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자는 괴로워하지 않는다
어느 법우님이 말했다. 우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여자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나이 든 사람에 대하여 여자로 보다는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법우님은 “우리는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사람이기는 남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남성성은 점차 약화되고 여성화 되어 간다. 여성 역시 나이가 들면 점차 남성화 되어 간다. 나이가 든 노부부를 보면 알 수 있다. 등이 굽을 정도로 늙었을 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사람을 오온으로 본다면
사람보다는 오온(五蘊)이 나을 듯 하다.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을 다섯 가지로 분석하여 설명했다. 색, 수, 상, 행, 식이라는 오온이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를 보면 “저기 오온이 간다.”라고 말할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 “정신-물질이 간다.”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말로 명색(名色)이 가는 것이다.
“명새기 내가”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자신을 지위와 동일시 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명새기 내가 사장인데.”라며 우월적 자만을 표출한다. 이때 명새기는 명색을 뜻하는 것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오온이다. 정신-물질 작용을 하는 자를 말한다.
정신-물질 작용으로 설명되는 오온에 남자 또는 여자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멋있는 남자를 보아도, 아무리 예쁜 여자를 보아도 정신적 물질적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82가지 파라맛타(paramattha)가 생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S22.95)
왜 물질을 포말과 같다고 했을까?
강에 가면 포말을 볼 수 있다. 비누거품 같은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형태를 지니고 있어서 견고해 보인다. 그러나 안을 보면 텅 비어 있다. 우리 몸도 포말 같은 것이다. 단단해 보이지만 잘개 쪼개면 텅 비어 있다. 일시적으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몸은 지, 수, 화, 풍 사대로 구성되어 있다. 딱딱함은 땅의 요소, 응집력은 물의 요소, 뜨거움은 불의 요소, 경쾌함은 바람의 요소이다. 정신작용이 있어서 몸이 유지 된다. 정신작용이 없으면, 죽으면 우리 몸은 사대로 흩어져 사라진다. 그렇다면 사대라는 빠라맛타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좌선할 때 복부의 움직임과 행선할 때 발의 움직임으로 사대라는 빠라맛타를 볼 수 있다. 복부가 불러오는 움직임, 꺼지는 움직임 같은 것이다. 발을 들었을 때 드는 동적, 미는 동작, 구부림이나 폄 등은 풍대(風大)에 대한 것이다. 어떤 동작이든지 육체적 과정을 관찰할 때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물질에 대하여 포말과 같다고 한 것이다.
통증은 물거품 같은 것
왜 느낌을 물거품 같다고 했을까? 물거품의 특징은 금방 사라지는 것이다. 비가 세차게 내릴 때 땅바닥에 물거품이 일어난다.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은 매우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마음을 집중하면 더 빨리 보일지 모른다.
수행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초당 마음의 변화를 기본적으로 50번 알 수 있다고 한다. 수행의 힘에 따라 더 많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부처님의 경우 초당 천번, 만번, 십만번, 백만번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엄청나게 아실 것이라 한다. 통증을 예로 들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자연스럽게 통증을 관찰하게 된다. 좌선해서 이삼십분 앉아 있다 보면 다리에 통증이 시작된다. 이럴 경우 자세를 바꾸지 말고 한시간 동안 앉아 있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통증을 관찰하라고 한다. 통증을 관찰하는 것이야말로 열반으로 가는 열쇠라고 말한다.
가부좌했을 때 통증이 일어나면 참을 수 없이 괴롭다. 마치 불구가 될 것처럼 염려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염려는 없을 것이라 한다. 통증은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통증을 잘 관찰하면 빠라맛타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럴 때 통증은 물거품 같은 것이다.
통증은 왜 물거품 같은 것일까? 찬먜사야도에 따르면 “통증 그 자체에서 깨닫고 있는 것은 단지 통증에 무질서하게 구성되어진 물질의 많은 작은 입자들이기 때문입니다.”(위빳사나수행 28일, 294p)라고 말했다. 통증은 작은 알갱이들과 같다는 것이다. 이 알갱이들이 통증이라는 괴로운 느낌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잘 관찰하면 물거품과 같은 통증은 폭발하거나 분해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느낌에는 실체가 없다. 지금 괴로운 느낌이라 하여 “괴로워 죽겠어”라고 말한다면 괴로움에 실체를 부여 하는 것과 같다. 괴로움이라는 것이 있어서 나를 괴롭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나(我)’가 있다. 그러나 잘 관찰하면 느낌은 순간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통증이 사라지는 것은 수 많은 알갱이가 터지는 것과 같다. 괴로운 느낌은 물거품 같은 것이어서 관찰하면 분해되고 흩어지고 폭발하여 사라지는 것이다. 마치 세찬 비가 올 때 바닥을 때리며 사라지는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느낌에 대하여 물거품과 같다고 한 것이다.
목마른 사슴 한마리가
지각에 대하여 아지랑이 같은 것이라 한다. 아지랑이는 실체가 없다. 지각은 요즘말로 이미지와 같은 것이다. 그 사람 이름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의 이미지가 떠 오른다. 나에게 잘 해 주었다면 긍정적 이미지이고, 나를 힘들게 했다면 부정적 이미지가 떠 오를 것이다. 이런 이미지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다. 조건 발생했으니 조건이 다하면 소멸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 사람의 이미지에 매달려 있다면 이미지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과 같다.
이미지는 신기루와도 같은 것이다. 신기루란 무엇인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가 보면 아무것도 없다. 대기와 빛 등으로 인한 자연현상으로 인하여 멀리서 보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아무것도 없다. 지각이 그런 것이다.
목마른 사슴 한마리가 있다. 멀리서 물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면 물은 없다. 사슴은 신기루를 보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지각하는 것이 영원하고 실체적인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것들에 주의 기울여 보면 실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허깨비를 본 것이다. 그 사람 이미지를 떠 올리고 그 사람과 동일시 하는 것과 같다.
중학교 다닐 때 영어시간에 배운 문구가 하나 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I am not what I was.”라는 말이다. 이 말은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지금 그 사람의 이미지가 떠 오르지만 옛날 이미지일 뿐이다. 그 사람은 계속 변해 가고 있다. 어느 것이 그 사람의 이미지인가? 그래서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신기루와 같다고 했다.
화내는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아라
형성에 대하여 파초와 같다고 했다. 형성을 뜻하는 행온은 느낌, 지각을 제외한 50가지 마음부수를 뜻한다. 50가지에는 선법도 있고 불선법도 있다. 불선법이라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 질투, 자만 등 온갖 해로운 마음부수를 말한다. 이런 것도 빠라맛타이다.
50가지 마음부수 역시 실체가 없다. 마치 양파껍질을 까는 것과 같다. 경에서 파초 또는 바나나나무로 비유하고 있다. 나무처럼 보이지만 나무가 아니라 다년생 식물이다. 그래서 껍질을 벗기면 심재가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벗겨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50가지 마음부수도 그렇다는 것이다.
탐욕, 분노, 근심, 의심 등 격정에 휘말릴 때가 있다. 이들은 실체가 없다. 그런 사실을 알고 관찰해 보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앞의 힘이 너무 센 것이다. 관찰하는 힘이 약했을 때 앞의 힘에 의해 압도된다. 그래서일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하는 것이다.
도둑질이 나쁜 것임을 잘 알고 있지만 자꾸 손이 가는 것은 관찰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본적 욕망은 성욕, 식욕 역시 마찬가지이다. 관찰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오계에서 ‘도둑질 하지 말라’고 하지만 더 좋은 것은 ‘도둑질 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그대로 지켜 보라’고 하는 것이다.
사띠의 힘이 강해졌을 때 손이 나가지 않을 것이다. 화가 났을 때 ‘화내지 말라’라고 말하기 보다는 ‘화내는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아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음을 빠르게 예리하게 확실하게 관찰하면 관찰의 힘이 강해진다. 그래서 실체도 없는 50가지 마음부수가 이전 마음이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지켜 보고 있는 나가 있다고?
마지막으로 의식이다. 의식에 대하여 환술과 같다고 했다. 마치 마술사가 마술로 사람의 눈을 속이는 것처럼, 의식은 우리를 속인다는 것이다. 어떻게 속일까? 여기 한 생각이 일어났다. 이때 ‘생각함, 생각함’이라 명명하여 관찰하면 사라진다. 여기서 생각하는 마음이 의식이다. 이런 때 ‘나는 생각하고 있다’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나는 없다. 그럼에도 생각하는 나가 있다고 여길 때 의식은 나를 속이는 것처럼 보인다.
대상이 일어나면 관찰하게 된다. 관찰하게 되는 마음을 또 관찰하는 마음이 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어떤 마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마음은 수, 상, 행, 식 중에서 식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그 전체적으로 알고 있는 마음에 대하여 ‘나’를 붙이면 내가 주인공이고, 그것을 나라고 착각하게 된다.
의식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나, 모든 것을 지켜 보고 있는 나,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나가 있다고 착각한다. 이를 어떤 이것을 참나라고 한다. 그러나 영원불변하는 나는 없다. 있다면 조건발생하는 나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의식이 윤회한다고 말하는 사띠비구에 대하여 “어리석은 자여, 의식도 조건적으로 함께 생겨난다는 것, 즉 조건 없이는 의식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M38)라며 강하게 질책했다.
지혜로운 자는 괴로워하지 않는다
크고 작은 일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때 마다 괴로움을 겪는다. 하나가 해결되고 나면 또 하나가 발생한다. 어떤 것은 너무 커서 감당하지 못할 정도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마다 “오! 괴롭다. 오! 고통이다.”라며 외쳐 대야 할까?
괴로움이 발생할 때 알아 차려야 한다. 먼저 잘 관찰 하는 것이 요구된다. 사띠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이것이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 그 자체는 영원한 것도 아니고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어날 만한 해서 발생된 것이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지혜의 영역에 속한다.
지혜로운 자는 괴로워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자는 즐거워하지도 않는다. 괴로운 일이 발생해도 즐거운 일이 발생해도 즉각 알아차린다. 여기 행복한 자가 있다. 그는 이 행복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행복은 단지 즐거운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조건이 다하면 소멸하고 만다는 것을 안다면 지금 누리는 이 행복은 즐거움이 아니다.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오히려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오욕락에 대하여 “그것들은 하늘사람과 인간의 세상에서 즐거운 것이라 여겨지지만 그들이 소멸될 때가 되면 그들은 그것들을 괴로운 것이라 여기네.”(S35.136)라고 했다.
윤회의 출구
즐거워도 내가 즐거운 것이고 괴로워도 내가 괴로운 것이다. 이것은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이다. 항상 나가 개입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즐거울 때는 “좋아 죽겠어!”라고 말하고, 괴로울 때는 “괴로워 죽겠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죽을 정도로 즐겁고 죽을 정도로 괴로운 것이다. 갈애가 개입 되어 있기 때문이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 갈애로 넘어간다. 갈애로 넘어가는 순간 연기가 회전된다. 그 결과는 항상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십이연기에서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라고 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연기의 회전으로 인하여 “모든 괴로움의 다발이 함께 생겨난다.”라고 했다.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는 것은 열반의 길로 가는 것이다. 마치 고속도로 인터체인지(IC)를 빠져 나가는 것과 같다.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면 윤회의 출구를 빠져 나가는 것과 같다. 십이연기 회전이 멈추는 것이다.
관찰대상도 무상하고 관찰하는 마음도 무상하고
십이연기는 조건발생이다. 이는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식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돌고 도는 십이연기의 회전에서 회전의 주체는 없다. 윤회의 주체가 없는 것이다. 모두 연이어 조건 발생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십이연는 우리 몸과 마음에서 매순간 일어난다. 그래서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잘 관찰하면 보인다.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도 영속하지 않고 실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 관찰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관찰대상도 무상하고 관찰하는 마음도 무상하다. 이를 아는 마음 역시 무상한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집착할 것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에 대하여 포말, 거품, 아지랑이, 파초, 환술과 같은 것이라 했을 것이다.
2019-05-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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