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
14-7 평상심이 도다
道流(도류)야 諸方說有道可修(제방설유도가수)하며 有法可證(유법가증)하나니 ?說證何法修何道(이설증하법수하도)오
?今用處欠少什?物(이금용처흠소십마물)이며 修補何處(수보하처)오 後生小阿師不會(후생소아사불회)하야 便卽信這般野狐精魅(편즉신자반야호정매)하야 許他說事(허타설사)하야 繫縛他人言道(계박타인언도)호대 理行相應(이행상응)하고 護惜三業(호석삼업)하야사 始得成佛(시득성불)이라하니 如此說者(여차설자)는 如春細雨(여춘세우)로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제방의 선지식들이 말하기를 도를 닦을 것이 있고 법을 깨칠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대들은 무슨 법을 깨치며 무슨 도를 닦는다고 말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쓰고 있는 것에서 무슨 모자람이 있으며, 어떤 점을 닦고 보완한다는 것인가?
못난 후학들이 잘 모르고 이들 여우와 도깨비들을 믿어서 그들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까지 얽어매어 말하기를
‘이치와 행이 서로 부합하고 삼업(三業)을 잘 보호하고 지켜야만 비로소 성불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자들은 봄날의 가랑비처럼 많다.”
(강의)
천번만번 말하지만 제방의 선지식들은 모두들 닦을 것이 있고 증득할 것이 있다고 한다.
요즘 불교를 말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세상이 이처럼 발달하고 불교도 이제 알 수 있을 만치 알건만 그래도 한결 같이
닦을 것이 있고 증득할 것이 있다고들 한다.
그래서 곳곳에서 닦는다고들 야단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닦아서 얻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
본래로 완전한 것을 다시 닦은들 무엇이 달라질 것이 있겠는가.
부처가 무슨 조각 작품도 아니고 한 점 한 점 그려가는 그림도 아니다.
과거의 수많은 부처님과 조사들을 살펴보라 무엇이 달라진 것이 있는가.
본래 그 사람이다. 처음부터 완전무결한 존재다.
그것은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 사람들이 본래로 갖춘 것이고 개개인이 완전무결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쓰고 있는, 잘 보고 잘 듣고 잘 느끼고 잘 아는 이것 외에 또 무엇이 있는가.
모자라는 것이 무엇인가.
신통묘용이고 무량대복인 것을. 방거사도 말하지 않았던가.
신통묘용이 물을 길어오고 땔 나무를 해오는 일이라고.
이치와 행이 잘 부합하고 삼업을 잘 보호하여야 성불할 수 있다는 주장들이 저 봄날의 가랑비처럼 많다.
이치와 행이 잘 부합하고 삼업을 잘 보호하여 불에 타지 않던가.
물에 빠지지 않던가. 그것을 부처라고 하는가.
천번만번 외쳐도 더 외쳐야할 말이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끊임없이 외치고 있다.
?今用處(이금용처) 欠少什?(흠소십마) 너무 좋은 말이다.
길어서 어려우면 ‘흠소십마’만 외우라.
古人云(고인운), 路逢達道人(노봉달도인)이어든 第一莫向道(제일막향도)하라하니라 所以言(소이언), 若人修道道不行(약인수고도불행)이니 萬般邪境競頭生(만반사경경두생)이라 智劍出來無一物(지검출래무일물)하야 明頭未顯暗頭明(명두미현암두명)이로다 所以(소이)로 古人云(고인운), 平常心是道(평상심시도)라하니라
“옛 사람이 이르기를, ‘길에서 도를 아는 사람을 만나거든, 무엇보다 도에 대해서 말해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만약 누구라도 도를 닦으면 도는 행하여지지 않고 도리어 수만 가지의 삿된 경계들이 다투어 생겨난다.
지혜의 칼을 뽑아들면 아무 것도 없다.
밝은 것이 나타나기 전에 어두운 것이 밝아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또 옛사람이 말하기를,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道)다’라고 한 것이다.”
(강의)
이 단락에는 아주 중요한 옛 사람의 말을 셋을 인용하고 있다.
먼저 도를 아는 사란을 만나거든 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도란 본래 언급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제스님은 상당 첫 법문에서 “산승이 오늘 어쩔 수 없이 인정에 따라서 겨우 이 자리에 올랐으나
만일 조사들이 면면히 이어온 전통에 입각하여 큰일을 드날려 본다면 곧 바로 입을 열수가 없다.
또 그대들이 발붙일 곳도 없다.”라고 하였다.
입을 열기 전에 이미 틀려버린다.
그러니 부디 세상이 돌아가는 얘기나 할지언정 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또 이런 말도 인용하였다.
도를 닦는다면 도는 행해지지 않고 온갖 삿된 경계가 다투어 일어난다.
천 번 만 번 강조 하지만 도는 닦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혜로 비춰보면 부처도 없고 조사도 없고 중생도 범부도 아무 것도 없다.
번뇌무명이 곧 불성이고 허망한 이 육신이 곧 여래 법신이기 때문이다.
달리 어두운 것을 보내고 나서 밝은 것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둘이 아니다. 하나다.
한번 시험해보라. 어두운 방에 문을 꼭꼭 닫고 전기 스위치를 올려서 불을 밝혀보라.
어두운 것이 그대로 밝은 것이다.
어두운 것이 어디로 빠져나가지도 않는다. 나갈 틈도 시간도 없다.
그런데 곧 바로 밝아진다. 전혀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다.
어두운 그대로가 밝은 것이다.
그래서 또 인용하시기를 굳이 도를 말한다면, 평상의 마음이 그대로 도다.
천고의 명언이다.
달리 무엇을 논할 것인가. 무엇을 닦고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여기에서 치구심(馳求心)을 쉬어야 한다.
부처는 불상을 조각하듯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평상의 그 마음 그대로 도다.
즉심시불(卽心是佛). 현재 이 마음 이대로 부처다.
불교는 알고 보면 매우 간단하고 쉽다.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다.
平常心是道(평상심시도). 만고의 명언이다.
이 한마디만 알면 불교공부 끝이다. 서툰 글씨라도 하나 써서 걸어두자.
14-8 그 마음 그대로 살아있는 할아버지다
大德(대덕)아 覓什?物(멱십마물)고 現今目前聽法無依道人(현금목전청법무의도인)이 歷歷地分明(역역지분명)하야 未曾欠少(미증험소)하니 ?若欲得與祖佛不別(이약욕득여조불불별)인댄 但如是見(단여시견)이요 不用疑誤(불용의오)니라 ?心心不異(이심심불이)를 名之活祖(명지활조)니 心若有異(심약유의)하면 則性相別(즉성상별)이요 心不異故(심불이고)로 卽性與相不別(즉성여상불별라)이니라
“대덕아! 무엇을 찾느냐?
지금 바로 눈앞에 법문을 듣는 그 사람,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은 무의도인(無依道人)은 너무도 분명하고 결코 부족한 것이 없다.
그대들이 만약 할아버지 부처님[祖佛(조불)]과 다르지 않기를 바란다면 다만 이와 같이 보면 된다.
의심하여 그릇치지 말라.
그대들의 순간순간의 마음이 다르지 않음을 이름하여 살아있는 할아버지[活祖(활조)]라 한다.
마음이 만약 다르면 성품과 형상이 다르게 되지만 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성품과 형상이 다르지 않다”
(강의)
완벽한 자신을 두고 더 이상 무엇을 찾아 헤매는가.
지금 눈앞에서 법문하는 것을 듣는, 아무것에도 의지함이 없는 그 사람은 너무도 분명하다.
이렇게 말을 하고 글을 쓴다. 참으로 명명백백하다.
이것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것은 없다. 조금도 모자라는 것이 없다.
여러분들이 만약 부처나 조사가 되고 싶다면 이 사람을 부처나 조사로 알아라.
언제나 한결 같은 그 마음이 곧 살아있는 할아버지, 즉 조사다.
달라지지 아니하고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이란 마음의 공적한 자리다.
하루 종일 써도 쓴 흔적이 없는 그 자리다.
화도 내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고,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지만,
그 나온 자리는 언제나 텅 비어있다.
희노애락(喜怒哀樂)과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모두 그 자리다.
성공도 실패도, 영광도 오욕도 모두 그 자리다.
마치 물이 흐르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얼기도 하고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고 맑기도 하지만, 젖는 습성(濕性)은 변함이 없는 것과 같다.
알고 보면 본래 다르지 않다.
신심명(信心銘)에도 “마음이 만약 달라지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같다.”고 하였지만
알고 보면 본래로 다르지 않다.
성품과 형상을 달리보지만 실은 같은 것이다. 체가 곧 용이고 용이 곧 체다.
몸이 몸짓을 하기 때문에 몸과 몸짓은 둘이 아니다. 몸은 체고 몸짓은 작용이다.
편의상 몸과 몸짓을 나누어 말하고, 물과 물결을 나누어 말하고,
체와 용을 나누어 말하고, 성과 상을 나누어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공부는 心心不異(심심불이) 名之活祖(명지활조)다.
14-9 구하는 것이 있으면 괴롭다
問(문), 如何是心心不異處(여하시심심불이처)오 師云(사운), ?擬問早異了也(이의문조이요아)니 性相各分(성상각분)이로다 道流(도류)야 莫錯(막착)하라 世出世諸法(세출세제법)이 皆無自性(개무자성)하며 亦無生性(역무생성)하고 但有空名(단유공명)하야 名字亦空(명자역공)이어늘 ?祇?認他閑名爲實(이지마인타한명위실)하니 大錯了也(대책요야)로다 設有皆是依變之境(설유개시의변지경)이라 有箇菩提依(유개보리의)와 涅槃依(열반의)와 解脫依(해탈의)와 三身依(삼신의)와 境智依(경지의)와 菩薩依(보살의)와 佛依(불의)니라
“무엇이 순간순간의 마음이 다르지 않는 경계입니까?”
“그대들이 물으려 하는 순간 벌써 달라져 버린 것이니 성품과 형상이 각각으로 나누어졌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착각하지 말아라.
세간이나 출세간의 모든 법은 다 자성이 없으며, 또한 생멸의 성품도 없다.
그저 허망한 이름뿐이며 그 이름을 쓴 글자도 또한 텅 빈 것이다.
그대들은 이처럼 그 부질없는 이름을 진실한 것으로 알고 있으니 매우 잘못 된 것이다.
설사 그러한 것들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의지해서 변화한 경계들이다.
이른바 보리의 의지와 열반의 의지와 해탈의 의지와
세 가지 불신의 의지와 경계와 지혜의 의지와 보살의 의지와 부처의 의지 등이다.”
(강의)
앞의 단락에서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아니한 것을 살아있는 할아버지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은 것인가?
이렇게 묻고자 할 때 이미 달라져 버렸다. 성품과 형상도 이미 나누어졌다.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소식이다.
한 생각 일어나면 벌써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일어나고 삼라만상이 벌어진 것이다.
잘 살펴야 한다. 착각하기 쉬운 대목이다.
세간이나 출세간의 법이 다 허망하다. 실로 제행이 무상하다.
모든 것이 생기고는 없어지고 없어지고는 다시 생기는 인연에 의한 연기의 작용이다.
연기는 공이다. 공이기 때문에 또한 연기한다.
모든 존재는 이 원리대로 존재한다.
우주만유가 이 원칙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헛된 이름뿐이다. 이름이라는 글자조차 텅 비어 없다.
부질없는 이름을 진실한 것으로 아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
부처나 중생이나, 성인이나 범부나, 생로병사나 상락아정(常樂我淨)이나,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모두 공이요 연기다.
독립된 자성으로서의 실체가 없다.
그래서 이 존재의 원리인 “오온이 모두 공한 줄 알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이다.” 라고 밤낮 외우고 있다.
고통으로 인하여 숨이 끊어지고 끊어졌다가는 다시 이어지고,
이어졌다가는 다시 끊어지고 하는 이와 같은 아픔도 모두가 공이다.
공이기 때문에 행복도 불행도 아니다.
설사 경전에서 말한 이런 저런 것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들은
다 이 한 생각에 의지하여 변화된 가상의 경계들이다.
보리니 열반이니 해탈이니, 법신 보신 화신이니, 경계니 지혜니,
보살이니 부처니 하는 이름들이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답고 성스럽고 위대한가.
그 훌륭하고 성스럽고 위대한 이름들은 모두 이 한 생각에 의지하여 변화한 헛된 가상의 경계요 이름뿐이다.
보리· 열반· 해탈· 법신· 보신· 화신· 경계· 지혜· 보살· 부처 등등의 주옥같은 이름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이름들, 이런 것들을 가상이요, 허상이요, 이름뿐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소중하다.
그동안 믿고 의지하고 살아왔는데 실은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아픔이다.
믿고 싶지가 않다. 그동안 공을 드린 것이 너무도 아깝다[前功可惜(전공가석)].
그렇다고 삼을 짊어지고 금을 버릴 수[擔麻棄金(담마기김)]도 없는 노릇이다.
이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 가르침이 진짜 불교며 우리 한국불교의 전통인 것을. 이 가르침이 정통 불교인 것을.
역대 조사들이 이런 가르침에 매혹되어 임제스님을 꿈에도 못 잊는다.
모두가 임제스님의 법을 계승했노라고 자랑들이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나라의 큰스님들은 임제스님의 흉내를 내느라고 남의 상가 집에 가서도 “할”을 하지 않는가.
죽어서도 다시 임제스님의 문중에서 그 가풍을 따르리라고 축원하지 않는가.
?向依變國土中(이향의변국토중)하야 覓什?物(멱십마물)고 乃至三乘十二分敎(내지삼승십이분교)는 皆是拭不淨故紙(개시식부정고지)며 佛是幻化身(불시환화신)이요 祖是老比丘(조시노비구)니 ?還是娘生已否(이환시낭생이부)아 ?若求佛(이약구불)하면 卽被佛魔攝(즉피불마섭)이요 ?若求祖(이약구조)하면 卽被祖魔縛(즉피조마박)이니 ?若有求皆苦(이약유규개고)라 不如無事(불여무사)로다
“그대들은 의지하여 변한 국토에서 무엇을 찾고 있느냐?
삼승 십이분교마저도 모두가 똥을 닦아낸 휴지다.
부처란 허깨비로 나타난 몸이며, 조사란 늙은 비구인데 그대들은 어머니가 낳아 주신 진짜의 몸이 있지 않는가.
그대들이 만약 부처를 구하면 부처라는 마군(魔群)에게 붙잡히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라는 마군에게 묶이게 된다.
그대들은 만약 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가 고통이니 아무런 일 없느니만 못하니라.”
(강의)
임제스님의 말씀은 점입가경을 넘어서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곳까지 왔다.
막보자는 막말이다. 정말 마지막 말이다. 어찌 이렇게 까지 표현 할 수 있는가.
그대들은 진짜가 아닌 가짜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무엇을 찾으려는가.
보리· 열반· 해탈· 법신· 보신· 화신· 경계· 지혜· 보살· 부처 등등은 말할 것도 없고
부처님의 살림살이라고 할 수 있는 일생의 가르침인 삼승 십이분교는 모두 똥을 닦는 휴지다.
임제록도 예외는 아니다.
부처님은 허깨비고 조사란 늙은 비구다.
그런데 그대들에게는 어머니가 낳아준 진짜가 있지 않은가.
그것을 두고 다시 무엇을 찾는가. 여기서 할 말은 다 했다.
이 몸 당체가 곧 살아있는 부처요 조사다. 아무리 찾아봐야 그 이상은 없다.
여러분들이 허망하다고 말하는 이 육신, 즉 환화공신(幻化空身)이 곧 여래법신이다.
만약 그대들이 그것을 두고 부처를 찾으면 부처라는 마군에게 붙잡히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라는 마군에게 묶이게 된다.
구하는 것이 있으면 다 괴롭다. 아무런 일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有求皆苦(유구개고) 不如無事(불여무사)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근기 소인들은 임제록에서 이 한 마디만 건져도 훌륭하다. 평생의 양식은 된다.
공연히 창업한다고 퇴직금 날리고 전세금까지 날리지 말라.
집에서 청소하면서 마음 청소도 하고 빨래하면서 마음 빨래만 해도 크게 버는 일이다.
즐거움이란 구하지 않는 즐거움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다.
본래 더 구할 것이 없다 다 갖추어져 있다. 억만 장자다.
세세생생 써도 다 못쓴다. 더 이상 무엇을 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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