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제1칙 달마대사와 양무제
“불법의 지혜는 현실의 삶에서 구현돼야”
{벽암록}제1칙은 중국선종의 초조로 추앙받는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에 건너와 처음 불법천자라고 하는 양(梁)의 무제(武帝)와 불법에 대한 대의에 관하여 대화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양무제가 달마대사에게 질문했다.
“ 무엇이 불법의 근본이 되는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달마대사는 말했다.
“ 만법은 텅 빈 것. 성스럽다고할 것이 없습니다.”
양무제는 다시 질문했다.
“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달마대사는 말했다.
“불식(不識).”
양무제는 달마대사의 말을 깨닫지 못했다.
달마대사는 마침내 양자강을건너 위(魏)나라로 갔다.
양무제는 뒤에 달마대사와의대화를 지공화상에게 말하자,
지공화상이 말했다.
“ 폐하! 달마대사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양무제는 말했다.
“불식(不識; 모르겠습니다).”
지공화상이 말했다.
“그는 관음대사이며,부처님의 정법을 계승한 사람입니다.”
양무제는 깊이 후회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어 다시 초빙하고자 하자,
지공화상이 말했다.
“폐하께서 사신을 보내어 모셔오려고 하지 마십시오.
온 나라 사람이 모시러 가도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를 마음 밖에서 찾으면
‘본래면목’은 영원히 못찾아
양무제가 질문한 ‘불법의 근본이 되는 성스러운 진리(聖諦第一義)’는 {육조단경}에서 홍인이 제자들에게 과제로 제시한 ‘불법의 대의’를 말한다. 불법의 대의란 번뇌 망념을 텅 비우는 공(空)의 실천으로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는 반야사상과 반야의 지혜를 언제 어디서고 마음대로 전개하는 자각의 주체인 불성사상을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육조단경}에서는 불성을 깨닫는 돈오견성(頓悟見性)과 반야바라밀의 법문으로 대승불교의 전체를 통합하여 조사선의 새로운 선불교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사람이 자신의 견해를 게송으로 제시하고 인가를 받아 조사로서 불법을 계승하도록 {육조단경}은 이야기하고 있다.
{벽암록} 제1칙에서는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을 부처님의 정법을 이은 선종의 초조인 달마에게 불법천자로 유명한 양무제가 질문하는 대화를 통해서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달마는 일체의 만법은 본래 텅 빈 것(一切皆空)인데 성(聖)스럽다고 할 고정된 법은 없다고 대답한다.
{금강경}에는 ‘고정된 법은 없다(無有定法)’는 말이 있다. 반야의 지혜는 마음을 어디서도 머무름이 없도록 하는 무주(無住)와 어떠한 경계나 모양도 취하지 않는 무상(無相)의 실천을 하라는 것이다. 즉 불법은 시간과 공간이 함께하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일체의 존재와 함께 반야의 지혜와 자비를 나누는 삶을 지혜롭게 사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양무제의 질문에는 불법은 ‘성(聖)스러운 진리’이며 어떤 고정된 법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달마는 이러한 양무제의 착각과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리고 양무제가 성(聖)스럽다고 생각하고 질문한 것은 세간과 출세간적인 차별심에 토대를 둔 범부(凡)와 성자(聖)라는 상대적인 분별심이 작용하고 있다. 성(聖)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은 범부(凡)적인 차별심에서 비롯된 중생심이다. 시끄러움을 버리고 조용함을 추구하거나, 미혹함을 버리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상대적인 분별심도 마찬가지이다.
즉, 양무제의 질문은 불법의 근본이 성스러운 것이라는 차별심과 착각에 떨어진 양무제를 범성(凡聖)의 차별이 없는 본래의 텅 빈 마음을 체득하는 것이 불법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올바르게 제시한 정확한 대답인 것이다.
그러나 양무제는 달마대사의 법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다시 중생심으로 “나와 마주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한다. 달마대사는 “불식(不識)”이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양무제는 자기와 달마라는 주객(主客)의 상대적인 대립과 차별심에 떨어졌고, 또한 달마대사 당신은 성스러운 성자가 아닙니까? 라는 고정관념과 분별심으로 질문하고 있다.
이러한 주객과 상대적인 분별심에 떨어진 양무제의 질문에 대하여 달마는 불식(不識)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달마가 말한 불식(不識)을 ‘모르겠습니다’라고 번역하면 주객(主客)과 범성(凡聖)에 대한 상대적인 분별심이 된다. 즉 알고 모르는 중생심의 분별 의식에 떨어진 대답이 된다.
달마가 ‘불식(不識)’ 이라고 말한 것은 ‘나는 황제인 당신과 주객(主客)의 대립이나 상대적인 차별심이 없다.’는 입장이다. {열반경}에 “법에 의거하고 사람에 의거하지 말며, 지혜에 의거하지 분별의식(識)에 의거하지 말라”고 설한 불법의 정신을 알아야 한다. 식(識)은 중생심의 분별작용이며 불식(不識)은 불심의 지혜작용이라는 사실이다.
즉, 달마는 주객(主客)과 범성(凡聖)에 대한 상대적인 차별심으로 질문하고 있는 양무제를 불심의 지혜로 정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심으로 접근한 양무제는 달마가 불심의 지혜로 제시한 정법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법의 참된 정신(大意)를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달마대사를 양나라에서 추방하게 되었고, 달마는 양자강을 건너 당시 위(魏)나라의 숭산 소림사에서 벽을 향해 앉아서 좌선 수행하며 머물게 된다.
양무제는 당시 유명한 지공[寶誌]화상에게 달마대사가 어떤 인물인지 묻자. 지공은 그는 관음대사이며 부처님의 정법을 전해 받은 조사라고 말하자 그를 다시 불러오도록 한다.
지공은 온 나라 사람이 찾아가서 그를 다시 모시려고 해도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달마의 입장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달마의 동요됨이 없는 불심의 경지와 양무제의 안목없는 후회를 통감하게 하는 입장을 함께 대변하고 있는 말이다. 설두는 이러한 양무제의 입장을 ‘천고 만고에 부질없이 아쉬워하네’라고 게송으로 읊고 있다.
양무제의 허물은 달마를 마주하고도 달마의 참된 모습(眞相: 法身)을 친견하지 못하고 지공화상의 설명을 듣고 달마대사가 어떤 사람인지 중생의 분별심으로 인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공화상이 “폐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십니까?” 질문하니, 양무제는 “모릅니다(不識)”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양무제가 말한 불식(不識)은 중생심으로 진실을 알지 못하는 지혜없는 무지(無知)이다. 달마가 대답한 불식(不識)과 똑같은 말을 사용하지만, 불심의 지혜작용으로 대답한 달마의 입장과 내용은 전혀 다르다.
설두의 게송에 “여기에 달마가 있느냐? 스스로 ‘있다.’라고 대답하고는 그를 데려다가 노승의 다리나 씻기도록 해야겠다.”라고 읊고 있다. 이 일단은 {조주록}에서 조주가 한 말을 인용한 것인데, 이 공안을 읽고 있는 학인들에게 경책하는 일절이다.
여러분들은 양무제와 달마의 대화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한 이야기로 이해하고 있는가? 양무제처럼 달마를 대상으로 찾는 마음이 있는가? 달마나 부처를 자신의 마음 밖에서 대상으로 찾는다면 영원히 양무제처럼 달마의 본래면목(眞相)을 찾을 수가 없다. 그 달마대사를 찾는 그대의 마음이 달마의 참된 면목이니, 그(자신의 불심)를 데려다가 자신의 발이나 씻기도록 하라.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지혜로운 삶은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의 발을 씻는 일’이다. 불법의 지혜는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의 일(삶)을 떠나서 실현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벽암록 제2칙-지극한 불도는 조금도 어려움이 없다(至道無難)
“미혹함과 깨달음에 대한 분별심을 초월하라”
2칙은 조주화상의 법문은 [신심명]의 일절을 인용하여 ‘지극한 불도는 조금도 어려움이 없다(至道無難)’는 내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선문답을 싣고 있다.
조주화상이 대중스님들에게 법문 하였다.
“‘지극한 불도는 조금도 어렵지 않다. 오직 취사 선택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말하는 순간에 벌써 취사선택(揀擇)하는 마음에 떨어지거나 깨달음(明白)의 세계에 떨어진다.’ 나는 깨달음(明白)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 깨달음(明白)의 경지를 수행의 목적으로 삼고 보호하고 아끼려고 하는가? ”
그 때에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깨달음(明白)의 경지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무엇을 보호하고 아껴야 할 것이 있습니까?”
조주화상이 말했다.
“나도 모른다(不知)”
그 스님이 말했다.
“화상께서 모르신다면 어째서 깨달음(明白)의 경지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씀 하십니까?”
조주화상이 말했다.
“나에게 질문하는 일이 끝났으면 인사나 하고 물러가게!”
깨달음을 기대하거나 집착하면
선병(禪病)걸려 바른 수행 할 수 없어
2칙에 인용된 [신심명]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지극한 불도를 체득하는 일은 조금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오직 취사선택하고 분별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깨달음의 경지는 분명히 들어나리라.”
여기서 말하는 지도(至道)는 차별 분별심과 시기 질투의 미혹한 중생심을 벗어나 번뇌 망념이 없는 본래 청정한 불심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조사선에서 ‘번뇌 망념이 없는 청정한 마음이 도(無心是道)’라고 했고, 마조도 평상심(본래심)이 도(道)라고 설했다. 혜능도 ‘도(道)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지도(至道)나 불도(佛道)는 불심을 깨닫는 그 마음이며 부처의 지혜작용을 말한다. 어떤 고정된 불도(佛道)나 지도(至道)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 불도를 마음 밖에서 찾아 해매는 사람은 영원히 불도를 깨달을 수가 없다.
{신심명}은 이러한 조사선의 선사상을 토대로 하여 불도를 깨닫는 법문과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로 읊은 선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인데, 특히 조주화상은 신심명을 많이 인용하여 독자적인 법문을 펼치며 학인들을 지도하고 있다.
불도란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자각하여 본래 청정한 불심(佛性)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선에서 말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은 번뇌 망념이 없는 청정한 불성(佛心)을 깨닫게 되면 그대로 부처를 이루는 법문을 요약한 말인데, 화엄교학에서도 ‘한 생각의 번뇌 망념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대로 부처(一念不生名爲佛)’라고 설하고 있다. 이는 번뇌 망념이 없어진 그대로가 불심이기 때문이다. 불심을 깨닫는 것이 지도(至道)이며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중생심(不覺)에서 불심(本覺)으로 되돌아가는 논리적인 구조로 설명하고 있는데,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본래의 불심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수행방법이 참선수행이며 깨달음을 체득하는 불법이다.
{신심명}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불도를 체득하기란 지극히 쉬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각자 자기 마음으로 자각하고 체득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불도나 불법을 자신의 마음 밖에서 얻고, 남에게서 받아내야 한다면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마치 자신의 몸과 손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일과 같이 지극히 쉬운 일이다. 취사선택하는 번뇌 망념의 분별심(중생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지도’의 경지를 이루게 되며, 또한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기만 하면 불심을 깨닫고 불도를 이루게 된다.
조주화상은 신심명의 구절을 약간 바꾸어서 “한 마디의 말이라도 하게 되면 취사 분별심에 떨어지게 된다”라고 설한다. 깨달음의 경지는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경지(言語道斷)이며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이다. 개념화된 언어로 표현하면 벌써 깨달음의 경지를 대상화하여 설명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차별심과 분별의식에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조주 화상은 “나는 분별심의 중생세계에도 머무르지 않고 또한 깨달음의 경지인 불심의 경지에도 머무르지 않는데, 그대들은 중생심의 경지를 벗어나 깨달음의 경지를 목적으로 수행하고 깨달음의 세계에 안주하려고 하느냐?”라고 설하고 있다. 즉 ‘나는 번뇌 망념의 중생심은 물론, 깨달음의 경지인 불심의 경지까지도 초월하여 살고 있는데 그대들은 깨달음을 구경의 목적으로 삼고 수행하고 있지 않는가?’라고 학인들을 경책하는 법문이다.
선수행은 미혹함과 깨달음을 모두 함께 초월해야 올바른 깨달음의 경지를 이룰 수가 있다. 미혹함에서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여 그 경지에 도달하고 그 곳에 안주하게 되면 깨달음의 경계가 결국 집착의 대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또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은 올바른 수행이 될 수가 없고 불도를 장애하는 수행이 되기 때문에 가장 고치기 어려운 수행자의 선병(禪病)이 된다.
또한 참선 수행자가 깨달음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수행하는 사람도 영원히 깨달음을 이룰 수가 없는 선병이다. 깨달음을 기대하거나 그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그대로 중생심이며 집착심이기 때문에 이러한 집착심을 가지고는 영원히 불심을 체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수행자가 조주화상에게 “깨달음(明白)의 경지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무엇을 보호하고 아껴야 할 것이 있습니까?”라고 날카로운 질문을 하고 있다. 사실 깨달음의 경지까지 초월한다면 아끼고 보호하고 수행의 목적과 대상으로 삼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조주화상은 “나도 모른다(不知)” 라고 대답했다. 조주가 말한 ‘부지(不知)’는 지혜가 없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가 아니다. 선어록에서 지(知)나 식(識)은 알음알이(知解)나 분별의식을 말한다. 조주가 ‘나는 깨달음의 경지에도 머물지 않는데’ 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중생심의 차별과 불심의 깨달음(明白)의 경지까지도 모두 초월한 근원적인 본래심(佛心)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제1칙에서 언급한 달마의 ‘불식(不識)’과 마찬가지로 중생심의 차별과 분별의식이 없는 조주의 입장이다.
그런데 그 수행자가 “화상께서 모르신다면 어째서 깨달음(明白)의 경지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씀 하십니까?” 라고 다구치며 조주화상이 달아나는 길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 벽암록의 저자인 원오극근은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러한 질문을 받았다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당황하게 되었을 것이다. 조주화상은 훌륭한 선지식(作家)이기 때문에 그 스님에게 “나에게 질문하는 일이 끝났으면 인사나 하고 물러가게!” 라고 마지막 한마디를 할 수 있었다고 조주화상의 기지(機智)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그 질문한 스님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숨을 죽인 채 물러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라고 하고 있다.
이에대해 설두는 “불법을 체득하는 일은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취사선택하는 중생심과 깨달음의 불심을 그대의 마음에서 잘 살펴서 깨닫도록 해야 한다.” 라고 수행자들에게 각성시키는 게송을 남겼다.
벽암록 제3칙 - 마조화상의 병환
마조화상의 병환생사대립 초월한 경지가 곧 ‘법신불 세계’
마조도일화상이 병환으로 몸이 편치 않았다.
원주스님은 마조화상에게 물었다.
“화상께서는 요즈음 법체가 어떠하십니까?”
마조화상이 대답했다.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 이네.”
擧. 馬大師不安. 院主問, 和尙近日, 尊候如何. 日面佛月面佛.
이공안은 〈조당집〉14권 마조화상전에 전하고 있는 유명한 선문답인데, 마조화상이 입적하기 얼마 전에 병환으로 고통받고 있는 마조화상에게 원주가 건강을 여쭙는 인사말이다.
일면불 월면불은 불생불멸 상징
머리로만 이해말고 ‘체득’해야
‘불안(不安)’은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않는 상태로서 육체적인 병환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선불교에서는 육체적인 병환과 함께 번뇌 망념의 중생심으로 고통 받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불교의 가르침은 번뇌 망념의 불안한 중생심의 고통을 벗어나(解脫) 깨달음의 경지에서 평안하고 안정되고 지혜로운 삶을 사는 방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이러한 경지를 안신입명(安身立命)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공안은 마조화상의 육체적인 병환을 걱정하여 여쭙는 원주의 질문에 마조화상은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이지” 라고 짧게 대답하고 있다.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에 대해서 〈불명경(佛名經)〉 제7권에는 “월면이라는 부처님이 있는데, 그 월면불의 수명은 일일일야(一日一夜)이며, 일면(日面)이라는 부처님이 있는데 그 일면불의 수명은 1800세라고 한다.” 라고 설하고 있다. 마조화상은 불명경에서 설하고 있는 월면불과 일면불을 입장을 예로 들어 자신의 경지에서 대답하고 있다.
사실 대승불교의 특징은 불명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공간적으로는 시방(十方)과 시간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서 무수히 많은 부처의 이름을 제시하고 있다. 즉 다불(多佛)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부처는 어떤 존재인가?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처럼, “만약 부처라는 모양(色)으로 부처를 구하거나 음성(소리)으로 부처를 구한다면 여래를 친견 할 수가 없다.”라고 설한다. 즉 부처나 여래를 자신의 마음 밖에서 추구하는 목적 대상으로 설정하여 찾아 구한다면 영원히 부처나 여래를 친견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主)가 부처(客)를 구한다는 주객(主客)의 상대적인 대립과 부처나 여래라는 대상적인 분별심으로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분별심과 중생심을 떨쳐버리지 않는 한 여래나 부처를 친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부처나 여래를 친견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여래나 부처는 어떤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다고 한다면 부처나 여래는 어디에 있으며 부처나 여래는 무엇이며 어떻게 친견해야 하는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이 문제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면 참된 부처나 여래를 친견할 수가 없는 것이며, 한 평생 헛되이 엉뚱한 옆길에서 불법을 찾아 해매는 한심한 수행자가 되고 말 것이다.
부처나 여래를 친견한다는 것은 마음 밖의 어떤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래 부처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즉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불성을 깨닫고 부처를 이룬다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은 자기의 법신불을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불성과 법신불을 체득하는 것을 선불교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하며, 부보(父母)라는 상대적인 차별심과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의 근원적인 불심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번뇌 망념이 없는 본래의 불성을 깨닫는 자각적인 견성(見性)의 체험이 그대로 부처나 여래를 친견하는 것이며 이러한 친견은 불성의 지혜작용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법신(法身)은 형상이 없고 여래도 가고 옴이 없기 때문에 형상으로 보거나 소리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로지 자기의 본래심(佛心)으로 자각(깨달음)하는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불성의 자각적인 지혜작용을 견성(見性)이라고 하며, 이러한 깨달음의 지혜작용을 법신불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에 경전에 등장하는 많은 부처는 법신불의 지혜작용을 말한다.
마조화상은 원주의 질문에 “일면불 월면불” 이라고 대답한 의미는 무엇인가? 마조화상은 자신의 경지를 ‘일면불과 월면불’로 표현하고 있다. 일면불과 월면불은 불명경에서는 수명이 짧은 월면불, 수명이 긴 일면불로 설명하고 있지만, 부처는 수명의 길고 짧음에 관계할 것 없이 일체의 차별심과 분별심을 초월한 깨달음의 경지에서 법신불의 지혜로 살고 있는 것이다.
마조화상은 원주가 육체적인 병환을 걱정하여 여쭙는 질문에 자신의 입장을 병환으로 고통받는 육체적인 대상을 설정하여 대답하지 않고, 병든 환자의 몸과 병들지 않은 육체, 육체나 마음이라는 이원적(二元的)이고 상대적, 차별적인 분별심을 초월한 법신의 경지에 살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일면불과 월면불은 단순히 경전에서 설명하는 부처 이름이 아니라 마조의 법신불이며 본래면목인 것이다. 마조는 육체적인 병환과 정신적인 병환, 병(病)과 불병(不病), 장수불(長壽佛)과 단명불(短命佛)의 상대적인 대립을 초월한 자신의 법신은 언제나 태양과 달처럼, 여여(如如)하게 변함없이 살고 있는 경지를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태양과 달(日月)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법신불의 경지에서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깨달음(법신불)의 경지는 중생심의 생멸이 없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번뇌 망념의 생사가 없는 불생불사(不生不死)의 경지이다. 그래서 법신불의 대표적인 아미타불은 나고 죽음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는 수명(無量壽)이라고 한다.
또한 법신불의 지혜광명은 시방세계에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무량광(無量光)이라고 한다. 〈화엄경〉제34권 ‘보왕여래성기품’에도 법신 여래의 지혜광명을 태양과 달에 비유하고 있으며, 일월이 출현하면 세간과 깊은 산 계곡에까지 비추지 않는 곳이 없는 것처럼, 여래의 지혜광명도 이와 같다고 설한다. 설두화상도 마조의 일면불 월면불에 대한 법문을 체득하기 어려웠지만, 그가 20년간의 많은 각고를 겪은 수행으로 이 공안의 의미를 파악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읊고 있다.
“마조화상이 말한 일면불과 월면불이여!. 오제(五帝) 삼황(三皇)은 무슨 물건인가? 20년간 수행하여 고생을 겪으면서, 그대(本來心)를 위하여 푸른 용이 사는 동굴에 몇 번이나 내려 갔던가? 많은 고충을 받았다(屈). 그 고충을 말로서는 표현할 수가 없네. 눈 밝은 수행자여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라!”
설두는 마조화상의 ‘일면불 월면불’을 중국인들의 이상적인 황제 오제 삼황에다 비교하여 어떠한 부처나 어떠한 황제의 이름에 끄달리거나 집착하지 말고 초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설두는 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인 부처나 오제나 삼황의 권위를 초월하여 자신의 법신불을 체득하기 위해서 20년간 많은 어려움을 견디는 수행을 하였다. 용의 턱 밑에 있는 구슬(寶珠: 법신불)을 체득하기 위해서 용이 살고 있는 창용굴에 여러 차례 들어갔다고 하는 것은 신명을 돌보지 않고 수행에 전념한 자신의 지난날을 회상한 고백이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 소굴에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상신실명(喪身失命)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행하여 마조의 법문을 통해서 자신의 법신불을 체득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마조화상의 ‘일면불 월면불’을 머리로 적당히 이해하지 말고 신중하고 철저하게 수행하여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벽암록 제4칙 덕산이 위산 화상을 참문하다
‘고봉정상에서 가불매조할 녀석’을 가르치다
{벽암록} 제4칙 - 덕산이 위산 화상을 참문하다
덕산선감(德山宣鑑)선사가 당대의 명승 위산영우(山靈祐)화상을 참문하여 불법의 지혜작용(禪機)으로 도전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덕산스님이 위산영우화상을 참문하여, 걸망을 짊어진 채로 법당에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 갔다 하더니, 뒤돌아보면서 “無(없다). 無(없어)!” 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법당을) 나가 버렸다. 설두스님이 착어(코멘트)로 말했다. “완전히 파악해 버렸네.”
덕산스님은 대문 앞에 이르러 말했다. “경솔해서는 안되지.”다시 몸가짐을 가다듬고 다시 법당에 들어가 위산화상을 친견하였다. 위산화상이 앉아 있는데, 덕산스님은 (절을 하려고) 방석을 들면서 “화상!” 하고 불렀다. 위산화상이 불자(拂子)를 잡으려 하자, 덕산스님이 갑자기 소리(喝)를 지르고, 소맷자락을 떨치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설두스님이 착어했다. “완전히 파악해 버렸네.”
덕산스님은 법당을 뒤로하고 짚신을 신고 곧바로 떠나가 버렸다. 위산화상이 저녁때에 수좌에게 물었다. “아까 낮에 찾아온 그 스님은 어디 있는가?” 수좌는 말했다. “그 당시 법당을 뒤로하고 짚신을 신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위산화상이 말했다. “이 사람은 훗날 높은 산봉우리(高峰頂上)에 암자를 짓고,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할 것이다.” 설두스님이 착어 했다. “눈 위에 또 서리를 첨가(雪上加霜) 하는군.”
擧. 德山到山, 挾複子, 於法堂上, 從東過西, 從西過東, 顧視云, 無無便出. (雪竇, 著語云, 勘破了也.)
德山, 至門首, 却云, 也不得草草, 便具威儀, 再入相見. 山坐次. 德山, 提起坐具云, 和尙. 山擬取拂子, 德山, 便喝拂袖而出. (雪竇, 着語云, 勘破了也.)
德山, 背却法堂, 著草鞋便行. 山至晩, 問首座, 適來新到在什處. 首座云, 當時背却法堂, 著草鞋出去也. 山云, 此子已後 向孤峯頂上, 盤結草庵, 呵佛罵祖去在. (雪竇, 著語云, 雪上加霜.)
‘분별심 사라진 본래심의 만남’이 곧 선문답
서로의 속내 알아보는 ‘방행과 파정’보여줘
제4칙 덕산의 젊은 혈기와 용기 있는 수행자의 면모를 잘 전하고 있다. 덕산이 걸망을 맨 채로 위산영우화상의 법당에서 동서로 왔다갔다하며 뒤돌아보고 “무(無)”라고 말한 뒤 법당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선어록은 단순한 선문답이라는 대화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선승들의 대화와 행동, 표정까지 기록하고 있다. 법당은 깨달음의 세계이며 불법을 설하는 청정한 법계이다. 따라서 법당은 선지식(법신불)의 설법으로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덕산이 이러한 법당에서 ‘무무(無無)’라고 한 것은 자신이 불법을 깨달은 법신불의 경지에서 일체의 만법을 초월한 공(空)의 경지에 있다는 사실을 위산화상에게 말과 행동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법당을 나갔다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까지도 초월한 자신의 경지를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덕산의 지혜작용(禪機)을 ‘방행(放行)’이라고 한다. 즉 자신이 체득한 불법의 경지를 위산화상에게 자유롭게 전부 다 제시해 보여주면서 불법의 지혜로서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덕산의 경지를 위산화상은 완전히 파악하였다고 설두는 코멘트를 붙이고 있다.
위산은 법당에서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위엄 있고 냉정한 눈으로 덕산의 경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며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덕산은 사찰의 입구인 일주문까지 나가서,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경솔해서는 안된다’라고 자각하고, 또다시 몸가짐을 가다듬고 다시 위산화상을 친견하고 있다. 덕산은 법당의 조실자리에 앉아 있는 위산화상에게 예배를 올리기 위해 방석을 잡고서 “화상”이라고 불렀다. 위산화상은 수행자를 맞이하기 위해 불자를 잡으려고 하는 그 순간 덕산은 갑자기 고함을 지르고 소맷자락을 떨치고 법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러한 덕산의 지혜작용(禪機)을 ‘파정(把定)’이라고 한다. 파정은 예절과 법규를 준수하는 여법한 경지에서 불법의 지혜작용을 펼치는 것을 말한다. 위대한 선승은 자유롭고 걸림 없는 선기(禪機)를 펼칠 수 있는 방행과 여법한 경지를 모두 적절하게 잘 활용할 수 있는 방편을 갖추어야 한다. 덕산은 위산화상의 처소에서 방행과 파정의 두 가지 선기를 모두 용기 있게 펼치고 떠나갔다.
설두는 두 번째 착어로 “완전히 파악해 버렸다”라고만 한다. 여기서는 덕산이 위산화상의 경지를 파악한 것을 말한다. 즉 덕산이 “화상” 이라고 인사 올리려고 하는 순간 위산화상이 덕산의 예배에 대하여 인사를 하기 위해 불자를 잡으려고 하는 마음을 파악하고 고함을 친 것이다. 조실이 불자를 드는 것은 수행자를 맞이하는 인사이다.
덕산은 위산화상의 몸과 행동을 친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위산의 법신인 본래면목을 친견하기 위한 것이다. 불자를 잡으려고 하는 위산의 본래면목을 친견했기 때문에 덕산도 자신의 본래 면목을 불성의 지혜작용인 고함으로 보답하고 곧바로 법당을 나가 버린 것이다. 선지식을 참문하여 친견한다는 것은 육체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차별심, 분별심이 없는 근원적인 본래심(불성)과 본래심과의 만남이며, 법신불의 지혜작용을 선문답이라는 언어나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하고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저녁때 위산화상이 선원의 지도자인 수좌에게 덕산의 소식을 묻자, 덕산은 걸망을 메고 법당을 등지고 짚신을 신고 떠나갔다고 한다. 이 일단은 위산화상이 ‘그대는 덕산의 경지를 어떻게 보았는가’라고 수좌의 안목을 점검하는 말이다. 그러나 수좌는 위산의 말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덕산의 행동을 그대로 전한다.
덕산이 법당을 등지고 짚신을 신고 떠나갔다고 하는 것은 덕산은 자신이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법당)에 안주하지 않고, 그 절대적인 불심의 세계까지 초월하여 중생이 살고 있는 저자거리(사바세계)로 나아가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실현하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산이 수좌에게 “이 사람(덕산)은 훗날 독자적인 깨달음의 경지(高峰頂上)를 이루고, 법당을 열어 부처나 조사의 경지까지 초월하여 불법을 펼칠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선어록에서 말하는 ‘높은 봉우리의 최정상(高峰頂上)’은 ‘백척이나 되는 긴 장대 끝(百尺竿頭)’과 같이 독자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이루는 말이다.
설두는 세 번째 착어로는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하였다.
위산상이 덕산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한 말은 사실 덕산의 스승인 용담숭신(龍潭崇信)선사가 덕산이 깨달음을 체득했을 때 말한 예언과 똑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눈과 서리는 흰색이라는 동일성이 있지만 분명히 다른 물질인 것처럼, 덕산에 대한 평가는 용담과 위산이라는 당대의 위대한 선지식이 똑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두는 코멘트 하고 있는 것이다.
설두는 덕산이 위산에게 방행과 파정의 선기(禪機)로서 불법을 도전하는 덕산을 한(漢)나라의 장수 이광(李廣:飛騎將軍)에 비교하고 있다. “이광이 오랑캐의 조정에서 죽다가 살아난 것처럼, 위산의 법당에서 살아나올 수 있는 인물이 몇이나 될까. 덕산과 같은 위인이 아니면 살아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덕산을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덕산이 비록 위산의 법당에서 도망쳤지만 위산은 그를 놓아 주지 않고 냉철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하면서 덕산이 위산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 경지를 읊고 있다. 덕산이 펼친 방행과 파정의 두 가지 선기는 모두 칼날이 상하고 말았다고 원오극근 선사도 코멘트 하고 있다.
벽암록 제5칙 설봉의 온 대지
“좁쌀 한 알에도 모든 진리가 다 들어있다”
설봉의존(雪峰義存 : 832~908)선사의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설봉화상이 대중에게 법문하였다. “온 대지를 손가락으로 움켜서 집어 들면 좁쌀 크기만 하네. 이것을 눈앞에 내던졌지만 새까만 칠통같이 (대중은) 전혀 알지 못하네. 북을 쳐서 전 대중이 노동(普請)이나 참여 하도록 하라.”
擧. 雪峰示衆云, 盡大地撮來, 如粟米粒大. 抛向面前, 漆桶不會. 打鼓普請看.
‘만법은 하나’라는 소식 드러낸 말씀
‘망념 없애려는 것도 망념’ 깨달아야
{운문광록}과 {조당집}을 보면 “북쪽에는 조주가 있다. 남쪽에는 설봉이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설봉이 문하에 1,700명이 넘는 많은 대중을 거느릴 만큼 위대한 당대 최고의 선승이었음을 말해준다.
{벽암록}에 원오선사는 설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설봉화상이 대중들에게 ‘온 대지를 손가락으로 움켜서 집어 들면 좁쌀크기만 하네.’라고 법문 하였다. 옛사람이 사람들을 지도하고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행화는 뛰어난 지혜와 방편이 있었으니 참으로 고생하였다. 설봉화상은 투자산(投子山)에 세 번 오르고, 동산(洞山良价)화상을 아홉 차례나 찾아뵙는 수행을 하였다. 그는 물통과 주걱을 들고 가는 곳마다 밥 짓는 소임을 맡아서 수행한 것도 이 생사대사의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설봉화상이 “온 대지를 좁쌀크기만 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신심명]에서 말하고 있는 “만법과 자기와 하나가 된 경지(萬法一如)”를 말한다. 즉 일체의 만법을 자기와 상대하는 존재로 두지 않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경지를 제시하고 있다.
{보장록}에도 {불설법구경}의 일절을 인용하여 “삼라만상은 일법(一法)의 도장 찍힌(所印) 것이다.”라고 하며 “도장 찍힌 것(印)은 근본(本際)이다”라고 설한다. 또한 일법(一法)이란 일심(一心)을 말하는 것처럼, 온 대지를 움켜쥐어 하나의 좁쌀크기로 만들었다고 하는 말은 일체 만법의 근본을 체득하여 자기와 하나가 되고 일체가 되었다는 말이다.
자신과 온 대지나 만법을 대상으로 두고 있는 한 주객의 대립과 상대적인 차별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온 대지나 일체의 만법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일체의 상대적인 대립과 차별심을 초월하여 일체의 만법을 자기 마음대로 활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설봉화상이 ‘온 대지를 좁쌀크기’로 만들었다고 하는 말은 〈화엄경〉의 설법으로 정리하면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논리이다. 온 대지와 만법은 많음(多)이지만 하나(一)이다. 〈법성게〉에서도 “법성은 서로 원융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다.”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의 만법을 근본인 일심(一心)에서 깨달으면 만법(萬法)이 하나가 된 일여(一如)의 경지를 이룰 수가 있다.
불교에서는 일(一), 혹은 제일의(第一義), 제일월(第一月)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일(一) 은 근본이며 본래의 입장을 의미한다. 불법의 근본으로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세계를 초월한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하는 말이다. 반야경전에서 설하는 불이(不二)나 불이(不異) 역시 하나(第一)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이(二)나 이월(二月)은 차별과 분별을 상징하는 중생심에 떨어진 것을 말한다.
조주화상이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萬法歸一)”고 설한 말도 설봉의 법문과 마찬가지 입장이다.
온대지를 움켜쥐고 좁쌀만한 크기라고 말했다는 것은 실제로 온 대지를 좁쌀 크기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불법은 현상법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는 심법(心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말하는 것도 존재하는 모든 것을 텅 비우는 것이 공(空)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사물을 상대하고 있는 자신의 차별심과 번뇌 망념과 착각된 마음을 텅 비워서 일체의 모든 사물에 집착하지 않도록 공(空)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온 대지를 움켜서 하나의 좁쌀 크기로 만든다는 것은 일체의 모든 존재에 대한 상대적인 차별심과 분별심과 집착을 텅 비워 버린 것을 말한다. 번뇌 망념의 마음을 없애고 비우려고 하면 더욱 비울 수가 없다. 비우려고 하는 마음이 번뇌 망념이 되기 때문에 더욱 더 번뇌 망념의 함정에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번뇌 망념을 비우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자신의 불성을 자각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실천을 제시하고 있다. 견성(見性)은 번뇌 망념이 없는 자신의 불성을 깨닫는 수행방법이다. 자각이란 근원적인 불성의 지혜작용을 말하는데, 차별의 세계(만법)에서 본래의 세계(불성)으로 되돌아가는 방향과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마치 번뇌 망념의 숲(중생심)에서 벗어나 편안한 자기 자신의 집(불성)으로 되돌아가는 구조와 같다.
견성의 체험은 한 생각 한 생각(念念)의 자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좌선의〉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라.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면 번뇌 망념은 텅 비워(空) 없어진다.”라고 설하고 있다. 번뇌 망념을 자각하는 일이 불성의 지혜작용이며, 중생심의 차별세계를 초월하여 근원적인 불성의 집으로 되돌아 간 깨달음의 체험이다.
설봉의 설법은 일체의 모든 사물이나 만법을, 자신과 하나가 된 깨달음의 경지를 “온 대지를 움켜쥐니 좁쌀만 하네.”라고 설한 것이다. 일체의 모든 사물과 만법을 설봉이 마음대로 활용 할 수가 있게 된 경지를 설하고 있다.
그래서 설봉은 온 대지를 좁쌀만한 크기로 만들어 대중에게 내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지혜가 없기 때문에 설봉의 법문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
여기서 설봉이 대중에게 던진 행위는 일체의 만법을 대중에게 펼친 방편법문을 말한다. 설봉이 온 대지를 좁쌀 크기로 뭉친 것은 만법을 근본의 일심(一心)에서 깨달아 자기자신의 지혜로 만든 것이며, 대중에게 던진 것은 자신이 체득한 불법의 근본정신을 대중들에게 펼쳐 보인 자비심인 것이다. 설봉이 이렇게 온 대지의 만법을 자기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구족했기 때문에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실행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설봉의 법문 내용과 보살행의 자비심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설봉화상은 북을 쳐서 대중들에게 모두 노동(普請)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노동은 당대 선원의 독창적인 종교운동의 하나다. 전 대중이 의무적으로 공동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규정을 {선원청규}에 두고 있다. 선원의 노동은 자급자족의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일임과 동시에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인 노동력을 생산에 참여하여 대중과 함께 나누는 보살행으로 실행되었다. 따라서 선원의 보청(普請)은 단순한 육체노동이 아니라 신심을 하나(萬法一如)로 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실행하는 일이다.
설봉화상은 대중들을 노동에 참여하도록 한 것은 설봉이 설법한 내용을 본인들이 직접 체험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즉 땅을 파는 노동을 하면서 온 대지를 각자 자기 마음대로 직접 활용하는 체험을 하도록 한 것이다. 불법은 법당에서 제시한 이론이 아니다. 지금 여기 자신의 지혜와 육체적인 노동력으로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의 일을 하면서 전개해야 하는 생활의 지혜인 것이다.
벽암록 제6칙 운문의 날마다 좋은 날
매순간 깨달음의 삶 살아가면 ‘날마다 행복’
운문(雲門文偃 : 864-949)화상의 “날마다 좋은 날”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유명한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운문화상이 대중들에게 설법하였다. “15일 이전의 일에 대해서는 그대들에게 묻지 않겠다. 15일 이후에 대해서 한 마디(一句) 해 보아라.” 스스로 자신이 말했다. “날마다 좋은 날이지(日日是好日)!”
擧. 雲門垂語云, 十五日已前不問汝, 十五日已後道將一句來. (自代云), 日日是好日.
귀중한 인생 허비하지 않으려면
‘지금여기’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당송대의 선원에서는 주지가 법당에서 대중들에게 정기적으로 설법하는 것을 상당(上堂), 혹은 시중(示衆)이라고 한다. 선원의 주지 설법은 1일, 5일, 10일, 15일, 20일, 25일 실행된 상당 법문을 대참(大參)이라고 하고, 또한 아침저녁에 수시로 설법하는 것을 소참(小參)이라고 한다.
주지가 법당에서 대중들을 위해서 설법하는 것은 중생교화의 보살행으로 학인들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도록 하는 전인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운문의 법문도 15일 실시하는 정기설법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운문이 말하는 ‘15일 이전’과 ‘15일 이후’는 한달을 반으로 나눈 중간인데, 마침 15일은 정기 설법으로 상당법문이 있었기 때문에 이 15일을 기준으로 하여 학인들의 안목을 점검하는 문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15일 이전은 지난 과거가 되기 때문에 지난 일을 생각하는 일은 쓸데없고 무의미한 일이다. 그러나 15일 이후는 자신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수행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분명한 방향과 방법을 제시 할 수가 있어야 한다.
“그대들은 각자 자신이 체득한 지혜의 안목으로 한 마디(一句) 말해 보아라!”라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한 마디(一句)는 불법의 대의를 언어 문자의 개념으로 상대적인 차별심과 분별심으로 설명하는 이론이 아니라 근원적인 본래심의 지혜로 깨달음의 경지를 이루는 한 마디를 말한다. 불법의 교리나 정신에 대해서 지식으로 설명하거나 이론적으로 제시할 수는 있어도, 한 마디(一句)로서 깨달음의 경지를 만들어 살 수 있는 지혜로운 말을 제시한다는 것은 불법을 완전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운문의 문하에 모인 대중들도 운문의 문제제기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운문이 스스로 대답한 일구(一句)가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다. 운문이 말하는 ‘날마다 좋은 날’은 그냥 매일 매일 즐겁고 보람되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불법의 대의와 사상은 의미 없는 종교가 된다.
불법의 정신을 모르고 사바세계에 사는 평범한 인간의 일상생활이 날마다 좋은 날이 될 수가 있는가? 날마다 좋은 날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은 날이 자기에게 닥쳐오기를 바라는 요행이 아니라 좋은 날을 만들어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능력과 지혜를 체득하도록 제시하고 있는 법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날마다 좋은 날이 될 수 있는가? 매일 좋은 날로 만들어 살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방법과 불법의 정신을 체득하지 못하면 이 법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야기로 끝난다.
15일 이전과 15일 이후는 한달을 반으로 나눈 중간 날짜임과 동시에 우리들의 삶을 살고 있는 매일이다. 한달은 하루하루의 연속이며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고 있지만 시간은 물과 같이 연속된 것이기 때문에 쪼개고 나누어 토막을 낼 수가 없다.
사실 한달이나 하루는 ‘지금’이라는 한 순간(一念: 刹那)의 연속시간이다. 따라서 좋은 하루를 만들며 살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 이라는 시간을 좋은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사실 불교는 시간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나 자신을 비롯하여 가족과 이웃, 좋은 친구나 많은 것들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무상(無常)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선불교에서 말하는 생사대사(生死大事) 혹은 일대사(一大事)는 무상에 관련된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도록 함과 동시에 소극적인 대응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입장에서 지혜로 극복할 수 있는 실천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를 좋은 날로 살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는 시간을 좋은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좋은 시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불교의 정신에서 보면 깨달음의 경지에서 창조적인 삶을 사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바세계의 삶이 무상(無常)하고 괴롭고(苦) 자아의 영원한 존재가 없는 무아(無我)이고, 탐.진.치 삼독과 오욕에 물든 더러운 예토(穢土)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반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사는 법신의 삶은 번뇌 망념의 나고 죽음이 없는 불변의 세계(常)에서 항상 법희(法喜)의 즐거움(樂)이 있고, 자신의 청정한 불성의 지혜작용을 청정한 법계(淨土)에 두루 지혜의 광명으로 비추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을 좋은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각자 자기자신이 주인이며 주체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경전에서는 ‘불성’, ‘여래장’, ‘진여자성’, ‘청정심’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선불교에서는 평상심, 본래심, 주인공, 진인(眞人), 본래인(本來人) 등으로 불린다. 사물에 집착하고 삼독심에 떨어진 범부의 중생심이 아니라, 일체의 번뇌 망념을 초월한 깨달음의 주체를 말한다.
따라서 날마다 좋은 날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자기가 깨달음의 본래심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 하는 일에 몰입해야 한다. 우리들의 삶을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에 교차되는 곳에 살고 있다. 자신이 있는 여기라는 공간을 바꾸고 옮길 수가 없으며, 또한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을 미리 끌어당겨서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불교에서는 시절인연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일이란 육체적인 일과 정신적인 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가장 절박한 숨쉬는 일에서 육체를 움직이는 일(行住坐臥 語默動靜),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일, 노동을 하는 일, 매사 인간은 일을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인간의 삶이란 바로 자신의 일인 것이며, 일과 삶은 같은 말이다. 또한 정신적인 일은 일념(찰나) 일념에 번뇌 망념이 일어났다가 없어지는 생멸(生滅; 生死大事)의 일을 비롯하여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기 위해 경전을 읽고 사유하는 지혜작용의 일 등 한순간도 일이 아닌 것이 없다.
인간은 일을 통해서 자신의 위대한 보살도의 삶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일을 깨달음의 지혜로운 일이 되도록 하라’고 법문을 하고 있다. 자기의 일에 몰입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본래심으로 삼매의 경지에서 실천하도록 제시한 법문이다. 조사선의 참선은 언제 어디서나 일상생활하는 가운데 깨달음의 지혜로운 생활이 되도록 하는 생활종교이다. 임제가 “자신이 곳에 따라서 주인이 된다면 자신이 있는 그곳이 깨달음의 세계가 된다.”라고 설했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운문의 설법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사람이 일상생활속에서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깨달음의 지혜로 위대한 보살도를 실천하도록 제시한 법문이다.
벽암록 제7칙 법안화상과 혜초스님
“그대 자신외에 다른데서 부처를 찾지 말라”
〈벽암록〉 제7칙은 혜초(慧超)스님이 법안종을 개창한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 화상에게 질문한 한마디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혜초스님이 법안화상에게 질문했다. “제가 화상께 질문하겠습니다. 무엇이 부처 입니까?” 법안화상이 말했다. “그대는 혜초이다.”
擧. 僧問法眼, 慧超咨和尙, 如何是佛, 法眼云, 汝是慧超.
두선사의 ‘줄탁동시의 선문답’
“그대 혜초와 부처는 같은 것…”
법안은 당말 오가(五家) 종풍으로 선풍을 떨친 법안종(法眼宗)의 개창자인 문익(文益) 선사이다. 문익 선사는 젊은 시절 도반과 전국을 행각할 때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져 어떤 암자에 뛰어 들어갔다. 암자의 주인인 나한계침(羅漢桂琛) 선사는 법안이 인물인줄 알고 차를 마시며 여러 가지 불법의 대의를 논의하였다. 법안은 특히 화엄사상과 유식사상에 조예가 깊었다.
날씨가 맑아져 법안은 지장원을 떠나 다시 행각하려고 할때 나한 선사는 뜰 앞의 돌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대는 어제 ‘삼계는 오직 마음이며 , 만법은 오직 인식에 있다(三界唯心, 萬法唯識)’고 말했는데, 지금 이 돌은 그대의 마음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법안은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그 돌은 마음 안에 있지요.” 라고 대답하자, 나한 선사는 탄식하며, “행각하는 수행자가 어째서 하나의 돌을 마음 안에 짊어지고 다니는가?”라고 말하자 말문이 막혀, 그 암자의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법을 탐구하게 되어 나한 선사의 법을 계승하게 되었다.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이라는 유식사상을 아무리 잘 이해한다고 해도 지금 여기 자신의 생활에서 불법의 지혜로운 삶으로 전개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불교에 대한 지식은 불법의 지혜가 아니다. 지식을 지혜로 전환하기 위해서 참선 수행하고 사유해야 한다.
법안 화상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질문한 혜초는 부처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깊이 사유한 수행자이다. 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으로 제시한 부처는 어떤 것인가? 수행자가 이 문제를 분명히 밝혀야 자신이 부처가 되는 길과 방법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철저한 자각이 없이 많은 선사들이 주장하는 견성성불과 부처에 대한 법문을 아무리 많이 듣고 배운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부처가 되는 구법수행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처란 무엇인가? 법당에 모신 등신불이 부처인가? 목불(木佛)인가. 동불(銅佛)인가? 아니면 부처의 삼신(三身)으로 설하고 있는 보신불(報身佛)인가? 법신불(法身佛)인가? 화신불(化身佛)인가? 불법을 공부하는 수행자가 이 문제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면 부처라는 말에 혼란을 일으키고 미혹하게 된다.
“부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선문답에 수없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운문은 “똥막대기(乾屎)”라고 하고, 동산은 “마삼근(麻三斤)”이라고도 대답했다. 질문은 같지만 대답은 모두 다르다. 선문답은 스승이 학인의 질문을 파악하여 수행자의 병폐(禪病)를 고쳐주는 처방이기 때문이다. 중생의 병이 다양한 것처럼, 처방도 다양해야 하는 것이다.
〈조당집〉12권에 선종화상의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옛 사람이 말하길, ‘밤마다 부처를 품고 자고 아침마다 부처와 함께 일어난다.’고 했는데,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선사는 말했다. “그대는 옛 사람의 말을 믿는가?” “학인은 절대로 위배하지 않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그대가 만약 옛 사람을 믿는다면 합장하고 묻는 그대가 바로 부처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일은 부처를 자기 밖에서 어떤 대상과 모양에서 찾지 않는 것이다.
조사선에서는 마조가 “마음이 부처(卽心是佛)”이라고 주장한 법문을 발전시켜 〈백장광록〉에서는 “부처는 바로 이 사람이며, 사람이 바로 부처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나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는 주장처럼, 마음과 불성을 부처라고 주장하는 시대를 거쳐 이제 백장과 임제의 시대 이후에는 지상에서 활동하는 구체적인 사람이 부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마조의 제자인 반산보적 선사도 “전심(全心)이 바로 부처요, 전불(全佛)이 곧 사람이며, 사람과 부처는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체득하면 비로소 도를 이룬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조당집 15권), 마음과 부처, 부처와 사람에 대한 일체의 차별도 없는 경지에서 불법의 지혜를 지상의 일상생활에서 전개하는 것이다.
혜초라는 수행자도 “부처란 무엇인가?” 이 문제에 심각한 고민을 하고 법안 화상에게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자문을 청하는 질문하고 있다. 선문답은 지식을 익히는 대화가 아니라 불법을 자기 자신의 지혜로 만드는 확신을 체득하기 위한 절박한 질문이다. 질문하는 사람이 철저한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대화를 한다고 할지라도 불법을 체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법안 화상은 혜초의 질문에 “그대는 혜초이다.”라고 한마디로 대답한다. 법안 화상은 부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부처에 대하여 일체 언급하지 않고 부처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부처란 무엇인가? 그대 자신을 두고 또 달리 밖을 향해서 부처를 구하지 말라. 그대의 이름은 혜초가 아닌가?, 그대의 이름과 부처는 같은 것이라고 하는 의미의 대답을 하고 있다. 법안화상은 이렇게 자세한 설명을 하지도 않았다.
원오극근도 법안 화상과 혜초의 선문답은 병아리가 알에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어미닭이 껍질을 쪼아 생명이 새로 태어나게 하는 줄탁동시(同時)의 지혜작용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법안 화상이 학인을 근기를 파악하는 지혜가 있었고, 혜초는 불법에 대한 참구와 수행이 무르익은 간절한 질문에 법안화상의 한마디에 깨달음을 체득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부처가 무엇인가? 아무리 간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도 자기 마음으로 깊이 사유하고 음미하며, 반조(返照)하고 자각하지 않으면 부처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는 것은 질문하는 수행자의 간절한 구도심으로 응어리진 의문의 깊이에 따라서 스승의 대답이 영향을 좌우하는 것이다. 종은 종을 치는 사람의 힘에 따라서 울림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원오 화상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혜초가 법안 화상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대는 혜초이다.”라고 대답했다. 서로가 위배한 것이 없었다. 듣지 못했는가? 운문 화상이 “불법을 제시해 주어도 스스로 살펴보지 못하면 곧 잘못되고 만다. 사량분별하면 어느 세월에 깨닫겠는가?”라고 한 말을. 옛 사람이 한마디의 선문답을 통해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게 되는 것을 살펴보면 불법의 대의를 정신 차려서 스스로 잘 사유하고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불법의 대의를 사유하고 살피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경전과 어록을 읽고, 법문을 들어도 체득할 수 없고,불법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설두스님은 이 공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강남 지방에 봄바람이 불지 않는데, 두견새는 꽃밭에서 지저귄다. 세 단계 높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간 물고기는 용으로 바뀌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밤새 연못의 물을 퍼내고 있다.”
앞의 두 구절은 법안화상과 혜초가 한마디의 선문답으로 부처가 무엇인지 곧바로 깨닫게 된 불성 지혜작용의 경지를 봄소식의 풍경으로 읊고 있다. 그러나 부처란 무엇인가? 이 문제를 사량 분별하는 사람은 용문의 삼 단계 폭포를 오르지 못하고 쓸데없이 연못의 물이나 퍼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고 있다.
벽암록 제8칙 취암 화상의 눈썹
“선승은 일체만법을 자기것으로 만드는 사람”
〈벽암록〉 제8칙은 취암 화상이 하안거를 마칠 때에 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있다.
취암 화상이 하안거 끝에 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설했다. “하안거 동안에 형제 여러분들을 위해서 설법 했는데, 잘 보게! 나(취암)의 눈썹이 붙어 있는가?” 보복(保福) 화상이 말했다. “도둑놈은 늘 마음이 편치 못하지.”
장경(長慶) 화상은 말했다. “(눈썹이) 생겼네!” 운문(雲門) 화상이 말했다. “관문이다.(關)”
擧. 翠巖, 夏末示衆云, 一夏以來, 爲兄弟說話. 看, 翠巖眉毛在?, 保福云, 作賊人心虛. 長慶云, 生也, 雲門云, 關.
취암이 눈썹이 빠져가며 설법한 뜻
보복.장경.운문이 날카롭게 촌평
여기에 등장하는 취암, 보복, 장경, 운문은 모두 당대 설봉의존(雪峰義存) 문하의 대표적인 제자들이다. 〈전등록〉에는 설봉의 법을 이은 제자 45명을 싣고 있는데, 운문(雲門), 현사(玄沙), 장경(長慶), 보복(保福), 경청(鏡淸) 등의 순서로 열거하고 있다.
취암 화상은 하안거를 마치는 날 대중에게 “나는 90일간 여러분들이 불법의 대의를 깨닫도록 여러 가지 많은 설법을 하였다. 여러분들은 나의 얼굴을 잘 보게! 나의 눈썹이 남아 있는가?” 수행승들에게 자기의 눈썹이 남아 있는지 확인시키고 있는 말이다.
취암 화상이 이러한 법문을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조당집〉 제7권 암두장에 협산 화상이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으니 노승이 두 줄기 눈썹을 아끼지 않고 말해야 겠다.”라는 말처럼, 중생을 위해서 방편문(第二義)에서 여러 가지 설법을 하는 것을 말한다. 불립문자의 경지인 불법의 근본(第一義)정신을 언어 문자로 표현한 죄로 눈썹이 빠지는 과보를 받는다는 일반적인 속신(俗信)이 있었다. 〈임제록〉에도 보면 “나의 얼굴을 잘 보게! 눈썹이 몇 개 남아 있는가?”라는 구절이 있다. 〈조당집〉 4권에 단하천연이 혜림사에서 목불(木佛)을 쪼개어 불 피우고 잠자고, 암자의 주지가 천연선사를 꾸짖은 죄로 눈썹이 다 빠졌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벽암록〉제27칙에는 ‘눈썹을 아끼지 않고(不惜尾毛)’라는 말도 있는데 중생을 위해서 설법하여 눈썹이 빠지는 벌칙을 받는다고 해도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설법하는 자비심을 말한다.
취암 화상도 하안거 90일간 매일 눈썹이 빠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대중을 위해서 설법했다. 그래서 해제 날, 눈썹이 하나도 없어졌는지 대중에게 확인시키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대중을 위해 불법을 깨닫도록 설했는데 그대들은 나의 설법을 듣고 불법의 대의를 체득했는가? 각자 반성하라는 각성의 설법인 것이다.
취암 화상의 설법에 대하여 원오는 “아니 눈썹뿐만 아니고, 눈까지 땅에 떨어졌네. 그 뿐인가. 코(鼻孔:본래면목)도 없네.”라고 착어(코멘트)하고 있다. 즉 취암 화상의 얼굴이 없어진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취암 화상은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등 자아에 대한 일체의 분별심을 텅 비워버린 경지(身心脫落)에서 중생을 위해 불법을 설한 것이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
보복 화상은 “도둑놈은 늘 마음이 편치 못하지.”라고 말하고 있다. 보복 화상은 이러한 법문을 한 취암 화상을 천하와 우주를 훔친 도둑질 하는 사람으로 평하고 있다. 자아의식과 상대적인 차별심, 번뇌 망념을 텅 비운 무심도인(취암)은 만법과 하나가 된 경지에 사는 사람이기에 일체의 만법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든 도둑으로 평가하고 있다. 〈임제록〉에도 선승을 도둑놈이라고 평하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는 데 이는 불법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천하를 훔치는 도둑의 기질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보복 화상이 “도둑의 마음이 편치 못하다”고 한 것은 취암 화상의 설법은 만법을 자기 것으로 훔친 도둑(취암)에게도 눈썹이 있는가를 대중에게 확인시키고 있는 말이다. 즉 도둑놈이 뭔가 꺼림칙해서 하는 말이라고 코멘트하고 있다. 이러한 보복의 평가에 원오는 “분명히 그렇다(灼然)”라고 하면서 “도적은 도적을 잘 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보복은 취암이 만법을 훔친 도적이라는 사실을 도적의 입장에서 잘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
다음 장경 화상은 “(눈썹이) 생겼다.”라고 평하고 있다. 즉 취암 화상 그대는 얼굴의 눈썹을 가지고 말하는가? 나는 우주에 가득 찬 눈썹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즉 장경 화상은 취암 화상이 일체의 번뇌 망념을 텅 비우고 본래면목을 체득한 것처럼, 나도 그러한 경지를 체득하고 있다는 본인의 입장을 표명한 말이다.
선어록에 “거북의 꼬리에 털이 생겼다.” “토끼의 머리에 뿔이 생겼다.” “불타는 숯불 속에 연꽃이 피었다.”라는 표현이 있다. 장경의 독설은 무엇이 생겼다고 밝히지 않고 있지만, 원오는 “장경의 혀가 땅에 떨어졌다.”라고 착어했다. “장경 화상 당신의 혀도 너무 길어. 지나치게 잔소리 많이 하고 있네!”라고 하면서 “잘못을 가지고 잘못에 나아감(將錯就錯)‘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원래 취암 화상이 대중에게 설법한 것 자체가 불법의 근본에서 벗어난 잘못이 있는데, 또 장경화상이 쓸데없이 눈썹이 생겼다고 말한 것은 잘못에 또 잘못이 첨가된 꼴이라고 한 평가이다.
마지막에 운문 화상이 ‘관(關)’이라는 한 글자로 취암의 설법을 평했다. 운문의 설법은 한 글자로 선의 요지를 대답하여 수행자를 지도하는 일자관(一字關)으로 유명하다. 즉, 어떤 것이 정법안장입니까? 라는 질문에 “보(普)”라고 대답하고,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면 어디서 참회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로(露)”라고 대답했다. 보(普)는 절대 보편의 진실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정법안장이며, 로(露)는 자신의 본래면목 전체를 숨김없이 들어내어 참회해야 하는 불성의 지혜작용을 주장하고 있다.
관(關)은 관문으로 반드시 누구나 타파해야 할 관문 즉 벽(壁)과 같은 의미이다. 관문은 미혹과 깨달음, 중생심과 불심의 차별을 초월하는 관문으로 본래면목를 밝히는 고정된 문이 없는 관문이다. 불법의 수행자는 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불법의 대의와 절대 깨달음의 경지(본래면목)를 체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앞에서 취암과 보복, 장경이 자신의 경지에서 이 공안의 견해를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운문은 그대들이 이러쿵 저러쿵 말하고 있지만 내가 제시한 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안된다는 입장에서 독자적인 관문을 설치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운문은 ‘관(關)’이라는 일자관의 공안을 제시하여 천하 선승들이 제멋대로 주장하는 입을 봉쇄해 버리고, 불법을 체득하는 유일한 관문을 설치한 것이다.
원오는 “천하의 납승도 이 관문을 통과 할 수 없다.”고 코멘트 하고 있다. 이는 수행자가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지혜의 안목을 갖춘 선승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운문의 관문을 통과하면 천하를 활보하며 자유자재한 경지를 체득 할 수가 있다. 지금 이 공안을 읽고 있는 수행자는 이 관문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깊이 반조하고 사유하여 본래면목을 체득해야 한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은 취지로 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취암 화상이 수행자들에게 “눈썹이 있는가?”라고 자신의 본래면목을 제시했지만, 천고 만고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네. 운문이 “관문”이라고 대답하자, 취암, 보복, 장경 세 사람은 돈도 잃고 죄까지 지었네. 노련한 보복 화상은 취암 화상을 칭찬한 것인가, 꾸짖은 것인가? (본래면목은 칭찬해도 훌륭하게 되지 않고, 욕을 해도 보잘것없는 것이 아닌데.) 수다쟁이 취암 화상 분명히 천하를 자기 것으로 훔친 훌륭한 도적이다. 흰 구슬(본래면목)에 티가 없으니 누가 진짜인지 거짓인지 구별하랴. 아니 장경 화상이 알아 차렸으니 눈썹이 생겼다고 말했네. 장경은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는 한 줄기 눈썹(본래면목)이 천지에 들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벽암록 제9칙 조주화상과 사문(四門)
“진리의 세계는 항상 대문을 열어놓고 있다”
{벽암록}제9칙은 {조주록}에 수록된 조주 화상의 동서남북 네 개의 문(四門)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 화상에게 질문했다. “어떤 것이 조주(趙州) 입니까?”
조주 화상은 말했다.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지.”
擧. 僧問趙州, 如何是趙州. 州云, 東門, 西門, 南門, 北門.
조주의 안목을 시험하는 질문받고
‘문없는 문’활짝 열고 자비로 응대
조주 화상은 제2칙에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고 설한 종심 선사(778~897)선사를 말한다. 하북성 서족에 있는 조주성(趙州城) 관음원에 머물면서 선법을 펼쳤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조주 화상 혹은 그냥 조주라고 불렀다.
조주는 60살에 다시 구법행각의 길에 올라 선지식을 두루 참문 하였다. ‘7살 아동이라도 나보다 뛰어난 불법의 안목을 갖춘 사람이라면 나는 그에게 나아가 불법을 자문하고, 100살 노인이라도 나보다 견해가 못하면 나는 곧장 그에게 불법을 가르치리라’라고 서원을 세우고 80살 때 까지 깨달음을 체득한 이후(悟後)의 수행을 계속한 선승이다.
조주 화상이 조주 관음원에 있을 때에 어떤 스님이 “어떤 것이 조주입니까”라고 질문했다. 이 질문은 조주 화상의 견해와 안목을 시험하는 질문이기 때문에 정법의 안목이 없는 사람이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질문자의 함정에 빠져들고 만다. 질문하는 스님도 안목을 갖춘 사람이기 때문에 조주 화상을 시험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조주는 지명(地名)임과 동시에 조주 관음원에 살고 있는 조주 화상을 지칭하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어떤 것이 조주입니까’ 라는 질문에 조주 화상이 자기 자신의 견해에 대한 질문인가라고 생각하고 대답하면, 아니 조주 화상의 견해나 종풍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조주성이라는 지명(地名)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할 것이고, 조주성이라는 지명에 대한 질문이라고 파악하고 정직하게 대답하면, 지명과 경계를 질문한 것이 아니라 조주 화상 당신의 견해에 대한 질문이라고 반박할 것이다.
이 질문은 두 가지 문제에 걸친 질문이기 때문에 원오는 “하북 하남(河北 河南)”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河)는 황하(黃河)로서 하북과 하남은 이 황하를 두고 나누어진 것처럼, 조주도 지명(地名)과 인명(人名)을 포함한 문제라고 비유한 것이다. 원오는 이것은 진흙 속에 가시가 있는 질문이니 함부로 발을 내밀면 안 된다고 평하고 있다.
그런데 조주 화상은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라고 대답했다. 조주 화상을 곤경에 몰아넣고 조주의 안목을 시험하려던 그 스님은 조주의 대답에 오히려 본인이 곤경에 처하게 된 상황이다. 조주 화상의 대답은 단순히 조주성의 동서남북에 있는 문에 대한 대답인가. 아니면 조주 화상 자신의 입장을 대답한 것인가. 전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조주성에도 동서남북에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문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조주 화상도 동서남북의 네 개의 문(四門)이 있기 때문이다. 즉 발심, 수행, 보리(菩提), 열반(涅槃)의 네 개의 문(四門)인데, 밀교의 태장계만다라에서는 이것을 동서남북의 네 개의 문(四門)에 배치하고, 발심은 동문, 수행은 남문, 보리는 서문, 열반은 북문으로 하며, 불법 수행은 이 네 개의 문(四門)을 통과하는 순서로 삼고 있다.
조주 화상처럼 위가 없는 불도를 이루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원력을 세우는 발심은 출가수행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원력을 성취하기 위한 끊임없는 수행과 정진을 통해서 깨달음(보리)을 성취하여 불법을 지혜를 체득하는 것이다. 즉 여기서는 발심 수행하여 깨달음을 체득하여 열반적정을 경지에서 살고 있는 조주 화상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발심과 수행, 보리와 열반의 경지에서 중생을 구제하고 있는 조주화상은 원오의 수시에서 언급한 것처럼, 밝은 거울과 같은 지혜를 구족하고,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는 살활자재(殺活自在)의 지혜의 칼(寶劍)을 손에 쥐고 어려운 질문을 한 스님에게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라고 한 것은 정말 의미심장한 대답이었다.
원오는 조주의 대답에 “문이 열렸다(開也)”라고 코멘트하고 있다. 조주성의 네 개의 문(四門)이 항상 열려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누구라도 자유롭게 출입 할 수가 있다. 이 조주성의 사문은 장군과 귀족, 승려나 거지 등 사람뿐 만아니라 말이나 마차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불교의 팔만 사천 법문(法門)에는 팔만 사천의 번뇌가 출입한다. {무문관}에는 “불법을 체득하는 대도(大道)에는 고정된 문이 없다(大道無門)”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고정된 문이 없는 무문(無門)을 법문(法門)으로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말은 일체의 모든 것이 깨달음의 문(門)이기 때문이다. 문이 없는 무문이라면 문을 닫거나 열거나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문은 언제나 활짝 여덟 팔자(八字)로 열려 있는 것이다. 당대 관계(灌溪) 화상도 “시방에 울타리가 없고, 사면에 문이 없다”는 것은 온 천지가 그대로 완전히 열려 있는 텅 빈 허공의 세계(깨달음의 경지)를 읊고 있는 것이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질문한 말에 선기(禪機)를 드러내어 정면에서 치고 들어오지만, 삭가라(迦羅)의 눈에는 가는 티끌도 없다. 동서남북의 문이 마주 보고 있는데, 아무리 철퇴를 휘둘러 처부셔도 열리지 않네.”
“어떤 것이 조주 입니까” 라고 질문한 스님의 지혜는 뛰어난 선기를 갖춘 인물이었다고 읊고 있다. 원오도 “고기가 움직이면 물이 흐린다”라고 평하고 있는 것처럼, 흐린 물 속에 고기가 숨어 있는 것처럼, 스님의 질문한 말(句裏) 속에는 가시(함정)가 있는 질문이라고 하면서 조주 화상에게 가시 있는 질문을 한 것은 좀 실례된 것이 아닌가라고 코멘트하고 있다.
두 번째 “삭가라의 눈에는 가는 티끌도 없다”고 한 말은 조주화상을 칭찬한 말이다. 삭가라는 금강(金剛), 견고하다는 의미인데, 조주의 금강과 같은 지혜의 안목은 아무리 작은 먼지라도 분명히 밝혀내고 있다. 즉, 조주는 질문한 스님의 의도를 완전히 꿰뚫어 보고 있다.
세 번째 “동서남북의 문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말은 설두가 조주의 말을 그대로 가져와서 조주의 눈에 티끌도 없다는 사실을 읊고 있다. 원오의 착어에 “문이 열였다(開也)”라고 한 것처럼, 대도무문(大道無門)이기 때문에 이 문은 예부터 본래부터 열려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불도의 문은 본래부터 열려 있기 때문에 불법을 체득한 사람은 언제나 마음대로 통과 할 수 있지만, 불법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언제라도 통과 할 수가 없다.
원오는 “어디에 그렇게 열려있는 문이 있는가?”라고 착어하고 있는데, 원래 조주의 발심, 수행, 보리, 열반의 네 개의 문(四門)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결국 {능엄경}에서 설하고 있는 “하나의 길인 열반의 문(一路涅槃門)"이다. 일체의 모두가 그대로 조주의 네 개의 문(四門)이며, 아니 온 우주가 그대로 조주의 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조당집}제7권에, 설봉이 일체의 모든 천지(乾坤)가 바로 해탈의 문”이라고 주장하는 말도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무리 철퇴를 휘둘려 쳐부숴도 이 문은 열리지 않네”라고 맺고 있다.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조주의 철문을 열수가 없다. 왜 그럴까? 항상 열려있는 이 무문(無門)의 문은 누구나 쉽게 통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읊고 있다.
{조당집}제5권에 운암이 “문으로 들어온 것은 참된 집안 보물이 될 수 없다.”라고 설하고 있다. 고정된 문으로 들어온 물건은 시절인연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인연이 다하면 떠나게 되는 것이다. 경전과 어록의 설법을 사유하고 음미하여 불법의 지혜를 체득할 때 무문의 문은 열리며, 한 길인 열반의 문은 열려 있는 것이다.
벽암록 제10칙 목주화상과 사기꾼
가짜로 소리만 지르는 것은 ‘사기꾼’에 불과
{벽암록}제10칙에는 목주 화상과 엉터리 사기꾼 스님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목주 화상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최근 어디서 왔는가?”
스님이 갑자기 고함(喝)을 쳤다.
목주 화상이 말했다.
“노승이 그대의 고함(一喝)에 한번 당하게 되었군!”
그 스님이 또 고함(喝) 쳤다.
목주 화상이 말했다.
“그렇게 서너 차례 고함(喝)친 다음에는 어찌 하려는가?”
스님이 아무 말이 없자,
목주 화상은 곧장 그 스님을 치면서 말했다.
“이 사기꾼 같은 놈!”
擧. 睦州問僧, 近離甚處. 僧便喝. 州云, 老僧被汝一喝. 僧又喝. 州云, 三喝四喝後, 作生. 僧無語. 州便打云, 這掠虛頭漢.
“고함 지른 뒤에는 어쩌려는가?”
예리한 반문으로 엉터리 가려내
목주 화상(780~877)은 황벽희운 선사의 제자로 그의 전기는 {조당집} 19권, 〈전등록〉12권 등에 전한다. 임제의현과 동문이며, 젊은 운문의 발을 문지방에 치게 하여 깨달음을 체득하게 한 진존숙(陳尊宿)이라고 불리는 선승이다. 그는 명리(名利)를 멀리하고 한 평생 은거하며 짚신을 만들어 팔아서 노모를 봉양한 효행이 알려지면서 진포혜(陳蒲鞋)라고 불리게 되었다.
경율론 삼장(三藏)의 교학에 통달하여 계율을 청정히 하고 제자 교육에 엄격한 선승이다. 그의 이름을 {고존숙어록}에는 도종(道), {오등회원}에는 도명(道明)이라고 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목주 화상을 친견하려고 찾아왔기에, 목주화상은 “그대는 최근 어디서 왔는가? 지금까지 그대는 어디서 수행했는가?”라고 질문하였다. 이것은 어떤 학인에게도 던질 수 있는 평범한 물음이지만, 학인의 견해를 시험하는 날카로운 물음이다. 원오도 목주 화상의 물음은 ‘탐간영초(探竿影草)’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 말은 〈임제록〉에 임제의 네 번의 할(四喝)에 나오는 말인데 〈종용록〉14칙에도 ‘탐간(探竿)은 손에 있고, 영초(影草)는 몸을 따른다.’라는 말이 보인다. 즉 탐간(探竿)은 어부가 고기 잡는 도구로서 긴 장대 끝에 오리 깃털을 묶어서 물 속의 고기떼를 찾아 한 곳으로 모아 투망을 던져 고기를 잡는 도구이며, 영초(影草)는 풀을 베어 물 속에 던져 놓고 고기떼가 그 풀 더미 속에 숨기를 기다려서 고기를 잡는 것을 말한다.
목주 화상이 “그대는 최근 어디서 왔는가?” 라는 질문은 흔히 학인에게 던지는 인사말 같지만 고기를 잡기 위해 물속에 던져둔 풀 더미와 같은 도구이기 때문에 방심할 수 없는 물음이라는 의미이다.
목주 화상의 물음에 그 스님은 곧장 고함(喝)을 쳤다. 이 스님도 보통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목주 화상의 물음을 단순한 인사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큰 소리로 할(고함)을 한 것이다. 원오도 ‘대단한 선승(作家禪客)’이라고 평하고 있다. 선문답에서 고함(喝)을 하는 것은 지금 여기자기 불성(본래면목)의 지혜작용을 단적으로 제시하는 것과 일체 언설을 초월한 깨달음의 경지인 불립문자의 세계를 곧바로 제시하는 직접적인 행위이다.
목주 화상이 ‘그대는 최근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지금 여기에 여여(如如)하게 왔다는 사실을 불성의 지혜작용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목주 화상은 “노승이 그대의 할에 한방 얻어맞았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그대는 정말 대단한 선승이야!’ 라고 겉으로 칭찬하는 말이지만, 원오가 “호랑이를 함정에 빠지게 하는 기지(陷虎之機)”이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학인을 사로잡는 목주의 노련한 기지를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스님도 보통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또 할(고함)을 했다.’ 여기서 이 스님이 진짜 작가인지 작가 흉내를 낸 졸승인지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오는 “머리에 뿔이 있는지 잘 점검하라.”라고 하면서, “닮기는 닮았는데, 아직 진짜가 아니니, 아마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될까 걱정스럽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용두사미라는 말은 〈전등록〉12권에 처음 등장하는 말로 처음 큰 소리로 고함친 이 스님이 뒤에는 꼬리를 감추는 것을 말한다.
목주 화상은 “그렇게 서너 차례 고함을 친 다음은 어찌하려는가?” 라고 다구 쳤다. 즉 그대가 처음 한두 번 고함(喝)은 대단한 기세였는데, 다시 세 번 네 번 고함을 친 뒤에는 어떻게 할 참인가? 라고 목주 화상이 먼저 그 스님의 입을 봉쇄하기 위해 선수를 치고 있는 말이다. 즉 그대가 진정 대장부라면 불법의 안목과 지혜로 이 문제를 뚫고 나와 봐라!
원오는 목주 화상의 지혜작용(機鋒)이 날카로워서 누구한 사람 머리를 내미는 자가 없다고 하면서 이 스님이 “어디로 도망갔는가? 어디로 들어갔나?”라고 착어하고 있다.
목주 화상이 선수 치는 말에 그 스님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스님이 처음 한 두 번고함(할)을 친 것도 진짜 불법의 안목을 갖춘 할이 아니라 가짜로 흉내 낸 할이었다는 사실이 들어 났기 때문에 용두사미라는 예언이 적중한 것이다. 원오는 “그 스님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라고 착어를 하고 있는데, 기세등등한 그 스님은 어디로 도망갔지? 꼬리를 감추고 도망 가버렸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목주 화상은 주장자로 곧장 치면서 “이 사기꾼 같은 놈(掠虛頭漢)!” 이라고 말했다. 掠(략)은 탈취하다는 의미로서 허위로 한갓 남의 말이나 언어 문자를 모방하여 적당히 흉내만 내는 엉터리 사기꾼을 말한다. 불법수행을 진실로 하지 않고 착실하지 못한 엉터리 수행자를 꾸짖는 말이다. 참선 수행은 몸과 목숨까지 아끼지 말고 우직하고 착실하게 정진해야 한다. 〈임제록〉을 비롯하여 당대의 어록에도 선승이 학인들을 지도하는 차원에서 일체의 사량 분별을 차단하는 직접행동으로 고함(喝)을 하거나 방망이를 내리치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에도 선승들이 불성의 지혜작용으로 활용하는 할(喝)을 흉내 내는 엉터리 사기꾼 같은 수행자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설두 화상은 이 공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두 번의 할(兩喝)과 세 번의 할(三喝). 작가 선객은 근기에 맞출 줄 알았네. 만약 범의 머리에 올라탔다고 여긴다면, 둘 다 눈먼 장님이 되리라. 누가 눈먼 장님인가? 온 세상에 들추어내어 사람들께 보여 줘라.”
두 번의 할(兩喝)은 스님이 목주 화상에게 두 번이나 할을 한 것이고, 세 번의 할(三喝)은 목주 화상이 스님에게 세 번 네 번 할을 한 뒤에는 어떻게 하려는가? 라고 반문한 것을 말한다. 작가 선객은 목주 화상을 지칭하는 말로, 목주는 지혜 작용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스님에게 세 번 네 번 할을 한 이후에는 어떻게 하려는가? 라고 선수를 친 임기응변이 뛰어난 것을 읊고 있다.
“만약 범의 머리에 올라탔다고 여긴다면, 둘 다 눈 먼 장님이 되리라.”라고 읊고 있는 말은 목주화상 앞에서 두 번이나 고함(喝) 치는 스님의 할을 마치 범을 타고 질주하는 기세로 인정한다면 할을 한 스님과 이 공안을 읽고 그렇게 인정한 당신이나 두 사람 모두 불법의 안목 없는 장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어째서 장님이라는 말인가? 이 공안을 읽고 있는 당신도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견해를 들추어내 제시해보도록 하라. 그대의 안목도 천하의 사람들에게 한번 점검 받아 보도록 하는 것이 좋다.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눈 뜬 장님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스스로 잘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 모두가 불법의 대의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지 못한 장님이 되고 말 것이다.
설두는 여기서 이 공안을 읽는 수행자들에게 불법을 지혜를 구족하지 못한 안목 없는 눈먼 장님(漢)이라는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설두가 말한 눈먼 장님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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