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대승찬 풀이글)

신심명6/불식현지 도로염정/헛되이 없는 도를 찾고 없는 깨달음을 구하려고 애쓴다는 말

수선님 2023. 2. 5. 13:19

06. 불식현지(不識玄旨) 도로염정(徒勞念靜) : 현묘한 뜻을 알지 못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고 애만 쓰는구나.

이렇듯 지금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이것이 바로 도요 깨달음이요 자유요 해탈인 줄은 알지 못하고, 어떻게든 이것을 바꾸거나 고치거나 버리거나 부여잡으려고 함으로써 헛되이 없는 도를 찾고 없는 깨달음을 구하려고 애쓴다는 말이다.

찾고 구하는 마음만 내려놓으면 지금 이대로 아무 일이 없는 것을.

순역에 집착하는 사람이나 위순상쟁하여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들이 지도의 현묘한 뜻을 알지 못하고 수고로이 마음을 고요히 하려고 애만 쓴다고 했다.

현묘한 뜻을 알지 못한다는 현묘한 뜻이 곧 지도의 뜻이고, 극락 그리고 열반의 뜻이고, 이러한 경계는 세속적 욕망을 깨끗이 씻은 곳인데 그 욕망을 그대로 두고 참선한다고 앉아 있는 것은 공연한 헛수고를 하는 것이란 말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지극한 도의 현묘한 뜻을 알고자 하면 마음에서 서로 다투는 위와 순, 순한 것과 거슬리는 것부터 먼저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다. 세속적인 욕망이 있는 한 위순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다스릴 수 없는 법이니 세속적인 욕망을 우선 제어해야만 위순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

위순도 위에서 이미 말 한 바와 같이 사물이나 사람이 본래부터 나에게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성격이 그 대상을 대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이 감정은 나의 과거의 경험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위순이 반드시 좋다 나쁘다 혹은 옳다 그르다. 라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으니 위도 순도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아야 상쟁, 즉 서로 다투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습관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의 병은 그 습관을 그대로 두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거나 고요하게 할 수 있는 법은 없으니 나쁜 습관을 끊겠다는 원을 세워 끊임없이 그 습관을 끊는 수행에 정진함으로써 만이 가능하다. 수행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잘못된 습관을 바로잡는 일에 원을 세우고 정진하는 것이다.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잘못된 습관은 화냄이다. 탐진치 중 진애이다.

불식현지 不識玄旨

도로염정 徒勞念靜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한갓 수고로이 생각만 고요하게 하고자 할 뿐이다.

 

이 구절부터는 공부하는 사람들을 바로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현지는 우리 마음의 실상입니다. 우리 마음의 됨됨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하여 한갓 수고롭게 생각만 고요하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생각을 아무리 고요하게 해 보아도 금방 들고일어납니다.

끊임없이 들고일어납니다.

그야말로 여석압초 라 돌로 풀을 눌러놓은 것과 같습니다.

돌로 풀을 눌러놓으면 풀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 같지만,

밑에서는 노란 싹이 죽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에서는 싫어하는 마음과 좋아하는 마음이 다 같이 싹트고 있습니다.

특히,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라, 비워라, 없애라, 놓아라’하는 것들이

공부인 줄로만 아는 겁니다.

마음의 본래 됨됨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르고,

오직 염정 생각만 조용하게 하고자 합니다.

마음이란 본래 조용해지지도 않고, 조용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고 했습니다.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마음이 일어납니다.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그 마음은 마음대로 돌아다닙니다.

그것이 마음의 본색입니디.

그렇기 때문에 그것 가지고 꾸짖을 것 없습니다.

마음을 억지로 붙들어 매어서 조용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도로염정, 즉 마음을 고요히 하고자 하는 것은 헛된 수고로움일 뿐입니다.

 

“진정 마음을 고요히 하려면.. 그 방법은?”

 

너는 그렇게 생겼구나. 너는 그렇게 나타나는구나. 내가 너를 시비 분별없이 대하면 너도 나를 그렇게 대하는구나.

 

불식현지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도로염정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애쓴다. 이 대목은 상당히 고난이도의 내용이다. 현지란, 현묘한 뜻을 말하는 것이니, 현묘란 가물가물 하여 분간하기가 매우 어려운 경지를 말한다. 그래서 그 뜻을 알지 못하고 그저 생각만 시끄럽지 않기 위해 애쓴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현지란 도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그 답은 뒤에서 말하는 염정 즉, 고요한 생각에서 찾아야 한다. 고요한 생각을 갖고자 함은 바꾸어 말하여 지금 마음이 시끄럽다는 증거이다. 때문에 간단히 말하여 시끄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고요함을 찾을 필요가 없게 된다. 따라서 현지라는 뜻은 분별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니, 말을 하면서도 분별하지 않고, 생각을 하면서도 분별하지 않으며, 몸이 움직이면서도 분별하지 않는 즉, 신구의 삼업을 분별하지 않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내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일체의 모든 것이 분별없는 그대로 그대로가 모두 현묘 그 자체이니, 따지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별하지 않고 말을 할 수가 있으며, 어떻게 분별하지 않고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선, 말을 하거나, 생각을 하거나, 몸을 움직일 때, 감정을 넣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은 곧 고락(즐겁고 괴로운)의 인과를 낳아서 좋고 나쁜 업식(DNA)이 반복하기 때문이라 했으니, 이러한 고락의 감정이 계속 들락거리다 보면 마음이 시끄럽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곧 고요함을 찾으려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고요한 생각을 무조건 갖는다 하여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고요함의 인과로 인해 고요한 가운데서도 금새 시끄러운 고락의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신구의 삼업 즉, 말을 하거나 생각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게 되면, 탐진치(욕심, 성냄, 분별심) 삼독심이 생기지 않게 되어 분별심이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서 현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현이라는 뜻을 분명히 알게 되면 시끄러움이 저절로 사라지게 되어 고요함을 찾을 필요가 없게 되니, 무조건 고요함을 찾는 것은 휴대폰을 들고 휴대폰을 찾는 것이나 진배가 없다.

 

또 감정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은 인과의 과보를 받기 때문이니, 지금까지 지겹도록 설명하고 강조해 왔듯이,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던, 또 언제 어느 곳에 있던, 어떤 모양의 몸으로 태어나던, 누구를 만나던, 그 상대들은 나의 고락 감정의 업을 나타나게 하는 대상들일 뿐이다.

 

때문에, 나의 고락 업식이 들락날락 하는 업연에 의해, 이런 상대 저런 대상, 그리고 이런 일, 저런 일, 온갖 것을 만나게 되고 시비 분별을 반복하게 된다. 따라서 나의 업인 고락이라는 감정을 잠재우기만 하면, 누구를 만나던, 어떤 상태로 살아가던, 우주가 사라지고, 하늘이 무너지며, 온 세상 모두 불에 타고 물에 휩쓸려 가더라도 나의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적멸하여, 늘 피안과 열반, 현묘한 고요함에서 노닐게 될 것이다.

 

하여, 일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일 저런 일 온갖 일들 속에서도 고락의 인과를 철저히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감정의 분별심을 전혀 갖지 않게 되는 날이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와 대상을 만날 때마다 시비 분별의 감정이 일어난다면, 순전히 고락 인과에 대한 신심이 부족한 탓임을 자각하고, 늘 감정을 살펴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참회하면서, 틈만 나면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을 곁들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