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中道)
보리심은 발함이 없이 발하고, 불도는 구함이 없이 구해야 한다. 미묘한 작용은 행함이 없이 행하고, 참 지혜는 지음이 없이 지어야 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모두가 한 몸임을 깨달아야 하고, 사랑을 행하는 것은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깊이 이르러야 한다. 베푸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여 가지는 바 없이 계행을 지녀야 한다. 정진을 행하되 마음에 일어나는 바 없어야 하고 인욕을 익히더라도 상처 받는 바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반야지혜는 경계가 생멸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며 선정은 마음이 본래로 머묾이 없음을 아는 일이다.
몸이 없음을 알고 상호를 잘 갖추며 설할 것도 없음을 깨달아 법을 설해야 한다. 물에 비친 달그림자인 도량을 건립하며 본질이 공한 세계를 장엄하라. 환영(幻影)인 공양거리를 나열하여 그림자인 여래를 공양 올리라. 죄의 본성이 공한 것을 참회하고 법신은 항상 머무르는 데 머물기를 청하라. 철저히 얻을 바 없음에 회향하고 복은 진여와 같음을 따라 기뻐하라. 피차가 텅 비어 없음을 찬탄하고 주객이 평등함을 발원하라. 그림자처럼 나타난 법회에 예배하고 길을 걷되 발은 허공에 두어라. 향을 사르되 생멸이 없음을 깊이 통달하고, 경을 읽되 법의 실상을 깨달으라.
꽃을 올리는 것은 모든 것에 집착이 없음을 표현하는 것이요, 손가락을 퉁기는 것은 번뇌를 제거하는 것을 나타낸다. 메아리와 같은 덕목들을 행하고 허공 꽃과 같은 육도만행을 닦는다. 인연으로 생멸하는 성품의 바다 깊이 들어가서 환상과 같은 법의 문에서 항상 노닌다. 본래로 물들 것이 없는 번뇌 끊기를 맹세하고 유심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한다. 실제의 진리 위를 걸어 다니고 얻을 것이 없는 관조의 문을 출입한다. 거울 속의 마군들을 항복받고 꿈속의 불사를 크게 일으키며 환희와 같은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여, 적멸의 보리를 다 함께 증득하리라.
菩提無發而發 佛道無來而來 妙用無行而行 眞智無作而作
보리무발이발 불도무래이래 묘용무행이행 진지무작이작
興悲悟其同體 行慈深入無緣 無所捨而行檀 無所持而具戒
흥비오기동체 행자심입무연 무소사이행단 무소지이구계
修進了無所起 習忍達無所傷 般若悟境無生 禪定知心無住
수진료무소기 습인달무소상 반야오경무생 선정지심무주
鑒無身而具相 證無說而談詮 建立水月道場 莊嚴性空世界
감무신이구상 증무설이담전 건립수월도량 장엄성공세계
羅列幻化供具 供養影響如來 懺悔罪性本空 勸請法身常住
나열환화공구 공양영향여래 참회죄성본공 권청법신상주
廻向了無所得 隨喜福等眞如 讚歎彼我虛玄 發願能所平等
회향료무소득 수희복등진여 찬탄피아허현 발원능소평등
禮拜影現法會 行道足躡虛空 焚香妙達無生 誦經深通實相
예배영현법회 행도족섭허공 분향묘달무생 송경심통실상
散華顯諸無著 彈指以表去塵 施爲谷響度門 修習空華萬行
산화현제무착 탄지이표거진 시위곡향도문 수습공화만행
深入緣生性海 常遊如幻法門 誓斷無染塵勞 願生惟心淨土
심입연생성해 상유여환법문 서단무염진노 원생유심정토
履踐實際理地 出入無得觀門 降伏鏡像魔軍 大作夢中佛事
이천실제이지 출입무득관문 강복경상마군 대작몽중불사
廣度如化含識 同證寂滅菩提
광도여화함식 동증적멸보리
- 만선동귀집,영명 연수 선사
이 글은 영명 연수(永明延壽, 904~975) 선사의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이라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전 6권의 결론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필자는 이 글을 만선동귀중도송(萬善同歸中道頌)이라고 이름 지었다. 만 가지 선행이 모두 중도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연수 선사는 904년 여항에서 태어났으며, 일찍이 불법에 뜻을 두어 오신채를 먹지 않았다. 20세부터는 하루 한 끼를 먹으며 묘법연화경을 읽었다. 28세 때 화정진장(華亭鎭將)이라는 관리에 등용되었으나 백성들에게 거둔 세금을 모두 방생에 사용해 체포되었다. 문목왕(文穆王)은 그의 뜻을 알고 출가를 허락하였다. 31세에 취엄(翠嚴) 문하에 출가하여 수행을 시작한 뒤 천태 덕소의 제자가 되어 법안종의 법을 이었다. 절과 염불, 독경 등등 매일 108종의 불사를 지었다고 전하며, 아미타불 후신이라 칭송받았으며, 염불종의 개조가 되었다. 천태산에 들어가 1만여 명에게 계를 주었으며 975년 나이 72세, 법랍 42세로 입적, 지각 선사(智覺禪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종경록 100권과 만선동귀집 6권, 정토에 관계된 것으로 유심송, 신루안양부, 정혜상자가, 경문 등이 있다.
이 게송은 불자들의 신행생활이 모두 바른 자세, 바른 정신에 입각해서 행해져야 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곧 중도(中道)의 원칙이다. 중도에 입각해서 신행할 때 그 모든 일상의 불사가 바른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발심하되 마음에 조금이라도 낸다는 흔적이 있으면 그것은 온전한 발심이 아니다. 자비를 베풀되 나와 한 몸이라는 자세로 인연이 없는 중생에게까지 동체대비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보시도 또한 주는 바가 없이 주어야 하고, 육바라밀이 모두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有)나 무(無) 양면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유무를 다 수용해야 중도적인 신행이 된다.
또한 이 육신이 본래로 없고 공한 줄을 이치를 통해서 환하게 알지만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고 위의를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무상한 몸, 공한 몸이라고 하여 몸가짐을 아무렇게나 한다면 그것은 중도적 안목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관세음보살처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장엄하되, 한편 육신이 텅 비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법에 있어서도 사실은 한 마디도 설할 것이 없지만 열심히 설하고 부지런히 전해야 한다. 설하되 실은 한 마디도 설할 것이 없음을 알고 해야 한다. 이것은 이율배반의 논리가 아니라 중도이론이다. 사찰이나 도량도 수월도량이다, 물에 비친 달 그림자와 같은 텅 비어 공한 도량, 공한 사찰이다. 그러한 사실을 철두철미하게 알면서 부단히 절을 짓고 도량을 많이 건립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불교인들의 사소한 일상생활에서도 적용되어야 살아있는 중도이론이 된다. 경전과 어록의 말씀들만 중도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미완성 중도가 된다.
이 세상은 근본이 공이다. 텅 비어 없다. 그러나 아름답게 꾸미고 열심히 장엄하여야 한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구 또한 그림자요 메아리다. 그러나 정성을 다하여 공양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것이 모두 그림자인 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공양을 받는 여래도 역시 그림자요, 메아리다. 그런 여래에게 환화(幻化)인 공양거리를 올리는 바 없이 올리는 것이다.
죄의 성품이 본래 공하여 텅 비어 없지만 그 없음을 알고 참회한다. 부처님의 법신은 영원히 머무는 사실을 잘 알면서 다시 또 이 땅에 항상 머무르시기를 권청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논리로서는 합당하지 않은 이 이치가 불교다. 세속의 논리법칙과 같을 필요가 없다. 불교는 불교만의 독특한 논리가 있다.
메아리와 같은 육바라밀을 베풀고 닦으며, 허공 꽃과 같은 만 가지 행과 만 가지 덕을 닦고 일으킨다. 본래 물들지 않은 번뇌를 맹세코 끊으며, 내 마음의 정토에 반드시 태어나기를 서원한다. 거울 속에 있는 그림자 마군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항복 받을 까닭이 없지만 그것 역시 항복 받아야 한다.
꿈속의 불사지만 크게 지어야 한다. 불사도 꿈이요, 불사를 짓는 이도 꿈이다. 그렇기에 더욱 크게 불사를 짓는다. 그래서 실재하지 않는 환화인 중생들을 또한 제도하고, 적멸하여 깨달음이라 할 것도 아닌 그 깨달음의 경지를 함께 증득한다. 이것이 불교적 삶이며 중도적인 삶이다. 가장 이상적인 삶이며 가장 멋있는 삶이다.
출처 : 무비 스님이 가려뽑은 명구 100선 [진흙소가 물위를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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