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63칙 南泉斬猫兒 - 남전화상과 고양이 살해사건

수선님 2018. 9. 9. 13:07

관련 이미지 <벽암록(碧巖錄)>제63칙은 남전화상이 칼로 고양이를 절단한 사건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남전화상은 어느 날 선원의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의 선승들이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남전화상은 고양이를 잡아들고서 말했다. “말할 수 있으면 고양이를 참살하지 않겠다.” 대중들은 말이 없었다. 남전화상은 고양이를 두 동강이로 절단해 버렸다.

 

擧. 南泉一日, 東西兩堂, 爭猫兒,南泉見. 遂提起云, 道得卽不斬. 衆無對. 泉, 斬猫兒爲兩段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화상은 마조도일선사의 제자로서 <조당집> 제14권, <전등록(傳燈錄)> 제6권 등에 자세한 전기를 전하고 있으며, <어록(語錄)>도 전하고 있다. 남전화상의 속성은 왕씨로 왕노사(王老師)라고 불리며, 안휘성 귀지현의 남전산(南泉山)에서 행화를 펼쳤다. 문하에 조주종심, 장사경잠, 육응대부 등 뛰어난 선승들을 배출했기 때문에 후대에 마조문하의 서당지장, 백장회해와 함께 3대선승(三大禪僧)으로 주목되고 있다.

 

<벽암록>에는 제63칙, 제64칙으로 나누어서 싣고 있는데, <무문관(無門關)> 제14칙, <굉지송고> 제9칙에도 수록하고 있는 유명한 공안이다. 본 공안의 출처는 <조주록(趙州錄)> 상권, <전등록> 제8권 남전장에도 전하고 있는데, <조당집> 제5권 덕산장에 본 공안의 원형으로 간주되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남전화상 문하에 제일수좌(第一首座)가 고양이를 길렀는데, 옆에 있는 스님이 고양이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이로 인해 싸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남전화상에게 아뢰니 화상이 당장 내려와서 고양이를 번쩍 들고 외쳤다. ‘누군가 한마디(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궁극적인 일구) 말할 수 있으면 이 고양이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대중 가운데 대답하는 이가 없자 남전화상은 칼을 들고 고양이를 두 토막으로 잘라 버렸다. 설봉이 이 이야기를 들어서 덕산선사에게 질문했다. ‘남전화상이 고양이를 벤 뜻이 무엇입니까?’ 덕산선사는 설봉을 밀어내면서 때리니 설봉이 달아났다. 이에 덕산선사는 다시 설봉을 불러 세우고 ‘알겠는가?’‘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대를 위해서 그토록 애썼는데 그대는 모르는 구나 !’ 덕산선사가 암두에게 말했다.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것을 잘 지니는 것이 좋겠다.’ ‘이미 모르거늘 잘 지닐 것이 무엇입니까?’ 이에 덕산이 말했다. ‘그대는 마치 무쇠 말뚝 같구나!’ ”

 

이 이야기와 똑 같은 구조의 선문답으로 <백장광록>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마조화상이 사람을 시켜서 편지와 간장 항아리 세 개를 보내왔다. 백장스님은 법당 앞에 나란히 놓아두라고 지시하고, 법당에 올라 설법(上堂)할 대에 대중이 모이자. 주장자로 항아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누군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말을 한마디 한다면 이 항아리를 깨뜨리지 않을 것이요, 말하지 못하면 곧 깨뜨릴 것이다.’ 대중이 말이 없자, 백장스님은 곧장 항아리를 깨뜨리고 방장으로 되돌아갔다.”

 

또 <오등회원> 제9권 앙산장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앙산스님은 스승 위산화상이 하나의 거울을 보내온 인연에 대하여 거울을 받아 들고 상당 설법하였다. ‘자! 말해보게나! 이것은 위산의 거울인가? 앙산의 거울인가? 만약 위산의 거울이라고 한다면 앙산의 손 가운데 있고, 만약 앙산의 거울이라면 이것은 위산이 보내준 것이다. 말할 수 있으면 타파하지 않겠지만, 말하지 못한다면 타파해 버리겠다.’ 세 번이나 질문했지만 대중이 말이 없자, 앙산은 드디어 거울을 깨뜨려 버렸다.”

 

남전화상은 어느 날 선원의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의 선승들이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원오가 “이것은 오늘만 시끄러운 것이 아니었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선원의 수행자들은 항상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논쟁하고 시비 분별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수행자들이 동서로 나누어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는 모습을 본 남전화상은 참고 볼 수가 없어서 곧장 고양이를 잡아들고서 말했다. “자! 그대들이 말할 수 있으면 고양이를 참살하지 않겠다.” 그대들은 수행자인데, 무엇 때문에 이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가. 수행자라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정법의 안목으로 자신의 지혜로 한마디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무문관>에는 “정법의 안목으로 생사대사의 본분사를 해결한 지혜의 말을 한다면 이 고양이를 살려 주지만 말하지 못한다면 고양이를 절단해버리겠다”고 하였다. 원오는 “이 노인 용과 뱀을 구분하는 수단이 있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남전의 한마디는 지혜로 판단하는 안목이 있다. 원오가 ‘수시’에 “의식이 길이 이르지 못한 경지(意路不到)”라고 말한 것처럼, 언어 문자로 엿볼 수 없는 경지를 체득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시한 것이다. 대중 가운데 남전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남전화상은 고양이를 두 동강이로 절단해 버렸다. 남전이 절단한 것은 단지 고양이 뿐만 아니라 동당 서당 선승들의 논쟁한 그 핵심을 절단한 것이며, 선승들의 분별 망상을 절단한 것이며, 아상(我相) 인상(人相)의 근원을 끊어버리고 일체 무명의 근본을 절단해서 펼쳐 밝힌 것이다. 원오도 “통쾌하고 통쾌하다”라고 착어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남전이 왜 고양이를 절단했는가, 불쌍한 고양이를 죽일 필요가 있었겠는가하는 점이다. 남전은 스스로 축생의 경계에 떨어져 불도를 실행하도록 하는 ‘이류중행(異類中行)’의 설법을 설한 선승으로도 유명한데, 축생도(畜生道)에서는 축생으로 응현하여 불법을 수행하도록 하는 남전화상의 ‘이류중행(異類中行)’은 살생과 불살생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고양이를 절단한 남전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동당 서당 양쪽 승당엔 모두 엉터리 선승들(杜禪和)” 양쪽 승당의 선승들이 고양이를 다투는 시비 분별에 떨어진 수행자들이라고 심하게 꾸짖는 말이다. 두선화(杜禪和)는 두묵(杜)이라는 시인이 운율에 맞지 않고 격식에도 틀린 엉터리 시를 지었기 때문에 두선(杜撰)이라는 말이 생겼는데, 이 말을 토대로 하여 수행자의 본분을 상실하고, 격식과 품위도 없이 제멋대로 놀고 있는 엉터리 선 수행자(禪和子)들 뿐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봉화의 연기와 티끌(煙塵)만 일으킬 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연진(煙塵)은 랑연(狼煙)으로 봉화의 연기와 마진(馬塵)으로 말이 달리면서 발굽에서 일어나는 티끌을 말한다. 즉 전쟁터에서 사건이 일어난 상황을 말하는데, 천하태평으로 여유 있게 자기의 일대사를 규명하는 본분사의 수행에 몰입하였다면 좋았는데, 쓸데없는 일을 하다가 분쟁이 일어났다는 상황을 읊고 있다. 불법 문중에서 바람없이 풍랑을 일으키고, 불조의 생명인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며, 수행자의 본분을 망각한 일이었다. 그런데 분쟁의 당사자들은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남전의 질문에 대답도 못하여 고양이를 살해하는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다행히 남전화상이 법령을 실행하였으니.” 다행히 남전화상과 같은 능력있는 선승이 출현하여 불조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실행하고 분쟁의 근원과 망상의 뿌리를 일소하였기 때문에 사건은 해결된 것이다. 만약 남전화상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바보같은 선승들이 지옥에 떨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영원히 번뇌 망상의 먼지만 일으키는 사량분별선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단칼에 고양이를 두동강이로 절단하는 쪽(偏頗)을 선택했다.” 편파(偏頗)는 <서경(書經)>의 말로서 공정하지 못하고 한 쪽에 치우친 판단을 말한다. 즉 남전화상이 고양이를 절단하여 죽이는 행동을 선택한 것을 말한다. 선은 양쪽의 의견을 절충하여 타협점을 찾는 것이 아니다.

 

“양쪽 머리의 뱀을 보는 자는 죽는다.”라고 말한 것처럼, 양쪽의 머리를 모두 함께 절단하고 양변의 차별심을 초월하는 지혜작용을 펼치는 것이다. 남전의 일도양단(一刀兩斷)은 불조의 정법을 실행한 지혜의 칼을 휘두른 것이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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