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10. 14-11. 14-12
14-10 형상 없는 것이 참 형상이다
有一般禿比丘(유일반독비구)하야 向學人道(향학인도)호대 佛是究竟(불시구경)이니 於三大阿僧祇劫(어삼대아승지겁)에 修行果滿(수행과만)하야 方始成道(방시성도)라하니 道流(도류)야 ?若道佛是究竟(이약도불시구경)인댄 緣什?(연십마)하야 八十年後(팔십년후)에 向拘尸羅城雙林樹間(향구시라성쌍임수간)하야 側臥而死去(측와이사거)며 佛今何在(불금하재)오 明知(명지) 與我生死不別(여아생사불별)이니라 ?言(이언), 三十二相八十種好是佛(삼십이상팔십종호시불)이라하니 轉輪聖王(전륜성왕)도 應是如來(응시여래)라 明知是幻化(명지시환화)로다
“어떤 머리 깎은 비구가 있어서 학인들을 향해 말하기를, ‘부처님은 최고 궁극적인 경지이니
삼대 아승지겁 동안 수행하여 그 결과가 다 채워져서 비로소 도를 이룬 것이다.’라고 한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이 만약 부처를 최고 궁극적인 경지라 한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80년 후에
쿠시나가라 성의 사라쌍수 사이에서 옆으로 누워 돌아가셨는가?
그리고 부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들의 생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리라.
그대들은 32상과 80종호가 부처님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전류성왕도 마땅히 여래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환영이고 허깨비임을 분명히 알리라.”
(강의)
머리 깍은 중들만 부처님을 최고 궁극의 경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불자들은 다 그렇게 생각한다.
스스로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한다.
오랜 세월 동안 수행을 한 뒤 불과(佛果)가 원만하고 나서 비로소 성도(成道)를 하였다고 여긴다.
이야기가 더해지고 또 더해지고 해서 별의별 방편의 말이 다 생겨낫다.
실제로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그 사람이 있을 뿐이다.
참으로 혼자만 최고 궁극의 경지에 있다면 왜 우리들과 같이 80세에 돌아 가셨는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지수화풍 네 가지 요소가 뿔뿔이 다 흩어지지 않았는가.
평소에 잘 생긴 모습을 가지고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그런 모습은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이 잘 생긴 모습을 한 사람이 있었다.
이런 이치는 이미 금강경에서 부처님 스스로도 밝힌바 있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여러 분들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그 부처님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 그냥 사람일뿐이다. 보고 듣고 하는 사람일뿐이다.
이 세상에 최고고 제일이고 가장 위대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일뿐이다.
사람이 부처님이다. 어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님이다.
사람이 최고 궁극의 경지에 있다. 그래서 필자는 평생 인불사상(人佛思想)을 펼치고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겨야 한다.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면 그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다.
古人云(고인운), 如來擧身相(여래거신상)은 爲順世間情(위순세간정)이라 恐人生斷見(공인생단견)하야 權且立虛名(권차립허명)이로다 假言三十二(가언삼십이)하고 八十也空聲(팔십야공성)이니 有身非覺體(유신비각체)요 無相乃眞形(무상내진형)이로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여래가 갖추신 몸의 모습은 세상의 인정을 따른 것이다.
사람들이 아무 것도 없다는 단견을 갖게 될까봐 염려하시어 방편으로 세운 헛된 이름이다.
32상은 거짓 이름이고 80종호도 헛소리다.
몸이란 깨달음의 본체가 아니며, 형상 없음이 진실한 형상이다’라 하였다.”
(강의)
임제스님은 앞에서는 금강경을 인용하였고,
여기서는 다시 고인(古人)의 말씀을 인용하여 당신의 주장을 보완하고 있다.
부대사(傅大士)가 금강경을 해설하면서 하신 말씀이다.
여래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의 뜻을 따른 것이다.
실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을 세상 사람들은
잠간 있으면 영원히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없으면 영원히 없는 것으로 착각한다.
있고 없는 양변에 잘 떨어지고 잘 집착하는 것이 중생들의 속성이다.
여래가 있고 없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선과 악에도 잘 집착한다.
자신만의 기준과 틀을 만들어 놓고 일체를 그 기준에 맞춰본다.
그런 편견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기고 순종하는 것을 살핀다.
자신도 어기거나 순종한다.
그래서 평생을 미워하고 애착하여 취하고 버리는 일로 인생을 삼는다. 병이다.
모두가 환자다. 중환자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부처님을 바로 알 수 있겠는가.
몸은 깨달음의 본체가 아니다. 형상이 없는 것이 진실한 형상이다.
모든 형상에서 형상이 없음을 보아야 여래를 본다.
엑스레이 적 안목을 가져라. 세상만사 보기를 마치 홀로그램 보듯이 하라.
홀로그램에 나타난 영상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 들고 있는 유리잔이 이미 깨어진 것이라고 보며 사용하라.
14-11 땅으로 걸어 다니는 신통
?道(이도)호대 佛有六通(불유육통)하야 是不可思議(시불가사의)라하니 一切諸天(일체제천)과 神仙阿修羅(신선아수라)와 大力鬼(대력귀)도 亦有神通(역유신통)하니 應是佛否(응시불부)아 道流莫錯(도류막착)하라 祇如阿修羅(지여아수라)가 與天帝釋戰戰敗(여천제석전전패)에 領八萬四千眷屬(영팔만사천권속)하고 入藕絲孔中藏(입우사공중장)하니 莫是聖否(막시성부)아 如山僧所擧(여산승소거)는 皆是業通依通(개시업통의통)이니라
“그대들이 ‘부처님께서는 여섯 가지 신통이 있으시니 참으로 불가사의하다’고 하는데,
여러 천신들과 신선과 아수라와 힘센 귀신들도 역시 신통이 있다.
이들도 마땅히 부처님이겠구나.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착각하지 말아라.
아수라들이 제석천신들과 싸우다 지게 되면 팔만 사천의 권속들을 거느리고
연근 뿌리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 숨는다 하니, 이들도 성인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예를 든 것은 모두가 업의 신통이거나 의지한 신통들이다.”
(강의)
불교에는 신통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부처님의 위대함도 이 신통이 있다는 조건으로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통이란 요즘말로하면 초능력 같은 경우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魔法)과 같은 것을 뜻한다.
아수라와 제석천신들이 싸우는 이야기는 해리포터의 마법 그대로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는 목련존자가 신통제일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그런데 부처님은 어느 날 목련존자에게 신통은 정도(正道)가 아니니 쓰지 말라고 당부한 적이 있다.
그래서 목련존자는 신통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외도(外道)들로부터 구타를 당해서 열반하였다고 한다.
임제록에서 보인바와 같이 설사 그와 같은 능력이 있다 손치더라도 그런 일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장려할 바가 아니다. 그런 능력으로서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외도의 소견이다.
방거사(龐居士)의 말씀에 “신통과 묘용이란 물을 길어 오고 땔나무를 해오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참 신통이다.
비가 오면 빗소리를 듣고 날이 개이면 화창한 날씨를 감상하는 일,
즐거운 일이 있으면 즐거워하고 몸이 아프면 ‘아야! 아야!’하고 앓을 줄 아는 그것이 참다운 신통이다.
지금 이 순간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이 사실이 신통묘용이고 무량대복이며,
대자유(大自由) 대해탈(大解脫)이다.
夫如佛六通者(부여불육통자)는 不然(불연)하야 入色界不被色惑(입색계불피색혹)하며 入聲界不被聲惑(입성계불피성혹)하며 入香界不被香惑(입향계불피향혹)하며 入味界不被味惑(입미계불피미혹)하며 入觸界不被觸惑(입촉계불피촉혹)하며 入法界不被法惑(입법계불피법혹)하니라 所以(소이)로 達六種色聲香味觸法(달육종색성향미촉법)이 皆是空相(개시공상)이라 不能繫縛此無依道人(불능계박차무의도인)하야 雖是五蘊漏質(수시오온누질)이나 便是地行神通(편시지행신통)이니라
“대저 부처님의 육신통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물질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물질의 미혹함을 받지 않고, 소리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소리의 미혹함을 받지 않으며,
냄새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냄새의 미혹함을 받지 않고, 맛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맛의 미혹함을 받지 않는다.
감촉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감촉에 미혹함을 받지 않고, 법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법의 경계의 미혹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색·성·향·미·촉·법 이 여섯 가지가 모두 텅 비었음을 통달하고 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무의도인을 속박할 수 없다.
비록 오온의 번뇌로 이루어진 몸이지만 바로 이것이 땅으로 걸어 다니는 신통[地行神通(지행신통)]이니라.”
(강의)
부처님의 진정한 육신통이란 육진(六塵)경계를 만나 그 육진경계들을 일일이 느끼고
감상하고 수용하면서 그 경계에 빠지지 않고 더렵혀지지 않고 속지 않는 것이다.
그 육진경계를 능동적으로 사용하는 그 사람의 작용이다.
경계는 경계일 뿐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본래인(本來人)과는 상관없다.
본래인을 속박할 수는 없다.
본래인이 오온으로 된 이 육신을 떠나서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육신이 본래인이다.
결론은 부처님의 신통도 이 육신이 땅으로 걸어 다닐 줄 아는 그 사실이다.
그래서 땅으로 걸어 다니는 신통이라 한다.
地行神通(지행신통). 아주 재미있는 말이다.
14-12 삼계가 오직 마음이다
道流(도류)야 眞佛無形(진불무형)이요 眞法無相(진법무상)이라 ?祇?幻化上頭(이지마환화상두)에 作模作樣(작모작양)하야 設求得者(설구득자)나 皆是野狐精魅(개시야호정매)요 幷不是眞佛(병불시진불)이니 是外道見解(시외도견해)니라 夫如眞學道人(부여진학도인)은 幷不取佛(병불취불)하며 不取菩薩羅漢(불취보살나한)하며 不取三界殊勝(불취삼계수승)하고 逈然獨脫(형연독탈)하야 不與物拘(불여물구)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참 부처는 형상이 없고 참된 법은 모양이 없다.
그대들은 그와 같은 변화로 나타난 허깨비에서 이런 모양을 짓고 저런 모양을 짓는구나.
설사 그런 것을 구하여 얻는다 하더라도 모두 여우의 혼령들이며 결코 참된 부처가 아니다.
이는 바로 외도의 견해인 것이다.
진정으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부처마저도 취하지 않으며
보살과 나한도 취하지 않고 삼계의 뛰어난 경계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멀리 홀로 벗어나 사물에 전혀 구애되지 않는다.”
(강의)
금강경에 ‘만약 형상으로서 부처님을 보거나 음성으로서 부처님을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다. 결코 여래를 불 수 없으리라.’라고 하였다.
이 단락은 금강경의 구절로 보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참 부처는 형상이 없다. 참 법도 그렇다.
또 금강경에 ‘일체 상을 떠난 것이 모든 부처라[離一切相(이일체상) 卽名諸佛(즉명제불)]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천 부 만 불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서 무엇을 찾는다.
설사 거기서 무엇인가를 찾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 여우의 혼령들이다. 외도들의 소견이다.
진정한 불교인은 부처님도 취하지 않는다. 보살이나 나한도 취하지 않는다.
그런 것에 걸리고 속박되지 않는다. 부처와 보살로부터 멀리 벗어난다.
선계(禪偈)에 ‘부처님이 있는 곳에는 머물지 말고 부처님이 없는 곳에는 급히 지나가 버리라
[有佛處不得住(유불처불득주) 無佛處急走過(무불처급주과)].’라는 말이 있다.
부처와 보살도 다 벗어낫는데 다시 무엇에 걸리겠는가. 참으로 시원한 말이다.
逈然獨脫(형연독탈) 不與物拘(불여물구). 참 좋은 명구다.
乾坤倒覆(건곤도복)하야도 我更不疑(아갱불의)하며 十方諸佛現前(시방제불현전)하야도 無一念心喜(무일념심희)하고 三塗地獄頓現(삼도지옥돈현)하야도 無一念心怖(무일염심포)하나니 緣何如此(연하여차)오 我見諸法空相(아견제법공상)일새 變卽有(변즉유)하고 不變卽無(불변즉무)니라 三界唯心(삼계유심)이요 萬法唯識(만법유식)이니 所以(소이)로 夢幻空花(몽환공화)를 何勞把捉(하로파착)가하니라
“하늘과 땅이 뒤집힌다 해도 나는 더 이상 의혹하지 않는다.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이 앞에 나타난다 하여도 한 생각도 기쁜 마음이 없다.
삼악도의 지옥이 갑자기 나타난다 하여도 한 생각도 두려운 마음이 없다.
어째서 그런가.
나는 모든 법은 공한 모습이라 변화하면 곧 있고 변화하지 않으면 없는 것으로 본다.
삼계는 오직 마음이고 만법은 오직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꿈이요 환상이요 헛꽃인 것을 무엇 하려 수고로이 붙드려는가.’라고 하였다.”
(강의)
모든 현상들은 이런 저런 인연과 조건들에 의해서 시시각각으로 변화를 일으키며 끝내는 소멸한다.
그리고는 다시 조건들이 맞아지면 다시 생기고, 생긴 뒤에는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한다.
변화를 거듭하면서 다시 소멸의 길로 들어선다. 이런 과정을 쉴 새 없이 반복한다.
이것이 모든 존재의 법칙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나 들리는 것이나 보이지 않고 들이지 않는 존재들도 역시 그렇다.
인간의 감정과 지식과 느낌 등 마음작용의 모든 것이 그렇다.
물질계에는 우리들의 육신이 그렇고 온갖 사물이 다 그렇다.
해가 지고 뜨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하는 일이 다 그렇다.
그래서 아이들은 성장하고 중년들은 늙어간다. 늙어가는 일과 성장하는 일이 동일하다.
임제스님은 그와 같은 변화에는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하늘과 땅과 부처와 지옥의 변화에도 전혀 동요가 없다.
그것들은 어차피 변화하는 것이고 텅 비어 공한 것인데
인연의 힘이 존재하는 동안만 눈앞에 나타난 허망한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흘러가는 구름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삼라만상과 세상의 만류가 오직 마음뿐이다. 만목청산(滿目靑山)이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들은 오직 마음일 뿐, 형상이 형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형상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삼조 승찬대사의 신심명(信心銘)을 빌어서
‘인생사 세상사가 모두 꿈이요 환상이요 헛꽃인 것을 어찌하여 수고로이 붙드려는가.
이득과 손실과 옳고 그름을 이 순간 완전히 놓아버려라.’라고 경고 하고 있다.
진부하지만 중요한 구절이다.
불교의 핵심이다.
다시 한번 기억해 두어야 할 구절이다.
三界唯心(삼계유심) 萬法唯識(만법유식).
夢幻空花(몽환공화) 何勞把捉(하로파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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