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 해설

아함경 해설 6. 뗏목의 비유 : 좋은 법조차 버려야 하거늘,

수선님 2017. 12. 3. 12:15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진리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러한 진리로 인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위대한 진리일지라도 역시나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진리일지라도 거기에 집착해버리면 그건 곧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뗏목이 내 목숨을 구해준 소중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뗏목이 소중하다고 해서 그 뗏목을 평생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진리일지라도

그 진리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하신 것이 바로 아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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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법조차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나쁜 법을 익혀서야 되겠는가?

 

마치 어떤 사람이 무섭고 험난한 곳을 당해 그 위험한 곳을 벗어나 안온한 곳에 이르려고 생각대로 이리저리 내달리며 편안한 곳을 찾는 것과 같다. 이 때 그는 매우 깊고 넓은 큰 강을 만났는데 저쪽 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나 배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서 있는 곳은 너무도 두렵고 험난하였지만 저쪽 언덕은 무사 태평하였다.
그 때 그 사람은 방법을 강구하였다.

'이 강물은 너무도 깊고 넓다. 이제 나무와 풀잎을 주워 모아 뗏목을 만들어 건너가자.

뗏목을 의지하면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곧 나무와 풀잎을 모아 뗏목을 만들어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건너갔다. 그는 저쪽 언덕에 이르러 다시 생각하였다.
'이 뗏목은 내게 많은 이익을 주었다. 이 뗏목 덕택에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무서운 곳에서 편안한 곳으로 올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이 뗏목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다니면서 쓰리라.'

 

어떤가? 비구들이여, 그 사람은 과연 이른 곳에서 그 뗏목을 스스로 쓸 수 있겠느냐?"
비구들이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의 소원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그 뗏목을 다시 어디 쓰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좋은 법조차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나쁜 법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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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는게 목적이지,

뗏목을 저 언덕에 가져다 대는게 목적이 아닙니다.

 

아무리 진리가 위대하더라도, 진리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진리 자체를 버리라는게 아니죠.

 

저 언덕에 도착했을 때, 그 진리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저 언덕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뗏목을 버리면 죽습니다.

 

 

진리(法)에도 역시나 고정불변의 실체(자성)이 없습니다.

이걸 잘 이해해야 합니다.

 

진리가 아예 없다는게 아닙니다.

속제에서는 진리가 있지만, 진제에는 진리 자체라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실상을 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진리 그 자체에도 실체라고 여길 만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진리에 집착할만한 실체가 정말로 있고 거기에 집착한다면 그게 진리일까요?

그건 곧 고통입니다.

 

또 진리에 실체가 있다면 <제법무아>에 위반되는 것이며, <일체개공>에도 역시나 위배됩니다.

 

사성제 중에 첫째가 고통의 진리...즉 고성제입니다.

고통이라는 것에 정말 영원한 실체가 있다면, 그 누구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진리가 없다는게 아닙니다. 진리 그 자체에도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도 존재하지만, 그 자체에 독립적인 영원한 자성/실체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 어디에도 집착할만한 대상이 없어서 空이며,

그 모든 것에는 고정불변의 모습, 즉 相이 없어 無相이며,

상이 없으므로 바램 자체가 없다는 것이 無願입니다.

 

삼해탈문이란 空/無相/無願입니다.

비어 있지 않고, 모습이 있고, 뭘 바란다면 그것은 해탈이 아닙니다. 이 윤회 세간의 모습이죠.

 

그러므로 진리 그 자체에도 고정불변의 실체/모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살은 반야바라밀로 인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다.

반야바리밀의 모습이란 무소득입니다. 얻을바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에 실체가 없어서

얻을 수 있는게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완전히 체득한 상태가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반야바라밀에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도 역시나 스스로의 성품, 즉 영원한 실체라는 것은 없습니다.

 

도를 닦는 존재에겐 실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아이며, 오온개공입니다.

도를 닦는 존재에게도 실체가 없는데, 그 공한 존재가 닦는 진리에 과연 실체가 있겠습니까?

 

이래서 이 불교의 수행이란게 세속에서의 그런 도 닦는 관념과는 정반대라는 것 입니다.

 

 

 

진리라는 것이 그래서 뗏목과 같은 것 입니다.

본질적으로는 집착할 게 없다는 걸 깨닫는게 바로 진리이므로, 진리 자체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집착할만한 대상이 단 하나도 없다라는 것...........이게 바로 진리입니다.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인 것입니다.

 

속제, 즉 세간에서나 이것이 진리라고 하는 것이지,

진제, 즉 출세간에서는 진리라고 따질만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체가 텅빈 空이기 때문입니다.

 

 

 

 

 

 

아함경 해설 6. 뗏목의 비유 : 좋은 법조차 버려야 하거늘,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글쓴이 : - 반야바라밀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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