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3-5. 13-6. 13-7. 13-8
13-5 본래 일이 없다.
道流(도류)야 大丈夫兒(대장부아)가 今日方知本來無事(금일방지본래무사)로다 祇爲?信不及(지위이신불급)일새 念念馳求(염념치구)하야 捨頭覓頭(사두멱두)하야 自不能歇(자불능헐)하나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대장부라면 본래 아무런 일이 없는 줄을 오늘에야 알 것이다.
다만 그대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생각생각 내달려 구하면서
자기 머리는 놔두고 다른 머리를 찾느라 스스로 쉬지를 못하는 것이다.”
(강의)
불교에서 대장부란 출가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영웅호걸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인생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진 사란을 뜻한다.
인생에 대한 올바른 견해란 편견이나 변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이다.
흑백논리에 집착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아주 없다거나 영원히 존재한다거나 하는 단견(短見)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이다.
유·무 단·상(斷常)의 삿된 견해에서 시원스레 벗어난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본래로 할 일이 없음을 안다.
닦을 것도 깨달을 것도 처음부터 없음을 안다.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열심히 자신을 두고 밖을 향해서 찾는다.
마치 자신의 머리를 두고 다른 머리를 찾는 격이다.
설사 3아승지겁 동안 6바라밀을 닦고 참선을 하고 고행을 하여 머리를 찾았다 하더라도
이미 머리가 있는데 그 머리를 어디에다 쓸 것인가.
쉬어라, 쉬어. 본래로 아무런 일이 없느니라.
이렇게 하여 아무런 일이 없는 사람이 대장부니라.
本來無事(본래무사). 捨頭覓頭(사두멱두) 自不能歇(자불능헐)은 이 단락에서 제일 중요한 말이다.
한번 더 되새겨야 한다.
如圓頓菩薩(여원돈보살)이 入法界現身(입법계현신)하야 向淨土中(향정토중)하야 厭凡?聖(염범흔성)이라
如此之流(여차지류)는 取捨未忘(취사미망)하고 染淨心在(염정심재)니 如禪宗見解(여선종견해)는 又且不然(우차불연)하야 直是現今(직시현금)이요 更無時節(갱무시절)이니라 山僧說處(산승설처)는 皆是一期藥病相治(개시일기약병상치)요 總無實法(총무실법)이니 若如是見得(약여시견득)하면 是眞出家(시진출가)라 日消萬兩黃金(일소만양황금)하나니라
“저 원교보살 돈교보살[圓頓菩薩]은 법계에 들어가 몸을 나타내어
정토에 있으며 범부를 싫어하고 성인을 좋아한다.
이런 무리는 취하고 버리는 마음을 잊지 못한다.
더럽다, 깨끗하다 하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종의 견해는 그렇지 않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지 달리 다른 시절이 없다.
산승이 말하는 것은 모두가 병에 따라 그때그때 약을 쓰는 일회적인 치료일 뿐이다.
실다운 법이라고 전혀 없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수만 있다면 참된 출가인이다.
하루에 만 냥의 황금을 쓸 수 있느니라.”
(강의)
교리에서 말하고 있는 원교(圓敎)나 돈교(頓敎)의 대승보살들은 진리의 세계에서 몸을 나타내고,
청정한 국토에 살면서 범부는 싫어하고 성인들만 좋아한다고 한다.
설사 그런 경계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은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을 버리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유·무·단·상(有無斷常)에서 벗어난 참되고 바른 견해가 아니다.
중도정견(中道正見)이 아니다. 중도정견이 못되면 부처고 보살이고 아무 것도 아니다.
모두 가설이다. 이왕 중도란 말이 나왔으니 좀 더 부연하겠다.
흔히 일체법이 공(空)이기 때문에 연기(緣起)다.
어떤 작은 물질도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두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 관계를 맺을 때에만 존재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다.
연기는 곧 여래(如來), 여래는 곧 공이다.
연기이면서 공이요 공이면서 연기인 모든 존재의 원리가 곧 중도라고 한다.
쌍차쌍조(雙遮雙照), 쌍민쌍존(雙泯雙存)이다.
즉 유무 선악의 상대적 견해를 함께 부정하고 상대적 견해를 함께 긍정하며,
상대적 양면을 함께 수용하고, 긍정과 부정을 함께 받아드리는 것이 곧 중도다.
모든 경전과 어록들이 이 중도의 공식으로 설해졌다.
중도를 설명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까지만 말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경전의 말씀과 어록의 글들을 이끌어 불조가 모두 중도를 말했다고 증거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어쩐지 좀 부족하고 구체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선사의 말씀은 매우 구체적이다.
불교인들의 일상 덕목인 육바라밀이나 불공하는 일이나, 불사를 짓는 일이나
예불을 드리는 일 등등을 열거하며 그 일의 중도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자비를 행하되 나와 상대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라.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하라.
보시는 베푸는 바 없이 베풀라. 가지는 바 없이 계행을 가지라.
우리들의 육신은 없는 줄을 알고 모양을 잘 갖추라.
법은 본래 설할 것이 없음을 알고 설법하라.
절이란 물에 비친 달빛과 같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절을 세우고 도량을 건립하라.
텅 빈 세계지만 잘 장엄하라.
환영이요 헛것인 공양구를 부처님께 정성 다해 올려라.
그림자요 메아리인 여래에게 공양을 올리라.
마음의 극락인 줄 알고 왕생을 발원하라.
꿈속의 불사인줄 알고 크게 일으켜라.
모두가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알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중도의 원리로 존재하므로 중도적 원리대로 살라는 것이다.
세속적 논리로 보면 모두가 모순된 말이지만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 철저히 중도적 길을 제시하고 있다.
산승의 설법은 모두가 병에 따라 약을 쓰는 것과 같다.
즉 방편이다. 실다운 법은 하나도 없다.
그렇게 알아야 진정한 출가자의 안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하루에 만 냥의 황금을 소비하더라도 상관없다. 빚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말을 쫒아가서 말 속에 대단한 법이라도 있는 것으로 알면 한 방울의 물도 녹이기 어렵다.
直是現今(직시현금) 更無時節(갱무시절)이 오늘의 공부다.
13-6 지옥 업을 짓는 것
道流(도류)야 莫取次被諸方老師印破面門(막취차피제방노사인파면문)하야 道我解禪解道(도아해선해도)하라 辯似懸河(변사현하)하나 皆是造地獄業(개시조지옥업)이니라 若是眞正學道人(약시진정학도인)은 不求世間過(불구세간과)하고 切急要求眞正見解(절급요구진정견해)니 若達眞正見解圓明(약달진정견해원명)하면 方始了畢(방시요필)이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은 쉽사리 제방의 노사들에게 인가를 받아 가지고
‘나는 선(禪)을 알고 도(道)를 안다.’고 지껄이지 말라.
설법이 폭포수처럼 말솜씨가 유창하다하더라도 이는 모두 다 지옥 갈 업을 짓는 것이다.
만약 참되고 바르게 도를 배우는 이라면 세상의 허물을 찾지 않는다.
참되고 바른 견해를 구하는 일이 간절하고 급박하다.
만약 참되고 바른 견해를 통달하여 뚜렷이 밝으면 비로소 일을 마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의)
공부한 것을 인가하는 문제다. 인가를 하는 것은 요즘도 있는 일이다.
인가하는 사람은 참으로 인가할 만해서 하는지,
받는 사람도 공부가 충분히 인가를 받을 만해서 받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차를 마시면서 자신도 인가를 받은 지 몇 년이나 되었는데
도대체 모르겠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야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데 무엇을 인가했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혹 인가를 받아서 선을 알고 도를 안다고 하여 설법하는 말솜씨가
폭포수 같다하더라도 모두가 지옥에나 갈 업을 짓는 것이다.
그러나 남이야 어떻든 남의 허물을 탓할 것은 아니다.
지금 간절하고 다급한 일이 있다. 참되고 바른 견해를 구하는 일이다.
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할”
지금 목전에서 역력하게 “할”을 하고
“할”을 듣는 그 사람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아는 일이다.
아래에 또 자세한 말씀이 있다.
眞正學道人(진정학도인) 不求世間過(불구세간과)란 참으로 좋은 말이다.
공부인은 꼭 명심해야 할 말이다.
13-7 실다운 법은 아무 것도 없다
問(문), 如何是眞正見解(여하시진정견해)오 師云(사운), ?但一切入凡入聖(이단일체입범입성)하며 入染入淨(입염입정)하며 入諸佛國土(입제불국토)하며 入彌勒樓閣(입미륵누각)하며 入毘盧遮那法界(입비로자나법계)하야 處處皆現國土(처처개현국토)하야 成住壞空(성주괴공)하나니라
“무엇이 참되고 올바른 견해입니까?”
“그대들은 언제 어디서나 범부에도 들어가고
성인에도 들어가며 더러움에도 들어가고 깨끗함에도 들어간다.
모든 부처님 나라에도 들어가고 미륵의 누각에도 들어가며 비로자나불의 법계에도 들어가서
곳곳마다 국토를 나타내며 성·주·괴·공(成住壞空)을 한다.”
(강의)
임제스님은 일심(一心)의 활발발한 작용이 어떤 것인가를 눈여겨보는 것이 참되고 바른 견해라고 한다.
그 일심[그대들]은 범부·성인·더럽고·깨끗함 등등 온갖 곳에 다 들어간다.
즉 유무 선악의 상대적 대립관계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경지인,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다 친견하고
최후에 들어갔다는 미륵누각이나 비로자나법계에 까지도 들어간다.
일심은 곧 그 모든 것들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들을 만든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만들어 놓고, 특히 선악 애증 청탁 등등
온갖 대립적 관계들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들어가서 그 환경과 그 세계를 나타내고
거기서 생성하고[成(성)] 거기서 머물다가[住(주)] 변화하고[壞(괴)] 또 사라져간다[空(공)].
우리들의 삶은 모두 우리가 만들어 놓은 환경과 그 상황에서 이리 딩굴고 저리 딩굴고 하면서 출몰을 계속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 모두가 일심의 세계, 즉 우리들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유무 선악의 상대적인 대립을 멀리 벗어나면서 한편으로는 그것들을 다 수용하는 중도적 삶을 암시하고 있다.
佛出于世(불출우세)하야 轉大法輪(전대법륜)하고 却入涅槃(각입열반)하되 不見有去來相貌(불견유거래상모)하야 求其生死(구기생사)하나 了不可得(요불가득)이니라 便入無生法界(편입무생법계)하야 處處游履國土(처처유리국토)하야 入華藏世界(입화장셰계)하야 盡見諸法空相(진견제법공상)하야 皆無實法(개무실법)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세간에 출현하시어 큰 법륜을 굴리시고 다시 열반에 드시지만 가고 오는 모양을 볼 수가 없다.
그 자리에서는 생사를 찾아도 마침내 찾을 길 없다.
곧 무생(無生) 법계에 들어가 곳곳에서 국토를 노닌다.
화장세계에도 들어가 모든 법이 다 텅 비어있어서 전혀 실다운 법이 없음을 다 본다.”
(강의)
세존이 이 세상에 오시어 태자로 살다가 향락의 삶을 버리고 출가하여 고행의 길을 걸었으며,
깨달음을 이루고는 진리의 가르침을 펴시다가 열반에 드시었다.
인류의 큰 스승으로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게 역사적인 사실이 확실하지만 그 오고간 모습 찾을 길 없다.
태어나고 죽은 일을 찾아보아도 역시 찾을 길 없다.
모든 존재가 동일한 생멸이 없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범주 안에 있으면서 온갖 삶을 다 펼친다.
철저히 공한 진공(眞空)이면서 미묘 불가사의하게도 존재하는 묘유(妙有)의 세계인 화장세계에서 노닌다.
참으로 변화무쌍한 멋 진 화장세계다.
아무리 보아도 모든 존재[諸法(제법)]는 텅 비어 공한 것[空相(공상)]이다.
실다운 것이라곤 어디에도 없다. 이 이치는 세존만이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일체 인간과 모든 생명 모든 삼라만상이 동일하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유무이변(有無二邊) 어느 것도 아니다.
이것이 모든 존재의 법칙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 모두는 삼라만상과 함께 중도(中道)로 존재한다.
영가스님은 “모든 것은 무상하여 일체가 공한 것, 그것이 곧 여래의 큰 깨달음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교리에서는 공(空)이 곧 연기(緣起)고 연기는 곧 공이며, 곧 여래(如來,진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일체는 곧 공이며, 연기이며, 여래[진리]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들고 있는 물 잔은 이미 깨어진 것으로 보아도 좋다.
올라가는 길이 곧 내려오는 길이듯이 삶은 그대로가 죽음이다.
죽음 그대로가 삶이다.
諸法空相(제법공상) 皆無實法(개무실법). 반야심경의 내용과도 같다.
반야심경은 우리말로 표현하면 “나는 없다.”다.
없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고 불보살의 삶이다.
唯有聽法無依道人(유유청법무의도인)이 是諸佛之母(시제불지모)라 所以佛從無依生(소이불종무의생)이요 若悟無依(약오무의)하면 佛亦無得(불역무득)이니 若如是見得(약여시견득)하면 是眞正見解(진정견해)니라
“오직 법을 듣는 사람,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도인이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다.
그러므로 부처는 의지함이 없는 데서 생겨난다.
만약 의지함이 없음을 깨닫는다면 부처라는 것도 얻을 것이 없다.
만약 이와 같이 보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참되고 올바른 견해인 것이다.”
(강의)
부처님이나 어머니나 도인이 모두 같은 의미다.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이 홀로 드러나 있는 사람. 법문을 들을 줄 아는 이 사람이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다.
하필 모든 부처님의 어미니 있겠는가. 모든 존재의 어머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것으로부터 생겼다.
만약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그것을 깨달으면 부처도 또한 찾을 길 없다.
만약 이와 같이 알면 그것이 참되고 올바른 견해[眞正見解(진정견해)]다.
무위진인(無位眞人), 무의도인(無依道人), 무위도인(無位道人). 이 모두가 같은 뜻이다.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聽法無依道人(청법무의도인) 是諸佛之母(시제불지모)라는 구절도 익혀 두어야 할 말이다.
13-8 찾을수록 멀어진다
學人不了(학인불료)하야 爲執名句(위집명구)하야 被他凡聖名?(피타범성명애)일새 所以障其道眼(소이장기도안)하야 不得分明(부둑분명)이니라 祇如十二分敎(지여십이분교)는 皆是表顯之說(개시표현지설)이라 學者不會(학자불회)하고 便向表顯名句上生解(편향표현명구상생해)하나니 皆是依倚(개시의의)라 落在因果(낙재인과)하야 未免三界生死(미면삼계생사)하나니라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명칭과 글귀에 집착하여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이름에 구애되므로 훌륭한 식견[道眼]이 막혀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저 십이분교(十二分敎)도 모두 이치를 보여주기 위한 설법인데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명칭이나 글귀에서 알음알이를 낸다.
이것은 모두 무엇에 의지하고 기댄 것이라서 인과(因果)에 떨어지며
삼계에서 생사에 윤회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강의)
경전을 공부하고 성인의 글을 읽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의 인품이 모자라고 지혜가 없기 때문에
옛 성인들이나 불조의 가르침으로써 부족한 것을 메우고 어리석음을 밝음으로 바꿔 보려한다.
그러한 뜻으로 출발하여 경전을 공부하다가 오히려 경전의 명자나 글귀들의 장애를 입어
도(道)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안무물(道眼無物)이라는 말이 있다.
도안으로 세상을 볼 때 그 사물에 미혹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에서 텅 빈 것으로 본다는 뜻이다.
경전을 보아도 이름과 글귀에 걸리지 않고 그 말의 낙처(落處)를 잘 안다는 뜻이다.
불교에는 팔만대장경이라는 수많은 가르침이 있다.
이것을 달리 삼승(三乘) 십이분교(十二分敎)라고 일컫는다. 모두 이치를 밝히기 위함이다.
그런데도 모두들 말에 의지하고 명칭에 매달려 갖가지 아름아리를 다 내어 집착하고 빠진다.
중생이다 부처다. 생이다 멸이다. 선이다 악이다. 있다 없다 등등의 상대적인 편견에 떨어진다.
편견에 떨어지는 것은 곧 인과에 떨어지는 것이다.
역시 인과를 잘 알고 인과에 미혹하지 않아야 하는데[不昧因果(부매인과)] 반대로 인과에 떨어지고 만다.
이렇게 되어서는 생사에 윤회함을 면할 수 없다.
그와 같은 차별적인 견해에 치우치는 일이 곧 윤회다.
그래서 집착을 떼어주기 위해서 임제스님은 경전이나 어록들을
‘똥을 닦은 휴지다.’라는 너무나 혹독한 말씀을 하기도 한다.
사람의 삶은 유무가 아니다. 생도 멸도 아니다.
부처도 중생도 아니다. 선도 악도 아니다.
그래서 육조 혜능스님도 첫 법문에서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당부할 때도 서른여섯 가지의 대대(待對)를 제시하면서
부디 상대적 편견을 벗어나서 법을 설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若欲得生死去住脫著自由(이약욕득생사거주탈착자유)인댄 卽今識取聽法底人(즉금식취청법저인)하라 無形無相(무형무상)하며 無根無本無住處(무금무본무주처)하야 活??地(활발발지)라 應是萬種施設(응시만종시설)하야 用處祗是無處?(용처지시무처)새 所以覓著轉遠((소이멱착전원)이요 求之轉乖(구지전괴)니 號之爲?密(호지위비밀)이니라
“그대들이 만약 나고 죽음과 가고 머무름을 벗어나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지금 법문을 듣는 그 사람을 알도록 하여라.
이 사람은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뿌리도 없고 바탕도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다.
활발발하게 살아 움직이고, 수만 가지 상황에 맞추어 펼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작용에도 정해진 곳이 없다.
그러므로 찾을수록 더욱 멀어지고 구할수록 더욱 어긋난다.
그것을 일러 비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강의)
모든 인간은 불교에서 지적하는 것을 들어보면 문제들이 너무 많다.
망상과 미혹과 생사의 윤회와 무명과 삼독을 위시한 팔만사천 번뇌와 가고 오는데 부자유한 것 등등이다.
불교공부나 수행이나 일반적 신행생활들은 모두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자고 하는 것이다.
참선과 간경과 기도와 염불과 주력 등등이 모두 역시 그러한 문제해결을 위한 방편이다.
그런데 임제스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문제해결의 열쇠는 간단하다.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을 아는 것이 답이다.
법문을 듣는 그 사람을 알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 사람은 모든 문제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문제도 그 삶에게서 일어났고 답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모양도 형상도 없다.
뿌리도 근본도 없다. 어디에 머무는 곳도 없다. 너무나 활발발하다.
그 사람은 세상의 온갖 삼라만상에 다 응하지만 응하여 쓰는 곳도 찾아보면 실은 없다.
그래서 그 사람은 찾을수록 더욱 멀어진다.
그 사람은 구할수록 더욱 어긋난다.
비밀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아는 사람만이 알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가르쳐 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임제스님은 처음에 스승 황벽스님에게 불교의 대의를 물으러 갔다가 흠신 얻어맞았다.
그 때는 몰랐으나 나중에사 그 때 얻어맞은 자신이 곧 불교의 대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무위진인이다. 절대현재라고도 한다.
큰 기틀 큰마음의 큰 작용, 즉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고도 한다.
전체작용(全體作用)이라고도 한다.
대기(大機)는 진리와 법의 인격화다. 모든 문제의 답은 이 하나다.
이 사람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공부의 요체며 수행의 요체인 이 식취청법저인(識取聽法底人)을 명심하라.
그런데 그 청법저인은 覓着轉遠(멱착전원) 求之轉乖(구지전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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