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봉 김기추 거사의 금강경 해석
金 剛 經 講 頌
본문(本文) : 요진삼장(姚秦三臟) 구마라십(鳩摩羅什) 역(譯)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번역(飜譯) 및 강송(講頌) : 백봉(白峯) 金 基 秋 거사(居士)
머 리 말
슬기롭고 총명한 사람은 먼저 삼계(三界)의 건립사(建立事)와 아울러 인생(人生)의 거래사(去來事)에 대하여 큰 의심덩이를 품는다. 당연한 일이다. 실로 삼계(三界)는 무엇으로 인하여 허공에 떠돌면서 온갖 법풍(法風)을 이루고 있으며 인생(人生)은 무엇을 위하여 고뇌를 헤치면서 줄곧 생사(生死)를 엮으며 달리는가? 본래로부터 삼계(三界)와 인생(人生)은 특별히 어떠한 관련성이라도 있는가 없는가? 만약 있다면 삼계(三界)는 주인공이요 인생(人生)은 종속물인가? 참으로 알고도 모를 일이다. 이 당처(當處)의 그 소식을 모르고는 눈 먼 망아지가 방울소리만 듣고 따라가는 격이니 어찌 이 문제를 소홀히 다루겠는가.
성현의 말씀에 삼계(三界)와 인생(人生)은 둘이 아니라셨다. 왜 그런가? 역역(歷歷)히 나투는 유형유색(有形有色)인 삼대계(三大界)는 묵묵(黙黙)히 통하는 무형무색(無形無色)인 법성신(法性身)에서 왔기 때문이다. 법성신(法性身)을 형체라면 삼대계(三大界)는 그림자로서 둘이 아닌 바에야 무슨 까닭으로 법성신(法性身)과 삼대계(三大界)를 둘로 보겠는가. 이럴진댄 도리어 법성신(法性身)의 주인공인 인생(人生)이 그 종속물인 삼대계(三大界)를 마련하면서 모든 법(法)을 굴린다고 믿음이 옳지 않을까. 까닭에 인생(人生)의 거래사(去來事)가 가려짐으로 하여금 삼계(三界)의 건립사(建立事)도 자동적으로 풀려 나오게 마련이라 하겠으니 인생(人生)문제로부터 다루어 감이 첩경(捷徑)일 것이다.
그런데 인생(人生)을 삼계(三界)의 주인공이라면 왜 그 수명은 백년(百年)도 채우지 못하고 죽어야만 하는가? 죽으려면 왜 낳았으며 낳았으면 왜 길이길이 삼계(三界)의 주인공 노릇을 못하고 죽느냐는 말이다. 이렇다. 현멸(顯滅)은 가짜요 부동(不動)은 진짜다. 진짜인 법신(法身)이 없으면 가짜인 색신(色身)은 나툼이 안되고 가짜인 색신(色身)을 나투지 않으면 진짜인 법신(法身)은 씀이를 굴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 곡절을 알면 진짜와 가짜는 둘이 아니므로 하여서 법신(法身)과 색신(色身)도 둘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은 곧 죽음이 아니오 낳음도 곧 낳음이 아니라, 죽음과 낳음은 한결같다고 이르는 것이니 어찌 삼계(三界)의 주인공인 인생(人生)에게 죽음이란 말귀인들 붙이겠는가. 높은 고개로다! 이에 의심의 구름이 뫼 머리에 궁할 새 몸을 굴려도 머물 곳이 없더니 뜻길이 물가에 끊어지면서 푸른 허공이 찢어지는구나. 동남풍(東南風)아 너는 왜 일찍이 유마거사(維摩居士)가 비사리성(毘舍離城)에서 입을 다무시고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소림사(少林寺)에서 벽을 향하신 소식을 전하여 주지 못하였던고!
알지어다! 이곳에 한 등잔이 있어서 겁(劫) 밖의 빛을 놓을새, 이 바로 석가노인이 녹야원(鹿野苑)에서 사제법륜(四諦法輪)을 굴리심으로부터 비롯하여 아함(阿含)․방등경(方等經) 등부(等部)를 설(說)하시고 중생들로 하여금 그 근기(根機)를 순숙케 하신 다음 바야흐로 반야대부(般若大部)를 드시어 부처지견(知見)을 여시고 보이시고 깨우치시고 들게 하셨으니 이는 곧 법등잔의 심지를 크게 끌어올리신 셈이신 데, 이와 같이 무릇 사처 십육회(四處 十六會)에 걸쳐 사십구년중(四十九年中)에서도 이십일년(二十一年)이란 긴 세월을 통하여 육백여부(六百餘部)를 설(說)하시고 그 중에서도 이 일부(一部)를 드시어 금강경(金剛經)이라고 까지 일컬으셨다는 것은 아마 중생의 본래 슬기가 고금(古今)을 꿰뚫어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소식임을 이 경(經)에서 입증하심이 아니실까.
나날이 뚜렷함이여! 안 꺼지는 나날의 등불이로다.
그 성체(性體)는 휘영청이 맑아서 시방(十方)에 펴였고 그 이량(理量)은 영특스리 밝아서 일체(一切)에 잠겼으니 이 미(迷)함이냐, 이 깨침이냐! 태산(泰山)이 눈을 부릅떠서 오니 녹수(綠水)는 귀를 가리고 가는 증처(證處)인지라 이 실로 너의 알뜰한 터전인 줄로 알라.
생각 생각이 환함이여! 안 꺼지는 생각 생각의 등불이로다.
그 위덕(威德)은 외외하여 사해(四海)를 거느리고 그 공행(功行)은 당당하여 구류(九類)를 건지니, 이 참이냐, 이 거짓이냐! 옛 길에 풀은 스스로가 푸르려니 바름과 삿됨을 아울러 안 쓰는 용처(用處)인지라, 이 바로 너의 살림인 줄로 알라.
자국자국이 시원함이여! 안 꺼지는 자국자국의 등불이로다.
그 수단(手段)은 호호하여 이변(二邊)을 거두움에 뜻하여 이루지 못함이 없고 그 방편(方便)은 탕탕하여 삼제(三際)를 말아냄에 행하여 달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 실다움이냐, 이 헛됨이냐! 만약 오늘 일을 논의하면 문득 오랜 때의 사람을 잊어버리는 응처(應處)인지라 이 오로지 너의 맡음인 줄로 알라.
싱그럽고 까마득한 본래의 슬기인 반야(般若)여! 앎이 아니면서 알지 아니함이 없고 있음이 아니면서 있음 아님이 없고 머묾이 아니면 서 머묾 아님이 없으므로 하여금 유자(孺子)는 이를 가리켜 일태극(一太極)이라시고 노자(老子)는 이를 가리켜 비상도(非常道)이라시고 예수는 이를 가리켜 여호와대신(大神) 이라셨으니 모두가 그럴듯한 명구(銘句)라겠으나 세존(世尊)이 이르신 「본래의 성품」이란 말씀과의 그 거리는 이 가까움이냐, 이 멂이냐, 이 같음이냐, 이 틀림이냐, 만약 상위가 된다면 천리(千里)인가 천만리(千萬里)인가. 여기서 특히 옛 사람의 글귀를 듣기로 하자. 「옛 부처도 나시기 전에 엉기었어라, 한 모습이 뚜렷함이여 석가도 오히려 들내지 못하셨거늘 가섭인들 어찌 능히 전하랴」이르신 이 당처(當處)가 바로 우리 집안의 풍속으로서 그 맛이 쇠쇠하고 그 멋이 낙낙한 첫 글귀가 아니며 나아가서 이경의 소식처(消息處)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경은 무상(無相)을 마루로 무주(無住)를 밑으로 묘유(妙有)를 씀으로 하시고 견성(見性)의 도리를 세우심에 읽고 외우는 자 수 없으며 일컬으고 기리는 자 한없으나 하나인 법에 대하여는 제 나름대로의 소견이 다르고 제 깜냥대로의 풀이가 엇갈리니 이 또한 무슨 놀음인가. 다 근기(根機)의 우열(愚劣)에서 오는 병통인지라, 참으로 대도(大道) 앞의 분별에 넘치는 합리화(合理化)를 고집함은 절대의 금물(禁物)이라 하겠다. 이렇듯이 이 한 권의 경의(經義)는 깊고 그윽하면서 중생성(衆生性)중에 오뚝하여 있음으로 글자풀이 안에 잠겨있지 않고 말귀놀이 위에 감돌지 않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니, 당초로 다그진 고집쟁이가 못되면은 온 누리의 진리(眞理)를 깨쳐 알기란 지극히 어렵다고 이르겠다. 「마하 큰 법왕이시여!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구나. 본래로 검지도 희지도 않음이로되 곳에 따라 푸르고 누름을 나투시네.」거성(去聖)의 게구(偈句)이시니 이를 바탕으로 하여서 삼계(三界) 구지(九地)가 머리를 들고 인간군상(人間群像)이 손을 흔들며 쏟아져 나오나 범성(凡聖)이 어찌 그 의(義)를 재며 용천(龍天)이 어찌 그 취(趣)를 헤아릴까보냐. 고금(古今)으로 사람이 알지 못하니 이름하여 금강경(金剛經)이라 부르자
끝으로 이번에 새로 출판하는 기회를 얻어 강송(講頌)을 대폭 보강하였음을 알려 들리고, 출판에 물심양면으로 협조를 아끼지 않으신 제현(諸賢)에게 깊이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단기 4205
서기 1972년 10월 15일
불기 2516
백봉(白峯) 金 基 秋 분향(焚香)
해제서인(解題序引)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은 반야부(般若部) 경중(經中) 금강(金剛)과 같이 예리한 경(經)이다. 반야(般若)는 대장경중(大臟經中)에서 최대(最大)한 경(經)이요, 이 가운데는 대품(大品) 소품등(小品等) 제부(諸部) 이백칠십오부분(二百七十五部分)이 있고 총권수(總卷數) 육백권(六百卷)으로 되어있으며, 이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은 그 제오백칠십권(第五百七十卷)째의 능단금강분(能斷金剛分)이 된다.
그리고 반야(般若) 전부(全部)는 사처(四處) 십육회(十六會)에 의(依)하여 의설(宜說)되었으니, 제일처(第一處) 왕사성(王舍城) 기도굴산(耆闍堀山)에서 칠회(七回)로서 제일회(第一會) 지(至) 제칠회(第七會), 제이처(第二處) 사위성(舍衛城)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서 칠회(七回)로서 제팔회(第八會) 지(至) 제십사회(第十四會), 제삼처(第三處) 타화자재천궁(他化自在天宮)에서 일회(一回)로서 제십오회(第十五會), 第四處 왕사성(王舍城) 죽림원(竹林園)에서 일회(一回)로서 제십육회(第十六會)인 바, 이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은 제이처(第二處) 제구회(第九會)의 설(說)이 된다.
그러나 이 금강반야(金剛般若)는 반야부중(般若部中) 상당히 일찍이 출현된 경(經)이요, 대반야(大般若) 완성(完成)에 따라 그 부질(部秩) 권차(卷次)에 당(當)하게된 것이며 대반야(大般若) 완성(完成) 이전부터 유통(流通)되어 왔다.
이러한 금강반야(金剛般若)는 대가(大家)의 역(譯)이 있으니 하나는 요진(姚秦) 홍시사년(弘始四年)(서기402) 장안(長安) 초당사(草堂寺)에서 경제(經題)를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혹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둘은 북위(北魏) 삼장(三臟) 보리유지(菩提有支) 역(譯)으로서 북위(北魏) 영평이년(永平二年)(서기509) 호상국(胡相國)의 집에서 경제(經題)를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셋은 진(陳) 삼장(三臟) 진제(眞諦)의 역(譯)으로서 진(陳) 천가삼년(天嘉三年) (서기562 역처불상(譯處不詳)) 경제(經題)를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넷은 수(隋) 삼장(三臟) 달마급다(達摩笈多) 역(譯)으로서 수(隋) 대업년간(大業年間)(서기605~616 역처불상(譯處不詳)) 경제(經題)를 「금강능단반야바라밀경(金剛能斷般若波羅蜜經)」 다섯은 당(唐) 삼장(三臟) 현장(玄裝) 역(譯)으로서 당(唐) 정관(貞觀) 이십삼년(서기648) 옥화궁(玉華宮)에서 경제(經題)를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 여섯은 당(唐) 삼장(三臟) 의정(義淨) 역(譯)으로서 당(唐) 장안삼년(長安三年)(서기703) 서(西) 명사(明寺)에서 경제(經題)를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 이라고 한 것 등의 역본(譯本)이 그것이다. 그리고 현장삼장(玄裝三臟)이 당(唐) 용삭삼년(龍朔三年)(서기663) 대반야(大般若) 전출(全出)에 제(際)하여 「대반야제구회분(大般若第九會分)」이라는 제호(題號)로 별역수장(別譯收臟)한 것도 이 경(經)의 이름인 것이다. 위의 육역(六譯)은 대체로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하도 혹 직역적(直譯的)․의역적(意譯的)인 것과 문사상(文詞上)의 상이(相異)가 있으며 일반적인 경우는 현장(玄裝)의 역(譯)이 많이 준용(準用)되는 것이로되 이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은 구마라십(鳩摩羅什) 역(譯)이 예로부터 널리 준용(準用)되어 온다.
이 경(經)의 적적(的的)한 대의(大意)는 후단(後段)에 말하고자하는 본(本) 강송(講誦)에서 잘 드러내고 있거니와 그 상면적(相面的)인 경의(經意)로는 「以喩法爲名(이유법위명) 實相爲體(실상위체) 無住爲宗(무주위종) 斷疑爲用(단의위용) 大乘爲敎相(대승위교상)」이라고 한 명(明)의 종려(宗려)의 주석(註釋)이 간명(簡明) 적요(適要)한 말씀이다. 그리고 여기 그 진상적(進相的) 의취(義趣)에 대하여 세속적(世俗的) 또 개괄적(槪括的)으로 일언(一言)하면, 불타(佛陀) 성해(性海)의 무한대(無限大)한 정신(情神)이 보시행(布施行)을 위수(爲首)로 하여 광대(廣大) 무변(無邊) 무수(無數) 무량(無量)의 덕행(德行)을 작(作)하되 이것이 그 자성반야(自性般若)의 견(堅) 강(剛) 명(明) 리(利)한 성용(性用)에 의(依)하여 환망(幻妄) 악습(惡習)을 당처(當處)에 파쇄(破碎)하고 자성대천사계(自性大千沙界) 일진상(一眞常)으로 돌아가 무주(無住) 무착(無着) 무상(無相)한 심상(心相)이 대천사계(大千沙界)의 무변(無邊) 무진(無盡)한 중생(衆生)과 제불(諸佛)에 향(向)하여 동용(動用)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무상(無上) 정등(正等) 정각(正覺)〉를 자기본연(自己本然) 자성반야(自性般若)의 발화(發華)로서 현성(現成)하는 것이 이 경(經)의 계긍(綮肯)이라 하겠다.
또한 이 경(經)의 결구(結構)로는 심히 사견적(私見的)이기는 하나 일개(一槪)하면, 인위적(因位的)인 반야(般若)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라는 용상(用相)으로 현발(顯發)하여 그 과위적(果位的)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향(向)하여 진동(進動)되는 것이요 또 이것이 자성(自性) 무량(無量) 광대(廣大)한 사계(沙界)로 향(向)하는 바탕이 되는 것으로서 반야(般若) 그것이 무한한 용력(用力)을 발휘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그것이 무진(無盡)하고 각차(各差)한 중생(衆生)과 함께 하는 때문에 이 경(經)은 일견(一見) 호대(浩大)한 말씀이 반복 순환된 듯한 가운데 은현(隱顯)의 맥박(脈膊)이 퍼져나가고 구단(句段) 구단(句段)이 반야(般若)의 구심적(求心的) 운동(運動)이 의단(疑團)을 낳고 깨뜨리고 하는 행진(行進)으로서 결구(結構)되었다. 그러므로 이 경(經)은 왕양(汪洋) 광대(廣大)한 그 정신(情神)의 당체(當體)가 되는 반야(般若)의 현발(顯發)과 체득(體得)이 제일의(第一義)가 되는 것으로서 반야자체(般若自體)의 용성(用性)에 의(依)하는 조파(照破)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가 자신(自身)의 심상(心像)이 되는 도리(道理)인 것이다.
그러면 이 경(經)은 첫째로 경수(經首)에서 보이는 사심(四心) 등(等)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하고, 둘째로 주강(住降) 등 보리행(菩提行)을 행(行)하는데 있어서 반야자성(般若自性)의 견강(堅剛)하고 예리(銳利)하고 명철(明徹)한 용공적(用功的)인 행진(行進)이 최상(最上) 직재(直裁)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진취(進取)하는 경(經)인바, 여기에는 사마이(奢摩提) 등 여러 가지 행법(行法)에서 향망(向望)할 수 있을 것이나 최상승(最上乘) 선법(禪法)이 가장 적요(適要)한 것이라 하겠고 또 이러한 선법(禪法)이 이러한 경(經)에서 발천(發闡)된 것이라 하겠다.
혹 교가(敎家)에서 천태(天台)의 교판(敎判)에 따라 반야경(般若經)을 대승시교(大乘始敎) 즉 대승(大乘)의 초보적(初步的)인 교상(敎相)이라고 말하는 일이 있거니와 이것은 천태(天台)의 자가(自家) 종취(宗趣)를 고양(高揚)한 것을 그대로 쓰는 말일뿐, 반야(般若)는 실로 불교(佛敎)의 시점(始點)이 되는 동시에 종점(終點)이 되는 것이요, 불교(佛敎)의 핵심(核心)이 되는 것이요, 불법(佛法)의 생명력(生命力)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존(釋尊) 일대(一代) 사십구년(四十九年) 시교중(示敎中) 거의 그 절반이 되는 이십일년간(二十一年間)이 반야의 의설기간(宜說期間)으로 판석(判釋)되는 것이요, 대장경(大藏經)의 약(約) 삼분(三分)의 일을 차지하고 있는 최대(最大)의 경(經)으로서 전(全) 불전(佛典)중 그 폭(幅)과 아울러 그 비중(比重)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는데 특히 이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은 그 중 정점(頂点)이 되는 경(經)이다.
그러므로 이 경(經)은 실로 최상승의 법문이 되는 것이요, 불교(佛敎) 각종(各宗)에 긍(亘)하여 숭상(崇尙)되어 온 경(經)으로서 불교경전(佛敎經典)중 가장 많이 읽혀지는 경(經)이요, 그 주석서(註釋書)는 당(唐)의 초대(初代)에 벌써 팔백여가(八百餘家)의 것이 있었다고〈육조서(六祖序)에 범팔백여가(凡八百餘家)라 함〉하는 것이니 이후(以後) 지(至) 현대(現代)까지에 나온 주석서(註釋書)를 통치면 시로 한우충동(汗牛充棟)일 것이다. 이것은 이 경(經)의 최심묘(最深妙)함에 의(依)하는 각(各) 가(家)들, 또 그 시대(時代) 그 대중(大衆)의 요청적(要請的) 표상(表象)이라 하겠으며 이들 주석서(註釋書)의 실질(實質)은 별문제로 하고라도 각각(各各) 그 안목적(眼目的) 특징(特徵)이 있을 것은 자이(自爾)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매거(枚擧)는 미황(未遑)하거니와 그중 특공적(特功的)인 것으로는 인도(印度)의 무착보살(無着菩薩)(4~5세기) 은 이 經을 전념중(專念中) 일광정(日光定)에 들어 보처존(補處尊)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의 「팔십게(八十偈)」를 품수(稟受)하고 그 실제(實弟)요 또 동지(同志)인 천친보살(天親菩薩)과 더불어 이 경(經)의 이십칠단(二十七段)의 단의처(斷疑處)를 소명(疏明)하여 이후(爾後) 이 경(經)에 대한 안목(眼目)을 지어 오는 것이며, 또 이 경(經)이 중국(中國)에 전래(傳來)되자 그 연구(硏究)가 고조(高潮)된 나머지 그 분단(分段)이 구분(區分)되어 이 경(經)의 대단(大段)을 조연(照然)케 하였다. 양(梁) 소명태자(昭明太子)의 소립(所立)이라고 전(傳)하는 삼십이분(三十二分)이 그것이요, 이래(爾來) 이 경(經)은 이 구분(區分)에 의하여 분단(分段)되는 것이 상례(常例)가 되어온다.
그리고 각(各) 가(家)와의 관련(關聯)된 것으로는 승조(僧肇)〈동진(東晋) 383~414〉의 금강경주(金剛經註), 천태(天台)〈수(隋) 538~597〉의 동경(同經) 소(疏), 길장(吉臟)〈수(隋) 549~623〉의 동의소(同義疏)에 의하여 「삼론종(三論宗)」〈대승실교(大乘實敎)〉이 천양(闡揚)되고 또한 「천태종(天台宗)」〈일승원교(一乘圓敎)〉에 숭상(崇尙)되고 규기(窺基)〈당(唐) 632~682〉의 동찬(同贊), 경흥(憬興)〈신라(新羅) 신문왕시(神文王時). 수적불상(壽寂不詳)〉의 동(同) 요간(料揀), 지엄(智儼)〈당(唐) 602~668〉의 동(同) 약소(略疏) 등(等)에 의(依)하는 「법상종(法相宗)」〈대승권교(大乘權敎)〉이 발천(發闡)되고 또한 「화엄종(華嚴宗)」〈일승별교(一乘別敎)〉의 안목(眼目)이 되었다. 그리고 특히 선가(禪家)에 있어서는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당(唐) 643~716〉가 크게 그 회상(會上)의 교전(敎典)으로 하였고 육조(六祖) 혜능대사(慧能大師)〈당(唐) 638~713〉가 초수시절(樵豎時節)에 이 경(經)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제십(第十)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의 구(句)를 들음에서 오득(悟得)한 이래(邇來)로 선가(禪家)의 소의경전(所依經典)처럼 되어 왔다. 덕산화상(德山和尙)이 당초(當初) 이 경(經)의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제십팔(第十八)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에서 다점노파(茶店老婆)의 힐문(詰問)에 망석(罔惜)하였다는 이야기는 선가관문(禪家慣門)의 이야기거니와 그가 이 금강(金剛)의 연유(緣由)에 의하여 필경에 사풍(詞風) 매우(罵雨)의 대선장(大禪匠)이 되었다는 것은 두말 할 것 없다.
우리 한국(韓國)의 불교(佛敎)는 그 역사적(歷史的) 진상(進相)에 의(依)하여 조계하(曹溪下) 선종(禪宗)이 되거니와 「이석(理釋)」제도(制度) 확립(確立) 이래(以來)로는 그 교전(敎典)의 하나로서 본경(本經) 오가해(五家解) 합편본(合編本)이 지용(智勇)되어온 것이니 부대사(傅大士) 〈양(梁) 498~569〉찬(贊), 육조(六祖)의 구결(口訣), 종밀(宗蜜)〈당(唐) 807~841〉찬요(纂要), 치부(治父)〈송(宋) 도천(道川) 년조불상(年條不詳)〉송(頌), 종경(宗鏡)〈북송(北宋) 904~975〉 제망(堤網)이 그것이요, 이것이 이조초(李朝初) 함허(涵虛)〈1376~1433〉의 설의(說誼) 병교간(倂校刊)으로 상재(上梓) 유통(流通)되는 것으로서 중국(中國)이나 일본(日本)에서는 볼 수 없는 편본(編本)인 것이며, 이 오가해본(五家解本)을 태본(台本)으로 하여 자선(子璿)〈북송(北宋) 964~1038〉의 간정기(刊定記)를 본경(本經) 소석서(疏釋書)로 첨용(添用)하여 온다. 그런데 이것은 선가적(禪家的) 경학(經學)으로서는 이상적(理想的) 편성(編成)이라 하겠고 또 그 소식(消息)을 아는 이에게는 좋은 것이기는 하나 초학자(初學者)로서는 산발적(散發的)인 합본(合本)의 지말(枝末)에서 천식(喘息)하는 것이어서는 의미(意味)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경(經)의 현대적(現代的) 해설본(解說本)으로는 일본인(日本人)들이 상당히 노력한 저술(著述)들이 있으나 그 본지(本旨)를 분명히 관천(貫穿)한 것을 볼 수 없으며 우리 한국(韓國)에 있어서도 수종(數種)의 강술본(講述本)이 나온 것이 있으나 그 투식(套式)부터가 현대적(現代的) 호흡(呼吸)에 맞을 것인가 의문인 것이요, 그 내용(內容)에 있어서도 뚜렷이 학구적(學究的)이거나 뚜렷이 본지적(本旨的)이거나 한 것이 없다. 여기 이 경(經)의 참으로 새롭고 좋은 저서(著書)가 대망(待望)되는 터이다.
본(本) 강송(講頌)을 대하건대 구마라십(鳩摩羅什) 역(譯)에 의거하고 삼십이분단(三十二分段)에 따라 분단(分段)이 본문대역(本文對譯)(훈독(訓讀))하고 강송(講頌)을 시(施)하고 거기에 한문(漢文)․국문(國文)의 송구(頌句)를 부(附)하였으며 경수(經首)의 「여시(如是)」에 대하여는 송구(頌句)를 하나 더 가(加)하여 삼십삼송(三十三頌)의 복수(複數)로 되었다. 이것은 여시(如是)의 의(義)가 심중(甚重)한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 송구(頌句)들이 연선(連線)히 펼쳐 나간 경의(經意)에 대하여 절절(節節)이 꽃을 피우고 그 깊은 의지(義旨)를 관천(貫穿)하기 창해(滄海) 밑바닥을 둘러 빼었다. 금강경(金剛經)의 전정신(全精神), 전의취(全義趣)가 만전(滿全)히 차이고 또한 새롭고 맛있게 조리(調理)되어 이것을 읽고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르는 결에 치윤(治潤)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해(阿耨多羅三藐三菩提海)로 인입(引入)하여 마지않는다. 이것은 이 금강경(金剛經)의 전정신(全精神)이 저자(著者) 자신(自身)의 생리(生理)가 되고 이 경의(經意)가 자가(自家)의 호흡(呼吸)이 됨이 아니고서는 이럴 수 없으며, 또 재래(在來)의 불서(佛書)에서 보는 고착적(固着的)인 문자배열(文字配列)이 아니고 저자(著者)의 용용(湧湧)하는 슬기에서 솟아오는 신신(新新) 발자(潑刺)한 사조(詞藻)로서 종횡무애(縱橫無碍)로 유인(遊刃)하여 그 경의(經意) 그 문구(文句)를 하나도 남김 없이 또한 대천사계(大千沙界)의 한 중생(衆生)도 남김 없이 다 알아 가고 또한 단 하나의 중생(衆生)이라도 알아 가도록 기술(記述)하여 갔다.
그런데 여기 하나 부언(附言)코자 하는 것은 저자(著者) 백봉(白峯) 김기추(金基秋) 선생(先生) 이분에 대한 것인바, 이분은 평석(平昔)에 글을 잘하는 분도 아니오, 불교(佛敎)에 오래 종사(從事)한 분이 아니다. 그의 생애적(生涯的), 불교적(佛敎的) 경력(經歷)은 이분의 어떤 일문(一文) 가운데 일단(一段)을 끌기로 한다.
「무신론자(無神論者)로 자처(自處)하던 나는 청년시(靑年時)에 일제소요죄(日帝騷擾罪)로 투옥(投獄)되었을 때 일년간(一年間)의 독방생활(獨房生活)에서 일본역(日本譯)인 채근담(菜根譚)․벽암록(碧巖錄)을 읽음으로써 인생문제(人生問題)에 대한 어떤 회의(懷疑)를 느꼈다. 맹자(孟子)와 논어(論語)에서도, 신약(新約)과 구약(舊約)에서도 느껴보지 못하였던 마음의 크나큰 충격은 출옥후(出獄後)의 기구한 시간(時間)의 흐름 속에서도 사람이란 무엇이냐 하는 파문(波紋)만을 일으킬 따름이었다. 이와 같이 민민(憫憫) 장세월(長歲月)에 걸쳐 자의자작(自意自作)한 억지 결론(結論)이 양심적(良心的)인 삶이요 깨끗한 죽음뿐이었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결론(結論)이었다. 그러나 거년(去年)에 기이(奇異)하게도 불(佛) 보살(菩薩)의 가호(加護)로써 숙연(宿緣)을 만나게 되었고 그 지도(指導)에 따라 결사적(決死的)으로 대법(大法)에 참여할 기회를 얻음으로써 인생(人生)에 대한 묘리(妙理)를 음미(吟味)하게 되었고, 따라서 금강경(金剛經)에서 우주(宇宙)의 근본진리(根本眞理)를 체득(體得)하게 된 셈이었으니 불(佛) 보살(菩薩)께 은혜(恩惠)를 갚는 일만이 나의 인생관(人生觀)의 전부(全部)인 것이라고 하겠다. 」
위의 일문(一文)에서 별견(瞥見)되는 바와 같이 이분은 청년시절(靑年時節) 이래(爾來) 학문(學問)보다도 사상(思想)의 생애(生涯)이었고, 이것이 인생(人生)의 추구(追求) 회의(懷疑)로 향진(向進)되었고, 경각(頃刻)에 무량공덕해(無量功德海)로 이 강송(講頌)을 유출(流出)하였음을 알 수 있거니와 이분은 일제시(日帝時)의 한족(韓族) 특급(特級)의 「요시찰」로서 맞섰고 해방후(解放後) 일시(一時) 정치운동(政治運動)을 폈었으나 그것이 아님을 알자 포척(抛擲)하고 오로지 인생(人生) 그것이 무엇인가 회의(懷疑)하고 추구(追求)하였다. 그러나 지금부터 바로 일년전(一年前) 그때까지는 일개(一個) 촉망(囑望)도는 구도자(求道者)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이분이 그 후에 그야말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의 기연(機緣)을 가진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솔직히 말해서 이분이 본 강송(講頌)을 금반(今般)에 나에게 교간(校刊)을 부탁 하였을 적에 나는 내심(內心)으로 「이분이 불교(佛敎)를 얼마 하지 않은 분이니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이겠거니」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얼마나 정중와(井中蛙)의 소견(所見)이냐. 이 강송(講頌)을 일단 손에 하고 정독(精讀)하건대 그야말로 언언(言言)이 이인당양(利刃當陽)이요, 구구(句句)가 수쇄불착(水灑不着)이요, 부처의 심간(心肝)을 궤뚫는 것이요, 중생(衆生)을 해체(解體)하여 버리는 기발(奇拔) 그것임에 새삼 감탄(感歎) 경복(敬服)을 불금(不禁) 하였다. 여기에는 나의 놀라움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백봉(白峯) 김기추(金基秋) 선생(先生) 이분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불법(佛法)의 도리(道理)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 육조대사(六祖大師)가 무식한 나무꾼 시절에 항려(巷閭)의 길에서 금강경(金剛經)의 일구절(一句節)을 듣고 곽연(廓然) 오득(悟得)하고 불과(不過) 팔개월(八個月)의 수련(修練) 그것도 「방아찍이」를 거쳐서 일약 불(佛) 혜명정통(慧命正統)의 제삼십삼조(第三十三祖), 지나(支那) 법통(法統)의 제육조(第六祖)가 된 사실, 그것이 육조(六祖) 그분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불법(佛法)의 도리(道理)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평석(平昔)의 백봉(白峯) 이분이 무식한 나무꾼 혜능(慧能)만 못하라는 법(法)이 있으리요, 이분 백봉(白峯)은 회의추구(懷疑追求)의 나머지 작년(昨年) 동기(冬期) 삼․사인의 동반(同伴)을 얻어 모처(某處)에 나가 함께 결사(結社)를 하고 「이것을 해결 못하면 죽는다.」는 결의(決意)와 그 죽음의 절박감(切迫感)과 달아오르는 열민(熱悶)의 연속(連續) 수월(數月), 물아(物我) 민연(泯然)의 경지(境地)가 전개되면서 더욱 갈열(渴熱) 불사저(不死底)의 사상(死像)과 같이 된 중, 홀연 「비심비불(非心非佛)」의 구(句)를 견문(見聞)하는 찰나 폭지(曝地) 일파(一破)하고 그후 그 초속적(超速的)인 진동(進動)에 의(依)하여서는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열(閱)함에 곽이전탈(廓而顚脫)하였다. 그러니 이 분이 실삼수월(實參數月)에 불법(佛法)을 요득(了得)하고 생사문제(生死問題)를 해결하였다. 모든 학불자(學佛者)를 위하여 얼마나 좋은 본보기냐. 또한 이것이 수십년(數十年) 장세월(長歲月)을 안좌의선(晏坐擬禪)하고 거기에 마치 군대(軍隊)의 밥그릇 수 따지듯이 수행(修行)의 년조(年條)나 따지고 아만(我慢)만을 증장(增長)하는 일부(一部) 류(流)의 얼마나 참괴(慚愧)할 사상(事像)이냐. 이 일이란 년한시간(年限時間)에 관계가 없는 것이요, 학문지식(學問知識)과도 관계가 없는 일이다. 초발심시(初發心時)에 편성정각(便成正覺)하는 것이요, 식정(識情)의 백지(白紙) 위에서 성취(成就)하는 것이요, 정식(情識)의 피안(彼岸) 그것인 것이다.
자기(自己) 자지(自持)의 자성(自性)을 개발(開發)하는 일, 이것은 자가본유(自家本有)의 광명(光明)의 현현(現顯)인 것이요, 거기에 소호(少毫)의 운예(雲翳)가 있어도 섬사(纖絲)의 짐축(朕逐)이 있어도 그것은 이미 정식(情識)의 차안(此岸)인 것이니 일반저한(一般底漢)의 자임(自任)하는 경지(境地)가 아니다. 또한 공량(空亮)한 경지(境地) 그것은 무기공상(無記空相)인 것이며 또한 설사 대사(大死)의 피안적정(彼岸寂靜)에 거(居)한다 할지라도 이것은 아라한과상(阿羅漢果上)의 일인 것이며 바라밀다(波羅蜜多)의 소식은 아닌 것이다. 무한대(無限大)한 정신(情神)이 일초(一草) 일목(一木) 일사(一沙) 일진(一塵)에 섭입(涉入)하여 이것이 대천사계(大千沙界) 일진상(一眞常)으로서 진동(進動)하는 소식이 금강반야바라밀다(金剛般若波羅蜜多)인 것이다. 이것이 저자(著者) 백봉(白峯) 선생(先生)의 경지(境地)임을 위에서 표시(表示)한 바이다.
무량(無量) 무변(無邊)의 공덕장(功德藏)이 되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을 만전(滿全)히 창달(暢達)한 이것이 이 세대(世代)위에서 념념생동(念念生動)하는 이 강송(講頌)이야말로 미암(迷暗)의 혼구등광(昏衢燈光)이 되는 것이요, 혼탁(混濁)한 이 사회(社會)에 생신제(生新劑)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영혼(靈魂)에 병들고 지혜(智慧)에 녹슨 이 고장에 얼마나 값진 것이냐. 불초(不肖) 일러서 무한(無限) 무진(無盡)의 공덕모(功德母)라 하는 바이다.
서기 1964년 10월 일
김(金) 준(俊) 열(烈) 근식(謹識)
인생의 노정기(路程記)다
백봉(白峯) 김기추선생(金基秋先生)은 일반신도(一般信徒)들은 물론 불교전문학자(佛敎專門學者)들도 기호(耆好)하면서 감히 생의(生意)치 못하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을 마치 떡을 주무르듯이 자유자재(自由自在)로 그 심오(深奧)한 의취(義趣)를 갈파(喝破)하고 웅건(雄建)한 송구(頌句)로 노래하였다.
이 경(經)은 대승교(大乘敎)의 최상승(最上乘) 법문(法門)이요, 선리(禪理)라, 금강(金剛)과 같은 지혜(智慧)가 아니고서야 무소주(無所住)에 머물어 그런 마음이 솟아나지 않을 것이요, 또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는 사구(四句) 그대로 여거 여래(如去 如來)하는 여래(如來)의 뜻이 아니고서야 이렇듯 걸림없는 법유(法乳)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이미 고금(古今)을 통하여 이 경(經)은 대소천여(大小千餘)의 주석서(註釋書)가 있으나 거개(擧皆)가 강독(講讀) 해석(解釋)의 편(便)을 공(供)한 것이요, 내용(內容)을 알기 쉽게 여실(如實)히 해명(解明)한 것이 희소(稀少)할 뿐만 아니라 현대인(現代人)으로서 호흡(呼吸)에 알맞고 삶의 철학(哲學)으로 생활화(生活化)하는데 좋은 방편(方便)이 되지 못하던 이때 백봉선생(白峯先生)의 강송서(講頌書)는 미진(迷津)의 교량(橋梁)이요 암야(暗夜)의 증명(證明)과 같은 존재(存在)이다.
초심자(初心者)를 위하여서나 전문가(專門家)를 위해서 이 강송서(講頌書)는 어진 사우(師友)요 선지식(善知識)이 될 것은 그 초판(初版)에서 이미 법열(法悅)을 얻은 사람들의 수(數)로도 짐작이 가거니와 이제 이를 보완(補完) 재판(再版)하였으니 그 누구라도 이 무한(無限)한 공덕장(功德藏)을 대하게 되면 자연(自然) 의내명주(衣內明珠)를 되찾아 본지풍광(本地風光)의 여여(如如)한 소식(消息)을 만끽(滿喫)할 것이다.
아무리 과학(科學)이 발달하여 물질문화(物質文化)의 혜택을 받는 인간(人間)이라 하더라도 삶의 철학(哲學)이 없으면 팔만사천(八萬四千) 번뇌(煩惱)에 휩쓸려 정신적(精神的)인 안온(安穩)함을 얻지 못하고 일종의 허탈상태(虛脫狀態) 그대로 취생몽사(醉生夢死)가 될 것이니, 과연 「인생(人生)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지성인(知性人)이라면 수수께끼의 해답(解答)을 알지 못하고 풀지 못한다면 무슨 보람이 있으랴.
오늘날은 동서(東西)가 함께 우주시대(宇宙時代)라고 기함(氣陷)을 토(吐)하며 바로 날개가 돋친 듯 자유(自由)로이 허공(虛空)을 날고 우주(宇宙)를 왕복(往服)한다고 뽐내지만 가령 월세계(月世界)나 일세계(日世界)에 가거나 또는 그 밖의 모든 성좌(星座)에 오른다해서 곧 천당(天堂)에 가거나 극락정토(極樂淨土)에 가는 길은 물론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人間)의 근본문제(根本問題)를 해결하지 못하면 생(生) 자체(自體)가 불안(不安)하고 초조(焦燥)하므로 그의 모든 향배(向背)가 불안(不安)의 연속(連續)이 있을 뿐이요 해탈(解脫)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 인생(人生)이 무엇이냐의 우문현답(愚問賢答)이 바로 이 강송서(講頌書)이니 이를 벗하여 인생(人生)의 노정기(路程記)로 삼는다면 자기(自己) 일대(一代)도 허망(虛妄)하지 않을 것이요 남의 지표(指標)도 될 것이니 화급(火急)히 읽고 깨달아 현실정토(現實淨土)의 이상향(理想鄕)을 건설(建設)하자.
생명(生命)을 도(賭)하고 형자(荊朿)하게 생명(生命)이 약동(躍動)하는 법유(法乳)를 끼쳤으니 인류(人類)의 은혜(恩惠)로운 성지(聖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가 여래(如來)의 참된 사자(使者)요 올바른 법손(法孫)이라, 새삼스러운 췌언(贅言)이 불요(不要)하거니와 이 일서(一書)를 통하여 세심안명(洗心安命)의 무진해탈(無盡解脫)을 이룰 것을 뇌이며 道俗이 함께 이 노정기(路程記)를 의지해 광복(光復)의 내일(來日)을 누리기 거듭 간망(懇望)하는 바이다.
서기 1967년 5월 일
백웅(白熊) 홍영의(洪永義)
컴퓨터에 입력하며
내가 이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을 나의 회사에 같이 근무하면서 조계종(曹溪宗) 법사(法師)이였고 대승종(大乘宗) 포교부장(布敎部長)이신 여운(如雲) 임계순(任桂淳)님에게서 받았을 때 너무 주옥(珠玉)같은 해석(解釋)과 강송(講頌)에 놀랐으나 어려운 한문(漢文)으로 토도 달려있지 않아 현대인(現代人)이 읽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모두 한글로 하고 한문(漢文)은 ( )속에 넣어 컴퓨터에 입력하여 백봉(白峯) 김기추(金基秋)선생님의 높은 법문(法門)을 대중(大衆)이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이 책을 읽는 모든 이 마다 무주(無住) 무상(無相)의 대도(大道)를 깨우쳐 하루빨리 금강(金剛)의 무상보리(無常菩提) 이루어 지어이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석산(石山) 박재훈(朴在勳)
목 차
제일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
제이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
제삼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
제사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
제오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
제육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
제칠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
제팔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
제구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
제십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
제십일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 ---------------------------------------------
제십이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 ---------------------------------------------
제십삼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
제십사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
제십오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
제십육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 ---------------------------------------------
제십칠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
제십팔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
제십구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 ---------------------------------------------
제이십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
제이일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
제이이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
제이삼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
제이사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 ---------------------------------------------
제이오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
제이육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
제이칠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
제이팔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 ---------------------------------------------
제이구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
제삼십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 ---------------------------------------------
제삼일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
제삼이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
맺음말 ------------------------------------------------------------------------------
표제(表題) : 도인(島人) 이만우(李晩雨)
第一(제일) 法會因由分(법회인유분)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第一(제일) 法會因由分(법회인유분)
【본문】 如是我聞(여시아문)이로다
제일 법회의 인유분
【번역】이러히 내가 들었노라
【강송】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의 그 뜻을 이러히 풀어 보기로 하자. 「금강」이란 맑고 굳은 투명체(透明體)로서 중생계에서는 가장 귀하게 여기는 보물이니 그 가치의 평가로는 아마 월석(月石) 다음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금강은 그렇지가 않다. 하늘과 땅을 앞하여서 비롯이 없고 허공을 뒤하여서 마침이 없는 영특스런 實存(실존)으로 그 체성(體性)은 공적(空寂)하면서 무한(無限)한 영지(靈智)를 갖추고 그 이량(理量)은 원명(圓明)하면서 무궁(無窮)한 조화(造化)를 이룬다. 일진(一塵)에 처(處)하여 육합(六合)을 에워싸고 일시(一時)에 임(臨)하여 삼제(三際)를 꿰뚫었으니 이 있음이냐! 있음인 듯 없음도 아니나 또한 없음 아님도 아니며, 이 없음이냐! 없음인 듯 있음도 아니나 또한 있음 아님도 아니면서 안으로는 훌륭한 도리를 머금었고 밖으로는 숱한 기틀에 응하면서 그 이름마저도 끊어진 소식처(消息處)임을 뜻함이다. 「반야」는 무시이래(無始以來)로 사람마다가 간직한 자연지(自然智)로서 온갖 법(法)을 풀고 거두어들이는 여래지(如來智)의 마음씨를 이름이요, 「바라밀다」는 「저 언덕」이라는 뜻으로 무명(無明)에서 쏟아지는 사량분별(思量分別)과 삼독(三毒)에서 빚어지는 번뇌망상(煩惱妄想)이 여의인 무위청정(無爲淸淨)한 영원의 안식처(安息處)를 이름이요, 「경」은 지름길이라는 뜻이나 여기서는 선(善)과 악(惡)이 서로 통하고 정(正)과 사(邪)가 서로 통하고 명(明)과 암(暗)이 서로 통하고 생(生)과 사(死)가 서로 통하지 않음이 없는 온 누리의 일대(一大) 공도(公道)를 뜻함으로 보아두자.
그런데 성현(聖賢)의 조종(祖宗)이신 부처님의 말씀으로 결집(結集)된 책이름에다 경자(經字)만을 놓은 것은 참으로 감명(感銘)이 깊을 뿐이다. 왜나면 세간학(世間學)을 바탕으로 하는 철인(哲人)들의 문언구(文言句)로 이루어진 책이름이라면 대개가 성문(聖門)․성서(聖書)․성학(聖學) 따위인 성자(聖字)로 판을 치지마는 도가(道家)에서는 그렇지 않다. 무슨 이유냐. 무릇도 한쪽이요 거룩도 한쪽인 까닭이다. 만약 한쪽에 치우침이라면 법은 두 법이니 절대성(絶對性)이 아닌 상대성(相對性)으로서 성자(聖字)의 구실을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도가(道家)에서는 범성(凡聖)을 뛰어넘어서 속(俗)됨인 양 경자(經字)만을 즐겨 쓰는 것이니, 아무 거슬림이 없는 고인(古人)의 심경(心鏡)은 그 맛이 쇄쇄(灑灑)하고 그 멋이 낙낙(落落)할 따름이다. 「이러히 내 들었노라」심은 세존(世尊)의 말씀대로 아난존자(阿難尊者)가 경을 결집(結集)하실 때의 머리말씀이시다. 존자는 세존의 종제(從弟)로 십대제자(十大第者) 가운데서도 다문(多聞) 제일인자(第一人者)이시며 무루(無漏) 대아라한(大阿羅漢)이시다. 이러므로 존자의 그 말씀은 세존을 대(代)로 하시는 말씀으로서 절대로 부동적이요 불변적인 신빙성을 지니고 있는 법계(法界)의 참 소식이니 일로 쫓아서 세존의 그 말씀은 서천(西天)에 차고 동방(東方)에 넘친 것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무변허공일구래(無邊虛空一句來)하니 구모토각만건곤(龜毛免角滿乾坤)이로다. 번역하여 「가이 없는 허공에서 한 구절 오니 거북털과 토끼뿔이 하늘과 땅에 가득함이로다.」 태초(太初)의 일구(一句)라 하여두자.
이 소식부터 불꽃이 튀니 아예 모든 것을 여의고 달려들라
산(山)은 산(山) 수(水)는 수(水) 산수(山水)가 각래(却來)요
남(男)은 남(男) 여(女)는 여(女) 남녀(男女)가 향거(向去)라
如是如是是如是 여시여시시여시
如是外別無如是 여시외별무여시
世人不知是如是 세인불지시여시
左往右往覓如是 좌왕우왕멱여시
이러히 이러히니 이것이 이러히네
이러히 밖에따로 이러힌 없는거이
사람은 모른고야 이것이 이러힘을
이저곳 헤매이며 이러힐 찾는고야
【본문】 一時(일시)에 佛(불)이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하사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으로 俱(구)하시다 爾時(이시)에 世尊(세존)이 食時(식시)에 着衣持鉢(착의지발)하시고 入舍衛大城(입사위대성)하사 乞食(걸식)하실새 於其城中(어기성중)에 次第乞已(차제걸이)하시고 還至本處(환지본처)하사 飯食訖(반사흘)하시고 收衣鉢(수의발)하시고 洗足已(세족이)하시고 敷座而坐(부좌이좌)하시다.
【번역】한 때에 부처님이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어 큰 비구들 천이백오십인으로 더불어 함께 하시더니 저 때 세존께서 진지를 드실 때인지라 법의를 입으시고 바리를 드시고 사위의 큰 성안으로 들어가시사 그 성안에서 밥을 비시되 차례로 비시고 본 곳으로 돌아오시어 진지를 마치시고 의발을 거두시고 발을 씻으시고 자리를 베풀어 앉으시다.
【강송】일시(一時)라 일컬음은 부처님께서 이 경(經)을 설(說)하시던 때를 이름인데 우선 이 일시(一時)는 세간법(世間法)에 따르는 일시(一時)가 아님을 알아두자. 세간에서의 설법(說法)이란 대개가 삼계(三界)를 벗어나지 못하는 위인(偉人)들이 육도(六道) 속에 자리를 잡은 채로 육도(六道) 속의 모든 법(法)을 조절(調節) 미화(美化)하기 위한 수단(手段)이요 방편(方便)이지마는 부처님의 설법은 하늘과 땅이 나뉘기 전의 보리도(菩提道)인 당처(當處)에서 하늘과 땅이 이루어진 뒤의 일체만법(一切萬法)으로 하여금 되돌아서 보리도(菩提道)로 굴리시는 그 때의 소식임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오탁악세(五濁惡世)인 사바세계로 하여금 불심정토(佛心淨土)로 승화(昇化)를 시키시고 중생으로 더불어서 생사(生死)와 고해(苦海)를 여의도록 하시는 소식처(消息處)이니 이 바로가 고금(古今)의 일념(一念)이 만리(萬里)의 풍광(風光)인지라 어찌 상대적(相對的)인 시공간(時空間) 따위에 얽히고 어찌 환상적(幻像的)인 삼세관(三世觀) 따위에 휘둘려서 어리석게도 대법륜(大法輪)을 스스럼없이 굴리시겠는가. 이러므로 이곳의 일시(一時)는 시공(時空)의 개념(槪念)과 삼세(三世)의 관념(觀念)이 어울러서 제절로가 무너진 일시(一時)라 일러서 이론(異論)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초학(初學)으로서는 크게 의심도 날 것이다. 시공간(時空間)을 통하여 삼세간(三世間)이 벌어지는 것은 엄연한 사실인데 아무 이유도 없이 시공간(時空間)을 부정하고 삼세관(三世觀)을 거부하는 것 같음을 모순(矛盾)이라 하여서 그릇된 지식층(知識層)에서는 반기(反旗)까지라도 들고 뛰쳐나오리라. 이렇다하여 올바른 소견(所見)이 아닌 데야 별 도리가 없겠지마는 이 글을 끝까지 읽어 내려가는데 따라 자연히 납득이 되겠으므로 여기서는 대충 줄거리만을 설명하여 둔다. 원래로 우주의 진리를 밝혀 아는 지인(智人)의 분(分)으로는 허망물(虛妄物)인 이 색신(色身)뿐 아니라 일체(一切)의 유무상(有無相)이 현멸(顯滅)하는 것으로 시종점(始終點)을 삼는 시공간(時空間)의 설정(設定)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인 삼세관(三世觀)도 필연적(必然的)으로 부정(否定)되게 마련인 것이다. 왜 그러냐면 헛된 모습이 이루어지고 머무는 사이에 시간(時間)이라는 관념이 꾸미어지는 만큼 헛된 모습이 뭉개어지고 꺼지는 사이를 공간(空間)이라는 개념(槪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니 절대적(絶對的)인 부동지(不動地)에서 상대적(相對的)인 생사근(生死根)을 다루는데 어찌 세속적(世俗的)인 관념(觀念)과 개념(槪念) 따위에 사로잡혀 시공간(時空間)을 말하는 모습놀이에 떨어질까 보냐. 이러므로 초세간사(超世間事)를 다루는데 있어서는 삼세관(三世觀)을 뛰어넘는다는 말마디를 쓴다고 하여서 잘못은 없는 것이니 오직 수도인(修道人)의 분(分)으로는 무상(無常)한 환상(幻像)의 출몰(出沒)을 바탕으로 하는 시공간(時空間)의 분별이란 금물(禁物)이라겠다.
『부처』란 「깨친 사람」을 일컬음인데 무엇을 깨쳤다는 말인가. 온누리의 참된 이치를 깨쳐서 앎을 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삼천대계(三千大界)의 래처(來處)와 그곳에 벌어진 삼라만상(森羅萬象)의 거처(去處)를 캐어냄과 아울러 인생(人生)의 바탕을 밝혀내인 소식인데 육신불(肉身佛)로는 석가모니불이신 세존(世尊)이시다. 이 깨달음의 참 소식은 극히 깊고도 그윽하여 자로 능히 그 체성(體性)을 재지 못하고 되로 좋이 그 이량(理量)을 되지 못하고 저울로 자못 그 영지(靈知)를 달지 못하니 생각길이 막히고 말길이 끊어진 자리 라겠으니 실로 대해(大海)의 파심(波心)이요 태악(泰岳)의 정상(頂上)인지라, 문언구(文言句) 풀이만으로는 소경이 코끼리를 만지는 격이 라겠다.
이렇듯이 정각(正覺)을 성취하신 싯다르타태자(太子)를 십대명호(十大名號)로 받들어 모시되 다음과 같다. 우선 한분으로서인 인격(人格)을 갖추심으로 하여금 성현(聖賢)의 조종(祖宗)으로 받들어 모시기 때문에 「여래(如來)」라 일컬으고, 온갖 번뇌가 쉬었음으로 하여금 사람과 하늘의 공양을 받으시기 때문에 「응공(應供)」이라 일컬으고, 철과 슬기가 밝으심으로 하여금 인연법칙을 알지 못함이 없으시기 때문에 「정변지(正遍知)」라 일컬으고, 삼학(三學)을 바탕으로 하여금 위없는 도리를 깨치셨기 때문에 「명행족(明行足)」이라 일컬으고, 인과(因果)를 여윔으로 하여금 다시는 나고 죽음이 없음으로 하여금 모든 법이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음을 아시기 때문에 「선서(善逝)」라 일컬으고, 정사(正邪)를 잘 굴림으로 하여금 대력사(大力士)가 되시기 때문에 「무상사(無上士)」일컬으고,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으로 하여금 부드러운 소리와 간절한 이야기로 중생을 가르치시기 때문에 「조어장부(調御丈夫) 」라 일컬으고, 중생의 무명(無明)을 쓸어냄으로 하여금 하늘과 사람의 스승이 되시기 때문에 「천인사(天人師)」라 일컬으고, 미혹과 망령된 알이를 여윔으로 하여금 자타이각(自他二覺)을 성취하시기 때문에 「불(佛)」이라 일컬으고, 끝으로 온갖 공덕을 원만히 갖추어서 중생을 이익케 함으로 하여금 세간의 존중을 받으시기 때문에 「세존(世尊)」이라 일컬으니 이 깨달음의 길은 곧 세존(世尊)의 도(道)이며 법(法)이며 교(敎)로서 이를 받들어 세속 명자(名字)로 불교(佛敎)라 이르는 것이다. 당연한 사리(事理)라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일언(一言)을 붙이고자 하는 것은 불교(佛敎)를 다른 세교(世敎)와 더불어 혼동시(混同視)하는 축도 있는 모양이나 다 까마득한 불교(佛敎)의 참 소식을 모르는데서 오는 알음알이의 소견(所見)임을 밝혀둔다.
왜 그러냐면, 이 세간중(世間中)에서 이루어지는 종교(宗敎)란 대개가 천신(天神)․지신(地神)․수신(水神)․화신(火神)으로부터 심지어는 동물(動物)과 식물(植物)에까지라도 나름대로의 상대적인 신령화(神靈化)를 마련하여 놓고 신앙(信仰)의 대상으로서 구원을 청하는 행위가 상식적인 현상이라겠다. 다시 말하자면 상대성인 세간사(世間事)는 절대성인 출세간사(出世間事) 위에서 이루어지는 환상계(幻像界)련마는 이 의취를 모르는 사람들은 깜냥대로 환신(幻神)을 지어놓고 그 신(神)에게 되돌아 의존하는 행위가 인간의 정념(情念)에서 우러나오는 종교관(宗敎觀)인 것이다. 이러므로 여기에서는 출발점(出發點)도 귀착점(歸着點)도 상대성 속에서 상대성을 따로 찾아 헤매일 뿐이니 허공 중에서 허공을 따로 찾듯이 제 아무리 참회와 용서와 애원으로 평생(平生)을 하루같이 일삼아봤든 절대성인 생사(生死)의 뿌리는 캐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상대적인 어떠한 신(神)을 절대성으로 오인(誤認)하고 그 관용(寬容)에 의지하여서 영원한 안주처(安住處)를 마련하여 주도록 비는 행위는 이 바로 어디까지나 타사(他事)이지 자사(自事)는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나 상대적인 의타행(依他行)을 닦는 도중에 있어서 청천(靑天)에 일광(日光)과 월광(月光)을 나투고 산기슭에 구름이 걸리고 나뭇가지에 새가 지저귀고 물가에 무지개가 서로 풍악(風樂)소리가 들리고 타인(他人)과 이야기를 나누는 따위의 광경(光景)은 다 스스로의 식념(識念)으로 스스로가 일으키는 환상(幻像)놀이에 지나지 않건마는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들은 무슨 구경위(究竟位)에나 오른 것처럼 환희심(歡喜心)까지라도 크게 일으킨다. 이런 징조는 수행과정(修行過程)에 있어서 어는 정도의 번뇌와 망상이 쉬는데 따른 현상(現像)으로서 공리(空理)에 요달(了達)한 분(分)으로는 정도(正道)로 이끌 수 있는 양약(良藥)으로도 능히 처리가 되겠지마는 타력(他力)에 굴복하는 분(分)으로는 사도(邪道)로 끌리는 독약(毒藥)으로 밖에 소용이 안되는 것이다. 실로 자력(自力)으로 굴리고 타력(他力)으로 굴리임도 오직 한 생각의 차이요 한 자국의 거리며, 자력(自力)으로 살고 타력(他力)으로 살리임도 오직 한 생각의 차이요 한 자국의 거리언마는, 이 확연한 이치를 사람 중에서도 지식인들이 더욱 모르고 지식인 중에서도 종교인들이 더욱 모르니 상대적인 세간의 지식(知識)만으로는 절대성인 누리의 진리(眞理)를 밝혀내지 못한다고 단언(斷言)을 하여도 이론(異論)이 없을 것이다. 이러므로 하여서 십선(十善)을 닦음으로 말미암아 인천보(人天報)를 향하여서 달리는 것도 근기(根機)가 낮은 중생에게는 이해도 가나, 그러나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꼭 같은 믿음과 꼭 같은 노력으로 왜 인천보(人天報)만에 탐착하고 생사업(生死業)을 녹여내지 않느냐 말이다. 실로 비이지적(非理智的)인 과잉신앙(過剩信仰)으로 말미암아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인생(人生)이라 인생(人生)으로서의 종지부(終止符)가 찍힘 셈이 라겠지마는 그러나 한 생각을 크게 돌이켜서 죽어도 내가 죽고 살아도 내가 산다는 마음을 걷어잡음으로 하여금 자력(自力)으로 삼세간(三世間)을 꿰뚫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쩐 연고이냐. 애오라지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남이 있고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불 보살이 계시고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삼계(三界)가 벌어지면서 천당과 지옥도 나뉘는 만큼 나의 영원한 안주처(安住處)도 또한 올바른 나의 행(行)에 있기 때문이다. 이 행은 고집에 있음이 아니고 슬기에 있으며, 슬기는 얻음에 있음이 아니고 놓음에 있으며, 놓음은 하염있는 법에 있음이 아니고 하염없는 법에 있으면서 비추되 항상 적적하고 적적하되 항상 비춤으로 하여금 나의 성품 가운데 홀로 오뚝하고 의젓할 따름이니 남의 물건이 아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에 있어서는 그 입은 거리끼지 않고 상승도리(上乘道理)를 말하나 그 행은 도리어 이승도리(二乘道理)를 행하는 판이니 오로지 정도(正道)를 버리고서 사도(邪道)를 취함이요 활구(活句)를 여의고서 사구(死句)를 붙듦인지라, 이야말로 신선(神仙)놀음에 도끼자루가 썩듯이 인생(人生)을 스스로가 포기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법신(法身)을 건지려면 먼저 그 성품을 맑히고 색신(色身)을 건지려면 먼저 그 마음을 닦아야 하거늘 나름대로의 지견해(知見解)와 깜냥대로의 유주행(有住行)으로 말미암아 도깨비 굴을 향하여 달릴 뿐이니 다시 어느 때를 기다려서 인신(人身)을 얻고 제도를 받겠는가.
불법(佛法)이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어디까지라도 세존의 말씀으로 밝히어진 온 누리의 참된 도리를 깨쳐알기 위하여는 모든 보살과 조사들이 봉행(奉行)하여 온 그 수행방편(修行方便)에 의지하되 자신의 슬기와 분발로 하여금 인생(人生)의 바탕을 파헤치고 자신이 다겁(多劫)에 이루어 놓은 육도(六道)의 수레바퀴를 걷어냄과 아울러 자신이 바로 불보살의 지위에 오르는 것만이 바라는 바의 구경(究竟)인 것이며 이에 따라서 한없는 중생으로 더불어 하나도 빠짐없이 제도를 하는 것으로 원을 세움이 본래의 정신이니 어찌 미한 중생들의 봄․들음․깨침․앎으로 하여금 상상 조차나 되겠는가. 이러므로 자신(自身)의 깨침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와 타력(他力)에 의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와는 그 이념(理念)의 차이에 있어서 천지(天地)의 차이라면 그 과보(果報)의 거리에 있어서도 운니(雲泥)의 거리임도 덧붙여 둔다. 비유컨대 여래의 그늘 속에서 깜냥대로의 영역(領域)을 차지하고 국지적(局地的)인 면에서 제멋대로 성장소멸(成長消滅)하고 있는 것을 이른바 중생계의 정념(情念)에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종교의 형태 라겠으니, 불교야말로 법(法) 앞의 법모(法母)요, 교(敎) 앞의 교조(敎祖)요, 도(道) 앞의 도종(道宗)으로 하나뿐인 삼천대계(三千大界)의 「본 바탕」이라 하겠다. 이러므로 불교라는 명칭도 또한 중생들의 자작(自作)인 명자(名字)로서 편의상의 대명사(代名詞)라 하여 두자.
「사위국(舍衛國)」은 부처님이 설법하실 때의 국명(國名)이요, 「기수(祇樹)」는 사위태자(舍衛太子)인 기타(祇陀)의 수림(樹林)이란 뜻이다. 급고독(給孤獨)은 사위국의 부호 장자(長者)로서 자선가인 수달다의 별명(別名)인데 외로운 자를 구호하여 준다는 데서 이르는 칭호다. 「비구(比丘)」는 생사업(生死業)을 끊기 위하여 불문(佛門)에 출가(出家)한 속칭 「중」으로 이백오십계(二百五十戒)를 지키는 남자(男子)를 이름인데, 항상 밥을 빌면서 깨끗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걸사(乞士)라고도 이르고, 또는 마구니를 두렵게 한다는 뜻으로 포마(怖魔)라고도 이르고, 또는 삼학(三學)을 닦아서 견사혹(見思惑)을 끊는다는 뜻으로 파악(破惡)이라고도 이르고, 또는 계율(戒律)이라는 좋은 복전(福田)이 있기 때문에 능히 물자를 내어서 인과(因果)의 흉년을 제한다는 뜻으로 제근(除饉)이라고도 이른다. 이에 덧붙일 것은 「비구니(比丘尼)」란 걸사녀(乞士女) 또는 근사녀(勤士女)라 이르는 여자「중」으로 남자보다 업장이 두껍다 하여서 삼백사십팔계(三百四十八戒)를 가지고 있다고도 이른다. 어떻든 인생문제의 용감한 해결 부대로서 앞장을 선 기수(旗手)라 이르겠다. 「식시(食時)」는 일일일식(一日一食)하시는 진지시간으로서 오전 열시 안팎이며, 「의(衣)」는 법의(法衣)인 가사를 이름이며, 「발(鉢)」은 바리로서 진지그릇이다. 걸식(乞食)은 일일(一日) 칠가(七家)에 한정하시고 순번에 따라 차례로 비시는데 가난하고 천한 자에게는 복씨를 심어주심이요 부하고 귀한 자에게는 복록이 다하지 않도록 하심이나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는데 더욱 간절하신 회포가 숨기어져 계심으로 짐작이 되는 바이다.
여기에서 세존이 지나가신 날로 머리를 잠시 돌이켜 보기로 하자. 물론 이 땅덩이만 세계의 전부요 생애의 전부라 인정하여서 생사상(生死想)에 얽히인 중생에게는 어떠한 이해조차도 안가는 문제이겠지마는, 세존께서는 다겁(多劫)을 앞하시어 성불(成佛)하신 다음 연등불(燃燈佛)께 수기(授記)를 받으시고 왕궁(王宮)에 탄생하시와 보리수 밑에서 아침별을 보시고 깨치셨다는 사연은 다 중생제도에 대한 방편으로 받아 들이겠지마는, 그러나 세존은 탄생하시자마자 칠보(七步)를 두루 거니시며 눈으로 사방(四方)을 돌아보시고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시며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켜 이르시되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내 홀로 높으도다」이르셨으니 이 무슨 곡절인고! 어허! 보리수 밑에 발가숭이가 삼계(三界)를 누리고 일체(一切)을 걷어들이면서 인생(人生)을 선언(宣言)함이로다, 인생(人生)을 선언(宣言)함이여! 뭇 발가숭이들의 입이 반쯤은 열리고 반쯤은 닫치었네! 에익! 꿈속의 일을 뉘와 더불어 말하려노! 앞에 석가 없고 뒤에 미륵 없는 것을! 옳거니! 만년녹수(萬年綠水)를 천리장강(千里長江)에서 들내어 보이시는 소식이로군! 성현(聖賢)의 조종(祖宗)이신 세존의 출현(出現)이신지라 중생의 분(分)으로 살필 때에 어찌 천변만화(千變萬化)하시는 기적(奇蹟)이 아닌 당연한 기적(奇蹟)인들 어찌 없으시겠는가. 다만 이 대목에서는 입을 봉하고 한낱 인간(人間)으로서인 세존에게 붓을 옮겨 보자.
세존은 지금으로부터 약 이천오백여년전(二千五百餘年前)에 중인도(中印度)인 가비라국의 벌솔로 성주(城主)이신 정반왕의 맏아들로 태어나시었으므로 뒷날에는 당당히 왕위(王位)의 계승자이시기도 하였다. 세존은 어머님이신 마야부인이 몸을 푸시기 위하여 친정으로 가시는 도중에 룸비니동산의 무우수(無憂樹) 아래서 탄생을 하시었다. 그러나 세존이 탄강하신 칠일(七日)만에 마야부인은 세상을 떠나시었으니, 불모(佛母)를 여의신 셈이지마는 다행히 이모님이요 계모이신 파사파데부인의 품에서 고이고이 자라나셨다. 왕자(王子)로서인 싯다르타태자는 자라나심에 따라 어머님의 죽음에 대한 슬픔도 느끼셨으리라고 본다면 뒷날 싯다르타태자(太子)로서의 출가(出家)를 하시게된 간접적인 동기의 싹은 여기에서도 부채질이 되었을런지도 모르겠다. 만약 인생(人生)의 무상(無常)을 느끼는 번뇌가 출가(出家)의 동기를 지었다면 이 번뇌는 번뇌만을 위한 번뇌가 아니고 내일을 약속하는 번뇌라 하겠으니 그 번뇌를 처리하는데 따라서 하늘과 땅으로 갈라놓는 것이 라겠다.
어찌됐든 청년기(靑年期)에 접어드신 싯다르타태자(太子)는 다복(多福) 다귀(多貴)하심에는 틀림이 없으셨다. 몸이 건장하실 뿐 아니라 슬기가 총명하시고 기자(氣字)가 헌앙(軒昻)하신 존귀상(尊貴相)으로서 세인(世人)의 흠모(欽慕)를 독차지 하셨던 귀공자(貴公子)이셨다. 숙세(宿世)에 심기어진 선종(善種)의 공덕탑이 아니실까. 뿐이랴. 당대(當代)에서도 재덕(才德)을 갖추시고 자용(資容)이 뛰어나신 야수다라규수를 아내로 맞이하신 행운의 청년(靑年)이시었으니 선연(善緣)으로 무르익은 현세(現世)의 함박꽃이 아니실까. 더욱이 뒷날에는 일국(一國)의 제왕(帝王)으로서 천하(天下)를 호령하실 분이기도 하셨으니 아마 세계의 대지도자(大指導者)요 대성인(大聖人)으로 보아서 그 주위와 그 환경이 화려찬란 하기로서는 현시점(現時點)까지에 있어서 세존을 앞설 사람이 없을 것 같다. 다겁(多劫)으로 심기이고 쌓이어진 유무루(有無漏)의 공덕림(功德林)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음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현재(現在)에서 이루어지는 고(苦)와 락(樂)은 전세(前世)에 뿌리어진 인과(因果)를 바탕으로 하여서 또다시 스스로가 날로 지어내는 것으로 보아진다.
그러나 사대문(四大門)을 유람하신 다음날부터의 태자(太子)는 세상 사람들이 갈망(渴望)하는 부러운 부귀(富貴)와 즐거운 공명(功名)을 뜬구름이요 흐르는 물로 보셨다. 바보로다! 권위의 왕관(王冠)도 호화로운 생활(生活)도 허울 좋은 덤불로 보셨다. 멍텅구리로다! 인자하신 아버님도 사랑하는 아내도 귀여운 아들도 늙고 병들어 죽을 때가 있으리니, 한낱 꼭두각시로 보셨다. 천치로다! 행운의 청년 싯다르타태자(太子)는 세기(世紀)의 큰 영화(榮華)를 스스로가 박차버리시고 깊은 밤을 틈타시어 낯익은 성문(城門)을 빠져나와 도망을 치셨으니 앞으로의 고초를 자초(自招)하신 셈이다. 문물(文物)이 발달된 현대인으로서도 깊고 그윽한 그 심량(心量)을 헤아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의 행위라 일러서 지탄을 서슴치 않으리라. 그 무엇을 바래서 무엇을 구하려고 인자하신 아버님의 뜻을 저버리시고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아드님도 돌아보시지 않으면서까지 그리운 조국을 등지고 가시밭길을 헤치며 달려야만 했던가? 태자(太子)를 신뢰하던 당대의 대변가들은 불효(不孝)라고도 일컬었으리라. 왜 그러냐면 부왕(父王)의 간곡한 소망(所望)을 저버리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成道)하신 뒷날의 세존은 맨 처음으로 얼굴도 모르는 어머님 마야부인을 도솔천(兜率天)에서 제도하셨으니 인간으로서인 어머님께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라겠고, 자기를 길러주신 계모님인 파사파데부인이 교단(敎團)에 드시려는 데도 뒷날의 성취를 위하여 모름지기 그 결단성과 용맹심이 순숙 하여지도록 방편(方便)으로 날짜를 기다리신 다음 허용(許容)하셨으니 인간으로서인 이모님께 대한 보답의 표현이라겠고, 아버님이 별세(別世)하신 뒷날 그 영구(靈柩)를 옮기는데 당신의 이복(異腹)동생이신 난타존자와 사촌(四寸)동생이신 아난존자에게까지도 손을 못 대게 하신 다음 아드님이신 라후라존자로 하여금 앞을 들리시고 당신 자신이 뒤를 드시었으니 인간으로서인 세존의 아버님께 대한 그윽한 애정(愛情)과 존경심(尊敬心)으로서 자식된 도리의 당연한 표현이라면 어찌 눈물겨운 광경이 아니며 어찌 대효(大孝)가 아니겠는가! 또한 불충(不忠)이라고도 일컬었으리라. 왜 그러냐면 국민(國民)의 기대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존이 성도(成道)까지 하시고 법수레를 굴리시는 연고지인 마갈타국의 비유리왕자(王子)가 당신의 조국(祖國)인 가비라국을 무찌르기 위하여 대군(大軍)을 출동시킬 때에 세존은 어떻게 하셨던가. 숙세(宿世)의 업연(業緣)관계와 당시(當時)의 석가족의 아만상(我慢相) 때문에 불가피적(不可避的)으로 벌어지는 싸움판임을 잘 아시는 세존이시겠지마는 그래도 조국의 안위(安慰)를 걱정하신 세존은 비유리왕자가 거느린 대군(大軍)의 진로(進路)에서도 숲이 무성한 그늘 밑을 버리시고 가비라국에 가장 많은 니구로다수(樹) 아래 장승같이 서 계셨다. 행군(行軍)하던 비유리왕자는 이상히 생각하고 여쭙되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숲 그늘을 버리시고 햇살이 뜨거운 나무 아래 서서 계십니까?」여쭈었다. 세존은 답하시기를 「나의 조국에는 니루로다 나무가 많으므로 고향이 그리웁기 때문에 이 나무 밑에 섰노라」하셨다. 평시로 존경하는 터인지라 비유리왕자는 부처님이 이르시는 그 말씀의 뜻을 알아모시고 감히 세존 앞을 지나가지 못하고 대군(大軍)을 후퇴시킨 다음 됫날에 다른 길을 택하였다는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시고 겨레를 아끼시는 세존의 그 마음씨를 미루어 살필 제 어찌 한 무더기의 한숨이 아니 터져 나오겠는가. 과연 대충(大忠)이신 세존이시라 이르겠다. 또는 불의(不義)라고도 일컬었으리라. 왜 그러냐면 백년해로(百年偕老)를 약속하신 야수다라부인이 불쌍하고 나어린 왕손(王孫) 라후라가 가없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아드님으로 하여금 육도윤회(六道輪廻)를 여의고 삼계(三界)를 뛰쳐나게 하셨으니 유사이래(有史以來)로 이러한 남편이 몇 분이나 있겠으며 이러한 아버지가 몇 분이나 계셨겠는가. 지극한 인연으로 맺어진 아내와 자식을 대도인(大道人)으로 성취를 시키셨으니 대의(大義)의 꽃을 피우신 셈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도를 이룬다」는 절대의 보배는 효도와 충성과 의리로써 이루어진 순직하고 성실하며 정결한 그릇이 못되면 담기어지지 않음을 능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어찌 하였든 혈기(血氣)가 왕성하신 청년시절의 싯다르타태자는 너무나 슬기로웠기 때문에 바보라는 말도 자연히 들으셨을 것이다. 왜 그러냐면 깜냥대로인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똑똑하셨기 때문에 멍텅구리라는 말도 들으셨을 것이다. 왜 그러냐면 나름대로인 비방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총명하셨기 때문에 천치라는 말도 들으셨을 것이다. 왜 그러냐면 짐작대로인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수행도상(修行途上)에 있는 학인(學人)으로서는 깜냥대로의 판단과 나름대로의 비방과 짐작대로의 결론은 크게 삼가야 할 것이다. 그때의 싯다르타태자는 오로지 죽고 사는 문제의 해결만에 엄연하셨으니, 어즈버야 설산수도(雪山修道) 육년(六年)으로부터 홀연히 일어나신 다음 다자탑(多子塔) 앞에 자리를 나누시어 살인도(殺人刀)를 쓰시고, 대중(大衆)에게 꽃을 들어 보이시어 활인검(活人劍)을 쓰시고, 곽(槨) 속에서 발을 내어 보이시어 살인도(殺人刀)와 활인검(活人劍)을 아울러 쓰심도 다 그 때문이셨다. 세존께서는 거룩하시게도 녹야원(鹿野苑)을 비롯하시어 사십구년(四十九年)을 통하여 장광설(長廣舌) 하신 공덕은 생각만 하여도 감격할 따름이지만, 찬란한 영화를 등지고 도망치신 싯다르타태자로서인 지난날을 돌아 뵙고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로서 모든 중생을 건지시는 오늘날을 우러러 뵈올 제 어찌 한 무더기의 눈물이 앞깃을 안적시겠는가! 세존께서는 이렇듯이 극귀(極貴) 극존(極尊)하시면서도 몸소 중생 속에 드시어서 부처지견(知見)을 펴시는데 평상심(平常心)으로 걸식(乞食)까지 하시며 도(道)를 펴시는 대자비(大慈悲)를 남김없이 발휘하셨으니, 도(道)란 언(言)과 행(行)을 놓을 때는 둘이나 거두울 때는 하나임을 보이심과 아울러 부처와 중생도 놓을 때는 둘이나 거두울 때는 하나이란 본연(本然)의 평등성(平等性)을 나투어 밝히시는 자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세존께서는 중생을 교도(敎導)하시는 데도 그 때와 그 연에 따라 그 방편(方便)에 정함이 없이 혹은 몸으로 보이시고 혹은 마음으로 나투시되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누움의 전부가 법도 아님이 없으시니 일동일정(一動一靜) 모두가 위없는 법문이심을 알아야 할 것이다.
붓을 되돌려서, 한 때에 부처님이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계시어 큰 비구들 천이백오십인(千二百五十人)으로 더불어 함께 하시더니 마침 진지를 드실 때인지라 법의를 입으시고 바리를 드시고 사위의 큰 성안으로 들어가시어 차례로 밥을 비시고 돌아오시되 진지를 마치시고 의발을 거두시고 발을 씻으시고 자리를 베푸시어 앉으셨다. 이 소식처는 무엇을 뜻함이시며 무엇을 가리킴이실까? 세간사(世間事)에만 시달리는 속인(俗人)으로서야 문구(文句)에 나타난 그대로인 사실로서 별다른 의취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분(分)으로는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마는 지인(智人)의 분(分)으로 볼 때 너무나 천연적(天然的)인 절대성(絶對性)을 바탕으로 너무나 당연사(當然事)인 상대성(相對性)을 굴리시는데 어찌 감탄사가 터져 나오지 않겠는가! 애오라지 부처님이 법의를 입으심은 참으로 입으심일까? 그러나 법의를 입으시지 않음도 아니며, 바리를 드심은 참으로 드심일까? 그러나 바리를 드시지 않음도 아니며, 사위의 큰 성안으로 들어가시지 않음도 아니며, 밥을 비심은 참으로 비심일까? 그러나 밥을 비시지 않음도 아니며, 본 곳으로 돌아오심은 참으로 돌아오심일까? 그러나 본 곳으로 돌아오시지 않음도 아니며, 진지를 마치심은 참으로 마치심일까? 그러나 진지를 마치시지 않음도 아니며, 의발을 거두심은 참으로 거두심일까? 그러나 의발을 거두시지 않음도 아니며, 발을 씻으심은 참으로 씻으심일까? 그러나 발을 씻으시지 않음도 아니며, 자리를 베풀어 앉으심은 참으로 앉으심일까? 그러나 자리를 베풀어 앉으시지 않음도 아님이로다. 히힛! 약무공중월(若無空中月)이면 안득천강월(安得千江月)이리요. 이 무슨 소식일까? 동정(動靜)이 일여(一如)니 거래(去來)가 본적(本寂)인지라 어디에다 사의(思議)를 걸어보겠는가. 참으로 드높은 고개로다. 다만 가리사(家裡事)가 오뚝하니 중마(衆魔)가 항복(降伏)하는 지음(知音)이요, 도중사(途中事)가 확연하니 빈주(賓主)가 공창(共唱)하는 풍광(風光)으로, 입이 천(千)개인들 어찌 봉하지 아니하며 붓이 만(萬)개인들 어찌 던지지 아니하랴. 이렇듯이 담담(淡淡)하시면서 이에 지극히 낙낙(落落)하시고, 이렇듯이 범범(凡凡)하시면서도 이에 지극히 외외(巍巍)하시어 일찍이 정함이 있지 않은 본래의 법을 천연(天然) 그대로 쓰심이니 이변(二邊) 삼제(三際)가 그대로 이면서 여의는 당처(當處)로다. 겁(劫) 밖에 한 가닥의 차가운 빛이려니 구멍 없는 피리소리가 들림이로다. 흥! 대사일번(大死一飜)하여야 이 소리를 얻어들으리라. 찬불가(讚佛歌)를 단다.
무량공덕 다겁에 쌓으시와서
연등불전 수기를 받으시오니
삼계도사 크신님 분명하올새
하늘땅이 엎드려 큰절합니다
도솔천서 시방계 살피시옵고
인연깊은 이땅에 몸을나투셔
부처지견 펴오신 큰자비오니
모든중생 받들어 모시옵니다
본래부터 생멸이 없는자리라
하늘위알 나홀로 높단말씀은
이허공을 깨뜨려 밝히심이니
나의법신 뚜렷이 보았습니다
설산수도 육년에 성도하시고
왕국복록 모른척 밥을비시며
팔만법문 설하셔 계발하시니
생사윤회 여윔을 알았나이다
이 소식에 법계가 뒤엎어진다
본원천진(本源天眞)이 당신이니까? 상호엄신(相好嚴身)이 당신이니까? 구래다친무면옹(舊來多親無面翁)이나 유시토설논시비(有時吐舌論是非)로다. 번역하여 「예로부터 알뜰하나 모습 없는 첨지련만 때를 둘세 혀를 내어 옳그름을 말하누나」
乞食洗足設敷座 걸식세족설부좌
平常心裡三世空 평상심이삼세공
無孔苗吹向爲誰 무공묘취향위수
淸平天地惹波濤 청평천지야파도
밥비시고 발씻으셔 자리펴고 앉으실새
떳떳하온 마음속엔 삼세간이 비인것을
구멍없는 그피리는 뉘를위해 부십니까
본래맑은 이천지에 물결인다 하올것을
第二(제이) 善現起請分(선현기청분)
第二(제이) 善現起請分(선현기청분)
【본문】 時(시)에 長老須菩提(장로수보리)가 在大衆中(재대중중)하여 卽從座起(즉종좌기)하고 偏袒右肩(편단우견)하고 右膝着地(우슬착지)하여 合掌恭敬(합장공경)하여 而白佛言(이백불언)하되 希有世尊(희유세존) 如來(여래) 善護念諸菩薩(선호념제보살)하시되 善付囑諸菩薩(선부촉제보살)하시나니 世尊(세존)이시여 善男子(선남자)와 善女人(선여인)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인댄 應云何住(응운하주)며 云何降伏其心(운하항복기심)이니이까 佛言(불언)하시되 善哉善哉(선재선재)라 須菩提(수보리)야 如汝所說(여여소설)하여 如來(여래) 善護念諸菩薩(선호념제보살)하시며 善付囑諸菩薩(선부촉제보살)하시나니 汝今諦聽(여금체청)하리라 當爲汝說(당위여설)하리라 善男子善女人(선남자선여인)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인데는 應如是住(응여시주)며 如是降伏其心(여시항복기심)이니라 唯然(유연)이나이다 世尊(세존)이시여 願樂欲聞(원요욕문)하나이다
제이 선현이 법을 청하는 분
【번역】때에 장로 수보리는 대중 가운데에 있다가 곧 자리로부터 일어나시사 오른 어깨에 옷을 얼메며 오른 무릎을 땅에 붙이고 합장 공경하시와 부처님께 말씀을 사뢰되 「드무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두호하시고 생각하시며 모든 보살에게 잘 위촉하시나니,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옴에는 응당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으오리까.」부처님이 말씀하시되 「착하고도 착하도다 수보리야, 네가 말한바와 같이 여래는 모든 보살을 잘 두호하며 생각하며 잘 위촉하나니,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마땋히 너를 위하여 말하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을진댄 응당 이러히 머물지며 이러히 그 마음을 항복 받을지니라.」「그러하오나 세존이시여 원컨대 즐거이 듣고자 하나이다.」
【강송】장로(長老)란 지위가 높은 이를 뜻함이요, 수보리(須菩提)는 선현(善現)․선길(善吉)로도 번역되는 이름으로 십대제자(十大第者) 중에도 가장 공리(空理)에 밝으신 분이다. 여래(如來)란 중생의 분(分)으로 볼 제 한 분으로서인 인격(人格)을 갖추심으로 말미암아 성현(聖賢)의 조종(祖宗)으로 받드는 명호(名號)겠지마는 그 어의(語意)를 음미(吟味)할진댄 참으로 그 이취(理趣)는 현현(玄玄)하고 그 사실(事實)은 역역(歷歷)한지라, 이에 삼계(三界)를 드러내면서 일체만법(一切萬法)을 걷어들이는 소식처라겠다. 왜나면 여래(如來)는 온 듯하나 실로 온 바가 없다는 뜻이니 거래(去來)의 그 모습을 두면서 되돌아 그 모습을 여의는데 그 의취(義趣)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럴진대 삼계(三界)의 출몰(出沒)도 이와 같은 것이니 이 명호(名號)야 말로 온누리의 진리(眞理)를 드러낸 소식이 아닐까. 보살(菩薩)의 보(菩)는 슬기를 닦되 자리(自利)를 뜻함이요, 살(薩)은 복을 닦되 타리(他利)를 뜻함이니, 어디까지라도 불타의 이념(理念)을 자가(自家)의 정신으로 삼는 대행자(代行者)임을 이름인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堤)인 아(阿)는 무(無)를 뜻함이요, 뇩다라(耨多羅)는 상(上)을 뜻함이요, 삼(三)은 정(正)을 뜻함이요, 먁(藐)은 등(等)을 뜻함이요, 보리(菩提)는 각(覺)을 뜻함이니, 합치면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름이다. 선재(善哉)라 함은 좋다는 말인데 닦아서 증득한 바 소견을 인정하는 뜻으로 알자.
첫째, 부처님께서는 신장(身長)이 장육(丈六)이신 자마금용(紫磨金容)의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로서 그 위풍(威風)이 얼마나 외외하시고 당당하시었던지 금륜성왕(金輪聖王)의 고결(高潔)한 기품(氣品)도 뛰어넘으시고 삼계(三界)를 누르신 존엄상(尊嚴相)이시었다. 더욱이나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을 함토(含吐)하시되 삼신(三身)이 원만하신 지혜상(知慧相)은 고금(古今)을 꿰뚫으셨으니 절대의 드무신 몸매이심에 틀림없으셨다. 이렇듯이 삼계(三界)를 누르신 존엄상(尊嚴相)과 삼신(三身)이 원만하신 지혜상(知慧相)은 어디로부터 쫓아오신 것일까? 다겁(多劫)으로 닦으신 삼십이청정행(三十二淸淨行)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아두자. 여래께서는 금강보좌(金剛寶座)에 높이 앉으심으로 말미암아 반야바라밀다 법(法)으로서 모든 보살을 호념(護念)하시고 반야바라밀다 법(法)으로서 모든 보살에게 부촉(付囑)하셨다. 호념(護念)이란 큰 비구중(比丘衆)으로 하여금 반야지(般若智)로서 지신의 심불(心佛)을 지키되 생각 생각이 뚜렷 밝아서 육진(六塵) 경계(境界)에 끌리지 않고 생사(生死)의 업연(業緣)을 여의도록 하심이요, 부촉(付囑)이란 큰 비구중(比丘衆)으로 하여금 자신의 여래지(如來智)에 맡기되 생각 생각이 맑고 밝은 스스로의 성품이 구경지(究竟地)인 해탈위(解脫位)에 오르도록 권하시는 바이나, 실은 이에 따라 뒤의 중생을 호념(護念)하시고 뒤의 중생을 부촉(付囑)하시는 소식처라 하겠으니, 돌아보건대 부처님은 입을 열지 아니하고서 마음으로 큰 도(道)가 뒷세상에 전하여지고 행하여지도록 크신 자비를 베푸시는 자리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히 성스럽고 간절한 마당으로 말미암아 크나큰 인연공덕으로 부처님을 바로 눈 앞에 모시게 된 천이백오십인(千二百五十人)의 큰 선지식들은 또한 뒷세상의 중생들을 대표하시어 귀를 통하지 않고도 스스로의 마음씨로 큰 도를 이어 받드는 기막힌 풍광(風光)이니 그 느끼는 바 뜻이 얼마나 가슴속에 넘쳐흐르겠는가. 다행(多幸)하고 다복(多福)하신 선지식들이여, 그 인연 공덕을 우리에게도 나눠주사이다.
장로 수보리는 부처님이 금강보좌(金剛寶座)에 앉으시어 일행삼매(一行三昧)에 드신대로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으신 데 느닷없이 「드무십니다」라는 감탄사(感嘆辭)를 올렸다. 무슨 소식일까? 해공제일인자(解空第一人者)이신 수보리 장로인지라 그 그릇도 대강 짐작이 가는 바로서 반드시 곡절(曲折)은 있다. 범을 타고 용을 낚으셨다. 용을 타고 범을 쏘으셨나, 우리는 장로의 멱살을 휘어잡고 그 가슴을 파헤쳐 보기로 하자. 그렇다면 신장(身長)이 장육(丈六)이신 자마금용(紫磨金容)의 외외 당당하신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의 정지광명(正智光明)을 뵈옵기 때문 이실까? 아니다. 이 대목은 씀을 거두어서 바탕을 보이시는 자리로서 동정(動靜)이 쉬었으니 거래(去來)가 쉬고, 거래(去來)가 쉬었으니 취사(取捨)가 끊기었고, 취사(取捨)가 끊기었으니 삼세(三世)가 여의였고, 삼세(三世)가 여의였으니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이 무너진 본 고장의 소식인데 어찌 분별상(分別想)인 존귀상(尊貴相)에 휘둘리시는 감탄사(感嘆辭)일까보냐. 만약 이럴진댄 낙동강 모래 바닥에 떨어진 오리알이다. 그렇다면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을 머금고 토하시되 그 삼신(三身)이 뚜렷하신 지혜를 받들기 때문 이실까? 아니다.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을 거두어들이면 삼천성교(三千聖敎)가 되고 삼천성교(三千聖敎)를 거두어들이면 삼승(三乘)이 되고 삼승(三乘)을 거두어들이면 일법(一法)이 완연하거늘 어찌 원만체(圓滿體)인 지혜상(知慧相)에 휘둘리시는 감탄사(感嘆辭)일까보냐. 만약 이럴진댄 장판방에 구르는 진주알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 이실까?
이 자리는 부처님을 비롯하시어 장로수보리와 시회대중(時會大衆)과인 삼인자(三人者)의 배역(配役)으로 꾸미어진 무대로서 피아(彼我)가 분명한 것 같고 사리(事理)가 정연한 것 같고 뿐 아니라 보는 이와 보이는 이가 뚜렷이 구별되어 있는 것 같지마는 본래로부터 의젓하여 움직이지 않는 당처(當處)로 볼 때에 주종(主從)의 설정(設定)이란 허망하여서 실답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무대인지라 부처님은 부처님대로의 탈을 쓰시고 장로는 장로대로의 탈을 쓰시고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시회대중(時會大衆)대로의 탈을 쓰신 다음 제각기대로의 생각과 소견으로 말미암아 제각기대로의 세계를 꾸미어 놓고 온갖 법을 굴리면서 처리를 하는 듯 하지마는 실에 있어서는 삼인자(三人者)의 배역(配役)은 본래로부터의 청정한 비로자나불의 분신(分身)대로 등장하여서 제나름대로의 인생놀이를 공연(共演)하는 막간(幕間)이기 때문에 수보리 장로가 부처님을 상대로 하시어 요지경(瑤池鏡)같은 세계를 따로 보셨다면 이 바로 불 속에서 얼음을 찾음이요 묏등에서 고기를 낚음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럴진댄 무슨 까닭으로 「드무십니다」라는 절규성(絶叫聖)을 올렸을까?
부처님이 금강보좌(金剛寶座)에 앉으시어 일행삼매(一行三昧)에 드실새 모든 불 보살님네들을 비롯하여 구류(九流)중생과 삼라만상은 제각기의 업연과 기틀에 쫓아 제각기대로의 경계를 이루는 듯하나 그 법(法)은 원적(圓寂)하여서 소소(昭昭)하므로 천번 변하고 만번 변하나 변하여서 오지 아니하여 같음인 듯 다르고 다름인 듯 같음이나 입으로 좋이 말할 수 없고 생각으로 능히 헤아릴 수 없음을 장로가 간파(看破)하심으로 하여금 이 당처(當處)가 곧「아뇩다라삼먁삼보리」요 이 소식처(消息處)가 바로 「금강반야바라밀다」임을 인증하기 때문이 아니실까. 아니다. 술은 술인데 무슨 술이냐? 탁주냐 청주냐 맥주냐 소주냐? 어정대지 말고 이름을 대어라.
비롯도 없고 마침도 없으면서 똑똑하고, 움직임도 아니오 정지함도 아니면서 역력하고, 낳음도 아니오 죽음도 아니면서 뚜렷하고, 있음도 아니오 없음도 아니면서 환하나, 방위(方位)도 내외(內外)도 대소(大小)도 수량(數量)마저도 일찍 없으면서 되돌아 다함 없는 법륜(法輪)이 굴리어지는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세계 속에서 수보리 장로는 장로 자신(自身)만이 아니라 부처님을 비롯한 시회대중(時會大衆) 천이백오십인(千二百五十人)도 돈오(頓悟) 무생(無生)인 공적체(空寂體)중에서 제각기대로인 업연(業緣)대로 우뚝하심을 알기 때문이 아니실까. 옳으리라. 이 대목이야말로 부처님이 금강보좌(金剛寶座)에 앉으시어 태고(太古)때의 소식을 그대로 들어내시는 마당이니, 어찌 장로로 하여금 우리의 귀에까지라도 쨍하게 들리도록 「드무십니다」라는 환호성(歡呼聲)이 터져 나오지 않겠는가!
장하도다, 장로수보리시여! 세존이 한마디의 말씀도 끄집어내시기도 전에 그 뜻을 드시었으니 그 경계를 알아차리셨네. 그 경계라서 한 마디의 말귀로 「드무십니다」시니 바로 천기(天機)를 누설(漏說)함이로다. 천기(天機)를 누설(漏說)함이여! 구름은 가다가 멈추지 않고 그대로 가며, 달은 뜨다가 멈추지 않고 그대로 뜨며, 물은 흐르다가 멈추지 않고 그대로 흐르며, 꽃은 피다가 멈추지 않고 그대로 피니, 여여부동(如如不動)이여 조이상적(照而常寂)하고 올올회광(兀兀回光)이여 적이상조(寂而常照)로다. 번역하되 「의젓하여 안 움직임이여, 비추어서 항상 적적하고, 오뚝하여 빛을 돌이킴이여, 적적해서 항상 비춤이로다」허허! 한 개 뿔 난 토끼가 물속 달을 품음이로다.
정각심(正覺心)을 내면 법법(法法)은 허융(虛融)하여 법(法)은 좋이 머물 바가 없고 심심(心心)은 적멸(寂滅)하여 심(心)은 좋이 항복 받을 바 없음을 잘 아시는 장로는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보리심(心)을 내오니 응당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으오리까」여쭈시었다. 실로 육진(六塵)을 뛰쳐나지 못하면 「머뭄 없이 머뭄」을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요, 마음의 해탈이 없으면 「마음의 항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장로가 이러한 질문을 부처님께 여쭈신 것은 아마 뒷중생에 대한 연민심(憐愍心)에서의 청문으로 보아진다. 만약 그렇지가 않고 머뭄과 항복 받는 두 문제를 드렸다면 법(法)은 좋이 물을 것이 없으며 도(道)는 좋이 닦을 것이 없는 의취를 모르는 청문이니, 이렇다면 청산(靑山)에 백운(白雲)은 십만리(十萬里)라겠다.
이에 부처님은 장로가 당신의 마음씀이를 잘 아는 줄을 아심으로 하여서 「무상 정등 정각을 내는 이는 응당 이러히 머물며 이러히 그 마음을 항복 받느니라」셨다. 그렇다! 온갖 모습을 여의고 망령된 생각과 망령된 집착과 삿된 소견과 삿된 알이가 끊어진 깨끗한 스스로의 성품자라라면 어찌 머뭄 없는데 머뭄을 걱정하며 어찌 망령된 마음의 항복을 근심하리요, 장로는 무슨 생각을 가지시었음인지 또다시 여쭈되「세존이시여, 오직 그러하오나 원컨대 즐거이 듣고자 하나이다」하셨다. 아마 뒤의 중하근(中下根)을 위한 계오(啓悟)의 문이 열리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시는 심정(心情)이실 것이다. 이렇듯이 간곡하신 한 마디의 말씀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장광설(長廣舌)은 전개(展開)가 되신 것이 아니실까. 참으로 장로는 우리들의 대선배(大先輩)이심에 틀림이 없으시다. 이 분(分)에서 「금강경」에 대한 설법은 실로 끝난 셈이다. 바로 이 소식처가 제일의체법문처(第一義諦法門處)로서 구경지(究竟地)인 무상(無上) 정등(正等) 정각(正覺)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더 이상 횡설수설은 군더더기라겠으나 부처님은 중․하근을 위하시어 계속 설법을 가지심으로 알되 원래(元來)로 나의 성품 위에는 중․하근이라는 관념(觀念)의 가뭇도 없다고 단정(斷定)하라.
여기에 한 문제를 거는데 답은 ○에다 써넣어라. 초학(初學)들의 알뜰한 살림살이를 세우는데 그 뜻이 있으니 조금도 오해를 말고 답이 나오거든 눈 밝은 이에게 인증을 받아라.
【문】 눈으로 보는 중생은 어디에 있습니까?
【답】 너의 ○○에 있느니라.
【문】 귀로 듣는 파순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답】 너의 ○○에 있느니라.
【문】 혀로 이르는 부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답】 너의 ○○에 있느니라.
【문】 혓바닥 속에 있는 말씀을 한마디 던져 주십시오.
【답】 이것도 동그랑땡, 저것도 동그랑땡, 모두가 동그랑땡이니 토끼뿔은 물속 달을 꿰었고 거북털은 뱃속 꿈을 털었느니라.
이 소식에 팔만법문(八萬法門)이 열린다
망심(妄心)이 본공(本空)하니 진경(塵境)이 본적(本寂)한 줄을 알면 고봉절정(高峰絶頂)에 독좌(獨坐)하여 천하인(天下人)을 답살(踏殺)하리라.
忽聞鐘聲何處來 홀문종성하처래
寥寥長天是吾家 요요장천시오가
一口呑盡三千界 일구탐진삼천계
水水山山各自明 수수산산각자명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얼로오노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집안이 분명허이
한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
물은물은 뫼는뫼는 스스로가 밝더구나
第三(제삼) 大乘正宗分(대승정종분)
第三(제삼) 大乘正宗分(대승정종분)
【본문】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시되 諸菩薩摩訶薩(제보살마하살)이 應如是降伏其心(응여시항복기심)하나니 所有一切衆生之類(소유일체중생지류)에 若卵生(약난생) 若胎生(약태생) 若濕生(약습생) 若火生(약화생) 若有色(약유색) 若無色(약무색) 若有想(약유상) 若無想(약무상) 若非有想(약비유상) 非無想(비무상)을 我皆令入無餘涅槃(아개영입무여열반)하여 而滅度之(이멸도지)하리라하여 如是滅度(여시멸도) 無量無數無邊衆生(무량무수무변중생)하되 實無衆生(실무중생)이 得滅度者(득멸도자)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有我相(유아상) 人相(인상) 衆生相(중생상) 壽者相(수자상)이면 卽非菩薩(즉비보살)이니라
제삼 큰 수레의 바른 마루 분
【번역】부처님이 수보리에게 고하시되 「모든 보살 마하살이 응당 이러히 그 마음을 항복할지니, 있는 바 온갖 중생종류가 태에서 생기는 것, 알에서 생기는 것, 습에서 생기는 것, 화해서 생기는 것, 빛깔 있는 것, 빛깔 없는 것, 생각 있는 것, 생각 없는 것 생각 있음도 아니오 생각 없음도 아닌 것을 내가 다 남김 없이 열반에 들게 하여금 멸도하였으나 이러히 한량없고 수없고 가없는 중생을 멸도하여서는 실로 멸도를 얻는 중생이 없느니라. 무슨 까닭으로서 이냐.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님일새니라」
【강송】보살은 앞생각이 담적(湛寂)하고 뒷생각이 청정(淸淨)하여 자비(慈悲)와 희사(喜捨)의 가지가지 방편으로 중생을 화도(化度)함을 뜻함이요, 마하살은 생각 생각이 공적(空寂)하여 비록 진로(塵勞)중에 있다해도 항상 마음이 맑고 고요하여서 능소연(能所緣)에 얽히지 아니한 허명(虛名)의 기상(氣象)을 뜻하는 것이다. 이럴진대 보살심(菩薩心)인 마하심(摩訶心)을 내면 이 바로 대해탈(大解脫)인지라, 만약 그 망념(妄念)인 중생심(衆生心)이 항하의 모래수같이 있다손 치더라도 항복을 받을 것은 엄연한 사실일 것이다.
이 보살심(菩薩心)과 마하심(摩訶心)은 놓아서 둘이나 거두우면 하나인 청정심(淸淨心)이다. 이 청정심(淸淨心)은 지견(知見)을 세워서 새김을 두기 때문에 알이를 낳고, 이 알이는 탐함을 굴려서 욕계(欲界)를 짓고 성냄을 굴려서 색계(色界)를 짓고 어리석음을 굴려서 무색계(無色界)를 짓는데, 이렇듯이 삼독(三毒)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삼계(三界)의 테두리 안에서 지혜(智慧)와 미혹(迷惑)고 증애(憎愛)로 바탕을 삼고 업연(業緣)을 따라 쏠리는 대로 태문(胎門)과 난문(卵門) 습문(濕門) 화문(化門)을 향하여서 유색(有色) 무색(無色) 유상(有想) 무상(無想) 비유상(非有想) 비무상(非無想) 대로의 탈을 뒤집어쓰는 것이니, 다 그 인과(因果)대로 결정되는 사생보(四生報)로 하여금 세간을 엮으며 가는 셈이다 그 뿐이랴! 이 곳에서 또다시 내세(來世)에 받을 업보(業報)의 탈도 마련이 되면서 연(緣)에 따른 새로운 생애(生涯)를 준비하게 마련인 것이니 이 바로 육도(六道)의 수레바퀴에 뜨잠김이라 일컬어서 괴로움과 즐김의 그 차이는 천만(千萬) 갈래로 나뉘어지지마는 이 모두가 실은 청정심(淸淨心)의 꼭두놀음에 지나지 아니함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이렇듯이 육도(六道)중의 천상도(天上道)는 길고 긴 세월을 통하여 그 생애(生涯)가 지극히 화려하고 즐겁지마는 그 복록(福祿)이 다함에 따라 오쇠(五衰)에 들면 되돌아서 인간사회(人間社會)에 떨어지는 것이니 그 다음의 보(報)를 뉘라서 미리 알며, 인간도(人間道)는 만물(萬物)중의 영장(靈長)으로서 대도(大道)를 성취할 수가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기는 하나 만약 오욕락(五欲樂)을 전부라 해서 닦지 않으면 또한 생사(生死)의 뿌리를 캐어내지 못하는 것이니 그 다음의 보(報)를 뉘라서 말하며, 수라도(修羅道)는 식념(識念)의 놀음판으로 닿질리면 거슬리고 거슬리면 다툼만을 일삼다가 마침내는 태어날 곳도 분명치 못하니 그 다음의 보(報)를 뉘라서 미리 짐작을 하며, 지옥도(地獄道)는 유황불과 기름가마의 사나운 짐승 속에서 하루에도 옥졸의 손으로 만번 죽이이고 만번 살리이는 괴로움과 놀라움과 슬픔과 외로움뿐이니 그 다음의 보(報)를 뉘라서 미리 재며, 아귀도(餓鬼道)는 간탐과 질투의 놀음판으로 허욕만을 캐어댐으로 하여서 반공기의 밥알에는 가시가 돋쳐 보면서도 못다 먹는 꼴이니 그 다음의 보(報)를 뉘라서 미리 달며, 축생도(畜生道)는 주리고 쏠리고 허덕임만이 모두인지라 서로가 잡아먹고 잡히어 먹힐 따름으로 두려움과 의심만을 가질 뿐이니 그 다음의 보(報)를 뉘라서 미리 헤아릴까보냐. 청정심(淸淨心)을 바탕으로 모든 씀이가 굴리어지는 줄을 모르고 사생보문(四生報門)에만 매어 달려서 꿈속 같은 세계를 헤매일 뿐이니 서글픈 일이 아닌가.
부처님은 이렇듯이 서글픈 인생(人生)의 생사고락(生死苦樂) 문제를 헤치기 위하시어 그 연(緣)을 따라서 갖은 수단(手段)을 말아내시고 그 기(機)를 좇아 온갖 방편(方便)을 거둬들이시어 이리 몰고 저리 모시면서 사리(事理)가 정연하게 가르치심으로 말미암아 삼계(三界) 구지(九地)의 중생은 모두가 청정심(淸淨心)을 바탕으로 하는 수승한 열반묘심(涅槃妙心)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때, 「내가 다 남김없이 열반에 들게 하여금 멸도하였느니라」시는 말씀이 부처님의 입 밖에 떨어지기도 전에 삼계(三界) 구지(九地)의 중생은 모두가 한 때에 부처를 이루는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시 말하자면 사생보문(四生報門)을 좇아서 실다운 듯이 항상 출몰(出沒)을 계속하는 환상(幻像)임에는 틀림없으니 본래로 열반묘심(涅槃妙心)인 필름 위에 얼룩진 영상(影像)임을 사람들은 모르고 길이 한숨질뿐이다. 허나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용상면(用相面)인 환상극(幻像劇)은 원명부동(圓明不動)한 체성면(體性面)인 실존법(實存法)이 있음으로서만이 무궁한 조화는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찌 춤인들 안추겠는가. 이렇듯이 한숨지고 춤을 춤이 한낱 마음의 씀이라면 한낱 마음은 깨치고 미함에 따라 울고 웃는 것이니 애오라지 사생보문(四生報門)의 탈도 한낱 마음의 씀이로 결정되는 것임을 알겠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있어서 이르되 ‘중생은 본래로 부처와 다름이 없다고 하겠지마는 당장에는 미한 범부가 아니냐’고 뇌까린다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한 분(分)으로서인 잠꼬대로 그 책임은 미한데 있을 따름일지언정 본래로부터 맑고 밝은 열반묘심(涅槃妙心)을 여윔은 절대로 아닌 것이니, 이러므로 하여서 중생의 이름을 빌고 멸도를 얻는다는 말을 씀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왜나면 중생이 있음으로서 법이 있고 법이 있음으로서 멸도란 말귀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사상(四相)에 휘둘리면 중생이나 사상(四相)을 여의면 스스로가 부처임을 깨쳐 앎으로 하여금 멸도에 든다고 말씀을 던지신 것이니 실로 중생에게는 허공을 찢어내는 소식이라겠다. 자! 이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허헛! 알고 보니 하늘사람과 땅사람이 한 수레로 오고 옛사람과 지금사람도 한 가마로 가는구나! 에익! 멸도니 열반이니하는 말귀는 뉘라서 지어냈는고! 히! 내니라.
부처님은 이러히 무량 중생을 멸도하여 미쳐서는 실로 중생이 멸도를 얻은 자가 없다고 이르셨다. 왜 그러실까? 사람이 스스로의 성품을 깨침으로 하여금 온갖 업장(業障)이 녹아서 남음이 없으면 이 이름이 대해탈(大解脫)인데 어찌 일찍이 중생을 멸도함이 있겠느냐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말씀이신 즉 옳으신 말씀이나 모든 모습에 휘둘리는 범부(凡夫)는 우선 무위리(無爲理)를 모르는데 따라 다음 인아(人我)를 제하지 못하고 이어 인아(人我)를 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自身)의 본심(本心)도 알지 못하고 자신(自身)의 본심(本心)도 알지 못하므로 하여금 마침내 부처님도 뜻도 밝혀내지 못하는 병통을 짊어졌으니 문제는 다르겠다. 까닭에 다만 부처님의 처방(處方)에 따라서 오래된 병통만 깨뜨려버리면 중생은 바로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면목(面目)으로 돌아가서 청정인(淸淨人)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이 부처님의 법력(法力)에 의지하여 누리에 호올로 우뚝하면서 의젓한 법신(法身)임을 깨쳐서 보면 중생이 또한 보리상(菩堤相)이요 또한 열반상(涅槃相)이요 또한 멸도상(滅度相)인지라, 비추어서 항상 적적하고 적적하여 항상 비추면서 기(機)를 굴리고 연(緣)을 접할 뿐인데 되돌아 삼상(三相)이 또한 어디에 붙겠는가. 이러므로 만약 「내가 멸도를 하고 네가 멸도를 받았느니라」한다면 벌써 아(我)․인상(人相)이 뛰쳐나오며 중생(衆生)․수자상(壽者相)도 뒤따를 것이니 바야흐로 천당과 지옥은 사바세계로 더불어서 중생들이 제멋대로 판을 치는 무대가 되고 말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상(四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고 이르신 것이니 이 법이라서 본래로 맑고 밝아서 낱낱이 뚜렷하건만 사람들은 제 스스로가 쏠리는 대로의 탈을 뒤집어쓰고 소집 말집으로도 가는구나!
여기에서 사상(四相)에 대한 개념을 일단 적어보자
아상(我相)이라 함은 입신양명(立身揚名) 따위를 본위(本位)로 하는 사념(思念)의 행위일체(行爲一切)를 뜻함이요
인상(人相)이라 함은 사리분별(事理分別) 따위를 본위(本位)로 하는 사념(思念)의 행위일체(行爲一切)를 뜻함이요
중생상(衆生相)이라 함은 구정심사(口正心邪) 따위를 본위(本位)로 하는 사념(思念)의 행위일체(行爲一切)를 뜻함이요
수자상(壽者相)이라 함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열반지(涅槃地)를 얻었다는 관념 따위를 본위(本位)로 하는 사념(思念)의 행위일체(行爲一切)를 뜻하는 것으로 우선 보아두자.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음을 미리 말하여 둔다. 육도(六途)의 노래를 달기로 하자.
유황불 기름가마 들끓는곳에
사나운 짐승마저 앞을덮치니
눈알만이 굴리이는 반죽음이라
지옥도엔 외론넋이 울부짖으네
간탐과 질투에서 허덕이다가
검붉은 톱산속에 어둠이오면
반공기의 밥알에는 가시가돋쳐
보면서도 못다먹는 아귀도라네
서로가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길짐승 날짐승과 물짐승들은
어리석은 중생들의 탈바꿈이라
축생도는 비탈길에 낭떠러지네
본래로 영특스런 성품이런만
넝쿨에 얽히어진 알이놀이라
가랑잎이 떨어져도 풀리지않고
싸움만을 좋아하는 수라도라네
하늘이 높다더냐 땅은둥근데
굴리는 한법에서 시간이나니
산북(山北)에는 눈 내리고 산남(山南)은 비라
인간도인 이 소식엔 장승도 뛴다
십선(十善)과 선정(禪定)으로 하늘에 나면
노래와 꽃놀음에 세월(歲月)이가나
그 복덕(福德)이 다함따라 오쇠(五衰)에 드니
윤회(輪廻)속에 춤을추는 천상도라네
이 소식에 숱한 세계가 벌어진다
어허! 이러한 조화(造化)가 없었던들 불 보살님네들 어디에다 발을 붙이시지. 히힛! 머리 없는 쇠 소의 혓바닥이 설법(說法)을 하네
九類衆生曾那得 구류중생증나득
問處有口從此來 문처유구종차래
誰稱實無得滅者 수칭실무득멸자
不離四相非佛事 불이사상비불사
구류중생 얼로얻어 윤회바다 떠도는고
묻는곳에 입있으니 일로좇아 오노매라
뉘라일러 제도받은 중생이라 없다던고
네모습을 안여의면 불사라고 안한다네
第四(제사) 妙行無住分(묘행무주분)
第四(제사) 妙行無住分(묘행무주분)
【본문】 復次須菩提(부차수보리)야 菩薩(보살)은 於法(어법)에 應無所住(응무소주)하여 行於布施(행어보시)니 所謂不住色布施(소위부주색보시)며 不住聲香味觸法布施(부주성향미촉법보시)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은 應如是布施(응여시보시)하여 不住於相(부주어상)이니 何以故(하이고)오 若菩薩(약보살)이 不住相布施(부주상보시)하면 其福德(기복덕)은 不可思量(불가사량)하리라 須菩提(수보리)야 於意(어의)에 云何(운하)오 東方虛空(동방허공)을 可思量不(가사량부)아 不也(불야)니다 世尊(세존)이시여 須菩提(수보리)야 南西北方(남서북방) 四維上下虛空(사유상하허공)을 可思量不(가사량부)아 不也(불야)니다 世尊(세존)이시여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의 無住相布施福德(무주상보시복덕)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여 不可思量(불가사량)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은 但應如所敎住(단응여소교주)니라
제사 머무름 없는 묘행분
【번역】다시 「수보리야, 보살은 법에 응당 머무른 바 없이 보시를 할지니 이른바 빛깔에 머물지 않는 보시며 소리․냄새․맛․닿질림과 요량에 머물지 않는 보시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이러히 보시하되 모습에 머물지 않을지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만약 보살이 모습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하면 그 복덕은 좋이 헤아리지 못하나니라. 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동방 허공을 좋이 헤아리겠느냐? 「못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모퉁이, 위․아래 허공을 좋이 헤아리겠느냐?」「못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수보리야, 보살이 모습에 머물지를 않는 보시는 복덕도 또다시 이와 같아서 좋이 헤아리지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다못 가르친 바와 같이 응당 머무를 지니라」
【강송】부처님은 제일(第一)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에서 체성면(體性面)을 말씀하시고 제이(第二) 선현기청분(善現記請分)에서 체성면(體性面)은 용상면(用相面)으로 더불어 다르지 않음을 말씀하시고 제삼(第三)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서는 용상면(用相面)만을 말씀하셨다고 억지 분별을 짓는다면, 이 분(分)부터는 이모저모의 방편(方便)을 드시면서 가지가지의 수단(手段)으로 하여금 제일(第一), 제이(第二), 제삼(第三)인 의체법문(義諦法門)을 해득(解得)하지 못하는 중하근(中下根)을 상대로 하여서 열어 놓으신 제사(第四)의 법문처로 보아두자.
복차(復次)는 거듭함을 뜻함이요, 어법(於法)은 육도(六度)를 뜻함인데 육근(六根)이 청정(淸淨)한 육바라밀을 이름이다. 이 육도(六度)를 닦으려면 먼저 육근(六根)을 맑혀야하고 육근(六根)을 맑히려면 다음 육진(六塵)을 쓸어내어야 한다. 보시(布施)는 빛깔에 머물지 아니하면서 간탐(慳貪)을 제도함이니 눈의 티끌을 쓸어냄이요, 지계(持戒)는 소리에 옮기지 아니하면서 도리(道理)를 행함이니 귀의 티끌을 쓸어냄이요, 인욕(忍辱)은 냄새를 셈하지 아니하면서 조화(調和)를 이룸이니 코의 티끌을 쓸어냄이요, 정진(精進)은 맛에 쏠리지 아니하면서 진여(眞如)를 가짐이니 혀의 티끌을 쓸어냄이요, 선정(禪定)은 닿질림에 움직이지 아니하면서 적조(寂照)를 지킴이니 몸의 티끌을 쓸어냄이요, 지혜(智慧)는 요량을 일으키지 아니하면서 무명(無明)을 쓸어냄이니 뜻의 티끌을 쓸어내는 것으로 우선 알아두자. 이렇듯이 육도만행(六度萬行)을 닦는다는 것은 그 六塵을 쓸어냄을 일컬음이다.
부처님은 다시 수보리 장로를 향하시어 「보살은 법에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할지니 이른바 빛깔에 머물지 않는 보시며 소리와 냄새․맛․닿질림과 요량에 머물지 않는 보시니라」하시고 마음이 그 빛깔을 으뜸으로 하는 육진경계(六塵境界)에 부딪치어도 머물지 않는 보시를 말씀하셨다. 왜 그러시냐면 범부(凡夫)의 보시는 오욕(五慾)의 쾌락인 간탐심(慳貪心)을 바탕으로 하는 명예(名譽)와 신상(身相)을 사회에 나투는데 있으므로 하여금 그 보(報)가 다함에 따라서 삼악도(三惡道)에도 떨어지지마는 도인(道人)의 보시는 오욕(五欲)의 쾌락인 간탐심(慳貪心)을 바탕으로 하여 명예(名譽)와 신상(身相)을 사회에 나투는데 있지 않고 다만 모든 이익을 중생 전체에 돌리기 위한 때문으로 하여금 그 덕화(德化)는 우마(牛馬)와 곤충(昆蟲)에게 까지라도 미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육경(六境)에 머물지 않는 보시는 심심(心心)이 청정(淸淨)하고 념념(念念)이 적조(寂照)하므로 내외(內外)가 상응(相應)하니 무량묘의(無量妙義)가 자성(自性)위에 자구족(自具足)할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허공은 끝되는 곳이 없으니 좋이 생각으로 재지 못하며 보살이 모습에 머물지 않는 보시는 얻은 바의 공덕도 또한 허공과 같아서 좋이 양을 재지 못한다」셨으니 끝되는 곳이 없음을 뜻하심이다. 실로 세계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을 이른다면 허공을 지나지 못할 것이요, 성품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을 이른다면 불성을 지나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무릇 있는 바의 모습은 한정이 있으므로 크다는 이름을 못 얻지마는 허공은 한정이 없으므로 크다는 이름을 얻으며, 온갖 성품은 나름대로의 분별이 있기 때문에 크다는 이름을 얻지 못하나 불성은 한량이 없는 까닭으로 크다는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허공 중에는 본래로부터 동 서 남 북이 없건마는 만약 알이를 두어서 사방(四方)을 본다면 곧 이 모습에 머뭄인지라 해탈을 얻지 못할 것이요, 이 불성 중에는 본래로부터 아․인․중생․수자가 없건마는 만약 분별을 두어서 사상(四相)을 본다면 곧 이 중생의 지견인지라 열반을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니, 이 또한 주상행위(住相行爲)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고인(古人)도 이르시기를 「반야지(般若智)로써 질(質)을 삼고 만행화(萬行花)로서 문(文)을 삼나니 지(智)와 행(行)이 상자(相資)하여야 문질(文質)이 빈빈(彬彬)이니라」하였으니, 이런즉 슬기로써 행위를 일으켜서 머무름이 없는데 머무르면 그 마음씨의 허철영통(虛徹靈通)함이 허공으로 더불어서 다르지 않음은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다시 말하여서 「머무름이 없는데 머무름」이란, 마음이 경계에 닿질림으로 말미암는 옳그름의 분별과 밉고움의 판단에 새김을 두지 않음이다. 또다시 말하여서 머무름도 치우침이요 안 머무름도 치우침이니 이 두 치우침에 거치적거리지 아니하고 그대로 여윔이 곧 「머무름이 없는데 머무름」인 참 소식이니 이 바로가 대도(大道)라 일컬으겠다. 어즈버야, 대도(大道)는 머무름이 있고 머무름이 없는데 탐착하여서 끄달리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하여금 허공(虛空)중에 이루어진 관동팔경(關東八景)이 방해롭지 않으니 보고 듣고 깨치고 앎이 어찌 우리 집안이 풍속이 아니겠으며, 무주(無住)중에 나투는 묘용도리(妙用道理)가 방해롭지 않으니 빛깔․소리․냄새․맛․닿질림이 어찌 나의 놀음터가 아니겠는가! 실로 그렇다. 판단이 없으면 어찌 일신(一身)을 단장하며 분별이 없으면 어찌 만법(萬法)을 굴릴까보냐. 그러나 판단과 분별에 새김을 달지 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듯이 무주(無住)는 만행(萬行)의 대본(大本)이요 만행(萬行)은 무주(無住)의 대용(大用)이니 이를 가리켜 곧 이 불심(佛心)이요, 곧 이 해탈심(解脫心)이요, 곧 이 보리심(菩堤心)이요, 곧 무생심(無生心)이라 일컬으니 이 바로가 무심도인(無心道人)이 긴칼을 빼어 들고 천하인(天下人)을 흘겨보는 소식처(消息處)이요 무위진인(無位眞人)이 그림자 없는 탑에 올라 구멍 없는 피리를 부는 소식처(消息處)로서 어찌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음인 삼독성(三毒城)을 무찌르는 일대작가(一大作家)의 대본영(大本營)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 문제를 건다.
【문】 세계 중에서 무엇이 가장 크나니까?
【답】 허공이 제일 크나니라.
【문】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답】 너는 허공과 더불어 같이 살면서도 어찌 끝이없는 허공성(虛空性)을 모르느냐.
【문】 제가 아는 것은 둥글고 푸른 하늘을 허공이라 믿을 뿐입니다.
【답】 허공은 어찌 둥글고 모짐이 있겠느냐. 다만 너의 눈동자가 둥글기 때문에 둥글게 보일 따름이요, 허공이 어찌 푸르고 누름이 있겠느냐. 다만 빛깔 관계로 푸르고 누렇게 보일 따름이니, 이를 일러 하늘이라고도 부르지마는 그 크기로 말하자면 이렇다. 단단히 들어라. 만약 네가 이 자리에서 상하좌우(上下左右)를 향하여 광속(光速)으로 억천만년을 달려가고 또다시 억천만년을 달려가도 끝이없는 허공은 그대로 계속할 따름으로 부처님 말씀따나 마음의 가는 곳이 꺼졌고 말의 길이 끊어졌을 뿐인데 어찌 크고 작음을 논의하겠는가. 이러므로서 크다고 이르는 것이다.
【문】 아니 세계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하면 그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이루고 있는 만큼인 허공의 한정은 있지 않겠습니까?
【답】 이름의 모습을 둔다면 한계는 있지. 이러므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의 그 밖을 향하여 수 없는 세계가 끝없는 허공 중에 다함없이 벌어져 있음도 알아야 한다.
【문】 얼떨떨하여 끝이없는 허공이라는 말귀에 실감(實感)이 아니 갑니다.
【답】 우물 속에 개구리가 태평양의 넓이를 듣는다 하여서 어찌 실감(實感)이 가겠는가.
【문】 그렇다면 세계의 중심(中心)은 어딥니까?
【답】 중심이 있으면 변두리가 설정되고 변두리가 설정됨은 중심의 성립을 뜻함인데 변두리가 없는 누리에 어디를 중심이라 이르겠는가.
【문】 성품 중에는 무엇이 제일 크나니까?
【답】 불성이 가장 크나니라.
【문】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답】 영특스런 마음이 허공을 싸고 있기 때문이다.
【문】 어찌 마음이 허공을 싸고 있는 줄을 압니까?
【답】 허공은 모습이 없다. 그러나 항상 쓴다. 이 허공은 부처도 얻지 못하나 중생도 버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은 모습이 없다. 그러나 항상 쓴다. 이 마음은 부처도 얻지 못하나. 중생도 버리지 못하는 것이지마는 마음의 씀이 어떠함에 따라 허공중의 어디라도 나투기 때문에 허공을 싸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문】 이럴진댄 한없이 큰 허공은 한없이 큰 불성과 꼭 같다고 이르지 않겠습니까?
【답】 그렇다. 입을 벌리면 허공과 불성은 둘이나 봉하면 하나이니, 그 까닭은 허공이니 불성이니 일컬으는 이름도 편의상 빌려씀으로 알아라.
【문】 그것은 그렇다 할지라도 허공에는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인 삼계해(三界海)가 벌어지면서 상하사방(上下四方)으로 나뉘고 따라 밝고 어둠이 엇갈리면서 또다시 차갑고 뜨거움을 나투는데 어찌 하여서 불성과 같다고 이르겠습니까?
【답】 단단히 들어라. 불성에는 탐심(貪心)․진심(瞋心)․치심(痴心)인 삼심산(三心山)이 벌어지면서 아인사상(我人四相)으로 나뉘고 따라 바름과 삿됨이 엇갈리면서 또다시 착하고 악함을 나투는데 어찌 하여서 불성이 허공과 다르다 이르겠는가.
【문】 허공은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두어서 시절을 엮으며 가는데 어찌하여 불성과 같다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답】 불성은 낳고 늙고 병들고 죽음을 두어서 세간을 엮으며 가는데 어찌하여서 허공과 다르다 하겠는가.
【문】 그렇다 할진댄 아무 모습도 없으면서 가도가도 다함 없고 와도와도 끝이 없고 이렇다 저렇다 할 뜻길조차 꺼진 불성과는 그 모습이 같고 그 성품이 같다고만 불 것이 아니라 이 바로 하나라 하지 않겠습니까?
【답】 좋은 생각이다. 가이 없는 허공은 곧 가이 없는 불성이요, 가이 없는 불성은 곧 기이 없는 허공이니라. 여기에 만약 어리석은 사람이 있어서 허공이니 불성이니 이르는 이름에만 매어 달려서 둘로 나눠 놓으려고 하여봤든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끌어잡고 허공과 불성을 둘로 나누겠느냐는 말이다. 이러므로 하여서 아무 모습도 없는 이 허공이 아무 모습도 없는 이 불성과는 둘이 아니니, 너는 허공이란 이름도 버리고 불성이란 이름도 버린 다음 한낱 너의 법성체(法性體)인 줄로 알아라.
【문】 이럴진댄 삼계(三界)는 어찌하여서 나의 법성체(法性體)중에 이루어졌습니까?
【답】 실로 중요한 물음이다. 가이 없고 끝이없는 법성체(法性體)는 영특스리 맑은 슬기로서 옳그름이 끊어졌고 가옴이 끊어졌으므로 하여금 마음으로 능히 헤아리지 못하고 생각으로 좋이 다루지 못하는 자리나, 그러나 기(機)에 응하여 지견(知見)을 세울새 새김을 따로 두어서 가려냄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탐하는 마음으로 하여금 욕계(欲界)를 이루고 성내는 마음으로 하여금 색계(色界)를 이루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하여금 무색계(無色界)를 이룬다는 경(經)의 말씀이지마는, 여기에서 탐착하는 마음의 상대는 베푸는 마음이니 그 앞소식은 청정심(淸淨心)이요 성내는 마음의 상대는 자비의 마음이니 그 앞소식은 청정심(淸淨心)이요 어리석은 마음의 상대는 똑똑한 마음이니 그 앞소식은 청정심(淸淨心)인 줄로 알고 한 생각을 고쳐 잡아 삼학(三學)을 닦음으로 하여금 법락(法樂)을 삼고 묘한 씀이를 굴린다면 탐하는 마음에서 온 욕계(欲界)와 성내는 마음에서 온 색계(色界)와 어리석은 마음에서 온 무색계(無色界)는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이면서 이름 뿐인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 인지라 되돌아 탐하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은 바로 불정토(佛淨土)라 이르지 않겠는가. 이러므로 삼심산(三心山)을 이적(理的)이라 하겠고 삼계해(三界海)는 사적(事的)이라겠는데, 이(理)가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사(事)는 그 씀이를 나투우고 사(事)가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이(理)는 그 조화를 부리게 되는 것이니 까닭에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닌 하나라겠고,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닌 하나인 바에야 삼신산(三神山)과 삼계해(三界海)가 또한 둘이 아닌 하나라 이르지 않겠는가. 이렇듯이 이루어지고 꺼지는 온갖 법(法)이 다 사람의 성품 가운데서의 조화련마는 세상사람들은 출몰(出沒)하는 그 모습에만 탐착함으로 말미암아 무상(無常)만을 느끼며 울고 웃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몸을 한번 크게 뛰쳐서 이 도리를 깨쳐 알면 바로 끝없는 법성체(法性體)는 곧 끝없는 너의 법성신(法性身)인지라, 또다시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문】 그럴진댄 무슨 까닭에 사람들은 제각기가 간직한 법성신(法性身)을 깨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제각기대로인 등차(等次)를 두고 인격(人格)을 나투게 됩니까?
【답】 이렇다. 원래로부터 법성체(法性體)가 엄연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인연을 따른 심식(心識)은 법칙(法則)대로인 다섯쌓임이 모여서 한낱 인격(人格)인 색신(色身)을 나투는 것이지마는, 그러나 그 모습이 헛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의취를 모르고 생기고 사그라지는 모습에만 얽매어서 낳고 죽는다는 그릇된 새김 속에 휘둘리는 까닭으로 본래의 맑은 성품도 물들리게 마련이요, 따라 그 인격(人格)도 물들리는 정도에 맞추어서 등차(等次)가 마련되는 것이다.
【문】 어떻게 닦음으로서 색신(色身)만에 쏠리지 않고 인격(人格)을 갖춘 법신(法身)을 나툼니까?
【답】 삼가이 들어라. 되돌아 말하자면 본래로부터의 맑고 뚜렷한 성지(性智)가 너의 터전이요 너의 살림인 줄로 알고 뜻대로 쓰면서 끝이 없고 다함 없는 적멸(寂滅)을 마음껏 즐길지언정 헛되이 은애해(恩愛海)에 뛰어듦으로 하여금 오욕지(五欲地)에 빠지지 말 것이며, 본래로부터의 휘영청이 밝은 부처의 성덕(聖德)이 너의 자산이요 너의 보람인 줄로 알고 멋대로 굴리면서 한이 없고 궁함 없는 법락(法樂)을 자랑껏 누릴지언정 막연히 사상산(四相山)에 에워싸임으로 하여금 생사상(生死想)을 일으키지 않으면 비로소 인격(人格)을 갖춘 법신(法身)을 이루게 되느니라.
【문】 허공 중을 떠도는 이 땅덩이만 의지하고 있는 내가 가이 없는 법신임을 알게되오니 참으로 놀랍고도 두렵기만 합니다.
【답】 네가 놀랍고도 두려운 줄을 안다니 본래의 소식을 아는구나. 좋구나 좋다. 네가 만약 지식이나 알음알이로써 이 소식을 접하였더라면 놀라움과 두려움은 없었을 것이요, 놀라움과 두려움이 없었으면 다음에 오는 기쁨과 즐거움도 없을 것이다. 장한지라! 이 의취를 알되 비추어서 항상 적적한 절대성을 바탕으로 적적하면서 항상 비추는 상대성을 씀이로 하면 보임․들음․깨침․앎이라서 어찌 참다운 깨달음이 아니겠으며, 빛깔․소리․냄새․맛․닿질림이라서 어찌 참다운 법이 아니리요. 이렇듯이 참다운 깨달음으로써 참다운 법을 대한즉 육근(六根)은 스스럼없이 청정공덕을 이루게 마련이니 대각보리(大覺菩堤)는 애오라지 너의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소식에 허공의 머리를 채었구나
동서(東西)가 있으면 중앙(中央)이 있을 것이니, 이럴진댄 중앙(中央)은 어디메인고. 히힛!
상투 끝에 꽂친 동곳이니라.
住相布施數量內 주상보시수량내
起智功行與十方 기지공행여십방
捺印虛空果虛空 날인허공과허공
福德自成金剛體 복덕자성금강체
모습에다 머문보시 수량안에 있는거이
슬기라서 일킨공행 시방계로 더불은다
허공에다 인찍으면 과도허공 같은거이
복과덕은 스스로가 금강체를 이루고야
第五(제오) 如理實見分(여리실견분)
第五(제오) 如理實見分(여리실견분)
【본문】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可以身相(가이신상)으로 見如來不(견여래부)아 不也(불야)니다. 世尊(세존)이시여 不可以身相(불가이신상)으로 得見如來(득견여래)니다 何以故(하이고)오 如來所說身相(여래소설신상)은 卽非身相(즉비신상)일새니이다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시되 凡所有相(범소유상)은 皆是虛妄(개시허망)이니 若見諸相(약견제상)이 非相(비상)이라시면 卽見如來(즉견여래)하리라
제오 이치대로 실다이 보는 분
【번역】「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좋이 몸 모습으로써 여래를 뵈옵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좋이 몸 모습으로써는 여래를 얻어 뵈옵지 못하나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습니까.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 몸 모습은 곧 아닌 몸 모습일새니다.」부처님이 수보리에게 고하시되 「무릇 있는 바 모습이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모습을 아닌 모습으로 보면 곧 여래를 뵈오리라.」
【강송】부처님이 장로에게 고하시되
「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좋이
몸 모습으로써
여래를 뵈옵겠느냐」
하셨다. 다시 말하자면 三十二相(삼십이상) 八十種好(팔십종호)의 존엄상으로써 여래를 뵈옵겠느냐시는 말씀이시나, 실은 그 뜻이 妙圓(묘원)한 무상신(無相身)을 밝히시는데 있다. 왜 그러냐면 아무리 외외하시고 당당하신 부처님의 존엄상이라 할지라도 한낱 모습으로서 환상(幻像)임을 면하지 못하니, 그 환상(幻像)만으로는 여래님이라 일컬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색신(色身)은 이 곧 모습이요 법신(法身)은 이 곧 성품이니 색신(色身)은 사대(四大)가 화합(和合)하여 부모(父母)가 낳은 바로서 육안(肉眼), 곧 살눈으로 능히 볼 수 있겠지마는 법신(法身)은 빛깔도 소리도 없으면서 그 이량(理量)은 허공으로 더불어서 같음으로 말미암아 혜안(慧眼), 곧 슬기눈으로써만이 볼 수 있기 때문에 법신(法身)이신 여래님을 뵈오려면 슬기눈을 갖춤으로 하여금 몸 모습을 아닌 몸 모습으로 뵈어야 할 것이다. 이러므로 장로는 「좋이 몸 모습으로써는 여래를 뵈옵지 못하나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습니까?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 몸 모습은 곧 아닌 몸 모습일새니다」라고 말씀을 드리신 것은 법신(法身) 여래를 여윈 색신(色身)만의 여래는 제 구실을 못할 뿐 아니라 있을 수도 없음을 뜻하시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실로 여래님을 뵈오려면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의 좋으신 색신상(色身像)만에 치우쳐도 이 곧 상견(常見)이라, 무염(無染) 청정(淸淨)한 법신(法身)의 여래는 못뵈올 것이요, 그렇다고 무염(無染) 청정(淸淨)한 법신(法身)의 여래상(如來相)에만 치우쳐도 이 곧 단견(斷見)이라, 묘유(妙有) 자재(自在)한 색신(色身)의 여래는 못 뵈옵기 때문에 문제는 크게 달라진다고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이러므로 부처님은
「무릇
있는 바의 모습은
다
허망하니
모든 모습을
아닌 모습으로 보면
곧
여래를 뵈오리라」
이르셨다. 무릇 있는 바의 모습은 허망(虛妄) 무실(無實)한 것이라고 잘라서 말씀하신 것은 무상리(無相理)를 높이 드러내신 소식이요, 모든 모습을 아닌 모습으로 보면 여래를 뵈온다고 이르신 것은 아닌 모습 곧 비상(非相)은 모습 밖에 곧 상외(相外)에 있음이 아니니 여래님의 비신상(非身相)도 그 신상(身相) 밖을 향하여서 뵈올 수는 없는 것임을 뜻하심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므로 하여서 색신(色身)을 여위어도 무염청정(無染淸淨)한 법신(法身)을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요, 법신(法身)을 여위어도 묘용자재(妙用自在)한 色身은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니, 어떻게 하면 여래님의 참 몸을 얻어 뵈옵겠는가? 한마디 일러라. 알겠는가? 바로 이 소식처가 산(山)은 산(山), 수(水)는 수(水), 산수(山水)가 각래(却來)요! 남(男)은 남(男), 여(女)는 여(女), 남녀(男女)가 향거(向去)라! 일컬으는 풍광(風光)이다. 이래도 모르거든 허공을 향하여 일보(一步)를 내어 디디어라. 그곳에서 황면노자(黃面老子)가 빙긋이 웃고 계시리라.
그럴진댄 여래님의 진신(眞身)을 뵈오려면 여래님의 그 색신(色身) 밖을 향하여 뵈우려 하지 말고 그 색신(色身)을 통하여서 아닌 색신(色身)인 법신(法身)을 뵈옵는 줄을 알았으니 우리들 중생의 진신(眞身)을 보려면 또한 우리의 이 색신(色身) 밖을 향하여 보려고 하지 말고 이 색신(色身)을 통하여서 아닌 색신(色身)인 법신(法身)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 대목에서 인생문제는 비로소 해결되기 시작하는 소식임을 밝혀두고 , 다음 가짜 색신(色身)은 진짜 법신(法身)의 생각대로 굴리이는 꼭두이니 모든 선악업(善惡業)도 다 이 법신(法身)의 잘잘못인 알이의 굴리는 대로 지어지는 것도 아울러 말하여 두자. 이런 까닭에 만약 법신(法身)이 악(惡)을 저지르면 색신(色身)이 선처(善處)에 나지 못함으로 하여서 스스로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는 것이요, 만약 법신(法身)이 선(善)을 쌓으면 색신(色身)이 악처(惡處)에 나지 않음으로 하여서 스스로가 삼악도(三惡道)를 받음은 엄연한 사실이니, 이를 일컬어서 인과법(因果法)이 불매(不昧)라는 것이다. 이 의취를 모르고 가짜인 꼭두의 색신(色身)만을 전부라 하여서 세간을 엮어가다가 마침내 흙구덩이나 불구덩이를 향하여 달리는 것은 지극히 원통한 일이니 이런 사람들에게 한하여서 어찌 인생 본래의 소식인 사는 맛과 죽는 멋을 꿈속에서인들 알아낼까 보냐! 한 문제를 걸어보자.
무슨 까닭으로 삼선도(三善道)와 삼악도(三惡道)로 나뉩니까?
단단히 들어라, 본래로부터 삼선도(三善道)와 삼악도(三惡道)의 그 당처(當處)는 아무 모습도 없는 하나의 성품이나 일념(一念)의 차이로써 육도(六道)를 지어가며 세간(世間)을 엮을 따름이다.
그 당처(當處)가 비었는데 어찌하여서 둘로 나뉘입니까?
그래도 모르겠나? 성품이란 원래로 영특스리 밝고 맑아서 아무런 모습이 없건마는 지견(知見)을 세워서 씀이를 굴리게 마련인데, 삼학(三學)을 놓치지 않으면 삼선도(三善道)의 보(報)를 받으나 만약 삼독(三毒)에 뛰어들어서 헤어나지 못하면 삼악도(三惡道)의 보(報)를 받게 마련이니, 다 그 마음씀이 어떠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삼악도(三惡道)는 어떠한 인과(因果)로 말미암아서 축생(畜生)의 탈까지라도 뒤집어쓰게 되는 것입니까?
삼가이 들어라. 영특스런 슬기의 그 성품 자리는 원래로부터 생기고 꺼짐도 아니오 더럽고 깨끗함도 아니오 푸르고 누름도 아니면서 아무 새김도 없으나 때에 따라서 기틀에 응함을 「도리」곧 이(理)라 이르니 이 바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바탕으로서 진공(眞空)인 것이요, 따라 이 진공(眞空)이 느껴서 통함이 「기운」곧 기(氣)라 이르니 이 바로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씀이로서 묘유(妙有)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비유하여 전기인 바탕의 이(理)와 붙임 씀이의 기(氣)가 본래로 둘이 아니지마는 이(理) 가운데서 기(氣)가 나투지 않으면 기(氣)는 없는 듯이 이(理)가 있음이니 이를 일러 진공(眞空)이라 하고 기(氣) 가운데서 이(理)를 나투지 않으면 이(理)는 없는 듯이 기(氣)가 있음이니 이를 일러 묘유(妙有)라 하는데, 입을 열면 이(理)와 기(氣)는 이름이 다르나 입을 봉하면 이(理) 밖에 기(氣)가 따로 없고 기(氣) 밖에 이(理)가 따로 없음으로 말미암아 기(氣)가 곧 이(理)인 도리요 이(理)가 곧 기(氣)인 기운이라 이르겠다.
이렇듯이 본래의 바탕인 진공(眞空)의 도리를 밑천으로 하는 그 씀인 묘유(妙有)의 기운이 살림살이를 꾸밀 때 앞 경계를 거느리고 뒷 경계에 끄달리지 아니하여서 정각(正覺)을 이루면 육도(六道)를 벗어나겠지마는, 그러나 어리석게도 만약 정인(正因)을 알지 못하여서 어두운 마음으로 선(善)을 닦는다손 치더라도 짐승 지견(知見)을 좋아하여 쓰면 마침내 짐승굴에 뛰어 들어서 짐승탈을 쓰고 사람 지견(知見)을 좋아하여 쓰면 마침내 사람집에 달려가서 사람탈을 쓰고 부처 지견(知見)을 좋아하여 쓰면 마침내 부처나라에 올라가서 부처탈을 쓰게 마련인 것이다. 고인(古人)의 말씀을 예로 든다면, 미련한 마음으로 십선(十善)을 닦되 망령되이 쾌락(快樂)을 구하면 탐(貪)으로 이루어진 욕계(欲界)를 여의지 못하니 천취(天趣)에 낳고, 미련한 마음으로 오계(五戒)를 가지되 망령되이 증애(憎愛)를 가름하면 진(嗔)으로 이루어진 색계(色界)를 여의지 못하니 인취(人趣)에 낳고, 미련한 마음으로 유위(有爲)에 붙여서 망령되이 복록(福祿)을 바라면 치(痴)로 이루어진 무색계(無色界)를 여의지 못하니 수라취(修羅趣)에 난다고 하셨으며, 따라 삼독심(三毒心)으로 악업(惡業)을 짓되 탐업(貪業)이 무거우면 아귀도에 떨어지고 진업(嗔業)이 무거우면 지옥도에 떨어지고 치업(痴業)이 무거우면 축생도에 떨어진다고 이르셨으니, 어찌 선성(先聖)의 말씀을 의심하랴.
이러므로 십선(十善)을 닦으면 인천보(人天報)를 받거니와 그렇지 않고 한강 모래수의 삼독심(三毒心)이 뛰쳐나와서 놀아나면 거기에 응하여서 알맞은 탈을 스스로가 뒤집어쓰는 것이니, 알지어다, 어리석고 게으른 놈은 소나 말 따위로 태어나고, 미련하고 탐하는 놈은 돼지나 개 따위로 태어나고, 꾀있고 조바심 많은 놈은 쥐나 삵쾡이 따위로 태어나고, 음탕하고 모진 놈은 구렁이나 독사 따위로 태어나고, 사납고 억척스러운 놈은 호랑이나 이리 따위로 태어나고, 추잡하고 흐리멍덩한 놈은 구더기나 지렁이 따위로 태어나고, 쏠리고 붙이는 놈은 새 종류 따위로 태어나고, 들뜨고 허황한 놈은 물고기 종류 따위로 태어나는 것이 보통이라겠는데, 만약에 그 성품을 닦지 않고 한번 축생보라도 받게되면 다겁(多劫)을 통하여 서로가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두려움과 놀라움과 괴로움을 겪게 마련이니 그 참혹한 꼴을 무엇에다 비유인들 하겠는가. 뿐이랴! 같은 사람 가운데도 부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아니하고 믿지도 아니하면서 비방하는 자 따위는 말할 나위도 없겠지마는 나라와 겨레의 그늘을 모르는 배신자(背信者), 어버이와 스승의 은혜를 저버리는 배은자(背恩者) 따위는 지옥보를 크게 받으며, 베풀기를 싫어하고 받기만을 좋아하는 녀석, 이익만을 좇아서 의리(義理)를 짓밟는 녀석, 분수에 넘치는 허욕으로 말미암아 불평(不平)만을 일삼는 녀석, 시기와 질투로 하여금 헐뜯기를 좋아하는 녀석 따위는 아귀보를 받지 않는 다고 뉘라서 보증을 하겠는가! 이 법은 극히 미묘하여서 좋이 말로 드러낼 수 없으나 똑같은 공부를 짓되 슬기만을 닦고 복을 심지 아니하면 인간도에 태어났다손 치더라도 그 귀천(貴賤)의 차이가 심하며 악행(惡行)을 저지른대도 심천(深淺)의 정도에 따라 그 고뇌(苦惱)의 차이는 천만갈래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이러므로서 몸 밖을 향하여 의타적(依他的)인 모습놀이로 선행(善行)을 닦음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타사(他事)인 사도(邪道)이지 자사(自事)인 정도(正道)는 아니므로 인신(人身)을 받음이란 용이한 일이 아닌 것으로 보아두자. 예를 들면 경의 말씀대로 망식(妄識)이 까치집을 보고 궁궐같이 훌륭한 처소로 알아서 거기에 태어난 일도 있지 않느냐. 이렇듯이 정도(正道)를 닦음으로서만이 사람의 몸을 받음이 원칙이라 한다면 어찌 망령되이 외도(外道)나 사도(邪道)로 향할까 보냐. 모름지기 공손과 겸양의 마음으로 복과 총명을 아울러 닦아서 가져라. 알겠느냐!
그렇다면 현재의 사람들 중에서도 삼악보(三惡報)를 받을 자가 많지 않겠습니까?
내가 어찌 알겠느냐. 다만 부처님의 말씀따나 「사람의 몸을 받기란 백천만겁에 어렵느니라」시는 의취를 삼가이 받들되 모름지기 정혜(定慧)를 닦아서 육도(六道)를 면하는 것이 불자(佛子)의 책임이나, 만약 그렇지 못하는 경우에는 십선(十善)이라도 닦아서 인천보(人天報)라도 받는데 힘을 써라.
이 소식도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입니다. 그려
뫼는 뫼, 물은 물이니 부처는 무엇인고? 자씨궁중(慈氏宮中)에서 도솔천을 따로 찾으면 삼도(三途)지옥이 들먹인다.
莫說諸相是虛妄 막설제상시허망
春來春去也妙用 춘래춘거야묘용
一月當天千江月 일월당천천강월
千江月攝一月明 천강월섭일월명
모습이란 허망하다 아예그리 말치마소
봄이오고 봄이감이 이거묘한 씀인것을
달이둥실 뜨고보니 일천강에 달이러니
천강달은 하나달을 걷어잡고 밝더구나
第六(제육) 正信希有分(정신희유분)
第六(제육) 正信希有分(정신희유분)
【본문】 須菩提(수보리)가 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이시여 頗有衆生(파유중생)이 得聞如是言說章句(득문여시언설장구)하고 生實信不(생실신부)니까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시되 莫作是說(막작시설)하라 如來滅後五百歲(여래멸후오백세)에 有持戒修福者(유지계수복자)하여 於此章句(어차장구)에 能生信心(능생신심)하여 以此爲實(이차위실)하면 當知是人(당지시인)은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에 而種善根(이종선근)이라 已於無量千萬佛所(이어무량천만불소)에 種諸善根(종제선근)하여 聞是章句(문시장구)하고 乃至一念(내지일념) 生淨信者(생정신자)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如來(여래) 悉知悉見(실지실견) 是諸衆生(시제중생)이 得如是無量福德(득여시무량복덕)이니 何以故(하이고)오 是諸衆生(시제중생)은 無復(무부) 我相(아상) 人相(인상) 衆生相(중생상) 壽者相(수자상)이며 無法相(무법상)이며 亦無非法相(역무비법상)이니라 何以故(하이고)오 是諸衆生(시제중생)이 若心取相(약심취상)이면 卽爲着 我 人 衆生 壽者(즉위착 아 인 중생 수자)며 若取法相(약취법상)이라도 卽着 我 人 衆生 壽者(즉착 아 인 중생 수자)니 何以故(하이고)오 若取非法相(약취비법상)인데는 卽着 我 人 衆生 壽者(즉착 아 인 중생 수자)니라 是故(시고)로 不應取法(불응취법)이며 不應取非法(불응취비법)이니 以是義故(이시의고)로 如來常設(여래상설)하시되 汝等比丘(여등비구)는 知我說法(지아설법)이 如筏喩者(여벌유자)니 法相應捨(법상응사)어든 何況非法(하황비법)이리요
제육 바로 믿기 드문 분
【번역】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시되 「세존이시여, 자못 중생이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실다운 믿음을 내겠아오리까?」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고하시되 「이런 말을 하지 마라. 여래가 멸한 뒤, 뒤 오백세에라도 계를 갖고 복을 닦는 자가 있어서 이 장구에 능히 믿는 마음을 내고 이로써 실다움을 삼으리니 마땅히 알지어다. 이 사람은 한 부처나 두 부처나 셋․넷․다섯 부처님에게만 선근을 심었음이 아니라 이미 무량한 천 만 부처님네께 모든 선근을 심은바 이므로 이 장구를 들으면 이에 한 생각이라도 깨끗한 믿음을 낼 것일세. 수보리야, 여래께서는 다 아시고 다 보시나니, 이 모든 중생은 이러히 무량한 복덕을 얻느니라.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이 모든 중생은 다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음이며, 법 모습도 없고 또 아닌 법 모습도 없음이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이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모습을 취함인즉 곧 아․인․중생․수자에게 붙임이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법 모습을 취할지라도 곧 아․인․중생․수자에 붙임이니라. 이러한 고로 응당 법을 취하지 말 것이며 응당 아닌 법도 취하지 말지니, 이러한 뜻인고로 여래가 항상 말씀하시되 너희들 비구는 나의 말하는 법을 뗏목의 비유와 같이 알면 법도 오히려 응당 버리려든 어찌 하물며 아닌 법일까 보냐」
【강송】장로는 세존이 가신 뒤의 중생을 걱정하시고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자못 중생이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실다운 믿음을 내겠습니까」여쭈셨다. 이 법은 심히 깊어서 믿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렵기 때문에 지혜(智慧)가 밝지 못한 말세(末世) 중생이 어떻게 믿고 들어오겠습니까 하시는 물으심이시다. 우리의 분(分)으로서는 당연한 물으심이라 하겠다. 부처님은 장로에게 고하시되 「이런 말을 하지 마라. 여래가 멸한 뒤, 뒤 오백세에라도 계를 갖고 복을 닦는 자가 있어서 이 장구에 능히 믿는 마음을 내고 이로써 실다움을 삼느니」하시고 말씀을 계속하신다. 실로 그렇다. 사람이란 본래로 끝이 없고 한이 없는 청정(淸淨) 자성(自性)을 간직하고 있는 만큼 설혹 삼독(三毒)의 먹구름이 덮혔다 손치더라도 그 두껍고 얇음에 따라 알면서도 모르면서도 선근(善根)은 심기어지는 모양이다. 이 선근(善根)의 깊고 얕음에 따라 그 슬기의 높고 낮음도 나투게 마련이니, 갓난 어린아이로부터 늙고 병들어 죽은 다음 불구덩이가 아니면 흙구덩이를 향하여서 달릴 때까지의 한낱 가죽주머니인 자신(自身)에 대하여 어찌 제 나름대로의 무상(無常)을 느끼지 않겠는가. 이러히 무상(無常)을 느낌에 따라 한낱 가죽주머니로서의 색신(色身)은 환화(幻化) 공신(空身)을 끌고 다니는 놈은 바로 무엇이냐는 의심덩이가 크게 쏟아져 나올 것이다. 쏟아져 나오는 이 의심덩이가 돈독할 때 바야흐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여 들어서 믿고 그 말씀대로 행을 닦으며 갈 것이니, 이 소식처에서 무주무상(無住無相)의 참된 뜻을 실다이 증득(證得)하는 것이 법(法)의 순서라 하지 않겠는가.
무상(無相)은 허현(虛玄) 묘도(妙道)를 뜻함이요 무주(無住)는 무착(無着) 진종(眞宗)을 이름이니 만약 이 진종(眞宗) 묘도(妙道)로 하여금 실다움을 삼을진댄 바로 이 진종(眞宗) 묘도(妙道)는 엄연한 실존(實存)으로서 향상사(向上事)이니 삼신(三身)은 향하사(向下事)에 속하여서 수기시현(隨機示現)하는 권도(權道)로 보아야겠다. 그러나 경(經)의 말씀을 따라서 법신(法身)으로 하여금 실다움을 삼음일진대 보(報)․화(化) 이신(二身)은 바로 권도(權道)임을 이에 밝혀두되 참고로 고인(古人)의 말씀을 덧붙여보자. 조주(趙州)는 이르시되 「금불(金佛)은 화로를 제도하지 못하고 목불(木佛)은 불을 제도하지 못하고 니불(泥佛)은 물을 제도하지 못하거니와 진불(眞佛)은 안 속에 앉았느니라」하셨으니 진불(眞佛)이 어찌 무위향상인(無位向上人)이 아니며 삼불(三佛)이 어찌 수기(隨機) 삼신(三身)이 아니겠는가. 임제(臨濟)는 이르시되 「정묘국토중(淨妙國土中)에 들어서 무차별의(無差別衣)를 걸치고 보신불(報身佛)을 말하며 해탈국토중(解脫國土中)에 들어서 해탈의(解脫衣)를 걸치고 화신불(化身佛)을 말하리라」이르셨는데 대혜(大惠)는 이 말을 꼬집어 이르시되 「임제(臨濟)의 늙은 배짱을 아느냐.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여, 에익! 도깨비의 요사스런 정기로다. 삼안국중(三眼國中)에 맞닿았으니 무위진인(無位眞人)을 크게 웃김이로다」 하셨으니 이것은 삼신(三身) 밖의 일신(一身)은 향상사(向上事)로서 실다움이요 일신(一身) 밖의 삼신(三身)은 향하사(向下事)로서 권도임을 밝히심 이라겠다. 그러나 그 말귀 밖에 또한 뜻이 있으니 무엇이냐. 이것은 진종묘도(眞宗妙道)인 法身이 의젓함으로 말미암아서 보신(報身)․화신(化身)의 몸매는 기틀에 응하여 나투는 까닭으로 따라서 금불(金佛)․목불․니불(泥佛)의 모습은 보화신(報化身)중에서 오는 것이니 이에 법신(法身)은 실다움이요 보화신(報化身)은 권도임을 분명하게 들어내면서 되돌아 소리와 메아리는 한 골짝 안의 살림이요 전기와 불은 한 줄 위의 놀음임을 뜻하는 소식이라겠다. 이러므로 대승(大乘)인 무상계(無相戒)를 받아 가져서 망령되이 모든 모습을 취하지 않고 생사업(生死業)을 짓지 않으면 그 마음은 항상 허현무착(虛玄無着)하여서 여래 땅에 들게 마련으로 이러한 사람은 宿世에 있어서 일겁(一劫), 이겁(二劫), 삼(三) 사(四) 오겁(五劫)을 통하여 일불(一佛), 이불(二佛) 삼(三) 사(四) 오불(五佛)뿐 아니라 무량(無量) 천만불소(千萬佛所)에 선근(善根)을 심은 공덕으로 이 장구(章句)를 들으면 한 생각에 깨끗한 믿음을 낼 것이라 시는 말씀이시니 어찌 오백세(五百歲) 뒤의 일을 지나치게 걱정할까보냐.
선근(善根)이란 부처의 씨를 뜻함이다. 부처의 씨란 무엇을 이름인가? 이렇다. 미음을 보는 한 법이 있을 따름인데, 그 방편(方便)에 있어서는 능히 삼독(三毒)을 굴려 삼취정계(三聚淨戒)로 바꾸어 놓고 능히 육적(六賊)을 옮겨 대바라밀(大波羅蜜)을 삼음이니, 그 행에 따라서는 자성(自性) 삼불(三佛)을 통하여 모든 불보살의 교법(敎法)을 받들되 선지식(善知識)과 부모(父母)의 존장(尊長)과 현우(賢友)의 뜻을 거슬리지 말며 자비심(慈悲心)으로 불안(不安)과 고독(孤獨)과 빈한(貧寒)과 병고(病苦)를 돌보고 평등심(平等心)으로 살해(殺害)를 삼가되 풀이나 나무일지라도 소용 밖에 마구 베지 않음을 뜻함으로 우선 알아두자. 이렇듯이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약으로 삼아서 사상(四相) 독충(毒虫)을 쓸어내면 한 포기의 보리수에는 가지가지마다에 복덕화(福德花)가 몽실몽실 피어날 것이요 줄기줄기마다에 공덕과(功德果)가 주렁주렁 달릴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인법(人法)이요, 이것이 바로 불법(佛法)이다. 이것이 바로 세간법(世間法)이요, 이것이 바로 출세간법(出世間法)이다. 이것이 바로 무진한 복덕법(福德法)이요, 이것이 바로 무량한 공덕법(公德法)이다. 모든 부처님네가 증명하시는 바도 바로 이 법(法)이 있을 따름이요, 모든 사람네들이 믿는 바도 또한 이 법(法)이 있을 따름이니, 이러므로 하여서 부처님이 이르시되 「여래가 다 알고 다 보시나니 이 모든 중생은 이러히 무량한 복덕을 얻느니라」신 것이시다. 참으로 팥을 심으면 팥이 나고 콩을 심으면 콩이 난다는 속언(俗言)에 실감(實感)이 생길 뿐인데 여기에서 한 예를 들기로 하자. 이른바 세상 사람들이 보살의 화신(化身)이라고까지 존경을 하는 육조(六祖) 혜능대사(慧能大師)의 이야기다. 득도전(得道前)의 대사(大師)는 편모시하(片母侍下)에 그날 그날을 겨우 살아가는 한낱 몽두리 총각이었다. 그러므로 무식(無識)과 빈한(貧寒)과 고독(孤獨)의 독점자(獨占者)로서 상민(常民)의 취급을 달게 받는 나무꾼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 무슨 곡절인가. 하루는 땔나무를 객점(客店)에서 팔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어떤 사람의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깨친 바 있음이 인연으로 오조회상(五祖會上)에서 방아찍이인 행자(行者)로 팔개월(八個月)을 보냈다. 물론 행자(行者)이기 때문이겠지마는 그 동안에 있어서 단 한번도 강원(講院) 출입(出入)을 한 바도 없을 뿐 아니라 설법(說法)을 들은 바도 없었다. 표면으로 보아서 절일을 보고 절밥을 먹었을지언정 절과는 먼 인연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는 불우한 청년 혜능(慧能)에게 법(法)을 전하셨고 불우한 청년 혜능(慧能)은 법(法)을 받았으니 삼십미만(三十未滿)의 불우한 청년 慧能은 천여명의 동선사(東禪寺) 학승(學僧)중에서도 신수(神秀)와 같은 준족(俊足)을 물리치시고 석가모니불의 정통(正統)을 이어 받음으로 하여금 동방(東方)에 법고(法鼓)를 크게 울렸으니 숙세(宿世)에 숨기어진 선근(善根)의 소치(所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실로 이 법은 시공간(時空間)을 여윔에 따라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의 삼세(三世)를 뛰어 넘었음으로 말미암아 어느 생(生)이라고 하여서 따로 설정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므로 환상계(幻像界)의 출몰(出沒)에 휘둘리지 말고 선근(善根)을 심으면 선인(善因)을 낳을 것이요, 선인(善因)을 낳으면 선연(善緣)을 이룰 것이요, 선연(善緣)을 이루면 선과(善果)는 가지마다 맺어지는 것이니 일인(一人)도 아니오 이인(二人)도 아니오 삼(三) 사(四) 오인(午人)으로부터 무수한 불자(佛子)가 쏟아져 나올 것은 사실이 아니겠는가. 이렇듯이 청정신자(淸淨信者)들은 아상(我相)을 여윔으로써 것은 빔과 다르지 않고 빔은 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느낌․새김․거님과 알이도 그 당처(當處)가 비어서 고요 적적함을 알기 때문에 마음은 항상 휘영청이 밝아서 번거롭지 않으니 천하(天下)가 태평(太平)일 것이며, 인상(人相)을 여윔으로써 사대(四大)가 본래로 허망하여 실답지 않으니 마침내 흙과 물과 불과 바람으로 돌아가는 줄을 알았기 때문에 시시털털한 오욕락(五欲樂) 따위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요, 중생상(衆生相)을 여윔으로써 생멸심(生滅心)이 본래로부터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생사(生死) 거래(去來)에 두려움이 없을 것이요, 수자상(壽者相)을 여윔으로써 나라 일컬으는 몸이 허망하여 실답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끝이없는 허공으로 더불어서 옳고 그르고 굽고 곧음이 없으매, 뫼가 높고 물이 낮음은 나의 손발이요, 바람이 불고 구름이 감돎은 나의 나들이요,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귐은 나의 놀음인지라, 따로 상대(相對)할 삼계(三界)를 다시 어디에서 찾아보겠는가 말이다. 이렇듯이 사상(四相)을 이미 여의면 곧 법눈이 밝고 투철하여 미(迷)와 오(悟)에 붙이지 아니하고 이변(二邊) 삼제(三際)도 여윔으로써 스스로의 참 마음인 진종묘도(眞宗妙道)를 제 스스로가 깨쳐서 제 스스로가 증득하는 것이니 비로소 진로(塵勞) 망념(妄念)은 길이 여의고 스스로 가없는 복덕을 얻게 마련인 것이다. 까닭에 법상(法相)도 비법상(非法相)도 취하지 아니하여서 항상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 법(法)을 뗏목으로 비유하심과 같이 행할 것이 아니겠는가. 왜냐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가 다못 도(道)에 드는 는 방편이기 때문이니 일단 방편에 의하여 도(道)에 들었다면 그 방편은 마땅히 버려야 옳은 것이다. 그러니 방편인 법(法)도 쾌히 버리는데 어찌 항차 비법(非法)인 아닌 법을 버리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시다. 이 소식에서 온갖 것을 다 놓으면 되돌아 온갖 것은 모두 내 것이 되는 소식이니 이러히 무상도(無上道)는 전하여지고 행하여져서 도(道)가 이땅에 끊어지지 않고 펴여짐을 뜻하심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실로 여래의 이량(理量)이 원래로 원만(圓滿)하여서 공적(空寂)하기 때문에 신상(身相)을 두었고 여래의 성지(性智)가 원래로 광대(廣大)하여서 영통(靈通)하기 때문에 심상(心相)을 두었으나 중생들은 무명(無明)의 가리움으로 말미암아 사대육신(四大肉身)을 자신상(自身像)으로, 육진연려(六塵緣慮)를 자심상(自心相)으로 오인착각(誤認錯覺)하는데서 원만한 체(體)와 영통한 용(用)을 자제로이 굴리지 못하고 갖추어진 공덕을 물리치면서 재앙만을 거두어들이는 셈이니 이 자리에서 회광반조(回光返照)하라. 그리하여 아(我)와 법(法)을 아울러 잊어버리면 비로소 상견(常見)과 단견(斷見)도 여의면서 일미(一味)가 방현(方現)하는 최상승(最上乘) 도리에 높이 앉으리니, 바야흐로 여래의 공덕을 찬양하면서 같이 가리라. 이 소식처인지라,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구나. 이 법이 있음이냐? 이 법이 없음이냐? 일심(一心)이 열리면 삼지(三智)로 벌어진다더라.
여기에서 선근(善根)을 심음으로써 신심(信心)이 난다는 말씀을 보류하고 특히 과학만능(科學萬能)을 외치고 철학(哲學)을 도외시하는 인사(人士)들을 위하여 그 잘못된 사고방식을 올바로 잡으면서 여래문중(如來門中)으로 같이 들어가는 길은 없슬까를 흝어 보자. 나는 이 글을 쓰는데 앞서 양해를 구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고 우선 과학(科學)을 색상학(色象學)으로, 철학(哲學)을 심성학(心性學)으로 부르는 것이다. 왜 그러냐면 과학(科學)이란 대개가 철학(哲學)을 제외한 모든 학문(學問)이라 하나 주로 자연(自然)의 현상(現像)에만 치우치는 결함이 있고 철학(哲學)은 인생(人生)의 의의(意義)와 우주(宇宙)의 원리(原理)를 캐어내는 학문(學問)이라 하나 주로 형이상학(形而上學)쪽으로 흔히 쏠리는 모순이 있음으로 하여금 어딘가에 자구(字句)의 개념(槪念)에 대하여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실로 색상학(色象學)과 심성학(心性學)은 표리(表裏)가 일치(一致)한대로 한 항아리 속에 피는 꽃이요 맺어지는 열매련마는 이 학문(學問)을 주무르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한쪽에만 치우치는 고질적(痼疾的)인 관념(觀念)의 병폐 때문에 거리가 없는데 거리를 지어내고 틈이 없는데 틈을 그어놓고 마는 것은 큰 유감이라 하겠다. 색상학(色象學)은 심성(心性)의 씨가 뿌려짐으로써만이 색상(色象)으로서의 꽃을 피우고 심성학(心性學)은 색상(色象)의 가지가 벌어짐으로써만이 심성(心性)의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것이건마는 사람은 이 의취를 모르기 때문에 몸뚱이는 하나인데 양두사(兩頭蛇)가 되어서 본래가 일치(一致)인 그 당처(當處)에 양극(兩極)을 이루고 있다.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심성학(心性學)은 슬기눈을 바탕으로 하여서 누리의 도리(道理)를 밝혀내고 아울러 온갖 법(法)을 승화(昇化)하고 동류(同流)시키려는데 그 뜻이 있는 무위법(無爲法)이지마는 색상학(色象學)은 살눈만을 씀이로 하여서 거래(去來)의 환상(幻像)을 끌어잡고 조절(調節)하며 이용(利用)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유위법(有爲法)이라겠다. 무위법(無爲法)은 자연지(自然智)로서 한정이 없는 무루법(無漏法)이니 근본적(根本的)인 실상(實相)이라겠지마는 유위법(有爲法)은 조작혜(造作慧)로서 한정이 있는 유루법(有漏法)이니 임시적(臨時的)인 환상(幻相)이라 하겠다. 모습이 없는 실상(實相)은 참이기 때문에 만상(萬像)을 낳아 놓치마는 모습이 있는 환상(幻相)은 거짓이기 때문에 당처(當處)로 되돌아간다. 이러므로 하여서 색상학(色象學)은 그 도리(道理)와 그 사실(事實)을, 그 당위(當爲)와 그 유위(有爲)를, 그 실상(實相)과 그 환상(幻相)을 살눈에 비치는 그대로 단정을 하여서 양극(兩極)으로 나누어 놓기를 서슴치 않음으로 말미암아 일치(一致)가 안된다고 이르지마는 심성학(心性學)은 그렇지 않다. 유인(有因)은 유(有)를 나투는 것이니 본래 유(有)를 세우지 않으면 무(無)는 어디로 쫓아오겠는가. 이렇듯이 유무(有無)가 상인(相因)이 됨으로 말미암아 온갖 법(法)이 이루어짐으로 하여금 유위(有爲)도 취하지 아니하고 또한 무위(無爲)도 취하지 아니함이 이 참 무위법(無爲法)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 도리(道理)와 사실(事實)도, 진상(眞相)과 환상(幻相)도 양극(兩極)이 다른 듯하나 되돌아서 일치(一致)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취를 모르는 색상학(色象學)은 근세(近世)에 접어들면서부터 더욱 심성학(心性學)에 대한 무관심(無關心)의 자기 모순을 안은 채 비대(肥大)하여 세간(世間)을 독주(獨走)함은 사실이기 때문에 여기에 따른 위험성도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선 전쟁무기는 그만둘지라도 원자분야(原子分野)만에 있어서 이백사십여종(二百四十餘種)에 달하는 분석성공(分析成功)에 대하여 개가(凱歌)를 올림에 따라 「컴퓨터」와 같은 기능(機能)은 인간능력(人間能力)의 수백배(數百倍)를 능가할 뿐 아니라 그 기계공학은 또한 천분의 일 밀리미터 이하의 오차(誤差)인 정밀도(精密度)로 달세계까지 정복한 일대장거(一大壯擧)였으니 크게 찬양할 일이라 하겠지마는 그러나 앞으로의 대발전(大發展)에 따른 결과적인 희망(希望)보다도 여기에서 빚어지는 부작용(副作用)의 비애(悲哀)가 더욱 심각하게 느껴진다. 왜냐면 절대성(絶對性)인 청정자성(淸淨自性)이 선용(善用)을 한다면 실로 인류사회의 복덕(福德)에 도움이 되겠지마는 만약 절대성(絶對性)인 오염망식(汚染妄識)이 악용(惡用)을 하는 경우엔 오로지 인류사회의 재앙(災殃)을 구하기에 앞서 비극(悲劇)을 가져올 것이니 참으로 인간(人間)이란 사리(事理)가 공전(共轉)하는 소식을 알아야겠다. 이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사고방식은 상대적으로 나뉘면서 깜냥대로인 주의(主義) 주장(主張)도 달라지게 마련이니 결과라서 생성(生成)된지 오십억년 밖에 안된다는 이 땅덩이의 존립여하(存立如何)에 대한 의심마저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애오라지 사람을 위한 당초의 이기(利器)는 경우에 따라 사람의 해기(害器)로 돌변하게될 기우(杞憂)가 아닌 우려(憂慮)가 깊어지니 과학만능(科學萬能)이란 말귀 밑에 인간부재론(人間不在論)도 신사설(神死說)도 뛰쳐나오지 않겠는가. 이럴수록 색상(色象)의 머리는 끝이 없이 쳐들리는 반면에 심성(心性)의 코는 쥐구멍이라도 찾는다 할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 뿌리인 나무에 한 가지의 꽃과 열매인걸 어찌 이곳에 우열(優劣)이 용납되겠는가. 아 인식착오에서 오는 소견이므로 반성(反省)을 기다릴 뿐이다. 색상(色象)은 심성(心性)이 있음으로서만이 이 색상(色象)으로서의 색상(色象)인 그 자체가 바로 심성(心性)의 묘용(妙用)인 줄을 깨쳐서 알 때 비로소 여래문중(如來門中)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能破色象馬月宮(능파색상마월궁)이나 未出心性牛角胎(미출심성우각태)로다. 번역하여 「색상말은 달나라를 능히 부수었으나 심성소의 뿔속을 뛰쳐나지 못하였도다」심성학(心性學)이여! 너는 색상학(色象學)을 살림으로 삼계(三界)를 낳아놓고 만법(萬法)을 굴리니 이 심성(心性)의 노래냐, 이 색상(色象)의 춤이냐. 아서라! 여래문중(如來門中)의 풍광(風光) 속에 어찌 너와 나의 분별이 따로 있겠는가. 다만 보이는바 대로의 차이로 이러쿵저러쿵 할 따름이니, 뒤바뀐 세간법(世間法)을 바로 놓으라.
이 소식에서 삼신불(三身佛)이 나오신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니 노새 등에 술을 싣고 관동팔경(關東八景) 구경가세.
性智常明無邊界 성지상명무변계
隨緣風雨又作雪 수연풍우우작설
時來江南烏啼處 시래강남오제처
無心道人雪水來 무심도인설수래
성품슬기 항상발아 가이없는 세계러니
인연따른 바람비는 또한눈도 짓더구나
때가오면 강남에도 새가날며 지저귈걸
삼월이라 봄바람에 구름타고 님오시네
第七(제칠) 無得無說分(무득무설분)
第七(제칠) 無得無說分(무득무설분)
【본문】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아 如來有所說法耶(여래유소설법야)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시되 如我解佛所說義(여아해불소설의)로는 無有定法(무유정법)을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며 亦無有定法(역무유정법)을 如來可說(여래가설)이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所說法(여래소설법)은 皆不可取(개불가취)며 不可說(불가설)이며 非法(비법)이며 非非法(비비법)일니이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一切賢聖(일체현성)이 皆以無爲法(개이무위법)으로 而有差別(이유차별)이시니이다
제칠 얻음도 말함도 없음 분
【번역】「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말한 바 법이 있느냐?」수보리 말씀드리되 「제가 부처님의 말씀하신 바 뜻을 아옴 같아서는 정한 법이 있지 아니함을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며 또한 정한 법이 있지 않음을 좋이 여래가 말씀하심 이니다.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습니까?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 법은 다 좋이 취하지도 못하며 좋이 말하지도 못하며 아닌 법이며 아닌 법도 아님일세 어떠한 바이겠습니까? 온갖 성현은 다 하염없는 법으로써 차별이 있음 이니다.」
【강송】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되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님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여래께서 설(說)하신 그 뜻을 아옴 같아서는 다만 마음에 아소(我所)가 없으면 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지마는 그 연(緣)을 쫓아서 대병투약식(對病投藥式)으로 설(說)하신 것이니 어찌 정법(定法)이 있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을 하겠는가! 설(說)은 설(說)이로되 설(說)이 아님으로써 설(說)이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다만 중생의 근성(根性)에 맞추어서 갖가지의 방편(方便)으로 화도(化度)를 하셨지마는 모든 집착(執着)을 여의셨기 때문에 설(說)은 설(說)이로되 어찌 정설(定說)이 있는 설(說)이라 일컬으겠는가! 이러므로서 다시 비유를 하여서 말하자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라도 여윈 여래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인 가리사(家裡事)라면, 설(說)은 설(說)까지라도 여윈 여래의 화장세계(華藏世界)인 도중사(途中事)라고 하여두자.
이렇듯이 여래께서는 이승(二乘)을 설하시고 대승(大乘)을 설하시되 연(緣)에 따라서 권도(權道)로서, 유상(有相)을 설하시고 무상(無相)을 설하시되 기(機)를 좇아서 방편(方便)으로 설하셨으니 원화(圓話)가 자재(自在)함이 마침내 일변(一邊)에 치우치지 않음으로 하여서 이른바 좋이 취할 수도 없으며 좋이 설할 수도 없다고 하겠다. 이러므로 부처님의 설법은 옳은 법이라 일러도 또한 옳지 않으며 그른 법이라 일러도 또한 그르지 않은 것이니 만약 그른 법으로 정(定)할지라도 언덕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뗏목을 버려야 하므로 때에 있어서는 지리(至理) 일언(一言)이 범부(凡夫)를 고쳐서 성현(聖賢)을 이룬다 이르고 때에 있어서는 삼승(三乘) 십이분(十二分)이 다 이 무슨 똥막대기 같은 소리냐고 이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처님의 설법은 물위에 뜬 갈대배와 같이 부딪치면 굴려서 옮기듯이 무정법(無定法)을 좋이 취(取)하며 무정법(無定法)을 좋이 설(說)하시니 만약 정설(定說)이 있을진댄 어느 것이 유(有)가 아니며 만약 정설(定說)이 없을진댄 어느 것이 무(無)가 아니리요 이미 유(有)․무법(無法)이 없을진댄 필경엔 이 무엇인가? 법(法)을 이르고 비법(非法)을 이름이 다 옳지 않을진댄 필경에 이 무엇인가? 이래도 얻지 못하고 저래도 얻지 못하니 확연히 대허공(大虛空)이라, 새가 날아간 자취도 없구나. 알겠구나! 몸을 한번 굴리면 동 서 남 북이 일천지(一天地)인걸! 정법(定法)이 있다고 이름하여도, 정법(定法)이 없다고 이름하여도 다 옳지 않으니 왜 그런가? 이견(二見)은 다 불본심(佛本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래께서 설(說)하신 바 문자(文字) 장구(章句)에 붙이지 말고 망령되이 지견(知見)풀이에 얽히지 아니하여서 무상리(無相理)를 깨쳐 알면 어찌 사구게(四句偈)를 향하여서 황면노자(黃面老子)를 뵈오려 하겠는가. 만약 이곳에 알찬 녀석이 있어서 참으로 불본심(佛本心)을 알진댄 옳은 법이라 일러도 방해롭지 않고 그른 법이라 일러도 방해롭지 않으리라.
온갖 현성(賢聖)은 다 무위법(無爲法)으로 좇아서 차별이 있다는 말씀이시다. 실(實)로 그렇다. 무위(無爲)인 평등상(平等相)의 「바탕」이 없는데 유위(有爲)인 차별상(差別相)의 「씀이」는 있을 수 없다. 차별상(差別相)은 무위법(無爲法)을 「바탕」으로 하여서 그 활개를 치고 평등상(平等相)은 유위법(有爲法)을 「씀」으로 하여서 그 멋을 부리니, 무위(無爲)는 유위(有爲)로 더불어서 이신동체(異身同體)라면 차별(差別)은 평등(平等)으로 더불어서 동체이신(同體異身)이라 이르겠다. 고인(古人)도 이르시기를 「일미(一味) 무위법(無爲法)이 성문(聲聞)에 있은 즉 사체(四諦)요, 연각(緣覺)에 있은 즉 인연(因緣)이요, 보살(菩薩)에 있은 즉 육도(六度)이니 육도(六度)․인연(因緣)․사체(四諦)가 낱낱이 취하지도 못하고 좋이 말하지도 못한다」하셨고, 또 이르시기를 「하염없는 법은 머무름이 없다」하셨으니 머무름이 없음은 곧 이 모습이 없음이요, 모습이 없음은 곧 이 생김이 없음이요, 생김이 없음은 곧 이 꺼짐이 없음이니 탕연(蕩然)히 공적(空寂)하며 조용(照用)이 평등(平等)하고 감각(鑑覺)에 거치적거리지 않음이 참 이 해탈(解脫)인 불성(佛性)인지라, 이 바로 각성(覺性)이요, 이 바로 관조(觀照)요, 이 바로 지혜(智慧)요, 이 바로 반야바라밀인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바른 사람이 삿된 법을 말하면 삿된 법은 다 바른 데로 돌아가고 삿된 사람이 바른 법을 말하면 바른 법은 다 삿된 데로 돌아가는 것이니, 참으로 일미(一味) 무위법(無爲法)이란 능히 바르고 능히 삿되어서 가지에 높낮음이 있다고는 하겠으나 춘색(春色)은 일반화(一般花)라는 소식이라 하겠다. 몇 가지 문제를 건다.
너에게 묻노라. 허공 중에 이루어진 욕계 색계 무색계는 어디로부터 왔느냐?
조물주(造物主)가 지어낸 것으로 봅니다.
아니다. 조물주(造物主)가 있으면 피조물자(被造物者)도 있게 마련이니 그렇다면 법은 둘이 아니냐. 단단히 들어라. 조물주(造物主)는 곧 피조물자(被造物者)요 피조물자(被造物者)는 곧 조물주(造物主)로서 법은 하나이니 절대성(絶對性)인 체성면(體性面)이 있음으로써 상대성(相對性)인 용상면(用相面)은 살림을 꾸려가고 상대성(相對性)인 용상면(用相面)이 살림을 꾸려감으로써 체성면(體性面)은 무궁 무진한 조화(造化)를 이름인지라, 원각산에 한 포기의 나무가 났으니 하늘땅이 나뉘기 앞서 꽃이 핀 소식이로다. 온갖 법은 네가 뿌린 씨이니 지견(知見)으로 증명하려지 말고 그 바탕을 직접 보라.
무슨 까닭으로 묵중한 해․달․별과 땅덩이가 안 떨어지고 허공 중에서 올바로 떠도는가?
다른 천체(天體)와의 인력(引力) 관계입니다.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인력(引力)관계란 말이냐. 이 당처(當處)는 무위법(無爲法)에서 유위법(有爲法)이 굴리이는 소식처(消息處)이니 묵중한 땅덩이들이 허공 중에 떠도는 것은 인력(引力)관계의 앞소식임을 너는 모르느냐. 세존께서는 이 문제의 해답을 이 경에서도 밝히셨으니 남의 슬기를 빌리지 말고 너의 자연지(自然智)로 깨쳐서 알뜰한 살림을 꾸리되 벽에 그리어진 복숭아가 떨어질까 염려 말라.
무슨 까닭으로 풀과 나무도 잘리지마는 돌과 쇳덩이도 끊기느냐?
약하기 때문에 굳센 놈에게 잘리고 끊깁니다.
아니다. 풀․나무․돌덩이․쇳덩이가 잘리고 끊기는 것은 굳세고 약한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하지 말라. 다만 풀․나무․돌덩이․쇳덩이 따위의 앞소식인 그 당처(當處)가 빈성품이요, 따라 굳세고 약한 따위의 앞소식인 그 당처(當處)도 또한 빈성품이기 때문에 법에 좇아서 잘리고 끊기는 것이다. 이러므로 강약(强弱) 전(前)의 소식인 무위법(無爲法)에 강약(强弱)인 유위법(有爲法)이 따로 없으니 구리새가 머리를 저의며 오는 소식부터 알아라.
무슨 까닭으로 숱한 세계 인류 중에서 꼭 같은 사람이 없느냐?
불균등한 조건 속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아니다. 너는 뒤바뀐 소견만을 고집하는구나. 단단히 들어라. 유위법(有爲法)인 차별상(差別相)은 무위법(無爲法)인 평등선(平等線) 위에서 아무 거슬림도 없이 제 멋대로 법에 따라 이루어지는 씀이, 곧 묘유(妙有)인 차별상이다. 만약 여기에서 어떠한 조건과 제약이 필요하다면 모든 법은 성립도중(成立途中)에서 어떤 명령을 쫓기 위하여 구름은 가다가 머물고 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바람은 불다가 그치고 꽃은 피다가 쉴 터이니, 절대성이요 무위법인 평등선 위의 묘유(妙有)인 차별상은 아니고 다만 차별을 위한 차별로서 충돌만을 전제(前提)로 한 소식이니 그 반응(反應)은 세기(世紀)의 파멸(破滅)만을 가져올 뿐이다. 예를 들면 낙동강의 숱한 모래알 중에서 만약 꼭 같은 것이 한 알만이라도 있다면 이것은 제멋대로인 인연법칙의 소산물(所産物)은 아니므로 벌써 평등선을 여윈 차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인류가 제 아무리 많다기로 서니 자재(自在)한 절대 평등선 위에서 누구의 명령도 조작도 아닌 그 마음 씀이의 멋대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어찌 같은 몸집이나 얼굴을 나투겠는가. 너는 절대 평등선인 무위법(無爲法) 위에서 유위법(有爲法)인 차별상의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지며 삼천대계(三千大界)는 무궁무진한 조화의 상징적인 실존(實存)임을 모르고 차별상만에 주저앉아서 헛되이 차별상만을 탓하고 헤매 이는가. 이러므로 꼭 같은 모습이 없는 것은 절대 평등선 위에서 피고 맺어지는 이름 뿐인 차별의 꽃이요 열매임을 알게 될 때, 비로소 구멍 없는 피리소리의 높낮음도 듣게 되리라.
무슨 까닭으로 사람들은 숙세(宿世)에 나투었던 색신(色身)의 모습을 모르느냐?
사람에게는 잊어버리는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다. 성품에 어찌 잊어버리고 되찾는 법이 있다는 말이냐. 슬기란 낳음이 아니나 식(識) 곧 알이로써 낳으니 망심(妄心)인 명(名) 곧 이름이요, 성품이란 낳음이 아니나 식(識) 곧 알이로써 낳으니 환질(幻質)인 색(色) 곧 빛깔이라 이른다. 이 이름과 빛깔이 태(胎)에 들어서 육근(六根)을 갖추고 세간에 남으로부터 유위법(有爲法)에 앉아서 온갖 경계를 거느리는 것이 중생일진댄 얼음에 새긴 글씨는 얼음과 더불어서 녹듯이 마침내 육근(六根)이 흩어짐에 따라 육식(六識)도 사라지는 것이니 어찌 전세사(前世事)를 알까보냐. 너는 마음에 얻는 바가 없으면 돌말이 십만리(十萬里)를 뛰어가는 줄로 알라.
무슨 까닭으로 늙으면 벽에 똥칠을 하느냐?
마음이 쇠약하여서 흐리기 때문입니다.
아니다. 본래로 마음이 쇠약하여지고 흐리어지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 중생심(衆生心)은 앞 경계를 거느리고 뒷 경계를 따르는 망령된 알이의 농간이 전부이기 때문에 뚜렷이 밝은 본래의 영지(靈智)는 숨기이지가 오랜 것이다. 이렇듯이 온갖 유위법(有爲法)에 휘둘리는 육근(六根)이 낡음에 따라 육식(六識)도 흐리게 마련이니 어찌 벽에 똥칠인들 않겠는가. 마음에 얻는 바가 있으면 나무닭이 울지 못하고 도깨비 굴에 떨어지느니라.
이 소식에 알이는 숨을 거두운다.
금강산(金剛山) 일만이천봉(一萬二千峯)에는 골짝마다 암자이더라.
不去不來碧空裂 불거불래벽공열
非心非佛一圓明 비심비불일원명
本來無法無說處 본래무법무설처
東西南北一天地 동서남북일천지
가고옴이 없음일새 푸른허공 찢어지고
마음부처 아니러니 하나뚜렷 밝았구나
본래법도 없으면서 또한말도 없는곳에
동과서와 남과북은 하나뿐인 천지러라
第八(제팔) 依法出生分(의법출생분)
第八(제팔) 依法出生分(의법출생분)
【본문】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若人(약인)이 萬三千大千世界七寶(만삼천대천세계칠보)로 以用布施(이용보시)하면 是人(시인)의 所得福德(소득복덕)이 寧爲多不(영위다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되 甚多(심다)니다. 世尊(세존)이시여 何以故(하이고)오 是福德(시복덕)이 卽非福德性(즉비복덕성)일새 是故(시고)로 如來說福德多(여래설복덕다)이니다. 若復有人(약부유인)이 於此經中(어차경중)에 受持乃至四句偈等(수지내지사구게등)하여 爲他人說(위타인설)하면 其福(기복)이 勝彼(승피)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一切諸佛(일체제불)과 及諸佛(급제불)의 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皆從此經(개종차경)하여 出(출)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所謂佛法者(소위불법자)는 卽非佛法(즉비불법)이니라
제팔 불법이 낳음 분
【번역】「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느냐. 만약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서 보시한다면 이 사람의 얻는 바 복덕은 얼마나 많겠느냐?」수보리 말씀드리되 「심히 많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습니까. 이 복덕이 곧 복덕성이 아님일세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심 이니다.」「만약 다시 사람이 있어서 이 경 가운데 이에 사구게 등이라도 받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말하면 그 복이 저보다 나으리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수보리야, 온갖 모든 부처와 모든 부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경으로 쫓아 나옴일세,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니라.」
【강송】부처님은 또다시 비유를 드시고 시회대중(時會大衆)을 대신하시는 장로수보리에게 복덕성(福德性)을 철저히 해부(解剖)하여 보이신다. 과연 중생의 사량(思量)으로서는 추리(推理)조차도 하여 볼 수 없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이니 말이다. 더욱이 이 세계에 가득히 찬 칠보(七寶)로써 보시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기막히는 복덕으로 좋이 계량(計量)인들 어찌 하겠는가. 세간에서는 헐벗은 이에게 옷 한 벌만 주어도 복덕이 되고 배고픈 이에게 밥 한술만 주어도 복덕을 이루는데 하물며 삼계(三界)에 가득찬 칠보(七寶) 보시의 복덕이랴! 그러나 부처님은 이러히 큰 복덕이라 할지라도 자성(自性) 위의 무궁한 복덕성은 아니라고 잘라 말씀하셨다. 어쩐 연고이냐? 「쇰복덕」곧 유루(有漏) 복덕인 유위법(有爲法)이기 때문이다. 「굄복덕」곧 무루(無漏) 복덕성인 무위법(無爲法)은 능소(能所)를 여의고 시비(是非)를 쉬고 존몰(存沒)을 끊고 득실(得失)이 없는 무상(無相)인 까닭에 무진하고 무한한 복덕성으로서 자성(自性)위에 갖추어지겠지마는 쇰복덕은 시공(時空)이 있고 다과(多寡)가 있고 경위(經緯)가 있고 수수(授受)가 있는 유상(有相)인 까닭에 유진(有盡)하고 유한한 복덕으로서 자성(自性)위에 갖추어지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러기 때문에 아무리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가득히 찬 칠보(七寶) 보시의 복덕이라 할지라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만큼의 쇰복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끝이없는 자성(自性)위의 복덕성을 이루지 못하지마는, 그러나 모름지기 이 경(經)중에 말씀하신 사구게(四句偈)만이라도 받아 가져서 닦아 나아가면 자성(自性)안의 삼신불(三身佛)이 눈 앞에 나투는 것이니 이른바 굄복덕성의 일대광명처(一大光名處)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법(法)에 의하여 관찰할 소식처라 하겠다.
이럴진댄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구게(四句偈)는 무엇인가? 이렇다. 팔만장경의 대의(大意)가 다 사구게(四句偈) 중에 엄연하니 곧 이 마하반야바라밀다를 이르심이다. 마하반야는 모든 불모(佛母)로서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다 이 마하반야바라밀다를 닦아 행하는데서 바야흐로 부처를 이루어 얻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반야경에도 「삼세의 모든 부처가 반야바라밀다를 밝힘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이르셨다. 이렇듯이 이 경은 바탕, 곧 체(體)로 쫓아서 씀, 곧 용(用)을 일으키니 묘리(妙利)가 무궁하며 철, 곧 지(智)인 방편(方便)으로써 공(功)을 삼고 슬기, 곧 혜(慧)인 수단(手段)으로써 덕(德)을 삼는데 곧 일체시중(一切時中)의 각조심(覺照心)이 바로 이것이므로 이르시되 이 경(經)으로 쫓아서 온갖 부처와 아뇩보리가 나온다고 하신 것이다. 이제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구게(四句偈)를 써보기로 하자.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제일(第一)로부터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제삼십이(第三十二)까지 장로에게 내리신 말씀의 전부가 모두 진리(眞理)인 게(偈)로서 허공의 뼈를 추려낸 소식이지마는 근기(根器)에 따라 구미(口味)가 다르기 때문에 여기서 몇 구절 빼어서 학인(學人)들의 간택에 맡기도록 하자.
우선 제오(第五)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서 말씀하신 「무릇 있는 바 모습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모습을 아닌 모습인 줄로 보면 곧 여래를 뵈올 것이니라」도 좋고, 제십(第十)의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에서 말씀하신 「모든 보살 마하살은 응당 이러히 청정한 마음을 내어 응당 빛깔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소리와 냄새와 맛과 닿질림과 요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지니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도 좋고, 제십팔(第十八)의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에서 말씀하신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이 다 마음이 아니오, 그 이름이 마음일새니라. 무슨 까닭이냐.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당장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오는 마음도 얻을 수 없음이니라」도 좋고, 제이십일(第二十一)의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에서 말씀하신 「수보리야, 여래가 중생을 중생이라 함은 중생이 아니오, 이 이름이 중생임을 말함이로다」도 좋고, 제이십육(第二十六)의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에서 말씀하신 「만약 빛깔로 나를 보려 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지라, 여래는 뵈옵지 못하리라」도 좋고, 마지막인 제삼십이(第三十二)의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서 말씀하신 「일체 하염있는 법은 꿈 같고 꼭두각시 같고 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으며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러히 볼지니라」도 좋으니 아무 구절(句節)이라도 마음에 들고 문맥이 잘 소화가 되는 것을 가려서 그 뜻을 밝혀 낸다면 우선 무아리(無我理)에 통하고, 무아리(無我理)에 통하면 따라 마음에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 끊어지고, 마음에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 끊어지면 다음엔 흉중(胸中)이 쇄락(洒落)하여 맑고 깨끗하며 허공으로 더불어서 둘이 아님을 알게될 것이다. 마음이 이미 청정한즉 모든 불보살의 신통기용(神通機用)과 무량묘의(無量妙義)를 다 얻게 마련이니 쇰복덕의 인천복록(人天福祿)인들 어디로 가겠는가. 이러므로 복덕의 그 자체에는 성품이 없음이나, 자성(自性)으로 통할 때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복덕성(福德性)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얻어 놓은 강산(江山)에 풍광(風光)은 저절로 따르게 마련이다.
이 일권경(一卷經)이야말로 그 량(量)은 태허(太虛)를 싸고 그 체(體)는 일체(一切)에 펴져 있으니 현기(玄機)라서 확연하지마는, 그러나 그 경문(經文)에만 의지하고 그 법(法)을 가지지 아니하면 이 경(經)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고 보아야 하겠다. 왜냐면 경(經)은 어디까지나 경(經)이지 법(法)은 아니기 때문이다. 경문(經文)은 살눈으로 보고 입으로 옮길 수도 있지마는 법(法)은 슬기눈으로써만이 보아서 알기 때문에 경(經)과 법(法)의 거리는 크게 다르다 하겠다. 다시 말하자면 경(經)은 그 법(法)의 자리를 가리키는 안내도(案內圖)인 불학(佛學)이지 불도(佛道)는 아니련마는 세인(世人)중에서는 쭈욱 벌려놓은 문언구(文言句)의 풀이를 불도(佛道)로 오인(誤認)하는 수가 많다. 이러므로 하여서 비록 수많은 안내도가 있다 할지라도 그 가리킴에 따라 닦아 행하지 않는 데야 법(法)과의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말이다. 다만 안내도에 의지하고 법(法)자리를 향하여 닦아 나가는데 비로소 안내도인 경(經)의 사명(使命)은 다할 뿐만이 아니라 이곳에서는 바야흐로 경(經)과 법(法)은 홀연히 일체(一體)를 이루어서 「경과 법은 둘도 아니면서 또한 하나도 아니니라」는 언구(言句)가 터져 나오지 않겠는가. 이러므로 하여서 슬기눈을 갖추지 못한 어리석은 지아비들에게 있어서는 다만 지식을 넓히는 것만이 불법(佛法)인양 경(經)을 보고 읽고 말하나 그 법(法)만은 보지 못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바엔 마침내 부처님의 도(道)를 이루지 못할 것은 너무나 엄연한 사실임을 덧붙여 말하여 두고 본론(本論)으로 붓을 옮기자.
이렇듯이 법(法)은 엄연하여서 참된 그 성품이 인연 일으키는 것을 거리끼지 않으므로 하여서 경(經)은 능히 불법(佛法)을 낳아놓고, 일으킨 그 인연은 또한 참된 성품을 거리끼지 않으므로 하여서 불법(佛法)은 비불법(非佛法)이 되는 것이니, 불(佛)은 비불(非佛)이요 법(法)은 비법(非法)이라겠다. 어즈버야! 비불(非佛)인 불(佛)과 비법(非法)인 법(法)은 도무지 거문고 줄 위의 소리를 잡음과 같은지라, 그 묘미(妙味)는 또한 능히 쫓고 능히 뺏고 좋이 놓고 좋이 거두고 이에 살리고 이에 죽인다고나 할까. 경은 실로 불타의 본원(本源)이요 법(法)의 모체(母體)인지라, 지난날의 조사(祖師)도 이 경전의 도리를 마루로 삼아서 본 수행(修行)을 쌓아 왔거늘 어찌 이 장구(章句)인지라 일대관문(一大關門)이 아닐까보냐. 끝에 사승(四乘)을 게(偈)로 읊어보자.
귀와 눈이 듣고 보는데 겨우 의거하여서
경전을 읽고 외우되 그런 줄로 아나
그리되는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이
성문인지라 양 수레를 타는 소승일다
僅抛耳目之聞見 근포이목지문견
讀誦經典知其然 독송경전지기연
不了其所以然者 불요기소이연자
聲聞羊車是小乘 성문양거시소승
법을 깨쳐서 경전 중의 뜻을 알되
비록 능히 그리되는 바를 아나
오히려 몸소 실다이 밟아 행하지 못하는 것이
연각인지라 사슴 수레를 타는 중승일다
悟法解得典中義 오법해득전중의
誰能知其所以然 수능지기소이연
尙未躬行實踐者 상미궁행실천자
緣覺鹿車是中乘 연각녹거시중승
이미 육도만행의 이치를 깨쳐서
능히 번뇌를 끊고 중생을 건지되
법에 따라 살피며 아울러 행하는 것이
보살인지라 소수레를 타는 대승일다
旣悟六度萬行理 기오육도만행이
能斷煩惱度衆生 능단번뇌도중생
隨法觀察並行者 수법관찰병행자
菩薩牛車是大乘 보살우거시대승
오뚝스리 빛을 돌려서 항상 적적히 비춤에
나들이가 스스로워서 다시 닦을 일이 없고
만 법을 굴리되 모자람 없는 것이
부처인지라 흰 소수레를 타는 최상승일다
兀兀回光常寂照 올올회광상적조
出入自在更無修 출입자재경무수
運掌萬法不欠者 운장만법불흠자
佛白牛車最上乘 불백우거최상승
이 소식에 일미(一味)가 나뉘니 백향(百香)이 엇갈리네
불법(佛法)은 엿가락이요 비불법(非佛法)은 조롱박일러라.
平等性中無彼此 평등성중무피차
南北東西是吾家 남북동서시오가
千古知音誰先解 천고지음수선해
飜身一聲超三界 번신일설초삼계
평등하온 성품중에 너와내가 없는거이
남복동서 불러봤든 우리집안 일일러라
뉘라먼저 알았으랴 천만고의 이소식을
몸을굴린 한소리에 이삼계를 뛰쳐나리
第九(제구) 一相無相分(일상무상분)
第九(제구) 一相無相分(일상무상분)
【본문】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須陀洹(수다원)이 能作是念(능작시념)하되 我得須陀洹果不(아득수다원과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 不也(불야)니다 世尊(세존)이시여 何以故(하이고)오 須陀洹(수다원)은 名爲入流(명위입류)로되 而無所入(이무소입)하여 不入色聲香味觸法(불입색성향미촉법)일새 是名(시명) 須陀洹(수다원)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斯陀含(사다함)이 能作是念(능작시념)하되 我得斯陀含果不(아득사다함과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되 不也(불야)니다 世尊(세존)이시여 何以故(하이고)오 斯陀含은 名一往來(명일왕래)로되 而實無往來(이실무왕래)일새 是名斯陀含(시명사다함)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어의)에 云何(운하)오 阿那含(아나함)이 能作是念(능작시념)하되 我得阿那含果不(아득아나함과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되 不也(불야)니다 世尊(세존)이시여 何以故(하이고)오 阿那含(아나함)은 名爲不來(명위불래)로되 而實無不來(이실무불래)일새 是故(시고)로 名阿那含(명아나함)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阿羅漢(아라한)이 能作是念(능작시념)하되 我得阿羅漢道不(아득아라한도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 不也(불야)니다 世尊(세존)이시여 何以故(하이고)오 實無有法(실무유법)을 名阿羅漢(명아라한)이니이다 世尊(세존)이시여 若阿羅漢(약아라한)이 作是念(작시념)하되 我得阿羅漢道(아득아라한도)라하면 卽爲着我人衆生壽者(즉위착아인중생수자)이니다 世尊(세존)이시여 佛說我得無諍三昧(불설아득무쟁삼매)하여 人中(인중)에 最爲第一(최위제일)이기에 是第一離欲阿羅漢(시제일이욕아라한)이니다 世尊(세존)이시여 我不作是念(아부작시념)하되 我是離欲阿羅漢(아시이욕아라한)이니이다 世尊(세존)이시여 我若作是念(아약작시념)하되 我得阿羅漢道(아득아라한도)라하면 世尊(세존)께서는 卽不說須菩提(즉불설수보리)가 是樂阿蘭那行者(시락아란나행자)라시련마는 以須菩提(수보리)가 實無所行(실무소행)일새 而名須菩提(이명수보리)로 是樂阿蘭那行(시락아란나행)이라시니다
제구 하나인 모습은 모습이 없음 분
【번역】「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수다원이 능히 생각을 짓되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 하겠느냐?」수보리 말씀 여쭈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습니까. 수다원은 성류에 든다는 이름이로되 드는 바가 없음일세 빛깔․소리․냄새․맛․닿질림․요량에 들지 아니함임을 수다원이라 이름할 뿐입니다」「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사다함이 능히 생각을 짓되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다 하겠느냐?」 수보리 말씀 여쭈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습니까. 사다함은 한번 왕래한다는 이름이로되 실은 왕래함이 없음일세 사다함이라 이름할 뿐입니다. 「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아나함이 능히 생각을 짓되 내가 아나함과를 얻었다 하겠느냐?」 수보리 말씀 여쭈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습니까. 아나함은 오지 않는다는 이름이로되 실로 오지 않음이 없음일세 이런 까닭으로 아나함이라 이름할 뿐입니다」「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아라한이 능히 생각을 짓되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하겠느냐?」수보리 말씀 여쭈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습니까. 실로 법 있음이 없음을 아라한이라 이름할 뿐이오니,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생각을 짓되 제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하오면 곧 아․인․중생․수자에 붙임이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를 다툼 없는 삼매를 얻어서 사람 가운데 가장 제일이기에 이를 제일 하고자 함을 여윈 아라한이라 말씀하시나 저는 이러한 생각을 짓지 아니하므로 저를 하고자 함을 여윈 아라한이라시나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생각을 짓되 제가 아라한도를 얻었다면 세존께서는 곧 수보리를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 말씀을 아니하시련마는 수보리가 실로 행한 바가 없음일세 수보리를 아란나행을 즐긴다 이름하심 이니다.
【강송】수다원(須陀洹)․사다함(斯陀含)․아나함(阿那含)․아라한(阿羅漢)은 보살도의 깊고 낮음을 구별하는 과명(果名)이다.
우선 수다원과는 무상법(無相法)을 요증(了證)하여서 육진(六塵)에 물들리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무루업(無漏業)을 닦아감으로 말미암아 모든 번뇌가 끊기었음을 이른다. 이러므로서 다시는 결정코 지옥(地獄)․축생(畜生)․아귀도(餓鬼道) 따위에는 안 떨어짐을 뜻함인데 이를 일러 성류(聖流)에 드는 초과(初果)라 한다.
사다함과은 사람이 죽어서 천중(天中)에 낳이나 그 복록(福祿)이 다하면 사시 세간(世間)에 태어나지마는 필경에 삼악도보(三惡道報)가 다하였으므로 성류(聖流)에 들었다는 제이과(第二果)를 뜻한다. 대승(大乘)인 사다함은 눈이 경계를 보나 마음에는 일생(一生) 일멸(一滅)이 있을지라도 제이(第二)의 생멸(生滅)이 끊어진 까닭에 이를 일러서 일왕래(一往來)라고도 이르는데 앞생각이 망령되이 일어나도 뒤 생각이 끊기고 앞생각이 망령되이 닿질리나 뒤 생각이 곧 여의여서 왕래(往來)가 없음을 뜻한다.
아나함과는 밖으로 좋이 경계를 보고자 하지 않고 안으로는 좋이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하여금 욕계(欲界)를 향하여 수생(受生)을 않는 까닭에 불래(不來)라 이르나 실은 불래(不來)도 없으므로 또한 불환(不還)이라고도 이르니 제삼과(第三果)이다.
아라한과는 무학(無學) 또는 살적(殺賊)이라 일러서 번뇌는 영단(永斷)되고 온갖 법(法)으로 하여금 다툼이 없음이나 만약 과(果)를 얻었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곧 무쟁(無諍)이 아닌 유쟁(有諍)이기 때문에 아라한이라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니 이를 제사과(第四果)라 이른다.
이렇듯이 이곳에서는 사과(四果)로 나누어 놓았으나 앞에서 말씀하시기를 「일체불법(一切佛法)은 다 이 경(經)으로 쫓아서 나왔으며 일체(一切) 성현(聖賢)도 다 이 무위법(無爲法)으로써 차별(差別)이 있다」하셨고 「불법(佛法)은 곧 불법(佛法)이 아니니라」일렀으니 차별(差別) 성과(聖果)인들 어찌 실다운 것이며 이럴진댄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도 필경엔 명연(冥然)히 일기(一機)에 합쳐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으로써 고인(古人)도 이르시기를 「明明四果(명명사과)나 元無果(원무과)이니 幻化空身(환화공신)이 卽法身(즉법신)이라」하신 것이다.
아란나행(阿蘭那行)은 무쟁행(無諍行)을 뜻함인데 곧 이 청정행(淸淨行)을 이름이다. 이러므로 아라한은 마음에 생멸상(生滅想)의 거래(去來)가 없고 오직 본각(本覺)이 상조(常照)함으로써 무쟁삼매(無諍三昧)라 이르는 것이다. 공중(空中)에는 명(明)과 암(暗)이 있어서 다투는 것과 같이 성중(性中)에는 사(邪)와 정(正)이 있어서 다투지마는 생각 생각이 항상 정도(正道)를 지키고 한 마음의 망령된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이 곧 무쟁삼매(無諍三昧)라면 이러히 닦는 그 사람을 어찌 제일 가는 사람이라 하여서 받들지 않겠는가. 이런 까닭에 본래가 청정(淸淨)한 아라한도를 마음으로 얻은 바가 있다는 생각의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면 사상(四相)이란 먹구름이 뒤덮이는 유쟁(有諍)이니, 유쟁(有諍)인즉 영특스리 밝은 청정도(淸淨道)가 아니므로 아라한도라고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란나행을 즐긴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人間)의 근기차(根機差)를 대강 흝어 보기로 하자. 실로 중생심(衆生心)의 미오(迷悟)는 사람 사람마다가 다르니 세계의 인구(人口)가 약 삼십억(三十億)이라면 그 근기(根機)의 차이도 약 삼십억(三十億) 단계라고 일러야 정확한 판단에 가까우리라. 왜 그러냐면 사람마다가 간직한 본래의 성지(性智)는 불 보살님네로부터 온갖 중생으로 더불어서 절대 평등한 자리이나, 그러나 그 성지(性智)가 기(機)에 응하여 지견(知見)을 세우는데 보는 것을 둠으로 하여금 사량(思量)을 일으키고 사량(思量)은 분별(分別)을 낳고 분별(分別)은 선악업(善惡業)을 맺고 선악업(善惡業)은 삼악도(三惡道)로 나누어 놓은 것이니 그때 그때에 일으키는 청염심(淸染心)의 씀이인 슬기인 근기(根機)라 하여두고 대충 그 줄거리를 나눠보기로 하자.
첫째로, 이착애증(泥着愛憎)하는 축인류(畜人類)가 있을 것이니 탐욕과 질투로 삶을 꾸려 가는 자 말이다.
둘째로, 대경수순(對境隨順)하는 범인류(凡人類)가 있을 것이니 그릇에 따라서 담기는 물처럼 남의 힘에 따르는 자 말이다.
셋째로, 이해분별(利害分別)하는 재인류(才人類)가 있을 것이니 안일과 명리를 쫓아 셈하는 자 말이다.
넷째로, 사리판단(事理判斷)하는 학인류(學人類)가 있을 것이니 옳고 그름을 올바로 가름하려는 자 말이다.
다섯째, 견기이작(見機而作)하는 철인류(鐵人類)가 있을 것이니 수단을 가리고 방편을 굴리는 자 말이다.
여섯째, 불탐계급(不貪階級)하는 인인류(仁人類)가 있을 것이니 뜻을 세워서 불의와의 타협을 않는 자 말이다.
일곱째, 초출삼계(超出三界)하는 달인류(達人類)가 있을 것이니 누리의 진리를 깨쳐 아는 호탕한 자 말이다.
여덟째, 선용생사(善用生死)하는 도인류(道人類)가 있을 것이니 중생 제도에 앞장을 서신 우뚝한 자 말이다.
아홉째, 영지곽연(靈智廓然)하온 진인류(眞人類)가 있을 것이니 삼세를 꿰뚫어서 가고 옴을 여의신 의젓한 자 말이다.
이렇듯이 삼십억(三十億)의 인류(人類)를 아홉 단계로 나누어 놓고 이를 또다시 세 단계로 나눈 다음에 제대로인 삶의 의의(意義)를 묻는다면 같은 누리에서 같은 삶을 엮어 가는 같은 사람임에도 거치적거리지 않고, 첫째에서 셋째까지는 현세(現世)만이 전부이니 현세(現世)만을 위하여 산다고 이를 것이요, 넷째에서 여섯째까지는 현세(現世)와 내세(來世)가 있을 뿐이니 현세(現世)와 내세(來世)를 위하여 산다고 이를 것이요, 일곱째에서 아홉째까지는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는 나의 씀이인 놀음이니 그대로 굴리면 재미를 볼 뿐이라 이를 것이다. 모두가 나름대로의 생각이요 깜냥대로의 판단이니 그 슬기의 그 근기차(根機差)란 무서운 것이며 따라 무서운 결과도 가져오게 마련이라겠다. 실로 마음을 도사려 생각하여 볼 때 억천만의 幸 不幸과 福 不福은 억천만의 마음씀이의 슬기인 근기(根機)의 차이로 온갖 고락(苦樂)을 지어내는 것이지마는 다 일념이(一念裡)의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소림(小林)에서 벽을 향하신 뒤로 숱한 조사(祖師)와 대덕(大德)들이 비단결처럼 이어오면서 배휴(裴休)․방온거사(龐蘊居士)를 비롯하여 영조(靈照)아가씨 같은 도인(道人)도 낳았으며 한국에서도 이차돈(異次頓) 성사(聖師)가 목에서 흰 피를 뿜으신 뒤로 많은 조사(祖師)와 대덕(大德)들이 금줄처럼 이어오면서 윤필(尹弼)․부설거사(浮雪居士)를 비롯하여 명월(明月)아가씨 같은 도인(道人)이 나왔다는 사실을 살펴볼 때 어찌 근기(根機)의 등차(等次)라는 말귀에 매달려서 일생(一生)을 헛되이 보낼까보냐. 오직 도도일하(屠刀一下)에 입지성불(立地成佛)하는 소식이 있을 따름이다.
이 소식에서 돌장승이 움직인다
사과(四果) 천과(千果)라도 그 당처가 한 낱의 묘공(妙空)인지라, 환화공신(幻化空身)이 어찌 청정법신(淸淨法身)이 아닐까보냐.
無諍三昧本自性 무쟁삼매본자성
不出入亦非定亂 불출입역비정란
是故三百六十日 시고삼백육십일
月明花開空寂中 월명화개공적중
다툼없는 삼매라서 본래저의 성품인걸
들고남이 없는데다 정란인들 있을손가
이러므로 일년이라 삼백에다 육십일에
달도뜨고 꽃도피니 공적중의 일일러라
第十(제십) 莊嚴淨土分(장엄정토분)
第十(제십) 莊嚴淨土分(장엄정토분)
【본문】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시되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가 昔在燃燈佛所(석재연등불소)하여 於法(어법)에 有所得不(유소득부)아 不也(불야)니다 世尊(세존)이시여 如來(여래)는 在燃燈佛所(재연등불소)하여 於法(어법)에 實無所得(실무소득)이시나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菩薩(보살)이 莊嚴佛土不(장엄불토부)아 不也(불야)니다 世尊(세존)이시여 何以故(하이고)오 莊嚴佛土者(장엄불토자)는 卽非莊嚴(즉비장엄)일새 是名莊嚴(시명장엄)이니이다 是故(시고)로 須菩提(수보리)야 諸菩薩摩訶薩(제보살마하살)이 應如是生淸淨心(응여시생청정심)하되 不應住色生心(불응주색생심)이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이니 應無所住(응무소주)하여 而生其心(이생기심)이니라 須菩提(수보리) 譬如有人(비여유인)이 身如須彌山王(신여수미산왕)하면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是身(시신)이 爲大不(위대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되 甚大(심대)니다 世尊(세존)이시여 何以故(하이고)오 佛說非身(불설비신)이 是名大身(시명대신)이니이다
제십 정토 장엄 분
【번역】부처님이 수보리에게 고하시되 「뜻에 어떠하느냐. 옛적 연등불 처소에 있어 법에 얻은 바가 있었겠느냐?」「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불 처소에 계시어 법에 실로 얻으신 바가 없었나이다.」「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보살이 불토를 장엄한다 하겠느냐?」「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습니까. 불토가 장엄하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올새 이 이름이 장엄이니다.」 「이런 까닭으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러히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응당 빛깔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소리와 냄새․맛․닿질림․요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수보리야, 비유컨대 사람이 있어 몸이 수미산왕만 하다면 뜻에 어떻겠느냐. 이 몸이 크다 하겠느냐?」수보리 말씀 여쭈되 「심히 큼이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습니까. 부처님이 「아닌 몸」을 말씀하심이 이에 큰 몸이라 이름하심 이니다」
【강송】부처님이 장로에게 고하시되「뜻에 어떠하느냐. 여래가 옛적 연등불 처소에 있어 법에 얻은 바가 있었겠느냐」하셨다. 이 무슨 물으심 이실까? 부처도 얻지 못하시는 법이요 중생도 버리지 못하는 법이거늘 연등불이신들 어떻게 전하시며 석가모니불이신들 어떻게 받아 들이시리오 마는 세존이 그때 연등불께서 말씀하신 바 법요(法要)로 인하여 정각(正覺)을 이루셨으니 이를 가리켜 얻음이 계신다고 이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연(緣)을 빌어서 증도(證道)하시 말귀로 보고 실인즉 석가모니불께서는 본래로 하늘 위아래 홀로 우뚝하신 지라 그 위계(位階)는 제불(諸佛)에 지나시고 그 부유(富有)는 만덕(萬德)을 갖추셨으니 어찌 사람의 점안(點眼)인들 받음이 계시겠는가. 그렇지마는 돌아보건대 그 어른의 전후신(前後身)으로서 그 어른이 그 어른이나 법(法)은 스승의 결택(決擇)이 있음을 강조(强調)하시는 뜻으로 우선 받아 들이자. 이러므로 하여서 수보리 장로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불 처소에 계시어 법에 실로 얻으신 바가 없나이다」하고 여쭈셨다. 해공(解空) 제일인자(第一人者)인 장로이시다. 다만 제 스스로의 성품만 깨치면 본래로 진로(塵勞)가 없는 까닭에 적적하여 항상 비추고 비추어서 항상 적적하면 이 곧 부처라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실로 얻음 없이 얻음」을 단언(斷言)한 소식처라 하겠다.
이럴진댄 장엄불토는 어떠한가? 이렇다. 안으로는 근신(近身)과 밖으로는 기계(器界)가 다 이 청정(淸淨)한 슬기의 경계이니 살눈에 비치는 하나 하나가 다 장엄(莊嚴)한 불정토(佛淨土)이다. 이 무슨 이유일까? 물이 있음으로써 거품이 생기니 물과 거품이 둘 아니며, 형체가 있음으로써 그림자가 드리우니 형체와 그림자가 둘 아니며, 소리가 있음으로써 메아리가 울리니 소리와 메아리가 둘 아님과 마찬가지로 본래로부터 까마득한 공적체(空寂體)이면서 곽연(廓然)하고, 본래로부터 의젓한 부동체(不動體)이면서 역연(歷然)하고, 본래로부터 휘영청한 원명체(圓明體)이면서 엄연(嚴然)하고, 본래로부터 영특한 성덕체(聖德體)이면서 호연(浩然)한 성지(性智)가 시방(十方)에 펴여져 있음으로 말미암아 산수(山水)는 서로가 의지하면서 정연(整然)하고, 풍운(風雲)은 서로가 화합하면서 유연(悠然)하고, 인마(人馬)는 서로가 어울리면서 흔연(欣然)하고, 권실(權實)은 서로가 통하면서 교연(晈然)한 경계를 이루며 가니 어찌 장엄한 불정토(佛淨土)가 아닐까보냐. 그러나 여기에서 만약 정연(整然)하고 유연(悠然)하고 흔연(欣然)하고 교연(晈然)한 묘용(妙用)이 도리에만 끄달려도 이것은 한낱 헛것인 거품이요 메아리요 그림자임에는 틀림없으니 장엄불토는 아니랄 것이며, 여기에서 만약 곽연(廓然)하고 역연(歷然)하고 엄연(嚴然)하고 호연(浩然)한 묘체(妙體)인 실다운 모습에만 쏠려도 이것은 모습이 없음으로써인 실다운 물이요 소리요 형체이기 때문에 또한 장엄불토라 일컬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럴진댄 장엄불토는 실상(實相)만도 아니오 환상(幻像)만도 아니니 어디로 향하여서 찾아내겠는가 말이다. 이렇다. 두 곳을 다 놓아라. 놓은 다음에 되돌아 정연(整然)한 곳에서 곽연(廓然)을 아울러 보고 호연(浩然)을 아울러 보면 찰나(刹那)에 비로소 장엄불토는 눈 앞에 현전(現前)하리라. 수보리 장로께서는 어디까지라도 중생들이 한 쪽에만 치우치는 그 편견(片見)을 쓸어내시기 위하시어 부처님께 여쭈시되 「장엄불토는 곧 장엄불토가 아니오, 이 이름이 장엄불토이니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 당처(當處)인지라, 바로 공화(空華)가 난타(亂墮)하니 삼사구서(三蛇九鼠)로다. 번역하여 「빈꽃이 어지럽게 떨어지니 세 마리의 뱀이요 아홉 마리의 쥐로다」이르는 소식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육조대사(六祖大師)의 말을 빈다면 「오직 정혜(定慧)의 보(寶)로써 거짓 장엄이나 장엄에 셋이 있는데, 제일 장엄은 세간불토(世間佛土)이니 사찰(寺刹)을 짓고 경(經)을 찍음이며, 제이 장엄은 신불토(身佛土)이니 일체인(一切人)을 보되 널리 공경(恭敬)함이요, 제삼 장엄은 심불토(心佛土)이니 심정(心淨)이면 곧 불토정(佛土淨)이라」하시고 「생각 생각이 마음에 얻는 바 없음을 항상 행함이 장엄이니라」일렀다. 장엄불토를 색상(色相)에서 구하되 세간불토(世間佛土)와 신불토(身佛土)와 심불토(心佛土)인 삼불토(三佛土)로 말씀하심은 그 바탕과 그 씀이가 둘이 아닌 일위일상(一位一相)의 자리에서의 일컬으심임을 잘 알고 음미(吟味)하여야 할 것이다.
청정심(淸淨心)은 무엇인가? 부처님 말씀따나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이르심과 같이, 빛깔을 보되 여위어서 머물지 아니하고 그 마음을 낳음은 지인(智人)의 마음 씀이다. 빛깔에만 머물러서 그 마음이 굴리임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움 같고, 빛깔에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굴림은 허공에 구름이 거침과 같음이니 마음의 달은 길이 빛을 놓을 것이다. 부설거사(浮雪居士)도 노래를 부르시되
눈으로 보는 바가 없으니 판가름이 없고
귀는 들음에 소리가 없으니 옳그름이 끊어졌구나
판가름과 옳그름을 모두 놓고
다만 마음 부처를 보아서 스스로 귀의할 뿐이로다.
하셨으니 그 마음씀이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이렇듯이 도인(道人)은 눈으로 보되 그 보는 바에 휘둘리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판가름이 사라지고 귀로 듣되 그 듣는 바에 휘둘리지 않음으로 하여금 옳그름이 끊어졌으므로 되돌아서 온갖 법의 판가름과 옳그름을 잘 처리하되 붙이지 않고 머물지 않는 것이니 이 당처(當處)인지라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는 말귀는 읽기도 쉽고 외우기도 쉽다. 그러나 이 말씀과 같이 행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빛깔과 소리가 거리끼지 않는 곳이라야 몸소 법왕의 성에 이름이로다」고인(古人)의 마음씨를 가꾸는 노래로서 수심요결(修心要訣)의 관문(關門)이니 신중을 기할 곳이다.
부처님은 또 장로에게 「수보리야, 비유컨대 사람이 있어 몸이 수미산왕만 하다면 뜻에 어떻겠느냐. 이 몸이 크다 하겠느냐.」물으셨다. 삼계(三界)의 중심(中心)인 수미산(須彌山)의 크기만큼 크느냐는 말씀이시니 그 크기로 말하자면 허공의 다음만큼 큰 것을 일컬으심인 말씀이신데, 그러나 끝이 없고 다함 없고 모습도 이름자마저도 끊어진 허공을 붙들고 말씀을 하여봤든 미한 중생에게 실감(實感)을 주실 수가 없기 때문에 한정이 있는 수미산을 내어 세우심이나 그 뜻은 수미산과 허공을 같이 보시는데 있다고 추찰(推察)이 된다. 실로 색신(色身)이라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이것은 한낱 거품이요 메아리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크다는 말을 못할 뿐 아니라 작다는 말도 붙지 않는다. 왜 그러냐면 크고 작음은 그 심량(心量)에 달렸기 때문이다. 어쩐 까닭이냐? 아무리 작은 오척단구(五尺短軀)라도 그 심량(心量)이 청정무애(淸淨無礙)이면 수미산왕과 허공으로 더불어서 크기가 같겠지마는 반대로 아무리 큰 무한장신(無限長身)이라도 그 심량(心量)이 진로망상(塵勞妄想)에 덮이었으면 작기로서니 어찌 일척단구(一尺短軀)인들 감당하겠는가. 이러므로 장로는 아닌 몸을 말씀하시어 큰 몸이라 이름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소식에 크도 작도 않구나
생각을 하면 눈썹이 빠지고, 생각을 아니하면 입․코가 뭉개어지고, 생각하지도 않고 아니하지도 않으면 팔 다리가 흩어지느니라.
莊嚴佛土一念裡 장엄불토일념이
須彌山王亦如是 수미산왕역여시
了知四相本無實 요지사상본무실
獨坐虛空無變身 독좌허공무변신
장엄불토 말도마소 한생각속 일인것을
수미산왕 이렇듯이 이러하고 이런지라
모든모습 실다웁지 아니함을 알진대는
허공에다 홀로앉아 가없는몸 이룰것을
第十一(제십일) 無爲福勝分(무위복승분)
第十一(제십일) 無爲福勝分(무위복승분)
【본문】須菩提(수보리)야 如恒河沙中(여항하사중)에 所有沙數(소유사수)하여 如是沙等恒河(여시사등항하)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是諸恒河沙(시제항하사)가 寧爲多不(영위다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되 甚多(심다)니다 世尊(세존)이시여 但諸恒河(단제항하)도 尙多無數(상다무수)온 何況其沙(하황기사)하시이까 須菩提(수보리)야 我今(아금)에 實言(실언)으로 告汝(고여)하노니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인)이 以七寶(이칠보)로 滿爾所恒河沙數(만이소항하사수) 三千大天世界(삼천대천세계)하여 以用布施(이용보시)하면 得福(득복)이 多不(다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되 甚多(심다)니다 世尊(세존)이시여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시되 若善男子善女人(약선남자선여인)이 於此經中(어차경중)에 乃至受持四句偈等(내지사구게등)하여 爲他人說(위타인설)하면 而此福德(이차복덕)은 勝前福德(승전복덕)하리다
제십일 하염없는 복의 수승한 분
【번역】「수보리야, 항하 가운데 있는 바 모래수와 같이 이러한 모래알 같은 항하라면, 뜻에 어떠하느냐, 이 모든 항하의 모래가 얼마나 많다 하겠느냐?」수보리 말씀 여쭈되 「심히 많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다만 모든 항하라도 오히려 많아서 세일 수 없거늘 어찌 하물며 그 모래이겠습니까」 「수보리야, 내가 이제 참다운 말로 너에게 고하느니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저 항하의 모래 수효의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에 쓴다면 복을 얻음이 많겠느냐?」 수보리 말씀 여쭈되 「심히 많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고하시되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경 가운데서 이에 사구게 같은 것만이라도 받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한다면 이 복덕이 앞의 복덕보다 나으리라. 」
【강송】항하(恒河)는 히말라야산으로부터 발원(發源)하여 인도(印度)의 북동쪽으로 흐르는 강물의 이름이란다. 그 하류(下流)의 연변(沿邊)에는 가는 모래가 많다는데 부처님은 항상 이 모래로 비유를 드셨다. 그런데 한 항하의 그 모래수도 무궁(無窮)이라 하겠는데 이것도 오히려 모자라서 또 모래수와 같은 무진(無盡)한 항하의 그 모래수를 다시 드신 것은 한 성품 중에 무궁(無窮)한 용법(用法)이 또다시 무진(無盡)함을 드신 것이다. 이렇듯이 부처님의 말재주에 끌려든 붓은 앞을 다리니 무슨 까닭이냐. 법(法) 법(法)이 무궁무진하니 애오라지 다른 법이 없는 구나. 셈하여 가뭇도 없을 새 눈 앞에 한 법도 없는지라, 어즈버야! 허공으로 더불어서 아득할 뿐이로다. 이곳에서 모든 법을 끌어 잡아 보았던들 스스럼없는 본 고장의 풍광(風光)일러라. 붓을 돌려서, 모래수의 대계(大界)에 가득찬 칠보(七寶) 보시(布施)라도 마침내 유루(有漏) 곧 쇰인 복덕에 속하는 것이니 인천보(人天報)를 지어서 알맞은 쾌락(快樂)을 누리어 봤든 생사업(生死業)만은 못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전에서 말씀하신 사구게(四句偈)만이라도 받아 가져서 읽고 외우고 행하면 곧 보리도로서 이 바로가 자리이타(自利利他)를 겸한 무루(無漏) 곧 굄인 복덕을 이룸이니 어찌 생사업(生死業)이 문제이겠는가. 이러므로 항하사수(恒河沙數)의 세계에 가득찬 칠보(七寶) 보시(布施)의 복덕인들 생사업(生死業)을 쓸어내는 사구게(四句偈)의 공덕에 비교가 되겠느냐는 뜻이시다. 부처님은 어디까지라도 관념적(觀念的)이요 피동적(被動的)이요 상대적(相對的)인 유위(有爲)․유상(有相)․유주(有住)인 곧 쇰인 복덕성(福德性)은 실질적(實質的)이요 부동적(不動的)이요 절대적(絶對的)인 무위(無爲)․무상(無相)․무주(無住)인 무루(無漏) 곧 굄인 복덕성(福德性)과의 비교가 안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시는 바이다.
실에 있어서 윤회(輪廻)의 쳇바퀴를 돌고 있는 자신(自身)을 살필 줄을 안다면 아무리 극다(極多)의 복덕이라도 쇰에 속하는 비공덕성(非公德性) 쯤은 원하지를 않을 것이다. 왜냐면 무시이래(無始以來)로 고해(苦海) 속에 떠돌아다니던 석일(昔日)의 행상(行狀)을 상상하여 볼 때에, 혹은 축생(畜生)으로서 타(他)의 희생물(犧牲物)로 바치었던 수(數) 또한 많았을 것이며, 혹은 천상인(天上人)으로서 수복(壽福)을 누린 수(數) 또한 많았을 것이며, 혹은 지상인(地上人)으로서 선악(善惡)을 저지른 수(數) 또한 많았을 것이다. 때에 따라 연(緣)에 따라 희(喜) 노(怒) 애(哀) 락(樂)에 휘둘리고 부(富) 귀(貴) 빈(貧) 천(賤)에 억눌리고 은(恩) 원(怨) 증(憎) 애(愛)에 사로잡히고 생(生) 노(老) 병(病) 사(死)에 시달리며 윤회(輪廻)의 구렁텅이에서 헤매던 일을 생각할 때 어찌 항하사수(恒河沙數) 대계(大界)의 복덕엔들 눈썹이나 까딱하겠는가. 왜 그러냐면 진실로 칠보(七寶) 보시(布施)는 삼계(三界)의 부귀보(富貴報)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마침내 시간적(時間的)인 성주(成住)와 공간적(空間的)인 괴멸(壞滅)을 통하여 생사업(生死業)을 녹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경(持經) 공덕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큰 슬기가 생기도록 할 뿐 아니라 생사(生死)를 선용(善用)하며 마침내 무상도(無上道)를 이루게 함이니, 마땅히 보리성(菩提性)인지라 수승(殊勝)하다고 이르지 않겠는가. 이러므로 하여서 부처님은 진리(眞理)가 담긴 사구게(四句偈)만이라도 받아 가져서 남을 위하여 설하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공덕행(功德行)으로서 그 복덕은 허공으로 더불어 같으니 이 복덕이 앞 복덕보다 수승(殊勝)하다는 말씀이시다. 인신(人身)을 받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항하사수(恒河沙數)의 항하(恒河)의 모래수인 삼천대천세계수(三千大天世界數)의 사량분별(思量分別)과 번뇌망상(煩惱妄想)을 버리고 무상리(無相理)를 요달(了達)하여 공적행(空寂行)을 닦아 가는 것만이 최고의 희망(希望)이요, 최상(最上)의 소원(訴願)이요, 최대(最大)의 사명(使命)이요, 최종(最終)의 목적(目的)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한 문제를 건다.
초학은 어떻게 공부를 지어 갑니까?
첫째 착한 벗을 사귀며 항상 경전을 받들어 모시기를 기뻐하면 뒷세상에도 사람의 몸을 받느니라.
둘째 눈은 그른 것 보기를 미워하고 옳은 것 보기를 좋아하며, 귀는 악한 소문 듣기를 멀리하고 착한 소문 듣기를 가까이 하며, 혀는 헛된 말 옮기기를 싫어하고 실다운 말 옮기기를 즐겨하면 뒷세상에는 하늘의 몸도 받느니라.
셋째 격외선지(格外禪旨)를 닦아 놓치지 않되 세간사(世間事)를 살림으로 하여서 출세간사(出世間事)를 엮어가고 출세간사(出世間事)를 바탕으로 하여서 세간사(世間事)를 굴리면 생사업(生死業)을 녹여내느니라.
세간사와 출세간사를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첫째 집안을 다스리는 데는 반드시 부지런하여야 한다.
둘째 이웃을 다스리는 데는 반드시 너그러워야 한다.
셋째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반드시 곧아야 한다.
넷째 인류를 다스리는 데는 반드시 덕이라야 한다.
이상은 곧 세간사(世間事)에 속함인 줄로 알라.
다섯째 삼계(三界)를 다스리는 데는 반드시 슬기가 앞을 서는 것이니, 이는 곧 출세간사(出世間事)에 속함을 뜻한다. 이러므로 같은 복덕행(福德行)을 닦되 슬기를 닦음으로써만이 복덕중의 공덕행(功德行)으로 자성(自性) 삼불(三佛)을 굴리며 중생을 건지게 되는 것이니 대성인(大聖人)의 출현이라 일컬으겠다.
이럴진댄 고금(古今)의 성현들은 출세간사에 속합니까?
아니다. 세인(世人)이 일컫는 대개의 성현이란 착상인물(着相人物)로서 상대성(相對性)인 세간사에 속하는 것이 보통이지마는 오직 무상의(無相義)를 깨치시고 호올로 절대성(絶對性)인 출세간사에 우뚝하신 분은 무위진인(無位眞人)이신 세존이시며, 따라 그 어른의 제자로 선지식인 무심진인(無心眞人)들이시다. 이렇듯이 부처님은 모든 성현의 조종(祖宗)으로 삼계(三界)에 뚜렷하시고 그 제자들이 또한 사해(四海)에 의젓하시니 어찌 유심군자(有心君子)인 성현의 견줄 바이며 따를 바이겠는가.
선지식을 어떻게 알아봅니까?
남의 글귀나 말귀를 찾아서 헤매지 않고 자신의 살림살이를 말아내느니, 그 얼굴 빛깔은 맑고 그 눈빛은 차갑고 그 말소리에는 뼈가 있느니라.
선지식을 어떻게 만나 봅니까?
너의 마음 안에서 고요로히 찾으면 너의 몸 밖에서 스스럼없이 뵈옵게 되느니라.
예불 송경으로 닦아 감은 어떻습니까?
예불 송경은 다 법중(法中) 방편(方便)으로 불자(佛子)의 소중한 일과(日課)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만약에 삼학(三學)을 닦음은 고사하고 마음과 몸 밖을 향하여 내세(來世)의 안주처(安住處)와 현세(現世)의 복록(福祿) 따위나 얻기 위한 생각으로서인 예불이요 송경이라면 어찌 사도(邪道)나 외도(外道)의 짓거리와 다르다겠는가. 이는 곧 무위진인(無位眞人)을 죽이는 셈이니 슬기로운 사람은 애오라지 상승(上乘)의 범부(凡夫)는 될지언정 이승(二乘)의 성과(聖果)는 탐하지 않느니라.
삼학(三學)은 무엇을 뜻함입니까?
삼학(三學)은 성품을 맑히면서 나아가 그 맑히어진 성품을 항상 놓치지 않음을 뜻함인데 예를 들기로 하자. 「모든 악을 짓지 않음이 계(戒)요, 스스로가 그 뜻을 맑힘이 정(定)이요, 착함을 받들어 행함이 혜(慧)니라」 이르신 것은 신수대사(神秀大師)의 살림살이로서 대승(大乘) 근기(根機)를 상대로 하는 것이라겠고, 「마음자리에 그른 것이 없으면 스스로의 성품인 계(戒)요, 마음자리에 어리석음이 없으면 스스로의 성품인 혜(慧)니라」 이르신 것은 혜능대사(慧能大師)의 살림살이로서 최상승(最上乘) 근기(根機)를 상대로 하는 것이라면, 「선악(善惡)의 앞소식을 놓치지 않음이 계(戒)요, 동정(動靜)의 앞소식을 놓치지 않음이 정(定)이요, 미오(迷悟)의 앞소식을 놓치지 않음이 혜(慧)로다」 이르시는 것은 나의 살림살이로서 대승(大乘)도 아니오 최상승(最上乘)도 아닌 근기(根機)를 상대로 하는 말이니 이 당처(當處)의 소식을 접하기 위하여 닦아서 가는 것을 우선 삼학(三學)으로 알고 단단히 참고하되 너의 알뜰한 판단에 맡긴다.
법(法)을 묻는데 대하여 그 뜻을 말로 풀어서 가르치면 능히 받아들여서 행(行)에 옮길 수가 있는데 어찌하여서 혹은 갈(喝)하고 혹은 때리고 밟기도 합니까?
이렇다. 단단히 들어라. 그 뜻을 말귀로 풀어서 가르치지 못하는 이유는 비유로 형체를 가리키지 위하여 그림자를 가리킴이니 형체는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왜나면 형체는 그림자 밖에 있음과 마찬가지로 그 뜻도 말귀 밖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말귀를 여윔 없이 여윌 줄을 모르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짓은 속칭 열반당 도깨비를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자성(自性) 자도(自度)에 힘써라. 따라 학인(學人)에게 대하여 할을 하고 때리고 밟기도 하는 짓은 그 학인(學人)의 의심덩이가 무르익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더욱더 궁지(窮地)로 몰아 넣음으로 하여금 모든 망상(妄想)을 뿌리째 뽑아내는 보도(寶刀)의 행사(行使)인 줄로 알아 두라.
끝으로 대근(大根)은 사흘 안에, 중근(中根)은 석달 안에, 하근(下根)은 삼년 안에 견성(見性)을 한다시는 고인(古人)의 말씀인데 무슨 까닭에 일년(一年)도, 오년(五年)도, 평생(平生)을 통하여서도 스스로가 간직하고 있는 성품을 보지 못합니까?
사상산(四相山)에서 은애해(恩愛海)에 떨어진 몸인지라 무상의(無相義)인 허현묘도(虛玄妙道)의 의취를 어찌 깨쳐 알겠는가. 다겁래(多劫來)의 업장(業障)에 찌들인 중생의 분(分)으로는 마땋히 선지식의 계오(啓悟)를 기다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만약에 선지식 밑에서 정혜(定慧)를 닦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마다가 간직하고 있는 스스로의 성품을 밝혀내지 못하는 경우라면 이것은 어딘가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실로 죽고 삶은 남의 일이 아니고, 나의 일이 분명한 것이니 학인들은 이 모순을 하루 속히 밝혀내고 길을 바로 잡아서 만고(萬古)에 한(恨)됨이 없게 하여야 한다.
이 소식에 금과 놋쇠는 안 바꾼다
진인(眞人) 일명(一名)을 살리기 위하여 가인(假人) 만명(萬名)을 죽여도 시비(是非)가 없다더라. 쉬! 봉구제일주의(封口第一主義)다.
三界是幻福亦幻 삼계시환복역환
本非實故幻將滅 본비실고환장멸
幻滅眞性一圓明 환멸진성일원명
屹然獨走乾坤外 흘연독주건곤외
삼계라서 곡두런가 복덕또한 곡두로다
본래참이 아니러니 곡둔창차 꺼질것이
곡두라서 꺼지며는 성품뚜렷 밝으리니
우뚝스리 홀로가리 하늘땅의 그밖으로
第十二(제십이) 尊重正敎分(존중정교분)
第十二(제십이) 尊重正敎分(존중정교분)
【본문】復次須菩提(부차수보리)야 隨說是經(수설시경)하되 乃至四句偈等(내지사구게등)하면 當知(당지)하라 此處(차처)는 一切世間天人阿修羅(일체세간천인아수라)가 皆應供養(개응공양)을 如佛塔廟(여불탑묘)어든 何況有人(하왕유인)이 盡能受持讀誦(진능수지독송)가 須菩提(수보리)야 當知(당지)하라 是人(시인)은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성취최상제일희유지법)이니 若是經典所在之處(약시경전소재지처)에는 卽爲有佛(즉위유불)커나 若尊重弟子(약존중제자)니라
제십이 바른 교화를 존중하는 분
【번역】다시「수보리야, 이 경을 설하되 이에 사구게 등이라도 따르면, 마땅히 알지어다, 이 곳은 온갖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다 응당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하거든 어찌 하물며 사람이 있어서 다 능히 받아 가지고 읽고 외움이리요, 수보리야, 마땋히 알지어다. 이 사람은 가장 위로 제일 가는 드문 법을 성취함이니, 만약 이 경전이 있는 곳에는 곧 부처님과 존중받는 제자들이 계시느니라」
【강송】세간(世間)이란 태허(太虛)중에 이루어져 있는 유상(有相)․무상(無相)의 중생계를 이름이다. 이 세간(世間)에 칩거(蟄居)하는 중생보를 육취(六趣)라고 한다. 하나는 천취(天趣)요 둘은 인취(人趣)요 셋은 아수라취(阿修羅趣)로서 천상(天上)․인간(人間)․수라(修羅)의 삼선도(三善道)와, 넷은 지옥취(地獄趣)요 다섯은 아귀취(餓鬼趣)요 여섯은 축생취(畜生趣)로서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의 삼악도(三惡道)를 합칭(合稱)함인 것이다. 그런데 이 경에서는 다못 삼선도(三善道)만 설하시고 삼악도(三惡道)를 설하시지 아니한 것은 슬기가 우매하고 총명이 미혹하여 반야묘리(般若妙利)를 해득(解得)할 수 없는 까닭이다. 탑(塔)은 불 사리(砂利)를 모신 곳이며 묘(廟)는 불 형상을 모신 곳으로 사찰(寺刹) 곧 「절」을 의미하는 말이다. 절은 불도(佛道)를 닦는 도량이니 교주(敎主)이신 석가모니불을 비롯하여 모든 불보살 중에서 그 인연에 따라 몇 분씩의 형상불을 모시고 모든 천왕(天王)과 신장(神將)도 산신(山神)까지도 별도로 모시는 것이 우리 나라의 보통 예이나, 최상승도(最上乘道)를 지향하는 큰절에서는 형상불을 모시지 않고 자리와 촛대만을 모시는 적멸궁(寂滅宮)도 혹은 있다. 이곳에서 덧붙여 말하여 둘 것은 모든 천왕(天王)과 모든 신장(神將)과 산신(山神)까지도 모시게 되는 것은 동양인(東洋人)이 고래(古來)로부터 숭배하여 오던 풍속을 쫓아 도량 안에 별도로 모심으로써 우매한 중생으로 하여금 불법(佛法)으로 이끌리어 오게 하는데 교량적(橋梁的)인 역할(役割)을 하기 위한 선사(先師)들의 방편(方便)으로 보아 두는 것도 좋은 것이다. 이리하여 아침저녁으로 진불(眞佛)과 진신(眞身)을 모시는 바와 다름없이 지성을 다하여서 공양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삼계(三界)를 한 입에다 삼키고 있는 우리 학인(學人)들의 입장으로 볼 때 이 형상불(形像佛)과 형상신(形像神)을 지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예식을 받드는 행은 이 옳음인가 이 그름인가를 검토하여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곳에서는 색(色)과 공(空)이 본래로부터 둘 아니라는 원리론(原理論)을 떠나 사적(事的)인 면에서 문제를 취급하여 보자. 인간이란 인간 자체의 생사문제를 심각하게 다뤄볼 때에 스스로가 자족(自足)할만한 안심처(安心處)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항상 허탈감(虛脫感)과 고독감(孤獨感)과 불안감(不安感)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조차도 하여보지 아니하고 사상(四相)에만 휘둘리는 허수아비류에 있어서는 별문제이겠지마는 현세(現世)와 미래(未來)까지를 생각한다든지 과거(過去)와 현재(現在)와 미래(未來)까지의 삼세(三世)를 생각하여 보는 지성인(知性人)에게 있어서는 아마 제 스스로의 생명과 대결을 한다고 일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렇듯이 일단 인생문제에 대한 회의(懷疑)를 일으키기 전까지에 있어서는 제 나름대로의 문학(文學)도 예술(藝術)도 사회학(社會學)도 색상학(色象學)도 심성학(心性學)도 대체적으로 다뤄본 연후 이곳에서는 생사(生死)의 뿌리를 캐어낼 도리가 없다는 단정을 내리게 됨으로부터 그 회의(懷疑)는 절정(絶頂)에 달할 것이다. 여기에서 그 회의의 배출구(排出口)를 쉽사리 찾아내지 못한다고 가정을 한다면 결국 자살을 택하는 길 이외에는 종교에 귀의하는 길만이 있을 따름이다.
아마 세간에서는 자살을 택하는 길보다 종교에 의존하는 수가 많으리라 보아진다. 그리하여 제 나름대로 택한 불신(佛神)에게 의존함으로써 항상 때로 사모하는 불신(佛神)을 혹은 형상(形像)으로 모시고 혹은 심상(心像)으로 모시어서 조석(朝夕)으로 진불(眞佛) 진신(眞身)과 다름없이 혹은 염불 공양을 혹은 기도 공양을 아니 올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 사회의 상식적인 정념(情念)이 아닐까. 이렇듯이 모든 불 보살의 진리를 사모(思慕)하고 추앙(推仰)하는 나머지 그 형상(形像)이나마 그 자리나마를 통하여 아침저녁으로 공양을 아니 올리지 못하는 불도(佛徒)들의 간곡한 심정에서랴. 그렇다면 형상(形像)을 진상(眞像)과 같이, 형상(形像)을 아니 모신 곳은 마음으로 사모하는 심상(心像)을 통하여, 공양을 드리는 것은 득도(得道)를 못한 중생의 당연한 애정(哀情)이라고 보아서 크게 어긋난 일이 아니라고 하여두자. 불제자가 이러한 방편을 통하여 불보살의 이념(理念)과 혼연일체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조석(朝夕)으로 마련한다는 것은 도(道)를 닦는 수행자(修行者)로서 좋은 행일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단계적인 방편마저도 없이 그만 그대로 최상승도(最上乘道)에 뛰어 올라 간다는 대근기(大根機)인 알찬 이라면 모르겠으나 소근기(小根機)인 중생을 위하여는 부득이 이승도리(二乘道理)를 방편으로 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니, 이것 역시 무유정법(無有定法)인 불도(佛道)로서 그 근기(根機)의 분(分)에 따라 성실을 다 할 자리이다.
본론(本論)으로 들어가자.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시는데 따라 사구게(四句偈)만의 공덕도 많을 뿐 아니라 이 경전을 모신 처소에까지라도 공덕성이 서리어 있음을 말씀하셨다. 무슨 연고이냐? 이렇다. 이 경 가운데의 사구게(四句偈)만이라도 설한다는 것은 전체 경에 대한 소부분(小部分)에 지나지 않으나 생각 생각에 분별을 쉬고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을 여의여서 누(漏) 곧 쇰이 끊어지고 얻은 바 없는 마음으로 모든 사물(事物)을 대할 뿐 아니라 인연있는 중생으로 더불어 가지고 읽고 외우고 깨치게 하여서 교화를 하면 이 바로 법신(法身)인지라, 이 몸 가운데는 여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깃듦으로 하여서 부처님의 탑묘(塔廟)와 같다고 이르는 것이다. 이러므로 얻는 바 없는 마음으로 이 경을 설할진댄 하늘사람․땅사람은 물론이요 아수라 등이 다 와서 부처님의 탑묘(塔廟)와 같이 존경하고 공양할 것은 당연한 일이어니와 만약 그렇지 않고 그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면서도 다만 명문(名聞)과 이양(利養)을 위하여서 이 경을 설한다면 죽어서 몸을 바꿀 때 삼도(三途)를 어찌 면할까보냐는 고인(古人)의 말씀도 있음을 알아두자.
그런데 항차 청정한 무애심(無礙心)으로서 사구게(四句偈)가 아닌 전체의 경을 받아 지니고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운다면 곧 이 몸 가운데의 삼신불(三身佛)이 현전(現前)하는 것이니 어찌 최상 제일로 드문 사람이 아니겠는가. 뿐이랴. 이 경전을 모신 처소에까지라도 공덕성(功德性)이 서리어 있음을 드셨는데 중요한 의취가 있음이 느껴진다. 앞에서 경의 수승을 밝히시고 다음은 인법(人法)의 존중을 가리키셨다. 인간으로서의 존중할 바가 성현(聖賢)이라면 성현(聖賢)의 조종(祖宗)은 당연히 부처님이시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조종(祖宗)은 누구냐고 할진댄 두말할 것 없이 경(經)이라고 답을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므로 이 경(經)은 불(佛)과 성현(聖賢)의 조종(祖宗)이 되는 바이라, 그 수승(殊勝)함을 좋이 말할 수가 없으니 실로 경전의 존중함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이럴진대 불(佛)과 성현(聖賢)의 조종(祖宗)이 경전이라면 그 경의 조종(祖宗)은 마땅히 누구일까? 자! 학인(學人)들은 한마디 일러라. 이 대목도 건성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드높은 관문(關門)이니 사나운 정진으로 돌파하라. 앞에서는 체(體)로 좇아서 용(用)을 일으키는 자리지마는 이곳에서는 용(用)을 끌어잡고 체(體)로 돌리는 당처로 보고 체용(體用)이 둘 아닌 소식에 붓을 돌리자. 절대성(絶對性)인 진공(眞空)의 체성면(體性面) 속에서 이뤄지는 상대성(相對性)인 묘유(妙有)의 용상면(用相面)은 체성면(體性面)으로 더불어 둘이 아니련마는 사람들은 용상면(用相面)에만 주저앉아서 온갖 법을 처리하려고 서두르기 때문에 피아(彼我)가 없는 곳에 피아(彼我)를 지어내면서 피아(彼我)를 논하고, 범성(凡聖)이 없는 곳에 범성(凡聖)을 지어내면서 범성(凡聖)을 논하고, 시비(是非)기 없는 곳에 시비(是非)를 지어내면서 시비(是非)를 논하고, 미오(迷悟)가 없는 곳에 미오(迷悟)를 지어내면서 미오(迷悟)를 논하고, 생사(生死)가 없는 곳에 생사(生死)를 지어내면서 생사(生死)를 논하고,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이 없는 곳에서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을 지어내면서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을 논하니, 이념(理念)이 맞서고 이해(利害)가 엇갈리는데 어찌 인류사회(人類社會)의 대립(對立)인들 쉬는 날이 있겠는가.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몸을 한번 굴려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의 앞소식을 바탕으로 하고 인생(人生)을 밝혀내는 것이니 인생(人生)의 앞소식을 바탕으로 하여서 피아(彼我)를 걷어내고, 피아(彼我)의 앞소식을 바탕으로 하여서 범성(凡聖)을 걷어내고, 범성(凡聖)의 앞소식을 바탕으로 하여서 시비(是非)를 걷어내고, 시비(是非)의 앞소식을 바탕으로 하여서 정사(正邪)를 걷어내고, 정사(正邪)의 앞소식을 바탕으로 하여서 미오(迷悟)를 걷어내고, 미오(迷悟)의 앞소식을 바탕으로 하여서 생사(生死)를 걷어내고, 생사(生死)의 앞소식을 바탕으로 하여서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을 걷어낸다. 되돌아 모든 법의 뿌리가 비었음을 알 제, 피아(彼我)는 가지런하면서 범성(凡聖)을 굴리고, 범성(凡聖)은 가지런하면서 시비(是非)를 굴리고, 시비는 가지런하면서 정사(正邪)를 굴리고, 정사(正邪)는 가지런하면서 미오(迷悟)를 굴리고, 미오(迷悟)는 가지런하면서 생사(生死)를 굴리고, 생사(生死)는 가지런하면서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을 굴리게 되는 것이니, 이 당처(當處)인 어느 곳에서 피아(彼我)가 둘이며 범성(凡聖)이 둘이며 시비(是非)가 둘이며 정사(正邪)가 둘이며 미오(迷悟)가 둘이며 생사(生死)가 둘이며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이 둘임을 찾아내겠는가. 다만 이(理)와 사(事)가 일여(一如)인 본래의 소식처로서 이 바로가 용(用)을 끌어잡고 체(體)로 돌리면서 표리(表裏)가 공전(共轉)하는 풍광(風光)이라 이르지 않겠는가.
실로 불(佛)이라면 형상과 사리를 이름이 아니고 진리(眞理)를 이름인 것이다. 원명(圓明)하고 담적(湛寂)한 청정법신(淸淨法身)을 일컬음이다. 그럼으로써 법을 설(說)하더라도 이 경의 사구게(四句偈)의 문구(文句)나 처소(處所)가 지중한 것이 아니라 그 사구게(四句偈)의 이념(理念)이 그 처소(處所)로 인연되어서 중생으로 하여금 제도를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 때문에 처소(處所)는 이 사구게(四句偈)와 더불어서 또한 은혜스러운 곳이 아니겠는가. 이러히 실다운 진리가 은혜스러운 처소로 인연되어서 나투어질 때 경전은 모시어지는 것이요, 경전이 모시어졌으면 응당 부처님이 계실 것이요, 부처님이 계시면 반듯이 불제자(佛弟子)가 있을 것이요, 불제자가 있으면 으례히 법회가 열리는 것이요, 법회가 열리면 자연히 천인(天人) 수라(修羅)가 공양(供養)하고 호법(護法)할 것이니, 이럼으로써 이곳은 바로 불․법․승 삼보(三寶)가 이루어지면서 삼계(三界)의 진리도 밝히어지는 곳인지라, 어찌 최상(最上) 제일인(第一人)이 출현하는 성역(聖域)이 아닐까보냐. 이에 초학(初學)을 위하여 다서 규범(規範)을 단다.
말을 다무니 강산에 옳그름이 끊어질 새
범부와 성현은 같이 구멍 없는 피리를 부네
黙言江山是非絶 묵언강산시비절
凡聖共吹無孔笛 범성공취무공적
곧은 마음은 좋이 태고의 소식을 얻어내느니
한결같구나 쇠꽃이라서 지난 해 가지에 피네
直心可得太古音 직심가득태고음
一向鐵花去年枝 일향철화거년지
올바로워서 어지럽지 않으니 바탕은 뚜렷 밝을 새
구래새가 머리를 저으면 문득 날아오는구나
端正不亂體圓明 단정불란체원명
銅雀点頭却飛來 동작점두각비래
조촐한 도량은 어디메이런가
앞도 셋셋 뒤도 셋셋일러라
淨潔道場在何方 청결도장재하방
前三三與後三三 전삼삼여후삼삼
사람이 고르고 잡안이 고르고 세계가 고르니
돌말이라서 십만리를 뛰어 마치구나
人和家和世界和 인화가화세계화
石馬走破十萬里 석마주파십만리
이 소식에 흰 구름은 푸른 뫼에 걸치었네
권서(卷舒)가 자재(自在)하니 군마(群魔)가 자복(自伏)이요
강산(江山)에 봄이 드니 곳곳마다 잣나무네
白雲不離在靑山 백운불이재청산
淸平世界添一景 청평세계첨일경
侍經草堂瑞氣長 시경초당서기장
三寶幽然從此來 삼보유연종차래
흰구름은 무삼일로 푸른산을 안여의노
맑고밝은 이세계에 한경치를 더함이네
이경전을 모신집에 사기는왜 서리었노
하늘땅에 제일가는 삼보님이 온다시네
第十三(제십삼) 如法受持分(여법수지분)
第十三(제십삼) 如法受持分(여법수지분)
【본문】爾時(이시)에 須菩提(수보리) 白佛言하되 世尊(세존)이시여 當何名此經(당하명차경)이며 我等(아등)이 云何奉持(운하봉지)리까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시되 是經(시경)은 名爲金剛般若波羅蜜(명위금강반야바라밀)이니 以是名字(이시명자)로 汝當奉持(여당봉지)하라 所以者何(소이자하)오 須菩提(수보리)야 佛說般若波羅蜜(불설반야바라밀)이 卽非般若波羅蜜(즉비반야바라밀)일새 是名般若波羅蜜(시명반야바라밀)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有小說法不(여래유소설법부)아 須菩提(수보리) 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이시여 如來無所說(여래무소설)이시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三千大天世界所有微塵(삼천대천세계소유미진)이 是有多不(시유다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되 甚多(심다)니다 世尊(세존)이시여 須菩提(수보리)야 諸微塵(제미진)을 如來說非微塵(여래설비미진)일새 是名微塵(시명미진)이며 如來說世界(여래설세계)가 非世界(비세계)일새 是名世界(시명세계)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可以三十二相(가이삼십이상)으로 見如來不(견여래부)아 不也(불야)니다 世尊(세존)이시여 不可以三十二相(불가이삼십이상)으로 得見如來(득견여래)이니다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說三十二相(여새설삼십이상)은 卽是非相(즉시비상)일새 是名三十二相(시명삼십이상)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인)이 以恒河沙等身命(이항하사등신명)으로 布施(보시)하고 若復有人(약부유인)이 於此經中(어차경중)에 乃至受持四句偈等(내지수지사구게등)하여 爲他人說(위타인설)하면 其福(기복)이 甚多(심다)니라
제십삼 법다이 가짐 분
【번역】저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드리되 「세존이시여, 이 경을 마땅히 무엇이라는 이름으로 저희들이 받들어 가지오리까?」부처님이 수보리에게 고하시되 「이 경은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러한 이름대로 너희는 마땋히 받들어 가질지니라. 왜 그러냐면 수보리야, 부처가 말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오, 이 이름이 반야바라밀일새이니라. 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여래가 법을 말한 바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되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말씀하신 바가 없나니다. 」「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먼지를 많다 하겠느냐?」 수보리 말씀 여쭈되 「심히 많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모든 먼지는 여래가 말한 먼지가 아니오 이 이름이 세계니라.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느냐. 좋이 삼십이상으로서 여래를 뵈옵겠느냐?」「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으로서 여래를 뵈움은 옳지 않음이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습니까.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십이상은 곧 모습이 아니오 이 이름이 삼십이상일새입니다.」「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서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목숨으로써 보시를 하여도 만약 다시 사람이 있어서 이 경 가운데 이에 사구게 등이라도 받들어 가져서 남을 위하여 설명을 하면 그 복이 심히 많으니라.」
【강송】부처님의 말씀을 여기까지 들어 모신 장로는 한 권의 경정으로서의 그 의취가 갖추어져 있음을 크게 깨치시고 「세존이시여, 이 경을 마땋히 무엇이라는 이름으로 저희들이 받들어 가지오리까」여쭈셨다. 뒤의 중생을 위하신 물으심일 것이다. 부처님은 「이 경은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니 이러한 이름대로 너희는 마땅히 받들어 가질지니라. 왜 그러냐면 수보리야, 부처가 말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오, 이 이름이 반야바라밀이새니라」하셨다. 실로 이 경의 소식이야말로 물로 능히 적시지 못하고 불로 능히 태우지 못하나 천번 변하고 만번 변하여도 변하여서 가지 아니하여 물건마다 응하고, 천번 변하고 만번 변하여도 변하여서 또한 오지 아니하여 물건마다 응하니, 정식(情識)으로 이를 바 아니며 사량(思量)으로 용납할 바 아닌 문자성(文字性)까지라도 빈 금강반야바라밀인 소식이다. 만약 이 소식처를 들어내어서 좋이 설명할 수가 있다면 벌써 정법(定法)이니 당연히 명자(名字)가 있어야 할 것이다. 명자(名字)가 있으면 응당 수자상(壽者相)도 뛰쳐나오게 마련이니 무유정법(無有定法)이 아니므로 하여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 뜻대로의 금강반야바라밀은 아니라 하겠다.
부처님은 이렇듯이 문자성(文字性)까지라도 빈 금강반야바라밀은 무위청정(無爲淸淨)한 금강체(金剛體)이며 불생(不生) 불멸(不滅)하는 금강지(金剛智)인지라 이 슬기의 총명으로 하여금 중생의 우치심(愚痴心)인 생멸상(生滅想)을 멸진(滅盡)하면 허철영통(虛徹靈通)한 흉중(胸中)에 일법(一法)도 얻음이 없으면서 삼신불(三身佛)은 눈 앞에 나투울 것이니 이 바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복음처(福音處)인 소식임을 가리키시는 대목으로 알아두자.
부처님은 또다시 장로에게 고하시되 「여래가 법을 말한 바 있느냐」물으셨는데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말씀하신 바가 없나니다」라고 답을 올리셨다. 장로는 해공(解空) 제일인자(第一人者)이신데 어찌 설자(說者)는 무언(無言)이요 청자(聽者)는 무문(無聞)이란 의취를 모르시리요 마는, 말로는 비록 그러나 아난존자가 경을 결집(結集)한 이래 명구문신(名句文身)과 차별언사(差別言詞)가 서천(西天)에 넘치고 동방(東方)에 찼는데 황면노자(黃面老子)가 말씀함이 없으시고 아난존자가 들으심이 없다 시면 팔만장경(八萬藏經)은 도대체 누구의 입을 빌리고 누구의 귀를 지나서 나왔다는 말인가. 실로 유언(有言)이라도 비방을 이루고 무언(無言)이라도 용납이 안되므로 하여금 유문(有聞)이라도 비방을 이루고 무문(無聞)이라도 용납이 안된다는 것은 사리(事理)를 따져서 옳기는 옳다고 이르겠으나, 그러나 무언(無言)도 부처님네의 본심(本心)이 아니오 무문(無聞)도 중생들의 본의(本意)가 아닌 바엔 또한 사리(事理)를 따져서 유언(有言)을 옳다고 하겠는가 무문(無聞)을 옳다고 하겠는가. 험한 고개로다. 왜냐면 부처님의 뜻을 살필진댄 중생으로 하여금 얻은 바의 마음을 여위어서 보리심(菩堤心)을 내고 무생법(無生法)을 깨쳐서 무상도(無上道)에 들도록 하시는데 그 본회(本懷)가 계심으로 말미암아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셨지마는 부처님께서는 마음에 붙이는 바가 없으셨으니 무언(無言)이라겠고 장로께서는 마음에 얻은 바가 없으셨으니 무문(無聞)이라겠다. 이럴진댄 유언(有言)이 옳은가? 그렇다면 무언(無言)이 비방을 이룰 것이오, 무언(無言)이 옳은가? 그렇다면 유언(有言)이 용납이 안되는 소식처이며, 무문(無聞)이 옳은가? 그렇다면 유문(有聞)이 비방을 이룰 것이요, 유문(有聞)이 옳은가? 그렇다면 무문(無聞)이 용납이 안되는 소식처이니 고인(古人)도 이 대목에서는 「조용조용히 하라」고 쐐기를 찌른 것이다. 이 또한 무슨 곡절일까? 알겠구나! 일향(一向) 무소설(無所說)이 「하늘사람」「땅 사람」의 귀에 꽹과리 소리와 같이 들리니 나는 그만 이불이나 뒤집어쓰고 히죽히죽 웃기나 하리라.
부처님은 먼지가루 수의 세계(世界)를 비유로 무소설(無所說)을 밝히신다. 실로 일위일상(一位一相)인 본유(本有)의 일대지(一大地)가 의젓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삼계(三界)가 나투었고, 삼계(三界)가 나투었기 때문에 이에 먼지가루 수의 한없는 세계(世界)가 십방(十方)에 펴여져 있으나, 실에 있어서는 온갖 법(法)의 그 당처(當處)가 휘영청이 밝으면서도 비어서 걷어잡지 못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일불승(一佛乘)에서 삼승(三乘)을 설(說)하심에 따라 다함이 없는 법문(法門)이 쏟아져 나온다고 이를지라도 그 본유(本有)인 일불승(一佛乘)을 여의지 않으면 법법(法法)은 모두가 비어서 있는 바가 없음이니 오로지 메꽃․들꽃은 다 이 빈꽃이라는 소식이 아니겠으며, 이런즉 부처님이 처음에 사체(四諦)를 굴리시고 지금에 반야문(般若門)을 열어놓으심은 법(法)을 두어서 좋이 보이심이 계시고 말씀을 두어서 좋이 베푸심이 계신다. 이르겠으나 그러나 실제면으로 살핀다면 이(理)은 본래로 말이 없는지라 법(法)은 좋이 보이심이 없음이오 불(佛)은 본래로 마음이 없는지라 설(說)은 좋이 베푸심이 없음으로 말미암아서 티끌도 티끌이 아닌즉 이름도 이름이 아니오 세계도 세계가 아닌즉 삼승(三乘)도 삼승(三乘)이 아니니 바로 소부처 말부처가 이 참부처인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육조(六祖) 혜능대사(慧能大師)는 이르시되, 중생성(衆生性)중의 망령된 생각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중에 있는 바 가는 먼지가루 같아서 온갖 중생의 망령된 생각도 가는 먼지가루가 일고 꺼짐이 정지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성품은 가리어지고 해탈(解脫)을 얻지 못함이나 만약에 능히 생각 생각에 참되고 바름으로 반야바라밀을 닦고 무착(無着)․무상행(無相行)을 가져서 망령된 생각의 티끌인 수고로움이 다하면 맑고 조촐한 법의 성품인 것이며, 망령된 생각이 이미 없을진댄 곧 가는 먼지가루가 아니오 참이 곧 망령임을 알았을진댄 망령이 곧 참임도 알게 되는 것이니 이에 참과 망령이 다 꺼져서 가뭇도 없으면 별로 법(法)이 따로 있음이 없는 까닭으로 하여서 이 이름을 가는 먼지가루라 이름할 따름이며, 성품 가운데 먼지의 수고로움이 이미 없으면 곧 이 부처세계요 마음 가운데 먼지의 수고로움이 이에 있으면 곧 이 중생세계일지나 모든 망령된 생각이 공적(空寂)함으로 하여금 세계(世界)가 아니라 이름이요 여래법신을 증득(證得)함으로 말미암아 널리 진찰(塵刹)을 나투되 방위(方位)가 없이 씀을 이 이름이 세계(世界)라시니, 과연 선지식의 드높은 말씀이라겠다. 이럴진댄 먼지가 먼지 아니니 먼지마다가 정묘신(淨妙身)이요, 세계가 세계 아니니 세계마다가 황금국(黃金國)이로다. 세계마다가 이미 황금국(黃金國)임을 알았을진댄 다시 무엇 때문에 먼지가 아님을 말하며 먼지마다가 이미 정묘신(淨妙身)임을 알았을진댄 다시 무엇 때문에 먼지가 아님을 말할까보냐. 어허! 남섬부주(南贍部洲)가 여기에 있구나. 연화대(蓮花臺)의 소식도 향기롭기만 하네. 춤이나 추고 노래나 부르자.
이러히 모습이 모습 아니니 또한 부처도 부처가 아니오, 이러히 있음과 없음을 갖추어 세우지 않는데 이러히 천진면목(天眞面目)인 부처는 호올로 나투는 것이니 다시 어찌 이 장구(章句)를 의심할까보냐. 모름지기 여래의 삼십이상(三十二相)만에 쏠리지 말고 삼십이의 청정행(淸淨行)을 통하여 오근(五根)중의 육바라밀을 부지런히 닦아서 가면 의근(意根)중에 무상(無相)․무위행(無爲行)도 닦이이니 스스로가 꽃을 피우면서 성도(成道)를 약속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므로 하여서 만약 슬기눈이 없는 보시(布施)는 보살의 취할 바 정로(正路)가 아니라 이 바로 생사로(生死路)이니 부처님이 항하사수(恒河沙數)의 신명(身命) 보시(布施)라도 사구게(四句偈)의 한없는 공덕을 따르지 못하다고 이르신 것이다. 왜 그러냐면 무량겁중(無量劫中)의 신명보시(身命布施)라도 유위법(有爲法)이기 때문에 그 복덕이 비록 많기는 하나 자성(自性)위의 공덕이 못된다는 것이니 실로 요사이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예불(禮佛)과 염불(念佛)만 하여도 그렇다. 왜 그러냐면 자성(自性) 삼불(三佛)을 위한 염불(念佛)과 예불(禮佛)이 아니고 자성(自性) 밖을 향하여 마음에 새기는 어떠한 불보살을 그리고 연상하면서 구하고자하는 바를 애원(哀願)하는 염불(念佛)이요 예불(禮佛)이니 벌써 지혜가 빠지고 생명이 녹슬은 예불(禮佛)이요 염불(念佛)인지라, 자성(自性)을 밝혀내는 최상승(最上乘) 도리와는 그 거리가 먼 이승(二乘) 도리 중에서도 하질이라 하겠다. 물론 예불(禮佛)과 염불(念佛)은 불사(佛事)중의 당연사(當然事)인 법중(法中) 방편(方便)으로서 앞으로도 천고(千古) 만고(萬古)에 변할 수 없는 배불사상(拜佛思想)을 표시하는 좋은 수단이겠지마는, 불교(佛敎)의 참 면목(面目)인 생사업(生死業)을 녹여내는 구경위(究竟位)에 오르려면 먼저 예불(禮佛)을 통하여 흐리어진 앞생각을 가라앉히고 염불(念佛)을 통하여 거칠어지는 뒷생각을 맑힘으로서 자성(自性) 삼불(三佛)을 증득(證得)하려는 정견(正見)을 바탕으로 한 염불(念佛)이요 예불(禮佛)이여야 비로소 모든 불보살님의 가피력(加被力)도 있게 마련인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모든 불보살의 가피력(加被力)도 전념(前念)이 청청하고 후념(後念)이 담적(湛寂)한 성품의 보기(寶器)에 담기기 때문인 까닭이다. 만약 그렇지가 않고 삼독(三毒)이 심중(心中)에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구한다 하여서 가피력(加被力)이 있다면 이것은 벌써 사도(邪道)라 하겠으니 이러므로 하여서 설법(說法)은 최상승(最上乘) 도리를 여위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만 인연이나 맺으라는 식의 예불(禮佛)이요 염불(念佛)만을 강요하는 것으로서 유일한 지도방침으로 삼는 것은 미련한 중생에게 대하여 언뜻 생각할 때 일리(一理)는 있다고 하겠으나, 그러나 최상승도(最上乘道)에 오르는 안내사(案內辭)는 귓가를 적셔주지 못하는 것이니 속칭 사람이 말하는 기복(祈福)행위인 이승도리(二乘道理)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말은 의타적(依他的)인 염불(念佛)과 예불(禮佛)만을 고집하는 축에 대한 이야기지마는 슬기가 없는 방편(方便)과 총명이 녹슬은 수단(手段)으로 중생을 잘못 인도할 경우에는 그 죄가 크다는 것도 아울러 알아두자. 한 문제를 건다.
만약 너의 병든 양쪽 다리를 끊어내고 갓 죽은 일본 사람의 알맞은 다리로 바꾸어 붙여서 무병인(無病人)을 이루었을 때, 너의 어머니는 너의 어머니요, 너의 아내는 너의 아내요, 너의 자식은 너의 자식이라 일러도 좋겠는가?
좋다마다 이겠습니까.
만약에 이번에는 너의 병든 양쪽 팔을 끊어내고 갓 죽은 중국 사람의 알맞은 팔로 바꾸어 붙여서 무병인(無病人)을 이루었을 때 너의 어머니는 너의 어머니요, 너의 아내는 너의 아내요, 너의 자식은 너의 자식이라 일러도 좋겠는가?
좋다마다 이겠습니까.
만약에 이번에는 너의 병든 염통과 콩팥을 도려내고 갓 죽은 미국 사람의 알맞은 염통과 콩팥으로 바꾸어 넣어서 무병인(無病人)을 이루었을 때 너의 어머니는 너의 어머니요, 너의 아내는 너의 아내요, 너의 자식은 너의 자식이라 일러도 좋겠는가?
좋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이번에는 너의 병든 대장과 소장을 잘라내고 갓 죽은 영국 사람의 알맞은 대장과 소장으로 바꾸어 넣어서 무병인(無病人)을 이룰 때, 너의 어머니는 너의 어머니요, 너의 아내는 너의 아내요, 너의 자식은 너의 자식이라 일러도 좋겠는가?
좋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이번에는 너의 병든 허파와 간장․심장을 도려내고 갓 죽은 독일 사람의 알맞은 허파와 간장․심장으로 바꾸어 넣어서 무병인(無病人)을 이룰 때, 너의 어머니는 너의 어머니요, 너의 아내는 너의 아내요, 너의 자식은 너의 자식이라 일러도 좋겠는가?
좋겠지요.
만약에 이번에는 너의 병든 목구멍과 이․혀․뇌를 뽑아내고 갓 죽은 불란서 사람의 알맞은 목구멍과 이․혀․뇌로 바꾸어 넣어서 무병인(無病人)을 이룰 때, 너의 어머니는 너의 어머니요, 너의 아내는 너의 아내요, 너의 자식은 너의 자식이라 일러도 좋겠는가?
글쎄요
만약에 이번에는 너의 병든 눈알을 개 눈알로, 코는 원숭이 코로, 귀는 고무로, 머리털은 가발로 바꾸어 넣어서 무병인(無病人)을 이룰 때, 너의 어머니는 너의 어머니요, 너의 아내는 너의 아내요, 너의 자식은 너의 자식이라 일러도 좋겠는가?
큰일났습니다. 왜 그러냐면 나의 몸은 우리 어머니가 낳아 주신 나의 몸이 아니고 일본․중국․미국․영국․독일․불란서 사람 것이 확실하고 따라 개와 원숭이의 것임도 분명할 뿐 아니라 또는 남의 손을 빌려서 만들어진 것도 있으니 어머니를 어찌 나의 어머니라 이르겠으며 아내를 어찌 나의 아내라 이르겠으며 자식을 어찌 나의 자식이라 이르겠습니까. 이럴진댄 나는 누구이며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떤 물건입니까?
단단히 들어라. 이리 저리 모이어져서 다시 이루어졌지마는 몸뚱이란 본래로 성품이 없으면서도 법에 따라 줄곧 변하는 가죽주머니이니 어찌 정법(定法)이 있어서 국적을 말하고 인종을 가리랴. 다만 연(緣)에 따라서 뉘라도 쓰면 주인인지라 너의 색신(色身)인 줄로 알라. 왜나면 너에게는 보고 듣고 생각하는 놈이 있으니 이 바로 참 너인데, 이 놈은 본래로부터 빛깔도 소리도 없으면서 영특스리 맑고 밝으나 어떤 물건이라 일컬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러므로 부득이 마디말을 빌어 마음이니 성품이니 슬기이니로 부르는데 의젓하여 하늘과 땅이 나뉘기 앞의 소식으로서 부처도 얻어내지 못하나 중생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사리가 이렇듯이 분명하니 다만 너는 여자의 몸으로 바뀌어지지 않은 것만이라도 다행으로 생각하되 소중하게 맺어진 상대적인 인연을 의심하지 말고 어머니로서 존경하고 아내로서 아끼고 자식으로서 사랑함이 당연한 처사라 하겠다.
이 소식에 몸을 한번 뛰쳐라
목계(木鷄)가 홰를 치니 석인(石人)이 움직인다.
조용조용히 말하여라 남이 들을라.
梅枝片白足知春 매지편백족지춘
從此不疑天下事 종차불의천하사
一去一來無窮意 일거일래무궁의
哩哩囉囉本自然 리리라라본자연
매꽃이라 피었으니 봄소식이 분명쿠나
어즈버야 이렇던가 천하사를 의심하랴
한번가고 한번옴에 무궁한뜻 잠겼기로
리리라라 장단소리 그대로가 자연일레
第十四(제십사) 離相寂滅分(이상적멸분)
第十四(제십사) 離相寂滅分(이상적멸분)
【본문】爾時(이시)에 須菩提(수보리)가 聞說是經(문설시경)하시고 深解義趣(심해의취)하고 涕淚悲泣(체루비읍)하여 而白佛言(이백불언)하되 希有世尊(희유세존)이시여 佛說如是甚深經典(불설여시심심경전)하시니 我從昔來(아종석래)에 所得慧眼(소득혜안)으로는 未曾得聞如是之經(미증득문여시지경)이니이다 世尊(세존)이시여 若復有人(약부유인)이 得聞是經(득문시경)하고 信心淸淨(신심청정)하면 卽生實相(즉생실상)이니 當知是人(당지시인)은 成就第一希有功德(성취제일희유공덕)이니이다 世尊(세존)이시여 是實相者(시실상자)는 卽是非相(즉시비상)일새 是故로 如來說明實相(여래설명실상)이니이다 世尊(세존)이시여 我今得聞如是經典(아금득문여시경전)하고 信解受持(신해수지)는 不足爲難(부족위난)이어니와 若當來世後五百世(약당래세후오백세)에 其有衆生(기유중생)이 得聞是經(득문시경)하고 信解受持(신해수지)하면 是人(시인)은 卽爲第一希有(즉위제일희유)니 何以故(하이고)오 此人(차인)은 無我相(무아상) 無人相(무인상) 無衆生相(무중생상) 無壽者相(무수자상)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我相(아상)이 卽是非相(즉시비상)이며 人相(인상) 衆生相(중생상) 壽者相(수자상)이 卽是非相(즉시비상)이니 何以故(하이고)오 離一切諸相(이일체제상)이 卽名諸佛(즉명제불)이니이다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시되 如是如是(여시여시)니라 若復有人이 得聞是經(득문시경)하고 不驚不怖不畏(불경불포불외)하면 當知(당지)어다 是人(시인)은 甚爲希有(심위희유)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如來說(여래설) 第一波羅蜜(제일바라밀)이 卽非第一波羅蜜(즉비제일바라밀)일새 是名第一波羅蜜(시명제일바라밀)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忍辱波羅蜜(인욕바라밀)을 如來說(여래설) 非忍辱波羅蜜(비인욕바라밀)일새 是名忍辱波羅蜜(시명인욕바라밀)이니라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如我昔爲歌利王(여아석위가리왕)의 割截身體(할절신체)하여도 我於爾時(아어이시)에 無我相(무아상) 無人相(무인상) 無衆生相(무중생상) 無壽者相(무수자상)이었니라 何以故(하이고)오 我於往昔節節支解時(아어왕석절절지해시)에 若有我相(약유아상) 人相(인상) 衆生相(중생상) 壽者相(수자상)이었더면 應生瞋恨(응생진한)일러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又念(우념)하시고 過去於五百世(과거어오백세)에 作忍辱仙人(작인욕선인)할새 於爾所世(어이소세)에 無我相(무아상) 無人相(무인상) 無衆生相(무중생상) 無壽者相(무수자상)이니 是故(시고)로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은 應離一切相(응리일체상)하고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하되 不應住色生心(불응주색생심)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하고 應生無所住心(응생무소주심)이니 若心有住(약심유주)면 卽爲非住(즉위비주)니라 是故(시고)로 佛說菩薩心(불설보살심)은 不應住色布施(불응주색보시)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은 爲利益一切衆生(위이익일체중생)하여 應如是布施(응여시보시)니라 如來說一切諸相(여래설일체제상)이 卽是非相(즉시비상)이며 又說一切衆生(우설일체중생)이 卽非衆生(즉비중생)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如來(여래)는 是眞語者(시진어자)며 實語者(실어자)며 如語者(여어자)며 不誑語者(불광어자)며 不異語者(불이어자)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如來所得法(여래소득법)은 此法(차법)이 無實無虛(무실무허)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心住於法(심주어법)하야 而行布施(이행보시)하면 如人(여인)이 入暗(입암)에 卽無所見(즉무소견)이어니와 若菩薩(약보살)이 心不住法(심부주법)하여 而行布施(이행보시)하면 如人有目(여인유목)에 日光(일광)이 明照(명조)하여 見種種色(견종종색)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當來之世(당래지세)에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인)이 能於此經(능어차경)에 受持讀誦(수지독송)하면 卽爲如來(즉위여래) 以佛智慧(이불지혜)로 悉知是人(실지시인)하시여 悉見是人(실견시인)하나니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개득성췸무량무변공덕)이니라
제십사 모습을 여윈 적멸 분
【번역】저 때 수보리가 이 경의 말씀을 들으시고 깊이 의취를 깨달으사 눈물을 흘리어 슬피 우시면서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시되 「드무십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심히 깊은 경전을 말씀하심은 제가 옛적부터 얻은 슬기눈으론 일찍이 이러한 경을 얻어듣지 못하였나이다. 세존이시여, 만약 다시 사람이 있어서 이 경을 얻어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하면 곧 실다운 모습을 낳으리니,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로 드문 공덕을 성취함인 줄로 압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다운 모습이라 함은 곧 이 아닌 모습일새 이런고로 여래께서 실다운 모습이라 이름하여 말씀하심 이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러히 경전을 얻어듣고 믿어서 알며 받아 가지옵기는 족히 어렵지 않습니다 마는 만약 앞으로 오백세 뒤에 그 중생이 있어서 이 경을 얻어듣고 믿어 알고 받아 지니면 이 사람은 곧 제일로 드묾이겠습니다.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습니까. 이 사람은 아상이 없고 인상이 없고 중생상이 없고 수자상이 없음이니 어쩐바 이겠습니까. 아상이 곧 이 모습이 아니며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이 모습이 아님이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습니까. 온갖 모습을 여윔이 곧 모든 부처라 이름할새입니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고하시되 「그렇고 그러니라. 만약 다시 사람이 있어서 이 경을 얻어듣고 놀라지도 않으며 겁내지도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마땅히 알지어다, 이 사람은 심히 드묾이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 바라밀은 제일 바라밀이 아니오, 이 이름이 제일 바라밀일새이니라. 수보리야, 인욕바라밀도 여래가 말한 인욕바라밀이 아니오, 이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수보리야, 내가 옛적에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끊기어도 내가 저 때에 아상이 없었으며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이 없었으며 수자상이 없었느니라.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내가 옛적에 마디마디로 사지를 끊길 때에 만약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더라면 응당 성내고 원통하였으리라. 수보리야, 또 지난 오백세를 생각하매 인욕선인이 되었었는데 저 세상에서도 아상이 없었으며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이 없었으며 수자상이 없었더니라. 이런 까닭으로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온갖 모습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느니, 응당 빛깔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소리와 냄새와 맛과 닿질림과 요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지요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지니라. 만약 마음이 머묾 있으면 곧 들린 머묾이니, 이런 까닭으로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보살은 응당 마음을 빛깔에 머물지 아니한 보시를 하느니라 시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온갖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응당 이러히 보시를 하나니, 여래가 말한 온갖 모든 모습이 곧 이 모습이 아니며 또 말한 온갖 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이 참된 말을 하는 이며,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같은 말을 하는 이며, 속이는 말을 한하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법은 이 법이 실다움도 없고 허함도 없느니라.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러서 보시를 행할 지면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매 곧 보이는 바가 없는 것 같고, 만약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할 지면 사람이 눈이 있어서 햇빛이 밝게 비추매 가지가지 빛깔을 보는 것 같으니라. 수보리야, 장차 오는 세상에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서 능히 이 경을 받아 가져서 읽고 외우면 곧 여래께서는 부처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아시고 이 사람을 다 보시나니, 다 한량 없고 가없는 공덕을 얻어 성취하니라」
【강송】일대사(一大事) 인연으로 출세(出世)하신 부처님을 친히 눈 앞에 모신 장로 수보리는 눈물 콧물까지 흘리면서 슬피 우셨다. 누구를 위한 울음이실까? 부처님의 오백제자 중에서도 해공(解空) 제일인자(第一人者)로서 자타(自他)가 공인하는 큰 수보리시기도 하다. 일찍이 슬기눈까지 얻으시고 더욱이 오도(悟道)에 드신 경초(經初)에 있어서 번뇌를 완전히 끊으신 아라한이기도 한데 어찌 슬피 우셨을까? 혹시 옛적에 있어서는 성문(聲聞)의 슬기눈이었는데 오늘에 와서는 불의(佛意)를 깊이 깨달음으로써 그 기쁨을 참지 못함으로 울음이 터져 나온다고 우선 보나, 아울러 중생을 위한 울음이 그 뿌리라고도 믿어진다. 왜 그런가? 보살심(菩薩心)이시기 때문이다.
장차 장로는 눈물을 거두시고 「만약 사람이 있어서 이 경을 얻어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하면 곧 실다운 모습을 낳으리니, 마땋히 이 사람은 제일로 드문 공덕을 성취한 줄로 압니다」하고 부처님께 여쭈셨다. 좋은 말씀이다. 왜나면 청정한 가운데로 좇아 반야바라밀다의 심법(深法)인 실다운 모습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실다운 모습이란 아닌 모습으로서 좋이 봄․들음․깨침․앎으로써 구할 바 아니며, 좋이 빛깔․소리․냄새․맛․닿질림으로써 찾을 바 아니며, 이는 비유상(非有相)이요 비무상(非無相)이며 비비유상(非非有相)인지라, 이 실상묘체(實相妙體)가 아닐까 보냐. 고인(古人)도 이르되 「비록 색성(色聲)이 없다고 이르나 상상(相相)이 항상 완연(宛然)하고, 비록 항상 완연(宛然)하다 이르나 상상(相相)을 좋이 얻지 못하므로 무상(無相)이요 무공(無空)이요 무불공(無不空)이니 곧 이 여래의 진실상(眞實相)이라」셨다. 어즈버야! 스스로의 성품에 어리석음이 없으면 슬기눈이니 가지마다에서 여래의 진실상(眞實相)을 보고, 법을 들음에 스스로가 깨치면 법눈이니 물건마다에서 중생의 실상묘체(實相妙體)를 봄이로다.
장로 수보리는 확실히 후배(後輩)들의 선배(先輩)이시다. 의취(義趣)가 심오(深奧)한 이 경을 얻어듣고 믿어서 받아 가지기는 어렵지 않으나 오백세후(五百世後)의 중생이 걱정이신 모양이시다. 눈물과 콧물을 흘리면서까지 슬피 우시던 그 심정(心情)의 실마리가 비로소 풀려 나오는 것 같다. 후배(後輩)를 위한 선배(先輩)의 울음이면 얼마나 고마우신 울음인가. 천지(天地)가 동근(同根)이라니 이신동체(異身同體)인 중생을 제도함이란 큰 수보리이신 자신(自身)을 단장함이신가. 참으로 경의(經義)를 달관(達觀)하기란, 어렵다면 다섯 눈으로 능히 보지 못하고 두 귀로 능히 듣지 못하나 쉽다고 한다면 애꾸눈으로 좋이 볼 수 있고 짝귀로 좋이 들을 수도 있으니, 입을 열면 말귀 말귀마다가 진리(眞理)요 눈을 뜨면 조각 조각마다가 정토(淨土)인 것이나. 회광반조(回光返照)하여 우중(雨中)에서 달뜨는 거동을 보고 화리(火裡)에서 꽃피는 소식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장로수보리의 구슬픈 울음에 대한 보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렇듯이 그 정진(精進)에 따라 경의(經義)에 통하면 불의(佛意)를 깨치게 되고 불의(佛意)를 깨치게 되면 공리(空理)에 요달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실상(實相)을 간파(看破)한 제일공덕인(第一功德人)으로서 오백세(五百世) 뒤에라도 제일희유인(第一希有人)이라 이르지 않겠는가. 뿐이랴! 나아가서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은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아니고 그 이름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므로서 비상(非相)임을 알게 되는 것이니, 이렇다면 밥을 먹고 잠을 잠이 어찌 본래의 불사(佛事)가 아니라겠으며 뫼는 높고 물은 낮음이 어찌 본래의 소식이 아니라 하겠는가. 고인(古人)이 또 이르되 「부처가 삼신(三身)을 두시니 이 법신(法身)이냐. 이 보신(報身)이냐, 이 화신(化身)이냐? 저 비로자나 노한(老漢)의 머문 곳을 보라 셋도 아니오 하나도 아니나 셋이요 하나이니라」시고, 또다시 이르되 「만약 문수(文殊)로 하여금 도중(途中)에 오시지 않고 보현(普賢)으로 하여금 문득 청산(靑山)을 잊으셨다면 일찍 비로자나 노한(老漢)을 등짐이로다」시고, 거듭 이르되 「본래가 쌍으로 이루는 부자(父子)끼리의 동업(同業)인지라 이미 동업(同業)일진댄 가리사(家裡事)를 그리워하지 말고 즐거이 도중객(途中客)을 지으며 또한 도중(途中)을 그리워하지 말고 문득 가리(家裡)를 향하여 돌아갈지어다. 비록 이러나 도중(途中)이 가리사(家裡事)에 걸리지 않으며 가리(家裡)가 도중사(途中事)에 걸리지 않으니, 볼지어다, 문수(文殊)와 보현(普賢)이 왼쪽으로 돌고 오른쪽으로 도는지라 비로자나불의 얼굴엔 봄바람이 가득함이로다」셨으니 이 무슨 소식일까? 다 절대성을 놓치지 않으면서 상대성을 굴리고 상대성을 굴리되 절대성을 놓치지 않는 풍광(風光)으로 우선 받아 들이자.
실로 모든 법(法)이 본공(本空)임을 알고 경의(經義)를 요달하여 생사상(生死想)을 쓸어내면 겁내고 두려운 생각이 사라질 것이니 참으로 드묾이라 이르지 않겠는가!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본래로 부자(父子)가 동기(同氣)인지라, 어찌 일찍이 놀래고 겁내고 두려움인들 따로 있겠는가. 이러히 공리(空理)에 통달하면 입으로 이르고 마음으로 행하는데 따라 능소(能所)를 여의고 반연(攀緣)을 끊어낼 것이니 어찌 제일바라밀을 향상사(向上事)라 하여서 거기에 얽히며 제일바라밀이 아닌 향상사(向上事)라 하여 서 꺼리는 마음으로 향상(向上) 향하(向下)인들 논(論)하겠는가. 이 당처(當處)인지라, 바로 한산(寒山)은 채를 잡고 습득(拾得)은 춤을 추는 지음(知音)이니, 천하(天下)는 남의 천하(天下)가 아니고 나의 천하(天下)라겠다.
부처님은 사상(四相)을 여의는 뒷받침으로 숙세(宿世)에 가리왕(歌利王)에게 당했던 일을 상기(想起)시킨다. 「그때 만약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던들 응당 성내고 원통한 생각을 내었으리라」고 말씀하신 다음 또 다시 과거(過去) 오백세(五百世) 동안에 있어서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서의 육바라밀을 닦으실 그때에도 또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었음을 말씀하셨다. 비단 일생(一生)뿐 아니라 오백세(五百世) 동안에 걸쳐서 인욕바라밀을 닦으시며 사상(四相)이 되살아나지 않음을 성취하셨으니 미(迷)한 중생들에게는 크나큰 교훈을 내리시는 셈이시다. 이렇듯이 모습을 여의고 발심(發心) 수행(修行)을 하여서 나아가면 환망(幻妄)이 스스로 끊어질 것이요, 환망(幻妄)이 스스로 끊어지면 시비(是非)의 갈등(葛藤)은 어디에 붙을 것이며 빛깔․소리․냄새․맛․닿질림은 어디에 의존하겠는가.
이러므로 온갖 모습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는데 빛깔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소리와 냄새와 맛과 닿질림과 요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않음은 육진경계(六塵境界)에 증애심(憎愛心)을 일으키지 않음을 뜻한다. 만약 온갖 법(法)에 미워하고 쏠리는 마음을 일으키면 이로 말미암아 망령되이 마음이 쌓이고 모여서 한량없는 업(業)만을 지어내니 자연히 그 업(業)은 사람마다가 본래로부터 간직하고 있는 불성(佛性)을 덮고 만다. 이럴진댄 비록 어떤 생각으로 수행(修行)을 쌓아 올린다손 치더라도 그 마음의 때를 제하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해탈(解脫)을 얻지 못하는 것이니, 그 근본을 미루어 볼진댄 모두가 빛깔․소리․냄새․맛․닿질림․요량 따위에 마음이 머물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하여서 부처님의 일체처(一切處)에 머물지 말나시는 말씀은 모든 법은 물론이요 열반에도 머물지 말나시는 뜻이니, 만약 마음이 열반에 머문다면 보살이 될 수 없는 까닭에 나아가서 이승(二乘)을 크게 걱정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이러므로 보시를 하는데 있어서도 자신(自身)의 오욕락(五欲樂)을 위함이 아니고 다만 안으로 간탐심을 부수어서 밖으로 온갖 중생의 이익을 위하는데 있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참으로 간단한 말 같으나 실로 하근(下根)중생에게 있어서는 이해하기 곤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렇듯이 제상(諸相)이 본공(本空)하니 무생(無生)에 머물 것이요, 중생(衆生)이 본적(本寂)하니 무생(無生)을 제도하여야할 것이다. 무슨 뜻인가? 모습이 곧 모습이 아니므로 낳음도 곧 낳음이 아니오 죽음도 또한 죽음이 아니니, 생김도 아니고 꺼짐도 아닌 그 당처를 가르치심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아(人我)가 불생(不生)하고 각조(覺照)가 불멸(不滅)함이니 이것이 바로 불주(不住)에 머묾이요 무생(無生)을 제도함이 아니겠는가. 이 소식이 여래의 본령(本領)이요 여래의 본심(本心)이시니 「여래는 참된 말씀을 하시는 분이며 실다운 말씀을 하시는 분이며 같은 말씀을 하시는 분이며 속이는 말씀을 아니하시는 분이며 다른 말씀을 아니하시는 분이니라」하시고 다음에 「이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허함도 없느니라」하셨다. 여기에서 육조대사(六祖大師)의 말씀을 빈다면, 진어(眞語)는 일체(一切)의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이 다 불성(佛性)이 있음을 뜻함이요, 실어(實語)는 중생이 악업(惡業)을 짓는데 정하여진 고보(苦報) 받음을 뜻함이요, 여어(如語)는 중생이 선법(善法)을 닦는데 정하여진 낙보(樂報) 받음을 뜻함이요, 불광어(不誑語)는 반야바라밀법에서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나옴을 뜻함이요, 불이어(不異語)는 여래께서 초선(初善) 중선(中善) 후선(後善)을 설하신 바 있으신데 그 지의(旨意)가 미묘(微妙)하여 일체(一切) 천마(天魔)와 외도(外道)를 꺾으심을 뜻함이라고 이르셨다. 무실(無實)이란 법체(法體)가 공적(空寂)하므로 좋이 모습을 얻지 못함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항하(恒河) 모래수의 성덕(性德)이 있어서 써도 다함이 없는 까닭에 말하여 무허(無虛)이니 그 실(實)을 말하고자 할진댄 그 모습을 좋이 얻을 수 없고 그 허(虛)를 말하고자 할진댄 그 씀이의 틈이 없는 까닭에 있다고 하여도 얻지 못하며 없다고 하여도 얻지 못하므로 있으면서 있지 않음이요 없으면서 없지 않음이니 말머리가 미치지 못함이 오직 진지(眞智)인지라, 만약 모습을 여의고 수행(修行)을 아니하면 이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러므로 하여서 일체법(一切法)에 마음이 주착(住着)하면 삼륜(三輪)의 체(體)가 공(空)한 줄을 모르고, 마음이 법에 머물러서 보시를 행하면 사람이 암허(暗虛)에 들어서 소경과 같이 보이는 바가 없을 것이요, 마음이 법에 머물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하면 눈 있는 사람이 명처(明處)에 들어서 갖가지의 빛깔을 봄과 같을 것이요, 법(法)은 본래로 무허(無虛)하니 마땋히 무(無)에 머문즉 영명본용(靈明本用)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미 본체(本體)와 본용(本用)에 어긋난즉 성상만덕(性上萬德)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니 사람이 암실(暗室)에 듦과 같아서 소경을 면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겠는가.
이러히 앞으로 오는 세대(世代)를 여래멸후(如來滅後)의 오탁(汚濁)한 오백세(五百世)라면 사법(邪法)이 경기(競起)하고 정법(正法)이 난행(難行)이라 하겠는데,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經)을 받아 가져서 읽고 외우며 닦아 가면 불지견(佛知見)에 깨쳐 듦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능히 얻어 이룰 것이다. 어찌한 까닭이냐면 읽고 외움이 마음에 있고, 닦고 행함이 마음에 있고, 미하고 깨침이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실(實)로 죽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보통 마음의 씀이로는 안된다. 그야말로 삼세간(三世間)을 꿰뚫어서 생사관(生死關)을 뛰어넘는 묘기(妙機)를 주무르는데 있는 것이니, 어찌 안일(安逸)을 꾀하고 취미(趣味)를 살리고 지식(知識)을 넓히는 수단(手段)과 방편(方便)만으로서 이 문제가 다뤄질까 보냐.
여기 덧붙여서 말하여 둘 것은 부처님께서 숙세(宿世)에 산중선인(山中仙人)으로 인욕행(忍辱行)을 닦으실 때의 이야기다. 선인(仙人)은 어느 날 산록(山麓)의 푸른 그늘을 찾아서 연좌(宴坐)를 하시노라니 때마침 가리왕이 거느리고 사냥을 나온 궁중(宮中) 채녀(彩女)들은 왕이 낮잠을 자는 짬을 타고 몰려와서 우러러 줄곧 절을 한다. 옳거니! 환경에 따라서 그 마음의 씀이도 달라진다더니 오욕지(五欲地)에서 헤엄치는 채녀(彩女)들도 불연(佛緣)을 맺는구나!
잠에서 깨어난 왕은 이 꼴을 보고 성을 내면서 선인(仙人)이 앉은 곳으로 걸어가 소리를 높여 꾸짖되 「어찌하여 야릇한 마음으로 나의 계집들을 보느냐」하였다. 깜냥대로 노는 판이니 나름대로의 춤도 추겠지! 선인(仙人)은 태연히 「나는 실로 모든 여자에게 탐하는 마음이 없노라」하셨다. 히힛! 남녀의 앞소식에 사람이 잇고 사람의 앞소식에 내가 있구나! 왕은 「어찌하여 계집에게 탐하는 마음이 없는가」소리를 질렀다. 오욕락(五欲樂)이 전부이니 그렇고 말고! 선인(仙人)은 「계(戒)를 가짐이로다」 대답하였다. 보아도 눈에 안넣고 들어도 귀에 안거는 첨지런가! 분통이 터지면서 울화까지 곁든 왕은 「계(戒)를 가짐이란 무엇을 이름인가」다그쳐 묻는다. 알아서 행하면 성인(聖人)이나 모르고 행하지 않으면 범부(凡夫)일다! 선인(仙人)은 「인욕(忍辱)을 닦음이 바로 계(戒)를 가짐이로다」 대꾸를 던졌다. 히힛! 내가 없는 의취를 앎은 무엇이라지! 왕은 칼을 빼어들고 선인(仙人)의 몸을 벤 다음 「아프지 않은가」되씹었다. 아픔은 망식(妄識)이요 안 아픔은 무기(無記)니 어이 답하려노! 선인(仙人)은 태연히 「아프지 않노라」하였다. 흥! 동가인(同家人)이 죽으면 서가인(書家人)이 우는 줄을 모르시나! 분노와 질투로 떨리는 누런 칼은 선인(仙人)의 몸을 마디마디로 베고 「이리하여도 원한이 없는가」 쏘아 부쳤다. 에익! 화탕(火蕩)지옥의 무쇠문이 덜커덕 열린다. 선인(仙人)은 「내가 이미 없거늘 어찌 원한이 있겠는가」하였다. 하늘과 땅이 딱 붙었는데 어디에서 한 가닥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구나! 이때에 천신(天神)이 돌비를 쏟자 왕은 기절을 하고 선인(仙人)의 몸은 여전하였다. 가리는 범어(梵語)로 극악(極惡)이란 뜻이니 극악(極惡)과 극선(極善)의 대결에서 보리화(菩提花)는 피는가 보다. 한 문제를 걸기로 하자.
誰藏吾飯器 수장오반기
兩兩三三舊路行 양양삼삼구로행
捋虎鬚 날호수
不放過 불방과
뉘라서 내 밥그릇을 감추었노
둘둘 셋셋 옛길을 가는구나
범의 수염을 만짐이라
놓치지를 말아라
夜來寒潭月 야래한담월
照破開口以前事 조파개구이전사
冷眼看 냉안간
痴漢哭 치한곡
밤사이 차가운 못의 달은
입을 열기 전의 일을 비추었구나
차가운 눈은 보나
미련한 놈은 운다
이 소식에 가시가 돋쳤다
본래(本來) 무일물(無一物)은 육조대사(六祖大師)의 물건이요, 본래(本來) 무일물(無一物)이라 함도 틀린 것은 회양선사(懷讓禪師)의 물건이요, 본래(本來) 무일물(無一物)이라고 함도 틀린 것이 아님은 나의 물건이다.
無相爲宗吾家風 무상위종오가풍
雲捲四海共長天 운권사해공장천
若問法報化身佛 약문법보화신불
擧示去年枝頭花 거시거년지두화
모습없음 마루삼음 우리집안 풍속이니
덮힌구름 걷힐새라 하늘땅이 하나인걸
만약에다 법신보신 화신불을 묻거들랑
묵은가지 끝에피인 꽃을들어 보이려믄
第十五(제십오) 持經功德分(지경공덕분)
第十五(제십오) 持經功德分(지경공덕분)
【본문】須菩提(수보리)야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인)이 初日分(초일분)에 以恒河沙等身(이항하사등신)으로 布施(보시)하고 中日分(중일분)에 復以恒河沙等身(부이항하사등신)으로 布施(보시)하며 後日分(후일분)에 亦以恒河沙等身(역이항하사등신)으로 布施(보시)하여 如是無量百千萬億劫(여시무량백천만억겁)에 以身布施(이신보시)하되 若復有人(약부유인)이 問此經典(문차경전)하고 信心不逆(신심불역)하면 其福(기복)이 勝彼(승피)니 何況書寫受持讀誦(하황서사수지독송)하여 爲人解說(위인해설)이랴 須菩提(수보리)야 以要言之(이요언지)컨대 是經(시경)이 有不可思議不可稱量無邊功德(유불가사의불가칭량무변공덕)이니 如來(여래) 爲發大乘者說(위발대승자설)이시며 爲發最上乘者說(위발최상승자설)이시니라 若有人(약유인)이 能受持讀誦(능수지독송)하야 廣爲人說(광위인설)하면 如來(여래) 悉知是人(실지시인)하시며 悉見是人(실견시인)하사 皆得成就不可量不可稱無有邊不可思議功德(개득성취불가량불가칭무유변불가사의공덕)이니 如是人等(여시인등)은 卽爲荷擔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즉위하담여래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若樂小法者(약요소법자)는 着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착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일새 卽於此經(즉어차경)에 不能聽受讀誦(불능청수독송)하여 爲人解說(위인해설)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在在處處(재재처처)에 若有此經(약유차경)이면 一切世間天人阿修羅(일체세간천인아수라)가 所應供養(소응공양)이니 當知此處((당지차처)는 卽爲是塔(즉위시탑)이라 皆應恭敬(개응공경)하며 作禮圍繞(작례위요)하고 以諸華香(이제화향)으로 而散其處(이산기처)하나니라
제십오 경을 지니는 공덕 분
【번역】「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아침에 항하 모래수의 몸으로써 보시하며 낮에 다시 항하 모래수의 몸으로써 보시하며 저녁에 또한 항하 모래수의 몸으로써 보시하여 이러히 한량없는 백천만억겁을 몸으로써 보시할지라도 만약 다시 사람이 있어서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거스르지 아니하면 그 복이 저보다도 나으려든, 어찌 하물며 베껴 쓰거나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하여 알도록 말함이겠느냐. 수보리야, 요를 말할진댄 이 경을 좋이 생각할 수도 없고 좋이 칭량할 수도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으니 여래가 대승을 피운자를 위하여 말한 것이며 최상승을 피운자를 위하여 말한 것이니라. 만약 사람이 있어 능히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널리 남을 위하여 말하면 여래가 이 사람을 다 아시고 이 사람을 다 보시나니 좋이 헤아릴 수 없고 좋이 일컬을 수 없고 가이 없고 좋이 생각할 수 없는 공덕을 다 얻어 성취하나니, 이와 같은 사람들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짐이니라.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수보리야, 만약 작은 법을 즐기는 자는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에 부침일새, 곧 이 경을 능히 듣고 받아 외워서 풀어 말하지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곳곳마다 만약 이 경이 있다면 온갖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할 바이니, 마땅히 알지어다, 이 곳은 곧 이 탑인지라, 다 응당 공경하여 예배를 드리고 둘러싸서 모든 꽃과 향으로써 그곳에 뿌릴 것이니라.
【강송】부처님은 마지막까지 극다(極多)의 신명보시(身命布施)라도 이 경전을 베껴 써서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사람을 위하여 해설(解說)하는 그 공덕과는 비교가 아니된다는 말씀이시다. 사람의 간탐(慳貪)이란 땅덩이보다 더 두꺼운 것이 되어서 실오라기만큼의 보시(布施)라 할지라도 남을 위하여서는 외면(外面)을 하는 것이 보통이라 하겠는데 하물며 삼시(三時)를 통하여서 항하(恒河) 모래수의 신명(身命) 보시가 어찌 인간(人間)의 사량(思量)으로 분별(分別)인들 하겠는가마는, 그러나 자성(自性)위의 공덕과 직결되는 이 경전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불가칭량(不可稱量)한 무변공덕(無邊功德)과의 비교가 되겠느냐는 말씀이시다. 왜냐면 비록 일일(一日) 삼시(三時)의 극다(極多)인 신명보시(身命布施)의 그 복덕은 가볍지 아니하여서 극히 무겁고, 얕지 아니하여서 극히 깊고, 가깝지 아니하여서 극히 멀고, 적지 아니하여서 극히 많으나, 그러나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는 유위법(有爲法)인지라, 인천복보(人天福報)는 없지 않지마는 불법(佛法)은 꿈에도 엿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 경전의 공덕은 성중(性中)의 번뇌(煩惱)가 쉬고 심중(心中)의 아소(我所)가 끊어진 무위법(無爲法)이기에 그만 그대로가 허철영통(虛徹靈通)한 불심(佛心)인지라 삼세간(三世間)을 꿰뚫어서 생사(生死)를 오로지 여의는 소식이므로 그 리(理)는 뚜렷하고 그 사(事)는 평탄하고 그 도(道)는 지극하니 비상(非相)으로써 실상(實相)을 삼고 비반야(非般若)로써 실반야(實般若)를 삼는 불가사의․불가칭량의 가없는 공덕성(功德性)과는 비유가 아니 되기 때문이다. 이 공덕성(功德性)인지라 혓머리가 떨어졌으니 좋이 들내지 못하며, 마음 뿌리가 끊겼으니 좋이 일컬으지 못하며, 있고 없음이 망하였으니 좋이 재지 못하며, 착하고 악함이 쉬었으니 좋이 나투지 못하는 당처(當處)로서 내외(內外)가 비어서 시공(時空)이 없으니 마법(魔法)과 불법(佛法)이 자취를 감추었고 상하(上下)가 비어서 중간(中間)이 없으니 정도(正道)와 사도(邪道)가 판가름을 여읜 소식처(消息處)가 아닐까 보냐. 이 소식처(消息處)인지라 바로 한 주먹으로 환화성(幻化城)을 무찌르고 한 다리로 현묘관(玄妙關)을 뒤집으니, 어즈버야! 건곤(乾坤)이 실색(失色)이요 일월(日月)이 무광(無光)이로다.
여래께서는 대승(大乘)과 최상승(最上乘)을 위하여 말씀하신다 하셨다. 대승(大乘)이란 지혜가 광대(廣大)하여서 능히 일체법(一切法)을 건립(建立)함이요, 최상승(最上乘)이란 구법(垢法)을 좋이 싫어함을 보지 않으며 정법(淨法)을 좋이 구함을 보지 않으며 중생을 좋이 제도함을 보지 않으며 열반을 좋이 증득 함을 보지 않으며 중생을 좋이 제도하려는 마음을 짓지 않으나 또한 중생을 좋이 제도하지 않으려는 마음도 짓지 않음이니 이 이름이 최상승(最上乘)이며 또한 이 이름이 무생인(無生忍)이며 또한 이 이름을 대반야(大般若)라고 한다는 말씀은 육조대사(六祖大師)의 살림살이다. 일자(一字) 무식(無識)인 대사(大師)는 어디서 이러히 호호하면서 감히 지니지도 못하고 탕탕하여서 감히 버리지도 못하는 살림살이를 쏟아 놓으실까. 참으로 여래 문중의 가풍(家風)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러한 소식이 뛰쳐나올까 말이다.
이렇듯이 이 경은 상지(上智)를 위한 대승설(大乘說)이요 최상승설(最上乘說)이니 인연(因緣)에 따라 근기(根機)에 따라 복력(福力)에 따라 능히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하여 널리 설하는 사람은 여래께서 다 알고 다 보신다는 것이니 실로 여래의 재출현(再出現)으로서, 사상(四相)에 얽힘으로 말미암아 심법(心法)을 즐기는 이승(二乘)의 따를 바가 아닌 것이다. 슬기로써 바탕을 세우고 행으로써 씀이를 일으킴은 이 곧 문수(文殊) 보현(普賢)의 경계인지라, 어찌 소근(小根) 소지(小智)의 알 바이겠는가. 이러므로 하여서 입으로 반야를 외우고 마음으로 반야를 행하여서 항상 무위(無爲)․무상행(無相行)을 닦아 물리치지 아니하면 바로 이 사람의 마음 가운데는 의젓한 여래를 나투게 되는 것이니 이 바로가 여래의 아뇩보리(阿耨菩堤)를 짊어진 상지인(上智人)으로서 어지러운 세간에 부처님이 출현하신 바와 다름없는 것 이라겠다. 까닭에 이 사람이 있는 곳은 비록 초가삼간(草家三間)이라 할지라도 보탑(寶塔)을 모신 곳과 같으므로 일체(一切)의 인천(人天)이 공양하고 공경하여서 예를 지으며 향을 피우고 꽃을 흩을 것은 당연한 일이니 어찌 무량공덕이 아닐까보냐. 여기서 붓을 대소승(大小乘)으로 옮기어 보자면, 첫째, 염불(念佛) 주송(呪誦)을 통하여 현세(現世)의 수복(壽福)과 내세(來世)의 명복(冥福)을 소원(訴願)하는 것은 소승(小乘)이라 이르겠고, 둘째, 참선간경(參禪看經)을 통하여 심성(心性)의 계오(啓悟)를 꾀하는 것은 중승(中乘)이라 이르겠고, 셋째, 대의(大意)를 요달(了達)하고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육도만행(六度萬行)을 법(法)에 의하여 실천에 옮기는 것은 대승(大乘)이라 이르겠고, 넷째, 만법(萬法)에 진통(盡通)하여서 삼계(三界)를 뛰어넘고 생사(生死)를 잘 쓰되 일법(一法)도 얻은 바 없이 영지(靈知)가 독로(獨露)함은 최상승도(最上乘道)라 이르겠는데, 이에 대소승가(大小乘歌)를 달아보자.
앞으로의 좋은 복록(福祿) 누리기 위해
십선(十善)으로 묘인(妙因)삼아 닦아 나갈새
인천보(人天報)를 남을 주랴 낙과(樂果)라지만
윤회만은 못면하니 어이 하려노
안 밝음인 번뇌망상 없애기 위해
생멸법(生滅法)을 정인(正因)삼아 닦아 나갈새
사체묘문(四諦妙門) 공적(空寂)인양 성과(聖果)라지만
도(道)에 드는 방편밖에 쓸모가 있나
생사업(生死業)을 끊어내는 열반(涅槃)을 위해
육도만행(六度萬行) 대인(大因)삼아 닦아 나갈새
보리회향(菩提廻香) 이룸이니 정과(正果)라지만
정법(定法)인양 고집하단 또한 탈이네
우리집안 풍속이라 이와 달라서
인과(因果)마다 안 얽히인 본래부처라
법수레를 굴리면서 제도를 하니
휘영청이 밝은 누리 내몸일러라
이 소식은 풍파를 몰고 온다
迷情捨身(미정사신)하지 마라. 暗行御史(암행어사) 李夢龍(이몽룡)이 옥중(獄中) 춘향(春香)을 구해냈느니라.
焚身供養世所罕 분신공양세소한
誰然不過作人天 수연불과작인천
若透本智觀自佛 약투본지관자불
隻脚踏破八萬門 척각답파팔만문
몸을사뤄 공양한복 세간에선 드무오나
그래봐도 인천보를 벗어나지 못하느니
만약본래 슬기뚫고 제부처를 볼진대는
짝다리로 밟을새라 팔만문을 부수우리
第十六(제십육) 能淨業障分(능정업장분)
第十六(제십육) 能淨業障分(능정업장분)
【본문】復次(부차) 須菩提(수보리)야 善男子善女人(선남자선여인)이 受持讀誦此經(수지독송차경)하되 若爲人輕賤(약위인경천)하면 是人(시인)은 先世罪業(선세죄업)으로 應墮惡道(응타악도)언마는 以今世人(이금세인)이 輕賤故(경천고)로 先世罪業(선세죄업)을 卽爲消滅(즉위소멸)하고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我念(아념)하니 過去無量阿僧紙劫(과거무량아승지겁)에 於燃燈佛前(어연등불전)에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득치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하야 悉皆供養承事(실개공양승사)하야 無空過者(무공과자)니라 若復有人(약부유인)이 於後末世(어후말세)에 能受持讀誦此經(능수지독송차경)하면 所得功德(소득공덕)은 於我所供養(어아소공양) 諸佛功德(제불공덕)이 百分(백분)에 不及一(불급일)이 千萬億分(천만억분)과 乃至算數譬喩(내지산수비유)에 所不能及(소불능급)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善男子善女人(약선남자선여인)이 我若具說者(아약구설자)인데는 或有人(혹유인)이 聞(문)하고 心卽狂亂(심즉광란)하야 狐疑不信(호의불신)하리라 須菩提(수보리)야 當知(당지)하라 是經義(시경의)가 不可思議(불가사의)일새 果報(과보)도 亦不可思議(역불가사의)니라
제십육 업장을 맑힘 분
【번역】다시「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되 만약 사람을 업신여김인댄 이 사람은 먼저 세상의 죄업으로 응당 악도에 떨어질 것이지마는 지금 세상 사람이 업신여기는 까닭으로써 먼저 세상 죄업이 곧 사라지고 마땋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일지니, 수보리야, 내가 지난 무량 아승지겁을 생각하면 연등불 전에서 보람있게 팔만사천만억 나유타의 모든 부처님을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되 헛되이 지냄이 없었느니라. 만약 다시 사람이 있어 뒤 끝세상에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면 얻을 바의 공덕이 내가 모든 부처님에게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못 미치며 천만억분과 이에 셈수의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바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뒤 끝세상에 이 경을 받아 지녀서 읽고 외움이 있으면 얻는 바의 공덕을 내가 만약 갖추어 말한다면 혹은 사람이 있어서 듣고 곧 마음이 어수산란하여 여우같은 의심으로 믿지 않으리니, 수보리야 마땅히 알지어다. 이 경은 뜻도 좋이 생각지 못하거니와 과보도 또한 좋이 생각지 못하느니라」
【강송】이 분(分)에서는 까다로운 곡절이 감도는 듯하나, 그렇다고 하여서 별다른 뜻이 없으니 붓에 맡겨 내려가자.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가져서 읽고 외우되”의 다음 「若爲人輕賤(약위인경천)」을 「만약 사람을 업신여김인댄」으로 새기면 이는 유아인관(有我人觀)으로 보아야 옳다. 왜나면 색신(色身)을 진신(眞身)으로, 망심(妄心)을 진심(眞心)으로 보기 때문에 절대의 소식인 진신(眞身)과 진심(眞心)은 저절로 업신여기어질 것은 사실이다. 이렇듯이 뒤바뀐 여김은 온갖 모습놀이판에 휘둘리는 유아인관(有我人觀)이 세워지는데 따라 죄업(罪業)은 나투며 일어나고 보리도(菩堤道)는 가리어짐으로 말미암아 선세의 죄업으로 응당 악도에 떨어질 것이다. 다음「以今世人輕賤故(이금세인경천고)」를 「금세의 사람이 업신여기는 까닭으로써」로 새기면 이는 무아인관(無我人觀)으로 보아야 옳다. 왜나면 색신(色身)을 환신(幻身)으로, 망심(妄心)을 환심(幻心)으로 보기 때문에 상대의 나툼인 환신(幻身)과 환심(幻心)은 저절로 업신여기어질 것은 사실이다. 이렇듯이 올바른 여김은 온갖 법을 굴리는 무아인관(無我人觀)이 굳히어지는데 따라 죄업(罪業)은 한가로이 녹이어지고 보리도(菩堤道)는 스스럼없이 밝히어짐으로 하여금 선세의 죄업이 곧 사그라지고 마땅히 아뇩보리도를 얻어내지 않겠는가.
이렇듯이 문맥(文脈)을 쫓아서 붓을 옮겨 본다면 부처님은 오로지 무아인관(無我人觀)으로 하여금 유아인관(有我人觀)을 쓸어내시는데 본래의 회포가 있으심을 알고 이 분(分)을 읽어 내려가야 할 것이다. 진실로 사람이란 공리(空理)에 통달하지 못하고 유아인관(有我人觀)에만 사로잡혀서 은애(恩愛)의 바다에 떠돌고 사상(四相)의 산을 넘나든다는 것은 한낱 꿈속에서 일을 지어감인지라 인생(人生)을 포기함인 것이다. 망심(妄心)을 본심(本心)으로 색신(色身)을 진신(眞身)으로 그릇 인정하고서 무상(無相)인 실상(實相)을 업신여기고 유상(有相)인 환상(幻像)만을 무겁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온갖 죄업(罪業)만을 한없이 지어서 갈 뿐이니 색신(色身)만을 위한 탐욕행(貪欲行)으로서 보리도(菩堤道)와는 그 거리가 멀다 이르지 않겠는가. 그러나 되돌아 무아인관(無我人觀)을 밝혀 알고 환상(幻相)을 업신여긴다면 그대로가 부(富) 귀(貴) 빈(貧) 천(賤)은 뜬구름이요, 희(喜) 노(怒) 애(哀) 락(樂)은 흐르는 물결이요, 생(生) 노(老) 병(病) 사(死)는 번거로운 꿈 놀음에 지나지 않음을 깨칠 것이요, 나아가서 부처님이 중생에게 베푸시는 바의 자비심을 달게 여김은 오히려 법락(法樂)으로서의 즐거움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이니 이 바로 자성(自性)위의 공덕행(功德行)으로서 아뇩보리도와 직결되는 것 이라겠다. 이러므로 하여서 아뇩보리도를 이루려면 그 죄업(罪業)을 제하여야 하고, 그 죄업(罪業)을 제하려면 먼저 반드시 아인견(我人見)을 끊어냄으로써만이 된다. 왜 그러냐면 아인견(我人見)을 끊어내지 않고서는 피로 피를 씻는 격이니 어찌 본 바탕이 나타나겠는가 말이다. 이렇듯이 부처님의 그 올바르신 뜻을 받들어 무아리(無我理)에 통하고 능히 행하면 다시는 생사업연(生死業緣)을 짓지 않으므로 하여금 비로소 죄근(罪根)은 길이 녹아날 것이요, 이 죄근(罪根)이 아주 녹아나면 바야흐로 선세(先世)의 업(業)덩이가 무겁다해도 봄날의 얼음이니 위없는 불과(佛果)를 얻음이 당연하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에 이 경을 받아 지녀서 읽고 외움에 명문(名聞)과 이양(利養)을 탐하기 위한 짓이라면 정신심(淨信心)은 고사하고 무아행(無我行)은 변하여서 유아행(有我行)으로 놀아나게 마련이니 죄(罪)를 굴려서 성불(成佛)을 꾀함이 아니라 업(業)을 옮겨서 악도(惡道)를 지음인 까닭에 보리도를 얻지 못하는 이유도 또한 여기에 있는 것으로 알아두자.
또한 이적(理的)인 면에서 논하더라도, 선세(先世)는 곧 이 전념(前念)인 망심(妄心)이요 금세(今世)는 곧 이 후념(後念)인 각심(覺心)이니 후념(後念)인 각심(覺心)으로 하여금 전념(前念)인 망심(妄心)을 업신여기어서 그 망심(妄心)으로 하여금 능히 머물지 못하게 하면 선세죄업(先世罪業)은 소멸될 것이요, 망념(妄念)이 이미 없어지면 죄근(罪根)은 다시 심기어지지 않을 것이니 곧 보리도는 당당히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실로 무아리(無我理)는 생사업(生死業)을 녹여 내면서 보리도를 이루는 묘책이니 오로지 지경(持經) 공덕력(功德力)에 의존함은 당연한 사리(事理)라 하겠다.
부처님은 비유로 당신 자신(自身)이 과거세(過去世)에 있어서 쌓아 놓으신 공덕을 드신다. 부처님은 숙세(宿世) 아승지겁의 연등불전(燃燈佛前) 전에 계시면서 팔백사천만억(八百四千萬億)나유타나 되는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신 공덕이 계신다는 말씀이시다. 잠시 붓을 숫자로 옮겼다가 다음을 엮어가자. 십억을 일락차라 하고 백락차를 일구지라 하며 십구지를 일나유타라 일컬으니 팔백사천만억(八百四千萬億)나유타라면 이 얼마나한 숫자인가. 팔천사백경이란 놀라운 숫자가 나오는데 이 숫자는 애오라지 정사간(正邪間)에, 선악간(善惡間)에 사람마다가 항상 쓰고 있는 숫자라고 생각하면 우리들도 놀라운 존재라 하겠지마는 이렇듯이 어마어마한 복덕도 이 경을 받들어 지녀서 읽고 외우는 공덕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천만억분뿐 아니라 산수(算數)의 비유로도 미치지 못한다 시는 말씀이니, 상대성인 복덕은 절대성인 공덕을 따를 수 없다는 뜻이시다. 옳은 말씀이시다. 부처는 밖에서 구하지 말고 마음을 향하여 안에서 찾아야 한다. 수많은 부처님을 받들어 모심이 어찌 큰 공덕이 아니며 어찌 큰 복덕이 아니리요 마는, 그러나 마음 밖을 향하여서 달리었으니 자성(自性) 위의 일과는 그 거리가 천만리(千萬里)라 하겠다. 반면에 경의 가르치심을 듣고 능히 받아 가져서 읽고 외우며 스스로가 청정한 신심(信心)을 내어서 견성(見性)을 하면 바로 도(道)를 성취하고 생사업(生死業)을 끊어 내는데 어찌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던 그 복덕이 경을 받아 지니는 공덕에 비유가 되겠는가.
이러한 경의 공덕장(功德藏)인 여래의 정법(正法)은 상주불멸(常住不滅)하여 여래멸후(如來滅後) 후오백세(後五百世)에도 듣기만 한다면 능히 무상심(無相心)을 성취하고 아뇩보리를 얻건마는 혹은 성문(聲聞) 소견(小見)들은 그 마음이 어수산란하여 여우와 같이 의심하고 불신할 것으로 보아도 별도리가 없는 것이다. 한번 몸을 뛰칠 수 있는 알찬 사나이가 아니면 보아도 못 보는 소경이요 들어도 못 듣는 귀머거린 지라, 양약(良藥)이 입에 쓰나 마시지를 않을 것이요 충언(忠言)이 귀에 거슬리니 듣지를 않을 것이라, 차고 뜨거움을 어찌 스스로가 알겠는가.
돌아보건댄 경초(經初)에 「응당 이와 같이 머물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 받을지니라」이르신 것은 상근(上根)으로 하여금 보리심(菩堤心)을 밝히심이요, 그 다음에 구류중생(九類衆生)의 멸도(滅度)를 보이신 뒤 실로 멸도자(滅度者)가 없다고 이르시어 사상(四相)을 부수신 것은 중근(中根)으로 하여금 보리심(菩堤心)을 밝히심이요, 또다시 말씀을 이곳까지 이끌어 오신 것은 하근(下根)을 위하시고 그 의심처를 가지가지로 쫓아 이리 몰고 저리 몰아서 보리도(菩堤道)로 이끄시는 것으로 보아두자. 이러므로 인연이 순숙(淳熟)한 상근(上根)은 제일법문처(第一法門處)에서 보리도(菩堤道)에 들 수 있는 것이요, 인연이 미숙(未熟)한 중근(中根)은 제이법문처(第二法門處)에서 보리도(菩堤道)에 들 수 있을 것이요, 하근(下根)이라도 이 경을 의심하지 말고 여래정법(如來正法)으로만 닦아서 가면 제삼법문처(第三法門處)에서 보리도(菩堤道)에 들 수가 있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니 세계의 많은 사람 가운데서 이 제삼법문처(第三法門處)만이라도 이해하고 달려드는 이가 얼마나 될는지 의심스럽다. 이 법은 본래가 평등하나 다만 미오(迷悟)의 차이로 등분(等分)이 지어지는 것이니 사나운 정진을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 문제를 거는데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다른 문자(文字)로 달아 보라. 만약 틀림이 없다고 생각되면 눈 밝은 이에게 물어 보기를 바란다.
【묻는다】
가는 것도 아니오 오는 것도 아닌 곳에, 산 자는 무엇이며 죽는 자는 무엇인가?
【답이라】
태산이 눈을 부릅뜨고 오니
녹수는 귀를 가리고 가누나
【문】不去不來處(불거불래처) 生者何物(생자하물) 滅者何物(멸자하물)
【답】泰山刮目來(태산괄목래)
綠水掩耳去(녹수엄이거)
【묻는다】
마음 밖에 법 없는데, 미한 자는 무엇이며 깨친 자는 무엇인가?
【답이라】
옛 길에 풀은 스스로가 푸르렀으니
바름과 삿됨을 아울러 안 쓰네
【문】心外無法處(심외무법처) 迷者何物(미자하물) 悟者何物(오자하물)
【답】古路草自靑(고로초자청)
正邪俱不用(정사구불용)
【묻는다】
너와 내가 비었는데, 말하는 자는 무엇이며 듣는 자는 무엇인가?
【답이라】
만약 오늘 일을 논의하면
문득 옛 때 사람을 잊으리
【문】人我皆空處(인아개공처) 說者何物(설자하물) 聽者何物(청자하물)
【답】若論今日事(약론금일사)
忽妄舊時人(물망구시인)
이 소식에서 허공의 한 모퉁이를 들어내자
백천삼매(百千三昧)와 무량묘의(無量妙意)가 다 일념이(一念裡)에서 나오는데 무슨 걱정이냐. 암 그렇고 말고! 천당(天堂) 지옥(地獄)도 제가 지어서 제가 들어앉는데!
堯舜禹湯是何物 요순우탕시하물
有情三月石頭花 유정삼월석두화
世人不知生死路 세인불지생사로
夢裡靑山求壽福 몽리청산구수복
옛날옛적 요순우탕 어떠하온 물건인고
뜻을둘새 삼월이라 돌위에핀 꽃이더라
어즈버야 세상사람 생사길을 모르단가
꿈속이라 청산에서 수복만을 구한고야
第十七(제십칠) 究竟無我分(구경무아분)
第十七(제십칠) 究竟無我分(구경무아분)
【본문】爾時(이시)에 須菩提(수보리) 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이시여 善男子善女人(선남자선여인)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인데는 云何應住(운하응주)며 云何降伏其心(운하항복기심)이니이까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시되 若善男子善女人(약선남자선여인)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인대는 當生如是心(당생여시심)하되 我應滅度一切衆生(아응멸도일체중생)하리라하라 滅度一切衆生已(멸도일체중생이)하여서는 而無有一衆生(이무유일중생)도 實滅度者(실멸도자)니라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有我相(유아상) 人相(인상) 衆生相(중생상) 壽者相(수자상)이면 卽非菩薩(즉비보살)이니라 所以者何(소이자하)오 須菩提(수보리)야 實無有法(실무유법)일새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가 於燃燈佛所(어연등불소)에 有法(유법)하여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부)아 不也(불야)니다 世尊(세존)이시여 如我解佛所說義(여아해불소설의)로는 佛(불)이 於燃燈佛所(어연등불소)에 無有法(무유법)하야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이다 佛言(불언)하시되 如是如是(여시여시)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實無有法(실무유법)일새 如來(여래)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有法(약유법)하여 如來(여래)가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인데는 燃燈佛(연등불)이 卽不與我授記(즉불여아수기)하사되 汝於來世(여어내세)에 當得作佛(당득작불)하면 號(호)를 釋迦牟尼(석가모니)련마 以實無有法(이실무유법)일새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 是故(시고)로 燃燈佛(연등불)이 與我授記(여아수기)하시고 作是言(작시언)하시되 汝於來世(여어내세)에 當得作佛(당득작불)하면 號(호)를 釋迦牟尼(석가모니)라하시니라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者(여래자)는 卽諸法(즉제법)에 如義(여의)니 若有人(약유인)이 言(언)하되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하면 須菩提(수보리)야 實無有法(실무유법)일새 佛(불)이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여래소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於是中(어시중)에 無實無虛(무실무허)니라 是故(시고)로 如來(여래) 說一切法(설일체법)이 皆是佛法(개시불법)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所言一切法者(소언일체법자)는 卽非一切法(즉비일체법)일새 是故(시고)로 名(명)이 一切法(일체법)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譬如人身(비여인신)이 長大(장대)니라 須菩提言(수보리언)하되 世尊(세존)이시여 如來說人身長大(여래설인신장대)는 卽爲非大身(즉위비대신)일새 是名大身(시명대신)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도 亦如是(역여시)하여 若作是言(약작시언)하되 我當滅度無量衆生(아당멸도무량중생)이라하면 卽不名菩薩(즉불명보살)이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實無有法(실무유법)을 名爲菩薩(명위보살)이니라 是故(시고)로 佛說一切法(불설일체법)이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作是言(작시언)하되 我當莊嚴佛土(아당장엄불토)라하면 是不名菩薩(시불명보살)이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說莊嚴佛土者(여래설장엄불토자)는 卽非莊嚴(즉비장엄)일새 是名莊嚴(시명장엄)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通達無我法者(통달무아법자)인데는 如來(여래)가 說名眞是菩薩(설명진시보살)이니라
제십칠 마침내 나 없음 분
【번역】저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시되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오니 어떻게 응당 머물게 하오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게 하오리까?」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고하시되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을진댄 마땅히 이런 마음이 날 것이니, “내가 응당 온갖 중생을 멸도하였으나 온갖 중생을 멸도하여 마쳐서는 한 중생도 실로 멸도한 자가 있지 않으니라.”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만약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을진댄 곧 보살이 아니니, 그런 바는 무엇이겠느냐.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지 아니함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냄이니라. 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여래가 연등불 처소에서 법이 있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겠느냐?」「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 뜻을 제가 아옴 같아서는 부처님이 연등불 처소에서 법이 있지 아니함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심 이니다.」부처님이 말씀하시되 「그렇고 그러니라.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지 아니함으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음이니, 수보리야, 만약 법이 있음으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음일진댄 연등불께서 곧 나에게 수기를 주시와 너는 오는 세상에 마땋히 부처를 짓되 호를 석가모니라 아니하셨으련만, 실로 법이 있지 아니함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 일새 이런 까닭으로 연등불께서 나에게 수기를 주시와 이러한 말씀을 하시되 “너는 오는 세상에 마땋히 부처를 지어 얻어서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 시었으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여래란 곧 모든 법에 듯하다는 뜻이니라. 만약 사람이 있어서 말하되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라면,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지 아니함으로 부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니,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이 가운데 실다움도 없고 허함도 없느니라. 이런 까닭으로 여래가 온갖 법은 다 이 불법이라고 말씀하심이나. 수보리야, 말씀하신 바 온갖 법이란 곧 온갖 법이 아님일새, 이런 까닭으로 온갖 법이라 이름함이니, 수보리야, 비유하자면 사람의 몸이 큼과 같으니라.」수보리가 여쭈되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의 몸이 큼은 곧 큰 몸이 아님일새, 이 이름이 큰 몸이니다.」「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러하여 만약 이런 말을 짓되 “내가 마땋히 무량중생을 멸도하였다”면 곧 보살이라 이름하지 않으리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지 아나함으로 이름하여 보살이니, 이런 까닭으로 부처님께서 온갖 법을 말씀하심에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다 심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이런 말을 짓되 “내가 마땅히 불토를 장엄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나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여래가 말씀하신 장엄불토란 것은 곧 장엄이 아니오, 이 이름이 장엄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나와 법이 없음을 통달할진댄 여래가 말씀하신 참 이 보살이라 이름하리라.」
【강송】이 법문부터는 문밖의 법문처(法門處)라 이름할까. 이 대목은 경초(經初)로 거슬러서 올라가는 것 같은 내음새를 피우나 실은 그렇지도 않다. 부처님께서는 상(上) 중(中) 하(下)의 근기(根器)에 따라 대병투약식(對病投藥式)인 설법으로 횡설수설하신 자비심에 힘입어 선남자선여인들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의 본지풍광(本地風光)에 돌입(突入)한 셈이라 하여두자. 그런데 장로 수보리는 경초(經初)의 문처(問處)에 있어서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낼새 「응당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하오리까」여쭈었다. 다만 경초(經初)에 있어서는「응당」이「어떻게」의 위에 놓이고 이 목에 있어서는「응당」이「어떻게」의 밑에 놓인 것이 다른 점이라 할까. 이에 따라 부처님은 경초(經初)에 답처(答處)에 있어서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을진댄 「응당 이러히 머물며 이러히 그 마음을 항복하느니라」하셨고 이 목인 답처(答處)에서는 삼보리심(三菩堤心) 밑에 자자(者字)를 더하여 기정사실로 인정하신 다음 「마땅히 이러한 마음이 날 것이니」하셨다. 이 당처(當處)인지라 능소심(能所心)을 여윈 본래지심(本來智心)을 말씀하시는 소식처(消息處)라 일컬으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앞에 있어서의 문답처(問答處)와 뒤에 있어서의 문답처(問答處) 사이에는 어떤 거리가 있음같이 느껴지나 문답의 설왕설래(說往說來)에 있어서 그 때와 그 기틀을 살렸을 뿐 별다른 의취(義趣)가 따로 없다고 보아진다. 왜 그러냐면 이렇다. 앞의 문답처(問答處)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씨」를 기르는데 대한 문답이며, 뒤의 문답처(問答處)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씨」가 꽃을 피우게 되었음으로 하여금 그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소식이 아니실까. 다 분별에서 나오는 말귀이다. 입을 별리면 씨와 꽃과 열매가 제각기 놀아나니 그 만 붓을 옮기자.
모든 중생을 멸도(滅度)함이란 온갖 중생지견(衆生知見)을 쓸어냄이요, 온갖 중생지견(衆生知見)을 쓸어냄이란 부처지견을 깨우침이요, 부처지견을 깨우침이란 아뇩보리도를 성취시킴인데, 부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본래의 소식을 접하여 알았다면 그만 그대로가 지극히 미묘하여서 맑은 성품의 슬기만이 있을 따름이다. 이 지극히 미묘하여서 맑은 성품의 슬기자리에는 인아(人我)가 끊어졌고 능소(能所)가 다한 자라로서 인가(印可)를 내릴 사람도 받을 사람도 없고 멸도(滅度)를 시킬 사람도 얻을 사람도 없다. 만약에 있다면 사상(四相)이 뛰쳐나오니, 지극히 미묘하여서 맑은 성품의 슬기 자리는 아닌 것이다. 이러므로 부처님은 앞에서 「자그마한 법도 얻음이 없을 새」이르시고, 여기서도 「온갖 중생을 멸도하여 마쳐서는 한 중생도 실은 멸도한 자가 있지 않느니라」이르신 것이다. 실로 유법(有法)인 사상(四相)에 얽히면 보살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므로 부처님께서 연등불(燃燈佛) 앞에서 수기(授記)를 받으신 것도 모든 중생을 멸도(滅度)하신 것도 온갖 모습을 여윈 무유법(無有法)의 소식처(消息處)이기 때문에 주고받음이란 언구상(言句相)인들 어디에 붙겠는가. 다만 생각 생각은 비추되 항상 적적하고 적적하되 항상 비춤으로 하여금 육진경계(六塵境界)를 대할지라도 더럽히지 않고 물들리지 않고 온갖 법을 굴릴 따름이니, 이 당처(當處)가 곧 부처님이 말씀하신 「여래란 곧 모든 법에 듯 하느니라」는 소식으로서, 다시 말하면 의젓한 「뜻」 곧 「여의(如義)니라」는 의취이니 이 바로가 진여(眞如)요, 이 바로가 불심(佛心)이요, 이 바로가 일행삼매(一行三昧)인 여래(如來)의 풍광(風光)이라 하겠다.
이렇듯이 지극히 미묘한 여래의 풍광(風光)을 접할 때 비로소 중생들은 멸도(滅度)를 얻은 것이 아닐까, 아닌 본래로부터의 법신(法身)인 중생에게 멸도이니 열반이니도 다 당찮은 말이며, 따라 부처님이 멸도하여 미치셨다는 말씀도 군더더기가 아닐까. 왜냐면 중생은 중생이 아니며 그 이름이 중생이란 그 중생을 멸도하여 마치었다는 관념(觀念)이 털끝만치만 있어도 벌써 수자상(壽者相)이 머리를 들므로 하여금 부처도 중생으로 떨어지는 판이니 보살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만약 제도할 중생이 있음을 본다면 이것은 곧 아상(我相)인 것이요, 능히 중생을 제도할 마음이 생긴다면 이것은 곧 인상(人相)인 것이요, 열반을 좋이 구하려는 생각이 있으면 이것은 곧 중생상(衆生相)]인 것이요, 열반을 마침내 증명함이 있음을 보면 이것은 곧 수자상(壽者相)이니, 이렇게 사상(四相)의 그물에 얽히고 설키어서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 다투어 온갖 곳에 일어나는데 어찌 그 마음씨가 맑고 깨끗한 보살이라 이름하겠는가.
이러므로 부처님은 「여래의 얻은 바 아뇩보리는 이 가운데 실다움도 없고 허함도 없느니라」이르신 것이다. 실로 보리도(菩堤道)는 무유법(無有法)인 까닭에 다만 석가모니불께서는 연등불께서 계오(啓悟)하시는 수단(手段)의 연(緣)을 비심으로 말미암아 본지풍광(本地風光)을 접하심에 얻음이란 말귀로 표시를 하심이요, 연등불께서는 석가모니불께서의 대각(大覺)을 인증(印證)하시는 뜻으로 하여금 수기(授記)라는 말귀로 표시를 하신 것 뿐이시라겠다. 여기에서 만약에 불의(佛義)를 들어 말하자면, 오직 모든 모습을 여위어서 오고 감이 끊기었으므로 하여금 시방계(十方界)를 다하였으나 도무지 이 일신(一身)에 지나지 않는데 어느 곳에 두 모습을 두어서 전하는 이와 받는 이를 따로 설정하겠느냐는 뜻이시다. 그러나 만약 법의(法義)를 든다면 삼라만상(森羅萬像)은 차별상(差別相)이요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분별심(分別心)으로서 쓰고 써도 방해롭지 않으니, 이곳에 어찌 말씀과 들으심이 없겠으며 전하심과 얻으심인들 없겠는가. 이러므로 이르시되 「이런 까닭으로 여래가 온갖 법은 다 이 불법이라 말씀하시느니, 수보리야, 말씀하신 바 온갖 법이란 곧 온갖 법이 아닐새, 이런 까닭으로 온갖 법일라 이름함이니라」하셨다. 무실(無實)인즉 법법(法法)은 성품이 없으므로 하여금 안으로는 신근(身根)과 밖으로는 기계(器界)가 서로 서로 다 허망하여 살림을 꾸려가지 못하겠지마는, 무허(無虛)이므로 법법(法法)은 자리를 의지하여 머물면서 학다리는 길고 오리다리는 짧으며 솔나무는 곧고 대추나무는 굽어서 서로 서로가 세락(世樂)을 즐기며 이에 우불(牛佛) 마불(馬佛)과 남불(男佛) 여불(女佛)도 제각기의 법락(法樂)을 즐길 따름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온갖 법은 법이 아니고 그 이름 뿐인 법이니 육조(六祖)의 말씀을 듣기로 하자. 능히 모든 법에 있어서 마음에 취사(取捨)가 없고 또한 능소(能所)가 없으면 치연(熾然)히 온갖 법을 건립(建立)하되 마음이 항상 공적(空寂)하느니, 까닭에 온갖 법은 다 이 불법(佛法)인 줄로 알겠거니와 미자(迷者)가 온갖 법에 탐착(貪着)함으로 불법(佛法)을 삼을까 두려워하시고 이 병(病)을 보내기 위한 고로(苦勞)의 말씀이신 즉 곧 온갖 법이 이니라 심이요, 마음에 능소(能所)가 없어서 적적하여 항상 비추면 정혜(定慧)가 가지런히 행하여지고 체용(體用)이 한결같음 일새 이런고로 온갖 법이라 이름함이니라 이르셨다. 옳은 말씀이다. 이러기 때문에 불(佛)은 비불(非佛)이며 비비불(非非佛)이요, 법(法)은 비법(非法)이며 비비법(非非法)이라 일컬으겠으니, 어즈버야, 산하대지(山河大地)는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아니면서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아님도 아니로구나, 에익! 닻줄을 감아라.
인신장대(人身長大)도 또한 이렇다. 중생의 법신(法身)을 뜻하심이니, 법신(法身)은 본래로 모습이 없으니 큰 몸이 아니라 심이요, 법신(法身)은 둘이 아니면서 한량이 없으니 큰 몸이라 이름하심이다. 또는 색신(色身)이 비록 큰 몸이나 안으로 슬기가 없으면 큰 몸이 아니오, 색신(色身)이 비록 작으나 안으로 슬기가 있으면 큰 몸이라 이름하겠다. 만약 슬기가 있더라도 행하지 아니하면 중생지견(衆生知見)인지라 큰 몸이라 이름할 수 없으나, 만약 슬기가 있어서 행하되 위없는 보리도(菩堤道)에 오르면 부처지견인지라 큰 몸이라 이름하지 않겠는가. 이렇듯이 슬기가 없으면 법신(法身)은 법신(法身)이라도 색신(色身)은 면하지 못할 것이요, 이렇듯이 슬기가 있으면 색신(色身)은 색신(色身)이라도 가이 없는 법신(法身)으로서 중생을 멸도(滅度)하여 마쳐서는 법아(法我)가 끊어졌으니 보살이라 이름하겠고, 세계를 건립(建立)하여 마쳐서는 능소(能所)를 여의였으니 보살이라 이름하겠다. 그렇지가 않고 만약 법아견(法我見)과 능소심(能所心)을 간직하고는 중생의 멸도(滅度)도 세계의 건립(建立)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마는, 설혹 이루어졌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벌써 유주(有住)․유상(有相)․유아행(有我行)으로서 자신(自身)도 모르는 사이에 중생을 오도(誤導)하고 세계를 혼탁(混濁)시키는 결과밖에 가져올 것은 없으니 도리어 죄(罪)는 크다고 이르겠다. 이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무아법(無我法)에 통달하여야 참 보살이라 이르신 것이나. 이럴진댄 되돌아서 참보살님을 어디서 만나 뵙겠는가. 실로 얻는 바의 마음이 있으면 삼계(三界)를 다 뒤져도 못 만나 뵙는다. 그러나 얻는 바의 마음이 없으면 뜰 앞에 핀 꽃잎에서도 만나 뵙고 시냇가에 흐르는 물소리에서도 만나 뵙고, 뿐이라, 글귀와 말마디에서도 만나 뵈옵느니라. 알겠는가! 이 소식인지라 허공이 내려앉으니 속히 거두어 들여라. 십이인연곡(十二因緣曲)을 단다.
뚜렷맑은 성품슬기 지견(知見)세울새
것흐르는 한줄기의 검붉은뜻은
법에따라 번지이는 안밝음이네 무명(無明)
어느사이 안밝음은 자리잡히고
저도모른 버릇만이 굳히어지며
굴리이는 그대로가 다님이라네 행(行)
느낌대로 옮기이는 다님이라서
어이할손 새생애(生涯)의 바탕이되니
십이연중(十二緣中) 으뜸인양 알이라하네 식(識)
앎과낳음 따로없는 그성품이나
알이로써 분별지어 알고낳으니
망심(妄心)이요 환질(幻質)로서 이름인빛깔 명색(名色)
인연따른 이름빛깔 태(胎)에들며는
비롯하여 흐리멍덩 모습을두니
첫 육근(六根)이 이뤄지는 여섯듦이네 육입(六入)
여섯듦이 갖추어져 세간에나면
알쏭달쏭 휘둘림이 모두이라서
살림살이 시작되는 닿질림이네 촉(觸)
닿질리는 그대로만 딸리어가며
꿈속같은 온경계를 거느려대고
눈물콧물 안가리는 받음이라네 수(受)
온갖법을 실답다고 받아들이고
거울속의 눈꼬리를 알랑거리며
이리뛰고 저리뛰는 쏠림이라네 애(愛)
쏠림이란 무엇인가 아편꽃인가
나와내것 놀음판에 세월이가니
천하(天下)것을 거두려는 가짐이라네 취(取)
가지려는 탐심에도 날개가돋혀
사람에게 뒤질손가 앞을다투니
선악업(善惡業)만 맺어내는 둠이라하네 유(有)
둠이라서 물위에뜬 거품이러니
이몸둥일 아껴봤든 하루살이라
육도(六途)속을 헤엄치는 삶이라하네 생(生)
삶이라서 황천길의 출발점이니
두렵고도 놀람인들 어이없으랴
서글프다 이름하여 늙고죽음가 노사(老死)
이 소식에 입을 열면 죄가 많다
만법(萬法)이 귀일(歸一)하니 일귀(一歸)는 하처(何處)런고
낙동강(洛東江) 칠백리(七百里)에 물새가 운다
燃燈閣中密意圓 연등각중밀의원
劫外春光草頭冷 각외춘광초두냉
本來非心亦非佛 본래비심역비불
處處古路逢古人 처처고로봉고인
연등각안 보좌위에 긴밀한뜻 뚜렷할새
겁밖에의 봄빛이라 풀끝마다 차갑구나
본래마음 아니면서 또한부처 아니러니
곳곳마다 옛길에선 옛사람을 만나구나
第十八(제십팔) 一體同觀分(일체동관분)
第十八(제십팔) 一體同觀分(일체동관분)
【본문】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有肉眼不(여래유육안부)아 如是(여시)니다 世尊(세존)이시여 如來有肉眼(여래유육안)이시니이다 須菩堤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有天眼不(여래유천안부)아 如是(여시)니다 世尊(세존)이시여 如來有天眼(여래유천안)이시니이다 須菩堤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有慧眼不(여래유혜안부)아 如是(여시)니다 世尊(세존)이시여 如來有慧眼(여래유혜안)이시니이다 須菩堤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有法眼不(여래유법안부)아 如是(여시)니다 世尊(세존)이시여 如來有法眼(여래유법안)이시니이다 須菩堤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有佛眼不(여래유불안부)아 如是(여시)니다 世尊(세존)이시여 如來有佛眼(여래유불안)이시니이다 須菩堤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恒河中所有沙(여항하중소유사)를 佛說是沙不(불설시사부)아 如是(여시)니다 世尊(세존)이시여 如來說是沙(여래설시사)이니다 須菩堤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一恒河中所有沙(여일항하중소유사)하여 有如是沙等恒河(유여시사등항하)어든 是諸恒河所有沙數(시제항하소유사수)의 佛世界如是(불세계여시)가 寧爲多不(영위다부)아 甚多(심다)니다 世尊(세존)이시여 佛告須菩堤(불고수보리)하시되 爾所國土中(이소국토중)의 所有衆生(소유중생)의 若干種心(약간종심)을 如來悉知(여래실지)하시나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說諸心(여래설제심)이 皆爲非心(개위비심)일새是名爲心(시명위심)이니라 所以者何(소이자하)오 須菩堤(수보리)야 過去心(과거심) 不可得(불가득)이며 現在心(현재심) 不可得(불가득)이며 未來心(미래심) 不可得(불가득)이니라
제십팔 한 몸을 한가지인 것으로 보는 분
【번역】「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여래가 살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살눈이 계십니다.」「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여래가 하늘눈이 있느냐?」「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하늘눈이 계십니다.」「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여래가 슬기눈이 있느냐?」「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슬기눈이 계십니다.」「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여래가 법눈이 있느냐?」「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법눈이 계십니다.」「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여래가 부처눈이 있느냐?」「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부처눈이 계십니다.」「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향하 가운데 있는 바 모래알 같음을 부처가 이 모래알을 말함이 있느냐?」「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이 모래알을 말씀하셨습니다.」「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한 개의 항하 가운데 있는 바 모래알처럼 이 같은 모래알의 항하가 있어서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바 모래알수의 불세계가 이와 같다면 얼마나 많겠느냐?」「심히 많겠습니다, 세존이시여.」부처님이 수보리에게 고하시되 「저 국토 중에 있는 바 중생들의 약간 마음씨를 여래가 다 아나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여래가 말씀하신 모든 마음이 아 마음이 아니오, 이 이름이 마음일새니라. 이런바 어떠함이겠느냐. 수보리야, 지난 마음도 좋이 얻지 못하며 당장의 마음도 좋이 얻지 못하며 오는 마음도 좋이 얻지 못하느니라」
【강송】육안(肉眼) 곧 「살눈」은 막힌 안만을 보고, 천안(天眼) 곧 「하늘눈」은 막힌 밖에도 뚫어보고, 혜안(慧眼) 곧 「슬기눈」은 누리의 진리를 밝혀보고 법안(法眼) 곧 「법눈」은 모든 법을 비추어 보고, 불안(佛眼) 곧 「부처눈」은 진여의 뚜렷 밝음을 본다고 일컬은다. 또다시 이르기를 색신 중에 법신이 있음을 봄이 「살눈」이요, 일체 중생은 제각기 반야성(般若性)이 갖추어져 있음을 봄이 「하늘눈」이요, 반야바라밀이 능히 삼세(三世)의 온갖 법에 뛰쳐 남을 봄이 「슬기눈」이요, 온갖 불법(佛法)이 본래로부터 갖추어져 있음을 봄이 「법눈」이요, 성품이 밝고 맑아서 능히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을 길이 제함을 봄이 「부처눈」이라고도 일컬으니, 실로 사심(私心)은 「살눈」이라겠고 공심(公心)은 「하늘눈」이라겠고 정심(正心)은 「슬기눈」이라겠고 도심(道心)은 「법눈」이라겠고 각심(覺心)은 「부처눈」이라고도 이르겠다.
이 오안(五眼) 곧 다섯 눈은 부처님만이 가지고 계신 것은 물론 아니다. 정서방도 김서방도 다 같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섯 눈을 그대로 쓰느냐 못쓰느냐가 문제다. 만약 눈알로 하여금 그 보는 바의 맡음을 다한다면 바로 다섯 눈을 자재로이 쓰는 눈이 라겠으나, 그렇지 않고 그 보는 바의 맡음을 다하지 못하면 막힌 안만을 보는 일목(一目) 곧 한 눈깔인 눈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섯 눈이든 한 눈깔이든 안구(眼球) 곧 눈알이라는 기관을 통하여 보는 그 주인공은 아마 다섯 눈의 눈이나 한 눈깔의 눈 자체는 아닌 모양이다. 만약 눈알이 고장 난 소경도 검은 빛깔은 보니 눈의 주인공은 바로 눈알 자체라고 우겨댈는지 모르겠지마는, 그렇다면 눈알을 빼어서 벽에 걸어 놓아도 그 눈알은 다섯 눈의 눈 구실이나 한 눈깔의 눈 구실을 하겠느냐 말이다. 이럴진대 눈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두말할 것 없이 마음이다. 이 마음이 진공묘리(眞空妙理)를 깨쳐 알면 다섯 눈으로서의 활용(活用)을 다하지 마는, 이 마음이 간탐과 질투 따위로 덮이어서 미하면 한 눈깔로서의 구실도 못한다는 것을 알아두자.
부처님은 위에서 무주(無住) 무아리(無我理)를 밝히시고 여기서는 다섯 눈을 드시와 여래지견(如來知見)이 광대(廣大)하면서도 소상분명(昭詳分明)함을 드심이니, 그 뜻이신 즉 정염(淨染)․선악(善惡) 따위의 차별(差別)로 얽힌 중생의 지견(知見)을 무주(無住) 대도(大道)로 뒤바꿔 놓으시려는데 그 본회(本懷)가 계시다. 「머묾 없이 머묾」을 행하면 하늘눈․슬기눈․법눈은 물론이요 부처눈까지도 얻는다. 그러나 찾으려면 천하(天下)를 휘돌아도 안된다. 왜 그런가? 찾는 그놈이 바로 찾을 그놈이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부처님은 그 다섯 눈의 당처(當處)를 밝히시기 위하여 항하사수(恒河沙數)의 그 항하사수(恒河沙數)인 세계를 비유하심은 중생이 다 항하사수(恒河沙數)의 그 항하사수(恒河沙數)인 뭉치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뭉치마음은 다섯 눈을 조종하는 주재자(主宰者)이다. 이 뭉치마음이 능소연(陵所緣)에 휘둘려서 천만(千萬)갈래로 굴리이나 그 당처(當處)는 하나이다. 하나인 마음은 만인(萬人)이 같으므로 여래심(如來心)이라서 더하고 중생심(衆生心)이라서 덜함이 없는 하나로서 춤도 추고 싸움도 한다. 악종(惡種)을 심어서 지옥도 꾸미고 선종(善種)을 심어서 천당도 세운다. 이 마음은 가없는 허공으로 더불어 비롯이 없고 마침도 없이 휘영청이 밝으나, 들뜨기 시작하면 한이 없는 뭉치마음으로 변하면서 굴리는 경계에 따라 강물이 흘러내리듯이 일초의 끊임도 없이 그대로 계속하여 쏟아진다. 만약에 이 뭉치마음이 쉴 때가 있다면 이것은 까무러칠 때와 잠을 잘 순간일 것이라 하여두기로 하자
다시 말하자면 이 마음이 법성면(法性面)으로는 무변법신(無邊法身)인 여래(如來)지마는 용상면(用相面)으로는 무진중생(無盡衆生)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알아내기란 지극히 어려운 것이니, 세상 사람은 이 마음이 앞 경계에 부딪쳐서 굴리이고 뒷 경계에 끄달려서 굴리일 때마다 변하고 또다시 변하면서 뛰쳐나오는 식(識)인 알이를 그릇 인정하고 마음이라 고집을 한다. 이 알이인 망심(妄心)은 앞의 생각과 당장의 생각과 뒤의 생각이 엇갈리고 섞갈리면서 흘러가는데, 생각 생각이 일어나고 꺼짐이 정지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천만갈래의 차별심수(差別心數)를 낳아 놓는다. 이 차별심수(差別心數)를 가리켜 들뜬 마음이니 삿된 마음이니 망령된 마음이니 따위로 표현하는 뭉치마음이지마는 여기에서 한 생각을 일으키되 찰나에도 생기는 새김과 꺼지는 새김을 두지 아니하고 다시 생기고 꺼짐을 없애려고도 않음을 이름하여 비심(非心)인 「아닌 마음」이라 하며, 이미 생기고 꺼짐을 좋이 없앨 것도 없음일진댄 오직 묘하게 맑고 뚜렷이 밝은 마음이 항상 머물러서 꺼지지 아니함을 진심(眞心) 곧 참마음이라 이른다. 이렇듯이 숱한 뭉치마음의 그 당처(當處)를 알고 한 생각을 뛰칠 때, 이 바로가 곧 진심(眞心)이요, 이 바로가 곧 상심(常心)이요, 이 바로가 곧 불심(佛心)이요, 이 바로가 곧 반야바라밀다심(般若波羅蜜多心)인 것이다.
고인(古人)도 이르시기를 「제심(諸心)인 비심(非心)은 이 상주(常住) 묘원(妙圓)의 진심(眞心)이니라」함과 같이 상주(常住)인 묘원(妙圓)의 진심(眞心)인 엄연함으로서 제심(諸心)이 날뛰는 것이니, 애오라지 물인 참마음이 있기 때문에 거품인 뭉치마음이 있고, 형체인 참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림자인 뭉치마음이 있고, 소리인 참마음이 있기 때문에 메아리인 뭉치마음이 있는 것임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여기에서 만약 제심(諸心)이 망(妄)이요 진(眞)이 아니라 하자. 그렇다면 무엇이 과거심(過去心)이며 무엇이 현재심(現在心)이며 무엇이 미래심(未來心)이란 말인가? 이럴진댄 삼세심(三世心)은 좋이 얻어내지 못할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정론(正論)이라면 오직 하나뿐인 묘원(妙圓) 진심(眞心)인가? 그러나 이 또한 묘원(妙圓) 진심(眞心)이라 할지라도 삼제(三際)를 꿰뚫어서 시방(十方)에 펴여져 있으나 거래상(去來相)이 끊어진 당처(當處)이고 보니 이 현재이냐, 이 미래이냐, 이 과거이냐? 여기에서 만약 과거심(過去心)이라 한다면 과거는 이미 꺼졌으니 마음은 좋이 얻어내지 못할 것이요, 만약 현재심(現在心)이라 한다면 현재는 다만 공적(空寂)하였으니 마음은 좋이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이렇듯이 아무 모습도 없이 적연(寂然)하여서 나의 몸 안에 오뚝하나 일찍 가고 옴이 있음 없고, 이렇듯이 아무 모습도 없이 곽연(廓然)하여서 나의 몸 밖에 의젓하나 일찍 생기고 꺼짐이 있음 없으니, 어떻게 삼세(三世)를 구분 지어서 그 마음을 얻어낸다는 말인가.
부처님은 또다시 말씀하시기를 「모래수인 중생의 차별심행(差別心行)은 곧 이 여래의 묘원(妙圓) 진심(眞心)이라, 부처로 더불어서 다름이 없느니라」이르셨다. 말씀이신 즉 옳은 말씀이나, 그러나 이 말씀의 본회(本懷)는 중생의 허망부심(虛妄浮心)으로 하여금 상주진심(常住眞心)으로 계합(契合)을 시키시려는데 더욱 간절하신 뜻이 계실 것이다. 이러므로 하여서 부처님은 항하(恒河)의 모래수의 그 항하(恒河)의 모래수인 중생의 가지가지 마음씨가 바로 상주진심(常住眞心)으로부터 쫓아 일어나는 허망부심(虛妄浮心)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은 엄연한 일이 라겠다. 실로 삼제(三際)를 향하여 구하되 구하여 얻지 못하고 시방(十方)을 향하여 찾되 찾아서 종적이 없으니, 나아감에 은산철벽(銀山鐵壁)이요 물러섬에 천애만학(天涯萬壑)이라는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음씨 타령
뚜렷하게 맑은성품 법이라하면
휘영청이 밝은마음 부처아니랴
어즈버야 온누리는 불가사의니
지화자자 좋을시구 쇠꽃이랄까
영특스런 슬기라서 의젓한지라
기틀마다 응하면서 씀을굴리니
어즈버야 다함없는 장엄세계라
지화자자 좋을시구 돌말이뛴다
앎과모름 뛰어넘은 본바탕이라
지견에다 옳그름의 풀이않으면
어즈버야 모든반연 녹아서가니
지화자자 좋을시구 물달도밝네
한생각의 굴림새로 낳고죽어서
천당지옥 제가짓고 울고웃으나
어즈버야 곡두임을 이에깨칠세
지화자자 좋을시구 장승은잰다
줄을따라 고요로히 관찰을하면
염불송경 안하여도 열반에드니
어즈버야 천하대도 가는길이라
지화자자 좋을시구 풀개가짖네
실속없는 남의살림 엿보지말고
제보배를 되찾음이 큰공덕이니
어즈버야 나의법신 나툼인지라
지화자자 좋을시구 흙소는간다
닦다못해 대승범부 됨일지언정
바보처럼 소승성과 탐할까보냐
어즈버야 하늘땅의 앞에선지라
지화자자 좋을시구 육도는떤다
알지어다 온갖것은 새김놀이라
시방계를 흝어봐도 나홀로이니
어즈버야 뉘라있어 상대를하랴
지화자자 좋을시구 파순이운다
이 소식에 춤은 안추려나
삼심(三心)을 못 얻음이 곧 부처이니라. 흥! 잔소리가 많으면 이에서 털이 나느니, 그만 콧구멍 없는 송아지나 타고 가거라. 에익!
靈鏡炯炯色身中 영경형형색신중
百幻粉粉映此邊 백환분분영차변
吾王本非去來客 오왕본비거래객
豈有玉京三世路 기유옥경삼세로
영특스리 밝은거울 색신중에 지었기로
백가지의 곡두들이 이곳에서 일고진다
우리님은 본래부터 오고가는 손아닌걸
무삼일로 내집안에 삼세길이 있을손가
第十九(제십구) 法界通化分(법계통화분)
第十九(제십구) 法界通化分(법계통화분)
【본문】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若有人(약유인)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만삼천대천세계칠보)로 以用布施(이용보시)하면 是人(시인)이 以是因緣(이시인연)으로 得福(득복)이 多不(다부)아 如是(여시)니다 世尊(세존)이시여 此人(차인)은 以是因緣(이시인연)으로 得福(득복)이 甚多(심다)니다 須菩堤(수보리)야 若福德(약복덕)이 有實(유실)인데는 如來(여래) 不說得福德多(불설득복덕다)니 以福德(이복덕)이 無故(무고)로 如來(여래)가 說得福德多(설득복덕다)니라
제십구 법계에 펴짐 분
【번역】「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만약 사람이 있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 보시에 쓴다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써 얻은 복이 많겠느냐?」「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이 인연으로써 얻는 복이 심이 많겠습니다」「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실다움이 있음일진대 여래가 복덕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아니하련마는 복덕이 없는 까닭으로써 여래가 복덕 얻음이 많다고 말함이니라.」
【강송】복이 있다고 이름은 모습을 취함이요, 복이 없다고 이름은 모습을 여윔이다. 모습을 취함은 머무름이 있는 보시복덕(寶施福德)으로서 세체(世諦)인 유루(有漏) 곧 쇰에 돌아감을 뜻함이지마는 모습을 여윔은 머무름이 없는 보시복덕(寶施福德)으로서 진체(眞諦)인 무루(無漏) 곧 굄에 돌아감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부처님은 항상 말씀하시되, 진보(珍寶)의 복덕이 아무리 많다. 이를지라도 능히 불과(佛果)인 보리도(菩堤道)는 이루지 못하는 까닭으로 없다고 이르심이요 그 수량이 있는 까닭으로 많다고 이르심이나 만약 이에 그 수량이 뛰쳐 나서 끝됨이 없는 숫자라면 말귀가 끊어진 지리니 무엇을 끌어잡고 많다 적다는 이야기를 하겠느냐는 뜻으로 받아 들이자. 이러므로 고인(古人)도 이르시되 칠보(七寶) 보시의 인연은 복 가운데서 수승하나 하염이 없는 복덕은 수승한 가운데서도 수승하다 셨으니 참으로 쇰인 복덕과 굄인 공덕성의 그 거리에의 길고 짧음을 말하는 것보다 상대성인 복덕과 절대성인 복덕성과의 그 거리는 말마디가 끊어진 자리임을 밝히시는 소식처로 알아야 할 것이다. 잠시 여기에 붓을 돌려서 복이란 것은 무엇인가를 대충 살펴보기로 하자. 세간(世間)을 꾸려 가는데는 우선 건강과 지식과 수단도 복밭이 되겠지마는 다음에는 재물도 명예도 권세도 다 복터임에는 틀림이 없다. 왜나면 생활(生活)을 엮어나가는 데의 희구조건(希求條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 조건(條件)이 갖추어졌다고 하여서 국가(國家)를 다스리고 세계(世界)를 주름잡는다손 치더라도 생사(生死)를 다스리고 미래(未來)를 주름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면 몸뚱이가 흙구덩이에서 무럭무럭 썩는다든지 불구덩이에서 지글지글 타는데 갖추어진 이상의 조건이 무슨 쓸모가 있다는 말인가. 이러므로 사람이란 마지막에 가는 길을 생각하므로 말미암아 고독과 불안과 공포감이 쏟아질지언정 안정된 희열감으로써 인생(人生)을 찬미(讚美)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럴진댄 인생(人生)이란 그 이름은 한 가닥의 비곡(悲曲)에 지나지 않으니 건강과 지식과 수단은 몇푼어치나 되겠으며 재물과 명예와 권세는 몇 돈쭝이나 되겠는가? 생각할 문제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한 가닥의 비곡(悲曲)을 쓸어내시기 위하여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만이 생사업(生死業)을 녹여내는 참된 복덕성(福德性)이라 말씀하시고 이 복덕성만이 영원한 생명의 안식처(安息處)인 소식임을 강조하심이니 이 바로 대공(大功)은 무공(無功)이라는 철언(哲言)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여서 칠보(七寶) 보시(布施)를 외면하시거나 무시하시는 것은 절대로 아니시다. 왜냐면 다만 같은 복덕성(福德性)을 같은 때에 같은 마당에서 마음으로 닦는데 있어서 슬기로운 수단과 총명한 방편으로 말미암아 소득심(所得心)인 쇠는 복덕으로 하여금 무소득심(無所得心)인 괴는 복덕성으로 뒤바꿔 놓으시려는데 그 본회(本懷)가 계신 것이다.
이렇듯이 생사업(生死業)을 녹여냄과 아울러 나의 몸을 삼계(三界)에 우뚝이 나투는데는 슬기로운 수단과 총명한 방편이 절대로 따르게 마련이니, 고인(古人)도 이르시기를 「다만 작복(作福)할 줄만 알고 성공(性空)함을 해득하지 못함은 새의 한쪽날개가 부러짐이요, 다만 성공(性空)함을 볼 줄만을 알고 작복(作福)할 줄을 해득하지 못함은 수레의 한쪽 바퀴가 떨어짐과 같으니라」하셨으니, 이는 대도(大道)로 더불어서 서로 계합이 안됨을 뜻함인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을 비교할 때 관공자(觀空者)는 작복자(作福者)의 따를 바가 못될 만큼 수승하지마는 금상첨화(錦上添花)를 이루려면 작복(作福)도 따르게 마련이니, 이러므로 고인(古人)도 이르되 「莫言空打坐(막언공타좌)하라, 猶勝別勞心(유승별노심)이로다.」번역하여 「퍼질러 앉음만을 말하지 말라. 오히려 따로 마음을 굴림이 나으리라」하신 것이다. 실로 유위(有爲)가 비록 참이라겠지마는 헤아린즉 성과(聖果)를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니, 복혜쌍수(福慧雙修)가 대도(大道)의 기본(基本)임을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잠시 붓을 사회문제로 돌려보자. 사회문제 또한 불법(佛法)중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그 체성면(體性面)인 이(理)를 바탕으로 하고 그 용상면(用相面)인 사(事)를 시책으로 굴린다면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베풀어지고 얻어지고 변하여지고 고치어지는데 따라 조만(早晩)이 없고 역순(逆順)이 없고 상하(上下)가 없이 연(緣)에 따라 시(時)를 옮기며 시(時)를 옮겨서 기(機)에 응하는데 맺어지고 풀려지는 작용(作用)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이니, 이곳에는 「좋은 사회」「좋은 국가」「좋은 세계」로 발전할 것은 사실이라겠다. 이렇듯이 좋은 조건의 현실(現實)속에서 뿌리어지고 거두어들이는 피아(彼我)의 인과관계는 내세(來世)에까지라도 복덕성의 발판이 됨으로 하여금 자성계오(自性啓悟)의 길이 트이면서 생사업(生死業)을 녹여내는 터전이 될 것이니, 대도(大道)란 정한 법(法)이 따로 있지 않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는 바이다. 그러나 만약 용상면(用相面)인 사(事)에만 매어 달려서 이루어지는 사회의 시책이란 사상누각(沙上樓閣)으로, 가식(假飾)이 필요하니 허위(虛僞)가 따르고 권모(權謀)가 세워지니 술수(術數)가 용납되는 세간(世間)인지라, 그 수명의 길 짧음을 뉘라서 보증하겠는가.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겨레를 아끼고 인류를 위하는 정치가(政治家)라면 어디까지라도 심성학적(心性學的)인 기본토대(基本土臺)부터 확립시킬 책임이 있지 않을까. 그러지 못하면 키가 없이 떠도는 배와 마찬가지로 변하여 가는 세속(世俗)의 드높은 물결에 파선(破船)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오분향사(五分香詞)를 단다.
의젓하온 내성품이여
모든악을 끊어서내면
그자리가 착함뿐인걸
이대로서 계향(戒香)이라네
뚜렷하온 내성품이여
큰수레로 버젓이가니
물러날바 다시없거늘
이대로서 정향(定香)이라네
역력하온 내성품이여
본래밝음 그슬기라서
살피나니 몸과마음을
이대로서 혜향(慧香)이라네
시원하온 내성품이여
안밝음이 끊기었는데
묶임풀림 어디있으랴
이대로서 해탈향(解脫香)이네
영특하온 내성품이여
사람들도 깨우치나니
법수레를 굴리며가네
이대로서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이 소식에서 짝 바퀴도 굴리군
갈베를 걸치고 나물을 씹으며 풍월(風月)을 벗삼는 평생(平生)을 지을지언정 비단을 두르고 고기를 먹으며 명리(名利)를 탐하는 인생(人生)은 원치 않노라
七寶布施作生天 칠보보시작생천
福盡還墮世間中 복진환타세간중
無住功德超凡聖 무주공덕초범성
一大事畢吾家風 일대사필오가풍
칠보보시 분수따라 하늘에도 나지마는
복다하면 되돌아서 세간중에 떨어진다
머물지를 않는공덕 범부성인 뛰쳐나니
일대사를 마침일새 우리집안 풍속일레
第二十(제이십) 離色離相分(이색이상분)
第二十(제이십) 離色離相分(이색이상분)
【본문】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佛(불)을 可以具足色身(가이구족색신)으로 見不(견부)아 不也(불야)니다 世尊(세존)이시여 如來(여래)를 不應以具足色身(불응이구족색신)으로 見(견)이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說具足色身(여래설구족색신)은 卽非具足色身(즉비구족색신)일새 是名具足色身(시명구족색신)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를 可以具足諸相(가이구족제상)으로 見不(견부)아 不也(불야)이니다 世尊(세존)이시여 如來(여래)를 不應以具足諸相(불응이구족제상)으로 見(견)이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說諸相具足(여래설제상구족)은 卽非具足(즉비구족)일새 是名諸相具足(시명제상구족)이니이다
제이십 빛깔과 모습을 여윔 분
【번역】「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부처님을 좋이 갖추어진 색신으로서 뵈옵겠느냐?」「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응당 갖추어진 색신으로서 뵈옵지 못합니다.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습니까. 여래께서 말씀하신 갖추어진 색신은 곧 갖추어진 색신이 아닐새, 이 이름이 갖추어진 색신이기 때문입니다.」「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여래를 좋이 갖추어진 모든 모습으로서 뵈옵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좋이 갖추어진 모든 모습으로서 뵈옵지 못하나이다.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습니까.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모습이 갖추어짐은 곧 갖추어짐이 아닐새, 이 이름이 모든 모습이 갖추어짐이기 때문입니다」
【강송】부처님은 미한 중생들이 여래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은 뵈올 줄을 모르고 다만 자마금구(紫磨金驅)이신 존귀상(尊貴像)의 몸매만으로서 진신(眞身)으로 삼을까 두려워하시고 수보리 장로에게 이르시되 「부처님을 좋이 갖추어진 색신으로서 뵈옵겠느냐」하셨다. 이 무슨 뜻이실까? 다만 갖추어진 훌륭하신 몸의 모습만으로서 여래님의 참 몸으로 알아서 뵈옵겠느냐시는 말씀이시다. 안될 말이다. 왜냐면 갖추어진 좋은 몸매를 위한 그 몸매에만 주저앉으면 빛깔을 여윈 청정법신(淸淨法身)은 못 뵙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장로는 여쭙되「이 이름이 갖추어진 색신이기 때문입니다」하셨으니, 실로 이름 뿐인 색신이란 실답지 않음이 사실이니 한 분으로서인 인격(人格)을 갖춘 여래님은 아니라겠다. 부처님은 또다시 이르시되 「여래를 좋이 갖추어진 모든 모습으로서 뵈옵겠느냐」하셨다. 이 무슨 뜻이실까? 이에 오직 갖추어진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의 자마금용(紫磨金容)인 원만상(圓滿相)의 몸매를 위한 그 몸매에만 주저앉으면 모습을 여윈 무상법신(無相法身)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장로는 부처님께 여쭈되 「이 이름이 모든 모습이 갖추어짐이기 때문이다」하셨으니 이름 뿐인 갖추어짐이라면 허망함이 사실인지라, 어찌 한 분으로서인 인격(人格)을 갖춘 법신(法身)이시라 일컬으겠는가.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오직 오근중(五根中)에서 육바라밀을 닦고 의근중(意根中)에서 정혜(定慧)를 아울러 닦음으로 말미암아 삼십이청정행(三十二淸淨行)은 이루어짐으로 하여금 비로소 갖추어진 색신(色身)이라 이름하겠으니, 이에 빛깔을 여윔 없이 여윈 그 빛깔을 통합으로써만이 건곤(乾坤)을 독주(獨走)하는 청정법신(淸淨法身)을 뵈올 수 있을 것이요, 이에 따라 슬기눈도 밝혀짐으로 하여금 사상(四相)을 일으키지 않고 항상 비추어서 갖추어진 모든 모습을 그대로 굴릴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습을 여윔 없이 여윈 그 모습을 통함으로써만이 만법(萬法)을 건립(建立)하는 무상신(無相身)을 뵈올 수가 있음을 뜻한다. 높은 고개로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인데 응기만반형(應機萬般形)이로다. 번역하여 「본래로 한 물건도 없는데 기틀에 응하여 온갖 형상을 나툼이로다.」
붓을 체성면(體性面)과 용상면(用相面)으로 옮겨보자. 체성(體性)을 절대성(絶對性)인 상주불멸(常住不滅)의 평등성(平等性)이라면 용상(用相)은 상대성(相對性)인 변화무상(變化無常)의 차별상(差別相)이라겠다. 평등상인 법신(法身)을 공중월(空中月)에 비유한다면 차별상인 색신(色身)은 수중월(水中月)에 비유되겠다. 이 수중월(水中月)이 한낱 그림자로서 환물(幻物)이라면 이 색신(色身)도 또한 한낱 그림자로서 환물(幻物)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환물(幻物)은 무궁한 조화를 가져온다. 세인(世人)은 이 무궁한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앞하여 실물(實物)인 공중월(空中月)과 실물(實物)인 법신(法身)이 있음을 잊은 지가 오래기 때문에 무상(無常)만을 느끼면서 한숨지운다. 절대성(絶對性)위에서 벌어지는 상대성(相對性)인 온갖 법이란 변하면서 쇠하고 쇠하면서 뭉개어지고 뭉개어지면서 이루어지는 연속이건마는 이 의취를 모르니 우리 나라의 양사언(楊士彦)은 색신(色身)을 기르기 위해 뫼를 찾았고 당나라의 이태백(李太白)은 수중월(水中月)을 건지기 위하여 물에 들었다는 이야기인들 안나오겠는가. 그러나 만약 모든 법이 변하면서 가는 그 묘미(妙味)가 도무지 없다면 이것은 공중월(空中月)과 수중월(水中月)은 둘로서 법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라 일컬으겠다. 이럴진대 갓난 어린아이는 영원히 어린아이로서 장차의 어른은 못될 것이요 늙은이는 영원한 늙은이로서 다시는 젊은 사람으로서인 몸을 받지는 못할 것으로, 가없는 묘용의 도리는 정지가 되면서 천당은 천당대로 지옥은 지옥대로 뫼는 뫼대로 물은 물대로 화석(化石)같이 될 것이니, 삼계(三界)의 무궁(無窮)한 조화(造化)는 어찌 되겠는가. 알겠구나! 체성(體性)은 물건마다 응하면서 영광(靈光)이 독로(獨露)하므로 뫼가 높으니 구름이 자고 물은 낮으니 고기가 뛰건마는 천번 변하고 만번 변하나 변하면서 가옴이 없으니 마음의 가는 길이 꺼지고 말의 오는 길이 끊어진 자리라겠다.
이렇듯이 절대성인 평등상면(平等相面)의 바탕이 엄연하므로 말미암아 상대성인 차별상면(差別相面)의 무궁무진한 조화는 그 연(緣)에 따라 꽃을 피우고 그 기(機)를 좇아서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바야흐로 공중월(空中月)이 있음으로써 애오라지 수중월(水中月)은 청풍(淸風)으로 더불어 일경(一景)을 더하는 것이라 않겠는가. 이러므로 하여서 법신(法身)은 되돌아 색신(色身)이요 색신(色身)은 되돌아 법신(法身)이며 체(體)는 이 바로 용(用)이요 용(用)은 이 바로 체(體)로서 법신(法身)과 색신(色身)은 비일(非一)이요 비이(非二)인지라, 태허중(太虛中)에서 출몰(出沒)하는 억천만의 차별상면(差別相面)도 다 의젓하여 움직이지 않는 법성체(法性體)인 평등상면(平等相面)으로 좇아 이루어졌기 때문에 또한 차별상면(差別相面)은 평등상면(平等相面)으로 더불어서 비일(非一)이요 비이(非二)라 일러서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는 것 이라겠지마는, 이 말은 공리(空理)에 통달한 분(分)의 소임(所任)임도 아울러 덧붙여 두는 바이다.
그러나 미인(迷人)은 이 의취를 모르고 살눈 만에서 이루어지는 소견(所見)으로 말미암아 차별상면(差別相面)에만 매어 달려서 이리 뛰고 저리 뛸 따름이다. 이렇듯이 한 쪽에만 치우친 소견(所見)이라면 그 차별상면(差別相面)은 실에 있어서 허망물(虛妄物)임에는 틀림이 없으므로 하여금 천하(天下)의 선지식들은 이 환상(幻相)을 부수기 위하여서는 갖은 수단과 방편을 쏟는다. 여기에서 좋은 예를 든다면, 운문선사(雲門禪師)가 세존이 갈파하신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란 언구(言句)에 대하여 검은 눈알을 굴리고 붉은 혓바닥을 말아내면서 「만약 내가 그 당시에 있었더라면 한 몽둥이로 석가를 때려 죽여서 주린 개에게나 주었을 것을」하고 기염을 토한 일이다. 이 한 마디의 말은 아마 법계(法界)를 흔들어 놓았을 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모습을 부수시는 방편어(方便語)라 할지라도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요 자부(慈父)에게 대하여 그럴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법도로 논하더라도 용납이 안될 말이다. 더욱이나 불자(佛子)로서의 구설(口舌)인데야! 이를 평하여 교계(敎界)에서는 이르되, 어느 쪽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불쾌한 생각을 가지고 어느 쪽에서는 부처님 은혜를 갚음이라 하여서 찬양을 하였다. 학인들은 고인(古人)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스스로의 슬기로 판단하라. 실로 운문(雲門) 이전의 범부인 운문(雲門)이라면 삼도지옥(三途地獄)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범성(凡聖)을 뛰어 넘어서 허공의 뼈를 추려내시는 오늘의 운문선사(雲門禪師)로서는 과연 부처님의 은혜를 크게 갚아 드린 소식이니, 그 방편(方便)에 있어서도 정법(正法)이 있음 없음이 절감(切感)된다. 겸하여서 여기에 한 수의 게(偈)를 들어서 선사(禪師)의 속을 더듬고 학인들의 슬기를 돕고자 한다. 문제로, 다음 게중(偈中)의 ○안에 적당한 글자를 넣고 옳그름을 눈 밝은 사람에게 물어라.
雲門舌頭氣勢大 운문설두기세대
呑却祖域震江山 탐각조역진강산
誰知○佛處○佛 수지○불처○불
若非丈夫難難解 약비장부난난해
운문이 혓바닥은 기세가 대단하구나
조역을 삼켰으니 강산도 떨었으리라
뉘알리 부처○○ 그곳에 ○부처임을
만약에 알찬이가 아니면 풀기어렵네
이 소식엔 실오라기 하나 안걸치었구나
별이 총총 저 하늘에 달이 둥실 밝았구나
옛 때 길을 찾으려면 돌장승께 물어보소
君臣不二絶疎親 군신불이절소친
廓然無邊覓無蹤 곽연무변멱무종
只此妙中又此妙 지차묘중우차묘
何處更對主中主 하처경대주중주
임금신하 둘아니니 친코성김 어디있나
확연하여 가없으니 찾을수록 종적없네
다만묘한 이가운데 이묘함이 또있는걸
어디가서 주인중의 그주인을 대하려노
第二十一(제이십일) 非說所說分(비설소설분)
第二十一(제이십일) 非說所說分(비설소설분)
【본문】須菩提(수보리)야 汝勿謂如來作是念(여물위여래작시념)하되 我當有所說法(아당유소설법)이니 莫作是念(막작시념)하라 何以故(하이고)오 若人(약인)이 言如來有所說法(언여래유소설법)이라하면 卽爲謗佛(즉위방불)이라 不能解我所說故(불능해아소설고)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說法者(설법자)는 無法可說(무법가설)일새 是名說法(시명설법)이니라 爾時(이시)에 慧命須菩提(혜명수보리) 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이시여 頗有衆生(파유중생)이 於未來世(어미래세)에 聞說是法(문설시법)하고 生信心不(생심심부)리까 佛言(불언)하시되 須菩提(수보리)야 彼非衆生(피비중생)이며 非不衆生(피불중생)이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衆生(중생) 衆生者(중생자)는 如來(여래) 說非衆生(설비중생)이 是名衆生(시명중생)이니라
제이십 빛깔과 모습을 여윔 분
【번역】「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이러한 생각을 짓되 내가 마땅히 법을 말함이 있다고 이르지 말라. 이런 생각을 짓지 말지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만약 사람이 이르되 ‘여래가 법을 말한 바 있다.’면 곧 부처를 비방함인 짓이라, 능히 나의 말하는 바를 알지 못함인 까닭이니, 수보리야 법을 말함이란 것은 좋이 말할 법이 없음이 이 이름이 설법이니라.」 저 때에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 사뢰되 「세존이시여, 오는 세상에 중생이 있어서 이러한 법 말씀을 듣고 자못 믿는 마음을 내오리까?」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저가 중생이 아니며 중생 아님도 아니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느냐. 수보리야 중생을 중생이라 함은 여래가 말하는 중생이 아니오, 이 이름이 중생임을 말함이니라.」
【강송】설(說)은 설(說)이면서 설(說)이 아니고 그 이름이 설(說)이다. 왜 그런가? 만약 법신(法身)을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향상사(向上事)로 한다면 법신(法身)은 입이 없으니 설(說)이 있을 수 없는 것이요, 만약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이 바야흐로 설(說)이 있다면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은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향하사(向下事)에 속하니 설(說)은 설(說)이면서 설(說)이 아니고 이름 뿐인 설(說)인 까닭이다. 고인(古人)도 이르시기를 「법신(法身)은 본래로 설(說)이 없음이나 보화(報化)가 바야흐로 설(說)이 있음이니, 유설(有說)은 진설(眞說)이 아니오 무설(無說)이 진설(眞說)이니라」셨다. 실로 그렇다. 시방불토(十方佛土)중에 오직 일승법(一乘法)이 있을 따름이니 이 일승법(一乘法)을 여의고 다시 어디에 설(說)이 있겠는가. 이러기 때문에 무법(無法)을 좋이 설(說)한다고 이르심인데 단지 일승법(一乘法)으로써 모든 중생을 계오(啓悟)시키는 까닭으로 이 이름을 설법(說法)이라고 이르지마는 만약 일승법(一乘法)일진댄 바로 개구처(開口處)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중생의 일용사(日用事)를 여위지도 않는 당처(當處)이니 이 바로 정도(正道)와 권도(權道)를 아울러 쓰는 소식이 아니겠는가. 이러므로 하여서 유마경(維摩經)에서도 이르시기를 대저 설법자(說法者)는 무설(無說) 무시(無示)요 청덕자(淸德者)는 무문(無聞) 무득(無得)이라 심과 같이, 만법(萬法)이 모두 공적체(空寂體)중에서 온갖 명구(名句)가 다 거짓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서 되돌아 자성(自性) 중에도 온갖 언구(言句)를 뚜렷이 세우고 모든 법(法)을 굴리되 무상(無相) 무위법(無爲法)으로 하여금 중생을 계오(啓悟)시킴으로써 무상(無上) 보리도(菩堤道)를 닦아 증득하도록 하는 것을 이름하여 설법(說法)이라 하겠다. 고인(古人)이 또 이르시되 「말이 있어도 다 비방을 이룸이요, 말이 없어도 또한 용납이 아니된다.」하셨고, 또 이르시되 「사십구년 동안에 쌓은 거듭한 공이여! 거북털과 토끼뿔이 허공에 가득함이로다」노래를 부르신 이유가 마음에 얻음이 없고 머뭄이 없는 소식임을 뜻함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이렇듯이 날이 다하도록 법(法)을 설(說)하여도 설(說)한 그 생각이 없고 또한 설(說)한 그 모습이 없으니 애오라지 설(說)한 이는 누구이며 설(說)한 법(法)은 또한 무엇인가. 이 당처(當處)에서 념(念)과 설(說)과 법(法)은 다 같이 공(空)하게 마련이니 비념(非念) 비설(非說) 비법(非法)이 한결같이 뚜렷할 새, 돌이켜서 념(念)이 자구족(自具足)하고 설(說)이 자구족(自具足)하고 법(法)이 자구족(自具足)하는 소식처라 하겠다. 이러히 자구족(自具足)한 비념(非念) 비설(非說) 비법(非法)은 속세(俗世)의 말로 무념(無念) 무설(無說) 무법(無法)이니 되돌이켜서 정념(正念) 정설(正說) 정법(正法)이라 하겠고 다시 되돌이켜서 유념(留念) 유설(有說) 유법(有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法)을 설(說)하는데 있어서 법(法)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면 무법(無法)을 들낼 수가 없고 설(說)로 말미암음이 아니면 무설(無說)을 보일 수가 없고 념(念)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면 무념(無念)을 나툴 수가 없는 것이니 이곳에서 또다시 되돌이킨다면 여래(如來)께서 설(說)하시는 설(說)은 곧 무설(無說)인 진설법(眞說法)임을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기 때문에 만약 여래(如來)께서 법(法)을 설(說)하신다고 이를진댄 이 바로 한쪽에 치우침으로 하여서 부처님을 비방함과 다름이 없고, 만약 여래(如來)께서 법(法)을 설(說)하심이 아니라고 이를진댄 이것 또한 한쪽에 치우침이라서 부처님을 용납함이 아니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로는 뒤 중생을 위하여 「세존이시여, 오는 세상에 중생이 있어서 이러한 법 말씀을 듣고 자못 믿는 마음을 내오리까」여쭈셨다. 부처님은 「수보리야, 저가 중생이 아니며 중생 아님도 아니니라. 어찌한 까닭으로써 이냐. 수보리야, 여래가 중생을 중생이라 함은 중생이 아니오, 이 이름이 중생임을 말함이니라」답을 하셨다. 장로의 물으심은 색상학분(色象學分)이실까. 왜냐면 낳음이 있으면 죽음은 따르게 마련인 중생이니 이러한 법(法)의 말씀을 듣고 자못 믿는 마음을 내오리까 시는 뜻으로 보고, 부처님의 답은 심성학분(心性學分)이실까. 왜나면 낳음은 낳음이 아니니 죽음도 죽음이 아니라 시는 뜻이리라. 그러므로 낳고 죽음의 바다를 뛰어넘은 본래의 부처로서 여래가 중생을 중생이라 함은 중생이 아니오, 이 이름이 중생임을 말씀하심이라는 뜻으로 우선 받아 들이고 다음을 엮어서 가기로 하자. 이럴진댄 장로의 물으심과 부처님의 답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나 그렇지가 않다. 왜 그러냐면 색상(色象)과 심성(心性)을 여윈 여래의 가풍(家風)에 어찌 다른 소식이 있으리요 마는, 다만 부처님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닌 그 당처(當處)를 드러내신 말씀이시고 장로는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중생을 건지시는 데의 방편(方便)을 걱정하시는 것으로 추찰(推察)이 된다. 실로 범부와 성현이 둘 아니냐, 그러나 범부는 범부의 지위에 머물면서 날로 범부의 지견(知見)을 쓰고 부처님은 부처의 지위에 머물면서 날로 부처의 지견(知見)을 쓰시는 것만이 다를 뿐이니,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 그 위치에서 부처와 중생의 그 노정기(路程記)는 크게 다름이 틀림없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부처님은 인생(人生)의 나아갈 바의 그 당처(當處)를 드러내시어 보이시고 이에 따라 중생을 제도하시되 토각장(兎角杖) 곧 토끼뿔 지팡이를 드시어 일로 열반문(涅槃門)을 열어제치시고 구모불(龜毛拂) 곧 거불털 털이개를 드시어 일향(一向) 생사진(生死塵)을 쓸어내시는 소식처라 하겠다. 이에 한 문제를 건다.
【묻는다】
어찌하여서 남녀(男女)로 나누이며 노소(老少)로 벌어지며 갈리입니까?
【답이라】
너는 어찌하여 사람으로서인 남녀(男女)로 볼 줄은 모르고 남녀(男女)로서인 사람만으로 보려고 하며, 모습으로서인 노소(老少)로 볼 줄은 모르고 노소(老少)로서인 모습만으로 보려고 하며, 삶으로서인 생사(生死)로 볼 줄은 모르고 생사(生死)로서인 삶만으로 보려고 하느냐. 그러니 남자와 여자의 새김에 앉지 말고 늙음과 젊음의 새김에 앉지 말고 낳음과 죽음의 새김에 앉지 아니하면 남녀(男女)의 나뉨과 노소(老少)의 벌어짐과 생사(生死)의 갈림이 끊어지느니라. 왜 그러냐면 본래로부터 남자는 남자가 아니고 그 이름이 남자며 여자는 여자가 아니고 그 이름이 여자이니 하나인 사람인 까닭이요, 늙음은 늙음이 아니고 그 이름이 늙음이요 젊음은 젊음이 아니고 그 이름이 젊음이니 하나인 모습인 까닭이요, 낳음은 낳음이 아니고 그 이름이 낳음이요 죽음은 죽음이 아니고 그 이름이 죽음이니 하나인 삶인 까닭이다.
【묻는다】
어찌하여 괴로움과 슬픔의 중생이 있습니까?
【답이라】
괴로움은 즐거움의 상대요, 슬픔은 기쁨의 상대요, 중생은 부처의 상대이니, 즐거움을 따로 구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고 기쁨을 따로 찾기 때문에 슬픔이 생기고 부처를 따로 바라기 때문에 중생이 생기는 것이니, 너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놓고 슬픔과 기쁨을 버리고 중생과 부처를 여위면 비로소 참 즐거움과 참 기쁨과 참 부처를 이루리라. 왜 그러냐면 괴로움과 즐거움이 비록 둘이나 그 뿌리는 오직 하나이니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까닭이요, 슬픔과 기쁨이 비록 둘이나 그 뿌리는 오직 하나이니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까닭이요, 중생과 부처가 비록 둘이나 그 뿌리는 오직 하나이니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까닭이다. 이렇듯이 하나인 절대성(絶對性)의 진리(眞理)를 깨치지 못하고 둘인 상대성(相對性)의 환상(幻相)에만 사로잡히면 도깨비 굴에 떨어진다.
이 소식에 너는 말없는 말을 듣느냐
흥! 부처님이 사십구년 동안에 말씀하신 몰록과 차례와 치우침과 뚜렷과 크고 작은 수레바퀴는 어디로 굴려야 하는가? 히힛! 유설(有說)과 무설(無說)이 같은 골짝의 소리와 메아리니, 뫼는 높은지고, 물은 낮은지고!
無有說不擧無說 무유설불거무설
無有法不示無法 무유법불시무법
無有念不論無念 무유념불론무념
三路非眞亦非假 삼로비진역비가
없는말을 들내려니 말이라야 되겠구나
없는법을 보이려니 법이라야 되겠구나
없는셈을 논하려니 셈이라야 되겠구나
이세길은 참아니며 또한거짓 아닐러라
第二十二(제이십이) 無法可得分(무법가득분)
第二十二(제이십이) 無法可得分(무법가득분)
【본문】須菩提(수보리)가 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이시여 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爲無所得耶(위무소득야)니까 佛言(불언)하시되 如是如是(여시여시)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乃至無有小法可得(내지무유소법가득)일새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제이십이 법은 좋이 얻음이 없음 분
【번역】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되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심은 얻은 바 없음이 되옵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그렇고 그러니라,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에 조그마한 법도 얻음이 없음 일새, 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강송】장로는 부처님께 말씀드리되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심은 얻은 바 없음이 되옵니까」여쭈셨다. 해공제일인자(解空第一人者)이신 장로로서는 엉뚱하신 물으심인 것 같다. 부처님은 숙세(宿世)에 계시어 쇰과 굄의 무량공덕(無量功德)으로 말미암아 절대(絶對)의 슬기가 밝혀지심으로서 당신 자신의 「본바탕」이 바로 아뇩보리(阿耨菩堤)였다는 엄연한 사실을 얻으심이 아니고 바로 연등불(燃燈佛)의 계오(啓悟)에 의지하여 깨치셨다는 것을 장로께서 모르실 리가 없으실 것이다. 뿐이랴!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는 아뇩보리(阿耨菩堤)를 만약 얻었다는 생각만이라도 있으면 이것은 벌써 정법(定法)인 수자상(壽者相)이 뛰쳐나와서 인아(人我)를 가려놓고 천당과 지옥마저도 나눠놓는 판이니 이미 아뇩보리도는 아니라 하겠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장로께서는 본의(本意)가 아닌 물으심을 부처님께 올렸으며 부처님은 응당 엉뚱한 물으심인 줄로 아시면서도 「조그마한 법도 좋이 얻음이 없을 새」하시고 선선히 답을 내리신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왜 그러냐면 일대(一代)의 장로께서 소승적(小乘的)인 입장(立場)으로 권도(權道)마저 써 가시면서까지 이런 물으심을 부처님께 올리시는 것은 아마 아뇩보리도는 주고받을 수가 있는 법(法)도, 아닌 법(法)도 아니면서 중생 제각기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청정심(淸淨心)이라는 것을 뒤 중생에게 재확인시키려는 하나의 방편으로서가 아닌가 생각되는 바이다.
실로 이 법은 중생성(衆生性)중에 오뚝하여 있는 절대의 특권임으로 알진댄 어찌 함부로 몸 밖을 향하여 성현(聖賢)을 쫓으며 어찌 섣불리 마음 밖을 향하여 보리(菩提)를 구하는 어리석음을 범할까 보냐. 스스로의 쓰는 바 그 성품이 바로 모든 부처의 본원(本源)임을 깊이 믿고 깨달아서 정혜력(定慧力)으로 스스로의 삼신불(三身佛)을 관조(觀照)할 지 언정 실속 없이 의타적(依他的)인 환상(幻像)에 쏠려서 육도(六道)의 바퀴만을 감돌까보냐! 고인(古人)도 이르시기를 「求人(구인)에 不如求自己(불여구자기)니라」하셨으니 어찌 이 대목에서 몸과 마음을 한번 크게 뛰치지 않겠는가. 그렇다하여서 어리석게도 무분별(無分別)이라는 문구(文句)만을 본떠서 함부로 대도(大道)로 삼지는 말아야 한다. 왜냐면 얽히인 진여(眞如)는 모든 중생심(衆生心)중의 진여(眞如)로서 혼침(昏沈)과 산란(散亂)만이 판을 칠 것이오, 풀림인 진여(眞如)는 모든 부처지 중의 진여(眞如)로서 정혜(定慧)의 광명(光明)만이 뚜렷할 것이니 비로소 비로자나 불두(佛頭)에 높이 앉아서 삼계(三界)를 크게 호령하게 되기 때문인 까닭이다. 이 당처(當處)라서 섬애(纖埃)가 불립(不立)이니 촌초(寸草)가 불생(不生)이요, 급류(急流)에 춘풍(春風)이니 육진(六塵)이 삼매(三昧)인 소식처로서, 한번 보임과 한번 들음은 모두 발기적(發機的)인 시절(時節)이요, 한줄기 빛깔과 한줄기 향기는 다 활안적(活眼的)인 지음(知音)인지라, 곳곳마다가 보리로(菩提路)요 가지가지마다가 공덕림(功德林)이로다. 어즈버야! 一句二句當風立(일구이구당풍립)하니 界界盡是黃金國(계계진시황금국)일러라. 번역하여 「한 구절 두 구절 바람을 맞아 서니 세계 세계마다는 다 이 황금국일러라.」 이 글귀를 어떻게 받아 들이겠는가? 만약에 이 소식을 알면 수미산 꼭대기에서 춤을 추려니와 아직 모르면 죽을 자리조차 없으리니 그만 다리나 뻗고 통곡이나 하렴! 에익! 부처는 무엇인고! 똥막대기다! 운문(雲門)이 웃는군! 한 문제를 건다.
【문】무슨 이유로서 교계(敎界)의 일부(一部)에서는 교문관(敎門關)이 선문관(禪門關)을 비방하고 선문관(禪門關)이 교문관(敎門關)을 비웃습니까?
【답】참으로 알쏭달쏭한 일이다. 선문관(禪門關)은 부처님의 마음으로 이루어진 상아탑(象牙塔)이라면 교문관(敎門關)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세워진 금자탑(金子塔)이라겠는데, 본래로 마음이 없으면 말을 굴리지 못하는 것이요 말이 없으면 마음의 씀이를 나투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부처님의 마음이신 상아탑(象牙塔)과 부처님의 말씀이신 금자탑(金子塔)이 둘이겠는가. 이러므로 상대(相對)가 끊어진 자리에서 상대(相對)를 세워놓고 서로가 비방하고 비웃는 짓은 자기 모순을 짊어지고 비방함이요 자기 고집을 걷어잡고 비웃음이니, 격외도리(格外道理)인 어디에 자기 모순이 있겠으며 팔만장경(八萬藏經)의 어디에 자기 고집이 있겠는가. 다 자기 나름대로의 문자(文字)풀이와 자기 깜냥대로의 지견(知見)놀음이 엇갈림으로 말미암은 의사(意思)의 반목(反目)에서 오는 짓거리니, 이러고서야 어찌 부처님의 참 말씀에서 참 마음인들 받들겠는가.
【문】자기 모순을 짊어진 비방이요, 자기 고집을 걷어잡은 비웃음이란 무엇을 뜻함이니까?
【답】이렇다. 교문관(敎門關)에는 오도(悟道)에 바로 드는 비결(秘訣)이 있고 선문관(禪門關)에는 자성(自性)을 일찍 깨치는 방도(方道)가 있는 것이니, 다시 말하자면 정견(正見)을 밝힘으로써 도리를 깨치는 비결(秘訣)과 영지(靈知)를 닦음으로써 번뇌를 끊는 방도(方道)가 본래로 둘이 아닌 하나이건마는 이 뜻을 모르고 한쪽에만 치우친 비방이요 비웃음이기 때문에 자기 모순을 짊어진 비방이요 자기 고집을 걷어잡은 비웃음이라는 말이다.
【문】만약 학인이 양쪽 문관(門關)중에서 택한다면 어느 쪽을 가짐이 좋습니까?
【답】교문관(敎門關)에는 선지(禪旨)가 잠겨 있으니 문자(文字)를 통하여 격외선(格外禪)을 닦음이나 만약 문자(文字) 위의 온갖 해의(解義)만을 끌어잡고 부처를 색신(色身) 밖에서 구하려는 행위라면 곧 외도(外道)인 짓거리리라, 애당초 선문관(禪門關)으로 뛰어들어 해탈문(解脫門)을 향하는 방향(方向)만이라도 아는 것만 같지 못하고, 선문관(禪門關)에는 교리(敎理)가 잠겨 있으니 의단(疑團)을 통하여 심성(心性)을 밝힘이나 만약 의단(疑團) 밑에 온갖 분별(分別)의 합리화(合理化)만을 지어가며 성품을 망심(妄心) 밖에서 찾으려는 행위라면 곧 사도(邪道)인 짓거리라, 애당초 교문관(敎門關)으로 뛰어들어 여래문(如來門)의 대의(大義)만이라도 아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다. 이러므로 숙연(宿緣)을 따라 성실(誠實)을 다할지나 한낱 고집쟁이라면 선문관(禪門關)으로 뛰어드는 것이 첩경(捷徑)이리라.
【문】견성(見性)이란 지극히 어려운 것인데 금생(今生)에 복을 쌓았다가 내세(來世)에 닦아 작불(作佛)함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답】도대체 너의 성품을 네가 보는데 지극히 어렵다는 그 사고방식(思考方式)부터가 틀려먹었다. 그 따위 게으름과 편안함만을 좋아하는 망상(妄想)덩이로 몸을 바꿀 제 무슨 탈을 뒤집어쓰지? 사람의 몸 받기란 백천만겁(百千萬劫)에 어렵느니라 시는 부처님의 말씀은 잊었나? 이따위 말은 함부로 입밖에 내지 말지니, 왜냐면 부처씨를 말리기 때문이다. 작불(作佛)을 한다는 마음가짐 새는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여윈 법신분(法身分)으로서의 결정이겠는데 삼세(三世)는 어디에 따로 있어서 현재(現在)와 내세(來世)를 구분하겠는가. 모름지기 상아탑(象牙塔)도 금자탑(金子塔)도 쓸어내고 무형탑(無形塔)에 오르라.
【문】견성(見性)을 하면 당장 부처를 이루어서 자재신통(自在神通)을 부리게 됩니까?
【답】어머니의 태(胎)에서 떨어진 핏덩이는 사람이 아니냐? 그 핏덩이가 자라면서 사람의 구실을 하듯이 성품을 보고 닦아 가면 다겁(多劫)을로 쌓였던 습기가 녹아남에 따라 온갖 신통(神通)도 굴리게 마련인 줄로 알라. 그러나 여기에서 시비(是非)만을 좋아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인데, 교리(敎理)를 모르는 선문관(禪門關)은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기요, 선지(禪旨)를 모르는 교문관(敎門關)은 떡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格)이 라겠으니, 어찌 본래의 면목(面目)을 되찾아서 사람의 구실을 하며 신통(神通)인들 자재로이 굴리겠는가.
이 소식에서 알쏭달쏭 하면서 길이 훤히 트였구나
사량분별 달아보니 천근 만근 무겁구나. 허공만을 달아보니 한푼중도 아니 되네. 아서라! 본래부터 빈 몸인지라 무게 없이 가리로다.
着文字字魔長說 착문자자마장설
離言句句佛妙音 이언구구불묘음
本來無法無傳處 본래무법무전처
一色一香菩提道 일색일향보리도
글자마다 붙이이니 마군이의 긴말이요
이야기를 여윈말귀 부처님의 소리시네
본래법이 없으므로 전할곳도 없음인댄
한빛이요 한향기도 어즈버야 보리도네
第二十三(제이십삼) 淨心行善分(정심행선분)
第二十三(제이십삼) 淨心行善分(정심행선분)
【본문】副次須菩提(부차수보리)야 是法(시법)이 平等(평등)하야 無有高下(무유고하)일새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하고 修一切善法(수일체선법)하면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所言善法者(소언선법자)여 如來說(여래설) 卽非善法(즉비선법)이 是名善法(시명선법)이니라
제이십삼 깨끗한 마음으로 착함을 행하는 분
【번역】다시 수보리야, 이 법이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을 새 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 아가 없고 인이 없고 중생이 없고 수자가 없음으로써 온갖 착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수보리야, 착한 법이라 말한 바는 여래가 곧 착한 법이 아니오, 이 이름이 착한 법임을 말함이니라.
【강송】이 법은 평등하다. 이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머리가 있고 손발이 있어서 그 맡은 바 사실(事實)을 이행(履行)한다. 이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학 다라는 길고 오리 다리는 짧아서 맡은 바 생애(生涯)를 처리(處理)한다. 이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녹음이 짙고 가을이면 단풍이 붉고 겨울이면 눈이 내려서 맡은 바 시절(時節)을 정리(整理)한다. 이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뫼는 높으니 높은 데 맡기고 물은 낮으니 낮은 데 맡겨서 조화(造化)의 묘(妙)를 가져온다. 이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부처는 미하여 중생이 되고 중생은 깨쳐 부처를 이루며 간다. 그렇다면 어찌한 까닭으로 부(富) 귀(貴) 빈(貧) 천(賤)의 나뉨이 있고 생(生) 노(老) 병(病) 사(死)의 갈림이 있고 천당(天堂) 지옥(地獄)의 거리가 있는가? 좋은 말이다. 이유는 이렇다. 스스로가 그 평등을 꺼리어서 구함이 따로 있기 때문에 부(富) 귀(貴) 빈(貧) 천(賤)으로 나뉘고, 스스로가 그 평등을 기(忌)하여서 탐함이 따로 있기 때문에 생(生) 노(老) 병(病) 사(死)로 갈리고, 스스로가 그 평등을 범하여서 붙임이 따로 있기 때문에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의 거리가 생기면서 가지고 버리고 갖추고 가림으로 말미암은 기쁨과 성냄과 서러움과 즐김의 세간사(世間事)는 엮이어지고 마는 것이다. 절대의 평등성(平等性)인 일선상(一線上)에서 이루어지는 차별상(差別相)이 바로 평등의 소산(所産)인 것이다. 이러므로 하여서 만약 학다리를 잘라서 오리다리에 붙이고 높은 뫼를 허물어서 물을 메운다는 것은 각개의 평등성을 무시한 평등으로서 죽음의 평등이다. 긴 것은 긴 데 맡기고 짧은 것은 짧은 데 맡김으로 하여서 김과 짧음은 조화를 같이 이루며 제각기의 모습 세계를 바탕으로 한 서로의 세계가 당당하게 엉키어서 큰 세계로서의 공존을 한다.
이렇듯이 이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거리끼지 않고 여자는 남자를 거리끼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남자와 여자는 한가지로 그 살림을 꾸리며, 늙음은 젊음을 거리끼지 않고 젊음은 늙음을 거리끼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늙음과 젊음은 한가지로 그 삶을 굴리며, 기쁨은 슬픔을 거리끼지 않고 슬픔은 기쁨을 거리끼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슬픔은 한가지로 그 뜻을 펴면서 간다. 이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교문(敎門)은 선문(禪門)을 거리끼지 않고 선문(禪門)은 교문(敎門)을 거리끼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교문(敎門)과 선문(禪門)은 한가지로 그 법을 보이며, 미혹은 깨침을 거리끼지 않고 깨침은 미혹을 거리끼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미혹과 깨침은 한가지로 그 슬기를 들내며, 몰록은 차례를 거리끼지 않고 차례는 몰록을 거리끼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몰록과 차례는 한가지로 그 성품을 밝히면서 가니, 어찌 생각 생각이 석가의 출세(出世)가 아니며 자국자국이 미륵의 하생(下生)이 아니리요.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부처님은 「이 법이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을 새 이 이름이 아뇩보리니」하시고, 다음 계속하시어 「아가 없고 인이 없고 중생이 없고 수자가 없음으로써 온갖 착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보리를 얻느니라」셨을까? 이렇다. 부처님은 장로의 물으심에 따라 낳음은 또한 낳음이 아니오 얻음은 또한 얻음이 아니심을 뜻하시는 말씀이신데, 앞의 말씀이신 즉 본유(本有)인 아뇩보리도를 밝히심이요 뒤의 말씀이신 즉 그 아뇩보리도를 훈(熏)하시는 뜻으로서 모든 현성(賢聖)으로 하여금 그 위(位)를 가지런하게 하심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면 만약 그렇지가 않고 다만 본유(本有)인 아뇩보리도만 깜냥대로 믿고 훈(熏)하지를 아니 한다면 그 결과는 길이 윤회의 바다를 뛰쳐나지 못하는 까닭이니, 알겠구나! 한결같은 공덕행(功德行)이 바로 본지풍광(本地風光) 이라고도 하겠다.
그런데 부처님은 사상(四相)을 여위고 선(善)을 닦으면 대각(大覺)을 이룬다고 말씀하신 다음, 선법(善法)은 선법(善法)이 아니오 이 이름이 선법(善法)이라 하셨다. 그렇다. 선(善)은 악(惡)의 상대적(相對的)인 명사(名詞)이다. 악(惡)이 있음으로서 선(善)이 드러나고 선(善)이 있음으로서 악(惡)이 나타나는 것이니, 왜 그러냐면 악(惡)이 없는데 어찌 선(善)이란 명구(名句)가 성립이 되겠으며 선(善)이 없는데 어찌 악(惡)이란 명구(名句)인들 존립이 되겠는가 말이다. 이러므로 하여서 선(善) 이전의 소식과 악(惡) 이전의 소식이 줄이 아닌 평등성(平等性)이기 때문에 부처님은 말씀하시되 선법(善法)은 선법(善法)이 아니오 이 이름이 선법(善法)이라고 이르신 것이니, 이 의취를 통달할 때 비로소 참 선법(善法)도 닦이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법은 본래가 평등하여 높낮음이 없으므로 하여서 어떠한 갖가지의 사회라도 구성이 되면서 세계의 역사는 바뀌어 간다. 다시 말하자면, 평등성(平等性) 중에서 차별상(差別相)이 이루어지는데 그 당처(當處)인 평등성(平等性)은 본래로부터 오감이 없이 휘영청이 밝고 뚜렷이 맑아서 위아래가 없고 크작음이 없고 넓좁음이 없고 얇두껍이 없고 옳그름이 없고 밉쏠림이 끊어진 자리다. 이러므로 미혹한 중생이나 깨친 부처님네들도 그 성품의 위로는 본래로 평등하다. 성인이라 하여서 따로 더함이 있고 범부라 하여서 따로 덜함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고, 만약 여기에 더함과 덜함이 있다면 이것은 절대성(絶對性) 위에서 자연으로 이루어지는 차별상(差別相)의 미묘한 꽃이요 열매는 아니라 다만 차별을 위한 차별로서 상대성(相對性)끼리의 충돌만이 있을 따름이니 지구(地球)의 앞날인들 뉘라서 보증하겠는가. 지식인(知識人)의 큰 관심사(關心事)라겠다.
이 법은 고금(古今)이 없으며 이변(二邊)이 없으며 삼제(三際)가 없으며 시종(始終)이 없이 평등하기 때문에 번뇌와 보리의 당처가 하나이며 착하고 악함의 당처가 하나이며 바름과 삿됨의 당처가 하나이며 미혹과 깨침의 당처가 하나이니 여기에 무슨 높낮음이 있겠는가. 다만 자기 스스로가 설정하여 놓은 온갖 업보를 발판으로 하여 대개가 대근(大根) 중생은 천취(天趣)로 올라가고 중근(中根) 중생은 인취(人趣)로 들어가고 하근(下根) 중생은 축생취(畜生趣)로 떨어질 뿐이다. 상중하(上中下)의 근기(根機)는 미오(迷悟)의 차이로 나눠지지마는 그 자체(自體)의 성품에 있어서는 절대로 평등하다. 이러므로 부처님도 높낮음이 없음으로서 아뇩보리도라 이르신 것이니, 이렇듯이 슬기로운 사람은 스스로가 간직한 본래의 평등성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푸른 것은 푸른 대로 붉은 것은 붉은 대로 살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눈의 티끌을 쓸어내면 모든 빛깔은 스스럼없이 보이고, 귀의 티끌을 쓸어내면 모든 소리는 스스럼없이 들리고, 코의 티끌을 쓸어내면 모든 냄새를 스스럼없이 기려내고, 혀의 티끌을 쓸어내면 모든 맛은 스스럼없이 나누이고, 몸의 티끌을 쓸어내면 모든 닿질림은 스스럼없이 깨치이고, 뜻의 티끌을 쓸어내면 모든 법은 스스럼없이 알리임과 아울러 그 앞소식도 고요 적적한 빈성품임을 스스럼없이 알게 되는 것이니, 이 바로 모든 누(漏) 곧 쇰이 떨어진 정각(正覺)의 풍광(風光)이 아닐까보냐. 한 문제를 단다.
六 淨 法 육 정 법
眼能見色 不起色想 안능색상 불기색상
耳能聞聲 不起聲想 이능문성 불기성상
鼻能辨香 不起香想 비능변향 불기향상
舌能別味 不起味想 설능별미 불기미상
身能覺觸 不起觸想 신능각촉 불기촉상
意能知法 不起法想 의능지법 불기법상
여섯 맑힘 법
눈으로 능히 빛깔을 보나 빛깔에 새김을 일으키지 말라
귀로 능히 소리를 들으나 소리에 새김을 일으키지 말라
코로 능히 냄새를 가리나 냄새에 새김을 일으키지 말라
혀로 능히 맛을 나누나 맛에 새김을 일으키지 말라
몸으로 능히 닿질림을 깨달으나 닿질림에 새김을 일으키지 말라
뜻으로 능히 법을 아나 법에 새김을 일으키지 말라
이 소식에 한 줄기의 향기가 풍긴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단풍진다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니 의심말고 가거라
衆生本寂與佛同 중생본적여불동
大道虛玄無高下 대도허현무고하
長也任長短任短 장야임장단임단
何事動舌論平等 하사동설논평등
중생이라 적적하여 부처님과 같은거이
큰도라서 허현하니 높낮음이 없노매라
길짧음은 길짧음에 그대로서 맡기려믄
무삼일로 혀를굴려 평등만을 논하려노
第二十四(제이십사) 福智無比分(복지무비분)
第二十四(제이십사) 福智無比分(복지무비분)
【본문】須菩提(수보리)야 若三千大千世界中(약삼천대천세계중)에 所有諸須彌山王(소유제수미산왕)인 如是等七寶聚(여시등칠보취)로 有人(유인)이 持用布施(지용보시)하고 若人(약인)이 以此般若波羅蜜經(이차반야바라밀경) 乃至四句偈等(내지사구게등)을 受持讀誦(수지독송)하야 爲他人說(위타인설)하면 於前福德(어전복덕)은 百分(백분)에 不及一(불급일)이며 百千萬億分(백천만억분)과 乃至算數譬喩(내지산수비유)에 所不能及(소불능급)이니라
제이십사 복과 슬기는 못 비김 분
【번역】「수보리야, 만약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있는 바의 모든 수미산왕 만한 이러한 따위의 칠보 무더기로 어떠한 사람이 가지고 보시에 쓸지라도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으로써 이에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가지고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하여 말하여 주면 앞의 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못 미치며 백천만억분과 이에 셈수의 비유라도 능히 미치지 못하는 바이니라.」
【강송】부처님이 말씀하시어 내려온 그 줄거리를 살피면 무상(無相)을 종(宗)으로 무주(無住)를 체(體)로 하시어 횡설수설(橫說竪說)하셨는데 여기서 또다시 무위(無爲) 공덕성(功德性)인 지경행(持經行)과 유위(有爲) 공덕성(功德性)인 보시행(布施行)을 드심은 아마 그 목적이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에 있음을 뜻하심일 것이다. 보시(布施)는 다못 간탐(慳貪)을 제도하는 것이요 반야(般若)는 바로 무명(無明)을 제도하는 것이니 지경(持經) 공덕행(功德行)과 보시(布施) 공덕행(功德行)과는 그 우열(優劣)은 있는 것이니 오로지 이 책임은 몰록 닦이임과 차례 닦임임에 있음으로 알고 잠시 대계(大界)로 붓을 옮기자.
경(經)의 말씀에 의하면 큰 철위산은 그 높이와 넓이가 이백이십사만리요 작은 철위산은 그 높이와 넓이가 일백십이만리인데 그 가운데 치솟은 수미산의 높이와 넓이가 또한 삼백삼심육만리라고 하였다. 이렇듯이 큰 철위산의 높이와 넓이와 작은 철위산의 높이와 넓이와 수미산의 높이와 넓이를 합친 것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 일컬으니 어마어마한 세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한낱 모습임에는 틀림이 없고 따라 그 모습이 타원형(橢圓形)임에도 틀림이 없으니, 알겠구나! 세계의 건립(建立)된 모습이 타원형(橢圓形)이니 중생의 몸 모습도 타원형(橢圓形)이며 나뭇잎과 풀뿌리의 모습도 타원형(橢圓形)이며 돌과 자갈의 모습도 타원형(橢圓形)이로다. 이럴진댄 그 소리와 이 빛깔도 타원형(橢圓形)으로 온누리에 번지이고 온누리에서 사그라지면서 갖은 조화를 부리며 간다고 하여두자. 이것은 사적(事的)인 면(面)으로 한마디 일컬어 보는 말이고 이적(理的)인 면(面)으로는 사람마다가 천(千)씩인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음을 제각기가 삼천(三千)씩 간직하고서 날로 쓰고 쓰이고 있으니 또한 어마어마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날로 쓰고 쓰이고 있는 셈이란 것도 아울러 말하여 두고 붓을 본론으로 돌리자. 이렇듯이 높고 넓은 세계에 가득히 찬 칠보(七寶) 보시(布施)로써 어찌하여 영원한 공덕행(功德行)을 이루지 못하는가 말이다. 이렇다. 제아무리 높고 넓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만큼의 복덕행(福德行)을 아무리 오랜 세월을 통하여 쌓아올려 봤든, 이것은 어디까지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만큼의 차례인 복덕행이지 단번에 생사업(生死業)을 녹여내는 몰록의 공덕행은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삼독(三毒)에서 이뤄지는 삼천대천(三千大千)의 망심(妄心)인 생사업(生死業)의 티끌을 지경공덕행(持經功德行)인 빗자루로 순간에 몰록 쓸어내면 그대로가 영원한 안주처(安住處)인지라, 어찌 어리석게도 한정을 두면서 차례로 엮어 가는 복덕행(福德行)이 본래의 슬기를 밝혀서 몰록으로 이루는 공덕행(功德行)에 비유를 하겠는가. 이러므로 마하반야바라밀의 사구게(四句偈)만이라도 비록 작은 경문(經文)이나 바른법에 의하여 닦아 가면 성도(成道)를 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니, 중생으로 하여금 지경공덕행(持經功德行)을 권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곳에서 부처님의 뜻을 추찰하여 본다면, 첫째, 칠보(七寶) 보시(布施) 따위는 차례로서 유상(有相) 보시(布施)이니 그 수량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쇰에 속하는 것이므로 생사업(生死業)을 녹여내지는 못하는 것이요, 둘재, 법(法) 보시(布施) 따위는 몰록인 무상(無相) 보시(布施)로서 그 수량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굄에 속하는 것이니 자성(自性)위의 공덕으로서 그대로가 저 언덕에 이르는 소식이다. 이러므로 하여서 차례로 오신 부처님은 있을 수가 없다고 잘라서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자면 차례인 복덕행(福德行)으로 하여금 마음과 몸을 닦고 마침내 몰록인 공덕행(功德行)에로 끌어들여서 구경위(究竟位)에 오르도록 하시는 의취가 숨어 있음도 아울러 알아두어야 한다. 물론 스스로의 근기(根機)에 따라 스스로의 깜냥대로 스스로가 결정하여서 스스로가 닦음으로 하여금 그 공과(功果)의 크고 작음도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것이지마는, 그러나 큰 뜻을 가슴속에 품으면서도 그 방편(方便)을 잘못 가림으로 하여서 평생(平生)을 그르치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실로 간탐을 화도(化度)하는 보시(布施)와 안 밝음을 화도(化度)하는 반야(般若)는 몰록과 차례가 비록 달라 수승의 졸렬이 있지마는, 그러나 가는 길이 서로 교연(晈然)하여서 능히 통하는 것을 어찌 마음 밖의 일로만 취급하고 몰록이 아닌 차례의 복덕행이라 일러서 망령되이 무시하겠는가. 그러나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이다. 진실로 유무누(有無漏)로서 혹은 가문을 위하고 혹은 사회를 위하고 혹은 국가를 위하여 혹은 인류를 위하여 크고 작고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능히 감당한다는 사람이면 빈부(貧富)를 막론하고 지식(知識)의 유무(有無)를 막론하고 그 인격(人格)과 도량(度量)부터가 남보다 다른 청정(淸淨)한 심정(心情)의 주인공(主人公)이 아니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히 본다면 절대적인 인생문제를 다루는 사람에게 있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참으로 슬기로운 사람으로서 세간에 우뚝하여 삼계(三界)를 한입으로 삼킬만한 외고집장이가 아니면 그대로가 낙방(落榜)인 것이다. 더욱이나 어떠한 성신(聖神)이라 일러서 그 가르침을 신뢰하는 것은 그만두고 그 명자(名字)만에 얽매어서 쩔쩔매며 돌아들고, 어떠한 불보살(佛菩薩)이라 하여서 그 이념을 봉행(奉行)하는 것은 고사하고 위용(威容)만에 눌리어서 슬슬 기어 찾아드는 행위는 자신(自身)의 존귀(尊貴)한 삼신불(三身佛)을 잊고 타신력(他神力)에 의탁하여 예속되기를 스스로가 원하는 우치인(疣痔人)의 소견(所見)인지라, 육도윤회(六道輪廻)를 벗어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왜 그러냐면 출세간법(出世間法)은 어디까지라도 자사(自事)이지 타사(他事)는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몸을 한 번 뛰쳐서 증애(憎愛)를 여의고 취사(取捨)를 버리고 사량(思量)을 쉬고 분별(分別)을 끊어서 일체의 반연(攀緣)을 녹여내면 바야흐로 나의 삼신불(三身佛)이 현전(現前)하는 것이니, 이때 비로소 도의심도 여기에서 나오고 용맹심도 여기에서 나오고 자비심도 여기에서 나와 꽃을 피우고 열매는 맺어지게 마련인 것이다. 까닭에 뉘라도 이 관문(關門)부터 깨뜨림으로 말미암아 사람으로서 인격을 갖추면서 따라 불지견(佛知見)도 받들어 행하게 되는 것이니, 비로소 자신을 제도함과 아울러 중생도 건질 수 있는 일대역사(一大力士)라 일컬으겠다. 이렇듯이 법계(法界)에 군림하여서 능히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행을 보이되 그 사람으로 하여금 위가 없는 묘리를 깨치게 함으로써 윤회의 고해(苦海)를 뛰쳐나게 하는 것이니 이 어찌 무량공덕이 아니겠는가! 부처님의 말씀을 빌지 아니하여도 자타(自他)가 성도(成道)를 한다는 것은 모든 불보살의 큰 원이시며 수도자의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최상승(最上乘) 도리(道理)인 이 경(經)을 통하여서 결사적인 정진에 뛰어드는 것만이 무량공덕을 쟁취(爭取)하는 수단이요 방편으로서, 어찌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보시(七寶布施)의 복덕행이 이를 따르겠는가 말이다. 어즈버야! 심지일편(心地一片)은 조파삼천계(照破三千界)로다. 번역하여 「마음자리의 한 조각달은 삼천계를 비추어 뚫었도다.」 어찌 슬기 밖의 일에 마음을 던질까보냐. 아미타불 찬송가를 단다.
서방국토 극락세계 그리운나라
지척에서 멀리찾는 마음의고장
아미타불 계시와서 법을펴시니
나의법신 되찾아서 가오리이다
모습두니 십억불토 넘어간나라
죽고삶이 본래없는 영원의가람
아미타불 계시와서 도를펴시니
삼세간을 여의고서 가오리이다
마흔여덟 크신원을 세우신나라
무량겁에 무루공덕 누리는낙원
아미타불 계시와서 깨우치시니
번뇌망상 버리고서 가오리이다
장엄하고 거룩하온 황금빛나라
고요로운 맑은목청 염불의도량
아미타불 계시와서 인도하시니
모든반연 끊어내고 가오리이다
이 소식에 삼천복덕(三千福德)이 떤다
三身四智(삼신사지)는 體中圓(체중원)이요 八解六通(팔해육통)은 心地印(심지인)이로다. 어허! 본래로부터 生死(생사)가 三昧(삼매)일러라.
七寶布施其利多 칠보보시그이다
八風不動眞功德 팔풍부동진공덕
能破四句斷三際 능파사구단삼제
何處不作天人師 하처불작천인사
칠보보시 말도마소 그이익이 많지마는
팔풍이라 부동해야 진짜공덕 틀림없네
사구게를 능히부셔 삼세간을 끊어내면
무삼일로 걱정하리 부처짓는 길이라서
第二十五(제이십오) 化無所化分(화무소화분)
第二十五(제이십오) 化無所化分(화무소화분)
【본문】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汝等(여등) 勿謂如來(물위여래) 作是念(작시념)하되 我當度衆生(아당도중생)하라 須菩提(수보리)야 莫作是念(막작시념)하라 何以故(하아고)오 實無有衆生(실무유중생)을 如來度者(여래도자)니 若有衆生(약유중생)을 如來度者(여래도자)는 如來(여래)도 卽有我人衆生壽者(즉유아인중생수자)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如來說有我者(여래설유아자)는 卽非有我(즉비유아)어늘 而凡夫之人(이범부지인)이 以爲有我(이위유아)하나니 須菩提(수보리)야 凡夫者(범부자)는 如來說卽非凡夫(여래설즉비범부)요 是名凡夫(시명범부)니라
제이십오 되어지는 바 없이 되는 분
【번역】「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너희들은 여래가 생각을 짓되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한다고 이르지 마라. 수보리야, 이런 생각을 짓지 말지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실로 여래가 제도한 중생이 없음이니, 만약 여래가 제도한 중생이 있다면 여래는 곧 아․인․중생․수자가 있는 자이리라. 수보리야, 여래로서 아가 있음을 말함은 곧 아가 있음이 아니언마는 범부인 사람들이 아가 있다고 하느니. 수보리야, 범부라 함은 여래가 말한 곧 범부가 아니오, 이 이름이 범부니라.」
【강송】제도(濟度)가 있음은 중생이 있음이요, 중생이 있음은 사상(四相)이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인생문제를 근본적인 입장에서 슬기눈으로 관한다면 온갖 중생은 본래로 부처와 다름없는 것인데, 만약 새김을 두어서 여래님이 중생을 멸도하여 마치셨다면 곧 아인사상(我人四相)이 뛰쳐나옴으로 하여금 망언(妄言)이라겠다. 왜냐면 진여계내(眞如界內)에 생불(生佛)이 따로 없고 평등성(平等性) 중에 자타(自他)가 따로 없는 까닭이니, 어찌 부처가 중생을 멸도하심이 계시고 중생이 부처님께 멸도를 받음이 있겠는가. 이러기 때문에 따로 멸도함을 봄이 있다면 이것은 바로 자타(自他)를 일선상(一線上)에 설정(設定)하여 놓고 사상(四相)놀음을 시작하는 짓거리니, 이에 여래님을 무아인(無我人)인 공리(空理)에 통하신 부처님이라 일컬으겠는가?
만약 여기에 미련한 고집쟁이가 있어서 비록 진실로 내가 있음을 주장할지라도 그 성품은 당처(當處)가 비어서 모습이 없으므로 하여금 어디에서 무엇을 끌어잡고 내가 있음을 내세우며, 만약 법신(法身)으로부터 이루어진 나의 색신(色身)은 흰피톨과 불은 피톨로 뭉쳐진 세포의 가죽주며니에 지니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이나 이 흰피톨과 붉은 피톨 따위는 줄곧 죽고 생김이 연속으로 일정한 모습이라고는 없는데 그 무엇을 기준하여서 내라고 자신있는 장담을 하겠는가? 까닭에 뒤바뀐 생각을 가진 범부(凡夫)로서 비록 내가 있음을 우겨댄다손 치더라도 이 범부상(凡夫相)도 또한 적멸인 것이요, 범부상(凡夫相)이 적멸이기 때문에 범부(凡夫)는 범부(凡夫)가 아니고 이 이름이 범부(凡夫)일 따름인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므로 고인(古人)도 이르시기를 전념(前念) 불각(不覺)을 이름하여 범부(凡夫)라 이르고 후념(後念) 즉각(卽覺)을 이름하여 범부(凡夫)가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이러히 여래께서 말씀하신 유아(有我)는 영광(靈光)이 독로(獨露)하는 무변법신(無邊法身)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아(我)이지마는 범부(凡夫)의 유아(有我)는 진풍(塵風)이 병취(並吹)하는 유한색신(有限色身)인 상고아염(常苦我染)의 아(我)이니, 유아(有我)라는 그 자구(字句)와 언구상(言句上)으로는 같으나 그 내용(內容)의 질(質)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기 때문에 그 뜻풀이와 글자풀이를 삼가야 할 것이다. 이러므로 아(我)와 인(人)의 모습을 두면 곧 범부(凡夫)라 이르겠고 아(我)와 인(人)의 모습을 두지 않으면 곧 비범부(非凡夫)라 하겠다. 마음에 생멸상(生滅想)이 있으면 곧 범부(凡夫)라 이르겠고 마음에 생멸상(生滅想)이 없으면 곧 비범부(非凡夫)라 하겠다. 반야바라밀을 깨치지 못하면 곧 범부(凡夫)라 이르겠고 반야바라밀을 깨치면 곧 비범부(非凡夫)라 하겠다. 마음에 능소연(能所緣)이 있으면 곧 이 범부(凡夫)라 이르겠고 마음에 능소연(能所緣)이 없으면 곧 이 비범부(非凡夫)라 하겠다. 무아(無我)요 무인(無人)이기 때문에 곧 이 스스로가 정각(正覺)을 이룬다 이르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이기 때문에 이 본래로부터의 비범부(非凡夫)라 하겠으니, 이 바로가 夢踏靑山十萬里(몽답청산십만리)에 無盡風月幾多年(무진풍월기다년)고, 번역하여 「꿈속에 밟을세라 청산은 십만린데 다함 없는 풍월이라 거듭하기 몇 해런고」 부르는 소식이 아닐까 보냐! 알쏭달쏭한 글귀 라겠다. 알쏭달쏭하다고 생각하는 그 놈이 바로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요 무인(無人)이라 일컬으겠으나, 그러나 이놈이 또한 보고 듣고 깨닫고 알기 때문에 불생(不生)인 나이요 불멸(不滅)인 너라는 말귀로써 표현할 수가 있다는 것도 우선 알아두고 다음을 엮어가자. 이러므로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비록 불성(佛性)이 다 갖추어져서 있다고 하겠지마는, 그러나 만약에 부처님이 가르치시는 그 말씀을 인연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깨침이란 극히 어려운 것이 라겠다. 한 문제를 건다.
【문】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을 가리키심이니까?
【답】 뱀이 대통에 들어서 가는 소식이로다.
【문】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물었는데 어찌하여 뱀이 대통에 들어서 가는 소식이라 하십니까?
【답】 너는 어찌 한 빛깔이 그 한 빛깔 가운데 있지 아니하고 한 구절이 그 한 구절 밖에 있음을 모르느냐.
【문】 어리둥절합니다.
【답】 무엇이 어리둥절 하느냐. 방위(方位)가 없으므로 하여금 능히 방위(方位)를 두고, 거래(去來)가 없으므로 하여금 능히 거래(去來)를 두는 것이니, 「본래로 검지도 희지도 않으나 곳에 따라 푸르고 누름을 나투네」 이르는 의취이기도 하다.
【문】 더욱 답답할 뿐입니다.
【답】 너는 오로지 어리둥절하고 답답한 것만을 끌어잡고 뒹구는구나. 단단히 들어라. 석남(石男)이 밑빠진 바리의 밥을 먹으니 「도솔을 여의지 않으시고 이미 왕궁에 오셨으며,」목녀(木女)가 줄 없는 거문고를 뜯으니 「어머니의 태를 나오지 않으시고 이미 중생을 건져 마치시다」 이르신 소식이기도 하니, 알몸으로 달려들어서 이 문제를 처리하라.
이 소식에 양마(良馬)가 뛰어도 그림자는 없더구나
전념불각(前念不覺)은 중생(衆生)이요 후념즉각(後念卽覺)을 부처라면 뫼 빛깔과 물소리는 무엇이라 하지!
愚者在江更覓水 우자재강경멱수
達人嶺上不尋山 달인영상불심산
無始以來同根生 무시이래동근생
何故智隔千萬里 하고지격천만리
강에내려 물찾으니 어리석은 표본이요
제에올라 뫼안찾음 영특스런 증거로다
비롯없는 그때부터 한탯줄의 낳음이나
무삼일로 철이라서 천만리로 막히었노
장엄하고 거룩하온 황금빛나라
고요로운 맑은목청 염불의도량
아미타불 계시와서 인도하시니
모든반연 끊어내고 가오리이다
이 소식에 삼천복덕(三千福德)이 떤다
三身四智(삼신사지)는 體中圓(체중원)이요 八解六通(팔해육통)은 心地印(심지인)이로다. 어허! 본래로부터 生死(생사)가 三昧(삼매)일러라.
七寶布施其利多 칠보보시그이다
八風不動眞功德 팔풍부동진공덕
能破四句斷三際 능파사구단삼제
何處不作天人師 하처불작천인사
칠보보시 말도마소 그이익이 많지마는
팔풍이라 부동해야 진짜공덕 틀림없네
사구게를 능히부셔 삼세간을 끊어내면
무삼일로 걱정하리 부처짓는 길이라서
第二十六(제이십육) 法身非相分(법신비상분)
第二十六(제이십육) 法身非相分(법신비상분)
【본문】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可以三十二相(가이삼십이상)으로 觀如來不(관여래부)야 須菩提言(수보리언)하되 如是如是(여시여시)니다 以三十二相(이삼십이상)으로 觀如來(관여래)니이다 佛言(불언)하시되 須菩提(수보리)야 若以三十二相(약이삽십이상)으로 觀如來者(관여래자)인데는 轉輪聖王(전륜성왕)도 卽是如來(즉시여래)이냐 須菩提白佛言(수보리백불언)하되 世尊(세존)이시여 如我解佛所說義(여아해불소설의)로는 不應以三十二相(불응이삼십이상)으로 觀如來(관여래)니이다 爾時(이시)에 世尊(세존)이 而說偈言(이설게언)하시되 若以色見我(이색견아)거나 以音聲求我(이음성구아)하면 是人(시인) 行邪道(행사도)라 不能見如來(불능견여래)니라
제이십육 법신은 아닌 모습인 분
【번역】「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느냐. 좋이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뵈옵겠느냐?」 수보리야 말씀 여쭈되 「그러하고 그러하옵니다.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뵈옵겠습니다.」부처님이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뵈울진댄 전륜성왕도 곧 이 여래이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 여쭈되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의 말씀하신 바 뜻을 아옴 같아서는 응당 삼십이상으로 여래님을 뵈옵지 못하겠습니다.」 이때 세존이 게로 말씀하시되 「만약 빛깔로써 나를 보려 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지라, 여래는 뵈옵지 못하리라.」
【강송】부처님은 장로수보리를 내려다보시면서 느닷없이 「좋이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뵈옵겠느냐」하시고 물으셨다. 수보리 장로는 얼결에 「그러하고 그러하옵니다」라고 답을 올렸다. 부처님의 말씀이시라면 전적으로 인정을 하는 답이랄까? 문제는 골치가 아프게 된 셈이다. 부처님의 물으심에 대한 장로의 답이 이렇게 뛰쳐나온다는 것은 해석하기에 곤란하다. 그렇다면 후래(後來) 중생(衆生)을 위한 권도(權道)로서의 답이라면 모르겠으나 이 장면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색신(色身)뿐 아니라 음성(音聲)마저도 여의는데서 여래님을 뵈옵는 것을 잘 알고 계시는 수보리장로이신데 무슨 까닭으로 부처님의 물으심에 「그러하고 그러하옵니다」여쭈셨을까? 것은 곧 빔이요 빔은 곧 것이라는 의도였을까? 틀렸다. 기합이 안 걸린다.
수보리 장로는 확실히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병에 걸리신 모양이다. 부처님은 수보리 장로가 아직도 모습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쓸어내지 못하였음으로 아셨던지 삼십이상(三十二相)으로 여래를 뵈울진댄 전륜성왕도 곧 이 여래이냐 하시고 크게 철퇴를 내리신 셈이시다. 장로는 급히 말씀을 돌리시어 「삼십이상(三十二相)으로 여래님을 뵈옵지 못하겠습니다」하시고 황황히 여쭈셨다. 갈수록 태산(泰山)이로다. 해공제일인자(解空第一人者)이신 장로로서의 첫째 답은 그 때와 그 경우로 보아서 잘못된 답이라면, 둘째 답은 미한 답이고 지금엔 법신(法身)에 깨친 답이실까? 틀렸다. 그렇다면 바탕과 씀이는 따로 놀아나니 무궁한 조화는 뉘라서 굴리게! 이럴진댄 앞에서는 가사답(假事答)인데 지금엔 실리답(實理答)이실까? 틀렸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은 둘이니 초상은 뉘라서 치게! 이럴진댄 앞에서는 도중답(途中答)인데 지금엔 가리답(家裡答)이실까? 틀렸다. 그렇다면 무릇과 거룩은 엇갈리니 천당과 지옥은 뉘라서 말아내게! 그러나 인생(人生)의 오는 곳을 알면 앞의 답은 옳다. 그러나 인생(人生)의 가는 곳을 모르면 뒤의 답은 그르다. 아서라! 부처님과 장로는 중생을 계오(啓悟)시키시는 데의 방편(方便)을 높이 드심 이신데, 다만 중생들이 제가 모르고 왈가왈부(曰可曰否)할 뿐이로다. 똥 무더기에서 연꽃이 피듯 왈가왈부(曰可曰否)에서 법눈이 밝아지네!
전륜성왕(轉輪聖王)은 십선(十善)을 행하고 권하심으로써 무색계(無色界)의 사천(四天)을 관할하시는 중생계의 최고 주재자이시니, 그 갖추어진 복덕을 셈하면 좋이 입으로 표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측량할 수도 없다. 더욱이 동양 사람들은 옥황상제로, 서양 사람들은 여호와대신(大神)이란 존호(尊號)로도 모시지마는 수복(壽福)까지라도 주고 거두어 들인다고 생각하는 세간중(世間中)의 대성신(大聖神)이시다. 이러므로 그 지혜와 그 공덕으로 이루어진 삼십이상(三十二相)의 당당하신 위의(威儀)야 이루 말할 나위인들 있겠는가. 그러나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삼십이상이나 중생의 삼십이상도 삼십이상은 삼십이상이지마는 그 삼십이상의 깨끗하고 물들임에 따른 질(質)과 내용(內容)의 차이에 있어서는 중생의 삼십이상이 어찌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삼십이상을 따르며, 또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삼십이상이 어찌 여래님의 삼십이상을 우러러 뵈옵겠는가. 어즈버야! 삼십이상은 삼십이상으로서 같으나 바야흐로 삼십이상은 삼십이상으로서 크게 다르니 장차 중생으로서의 갈길은 어디 메인가!
부처님은 수보리 장로의 깨친 바를 더욱 더 밝게 하시기 위하여 희미하게나마 남은 세혹(細惑)을 말끔히 씻어내시면서 오늘의 가르치심을 뒤에 펴시기 위하시어 게를 드시되,
만약
빛깔로서
나를 보려 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지라
여래를 뵈옵지 못하리라
하셨다. 빛깔과 음성으로는 뵈올 수 없다는 말씀이시다. 왜 그러신가? 부처님은 그 빛깔과 그 소리에 계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여서 그 빛깔과 그 소리를 또한 여위심도 아니기 때문에 문제는 달라진다. 까닭에 여래를 뵈옵는데는 삼십이상으로 뵈움도 잘못이지마는 삼십이상을 여윔도 또한 잘못인 것이다. 자! 이럴진댄 어떠한 수단과 방편으로써 한 자국도 옮기지 않고 여래를 뵈옵겠는가? 어헛! 한 톨의 쌀도 간직하지 아니하고 한 줄기의 나물도 갈지 아니하였구나! 알겠는가? 모르겠거든 마야부인의 뱃속을 향하여 다시 달려들라. 이래도 모르면 너는 죽을 곳도 없을 터이니 어이 하려노. 몸을 크게 뛰치지 못하면 만겁(萬劫)의 슬픔을 뉘와 더불어서 나누려는가! 고인(古人)도 이르시기를 봄․들음․깨침․앎에 속하지도 않고 또한 봄․들음․깨침․앎을 여위지도 않는 것이라니, 봄․들음․깨침․앎에 나아가서 구하여도 틀리며 봄․들음․깨침․앎을 떠나서 구하여도 또한 틀릴진대 어떻게 함으로써 여래님을 몸소 뵈옵겠는가? 별다른 소식이 따로 없다. 다만 소리와 빛깔에 쏠려서 새기지 말고 그만 그대로 쓰면 그만인걸! 다만 봄․들음․깨침․앎이 참이 아니어늘, 그 봄․들음․깨침․앎에 쏠려서 얽히지 아니하고 그만 그대로 쓰면 그만인걸! 알겠는가? 이곳인지라 한 발자국이 틀리면 그대로 사도(邪道)에 떨어지는 갈림길이니 입을 봉하자. 불씨가 하늘 밖으로 튀니 눈은 별 갓으로 가는구나. 에익! 이래도 모르겠거든 봉래산 꼭대기의 탕건바위에게 물어 보아라. 한 문제를 건다.
【문】무엇을 삼보(三寶)님이라 합니까?
【답】게로 읊을 터이니 들어라.
大圓鏡智體金剛 대원경지 체금강
虛徹靈通本無作 허철영통본무작
包盡三界絶思議 포진삼계절사의
自心正覺汝佛寶 자심정각여불보
크게둥근 거울슬기 바탕이라 금강일세
휘영청이 밝으면서 본래지음 없는구나
삼천계를 싸고서도 모든생각 끊겼으니
스스로의 정각이라 너의불보 틀림없다
遠離三毒斷邪見 원이삼독단사견
恒沙聖德從此來 항사성덕종차래
千變萬變變不去 천변만변변불거
自心正法汝法寶 자심정각여법보
삼독일랑 멀리하고 삿된소견 끊어내면
모랫수의 거룩한덕 일로좇아 몰려오나
천번만번 변하여도 변하면서 아니가니
스스로의 정법이라 너의법보 틀림없다
應機接物用無窮 응기접물용무궁
不住一切善分別 불주일체선분별
隨緣作緣度衆生 수연작연도중생
自心正修汝僧寶 자심정수여승보
기틀응한 물건마다 접해씀이 무궁일새
온갖곳에 안머물되 판가름을 잘하오며
연을따라 연을짓고 중생들을 제도하니
스스로의 정수이라 너의승보 틀림없다
【문】무엇을 삼신불(三身佛)이라 합니까?
【답】게로 읊을 터이니 들어라.
靈明獨照不變體 영명독조불변체
內外透徹無滯礙 내외투철무체애
從此性中萬法現 종차성중만법현
是名淸淨法身佛 시명청정법신불
영특스리 홀로밝아 비치나니 불변체라
안과밖이 툭틔여서 거맄낌이 없노매라
일로부터 성품중에 오만법이 이뤄지니
이름하여 모시오리 청정법신 불이시네
金風一陣掃重雲 금풍일진소중운
頭頭物物是妙用 두두물물시묘용
成就諸法皆實性 성취제법개실성
是名圓滿報身佛 시명원만보신불
서늘바람 한무더기 쌓인구름 쓸어내니
가지가지 물건마다 이것묘한 씀인지라
모든법을 성취함은 실다움인 성품인걸
이름하여 모시오리 원만보신 불이시네
一念思量變化多 일념사량변화다
天堂地獄於此分 천당지옥어차분
隨緣三界度衆生 수연삼계도중생
是名千億化身佛 시명천억화신불
한생각이 번지이니 변화라서 많더구나
천당이라 지옥이라 일로좇아 나눠질새
연을따라 이삼계의 중생들을 제도하니
이름하여 모시오리 천억화신 불이시네
【문】삼보(三寶)는 그러하오나 삼신불(三身佛)은 제각기대로의 인격(人格)을 갖추신 부처님네로 짐작하였는데 나의 성품 중에서 이루어지는 별칭불(別稱佛)임을 비로소 알게 되오니 놀랍고도 우습기만 합니다.
【답】 무엇이 놀랍고도 우습느냐. 청정법신(淸淨法身)은 너의 성품이요, 원만보신(圓滿報身)은 너의 슬기요, 천억화신은 너의 거님이나, 다만 삼신(三身)은 씀이에 따라 거짓 명자(名字)를 세움으로 알아라.
【문】거짓 명자(名字)를 세운다는 뜻은 무엇을 이름이니까?
【답】팔식(八識)을 굴려서 사지(四智)를 이루고 사지(四智)를 묶어서 삼신(三身)을 이뤘기 때문이다.
【문】그럴진댄 알이인 식(識)은 어디로부터 와서 무슨 작용(作用)을 하며, 팔식(八識)을 굴려서 사지(四智)를 이루고 또 다시 사지(四智)를 묶어서 삼신(三身)을 이룬다면 몇 개의 식(識)이 같이 이루어지는 일지(一智)이며, 몇 개의 식(識)이 홀로 이루어지는 일지(一智)이며, 따라 몇 개의 지(智)를 묶어서 홀로 이루어지는 일신불(一身佛)을 이루며, 몇 개의 지(智)를 묶어서 같이 이루어지는 일신불(一身佛)을 이루며, 몇 개의 지(智)를 묶어서 같이 일신불(一身佛)을 이룹니까?
【답】눈은 빛깔을 보고, 귀는 소리를 듣고, 코는 냄새를 판단하고, 혀는 맛을 분별하고, 몸은 닿질림을 깨닫는 까닭에 오식(五識)이라 이르고, 육식(六識)은 팔식(八識) 중의 여섯째인 식(識)인데 앞의 오식(五識)인 감각(感覺)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작용(作用)을 일으키는 까닭으로 의식(意識)이라 이르고, 칠식(七識)은 팔식(八識) 중의 일곱째인 식(識)인데 앞의 육식(六識)이 분별하고 판단하는 오진(五塵) 곧 빛깔․소리․냄새․맛․닿질림의 좋고 나쁨을 전하는 까닭으로 심식(心識) 혹은 아견식(我見識)이라 이르는데 범어(梵語)로 말라식이라고도 일컬으고, 팔식(八識)은 여덟째의 식(識)인데 모든 알이를 간직하는 까닭으로 함장식(含藏識)이라 이르는데 범어(梵語)로 아뢰아식이라고도 일컬으는 본래의 여래지(如來智)로서 만물(萬物)의 씨인 것이다. 이렇듯이 육식(六識)과 칠식(七識)은 인(因)에 속하고 오식(五識)과 팔식(八識)은 과(果)에 속한다 이르겠지마는, 다 거짓 이름을 세움이나 그 씀이에 있어서 함장식(含藏識)은 뚜렷이 맑아서 움직이지 않으므로 하여금 호올로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이루고, 심식(心識)은 밉고 쏠림이 없으므로 하여금 호올로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이루고, 의식(意識)은 능히 분별을 잘하므로 하여금 호올로 묘관찰지(妙觀察智)를 이루고, 오식(五識)은 곳에 응하여 판단을 하므로 하여금 같이 성소작지(成所作智)를 이루는 까닭에, 따라 대원경지(大圓鏡智)는 호올로 법신(法身)을 평등성지(平等性智)는 호올로 보신(報身)을 묘관찰지(妙觀察智)는 성소작지(成所作智)로 더불어서 같이 화신(化身)을 각기 이루지마는 그 슬기 자체의 성품은 없는 줄로 알아라
이 소식에 삼신불(三身佛)이 나오신다
여래님을 뵈었느냐? 뵈었으면 지옥 가기 화살이다.
여래님을 못 뵈었느냐? 못 뵈었으면 여래님을 뵈었느니라.
衆生與佛同根生 중생여불동근생
一念誤落五蘊山 일념오락오온산
迷人自造火蕩國 미인자조화탕국
長嘆生耶又死耶 장탄생야우사야
중생이라 부처이라 한뿌리로 왔건마는
한생각이 엇갈려서 오온산에 떨어졌네
미한사람 스스로가 화탕지옥 지어놓고
한결같이 죽네사네 탄식만을 하는고야
第二十七(제이십칠) 無斷無滅分(무단무멸분)
第二十七(제이십칠) 無斷無滅分(무단무멸분)
【본문】須菩提(수보리)야 汝若作是念(여약작시념)하되 如來(여래) 不以具足相故(불이구족상고)로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아 須菩提(수보리)야 莫作是念(막작시념)하라 如來(여래)가 不以具足相故(불이구족상고)로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汝若作是念(여약작시념)하되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는 說諸法斷滅(설제법단멸)가 莫作是念(막작시념)하라 何以故(하이고)오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는 於法(어법)에 不說斷滅相(불설단멸상)이니라
제이십칠 끊기고 꺼짐이 아닌 분
【번역】「수보리야, 너는 만약 이러한 생각을 짓되 ‘여래가 모습을 갖추지 아니하는 까닭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겠느냐? 수보리야, 이러한 생각을 짓지 말지니, 여래가 모습을 갖춤이 아닌 까닭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니라 하라. 수보리야, 네가 만약 이러한 생각을 짓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는 자는 모든 법에 끊기고 꺼짐을 말하겠느냐’ 이러한 생각을 짓지 말지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는 자는 법에 있어서 끊기고 꺼지는 모습을 말하지 않느니라」
【강송】부처님께서는 장로수보리를 향하시어 「수보리야, 너는 만약 이러한 생각을 짓되 ‘여래가 구족상을 쓰지 아니하는 까닭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겠느냐? 수보리야, 이런 생각을 짓지 말지니」하시고 지금까지 말씀하여 내려오신 그 설(說)을 한번 크게 뒤집어 놓으셨다. 참으로 기상천외(奇想天外)의 소식이라겠다. 왜 그러실까? 이유는 이러리라. 지금까지에는 구족상(具足相)을 깨뜨리시는데 중점을 두셨기 때문에 행여나 빈 데로만 치우치는 새김을 일으키면서 단멸상(斷滅相)을 향하여 떨어지지나 아니할까 염려가 되시는 까닭으로 느껴진다. 다시 말하자면 부처님께서는 앞에서 수보리장로에게 고하시되 갖추어진 색신으로 여래를 뵈옵지 못한다 이르셔 놓고 이곳에 이르러서는 잠시 말마디를 돌리시와 「수보리야, 이런 생각을 짓지 말지니」하신 것은 아무리 환상(幻相)인 색신(色身)이라 할지라도 그 색신(色身)을 아주 무시(無視)하여 버리고 법신(法身)에만 주저앉으려면 주저앉지도 못할 뿐 아니라 개성적(個性的)인 인격(人格)은 존립(存立)이 안됨과 아울러 개성적(個性的)인 법신(法身)의 존재의의(存在意義)마저도 말살이 됨으로 하여금 마침내 무기공(無記空)인 단멸상(斷滅相)에 떨어지기 때문인 것이 라겠다. 실로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제도하시는데 항용 분별을 짓지 마라, 사량을 하지 마라, 반연을 쉬어라 하시어 마음을 공적(空寂)하게 가져서 무상(無相)을 마루로, 무주(無住)를 바탕으로, 묘유(妙有)를 밑으로 삼으라는 뜻의 말씀을 줄곧 하셨으니 이 말씀을 한문자(漢文字)로 옮긴다면 無字(무자) 空字(공자) 非字(비자) 不字(불자) 觀字(관자) 相字(상자) 투성이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공(非空)의 공(空)인 활공(活空), 곧 진공(眞空)을 이해(理解) 요달(了達)치 못하는 중생으로서야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때 잘못하면 완공(頑空)에 주저앉아서 무기공(無記空)인 단멸상(斷滅相)에 떨어지기도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중생의 마음 씀이를 잘 알고 계시는 부처님은 이곳에서 또다시 말씀을 돌이켜 「여래가 모습을 갖춤이 아닌 까닭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니라 하라」시고 그 마음에 털끝만치의 모습에 집착함이 없이 공적체(空寂體) 중에서 보리도(菩堤道)가 이루어짐을 재 강조하시는 소식이니 참으로 정신을 차릴 당처(當處)이다. 그러나 만약에 진신(眞身)은 모습을 여의는 것 만으로만 착각을 하고 실성(失性)한 사람처럼 무사도일식(無事渡日式)인 현실도피만을 꾀하면서 이 色身을 통하여 삼십이(三十二) 청정(淸淨)의 공덕행(功德行)을 닦지 아니하면 그 개성적(個性的)인 법신(法身)은 어디에서 찾으며 나아가 본래의 아뇩보리도는 어디에서 얻겠는가. 이야말로 부처씨를 단멸(斷滅)함이니 문제는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알겠구나! 모습은 갖추어지지 않음인 듯 갖추어서 스스로가 장엄함이요, 법은 전하여지지 못함인 듯 전하여서 서로가 통함인데 어찌 일찍이 단멸일까 보냐! 끊김인 듯 없고 죽음인 듯 꺼짐이 절대로 아니고 오직 삼십이(三十二) 청정행(淸淨行)을 통하여 공덕장(功德藏)을 세우는 소식이므로 부처님은 계속하여 ‘아뇩보리심을 내는 자는 법(法)에 있어서 단멸상(斷滅相)을 말하지 않느니라’ 말씀하시는 것이니 법신(法身)에만 치우치는 단견(斷見)도 색신(色身)에만 치우치는 상견(常見)도 뛰어 넘으라는 뜻이시다. 이러므로 불도(佛道)는 어렵다고 일컬음일까? 세간학(世間學)은 말을 듣고 책을 읽으면 알아지는 것이 상식(常識)이나, 불도(佛道)만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면 그 의취가 자구(字句) 문장(文章)만의 풀이로서는 능히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소리와 빛깔이 없다고 이를지나 소리와 빛깔을 스스럼없이 쓰는 것이니, 옛적에 세존께서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인천중(人天衆) 에게 일경화(一莖花)를 들어 보이시고 ‘나에게 있는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을 음광(飮光)에게 전하여 널리 제도케 하노라’ 하실 때 오직 호올로 금빛 대머리가 얼굴을 부수어 웃으셨음은 이 바로가 한 등장을 켜면 백천 등잔이 밝히어지며 한 소리를 외치면 숱한 메아리가 응해지는 소식인데 이곳에 이른다면 단상이견(斷常二見)인들 어디에 붙이겠는가! 만약 이 도리(道理)를 모르고 다만 한가로움만을 찾아서 눈에 비치는 빛깔을 지워버리려 하고 귀에 들리는 메아리를 넘겨버리려 함은 섶을 지고 불을 끄려함이나 다름없음을 말하여 둔다. 한 노래를 단다.
가나다 노래
가고옴이 본래없는 공적체중에
나와너로 나눴으니 묘용이랄까
다행스리 사람인양 뽐도내지만
라라리리 장단속에 세월은간다
마냥이몸 허무함을 앎이보배라
바라밀행 바른소견 놓치지않고
사홍원을 높이세워 닦아나가면
아미타불 회상이라 뉘는못가랴
자력으로 이소식을 밝히어내고
차별상을 평등으로 보게될그때
카랑카랑 내부처는 뛰쳐나지만
타력문엔 이비결의 가뭇도없네
파순이너 어쩔테냐 물러가거라
하고픈말 다한곳에 장승도뛴다
파순이너 어쩔테냐 물러가거라
하고픈말 다한곳에 장승도뛴다
이 소식에 귀머거리가 되고 소경이 되어라
없다 없다 없다 단멸상(斷滅相)에 떨어질라
있다 있다 있다 구족상(具足相)에 뛰어들라
동상이몽(同床異夢) 짓지마라 귀굴리(鬼窟裡)에 걸리일리
相卽非相非非相 상즉비상비비상
非非相也是實相 비비상야시실상
若錯誤落斷滅相 약착오낙단멸상
永劫不脫地獄相 영겁불탈지옥상
상은바로 상아니며 아닌상도 아니러니
아닌상도 아님일세 이바로가 참상이네
만약아차 잘못되어 단멸상에 떨어지면
영겁으로 지옥상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第二十八(제이십팔) 不受不貪分(불수불탐분)
第二十八(제이십팔) 不受不貪分(불수불탐분)
【본문】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이만항하사등세계칠보)로 持用布施(지용보시)하고 若復有人(약부유인)이 知一切法無我(지일체법무아)하야 得成於忍(득성어인)하면 此菩薩(차보살)은 勝前菩薩(승전보살)의 所得功德(소득공덕)이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以諸菩薩(이제보살)이 不受福德故(불수복덕고)니라 須菩提(수보리) 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이시여 云何菩薩(운하보살)이 不受福德(불수복덕)이니이까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의 所作福德(소작복덕)은 不應貪着(불응탐착)일새 是故(시고)로 說不受福德(설불수복덕)이니라
제이십팔 받음이 아니고 탐함이 아닌 분
【번역】「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향하의 모래 같은 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로 쓸지라도 만약 다시 사람이 있어서 온갖 법에 내가 없음을 알고 인욕에 성취를 얻으면 이 보살이 앞의 보살의 얻은 바 공덕보다 나으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수보리야, 모든 보살이 복덕을 받음이 아닌 까닭으로써 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시되 「세존이시여, 보살이 왜 복덕을 받음이 아니라 이르나이까?」「수보리야, 보살이 짓는 바의 복덕은 응당 탐착이 아님일새, 이런 까닭으로 복덕을 받음이 아니라고 말을 함이니라.」
【강송】앞에서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복덕(福德)이 시방허공(十方虛空)으로 더불어서 평등함을 말씀하셨고 이곳에서는 무아인법(無我忍法)을 알면 항하사(恒河沙)의 보시(布施)보다 얻는 바의 공덕(功德)이 수승 하다고 이르심은 불수(不受)하고 불탐(不貪)함이 바로 주강(住降) 두 문제를 뜻하심으로 보고 다음을 엮어가자. 실로 온갖 법에 내가 없음을 알면 피아상(彼我相)이 사그라지면서 평등리(平等理)를 나투우고, 인욕의 성취를 얻으면 능소정(能所情)을 잊으면서 본래지(本來智)를 들낼 것이니, 그 묘(妙)는 허명(虛明)하여서 방위(方位)가 없을 것이요 그 화(化)는 원통(圓通)하여서 시분(時分)이 없을 것으로, 이 사람의 얻는 바 공덕은 앞의 칠보(七寶) 복덕보다 수승 하다고 이르지 않겠는가. 왜 그러냐면 거래(去來)가 본적(本寂)하고 동정(動靜)이 일여(一如)하기 때문에 산하(山河)와 목석(木石)과 금수(禽獸) 따위의 모든 모습이나 선악(善惡)과 정사(正邪)와 증애(憎愛) 따위의 온갖 법이 응연(應然)함으로 말미암아서, 남자는 남자이면서 여자와 통하고 여자는 여자이면서 남자와 통하고, 부처는 부처이면서 중생과 통하고 중생은 중생이면서 부처와 통하고, 늙음은 늙음이면서 젊음과 통하고 젊음은 젊음이면서 늙음과 통하니 성별간(性別間)에 미오간(迷悟間)에 노소간(老少間)에 안 통함이 없고, 큼은 큼이면서 작음과 통하고 작음은 작음이면서 큼과 통하고, 넓음은 넓음이면서 좁음과 통하고 좁음은 좁음이면서 넓음과 통하고, 김은 김이면서 짧음과 통하고 짧음은 짧음이면서 김과 통하니 대소간(大小間)에 광협간(廣狹間)에 장단간(長短間)에 통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럴진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음에 가름이 생기지 않을 것이요, 입을 열고 혀를 굴림에 새김을 달지 않을 것이니, 이 바로가 밝은 거울에 물건이 비치고 빈 골에 소리가 응함 같아서 비치고 응함도 스스럼없이 확연하지 않겠는가! 육조(六祖)도 「모든 뿌리에 응하여 떳떳이 쓰되 쓴다는 새김도 일으키지 않으며 온갖 법을 가름하되 가름하는 새김을 일으키지 않으면 천지불이 일어나서 바다를 태우고 천지바람이 쏟아져서 뫼끼리 부딪쳐도 참으로 떳떳한 적멸락(寂滅樂)만은 그대로 열반상(涅槃相)이니라」이르신 것이다.
이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만약 다시 사람이 있어서 온갖 법에 내가 없음을 알고 인욕에 성취를 얻으면 이 보살은 앞의 보살이 얻은 바의 공덕보다 나음이니」이르신 것이다. 이 의취를 깨쳐서 몸을 한 번 뛰치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음에 분별이 끊어질 것이니 어찌 미움과 쏠림인들 있겠으며, 입을 열고 혀를 굴림에 새김이 사그라질 것이니 어찌 즐김과 싫음인들 있겠는가! 다만 모든 법의 당처(當處)가 이렇듯이 비었음을 알 때 비로소 공덕법(公德法)도 따라 같이 비게 마련인지라, 그 복덕과 그 주는 이와 그 받는 이인 삼륜(三輪)도 다 같이 빈 것임으로 하여서 복덕의 주고받음이란 생각이 없기 때문에 복덕을 받음이 아니라는 말귀로 표시하신 것이 아닐까. 돌아보건댄 온갖 내외법(內外法)의 그 당처(當處)가 비었으면서도 되돌아 온갖 내외법(內外法)에 오뚝스리 나아가서 자재(自在)로이 굴리니, 마침내 이 온갖 내외법(內外法)은 천번 변하고 만번 변하나 변하여서 기지 아니하고 천번 변하고 만번 변하나 변하여서 오지 아니하는 소식이니, 이 바로 타사(他事)가 아닌 엄연한 자사(自事)로서 무궁한 조화로 삼계(三界)를 세우고 간다고 이를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보살이 왜 복덕을 받음이 아니라 이르나이까」물으심에 대하여 「보살이 짓는 바인 복덕은 응당 탐착이 아닐새」라는 답을 내리신 곳이다. 무슨 까닭이실까? 복덕의 그 당처(當處)가 밝혀졌음에도 거리낌이 없이 장로가 보살의 불수복덕(不受福德)을 부처님께 말씀드린 것은 제일월(第一月)인 불수복덕처(不受福德處)를 이름이 아니오 불수복덕(不受福德)이 되려면은 어찌 하여야 되나이까 물으시는 제이월(第二月)을 뜻함으로 보아둠이 좋을 것이다. 왜 그러냐면 이 또한 뒷중생을 위한 자성계발(自性啓發)의 길을 열어 놓으시려는데 그 본회(本懷)가 계실 것으로 생각이 되는 바이며, 부처님의 답은 짓는 바의 복덕은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고 모두가 다 중생의 이익을 위하시는데 그 목적(目的)이 있음을 밝히심인 것이니, 그 이유로서는 본래로부터 부처님네와 중생들은 둘이 아니므로 하여서 중생을 제도함이란 부처님네의 자신을 단장함이기 때문이라 하여둘까! 끝으로 수행도상(修行途上)에 있는 학인(學人)들의 병통을 적어보자.
첫째, 조작(造作)된 어떤 불보살의 존엄상(尊嚴相)과 조작(造作)된 모든 심상(心像)에 탐착함으로 말미암아 제 자신(自身)중의 삼신불(三身佛)을 망각(忘却)하고 열등감(劣等感)에 사로잡힘은 우부류(愚夫類)의 병통이다.
둘째, 아승지겁을 통하여 육도만행(六道萬行)을 닦음으로써만이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사고방식은 소승도(小乘徒)의 병통이다.
셋째, 온갖 법이 똑똑하고 역력한 공적체성(空寂體性)중에서 이루어지는데 따로 원명(圓明)한 묘각(妙覺)을 찾음은 수선자(修禪者)의 병통이다.
넷째, 심성(心性)의 계오(啓悟)가 대도(大道)임을 모르고 상대적(相對的)인 신통조화(神通造化) 따위에만 탐착 함으로써 구경위(究竟位)를 삼으려는 행위는 학인중(學人衆)의 병통이다.
다섯째, 깜냥대로의 철로 남의 말귀나 본뜨고 나름대로의 슬기로 남의 글귀나 되풀이하는 것으로 저의 살림살이인 양하여 아는 척 함은 공리배(功利輩)의 병통이다.
이 소식에 쪼개어는 져도 끊기지는 않는다
원래로 삼륜(三輪)이 비었으니 때에 삼륜(三輪)이 굴리이는 구나. 어헛! 해는 동천(東天)에 뜨기 때문에 좋고 달은 서산(西山)에 지기 때문에 좋다.
推尊爲道愚夫病 추존위도우부병
刻苦作佛小乘病 각고작불소승병
不識現前修禪病 불식현전수선병
假借神通學人病 가차신통학인병
濫用他句功利病 남용타구공리병
성현을 추앙함이 도라고함은 우부병일따
괴룸을 새김으로 부처지음은 소승별일따
나툼을 모르면서 선에얽힘은 닦는병일따
신통을 부리려고 날뛰는짓은 학인병일따
남말을 제것처럼 써먹으렴은 공리병일따
第二十九(제이십구) 威儀寂靜分(위의적정분)
第二十九(제이십구) 威儀寂靜分(위의적정분)
【본문】須菩提(수보리)야 若有人(약유인)이 言如來(언여래) 若來若去若坐若臥(약래약거약좌약와)라하면 是人(시인)은 不解我所說義(불해아소설의)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者(여래자)는 無所從來(무소종래)며 亦無所去(역무소거)일새 故名如來(고명여래)니라
제이십구 적적 고요한 거동 분
【번역】「수보리야, 만약 사람이 있어서 여래를 만약 온다든지, 만약 간다든지, 만약 앉는다든지, 만약 눕는다든지로 이른다면 이 사람은 나의 말한 바의 뜻을 알지 못함이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여래란 쫓아서 오는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음 일새, 이 까닭에 여래라 이름함이니라.」
【강송】이곳은 제일월(第一月)도 아니오 제이월(第二月)도 아닌 상여(常如)하여 불생(不生)하고 상주(常住)하여 불멸(不滅)하는 여래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독로(獨露)시킨 자리라 하겠다. 앞에서 이르시되 좋이 몸 모습으로써 여래를 뵈옵지 못한다 시고, 또 이르시되 좋이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뵈옵지 못한다 시고, 또다시 이르시되 부처를 좋이 갖추어진 색신으로 뵈옵지 못하며 여래를 좋이 갖추어진 모든 모습으로 뵈옵지 못한다 셨으니 이것은 다 부처가 모습이 있음 아님을 밝히신 소식처(消息處)라 하겠고, 다음 또다시 이르시되 「이런 생각을 짓지 말라. 여래가 모습을 갖추지 아니한 까닭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겠느냐」하셨으니 이것은 부처가 모습이 없음 아님을 밝히신 소식처(消息處)라 하겠고, 이 목에서 이르시되 「쫓아서 오는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음 일새」하심은 여래는 가고 옴이 없으심을 밝히신 소식처(消息處)라 하겠다. 이렇듯이 여래의 법성신(法性身)은 모습이 아니나 모습이 아님도 아니므로 성상(性相)이 여여(如如)하여 동정(動靜)이 불이(不二)인 당처(當處)이니, 이른바 여래는 옴이 아니나 오지 아니함이 아니고, 감이 아니나 가지 아니함이 아니고, 앉음이 아니나 앉지 아니함이 아니고, 누움이 아니나 눕지 아니함이 아님으로써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는 사위의중(四威儀中)에 항상 공적성(空寂性)을 여의지 않으심을 여래라 이르겠다. 천번 변하고 만번 변하나 변하여 가지 않으니 이 바로 밑빠진 바리의 밥을 먹는 소식이요, 천번 변하고 만번 변하나 변하여 오지 않으니 이 바로 줄 없는 거문고의 소리를 듣는 소식이다. 이렇듯이 청정하고 이렇듯이 담적 하면서 묘용(妙用)이 자재(自在)하나 그 실다움을 글로 좋이 쓰지 못하고 말로 능히 이르지 못하고 물감으로 감히 그리지 못하고 흙으로 몸소 만들지 못하니 이른바 말길이 끊어졌고 마음길이 꺼진 그 자리인지라, 애오라지 청정법신(淸淨法身)이신 비로자나불의 얼굴에 봄바람이 가득한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로부터 붓을 소소(昭昭)하고 역역(歷歷)한 여래의 법성신(法性身)을 굴려서 보기로 하자.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의 존엄상(尊嚴相)은 삼계(三界)에서 비유할 수 없음은 틀림이 없으시나, 그러나 뒷날에 작불(作佛)을 약속한 불자(佛子)로서 어찌 외외하시고 당당하신 부처님의 위풍(威風)이라 하여서 드무신 몸매에만 얽히고 눌리어 추앙(推仰)만을 위한 추앙(推仰)만으로 일생(一生)을 헛되이 보낼까 보냐! 무슨 뜻이냐. 부처님이 수승하신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의 금용(金容)을 갖추시었으면 중생도 또한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의 형태(形態)는 갖추어져 있어야 마땅히 옳은 일이다. 왜 그런가? 우선 그 마음씨인 성품에 있어서 여래님의 마음씨인 성품과 중생의 마음씨인 성품이 둘이 아닌 하나인 까닭이요, 다음 그 색신(色身)에 있어서 중생이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의 인연에 굴리어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부처님의 색신(色身)도 또한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의 인연을 빌어서 이루시기 때문이다. 이럴진댄 부처님과 중생은 체성적(體性的)인 법성면(法性面)으로나 용상적(用相的)인 색상면(色相面)으로도 한가지인지라, 어디에 중생과 부처가 서로 다른 점이 있겠는가. 그러나 중생은 부처님으로 더불어서 천지(天地)의 차이로 나뉘어지고 있으니 그 이유의 실마리를 한 가닥 풀어 보기로 하자. 부처님은 숙세(宿世)로부터 삼십이청정행(三十二淸淨行)을 닦으심으로 말미암아 정지광명(正智光明)인 존귀상(尊貴相)의 위의(威儀)로 삼계(三界)를 굴리시게 되는 것이지마는, 중생은 반대로 누겁(累劫)을 통하여 삼십이오염행(三十二汚染行)을 쌓음으로 하여금 사견망식(邪見妄識)인 비열상(卑劣相)의 형태(形態)로 일신(一身)도 감당을 못하는 것이다. 비유컨댄 물로는 같은 물이나 부처님의 물은 깨끗하기 백옥 같다면 중생의 물은 더럽기 진흙 같으니, 어찌 그 바탕이 같다고 일러서 부처님과 중생을 같이 견주어 말하겠는가.
△ 이러히 누만겁(累萬劫)의 청정행(淸淨行)인 결과 부처를 이루는 바탕이 됨이 사실이라면 우리도 누만겁(累萬劫)을 통하여 닦음으로써만이 부처를 지을 수 있는 절대의 조건이라야 옳지 않겠는가?
△ 이 천지야! 그것은 세존의 분(分)으로 보아서 다겁(多劫)을 통한 청정행을 닦으셨다는 것을 인정함은 옳은 소견이겠으나 중생의 분(分)으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모르느냐. 세존께서는 모든 중생을 대신 하시어 유무루(有無漏)의 공덕을 닦으시고 쌓으심과 아울러 대각(大覺)을 성취하신 다음 불지견(佛知見)을 펴시와 인천(人天)을 제도하셨으니 우리는 다만 그 어른의 가르치시는 대로 그 어른이 만들어 놓으신 방편의 제트기로 하여금 저 언덕에 이르면 그만일 뿐이다. 이를 일러 「한 번 뛰어서 여래 땅에 바로 든다」는 소식이니, 이 바로가 원만보신 노사나불의 경계임을 알 때 어찌 숙세(宿世)에 있어서 세존(世尊)의 각고수행(刻苦修行)을 마음에 걸어 두리요!
큰 도(道)를 이루려면 우선 그 기틀과 그 연(緣)을 만나야 한다. 인신(人身)을 받을 것이 다행한 기틀이라면 불법(佛法)을 만난 것은 고마운 인연이다. 부처님은 당신 자신의 경험을 통하시어 중생 제각기의 근기(根機)대로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을 여기에 열어 놓으시고 특히 격외(格外) 선지(禪旨)의 깃발을 드높이셨다. 뿐이랴! 세존께서는 이미「심성(心性)」의 공항(空港)에다 팔만사천정의 제트기를 대기시켜 놓으시고 맑은 눈알을 굴려대시며 중생들이 달려와서 입맛대로 타기를 기다리신 지 이미 오래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 백천만겁(百千萬劫)에도 만나기 어렵느니라. 무엇들을 어정거리느냐. 심성(心性)의 공항(空港)으로 뛰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인 직심로(直心路)일 따름이다. 자! 외도(外道)야, 너도 오너라. 평등성(平等性)중에 너와 내가 따로 없거늘 어찌 너로 하여금 차별을 할까 보냐. 부처님 앞에는 오로지 생사고해(生死苦海)를 떠도는 불자(佛子)들만이 있을 다름이니, 한번 굴려서 몸을 뛰쳐라. 시호시호(時好時好)가 부재래(不在來)로다. 어허! 청산이 구름 속에 있느냐, 구름이 청산 속에 있느냐! 彌陀會上無人事(미타회상무인사)하니 兩分天下一毫中(양분천하일호중)이로다. 번역하여 「미타회상에 인사가 없으니 천하를 둘로 나눠도 한 항아리 가운델러라.」 이 소식처에서 삼악도(三惡道)가 뒤집히니 지옥이 와지끈 부서지고, 생사업(生死業)이 무너지니 천당이 우지끈 넘어지는 풍광(風光)이다. 어디에서 부질없이 꿈틀거리느냐. 이리할까, 저리할까 망설이다가 흑일하(黑日下)에 날뛰는 백귀(百鬼)에게 사로잡히면 헤어나지 못하니, 쫓기 이는 길은 바로 불구덩이가 아니면 흙구덩이니라. 결단을 하라. 분별에 있지 않다. 여래 땅에 이르는 길은 집에 있고 집을 뛰쳐 남에 있지 않으니 그 법도(法度)에 차별이 없는 까닭이요, 앎과 모름에 있지 않으니 그 지견(知見)에 차별이 없는 까닭이요, 늙음과 젊음에 있지 않으니 그 상모(相貌)에 차별이 없는 까닭이요, 남자와 여자에 있지 않으니 그 성별(性別)에 차별이 없는 까닭이요, 미하고 깨침에 있지 않으니 그 지혜(智慧)에 차별이 없는 까닭이요, 바름과 삿됨에 있지 않으니 그 도리(道理)에 차별이 없는 까닭으로서, 착함과 악함에 있지 않으니 그 행위(行爲)에 차별이 없는 까닭으로서, 오로지 「쫓아서 온 바도 없고 또한 가는 바도 없느니라」호(號)의 제트기에 있을 따름이다. 이 당처(當處)인지라, 가지가지마다가 거문고 줄이요, 잎 잎마다가 피리 소리 더니, 어즈버야! 천억화신(千億化身)인 석가모니불의 가풍(家風)이로다.
이 소식에서 법중대왕(法中大王)이 나오신다
천당(天堂) 지옥(地獄) 무너지니 고국산천(古國山川)에 월일색(月一色)이로다.
삼가이 합장(合掌)하고 분향(焚香)하리라.
三十二威淸淨行 삼십이위청정행
誰知直入如來地 수지직입여래지
若非今日到彼岸 약비금일도피안
更待何時作人身 경대하시작인사
서른둘의 위의라서 깨끗하온 행인것을
뉘라알리 여래땅에 바로드는 소식임을
만약오늘 저언덕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어느때를 다시맞아 사람몸을 지으려노
第三十(제삼십) 一合理相分(일합이상분)
第三十(제삼십) 一合理相分(일합이상분)
【본문】須菩提(수보리)야 若善男子善女人(선남자선여인)이 以三千大千世界(이삼천대천세계)를 踤爲微塵(쇄위미진)하면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是微塵衆(시미진중)이 寧爲多不(영위다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되 甚多(심다)니다 世尊(세존)이시여 何以故(하이고)오 若是微塵衆(약시미진중)이 實有者(실유자)인데는 佛(불)이 卽不說是微塵衆(즉불설시미진중)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佛說微塵衆(불설미진중)이 卽非微塵衆(즉비미진중)일새 是名微塵衆(시명미진중)이니이다. 世尊(세존)이시여 如來所說三千大千世界(여래소설삼천대천세계)가 卽非世界(즉비세계)일새 是名世界(시명세계)니 何以故(하이고)오 若世界(약세계)가 實有者(실유자) 卽是一合相(즉시일합상)이니 如來說一合相(여래설일합상)은 卽非一合相(즉비일합상)일새 是名一合相(시명일합상)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一合相者(일합상자)는 卽是不可說(즉시불가설)이언마는 但凡夫之人(단범부지인)이 貪着其事(탐착기사)니라
제삼십 한 뭉치의 이치 모습 분
【번역】「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가는 먼지로 삼는다면 뜻에 어떻다 이르겠느냐. 이 먼지가루들이 많다 하겠느냐?」「심히 많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습니까?」만약 이 먼지가루가 실다이 있음일진댄 부처님께서 곧 먼지가루라 말씀하시지 아니하시리니 어찌함으로써 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먼지가루는 곧 먼지가루가 아니오 이 이름이 먼지가루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 바 삼천대천세계도 곧 세계가 아니고 이 이름이 세계이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습니까? 만약 세계가 실다이 있음일진댄 곧 한 뭉치인 모습일지나, 여래께서 말씀하신 한 뭉치인 모습은 곧 한 뭉치인 모습이 아니오, 이 이름이 한 뭉치인 모습이옵니다.」「수보리야, 한 뭉치인 모습은 좋이 말할 것이 못되거늘 다만 범부인 사람들이 그 일에 탐착 함이니라.」
【강송】세계를 부수면 많은 먼지가루가 되나 그 먼지가루는 곧 먼지가루가 아니오 이 이름이 먼지가루며, 그 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오 이 이름이 세계며, 그 한 뭉치인 모습은 곧 한 뭉치인 모습이 아니오 이 이름이 한 뭉치인 모습으로서, 그 한 뭉치인 모습은 좋이 말할 수 없거늘 다만 범부들이 그 일에 탐착 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이신데 무엇을 뜻함 이실까. 여기에서 부처님의 속셈을 캐어내기로 하자. 부처님은 앞에서 이르시되, 좋이 몸 모습으로도, 좋이 삼십이상(三十二相)으로도, 좋이 갖추어진 색신으로도, 좋이 갖추어진 모든 모습으로도 여래를 뵈옵지 못한다 시고, 또다시 말씀하시되 여래를 만약 온다든지, 만약 간다든지, 만약 앉는다든지, 만약 눕는다든지 이른다면 이 사람은 나의 말한 바의 뜻을 알지 못함이라 셨으니, 이는 여래가 나투신 몸이 참도 아니시며 거짓도 아니시며 가는 것도 아니시며 오는 것도 아니신 부처의 진체(眞體)를 나투시는 소식처라 이르겠고, 다시 앞에서 말씀하신 법은 다 좋이 취하지도 못하며 좋이 말하지도 못하며 법이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라셨고, 여기에서는 먼지가루는 곧 먼지가루가 아니며 삼천대천세도 곧 세계가 아니라 시고 한 뭉치인 모습은 곧 한 뭉치인 모습이 아니라 시고 다음 법의 모습이란 여래가 말씀한 곧 법의 모습이 아니라 시니, 이는 바로 법 모습이 곧 법 모습 아님을 밝히심으로써 법의 진체(眞體)를 나투시는 소식처(消息處)라 이르겠으나, 실은 이 바로 언구(言句)와 명수(命數)의 흔적을 말끔히 씻어버리시고 본래의 맑고 맑은 진원(眞源)으로 돌이키는 수단(手段)임을 미리 머리에 넣어 두어야 할 것이다. 돌아 보건대는 불신(佛身)이 본래로 하염이 없음이로되 기틀을 따라서 진용(眞容)과 거래(去來)를 두고, 법성(法性)이 본래로 낳음이 없음이로되 기틀을 대함에 권실(權實)과 돈점(頓漸)을 두는 것이니, 까닭에 일신(一身)에 있어서 삼신(三身)을 나투시고 삼신(三身)에 있어서 먼지가루 수인 화신(化身)을 나투시며, 일법(一法)에 있어서 삼승(三乘)을 넓히시고 삼승(三乘)에 있어서 먼지가루 수인 중법(衆法)을 넓히시는 것이니, 이러히 살필진댄 불신(佛身)이 본래로 하염없음으로 말미암아 능히 이변(二邊)을 나툼이나 이변(二邊)이 또한 실다움이 아닌 데야 어찌 여기에 차별문(差別門)을 두어서 진용(眞容)과 거래(去來)의 다름을 말하며, 법성(法性)이 본래로 낳음 없음으로 말미암아 능히 명수(命數)를 나툼이나 또한 명수(命數)가 실다움이 아닌 데야 어찌 여기에 차별문(差別門)을 두어서 권실(權實)과 돈점(頓漸)의 다름을 말할까 보냐.
부처님은 중생의 성품 가운데서 일고 지는 그 망념(妄念)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부수운 먼지가루 수만큼이나 많다는 비유를 드심인데, 다시 말을 하자면 사람이란 그 마음 씀이 어떠함에 따라 일심(一心)이 열림으로써 도종지(道種智)․일체지(一切智)․일체종지(一切種智)인 삼지(三智)를 낳아 놓고 삼지(三智)는 또 삼천(三千)으로 나뉘면서 또다시 숱한 관지(觀智)를 두게 마련이며, 일경(一境)이 열림으로써 공체(空諦)․가체(假諦)․중체(中諦)인 삼체(三諦)를 낳아 놓고 삼체(三諦)는 또 삼천(三千)으로 나누이면서 또다시 숱한 체경(諦境)을 두게 마련이며, 일념(一念)이 열림으로써 견사혹(見思惑)․진사혹(塵沙惑)․무명혹(無明惑)인 삼혹(三惑)을 낳아 놓고 삼혹(三惑)은 또 삼천으로 나누이면서 또다시 숱한 진로문(塵勞門)을 두게 마련이며, 일법(一法)이 열림으로써 소승(小乘)․중승(中乘)․대승(大乘)인 삼승(三乘)을 낳아 놓고 삼승(三乘)은 또 삼천으로 나누이면서 또다시 숱한 수다라문(修多羅門)을 두게 마련으로, 그 바탕은 비록 하나이나 열리면서 셋으로 낳아 놓고 셋은 또다시 삼천으로 나뉘면서 숱한 법으로 벌려 놓는 것이니,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운 먼지가루 수가 어찌 중생의 성품에서 일고 지는 그 망념(妄念)에 비유인들 안될까 보냐 말이다. 그러나 이 먼지가루 수인 망념(妄念)이 참이 아니오 거짓일진댄 어찌 빛깔이 누런 쇠라 하여서 금과 바꾸겠는가!
먼지가루가 이미 실다움이 아님일진댄 삼계(三界)도 또한 실다움이 아니라겠다. 그러나 삼계(三界)가 엄연한 듯이 그 이름이 있음은 다만 이름을 빌려서 경계를 나투울 따름이니, 그 실인즉 삼천대천세계로서의 다름인들 어디에 있을까 보냐!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절대성(絶對性)인 무형무색(無形無色)의 일지(一地)가 실다움이라면 상대성(相對性)인 유형유식(有形有色)의 삼계(三界)는 거짓이 분명하므로 일지(一地)가 실다웁기 때문에 한 뭉치인 모습이라겠고 삼계(三界)가 거짓이기 때문에 한 뭉치인 모습이 아니 라겠지마는 그러나 소리인 일지(一地)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메아리인 삼계(三界)는 굴리어짐으로 하여금 소리인 일지(一地)는 버젓이 살림을 꾸리면서 가는 것이니, 이렇다면 삼계(三界)는 일지(一地)의 밖에 있음 아니고 일지(一地)는 삼계(三界)의 밖에 있음 아님이 또한 분명하므로 서 이 참인 한 뭉치의 모습이라 이르지 않겠는가! 이렇듯이 이름이 이미 실다움이 아닐진댄 삼승(三乘)도 또한 실다움이 아니나 삼승(三乘)의 이름이 있는 것은 다만 그 이름을 빌려서 그 근기(根機)를 접할 따름이니 그 실인즉 어디에 삼승(三乘)의 다름이 따로 있겠는가!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일승(一乘)은 이 실다움이요 삼승(三乘)은 이 권도임이 분명한 것이니 일승(一乘)이 실다웁기 때문에 한 뭉치의 모습이라겠고 삼승(三乘)이 권도이기 때문에 한 뭉치인 모습이 아니 라겠지마는, 그러나 전기(電氣)인 일승(一乘)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불빛인 삼승(三乘)은 이루어짐으로 하여금 전기(電氣)인 일승(一乘)은 불빛인 三乘으로 더불어 살림을 꾸리어서 가는 것이니, 이렇다면 삼승(三乘)은 일승(一乘)의 밖에 있음이 아니고 일승(一乘)은 삼승(三乘)의 밖에 있음 아님이 또한 분명하므로 서 되돌아 이 참인 한 뭉치의 모습이라 않겠는가! 일지(一地)의 한 뭉치인 참 모습이나 일승(一乘)의 한 뭉치인 참 모습의 소식에는 이러히 언설상(言說相)마저도 적멸(寂滅)함 이어늘, 다만 어리석은 사람은 이 의취를 모르고 삼승(三乘)을 말하면 삼승(三乘)의 이름만을 취하고 일승(一乘)을 말하면 일승(一乘)의 이름만을 두고서 풀이만을 거듭할 뿐이니 부처님의 뜻인 참 한 뭉치의 모습인 소식과는 거리가 먼 것 이라겠다. 이러므로 하여서 때에 셋으로 열리고 때에 하나로 뭉치이니, 이 열림이냐! 이 뭉치임이냐! 이 하나이냐! 이 셋이냐! 어즈버야, 거두고 놓음이 자재하니 죽이고 살림도 뜻 가운데 있더구나. 고인(古人)도 이르시기를 「아닌 셋은 바로 셋이요 아닌 하나는 바로 하나인지라, 셋과 하나는 갖추움이 아니면서 셋과 하나가 이에 갖추어짐이라」시고, 또다시 이르시되 「다름이 아님을 말하고자 할진대 어는 것이 다름이겠으며, 하나가 아님을 말하고자 할진댄 어느 것이 다름이겠으며, 하나가 아님을 말하고자 할진댄 어느 것이 하나이겠으리요. 셋과 하나를 비었다고 한다면 셋과 하나는 되돌아 셋과 하나인지라, 셋과 하나는 바야흐로 본래가 뚜렷이 이루어짐을 알겠구나」 셨으니, 天上天下一莖花(천상천하일경화)일새 銅蛇擊鼓太平歌(동사격고태평가)러라, 번역하여 「하늘 위와 하늘 아래가 한 줄기의 꽃일러니, 구리 뱀이 북을 치며 태평가를 부름이어라」는 소식이 아닐까보냐. 한 문제를 건다.
【문】산하대지(山河大地)도 장차는 꺼집니까?
【답】 이 땅덩이뿐 아니라 해․별․달도 한낱 모습으로서 생김이 있었기 때문에 따라 꺼짐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문】 그럴진댄 세기(世紀)의 종말(終末)이라 일컬으지 않겠습니까?
【답】 세기(世紀)의 종말(終末)은 세기(世紀)의 성립(成立)을 뜻한다. 왜나면 종말(終末)이 없는데 성립(成立)이 따로 있을 수 없고 성립(成立)이 없는데 종말(終末)이 따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죽음은 인생(人生)의 종말(終末)을 보임이나 다시 낳음을 뜻함이요 낳음은 인생(人生)의 성립(成立)을 보임이나 다시 죽음을 뜻함이며, 시들어짐은 꽃의 종말(終末)을 보임이나 되돌아 피어남을 뜻함이요 피어남은 꽃의 성립(成立)을 보임이나 되돌아 꽃의 떨어짐을 뜻함이니, 실로 종말(終末)의 앞소식에 종말(終末)이 따로 없고 성립(成立)의 앞소식에 성립(成立)이 따로 없이 의젓한 일위일상(一位一相)중에서 종말(終末)과 성립(成立)은 한결같이 조화를 이루며 갈 따름이니 세기(世紀)의 종말(終末)이란 아예 생각도 말라.
【문】 몇 가지 더 묻습니다. 본래가 의젓한 일위일상(一位一相)이면서 무슨 까닭에 숱한 법(法)을 낳아 놓고 남녀(男女)로도 나뉘며 그 성질까지도 다릅니까?
【답】 의젓한 일위일상(一位一相)만 있고 조화를 부리지 않으면 그 의젓한 일위일상(一位一相)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러므로 모습을 일으켜서 무궁 무진한 살림을 꾸려서 가는 것인데, 지견(知見)을 세워서 따로 새김을 둠으로 하여금 제각기대로의 자리에서 제각기대로의 법칙(法則)에 따라 음양(陰陽)을 나뉘면서 같이 굴리고, 지속(遲速)을 나뉘면서 같이 굴리고, 명암(明暗)으로 나뉘면서 같이 굴리고, 대소(大小)로 나뉘면서 같이 굴리나, 중생의 탈을 뒤집어쓰면 정사(正邪)와 미오(迷悟)와 돈점(頓漸)과 권실(權實)을 두어서 삶을 엮으며 가는 것이니, 어찌 상대적인 성별(性別)인들 없겠으며 제각기대로의 성질인들 같겠는가!
【문】 소원을 세우면 여신(女身)을 남신(男身)으로도 바꿀 수가 있습니까?
【답】 여신(女身)을 남신(男身)으로 바꿀 소원이 있다면 벌서 여신상(女身像)을 인정함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남녀(男女) 전(前)의 소식으로 돌아가서 정심(正心)을 놓치지 않고 중생 제도의 큰 원을 세우면 여신(女身)을 굴려서 남신(男身)을 이루고 남신(男身)을 굴려서 불신(佛身)도 이루니라.
【문】 인구증가(人口增加) 문제는 산아제한(産兒制限)으로 조절함이 어떠합니까?
【답】 생명(生命)을 어찌 유위법(有爲法)인 조작물(造作物)로 생각하느냐. 인생본유(人生本有)인 법락(法樂)을 굴림으로 말미암아 무겁게 맺어지는 정연(正緣)의 결과는 거두어들일 줄을 모르고 대개의 사람들은 삶의 가치가 오욕락(五欲樂)중에서도 그 애욕(愛慾)행위를 가장 즐거운 인생(人生)의 보람있는 수단(手段)으로 느끼고 별의별 사연(邪緣)마저도 마구 짓고 마구 맺어들이는 판이니 인구(人口)문제인들 어떻게 조절이 되겠는가. 그리고 근래(近來)에 접어들면서는 산아제한(産兒制限)의 방편(方便)으로 생리적(生理的)인 수단(手段)마저도 서슴치 않고 단행(斷行)을 한다니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니냐. 왜냐면 실제면에 있어 서로서로가 맺히어지고 풀리어지는 온갖 인연관계는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고인(古人)도 인과(因果)는 불매(不昧)라 셨으니 소소(昭昭) 역역(歷歷)하게 엉클어진 인연을 금생(今生)에는 일단 끊었다고 가상(假想)을 하자. 그러나 그 과보(果報)는 줄곧 변하면서 여의지 않고 내생(來生)․내후생(乃後生)에라도 다른 형태로 나투게 마련인데 어찌 간단히 거부(拒否)가 된 것처럼 생각하고 안심(安心)하겠는가! 이러므로 법락(法樂)을 모르는 부부애(夫婦愛)는 도살장(屠殺場)의 도끼자루란 것도 덧붙여두자.
【문】 법락(法樂)과 오욕행위(五欲行爲)의 그 차이점을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답】 법락(法樂)이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쳐 알고 법(法)에 따라 일체(一切)를 관찰(觀察)함이겠으나 이곳에서는 선연(善緣)으로 맺어진 가족(家族)끼리라도 오욕(五欲)행위에 빠져서 인생(人生)을 포기(抛棄)함보다는 불생(不生) 불멸(不滅)의 도리(道理)를 깨쳐알기 위하여 심신수행(心身修行)의 즐거운 맛과 상쾌한 멋을 스스로가 같이 체득(體得)함을 뜻함이요, 오욕락(五欲樂)이란 빛깔․소리․냄새․맛․닿질림 따위에 붙이어서 모든 쾌감(快感)을 느낌인데 대개가 상대와의 접촉에서 일으키는 그 자극과 그 흥분에서 오는 쾌감(快感)이니 이성(異姓) 밖의 부산물(副産物)로서 애욕행위(愛慾行爲)가 으뜸이라겠다. 이것은 결국 오욕락(五欲樂)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악(惡)의 씨를 뿌리기 쉬운 것이지마는 이 밖에도 체육 운동중의 몇 종목인 경기에 이르러서는 악(惡)의 씨를 뿌리는데 있어서 애욕행위(愛慾行爲) 못지 않게 단단히 한몫을 본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름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왜나면 그 운동 자체가 벌써 나와 남을 일선상(一線上)에 올려놓고 힘과 힘의 대결로서 지면서도 이기는 도리를 모르는 모진 싸움행위의 종말로 막(幕)을 내리는 것이니, 관용(寬容)보다 타도심(打倒心)이 앞서고 도의(道義)보다 적개심(敵愾心)이 앞서고 사실(事實)보다 요행심(僥倖心)이 앞서는데 이 어느 곳에서 사람은 사람으로 더불어 삶과 즐김을 굴린다는 인생관(人生觀)이나 사회관(社會觀)인들 나오겠는가. 더욱이나 닭싸움․개싸움 따위뿐 아니라 슬기로운 사람과 미련한 소와의 대결에서 잔혹적(殘酷的)인 자극성과 발광적(發狂的)인 흥분심 따위만을 불러일으키면서 허망부심(虛妄浮心)인 환상계(幻像界)를 꾸미어대는 판국이니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닐까보냐. 어즈버야! 이럴진댄 구름은 바람을 따르듯 화기애애(和氣靄靄)한 장자(長者)의 풍(風)은 어디에서 찾으며, 물은 골을 따르듯 귀심여여(歸心如如)한 도인(道人)의 태(態)는 어디에서 찾아보랴. 다만 그 혈투(血鬪)행위로 말미암아 악연(惡緣)의 씨만이 뿌리어질 따름이니, 올바른 지식인(知識人)으로서 이 문제에 대한 한마디의 말도 지금까지 없었다는 것은 되돌아 그 지식인(知識人) 자체가 더욱 의심스러울 뿐이다. 왜나면 이런 풍조(風潮)에서 쏟아지는 얄망궃은 중생을 내버려두고 어떻게 저 혼자만의 자성공덕행(自性功德行)인들 스스럼없이 쌓아가며, 어떻게 저 혼자만의 수신미풍행(修身美風行)인들 스스럼없이 이루어 가겠다는 말인가. 실로 법락(法樂)과 오욕(五欲)이 천지(天地)의 차이라면 그 과보(果報)도 또한 운니(雲泥)의 차이 라겠다.
【문】 인구증가(人口增加)에 따른 식생활(食生活)문제는 장차 어떻게 됩니까?
【답】 오욕(五欲)행위에서 오는 중생이라도 결국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때문에 선연(善緣)에서 오는 사람의 자비(慈悲)가 이를 방관하지 않느니, 입을 열어서 그 비틀어진 마음을 바로 잡아주고 온갖 법의 당처가 비었음을 깨치게 할 때, 비로소 허공에서도 식량문제의 해결을 보게될 것이다.
【문】 허공에서는 어떻게 식량문제를 해결을 보게됩니까?
【답】 너는 끝없는 허공성(虛空性)중에 다함이 없는 온갖 요소가 두루 갖추어져 있음을 모르느냐. 현재 흙과 물과 빛깔을 인연하여 이루어지는 오곡(五穀)만 하여도 한낱 허공성(虛空性)인 줄을 아는 심성학(心性學)의 슬기는 이 천연(天然)의 보고(寶庫)를 버리지 않고 색상학(色象學)으로 하여금 조화(造化)를 이루게 할 때 바로 허공은 생활필수품(生活必需品)의 못자리 판이 되느니라. 이에 앞서 문물(文物)은 극도로 발달이 되고 법풍(法風)은 크게 일어나면서 선행(禪行)도 닦임으로 말미암아 수도자(修道者)에 따라서는 일일삼식(一日三食)이 일월삼선식(一月三禪食)으로도 바뀌게 되는 것이니, 우선 노력미급(努力未及)이나 한탄할지언정 자원부족(資源不足)은 걱정하지 말라.
【문】 인지(人智)의 발달(發達)에 따른 사상(思想)과 인생(人生)문제는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답】 땅덩이가 생긴 뒤로의 사상(思想)과 인생(人生)문제의 시비(是非)는 전부가 변천적(變遷的)인 상대성(相對性) 속의 놀음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것을 깨치고 불변적(不變的)인 절대성(絶對性)을 바탕으로 하는 사상(思想)과 순조로이 발육되면서 인생(人生)문제도 스스럼없이 처리가 되리라. 왜나면 영특스런 본래의 슬기가 차차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 소식인지라 만법(萬法)은 뿌리가 없으니 가랑잎인가
지옥이 망심(妄心)이면 천당도 망심(妄心)이네.
뱀이 대통에 들어서 갈 때, 남(南)은 한라산이요 북(北)은 백두산일러라.
一位莊嚴不可收 일위장엄불가수
有時開三靑黃白 유시개삼청황백
萬法無根本非實 만법무근본비실
風頭高枕好幻夢 풍두고치호환몽
장엄하온 한분이네 어찌좋이 거두우리
혹은때로 셋을여니 청황백이 분명쿠나
뿌리없는 온갖법은 실다움이 아니지만
시원하온 벼개위의 좋은곡두 꿈일러라
천당(天堂) 지옥(地獄) 무너지니 고국산천(古國山川)에 월일색(月一色)이로다.
삼가이 합장(合掌)하고 분향(焚香)하리라.
三十二威淸淨行 삼십이위청정행
誰知直入如來地 수지직입여래지
若非今日到彼岸 약비금일도피안
更待何時作人身 경대하시작인사
서른둘의 위의라서 깨끗하온 행인것을
뉘라알리 여래땅에 바로드는 소식임을
만약오늘 저언덕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어느때를 다시맞아 사람몸을 지으려노
第三十一(제삼십일) 知見不生分(지견불생분)
第三十一(제삼십일) 知見不生分(지견불생분)
【본문】須菩提(수보리)야 若人(약인)이 言(언) 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불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라하면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是人(시인)이 解我所說義不(해아소설의부)아 不也(불야)니다 世尊(세존)이시여 是人(시인)은 不解如來所說義(불해여래소설의)니 何以故(하이고)오 世尊(세존)이시여 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은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즉비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일새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시명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는 於一切法(어일체법)에 應如是知(응여시지)며 如是見(여시견)이며 如是信解(여시신해)하야 不生法相(불생법상)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所言法相者(소언법상자)는 如來說卽非法相(여래설즉비법상)일새 是名法相(시명법상)이니라
제삼십일 지견을 내지 않는 분
【번역】「수보리야, 만약 사람이 말하되 부처가 아의 지견, 인의 지견, 중생의 지견, 수자의 지견을 말하였다면, 수보리야, 뜻에 어떠하겠느냐. 이 사람이 내가 말한 바 의취를 앎이겠느냐?」「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여래의 말씀하신 바 의취를 알지 못함이오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겠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신 아의 지견, 인의 지견, 중생의 지견, 수자의 지견은 곧 아의 지견, 인의 지견, 중생의 지견, 수자의 지견이 아니옵고, 이 이름이 아의 지견, 인의 지견, 중생의 지견, 수자의 지견이기 때문입니다.」「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자는 온갖 법에 응당 이러히 알지며 이러히 볼지며 이러히 믿어서 법의 모습을 내지 말지니, 수보리야, 말한 바 법의 모습이란 여래가 말한 곧 법의 모습이 아니오, 이 이름이 법의 모습이니라.」
【강송】부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상견(四相見)에 대하여 설왕설래(說往說來)를 많이 하셨다. 그만큼 사상견(四相見)의 해독(害毒)이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본래로부터 사상견(四相見)을 가지고 계시거나 사상견(四相見)을 일으키심이 아니셨지마는 미한 중생들은 사상견(四相見)을 자작(自作)하고 자작(自作)한 그 사상견(四相見) 속에 들어앉아서 사상세계(四相世界)를 화려하고도 실다웁게 꾸미기 위하여 교육도 하고 사업도 하고 정치도 한다. 사상견(四相見)은 관념적인 권위좌(權威座)에 군림하여 색상학적(色象學的)으로 문화(文化)를 엮으면서 종교(宗敎)까지라도 지어낸다. 물론 사상견(四相見)의 세계 속에서인 행사(行事)이겠지마는 사람의 지혜가 어떠함에 따라 독주(獨走)를 자행(恣行)하는 것은 사실이다.
유심론(唯心論)은 절대성(絶對性)인 평등상(平等相)으로서 향상사(向上事)이니 사상견(四相見)이 붙을 자리가 없겠지만, 유물론(唯物論)은 상대성(相對性)인 차별상(差別相)으로서 향하사(向下事)이니 사상견(四相見)이 판을 친다. 유심론(唯心論)은 사상견(四相見)을 여윈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심성학(心性學)이지마는 유물론(唯物論)은 사상견(四相見)을 끌어 잡는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색상학(色象學)이다. 그렇다면 붓을 잠시 돌려서 사상견(四相見)에 대한 육조(六祖)의 말씀을 들어보고 다음을 엮어서 가자. 「온갖 중생이 다 부처성품이 있음이 이 참 아견(我見)이요, 온갖 중생이 본래로부터 쇰없는 슬기성품을 스스로가 갖추고 있음이 이 참 인견(人見)이요, 온갖 중생이 본래로부터 번뇌 없음이 이 참 중생견(衆生見)이요, 온갖 중생성품이 본래로부터 스스로가 생기지 않고 꺼지지 않음이 이 참 수자견(壽者見)이라」셨으니, 실로 유심론(唯心論)을 바탕으로 하고 붓을 옮기는 데는 인아(人我)가 개공(皆空)임을 봄으로 말미암아 아견(我見)이라겠고, 영지(靈智)가 곽연(廓然)함을 봄으로 말미암아 인견(人見)이라겠고, 본래(本來)로 보리(菩提)임을 봄을 말미암아 중생견(衆生見)이라겠고, 생사(生死)가 일여(一如)임을 봄으로 말미암아 수자견(壽者見)이라겠다. 이럴진댄 아견(我見)․인견(人見)․중생견(衆生見)․수자견(壽者見)은 모습이 없는 이름 뿐인 아견(我見)․인견(人見)․중생견(衆生見)․수자견(壽者見)인 까닭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굴리고 부귀빈천(富貴貧賤)을 굴리고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굴려서 삼악도(三惡道)와 삼선도(三善道)를 말아내고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을 쓸어내어서 항상 적멸락(寂滅樂)을 즐기련마는, 그러나 유물론(唯物論)을 바탕으로 세우는데는 인아상(人我相)을 가려냄으로 말미암은 아견(我見)이요, 우치심(愚痴心)을 안 놓음으로 말미암은 인견(人見)이요, 번뇌망(煩惱網)을 덮어씀으로 말미암은 중생견(衆生見)이요, 생사상(生死想)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은 수자견(壽者見)이라겠으니, 아견(我見)․인견(人見)․중생견(衆生見)․수자견(壽者見)은 모습으로 굳히어진 아견(我見)․인견(人見)․중생견(衆生見)․수자견(壽者見)인 까닭에 희로애락(喜怒哀樂)에 휘둘리고 부귀빈천(富貴貧賤)에 휘둘리고 생로병사(生老病死)에 휘둘려서 삼악도(三惡道)와 삼선도(三善道)에 억눌리고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에 사로잡혀서 무진고(無盡苦)에 허덕임은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이렇듯이 미혹한 중생들은 절대성인 유심론(唯心論)을 바탕으로 하여서 상대성인 온갖 법(法)을 스스럼없이 굴릴 줄은 모르고 상대성인 유물론(唯物論)만을 바탕을 하여서 상대적인 온갖 법(法)에 휘둘리어서 굴리일 따름이니 어찌 세간사(世間事)이들 어지럽지 않겠는가! 실로 사상견(四相見)의 해독(害毒)이란 무서운 것이다.
이러므로 하여서 부처님은 사상견(四相見)은 곧 비사상견(非四相見)이기 때문에 법상(法相)도 곧 비법상(非法相)이라고 잘라서 말씀하신 것이니, 사체법문(四諦法門)이겠으며,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인들 어찌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겠으며,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다라니문(多羅尼門)인들 어찌 부처님의 뜻이신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다라니문(多羅尼門)이겠는가. 부처님이 처음 녹야원(鹿野苑)에서 사체법문(四諦法門)을 여심으로부터 반야(般若)를 굴리시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법(法)을 말씀하신 바에는 한 글자도 좋이 눈 앞에 걸어 놓으심이 없으셨고 한 말귀도 좋이 가슴속에 새기심이 없으셨으니 이른바 일상일미(一相一味)인 구경(究竟) 열반(涅槃)의 소식인지라, 이 바로 대적멸상(大寂滅相)의 나툼이 아니시고 무엇이겠는가. 알겠구나! 이에 불지견(佛知見)을 여시고 보이시고 깨우치시고 들리셨으니, 이곳에서 참되고 바른 신심(信心)을 내어서 참되고 바른 묘해(妙解)를 얻을지언정 어찌 말귀나 글귀로서 구경위(究竟位)로 삼고 명수(名數)중에 떨어져서 청정법체(淸淨法體)를 상할까 보냐.
이렇듯이 부처님은 이르시되 「수보리야, 보리심을 낸 자는 온갖 법에 응당 이러히 알지며, 이러히 볼지며, 이러히 믿어서 법의 모습을 내지 말지니라」하시고, 계속하시어 「수보리야, 말한 바 법의 모습이란 여래가 말한 법의 모습이 아니오 이 이름이 법의 모습이니라」이르셨으니, 이른바「온갖 법」이란 글귀가 이 대소승법(大小乘法)을 이르심이라면 「아닌 법의 모습」이란 다 실상묘공(實相妙空)인 법체(法體)를 이르심인데, 말씀하신 바의 대소승법(大小乘法)을 실상묘공(實相妙空)인 법체(法體)로 돌리시는 대자비문(大慈悲門)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어즈버야! 사람 사람마다가 눈이 있으니 봄이 없이 능히 보고, 귀가 있으니 들음이 없이 능히 듣고, 입이 있으니 말이 없이 능히 말할 뿐 아니라, 다리가 있으니 다니고 싶으면 곧 다니고 앉고 싶으면 곧 앉으며, 손이 있으니 잡고 싶으면 곧 잡고 놓고 싶으면 곧 놓으니, 타력(他力)의 능(能)함인들 어찌 빌리겠는가. 이렇듯이 천당을 세우고 지옥을 세움도 도무지 한 생각에 달렸고 중생을 굴려서 부처를 지음도 오로지 한 마음에 걸린 것이니, 어찌 중생이란 이름자를 걷어잡고 부처님의 제도를 새삼 기다릴까 보냐. 그리고 그러하나 부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중생성(衆生性)중에 본랠 생멸(生滅)이 없는 줄을 알고 입으로 무상법(無相法)을 말하며 마음으로 무상행(無相行)을 닦지 않으면 어느 때를 기다려서 무상도(無上道)를 깨치리요. 알지어다! 법(法)을 취함도 원래가 어리석은 짓이요, 공(空)을 깨쳤다 함도 또한 이에 참이 아니어늘 어디로 향하여서 천진면목(天眞面目)을 접하겠는가. 이 또한 드높은 고개로다. 모름지기 법(法)과 공(空)을 다 놓으라. 놓다가놓다가 보면 안 놓이는 것이 있으리니, 이 바로가 본래로 확연한 영지(靈智)인지라, 애오라지 눈에 보이는 것마다가 만고(萬古)의 풍광(風光)이요 귀에 들리는 것마다가 겁외(劫外)의 지음(知音)인걸, 어찌 들뜬 의심을 좇아서 몸 밖을 향할까 보냐!
春何發花 춘하발화
一法不捨 일법불사
跛鱉吐舌 파별토설
봄엔 어떻게 꽃이 피느냐?
한 법도 버리지 않으니
절름발이 자라가 혀를 토하네
夏何成綠 하하성록
空華亂墮 공화난타
三蛇九鼠 삼사구서
여름엔 어떻게 녹음이 이뤄지느냐?
빈꽃이 어지러이 떨어지니
세 마리의 뱀이요 아홉 마리의 쥐더라
秋何結實 추하결실
同氣相應 동기상응
賓主共唱 빈주공창
가을엔 어떻게 열매가 맺히이나?
같은 가운이 서로 응하니
나그네와 주인은 같이 노래하네
冬何落木 동하낙목
千古知音 천고지음
髑髏龍吟 촉루용음
겨울엔 어떻게 잎사귀가 떨어지느냐?
천만고의 소식이라
해골이 용트림 소리를 울리네
이 소식에 잠이나 자지
유심론(唯心論)이니 유물론(唯物論)이니가 무슨 개똥막대기 같은 소리냐
산북(山北)은 탱주요 산남(山南)은 귤일러라
如來藏中無幻相 여래장중무환상
衆生自作自不出 중생자작자불출
一覺能除萬年痴 일각능제만년치
何處妄物犯吾家 하처망물범오가
여래장의 그가운데 꼭두각시 없건마는
중생들이 제가짓고 제스스로 못나오네
한번깨쳐 가질새라 만년우치 사라질걸
어느곳의 망령들이 내집안을 범할손가
第三十二(제삼십이) 應化非眞分(응화비진분)
第三十二(제삼십이) 應化非眞分(응화비진분)
【본문】須菩提(수보리)야 若有人(약유인)이 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이만무량아승지세계칠보)로 持用布施(지용보시)하고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인)이 發菩提心者(발보리심자) 持於此經(지어차경)하되 乃至四句偈等(내지사구게등)을 受持讀誦(수지독송)하야 爲人演說(위인연설)하면 其福(기복)이 勝彼(승피)니 云何爲人演說(운하위인연설)고 不取於相(불취어상)하야 如如不動(여여부동)이니라 何以故(하이고)오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이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이며 如露亦如電(여로역여전)이니 應作如是觀(응작여시관)이니라 佛說是經已(불설시경이)하시니 長老須菩提(장로수보리)와 及諸比丘比丘尼(급제비구비구니) 優婆塞優婆夷(우바새우바이)와 一切世間天人阿修羅(일체세간천인아수라)가 聞佛所說(문불소설)하고 皆大歡喜(개대환희)하야 信受奉行(신수봉행)하니라
제삼십삼 응화는 참이 아닌 분
【번역】「수보리야, 만약 사람이 있어 무량아승지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에 썼다 할지라도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보살심을 낸자가 이 경을 가지고 이에 사구게 등이라도 받아 가져 읽고 외우되 사람을 위하여 말을 넓히면 그 복이 저 복보다 나음일세, 어떻게 사람을 위하여 말을 넓히냐면 모습에 취하지 아니하고 의젓하여 움직이지 않음 이럴지니 무슨 까닭으로써 이냐. 온갖 하염있는 법이 꿈과 곡두와 거품과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는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러히 관할지니라.」 부처님이 이 경을 말씀하시어 마치시니 장로수보리와 모든 비구․비구니와 우바새․우바이와 온갖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부처님의 말씀하신 바를 듣고 다 크게 기뻐하며 믿고 받아 받들어 행하시더라.
【강송】부처님이 금강보좌(金剛寶座)에 앉으심으로부터 다각적(多角的)인 면으로 횡설수설하시되 마지막까지 사구묘문(四句妙門)을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말씀하심이 계시고 대중은 들으심이 있으셨을까? 법계(法界)는 본래로 무설(無說)이로되 연(緣)을 대함에 유설(有說)인 것이니, 설법(說法) 그 자체에는 성품이 없다 할지라도 마침내 법계(法界)를 여의지 않음으로 말미암은 이 설법(說法)으로 하여금 법계체(法界體)를 들 내었을진댄, 이 있음이냐 이 없음이냐, 이 있음과 없음의 가운데냐! 흥! 뿌리 없는 나무에 꽃이 울긋불긋 핀 소식인지라, 다그진 녀석이 아니면 알아먹지 못하느니라. 있음도 아니나 있음 아님도 아니며, 없음도 아니나 없음 아님도 아니며, 있음과 없음의 가운데도 아니나 있음과 없음의 가운데 아님도 아니니, 법계체(法界體) 위의 삼상(三相)인 그 당처가 공적(空寂)하기 때문이다. 이(理)를 말하자면 곧 사(事)인지라 공(空)에서 취하지 못하며, 사(事)를 말하자면 곧 이(理)인지라 유(有)에서 취하지 못하며, 중(中)을 말하자면 곧 변(邊)인지라 중(中)에서 취하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부처님도 「응당 법도 취하지 아니하며 응당 아닌 법도 취하지 않으니라」 이르심과 같이, 입을 열면 법(法)과 비법(非法)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이에 따라 유(有)와 무(無)와 중(中)도 상대적인 삼상(三相)이라 일컬으겠지마는, 그러나 본래로부터가 의젓하여 움직이지 않는 절대성 자리에 높이 앉아서 유(有)와 무(無)와 중(中)을 자재로이 굴리는 그 의취(義趣)를 안다면 어찌 실제(實際)의 대도(大道)를 논(論)하는 무설(無說)중의 유설(有說)이 아니라 고집하겠는가!
이러므로 부처님은 녹야원(鹿野苑)을 비롯하여 발제하(跋提河)에 이르기까지 무려 사십구년(四十九年) 동안을 통하시어 장광설(長廣舌)을 하셨지마는 일찍 한 글자도 말씀하심이 없다 셨으니, 향상일구(向上一句)를 여의지 않으심으로 말미암아 안으로는 분별(分別)의 물결이 가라앉았고 밖으로는 만법(萬法)의 그림자가 사라졌고 중간으로는 번뇌(煩惱)의 티끌이 쉬셨기 때문에 날이 다하도록 중생을 건지셨기로니 어찌 일찍 중생을 건지셨다는 셈인들 계셨겠으며, 혓바닥에는 뼈가 없으시고 말 밑에는 종적이 끊어졌기 때문에 날이 다하도록 말씀을 보이셨기로서니 어찌 일찍 말씀을 보이셨다는 생각인들 계셨겠는가! 비록 그 말씀이라서 하늘을 덮고 땅에 깔렸기로서니 타는 불에 한 점의 눈(雪)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풀어감이 진정해(眞正解)요 진실해(眞實解)라 하겠다.
부처님이 처음에 「자리를 펴고 앉으심」은 푸른 칼을 드시고 생사(生死)를 끊어내시는 첫째의 일구(一句)라 시면, 「의젓하여 움직이지 않으심」은 맑은 구슬을 굴리시며 만법(萬法)을 거두어들이시는 뒤의 일구(一句)인 소식이라 이르겠다. 이 소식인지라, 삼세(三世)의 제불(諸佛)도 엿보아서 미치지 못하였으니 장로는 「드무십니다」 여쭈셨고, 따라 역대(歷代)의 조사(祖師)는 말로 전하지 못하니 「입을 연즉 그르친다」섰고, 천하(天下)의 선지식(善知識)은 글로 써내지 못하니「조용히 하라」섰는데, 나도 손으로 가리키지 못하니 「이러히네」라 하여둘까. 실로 동정(動靜)이 같이 끊기고 진퇴(進退)가 함께 쉼이로다. 그러나 가시덤불 속을 향하여 한 줄기의 빛이 있으니 진념(塵念)중에 본심(本心)이 감돌고 만행(萬行)중에 진지(眞智)가 서리었음인지라, 어찌 말하고 다물고 움직이고 고요함이 본래의 얼굴이 아니며, 어찌 다님과 머뭄과 앉음과 누움이 본래의 소리가 아닐까보냐. 여기에 이르러 묘용(妙用)을 가로세로 굴리되 정궤(正軌)가 없음인즉 온갖 법을 놓음도 나에게 있고 온갖 법을 세움도 또한 나에게 있음인지라, 도무지가 無邊虛空一句來(무변허공일구래)하니 案山踏地大圓鏡(안산답지대원경)이로다. 번역하여 「가없는 허공에서 한 구절이 오니, 허수아비가 땅을 밟을 새 크게 둥근 거울이로다」이르는 소식이 아닐까 보냐!
온갖
하염있는 법이
꿈과 곡두와 거품과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는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러히 관할지어다
부처님은 이러히 게(偈)를 읊으셨다. 옳기는 옳은 말씀이나, 그렇다면 무슨 까닭을 법계체(法界體)를 모습에서 취하지도 못하면서 「의젓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이르실까? 온갖 유위화연법(有爲化演法)이 법계(法界)를 여의면 자체상(自體相) 없음이 앞 노래의 비유와 같이 구경위(究竟位)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 당처(當處)인 절대성 자리가 의젓하기 때문에 「응당 이러히 관할지어다」일컬으심이니 천만고(千萬古)의 진리(眞理)를 들내심이라겠다. 이렇듯이 모습에서 취하지 아니함이란 삼상(三相)에서 취하지 않음을 뜻함인데, 진여자성(眞如自性)은 비유상(非有相)이며 비무상(非無相)이며 비비유상(非非有相)이며 비비무상(非非無相)이기 때문에 상견(常見)을 부수시기 위하시어 일체(一切)의 공(空)을 말씀하셨고, 단견(斷見)을 부수시기 위하시어 일체(一切)의 유(有)를 말씀하셨고, 이변(二邊)에 떨어짐을 두려워하시어 불공불유(不空不有)를 말씀하신 것이니, 이 다 연(緣)을 대한 꾸밈새로 알지언정 언구(言句)나 자구(字句) 자체(自體)가 구경(究竟)은 아님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러므로 말미암아서 일체법(一切法)이 다 연(緣)으로 좇아 일어남으로 하여금 유위법(有爲法)에 속한다. 이르겠지마는, 그러나 그 당처가 비어서 모두 그 자체 없음이, 꿈은 셈으로 인하여 꾸나 그 자체가 없고, 곡두는 착각을 인하여 생기나 그 자체가 없고, 거품은 물로 인하여 일어나나 그 자체가 없고, 그림자는 형체로 인하여 나투나 그 자체가 없음같이, 위로는 부처님네로부터 아래로는 땅강아지나 개미에 이르기까지 범성(凡聖)의 인과등법(因果等法)이 실답지 않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자체는 실답지 않다 할지라도 법법(法法)이 서로가 모르면서도 서로가 엉클리어져서 또다시 다른 법(法)으로 줄곧 변하면서 가기 때문에 범성(凡聖)의 인과법(因果法)은 어둡지 않다고 이르는 것이니, 인생(人生)살이란 한낱 요지경(瑤池鏡) 속이 라겠다.
돌아보건대 인생(人生)은 초로(草露)라는 말과 같이 모든 법이 거짓 아님이 없으므로 없는 가운데 문득 있으며 있는 가운데 문득 없음이니, 찰나에 곧 생기고 찰나에 곧 꺼짐인지라, 있음인즉 있음이 아니오 없음인즉 없음이 아닌 것이다. 이렇듯이 이미 있음도 없음도 아닐진댄 모든 법이 중도(中道) 아님이 없음이니, 생김은 생김이 아니오 꺼짐은 꺼짐이 아닌 것으로서 꺼지고 생김은 한결같이 허망함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지마는, 그러나 이 허망물(虛妄物)의 출몰(出沒)이 만약 없다면 삼계(三界)의 묘용(妙用)은 이루어지지 못하므로 문제는 길이 여음(餘音)을 품고 간다고나 할까. 이러므로 부처님은 「인연으로 난 바의 법이 내가 곧 이 빔을 말함이니 이 이름이 거짓 이름이며 또한 중도의(中道義)를 이름함이니라」하신 것이다. 이런즉 삼상(三相)은 일경(一境)을 여의지 않으며 일경(一境)은 삼상(三相)을 머금었으므로 삼(三) 일(一)과 일(一) 삼(三)은 뚜렷이 통하여 서로 비추니 이 바로가 의젓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인 것이다. 이렇다면 본래의 참 소식을 어디에서 취하겠는가? 공(空)에서 얻어 취하겠는가? 중(中)에서 얻어 취하겠는가? 유(有)에서 얻어 취하겠는가? 삼상(三相)에서 얻어 취하겠는가? 일상(一相)에서 얻어 취하겠는가? 알겠구나! 응당 삼(三)을 곧 일(一)로 보면 삼관(三觀)은 일심문(一心門)에 열리고, 응당 일(一)을 곧 삼(三)으로 보면 일심(一心)은 삼관문(三觀門)에 열리면서 모름지기 삼일(三一) 밖으로 뛰쳐나 의젓한 묘경(妙境)에 안주(安住)하게 되느니, 이 문(門)에 들면 일리(一理)를 풀지 못하여도 무량의(無量義)를 알게 되며 일자(一字)를 안 써도 항상 바른 법륜(法輪)을 굴리게 된다. 이 소식이야말로 천만고(千萬古)의 대헌장(大憲章)으로서 이름하여 대환법문(大幻法門)이요 또한 이름하여 대환삼매(大幻三昧)인지라, 예로부터 지금까지의 성현들이 다 이 대환삼매(大幻三昧)를 증득 함으로써 능히 가지가지의 불사(佛事)를 지어가고 능히 가지가지의 신변(神變)을 지어오니 어찌 세존께서 한 송이의 꽃을 대중에게 들어 보이신 소식이 아닐까 보냐. 「복(福)을 구함이 원래 이 망령된 짓이요 경(經)을 지님이 또한 참됨이 아니어늘, 도량이라서 수월(水月)과 같음일세 편안히 앉은 이라서 뉘이며, 불사(佛事)가 빈꽃과 같거늘 무엇을 성취하려는고? 함식(含識)이 곧 환화(幻化)라 무생(無生)을 좋이 제도함이요, 보리(菩提)가 본래 적멸(寂滅)이라 무법(無法)을 좋이 증명함이려니, 범정(凡情)과 성해(聖解)가 갖추어서 빈 바이요,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꿈과 같은 바일러라.」 고인(古人)의 말씀이니, 알겠구나! 온갖 것이 다 곡두인지라 곡두 밖에 곡두 아님이 없음일세, 곡두는 아닌 곡두로 더불어 한 집안을 이룸이려니, 어즈버야! 가지가지는 스스로가 무생락(無生樂)을 둠이로다. 이렇듯 경을 말씀하여 마치시니 법을 청하신 장로와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와 하늘․아수라 등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모두 의심이 사라지며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즐거이 믿고 받들어 행하더라.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그 인연에 따라 그 기틀에 따라 한 입으로 법 바퀴를 한결같이 굴리시되, 모습 없음을 마루로 삼으시고 머뭄 없음을 바탕으로 삼으시고 묘한 씀이로 밑을 삼으시어 법을 말씀하시는 그 가운데서도 지경(持經) 공덕(功德)을 크게 제창하셨다. 쇰과 굄의 복덕을 소명(昭明)하게 분배하심으로써 자성(自性) 자도(自度)인 방편문(方便門)의 최상승(最上乘) 도리를 높이 드시고 중생으로 하여금 그 문(門)에 들도록 하시었으니, 이 바로 금강도장(金剛道場)이라 하겠다. 메아리는 그 소리 밖에 울리듯 문자 밖의 뜻과 언설 밖의 정을 아는 데서 부처님의 회포를 받들게 되는구나. 참으로 장엄하도다 그 의취의 허허(虛虛) 실실(實實)함이여 만고(萬古)에 펼치어 있고, 참으로 존엄하도다 그 실상의 소소(昭昭) 영영(靈靈)함이여 삼세(三世)를 꿰뚫었으니, 입으로 능히 일컬으지 못하겠으며 붓으로 좋이 그리지 못하겠거늘 어찌 궁겁(窮劫)을 다한들 설파(說破)할까 보냐. 끝으로 한 문제를 단다.
삼선칠구
어떤 것이 여래선인고?
한 톨의 쌀도 간직 안했고
한 줄기의 나물도 갈지 않았네
三禪七句(삼선칠구)
如何是 如來禪 여하시 여래선
不藏一粒米 불장일립미
不耕一莖菜 불경일경채
어떤 것이 조사선인고?
살인도는 활인검을 더불었으니
호랑이의 머리와 꼬리를 한 때에 거두더라
如何是 祖師禪 여하시 조사선
殺人刀與活人劍 살인도여활인검
虎頭虎尾一時收 호두호미일시수
어떤 것이 보림선인고?
말머리가 떨어져도 말에 붙이지 않으니
한이 없는 맑은 바람은 큰 땅을 말아 내누나
如何是 寶林禪 여하시 보림선
說頭也落說不着 설두야낙설불착
無限淸風捲大地 무한청풍권대지
어떠한 것이 최초구인고?
가이 없는 허공에서 한 구절이 오니
허수아비가 땅을 밟을 새 크게 둥근 거울일러라
如何是 最初句 여하시 최초구
無邊虛空一句來 무변허공일구래
案山踏地大圓鏡 안산답지대원경
어떠한 것이 끝구인고?
손가락 끝에 눈 있는 사람이려니
소리와 빛깔을 같이 피우네
如何是 末後句 여하시 말후구
指頭有眼人 지두유안인
聲色同時發 성색동시발
어떤 것이 향상구인고?
살이 활줄을 떠나 돌아오지 않으니
달이 밝아 밤길 가는 사람을 비춰보구나
如何是 向上句 여하시 향상구
箭離弓絃無反回 전이구연무반회
月明照見夜行人 월명조견야행인
어떤 것이 향하구인고?
슬기로운 사람은 밑빠진 바리의 밥을 먹고
어리석은 사람은 줄 없는 거문고의 소리를 듣구나
如何是 向下句 여하시 향하구
智人食無底鉢飯 지인식무저발반
愚人聽沒絃琴聲 우인청몰현금성
어떤 것이 기특구인고?
하나를 듬에 셋을 밝히니
문득 돌 호랑이 머리를 부수네
如何是 奇特句 여하시 기특구
擧一而明三 거일이명삼
忽破石虎頭 홀파석호두
어떤 것이 뭄을 굴리는 구인고?
천하인의 혓바닥을 바꾸어 버리면
왼쪽으로 굴리고 오른쪽으로 굴림을 스스로가 하네
如何是 轉身句 여하시 전신구
換却天下人舌頭 환각천하인설두
左轉右轉任自在 좌전우전임자재
어떤 것이 격 밖의 구인고?
눈을 두고 귀를 두면서 소경과 귀머거리와 같으니
하늘 땅 밖 사람이 몇이나 알리
如何是 格外句 여하시 격외구
有眼有耳如聾盲 유안유이여농맹
天上人間幾人知 천상인간기인지
이 소식에서 마지막 관문이 다 쓰러지는구나
본래 하나 없는 곳에 산하대지(山河大地) 나퉜구나
산하대지(山河大地) 부수어서 뭉쳐내니 한덩인걸
난데없는 파랑새가 납죽 주어 먹더구나
浩浩蕩蕩說無說 호호탕탕설무설
諸佛菩薩從此來 제불보살종차래
飜身鳻踏虛空骨 번신분답허공골
泥牛大吼入長江 니우대후입장강
호호탕탕 함이러니 말씀없는 그말씀에
부처님과 보살들이 일로좇아 오시구나
몸을한번 뛰치어서 허공뼈를 추려내니
흙소라서 소리치며 긴강으로 들어가네
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상견(四相見)에 대하여 설왕설래
리는 것마다가 겁외(劫外)의 지음(知音)인걸, 어찌 들뜬 의심을 좇아서 몸 밖을 향할까 보냐!
산북(山北)은 탱주요 산남(山南)은 귤일러라
如來藏中無幻相 여래장중무환상
衆生自作自不出 중생자작자불출
一覺能除萬年痴 일각능제만년치
何處妄物犯吾家 하처망물범오가
여래장의 그가운데 꼭두각시 없건마는
중생들이 제가짓고 제스스로 못나오네
한번깨쳐 가질새라 만년우치 사라질걸
어느곳의 망령들이 내집안을 범할손가
백봉 김기추 거사의 금강경 해석
金 剛 經 講 頌 본문(本文) : 요진삼장(姚秦三臟) 구마라십(鳩摩羅什) 역(譯)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번역(飜譯) 및 강송(講頌) : 백봉(白峯) 金 基 秋 거사(居士) 머 리 말 슬기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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