임제록

[스크랩]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1. 12-1. 12-2. 12-3

수선님 2018. 1. 14. 13:19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1. 12-1. 12-2. 12-3

 

11 사조용(四照用)

示衆云(시중운), 我有時先照後用(아유시선조후용)하며 有時先用後照(유시선용후조)하고 有時照用同時(유시조용동시)하며 有時照用不同時(유시조용부동시)니라 先照後用(선조후용)은 有人在(유인재)요 先用後照(선용후조)는 有法在(유법재)요 照用同時(조용동시) ?耕夫之牛(구경부지우)하며 奪飢人之食(탈기인지식)이니 敲骨取髓(고골취수)하고 痛下鍼錐(통하침추)요 照用不同時(조용부동시)는 有問有答(유문유답)하며 立賓立主(입빈입주)하야 合水和泥(합수화니)하야 應機接物(응기접물)이니 若是過量人(약시과량인)인댄 向未擧已前(향미거이전)하야 ?起便行(요기편행)이라 猶較些子(유교사자)니라

 

임제스님이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어느 때는 먼저 지혜로 비춰보고, 뒤에 작용을 하며, 어느 때는 먼저 작용을 하고 나중에 비춰 본다.

어느 때는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며, 어느 때는 비춤과 작용이 동시가 아닐 때도 있다.

먼저 지혜로 비추고 뒤에 작용하는 것은 사람이 있는 데 해당된다.

먼저 작용을 하고 뒤에 비춰 보는 것은 법[대상]이 있는데 해당된다.

비춤과 작용이 동시인 경우에는 밭가는 농부의 소를 빼앗고, 굶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는 것처럼,

뼈를 두들겨 골수를 뽑아내고, 아픈데다가 다시 바늘과 송곳으로 침을 꽂는 것이다.

비춤과 작용이 동시가 아닐 때는, 물음이 있으면 답이 있고 손님[객관]도 세우고 주인[주관]도 세운다.

물에 합하고 진흙에 합하여 근기에 맞춰서 사람들을 제접한다.

만약 뛰어난 사람[過量人(과량인)]이라면 법을 거량하기 전에 떨치고 일어나 곧 가버린다.

그래야 조금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강의)

임제의 사조용이다. 이 내용은 없는 책도 있다.

서문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면 있어야 옳다.

사람들을 대하여 깨우치고 법을 쓰는 경우에 이러한 네 가지 방법이 있다.

최상의 지혜를 일깨워 주려면 먼저 사람을 잘 관찰하는 지혜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할을 하던지 방을 휘두르던지 하는 행동이 뒤따를 것이다.

그런 경우를 사람이 있는데 해당한다고 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탈인(奪人) 탈경(奪境)의 경우는 부정하는 것으로 드러내고, 여기서는 긍정하는 방법으로 드러낸다.

표현은 달라도 뜻은 같다.

사람이 있다. 법이 있다. 라는 것은 사람은 주체적 사람, 법은 경계며 대상이다.

사람만 두기도 하고 법만 두기도 한다는 뜻이다.

요는 비춤과 작용이 동시인 경우[照用同時(조용동시)]가 문제다.

밭을 가는 농부의 소를 빼앗아 버리면 어쩌자는 것인가?

굶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아 버리는 것은 또 어쩌자는 것인가?

뼈를 두들겨 골수를 뽑아내고, 아픈데다가 다시 바늘과 송곳으로 침을 꽂는 것은 또 어떤가?

위와 같은 상황들은 조용(照用)을 동시에 당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소낙비는 오는데 끌고 가던 소는 도망을 가고,

지고 있는 짐은 무거워 걸을 수 없는데 설사까지 났다. 라는 우리들의 옛 말과 유사하다.

사람을 정신없이 만든다. 혼비백산이다.

그러나 그 그림이야말로 볼만한 가치가 있다.

비춤과 작용이 동시가 아닐 때[照用不同時(조용불동시)]는 물음이 있으면 답이 있어서 매우 친절하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 물로 뛰어드는 노파심이다.

그래서 좀 뛰어난 근기들은 재미가 없어서 떨치고 가버린다.

이 단락에서는 이 말이 좋은 말이다.

合水和泥(합수화니) 應機接物(응기접물)

 

 

12-1 일이 없는 사람이 귀한 사람

師示衆云(사시중운), 道流(도류)야 切要求取眞正見解(절요구취진정견해)하야 向天下橫行(향천하횡행)하야 免被這一般精魅惑亂(면피자일반정매혹란)이니라 無事是貴人(무사시귀인)이니 但莫造作(단막조작)이요 祇是平常(지시평상)이라 ?擬向外(이의향외)하야 傍家求過(방가구과)하야 覓脚手錯了也(멱각수착료야)로다 祇擬求佛(지의구불)하니 佛是名句(불시명구)니라

 

임제스님이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참으로 중요한 것은 참되고 바른 견해[眞正見解(진정견해)]를 구해서

천하를 마음대로 다니면서 도깨비 귀신에게 홀리지 않는 것이다.

일이 없는 사람이 참으로 귀한 사람이다. 다만 억지로 조작하지 말라.

오직 평상의 생활 그대로 하라.

그대들이 밖을 향하고 옆집을 찾아 헤매면서 방법[脚手(각수)]을 찾아봐야 그르칠 뿐이다.

단지 부처를 구하려 하나 부처란 이름이며 글귀일 뿐이다.”

 

(강의)

불교공부를 하는 일이나, 집안의 살림을 사는 일이나, 회사를 경영하는 일이나,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나 모든 것에 가장 우선하는 것은 참되고 바른 견해다.

이 일에 대하여 진정견해를 가졌다면 천하를 횡행하여도 겁날 것이 없다.

부질없는 사람들의 되지 못한 말에 놀아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참선을 하고 간경을 하고 기도를 하고 6바라밀을 닦아야 성불할 수 있다는

도깨비의 혼이 붙어 귀신 씨 나락 까먹는 것과 같은 소리를 하는 것에 홀리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런 일이 없는 사람이 귀인이다.

귀인은 부처님이요, 조사다. 참사람이다.

다만 허위 조작하지 말고 평상심으로 살아라.

그렇게 하려면 자기 자신 외에 밖을 향해서 치닫지 말라.

밖을 향해 치달으며 찾은 부처는 모두가 명자(名字)에 불과하다.

이 단락에서 중요한 구절은 無事是貴人(무사시귀인). 但莫造作(단막조작) 祇是平常(지시평상)이다.

꼭 알아두라.

 

?還識馳求底?(이환식치구저마)아 三世十方佛祖出來(삼세시방불조출래)는 也祇爲求法(야지위구법)이요 如今參學道流(여금참학도류)도 也祇爲求法(야지위구법)이라 得法始了(득법시료)요 未得依前輪廻五道(미득의전윤회정도)니라 云何是法(운하시법)고 法者是心法(법자사삼법)이니 心法無形(심법무형)하야 通貫十方(통관시방)하야 目前現用(목전현용)이언마는 人信不及(인신불급)하고 便乃認名認句(편내인명인구)하야 向文字中求(향문자중구)하야 意度佛法(의탁불법)하니 天地縣殊(천지현수)로다

 

그대들은 바깥을 향해서 허둥대고 찾으려 하는 그 사람을 아는가?

시방 삼세의 부처님과 조사님들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오로지 법을 구하기 위함이다.

지금 여기에 참여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들도 또한 다만 법을 구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법을 얻어야 끝낼 수 있다.

법을 얻지 못하면 여전히 지옥· 아귀· 축생· 천도· 아수라[혹 인도]의 다섯 갈래의 길에 떨어져 윤회하게 된다.”

무엇이 법인가? 법이란 마음의 법이다.

마음의 법은 형상이 없어서 온 시방법계를 관통하고 있어서 눈앞에 그대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철저하게 믿지 못하고서

다만 명칭을 오인하고 글귀를 오인해서 문자 속에서 구하고 있다.

불법을 생각으로 헤아려 이해하려고 하니 하늘과 땅의 차이로 멀리 달라져 버렸다.

 

(강의)

그대들은 부처를 찾으려고 밖을 향해서 허둥대는 그대 자신을 아는가?

찾는 그 사람이 곧 찾을 사람이다.

우리들이 부처를 찾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찾는 그 사람이 곧 찾을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찾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될 것을 언제부터인가 이미 찾아 나서서 허둥대고 있다.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오로지 법을 구하기 위해서다.

모든 수행자들도 마찬가지다.

불법이란 마음의 법이다. 마음의 법은 형상이 없다.

온 시방에 꽉 차 있다. 그래서 바로 눈앞에서 환하게 쓰고 있다.

그런데 법을 구하기 위해서 수행하면서도 눈앞에 있는 그것을 구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 목전에서 쓰고 있는 그것이 법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 구하고 있는 그 일, 그 사람이 곧 법인데도 말이다.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가슴이 터질 노릇이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인가? 가까이 있기 때문에 찾지 못한다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인가?

중생들은 참으로 이유도 많다.

진짜를 버리고 문자 속에서 가짜를 찾고 다닌다.

그렇게 하면 저 하늘 멀리 아득해 지리라. 십만 팔 천리로 멀어지리라.

옛날 법을 구하기 위해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중국으로 인도로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 법을 구해 갔었다.

가서 돌아오지도 못하고 객사한 사람도 부지기수다.

법이란 마음의 법이고 마음의 법이란 그대 자신이다.

한 걸음도 옮길 필요가 없다.

스스로를 깨닫고 스스로를 증득하는 것, 그것이 불조가 법을 구하는 수행이다.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자신의 마음을 증득하는 것이 참다운 수행이다.

원효(元曉)스님과 의상(義湘)스님이 함께 법을 구해 중국으로 가다가

원효는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마음의 법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구법(求法)의 행각(行脚)을 끝냈다. 그렇게 쉽고 간단한 것이다.

몽둥이 하나로 십법(心法)을 보여준 사람도 있다.

한 소리 고함으로 심법을 보여준 사람도 있다.

손가락 하나로 심법을 보여준 사람도 있다.

새벽의 별을 보고 심법을 깨달은 사람이 있었다.

꽃을 들어 보인 것을 보고 심법임을 알고 미소 지은 사람도 있었다.

어느 봄 날 복사꽃이 핀 것을 보고 심법을 깨달은 사람이 있었다.

경전을 읽는 소리 한 마디에 심법을 깨달은 사람도 있었다.

변소 길에 눈에 미끄러져서 심법을 깨달은 사람도 있었다.

참으로 별의별 一機一境(일기일경)과 一言一句(일언일구)에서 심법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었다.

다시 한번 생각할 구절은

法者是心法(법자시심법). 心法無形(심법무형) 通貫十方(통관십방). 目前現用(목전현용) 人信不及(인신불급)이다.

 

 

12-2 모든 것이면서 모든 것이 아니다

道流(도류)야 山僧說法(산승설법)은 說什?(설십마밥)고 說心地法(설심지법)이니 便能入凡入聖(편능입범입성)하며 入淨入穢(입정입예)하며 入眞入俗(입진입속)하나 要且不是?眞俗凡聖(요차불시이진속범성)이라 能與一切眞俗凡聖(능여일체진속범성) 安著名字(안착명자)요 眞俗凡聖(진속범성)이 與此人安著名字不得(여차인안착명자부득)이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산승의 설법은 무슨 법을 설하는가.

심지법(心地法)을 설한다.

그래서 범부에게도 들어가고 성인에게도 들어가며, 깨끗한 곳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곳에도 들어가며,

진제(眞諦)에도 들어가고 속제(俗諦)에도 들어간다.

중요한 것은 그대들의 진((() ·()이 아니면서 모든 진· · · 성으로 더불어 이름을 붙여 준다.

그러나 진···성이 이 사람[참사람,]에게 그런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강의)

임제스님의 설법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종지가 무위진인(無位眞人)이며, 일심(一心)이다.

그 일심이란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될 수 있다. 그래서 곳곳에 다 들어간다.

그러나 그 일심은 일심대로 있다.

모든 것이 다 될 수 있고 모든 곳에 다 들어간다고 해서 결코 뒤섞여 분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참사람은 차별이 없이 가만히 있는데 온갖 이름들을 다 붙여 차별된 사람을 만든다.

설사 진· · · 성이 뚜렷하게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그런 진속범성의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그는 처음부터 그렇게 규정지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변화무쌍한 세상의 차별상을 보지 말고 차별 없는 진짜 사람을 보라.

금 불상이나 금 되지를 보지 말고 금을 보라는 말이다.

전단 나무로 중생의 모습과 불보살의 모습과 동물의 모습으로 천만 가지 형상을 조각하지만,

그 나무의 향기를 맡아보면 모두가 전단향의 향기가 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임제스님의 마음은 언제나 오늘 이 순간 보고 듣는 분명한 이 사람이다.

일체 진· · · 성의 차별은 없다.

이 단락의 중요한 구절은 심지법(心地法)이다.

보살계를 설하는 내용도 심지법문이 그 종지(宗旨)가 된다.

불교는 마음을 빼 버리면 아무 것도 없다.

삼라만상과 일체만유는 모두가 이 마음이 만든 것이다.

삼계가 오직 마음이다[三界唯心(삼계유심)].

 

 

12-3 쓰게 되면 곧 쓴다

道流(도류)야 把得便用(파득편용)이요 更不著名字(갱불착명자)니 號之爲玄旨(호지위현지)니라 山僧說法(산승설법)은 與天下人別(여천하인별)하니 祇如有箇文殊普賢(지여유개문수보현)이 出來目前(출래목전)하야 各現一身問法(각현일신문법)하되 ?道咨和尙(재도자화상)하면 我早辨了也(아조변료야)니라 老僧穩坐(노승온좌)에 更有道流(갱유도류)하야 來相見時(내상견시) 我盡辨了也(아진변료야)니 何以如此(하이여차)오 祇爲我見處別(지위아견처벌)하야 外不取凡聖(외불취범성)하며 內不住根本(내부주근본)하야 見徹更不疑謬(견철갱불의류)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잡으면 그대로 쓸 뿐 다시 무슨 이름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일컬어 깊은 뜻[玄旨(현지)]이라고 한다.

나의 법문은 천하의 누구와도 같지 않다.

가령,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바로 눈앞에서 각각 한 몸을 나타내어 법을 물으려고

스님께 묻습니다라고 하면 나는 벌써 알아버린다.

노승이 그저 편안히 앉아 있는데 어떤 수행자가 찾아와 나를 만날 때도 나는 다 알아차린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은 나의 견해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밖으로는 범부와 성인을 취하지 않고

안으로는 근본 자리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견해가 철저해서 다시는 의심하거나 잘못되지 않기 때문이다.”

 

(강의)

잡으면 그대로 쓸 뿐 다시 무슨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

보게 되면 보고 듣게 되면 들을 뿐이다.

그 듣고 보고 하는 것을 달리 이름 붙일 것이 아니다.

보는 것인가 하면 듣는 것이다. 듣는 것인가 하면 손으로 잡는 것이다.

잡는 것인가 하면 어느새 걷는 것이다.

이것을 부처· 조사· 보리· 열반· 진여· 불성· 자성· 법성 등등이라고

구태여 옳지도 않은 이름을 붙일 것이 아니다.

쓸 일이 있으면 그대로 쓸 뿐이다.

또 임제스님은 자신의 뛰어난 안목을 당당하게 말씀하신다.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오더라도 그들의 경지를 다 알아 보며,

어떤 수행자가 오더라도 역시 그들의 경지를 다 알아본다.

그 까닭은 견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차별상에 떨어져 있지 않고, 그렇다고 근본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지에도 자신을 메어 두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경지의 사람이 오더라도 다 적응하여 간파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임제스님의 견해는 없다.

없는 견해이기 때문에 모든 견해에 적응하여 다 상대하여 알아본다는 것이다.

把得便用(파득변용)이 중요한 말이다.


출처 : 제이제이
글쓴이 : 제이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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