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51칙 雪峰是什麽 - 설봉화상과 두 스님

수선님 2018. 8. 26. 12:26

관련 이미지 <벽암록〉제51칙은 설봉의존화상을 참문한 두 스님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설봉화상이 암자에 있을 때 두 스님이 찾아와서 예배를 하자, 설봉화상은 그들을 보고 손으로 암자의 문을 열고 몸을 내밀면서 말했다. “뭐야!?” 스님도 역시 “뭐야!” 라고 말했다. 설봉은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갔다.

 

스님은 뒤에 암두화상의 처소에 이르자, 암두화상이 “어디서 오는가?”라고 물었다. 스님은 말했다. “영남에서 왔습니다.” 암두화상은 “설봉화상을 찾아 갔었는가”라고 물었다. 스님은 “예. 갔다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암두화상은 물었다. “설봉이 무슨 말을 했는가” 스님은 지난날에 있었던 대화를 말씀드리자, 암두화상이 말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더냐” 스님은 말했다. “설봉화상은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갔습니다.” 암두화상이 말했다. “아아!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 불법의 궁극적인 한 말(末後句)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럽다. 만약 그에게 말후구(末後句)를 일러 주었더라면 천하 사람들이 설봉을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스님은 하안거 끝에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어내어 (암두화상께)법문을 청했다. 암두화상은 말했다. “왜 진작 묻지 않았는가” 스님은 “감히 쉽게 여쭙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암두화상은 말했다. “설봉이 나와 똑같이 한줄기에서 태어났지만(生) 나와 똑같이 죽지(死)는 않는다. 불법의 궁극적인 한 말(末後句)을 알고자 하는가. 단지 이것뿐이다.”

 

擧. 雪峰住庵時, 有兩僧來禮拜. 峰見來, 以手托庵門, 放身出云, 是什. 僧亦云, 是什. 峰, 低頭歸庵. 僧後到巖頭. 頭問, 什處來. 僧云, 嶺南來. 頭云, 曾到雪峰. 僧云, 曾到, 頭云, 有何言句. 僧擧前話. 頭云, 他道什. 僧云, 他無語低頭歸庵. 頭云, 噫, 我當初悔, 不向他道末後句. 若向伊道, 天下人不奈雪老何. 僧至夏末, 再擧前話請益,. 頭云, 何不早問. 僧云, 未敢容易. 頭云, 雪峰雖與我同條生, 不與我同條死. 要識末後句, 只這是.

 

이 공안은 〈조당집〉제7권 암두장과 〈오등회원〉제7권 설봉장에 전하고 있다. 설봉과 암두는 덕산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으로 〈벽암록〉22칙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암두의 교시에 의해 설봉이 오산(鼇山)에서 깨닫고 성도를 하게 되었다. 설봉화상이 영남의 암자에 은거하고 있을 때는 당나라 무종(武宗)의 회창(會昌)5년 폐불사건으로 천하의 사찰을 훼손하고 26만500명의 승려를 환속시킨 일대 법난의 시기였다. 당시 동문인 암두전활(巖頭全豁)선사는 악저호(鄂渚湖)라는 호수에서 뱃사공으로 은거하며 살고 있었다.

 

설봉화상이 암자에 있는데 두 스님이 찾아와서 참문하자, 설봉화상은 그들을 보고 손으로 암자의 문을 열고 뛰어 나와서 “뭐야!?”라고 묻자, 그 스님들도 역시 “뭐야!” 라고 말했다. 원오는 ‘화살촉이 서로 마주쳤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설봉과 두 스님의 지혜작용(機鋒)이 일치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자 ‘설봉은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갔다.’ 원오도 ‘진흙 속에 가시가 있다. 설봉의 기봉에 손 쓸 수가 없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설봉은 임제의 고함이나 덕산의 방망이처럼 격렬한 선기를 들어내지는 않았지만 깊은 선지(禪旨)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일단은 마치 〈무문관〉 제13칙에 설봉이 덕산선사에게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도 치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를 가느냐고 다그치는 한마디에 덕산은 말없이 방장실로 되돌아갔다는 내용과 갔다.

 

그 스님은 뒤에 암두화상의 처소에 이르자, 암두화상은 “어디서 오는가” 라고 물었다. 암두의  물음은 스님들이 어느 지방에서 왔는가를 묻는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그들의 수행 정도를 파악하기 위한 말이다. 그 스님은 “영남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암두화상은 “설봉화상을 찾아 갔었는가”라고 물었다. 암두화상은 영남지방의 선지식으로 활약하고 있는 유명한 설봉화상을 친견하고 왔는가 확인하고 있다.

 

단순히 설봉의 얼굴을 친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설봉의 진의(眞意)와 정법의 안목을 친견했는가를 묻고 있다. 그 스님은 “예, 찾아뵙고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원오는 ‘진실한 사람 만나기 어렵다. 차별(양변)에 떨어졌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설봉의 처소에 이르렀다는 대답은 벌써 양변의 차별적인 견해에 떨어진 것이라고 평했다. 본래의 근본당처(불심)에 도달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은 이전과 지금으로 논의하거나 사량분별할 장소가 아닌 것이다. 선의 종지로 한방 먹인 것이다.

 

암두화상은 “설봉이 무슨 말을 했는가”라고 묻자, 스님은 지난날에 설봉화상을 참문한 일과 그 당시의 대화를 말씀드렸다. 암두화상은 “설봉이 무슨 말을 했는가” 라고 묻자, 스님은 “당시 설봉화상은 말도 없이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 갔습니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정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암두화상은 “아아!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 불법의 궁극적인 한마디(末後句)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럽다. 내가 그때 그에게 말후구(末後句)를 일러 주었더라면 천하 사람들이 설봉을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한마디가 본칙 공안의 핵심이며, 진실로 자비심이 깊은 암두의 인격이 들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스님이 설봉을 참문했을 때, 설봉이 “뭐야!”라고 말하자, 스님도 “뭐야!”라고 응답하자, 설봉이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갔다고 한 말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암두는 “설봉은 나와 같이 덕산을 스승으로 참선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오산에서 성도하게 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 때 불법의 궁극적인 한마디를 더 제시했었더라면 이 스님들과 같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인데”라고 후회하고 있는 말이다. 암두의 이 말은 들은 스님은 비로소 설봉이 “뭐야!” 말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간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말후구가 불법을 체득해야 할 문제(疑團)가 되어 90일간 안거동안 이 문제를 공부하게 된 것이다. 말후구는 최후로 궁극적인 불도를 체득하는 한마디(一句)로 중생심(의심)을 죽이고 깨달음의 체험을 통한 확신(信心)으로 불심의 지혜작용을 살리는 법문을 말한다.

 

그 스님은 하안거가 끝날 때에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어내어 암두화상께 법문을 청했다. 암두화상은 “왜 진작 묻지 않았는가”라고 말하자, 스님은 “감히 쉽게 여쭙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암두화상은 “설봉이 나와 똑같이 덕산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으로서 깨달음은 같지만, 교화방법은 같지 않다. 불법의 궁극적인 한 말(末後句)을 알고자 하는가. 단지 이것뿐이다.”라고 말했다. 똑같은 스승의 문하에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했다고 할지라도 설봉은 설봉의 안목이 있고, 암두는 암두의 안목이 있기 때문에 학인을 교화하는 수단은 같지 않다. 불법의 궁극적인 한마디는 바로 이것뿐이다. 지견 분별과 언어문자를 여읜 본래심으로 사는 경지를 체득하는 것이라고 설했다.

 

설두는 게송으로 읊었다. ‘궁극적인 한마디. 그대에게 말한다.’ 암두가 말후구를 설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는데, 내가(설두) 학인들을 위해 설하리라. ‘밝음과 어둠이 쌍쌍으로 어울리는 시절이다.’ 차별과 평등, 미혹과 깨달음을 함께 초월한 경지가 설두가 설한 말후구이다.

 

‘같은 가지에서 나온 것은 알지만, 죽음을 달리한다는 사실은 모르는군.’ 암두의 말을 이어 설두는 밝음이 쌍으로 이루어지는 천지 만물이 생성하는 경지와 어둠이 쌍으로 전개되는 만물일체의 절대 평등의 세계를 읊고 있다. 만물이 생성하는 것도 마찬가지처럼, 성장과 모양과 작용은 각기 다른 것이다. 매화와 벚꽃이 다르고 산과 물이 각각 자기의 모양과 색깔과 기능을 가지고 있는 제법실상의 세계라는 사실이 설두가 제시한 말후구의 법문이다.

 

‘달리한다는 사실.’ 만물이 같이 태어나도 같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그와 같이 ‘석가와 달마의 다름도 잘 분별해야 한다’고 읊고 있다. 만물이 각자 되돌아갈 본래의 곳으로 ‘남북동서로 돌아가라’ ‘한밤중에 일천 바위를 뒤덮은 흰눈을 함께 본다’는 말은 밝음과 어둠(明暗)을 함께 보는 절대평등의 경지를 설두는 말후구로 읊고 있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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