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暗錄)> 제59칙도 조주화상이 <신심명(信心銘)>의 지도무난(至道無難)의 법문에 대한 선문답을 전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질문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단지 간택하는 마음이 없으면 된다.’라고 하였지만, 겨우 말을 하기만 하면 곧 간택인데, 화상께서는 어떻게 사람들을 지도하시겠습니까.” 조주화상이 대답했다. “그대는 왜 이 말을 다 인용하지 않는가.” 스님이 말했다. “저는 단지 여기까지 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주화상이 말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단지 간택하는 마음이 없으면 된다.”
擧. 僧問趙州, 至道無難, 唯嫌揀擇. 有語言, 是揀擇. 和尙, 如何爲人. 州云, 何不引盡這語. 僧云, 某甲只念到這裏. 州云, 只這至道無難, 唯嫌揀擇.
‘본칙의 공안도 <조주록(趙州錄)> 상권에 의거하고 있는데, 역시 조주화상이 <신심명>의 주제를 인용하여 자주 설법한 것을 문제로 하여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단지 간택하는 마음이 없으면 된다’라고 하였지만, 무슨 말을 하기만 하면 곧바로 지도의 경지와는 반대인 취사선택하고 분별하는 간택에 떨어지게 되는데, 화상께서는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고 어떻게 사람들을 지도 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조주화상은 “한 마디의 말이라도 하게 되면 취사 분별심에 떨어지게 된다”라고 설한 것처럼, 깨달음의 경지는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경지(言語道斷)이며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이다. 개념화된 언어로 표현하면 벌써 깨달음의 경지를 대상화하여 설명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차별심과 분별심인 간택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조주화상은 질문한 스님에게 “그대는 왜 <신심명>의 구절과 내가 한 말을 전부다 인용하지 않는가”라고 다그쳤다. 조주화상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신심명>의 첫 번째 구절에도 “지극한 불도를 체득하는 일은 조금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직 취사선택하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차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깨달음의 경지는 분명히 드러나리라”라고 하였다.
또 ‘평창’에도 언급한 것처럼, 조주화상은 <신심명>의 일절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있다. “지극한 불도는 조금도 어렵지 않다. 오직 취사 선택하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말하는 순간에 벌써 취사선택(揀擇)하는 마음에 떨어지거나 깨달음(明白)의 세계에 떨어진다. 나는 깨달음(明白)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 깨달음(明白)의 경지를 수행의 목적으로 삼고 보호하고 아끼려고 하는가.” 조주화상의 설법은 <벽암록> 제2칙에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나의 설법을 전부 언급하지 않고 왜 일부만 제시하여 질문하고 있는가라고 역습하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원오는 “도적은 소인배이지만 지혜는 군자보다 뛰어나다”라고 <임제록행록(臨濟錄行錄)>의 앙산혜적의 말을 인용하여 착어하고 있다. 즉 조주는 정말 노련한 도적과 같이 교묘하게 질문하는 스님의 문제를 완전히 빼앗아 빈털터리로 만들었다. 조주라는 도적의 지혜는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하고 있다.
질문한 스님은 “저는 단지 여기까지만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머리를 숙이고 교묘하게 몸을 피하고 한발자국 더 나아가 조주화상을 시험하는 용기있는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노련한 조주화상의 안목을 간파할 수가 있겠는가. 이 스님은 조주화상이 역습한 화살은 일단 피했지만, 조주화상의 날카로운 칼은 피할 수가 없었다. 원오도 “두 개의 진흙 덩어리를 가지고 논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이 스님은 이래도 저래도 진흙을 가지고 노는 어린애 취급을 받고 있다고 평가한다. 노련한 조주화상에게 덜미가 잡혀서 자유를 잃어버리고 진흙탕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조주화상은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단지 간택하는 마음이 없으면 된다”라고 <신심명>의 구절을 그 스님을 위해서 다시 그대로 설하고 있다. 그대는 오직 이 일절의 의미를 철저하게 깨닫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설법한 것이다. 지극한 불도를 체득하려면 먼저 취사 선택하거나 분별하고 차별하며 간택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고 결론적으로 설한 것이다.
지극한 불도를 체득한다는 것은 선악(善惡), 범성(凡聖), 시비(是非), 득실(得失)과 탐진치 삼독심으로 분별하는 번뇌 망념을 벗어나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신심명>의 일절을 잘 외우도록 하라고 당부한 법문이다.
원오는 “이처럼 학인을 위한 교화는 조주노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스님의 눈동자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조주화상은 평상의 말로 지도의 당체를 제시하여 질문한 스님의 눈동자도 바꾸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이 <신심명>의 지도무난(至道無難)에 대한 법문을 제시할지라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안목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라고 평한 말이다.
간택하는 마음은 중생심의 상대적인 차별심이며 분별심이다. 지극한 불도란 이러한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자각하여 본래 청정한 불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선에서 말하는 번뇌 망념의 중생심에서 청정한 불성을 깨닫게 되면 그대로 부처를 이루는 법문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하는 것이다. 현수법장의 <화엄오교장>에서도 “한 생각의 번뇌 망념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대로가 부처이다(一念不生名爲佛)”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번뇌 망념이 없어진 그대로가 불심이기 때문이다. 본래 청정한 불심을 깨닫는 것이 지도(至道)이며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혜능도 “도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으며, 마조도 본래 청정한 평상심이 도라고 설한다. 이러한 불법의 수행구조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중생심(不覺)에서 불심(本覺)으로 되돌아가는 논리적인 구조로 설명하고 있다.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본래의 불심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수행방법이 참선수행이며 불법을 체득하는 깨달음인 것이다.
설두화상은 게송으로 읊었다. “물을 부어도 물이 묻지 않네.” 마치 연꽃잎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면 물방울구슬이 되어 굴러 떨어지며 연잎에 물이 묻지 않는 것처럼, 조주화상의 대답은 이와 같이 물이 스며들어갈 틈도 없다. 이 말은 <전등록(傳燈錄)> 제9권 위산장에 보이는 말인데, 조주화상이 견고한 지도의 경지를 제시한 것을 읊은 것이다. “바람으로 불어도 들어가지 않네.” 조주화상의 지혜작용은 머리위에 하늘이 없고, 발아래 땅이 없이 바람을 불어 넣을 틈도 없었다. 즉 지도(至道)는 가없고(無邊) 법계에 충만하여 마치 허공과 같다. 허공이 무슨 장애가 있겠는가.
원오는 조주화상의 대답은 “허공과 같이 걸림 없이 무애자재한 지혜작용을 펼쳤고, 견고하기가 철석(鐵石)과 같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끊을 수도 없고, 쳐부술 수도 없는 견고한 대답이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범과 같이 걸어가고, 용과 같이 간다.” 범은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고 용은 구름을 일으키며 올라가는 것처럼, 위풍당당하여 감히 접근 할 수 없고, 변화무쌍하여 자유 자재한 조주화상의 선기작용을 읊고 있다.
원오는 “조주화상, 그는 자재를 얻었다”라고 칭찬하고 있다. 조주화상의 대답에는 질문한 스님은 물론, “귀신까지 울면서 소리친다. 머리의 길이가 삼척(三尺), 그가 누군지 알 수 없네. 갑자기 머리의 길이가 삼척인 요괴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그를 상대하고 마주하여 말없이 외발로 서 있다”고 읊고 있다.
‘평창’에 “듣지 못했는가. 어떤 스님이 동산(洞山)스님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 질문하자, 동산스님은 ‘머리는 석자요, 목의 길이는 두 치이다’”고 대답했다. ‘머리 길이가 삼척’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사람의 풍모가 아니다. 조주의 풍모임과 동시에 지도의 경지는 일체의 형상을 초월한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다시 그와 ‘상대하지만 말이 없다.’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며 언제나 상대하고 있는 것으로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있는 그는 누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홀로 존귀하게 서 있는 조주이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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