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1. 14-2. 14-3
14-1 문자에 속지 말라
師示衆云(사시증운), 如今學道人(여금학도인)은 且要自信(차요자신)이요 莫向外覓(막향외멱)하라 總上他閑塵境(총상타한진경)하야 都不辨邪正(도불변사정)하나니 祇如有祖有佛(지여유조쥬불)은 皆是敎迹中事(개시교적중사)니라 有人拈起一句子語(유인염기일구자어)하야 或隱顯中出(혹은현중출)이면 便卽疑生(텬즉의생)하야 照天照地(조천조지)하야 傍家尋問(방가심문)하야 也太忙然(야태망연)이로다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날 도를 배우는 사람들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믿는 것이다.
밖으로는 찾지 말라.
모두 다 저 부질없는 경계들을 받들어서 도무지 삿된 것과 바른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조사니 부처니 하는 것은 모두 다 교학의 자취 가운데 일이다.
어떤 사람이 한 마디 말을 거론하였을 때 혹 그 말의 뜻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隱顯中(은현중)]에서 나온 것이라면
곧 바로 의심을 내어 이리저리 온갖 생각을 다해 보며 천지를 뒤진다[照天照地(조천조지)].
또 옆 사람을 찾아가 물으며 몹시 바빠서 정신없이 서둔다.”
(강의)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 중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과 함께 사람을 아는 일이다.
이 사람이라는 미묘 불가사의한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으면 그것으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하물며 도를 배운다는 입장에서는 더 말 할 나위가 없다.
자신을 상세하게 알고 그 자신을 믿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공연히 자신 밖을 향해서 무엇인가 찾으려고 한다.
자신 밖엣 것은 그 어떤 것도 모두가 삿된 것이다.
조사와 부처도 모두 문자 상의 이름일 뿐이다. 교학적인 표현일 뿐이다.
그것을 쫒아서 얼마나 바쁘게 찾아 헤매는가. 온 천지를 다 뒤진다[照天照地(조천조지)].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파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궁리하고 또 궁리한다.
그 자신이란 무엇인가.
육조 혜능스님은 처음 오조스님에게서 금강경의 “응당 머무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지니라.”라는 말씀을 듣고
크게 깨달아 일체 만법이 제 자신의 성품을 떠나지 않은 것을 알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 자신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청정함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내 자신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모든 것이 구족한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내 자신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흔들림이 없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내 자신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능히 만법을 만들어 내는 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조계종(曹溪宗)이라고 하면 언필칭 조계산에서 터전을 닦은 육조 혜능스님을
종조(宗祖)로 삼고 육조스님의 사상을 의지한다.
그래서 육조단경을 교과서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조계종이라는 이름이 그를 증명하며
따라서 육조스님은 조계법맥(曹溪法脈)의 높은 산으로 섬김을 받기 때문이다.
그 가르침을 보면 표현은 약간 달라도 그 뜻은 임제스님과 한결같다.
보고 듣고 하는 우리들 자신 속에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且要自信(차요자신) 莫向外覓(막향외멱)을 잊지 말라.
大丈夫兒(대장부아)여 莫祇?論主論賊(막지마론주론적)하며 論是論非(논시론비)하며 論色論財(논색론재)하야 論說閑話過日(논설한화과일)하라 山僧此間(산승차간)에는 不論僧俗(불론승속)이요 但有來者(단유래자)하면 盡識得伊(진식득이)니 任伊向甚處出來(임이향삼처출래)나 但有聲名文句(단유성명문구)하야 皆是夢幻(개시몽환)이니라
“대장부라면 이렇게 주인이니 도적이니, 옳거니 그르거니,
색(色(색))이니 재물(財(재))이니 하며 쓸데없는 이야기로 세월을 보내지 말라.
산승의 이곳에는 승속을 논하지 않고 다만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다 알아내 버리고 만다.
그들이 어디서 오든 간에 그들은 다만 소리나 명칭이나 문자나 글귀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모두가 꿈이나 허깨비이다.”
(강의)
불교에서 대장부란 남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영웅호걸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의리의 사나이를 대장부라 하지도 않는다. 대장부란 양변(兩邊)에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다.
유무, 선악, 시비, 주객, 증애 등등의 양변을 벗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주인이니 도적이니 하는 것을 논하지 않는다.
도적에도 큰 도적 작은 도적 날도적이 있다.
언어나 문자의 시시비비도 논하지 않는다. 세상사의 시시비비도 논하지 않는다.
그런데 소비할 시간이 없다. 양변을 벗어나 있으면서 또 양변을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예컨대 중생이 본래로 부처인줄 알고 제도하기를 맹세하라.
번뇌가 본래 보리인줄 알고 끊기를 맹세하라.
법문이란 본래 배울 것이 없는 줄 알고 배우기를 맹세하라.
불도란 본래 이룰 것이 없는 줄 알고 이루기를 맹세하라.
여래란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은 줄 알고 정성들여 공양을 올리라.
공양구란 환영(幻影)이요 헛것인줄 알고 가득 가득 고여 올려라.
죄악의 성품이 본래로 텅 비어 없는 줄 알고 백만 배 천만 배 절을 하며 참회하라.
부처님이란 언제나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줄 알고 이 땅에 오래 오래 계시기를 청하라.
육바라밀도 허공 꽃과 같이 본래로 없는 것인 줄 알고 열심히 실천하라.
모든 존재가 텅 비어 없는 줄 알고 씩씩하게 열심히 살라.
이렇게 사는 사람이 대장부다. 불교인이다.
중도(中道)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본래의 모습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벗어나라고 하는 것이다.
존재의 법칙인 중도에 맞게 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치우친 소견으로 부질없이 세월을 보내지 말라는 것이다.
임제스님은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승속을 막론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들의 속을 훤하게 들려다 본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았더라도 그들의 살림살이는 소리와 이름과 문자에 불과하다.
그런 것은 참으로 하찮은 것들이다.
소리와 이름과 문자들을 어디에 쓸 것인가.
모두가 꿈과 같이 허망하고 허깨비와 같은 가짜들이다.
그런 가짜들을 한 걸망씩 지고 재산인양한다.
애석하고 안타깝고 불쌍할 뿐이다. 부디 문자에 속지 말라.
聲名文句(성명문구)가 皆是夢幻(개시몽환)이니라.
14-2 사람에 따라 모습을 나타낸다
却見乘境底人(각견승경저인)하니 是諸佛之玄旨(시제불지현지)라 佛境不能自稱我是佛境(불경불능자칭아시불경)이요 還是這箇無依道人(환시자재무의도인)이 乘境出來(승경출래)니라 若有人出來(약유인출래)하야 問我求佛(문아구불)하면 我卽應淸淨境出(아즉응청정경출)하고 有人問我菩薩(유인문아보살)하면 我卽應慈悲境出(아즉응자비경출)하며 有人問我菩提(유인문아보리)하면 我卽應淨妙境出(아즉응정모경출)하고 有人問我涅槃(유인문아열반)하면 我卽應寂靜境出(아즉응적정경출)하야 境卽萬般差別(경즉만반차별)이나 人卽不別(인즉불별)이라 所以應物現形(소이응물현형)은 如水中月(여수중월)이니라
“다시 경계를 부리는[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니 여기에는 모든 부처님의 깊은 뜻이 드러나 있다.
부처님의 경지는 ‘나는 부처의 경지다.’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무의도인(無依道人)이 경계를 활용하면서 나타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나에게 부처가 되는 길을 묻는다면 나는 즉시 청정한 경지에 맞추어서 대해준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보살을 묻는다면 나는 곧 자비의 경지에 맞추어서 대해준다.
또 어떤 사람이 보리를 묻는다면 나는 곧 깨끗하고 오묘한 경지에 맞추어서 대해준다.
또 어떤 사람이 열반을 묻는다면 나는 곧 고요한 경지에 맞추어서 대해 준다.
경계는 수만 가지로 차별하지만 사람은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에 응하여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마치 물속에 비친 달과 같다.”
(강의)
불교에서는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모두 경계라고 한다.
보통 사람들의 삶은 하루 종일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이끌려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 저기 온갖 것에 종속되어 사는 것이 습관화 되어 어디에든 메이지 않으면 사는 것 같지 않다.
공허하고 허전함을 느껴서 몸 둘 바를 모른다.
어디엔가 메여야만 사람으로서 사는 것 같음을 느낀다.
사람이나 텔레비전이나 전화나 무슨 일거리나 독서나 무엇에든지 메이고 싶어 한다.
그래서 경계들로부터 부림을 당한다.
그런데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도리어 경계를 부리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깨달은 사람들의 깊고 오묘한 삶이 그곳에 있다.
조주스님이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시간을 마음대로 부리면서 살았듯이.
부처님의 경계라 하더라도 스스로 부처님의 경계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끄달리지 않은 사람[無依道人(무의도인)]일 뿐이다.
오히려 경계를 능동적으로 부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나에게 부처가 되는 길을 묻는다면
나는 즉시 청정한 경지에 맞추어서 대해준다.”고 한다.
그것은 곧 부처의 경계를 보여준다는 뜻이다.
“또 어떤 사람이 나에게 보살을 묻는다면 나는 곧 자비의 경지에 맞추어서 대해준다.”고 한다.
그것은 곧 보살의 자비를 바로 보여준다는 뜻이다.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능히 경계를 부리는 사람의 표본이다.
경계는 수만 가지지만 사람은 하나다.
마치 하늘의 달은 하나지만 물이 있는 곳에는 모두 그 물의 상태에 따라 달이 비치듯이
오는 사람의 정도에 맞춰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임제스님은 應物現形(응물현형) 如水中月(여수중월)하는 것이 오늘의 공부다.
14-3 대장부라야 된다
道流(도류)야 ?若欲得如法(이약욕득여법)하면 直須是大丈夫兒(직수시대장부아)라사 始得(시득)다 若萎萎隨隨地(약위위수수지)하면 則不得也(즉부득야)니라 夫如(부여)시[斯瓦(사와)]?之器(사지기)는 不堪貯醍?(불감저제호)니 如大器者(여대기자)는 直要不受人惑(직요수불인혹)이라 隨處作主(수처작주)하야 立處皆眞(입처개진)이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이 만약 여법(如法)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대장부라야 비로소 할 수 있다.
만약 시들시들하고 나약하게 흐느적거려서는 안 된다.
깨어진 그릇에는 제호(醍?)같은 좋은 음식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큰 그릇이라면 다른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고 어딜 가나 주인이 되어
그가 선 자리 그대로가 모두 참다운 삶이 된다.”
(강의)
이 단락을 부연하면 이렇다.
불교의 문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진정한 불교인은 드물다. 불교공부를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다.
또 공부를 한다고 해서 아무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여법한 불교인이 되려면 먼저 세속적 명리(名利)를 초개같이 보아야 한다.
세상사 인생사가 모두 무상한 줄 알고 허망하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나아가서 있다 없다, 선이다 악이다. 라고 하는 편견에 떨어져서도 안된다.
그것은 모두 세속적 안목이다.
세속적 가치관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불교인이 아니다.
또 하나 결단력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나약하거나 비실비실해서는 불교를 제대로 체득할 수 없다.
조사스님들은 무쇠로 지어 만든 사람, 또는 쇠말뚝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의 이런 저런 주장에 미혹되어서도 안된다.
명예와 이익과 칭찬에 좌우되어서도 안된다.
정직해야 한다. 의롭고 떳떳하게 행동해야 한다.
어디를 가나 당당한 주인이 되어 그가 선 자리가 그대로 참되고 진실한 삶이어야 한다.
더럽고 깨어진 그릇에는 좋은 음식을 담을 수가 없다.
빼어난 훌륭한 그릇이어야 한다. 그를 대장부라 한다.
불교의 문에 드나들면서 입으로 불교를 운위한다고 불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머리를 깎고 중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불교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세상에서 칭송받는 의인(義人)이나 영웅호걸보다도 더욱 빼어난 사람이 불교인이다.
여기서 다시한번 해야 할 공부는, 남에게 속지 말라. 불수인혹(不受人惑).
그리고 어디서든지 주인으로 살라. 수처작주(隨處作主).
그리하면 그대 선 곳이 모두가 참된 삶이리라. 입처개진(立處皆眞).이다.
但有來者(단유래자)어든 皆不得受(개부득수)니 ?一念疑(이일념의)하면 卽魔入心(즉마입심)이라 如菩薩疑時(여보살의시)에 生死魔得便(생사마득편)이니라 但能息念(단능식념)이요 更莫外求(갱막외구)하고 物來卽照(물래즉조)하라
“다만 찾아오는 사람이 있더라도 모두 받아들이지 말라.
그대들이 한 생각 의심하면 곧 마(魔)가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만약 보살이라도 의심을 내면 생사의 마군이가 그 틈을 얻게 된다.
다만 생각을 쉬기만 하면 된다. 다시 바깥으로 구하지 말라.
사람이 다가오면 오는 대로 곧 비춰보라.”
(강의)
날아오는 공을 다 받을 필요는 없다. 걸려오는 전화를 다 받을 필요는 없다.
부탁하는 일이라고 다 할 것은 없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다 받아드릴 일은 아니다.
수많은 번뇌 중에서 의심하는 번뇌도 큰 번뇌에 속한다.
만약 그대들이 한 생각 의혹이 생기면 그 순간 마군이가 마음속에 자리하게 된다.
경전에도 보살이 의혹이 생기면 본래 생사가 없는 데서
곧 생사의 마군이가 그 틈을 엿보아 침입하게 된다고 했다.
자주 말씀하시는 불수인혹(不受人惑)이다.
다른 사람들의 의혹[속임]을 받아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다만 한 생각 쉬어버려라. 한 생각 쉬어버리고 다시는 밖을 향해서 찾지 말라.
사람이 오거나, 사물을 대하거나, 일이 벌어지거나, 그냥 가만히 비취보라는 것이다.
?但信現今用底(이단신현금용저)하면 一箇事也無(일개사야무)니라 ?一念心生三界(이일념심생삼계)하야 隨緣被境(수연피경)하야 分爲六塵(분의육진)하니 ?如今應用處(이여금응용처)가 欠少什?(흠소십마)오 一刹那間(일찰나간)에 便入淨入穢(편입정입에)하며 入彌勒樓閣(입미륵누각)하며 入三眼國土(입삼안국토)하야 處處游履(처처유리)하나 唯見空名(유견공명)이니라
“그대들이 지금 바로 작용하는 이것을 믿기만 하면 아무런 일이 없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삼계를 만들어내고 인연을 따라 경계에 끄달려서 육진경계로 나누어진다.
그대들이 지금 응하여 쓰는 그곳에서 무슨 모자람이 있겠는가?
한 찰나 사이에 깨끗한 국토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국토에도 들어가며, 미륵의 누각에도 들어가고 삼안국토(三眼國土)에도 들어가서 곳곳을 다니지만 오직 텅 빈 이름뿐이다.”
(강의)
아마도 임제스님이 가장 많이 말씀하시는 것이라 여겨진다.
지금 곧 사용하고 있는 것, 법문을 듣고 있는 그 사람, 그 사람을 믿고 알면 아무런 일이 없다.
일생의 일을 끝낸 사람이다.
그 사람이 모든 것의 근본이며 모든 것이 그 사람에게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믿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공연히 그대들 한 생각이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는 그들의 경계에 이끌리면서 또다시 여섯 가지의 경계를 만들어낸다.
다시한번 생각해 보자.
그대들이 지금 모든 상황에 맞추어 활용하고 있는 그 사실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비가 오면 비가 오는 줄을 알고, 날씨가 개이면 개인 줄을 알고, 추우면 추운 줄을 알고,
더우면 더운 줄을 알고, 피곤하면 쉴 줄을 알고, 배고프면 밥을 찾아 먹을 줄을 알지 않는가?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팔만사천 신통묘용이며 무량대복이 아닌가?
이 사람은 한 찰나사이에 청정한 곳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곳에도 들어가고 인간이 이르러 갈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미륵누각에도 들어가고 삼안국토(三眼國土)에도 들어간다.
이렇게 곳곳을 흘러 다니지만 그것들은 헛된 이름뿐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그 한 사람, 지금 목전에서 활발발하게 작용하는 그 한사람뿐이다.
다시 복습할 말이 있다.
?如今應用處(이여금응용처) (欠少什?(흠소십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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