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無心)
무심을 일러 도라고 하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한 겹의 관문이 막혀 있다.
莫道無心云是道 無心猶隔一重關
막도무심운시도 무심유격일중관
- 십현시
선가에 ‘오직 무심으로 으뜸을 삼는다.’는 말이 있다. 무심이란 일체의 번뇌와 망상이 없다는 말이다. 번뇌와 망상이란 선한 마음의 반대인 악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심 악심 모두를 일컫는다. 그렇다고 무정물인 목석과는 또한 엄연히 다르다. 사람의 마음을 무엇이라고 한 가지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공적하여 텅 빈 상태를 마음의 본 모습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바탕이 꽉 차 있지 않고 텅 비어 있으므로 어떤 마음이든지 일으킬 수 있고, 일으켜서 채울 수도 있다. 이미 어떤 마음이든지 꽉 차 있으면 다른 마음이 자리를 차지하기가 어렵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어야 한다. 일체가 부정한 자리다. 그래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인 무심을 귀중하게 여기고 높이 숭상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겹의 관문이 막혀 있다.’는 말을 가만히 살펴보면, 마음이란 텅 비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본 모습이 아니라, 그 텅 빈 데서 신령스럽게 보고 듣고 감지하는 능력이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악을 사량 분별하고 이해타산을 하는 그런 마음 작용이 아니라, 사량 분별이 떨어진 상태에서 신령스럽게 보고 듣고 감지하는 작용이다. 그것을 ‘공적한 데서 신령스럽게 안다.’ 하여 공적영지(空寂靈知)라 하고, ‘신비하게 감지한다.’ 하여 신해(神解)라 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유하자면, 거울은 아무런 사량 분별의 마음이 없다. 그런데 사물이 가까이 오면 사물의 생긴 모습 그대로 사심 없이 다 비춰 준다. 사물이나 사람의 종류에 따라 흔적이 남는 법도 없다. 텅 비어 공적하면서 사심 없이 신령스럽게 작용하는 것이 마음의 본령이다. 흔히 말하는 진공묘유(眞空妙有)도 그러한 뜻이다. 그런데 무심하기도 대단히 어렵지만, 무심하기만 하다면 그것은 아직 한 겹의 관문이 막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무비 스님이 가려뽑은 명구 100선 ② [소를 타고 소를 찾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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