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분별의 지혜
- 삶의 갈림길에서 읽는 신심명 강의 -
김기태 지음, 2015, 판미동
1부. 행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1강. 왜 무분별인가
1. 지극한 도(道)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가려서 택하지만 말라
(至道無難 唯嫌揀擇)
살다보면 우울할 때도 있고 외로울 때도 있으며 마음이 참 슬프고 힘들 때가 있다. 그러면 그 순간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좀 우울하고 힘들면 될 것을, 그렇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면 될 것을, 우리는 그것을 못견뎌하며 어떻게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달아나고 극복하려고만 한다. 그 순간에 일어난 외로움이 바로 도(道)요, 우울이 바로 불법(佛法)이며, 한 발 뗄 수조차 없는 마음의 무거움과 힘겨움이 바로 깨달음인 것을. 그래서 '번뇌 그대로가 바로 보리(菩提)'라는 말은 일점일획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을, 우리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끊임없이 싫어하고 거부하고 외면하며 버리려고만 하는 것이다. 그리곤 오직 그 반대편의 마음을 택하여 그 안에서만 살려고 한다. 이를테면 편안함이나 당당함, 기쁨, 즐거움만을 자신 안에 담아두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늘 자신을 '가려서 택하려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삶이 무한히 괴롭고 힘들게 된다.
(…) 왜 꼭 잘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야만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을 때 남들도 진실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온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초라함과 보잘 것 없음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렇게 자신에게 정직할 때, 뜻밖에 조금도 초라하지 않은 자신을 문득 깨닫고는 스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될 것이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영원한 행복을 얻기란 결코 어렵지 않다. 오직 '가려서 택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현존, 그것이 바로 도(道)요 깨달음이요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는 진정한 행복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것' 속에 있다.
2. 다만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만 않으면 막힘 없이 맑고 분명하리라
(但莫憎愛 洞然明白)
신심명의 첫머리에서 '가려서 택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우리 안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것을 가리켜 '지극한 도'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전부를 받아들이고 경험하며 살려 하지 않고, 언제나 우리 '내면'을 좋은 것과 나쁜 것, 만족스러운 것과 불만족스러운 것, 자랑스러운 것과 수치스러운 것, 바람직한 것과 부끄러운 것 등 '둘'로 나누어 놓고는 , 그 가운데 하나만을 사랑하고 다른 하나는 끝없이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밉고 마음에 들지 않고 보잘것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단 하나도 자신 안에 남겨주지 않고 경험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 반면에,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고 만족스러운 것들로만 자신 안을 가득히 채움으로써 비로소 자유롭고 행복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노력과 수고 때문에, 늘 그렇게 우리 안을 '가려서 택하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삶은 더욱 메마르고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얻고 싶어하는 참된 영혼의 자유와 행복은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과 수고를 통해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승찬 스님은 말한다. 우리가 그토록 애를 쓰며 도달하고자 하는 그 길은 참된 길이 아니라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들만을 사랑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은 미워하는 속에서는 결코 진정한 자유도 해방도 없다고. 영혼의 자유는 그렇게 '가려서 택하는' 가운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언젠가의 미래 속에서 누리게 되는 것도 아니라고. 오히려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고 수고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은 바로 지금 여기,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심지어 꿈속에서까지 경험하게 되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 바로 그 속에 있다고. 아니, 그 모든 '현존'이 이미 그것이라고. 번뇌가 바로 깨달음이요 중생이 그대로 부처라고. 그러나 다만 '가려서 택하는' 마음만 내려놓으면, 다만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만 않으면, 그래서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막힘없이 밝고 분명한 도의 길이어서 비로소 완전한 자유와 영원한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2강. 지금 여기, 당신으로 충분하다
3.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만큼 벌어진다
(毫釐有差 天地懸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지금 '이것'을 버리고 다른 특별한 것을 찾고 구하는 그 마음, 곧 '가려서 택하는' 마음만 내려놓으면 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찾고 구하는 '그것'이기 때문이며,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영원으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금 '이것'을 있는 그대로 껴안는다는 것은 곧 도를 껴안는다는 것이며,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영원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참된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 속에서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진실을 먼저 안 승찬스님은 우리에게 애틋하게 말한다.
"지금 '이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구한다면, 지금 '이것'과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그것'과는 하늘과 땅만큼 벌어진다. 왜냐하면 지금 '이것' 안에 우리가 원하는 '그것'이 온전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지금 '이것'이 곧 '그것'이기 때문이다."
4. 도가 앞에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따라가지도 말고 거스르지도 말라
(欲得現前 莫存順逆)
무엇에 따라가지 말라는 것일까?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구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거스르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이것'을 피하거나 저항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라는 말이다. 그때 우리 눈 앞에 훤히 나타나 있었으나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도(道)가 비로소 우리 마음에 확연히 드러나게 되어 모든 목마름과 방황이 영원히 긑나게 되는 것이다.
5. 거스름과 따라감이 서로 다투는 것, 이것이 마음의 병이다.
(違順相爭 是爲心病)
기쁨, 슬픔, 미움, 사랑, 분노, 자애로움, 우울, 즐거움, 불안, 당당함, 경직, 편안함, 게으름, 성실, 지혜, 어리석음, 열등감, 자신감 등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때그때 경험하게 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들이요, 모양과 빛깔만 다를 뿐 모두가 소중한 마음이며, 그 하나하나가 생명에너지인 것을, 우리는 언제나 그것들을 '둘'로 나눈다. 즉 기쁨, 사랑, 자애로움, 즐거움, 당당함, 편안함, 성실, 지혜, 자신감 등은 좋은 것, 바람직한 것, 완전한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슬픔, 미움, 분노, 우울, 불안, 경직, 게으름, 어리석음, 열등감 등은 나쁜 것, 못난 것, 결핍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좋다-나쁘다, 바람직하다-못났다, 완전하다-결핍됐다는 이원의 분별 자체가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허구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분별이 가리키는 대로 '가려서 택하는' 가운데 오직 한 방향으로만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닦달하며 몰아가니, 그 수고로움과 괴로움이 얼마나 크겠는가. 버리고 싶은 것은 얼른 버려지지 않아서 괴롭고, 얻고 싶은 것은 얼른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주지 않아서 고통스러우니 말이다. 그래서 "거스름과 따라감이 서로 다투는 것, 이것이 마음의 병이다."라고 승찬 스님은 말하고 있다.
6.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헛되이 생각만 고요히 하려 애쓴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힘겨움이나 육체적인 아픔, 슬픔, 미움, 불안, 무력감 등은 우리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그 모든 것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게 해 주고 싶어서, 어릴 적 받았던 마음의 모든 상처를 깨끗이 치유해주고 싶어서, 그리하여 더 이상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가운데 삶이 우리에게 주는 모든 아름답고 영원한 것들을 마음껏 누리게 해 주고 싶어서 찾아오는 하늘의 선물이요, 메시지 같은 것이다. 이런 현묘한 뜻을 간직한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이것'의 실상이다. 겉은 그렇게 초라하고 보잘 것 없기 짝이 없지만 속에는 그와 같은 놀라운 비밀들로 가득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이것'의 깊은 뜻은 알지 못한 채 그 겉모습만을 보고서 끊임없이 '이것'에 저항하며 얼른 그로부터 벗어나고 달아나려고만 한다. 우리 눈에는 아무리 봐도 '이것'은 오직 버려야 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이것'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경험해야 할 소중한 '나'다.
7. 원만하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건만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이것'이 사실은 원만하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라는 것도 아니요, 남음이 있는 것도 아니며, 보잘 것 없는 것도 아니요 대단한 것도 아니며, 나쁜 것도 아니요, 좋은 것도 아니며, 큰 것도 아니요 작은 것도 아닌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이건만.
8. 오직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본래 그대로 한결같지 못하다
어떤 것은 좋다, 마음에 든다, 흡족하다는 생각을 따라 끊임없이 취하려 하고, 어떤 것은 나쁘다, 보잘 것 없다, 초라하다는 분별을 따라 끝없이 버리려고 함으로써 우리 안에 본래 가지고 있던 참된 자기다움을 비롯한 모든 아름다운 보물을 다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곤 다시 채워지지 않는 내면을 괴로워하며 '없는 보물'을 찾아다니고…….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진실로 자유롭게 해 줄 보물은 따로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이것'이 바로 보물이다. 우리 자신이 지금 이대로 이미 더할 나위 없이 귀하고 완전한 보물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소중한 보물들을 우리 스스로 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2부. 그저 자기 편이 되어 주면
3강. 자신을 믿는다는 것
9. 인연을 좇아가지도 말고 빈 곳에 머물어 있지도 말라
이때 인연이란 우리 내면의 인연, 곧 분별심을 가리킨다. (…) 그런데 그렇게 분별심을 내려놓고 완전한 무분별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즉 매 순간의 '지금'으로 돌아와보면, 여기서 또 한 번의 비약이 일어나는데, 무분별은 온데 간데 없고 다시 온갖 상대적인 분별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래서 다시 일체를 분별하여 살아가지만, 또한 분명히 분별심을 내려놓았기에 그 모든 분별에도 매이지 않고 물들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갈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를 불가에서는 불이비일(不二非一, 둘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도 아니다)이라고도 한다. 승찬 스님도 "빈 곳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온갖 것을 분별하면서도 분별하지 않고 또한 분별하지 않으면서도 일체를 분별하는 이 이치는 알지 못한 채, 단지 분별이 없는 빈 곳에 머물러 있지 말라는 것이다.
10. 한결 같이 평등하게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끝날 것이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오직 '가려서 택하는' 그 한 마음을 내려놓고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기쁠 땐 기뻐하고 슬플 땐 슬퍼하며 우울할 땐 우울해하고 무료할 땐 무료해하며 즐거울 땐 즐거워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똥 누고 오줌 누며 피곤하면 눕는 것, 이것이 바로 불법이며 완전한 도다. 도란 매 순간의 '현존' 이 외의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를 깨닫기가 얼마나 쉬운가!
그렇게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모든 것을 한결같이 평등하게 지니면 우리의 모든 번뇌와 괴로움과 목마름은 저절로 사라져 끝난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11. 움직임을 그쳐 멈춤으로 돌아가면 멈춤은 다시 더욱 큰 움직임이 된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고 구하던 움직임을 그쳐 '지금'으로 돌아오니, 나 하나조차 감당할 길이 없어 언제나 힘들어하던 내가 다른 이의 마음 속 고통과 상처를 어루만져 주며 함께 치유의 기쁨과 감사를 나누는 사람이 되었고, 늘 '혼자'임을 한없이 괴로워하고 고통스럽게 여기던 내가 어느새 많은 사람을 편안히 만나며 그들 안에 있는 참된 자유를 발견하게 해주는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으며, 어릴 적 아버지의 부재로 사랑을 받지 못해 아무 것도 진정으로 느낄 줄 모르는 냉혈한의 가슴이 되었는데, 놀랍게도 그 차가운 가슴 속에서 너무나도 깊고 따뜻한 사랑이 나왔다. 삶이 언제나 허무하고 헛되어 견딜 수가 없었는데,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산다는 것이 조금도 허무하거나 헛되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하며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하고 결심을 해도 곧 다시 게을러지고 무기력해져서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그저 아득하기만 했는데, 아무리 많은 강의를 하고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상담을 해도 에너지의 소모를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충만과 충일함이 언제나 내 안을 가득히 흘렀다.
"움직임을 그쳐 멈춤으로 돌아가면, 멈춤은 다시 더욱 큰 움직임이 된다."는 승찬 스님의 말씀처럼, 나는 단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 된 것밖에 없는데, 그렇게 추구가 끝난 것밖에 없는데, 머리에서 발끝까지 달라지지 않은 것이 없고, 삶은 언제나 처음처럼 새롭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12. 오직 양쪽에만 머물로 있어서야 어찌 한결 같음을 알겠는가
바다와 파도가 하나이듯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와 내가 바라고 원하는 미래의 완전한 '나'는 둘이 아니다. 지금의 '나'가 이미 그것이다. 그런데도 이원의 분별심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눈에는 그것이 명백히 '둘'로 보일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언제나 극복의 대상으로만 보이고, 미래의 '나'는 어떻게든 도달하고 싶고 이루고 싶고 또한 영원히 거기에만 머물고 싶은 아름다운 존재로 보인다.
이렇듯 우리는 언제나 지금과 미래를 나누고, 이것과 저것을 구분지으며, 부족과 완전을 나누고, 중생과 부처를 분별한 다음에 하나는 버리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얻으려고 한다. 바로 그런 우리의 마음을 가리켜 승찬 스남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직 그렇게 양 쪽에만 머물러 있어서야 어찌 한결 같음을 알겠는가."라고.
13. 한결 같음에 통하지 못하면 양 쪽에서 모두 공덕을 잃으리라
이런저런 삶의 상황과 경험 속에서 매 순간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은 그것이 어떤 모양이나 빛깔을 하고 있든 모두가 다 '나의 마음'이다. 그렇지 않은가? 내 안에서 나왔으니 모두가 다 '나의 마음'인 것이다. 그 모든 마음을 다 '나의 마음'으로 한결 같이 받아들이며 매 순간 있는 그대로 경험하면, 어떤 것은 좋다 하며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싫다 하며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가려서 택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이요 해탈이며 '지극한 도'이다. 그 밖의 다른 깨달음은 없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현존, 그것이 바로 도이기 때문이다.
이한결 같음에 통하지 못하면, 그래서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양 쪽에서 모두 공덕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때 '양 쪽'이란 우리가 버리고 싶어하는 쪽과 얻고 싶어하는 쪽 모두를 가리키는데, 버리고 싶어하는 것들은 얼른 버려지지 않아서 힘들고 얻고 싶어하는 것들은 얼른 내 것이 되어 주지 않아서 괴로우니, 양 쪽에서 모두 공덕을 잃는 것이다.
14. 있음을 버리면 오히려 있음에 빠지고, 공(空)을 따르면 도리어 공을 등지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미움-혹은 불면, 아픔, 힘겨움, 게으름, 우울, 불안, 슬픔, 초라함이든 그 밖의 다른 무엇이든-을 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점점 더 깊이 그 속에 빠져들게 되어 괴로움만 더하게 될 뿐이며,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없는데(空)에서 마음의 고요와 평화를 찾는다면 도리어 그럴수록 영혼의 진정한 진정한 해방과는 더욱더 멀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마음은 결코 취하거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노력과 수고를 통하여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는 바로 그 마음을 내려놓을 때, 본래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자신을 문득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4강. 진실은 단순하다
15.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통하지 못한다
진리는 참 단순하다. '진리'라고 할 무엇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 하며,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리고 그런 것을 그렇다고 하고 아닌 것을 아니다 하는 것 속에 진리랄까 영혼의 참된 자유랄까 영원이랄까 하는 것이 온전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음의 이원성이 만들어 내는 많은 말과 생각들, 이를테면 있다-없다, 안다-모른다, 이다-아니다, 좋다-나쁘다, 됐다-안 됐다, 부족하다-완전하다, 번뇌-보리, 중생-부처 등의 이름과 분별에 매여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완전하게 주어진 도에는 더욱 더 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는 그 분별심 하나만 내려놓으면 우리는 즉시 영원한 자유를 만날 수 있는데도 말이다.
16.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다.'는 것은 말을 하지 않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마음의 이원성이 우리 안에서 사라져서, 모든 헤아림이 멈추고 '가려서 택하는' 분별과 몸짓이 정지함을 가리킨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매 순간의 '지금' 속에 존재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마음 길과 삶의 길 어디에서든 통하지 않는 곳이 없게 되는 것이다.
17.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라가면 근본을 잃는다
"근본으로 돌아가면…." 이라고 승찬 스님은 말했지만, 돌아가야 할 근본이란 본래 없다. '지금'이 바로 근본이요, 우리 안에서 매 순간 다양하게 올라오는 온갖 번뇌가 바로 근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단 한 순간도 근본으로부터 분리된 적이 없으며, 언제나 근본으로서 살며 존재하고 있다. 우리 자신이 이미 근본이다. 마치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 한 알 한 알 그대로가 바다이듯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근본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바다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보잘 것 없고 초라한 한 방울의 파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늘 불안해하고 목말라하면서, 돌아가 평안하고 자유로을 수 있는 어떤 근본의 자리를 찾고 또 구한다. 안타깝게도 찾고 구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자신이 찾고 구하는 '그것'과는 조금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모른채 말이다.
그래서 승찬 스님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으로 돌아오라."고. 즉 '지금'으로 돌아오고,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라고. 오직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를 통해서만 우리는 참되고 영원한 것을 만날 수 있기 떄문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우리의 분별심의 비춤을 따라 지금과 미래를 나누고, 부족과 완전을 따로 두며, 중생과 부처를 구분한 다음 하나는 버리고 다른 하나는 취하려는 우리의 간단 없는 노력과 수고를 통하여 미래의 어느 한 순간 속에서 깨달음과 완전을 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근본을 떠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18. 잠깐이라도 돌이켜 비추면 공(空)을 앞세우는 것보다 훨씬 낫다
불안한 '지금'의 마음을 버리고 평화로운 '미래'로 달려가려는 그 발걸음을 잠깐이라도 멈추면, 그래서 잠시만이라도 돌이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그 속에 머물러 보면, 그 '멈춤'이 우리가 도달하고 싶어하는 어떤 목표를 앞세우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묶여 있지 않은데 어찌 다시 해탈을 구하느냐?"는 승찬 스님의 한 마디에 문득 깨달음을 얻은 도신처럼,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이것'은 본래 묶여 있지 않은 것이어서 다시 풀어야 할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피하고 달아나고 극복하려고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스스로가 묶일 뿐인 것이다.
19. 공을 앞에 두고도 경계를 따라 흘러감은 모두가 허망한 견해 때문이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이 진실에 눈뜨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상대적인 모든 것에 대한 분별과 집착을 내려 놓게 되고, 동시에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버리려고 하는 헛된 몸짓도 멈추게 된다. 취하고 버릴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20. 참됨을 구할 필요는 없으니 오직 허망한 견해만 쉬면 된다
참(眞)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이 마음이 바로 참이다. 우리가 매일 매 순간 경험하고 있는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그 하나하나가 참 아님이 없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 이미 부처다. 우리는 이미 깨달아 있다. 그렇기에 참됨을 구할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오직 지금 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좋다-나쁘다, 됐다-안 됐다, 이다-아니다 등의 '둘'로 나누고 분별하면서 하나는 버리고 다른 하나는 택하려고 하는 그 허망한 견해만 쉬면 된다.
3부. 분별에서 무분별로
5강.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용기
21. 둘로 보는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좇아가 찾지 마라
삶이 괴롭고 힘들고 불행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그런 것들이 우리 안에서 자주 일어나고 또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저항하고 거부하며 외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늘 '둘'로 보는 견해에 머물면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 가운데 초라하고 못났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끊임없이 버리려고 하는 반면에 우리를 만족스럽게 하고 흡족하게 하는 것들만을 좇아가 잡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마음을 돌이켜 우리 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껴안아 주며 다만 그 순간을 경험해 보면, 그것들은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원수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진정으로 치유해주고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서 찾아온 벗이요 선물이며 하늘의 전령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모든 것의 진정한 실상이다. 그러니 그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가. 단 하나만이라도 놓쳐버리기에 너무나 아까운 귀한 보물들이 아닌가. 그런 온갖 다양한 보물들로 가득한 우리 안은 얼마나 풍요롭고 넉넉하며 든든하기까지 한가!
22. 옳으니 그르니 따지기만 하면 어지러이 마음을 잃게 된다
꿈 속에서 아무리 옳으니 그르니 하며 취하고 버린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마찬가지로 '둘'이라는 허구적인 분별 속에서 아무리 애쓰고 몸부림친들 헛되이 힘만 소진되고 어지러이 마음을 잃을 뿐이다. 다만 꿈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 그리하면 마치 캄캄한 방 안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한 채 더듬거리다가, 갑자기 전깃불이 들어와서 환하게 밝아지면 비로소 방 안의 모든 사물을 또렷이 보게 됨과 동시에 헤매고 더듬던 모든 몸짓을 멈추게 되듯이, 우리가 꿈에서 깨어나 잇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게 되면 우리 영혼의 모든 방황과 목마름이 영원히 끝남과 동시에 진실로 자유롭고 행복한 존재가 된다. 그렇듯 다만 눈을 뜨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23.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으나 하나 또한 지키고 있지 말라
'둘'이라는 것은 오직 우리 마음 안의 이야기일 뿐, 실재와는 거리가 멀다. 이 진실을 깨달아 마음이 만들어 내는 '둘'이라는 상(相)을 우리 눈앞에서 확연히 걷어내고 나면, 그래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이번에는 '하나'라고 할 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다만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매 순간 변화하며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흐르는 마음이 있을 뿐이어서, 그 어느 것도 지킬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24.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 가지 일에 허물이 없다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즉 비교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래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됨과 동시에 자신의 바깥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만 가지 일에 본래 허물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25.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다
본래 허물이 없었으니 따로 도(道)니 법(法)이니 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어 찾거나 구하는 마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다만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뿐 더 이상 비교하거나 분별하지 않으니 따로 '마음'이라고 할 것도 없다. 삶이란 본래 이렇게 단순한 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함 속에 얼마나 깊고 오묘하며 영원한 것이 들어있는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 안에, 이 평범한 일상 속에 말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도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삼라만상 실개성불(森羅萬象 悉皆成佛) 삼라만상이 이미 다 성불해 있더라.
6강. 저항을 그치는 순간
26.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사라진다
'지켜보는 자'가 사라지고 '보이는 대상'만 남으니 '대상'이랄 것도 없이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이듯이, 그렇게 주관과 객관이 소멸하고 사라진 자리에는 '나'와 '너'라는 구별도, 중생과 부처라는 분별도, 생멸법(生滅法)과 불법(佛法)이라는 이법(二法)도 모두가 사라진다.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27.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다
'객관'이라고 하기에 '주관'이라는 것이 생기고 '주관'이라고 하기에 '객관'이라는 것도 있게 되지만, 사실은 그렇게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28. 두 끝을 알고자 하는가? 원래 하나의 공(空)이다
두 끝이란 주관과 객관, 있음과 없음, 어려움과 쉬움, 앞과 뒤, 앎과 모름, 옳음과 그름, 좋은 것과 나쁜 것, 이것과 저것 등과 같이 둘로 분별된 개념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모두가 하나의 공(空), 즉 인연 따라 잠시 생겼다가 사라질 뿐이어서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이 실상을 깨닫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즉시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삶의 신기루와 같은 두 끝에 마음이 더 이상 꺼둘리지 않기 때문이다.
29. 하나의 공이 두 끝과 같으니 삼라만상을 다 머금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空)이다. 이 공이 우리 안팎의 삼라만상을 다 머금는다. 그래서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집착을 내려놓고 매 순간 '지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경험하고, 사랑하며 살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완전하고 영원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자신을 조금도 떠나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그것'이다.
30. 세밀함과 거칣을 나누어 보지 않는다면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세밀함도 공이요, 거칢도 공인 줄을 알면 거기 어디에 치우침이 있겠는가. 사랑과 미움, 성실과 게으름, 분노와 자비, 불안과 평화, 기쁨과 슬픔, 충만과 초라함, 잘남과 못남, 아름다움과 추함, 얻음과 잃음, 강함과 약함, 성공과 실패, 젊음과 늙음, 생과 사 등 그 모두가 다만 공할 뿐임을 알면 거기 어디에 하나는 택하고 다른 하나는 버리려고 하는 집착과 괴로움이 있겠는가. 그 모든 삶의 '파도'가 거칠게 혹은 잔잔하게, 따뜻하게 혹은 차갑게, 조금씩 한꺼번에 몰려온다 한들 그 모두가 다만 '바다'일 뿐인 것을…. 그 무한의 바다가 끊임없이 일렁거리고 춤추는 속에서 우리는 다만 배우고 성장하고 나누고 감사할 뿐인 것을….
4부. 내 안을 직시하는 힘
7강. 잠시 발걸음을 멈출 때
31. 대도는 바탕이 드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다
모두가 도 아님이 없다. 그래서 '대도(大道)'라고 하고 '바탕이 드넓다'라고 하는 것이다. 도란 바로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아프고, 슬프고, 기분 좋고, 우울하고, 심심하고, 즐겁고, 쩔쩔매고, 잡생각이 일어나고, 상쾌하고, 강박에 시달리고, 말을 더듬고, 등 가렵고, 꿈을 꾸고,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나비가 날고, 별이 빛나고, 계절이 바뀌고, 빗소리가 들리고, 귀뚜라미가 울고 하는 등이 모두가 도 아님이 없다. 지금 이대로요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이니, 여기 어디에 쉽고 어려움이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지금 이대로 이미 대도(大道) 안에 있다. 대도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무엇이 더 필요한가? 무엇이 부족한가?
32. 좁은 견해로 여우 같이 의심하여 서둘수록 더욱 늦어진다
좁은 견해란 모양과 모습으로써 헤아리고 분별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네 안에서 올라오는 '이것'이 바로 네가 찾는 그것이다. 그러므로 따로 찾지 마라."라고 분명하게 가리켜 주어도 "설마…." 하고 의심하며 '지금'을 떠나 '이것'을 버린다. 또 "가야 할 곳이 본래 없다. 너는 이미 도달해 있으며, 네가 이미 '참 나(眞我)'다." 라고 일러주어도 "그럴리가…." 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외면하고 깨달음을 구해 떠난다.
그렇게 서둘수록 오히려 더욱 늦어질 뿐이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우리가 어떤 완전한 상태나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거나, 어떤 영적인 자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렇게 분별하는 우리의 마음 하나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디로 달려가거나 무엇을 하려고만 하지 말고, 다만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라.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시점은 바로 '지금'이다.
33. 집착하면 법도(法度)를 잃고서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간다
삿된 길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지금'을 떠나는 것이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믿지 못하고 남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가 두지 말라"(출애굽기 20:3)는 진리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지금 있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을 찾고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왜 그렇게 헛된 노력과 몸부림을 그치지 못하느냐 하면, 바로 마음의 집착 때문이다. 어떤 것은 붙잡고서 놓지 않으려 하고 어떤 것은 멀리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집착인데, 그런 노력과 수고를 통하여 자신이 원하는 보다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법도를 잃는다.
34. 놓아 버리면 본래 그러하니 본바탕에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
다만 놓아버리면 본래 그러하다. 매 순간의 현존이 바로 진리요 자유인데, 우리는 이미 현존하고 있는데, 다시 무엇을 더할 수 있겠는가.
35. 본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니 한가하고 번뇌가 끊어진다
'본성에 맡긴다'는 것은 곧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맡겨야 할 '본성'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 우울할 땐 나를 온전히 우울에 맡겨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요, 불안할 땐 그냥 그 불안 속에 있을 뿐 그것에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앟는 것이며, 슬플 땐 그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여 마음껏 슬퍼하고, 누군가가 밉거나 화가 날 땐 그 소중한 감정을 백 퍼센트 내 안에서 허용해 주는 것이다. 기쁘고 즐거울 땐 다만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뿐 그것을 유지하려 하거나 쌓아두려 하지 않고, 외롭거나 공허하다고 생각될 땐 그것을 달래거나 벗어나거나 다른 감정으로 바꾸려는 일체의 노력을 정지하고 다만 그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며, 쩔쩔매며 안절부절하는 순간이 오면 오히려 마음을 돌이켜 그 힘겨움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는 것이다.
진실로 그렇게 본성에 맡겨보면 그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평화가, 희열이, 쉼이,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기쁨 같은 것이, 이제 비로소 힘겨운 문제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우리의 영혼을 조금씩 적셔옴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만 그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했을 뿐인데, 마음은 한가해지고 번뇌는 저절로 끊어지는 신비를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도를 깨닫기란 얼마나 쉬운가!
8강. 무언가 더하려고 했기에
36. 생각에 매달리면 참됨과 어긋나 어두움에 빠져 좋지 않다
생각으로 결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왜냐하면 생각은 언제나 이원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은 매 순간의 '지금'에 대해 항상 옳으니 그르니, 있다느니 없다느니, 깨끗하다느니 더럽다느니, 부족하다느니 완전하다느니 끊임없이 헤아리고 분별할 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모른다. 그런데 실상은 그런 헤아림과 '가려서 택하는' 노력 속에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할 때 드러나는 것이기에, 생각에 매달리면 참됨과 어긋나 어둠에 빠져 좋지 않다.
37. 정신을 피로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찌 멀리하거나 가까이할 필요가 있겠는가?
다시 말해, 멀리하거나 가까이 한다는 것은 곧 스스로 정신을 피로하게 하는 것이란 말이 아닌가.
9강. 예, 그 마음이면 됩니다
38. 한 수레를 얻고자 하거든 육진(六塵)을 싫어하지 말라
즉 꿈에서 깨어나 모든 것이 '하나'인 실상을 보고 참된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얻고자 하거든 "육진을 싫어하지 말라"고. 육진이란 우리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눈·귀·코·혀·몸·의식을 통하여 경험하게 되는 색깔·소리·냄새·맛·촉감·법의 감각대상을 가리키는데, 한 마디로 물질적인 대상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모든 경험 대상을 통틀어 육진이라 한다. 그것을 싫어하지 말라는 것은 곧 그러한 경험으로 인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을 가려서 택하지 말고 매 순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껴안으라는 말이다. 그것이 슬픔이든 불안이든 초라함이든 괴로움이든 우울이든 미움이든 열등감이든 공허든 그 밖의 무엇이든 그 하나하나가 온전히 '한 수레' 위에 올려진 것이기에, 다만 싫어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본래 '하나'임을 저절로 알게 되어 진정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말이다.
39. 육진을 싫어하지 말아야 바른 깨달음과 같아진다
육진을 싫어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지금'이라는 실상의 세계 속으로 아름답게 깨어나는 한 영혼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하고 가슴 벅찬 일인지!
"(…)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해 왔지만, 이제는 '그냥' 일을 해 보려고요. 깨달음을 위해, 성공을 위해 하는 일 말고요. 그리고 경제적인 부분도 회복하고, 이제 옷도 사 입고, 맛있는 것도 먹으려고요. 수행한다고 저한테 10년 간 신발 하나 옷 하나 사 준 적이 없어요. 그리고 제 룸메이트, 친구, 동료 모두에게 미인하고 고마워요. 현실을 외면한 채 살아왓지만 그래도 절 기다려 준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어색하고 떨리긴 하지만 조금씩 배워 나가려고요. 미래가 아닌 지금 저 자신으로 살아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대가 없이 베풀어 주신 사랑에 감사드려요."
그는 그렇게 '지금' 안에서 올라오는 불안과 두려움과 혼란과 답답함과 뒤죽박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껴안음으로써 존재의 진정한 자유속으로 성큼 들어갈 수 있었다.
5부, 나로서 살아가는 행복
10강.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면
40. 지혜로운 사람은 일부러 하는 일이 없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를 얽어맨다
지혜로운 사람은 '한 수레'를 얻은 사람을 가리킨다. 그렇기에 그는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 일부러 하는 일이 없다. 백장 스님처럼 슬프면 울고 우스우면 웃고, 배고프면 밥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피곤하면 눕는다. 즐거울 땐 즐거워하고 우울할 땐 우울해하고, 재미있을 땐 재미있어 하다가도 심심할 땐 그냥 좀 심심해한다. 혼란스럽고 답답할 땐 그 혼란함과 답답함을 받아들이며 그 속에 가만히 있어볼 뿐, 그것을 못견뎌하며 벗어나거나 극복하려 노력하지도 않고, 강할 땐 강하고 약할 땐 약하고, 따뜻할 땐 따뜻하고 차가울 땐 차갑고, 사랑할 땐 한없이 사랑하지만 누군가가 미울 땐 그냥 미워할 뿐 그 마음을 용서나 사랑으로 바꾸려 애쓰지 않고, 넉넉할 땐 넉넉하고 초라할 땐 초라하고, 편안할 땐 편안하지만 불편할 땐 또 좀 불편해하고, 당당할 땐 당당하고 경직될 땐 경직되고, 분명할 땐 분명하고 모호할 땐 모호하고….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늘 바쁘게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스스로 얽어맨다. 슬픔을 기쁨으로 만들려 애쓰고, 약함을 강함으로 고치려 노력하고, 게으름을 성실로 변화시키려 다짐하고, 미움을 용서나 사랑으로 바꾸려고 몸부림치고, 내면의 혼란과 답답함을 얼른 정리하려 안달한다. 외로움을 달래려 어딘가로 달려가고, 들끓는 잡생각과 망상을 고요하게 하려 수행하고, 초라함을 채워서 충만하게 하려 하고, 불편함을 못 견뎌 하며 깨달음을 구하고, 중생을 버리고 부처가 되려 하고….
그러나 그는 그 모든 노력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다만 메마르기만 할 뿐 진정한 평화와 고요와 자유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가 떠나고 고치고 바꾸려 하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이것' 속에 그가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이 넘치도록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듯 자신을 영원토록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 줄 보물들을 스스로 버리고 떠났으니 그 마음이 몸시도 가난하고 메마르게 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41. 법에는 다른 법이 없는데 허망하게 스스로 좋아하고 집착한다
법(法)에는 다른 법이 없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이것! 이 현존 밖에 없다. 그러므로 '가려서 택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허망하게 스스로 좋아하고 집착하지 말고 단지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라. 그러면 즉시 우리는 영원한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온갖 번뇌로 들끓는 우리 안의 사바세계가 바로 불국토요,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가 영원한 천국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 이대로 이미 그 자리에 있다.
42.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커다란 잘못이 아니겠는가?
마음 너머의 자리는 마음으로는 갈 수 없다. 분별 너머의 자리는 분별을 통해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바로 그 마음과 분별이 우리 안에서 사라질 때 저절로 드러나는 것인데, 오히려 그 마음을 가지고서 그 자리에 도달하려고 마음을 쓰니 어찌 커다란 잘못이 아니겠는가?
43. 어리석으면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생기지만 깨달으면 좋아함과 싫어함이 없다
어리석으면, 즉 이원의 분별심에 사로잡힌 채 자꾸만 '가려서 택하려' 하면 매 순간 좋은 것과 나쁜 것, 택할 것과 버릴 것,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생긴다. 하지만 깨달으면, 즉 그 한 마음을 내려놓고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면 좋아함과 싫어함이 영원히 사라진다. 다만 '지금'을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성장하며 나누며 너울너울 삶을 춤추며 아름답게 노래할 뿐이다.
44. 모든 두 가지 경계는 오직 헤아려 보기 때문에 생긴다
딸 아이의 눈빛 하나에도 경직되고 긴장하며 어쩔줄 몰라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가? 초라한 것인가? 잘못된 것인가? 흔들림 없는 무엇으로 더 많이 채워야 하는 결핍되고 모자란 마음인가? 번뇌에 사로잡힌 보잘 것 없는 중생의 모습인가? 아니, 그냥 '그것'일 뿐이다. 또 커다란 자비심과 사랑과 지혜와 흔들림 없는 마음은 좋은 것인가? 본받을 만한 것인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인가? 완전한 것인가? 깨달은 부처의 마음인가? 아니, 그것 또한 그냥 '그것'일 뿐이다. 헤아리고 분별하면 좋다-나쁘다, 크다-작다, 됐다-안 됐다, 부족하다-완전하다, 번뇌-깨달음, 중생-부처가 생기지만, 다만 그 한 마음만 내려놓으면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45. 꿈 같고 환상 같고 헛 꽃 같은데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은 마치 꿈 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으며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갯불 같아서 잡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며 모아 쌓아둘 수도 없는, 그때그때의 인연 따라 잠시 생겼다가 사라질 뿐인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그 순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만 경험하면 그것들은 제 스스로 왔다가 제 스스로 간다. 그러니 우리가 따로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면 된다.
46.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려라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의 시비분별로써는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영혼의 자유는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분별과 헤아림의 끝 혹은 노력의 끝에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토대요 바탕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다만 놓아 버리기만 하면 진리는 저절로 드러난다. 우리는 이미 그 토대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47. 눈이 잠들지 않으면 모든 꿈은 저절로 사라진다
눈이 잠들지 않으면, 즉 우리 마음 안에서 이원의 분별심 하나가 사라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꿈은 저절로 사라진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온갖 감정, 느낌, 생각을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가리고 택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여전히 꿈속에서 허망하게 몸부림칠 것이 아니라, 그 하나하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통째로 경험할 수만 있다면 마음의 이원성은 저절로 사라지고 모든 허망한 꿈 또한 남김없이 자취를 감춘다. 매 순간의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꿈을 깰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지금' 속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다. 이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진리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
48. 마음이 만약 다르지 않으면 만 가지 법이 한결 같다
물 위에서 일렁이는 물결이 잠잠하든 거칠든 약하든 힘차든 고요하든 격렬하든 아름답든 추하든 그밖에 어떤 모양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든 그 모두가 다만 물일 뿐이듯이, 내 마음 안에서 어떤 감정, 느낌, 생각이라는 물결이 무슨 모양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든 그 모든 것이 다만 내 마음일 뿐임을 알아, 모양(相)으로써 헤아리고 분별하는 가운데 어떤 것은 좋아하고 어떤 것은 싫어하며, 어떤 것은 택하고 어떤 것은 버리려는 그 허망한 몸짓만 정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이대로 완전하여 지금 이대로 자유롭다는 실상에 문득 눈을 뜨게 될 것이다.
11강. 본래 부족한 것이 없었다
49. 한결 같은 바탕은 현묘하니 그윽히 차별 인연을 잊는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책상 위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올라와 있다. (…) 그 모든 것이 올려지거나 사라짐에 대해 책상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냥 묵묵히 무엇이 올라오든 무엇이 사라지든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자신 위에 올려진 이런저런 것들에 대해 어떤 것은 좋다 하며 잡아두려 하지도 않고, 어떤 것은 싫다 하며 거부하거나 밀어내려 애쓰지도 않는다. 책상은 다만 여기 이렇게 있을 뿐이다.
우리 마음 안에도 이 책상과 같은 '판(板)'이 하나 있다. 이런저런 삶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온갖 감정, 느낌, 생각이 이 '마음의 판' 위에 올려지거나 사라지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순간을 경험할 뿐 어떤 것은 좋다 하며 집착하거나 어떤 것은 싫다 하며 버리려고 하지 않는 '무분별(無分別) 혹은 무간택(無揀擇)의 판' 같은 것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도 이 '판'이 있지만, 그러나 이 '판'은 마치 감추어져 있는 듯 사람들에게 잘 발견되지도 않고, 묻혀 있는 듯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판'을 자신 안에 엄연히 갖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그것을 사용하지 못한 채 그 '판' 위에 올라오는 온갖 감정, 느낌, 생각을 끊임없이 가려서 택하면서 좋아하고 싫어하느라 그저 분주하기만 하다. 그러면서 스스로 괴로움과 고통을 불러들이고 있다.
50. 만법을 평등하게 보면 본래 그러함으로 돌아간다
만법을 평등하게 보면 즉 마음이 다르지 않아서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 본래 그러함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 안의 모든 것은 이미 처음부터 본래 그러했다. 슬픔은 그냥 슬픔일 뿐이요, 기쁨은 그냥 기쁨일 뿐이어서, 슬픔이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고 경험하지 말아야 할 것도 아니며, 기쁨이 항상 좋은 것도 아니고 내 곁에 오래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닌, 단지 그 순간의 인연에 따라 잠시 잠깐 경험하는 감정일 뿐이다. 또 충만감을 느낄 땐 한껏 뿌듯해지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문득 초라한 자신을 경험할 땐 몹시 씁쓸해지기도 하는데, 그 둘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택하고 다른 하나는 버려야 할 아무런 까닭이나 이유가 본래 없다. 불안도 어느 순간 갑자기 내 안에서 올라오는 내 마음이요, 편안함도 내 안에서 느끼게 되는 내 마음일 뿐이어서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게 만법을 평등하게 보게 되면 내안에서 순간순간 올라왔다가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생(生)-멸(滅)일 뿐 아무런 차별이 없는 것들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생멸법(生滅法) 그대로가 바로 불법(佛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51. 그 까닭을 없애 버리면 견주어 비교할 수 없다
까닭이란 본래 없다. 그냥 단지 매 순간 우리 안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이런저런 감정, 느낌, 생각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어느 순간 무심히 나뭇가지로 날아와 앉았다가 다음 순간 미련 없이 떠나는 한 마리 새와도 같고, 텅 빈 하늘에 문득 피어올랐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없는 한 무리의 구름과도 같다. 그렇기에 까닭을 찾지도 말고 이유를 묻지도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매 순간의 '지금' 속에 존재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곧 지극한 마음의 평화와 새로운 힘 속에서 비로소 삶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 진정으로 만족하게 될 것이다. 오직 매 순간의 '지금' 속에 존재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까닭이 생기고 불만족과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52. 그침에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따로 없고, 움직임에서 그치니 그침이 따로 없다
삶의 실상은 '흐름'이다. 모든 것은 다만 흐를 뿐, 잠시도 멈추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슬픔은 다시 기쁨이 되고, 잃음은 다시 얻음이 되며, 흐림은 다시 맑음이 되고, 무너짐은 다시 일어섬이 된다. 힘겨움은 다시 평안이 되고, 혼란은 다시 고요가 되며, 움직임은 다시 그침이 된다. 그침에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따로 없고, 움직임에서 그치니 그침이 따로 없는 것이다.
53.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는데 하나가 어찌 이루어지겠는가?
사실은 하나이기에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임을 알고 나면 '하나'라는 것도 사라진다. 다만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일 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삶은 온갖 다양한 것이 온갖 다양한 모양으로 흘러나와 나를 풍요롭게 하고 즐겁게 하며, 순간순간 깨닫게 하고 깊어지게 하며, 끝없이 성장하고 자유롭게 하는 감사한 것들로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살만한 인생인가!
54. 마지막 끝까지 결코 격식을 두지 말라
"마지막 끝까지 결코 격식을 두지 말라."는 것은 곧 어떤 틀도 만들지 말라,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하고 정하지 말라, 상(相) 혹은 관념을 만들지 말라, 어떤 견해도 가지지 말라, 어디에도 머물지 말라는 뜻이다.
승찬 스님이 이렇게 말한 것은 도나 진리 혹은 깨달음이 결코 "이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진리란 이런 것이다." 라고 하거나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오직 이 하나의 길밖에 없다."라거나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하지 않으면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격식을 만드는 것이고 궤칙을 세우는 것일뿐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다.
55. 마음에 계합하면 평등하게 되어 하는 일이 모두 쉬워진다
'계합(契合)'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서로 조금도 틀림없이 꼭 들어맞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마음에 계합하면'이라는 말은 곧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이 마음과 하나가 되어 서로 조금도 틀림없이 꼭 들어맞게 되면'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하나가 되어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되면 우리 마음이 그 모든 것에 평등하게 되어 하는 일이 모두 쉬워진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도요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말이다.
56. 여우 같은 의심이 깨끗이 사라지면 올바른 믿음이 알맞고 바르게 된다
과연 지금 이것이 전부일까? 똥 누고 오줌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이 하찮은 일상이 어떻게 불법(佛法)일 수 있는가? 늘 흔들리는 내 마음이 있을 뿐인데 그 마음과 계합할 때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얻게 된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웃고 울고 슬퍼하고 기뻐하며 우울해하고 긴장하며 또 죽 끓듯 하는 잡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지금 이대로가 어떻게 완전한 자유이며 진리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그 이상의 것'을 찾고 구하는 마음이 바로 여기 '여우 같은 의심'이다. 이 마음을 달리 말해 '분별심'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는 그렇듯 늘 '지금'을 믿지 못하는 바로 그 마음으로 인해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오직 여우 같이 의심하는 그 마음 하나가 깨끗이 사라질 때 우리 안에는 비로소 올바른 믿음이 알맞고 바르게 된다. 동시에 우리 안팎의 모든 삶이 완전히 소생하게 되어 진실로 자유롭고 행복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57. 아무 것도 머물러 두지 않으면 기억할만한 것이 없다
우리 '안'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할 뿐 머물러 있는 것은 진실로 아무 것도 없기에, 다만 가려서 택하는 그 한 마음을 내려놓고 '흐름'과 하나가 되어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요 자유요 해탈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현재'에 있으면 매 순간을 백 퍼센트로 살게 되기에, 아무 것도 기억해 두려고 하지 않고 또한 그 무엇도 지키려고 하지 않아도 언제나 자유롭고 신선하며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삶의 진정한 힘은 '기억' 속에 있지 않고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존재' 속에 있기 때문이다.
58. 텅 비고 밝아 스스로 비추니 애써 마음을 수고롭게 하지 않는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모든 감정, 느낌, 생각은 다만 그때그때의 인연에 따라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인 텅 빈 것이어서, 우리가 분별심을 일으켜 가려서 택하지만 않으면 그 번뇌 그대로가 밝고 스스로 비추는 보리(菩提)요, 지금의 이 중생의 마음이 바로 영원히 변치 않는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되어, 다만 그냥 살 뿐 애써 마음을 수고롭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59. 생각으로 헤아릴 곳이 아니니 의식과 감정으로 측량키 어렵다
마치 하늘의 구름이 시시때때로 온갖 모양과 형태를 그리며 그저 일었다가 사라지듯이, 우리 '마음'이라는 하늘에도 온갖 모양의 감정, 느낌, 생각이 그때그때의 인연에 따라 시시로 때때로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어떤 것에도 본래 '이름'이 없으니,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고 또 판단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을 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무간택 혹은 무분별의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60. 진실하고 변함 없는 법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다
'진실하고 변함 없는 법계'란 바로 '지금'을 가리킨다. 언제나 변화하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으며 늘 흔들리는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이것'이 바로 진실하고 변함 없는 법계인 것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다고 승찬 스님은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진실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은 동시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나'와 '남'이라는 분별을 내려놓고 나면 다시 '나'와 '남'이라는 분별이 나타나 그 속에서 살게 되지만, 분별의 무게가 제로이기에 그 어떤 분별에도 매이지 않고 물들지 않는 대자유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61. 재빨리 상응하고자 한다면 오직 둘 아님만을 말하라
상응(相應)이라는 말은 계합한다는 말과 같은데, '정확히 딱 들어맞다.' 혹은 '막힘없이 통한다.'는 뜻이다. 승찬 스님은 "재빨리 상응하고자 한다면"이라고 말했지만,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실상을 말해보면, 우리는 이미 상응해 있다. 단 한 순간도 어긋나지 않고 우리는 이미 매 순간 도에 계합하고 있다. 우리가 아침에 눈떠서 다음 날 아침 다시 눈 뜰 때까지 우리 안에서 경험하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이 도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도를 떠날 수가 없다.
그러니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이미 이대로가 도인 것을 다시 무슨 방법을 통하여 도에 상응하며, 무슨 노력을 통하여 도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기에 승찬 스님이 "오직 둘 아님만을 말하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어떤 것도 거부하거나 저항하지 말고, 어떤 것도 잡아 두거나 쌓아두려 하지 말고, 그렇게 우리 안을 끊임없이 가려서 택하려는 모든 몸짓과 노력을 정지하고 다만 이 순간의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경험하면 된다. 우리는 이미 상응해 있기에, 상응하려는 모든 노력을 그치기만 하면 실상은 저절로 우리 앞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62. 둘 아니니 모두가 같아서 품지 않는 것이 없다
둘 아님을 알게 되면 비로소 마음이 고요해진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둘'이라는 착각 속에서 끝없이 내지르던 헛된 몸짓을 그만두게 되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움켜쥐려던 손도 가만히 내려놓게 된다. 삶과 자신에 대한 모든 의문과 방황과 목마름도 끝이 나서 참된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곤 매 순간의 '지금'을 살면서 자신 안에서 올라오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품으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존재하며,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며, 끝없이 성장하며 사랑하며 살게 된다.
63. 온 세상의 지헤로운 이들은 모두 이 근본으로 돌아온다
온 세상의 모든 지혜로운 이들이 돌아오는 근본의 자리란 바로 매 순간의 '지금'이다. 실재하는 것은 오직 '지금'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이미 그 자리에 도달해 있지 않은가? 매 순간의 현재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어느 누구도 '지금'을 떠나서는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을 더 찾고 무엇을 더 구해야 하는가? 무엇이 부족한가?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만 하면 될 뿐!
12강. 내가 곧 사랑이기에
64. 근본은 빠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아 한 순간이 곧 만년이다
승찬 스님이 말한 '근본'이란 것을 달리 표현해 보면 도(道), 진리, 깨달음, 불법, 참 나(眞我), 근원, 모든 것의 궁극, 영원히 변치 않고 흔들리지 않는 무엇 등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단지 이름일뿐 실상은 '하나'다.
그런데 그 근본이란 다름 아닌 바로 '지금'을 가리킨다. '지금'은 매 순간순간의 현재를 가리키는 것이니, 승찬 스님의 말처럼 빠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는 것이다. 빠르다 혹은 늦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감정 혹은 분별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매 순간의 '지금'에 존재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그와 같은 모든 이원적이고도 허구적인 분별로부터 놓여나게 됨과 동시에 '시간'이라는 관념으로부터도 벗어나게 되어 진정 자유롭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영원을 살게 된다.
65.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 온 세상이 바로 눈앞이다
즉 도는 있다거나 없다 하는 이원의 분별과 개념 속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게 헤아리며 찾을수록 도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다. 도는 언제나 우리 눈앞에 훤히 드러나 있다. 지금 이것! 바로 이것! 우리가 매일 매 순간 쓰고 있는 이것! 그렇기에 단 한 순간도 떠나 있지 않은 바로 이것!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호흡하고 앉고 눕고 서고 밥 먹는 이것!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나!
그런데 이 너무나 단순하고 명확한 진실이 알려 하고 찾으려 하는 마음 때문에 다 묻혀 버리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도는 알려고 하는 노력 속에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찾으라. 온 세상이 바로 지금 우리 눈앞에 있다.
66. 지극히 작은 것이 곧 큰 것과 같으니 상대적인 경계를 모두 잊고 끊는다
지극히 작은 것이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경험하는 온갖 모양의 소소한 감정, 느낌, 생각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지극히 큰 것과 같다는 것은 곧 그 하나하나가 진리요 도요 깨달음이요 불법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아무리 작고 보잘것 없는 파도 한 방울일지라도 그 하나하나가 무한히 큰 바닷물임에는 틀림 없고, 아무리 초라하고 하찮은 생명일지라도 그것이 한없이 넓은 허공 안에 존재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불법에 '예외'란 존재하지 않으며, '밖'이라는 것도 없다. 이 진실에 눈을 뜬다면 거기 어디에 상대적인 경계가 남아 있겠는가. 모두가 하나일진대, 거기 어디에 가려서 택할 것이 남아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을 떠나지 말라.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버리지 말라. 우리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67. 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으니 그 가장자리를 보지 못한다
그렇게 '지금'으로 돌아와 보면, 이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크다느니 작다느니 하는 상대적인 경계도 마음에서 사라지고 없고, 너와 나라는 분별도,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구분도, 나아가 '이 자리'라고 할 자리조차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 모든 것은 다만 마음이 지어낸 공허한 개념이요 말들일 뿐이어서 매 순간의 '지금' 속에서는 그 어떤 가장자리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하나'라고 한다.
68.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니
우리 마음 안에서 이원의 분별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구체적이고도 일상적인 우리의 삶 속에서는 그 모든 것이 하나도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 크고 작은 상대적인 경계도 성성하게 살아있고, 나와 너라는 구별도 엄존하고 있으며, 삶과 죽음이라는 모습도 분병하게 구분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 있다. 마치 석가모니가 생로병사의 문제가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6년 설산 고행 끝에 마침내 부처가 됨으로써 그 고통을 완전히 해결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생로병사에 매여 사는 대부분의 사람과 조금도 다름없이 늙고 병들고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분명히 마음 안에서는 이원의 분별이 사라져 모든 것이 '하나'일 뿐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삶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서도 그 있음에 집착하지 않으니 그 있음은 곧 있음이 아니요, 삶 속에 없어서 이런저런 모양으로 불편한 것에 대해서도 그 없음에 조금도 매이지 않으니 그 없음은 곧 없음이 아니며 불편함은 곧 불편함이 아닌 것이다. 그 마음 안에서는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어서 그 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렇기에 삶의 모든 일들에 늘 물드는 듯하지만 조금도 물들지 않고, 안팎의 모든 일들에 늘 흔들리는 듯하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마치 하얀 스크린처럼 말이다.
69.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반드시 지킬 것이 없다
모든 일이 일어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온갖 것이 왔다가 가지만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면, 그래서 모든 차별이 곧 차별이 아니요 모든 상대가 곧 하나하나의 절대가 아니라면, 그리하여 마침내 고요해지지 않는다면, 그 고요 속에서 늘 소란스러운 안팎의 모든 삶에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없다면, 안과 밖의 분별이 사라지고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져 나를 사랑하듯 진실로 너를 사랑할 수 없다면, 지금 이 순간 영원히 자유롭지 않다면, 그 자유를 기꺼이 나누어 줄 수 없다면, 그것은 지킬만한 법이 못된다는 말이다.
70. 하나가 곧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이 곧 하나다
'하나'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늘 쓰고 있는 이 마음을 가리킨다. (…) 우리가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심지어 꿈 속에서조차 경험하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을 다 적어보자면 바닷물을 먹물 삼고 하늘을 종이 삼아도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 마음일 뿐이니, 오직 '하나'인 것이다.
71. 다만 이와 같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끝마치지 못할까 걱정하랴
진정 이와 같을 수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이미 모든 추구가 끝나 있기에 다만 주어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면서, 매 순간 삶을 노래하며 기뻐하며 배우며 성장하며 사랑하며 나누며 감사하며 살아갈 뿐 달리 더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72. 진실한 마음은 둘이 아니고 둘 아님이 진실한 마음이다
본래 우리 안과 밖의 모든 것은 둘이 아니었다.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인데, 이원성에 병든 우리 마음이 스스로 둘로 나누어 봤던 것이다. 꽃은 때가 되면 그냥 피었다가 질 뿐인데 우리가 한 번은 '예쁘다' 하고 다른 한 번은 '추하다' 하며, 또 때에 따라 인연 따라 우리 안에서는 온갖 감정과 느낌과 생각이 그냥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인데, 우리가 어떤 것은 '좋다' 하고 어떤 것은 '나쁘다' 하며 기려서 택하고 사랑하거나 미워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매여 괴로워하고 힘들어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일체 모든 것은 그런 이원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 '둘'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허구다. 이 진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마음 너머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며 매 순간을 있는 그대로 살게 되는데, 그때 우리는 어디에도 걸림 없는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마음을 승찬 스님은 '진실한 마음(信心)'이라고 했다.
73. 언어의 길이 끊어지니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다
그 마음 너머의 자리란 바로 '지금'이며, 그 자리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오직 '지금' 밖에 없다. 매 순간 '지금 속에는 모든 언어의 길, 분별의 길, 이원의 길이 다 끊어져 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이름도, 과거니 미래니 현재니 하는 개념이나 관념도 붙을 수 없다. 오직 영원한 자유만이, 기쁨과 행복이, 사랑이 꺼지지 않는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며 넘실넘실 춤을 추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으로 돌아오라. 지금 두 발을 굳건하게 디디고 서 있는 그 자리로 돌아오라. 지금 자신 안에서 올라오는 이런저런 감정, 느낌, 생각들 가운데 어떤 것을 초라하다거나 못났다 하며 버리지 말라. 지금 자신 안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온갖 마음 가운데 어떤 것만을 사랑하여 부여잡거나 쌓아두려고 하지 말라. 그렇게 헛되이 애쓰지 말라. 모든 것은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라.
승찬 스님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이 간곡한 말씀이 지금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 살아 있기를!
지도유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단막증애 통연명백(但莫憎愛 洞然明白)
"지극한 도(道)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가려서 택하지만 말라.
다만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만 않으면 막힘없이 밝고 분명하리라."
(完)
'신심명 (대승찬 풀이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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