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은 어떤 경전인가(下)
종범 스님
본문 강술
(5)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공에는) 눈, 귀, 코, 혀, 몸, 생각이 없으며, (공에는) 빛과 소리, 냄새, 맛, 촉감 그리고 생각에 의해 생각되어지는 모든 존재[法境]가 없습니다. 이것을 보통 육근(六根)·육경(六境)이라 합니다. 인간에겐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있습니다. 시각(눈), 청각(귀), 후각(코), 미각(혀), 촉각(몸), 지각(의식)이 그것입니다. 이에 의존해 외부로부터 사물의 존재를 느낍니다. 이것을 12처(十二處)라고 합니다. 우리는 12처의 굴레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에는 12처가 없습니다. 공은 불생불멸이기에 12처는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은 바로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바라밀을 실행하는 보살은 십이처를 초월합니다(照見五蘊皆空). 이를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출가를 하여 그 절에서 준 『반야심경』을 읽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반야심경』에서는 ‘안이비설신의’가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는 분명히 눈, 귀, 코 등 모든 신체 기관이 있는데 『반야심경』에서는 없다고 했으니 경에서 잘못 말하고 있는 것인가, 자신이 자기 몸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스님께 찾아가서 또 여쭈어 보았습니다. “나에게는 내 몸이 분명히 있는데 어째서 『반야심경』에서는 온몸이 다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까?” 이 질문을 받은 스님께서는 번개처럼 대답하기를 “양각이 일보이다(兩脚一步)” 하였습니다. 두 다리가 한 걸음이란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에 그 수행자는 크게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중생이 몸의 구속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나 반야바라밀에는 본래 안의비설신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한 진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확연히 깨달은 다음에는 인생과 우주에 대해 아무런 의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반야심경』을 일찍 만난 것이 다행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수행자는 훌륭한 도인 스님이 된 것입니다. (6) 무안계내지(無眼界乃至) 무의식계(無意識界) 안식계에서부터 의식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없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의 공 중에는 18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18계의 명칭을 다 열거하지 않고 제일 처음의 안계(眼界)와 맨 마지막의 의식계(意識界)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있는 내용은 내지(乃至)란 말로 생략했습니다. 18계가 본래 불생불멸인데 중생은 그 참다운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괴로움에 시달립니다. 꿈속에서 꿈인 줄 모르고 걱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은 18계의 업습(業習)에 의하여 계속 윤회합니다. 불교에서는 108번뇌란 말을 씁니다. 이름을 붙여 108번뇌가 되는 것이지 사실은 우리의 6근 감각에 있습니다. 우리 감각이 평정하면 번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이 미혹에 빠지면 그때에는 108번뇌뿐 아니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번뇌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번뇌에 의하여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생불멸의 세계에 도달해야 합니다. 반야바라밀을 성취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18계에 있으면서 18계를 초월합니다. 이것이 도인의 생활이고 해탈의 감정입니다. (7) 무무명(無無明)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 내지무노사(乃至無老死)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 무명이 없으며, 무명이 다 없어진 것도 없으며, 그뿐 아니라 노사가 없으며 노사가 다 없어진 것도 또한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12연기(十二緣起)가 없다는 진리를 밝힙니다. 12연기의 항목을 보면 ①무명(無明) ② 행(行) ③ 식(識) ④ 명색(名色) ⑤ 육입(六入) ⑥ 촉(觸) ⑦ 수(受) ⑧ 애(愛) ⑨ 취(取) ⑩ 유(有) ⑪ 생(生) ⑫ 노사(老死)입니다. 이 십이연기는 사실 다 함께 연결된 것입니다. 무명이 있으면 자연히 생·노사까지 있게 되며, 노사가 있는 데는 무명과 기타 항목이 다 있게 됩니다. 이 12연기는 연쇄적 메커니즘을 이루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 없어진 상태도 없다고 합니다. 노사도 없고, 노사가 없어진 상태도 없다고 합니다. 반야바라밀은 불생불멸입니다. 그러므로 생과 사가 없습니다. 생과 사가 본래 없으니 생사가 다 없어진 상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반야바라밀에는 무명이 본래 없으니 무명이 없어진 ‘흔적’인들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무명도 없고(無無明) 무명이 다 없어진 상태도 없습니다(亦無無明盡). 그뿐 아니라 노사도 없고(無老死) 노사가 다 없어진 상태도 없습니다(亦無老死盡).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세계입니다. (8)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고, 집, 멸, 도가 없습니다. 반야바라밀은 불생불멸의 실상으로서 고집이 없으니, 멸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에는 고집멸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야바라밀을 이루지 못하고 무명의 굴레에서 맴도는 중생은 어느 일 찰나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중생은 자신의 고통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나머지 다른 사람에게는 별로 괴로움이 없는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는 다 좋아 보이지만 사실은 괴로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야바라밀을 성취해야 합니다. 반야바라밀에는 고통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9)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습니다.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많은 해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시대의 고승이신 원측 스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지혜는 ‘깨달음(菩提)’이고, 얻음은 ‘열반(涅槃)’입니다. 지와 득은 바로 보리, 열반입니다. 반야바라밀에는 보리, 열반이 모두 없습니다. 불교에 보리, 열반처럼 좋은 것이 없는데 어째서 반야바라밀에는 보리, 열반이 없을까요. 비유로 말한다면 어느 사람이 땅에 넘어졌다가 땅에서 일어났을 경우, 사람에게는 넘어지는 일도 있고 일어나는 일도 있지만, 땅은 넘어지는 일도 없고 일어나는 일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에게는 미혹이 있고 깨달음이 있고 속박이 있고 해탈이 있지만 불생불멸의 반야바라밀에는 이런 일이 본래 없습니다. 반야바라밀에는 5온, 12처, 18계, 12연기, 4제, 보리, 열반이 모두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도 없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의 세계입니다. 반야바라밀에는 온갖 것이 다 가명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실존이란 없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반야의 공상(空相)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밝힙니다. “5온, 12처를 초월합니다. 18계를 여의ㅂ니다. 12연기를 모두 초월합니다. 그런 까닭에 고집멸도 4성제가 본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리 열반도 반야의 공성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야의 공성에는 생사가 없습니다. 열반도 없습니다. 생사, 열반이 모두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도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空空, 大空]. 일체의 존재를 다 초월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실상(實相) 반야의 진리입니다. 이것이 반야의 공상입니다. 반야로서 진리와 하나가 됩니다. 반야의 세계는 이런 세계입니다. 이런 세계는 일절 공포가 없습니다. 공포가 없는 사람에게서 불가사의한 자비가 나옵니다. 이것이 관조(觀照)반야의 세계입니다. (10)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보리살타(菩提薩?) 의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蜜多) 고심무가애(苦心無쯀碍) 무가애고(無쯀碍故) 무유공포(無有恐怖) 원리전(遠離顚) 도몽상(到夢想) 구경열반(究竟涅槃) 존재하는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들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습니다. 마음에 걸림이 없는 까닭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쓸데없는 집착을 다 버리고 가장 높은 열반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반야바라밀의 공상에는 얻을 것이 없습니다. 절대 평등의 세계이기에 그러합니다. 평등에는 얻을 것이 없습니다. 평등의 세계에는 생사와 열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보살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마음에 걸림이 없습니다.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으므로 온갖 망상과 집착에서 벗어납니다. 그리하여 보살은 궁극적인 열반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생사와 열반이 없는 세계에 들어가기 때문에 구경열반인 것입니다. 중생은 항상 얻고자 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실상은 얻어지는 것이 아닌데 감정은 얻으려는 생각으로 늘 급급합니다.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늘 괴로움이 따릅니다(有求皆苦). 그러나 얻으려는 생각이 없으면 항상 즐겁습니다(無求皆樂). 반야바라밀에 의지한 보살은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구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삶을 구하지도 아니하고, 죽음을 구하지도 아니합니다. 세상을 취하려고도 않고, 버리려고도 않습니다. 사랑하지도 않고,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반야바라밀에 의지한 보살은 일절 걸림이 없습니다. 걸림이 없기에 공포가 없습니다. 온갖 쓸데없는 망상을 다 버렸습니다. 전도몽상을 다 여읜 것입니다. 보살은 이리하여 대해탈 대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11) 삼세제불(三世諸佛)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蜜多故) 득아뇩다(得阿耕辱多) 라삼먁삼보리(羅三花三菩提) 삼세 제불께서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셨기 때문에 최고의 정각을 이루시었습니다. 보살들만 반야바라밀에 의지해서 열반에 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다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정각을 이루신 것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변정각(無上正遍正覺)’을 의미합니다. 이는 가장 높고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올바른 깨달음이란 뜻입니다. 줄여서 표현할 때 무상정각(無上正覺)이라 합니다. 부처님의 이러한 결과도 다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이루신 것입니다. (12) 고지반야바라밀다(故知般若波羅蜜多) 시대신주(是大神呪) 시대명주(是大明呪) 시무상주(是無上呪)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대신주이며, 대명주이며, 무상주이며, 무등등주임을 알아야 합니다.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크게 밝은 주문이며 최상의 주문이며 비교될 만한 것이 없는 월등한 주문이란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일반적인 언어를 가지고 반야바라밀을 말했으나, 여기서부터는 비밀한 언어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부분을 현설반야(顯說般若)라 하고 뒤의 부분을 밀설반야(蜜說般若)라 말하기도 합니다. 밀설이란 비밀로 이루어진 반야란 뜻입니다. 주(呪)란, 범어의 다라니(Dháran.i)로 진언(眞言)이라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에 포함된 뜻은 모든 것을 다 총섭하고 있다(總持)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액난을 막는다는 의미(能遮)도 있습니다.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은 대신주(大神呪)라 했습니다. 신비로움을 헤아릴 수 없어서 온갖 번뇌를 다 소멸시킨다(能破煩惱)는 뜻입니다. 그다음 대명주(大明呪)란 모든 어리석음을 근본적으로 물리친다(能破無明)는 뜻이며, 무상주(無上呪)란 모든 보살행을 다 원만히 이루게 한다(令因行滿)는 뜻이며, 무등등주(無等等呪)란 최고의 덕성을 성취해서 대해탈, 대열반을 이룩하게 한다(令果德圓)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은 신묘하고 불가사의한 위신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이 헤아릴 수 없는 신앙의 세계입니다. 앞의 부분에서 반야바라밀의 세계를 성취한 사람은 바로 보살행으로 자족할 수 있습니다. 보살행은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전혀 괴롭지 않습니다(到一切苦厄).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은 사람이 비밀한 말씀을 통해서 신앙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비밀로 설해지는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중생의 소원을 성취하는 길입니다. (13)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 진실불허(眞實不虛) 능히 일체의 고통을 제거합니다. 진실하여 헛됨이 없습니다.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은 신비하고 헤아릴 수 없어 일체의 고통을 다 제거하게 됩니다. 반야바라밀을 실행할 때에는 깊은 관조(照見五蘊皆空)의 능력을 통해서 일체의 고통을 다 제거합니다(度一切苦厄). 그러나 반야바라밀의 신비한 위신력을 믿는 사람은 ‘대신주 대명주 무상주 무등등주’의 힘으로 모든 괴로움을 다 제거합니다(能除一切苦). 반야바라밀다는 진실한 내용입니다. 전혀 헛됨이 없습니다(眞實不虛). 이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말한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은 불가사의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밀한 언어의 반야바라밀로 중생의 고통을 다 제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14) 고설반야바라밀다주(故說)般若波羅蜜多呪) 즉설주왈(卽說呪曰) 아제아제(揭帝揭帝) 바라아제(波羅揭帝) 바라승아제(波羅僧揭帝) 모지(菩提) 사바하(娑婆訶)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합니다. 곧 주문을 설합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이 부분은 『반야심경』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우선 다라니의 음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로 읽습니다. 그런데 범어의 음에 가깝도록 발음하면 ‘갸퇴갸퇴 바라갸퇴 바라샹갸퇴 보드히 스바하’가 가까운 음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나라에서는 ‘아제아제’로 읽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 음계의 특성이 인도와 다르기 때문에 ‘갸퇴’가 ‘아제’로 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범어의 『반야심경』이 ‘갸퇴갸퇴’로 된 주문이 있고, ‘아제아제’로 된 주문이 있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문 『반야심경』에는 ‘아제아제’로 표기된 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도 언급한 것처럼 불교에서 반야부 경전은 그 양이 방대하지만 내용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반야심경』은 그중에서도 반야부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심경’이니까 더욱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다른 반야부 경전에서와 마찬가지로 『반야심경』에는 ‘반야바라밀’이 생명입니다. 반야는 바로 진리의 실상입니다. 이것을 ‘공’이라 하였고 ‘공’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의 내용이라 했습니다. 이 공의 세계는 반야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반야 그 자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반야의 본체는 ‘불생불멸’입니다. 공은 반야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더구나 공은 어떤 상대적 허무의 내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반야는 그 공능(功能)으로 최고의 해탈을 성취합니다. 『반야심경』 본문에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최상의 열반을 이루고, 삼세 제불께서도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무상정각을 성취하셨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반야심경』은 신앙과 발원을 강조하였습니다. 경의 후반부에서는 밀설(密說)반야를 통해서, 반야바라밀은 ‘대신주, 대명주, 무상주, 무등등주’이기 때문에 능히 온갖 고통을 다 제거한다 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반야바라밀에 대한 신앙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어서 마지막 진언을 통해 처음의 반야바라밀의 내용을 다시 천명하는 동시에 간절한 발원(發願)을 담고 있습니다. 발원이 간절하면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반야심경』에서는 관세음보살을 통해 반야의 인격을 보였으며, 불생불멸을 통해 반야의 실상을 천명하였고, 보살과 부처님을 통해 반야의 공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야바라밀에 의한 신앙과 반야바라밀에 대한 발원으로 『반야심경』의 종반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글자 수는 전부 합해 270자 밖에 안 되는 짤막한 경이지만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법보(法寶)인 것입니다. 이러한 『반야심경』을 불자 여러분도 생활 속에서 항상 봉독하시기 바랍니다. - 불교란 무엇인가 / 불교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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