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 (간택을 싫어하고 증애가 없는 마음에서)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
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
간택함이 없는 마음이나 증애함이 없는 마음 바탕에 털끝만큼이라도 가리고 택하는 차별심이나 미워하고 좋아하는 차별심이 남아 있으면 이 차별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고 했다.
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져 있는 상태가 우리들의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앞 세 구절을 종합해보면, 택하고 버리는 마음이나, 미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은 모두 자기 욕심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며, 욕심은 구하는 마음이 심해지면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이러한 이유로 (간택을 싫어하고 증애가 없는 마음에서)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고 했다.
이러한 악순환의 발단은 간택하는 분별심과 증애의 분별심에서 일어나는 법이니 오직 간택하는 마음을 싫어하면 지도에 무난히 이를 수 있고, 증애 하는 마음이 없으면 지도하는 길이 통연하고 명백해진다고 한 것이다.
간택하는 마음과 증애하는 마음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간택하는 마음이나 증애하는 마음은 이기심의 근본인 오온심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다.이 의식은 전생에 있었던 나의 경험이나 금생에 있었던 나의 경험이 지배하는 나의 생각이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 자체가 좋아서 내 비위에 맞고, 그 사람 자체의 성격이 나빠서 내 비위에 거슬린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자신을 돌이켜 보면 그것은 자신의 오온심에서 비롯된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온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 상대방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깨달음으로 자기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만 있으면 그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나에게 접근해 온다 하더라도 그를 간택하거나 증애하는 마음 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형형색색의 사람과 물건이 서로 어우러질 때 생 함이나 성장함이 일어나는 법이고 창조가 가능해질 수 있지만, 서로 대립하거나 배척할 때는 서로 쇠퇴해지고 멸하게 되는 법이다. 그렇다고 남을 상대하지 않으면 연기하는 대열에서 소외되고 자기 성격의 개선이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 더욱 외곬 수로 빠지게 된다. 이것도 역시 자기가 간택하고 증애하는 결과로 일어나는 현상이지 남에게 허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말한 상대방에게 허물이 있기도 하겠지만 많은 경우 상대방에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고의 허물에 의해 상대방에 허물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말은 불교의 인과응보설을 바르게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관점이다.이러하기 때문에 간택하는 마음을 싫어하고 증애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오온심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의 경험을 소멸하기 위해 참회하고, 복을 짓고, 도를 닦아야 한다는 말이다.
참회는 복을 짓는 뿌리이고, 복을 짓는 행위는 수행을 위한 뿌리이다. 즉 수행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복 짓는 일부터 해야 하고, 복 짓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남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거나 해가 되는 일을 한 성품, 말, 행동 등에 대한 참회가 있어야 한다. 참회를 통해서 복 짓는 일에 역행하였던 일을 다시는 하지 않음으로써 복 짓는 일에 가속이 붙게 된다.
복을 짓고 수행하는 일에 근본이 되는 것이 내 마음을 믿는 신심이다.
인과응보를 믿고 제행이 무상함을 믿으며, 제법이 무아하다는 가르침을 내려주신 불법승 삼보를 믿는 마음이다.
복 짓는 마음이란 나를 위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다.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했으면 그 과보로 금생에 복된 일이 많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생활 자체가 복을 짓는 업이 되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고, 또 악업을 짓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소에 어느 쪽으로 복 짓는 일을 많이 하느냐에 따라 금생이나 내생에 그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항상 남과 잘 사귀고 남에게 필요한 일, 좋은 일을 해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좋은 연을 많이 짓다 보면 선한 도반을 많이 만나고 훌륭한 스승이나 선배 또는 귀인을 만나 하는 일마다 잘 풀려 더욱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이다.
남이 하는 언행이 나의 비위를 상하게 했을 때, 저 사람의 언행이 기분 나쁘다고 생각되는 즉시,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저 사람이 저런 언행을 하지 않았을까? 고 생각하는 마음이 간택이 없고 증애가 없는 마음이다.
상대방의 언행으로 말미암아 화가 났을 때, 자기가 낸 화를 정당화하려 하거나 변명하려 하는 것은 간택심과 증애심을 오히려 깊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그러므로 화가 난 것을 인지하는 즉시 마음속 깊이 참회하고 복 짓는 일을 찾아서 하면 화도 다스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간택심과 증애심도 점차 해소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복 짓는다는 말씀이 우리들의 일상생활 밖에 있는 일이 아니다. 절에 와서 신도님들이나 불사를 위해 하는 여러 가지 봉사활동은 훌륭한 복 짓는 업이며, 예불에 참여하여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법문을 듣는 것 또한 좋은 복을 짓는 일이다.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자 하는 마음이 곧 자기 마음을 가장 잘 다스리는 법이 되기 때문이다.
복을 잘 지어 부처님 법에 수순할 수 있을 때 정과 혜를 함께 닦아 탐욕심을 비워 선정을 이루고 무명을 밝히는 도를 닦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 오온심 : 색수상행식(물질, 느낌, 생각, 행동, 의식)인데, 물질은 몸이고 느낌, 생각, 행동, 의식은 통틀어서 마음이라고 하며 우리들의 감각작용은 몸을 통해 일어나는 느낌이나 생각, 말이나 행동, 즉 간택 및 증애하는 느낌, 생각, 언행의 근본이 되는데 식에서 일어난다.
호리라는 것은 털끝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사슴 또는 노루가 봄이 되면 다 털갈이를 합니다. 그때 보면 묵은 털이 빠지고 보드랍고 보드라운 잔털이 올라옵니다. 그게 바로 호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육안으로도 잘 안 보이는 그런 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러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나중에는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부부나 친구가 갈라설 때도 그렇거든요? 처음서부터 큰문제가 아니에요. 보면 음식 차이, 잠버릇 차이, 성격차이 그렇지요? 첨에는 반찬투정하고, 출퇴근 시간 때문에도 싸우다가 나중에는 TV 채널을 가지고 싸우지요. 부부사이에는 TV 채널 선점권이란 게 있거든요? 어제 신문보니까 그래 놨대요? 중국의 어느 신혼부부가 싸우다가 여자는 우리나라에서 수출한 드라마 ‘대장금’을 보려고 하고, 남자는 다른 걸 보겠다며 둘이 붙어 싸우다가 여자가 강물에 뛰어들어 버렸어요, 그 꼴진 TV 때문에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걸 동네사람들이 보고는 그 남자를 불러오고 해서 살리긴 살렸습니다. 죽도록 놔 두지 그냥 왜 살렸나 몰라요.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조그마한 문제 때문에 나중에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지요. 친구 간에도 그렇지요. ‘야, 그때 니가 어려울 때 내 불러내서 호떡 안 사줬나, 그런데 너는 왜 답례가 없었노. 그때 나는 된장찌개 안 사 주더나, 그런데 너는 형편이 좋아졌는데도 너는 왜 나한테 된장찌개 안 사주고 칼국수 사 줬노?’이렇게 친구 사이에도 그게 아주 미묘하게 작용해 나중에 가면 너하고는 이제 친구 안 한다는 경우가 있지요? 왜 작은 문제를 가지고 그동안 쌓아왔던 그 큰 우정과 사랑을 다 버리느냐는 거지요, 그게 등신 아니냐는 거지요.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일이 많았습니다. 경전에 보면 두 집안에 싸움이 붙었어요. 가뭄이 들면 서로 자기 논에 물을 대려고 아우성입니다. 새벽부터 일어나 가지고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을 서로 자기 논에 대려고 애를 쓰지요. 그러다보니 두 사람이 싸움이 붙었어요, 그러다 나중에는 싸움이 커져 동네싸움이 되고 결국에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길 하나를 두고 국경이 있었던가 봅니다. 처음에는 두 집안이 싸우고, 그다음은 마을끼리 싸우고 나중에는 국가간에 전쟁을 벌인 거지요. 이것이 바로 털끝만큼의 차이가 있으면 나중에는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지는 그런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애들 싸움이 나중에 동네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처음에는 애들 둘이서 치고박고 하다가 그 다음엔 집안끼리 붙었다가 나중에는 동네끼리 싸움이 붙고 원수가 되고 안 그럽니까? 이게 다 그러한 도리입니다.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느니라]
왜 그러냐하면 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간택하고 증애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간택과 증애가 주범입니다. 버리고 취하고, 미워하고 집착하는 것 때문에 바로 천지현격이라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지더라는 겁니다. 나중에는 자기 스스로 마음이 감당이 안 되는 겁니다. 여기서 벌어진다는 말은 많은 의미가 있어요. 나의 마음 가운데의 본래심과 중생심이 계합하지 못하고 천지로 벌어져 버리지요. 나의 이 본심과 객으로 들어와 있는 중생심이 아주 천지로 벌어져서 도저히 같이 살 수가 없는 그러한 경우가 되는 거지요.
우리가 5번뇌라고 하면 탐·진·치·만·의라고 안합니까? 이 다섯 번뇌가 다 그렇습니다. 끝부분의 의심이라는 것도 그렇잖아요? 계속 온갖 망상을 지어서 나중에는 천지차이로 벌어지게 되거든요. 본인 스스로 불심에서 멀어져서 나중에는 자기 본성하고는 영 멀어져서 도저히 돌아올 수 없게 됩니다. 그런 것이 모두 간택과 증애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버리고 취하는 마음, 미워하고 사랑하는 애착하는 것에서 좀 초연할 수 없을까 하는데 기도와 참선을 열심히 하게 되면 다 초연하게 됩니다.
스스로 증애가 심하고 간택이 심하면 남이 보기에도 ‘저 사람 좀 이상하다’ 하는 분위기를 주게 됩니다.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이게 다 자기 집착 때문에 그런 극단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요.
제가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릴게요. 나이가 좀 많은 사람의 이야기인데요, 나이가 많다는 것은 사람이 늙어 간다는 겁니다. 그럼 어느 정도를 나이가 많다고 하느냐 하면, 여자는 나이가 스물네 살이 넘으면 늙어갑니다. 남자는 스물일곱이면 나이가 많습니다. 그 이상 되는 사람은 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나는 삼십대다, 사십대다 하는 사람은 웃기고 있는 겁니다. 세포는 이미 24세면 늙어 갑니다. 아무리 자기가 잘난 체를 해도 24, 5세 이상인 여성들은 큰소리 칠 것이 없어요.
이 참 웃을 일인지 울 일인지 한번 들어 보세요.
시골에는 어릴 때 보면 앞뒤 집에서 같이 노는 어린애들은 완전히 발가벗진 않지만 대여섯 살 될 때까지는 아랫도리 다 내놓고 그냥 다니지요. 여름에는 같이 수영도 하고 같이 뒤섞여 노는 거지요. 그러다가 이제 철이 들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중에는 뿔뿔이 헤어지지요.
세월이 한참 흐른 뒤 길거리에서 우연히 예전 앞뒤 집에 살던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마주쳤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만났다니까 스물다섯 이후에 만났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여자가 자기 집에 초대를 했습니다. ‘우리 집에 놀러 한 번 오너라, 소꿉장난하며 지내던 그 시절이 그립다’ 했더니 남자도 ‘그래, 가마’ 했습니다. 예정된 날짜에 갔는데 아마 여자가 혼자 사는 곳인가 봅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여자가 옷을 하나도 안 걸치고, 아주 원초적인 옷 그대로를 입고 맞이한 겁니다. 남자가 오히려 당황해 가지고 ‘너, 왜 이러냐'고 했더니 여자가 하는 말이, ‘우리 어릴 때는 원초적인 옷이 얼마나 좋았느냐, 그 때의 모습을 한 번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남자가 하는 말이 ‘원초적인 옷은 좋은데, 좀 다려 입지, 왜.’ 이러는 겁니다. (ㅎㅎㅎ)
말귀는 전부 알아듣네요. 좀 다려 입을 일이지, 어째서 쭈글쭈글한 옷을 입고 있느냐 이 말 아닙니까?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조그마한 생각들, 털끝만한 애착과 간택 때문에 나중에는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지요, 스스로 이상한 사람이 되지 말기 바랍니다.
막존순역莫存順逆
- 항상 마음 들여다보라, 생각에 놀아나고 있지 않은가?
“호리유차毫釐有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리니 욕득현전欲得現前인댄 막존순역莫存順逆하라. 털끝만한 차별이 있어도 하늘땅처럼 벌어지나니, 참나가 나타나려면 순順도 역逆도 두지 마라.”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증애심만 없으면 통연명백洞然明白이다”하시고 바로 뒤를 이어서 “호리유차毫釐有差하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나면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벌어진다고 못을 박아 놓습니다.(4) 뭇 중생들이 생각하기를 “아! 도가 쉽구나. 우리가 이미 도안에 있고 그 도는 완벽하게 갖추어 있으니 언제라도 보게 되겠지”, 이런 당치않은 생각을 할까봐 염려하는 노파심이 역력히 보입니다. 벌써 말에 떨어진걸 알기 때문이겠지요. 스승들만이 갖는 대자비심입니다. 그래서 지극한 도를 바로 보려거든 “막존순역莫存順逆하라.” 순역심順逆心에서 벗어나라는 겁니다.
순역심이란 거슬리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 따라주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말함인데 일체 세상사 순역심 아닌 게 없습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한 생각 일어나면 벌써 순역심입니다.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제발 생각에 놀아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겁니다. 몰록 무심삼매에 들어가 봐야 합니다. 자기가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는 바로 한 생각 차이가 천지현격天地懸隔이 되는 도리를 모릅니다. 그래서 양변을 초월한 도리인 중도中道를 바로 봐야 합니다.
자연에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침마다 떠오르는 해는 그 빛을 누구에게나 똑같이 비춥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남녀노소는 물론 동식물이나 곤충들에게도 똑같이 비춥니다. 완전평등이지요. 크다 작다, 좋다 나쁘다하는 순역심이 전혀 없습니다. 양변이 없으니 그냥 중도입니다. 태양빛만이 아니라 공기도 큰사람이라고 더 주고 작은 사람이라고 적게 주는 법이 없습니다. 꼭 같이 준다는 생각 자체도 없습니다. 그냥 조건 없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어찌 너니 나니 거슬림이니 따름이니 하는 순역심이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의 본질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려면 무심경계를 맛봐야 합니다. 그 길은 곧 일념一念이 되어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화두 참선할 때 화두란 바로 그러한 도리 즉, 중도를 보여준 말길이 끊어진 세계입니다. 심행처멸心行處滅이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중도를 여실하게 보여주신 마음의 언어입니다.
조사 스님들이 중도연기를 직접 깨달으시고 그 세계를 역력하게 보여주신 귀한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한 송이 꽃을 들어 보이시니 가섭 스님이 파안대소하신 소식,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을 전해주신 소식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이어져 우리나라에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다행한 일입니다. 만일 우리나라에 간화선看話禪이 없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남방불교에서는 위빠사나가 있고 티베트에는 티베트 불교의 특성이 살아있듯이 우리나라에 화두참선법이 있다는 것은 큰 행운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 간화선을 직접 참구할 수 있다는 게 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그렇다고 화두가 마음의 언어라고 하여 그런 언어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감정 언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에 무심無心의 언어로 보여주신 게 화두話頭입니다.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닛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니라”, 잣나무든지 소나무든지 그게 문제가 아니고 뜰 앞에 잣나무라는 말을 가지고 보여준 그 깊은 뜻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숙제처럼 준 것이 아니고 그냥 마음을 보여주신 건데 마음눈이 열리지 않으니 보지 못하는 겁니다. 누가 듣는지, 듣는 참나를 모르니까요. 순역심이 끊어진 화두참선에 인생한번 투자해 보십시오. 정말 한번 크게 죽어볼만한 일입니다. 그게 곧 영원히 사는 길이니까요. 이렇듯 태양도 물도 공기도 대지도 온자연이 일체 모든 생명에게 평등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평등 그 자체죠. 자연이 우리를 대하듯이 우리들 스스로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 봅시다. 진리는 하나라는 이름도 넘어선 원융무애圓融無礙이니까요. 어떠한 상대를 만나든 간에 싸워야할 경쟁자로 보지 말고 같이 공존해야 할 존재, 꼭 내 곁에 있어야 할 필요한 인연으로 보도록 하십시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순역심을 벗어난 상태, 거슬림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 맞는 따름까지 지나가는 그림자로 받아들여서 결국 공성이라는 믿음을 세워 보십시오. 이렇게 양변에 걸림없는 존재원리를 바로 보는 것 이것을 정견正見이라 하고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좋다, 나쁘다에서 나쁘다는 거슬림만이 아니라 좋다는 따름까지 초월하여 중간이라는 세계마저 없어진 거죠. 원융하여 어디에도 걸림이 없기에 ‘대자유’라 부득이 이름하기를 중도라고 한 겁니다. 본래 존재원리입니다. 새로 만든 것도 아니고 새로 꾸미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 본래 모습이건만 우리가 그 지극한 도에서 너무 멀리 나와서 그 사실을 모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사실을 바로 보라고 네가 바로 부처라고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평생 설하신 겁니다. 3조 승찬 스님은 <신심명>에서 그러한 본래모습, 지극한 도가 현전하기를 바라거든 일체 순역심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를 깨어나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만약 인류역사가 이러한 상생의 원리에 눈을 뜨기만 한다면 즉, 중도의 삶을 깨달아서 서로 공존의 원리로 살아간다면 지금 현재 지구자원을 가지고 지금 인구의 70배가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상대를 싸워야할 적으로 보기 때문에 경쟁하고 투쟁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하여 지구자원이 이렇게 모자란다는 겁니다.
전 세계에서 군비경쟁에 들어가는 그 엄청난 돈을 농업이나 학문, 수행문화에 투자한다면 지금보다 70배가 아니라 그 이상도 상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십시오. 중도라는 지극한 도가 얼마나 소중한 보배인가를, 그래서 세계의 석학 ‘토인비’는 이러한 원리를 불교경전에서 알고 나서 얼마나 마음에 느낀바가 컸으면 20세기의 가장 큰 사건은 불교가 서양에 전해진 일이라고 했겠습니까? 그러한 석학의 눈으로 볼 때 20세기의 가장 큰일이 2차 세계대전도 아니고 달나라에 인간이 발을 디딘 일도 아니고 불교가 서양에 전해진 일이랍니다. 부처님께서 중도선언을 하신 중도원리가 ‘토인비’라는 석학에게 얼마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으면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우리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위순상쟁違順相爭이 시위심병是爲心病이리니 불식현지不識玄旨하면 도로염정徒勞念靜이라. 어긋난다 맞는다 시비하면 이것이 마음의 병이니, 깊은 뜻을 모르면서 공연히 생각을 가라앉히려 한다.”
<신심명>에서는 중도상생의 원리가 이렇게 여여如如하고 진실이 그런데도 그렇게 삶이 안 되는 원인을 순역심에 이어 “위순상쟁違順相爭이 시위심병是爲心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옳다 그르다, 네 탓이다 내 탓이다, 싸우는 병폐가 너무나 크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 병으로 얼마나 많은 갈등에 시달리고 있으며 필요없는 소모전을 벌이고 있습니까, 이러한 중도원리를 감정표현의 언어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조사 스님들의 언어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석두 스님께서 조용히 앉아 참선하고 있는 약산 스님을 보고 ‘무엇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응, 그러면 그냥 한가하게 앉아 있다는 얘기로구먼.’ ‘스님, 앉아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천성인도 알지 못합니다.’”
옛 스승들의 언어가 이렇게 통연명백합니다. 일천성인도 알지 못합니다. 중도를 이 보다 잘 보여주기가 어렵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석두 스님의 게송입니다.
“언제나 함께 살아도 이름도 알지 못했는데/ 자유자재 이렇게 작용하는구나./ 일천성인도 오히려 알지 못했는데/ 어찌 범부들이 쉬이 밝히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일천성인도 알지 못합니다”는 의미는 안다, 모른다 하는 순역심이 아닙니다. 모를 뿐인 ‘청정’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는 원인이 <신심명>에서 걱정하는 바와 같이 순역심으로, 위순상쟁이라는 큰 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우주자연이 모든 생명을 완전히 평등하게 받들고 있건만 인간들의 불평불만은 끊어질 줄을 모릅니다. 스스로 만든 욕망, 그 욕망에서 온 조그만 손님이 온통 주인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욕계에서는 욕망이 단연코 왕이거든요. 욕망은 성성적적 지극한 도에 가장 약합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누구나 지극한 도道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요한 마음의 바다에 위순상쟁이라는 감정,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는 욕망 때문에 그만 파도가 일어납니다. 위순상쟁違順相爭하여 시위심병是爲心病이라, 나와 남을 가르는 갈등이 파도를 일으키는 겁니다. 이때를 당하여 파도를 싫어하는 순역심이 더 큰 파도를 일으키게 합니다. 왜냐면 파도라는 욕망은 없애려고 할수록 더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욕망이 바로 바람이거든요. 바람이 거세지면 파도도 거칠 수밖에요, 그럴수록 더 파도를 없애려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번뇌망상으로 바로 보리(부처)라는 진리를 세상에서 배워보질 못했기 때문입니다. 파도가 바로 바닷물이다. 파도를 없게 하려거든 파도를 없애려고 파도와 싸우지 말고 바람을 잠재우면 파도란 실체는 없다. 번뇌 망상이라는 파도는 바닷물이라는 부처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이와 같은 진리, 선과 악이 둘이 아니라는 이런 가르침을 우리가 금생에 만났다는 것, 이건 정말 행운입니다. 부처님께서 평생 보여주신 중도의 가르침 말입니다. 이런 법 만나기 그거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연기법에 의지해서 파도라는 순역심과 싸우지 말고 순역심의 본질, 파도의 본질을 바로 보십시오. 어디서 파도가 일어났는가를 자세히 지켜보십시오. 파도가 바닷물에서 바람에 의해 잠깐 변형된 바닷물의 모습이라는 사실이 있는 그대로 보여질 때까지 고요하게 지켜보십시오. 바람이 자고 나면 파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바람만 없으면 파도는 더 이상 파도일 수가 없습니다.
위순상쟁이 시위심병이니, 옳다 그르다 하는 갈등의 바람, 너다 나다 하는 거슬림과 따름의 바람, 이 바람이 다 그림자요 환영임을 알기에 부처님께서는 공空이라고 하신 겁니다. 있던 파도가 없어져서 공空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실체가 없는 공空이라는 겁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든지 오온개공五蘊皆空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단점이 단점일수만은 없게 됩니다. 죄업도 영원한 죄업일 수가 없습니다. 자기 단점을 바로 보는 안목이 생기는 거죠. 장점도 단점도 내 마음의 바다에서 만든 내 작품이고 내 인생임을 알게 될 테니까요. 아는데 그치지 말고 몰록 깨달으면 더 바랄게 없고요. 위순상쟁이 시위심병이라는 꿈에서 깨어나게요.
<주4> 간택하지 말라는 뜻을 해석한 대목입니다. 내게 맞는 경계와 나를 거스르는 경계가 날마다 시시각각 닥쳐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긋난다, 이것은 맞는다 하면서 시비하며 증애憎愛나 순역順逆과 같은 간택심을 버리지 못했다면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가라앉힌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좋은 것.”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으니, 때로는 생각을 놓아버려야 이미 성취되어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기술을 익히려고 하지를 않으니 원하는 것 이상을 가지려면 생각을 버리는 기술을 배워라.
털 끝만큼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만큼 간격이 벌어진다.’ 여기서 유차 즉 차이를 주목해야 한다. 차이가 있다라는 뜻은 이것과 저것의 분별을 말하는 것이니, 여기서도 역시 유차의 의미인 분별을 논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반대의 하나가 또 생기기 때문에, 이러한 상반된 두 가지가 수천수만 가지의 분별을 낳게 되고 끝없는 분별이 생김으로써 계속하여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벌어진다는 의미다.
좋은 것을 선택하고자 싫은 것을 멀리하게 되고, 싫은 것을 멀리하려 하니 고통과 괴로움이 따르게 되어 끝없이 고락의 인과가 반복됨으로 결국 크게 간격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터럭만큼의 분별심이 있으면 터럭만큼의 고락이 생기게 되는데, 이렇게 작은 욕심이 점점 더 많이 생기다 보면 수천수만 가지 욕심이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천지를 삼키려는 욕심으로 인해 하늘땅만큼의 고락의 인과가 생김으로써 천지만큼의 고통과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털끝만큼의 분별심을 없애야 하늘땅만큼의 분별심을 막을 수가 있는데, 이러한 분별심을 없앤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으니, 과연 어떻게 해야 분별심을 없앨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방하착이다. 즉, 곧바로 생각과 감정을 놓아 버리는 것인데, 일단 인과를 믿는 신심을 굳게 가져야 방하착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수없이 설명했듯이, 좋은 것을 하나 얻으려 하거나 얻었다면, 나쁜 것 하나가 이미 생겨났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언젠가는 나쁜 것 하나가 반드시 나타나 과보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각오해야 한다. 부자이건 빈자이건, 명예가 높던 명예가 없던, 잘 생겼던 못 생겼던, 큰 일을 하건, 작은 일을 하건, 늙은이 건 젊은이 건, 여기에 살던 저기에 살던, 보살행을 하던, 도둑질을 하던, 살아있는 이던, 죽은 영혼이던, 고락의 인과는 누구나 같은 것이므로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차이가 없이 나타난다.
다만 분별심이 작은 사람은 작은 인과의 고통을 받고, 분별심이 큰 사람은 인과의 고통을 크게 받으니, 즉,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은 인과의 고통이 없고, 원하는 것이 크고 작음에 따라 크고 작은 인과의 고통을 받게 된다. 사람들이 가장 착각하는 것은 이렇게 되어야 좋고 저렇게 되면 좋지 않다고 하는 생각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인과의 인연 따라 저절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므로,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상관할 일이 아닐 뿐더러 상관해서도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좋다고 생각하면 좋다고 생각하는 분별심으로 인해 좋지 않다고 하는 것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므로, 순전히 나의 생각으로서 나 스스로 좋고 나쁜 고락의 인과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다고 하는 생각을 멈추면 좋지 않다고 하는 것 또한 생겨나지 않게 되므로, 이런 것이든 저런 것이든 그냥 그대로 인연이 흐르는 모습만 그저 바라볼 뿐, 분별심을 내지 않는 것이 진정한 불자의 마음이다.
세상의 모습이나 인간의 모습은 동서고금을 통해 더 좋거나 나쁘거나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 할 것이다. 좋고 나쁘게 생각하는 내 마음만 인과의 파도가 출렁일 뿐이다. 하여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라는 생각이나 감정을 가져서는 고락의 인과를 받게 된다. 다만 인연에 따라 주장을 할 수도 있고, 고집을 피울 수도 있고, 화를 낼 수도 있고, 웃고 울고 할 수도 있을 것이나, 설사 그렇게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생각이나 감정을 얹지만 않으면 그나마 분별심을 내지 않고 중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오늘은 절대 감정을 얹지 않고 분별된 생각을 놓아버리는 즉, 방하착하는 날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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