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좌불교의 종주국 스리랑카 마성 지음
사자족의 후예 스리랑카는 인도의 남단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옛날에는 탐바빤니(Tambapanni, 銅葉洲). 랑카섬(Lankadipa, 楞伽島)으로 불린적이 있다. 그런데 이 나라는 일찌기 사자와의 인연에 의해 건국되었기에 師子洲(Sinhara) · 獅子國 · 세일론(Ceylon, 錫蘭島)이라 불리었다. 1972년 6월부터 현재의 국명인 스리랑카(Sri-Lanka)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번영하는 랑카섬'이라는 뜻이다. 스리랑카의 고대 역사서인 <大史, Mahavamsa>에 의하면, 이 나라는 붓다의 입멸 당시인 서력기원전 5세기경 인도의 위자야(Vijaya) 왕자가 사자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위자야 왕자가 인도에서 추방되어 랑카섬에 도착하여 사자와 결혼하여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그 후예들을 싱할러족(Sinhala)이라 하는데, 싱하(Sinha)는 사자 (Lion)를 말하고, 러(le)는 피(Blood)를 의미한다. 따라서 싱할러족은 '사자의 혈통을 전승한 민족'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랑카의 어원은 사자(Lion)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현재 스리랑카의 상징인 국기도 사자가 칼을 물고 있는 것을 형상화한 것으로 세일론의 건국신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현재의 인구는 약 1,700만이고, 면적은 4만 평방 키로미터 정도이다. 전체인구의 65%가 불교도이며, 6,000여개의 사찰과 20,000여명의 스님들이 수행하고 있다. 불교의 전래 스리랑카에 불교가 언제 들어왔는가 알아보자. 스리랑카인들은 석가모니불께서 직접 스리랑카를 내방하셨다는 '佛渡來說'을 믿고 있다. 세일론의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島史, Dipavamsa>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성도 후 9개월 뒤, 5년째, 8년째 등 3차례에 걸쳐 스리랑카에 오셔서 직접 법을 설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신화일 뿐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역사적으로 세일론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불멸후 약 2백년경 인도 아쇼카(Asoka, 阿育王, 273-236 B.C.)의 아들 마힌다(Mahinda, 282-222 B.C) 長老에 의해서였다. 마힌다장로는 부왕 아쇼카의 칙명으로 32세 때 세일론에 파견되었다. 마힌다장로는 당시 세일론왕 데와냠삐야 팃사(Devanampiya Tissa)에게 법을 설했는데, 왕이 법을 듣고 환희하여 받아들임으로 해서 공식적으로 세일론에 불교가 전래하게 되었다. 이때 왕은 스리랑카 최초의 도읍지였던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大寺(Mahavihara)를 건립하여 마힌다장로는 66명의 제자를 얻었으며, 하안거를 시작했다. 이곳이 후일 상좌부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는 大寺派(Mahaviharavasin)의 근거지가 된다. 이 무렵 마힌다장로의 누이동생 상가밋따(Sanghamitta)비구니가 인도 붓다가야에서 보리수나무를 가져와 아누라다푸라에 심었다. 그 때의 보리수가 지금도 살아 있다. 이 절의 이름은 보디마루위하라(Bodhimalu-vihara)인데, 한문으로 표기하면 '聖菩提樹寺'가 되고, 우리말로 표기하면, '성스러운 보리수나무가 있는 절'이란 뜻이다. 이 절은 스리랑카의 매우 중요한 성지중의 하나로 참배객이 끊어지지 않는다. 최초의 분열 그 후 서력 기원전 1세기경 왓따가마니 아브하야(Vattagamani Abhaya)왕이 무외산사(Abhiyagiri-vihara)를 건립하여 마하팃사(Mahatissa)장로께 헌납하므로써 세일론의 불교는 대사파와 무외산사파 둘로 나뉘어졌다. 대사파는 지금의 상좌부불교이고, 무외산사파는 대중부의 사상을 받아들인 개방적인 승단이었다. 이 때 대사파에서 종래 구전에 의해 전해지고 있던 성전이 싱할리어(세일론어)로 편찬, 서사되었다. 이 편찬사업은 왕의 지원없이 대사파쪽에서 정법수호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보하리까(Voharika Tissa, 269-291)王의 시대에는 대승불교의 空사상을 천명하고 있는 웨뚤라와다(Vetullavada, 方廣部)의 무리가 인도에서 건너와 무외산사에 잠입하였다가 쫓겨나기도 하였다. 이들이 다시 닥키나기리(Dakkhinagiri,南山)로 옮겨 다른 파를 만들었는데, 사가리야(Sagariya)派라고도 불리는 제타와나 위하라(Jetavanna-vihara, 祇陀林寺)派이다. 이로써 세일론 불교는 대사파 · 무외산사파 · 기타림사파의 3파로 나뉜다. 한때 마하세나(Mahassena, 334-361)왕 집권 시에는 대사파를 탄압했기 때문에 무외산사의 황금시대가 오래 지속되기도 했다. 佛齒의 도래 또한 시리 메가완나(Siri Meghavanna, 362-409)왕의 시대에 칼링가로부터 부처님의 치아 사리가 도래하여 무외산사에 안치되었다. 현재 이 불치는 캔디(Kandy)市 중심의 아스기리야 마하 위하라(Asgiriya Maha vihara, 佛齒寺)에 봉안되어 있는데, 세일론불교의 보물이면서 왕권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사찰은 현재 스리랑카 정부군이 24시간 지키고 있다. 1년에 한번씩 일반에 공개하는 페라헤라(Perahera) 축제는 대단히 규모가 크다. 이 축제를 우리말로 표현하면 '佛齒舍利 移運式'이라 할 수 있다. 세일론에 불치가 도착했을 무렵인 A.D.410-412년 사이 중국의 法顯스님이 세일론을 방문했다고 한다. 붓다고사의 팔리삼장 주석 세일론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5세기에 접어들어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三藏)가 세일론에 왔다는 사실이다. 붓다고사는 세일론에 도착하여 大寺에 거주하면서 지금까지 싱할리어로 씌어져 있던 삼장을 팔리어로 번역함과 동시 옛 주석을 활용하여 삼장에 대한 상세한 주석을 달았다. 현존하는 팔리삼삼장은 이 붓다고사에 의한 것으로 세계불교사에서도 가장 귀중한 불교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小王統史, Culavamsa>에 의하면 붓다고사는 중인도의 菩提道場 부근의 바라문 출신이라고 하며, 버마의 전승에 의하면 그는 버마의 타톤(Thaton) 출신이며, 불멸 943년 마하나마왕의 치하 때 세일론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붓다고사는 남인도 출신이라고 한다. 그의 불후의 명저 <淸淨道論, Visudhimagga>이 남아 있는데, 어쨌든 세일론불교사에서 세일론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마힌다장로와 함께 가장 중요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정통 상좌부불교의 확립 그 후에도 대사와 무외산사는 오랫동안 서로 대립했는데, 역대의 왕들은 무외산사를 지지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대사파는 이에 굴하지 않고 청정한 상좌부의 교학과 계율을 잘 유지했다. 그런데 8세기 전반에는 세일론에 대승불교, 즉 밀교가 성행하여 金剛智와 不空三藏이 來島했다고 한다. 그런데 11세기 초엽에는 시바교도인 남인도의 촐라(Chola)인들이 침입하여 王都였던 아누라다푸라가 함락되고 사찰은 폐허가 되었다. 이때 비구니상가는 절멸되고 만다. 이후 세일론에서는 비구니가 없다. 그 후 위자야바후(Vijayabahu, 1059-1113) 1세는 반세기 동안 세일론을 점령하고 있던 촐라인을 격퇴하고 왕위을 되찾음과 동시 버마로부터 장로를 초청하여 불교를 부흥시켰다. 또한 12세기에는 빠락카마바후(Parakkamabahu, 1153-1186) 1세가 나와 대사 · 무외산사 · 기타림사 등의 승려 가운데 퇴폐한 자를 환속시키고 교단을 정화했다. 그리고 왕은 대사의 불교가 올바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대숙청을 단행하여 순수한 상좌부 불교를 흥륭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로 말미암아 1,000여년에 걸친 대사와 무외산사의 싸움은 끝나고 대사의 정통 상좌부 불교로 통합된 것이다. 부처님의 승리 그 다음의 위자야바후(Vijayabahu, 1270-1272) 4세는 스스로 보살행을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왕실에서 불교를 주도해 왔다. 하지만 16세기부터는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지 통치하에 들어간다. 1505년부터 1630년까지 포루투갈의 지배를 받고, 1630년부터 1800년까지는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으며, 1815년부터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1945년 독립했다. 나라를 독립하고 1956년 불멸 2,500주년 기념법회를 실시했는데 이것을 '붓다 자얀띠'(Buddha Jayanti)라 한다. 붓다 자얀띠는 '부처님의 승리'라는 뜻이다. 이 행사에 한국의 고승 청담·동산스님 등이 참가했는데, 이때 세계 공통의 佛紀를 제정했다. 현재의 스리랑카 불교 현재 스리랑카에는 씨암派(Siam-Nikaya)와 아마라푸라派(Amarapura-Nikaya), 라만냐派(Ramanna-Nikaya) 등 3개의 종파가 있다. 씨암파는 1753년 태국스님을 초청하여 비구계를 받은 계통이며, 일명 우파리(Upali)派라고도 한다. 주로 상류 계급자가 많이 출가하며, 13,000여명의 비구가 소속되어 있다. 이 파의 스님들은 눈썹까지 깎는 것이 특징이다. 시암이란 태국의 옛 국명으로 스리랑카에 비구 승단이 전멸되었을 때 태국으로부터 법을 전수 받았기 때문에 그대로 종파의 이름이 되었다. 아마라푸라는 1802년 버마(지금의 미얀마)의 아마라푸라로부터 비구계를 받은 계통이다. 이 파는 각 계급 출신이 입단할 수 있으며, 주로 하층 계급 출신자가 많다고 한다. 현재 비구는 5,000명 정도이고, 씨암파와 같은 형태로 가사를 수하지만 눈썹은 깍지 않는다. 라만냐파는 버마의 페구왕조 때 전승해 온 승단이며, 위의와 행위를 매우 엄숙히 한다. 각 계급에서 다 출가할 수 있으며, 주로 철발우[鐵鉢]을 소지하고 야자 잎으로 만든 양산을 주로 사용한다. 현재의 비구는 약 2,000명 정도이다.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는 그들의 불교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많은 수난을 당하면서도 순수한 상좌부 불교의 전통을 고수해 왔기 때문에 오늘날 상좌부 불교의 宗主國으로 추앙 받고 있는 것이다. 승가는 정신적 지주 또한 스리랑카 스님들은 오랜 식민지 치하에서도 승단의 고유한 제도를 지켜왔을 뿐 아니라 불법연구에 심혈을 기우였다. 그 결과 오늘날 세계적인 불교학자는 거의 대부분 스리랑카 출신 스님들이며, 상당수의 스님들이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다. 이처럼 스리랑카의 스님들은 스리랑카의 지성을 대표하며, 스리랑카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담하고 있다. 앞으로 미래의 스리랑카 불교를 이끌어갈 젊은 스님들은 각 대학에서 오늘도 불법을 연구하고 있다. 일요불교학교 그리고 재가신자들을 위한 불교 교육은 담마스쿨(Dhamma Schools)에서 이루어진다. 담마스쿨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일요불교학교'라 할 수 있다. 이 담마스쿨이 현재의 스리랑카 불교를 지탱하는 힘이다. 담마스쿨은 유치원생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약 14등급으로 나누어 반이 편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불교를 체계적으로 가르친다.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팔리경전을 암송하고 교리를 체계적으로 배우니 어떻게 참 불자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의 스리랑카 불교가 있기까지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하지만 그들은 철저한 승가교육으로 승려의 자질을 향상시켰기 때문에 승려는 부처님처럼 존경 받으며, 사회를 이끌어 가는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불교대학에서는 '불교사회학'을 비롯한 '불교정치경제철학' 및 '불교와 현대사회사상' 등을 교육시키므로 사회의 지도자로서 활용하는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한국불교의 승가교육 실태는 어떠한가. 유형의 불사도 중요하지만 미래의 한국불교를 살리기 위해서는 교육제도의 보완과 함께 교육에 보다 많은 투자가 뒤따라야만 할 것이다. 앞으로 한국불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승가의 교육뿐임을 명심할 일이다. [이 글은 서울 조계사에서 발행한 <曹溪寺報> 제35호(1990. 10.1.), 4-5면에 게재된 것이며, 또한 부처님마을 회원들을 위해 <부처님마을> 제60호, 제61호, 제62호에 다시 연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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