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무엇인가

나도 없고, 참나/진아도 없다. 상락아정을 오해하는 문제. 무아[無我]

수선님 2019. 9. 8. 11:46

 

특정 한국 불교권에서 아주 잘못 이해되고 있는게 바로 참나/진아.....바로 이것이다.

 

"나"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인데,

"참나"니 "진아"니 이런 용어를 써서 더더욱 중생들을 헷갈리게 하고 거기에 집착하게 만든다.

 

 

부처님 가르침에는 본래, 이런게 없다.

참나, 진아.....이따위 가르침이 어디에 있는가?

 

열반경에 있다고?

상락아정이 그것이라고????

 

그건 전혀 깨달음이 없는 자가 외치는 바보같은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참나를 찾아서.....

뭐 이런 플랜카드를 많이 붙여놨는데,

당연히 못찾을 줄 알면서 붙여놓은 것인지, 자신도 모르면서 있다고 여기고 붙여놨는지,

하여튼간에 중생들을 더더욱 길을 잃게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중에 하나는 바로 무아[無我] 아니던가?

空이 해탈문이기에 空이 불교의 가장 핵심 아니던가?

 

"나"라는게 본래 없기에 無我이며,

실체로 여길만한 "나"가 없어 텅 비어 있기에 空이다.

 

 

 

 

참나/진아....이런 용어는 불교에서 쓰면 안된다.

외도들이나 쓰는 용어이다.

 

또한 이런 용어들로 인해 수많은 불자들이 더더욱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상주론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초보 불자들이 참나/진아 이런 용어를 듣게 되면 어찌될까?

뭔가 또 다른 나라는게 진짜 있다고 믿어버리게 된다.

 

그건 참 더더욱 마음을 세속화시키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나"라는 뜻을 대표하는 용어가 바로 "상일주재"이다.

 

상일이란 항상한, 즉 단일한 하나의 영원한 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주재란 마치 임금처럼 맘대로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뜻한다.

 

중생들은 어릴 적의 나와 현재의 나는 같다고 여기며,

또한 미래의 나도 같다고 여기기에, 다시 윤회해도 그 나가 지금의 나라고 여긴다.

 

동일한 하나의 영원불변의 "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한다면 그것은 "나"가 될 수 없고,

맘대로 뭘 못한다면 그것도 역시나 "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중생들은 전혀 깨달음이 없어서

변하는 것을 "나"라고 여기고 있다.

 

변하는 것을 영원히 안변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진제와 속제로 구분 되어져 있다.

진제 속제 구분 못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속제에도 "나"는 없고,

진제에도 "나"는 없다.

 

"나"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은 어리석어서 "나"라는게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왜냐면 마음을 전혀 살펴보지 않아서 그렇다.

 

제 마음을 가장 모르고 사는게 중생이다.

 

 

 

"나"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며,

그러므로 당연히 "참나", "진아" 이런 것도 역시나 없다.

 

"나"가 본래 없는데,

어찌 "참나"가 있겠으며, "진아"가 있겠는가?

 

 

 

"참나", "진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그저 어리석은 중생들의 집착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면 중생들의 에고는 기필코 뭔가에 집착하려 하기 때문이다.

 

 

 

깨달음...

뭘 깨닫는가?

 

空이다.

空을 깨닫는 것이다.

 

空을 깨달은 자도 있을 것이고, 근처에 간 자도 있겠고, 깨달았다고 착각한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이 空에 뭔가가 있다고 철썩같이 믿는다.

 

그래서 진공묘유라는 말에 속는다.

진정한 공에는 오묘함이 있다...라는 이런 단순한 해석에 얽매여버린다.

 

진정한 공이면, 완전히 텅빈 것이지...거기에 뭐가 있겠는가?

뭐가 있다면 진공이 아니다.

 

진공묘유란 본래 뜻은,

마음이 공에 촛점을 맞추면 이 속제...즉 드러난 현실에 오묘함이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쉽게 말하면, 마음을 텅비워 삼매에 들면 온갖 초능력(신통력)이 생기는 것과 같다.

공에 마음을 맞추면 이런 오묘함이 생긴다는 의미이지, 공 그 자체에 뭐가 있다는게 아니다.

 

 

 

 

그래서 용수보살의 중론에 아래와 같이 아주 철저하게 경고하고 있다.

 

空 그 자체에 뭐가 있다고 여기는 자는, 그 누구도 그 중병을 고쳐줄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큰 병이다.

 

 

 

空을 이해하는 장소는 바로 마음이다.

 

마음이 공한 것이다.

마음 속에 나라는게 있는가?

마음 속에 참나...진아...이런 따위가 있는가?

 

대승기신론에 잘 나와 있듯이,

마음은 크게 두가지이며,

그것이 바로 생멸심과 진여심이다.

 

생멸심이란 찰라생 찰라멸 하면서 매 순간 움직이는 이런 생각하는 마음이며,

진여심이란 움직이지 않는 부동심이며, 그러므로 불생불멸심이다.

 

"나"라는 것은 <영원함>을 뜻하는데,

생멸심 속에 그 "나"가 있는가? 아니면 부동심 속에 그 "나"가 있는가?

 

찰라생 찰라멸하는 이런 생멸심 속에는 끝없이 변하기에 고정된 "나"라는 것을 찾을 수 없으며,

부동의 진여심에는 본래 텅비어 고요한 적멸이기에 뭔가 찾을 만한 실체가 있을 수 없다.

 

 

 

왜 중생들은 기필코 이 "나"에 대한 집착을 못버리는가?

왜 또 참나/진아...이런 것 따위에 얽매이는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왜냐면, 이 거짓된 자아인 나/에고/자아라는 놈은

반드시 나라고 여길만한 대상을 찾고, 그걸 나라고 여겨버리는게 특징이다.

 

그래야만, 이 거짓된 자아...즉 "나"는 생존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이 없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면 본래 나라는 것은 없기에, 마음 속의 이 거짓된 "나"는 무조건 나라고 여길만한 대상을 찾아서

그걸 나라고 여기고야 만다. 이게 소유욕의 뿌리이다.

 

그렇기에 공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그 근처에서 서성이는 자들이

그 공을 나라고 여기고야 만다. 이것이 최고의 병통이다.

 

그래서 잘못 이해하는 용어가 바로 진공묘유다.

"아, 맞아...진정한 공에 바로 오묘함이 있고, 그게 바로 진정한 나...참나야"

 

이렇게 속아넘어가고야 만다.

 

이쪽걸 버리고, 저쪽에 붙어서 그걸 집착한다면.....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런 불자들이 수두룩하다.

 

전혀 깨달음이 없고, 깨달았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무아/공....

이런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은 "나"를 철저하게 박살내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해탈하는 것 아니던가?

 

 

모든 고통의 뿌리는 "나"이다.

그렇다면 진아/참나는 행복의 뿌리인가? 이것처럼 멍청한 소리는 없다.

 

"나"가 본래 없는데,

뭔 어러죽을 진아/참나가 있겠는가?

 

 

 

인무아/법무아 아니던가?

공은 크게 아공/법공 아니던가?

 

거기에 뭔 "나"가 있는가? 당연히 없다.

 

 

 

 

열반경의 <상락아정>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이걸 잘못 이해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고, 또한 온갖 삿된 무리들이 생겨난다.

 

空한 것을 속제의 방식으로 설명한게 바로 <상락아정>이다.

한 것을 진제의 방식으로 설명하면 어떻게 될까? 상락아정도 아니게 된다. 그저 이것도 희론일 뿐이다.

 

 

반야심경에 <진실불허>라는 용어가 나온다.

이 용어도 역시 속제에 촛점을 맞추어서 설명한 용어이다.

 

반야바라밀은 진실불허하다.. 이것이 속제 방식에 맞춘 설명이고,

반야바라밀은 진실하지도 않고 진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이것이 바로 진제 방식에 맞춘 설명이다.

 

진제에는 뭔가 따질만한 것이 없기에,

이렇다 저렇다 표현한다한들 그 표현이 맞을 수가 없다.

 

그러나 중생들에게 억지로 이해시키기 위해서 진실하다고 표현한 것이다.

왜냐면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해탈을 얻기에 진실하다고 속제방식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상락아정도 또한 이와 같은 표현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이걸 전혀 이해못하고, 오히려 꺼꾸로 이해한다.

 

 

 

상락아정을 열반사덕으로 여기기 전에, 사전도[4전도]임을 우선 배워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 상락아정을 네가지 잘못된 착각으로 가르치셨다.

 

상 : 중생들은 변하는 것을 항상하다고 여긴다.

락 : 중생들은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여긴다.

아 : 나라는게 본래 없는데 나라는게 있다고 여긴다.

정 : 중생들은 더러운 걸 깨끗하다고 여긴다.

 

이게 상락아정의 본래 뜻이다.

 

 

 

 

참나/진아가 있다고 믿으면, 거기에 집착할 수 밖에 없다.

집착이 있는 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세상에 믿을 것은 그 무엇도 없다.

실체가 있는 것은 그 무엇도, 그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바로 <필경공>이다.

 

 

 

나/참나/진아가 있다고 믿는다면, 해탈은 불가능하다.

그런건 본래 없다.

 

집착할 대상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필경공이다.

 

 

 

나/자아/에고란 놈은 지독하게 교활하고 속임수가 강해서,

기필코 자신으로 여길 대상을 찾아 헤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이 "나"라는 생각은 그저 단순히 생각 속에서만 있을 뿐이다.

 

생각이란 과거에 대한 기억의 집합을 떠올리는 것에 지나지 않고,

그런 과거에 대한 생각 속에서만이 "나"는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거짓이며, 본래 없는 것이다.

왜냐면 생각 자체가 실체가 없는 허깨비이기 때문이다.

 

 

 

참나/진아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참나/진아가 있다고 믿는다면 너무나도 멍청한 짓이다.

 

 

그렇다고 텅빈 공을 참나/진아로 여긴다는 것도 완전 바보짓이다.

거기에 뭐가 있다고.....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적멸한데....거기에 뭐가 있어서 그걸 "나"라고 여긴단 말인가...

 

 

 

속지 말아야 한다.

그 어디에도 "나"는 없다. 그러므로 참나/진아..이런것도 당연히 없다.

상위자아란 것도 역시나 없다. 그것도 착각이다.

 

 

"나"도 집착을 불러오고,

"참나"도 집착을 불러올 뿐이다.

 

"나"라는 게 본래 그런 기능을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놈이 진짜 악마다.......라고 많이 말씀하셨다.

"나"라는 놈은 거짓말쟁이이며, 사기꾼이고, 모든 존재를 망치는 악마이다.

 

중생들은 그걸 전혀 이해못하고, 나를 위하고 있다.

자신을 망치는 주범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고 있으니 고통에서 못 벗어난다.

 

"나"라는 이 생각이 모든 고통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당신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당신이 괴로울 때, 당신 마음을 관찰해보면 알 수 있다.

괴로울 땐 언제나 촛점이 "나"에게 맞춰져 있으니까....

 

 

 

 

"참나"를 찾아봐야 없다.

뭐가 "참나"인가?

 

설사 정말 있어서 찾는다고 쳐도, 그대에게 고통만을 불러올 뿐이다.

 

그러나 당연히 "참나"란건 본래 없다.

모든 것은 인연화합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본래의 마음은 텅비어 허공과 같아서 "나"라고 여길만한 대상조차 없다.

 

허공과 같은 마음에 뭔 참나/진아가 있겠는가?

헛소리에 지나지 않다.

 

 

 

텅빈 空을 <참나>라고 여기지 말라.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용수보살께서 가장 위험하다고 경고하신 것이다.

최후의 집착이기 때문이다.

 

 

 

집착할 곳이나 대상은 그 무엇도 없다.

그래서 공이다.

 

뭔가 실체가 있다면, 그 실체는 진실하여 영원할테니 어찌 변화가 있겠는가?

 

중생들은 변하는 걸 자신으로 여긴다.

이렇게 마음이 움직여 생각하니까, 이걸 나라고 여기는 것이다.

 

변하지 않아서 영원하다면, 생각이 일어날 수가 없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라고 여길 수조차 없게 된다.

 

 

생각의 흐름 속에서만이 "나"라고 여기는 마음이 생길 뿐이지, 거기에 "나"는 없다.

"나"는 착각의 산물이다.

 

마음이 마음에게 속는 것이다.

 

 

일체유심조...

믿는대로 된다.

 

"나"가 있다고 믿으니, 끝없이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중생의 운명이다.

 

 

이런 헛됨을 깨부수어주는 부처님의 가르침....

그 얼마나 위대하던가.....

 

 

 

"나"가 없다면 뭐가 있는가?

 

의식의 흐름이 있다.

그 의식의 흐름속에 "나"가 있다는 착각이 존재한다.

 

그래서 <일체유심조>이다.

 

 

 

 

 

참나/진아/주인공 등의 용어는 하나의 방편인 것이지, 실제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제(진여,불성,여여,空)을 참나/진아/주인공으로 표현한 것인데,

이 진제에는 텅비어 있어서 있다 없다 따질만한 대상 자체가 없다.

 

 

참나/진아/주인공...

이러한 용어를 초보자나 또는 많이 배우지 못한 불자들이 접하게 된다면,

거의 백프로 <상주론>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용수보살께서도 중론에서 말씀하시길,

이 공에 뭔가 실체로 여길만한게 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셨다.

 

그걸 최고의 병통으로 말씀하시고, 그 누구도 그 병은 못고쳐준다고 하셨다.

자아의 마지막 발악이자 최후의 보루이므로 결코 그걸 놓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를 처음 접한 초보불자, 또는 깊게 공부하지 않은 불자가

참나/진아/주인공.....이러한 용어를 접하게 된다면,

외도들과 똑같이 상주론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참나/진아/주인공을 영원한 어떤 실체로 여기고,

그걸 자신으로 여긴다면 그건 대단한 역효과다.

 

그러므로 이러한 용어를 쓸 때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무인아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oonceo/15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