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가 / 證道歌
1 君不見가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2 絶學無爲閑道人이여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이여
不除妄想不求眞이로다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으니
3 無明實性이 卽佛性이요
무명의 실다운 성품이 곧 불성이요
幻化空身이 卽法身이로다
허깨비 같은 실상없는 몸이 곧 법신이로다.
4 法身覺了無一物하니
법신을 깨달아 앎에 한 물건도 없나니
本源自性이 天眞佛이로다
본원의 자성이 천진한 부처로다
5 五陰浮雲이 空去來요
오음(色受想行識)의 뜬구름이 부질없이 가고 오며
三毒水泡虛出沒이로다
삼독(貪嗔痴)의 물거품은 헛되이 일어나고 사라지는도다.
6 證實相無人法하니
실상을 증득하면 사람도 없고 법도 없나니
刹那에 滅却阿鼻業이라
찰나에 아비지옥의 업을 없애버림이라(阿鼻地獄:무간지옥)
7 若將妄語誑衆生인댄
만약에 거짓말로 중생을 속이는 것이라면
自招拔舌塵沙劫이로다
티끌모래같은 긴 세월토록 발설지옥을 스스로 부르리로다.
8 頓覺了如來禪하니
여래선을 단박에 깨치니
六度萬行이 體中圓이로다
육도만행(六波羅密)이 본체 가운데 원만함이로다
9 夢裏에 明明有六趣려니
꿈속에서는 환하게 육취(육도)가 있더니
覺後空空無大千이로다
깨달은 후에는 비고 비어 삼천대천세계가 없도다.
10 無罪福無損益하나니
죄와 복이 없고 손해와 이익도 없나니
寂滅性中莫問覓하라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묻고 찾지 말라.
11 比來塵鏡을 未曾磨러니
예전엔 때 낀 거울을 미처 닦지 못했더니
今日分明須剖析이로다
오늘에야 분명히 해부하여 알았도다.
12 誰無念誰無生고
누가 생각이 없으며 누가 생각이 일어남이 없는가.
若實無生無不生인댄
진실로 남이 없으면 나지 않음도 없나니
13 喚取機關木人問하라
기관목인을 불러 붙들고 물어 보라.(기관목인: 오온합성된 인간의 비유)
求佛施功早晩成이니
부처를 구하고 공덕 베풂을 조만간 이루리로다.
14 放四大莫把捉하라
사대(地水火風)를 놓아 붙잡지 말라
寂滅性中隨飮啄이로다
적멸한 성품 따라 먹고 마실지어다.(啄 쪼을 탁)
15 諸行無常一切空하니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없는 것이니
卽是如來大圓覺이로다
이것이 곧 여래의 대원각이로다.
16 決定說表眞乘이여
틀림없는 말씀과 참됨을 나타낸 법이여
有人이 不肯任情徵하라
어떤 사람이 수긍치 않고 뜻을 따라서 헤아림이라
17 直截根源은 佛所印이요
근원을 바로 끊음은 부처님의 인가하신 바요
摘葉尋枝는 我不能이로다
잎을 따고 가지를 찾음은 내 할 일 아니로다.
18 摩尼珠를 人不識하나니
마니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나니(마니주: 無垢 如意寶珠)
如來藏裏親收得이로다
여래장 속에 몸소 거두어 얻음이로다(여래장: 미계에 있는 진여)
19 六般神用空不空이요(六般=六根)
여섯 가지 신통묘용은 공하면서 공하지 않음이요
一顆圓光色非色이로다
한 덩이 두렷한 빛은 색이면서 색이 아니로다.
20 淨五眼得五力이니
오안을 깨끗이 하여 오력을 얻음은
(五眼: 肉眼,天眼,慧眼,法眼,佛眼/ 五力: 信力,念力,精進力,定力,慧力)
唯證乃知요 難可測이니라
오직 증득해야만 알 뿐 헤아려 알기가 어렵나니라.
21 鏡裏看形은 見不難이나
거울속의 형상 보기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나
水中捉月爭拈得이리요
물속의 달을 붙잡는 것은 어떻게 잡을 수 있으리요(拈: 잡을념)
22 常獨行常獨步로
항상 홀로 다니고 항상 홀로 걷나니
達者同遊涅槃路로다
통달한 이와 함께 열반의 길에 노닐도다.
23 調古神淸風自高요
옛 곡조 신령한 기운이 맑으며 풍채가 스스로 높음이여
貌悴(顇)骨剛人不顧니라
초췌한 모습 앙상한 뼈를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나니라.
24 窮釋子口稱貧이나
궁색한 스님들 입으로는 가난하다고 말하나(貧道: 沙門)
實是身貧道不貧이로다
실로 몸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치 않음이로다.
25 貧則身常被縷褐이요
가난한 즉 몸에 항상 누더기를 걸치고(縷褐: 누갈. 누더기 옷과 삼베로 만든 신)
道則心藏無價珍이로다
도를 얻은 즉 마음에 값을 헤아리기 어려운 보물을 감추었도다.
26 無價珍을 用無盡하니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물을 써도 다함이 없나니
利物應機(時)終不悋이로다
기틀을 따라 사물을 이롭게 하는데 끝내 아낌이 없음이라
27 三身四智體中圓이요
삼신과 사지는 본체 가운데 원만하고
(三身: 法身, 報身, 化身/ 四智: 大圓鏡智, 平等性智, 妙觀察智, 性所作智)
八解六通이 心地印이로다
여덟가지 해탈과 여설가지 통달함은 마음땅의 인(印)이로다.
(八解: 八解脫 또는 八背捨/ 색욕, 탐욕....滅盡定)
(六通: 天眼, 天耳, 他心, 宿命, 神足, 漏盡通)
28 上士는 一決一切了하고
상근기는 한번 결단하여 일체를 요달하고
中下는 多聞多不信이로다
중하근기는 많이 들을수록 더욱 믿지 않는도다.
29 但自懷中解垢衣언정
다만 스스로 마음가운데 때 묻은 옷을 벗을 뿐
誰能向外誇精進이리요
뉘라서 밖으로 정진을 자랑할건가.
30 從他謗任他非라
남의 헐뜸에도 상관말고 남의 비난에도 맡겨두어라.
把火燒天徒自疲니라(燒: 불사를 소)
불로서 하늘을 태우려 하나 한갓 자신만 피곤하리라.
31 我聞恰似飮甘露하여
내 듣기에는 마치 감로수를 마심과 같아서
銷(鎖)融頓入不思議로다
잠금을 풀고 단박에 생각이 끊어진 경지에 들어가리로다.
32 觀惡言 是功德이니
나쁜 말도 관찰함이 바로 공덕이 되나니
此則成吾善知識이니라
이것이 나에게는 좋은 앎이 됨이라
33 不因攪(訕)謗起怨親하면
헐뜯음을 따라 원망과 친함이 일어나지 않으면(攪 어지러울 교/ 訕 헐뜯을 산)
何表無生慈忍力이리요
남이 없는 자비와 인욕의 힘을 드러내어 무엇하리요.
34 宗亦通說亦通하니
종취도 통하고 설법도 통하니
定慧圓明不滯空이로다
선정과 지혜가 두렷이 밝아 공에 걸리지 않는도다.
35 非但我今獨達了라
다만 나 홀로 이제 통달하여 알았을 뿐 아니라
河沙諸佛이 體皆同이로다
수 없는 모든 부처님이 본체는 모두 한가지로다.
36 獅子吼無畏說이여
사자 울음같은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百獸聞之皆腦裂이요
뭇 짐승들이 들으면 모두가 뇌가 부서짐이요
37 香象奔波失却威요
꼬끼리는 요란한 파도와 같아서 위엄을 잃고(香象: 교미기에 있는 코끼리)
天龍이 寂聽生欣悅이로다
천룡은 조용히 듣고서 희열을 내는도다(天龍: 깨친 선지식)
38 遊江海涉山川하야
강과 바다에 노닐고 산과 개울을 건너서
尋師訪道爲參禪이라
스승 찾아 도를 묻는 것은 참선을 하기 위함이라
39 自從認得曹溪路는
조계의 길을 알고부터는(曹溪: 6조 혜능의 선풍)
了知生死不相關(干)이로다
생과 사가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40 行亦禪坐亦禪이라
걸어도 참선이요 앉아도 참선이니
語黙動靜體安然이니라
어묵과 동정에 본체가 편안함이라
41 縱遇鋒刀常坦坦이요(鋒: 칼끝 봉)
창칼을 만나도 언제나 태연하고
假饒毒藥이라도 也閑閑(閒)이로다(假: 빌 가 饒: 넉넉할 요, 많을 요)
많은 독약을 마실지라도 한가롭고 한가롭도다.
42 我師得見燃燈佛은
우리 스승님 부처님께서 연등불을 뵈옵고
多劫에 曾爲忍辱僊(仙)이로다.
오랜 세월토록 일찍이 인욕선인이 되셨도다.(僊:선인선)
43 幾廻生幾廻死오
몇 번을 태어나고 몇 번이나 죽었던가.
生死悠悠無定止로다
생사가 아득하여 그침이 없었도다.
44 自從頓悟了無生하야
단박에 깨쳐서 남이 없음을 요달하고 부터는
於諸榮辱에 何憂喜리오
모든 영욕에 어찌 근심하고 기쁨이 있을까.
45 入深山住蘭若하니
깊은 산에 들어가 고요한 곳에 머무니(蘭若:절집)
岑崟幽邃長松下로구나(岑:높을 잠/崟:험준할 음/ 邃: 깊을 수)
높고 험준하며 깊은 낙락장송 아래로다.
46 優遊靜坐野僧家하니
한가히 노닐며 들판 절 집에서 조용히 앉았으니
闃寂安居實蕭灑로다(闃 : 고요할 격)
고요한 안거 참으로 蕭灑하도다.(闃:고요할 격/ 蕭 맑은대 숙/ 灑씻을 쇄)
47 覺卽了不施功하니
깨친 즉시 알 따름이요 공 베풀지 않나니
一切有爲法不同이로다
모든 유위법과 같지 않도다.
48 住相布施는 生天福이나
상에 머무는 보시는 하늘에 나는 복이나
猶如仰箭射虛空하야
마치 허공을 향하여 화살을 쏘는 것과 같도다.(箭:화살전)
49 勢力盡箭還墜니
세력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招得來生不如意라
내생에 뜻과 같지 않는 과보를 부르리로다.
50 爭似無爲實相門이리요
어찌 함이 없는 실상문과 같을 것인가
一超直入如來地이리요
한번 뛰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감과 같으리오.
51 但得本莫愁末이니
다만 근본을 얻을 뿐 끝은 근심치 말지니
如淨瑠璃含寶月이로다
마치 깨끗한 유리가 보배로운 달을 머금음과 같도다.
52 旣能解此如意珠하면
이미 이 여의주를 알았으면
自利利他終不竭이로다
나와 남을 이롭게 하여 다함이 없도다.
53 江月照松風吹하니(吹: 바람불 취)
강엔 달 비치고 솔바람 불어오니
永夜淸霄에 何所爲리오
긴긴 밤 맑은 하늘 무슨 할 일 있을 건가.
54 佛性戒珠 心地印
불성계의 구슬은 마음의 印이요(불성계: 법망경에 말한 대승계/ 이 계를 받아지니면
중생의 본래 불성을 계발하여 佛果를 얻는다고 함)
霧露雲霞 體上衣
안개와 이슬과 구름과 노을은 몸 위의 옷이로다.
55 降龍鉢解虎錫
용을 항복받은 발우와 범싸움 말린 석장이여
兩鈷金環鳴歷歷
양쪽 쇠고리는 역력히 울리는도다.(鈷(고): 다리미. 제기의 한 종류)
56 不是標形虛事持
이는 모양을 내려고 허투루 지님이 아니요
如來寶杖 親蹤跡
부처님 보배 지팡이를 몸소 본받음이로다.
57 不求眞不斷妄
참됨도 구하지 않고 망령됨도 끊지 않나니
了知二法空 無相
두 법이 공하여 모양 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58 無相無空無不空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음이여
卽是如來眞實相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59 心鏡明鑑無碍
마음의 거울이 밝아서 비침에 걸림 없으니
廓然瑩徹周沙界(瑩: 밝을 영)
확연히 비치어 항하사세계에 두루 사무치도다
60 萬象森羅影現中
만상삼라의 그림자 그 가운데 나타나고
一顆圓明非內外
한 덩이 두렷이 밝음은 안과 밖이 없음이로다.
61 豁達空撥因果(撥: 없앨 발)
공함에 활달해서 인과를 없다고 말하면
茫茫蕩蕩招殃禍
아득하고 끝없는 재앙을 부르리로다.
62 棄有著空病亦然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면 병이기는 또한 같나니
還如避溺而投火
도리어 물을 피하다가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도다.
63 捨妄心取眞理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여
取捨之心成巧僞
취하고 버리는 분별의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루도다.
64 學人不了用修行
배우는 사람이 잘 알지 못하고 수행하나니
眞成認賊將爲子
참으로 도적을 아들로 삼는 짓이로다.
65 損法財滅功德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애는 것은
莫不由斯心意識
심의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이라
66 是以禪門了却心
그러므로 선문에서는 마음을 물리치고
頓入無生知見力
남이 없는 지견의 힘으로 단박에 들어가도다.
67 大丈夫秉慧劒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般若鋒兮金剛燄(燄: 불꽃 염)
반야의 칼날이요 금강의 불꽃이로다.
68 非但能摧外道心(摧: 꺽을 최)
다만 외도의 마음만 꺾을 뿐 아니라
早曾落却天魔膽
일찍이 천마의 간담을 떨어뜨려 물라쳤도다.
69 震法雷擊法鼓
법의 우뢰 진동하고 법고를 두드림이여
布慈雲兮灑甘露(灑: 뿌릴 쇄)
자비의 구름을 펴고 감로수를 뿌리는도다.
70 龍象蹴踏潤無邊
용상이 차고 밟음에 윤택함이 끝이 없으니
三乘五性 皆惺悟
삼승과 오성이 모두 깨치는도다.(三乘: 五性: )
71 雪山肥膩更無雜
설산의 비니초는 다시 잡됨이 없어
純出醍醐我常納
순수한 제호를 만드나니 나 항상 받는도다.
72 一性圓通一切性
두렷한 한 성품이 모든 성품에 통하고
一法徧含一切法
두루한 한 법이 모든 법을 포함하나니
73 一月普現一切水
한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고
一切水月一月攝
모든 물의 달을 한 달이 거두웠도다.
74 諸佛法身入我性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 들어오고
我性還共如來合
나의 성품이 다시 함께 여래와 합치하도다.
75 一地具足一切地
한 지위에 모든 지위 구족하니
非色非心非行業
색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행업도 아니로구나.
76 彈指圓成八萬門
손가락 퉁기는 사이에 팔만법문 원만히 이루고
刹那滅却三祇劫
찰나에 삼아승지겁을 없애버리는도다.
77 一切數句非數句
일체의 여러 가지 법구가 법구가 아니요
與吾靈覺何交涉
나의 신령한 깨침과 무슨 상관 있을건가.
78 不可毁不可讚
훼방도 할 수 없고 칭찬도 할 수 없음이여
體若虛空勿涯岸
본체는 허공과 같아서 물가와 언덕이 없도다.
79 不離當處常湛然(湛: 즐길담, 맑을담)
당처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니
覓則知君不可見
찾으면 곧 그대를 알 수 있지만 볼 수는 없도다.
80 取不得捨不得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나니
不可得中只麽得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얻을 뿐이로다.
81 黙時說說時黙 말
침묵하면서 말하고 말할면서 침묵함이여
大施門開無壅塞(壅: 막을 옹)
크게 베푸는 문을 여니 막힘이 없도다.
82 有人問我解何宗
누가 나에게 어떤 종취를 아느냐고 물으면
報道摩訶般若力
마하반야의 힘이라고 대답해 주리라.
83 或是或非人不識
혹은 옳고 혹은 그릇됨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逆行順行天莫測
역행하고 순행함은 하늘도 헤아리지 못하도다.
84 吾早曾經多劫修
내 일찍이 많은 겁을 지내며 수행하였으니
不是等閑相誑惑
부질없이 서로 속여 미혹케 함이 아니로다.
85 建法幢立宗旨(幢: 기당)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일으킴이여
明明佛勅曹溪是
밝고 밝은 부처님 법 조계(혜능)가 옳구나
86 第一迦葉 首傳燈
첫 번째로 가섭이 맨 먼저 법등을 전하니
二十八代西天記
이십팔대는 서천의 기록이로다.
87 法東流入此土
법이 동쪽으로 흘러 이 땅에 들어와서는
菩提達磨爲初祖
보리달마가 첫 조사 되었도다.
88 六代傳衣 天下聞
6대에 옷 전한 일 천하에 소문났고
後人得道何窮數
뒷사람이 도 얻음을 어찌 다 헤아리랴.
89 眞不立妄本空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념됨도 본래 공함이여
有無俱遣不空空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니 공하지 않음도 공하구나.
90 二十空門元不著
이십공문에 원래 집착하지 않으니
一性如來體自同
한 성품 여래의 본체와 저절로 같도다.
91 心是根法是塵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兩種猶如鏡上痕
둘은 거울 위의 흔적과 같음이라.
92 痕垢盡除光始現
흔적과 때가 다하면 빛이 비로소 나타나고
心法雙亡性卽眞
마음과 법 둘 다 없어지면 성품이 곧 참되도다.
93 嗟末法惡時世
말법을 슬퍼하고 요즘 세상을 미워하노니
衆生薄福難調制
중생의 복이 얕아 조복받기 어렵도다.
94 去聖遠兮邪見深
성인 가신 지 오래고 사견이 깊어짐이여
魔强法弱多怨害
마구니는 강하고 법은 약하여 원망과 해로움이 많도다.
95 聞說如來頓敎門
여래의 돈교문 설교를 듣고서는
恨不滅除令瓦碎 부숴 없애버리지 못함을 한탄하는도다.
96 作在心殃在身
지음은 마음에 있으나 재앙은 몸으로 받나니
不須怨訴更尤人
모름지기 사람을 원망하고 허물치 말지어다.
97 欲得不招無間業
무간지옥의 업보를 부르지 않으려거든
莫謗如來正法輪
여래의 바른 법륜을 비방하지 말아라.
98 栴檀林無雜樹(栴: 향나무 전 檀: 박달나무 단)
전단향 숲에는 잡나무가 없으니
鬱密深沈師子住
울창하고 깊숙하여 사자가 머무는도다.
99 境靜林閒獨自遊
경계 고요하고 숲 한적하여 홀로 노나니
走獸飛禽皆遠去
길짐승과 나는 새가 모두 멀리 달아나도다.
100 師子兒衆隨後
사자 새끼 무리가 뒤따름이여
三歲卽能大哮吼(哮: 으르렁거릴 효 吼: 으르렁거릴 우)
세 살이 되면 곧 크게 소리치는도다.
101 若是野干逐法王
만약 여우가 법왕을 쫓으려 한다면
百年妖怪虛開口
백년 묵은 요괴가 헛되이 입만 여는 것이로다.
102 圓頓敎勿人情
원돈교는 인정이 없나니
有疑不決直須爭
의심있어 결정치 못하거든 바로 다툴지어다.
103 不是山僧逞人我(逞:굳셀 령, 왕성할 령)
산승이 인과 아의 상이 견고한 것이 아니요
修行恐落斷常坑(坑: 구덩이 갱)
수행타가 斷과 常의 구덩이에 떨어질까 염려함이로다.
104 非不非是不是
그름과 그르지 않음과 옳음과 옳지 않음이여
差之毫釐失千里
털끝만큼 어긋나도 천리길로 잃으리도다.
105 是卽龍女頓成佛
옳은 즉 용녀가 단박에 성불함이요
非卽善星生陷墜
그른 즉 善星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짐이로다.
106 吾早年來積學問
나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쌓아서
亦曾討疏尋經論
일찍 疏를 더듬고 경론을 살폈도다.
107 分別名相不知休
이름과 모양 분별함을 쉴 줄 모르고
入海算沙徒自困
바다 속 모래 헤아리듯 헛되이 스스로 피곤하였도다.
108 却被如來苦呵責
문득 여래의 호된 꾸지람을 들었으니
數他珍寶有何益
남의 보배 세어서 무슨 이익 있을건가.
109 從來蹭岑學虛行 예전엔 비칠거리며 헛된 꾸지람을 들었으니
多年 枉作風塵客 여러 해를 잘못 풍진객(風塵客) 노릇하였도다.
110 種性邪錯知解 성품에 삿됨을 심고 알음알이 그릇됨이여
不達如來圓頓制 여래의 圓頓制를 통달치 못함이로다.
111 二乘 精進勿道心 이승은 정진하나 도의 마음이 없고
外道聰明無智慧 외도는 총명해도 지혜가 없도다.
112 亦愚癡亦小駭 우치하고도 겁이 많으니
空拳指上 生實解 빈주먹 손가락 위에 실다운 견해를 내는도다.
113 執指爲月枉施功 손가락을 달로 집착하여 잘못 공부하니
根境塵中 虛捏怪 육근.육경.육진 가운데서 헛되이 괴이한 짓 하는도다.
114 不見一法 卽如來 한 법도 볼 수 없음이 곧 여래니
方得名爲觀自在 바야흐로 이름하여 관자재라 하는도다.
115 了卽業障 本來空 마치면 업장이 곧 공함이요
未了還須償宿債 마치지 못하면 도리어 묵은 빛 갚으리로다.
116 飢逢王膳不能飡 굶다가 임금 수라 만나도 먹을 수 없으니
病遇醫王爭得差 병들어 의왕 만난들 어찌 나을 수 있으랴.
117 在欲行禪知見力 욕망 속에서 참선하는 지견의 힘이여
火中生蓮終不壞 불 속에서 연꽃 피니 끝내 시들지 않는도다.
118 勇施犯重悟無生 용시비구는 중죄 짓고도 남이 없는 법을 깨달으니
早是成佛于今在 벌써 성불하여 지금에 있음이로다.
119 師子吼無畏說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深嗟懵懂頑皮靼 어리석은 완피달을 몸시 슬퍼하는도다.
120 只知犯重障菩提 중죄 범하면 보리를 막는 줄만 알 뿐
不見如來開秘訣 여래께서 비결 열어 두심은 보지 못하도다.
121 有二比丘犯游殺 어떤 두 비구 음행과 살생 저지르니
波離螢光 增罪結 우바리의 반딧불은 죄의 매듭 더하였고
122 維摩大士頓除疑 유마대사 단박에 의심을 없애줌이여
還同赫日消霜雪 빛나는 해가 서리. 눈 녹임과 같도다.
123 不思議解脫力 不思議한 해탈의 힘이여
妙用恒沙也無極 묘한 작용 항하사같아 다함 없도다.
124 四事供養 敢辭勞 네 가지 공양을 감히 수고롭다 사양하랴.
萬兩黃金 亦銷得 萬兩 황금이라도 녹일 수 있도다.
125 粉骨碎身未足酬 뼈가 가루되고 몸이 부숴져도 다 갚을 수 없나니
一句了然超百億 한 마디에 요연히 백억 법문을 뛰어 넘도다.
126 法中王最高勝 법 가운데 왕 가장 높고 수승함이여
河沙如來同共證 강모래같이 많은 여래가 함께 증득하였도다.
127 我今解此如意珠 내 이제 이 여의주를 해설하오니
信受之者皆相應 믿고 받는 이 모두 상응하리도다.
128 了了見無一物 밝고 밝게 보면 한 물건도 없음이여
亦無人兮亦無佛 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129 大千世界 海中漚 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이요
一切聖賢 如電拂 모든 성현은 번갯불 스쳐감과 같도다.
130 假使鐵輪 頂上旋 무쇠바퀴를 머리 위에서 돌릴지라도
定慧圓明終不失 선정과 지혜가 두렷이 밝아 끝내 잃지 않는도다.
131 日可冷月可熱 해는 차게 하고 달은 뜨겁게 할지언정
衆魔不能壞眞說 뭇 마구니가 참된 말씀 부술 수 없도다.
132 象駕崢嶸漫進途 코끼리 수레 끌고 위풍당당히 길을 가거니
誰見螳螂 能拒轍 버마재비 수레길을 막는 걸 누가 보겠는가.
133 大象 不遊於兎徑 큰 코끼리는 토끼 길에 노닐지 않고
大悟 不拘於小節 큰 깨달음은 작은 절개에 구애되지 않나니
134 莫將管見謗蒼蒼 대통같은 소견으로 창창히 비방하지 말라.
未了吾今爲君決 알지 못하기에 내 이제 그대 위해 결단해 주는도다.
(증도가 끝)
<증도가(證道歌)>는 영가(永嘉)스님이 지었습니다.
영가(永嘉)스님의 휘(諱)는 현각(玄覺)이요, 자(字)는 도명(道明)이며, 성은 대(戴)씨이며,
절강성 온주부 영가현[浙江省溫州府永嘉縣] 사람입니다.
어릴 때 출가하여 안으로는 삼장(三臟)을 두루 섭렵하고 밖으로는 외전에도 널리
통달하였다고 합니다.
영가스님은 본래 천태종 계통으로 천태지관(天台止觀)을 많이 익혀서 그 묘를 얻고
항상 선관(禪觀)으로 수행하였습니다.
천태종 팔조(八祖)인 좌계 현랑(左溪 玄朗) 법사와는 동문(同門)이며,
나중에 도를 성취하고 난 뒤에도 서로 서신 왕래를 하였다고 합니다.
일찍이 온주의 개원사(開元寺)에 있으면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지내며 효순하기로 소문이 났으나,
누님까지 함께 지내니 두 사람을 보살피고 있다하여
온 사중(寺中)과 동구(洞口)에서 비방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별세하여 상복을 입고서도 누님을 떠나보내지 못하니
사람들의 비방이 더욱 심했으나 영가스님은 전혀 그러한 데 개의치 않았습니다.
영가스님이 천태종에 있으면서 선관을 닦고 선종과 비슷한 길을 밟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면 왜 천태종에서 선종으로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개원사 복도로 현책(玄策)이라는 선사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나이는 60여세였습니다.
이때 그의 누님이 발 밖으로 그 노숙(老宿)을 보고,
"저 노스님을 방으로 청해서 대접했으면 좋겠다."
고 하였습니다.
영가스님이 얼른 나가서 노스님을 청했더니, 노숙은 들어오지 않으려 하다가
스님의 간절한 청에 못이겨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 노숙과 법에 대해 여러 가지로 토론해 보니 자신의 견처나 노스님의 견처가 같은 점도
많이 있고 독특한 점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책스님은 영가스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대의 법사는 누구인가?"
"제가 <방등경론>을 배울 때는 각각 스승이 계셨으나,
뒤에 <유마경>에서 불심종(佛心宗)을 깨치고는 아직 증명하실 분이 없습니다."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노스님은 영가스님의 기상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고
또 그 누님에게도 협기(俠氣)가 있음을 느끼고 다음과 같이 권했습니다.
"부모와 형제에게 효순하는 일도 한 가지 길이지만, 당신은 불법의 이치를 밝히기는 했으나
스승의 인가를 얻지 못하고 있소.
과거의 부처님들도 성인과 성인이 서로 전하시고 부처와 부처가 서로 인가하였습니다.
석가여래께서도 연등불의 수기를 받으셨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연외도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오.
남방에 큰 스승으로 혜능선사가 계십니다. 그곳으로 가서 발아래 예배하고 스승으로 섬기시오."
그러자, 영가스님이
"다른 분을 증명법사로 모실 것이 아니라 스님께서 법이 수승하신 듯 하니
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시면 좋겠습니다.
저를 위해서 허락해 주십시오." 하자, 현책스님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로서는 그대의 증명법사가 되기는 곤란하오.
지금 조계에는 육조대사가 계셔서 사방에서 학자가 운집하여 법을 받는 터이니
만약 그대가 가겠다면 함께 가리다."
그러나 영가스님은 누님을 홀로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어 망설였습니다.
그러자 누님이 하는 말이 "나는 다른 데 의지해서 지낼 수 있으니 나를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시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현책스님과 함께 떠났는데, 그 때에 영가스님의 나이는 31세였습니다.
그럭저럭 시흥현(始興縣) 조계산(曹溪山)에 이르니 때마침 육조대사(六祖大師)께서 상당(上堂)하여
법문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에 영가스님은 절도 하지 않고 선상을 세 번 돌고 나서 육환장을 짚고 앞에 우뚝 서있자니
육조대사께서 물으셨습니다.
"대저 사문(沙門)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추어서 행동이 어긋남이
없어야 하거늘, 대덕(大德)은 어디서 왔기에 도도하게 아만을 부리는가?"
육조스님의 이러한 말씀은 건방지게 와서 인사도 하지 않고 선상만 세 번 돌고
턱 버티고 서 있기만 하니 그것은 아만심이 탱천하기 때문이 아니냐하는 힐난입니다.
그러나 육조스님이 영가스님 하는 짓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한 번 슬쩍 법을 걸어보는 것입니다.
그러자 영가스님께서
"나고 죽는 일이 크고, 무상(無常)은 빠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저 피상적으로 관찰하는 것과는 뜻이 다르므로 그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육조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남[生]이 없음을 체험해 얻어서 빠름이 없는 도리를 요달하지 못하는가"
이렇게 육조스님께서 반문하시니 이것은 '네가 지금 무상이 빠르다고 하니
그 무상(無常)의 근본을 바로 체험하여 깨치고, 남이 없음[無生]을 요달하면
빠르고 빠르지 않음이 떨어져 버린 구경을 성취하게 되는데
왜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느냐'라는 말씀입니다.
이에 영가스님이 답하였습니다.
"본체는 곧 남이 없고 본래 빠름이 없음을 요달하였습니다."
본체는 원래 남이 없으니 그걸 우리가 체득할 필요가 뭐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대로가 남이 없고 그대로가 빠름이 없는데, 다시 남이 없고 빠름이 없음을 요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영가스님이 반박하자,
육조스님이
"네 말과 같다. 네 말과 같다."
고 인가하시니, 천여명의 대중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영가스님은 다시 동랑(東廊)으로 가서 육환장을 걸어 놓고
위의를 갖추어 육조스님께 정중히 예배하였습니다.
위의를 갖춘다는 것은 큰 가사를 입고 향을 피우고 스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영가스님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나서 바로 하직 인사를 드리자 육조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리 빨리 돌아가려고 하느냐?"
"본래 스스로 움직이지 않거니 어찌 빠름이 있겠습니까?"
"누가 움직이지 않는 줄 아느냐?"
"스님께서 스스로 분별을 내십니다."
"네가 참으로 남이 없는 도리를 알았구나!"
"남이 없음이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
이는 남이 없음에 뜻이 있다면 남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뜻이 없다면 누가 분별하느냐?"
뜻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있는 그것부터가 분별하는 것이 아니냐는 육조스님의 질책입니다.
"분별하는 것도 뜻이 아닙니다."
분별을 하여도 심(心), 의(意), 식(識)의 사량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대용의 나타남이라는 영가스님의 말씀입니다.
그러자 육조스님께서 선상에서 내려오시더니 영가스님의 등을 어루먼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장하다. 옳은 말이다. 손에 방패와 창을 들었구나. 하룻밤만 쉬어 가거라."
그리하여 그 때 사람들이 영가스님이 조계산에서 하룻밤만 자고 갔다 하여
일숙각(一宿覺)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튿날 육조스님께 하직을 고하니 몸소 대중을 거느리시고 영가스님을 전송하셨는데,
영가스님이 열 걸음쯤 걸어 가다가 석장을 세 번 내려치고 말했습니다.
"조계를 한 차례 만난 뒤로는 나고 죽음과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노라!"
선사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그의 소문은 먼저 퍼져서 모두들 그를 '부사의(不思議) 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그의 가(歌), 항(行), 게(偈), 송(頌)은 모두가 그의 누나가 수집한 것입니다.
영가스님은 선천(先天) 2년(서기 713년) 10월 17일에 입적하시니 세수 39세였으며,
시호(諡號)는 무상대사(無相大師), 탑호(塔號)는 정광(淨光)이라 하였습니다.
그해에 육조스님께서도 돌아가시니 세수 76세였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흔히 어떤 사람들은 이 법담(法談)을 평하기를,
영가스님이 육조스님보다 나은 듯하고 육조스님이 말에 몰리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가스님이 육조스님보다 수승한 사람이 아니냐고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평을 하면 영가스님을 잘못 본 사람입니다.
영가스님 자신이 <증도가(證道歌)>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조계의 길을 깨친 뒤로 나고 죽음과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다."고 하여,
조계산에 있는 육조스님을 찾아와서 근본을 확철히 깨쳤다고 자기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고인(古人)들은 영가스님이 깨친 대목을 두고 말하기를 앞의 법담에서,
"어찌하여 남이 없음을 체험해 얻어서 빠름이 없는 도리를 요달하지 못하는가?"
하는 말끝에서 깨쳤다고 봅니다.
영가스님이 자기 스스로 조계의 길을 확실히 깨치고 난 뒤에는 나고 죽음에 자재하다고
말씀하셨으며, 자기가 평생동안 연구했던 천태종을 버리고 육조스님의 조계 선종의 입장에서
법문하였고 저술도 하였습니다.
그런 만큼 육조스님께 와서 깨친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영가스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고
선종에서 깨친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영가스님의 행장(行狀)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살펴보고
<증도가(證道歌)>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 하겠습니다.
영가스님이 육조스님을 찾아가서 확철히 깨치고, 깨친 경지에 의지해서 <증도가>를 지었는데,
천태종이나 다른 교가의 사상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천태종에서는 교리적으로 볼 때 맞지 않는 것이 많이 있다 하여
이것이 일종의 미친 견해이지 바른 견해는 아니라고까지 혹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종에서 볼 때는 <증도가>가 선종사상을 대표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으므로,
그러하게 비난하는 사람들은 선종을 모르는 데서 하는 말이지 바른 길을 아는 사람이면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절대로 생각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禪)과 교(敎)의 관계가 <증도가>에서 더욱 더 완연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선(禪)에서는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간다[一超直入如來地]'고 많이 주장하는데
대해서, 교[敎]에서는 '점차 닦아 성불하는 것[漸修]'만을 근본으로 표방하므로
서로가 정반대의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그 당시 영가스님의 <증도가>에 대해서 천태종에서 가장 많이 공격했지만,
그 공격도 일시적인 것이 되고 말았으며, 영가스님의 <증도가>는 실제로 도 닦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만고의 표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증도가(證道歌)>라 하였는데 '증(證)'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를 살펴봅시다.
'증(證)'이란 구경(究竟)을 바로 체득함을 말합니다.
깨달음[悟]에도 증오(證悟)와 해오(解悟)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해오(解悟)란 견해(見解), 지해(知解)를 말하는 것으로, 알기는 분명히 알지만 실제 마음으로
체득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얼음이 본래 물인 줄은 알았지만 아직 녹지 않고 얼음 그대로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얼음을 녹여 물로 쓰고 있지는 못하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은 분명히 알았지만
번뇌망상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서 중생 그대로인 것, 그것을 해오(解悟)라고 말합니다.
'증오(證悟)'란 얼음을 완전히 녹여서 물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 자체도 볼 수 없는 경계,
따라서 중생의 번뇌망상이 다 끊어져서 제팔 아뢰야 근본무명까지 끊어진 구경각을 말하니
곧 실지로 성불한 것, 견성한 것을 증오(證悟)라 하고 간단히 줄여서 증(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가(敎家)에서든지 선가(禪家)에서든지 증(證)이라 하면
근본적으로 체달한 구경각(究竟覺)을 말하는 것이지 그 중간에서 뭘 좀 아는 걸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통된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이 노래에 '증(證)'자를 붙였냐 하면, 선종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증오(證悟)'를 근본적으로 삼았지 '해오(解悟)'로서는 근본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가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한다는 것은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조(普照)스님도 처음에는 선가에서 전한 법을 '해오(解悟)'라고 잘못 보았다가
나중에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이라든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같은 데서는
선이란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선가에서의 근본 표본은 '해오(解悟)'가 아닌 구경각이며,
선가에서의 깨달음[悟]이란 구경적으로 체달한 것임을 표현하기 위해서 노래 이름부터도
'증(證)'이라 하였지 '해(解)'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종에서는 언제든지 깨친 것을 '돈오(頓悟)'라 하는데,
"돈(頓)이란 망념을 순식간에 없애는 것이요 오(悟)란 얻는 바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대주(大珠)선사는 설파하고 있습니다.
근본 무명인 제팔 아뢰야는 무기무심(無記無心)의 마계(魔界)까지 완전히 벗어나서
대원경지(大圓鏡智)에 들어가 진여본성을 확철히 깨친 것이 곧 '증(證)'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가에서는 그 중간적인 것을 '깨달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앞으로 설명하는 <증도가>를 이해할 수 있지 '증오(證悟)'와 해오(解悟)'를 혼동해서는
영원히 <증도가>를 모르고 마는 것입니다.
이 <증도가>는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해서 부처님으로부터 달마스님까지
달마스님에서 육조스님까지,
그리하여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내려온 정안종사(正眼宗師)의 증오처(證悟處)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증(證)'이라 한다는 것을 한 번 더 강조합니다.
그러면 어째서 도(道)라 하는가?
도(道)를 보리(菩提)라 각(覺)이라 하는데 <증(證)>을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이 도(道)라 하는 것은 증(證)한 도(道)를, 구경각을 성취한 그 구경처(究竟處)를 말합니다.
즉 도(道)란 구경을 깨친 '증(證)'한 도(道)이지 중각적인 도(道), 해(解)한 도(道)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경각인 도란 무엇인가?
"무심이 도라고 일컬어 말하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한 겹 두터운 관문이 막혀 있느니라.
[莫道無心云是道하라 無心猶隔一重關이니라]"
도는 무심과 통합니다. 우리가 실지로 공부해서 대무심지(大無心地)에 들어가서 구경각을
바로 성취하면 그만인데,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지 못하고
제팔 아뢰야 무기무심에 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그 폐단을 막기 위해서 제팔 아뢰야의 무심 즉 멸진정(滅盡定)의 무심은 도(道)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멸진정의 무심도 아주 벗어나서 제팔 아뢰야의 근본 무명까지 끊어진 곳에서
구경각을 성취하여 대원경지가 현발한 이것이 도(道)인 것이며,
진연본성을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證)'이 곧 '도(道)'이며 '도(道)'가 곧 '증(證)'이라 하는 것입니다.
달마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外息諸緣하고 內心無喘하야
心如墻壁하사와 可以入道니라]"
그러면 마음이 담과 벽 같아야 한다고 하니 목석과 같고 장승과 같은 무심지에 들어가 버리면
그것이 도(道)냐 하면, 그것이 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제팔 아뢰야 무기무심이 장애가 되어 근본적인 구경무심에는
아직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참으로 구경의 대무심지에 들려면 멸진정의 가무심(假無心),
거기서 한 관문을 더 뚫어서 구경무심을 성취해야 바로 도(道)를 깨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인용한 달마스님의 말씀도 구경적인 도를 말씀함이지
중간적인 도가 아니며 증오(證悟)의 '도(道)'이지, 해오(解悟)의 '도(道)'는 아닙니다.
달마스님 이래로 선종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 구경각을 '증(證)'이라 하고,
'도(道)'라 하는 것도 '증(證)'을 근본 내용으로 삼기 때문에 구경각이 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도는 달마스님이 말씀하신 무심을 한층 넘어간 도가 되어야지
그 중간적인 것은 도가 아닙니다.
그러면 '가(歌)'란 무엇인가?
영가스님 자신이 확철히 깨친 경계를 노래로써 표현한 것입니다.
영가스님이 육조스님을 찾아가 확철히 깨쳐 구경각을 성취하고 나서 그 경지를
시가(詩歌) 형식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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