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내 교학과 선학 병행의 필요성>
이해와 깨달음은 지도보기와 등산하기의 관계
현응스님의 글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서두는 내게 무척 슬프게 다가왔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 길래 평생을 노력해도 성취할 수 없는가?” 깨달음을 구해 불교의 길에 들어선 스님 입에서 이 말이 나오기까지의 고뇌를 생각하니, 그것이 마치 나의 것인 양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그렇지만 깨달음은 “몸과 마음의 완성된 그 어떤 경지”가 아니고 “~에 대한 이해”로서 “논리적 사유와 성찰을 통해 … 경전의 내용을 잘 이해하는 것”이라는 스님의 결론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스님도 분명 출가할 때는 단지 잘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경지를 이루기 위해 출가하였을 것이다. 경전을 잘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부모형제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속세 인연을 머리카락 자르듯 끊어내는 그런 아픔을 감내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읽고 싶은 경전은 시립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만 가도 널려있지 않겠는가? 대화하고 토론하고 싶다면 동국대 불교학과나 불교 동아리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출가할 때 스님들의 발심은 얼마나 깊고 간절하겠는가? 그러니 이루지 못했을 때 좌절과 실망 또한 얼마나 심하겠는가?
나의 생각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 다음 홍창성교수의 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홍교수는 현응스님이 1990년 출판된 <깨달음과 역사>에서 “(인식)주관과 (인식)객관이 모두 실체와 본질이 없음 – 즉 공(空)함 –을 알아 이 둘을 모두 여읜 불이(不二)의 경지로 들어가야 함을 여러번 강조”하고, 또 “간화선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최고의 수행법으로 권장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스님도 25년 전에는 간화선 수행을 통해 주객분별, 자타분별의 이원성을 넘어 불이의 경지를 이루고자 하였으니 그 전후로 수십 년간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았겠는가. 나는 현응스님이 목숨 걸고 열심히 수행하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노력한 자만이 수행이 성취되지 않았을 때 그 원인을 진지하게 따져 물을 자격이 있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직하게 세상에 내놓을 용기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그 답을 목표가 잘못되어 있다는 데에서 찾았다.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대개 묵시적으로 깨달음이란 ‘마음을 확실히 깨닫는 것’ ‘몸과 마음의 완성된 경지이자 모든 번뇌를 끊고 고매한 인격을 이룬 높은 경지’라고 본다. 이러한 깨달음은 ‘궁극적 깨달음’ ‘확철대오’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이 불교계에서 조계종단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정의하는 깨달음은 내용이 추상적이며 구체적인 것은 아니다. 마음을 깨닫는다는 말은 부정확하다. 마음을 깨닫는다 할 때의 그 마음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는 그 마음을 깨닫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인가?” 조계종단이 깨달음을 ‘마음의 깨달음’으로 간주하지만, 여기서의 마음이 불명확하기에 깨달음의 설명도 부정확하고 결국 깨달음의 노력도 실효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것을 이렇게 모호하게 설정해서는 이를 얻기 위한 노력의 방법도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의 목표를 ‘마음의 깨달음’이 아니라 ‘경전의 이해’로 바꾸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냐는 제안이라고 본다.
그런데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왜 명확하지 않다는 것일까? ‘마음을 깨닫는다’는 말이 왜 부정확하다는 것일까? 이것 또한 홍창성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다소 분명해졌다. 마음이 불명확하다는 말, 마음을 깨닫는다는 것이 부정확하다는 말, 이 말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내 나름대로 이해가 갔다. 홍창성교수와는 3-4년쯤 전 학회에서 토론한 적이 있다. 그때도 홍교수는 연기와 공의 논리는 번뇌와 염오심에 대해서뿐 아니라 불성과 청정심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명쾌한 논리로 검은 밤하늘에 밝게 뜬 달의 비유를 들어 말하였다. 검은 밤하늘이 염오와 번뇌이고, 밝은 달이 청정이고 불성이라고 하자. 수묵화에서 밝은 달을 그리는 방법은 달을 칠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검게 칠함으로써 달을 밝게 드러내는 것이다. 주변이 어두워지면 그 어둠을 배경으로 그것 아닌 것으로서의 밝음이 드러난다. 그렇듯 불성, 여래장, 진심, 진여심, 일심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와 염오의 부정으로서만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것을 그 자체로 있는 것처럼 실체화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마음을 궁극적 실재인 듯 여겨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때 나는 이런 질문을 하였다. 그림에서 보면 홍교수가 강조하는 대로 달의 밝음은 밤하늘의 어둠을 통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밤하늘의 어둠 또한 달의 밝음을 통해 드러난다. 청정은 염오를 통해 드러나고 염오는 청정을 통해 드러난다. 그 점에서 둘은 차이가 없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둘의 위상을 다르게 본다. 우리는 수행을 통해 염오를 청정으로 바꾸려고 하지, 청정을 염오로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표면에서 염오와 청정으로 나뉘어 있는 그 현상의 전체 바닥 내지 바탕을 그 자체 본래 청정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상 내지 상(相)에 있어서는 염오와 청정이 나뉘어 이원성을 보이지만, 현상의 바탕인 체(體) 내지 성(性)에 있어서는 전체가 오직 청정이다. 그러니까 불성, 여래장, 일심은 그려진 달, 밤하늘을 제외한 달이 아니라, 밤하늘과 달, 어둠과 밝음을 모두 포괄하는 전체 바탕, 그림 이전의 바탕이 아니겠는가? 그 바탕은 그 위에 그려진 밤하늘과 달의 상대적 이원성과 달리 이원적 대대(待對)를 넘어선 전체, 불이(不二)의 하나이다. 그렇게 불성, 여래장, 일심은 생멸하는 이원성 너머의 불생불멸의 불이가 아니겠는가? 일체 현상의 근원 내지 바탕이 바로 불이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그날 학회의 좌장은 조성택교수였다. 그는 내가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를 간파하였기에 그 질문을 놓고 ‘진검승부’를 벌일 질문이라고 하며 홍교수에게 답변을 청했다. 홍교수는 그 문제를 생각 안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답변하였지만, 내겐 흡족하지 않았다. 그때도 홍교수는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일본 비판불교의 관점에 있구나 싶었다. 그들은 불성, 진여, 일심을 현상의 근원으로서의 진여법신으로, 그리고 그것을 각 중생 안에 깃든 불이의 마음으로 논하는 대승은 석가의 무아설과 대치되는 비불교 내지 힌두화된 불교라고 비판한다. 이번 홍교수의 글 중 “수불스님이 ‘깨달음이란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바라문교에서 아뜨만을 깨달아야 해탈에 이른다고 하는 것과 차이가 없다.”라든가 “‘마음이 우주의 근원’이라는 수불스님의 견해는 바라문교 사람들이 참 좋아할 주장이다.”라는 문장은 그가 아직도 그 관점에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 자리가 법신‧진여‧마음에 대한 이론적 논쟁을 벌일 자리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깨달음 논쟁의 문제의 발단이 바로 여기에 있고 해결의 실마리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되기에, 몇 자 더 적어보고자 한다. 위의 비유에서 밝은 달을 a, 어두운 밤하늘을 b라고 해보자. 종이 위 그림은 a와 b로, 밝음과 어둠으로, 청정과 염오로 나뉘어진다. 그림에서 a는 b로 인해 a로 드러나고, b는 a로 인해 b로 드러난다. 둘은 서로 상의상관적인 대대의 관계이다. 홍교수는 a는 b로 인해 있으니, a를 자성을 가진 자체 존재로 실체화하지 말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깨닫고자 하는 것이 과연 a와 b의 상호의존적 연기성에 그치겠냐는 것이다. 그럴 경우 연기의 유전문 아닌 환멸문, 윤회 아닌 해탈은 어디에서 성립하겠는가? 나는 불교의 핵심은 종이 위에 그려진 a나 b 또는 a와 b의 관계가 아니라, a와 b 둘의 공통의 바탕인 빈종이 A에 있다고 생각한다.
a와 b는 종이 위에 그려진 상(相)이고, 바탕 A는 상을 여읜 성(性)이고 바탕 체(體)이다. 석가가 말한 자성청정심, 대승불교가 말하는 불성과 여래장과 일심은 b를 연하여 드러나는 a, 그림 a가 아니라, 그림 a와 b의 전체 바탕 A일 것이다. 불교가 지향하는 것은 현상에서 a를 보되 a의 상에 머무르지 않고 a의 바탕인 A를 보는 것, b를 보되 b의 상에 머무르지 않고 b의 바탕인 A를 보는 것, 그래서 a와 b가 근본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 않다는 불이(不二)를 깨닫는 것이라고 본다. 만약 연기적 상호의존성에만 머물러 있다면 a를 보되 a 안에서 a 아닌 것으로서의 b를 보고, b를 보되 b 안에서 b 아닌 것으로서의 a를 보는데 그칠 것이다. 그러면 a와 b가 형성하는 순환적 연기고리를 벗어날 수가 없다. a와 b로 이루어진 상(相)의 세계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연기의 역관으로 윤회를 벗어나는 것은 a와 b의 순환적 연기고리를 끊고 그 바닥으로, a도 b도 아니면서 동시에 a와 b로 나타나는 그 바탕 A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본다. 그것이 바로 a에서 a의 공성(空性)을 보고 b에서 b의 공성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성은 a가 아니면서 동시에 a이기도 한 것, b가 아니면서 동시에 b이기도 한 것, 그래서 그 안에서 a와 b가 인연 따라 생멸변화하게 되는 바로 그 바탕 A일 것이다. 이 바탕 A를 우리는 구체적인 사물세계의 상을 여읜 것으로서 공(空)이라고도 부른다.
문제는 이 바탕 A, 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이다. 홍교수는 “나는 불교전통의 일부에서 부정적 개념에 불과한 공을 실체화하는 오류를 범하고서는 이 공을 마치 ‘우주의 근원이자 절대적인 객관적 실재’라는 바라문교의 부라흐만처럼 해석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공을 ‘부정적 개념’일 뿐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그의 사유가 a와 b의 상의 세계, 그림에 머물러 있고 아직 a와 b의 공통의 바탕 A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림에서 a는 b의 부정이고, b는 a의 부정이다. 그림의 차원에서 말하면 그의 말은 옳다. 그림은 그것이 아무리 밝은 달a라고 해도 실체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 상a에 막혀 바탕A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a가 절대화되면 a 이외의 것들이 모두 부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말할지 모른다. 본인도 바탕 A를 생각한다고. 바탕 A는 그림 <a+b>의 부정이라고. 그러나 부정은 긍정의 반대개념이다. a가 b의 부정이면 a는 b가 아닌 것(부정)일 뿐이고 b인 것(긍정)은 아니다. 그런데 A는 <a+b>의 바탕으로서 <a+b>가 아니면서(부정) 또 <a+b>이기도 하다(긍정). A는 <a+b>와 불일불이인 것이다. 뿌리(생명)가 그 위에 피어난 줄기와 불일불이이듯, 바탕은 그 위의 그림과 불일불이이다. 그러므로 바탕 A를 그림 <a+b>의 부정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긍정과 부정을 넘어선 것이다. 긍정과 부정, 유와 무를 넘어선 것이기에 공(空)이라고 하는 것이다. 공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오히려 대승은 일체의 분별과 일체의 이원성을 넘어선 불이의 바탕 A가 단지 상을 여읜 빈 허공, 추상적 공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원효는 그 마음을 ‘일심’이라고 부른다. “무엇이 일심인가? 염정 제법이 그 성이 둘이 아니고 진망 이문이 다를 수 없기에 일(一)이라고 하고, 둘이 없는 자리가 제법의 실(實)이면서 허공과 달리 성이 자신을 신묘하게 알기에(성자신해性自神解) 심(心)이라고 한다.” 염과 정, 진과 망의 이원성을 넘어선 불이의 바탕A는 자신을 신묘하게 아는 성자신해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지눌은 일체의 상을 여읜 적적에서 성성하게 깨어있는 이 적적성성의 마음을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이라고 하였다. <기신론>은 불이의 체를 단순한 비어있음의 공으로만 간주하는 것을 일종의 아견(我見)으로 간주한다. ‘허공이 여래성이다.’라는 주장, ‘진여열반이 곧 공이다.’라는 주장은 모두 삿된 집착이며, 이 사집을 대치하기 위해 <기신론>은 그 빈 바탕이 바로 ‘진심’이고, 무량공덕을 갖춘 불공(不空)의 진여법신이라고 논한다. <불성론>에서는 “불성을 논함으로써 아집을 극복하게 한다.”고 말하고, <원각경>은 “무변의 허공이 마음의 각에 의해 나타난다.”고 논하며, <능엄경>에서는 “법신이 단멸한다면, 누가 무생법인(無生法印)을 닦아 증득하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일체 상을 여읜 불이의 하나는 바로 일심이고 법신이며 진여이고 불성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모두 수행으로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현응스님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홍교수가 쓴 글이 그런데도 절대 불이의 마음을 부정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보면서, 현응스님이 마음은 불명확하고 애매하다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염정을 여읜 불이의 마음, 주객분별, 자타분별을 넘어선 절대의 마음을 부정하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그 마음을 부정한다면, 그 마음을 깨닫고자 하는 수행은 당연히 목표가 잘못 설정된 수행이고,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연금술”이 될 것이다. 그래서 현응스님은 깨달음을 ‘마음의 깨달음’이 아닌 ‘경전의 이해’로 전환시키자고 제안한 것이리라. 이 때 경전 중에서 여래장계 경전이나 유식계 경전은 아마도 모두 배제될지 모른다. 화엄과 천태의 바탕, 궁극적으로는 선의 바탕이 되는 불성사상과 일심사상의 경전들은 어쩌면 현응스님이 이해하고자 하는 경전목록에서 모두 제외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경전을 잘 이해하는 것’은 결국 마음을 잘 이해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그 마음을 증득하기 위한 수행의 필요성, 마음의 깨달음의 필요성을 잘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학을 잘 이해하면 할수록 실제 수행의 발심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적인 과정이다.”라는 수불스님의 말에 나는 백번 공감한다. 이 말은 곧 현응스님은 조계종단의 간화선 수행을 문제 삼았지만, 보다 더 근본적 문제는 깨달음이기에 앞서 그 깨달음을 이해 불가능하게 만드는 교학의 문제가 아니였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우리나라 불교학계가 현상의 근거, 상을 여읜 성, 이원성을 떠난 불이의 체(體)가 바로 우리 각 중생의 본래 마음인 본심이고 진심이며, 그게 바로 불성이고 여래장이고 진여법신이라는 것을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일체의 허망분별상 너머 그 상의 바탕인 불이의 체가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각자의 마음이라는 것,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법신진여로서 진실한 체, 실체(實體)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거 실체화 아니냐?’ ‘무아와 대치되는 것 아니냐?’라는 질문에 쉽게 위축된다. 석가가 ‘무아’로써 부정한 ‘아애‧아견의 자아’와 ‘아공‧법공으로 드러나는 진여’(이공소현진여二空所顯眞如)를 진정 구분하지 못하는 것일까? 자신 안의 불성, 자기 마음의 본체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일까? 궁극의 근원이고 궁극의 체인 마음을 왜 마음으로 애써 부정하려 하는 것일까? 마음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마음이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그 역설을 왜 알아채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이번 깨달음 논쟁을 보면서 불교학계뿐 아니라 불교계 그리고 수행하는 스님들까지도 혹시 자기 마음에 대한 확신, ‘심즉시불(心卽是佛)’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선학이 아니라 교학이다. 선학이 꽃피려면 교학의 뿌리가 든든히 받쳐줘야 하는데, 우리나라 조계종이 지나치게 ‘사교입선’을 내세우며 교학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닌가,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교학과 선학, 경전공부와 간화선 실참, 이해와 깨달음은 마땅히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은 분명히 다르지만, 서로 상보적이다. 교학과 선학의 관계, 이해와 깨달음의 관계는 지도보기와 등산하기의 관계와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교학적 경전이해는 지도를 보는 것과 같고, 선학의 간화선 실참은 몸소 산에 오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현응스님이 ‘경전의 이해’를 강조하는 것은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좀 더 친절하고 세밀한 지도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일 수 있다. 수불스님이 ‘마음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은 실제 산에 오르는 것과 지도만 보고 이해하는 것은 서로 다른 활동이라는 것, 지도를 이해해놓고 산에 올라간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 심지어 지도가 없어도 산에 오르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두 주장이 다 옳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직접 산에 오르는 것에 목숨 거는 사람도 있지만, 홍교수 말대로 경전의 이해, 즉 지도보기에 목숨 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본인이 산에 올라가봐야 지도를 제대로 이해하겠지만, 유추와 비량(比量)으로 지도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산에 오르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등산 안내자인 선지식도 필요하겠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지도를 보며 올라가기를 좋아할 수도 있다. 산에 올라가는 목적이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원함을 느끼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산길을 안내할 지도를 그리기 위해 올라가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지도보기와 등산하기는 서로 다른 것이지만 둘 다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현응스님이 ‘경전의 이해’를 주장하면서 ‘마음의 깨달음’을 배제하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지도를 보되 그것이 어느 산의 지도인지를 망각하는 것과 같으며, 이는 곧 지도를 보는 목적을 상실하는 것이고 결국은 지도가 지도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도를 보고 수행했는데 목적지에 달성 못했으면, 잘못된 지도를 들고 있었거나, 지도 읽는 법이 잘못되었거나, 제대로 된 산길 안내자를 못 만나서 일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바른 지도를 찾아내거나, 지도 읽는 법을 다시 배우거나, 길을 잘 아는 안내자를 만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대신 마음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산의 존재를 부정하고 등산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산을 지도 속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가 산에 오를 것이 아니라면 왜 지도를 보겠는가? 산이 없는 지도가 무슨 지도이겠는가?
그래서 수불스님은 거듭 지도를 보는 것과 산을 오르는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 지도보기는 분별이고 산을 오르는 것은 무분별이라는 것, “깨달음은 불이법에 속하고, 이해는 이법(二法)에 속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산 정상에 올라 그 통쾌함을 맛본 사람이라면 다른 누군가가 방에 틀어박혀 지도만 보고 있다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 것이다. 지도만 보지 말고 직접 산에 올라가 봐라! 경전만 읽지 말고, 너가 직접 수행을 해봐라! 경전의 수행론을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경전에서 말하는 대로 너가 직접 해봐라! 그것이 선사가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사교입선은 지도만 보지 말고 너도 직접 산에 가보라는 말일 것이다. 산에 가면서도 지도만 확인하고 있으면 산 경치를 제대로 볼 수 없으니 산에 왔으면 머릿속 지도를 보지 말고 눈 앞에 펼쳐지는 산을 직접 보라는 말일 것이다.
훌륭한 교학자는 지도를 가르치되 산에 갈 마음을 일으키게 가르치는 자이고, 좋은 선학자(선승)는 지도에서 못 보던 산수를 생생하게 즐길 수 있게 산길을 잘 안내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지도보기와 등산하기, 이해와 깨달음, 교학과 선학은 그렇게 함께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님들이 1년 중 6개월은 안거하면서 간화선수행으로 마음의 깨달음에 전념한다면, 나머지 6개월은 교학을 하면서 경전의 이해에 몰두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둘이 함께 발전해야 한국 불교의 미래가 더 밝아지지 않겠는가?
* 필자 한자경은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고(석사)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칸트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시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석사에 이어 유식불교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자아의 연구』, 『자아의 탐색』, 『유식무경』, 『일심의 철학』, 『불교의 무아론』, 『명상의 철학적 기초』, 『불교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 『한국철학의 맥』, 『칸트철학에의 초대』, 『헤겔 정신현상학의 이해』, 『대승기신론 강해』, 『화두-철학자의 간화선 수행 체험기』 등이 있다.
통융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kds11002/13479966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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