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대승불교와 법화경
법화경의 연구가 점점 진전함에 따라 최근에는 여러 종류의 사본이 읽혀지고 있다.
법화경의 사본에는 네팔계와 캐시미르계 그리고 중앙아시아계 등 세 본이 잇다.
중앙아시아계에서 제일 큰 것은 제정러시아때 캐슈가르 총영사가 1903년에 입수한 것으로 페트로우스키본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불지혜가 대부분 불승으로 기술되어 있다.
또 성문승.연각승.불승으로 병렬하고 있는 데도 있다. 그러나 불지가 불승으로 쓰여지면서 삼승 중에 하나로 기술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 본의 '화성유품'정도일 것이다. 화성유품에서 장자는 대증을 이끌어 보물이 있는곳을 향해 험난한 길을 가게 된다. 기진맥진하여 보물찾는 것을 포기하고 쓰러져가는 사람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도중에 가상의 호나성을 만들어 놓는다.
이 가상의 성은 중간 후게소인 성문지, 연각지이며 보물이 있는곳이 네팔계의 케른본에서는 불지혜, 중앙아시아계의 페트로우스키본에는 불승으로 되어 있으므로 성문승.연각승.불승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페트로우스키본의 화성유품을 제외하고는 과외에 있어 삼승 중에 하나를 불승으로 칭하는 용례는 없고 보살승이라고 한다.
여기서 페트로우스키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생긴다.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옛날에는 중앙아시아 사본이 가장 오랜 것으로 추정된 듯하나 최근에는 페트로우스키본에는 첨가한 부분이 많다든가 원문을 개변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 본에 개변이 있다고 한다면 본래 법화경에는 乘(승)이라고 하는 명칭도 삼승을 병렬할 때는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이며 일승이라고 할 때는 불승인 것이다.
즉 일불승이라는 말은 있어도 일보살승이라는 말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페트로우스키본에는 불지를 불승으로 치환시킨 것은 큰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불승이란 과위예 있어 불지혜라는 점과 적어도 인위에서의 보살지는 아니라는 점이 여기서 명확히 밝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승과 보살승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불과 보살을 같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나 적어도 법화경에는 구별하여 보아야 한다.
법화경 '방편품'에 '제불의 지혜는 심심무량하며, 그 지혜의 문은 난해난입하다. 일체 성문, 벽지불이 알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것이 이승의 지와 불지혜를 대비하고 있는 것인데, 이에 대응하는 偈文(게문)에서는 이승 이외에 보살지도 추가하고 있다.
즉 부처님의 지혜는 성문.연각의 이승뿐 아니라 보살의 지혜도 초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보살승과 불승을 단순한 의미에서 동일시하는 것은 법화경의 사고방식에 맞지 않다고 볼수 있다. 그러면 법화경이 일승에 의해 여러 가지 불교의 가르침을 통일시키고자 하면서 왜 보살승이라는 말을 <아함경>또는 <아비달마대비바사론> 등의 경우에는 삼승이 성문승.연각승.불승으로 되어 있다.
즉 보살승이라고는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보살승이라는 말이 대승으로부터 쓰여졌다고 한다면, 불승이라는 말이 먼저이고 대승이 된후부터 보살승이라는 말로 환치되었다고 생각된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아함경>이나 아비달마 등에서 보살승이라 말하지 않고 불승이라고 부를 경우의 불승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대비바사론> 등을 보면 역시 보살은 부처님이 되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소승불교에서는 일체 중생이 곧 대승보살이라는 대승불교의 입장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이같은 해석이 있을수 없다.
아비달마에서 보살이란 대개 부처님 전생을 가리키며 일체 중생이 보살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 같다. 불승이라 했을때의 보살이 어떤 의미의 보살이냐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 경우 이중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대비바사론>시대에는 대승이 성립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승 쪽에서 본다면 불승은 석가보살이 부처님이 되는 길을 설한 것이지 일체 중생이 부처님이 된다는 보살승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불승을 소승의 바깥 쪽에 있는 대승측에서 본다면 일체중생이 부처님이 된다는 보살승과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불승은 이같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소승아비달마에서 쓰여졌다고 생각되므로 어쨌든 불승이 바탕이 되어 거기서 보살승이 발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승이야말로 대승불교 발달의 원점이며 법화경은 그것을 보여 주고 있다 하겠다.
출가자의 부파교단에서 볼 때 불탑은 어디까지나 포교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을 수 있으며, 불탑의 가치를 승원의 중심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부속적인 하나의 포교수단으로 간주했었다.
즉 출가교단은 학문을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교라는 한 단계 낮은 수단에 아무런 통제도 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불탑이라는 장소를 매개로 하여 자유스런 활동이 행해졌으며 이윽고 부파로부터 분리되어 대승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불탑은 대승과 소승을 잇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법화경을 살펴보면 그것도 불탑숭배에 바탕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보탑품'의 서술에 의하면 대지가 갈라지고 거기서 백두산의 몇배나 되는 다보탑이라는 탑이 공중에 솟아오른다. 이는 현실적.물질적인 불탑은 아니며 정신적 의미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불탑신앙에서 출발했지만 이를 초월하려고 했던 데서 대승불교는 발전했으며 <법화경>의 가르침은 불승을 기점으로 삼승을 통일하는데 있었다.
통상 삼승은 성문.연각.보살이라는 세 가지 형태의 순위로 되어 있으나 어느 쪽도 불제자라는 점에서 본다면 삼승에 순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삼승 모두 부처님이 대한 신앙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위치에 있으며 그러한 사람들이 부처님에 대한 신앙에 의해 통일된다는 점을 <법화경>은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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