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36칙 長沙遂落花回 - 장사 화상의 봄날 산놀이

수선님 2018. 8. 5. 12:07

관련 이미지 <벽암록(벽암록)> 제36칙에는 장사경잠(長沙景岑) 화상이 꽃피는 봄날에 산놀이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장사 화상이 하루는 산을 유람하고 돌아와 대문 앞에 이르자, 수좌가 질문했다. ‘화상은 어디를 다녀오십니까?’ 장사 화상이 말했다. ‘산을 유람하고 오는 길이다.’ 수좌가 말했다. ‘어디까지 다녀오셨습니까?’ 장사 화상이 말했다. ‘처음은 향기로운 풀을 따라 갔다가 그리고는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 왔다.’ 수좌가 말했다. ‘아주 봄날 같군요.’ 장사 화상이 말했다. ‘역시 가을날 이슬 망울이 연꽃에 맺힌 때보다야 낫지.’ 설두 화상이 착어했다. ‘대답에 감사드립니다.’”

 

擧. 長沙, 一日遊山, 歸至門首. 首座問. 和尙什處去來. 沙云, 遊山來. 首座云, 到什處來. 沙云, 始隨芳草去, 又逐落花回. 座云, 大似春意. 師云, 也勝秋露滴芙渠.(雪竇著語云, 謝答話)


이 공안의 출처는 잘 알 수 없지만, 장사 화상의 전기는 〈조당집〉 제17권, 〈전등록〉 제10권 등에 전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장사(長沙)의 녹원사(鹿苑寺) 초현(招賢) 화상은 남전(南泉) 선사의 법을 이었으며 조주(趙州)와 자호(紫胡)스님과 동시대 인물이다. 선지의 작용이 민첩하여 상대방이 교학(敎學)으로 질문하면 교학으로 대답하고 게송을 요구하면 게송으로 대답해 주었다. 만일 작가로서 만나고자 하면 작가로서 맞이해 주었다.

 

앙산혜적 선사는 평소 선지의 작용(機鋒)으로는 제일인자이다. 하루는 장사 화상과 함께 달구경을 하다가 앙산스님이 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마다 이것(불성)이 있지만 사용하지 못할 뿐이다.” 장사 화상이 말했다. “옳치 그것 좀 빌려 써 봤으면 좋겠다.” 앙산이 말했다. “화상이 한번 사용해 보세요.” 그러자 장사 화상은 앙산을 한 발로 걷어차서 넘어뜨렸다. 앙산은 일어나면서 말했다. “사숙께서는 마치 호랑이(大蟲) 같군요.” 이후로 사람들이 장사 화상을 잠대충(岑大蟲: 높은 산의 호랑이)이라고 불렀다. 장사는 호남성에 있는 지명으로 가까이 동정호(洞庭湖)가 있는 산수(山水)의 경치로 유명한 명승지이며, 전설로 전하는 무릉(武陵) 도원(桃園) 등이 있는 지방이다.

 

〈전등록〉 제10권에는 장사화상의 독특한 법문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내가 만일 매양 종교(宗敎)만을 선전한다면 법당 앞에 풀이 한길이나 자라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시방세계가 온통 사문의 눈이요, 시방세계가 온통 사문의 온몸이요, 시방세계가 온통 자기의 광명이요, 시방세계가 온통 자기 광명속의 것이며, 시방세계가 온통 자기 아닌 것이 없다. 내가 항상 그대들에게 말하기를 삼세의 부처님들과 법계의 대중들이 모두가 마하반야의 광명이라 하였는데, 광명이 나기 전에 그대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광명이 나기 전에는 부처와 중생이라는 징조도 없거늘 산하(山河)와 국토(國土)는 어디서 생겼는가.”

 

즉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주관과 객관의 자기와 부처 등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경계를 초월하여 시방의 세계와 자기가 하나 된 경지(萬法一如)에서 지혜롭게 사는 사문이 되도록 설하고 있는 유명한 법문이다.

 

본칙의 공안은 장사의 녹원사 주지로 활약한 경잠 화상이 하루(一日) 산놀이(遊山)를 한 것을 안목으로 제시하고 있다. 원오는 “금일일일(今日一日)”이라고 평하고 있는 것처럼, 매일 오늘을 지금 여기 자기의 깨달음의 삶으로 철저하게 살고 있는 선승의 지혜를 보여주고 있다. 운문이 “날마다 좋은날(日日是好日)”이라고 말한 것처럼, 오늘 하루를 좋은 날로 보낸 장사 화상의 경지를 유산(遊山)으로 보여주고 있다. 선어록에 산놀이를 유산(遊山)과 완산(翫山) 완수(翫水)라는 말로 언급되고 있는데, 세간에서 말하는 유람행각이 아니라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일대사를 마친 선승이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하고 본래심 그대로 임운자재하게 인연에 따라서 자적(自適)한 풍류의 모습을 말한다.

 

장사 화상이 산놀이를 하고 돌아오니 대문 앞에 수좌가 마중을 나왔다. 수좌는 “화상은 오늘 어디를 다녀오십니까?”라고 질문했다. 수좌의 질문은 지극히 일반적인 인사말이지만 장사의 심경을 점검해보려는 선승의 선기(禪機)가 깔려있다. 장사 화상은 “산을 돌아보고 오는 길이네”라고 본심그대로 정직하고 산뜻한 대답을 하고 있다. 수좌는 “어디까지 다녀오셨습니까?”라고 두 번째 점검하는 질문을 던졌다. 만약 여기서 장사 화상이 수좌의 질문에 휘말려서, 어떠한 목적으로 어디 어디를 다녀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차별경계에 끄달리고 구경하는 세간사람의 유람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며, 여기저기에 자취를 남긴 범부의 행적이 된다. 선승은 범부심을 초월한 소요자적한 유산이 되어야 하며,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청정한 지금 여기의 지혜로운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장사 화상은 수좌의 점검하는 질문에 편승하지 않고, “처음은 향기로운 풀을 따라 갔다가 그리고는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 왔네”라고 했다. 장사 화상은 뛰어난 문장력을 구사하는 훌륭한 시인이기 때문에 멋있는 시로서 대답했다. 즉 갈 때는 향기 좋고 싱싱한 풀을 따라서 무아지경이 되어 갔기 때문에 산을 올라갔는지 계곡을 지나갔는지 기억도 없었다. 올 때는 나비가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것처럼, 바람에 날리는 꽃을 쫓고 함께 지나다 보니 어느새 절에 까지 오게 되었네. 산천의 풀과 자기가 하나가 되고, 꽃과 자기가 완전히 하나가 된 경지이다. “시방세계가 온통 사문의 온몸이며 눈”이라고 설파한 것처럼, 유희삼매의 경지에서 산놀이를 하고 있다. 수좌는 “아주 봄날의 소풍놀이 같군요”라고 맞장구를 치면서, “화상은 산놀이에 너무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일침을 은근히 던지고 있다.

 

장사 화상은 수좌의 심경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역시 가을날 이슬 망울이 연꽃에 맺힌 때보다야 낫지”라고 시구로 응대하고 있다. 부거(芙)는 연잎(荷葉)의 다른 이름이다. 가을날 차디찬 이슬이 연잎에 떨어지는 모습은 정말 처량한 것으로 조금도 따뜻한 기운이 없다. 이러한 심경을 선에서는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향상사(向上事)의 일로서 선승의 본분을 의미한다. 장사 화상은 나는 향하문(向下門)의 입장에서 중생과 함께하는 낙초(落草)의 봄기운이 훨씬 좋다는 의미를 시로 읊고 있다. 오늘 하루 산놀이를 가고 옴에 삼라만상의 차별경계와 함께 하였지만 어디에도 깨달음의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장사 화상의 심경이 산뜻하게 들어나고 있다. 수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선문답을 보고 설두화상은 수좌가 인사말을 잊고 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여 “대답에 감사드립니다”라고 인사말을 착어로 하고 있다. 즉 설두는 장사화상에게 감사의 뜻을 밝히고 있는 것인데, 그의 본의는 장사의 산놀이가 본분사에 계합된 선승의 삶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설두 화상은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대지에는 티끌 한점 없는데, 어떤 사람인들 눈을 뜨고 보려하지 않으랴! 처음엔 향기로운 풀을 따라 갔다가, 다시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왔네. 야윈 학은 차가운 나무위에서 발돋음하고, 미친 원숭이는 옛 누대에서 휘파람을 분다. 장사의 무한한 뜻이여! 쯧쯧.” 대지는 티끌한점 없다는 말은 시방세계와 자기와 하나로서 일체 차별경계를 초월한 장사의 청정한 심경을 말하고 있다. 누구나 두 눈을 뜨고 정법의 안목을 체득한 지혜의 눈으로 보면 장사와 같이 본래 청정한 경지를 볼 수 있다. 오늘 장사의 무심한 산놀이는 어떠했나. 처음은 향기로운 풀을 따라 갔다가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왔다고 하는 것처럼, 일체의 사량분별도 없이 자취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철저한 유산삼매였다고 칭찬한 말이다. 장사는 봄날의 산놀이에 푹 빠져있는데, 나라면 이러한 산놀이 소식도 있다고 하면서 야윈 학이 고목에서 앉아 있는 것과 슬픈 울음을 우는 원숭이를 등장시켜서 완전히 다른 경지를 제시하고 있다. 장사의 유산(遊山)은 의미심장하기만 하다. 아! 아!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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