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군불견가
君不見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대'라는 것이 자성을 자리킨다고 보아 '자성을 깨치지 못했느냐'고 보는 것이며, 또 하나는 바로 뒤에 나오는 '배움이 끊어진 하릴 없는 한가한 도인을 보지 못하였느냐'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를 자성이라 하여도 자성이 바로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이므로 별 관계가 없습니다.
2.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으니
절학무위한도인은 부제망상불구진이라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배움이 끊어졌다' 함은 계(戒),정(定),혜(慧) 삼학의 수행을 다 마쳐 다시 더 배울 것이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더 배울 것이 있고 공부할 것이 있다면 이것은 '배움이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배울 것이 더 떨어져서 다시는 더 배울 것이 없는 이것이 구경각인 것입니다. 그래서 [증도가]의 증(證)이란 구경각을 말하며 구경적으로 자성(自性)을 깨쳐서 실지로 자성을 체달한 것을 말합니다.
'하릴없다'함은 진여(眞如)를 말하니 진여를 바로 깨친 것을 가르킵니다. 배울 것이 하다도없고 하릴 없게 되면 자연히 '한가한 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선종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모든 것을 완전히 다 닦아서 더 닦을 것이 없고 더 나아갈 수 없어 '배움이 끊어져 버려서 아무런 할 일이 없는 한가한 도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증도한 사람을 표현한 말로서, 선종에서 '깨쳤다'고 하는 그 깨침(悟)의 내용이 구경각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한가한 도인은 무엇을 하느냐?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흔히 이 구절을 잘못 보아서 '모든 망상이 없앨 것도 없고 참됨을 구할 것도 없다. 망상이 일어나도 이대로가 참됨이며 참됨과 망상이 본래 완전히 통해 있기 때문에 망상 이대로가 참됨이며 망상 내놓고 달리 참됨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잘못 해석합니다. 그렇게 보면 앞 구절의 '절학무위한도인'과는 근본적으로 반대가 됩니다. '절학무위한도인'은 일체망념이 완전히 끊어져서 구경을 성취한 사람인데, 거기에 상대법인 참됨과 망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증도가]가 가운데서 영가스님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공하다.[眞不立妄本空]'
참됨도 설래야 설 수 없고 망상도 본래 공하여 찾아볼래야 볼 수 없는 참됨과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데서 하는 말입니다. 망상 이대로가 참됨이기 때문에 끊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절학무위한도인'을 모르는 것이고 영가스님의 뜻을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망상이 다 공하여 없애려 하여도 없앨 것이 없고 참됨도 설 수 없다면 참됨을 어디서 어떻게 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참됨괴 망상을 찾아 볼 수 없는 경지에서 하는 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참됨과 망상은 상대법이며 양변, 변견이기 때문에 생사의 견해이며 생멸법입니다. 참됨과 망상의 양변이 완전히 끊어져야만 이것이 중도(中道)입니다.
'절학무위한도인'은 중도를 바로 깨친 사람이며,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은 참됨과 망상의 양변을 다 버린 것을 말하니 그것이 곧 중도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증도가]를 이해하는 첫출발로서 근본 자세가 바로셨다고 보겠습니다.
3. 무명의 참 성품이 바로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로다.
무명실성이즉불성이요 환화공신이 즉법신이로다.
無明實性 卽佛性 幻化空身 卽法身
무명(無明)이라 하면 아직 생멸법인데 이것이 불성(佛性)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면 무명 이대로가 불성인 것이 아니라, 무명의 참 성품이 곧 불성이라는 것입니다.
앞 단에서는 '부제망상불구진'이라 하여 참됨[眞]과 망[妄]을 다 버려버린 쌍차(雙遮)로써 부정을 말하였다면, 이 단에서는 '무명의 참 성품성품이품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라고 하여 차원이 바뀐데서 쌍조(雙照)로써 긍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앞 단에서는 참됨[眞]과 망[妄]을 쌍차(雙遮), 부정하고 나서, 이 단에서는 불성(佛性)과 법신을 쌍조(雙照), 긍정하는 것입니다. 쌍조는 서로 즉(卽)하는 것이 근본이니 모든 것이 다 통함을 말합니다. 무명과 불성이 통하고 허깨비의 빈 몸과 법신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통하느냐 하면, 무명의 참 성품 이대로가 부처님의 성품이고 허깨비같은 빈 몸 이대로가 법신이라는 것이니 이것이 곧 쌍조(雙照)의 긍정의 세계입니다.
4.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법신을 각료무일물하니 본원자성이 천진불이라
法身 覺了無一物 本源自性 天眞佛
법신이라고 하면 무슨 물건이 있는 줄로 생각하기 쉬운데, 법신을 턱 깨치고 보니 거기에는 한 물건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물건도 찾아볼 수 없다면 텅비어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본래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고 하여 거기에는 대광명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차(遮), 막아서 전체를 부정하는 것을 말하고, '본래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조(照), 비추어서 전체를 긍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의 중도(中道) 공식은 앞에서 차(遮)하면 뒤에서는 반드시 조(照)하는 것이어서, 앞에서 부정을 하면 뒤에서는 반드시 긍정을 하여 부정은 분명히 긍정을 전제로하고 긍정은 부정을 전제로 해서, 쌍차쌍조(雙遮雙照)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한 면만 강조해서는 중도 공식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라고 하여 조(照)의 입장에서 긍정을 이야기하면, 법신이 또 흙덩이나 돌덩이처럼 무슨 물건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기 때문에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다'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일체 망념이 다 떨어져서 한 물건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공공적적(空空寂寂)을 말합니다. 공공적적하다고 하면 또 오해하여 단멸공(斷滅空)에 떨어지기 쉬우므로, 다시 공공적적한 이대로가 대광명체라는 말로서 '본래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고 하여 자성의 항사묘용이 현전하다는 것을 부정 뒤에 긍정으로 말하고 있읍니다.
5. 오음의 뜬 구름이 부질없이 가고 오며
삼독의 물거품은 헛되이 출몰하도다.
오음부운이 공거래하고 삼독수포허출몰이로다
五陰浮雲 空去來 三毒水泡虛出沒
내가 법신을 깨쳐 '본래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임을 확실히 알고 보니, 오음의 뜬 구름이 공연히 왔다갔다하고 삼독의 물거품이 생겼다 없어졌다 하며 생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음이나 삼독은 법성과 천진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음이나 삼독은 아직 중도를 깨치기 전 생멸의 쪽, 중생 쪽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실지로 중도를 바로깨쳐서 정각을 이루어 법신을 확철히 깨치게 되면, 한 물건도 없어서 오음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고 삼독을 찾아볼래야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삼독과 오음이 그대로 있다면 법신을 바로 깨친 것이 아니고 '자성이 천진불'임을 바로 안 것이 아닙니다.
6. 실상을 증득하여 인(人), 법(法)이 없으니
찰나에 아비지옥의 업을 없애버림이라
증실상무인법하니 찰나멸각아비업이라
證實相無人法 刹那滅却阿鼻業
오음이나 삼독은 거짓 모습[假相]이고, 불성이라든지 법성이라든지 자성이라든지 구경각이라든지 하는 것은 참모습[實相]을 표현해 말하는 것입니다. 실상을 증득하면 인(人)과 법(法) 즉 주관과 객관이 없습니다. 여기서 증자를 쓰는 것은, 선종에서 주장하는 깨침[悟]이라는 것은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가 아니기 때문/에 '실상을 증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상을 증득하면 주관과 객관이 없어져서 인과 법의 양변을 여읜 중도실상을 증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인과 법이 떨어진 곳을 알고 실상을 알려면 증오해야만 알지 해오로써는 도저히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상을 증득하여 주관이 공하고 객관이 공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찰나 사이에 아비지옥의 업이 없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아비(阿鼻)란 간단(間斷)이 없다, 쉴사이 없다는 뜻으로 무간지옥(無間地獄)을 말하며, 아비업(阿鼻業)이란 아비지옥 곧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받아야 하는 죄업을 말합니다. 중생이란 여러 무수 겁을 윤회하면서 한량없는 죄를 지어 갈 곳은 무간지옥 뿐입니다. 거기는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지옥이며 죄의 고통이 쉬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아비지옥이란 꼭 땅 밑으로 들어가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들은 앉으나 서나 가나 오나 언제나 자기가 계속해온 업에 따라 항상 쉴 사이 없이 업고(業苦)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 받고 있는 처소가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업이 남아 있으면 업을 따라 고(苦)가 따라 다녀서 전체가 아비지옥입인 것입니다. 어느 특정한 처소를 설정해서 아비지옥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업이 있고 업보가 따라 갈 때는 생각 생각이 서로 이어져 쉴 사이 없으므로 어느 곳에 있든지 처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중생세계 전체가 아비지옥이고 아비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겠는가?
중생이라는 것은 처소와 때를 가리지 아니하고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자기의 업에 의해서 업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표방하는 것은 이 모든 업고를 완전히 룸 爭ぜ 영원히 자유를 얻는 것, 곧 해탈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해탈하려면 성불해야 하는데, 성불한다는 것은 곧 실상을 증득해서 주체와 객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아비업이 눈 깜짝할 사이에 소멸되어서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비업만 찾아볼 수 없고 중생만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부처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란 중생을 상대한 약이지 중생을 버리고 부처를 따로 취한다면 이것도 일종의 변견이 되고 맙니다. 실상을 증득하면 양변을 떠깅 중도를 바로 깨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중생을 찾아볼 수 없고 부처도 찾아볼 수 없으며 아비업도 절대로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일 찰라간에 아비업이 없어져서 버린다고 했는데, 육조스님께서도 '미혹하여 들으면 여러 겁이 걸리고 깨친 즉 찰나간이라[迷聞이면 經累劫이요 悟卽刹那間이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입니다. 깨침에 무슨 시간적 간격을 두고 닦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종에서 돈오(頓悟)라고 하는 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 모든 것을 다 성취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이 어려운 것 같지만 이것은 그 닦는 방법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우리가 서울 가기 위해서 걸어간다면 한량없는 날들이 걸리지만 비행기를 타버리면 잠깐 사이에 가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종에서 제시하는 방법에 따라서 공부할 것 같으면 일 찰나간에 구경각인 실상을 증득해서 아비업이 없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7. 거짓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진사겁토록 발설지옥 보를 스스로 부르리로다.
약장망어광 중생하면 자초발설진사겁이로다
若將妄語[言狂]衆生 自招拔舌塵沙劫
'내가 만약 거짓말로 중생을 속이는 것이라면 내 스스로 진사겁토록 발설지옥에 간다'는 말씀입니다. 발설지옥이란 사람들이 거짓말을 많이 하면 죽어서 가는 지옥으로 그곳에서는 혀를 빼내어 쟁기질을 하는데 그 고통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선종에서는 인과 법, 즉 주관과 객관이 떨어지면찰나간에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고 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것이 거짓말이 아님을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는 사람은 이 말을 들으면 의심이 없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차원이 높은 이야기라서 이해하기 어렵고 자꾸 거짓말처럼 들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영가스님이 중생들이 너무나 딱하게 생각되어 자기말이 절대로 참말이지 거짓말이 아니란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기는 하나, 어떻게 보면 영가스님이 참 딱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말이 어느 정도 권위가 설 것 같으면 누가 듣든가 말든가 상관않겠지만 오죽했으면 '내가 거짓말할 것 같으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혀를 빼는 지옥에 가서 고생을 받겠다'고 맹세까지 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맹세한다는 것은 남에게 내가 불신임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만 하여도 선(禪)에 대해서 일반의 인식도가 낮고 이해를 잘못했지 때문에 선(禪)이란 것을 남에게 이해시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서 이런 구구한 말씀을 하신 걸로 볼 수 있습니다.
8. 여래선을 단박에 깨치니
육도만행이 본체 속에 원만함이라
돈각료여래선하니 육도만행이 체중원이라
頓覺了如來禪 六度萬行 體中圓
육도(육도)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말합니다. 바라밀이란 도(度)라든가 도피안(到彼岸)이라고 번역하여 저[彼] 언덕[岸]에 이른다[到]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육도란 저 언덕인 해탈에 이르는 여섯가지 방법이니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를 말합니다. 만행(萬行)이란 육바라밀을 실천 궁행하여 보살도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확철히 깨친다고 함은 여래선을 깨치는 것인데 여래선의 본체 가운데는 육도만행이 원만구족해 있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나무를 벨 때 그 밑 뿌리를 자르면 전체가 다 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마음의 근본자리를 바로 깨치기만 하면 육도만행을 닦고 안닦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원만구족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도만행을 달리 어떻게 닦으려 하지말고 영가스님 자기가 소개하는 여래선을 바로 깨치기만하면 전체가 모두 따라오는 것입니다. 근본을 바로 알면 지엽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니 지엽적으로 나아가 육도만행을 닦는다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근본적인 여래선을 바로 깨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9. 꿈속에선 밝게 밝게 육취가 있더니
깨친 후엔 비고 비어 대천세계가 없도다.
몽리엔 명명유육취러니 각후엔 공공무대천이로다
夢裏 明明有六趣 覺後 空空無大千
육취란 육도(六道)로서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을 말하니 중생은 지은 업에 따라 윤회 전생(轉生)하는 세계의 모양입니다.
대천(大千)이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뜻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쓰이는 말로서 수미산(須彌山)을 중앙으로 하여 일곱개의 산과 여덟개의 바다가가 둘러싸고 있으며 그 밖으로 철위산(鐵圍山)이 에워싼 공간을 한개의 소세계라 하며, 이 소세계를 천개 합친 것이 소천, 소천을 천개 합친 것이 중천, 중천을 천개 합친 것이 대천이니 이것을 삼천대천세계라고 합니다. 육취니 사생이니 삼천대천세계니 하는 것은 전체가 다 망상으로 일어난 업연(業緣)의 기멸(起滅)에서 생긴 이름들일 뿐 자성을 바로 깨친 대원경지에서는 부처나 조사도 찾아볼 수 없는데 하물며 육취인들 찾아볼 수 있으며 중생인들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육취라 하니 육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체만법 전체가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천당이니 지옥이니 부처니 중생이니 하나님이니 하는 것은 모두가 꿈속에서 하는 소리지 꿈을 바로 깨놓고 보면 부처도 찾아볼 수 없고 조사도, 중생도, 하나님도 외도도 또한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삼천대천세계도 찾아볼 수 없어서 깨끗하고 깨끗하여 아무것도 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설 수 없는 거기에서 진여대용인 대지혜광명의 항사묘용이 발현되게 되는 것입니다.
10. 죄와 복이 없고 손해와 이익도 없나니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묻고 찾지 말라.
무죄복무손익하니 적멸성중에 막문멱하라
無罪福無損益 寂滅性中 莫問覓
여래선을 확철히 깨쳐 돈오(頓悟)하면 모든 것이 원만구족한데, 거기에는 죄도 없고 복도 없으며 손해도 없고 이익도 없다는 말입니다. 비단 손해와 이익, 죄와 복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남, 옳고 그름의 모든 변견이 완전히 떨어지면 적멸한 성품이 발현하는 것이니 그 가운데서 무엇을 묻고 찾을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주관과 객관이 다 떨어진 곳이 쌍차이며, 쌍차(雙遮)이면 쌍조(雙照)로써 거기에서 중도정견(中道正見)의 항사묘용이 발현함을 알아야 합니다.
11. 예전엔 때 낀 거울 미처 갈지 못했더니
오늘에야 분명히 닦아 내었도다.
비래에 진경을 미증마러니 금일에 분명수부석이로다
比來 塵鏡 未曾磨 今日 分明須剖析
진경, 때 낀 거울이란 중생의 마음을 가리킨 것으로써 맑은 거울 위에 먼지가 덮혀 있으면 거울 빛이 드러나지 못함과 같이, 중생의 근본 자성은 본래 청정한 것인데 번뇌망상의 티끌이 꽉 차서 지혜광명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업을 따라 생사윤회를 거듭하면서 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잘 몰라서 이 마음을 닦지 못했지만, 오늘에는 참됨도 버리고 거짓됨도 버리고 죄도 버리고 복고 버리고 옮음도 버리고 옳지 않음도 버려서, 모든 상대의 양변을 완전히 여의였기 때문에 중도 정견이 발현하여 근본법을 분명히 밝혀 내었다는 것입니다.
12. 누가 생각이 없으며 누가 남이 없는가
진실로 남이 없으면 나지 않음도 없나니
수무념수무생고 약실무생무불생이니
誰無念誰無生 若實無生無不生
앞에서는 때 낀 거울로써 나고 죽음의 망상을 말하고, 이 귀절에 이르러서는 무생법인을 이루어 대원경지를 분명히 성취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생각이 없으며 누가 나는 것이 없느냐'는 것은 때 낀 거울에서 때를 닦아 내면 그 사람이 확실히 무념의 경계를 성취한 사람이고 무생법인을 증(證)한 사람읕繭遮잔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참으로 나는 것이 없으면 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곧 전체가 다 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쌍차(雙遮)하면 쌍조(雙照)가 됩니다. 모든 일체의 망(妄)이 다하면 이것은 나는 것이 없는 것이며[無生], 거기에서 항사묘용의 무진법문(無盡法門)이 난다는 것입니다.
실지로 무념(無念)을 성취하고 무생(無生)을 증했으면 그만인데 왜 또 '남이 없으면 나지 않음이 없다'고 하느냐하면, 혹 어리석은 중생이 잘못 이해하여 무생이나 무념에 응체하여 단견에 빠질까 염려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한 가지 말할 것은 '약실무생무불생(若實無生無不生)'을 '실지로 나는 것이 없으면 나지 않음도 없다'고만 해석한다면 이것은 전체를 까뭉게 버리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렇게 하면 뜻이 정반대가 되어 버려서 쌍차쌍조(雙遮雙照)가 되질 않습니다. 주의하여 해석하야 합니다.
13. 기관목인을 불러 붙들고 물어보라
부처 구하고 공 베품을 조만간 이루리로다.
환취기관목인문하라 구불시공조만성이로다
喚取機關木人問 求佛施功早晩成
기관목인이란 나무로 사람을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서 인형극하듯이 나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기관목인에게 물어보라'는 것은 곧 '나무 장승에게 물어보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부처 구하고 공을 베품이 조만간에 이룬다'하는 것은 흔히 어떻게 해석하느냐하면, '나무 장승에게 물어 보면 부처를 구해 공을 베품들 어느 때 이루리오'하고 합니다. 결국 무생물인 장승에게 물어가지고는 영원토록 성불하지 못하고 만다는 말인데 그리되면 쌍차(雙遮)는 표현이 되지만, 앞 구절의 '약실무생무불생(若實無生無不生)'과 서로 연관시켜 보면 그와는 뜻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나는 것이 업으면 나지 않음이 없다'고 해석하니만큼 그렇게 되면 나무 장승이 말을 해야 합니다. 나무 장승이 말을 하지 못하면 나는 것이 없다면 나는 것이 없는 것 뿐이지 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안되버리고 맙니다.
예전 스님네는 '나무 장승이 노래부르고 돌여자가 일어나 춤춘다[木人放歌石女起舞]'라고 했습니다. 결국은 참으로 나는 것이 없으면 곧 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나지 않은 것이 나는 것이고 나는 것이 나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쌍차가 곧 쌍조이며 쌍조가 곧 쌍차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인 원융무애한 구경법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나지 않는 것과 나는 것을 분리하여 보면 변견이 되어 버리는 것이어서, 그것은 중도정견이 아니고 사견(邪見)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잘못 해석하여 나무 장승이 본래 말을 못하니 부처를 성취하지 못한다고 하면 나는 것과 나지 않는 것을 분리해서 보는 변견에 떨어지게 되므로, '나지 아니하면 나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는 뜻과는 정반대가 되어 버립니다.
전체적으로 종합하면 '나무장승에게 물어보라. 나무 장승은 언제든지 대답하고 있고, 돌로 만든 여자는 언제든지 춤을 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처를 구하여 공을 베품이 조만간에 이루어지리로다'한 것입니다. 곧 '참으로 나무 장승이 노래 부르고 돌 여자가 춤을 출 때 그 때가 불법을 완전히 성취한 때이다'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나무 장승이 노래하고 돌 여자가 춤을 출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지만, 중생이란 것은 생명의 변(邊)에서 사량분별을 근본생명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애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량분별이 다 떨어져 버리면 무정물(無情物)인 나무 장승과 돌 여자처럼 되어 영영 대무심(大無心)이 되어 버립니다. 대무심이 되면 그 때 비로소 참으로 진여의 무진묘용이 거기서 살아나게 됩니다. 그것이 나무 장승이 말을 하고 돌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는 경계의 소식이니 진여가 대용전창(大用全彰)한 시절로 보아햐 합니다.
또한 그것은 죽음 가운데서 삶을 얻고[死中得活], 크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大死却活]을 말합니다. 크게 죽었다고 하는 것은 나무 장승과 같고 송장과 같다는 말인데, 거기서 다시 살아날 것 같으면 이것이 진여묘용이 현전한 것입니다.
나무 장승이 노래하고 돌 여자가 춤을 춘다고 하는 것은 크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소식을 비유해서 말한 것이며, '나는 것이 없으면 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대원경지의 경계를 그래로 표현한 것이니 그 뜻을 잘 알아야만 '나무 장승에게 물어보라'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의 뜻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14. 사대를 놓아 버려 붙잡지 말고
적멸한 성품 따라 먹고 마실지어다.
방사대막파착하고 적멸성중에 수음탁이어다
放四大莫把捉 寂滅性中 隨飮啄
나지 않는 것[無生]은 나무 장승과 같은 것이고 나지 않는 것이 없는 [無不生]은 진여의 항사묘용을 말함인데, 그러면 우리가 실지로 진여를 완전히 깨쳐서 무생법인을 증하고 항사묘용을 어떻게 해야하느냐?
'사대 오온을 다 놓아 버려서 붙잡지 말고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자유자재 활동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오온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생멸하는 것으로서 거기에 집착하면 영원토록 이 남이 없음[無生]을 모르게 됩니다. 이 사대나 오온이라는 것은 우리가 꿈 속에서 거짓모습을 망견으로써 집착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사대가 본래 공하고 오온이 모두 공하여서 사대를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고 오온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대와 오온이 본래 공한 경계를 증해 버려야만 그것이 적멸입니다. 그 같은 대적멸 경계 가운데서 우리가 임의자재하게 노니는 것을 '수음탁(隨飮啄)'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무 장승이 노래하고 돌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는 소식을 알려면 오온을 다 버리고 사대에 집착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영원토록 이 소식을 모르게 됩니다. 사대와 오온을 다 버리면 이것이 대적멸 세계이며 그 가운데서 우리가 대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 적멸이란 열반과 같은 말입니다. 열반이란 아무것도 없는 죽은 것이 아니라 대자유 대자재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음탁(隨飮啄)'이란 대자유자재하게 활동한다는 뜻인데, 그것은 곧 '남이 없으면 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15.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니
이는 곧 여래의 대원각이로다.
제행이 무상일체공하니 즉시여래대원각이로다
諸行 無常一切空 卽是如來大圓覺
일체의 모든 행이 영원한 것이 없고 일체가 공하여 아무 것도 찾아볼 수 없는 이것은 곧 여래의 대원각이라는 것입니다.
'일체가 공하다'는 것은 마구니와 부처를 찾아볼 수 없는 데서 하는 말이며, 그러면 일체가 텅 빈 그것 뿐이냐 하면 거기에서 진여의 항사묘용이 현발하는 것이니, 대원각이 항사묘용이며 항사묘용 이대로가 '일체 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이 곧 공 아님이요 공 아님이 곧 공이며, 나는 것이 곧 나지 않음이요 나지 않음이 곧 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같은 말을 자꾸 되풀이하는 것은 듣기가 귀찮지만 그것은 쌍차 이대로가 쌍조이며 쌍조 이대로가 쌍차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행이 무상하니 일체가 공'이라 함은 쌍차를 말하고, '곧 이것이 여래의 대원각'이라 함은 쌍조를 말하고,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자유자재하다'함은 쌍조를 말합니다. 다 버리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단멸공(斷滅空)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서 자유자재한 항사묘용이 현발하여 중도정견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16. 결정된 말씀과 참됨을 나타낸 법을
어떤 사람은 긍정치 않고 정에 따라 헤아림이라
결정설표진승을 유인은 불긍임정징이라
決定設表眞乘 有人 不肯任情徵
결정설(決定설)이란 근본적으로 변경시킬 수 없는 확실한 정설(定說)을 말합니다. [증도가]에서 주장하는 것은 자성을 깨쳐서 성불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근본이기 때문에 결정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조사가 그 누구나 할 것없이 자기의 마음을 깨쳐서 성불하였지, 자기의 마음을 깨치지 않고 성불한 사람은 한 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쳐서 성도(成道)한다는 것은 불교의 근본 생명선인 동시에 억천만겁이 지나도 절대로 변함없는 만고불변의 결정적인 근본 대원칙인 것입니다. 마음을 깨쳐 성불하기만 하면 일체가 다 원만구족하여 육도만행과 삼신사지(三神四智)가 다 갖추어져 있어서 다시는 더 밖으로 구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깨치는 법이 결정된 정설이며 따라서 참으로 진실한 최상승의 법문이라는 뜻으로 표진승(表眞乘)이라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통 중생의 근기가 여러 가지고 다르고 업이 두터워서 '결정된 정설인 최상승 법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를 합니다. '그것이 어찌 말이 되는 소린가, 마음을 깨친다고 부처가 되고 모든 것이 내 마음 가운데 다 갖추어질 수 있는가?'하여 긍정치 않고 자기의 정견(情見)에 따라 이리저리 헤매는 사람이 많다는 말입니다. 자기소견에 따라 칠전팔도하며 이리저리 따지기 때문에 중생들은 근본적인 최상승법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에게 이런 폐단이 많기 때문에 영가스님이 노파심절로 이렇게 말씀하여 경책하신 것입니다.
17. 근원을 바로 끊음은 부처님 인가 하신 바요
잎 따고 가지 찾음은 내 할 일 아니로다.
직절근원불소인이요 적엽심지는 아불능이로다
直截根源佛所印 摘葉尋枝 我不能
나는 지름길로 바로 질러가서 근원적인 자성을 바로 깨치는 것으로 으뜸을 삼지 가지나 더듬고 잎을 따는 지엽적인 짓을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무를 벨 때에 밑 뿌리만 끊어 버리면 전체가 다 넘어져서 가지나 잎은 저절로 따라 오는데 무엇한다고 잎을 자꾸 따고 가지를 끊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쓸데 없이 시간과 노력만 낭비할 뿐이지 절대로 바른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근원을 끊는다'는 것은 자성을 바로 깨치는 것을,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견성 성불 하는 바른 길을 말하는 것이요, 그렇지 않고 저 육도만행을 닦는다든지, 뭘 한다든지 하는 것은 가지를 찾고 잎을 딴다는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언제든지 근원을 바로 끊는, 자성을 바로 깨치는 것만 얘기할 뿐 가지나 더듬고 잎이나 따는 등 밖으로 구하면서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뀀裏이러한 말들을 중생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자기의 마음을 바로 깨치면 일체가 원만구족할 수 있느냐고 의심을 많이 합니다. 지금 이 [증도가]를 놓고 이야기해도 의심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바 있듯이 '여래선을 깨치고 나면 그 가운데 육도만행이 원만구족해 있다'고 하여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다고 하여도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느냐고 의심을 많이 가지게 됩니다.
여래선이란 구경각을 성취한 것을 말합니다. 한 번 깨칠 때 다 깨쳐서 진여본성이 드러나 버리면 육도만행 뿐만 아니라 삼신사지가 모두 구족해 있습니다. 이것은 근원을 바로 끊는 도리로서나무를 벨 때 그 밑둥지를 베면 전체가 다 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쉽고 빠른 이 길을 택할 뿐이요, 절대로 가지를 더듬고 잎을 따며 밖으로 불법을 구하려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18. 마니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여래장 속에 몸소 거두어 들임이라
마니주를 인불식하니 여래장리에 친수득이라
摩尼珠 人不識 如來藏裏 親收得
마니란 인도말로써 여의(如意)라는 뜻이니, 마니주는 그 쓰임이 무궁무진해서 무엇이든지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없다고 하여 이 구슬을 우리의 자성에 비유한 것입니다. 한 번 내 마음을 깨쳐 놓으면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하여 여의자재(如意自在)하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마니주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마음 속에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다 지니고 있어서 찾기만 하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이것을 활용하여 자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을 터인데, 이 보배구슬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자꾸 바깥으로만 돌면서 경전을 본다, 육도만행을 한다, 뭘 한다 하면서 바로 찾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여래장 속에서 몸소 얻어 거두어 들여햐 한다'는 것입니다. 여래장이란 진여불성을 말합니다. 여래장을 달리 여러가지 뜻으로 해석하지만 여기서는 진여불성을 여래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나는 마니주를 다른 어느 곳에서 찾지 않고 다만 나의 자성 진여불성 가운데서 찾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으로 영원하여 자유자재한 일체지(一切智)를 성취하여 성불하려면, 그것은 다른 곳에서 구하지 말고 오직 내 마음 본성 가운데서 마니보주를 바로 찾고 바로 개척해서 이것을 우리가 영원토록 쓰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근원을 끊지 않고 바깥으로만 돌면서 가지를 찾고 잎만 따다 보면 결정설(決定設)을 의심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영원토록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래장, 진여불성 가운데 있는 마니주를 완전히 개척해 놓으면 어떤 쓰임이 생기는 것인가?
19. 여섯가지 신통묘용은 공하면서 공하지 않음이요
한 덩이 둥근 빛은 색이면서 색이 아니로다.
육반신용공불공이요 일과원광색비색이로다
六般神用空不空 一顆圓光色非色
육반신용은 여섯 가지 신통묘용을 말하는데, 이것은 육신통(六神通)이라 해도 괜찮지만 육신통을 따라 세울 것은 없고,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六根)의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여불성 가운데 마니주를 찾으니 육근 이대로가 전체로 신통이며 모두가 진여대용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여래장을 열어서 마니보주를 얻지 못하면 육근이 모두 여섯 가지 도적[六賊]이지만, 여래장을 열어 마니주를 얻어 진여자성을 깨치면 육근 전체가 육신통 즉 진여대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를 통한 전체 진여대용 이것이 공(空)이면서 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이란 일체 명상(名相)이 다 떨어진 쌍차(雙遮)를 말하고, 공하지 않다는 것은 단공(斷空)이 아니라 거기에 묘유가 있다는 것으로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그래서 여섯가지 신용이 공했으면서 공하지 않고 공하지 않으면서 공했으며, 진공이면서 묘유고 묘유이면서 진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쌍차이면서 쌍조이며 쌍조이면서 쌍차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가 되는 것이니 중도의 참 정의를 우리가 여기서 체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론으로써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니주를 완전히 얻고보면 '육반신용' 가운데서 중도의 대용(大用)을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여섯가지 신통묘용'이라고 하여 여섯가지가 각각 다른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은 하나입니다.
비유하면 속에 불덩이는 하나인데 구멍이 여러 개 있어서 하나의 불이 여러 개의 구멍으로 비치는 것과 같으니 그 구멍마다 딴 불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덩이 둥근 빛'이란 자성을 말함이니 자성의 진여본성은 똑같아 둘이 아닙니다.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문(六門)을 통해서 비치는 신통묘용이 바로 자성이라는 한 덩어리 광명이 발하는 여러가지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여섯 가지 신통묘용'이 '한 덩어리 둥근 빛'이요, '한 덩어이 둥근 빛'이 '여섯 가지 신통묘용'인 것입니다.
'한 덩이 둥근 빛이 색이면서 색이 아니다'란 말은 긍정을 먼저하고 나중에 부정을 한 것이라면 앞에 말한 '공하면서 공하지 않다'는 것은 부정부터 먼저하고 나중에 긍정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앞에서는 막고서 비추고(遮而照), 뒤에서는 비춰서 막은(照而遮) 것입니다. 이것은 곧 막고서 비추며 비춰서 막으니 막음과 비춤이 한 때[遮照同時]인 중도정의를 여기서 바로 알 수 있읍니다. 누구든지 자성을 바로 깨쳐서 여래장 속에서 마니주를 얻게 되면 중도 정각을 완전히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 오안을 깨끗이 하여 오력을 얻음은
증득해야만 알 뿐 헤아리긴 어렵도다.
정오안득오력은 유증내지난가측이라
淨五眼得五力 唯證乃知難可測
오안, 다섯 눈이란 첫째는 육안(肉眼)이니 우리들 중생의 육신이 가지고 있는 눈을 말하며, 둘째는 천안(天眼)이니 색계(色界)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육안으로 멀고 가까움과 안과 밖,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볼 수 있는 눈을 말하며, 셋째는 혜안(慧眼)이니 이승(二乘)의 사람들이 가진 눈으로써 연기의 실상을 보는 지혜의 눈을 말하며, 네째는 법안(法眼)이니 보살이 가지고 있는 눈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일체의 법문을 비춰 보는 지혜의 눈을 말하며, 다섯째는 불안(佛眼)이니 부처님이 가지고 있는 눈으로써 일체를 알며 일체를 비춰보는 눈이니 앞의 네 가지 눈을 모두 구비한 눈을 말합니다.
중생이 깨치지 못하였을 때는 육안은 육안대로 천안은 천안대로 각각 다르지만 확철히 깨치고 보면 다섯 가지 눈이 서로 통해서 하나가 됩니다. 앞에서 그것을 '여섯 가지 신통묘용'이 한 진여본성의 묘용으로써 그 비치는 문만 다를 뿐 그 근본 자체는 똑같다고 말한 바와 같이, 오안을 비록 각각 다르게 말하였지만 그 근본 자체에 있어서는 육안이 곧 불안이고 불안이 곧 육안인 것입니다.
육안이란 중생의 육안 이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이 깨치면 육안 이대로가 불안이며 불안 이대로가 육안일 뿐, 육안 내놓고 따로 불안이 없으며 불안 내놓고 따로 육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천안 이대로 혜안이며 법안 이대로 불안이여서 오안 전체가 서로서로 융통자재합니다. 그러므로 이 오안을 차별적으로 보아서 육안을 버리고 천안을 얻고 그렇게 하여 단계적으로 올라가서 마침내 불안을 얻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경각을 증하게 되면 단박에 오안을 모두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가스님은 바로 이 오안을 깨끗이 하면 오력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오력(五力)이란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의 하나로써 첫째는 신력(信力)이니 신근(信根)을 증장케 하여 모든 삿된 믿음을 깨뜨리는 것이며, 둘째는 정진력(精進力)이니 정진근(精進根)을 증장케 하여 신테의 게으름을 물리치는 것이며, 셋째는 염력(念力)이니 염근(念根)을 증장케 하여 모든 사념(邪念)을 깨뜨리는 것이며, 넷째는 정력(定力)이니 정근(定根)을 증장케 하여 모든 어지러운 생각을 끊어버리는 것이며, 다섯째는 혜력(慧力)이니 혜근을 증장케 하여 삼계의 모든 미혹을 끊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가지 힘[五力]이라는 것도 각각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하는 힘을 말한 것으로써 그 한 힘을 자세하게 분석하여 말하자니 다섯 가지 힘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안이든 오력이든 전체가 다 진여대용인 것이니 실지에 있어서는 오직 여래장 속에 있는 마니주의 작용일 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쓰임으로 보아서 다섯 가지로 나눈 것이니 여럿으로 나누어 볼 때는 찬차만별의 작용으로 나눌 수도 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래장 속의 마니주, '한 덩이 둥근 빛'이 천자만별로 나타나는 것이지 다른 물건이 각각 따로 있어서 천차만별로 벌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눈이 다섯 개의 눈이고 다섯 개의 눈이 하나의 눈이며, 하나의 힘이 다섯 개의 힘이며 다섯 개의 하나의 힘으로 원융무애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원융무애한 진여대용을 우리가 얻을 수 있는가?
'깨쳐야만 알 뿐 헤아리긴 어렵다'고 하였듯이 우리가 진여대용을 알려면 반드시 증해야 되고 구경각을 성취하여 체득해야지 해오(解悟)나 신해(信解)로써는 절대로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선가에서든지 교가에서든지 증(證)자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봐서는 구경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여대용인 오안과 오력을 얻으려면 오직 증(證)해서 중도를 정득각해야만 알지 그렇게 하기 전에는 누구도 절대도 이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영가스님의 이 말씀들은 자성을 깨친 대광명 가운데서 말씀한 것인데 눈감은 봉사가 어찌 이 대광명을 볼 수 있겠습니까? 눈을 감고 앉아서 아무리 진여가 어떻고 오안 오력이 어떻고 해보았자, 봉사는 봉사이기 때문에 그 근본 대광명은 보지 못하니, 오안을 쓸 수도 없으며 오력을 쓸 수도 없으니 오직 눈을 떠야만 합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제팔 아뢰야 근본 무명을 완전히 끊어야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이 구경각을 성취하기 전에는 실제로 눈 뜬 사람이 아닙니다. 제팔 아뢰야 무기무심(無記無心)의 마계(魔界)를 완전히 벗어나서 참으로 죽음 가운데서 삶을 얻고, 크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만 눈 뜬 사람입니다.
진여본성을 확철히 깨쳐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해야만 부처와 조사가 전한 오안을 얻고 오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참으로 증(證)하지 않고는 어떤 공부를 한다하여도 절대로 공부라고 취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자주 되풀이 하겠지만 선종에서는 언제든지 깨치는 증오(證悟)만 말하지 이해하여 아는 해오(解悟)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만약 누구든지 선종을 해오적(解悟的)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선에 있어서 외도적인 해석이며, 선종의 전통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21. 거울 속의 형상 보기는 어렵지 않으나
물 속의 달을 붙들려 하나 어떻게 잡을 수 있으랴.
경리에 간형견불난이나 수중착월쟁염득가
鏡裏 看形見不難 水中捉月爭拈得
'거울 속에 환하게 비친 내 얼굴을 본다'는 것은 자성을 바로 깨쳐서 오안과 오력을 자유자재하게 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서 확철히 깨쳐서 증지(證智)를 성취하면 대지혜 광명이 현전하는데, 자기 자성을 보는 것이 비유컨대 거울 속에 환하게 비친 얼굴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하다고 밝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볼 물건이 있고 볼 사람이 있어서 보는 줄 알면 큰 일이니, 여기서는 모든 주관과 객관이 다 떨어져 버린데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별망상과 티끌 그림자를 따라가다가는 또 영원토록 자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 '물 속의 달을 붙들려하나 어찌 잡을 수 있으랴'라고 하고 있습니다. 경전에도 이러한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만, 원숭이가 물 속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달려들지만 천년 만년 잡으려 해 보았자 그것은 헛일이니 어찌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물 속에 비친 달이란 분별망상을 말하는 것이니 망상과 티끌 그림자를 가지고는 우리의 자성을 영원히 깨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성을 깨치려면 분별 망상뿐만 아니라 제팔 아뢰야의 근본 무명까지도 뿌리를 뽑아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영원토록 자성을 깨칠 수 없다는 것을 비유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 망상과 티끌 그림자를 버리고 회광반조하여 진여본성을 바로 깨쳐야 하는 것이니 외변으로 돌면서 헤매서는 안 되며, 근원을 바로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2. 항상 홀로 다니고 항상 홀로 걷나니
통달한 이 함께 열반의 길에 노닐도다.
상독행상독보하니 달자동유열반로로다
常獨行常獨步 達者同遊涅槃路
우리가 참으로 깨쳐서 증지(證智)를 성취하였는데 어째서 '항상 홀로 다니고 홀로 걷느냐'하면, 깨친 경계에서는 부처와 부처가 서로 보지 못하고 조사와 조사가 서로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佛佛이 不相見이요 祖祖가 不相逢이라]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일체의 명상(名相)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니, 천상천하에 오직 나 혼자 높아서 천하를 횡행하고 허공 위를 혼자 걸어 가는 것입니다. 아무 짝도 없고 걸림도 없이 자기 혼자 노닐게 되므로 서로서로 반려가 없습니다. 반려가 없다는 것은 절대로서 상대가 없다는 것이며 모든 명상의 양변이 다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려가 없다고 해서 혼자만 다니고 혼자만 걸으면 그만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깨친 사람들은 서로서로 손을 잡고 열반의 길에서 함께 노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을 빨리 알려면 '이것이 무엇인고'를 부지런히 해서 깨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영가스님이 이런 좋은 글을 만들어 놓고 내가 아무리 입이 아프도록 말해 보았자 쓸 데 없는 말일 뿐입니다. 오직 눈을 바로 뜨고 광명을 보아야 합니다.
23. 옛스런 곡조 신기 맑으며 풍체 스스로 느높음이여
초췌한 모습 앙상한 뼈 사람들 거들떠 보지 않는도다.
조고신청풍자고여 모췌골강인불고로다
調古神淸風自高 貌悴骨剛人不顧
홀로 다니고 홀로 걸어 열반의 길에서 노닐면 참으로 '곡조가 옛스럽고 신기는 맑고 풍채가 스스로 드높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고불고조(古佛古祖)들이 맨손에 단도를 쥐고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는 대기대용(大機大用)을 말한 것입니다. 그냥 운치가 좋고 풍채가 높다는 것이 아니라, 빈 손에 청룡도를 하나 들고 내 마음대로 자유자재하게 써서, 죽이는 것만 마음대로 하느냐 하면 살리는 것도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역대의 조사들을 죽이려고 하면 한 칼에 다 죽여 버리고, 살리려고 하면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들 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을 한 날 한 시에 살릴 수 있는 살활자재(殺活自在)한 전기대용(全機大用)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처럼 살활자재한 전기대용이 현저한 그 사람의 모양이 어떤한가 하면, '얼굴은 초췌하고 뼈는 앙상해서 사람들이 돌아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피부가 다 탈락되어 하나의 진실제뿐[皮膚脫落盡 唯一眞實際]'이라고 함과 같이, 일체 번뇌망상은 피부가 탈락되듯이 다 끊어져 버리고 오직 진여본성의 뼈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모양이 초췌하다'는 것은 일체 망상의 모양이 다 끊어졌음을 말하고, '뼈가 단단하다'는 것은 금강반야가 현저하여 진여의 뼈가 단단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망정이 다 떨어져서 살활자재한 전기대용이 현저하여 거기서는 부처와 조사도 찾아볼수 없고 중생과 마구니도 찾아볼 수 없는 인상(人相)과 아상(我相)이 다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냥 사람의 모습이 야위고 뼈만 앙상해서 사람들이 보기 싫다고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알면 피상적일 뿐만 아니라 영가스님의 참 뜻과는 정반대가 되고 맙니다.
24. 궁색한 부처님 제자 입으로는 가난타 말하나
실로 몸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치 않음이라
궁석자구칭빈하나 실시신빈도불빈이라
窮釋子口稱貧 實是身貧道不貧
'궁색한 부처님 제자'라 하니 무엇이 궁색하다는 말인가? 돈이 없고 옷이 없고 쌀이 없고 또 무슨 물거이 없다는 말인가?
예전 스님네 하시는 말씀이 '도를 배우려면 마땅히 가난함부터 먼저 배우라[學道先須學貧]'고 하였습니다. 중생이란 그 살림이 부자입니다. 8만 4천석이나 되는 온갖 번뇌가 창고마다 가득가득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고마다 가득찬 번뇌를 다 쓰지 못하고 영원토록 생사윤회를 하며 해탈의 길을 걸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답게 도를 배우려면 8만 4천석이나 되는 번뇌의 곳집을 다 비워버려야만 하는 것이니 그렇게 할 때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8만 4천석이나 되는 번뇌를 다 내버리고 나면 참으로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이 되어서 텅텅 빈 창고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 뜻은 실지로 진공(眞空)을 먼저 깨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주 가난한 진공(眞空), 이것은 가난한 것도 없는데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도를 닦음에 있어서는 가난한 것부터 먼저 배우라는 것인데 그것은 번뇌망상을 먼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생이 망상의 살림살이를 버릴 것 같으면 진여자성이 진공(眞空)임을 알게 되는데 그것을 아는 사람만이 참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일체 번뇌망상이 다해서 영원히 가난해 버리면 한 물거도 거기 설 수 없어서 '몸은 가난하나 도는 가난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 스님네는 가난한 것을 말할 때, '작년에는 송곳 세울 땅도 없더니 금년에는 송곳마저 없다'[去年無錐地러니 今年錐也無로다]'고 하였습니다.
작년에는 번뇌망상을 버리고 또 버려서 송곳 세울 땅도 없을 만큼 모든 망상이 끊어져 가난해졌지만 끈어졌다는 그 놈, 송곳이라는 물건은 아직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 속에 있는 번뇌망상만 버리면 그만이지 금은보화는 도 닦는 이가 아무리 많이 가져도 상관없다는 말인가하고 혹 이렇게도 생각할런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도 참 좋은 말이지만 금은보화라는 패물을 가니고 있으면 재물에 대한 욕심이 늘 붙어 있어서 마음 속의 탐심을 버릴 수 없게 됩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탐심을 버릴려면 바깥에 있는 물질적인 금은보화같은 물건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당(唐)나라의 방거사(龐居士)는 자기의 그 많은 모든 재산을 배에 싣고 가서 동정호(洞庭湖)에 버리고서는 대조리를 만들어서 장에 갖다 팔아다가 나날의 생계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밖으로는 모든 물건까지도 다 버리는 동시에 안으로는 번뇌망상을 다 버리게 되면 안팎이 함께 가난하게 됩니다.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가난뱅이가 된다면 모든 것이 공해서 거기에는 항사묘용이 현저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곧 견성이며 성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안팎으로 가난한 것부터 먼저 배워야 합니다.
25. 가난한 즉 몸에 항상 누더기를 걸치고
도를 얻은 즉 마음에 무가보(無價寶)를 감추었도다
빈즉신상피루갈이요 도즉심장무가진이로다
貧則身常披縷褐 道則心臟無價珍
'가난한 즉 몸에 누더기를 걸친다'고 하는 것은 안팎이 함께 가난함을 말합니다. 안으로 번뇌망상이 다 떨어져서 탐심과 구하는 마음이 없어지니 밖으로야 무슨 금은보화가 필요하겠습니까?안과 밖이 함께 가난하면 어떻게 되느냐?
안과 밖이 함께 가난해서 철두철미하게 진공(眞空)을 성취하면 거기서 항사묘용의 다 쓸 수 없는 보고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도를 얻은 즉 마음에 값할 수 없는 보배'를 지니는 것입니다. 삼천대천세계가 아무리 크고 넓다하지만 설사 그것을 억천만개를 합한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무진장의 '값할 수 없는 보배'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들 마음 속에 천상천하에 비교할 수 없는 값진 보배를 가지고 있느니 만큼 하루 빨리 개척해서 그것을 마음대로 써야 할 것입니다.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난한 것부터 배워서 밖으로는 물질을 버리고 안으로는 번뇌망상을 버려야 합니다. 만약 욕심을 가지고 도를 얻으려는 사람은 말로는 동으로 간다고 하면서 몸은 서쪽으로 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수행자는 '도를 배우려면 먼저 가난한 것부터 배워야 한다'는 고불고조(古佛告祖)의 말씀을 철칙으로 삼아 공부해야 합니다. 그와 같이 수행하여 안팎이 가난해진다면 참으로 무진장의 값할 수 없는 보배를 얻어서 천하에 둘도 없는 큰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꼭 믿고 명심하여 대중들은 열심히 정진합시다.
26. 무가보는 써도 다함이 없나니
중생 이익하며 때를 따라 끝내 아낌이 없음이라
무가진용무진하니 이물응시종불인이라
無價珍用無盡 利物應時終不吝
이것은 우리 진여자성의 쓰임[用]을 말합니다. 일체만물을 이롭게 하고 일체시(一切時)에 응하여 쓰더라도 끝내 아끼는 것이 없어 영원토록 다함2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가?
27. 삼신,사지는 본체 가운데 원만하고
팔해탈 육신통은 마음 땅의 인(인)이로다
삼신사지는 체중원이요 팔해육통은 심지인이로다
三身四智 體中圓 八解六通 心地印
삼신(三身)이란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을 말하고 사지(四智)란 대원경지(大圓鏡地), 평등성지(平等性地),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를 말합니다.
삼신과 사지를 성취하면 이를 부처라 하는데, 우리가 마니주를 완전히 알아서 자성을 바로 깨치면 삼신, 사지가 원만구족해서 다시는 더할래야 더할 것이 없고 덜래야 덜 것이 없는 구경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값할 수 없는 보배는 써도 다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 어떤 사람은 '깨쳤다고 해서 삼신, 사지가 그대로 원만구족할 수 있나?'하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증지(證智)라는 것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고, 깨친 것 돈오(頓悟)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돈오(頓悟)를 한 사람은 삼신,사지가 원만구족 안할래야 안할 수 없습니다.
이런 좋은 마니보주를사람사람이 다가지고 있건만 이것을 모르고 깨쳐서 쓸려고 하지 않으니 이보다 한심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삼신,사지가 원만구족하면 팔해탈과 육신통이 그 가운데 다 갖추어 있다는 것입니다.
팔해탈은 진여해탈의 경계를 여덟가지로 분류한 것인데 각각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여의 대용인 줄 알면 됩니다. 육신통이란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신족통(神足通), 숙명통(宿命通), 타심통(他心通), 누진통(漏盡通)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마음에 체득을 해보아야 아는 것이지 말로만 해서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항상 '...이것은 무엇인고'를 부지런히 해서 자성을 하루 빨리 깨쳐야 합니다. 금강산이 좋다고 아무리 말해 주어도 '어디 그런 좋은 산이 있을라고! 거짓말이다.'하면서 가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원히 금강산을 보지 못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삼신, 사지와 팔해탈, 육신통이 구족한, 값할 수 없이 귀한 마니주가 사람 사람에게 다 있어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들이 모두 다 개발하여 다함이 없이 썼는데도, 이것을 믿지 않고 거짓말이라고 의심하다가 영원토록 성불하지 못하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중생그대로 남게 됩니다.
28. 상근기는 한 번 결단하여 일체를 깨치고
중,하근기는 많이 들을수록 더욱 믿지 않는도다
상사는 일결일체료하고 중하는 다문다불신이라
上士 一決一切了 中下 多聞多不信
참으로 영리한 상근기의 사람은 이런 좋은 법문을 한 번 들으면 일체가 이해되어 버려서 다시는 더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리하지 못한 중,하근기의 사람은 값할 수 없이 귀한 마니주가 자기 마음 가운데 있다고 입이 아프도록 말해 주어도 믿지를 않고 의심만 한다는 말입니다.관운장이 안량과 문추의 목을 베듯이 한꺼번에 해치워버려야지 이리저리 빙빙 돌면서 허송세월해서야 되겠습니까?
29. 스스로 마음의 때묻은 옷 벗을 뿐
뉘라서 밖으로 정지을 자랑할건가
단자회중해구의어니 수능향외과정진가
但自懷中解垢衣 誰能向外誇精進
신신명의 '참됨을 구하려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쉴 뿐이라[不用求眞唯須息見]'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마니주는 본래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데 오직 때 묻은 옷, 즉 번뇌망상 때문에 쓰지를 못하는 것이니, 때 묻은 옷을 벗어 버리듯이 번뇌망상,분별취사심만 쉬어 버린다면 그것을 쓴다해도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해가 시방세계 비치고 있지만 해를 보지 못하는 것은 구름이 가려 있기 때문입니다. 해를 억지로 볼려고 하지 않아도 구름만 걷히면 해는 저절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와 같이 오직 때묻은 옷만 벗어 버리고 망상을 쉬어버릴 뿐입니다. 도를 성취한다 하여 겉으로 육도만행을 한다 무엇을 한다 하여, 가지를 더듬고 잎이나 따는 등 공연히 쓸 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30. 남의 비방에 따르고 남의 비난에 맡겨두라
불로 하늘을 태우려하나 공연히 자신만 피로하리라
종타방임타비하라 파화소천도자피로다
從他謗任他非 把火燒天徒自疲
저 사람이 비방하고 욕하는 것을 가리지 말고 탓하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좋은 마니주가 있다고 입이 아프도록 말해줘도 도리어 반대하고 욕하는 것은 그 사람이 몰라서 그런 것이지 알고서는 그렇게 욕하고 비방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불을 들고 하늘을 태우려는 사람과 같이 헛되이 스스로만 피로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진여자성을 깨쳐서 마니보주를 얻어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고 성불한다는 이 법을 비방하는 사람은 아무리 자기가 비방하고 반대를 해 보아도 정법인 진여자성에는 아무런 방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법문을 비난하지않고 들어서 아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31. 내 듣기에 마치 감로수를 마심과 같아서
녹아서 단박에 부사의해탈경에 들어가도다
아문흡사음감로하야 소융돈입부사의로다
我聞恰似飮甘露 銷融頓入不思議
이 법을 모르는 사람은 욕을 하고 비방을 하지만 아는 사람은 남이 욕하고 헐뜯어도 마치 감로수를 마시는 것과 같아서 팔만사천가지 병이 눈깜짝할 사이에 다 나아버린다는 것입니다. 병이 나음과 동시에 삼신,사지와 팔해탈,육신통이 원만구족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중생이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할 수 없는 부사의 대해탈경계로 우리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상승 무상묘법을 듣고 비방만 하지 말고 부사의해탈경계에 들어가서 일체중생과 더불어 화장찰해(華藏刹海)에서 영원토록 자유자재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모르면 자꾸 비방하고 반대하는 것은 옛날이니 지금이나 같습니다. 부처님 당시도 그랬고 육조스님, 영가스님 당시도 그랬으며 현재도 그렇습니다. 이 불법(佛法)이란 것이 하도 신기하고 묘한 것이여서 중생이 알기 어렵고 믿기 어렵기 때문에 비방하고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들어서 영가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2. 나쁜 말을 관찰함이 바로 공덕이니
이것이 나에게는 선지식이 됨이라
관악언이 시공덕이니 차즉성오선지식이라
觀惡言 是功德이니 此則成吾善知識
부처님께서는 오역죄(五逆罪)를 짓는 것보다도 정법(正法)을 비방하는 비방하는 죄가 더 크다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오역죄를 지은 죄는 참회하면 다시 돌이킬 수 없지만, 정법을 비방하면 불법에 인연을 끊어 버려서 그 사람은 영원토록 성불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미워서 죄가 크다는 것이 아니라 정법을 비방하여 불법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릴 것 같으면 영원히 성불할 길이 막히기 때문에 죄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소한 욕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정법을 비방하는 큰 욕도 나에게는 큰 공덕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비방을 하고 욕을 하는 것도 조금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저쪽에서는 독을 주어도 이쪽에서는 감로수로 받아 마시면 그것이 오히려 살이 되고 뼈가 되어서 부처가 안될래야 안될 수 없고 자성을 깨치지 않을래야 깨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나에게 독을 준다고 나도 함께 독을 내놓으면 내 몸과 마음이 영원히 독이 되어 지옥만 깊어져 버리고 자성을 깨칠 수 없어 성불은 영원히 할 루 없게 됩니다. 저쪽에서 아무리 비방하고 욕을 하더라 해도 그 비방과 욕을 감로수로 삼아서 성불의 길을 걸어 가야지, 같이 상대를 해서 비방하고 욕하며 싸워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니 오히려 그것을 나의 선지식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33. 비방 따라 원망과 친한 마음 일지 않으면
하필이면 남이 없는 자비인욕의 힘 나타내 무엇할 것인가
불인산 방기원친하면 하표무생자인력가
不因[言山]謗起怨親 何表無生慈忍力
일반적으로 비방하면 원수가 되고 칭찬하면 친구가 되는데 도를 닦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수행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참으로 수행할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나를 아무리 비방하고 욕을 하더라 해도 거기에 얼마만큼 움직이느냐, 감로수로 받아 마시느냐 못마시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누가 비방을 해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마음을 기울이지 아니할 것 같으면 '하필이면 남이 없는 자비 인욕의 힘을 나타낼 것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남이 없는 자비 인욕의 힘'이란 구경법을 성취하면 발현되는 대자대비의 힘을 말하는데, 그렇게 되면 아무리 저쪽에서 나에게 해독을 끼치려고 해도 그것은 독이 아닌 은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부처님 말씀과 같이 '원수를 부모같이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내 듣기엔 마치 감로수를 마심과 같다'는 것은, 한편으론 내가 정법을 들을것 같으면 감로수를 마신 것 같아서 부사의해탈경계에 들어간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나를 욕하는 것을 들을 것 같으면 감로수를 마심과 같아서 부사의해탈경계에 들어간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욕하고 비방하는 것을 감로수처럼 받아 들인다'고만 하면 '걸왕을 도와 학정을 위한 것[助桀爲虐]'이 되지 않느냐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옛날 중국 은나라 마지막 임금에 걸왕(桀王)이 있었는데 학정이 심해서 마침내 쫓겨난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쁜 사람을 징계하지 아니하고 나쁜 짓들만좋게만 받아 들인다면 그 사람을 언제 고칠 수 있으며 점점 더 나쁘게만 만들지 않느냐 하는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자비로써 베풀며 어떤 때는 위엄으로써 다스려서 어떻게 하면 저 사람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쪽으로 자비만을 집착해 나가다 보면 오히려 저쪽에 해독을 주게 되어 버리는 그것은 참된 자비가 아닙니다.
그러므모 '비방을 받아도 원수를 맺지 않는다'든가 '남이 없는 자비 인욕의 힘'을 베푼다는 것도 무조건적인 자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위엄을 겸한 것을 말합니다. 한쪽으로만 국집하면 실지의 중도정견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대자대비를 성취한 불보살은 중생을 상대할 때 어떻게 하면 저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겠나 하는 생각 뿐입니다. 그래서 혹은 자비로써 대하기도 하고 혹은 위엄을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중생을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자비가 됩니다.
만약 자비를 베푼다 하여 그 자비가 일방적인 것이라면 도리어 중생에게 해로움을 끼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자비가 아니라 독인 것입니다. 자비와 위엄을 겸해야만 참다운 대자대비가 되어 중생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이지 자비만 주장하면 도리어 해를 줄 수 있습니다. 자비와 위엄을 보이는데 있어서도 자비의 위엄이 되어야지 추호라도 감정이 게재된 위엄이라면 자비가 아니라 중생에게 해독을 주는 것이므로 자비로써 근본을 삼는 위엄이 되어야만 '남이 없는 자비인욕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34. 종취도 통하고 설법도 통함이여
선정과 지혜가 뚜렷이 밝어 공에 응체하지 않는도다
종역통설역통이여 정혜원명불체공이로다
宗亦通設逆通 定慧圓明不滯空
자성을 확철히 깨쳐서 구경각을 성취하여 중도를 체달한 것을 '종취를 통한다[宗通]'고 말합니다. '종취를 통하여'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하면 중생을 위해서 한량없고 걸림없이 설법을 할 수 있는 변재가 발현되는 것이니 이것을 '설법도 통한다[設通]'고 말합니다. 그러면 일대시교(一代時敎)를 꼭 보아야 하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육조스님과 같이 무식하여도 '종취를 통함'이 확철하면 사람에 그림자따라 가듯이 '설법도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취를 통하는 것과 설법을 통하는 것을 둘로 나누냐? 아무리 종취를 통했다 하여도 중생을 위하고 중생을 상대로 하지 않는다면 설법을 통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불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중생을 위한 것일 뿐 결코 자기 개인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 개인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니, 누구든지 확철히 깨쳐서 일체종지를 성취한 뒤에는 반드시 '설법을 통해서' 일체중생을 교화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종취와 설법을 완전히 통해 버리면 '선정과 지혜가 뚜렷이 밝아 공에 응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든 중생은 있음[有]에 많이 집착하게 되는데, 그 있음[有]을 부수어서 있음[有]이 소멸되면 또 어떤 병이 생기냐 하면, 공에 집착하는 공병이 생기게 됩니다. 공에 집착하여 머물러 있으면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은 무애자재한 구경법을 성취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래서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으려면 반드시 공적(空寂)한 제팔 아뢰야 무기공(無記空)까지 타파하여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은 대자재(大自在)는 절대로 성취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바로 깨쳐서 종취와 설법을 함께 통달하여 무애자재하게 되면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아 차조동시(遮照同時)가 되어서 공(空)에 머물래야 머물 수 없습니다. 공에 머무름이 없는데 있음[有]에 머무름이 없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니, 공(空)과 있음[有]을 초월하면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아 구경법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35. 나만 이제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
수 많은 부처님 본체는 모두 같도다
비단아금독달료요 하사제불체개동이로다
非但我今獨達了 河沙諸佛體皆同
자성을 확철히 깨쳐 진여본성을 확실히 알아서 정각을 성취한 이 경계는 나 혼자만 지금 통달한 것이 아니요, 간지스 강의 모래 알 같이 수많은 모든 부처님들의 본체도 모두 다 똑 같다는 것입니다. 종취를 통하고 설법을 통하여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은 이 경계는 남녀노소를 묻지않고 깨치면 모두가 같은 부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 말하기들 자고로 불(佛)자 붙은 사람은 사바세계에서 석가모니불 한 분 뿐인데 그 뒤에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제팔 아뢰야 근본 무명을 완전히 끊고 쌍차쌍조하여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은 중도를 성취하면 그 사람이 부처[佛]이지 따로 부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래알 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들도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은 것은 똑같아서 그 본체가 둘이 아닌 것입니다.
36.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뭇 짐승들 들으면 모두 뇌가 찢어짐이라
사자후무외설이여 백수문지개뇌열이라
獅子吼無畏設 百獸聞之皆腦裂
사자는 백 가지 짐승 가운데서 가장 무섭고 위엄있는 짐승으로서 한번 표효하면 모든 짐승들이 무서워 벌벌 떤다고 합니다. 최상승인 자성을 바로 깨쳐 중도를 정등각한 사람의 법문을 '사자후'라고 하고 '무외설'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짐승 가운데서는 사자가 가장 높아서 위가 없듯이 불법 가운데서는 밝은 그 도리를 체달한 그 사람이 최상이기 때문이니, 그 사람의 법문을 '사자후'라 하고 '두려움없는 설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자가 한 번 소리 지르면 백 가지 짐승들의 머리가 터져 죽어 버린다'는 것은 부처님의 '두려움 없는 설법' 한 마디에 일체 중생의 모든 무명이 끊어져 버리고 자성을 깨쳐 성불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중생의 모든 업장이 다 녹아 버리고 근본 무명이 다 끊어져 버려서 중생이라는 것은 완전히 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위 없는 법문을 듣고 발심해서 이 법을 따라 오면 결국에는 중생을 볼래야 볼 수 없고 성불 안할래야 안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머리가 터져 버린다'는 것은 중생이 모두 다 성불해 버린다는 말이지 그냥 죽어 버린다는 말이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37. 향상은 분주하게 달아나 위엄을 잃고
천룡은 조용히 듣고 희열을 내는도다
향상은 분파실각위하고 천룡은 적청생흔열이로다
香象 奔波失却威 天龍 寂聽生欣悅
향상(香象)은 성문(聲聞), 연각(緣覺)과 같은 이승(二乘)을 비유한 것입니다. 짐승 가운데서도 코끼라 하는 것은 덕이 높고 기운이 세어 지위가 높은 짐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생 가운데서도 성문이나 연각같은 사람들을 보면 지위가 좀 높지만, 이 '사자후'를 들을 것 같으면 분주하게 달아나서 위엄만 잃고 망연자실해서 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천룡(天龍)이란 천상인(天上人)이나 용왕같이 무애자재한 능력을 가진 이들을 비유해서 말한 것입니다. 향상(香象)은 발로써 땅 위를 걸어 다니기만 하지만 천룡은 부처님이나 대보살들처럼 큰 자유는 업지만 부분의 자유는 있습니다. '천룡이 조용히 듣고서 환희심을 낸다'는 것은 '이 무상대법을 듣고서 일체 중생이 이 법에 의지해서 한 날 한 시에 일체 종지를 성취케 하여지이다'하는 큰 서원을 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며 또 무상대법을 의지해서 공부를 하는 누구나가 성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에서는 백 가지 짐승들이 사자후를 듣고 머리가 깨져서 죽듯이 중생이 '무외설'을 듣고 망상을 모두 끊고서 성불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향상이 무슨 죄가 있어서 제도를 받지 못하나 하는 것입니다. 향상은 불법 가운데 있기는 하나 정법에 바로 들어 오지는 못했으므로 '사자후'를 듣고서는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룡처럼 어느 정도까지 자유를 가진 사람들은 끝내 중도에 들어 오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결국 향상도 천룡과 마찬가지로 모두 백수(百獸)들인지라사자가 한 번 소리지르면 모두 머리가 터지는 것이니, 머리가 터져서 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역시 모두 성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8. 강과 바다에 노닐고 산과 개울을 건너서
스승 찾아 도를 물음은 참선 때문이라
유강해섭산천하야 심사방도위참선이라
遊江海涉山川 尋師訪道爲參禪
강과 바다를 건너고 태산과 개울을 넘어서 공부하러 다닌다는 말입니다. 공부하는데 있어서 그냥 가만히 앉아 있다고 저절로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니고, 공부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천리만리를 멀다하지 아니하고 넓은 바다를 넓다하지 않으며 높은 산 넘기를 겁내지 않고 스승을 찾고 도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어떤 고생이 있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대법을 위하고 불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몸을 돌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 스님들이 공부를 위해 이와 같이 몸을 돌보지 아니한 예를 몇가지 들어보고자 합니다.
설봉(雪峰)스님이라면 천하에 유명한 분입니다. '세 번 투자산에 가고 아홉 번 동산에 갔다[三到投子九至洞山]'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투자산과 동산과의 거리는 오륙천 리나 되는 거리인데 그런 먼 길임에도 세 번이나 투자를 찾아가고 아홉 번이나 동산을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멀고 먼 길, 아무리 험하고 높은 산일지라도 멀고 험하다고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도를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했다는 것입니다. 설봉스님은 암두(岩頭)스님과 흠산(欽山)스님과 더불어 세 분이서 항상 도반이 되어 함께 다녔습니다. 설봉스님은 어디를 가든지 공양주만 하여서 쌀 이는 조리를 늘 가지고 다녔고, 암두스님은 어디를 가나 항상 채소 밭을 가꾸는 원두(園頭)만을 보아서 괭이와 호미를 늘 가지고 다녔으며, 흠산스님은 어디를 가나 바느질만 해서 실뭉치와 바늘을 늘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셋이서 어느 처소에 가든지 설봉스님은 공양주만 맡아서 대중의 공양을 지어 올리고, 암두스님은 채소밭을 가꾸어서 대중의 반찬을 해올리고, 흠산스님은 온 대중의 바느질이란 바느질은 전부 도맡아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셋이서 도반을 지어 천하를 다니면서 공부하여 마침내 세 분이 다 공부를 성취하여 후세에 모범적인 대도인들이 되었습니다. 선문염송(禪門拈頌)에 보면 이 세 분 스님들의 무서운 법문들이 많이 나옵니다.
선종사에 있어서 최초로 대중을 많이 거느린 스님이 설봉스님인데 평생에 늘 천오백명 이상의 대중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그때는 선종초기로서 중간에 와서는 더러 이삼천 명의 많은 대중을 거느리는 총림도 있었지만 초기에는 그렇게 많이 모여 살지를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선이 제대로 보급이 되지 않기도 했지만 선만 전문으로 하는 처소도 거의 없었습니다.
설봉스님은 일천오백 명 대중을 보고 늘 하는 말씀이, "너희 일천오백 명 대중이 모두 나의 이 조리 속에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복혜쌍수(福慧雙修)를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참으로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공양주를 많이 했기 때문에 대중들이 많이 모이는 이런 복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공부하는데 있어서 한편으론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간다'는 최상승의 공부를 바로 지어가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들이나 중생들을 섭수하는 방편으로써 중생의 생멸복인 추복([鹿+鹿+鹿: 거칠 추]福)이 아닌 청복(淸福)을 설봉스님이 공양주를 하며 닦아 가듯이 닦아 가야만 원만한 법을 성취할 수 있다고 예전 큰 스님네들이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강과 바다를 건너고 산천을 밟고 다녀도 설봉스님과 같이 발심해서 법을 위해 몸을 돌보지 않는 사상을 가지지 않는다면 산이나 보고 물이나 구경하는 유람꾼이지 참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유람꾼이 되지 않고 진정한 구도자가 되려면 설봉스님처럼 법을 위해 몸을 잊어버리는 철두철미한 발심을 해야 합니다.
나는 요사이 발심해서 공부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전부가 유람꾼들 뿐입니다. 해제(解制)하기가 바쁘게 "이 번은 어느 산을 구경할까? 어느 섬을 가보고 싶네!"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산이나 놀러 다니고 물 구경이나 하는 사람들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야 하는 것이니 그와 같은 한가로운 유람꾼이 되어서는 어느 시절에 대도를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공부하는 근본 자세는 나[我]라는 생각을 버려 버리고 제방으로 지도자를 찾아가서 철저한 지도를 받을 수 있도록 되야지, "너나 내나 똑같은데 네 말을 들을 것이 뭐 있나!" 하는 아만으로 가득차 공부할 것 같으면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옛날 오대산에 구정조사(九鼎祖師)라는 큰스님이 계셨는데 그 스님의 부도(浮圖)가 지금도 월정사 옆에 있습니다. 재작년 겨울에 그곳에 가서 내가 보았습니다. 어째서 구정조사냐 하면, 북대(北坮)에 무념(無念)이라는 큰스님이 계셨는데 구정조사는 무념스님이 큰스님이라는 말을 듣고 도를 배우러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공부에 대해서는 한 마디 일러주지도 않고 "밥 해 먹는 솥이 잘못 걸렸는데 이 솥을 한 번 잘 걸어보아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구정조사가 보니 솥은 반듯하게 잘 걸려 있는데 어째서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큰스님이 솥이 잘못 걸렸다고 다시 잘 걸라고 하시니 할 수 없이 전부 뜯어 가지고 다시 정성껏 솥을 잘 걸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솥을 다 걸었습니다."
고 여쭈었더니, 큰 스님이 보시고 화를 벌컥 내시면서
"이리 걸면 안돼! 다시 걸어라."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새로 솥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또,
"틀렸어. 다시 걸어라!"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리도 걸어보고 저리도 걸어봐도 다 툇짜를 맞았습니다. 이러기를 아홉번을 되풀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솥을 아홉번 옮겨 걸었다고 하여 '구정(九鼎)스님'이라 하였습니다.
큰스님의 뜻은 솥을 잘 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놈이 나를 찾아와서 믿고 공부를 배우겠다고 하니 내 말을 어느 정도 복종하고 듣느냐는 것을 시험하기 위해서 일부러 트집을 잡아서 솥을 아홉 번이나 걸게 해 보았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같으면 한두 번 걸고 나서 다시 걸라고 하면 "저 스님 정신 나간 모양이야. 이렇게 반듯한 솥을 자꾸 다시 걸라고 하니 누가 믿겠어!"하고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달아나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구정선사는 그런 생각이 아니고
"오직 내가 저 스님을 믿고 왔으니 어찌 됐든지 저 스님시키는 대로 무조건 복종해서 도를 배우는 것이 목적이지 이까짓 솥을 천 번 걸고 만 번 걸라한들 나에게 무슨 상관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도(道)를 배움에 있어서 나[我]라는 생각은 모조리 내버리고 오직 법은 위해 내 몸을 돌보지 않는 발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발심한 이에게는 어떤 욕을 하고 어떤 고통을 주어도 감내 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정선사는 그 큰 스님 밑에서 공부를 성취하여 유명한 '구정조사'가 되었고 이것이 천추만대로 도를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구정조사와 같은 그런 발심과 신심으로 참선하러 다녀야지 다만 조금이라도 아상(我相)을 가지고 다닌다면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 공부하러 다니는 사람이 아니고 산에나 놀러 다니고 물 구경이나 다니는 유람꾼이지 '스승을 찾고 도인을 방문하여 참선하는 태도'는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출가하였으면 참으로 공부인이 되어야지 유람꾼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운문종(雲門宗)의 개조(開祖)인 운문스님의 일입니다.
그 당시 황벽스님의 제자되는 목주(睦州)스님이 유명한 큰스님이라는 말을 듣고 찾아 갔습니다. 목주스님은 대중을 거느리지도 않고 짚신이나 삼으면서 조그마한 허물어져가는 토굴에 살았는데, 토굴 주위를 높게 담을 쌓고 대문을 만들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걸어 잠그고 그 안에서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운문스님이 그 토굴로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니 목주스님이 방문을 열고 나오면서,
"누구냐?" 하니, 엉겁결에
"운문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너 뭐하러 여기 왔느냐?"
"제가 스님을 찾아 뵈옴은 도를 배우기 위해서 입니다."
목주스님이 대문을 열자 운문스님이 토굴 안으로 들어가려고 발을 밀어 넣으니 목주스님이 운문스님의 멱살을 콱 움켜잡고는,
"한 마디 말해 보라, 한 마디 말해 보라"
고 다그쳤습니다. 그렇게 다그침에도 운문스님이 아무 말도 못하자 목주스님이 뒷 등덜미를 콱 밀어 부치면서
"산 송장놈이 왔구나! 문은 왜 두드려..."
하고 투덜대면서 문을 잠그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날은 그렇게 쫓겨나고 그 이튿날 또 목주스님을 찾아갔으나 어제와 같이 한 마디 대답도 못하고 쫓겨 나기만 했습니다. 사흘째 가서는
"오늘은 어떻게 해서라도 문전에서 쫓겨 나지 않고 기어이 토굴에 들어가고 말리라."고 결심하고 다시 목주스님을 찾아 갔습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목주스님이 문을 열자 "한 마디 말해보라"는 운도 떼기 전에 운문스님이 문안으로 발을 들이 밀고 들어가려고 하자 목주스님은 있는 힘을 다하여 문을 닫아 버리니 그 사이에 운문스님의 다리가 문틈에 끼어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어찌나 아프던지 [악!]하고 소리치는 그 순간에 확철히 깨쳤습니다. 그리하여 다음에 운문종의 개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법을 위하여서는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오직 도를 성취할 생각만을 할 뿐이지 다리 부러지고 머리터지는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하여서 운문스님은 대조사가 되었는데, 그렇지만 평생 내내 절름발이로 다리를 절룩이며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종문(宗門)에서는 운문스님의 절름발이와 이조 혜가스님이 팔을 베어 도를 구한 일은 법을 위해 몸을 잊어버리는 좋은 일화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비록 일부러 부뚜막을 헐고 솥을 새로 걸고 다리를 부러뜨리고 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구정조사가 한만큼은 못한다해도 공부하는 사람은 아상(我相)을 근본적으로 내버려야 합니다. 다만 조금이라도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다니면 어느 곳을 가던지 서로서로 상대가 되어 싸움만 했지 이익은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스승을 찾고 도인을 뵙고 참선하는 사람도 못되고 산천구경하는 유람꾼만 되는데, 그것도 산만 보고 강만 보고 놀러 다니는 사람이면 그래도 일 없는 한가한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아상(我相)을 가지고 돌아 다니면 어디를 가나 시비꾼만 되고 불집을 일으키는 싸움꾼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를 구하려 공부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단단히 가져 법을 위해 내 몸을 돌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나[我]를 버리고 살아야 함을 우리 깊이 명심합시다.
39. 조계의 길을 인식하고 부터는
생사와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자종인득조계로로는 요지생사불상간이로다
自從認得曹溪路 了知生死不相干
영가스님이 어릴 때부터 출가해서 공부를 하여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확철히 정각을 이루지 못했다가, 현책(玄策)의 권유에 따라서 육조스님을 찾아뵙고 법문 끝에 확철히 깨쳤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조스님을 찾아가서 조계의 길을 확철히 깨쳐 얻어서 생사가 서로 관계없음을 밝게 알았다는 것입니다. 생사를 해탈하여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무애경계를 증득한 것은 많이 노력한 곳에서 얻어진 것이지 게으르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곳에서 이루어진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스승을 찾고 도를 물어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얻어진 것입니다. 영가스님도 그렇게 육조스님을 찾아가서 확철히 깨쳐 영원히 생사와 상관없는 해탈의 길을 얻었던 것입니다.
40. 다녀도 참선이요 앉아도 참선이니
어묵동정에 본체가 편안함이라
행역선좌역선이니 어묵동정체안연이라
行亦禪坐亦禪 語默動靜體安然
다녀도 참선이고 앉아도 참선이니 말하거나 묵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언제든지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아 본체가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흔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나는 지금 깨치지 못했어도 가나 오나 화두가 그대로있으니 가도 선이고 앉아도 선이 아닌가! 말하거나 말하지 않거나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화두가 그대로 있으니 이것이 참선 잘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런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참선이 아니라 전체가 망상입니다.
선이란 일체 망상을 떠나서 오매일여(寤寐一如)한데서 확철히 깨쳐 대원경지가 현발되어야 합니다. 자성을 완전히 깨쳐서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은 경계가 참으로 선이지 그전에는 전체가 망상인 줄 알아야 합니다. 화두가 조금 잘 된다고 참선 잘 하는 줄 알아서는 천부당 만부당이니 그 사람은 망상 피우는 사람이지 참선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선방에 앉아서 화두한다고 해도 망상하는 것이지 참선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자성을 깨친 뒤부터가 실제 참선이지 깨치기 전에는 참선이 아니고 망상인 줄알아야 합니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원오스님이 확철히 깨치고 나니 오조 법연(五祖法然)선사가 대중들에게 "내 시자(侍者)가 오늘부터 참선할 줄 안다[我侍者參得禪也]"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성을 깨친 뒤부터가 실제 참선이지 확철히 깨치기 전에는 선이 아니라 모두가 망상(妄想)인 줄 분명히 알아서 경계에 속지 말아햐 합니다. 제팔 아뢰야 무기식(無記識) 경계에 있으면 대무심지에 있는 것 같아서 어느 정도 자재하지만 그것은 크게 죽은 것이고 아직 살아나지 못한 것이므로, 옛 스님들은 그 경계가 공부를 마친 것으로 잘못 알기 쉽다고 하여 제팔마계(第八魔界)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이란 것은 제팔 아뢰야의 무기무심까지도 벗어나 대원경지가 현발한 그 때가 비로소 선인 것입니다.
영가스님이 선이라고 하는 것은 조계의 길을 깨쳐서 구경각을 성취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구경각을 깨치고 보니 가거나 오거나 앉거나 서거나 말하거나 말하지 않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간에 선이 아닐래야 아닐 수 없으니 그 때가 무애자재한 열반의 길에서 노니는 때이며 이것이 선이라는 말입니다. 선(禪)과 망(妄)을 구별해야지 화두한다고 하면서 선방에 앉았다고 다 참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나 오나 앉거나 서거나 말하거나 묵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간에 모두가 진여대용이 되는 때가 참으로 참선하는 때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41. 창,칼을 만나도 언제나 태연하고
독약을 마셔도 한가롭고 한가롭도다
종우봉도상탄탄하고 가요독약야한한이로다
縱遇鋒刀常坦坦 假饒毒藥也閑閑
도를 성취하면 칼과 창으로 목을 천번 만번 끊는다 해도 항상 태연하여 조금도 겁낼 것이 없어 대자유자재하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구마라습(九摩羅什) 스님의 제자에 승조(僧肇)법사라는 분이 있었는데, 구마라습스님의 뛰어난 제가가 열 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사철(四哲)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승조법사의 자격과 재질이 특이하고 뛰어났으므로 그당시 요진(姚秦) 나라 임금이
"승조법사를 환속시켜 재상으로 삼으면 천하가 요순세계로 돌아가 태평시절이 될 것이다."고 생각하고 구마라습스님에게도 청하고 승조법사에게도 간청을 하였습니다.
"스님 머리를 기르고 재상이 되어 정치를 한다면 천하에 명 재상이 되어 백성들이 편안할 것이니 환속해서 부디 재상직을 맡아 주시오" 하니, 승조법사가 끝내 허락하지 않고서
"재상이 다 무엇이냐! 일국의 재상이란 꿈 속의 꿈이고 어린애 잠꼬대같은 소리다. 나는 무상대도를 얻어 영원토록 자유자재하여 일체 중생을 위해 살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아무리 권해도 듣지 않으므로 마침내 옥에 가두어 버리고 "끝까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고 위협하여도 막무가내였습니다. 나중에 정말 왕이 죽이려고 하니 승조법사께서 "나를 꼭 죽일려면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하고는 그 동안에 [보장론(寶藏論)] 한 권을 지었습니다. 일명 [조론(肇論)]이라고도 하는데, 그 문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불법의 진리가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책입니다. 우리 팔만대장경에도 들어있는 책입니다. 일주일 뒤에 형틀에 올려놓고 죽이려 하니 게송을 읊었습니다.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음이요
오음은 본래 비었음이라
머리를 흰 칼날 아래 내미니
마치 봄 바람을 베는 것 같도다.
[四大元無主요 五陰本來空이라
將頭臨白刀하니 猶似斬春風이로다]"
자기로서는 사대가 주인이 없고 오음이 본래 비어 일체가 다 공함을 깨쳐서 불생불멸하고 쌍차쌍조한 대도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허공은 열번 쪼개고 부술 수 있어도 자기는 죽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뚱이는 죽는 것 같지만 실지로 자기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이며, 자성을 확철히 깨쳐서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칼로 천번 만번 내리쳐도 자기한테는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창과 칼을 만날지라도 항상 탄탄하다'는 것은 승조법사의 이러한 경계를 말한 것입니다.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는 뜻만이 아니라 자성을 깨치면 영원토록 손익이 없고 생멸이 없는 경계를 '항상 탄탄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내 목에 칼을 맞는 것이 봄 바람을 베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독약을 먹는 것은 어찌 되느냐?
달마스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달마스님 당시에 보리유지삼장(菩提流支三藏)과 광통율사(光統律師)는 승단 가운데 뛰어난 스님들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달마대사와 토론을 벌려 시비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달마대사가 고준하게 법을 설하여 중생들에게 크게 덕화를 끼침을 보고 다투어 해치려는 마음을 내어 자주 독약을 음식에 넣었습니다. 어떨 때는 독약을 먹고나서 토하니 비위가 갈라지더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렇게 여섯 번이나 독약을 드셨는데 그 여섯번째에 이르러서는 세상에 교화할 인연도 다하였고 법을 전할 혜가 스님도 만난 뒤였으므로 독약을 드시고 조용히 앉아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때는 후위(後魏)의 여덟째 임금인 효문제(孝文帝) 태화(太和) 19년 (서기 495년)이었다고 합니다. 웅이산(熊耳山)의 오판(吳板)에서 장사 지내고 정림사에 탑을 세웠습니다.
그 뒤로 삼년 만에 위(魏)나라의 송운(宋雲)이라는 이가 서역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총령(蔥嶺)에서 달마대사를 만났는데 손에 짚신 한 짝을 들고 훌훌히 혼자 지나가시므로 송운이 물었습니다.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서천으로 돌아가오. 그대의 나라 천자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오." 송운이 이 말을 듣고 돌아와 보니 과연 문제(文帝)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송운이 이 사실을 자세히 보고 하므로 황제가 광(壙)을 열어 보게 하니 빈 관속에는 정말 짚신 한짝만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달마스님이 모르고서 여섯번이나 독약을 드셨느냐 하는 것인데 모르고서 드셨다고 하면 달마스님이 아닙니다. 알고도 드신 것입니다. 여섯번째 가서는 세연(世緣)이 다했음을 아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보통 볼 때는 독약에 돌아가신 것으로 보겠지만 세연이 다해서 자신이 독약을 드시고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그 뒤에 신짝 하나를 들고 총령을 넘어갔으니 그것을 죽었다고 해야될 것입니까, 살았다고 해야 될 것입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러한 대자유한 경계를 체득한 사람, 바로 깨친 사람, 다녀도 참선이요 앉아도 참선이요 어묵동정에 본체가 편안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칼날도 소용없는데 무엇을 겁내고 무엇을 무서워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무서운 칼날에도 항상 태연하고 독약에도 한가로워 독약을 꿀같이 보고 칼날도 꽃같이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확철히 깨쳐서 자유자재한 사람의 행리처(行履處)요 생활인 것입니다.
42. 우리 스승께서 연등불을 뵈옵고
다겁토록 인욕선인 되셨도다.
아사득견연등불하고 다겁에 증위인욕선이로다
我師得見燃燈佛 多劫에 曾爲忍辱僊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과거 도를 위해 공부하시던 전생담입니다. 그 인행(因行)시에 연등불이 마침 진흙 위를 지나가시게 됨을 보고 자기의 머리를 풀어서 그 진흙 위에 깔아서 발에 흙이 묻지 않고 지나가시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머리 푼 공양의 공덕으로 연등불께서 수기를 주셨는데,
"네가 미래세에 부처가 되어 이름을 석가모니라 하리라" 하셨습니다. 위 귀절은 그 전생담을 인용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느냐 하면 공부를 하려면 하심(下心)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철저하게 하심하는 신심과 발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머리를 풀어 부처님이 밟고 지나가도록 한 것은 참으로 아상(我相)이란 하나도 없고 오직 구도심, 신심 하나만 가지고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의 머리를 풀어서 밟고 지니가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내가 대자유자재한 공부를 성취한 것도 이런 하심을 했기 때문이라는 영가스님의 말씀입니다.
선(僊)은 곧 선(仙), 신선이란 말이니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신선이 아니고 성불한 것을 신선이라고 하니 부처님을 대금선(大金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사해탈하여 자유자재한 것을 선(仙)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연등불을 위해 진흙땅에 머리를 풀어 공양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다겁동안 인욕의 선인이 되어 공부를 했기 때문에 성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리왕 때의 일입니다.
산중 토굴에서 공부를 하고 있자니 그 때 가리왕(哥利王)이 신하들과 궁녀들을 많이 거느리고 사냥을 나왔다가 인욕선인의 토굴있는 데로 오게 되었습니다. 가리왕이 사냥을 하고 있는 동안에 궁녀들이 산책하다 보니 스님 한 분이 토굴 속에서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앉아 있는데 그 모습이 하도 거룩해서 숭배심이 일어나 그 앞에 가서 모두 예배를 드리고 또 드리며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가리왕이 사냥에서 돌아와 보니 자기가 총애하는 궁녀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것들이 다 어디로 갔나?" 하면서 찾아보니, 남루한 옷을 입고 토굴에 앉아 있는 스님을 보고 에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가리왕은,
"저 놈이 내 계집들을 다 빼앗아 가려고 한다"고 생각하고는 그만 분한 마음을 내어서 그 인욕선인을 잡아가 사지를 마디마디 잘라 고통을 주며 죽여버렸습니다. 그 때 인욕선인이 만약 아상(我相)이나 인상(人相)이 조금이라도 붙어 있었더라면 참으로 원한심을 품었을 것이고 그것이 원결이 되어서 세세생생으로 호랑이가 되든지 칼이 되든지 해서 가리왕을 뜯어 먹거나 찌르든지 하여서 원수를 갚으려고 자꾸 달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직대도를 위하고 법을 위해 몸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거기에 무슨 원수라든가 한이 맺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어도 조금도 원한이 없이 인욕선인 노릇을 하며 많은 겁을 닦아 내려왔기 때문에 오늘 내가 확철히 깨쳐서 부처도 되고 조사도 되고 하는 것이지, 공연히 일조일석에 조그마한 생각을 가지고 공부한다며서 쓸 데 없이 이 길 저 길을 오가며 산이나 보고 물이나 구경하고 다녀서는 절대로 공부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스승을 찾아 도를 묻기 위해 위법망구(爲法忘軀)하는 철두철미한 신심으로써만 공부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성취하면 다녀도 선 앉아도 선이며, 칼을 만나도 꽃잎과 같고 독을 마셔도 꿀을 먹는 것 같이 대자유자재한 경계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43. 몇 번을 태어나도 몇 번이나 죽었던가
생사가 아득하여 그침이 없었도다
기회생기회사오 생사유유무정지로다
幾廻生幾廻死 生死悠悠無定止
우리가 무엇 때문에 법을 위해 몸을 잊어 버려야 하고, 마디 마디를 토막내는 그런 욕을 참아가면서 공부를 해야 되며, 도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도는 우리들의 생사윤회의 세계는 억천만겁토록 사생육도를 이리 돌고 저리 돌아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말할 수 없는 고(苦)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수억겁의 생사를 해탈하려면 반딧불 같은 조그마한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인욕선이 되어 가리왕의 고(苦)도 받고, 어떤 때는 연등불에게 하듯이 하심(下心) 공양도 하고, 어떤 때는 혜가스님처럼 눈 속에 서서 팔뚝을 자르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운문스님처럼 다리도 부러뜨리는 식으로 법을 위해 몸을 바치는 그러한 노력과 공부가 있어야만 참으로 억천만겁의 생사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노력한 수행의 결과는 무엇인가?
44. 단박에 깨쳐 남이 없음을 요달하고 부터는
모든 영욕에 어찌 근심하고 기뻐하랴.
자종돈오료무생으로 어제영욕하우희아
自從頓悟了無生 於諸榮辱何憂喜
확철히 깨쳐서 남이 없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요달하여 일체경계에 대무심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돈오(頓悟)라 하면 흔히 이치는 알았으나 객진번뇌는 전과 다름이 없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생멸이지 돈오가 아니며 무생이 아닙니다. 돈오(頓悟)란 제팔 아뢰야 무기무심을 완전히 끊은 대원경지의 무생(無生)을 말합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돈오하여 무생법인을 증득하면 어떻게 되느냐?
영광스러움과 욕됨에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기뻐하겠습니까? 영화로운 일이든지 욕된 일이든지 근심하거나 기뻐한다는 것은 전부다 생멸 변견에서 하는 일이며, 돈오해서 무생을 증득하면 변견을 여의고 중도를 정등각한 것이므로 그때에 있어서는 영화로움과 욕됨과 근심과 기쁨이 완전히 떨어진다는 것이니, 곧 양변이 다 떨어져다는 말입니다. 여기 와서는 혹은 앉고 혹은 서더라도 절대로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야만 자유가 있는 것이지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면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오하여 무생(無生)을 밝혔다는 것은 구경각을 말한 것이며, 구경각을 성취하면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팔풍(八風)에 움직이지 아니하며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열반로에서 놀며 절대로 생사의 길은 밟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사없는 열반로에서 어떻게 사느냐?
45. 깊은 산에 들어가 고요한 곡에 머무니
높은 산 그윽하여 낙락장송 아래로다.
입심산주란야하니 잠음 유수장송하로다
入深山住蘭若 岑[山+金]幽邃長松下
깊은 산중에 들어가 토굴 생활을 하니 산은 첩첩하고 물은 깊으며 낙낙장송 우거진 심산유곡에서 새소리 물소리 들으며 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46. 한가히 노닐며 절 집에서 조용히 앉았으니
고요한 안거 참으로 소쇄하도다
우유정좌야승가하니 격 적안거실소쇄로다
優遊靜坐野僧家 [門+臭]寂安居實蕭灑
그러면 도를 깨친 사람이 깊고 깊은 산중에서만 사는가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산중에 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들녘에 나와 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야승가(野僧家)란 서울 한 복판에 살기도 하고 인연 따라서 여기도 자고 저기도 가면서 자유자재하게 생활함을 말합니다. 도를 깨쳐 대자재를 얻은 사람은 아무리 깊은 산중에 있다 하여도 적적함이 없어 분주한 도시에 있는 것과 같고 아무리 분주한 도시 가운데 있다 해도 저 심산 궁곡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해야 진실로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는 것이지 깊은 산중에 들어가면 조용해서 마음이 편하고, 도시에 나가면 분주해서 싫다면 실로 바로 깨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되면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지 진실로 자유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47. 깨친 즉 그만이요 공 베풀지 않나니
모든 유위법과 같지 않도다
각즉료불시공이니 일체유위법부동이로다
覺卽了不施功 一切有爲法不同
깨치면 그만이어서 다시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병이 다 나으면 약이 더 필요 없듯이 확철히 깨쳤는데 무슨 공부를 다시 더 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환자는 병이 다 나은 사람이 아니듯이 선가에서는 십지,등각(十地,等覺)도 환자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깨쳤다 하는 것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해서 중도를 정등각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병이 다 나아 약이 더 필요없게 된 것이므로 거기서 공부를 더 한다는 것은 우수운 소리가 되고 '베움이 끊어진 한가한 도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돈오(頓悟)했는데 점수(漸修)할 것이 있다면 이것은 돈오가 아닌 것입니다. 무생(無生)을 증해 버린 여기서는 모든 유위법과는 달라서 참으로 무위법도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위법이란 유위법에 상대한 무위법이지 바로 깨친 사람에게는 유위,무위가 다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위법도 상관하지 않는데 유위법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전 스님들은 목우(牧牛)하느니 보임(保任)을 하느니 하는 것은 모두가 대자재한 경계에서 하는 말이지 아직 약을 쓸 필요가 있고 닦을 데가 있어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닦을 것이 있다면 이것은 유위법입니다. 깨치면 전체가 다 끝났기 때문에 절대로 후수(後修)가 없습니다. 마조스님과 꼭 같이 후수(後修)가 없는 것입니다.
48.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하늘에 나는 복이나
오히려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도다
주상보시는 생천복이나 유여앙전사허공이라
住相布施 生天福 猶如仰箭射虛空
남에게 쌀 한 움큼 주고 돈 한 푼 주고 옷 한 가지 주는 것이 좋은 일임에는 분명하나, 모양[相]이 있는 유위법으로는 그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천상락은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니, 꼭 천상에 가야만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과보로써 좋은 행복을 누리게 되면 그것이 천상락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복은 한정이 있는 것으로서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49. 세력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내생에 뜻과 같지 않은 과보를 부르리로다
세력진전환추하니 초득래생불여의로다
勢力盡箭還墜 招得來生不如意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행복을 누리더라도 한정이 있기때문에 허공에 쏜 화살이 힘이 다하면 다시 땅으로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복이 다하면 내생에는 뜻과 같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자유를 얻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모양에 머물러 보시하는 것은 삼생(三生)에 원수라 했습니다. 금생(今生)에는 모양에 집착한 복을 닦느라고 공부를 못하고, 내생(來生)에는 금생에 닦을 복을 받느라고 공부를 못하고, 내래생(來來生)에는 복이 다하면 타락하여 고(苦)를 받느라고 공부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모양에 집착하여 보시하는 것은 삼생의 원수라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양에 머문 보시가 삼생의 원수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으로 모양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해야 합니다. 모양에 머물음이 없는 보시란 내 마음 속에 있는 양변,변견을 다 버려버리는 것이 참다운 보시라는 것입니다. 보시를 이렇게 해야만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지 수도인이 되어서 삼생의 원수인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양무제를 만나니 양무제가 물었습니다.
"짐이 만승천자가 되어 절도 많이 짓고 경전도 많이 펴고 탑도 많이 세우고 보시도 많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공덕이 없습니다."
고 달마스님이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모양에 머문 보시이기 때문이니 당신이 실제로 불법을 위하여 공덕을 쌓으려거든 자성을 깨치라'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자성을 깨치는 이것이 참공덕이라는 것입니다.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삼생의 원수이니만큼 수행하는 사람은 자성을 바로 깨쳐서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삼생의 원수는 맺지 않는 것이 아닌가, 혹 이리도 생각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최상승법을 바로 알아서 그 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고행난행(苦行難行)하는 것은 모양에 머무는 보시가 아니라 최상승법을 빨리 성취시키는 방편입니다. 그래서 고불고조(古佛古祖) 무상대도를 성취시키기 위해 신심을 조장시키는데 있어서는 모든 고행난행(苦行難行)을 해야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처님의 정법 이십대제자 가운데 두타제일(頭陀第一)인 가섭존자에게 갔습니다. 왜그런가 하니 가섭존자와 같이 고행난행하는 철두철미한 신심을 가지고 부처님 말씀을 믿고 공부해야만이 이 무상대법을 깨칠 수 있다는 근본 표본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섭존자의 고행난행은 자성을 깨쳐서 모든 모양으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에 전체가 모두 대기대용의 현발입니다.
예전의 총림에서 큰 스님네들이 공부하는 사람이 최상승법을 모르고서 다만 모양에 머무는 보시를 하는 것만을 배격하였지, 그 이외의 최상승법의 성취를 위한 고행난행은 누구에게든지 장려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백장스님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고 하여 구십평생을 호미를 들도 살았듯이, 이 고행난행을 하지 않고 공부한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양에 머무는 보시와 예전 큰 스님네들의 조도방편(助道方便)을 혼동하면 큰 오해가 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종문에서 하는 공부는 모양에 머무는 보시도 아니고 삼생의 원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고행난행을 하여 신심이 고양되어 최상승법을 하루 빨리 깨치게 하는 것이 그 근본 방침이기 때문입니다. 예전 어느 큰 스님이든지 고행난행하는 철두철미한 신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섭수해 나갔지 이것을 배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최상승법으로 들어가서 모든 모양을 떠난 공부를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50. 어찌 함이 없는 실상문에
한 번 뛰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감과 같으리오
쟁사무위실상문에 일초직입여래지리오
爭似無爲實相門 一超直入如來地
모양에 머무는 보시를 하면 삼생의 원수가 되어서 세력이 다하면 윤회를 거듭하고 말지만,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함이 없는 실상문에 바로 들어가면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각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가(敎家)에서는 삼아승지겁을 거쳐서 육도만행을 닦아 구경각을 성취할 수 있다고 했는데, 선가에서의 '한번 뛰어넘어 여래지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교가에서 강변합니다. 특히 천태종이 [증도가] 가운데서 가장 반대하는 대목이 바로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간다'는 귀절입니다. 교가의 교리상으로 볼 때는 구경각은 성취하는 기간이 무한한 시간이 걸리고 무한한 노력이 드는 것인데 어째서 자기 마음을 닦을 것 같으면 단박에 구경각을 성취할 수 있느냐, 그렇게 될 수 없다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외별전인 비밀방법을 참으로 모르는데서 하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모양에 집착해서 자꾸 뜀밖으로 나간다면 말할 수 없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렇지 않고 모양을 완전히 떠나서 자신을 바로 닦아 나갈 것 같으면 단도직입으로 구경각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선문의 정설입니다.
황벽스님 법문에 "힘 쎈 사람이 구슬이 자기의 이마에 박혀 있는 것을 모르고 시방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밖으로만 찾아다녀도 끝내 찾지 못하다가 지혜로운 이가 가르쳐주면 당장에 구슬이 이마에 본래대로 있음을 아는 것과 같다."는 말씀처럼, 구슬은 본래 이마에 있는데 자꾸만 외변으로만 돌면서 저 미국으로 영국으로 달나라로 다녀 보았자 구슬은 못 찾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구슬이 너의 이마에 있지 않느냐"고 바로 가르쳐 주면 스스로 더듬어 만져보아 알게되니 이것이 바로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드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모양에 머물러 보시하는 방법과 함이 없는 실상문의 방법과는 이렇게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모양에 머물러 보시하는 방법으로 공부를 한다면 삼아승지겁이 아니라 미래겁이 다하도록 성불하기가 곤란할 것 같으면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조스님께서도 '미혹하여 들으면 여러 겁이 걸리고 깨치면 찰나간'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즉 자기의 마음을 깨치면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각을 성취해 버리는 것이지 절대로 많은 시간이 필요 없으므로 누구든지 이 법을 바로 믿고 선택해서 부지런히 닦기만 하면 금생에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앞에서도 '만약 거짓말로써 중생을 속인다면 발설지옥에서 진사토록 지낼 화를 자초한다'고 맹세까지 하셨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중생의 업이 너무 두터워 참으로 믿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노파심절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든지 '함이 없는 실상문'에 바로 들어갈 것 같으면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부지런히 부지런히 공부한다면 옛사람과 같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51. 근본만 얻을 뿐 끝은 근심치 말지니
마치 깨끗한 유리가 보배 달을 머금음과 같도다
단득본막수말이니 여정유리함보월이로다
但得本莫愁末 如淨瑠璃含寶月
앞에서도 여러 번 강조한 바와 같이 뿌리를 끊어버리면 나무 전체가 넘어지는 것인데 어리석은 사람은 외변으로 공연히 잎만 따고 가지만 찾고 하여 무한한 세월과 한없는 노력을 허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근본 자성을 닦으면 거기에 육도만행이 원만히 다 갖추어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달마스님께서도 '마음을 관찰하는 한 가지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觀心一法總攝諸行]'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관찰하여 마음을 바로 깨칠 것 같으면 전체 불교가 그 가운데 다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완전히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경각을 성취하면 어찌 되느냐?
한 번 뛰어넘어 여래지에 들어가서 자성을 깨치면 내심외경(內心外境), 곧 안의 마음과 밖의 경계 전체가 원융무애하여 통연히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유로 '맑은 유리병 속에 보배 달을 넣어 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맑은 유리병 속에 보배달을 넣어두면 그 속이 환한 동시에 그 빛이 밖으로 시방세계를 비추어 내외가 명백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맑은 유리병 속에 보배달을 넣어 둔 것과 같다[如淨瑠璃含寶月]'는 말은 [능엄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공부를 해가는 중간의 해오(解悟)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구경각을 성취하여 삼현십지(三賢十地)와 등각(等覺)을 넘어서서 구경의 묘각(妙覺)을 성취하여 무소득(無所得)의 경계를 체달하는 것을 말하니 진여를 바로 깨쳐서 진여의 광명이 내외에 통철하고 무장무애하여 시방세계에 두루 비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경계에서 성취되느냐?
제팔아뢰야 무기무심인 가무심(假無心)에서 벗어나 진여의 대무심지가 현발한데서 성취되는 것이니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大死却活] 경계인 것입니다. 진여의 대무심지에 이르면 일체번뇌망상이 완전히 다 끊어져 제팔아뢰야 근본무명이 뿌리채 뽑히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진여의 보배 달이 떠올라 시방세계를 비추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의 경계이므로 말로만 보배 달을 운위해서는 안되는 것이고 몸소 체험해야 합니다. 그 경계에 있어서는 오매일여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밥 먹을 때나 일할 때나 자나 깨나 말하거나 않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어느 때는지 그 경계는 꼭 같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공부를 해가다가 조금되는 것 같다하더라도 거기에 조금의 간단(間斷)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공부가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부해서 간단 없음을 성취하여 객진번뇌(客塵煩惱)가 다 떨어진 구경에서 진여 보배 달이 떠오르면 억천만겁이 지나도 옛이 아니어서[歷天劫而不古]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이처럼 선종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은 구경각을 성취한 것으로써, '깨끗한 유리병 속에 보배달을 담은 것과 같은 것'을 돈오(頓悟)라 하였지 그 중간의 해오(解悟)를 돈오라 하지 않았습니다.
52. 이미 여의주를 알았으니
나와 남을 이롭게하여 다함이 없도다
기능해차여의주하니 자리이타종불갈이로다
旣能解此如意珠 自利利他終不竭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가서 마치 유리병 속에 보배 달을 담은 것'같은 그러한 대진여광명을 우리가 완전히 체득하여 증하고 나면 이 여의주를 항상 옳게 수용하여 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를 위해서도 한없는 힘을 발휘하여 무한한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을 위해서도 미래겁이 다하도록 한없는 대자대비를 베풀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구경각을 완전히 성취하여 여의주를 완전히 얻는 것이어서 진여본성을 바로 깨친 것이며, 진여본성을 바로 깨치었다면 영원토록 이것을 나와 남을 위해서 활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53. 강엔 달 비치고 소나무엔 바람 부니
긴긴 밤 맑은 하늘 무슨 하릴 있을건가.
강월조송풍취하니 영야청소 하소위아
江月照松風吹 永夜淸[雨+肖:하늘 소]何所爲
모든 것을 완전히 끊고 해탈하여 한가한 도인이 되고 보니 강물 위에 달 비치고 솔밭에 바람 부는 경계더라는 것입니다. 그 경계에 있어서는 긴긴 밤 하늘은 맑은데, 아무런 하릴없어 자유롭고 영원토록 걸림없다는 말입니다. '강 위에 달 비치고 솔 바람 분다'는 것은 실제 자성을 깨침에 있어서 자성의 체(體)와 용(用)을 분명히 표현한 것입니다.
54. 불성계의 구슬은 마음의 인(印)이요
안개,이슬,구름,노을은 몸 위의 옷이로다
불성계주는 심지인이요 무로운하는 체상의로다
佛性戒珠 心地印 霧露雲霞 體上衣
확철히 깨쳐 마니주를 얻으면 불성계의 구슬은 마음 땅의 도장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도장이란 우리의 근본자성을 말함이고, 안개,이슬,구름,노을은 생멸하는 것이므로 몸에 걸친 옷처럼 중생의 망정을 말한 것이 아니냐'고 흔히 해석하는데,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여의주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안으로는 마음 땅이 개척되어 불성계의 구슬이 둥글고 밝은 동시에 밖으로는 안개, 이슬, 구름, 노을이 몸 위에 걸친 옷으로써 모두가 진여대용이라는 말입니다. 안개, 이슬, 구름, 노을도 진여대용이고, 꽃은 붉고 버들이 푸르름도 진여대용이며, 산은 높고 물이 깊은 것도 진여대용입니다. '불성계의 구슬'은 안으로 자성을 표현하여 하는 말이고, '안개, 이슬, 구름, 노을이 몸위 에 걸친 옷이라'하는 것은 밖으로 일체가 진여의 실현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불성계의 구슬이란 내 마음 자리를 확철히깨친데서 한 말로써, 마니주 광명이 사방세계를 비추어 진진찰찰(塵塵刹刹)이 진여광명 아님이 하나도 없는데 안개,이슬,구름,노을인들 어찌 빼놓을 수 있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진진찰찰 전체가 다 진여대용임을 표현함에 있어서 이것들을 예로 들어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 땅의 도장[心地印]은 자성을 말함이고 안개,이슬,구름,노을은 생명하는 것이므로 망상이라고 해석하면, 여의주도 영가스님의 뜻도 모르는 사람이니 여기에 특히 주의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55. 용을 항복받은 발우와 범 싸움 말린 석장이여
양쪽 쇠고리는 역력히 울리는도다
항룡발해호석이여 양고 금환명역력이로다
降龍鉢解虎錫 兩[金+古]金環鳴歷歷
'용을 항복 받은 발우'라는 말은 출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삼가섭(三迦葉)을 제도하셨다는 [본행경(本行經)]의 이야기와 육조스님의 일화입니다. 육조스님이 보림사(寶林寺)에 계실 때 절 앞 뜰에 큰 용소(龍沼)가 있어서 거기에 독룡이 살면서 수풀을 휘젓고 사람에게 해를 끼침에, 하루는 그 독룡이 큰 몸뚱이를 물 위에 나투는 것을 보시고 육조스님께서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네가 다만 큰 몸은 나툴 줄은 알되 작은 몸은 나투지 못하는 구나. 신룡(神龍)이라면 마땅히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고 하시니 이에 그 큰 독룡이 홀연히 없어지더니 작은 몸을 나투어 물위에 다시 떠 올랐습니다. 그 때 육조스님께서 발우를 내밀면서 "노승의 발우 속으로 들어와 보아라."고 하시니 그 독룡이 헤엄쳐서 다가오므로 육조스님께서 그 작아진 독룡을 발우에 담아 법당으로 가셔서 상당(上堂)하여 설법하시니 그 용이 드디어 몸을 벗어 화거(化去)하여 제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를 들어 '용을 항복받은 발우'라 하는 것입니다.
'싸움하는 범을 말린 석장'이란 것도 일화가 있습니다. 승조(僧[禾+周:빽빽할 조])라는 스님이 산 길을 가다보니 범 두 마리가 길가에서 서로 싸우고 있으므로 두 범이 상할 것을 염려하여 육환장으로 두 범 사이를 떼어 놓으면서,
"싸울 일이 뭐 있나, 서로 잘 지내거라."
하면서 육환장으로 범 대가기를 몇 번 툭툭 건드리니 서로 헤어져 가더라는 얘깁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호랑이 담배 피울 때 하는 말이라고 웃을런지 모르지만 실지로 이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요즈음 심리학적으로 볼 때도 인간이 짐승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어 있습니다. 그런 만큼 호랑이 싸움을 말려 그치게 했다는 것도 빈 말이 아닙니다.
석장(錫杖)이란 육환장(六環杖)을 말합니다. 육환장 머리에 두 개의 걸이가 붙어 있고 또 한 쪽 걸이마다, 세개씩 조그만 고리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육환장은 양 걸이마다 세개씩 모두 여섯개의 고리가 달려 있는 나무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그 육환장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양 걸이는 진속이제(眞俗二諦)를 표현한 것이고, 여섯개의 고리란 육바라밀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심의 나무 지팡이는 중도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환장은 그저 나무 지팡이가 아니라 중도 위에 서 있는 이제(二諦)가 원융하고 육도가 원만구족한 불교 진리 전체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 스님들은 이 육환장을 지팡이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 진리 전체를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육환장을 짚고 다니면서 불법을 항상 실천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부터 스님들이 이 육환장을 짚고 다녔습니다. 육환장을 짚고 다닌다는 것은 중도에 의지해서 중도를 정등각한다는 것이고 진속이제와 육도를 원만히 성취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그것을 성취하지 못한 사람은 성취도도록 닦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환장을 육환장이라 부르지 않고 중도장(中道杖)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56. 이는 모양을 내려 헛트로 지니이 아니요
부처님 보배 지팡이를 몸소 본받음이로다
불시표형허사지요 여래보장을 친종 적이로다
不是標形虛事持 如來寶杖 親[足+從:자취 종] 跡
육환장을 짚고 다니는 것은 모양을 내기 위해서 공연히 쓸데없이 짚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여래의 보배 석장을 몸소 본받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여래의 보배 석장이란 중도를 말한 것이니 그 뜻이 나무 지팡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 지팡이에 있다면 지팡이는 아무데나 있는 것이니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출가사문(出家沙門)이 되면 반드시 육환장을 짚도록되어 있는 것은 언제든지 중도를 바로 깨쳐서 중도를 바로 행하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육환장을 짚는 동시에 중도를 바로 깨쳐 행하는 그 사람이 여래의 보배 석장을 본받는 사람이고, 중도를 깨치지 못하고 중도를 모르는 사람은 껍데기는 육환장을 짚고 다니지만 실지로는 육환장을 내버리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중도란 자성이니 자성을 깨치기 전에는 여래의 보배석장을 본받는 사람이 되지 못하니 어서 중도를 깨쳐 안팎으로 중도를 구비하여 육환장을 항상 짚고 다녀야 하겠습니다.
57. 참됨도 구하지 않고 망령됨도 끊지 않나니
두 법이 공하여 모양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불구진부단망하니 요지이법이 공무상이로다
不求眞不斷妄 了知二法 空無相
앞에서 중도를 정등각한 사람만이 여래의 보배 석장을 짚고 다니는 사람이고 여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며 여래의 길을 같이 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내용이 어찌 되어서 그러냐 하면, 참됨도 구하지 않고 망도 끊지 않아서 참됨도 버리고 망도 다 버려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됨과 망이 다 공하여 모양이 없음을 밝게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참됨이니 망이니 하는 것은 중생의 변견 망정에서 하는 소리일 뿐이고, 참됨도 설 수 없고 망이 본래 공해서 참됨과 망이 다 거짓말인 것이고 변견인 것이며,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그것이 중도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중도장, 육환장을 짚고 다녀야 하는데 중도장의 내용은 참됨과 망을 떠난 쌍차이면서 쌍조한 차조동시(遮照同時)인 것을 확철히 깨친 사람만이 중도장을 바로 짚고 다니는 사람이며 양변을 여읜 중도를 정등각한 사람입니다.
58.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음이여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무상무공무불공이여 즉시여래진실상이로다
無上無空無不空 卽時如來眞實相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다'는 것은 전체를 다 막아 버리는 것이니 청룡도를 가지고 전체를 다 끊어버리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체가 다 끊어진 곳에서 일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고 항사묘용이 나는 것이니 이것이 여래의 진실상이며 중도의 보배 석장이라는 것입니다.
59. 마음의 거울 밝아서 비침이 걸림 없으니
확연히 비치어 항사세계에 두루 사무치도다
심경명감무애하야 확연영철주사계로다
心鏡明鑑無碍 廓然瑩徹周沙界
마음 거울이 환희 밝아 그 비치는 것이 걸림없이 자재하여 그 광명은 삼천대천세계를 비추고 또 비춘다는 것입니다. 모양도 없고 공(空)도 없고 공(空) 아님도 없는 여래의 진실한 모습을 확철히 깨치면 전체가 다 끊어져서 거기서 참으로 항사묘용인 진여대용의 광명이 현출하여 시방세계를 비춰 두루하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60. 만상삼라의 그림자 그 가운데 나타나고
한 덩이 뚜렷이 밝음은 안과 밖이 아니로다
만상삼라영현중이요 일과원명비내외로다
萬象森羅影現中 一顆圓明非內外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는 진심 실상(實相)'을 안다면 그 광명이 시방세계를 비치는 동안에 시방세계의 진진찰찰이 그 광명 아님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삼라만상 전체가 다 중도실상, 진여대용, 진여광명 가운데 건립되어 있는 것이지 진여광명 내놓고는 삼라만상이 따로 없습니다. 따라서 만상삼라가 진여대용 가운데 있는 것이며 그 밖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진법계(一眞法界)요 무진법계(無盡法界)며 무진연기(無盡緣起)라는 것입니다.
삼라만상이라 하니 조각조각 나 있어 통일성이 없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한 덩이 구슬이 빛을 내는 것과 같아서 아주 밝고 둥글어 안과 밖이 없으니, 안과 밖이 끊어진 그곳에서는 유한이다 무한이다 할 것이 없습니다. 진진찰찰이 진여대용 아님이 없고 삼라만상 전체가 진여대용이어서 진진찰찰이 각각 차별이 있는 가운데 전체가 다 그대로 진여광명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금덩어리도 여러가지 모양의 물건을 만들면 모양은 달라도 모두가 다 진금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늘과 땅에 천만상지만상(天萬象地萬相)으로 벌어져 있는 모든 것을 아무리 둘러 보아도 진여광명 밖에는 따로 없습니다. 여기서는 중생을 볼래야 볼 수 없고 부처를 볼래야 볼 수 없어서 모두 다 진여대용입니다. 이것을 바로 깨쳐야만 불교를 바로 아는 사람이고 실지로 스님될 자격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여래의 보배 석장을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한 것이 되고 억천만겁을 살아도 육환장을 헛 짚고 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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