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39칙 雲門花藥欄 - 운문화상의 황금빛 털의 사자

수선님 2018. 8. 5. 12:07

관련 이미지 <벽암록(碧巖錄)> 제39칙은 운문화상의 ‘작약(芍藥)의 꽃밭’, 혹은 ‘황금빛 털의 사자(金毛獅子)’라고 불리는 공안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질문했다. ‘어떤 것이 청정 법신입니까?’ 운문화상이 대답했다. ‘작약(芍藥) 꽃밭이다.’ 그 스님이 또 질문했다. ‘바로 이러한 법신의 경지에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운문화상이 대답했다. ‘황금빛 털의 사자로다.’

 

擧. 僧問雲門, 如何是淸淨法身. 門云, 花藥欄. 僧云, 便恁去時如何. 門云, 金毛獅子.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 상권에 전하고 있다. 운문문언(雲門文偃)화상은 〈벽암록〉제6칙에서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법문을 하고 있는 것처럼, 〈벽암록〉에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운문선사에 대해서는 생략한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청정법신이란 무엇입니까?”라고 진지하게 질문했다. 대승불교에서 부처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심신(三身)을 구족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육조단경〉에서는 자성의 삼신불(三身佛)을 설하고 있는데, 보신은 원력과 서원을 세운 보살이 순간순간 불법의 정신으로 깨달음의 지혜와 자비가 실행되는 것이다. 화신은 보살이 원력과 서원을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시절인연에 맞추어서 자신의 지혜와 자비행을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법신은 불법의 지혜와 자비행을 실천할 수 있는 불심의 지혜작용이다. 즉 원력과 서원을 세운 보살은 위대한 보살행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불법의 정신에 의거한 많은 지혜와 자비행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능력이 없는 보살은 올바른 불법을 펼치는 지혜와 자비심이 없기 때문에 중생의 심병(心病)을 올바르게 진단하고 처방할 수 없는 것이다. 부처는 불법의 지혜와 자비심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구족해야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것인데, 중생의 심병을 진단하는 안목의 지혜작용을 법신이라고 한다. 〈임제록〉에서는 “그대가 지금 한 생각의 청정한 지혜광명이 그 자신의 법신불이다”라고 단적으로 설파하고 있는 것처럼, 선에서는 지금 여기서 자신의 청정한 불심의 영묘한 지혜작용를 법신 혹은 본래면목이라고 한다.

 

따라서 법신은 보신과 화신의 본체(本體)이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법신을 인격적으로 보고 밀교에서는 비로자나불, 법신불이라고 하며, 우주에 가득히 편만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도 “불신은 법계에 두루 충만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태양과 달, 별, 산천초목 등 일체의 모든 삼라만상이 모두 법신의 나툼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금강명경〉에도 “부처의 참된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사물에 순응하여 형체를 나타내는 모습이 마치 물속에 비친 달과 같다”라고 설하고 있다.

 

그런데 부처나 여래라고 하면 신과 같이 고정된 모습과 형체가 있는 존재로 생각하고 집착하기 쉽게 때문에 법신불을 ‘청정법신’이라고 한다. 허공과 같이 형체나 모습이 없는 무상(無相)의 부처이다. 그렇다면 ‘청정법신불의 본성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갖게된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질문한 것인데, 운문화상은 당시 작약꽃이 만발한 꽃밭을 응시하고 있으면서 즉시 “보라! 이와 같이 아름다운 작약(芍藥) 꽃밭을 보았는가?”라고 대답하고 있다. 작약을 심은 밭에 아름다운 작약의 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는 그 모습이 다름 아닌 청정법신의 경지이며, 만법이 현전한 소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그대가 작약 꽃이 만발한 꽃밭을 쳐다보며, 자신과 작약 꽃과 하나가 된 시절인연을 관찰하는 지금 여기 그대자신의 지혜작용 이 외에 달리 청정법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원오는 ‘북을 치면 울린다’라는 사투리로 착어하고 있는데, 청정법신이라는 북(질문)을 치니 작약꽃밭(소리)이라고 울렸다고 하면서 운문의 대답은 청정법신의 지혜작용을 하나도 숨김없이 그대로 정직하게 들어낸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원오가 운문화상이 정직하게 대답했다고 평하고 있는 것은 당시 운문화상이 작약꽃밭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것이며, 그가 만약 화장실에 있었다면 ‘마른똥막대기(乾屎)’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라는 의미을 내포한 코멘트라고 할 수 있다. 〈운문광록〉에 어떤 스님이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질문하면 운문화상은 가끔 “마른 똥막대기”라고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창에도 인용한 것처럼, 어떤 스님이 현사스님에게 “어떤 것이 청정법신입니까?”라고 질문하자, 현사는 “썩은 고름이 뚝뚝 떨어진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운문의 ‘마른똥막대기’처럼, 부처나 청정법신은 청정하고 깨끗하다는 차별심, 분별심에 집착된 학인의 선병을 치료하기 위한 처방의 대답인 것이다. 깨끗함은 더러운 것에 대한 상대적인 분별심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일체의 모든 사물은 차별과 분별의 세계에 존재하지만 그 본성은 모두 청정하며 순진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차별과 분별이 없는 청정법신인 것이다. 운문이 ‘작약꽃밭’이라고 대답한 것은 작약꽃밭을 쳐다보고 있는 운문과 꽃밭이 하나가 된 경지에서 운문법신의 미묘한 지혜작용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질문한 스님은 “일체의 모든 존재가 바로 청정법신의 경지 아닌 것이 없지요 바로 이러한 법신의 경지에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라고 곧장 질문했다.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원오는 “대추를 한입에 통째로 삼켰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음식의 참맛을 보지 않고 한입에 집어넣은 녀석이라고 하면서 운문의 대답의 깊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운문화상은 “황금빛 털의 사자로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사자는 뭇짐승의 왕으로 불법을 체득한 대장부에 비유하고 있는데, 황금빛의 사자는 사자 가운데서도 뛰어난 사자를 말한다. 선에서는 불도의 수행이 무르익어서 선지가 뛰어난 선승을 지칭하고 있거나, 뛰어난 제자를 인가할 때에 사용하는 말이다. 원오는 “칭찬하기도 하고, 깎아내리기도 하였다”라고 착어하고 있는데, 운문화상은 이 스님의 경지를 인가한 것인가? 아니면 인가하지 않은 것인가? 원오는 “주사위를 던진 한판의 승부에 각자가 모두 이겼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질문한 스님과 운문화상을 똑같은 경지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설두스님은 이 공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작약꽃밭이여! 우물쭈물 하지 말라. 저울의 눈금은 저울대에 있지, 받침대에 있지 않다. 이러함이라! 전혀 잡다함이 없다. 황금빛 사자를 그대들은 살펴보라!” 설두스님은 먼저 운문이 대답한 ‘작약 꽃밭’을 주제를 먼저 제시하고 있는데, 원오는 “이 말은 아직 귓전에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조금 전에 들은 말인데, 들을 때마다 새롭게 들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운문이 말한 ‘작약 꽃밭’이라는 말에 집착하면 운문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다.

 

운문의 진의를 파악하지도 못한 주제에 우물쭈물 하면 아는 체 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운문이 ‘작약꽃밭’이라고 대답한 것은 저울의 눈금자를 제시한 것인데, 저울의 받침대를 말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원오는 각자 운문의 언구에 집착하지 말고 스스로 회광반조하여 법신의 지혜작용을 체득하라고 착어하고 있다. 설두는 질문한 스님이 “이러한 법신의 경지에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말한 것에 대하여 이 스님은 “전혀 잡다함이 없다”라고 간결하게 읊고 있다.

 

즉 질문한 스님은 너무나 잡다함이 없이 순진하게 대답하고 있기 때문에 운문의 진의를 파악한 것인지, 파악하지 못한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다고 원오도 설두의 게송에 동의하고 있다. 천하의 수행자는 특히 이 공안을 참구하여 운문이 ‘금모사자(金毛獅子)’라고 대답한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잘 참구해 보라고 문제를 던지고 있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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