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 法華經 ]
「법화경」은 반야경, 유마경, 화엄경과 함께 초기에 성립된 대승경전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법화경」의 한역에는 구마라집의 「묘법연화경」과 축법호의 「정법화경」 그리고 사나굴다와 달마급다가 함께 번역한 「첨품묘법연화경」이 있다. 이 중에서도 구마라집의 「묘법연화경」이 명역이라는 평을 받아왔고, 대승불교권에서 「법화경」하면 일반적으로 이 「묘법연화경」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또한 후대의 법화(法華)사상의 전개는 전적으로 구마라집의 역에 의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다루게 될 「법화경」은 바로 「묘법연화경」이 될 것이다. 이 「법화경」은 모두 7권 28품으로 되어 있으며, 화엄사상과 함께 중국불교의 쌍벽을 이루게 된 매우 유명한 경전으로, 모든 불교경전 중에서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수많은 민족들이 애호했던 대승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법화경」의 핵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이 등장하는 '방편품'과 구원성불(久遠成佛)이 나오는 '여래수량품'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비유의 최고봉이라고 하는 이 「법화경」 속에 있는 유명한 비유담들을 직접 들어보도록 하자.
회삼귀일이란 3승이 일불승(一佛乘)으로 통일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이 '방편품'에서 지혜제일이라고 하는 사리불에게, 여래가 깨달은 진리는 심심무량하여 그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바, 설령 사리불과 같이 지혜가 출중한 자라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인 가르침보다는 여러 가지 교묘한 방편을 써서 가르침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중생들을 집착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3승의 가르침을 편 것도 일종의 방편이라고 한다. 여기서 3승이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말한다. 성문승과 연각승은 홀로 이 세상의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소승불교이고, 보살승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승불교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은 진정한 가르침은 오직 하나이며 제2, 제3의 가르침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분명 일불승만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타락한 시대의 중생들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에, 여래는 교묘한 방편을 써서 3승을 말했다고 한다. 이것을 '삼승방편 일승진실(三乘方便 一乘眞實)'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법화경」에서 선언한 부처님의 일불승설은 매우 획기적이고도 놀라운 것이었나 보다. 왜냐하면 사리불이 이에 관해 세 번이나 부처님에게 설법을 청했고, 오백 인이 퇴장한 후에야 비로소 설법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그 정황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불교의 목적이 종국에는 일체중생을 성불하게 하는 데 있으므로 교리 자체도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되어야지, 결코 일부 특정인들만을 위한 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일체중생을 제도하려는 일불승만이 진실한 교리이며 응당 이 교리로 사람들을 깨우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교리의 내용은 너무나 미묘하고 어려워 보통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일불승을 수준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단과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일률적으로 같은 방법을 써서 설법한다면 이 교리를 이해시킬 수도 없으려니와 수많은 중생들을 제도할 수도 없다고 한다.
또 이 '방편품'에서는 여러 곳에 소승불교도에 한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성불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보시를 하고 불탑을 세우거나 여러 가지 선행을 쌓은 사람은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이들이 소꼽장난 삼아 조약돌로 불탑을 쌓아도 성불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을 후세의 사람들은 '소선성불(小善成佛)'이라고 불렀다.
다음으로 구원성불이 나오고 있는 '여래수량품'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인들은 내가 왕궁에서 태어나 출가하여 가야에서 성불했다고 보고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되며, 사실은 내가 성불하고서도 이미 몇천 만억 겁이라는 셀 수 없는 시간이 지나갔다."
부처님은 그때부터 늘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 있으면서 어떤 때는 연등불의 모습으로, 또 다른 때는 저승에도 가서 무수한 중생들을 교화했다고 한다. 결국 부처님은 여기에서 불수(佛壽)의 영원함과 불신의 상주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서 80년밖에 살지 못하고 입멸하는 까닭은 부처님이 만일 영원히 살아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언제든지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부처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또 교만심에 공경하지도 않게 될 것이므로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제 저 유명한 「법화경」의 비유담들을 통해 「법화경」에 담긴 뜻을 되도록이면 쉽게 맛보도록 하자. 먼저 '비유품'에 나오는 화택(火宅)의 비유다.
옛날 어느 곳에 엄청나게 부자였던 나이 많은 장자가 살고 있었다. 그의 집은 대저택인데도 출입문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장자가 외출했을때 마침 집에 불이 났다. 장자는 귀가길에 집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그 안에는 재산도 재산이지만 무엇보다도 귀여운 자식들이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불이 난 것도 모르고 또 불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정신없이 뛰놀고 있었다. 장자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빨리 집에서 뛰어나오라고 외쳤으나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믿지도 않고 불이 무엇인지 또 죽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그저 정신없이 뛰놀고 있었다.
장자는 어리석은 아이들에게 불난 집에서 뛰어나오라고 외쳐도 알아듣지 못 하자 방편을 쓰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이 가지고 싶어했던 장난감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얘들아, 여기 재미있는 장난감이 있다.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가 있으니, 모두들 어서 밖으로 나오너라."
아버지의 장난감 운운하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 아이들은 다투어 집 밖으로 뛰어나왔다. 장자는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 아이들이 아까 말한 장난감을 달라고 하자, 그는 대신에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를 주었다.
이 이야기에서 불타는 집은 미혹에 빠져 있는 세상을 말하고 아이들은 그 세계가 위험하다는 것을 모른 채 그저 쾌락에만 탐닉하는 범부를 가리킨다. 또 세 가지 수레는 3승을 비유한 것으로, 양이 끄는 수레는 성문승, 사슴이 끄는 수레는 연각승, 소가 끄는 수레는 보살승에 해당된다. 부처님은 범부를 화택에서 끌어내기 위해 삼승이라는 방편을 쓴 후에는 모두에게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 즉 일불승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비유를 들고 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한다.
"사리불이여, 나는 이 이야기 속의 장자와 같다. 이 세상은 마치 불난 집과 같아서 온갖 괴로움이 가득 차 있어서 무섭기 그지없다. 생로병사의 괴로움이 불처럼 맹렬하게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이 세상을 벗어 난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중생들을 잠시라도 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나의 것이요, 그 안에 있는 중생들은 모두 나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세상을 구원할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뿐이다."
다음으로 '신해품'에는 궁자유(窮子喩)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사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와 헤어져서 수십 년 동안이나 방랑생활을 했다. 그 동안 아버지는 커다란 부자가 되어 있었다. 아들은 거지나 다름없는 행색으로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아버지가 살고 있는 마을에 도달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항상 잃어버린 아들을 생각하며 막대한 재산을 누구에게 상속할 것인지 걱정하고 있었다.
누더기를 걸친 아들은 동냥이라도 할까 해서 그 부자집으로 갔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을 부리고 있는 그 부자를 보자 아들은 기가 죽어 괜히 이곳에서 어물거리다가는 혼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먼발치에서 그를 본 부자는 단숨에 아들임을 알아보고 하인을 시켜 그를 데려오게 했다. 하인에게 붙들려온 아들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 소리치다가 그만 실신해버렸다. 부자는 아들을 깨우긴 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가 아버지라는 사실도 알리지 않은 채 그냥 떠나가게 했다. 부자는 어리석은 아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방편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인들을 시켜 아들을 찾아다가 허드렛일을 맡기게 했다. 그리고 자신도 누더기를 입고 이들에게 접근하여 함께 궂은 일을 하면서 차츰 친해지자,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하게나. 나를 자네 아버지로 생각하게"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아들은 그 부자를 차츰 아버지처럼 여기게 되었다.
이렇게 20여 년이 지나고 이제 죽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안 부자는 친척과 국왕, 대신들 앞에서 그 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아들에게 전 재산을 물려 줄 것을 선언했다.
이 비유는 부처님이 갑자기 "당신들은 나의 아들이며 성불할 것"이라고 말한다 해도 사람들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두려워할 것이므로 교묘한 방편을 써서 깨달음의 길로 이끈다는 내용을 가진 것이다.
이번에는 '약초유품'에 나오는 약초유(藥草喩)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부처님은 가섭 등의 제자에게 모든 초목은 비의 혜택을 똑같이 받지만 그 종류가 다양하고 또 특성도 각각 다르므로 수분과 영양소를 섭취하는 정도에 따라 생장하는 데 차이가 생기는 것처럼, 사람도 부처님의 설법을 똑같이 듣지만 영리한 사람과 우둔한 사람이 있어 이해하는 데 차이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부처님은 다양한 사람들의 수준에 따라 여러 가지 방편을 써서 설법하는 것이라고 한다.
'화성유품'의 비유를 보자.
어떤 사람이 수많은 대중을 이끌고 보물산을 향해 떠났는데, 길은 멀고 대중들은 지쳐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다. 이때 길잡이는 신통력을 써서 앞쪽에 화려한 성곽을 만들어놓고 저 성까지만 가면 모든 고생이 끝날 것이라고 독려했다. 그래서 대중들은 힘을 내서 그 성에 도달했는데, 길잡이는 다시 보물산이 바로 코앞에 있으니 조금만 힘을 쓰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길잡이는 모든 대중들을 이끌고 무사히 보물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비유에서 보물산은 부처님의 경지를 말하고, 신통력으로 만든 성곽은 소승의 경지이며, 길잡이는 바로 부처님을 가리키는 것이다.
'오백제자수기품'에는 의주유(依珠喩)가 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친구 집에 가서 술에 취해 자는데, 주인인 친구가 급한 용무로 외출을 하게 되었다. 이때 주인은 남아 있는 친구의 옷 속 깊숙이 보배 구슬을 넣어주었다. 그러나 친구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돌아가는 길에 다른 나라로 유랑하면서 날품을 팔아 간신히 먹고 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옛친구를 만나 그 이야기를 듣게 된 사내는 곧 빈궁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비유는 2승이 옛날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 시대에 대승의 종인(種因)을 받았으나, 무명과 번뇌로 인해 알지 못하고 있다가 법화회상에 참석하여 처음으로 깨달은 사실을 비유한 것이라고 한다.
계주유(紒珠喩)는 '안락행품'에 나오는 비유담이다.
전륜성왕은 여러 나라를 정복한 후 병사들 가운데서 공을 세운 이들에게 포상을 할 때 가장 공로가 큰 사람에게는 전륜성왕의 상투 속에 있는 보배 구슬을 준다. 이 이야기는 전륜성왕을 여래에, 그리고 상투를 2승의 방편교에 빗대고, 보배 구슬을 일승 진실교에 비유하고 있다.
'여래수량품'에는 의자유(醫子喩)가 나온다.
한 뛰어난 의사가 외국으로 출장을 간 사이 그의 아이들이 독을 마시고 신음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의사는 곧 해독제를 만들었다. 그런데 제정신이 있는 아이들은 그 해독제를 먹으면 나을 수 있지만, 머리가 이미 이상해진 아이들은 그 해독제를 절대로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의사는 다시 외국으로 나가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게 했다. 아이들은 이제 의지할 아버지가 없어진 것을 무척 슬퍼하다가 제정신을 찾아 해독제를 먹고선 독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의사는 자신의 무사한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 비유 속에서 독을 마시고 신음하는 아이들은 미망 속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말하고, 아버지인 의사는 구원불을 가리킨다. 아버지가 죽은 소식을 알려 아이들로 하여금 해독제를 복용하게 만든 일은 구원불이 입멸했다는 말을 꾸며 미망 속에 허덕이는 중생들이 제정신을 차리게 한 일에 비유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비유담들을 모두 일컬어 '법화칠유'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법화경」의 제25품인 '관세음보살보문품'은 따로 '관음경' 또는 '보문품경'이라 부르며, 한국불교에서 널리 독송되고 있는 경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법화경 [法華經] (한 권으로 읽는 팔만대장경, 2007. 6. 10., 영담, 진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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