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관련

세계의 불교학자 37.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 1858~1919)

수선님 2025. 7. 6. 12:24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 1858~1919) 일본 근대기, 불교 재활의 토대를 닦다

1. 엔료의 소년기 고백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 1858~1919)(이하 엔료)는 자신의 《불교활론서론》(이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본래 절에서 태어나 불교의 세계에서 자라나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오로지 불교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불교가 진리가 아닌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고, 머리를 깎고 염주를 손에 들고 일반인을 대하는 것은 일신의 치욕으로 생각하고 하루라도 빨리 절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메이지유신을 맞이해 종교계에 대변동이 일어나 폐불훼석(廢佛毁釋)의 논의가 실제 행해지는 것을 보고 불교의 세계를 벗어나 세상 속에 학문을 구했던 것이다.(《서론》 pp.30-31)

불교 사상가로서 엔료의 이름을 일본 전국에 알린 대표적인 저술인 《서론》 속에서 엔료는 어린 시절 자신이 불교의 사원에서 태어난 것에 대한 수치와 치욕의 감정이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치욕의 감정을 가진 엔료에게 당시 폐불훼석이라는 불교 탄압의 시대적 조류는 더욱더 그를 불교로부터 떠나게 하였을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엔료는 그가 몸소 겪은 불교 탄압의 조류를 역류시켜 불교를 부흥시키고 하물며 불교를 서구에 수출해 서양인에게 알려야 할 중요한 종교인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일본 근대 초기 불교 탄압으로부터 불교 재활의 길에 온몸을 던진 학자이자 사상가, 교육가인 엔료의 삶과 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엔료의 생애와 저술

1) 생애

엔료는 1858년 에치고(越後國, 지금의 니가타현)의 나가오카(長岡)에 있는 정토진종 대곡파의 사원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지역에서 한학과 역사 등을 배우고 17세에 나가오카 양학교에 들어가 영어와 서양의 역사 지리 등을 배웠다. 이후 엔료는 동본원사의 자재들 중 수재들이 입학하는 교사교교(敎師敎校)에 영학생(英學生)으로 선발되어 수업을 받았다. 이곳에서도 그 능력을 높게 인정받아 본원사의 급비를 받는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878년 9월 도쿄대학 예비문에 입학하고 1881년 24세로 도쿄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도쿄대학은 1877년 설립된 일본 최초의 국립대학으로, 1879년에는 ‘불서강의’라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불교학에 대한 강의가 개설되어 하라 탄잔(原坦山)이 담당하였다. 엔료가 입학하던 1881년 당시에는 학과 조직의 개편으로 철학과 내에 ‘인도 및 지나철학’이 개설되어 이 교과목의 교재로서 《유마경(維摩經)》과 《보교편(輔敎編)》이 사용되었다. 이 ‘인도 및 지나철학’은 다음 해 1882년에는 동양철학, 중국철학, 인도철학으로 나누어지고, 인도철학은 하라 탄잔과 새롭게 강사로 임명된 요시타니 카쿠주(吉谷覺壽)가 격년으로 담당하였다. 따라서 엔료는 당시 인도철학으로 불리던 불교학 강의를 들었던 것은 물론 서양철학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몰두하였다.

그는 1882년 2학년 당시 친구들과 철학연구회를 만들어 매월 모임을 가져 칸트 헤겔 콩트의 원전을 공부하였으며, 1884년에는 은사와 선배 동료들의 협조를 얻어 ‘철학회’를 창립, 1886년에는 《철학잡지》를 간행하였다. 그는 철학을 “사상의 법칙 사물의 원리를 규명하는 학문”으로 규정하며, 자연, 사회 인문의 “제학의 존재근거”를 기초하는 총괄적 학문으로 규정해 철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그는 서양철학 연구에 매진하는 한편 동양문화의 중요성에도 눈떠, “서양인이 아직 연구하지 않은 ‘고유의 철학’이 있다”고 하여 동양문화 사상의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졸업논문으로 〈독순자(讀荀子)〉를 써 문학사 학위를 받고 1885년 10월 학위 수여식에서는 전학생을 대표해 학위기를 받았다.

그는 졸업 당시 대학에서의 인도철학 연구, 관료로의 진출, 본원사 종단으로 복귀 등 다양한 진로가 열려 있었지만, 재야의 불교 사상가 내지 교육자로 매진하고자 뜻을 세웠다. 대학 졸업에 즈음해 다수의 저술을 출간한 엔료는 1887년 9월 철학관(哲學館)을 창설하여 교육자로서의 뜻을 세웠다. 그가 창설한 철학관은 이후 1904년 4월 철학관대학으로 개칭하고 1906년 6월 동양대학으로 명칭을 바꾼 뒤 오늘날까지 존속한다. 1896년 6월 논문 〈불교철학계통론〉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엔료는 평생 저술과 강의에 전념하여 생애 127책에 달하는 단행본 또는 강의록과 638편에 이르는 한시(漢詩), 취의서(趣意書), 보고서 등을 남겼다. 일본 전국을 다니며 강연하고 해외 시찰을 통해 세상의 문물을 받아들여 불교와 대학의 발전에 기여한 엔료는 1919년(大正 8) 61세로 중국 대련에서 강연 도중 쓰러져 서거했다.

2) 저술

엔료의 저술은 상당히 방대하지만, 저술의 시기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규명되어 있다. 방대한 그의 저술활동은 대체로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제1기는 도쿄대학 졸업 전후로 《삼학론(三學論)》 《불교신론》 《철학신론》 《철학일석화(哲學一夕話)》 등, 철학을 주제로 저술이 이루어지는 시기, 제2기는 1887년 전후로 《진리금침》을 중심으로 파사현정의 입장을 명확히 하는 시기, 제3기는 메이지 20년대(1887~ ) 전반의 《불교활론》 《순정철학신론》 《일본정교론》 등 철학과 불교의 체계를 확립하는 시기, 제4기는 메이지 30년대(1897~ ) 심리학과 요괴(妖怪) 현상에 관해 저술하던 시기의 넷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시기 구분을 감안하면 엔료의 저술 활동은 제1기에서 제3기의 1886년부터 1889년경 사이, 그의 나이로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걸쳐 불과 4년 정도의 기간에 상당히 많은 저술이 이루어졌다. 특히 이 시기는 일본 불교계에서도 여타의 특별한 활동이 눈에 띄지 않던 시기였던 까닭에, 엔료가 불교 사상가 내지 저술가로서 크게 부각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엔료의 저술은 철학, 종교(불교), 윤리, 심리, 요괴학, 여행기, 수필 등 집필 분야가 다양하며, 또한 철학과 불교, 철학과 종교, 종교와 교육 등 학문상의 관계에서 저술된 것도 적지 않다.

이러한 저술 가운데 서양의 기독교를 비판하고 불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책들이 다수 눈에 띈다. 대표적인 것으로 《파사신론(破邪新論)》(1885), 《야소교의 난점(耶蘇敎の難目)》(1885), 《진리금침(眞理金針) 초편(初編)》(1886), 《同 속편(續編)》(1886), 《同 속속편(續續編)》(1887), 《불교활론서론(佛敎活論序論)》(1887), 《파사활론(破邪活論)》(1887), 《현정활론(顯正活論)》(1890) 등을 들 수 있다. 이 활론 시리즈 중 가장 마지막에 출간된 것이 《호법활론(護法活論)》(또는 活佛敎라고도 칭함, 1912)이지만, 저술 연대는 앞의 세 책과 상당히 차이가 난다.

또 초기 저술로서 철학과 사상을 드러내는 책으로 《철학신론(哲學新論)》(1885), 《철학일석화(哲學一夕話)》(全3編 1886-1887), 《철학요령(哲學要領)》(前 · 後編 1886-1887), 《심리학강의》(1887), 《심리적요(心理摘要)》(1887), 《요괴현담(妖怪玄談)》(1887), 《철학도중기(哲學道中記)》(1887), 《윤리통론(倫理通論)》(상 · 하 1887), 《실제적종교학(實際的宗敎學)》(1887), 《종교신론(宗敎新論)》(1888), 《순정철학신론(純正哲學新論)》(1888) 등을 들 수 있다.

이렇듯 초기의 엔료 저술을 살펴보면 대체로 그 저술의 내용은 서양철학을 순수하게 밝히는 것(이것을 엔료는 순정철학이라 부르고 있다)과 기독교를 비판하며 동시에 불교의 정신을 확립하는 것의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방향이 각각 개별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 《진리금침》 3편이며, 여기에서 다루어진 내용이 하나의 저술로서 정리되어 나타난 것이 《불교활론서론》이다. 이 책은 초기의 저술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읽혔고 많은 영향력을 가졌던 책으로 알려져 엔료의 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책으로 간주된다. 이 책에 나타나는 엔료의 사상적 입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3. 《불교활론서론》에 나타나는 엔료의 불교관

1) 엔료의 사상적 입장

엔료는 자신이 출간한 책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한 어느 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내가 십수 년간 괴로워하며 갈망하고 있던 진리는 유교, 불교 중에 있지 않고, 기독교에도 없고 단지 서양에서 강의되던 철학 속에 있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때 나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었다. 마치 콜럼버스가 대서양에서 육지의 일단을 발견했을 때와 같았을 것이다. 그때 십수 년 동안의 어둠이 처음으로 열려 뇌가 산뜻해지고 머릿속이 씻긴 듯한 심경이었다. 이미 철학의 세계에서 진리의 달을 발견한 것으로 여기에서 다시 지금까지의 종교를 돌아보았다. 기독교가 진리가 아닌 것은 더욱 분명하고 유교가 진리가 아닌 것도 쉽게 증명되는 일이었다. 단지 불교만은 그 가르침이 크게 철학의 원리와 합치하였다. 내가 다시 불전을 읽고, 점차 그 가르침이 진리인 것을 알아 박수 갈채하며 “어찌 몰랐을까, 유럽에서 천수 년 이래 규명하며 손에 넣은 진리가 이미 동양 삼천 년 전의 태곳적에 완비되어 있었던 것을.” 내가 어렸을 때 불문에 있으면서 불교 속에 진리가 있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은 당시 나의 학식이 옅고, 그것을 발견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새롭게 하나의 종교를 만드는 것을 접고, 불교를 개량하여 이것을 문명개화의 세계 종교로 하기로 결심했다. 1885년의 일로, 이것을 나의 불교 개량의 기년(紀年)으로 삼는다.(《서론》 pp.32-33)

곧 엔료는 도쿄대학의 철학과에서 공부한 서양철학의 진리가 자신이 치욕으로 생각한 불교의 사상 속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확신하고, 이 불교의 사상을 새롭게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개량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것은 엔료가 불교가 모든 종교 가운데 그 진리성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진리성에 대한 부합을 ① 서양철학과의 비교 대조 ② 기독교의 교리와 비교 대조 ③ 불교 진리성의 성격 규명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 가지 관점을 고려하면, 이 《서론》은 그 이전에 출간된 《진리금침》의 내용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진리금침》을 새롭게 요약, 정리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진리금침》은 초편, 속편, 속속편의 3편이 출간되지만, 각각의 부제가 초편에는 “예수교를 배척하는데 이론은 있는가” 속편은 “예수교를 배척하는 일은 실제 있는가” 속속편은 “불교는 지력정감 양쪽이 완전한 종교인 이유를 밝힘”이라고 붙어 있고,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서론》의 내용 속에서도 거의 그대로 다시 정리,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론》은 불교의 진리성에 대한 규명을 통해 불교가 서양철학, 기독교의 정신에 뒤지지 않는 철학 정신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그것을 통해 불교인의 자각과 분발을 촉구하기 위해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서론》의 본론에서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2) 엔료의 불교관

(1) 성도문과 정토문

엔료는 인간에게는 정감(情感)과 지력(知力)의 두 가지 마음 작용에 근거해 종교와 철학이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정감이란 일종의 감정적인 부분으로 신앙하고 믿는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마음 작용이다. 그에 대해 지력이란 판단하고 비판하는 능력으로 그러한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철학이다. 엔료는 이러한 정감과 지력의 양방향으로 인류의 종교를 구분하며, 인류의 종교 중 서구의 기독교는 정감적인 부분을 중시하는 종교인 데 대하여 불교는 정감뿐만 아니라 지력의 철학적인 부분을 전승하는 종교라고 말하고 있다. 엔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래 인간이란 정감과 지력이라는 두 가지 마음 작용을 가진 존재로 종교도 이 두 가지를 갖는다. 기독교는 정감의 종교이며, 이슬람교도 동일하다. 단지 불교에 대하여 말하면 대체적으로 지력의 종교라 할 수 있고, 그중에서도 성도문(聖道門)은 철학의 원리에 의해 구축된 종교이다. 세상에서 불교를 평하여 “일종의 철학이다”라고 하는 것은 불교가 정감의 종교가 아니라 철학상의 종교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성도문 외에 정토문(淨土門)이 있는 것은, 불교가 지력의 종교 외에 정감의 종교를 포함하고 있는 이유이다.(《서론》 pp.71-72)

이와 같이 엔료는 불교를 지력과 정감을 갖는 종교로 규정하고, 불교의 역사적인 전통 속에서 지력과 정감의 양 전통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것이 성도문과 정토문의 전통으로, 엔료는 성도문으로서 화엄종, 천태종, 구사종, 성실종, 유식종을 분류하고 정토문으로 정토종과 정토진종을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불교의 철학적인 전통에 대해 상세하게 고찰해 간다.

엔료의 불교철학적 전통의 성도문에 대한 고찰은 기본적으로 서양 근대철학과의 비교 속에서 진행된다. 엔료는 서양 근대철학의 흐름을 기본적으로, 유물(唯物)-유심(唯心)-유리(唯理), 주관-객관-이상(理想), 경험-본연-통합, 가지경(可知境)-불가지경(不可知境)-양존(兩存) 등으로 구분하여 정리하며, 특히 이중 유물-유심-유리의 흐름을 불교의 전통과 대비시키고 있다. 곧 서양 유물론의 입장을 불교의 구사종에, 유심론의 입장을 유식론 즉 법상종에, 유리론의 입장을 화엄종과 천태종에 대비시키며, 이들 대비를 통해 불교의 철학적 성격을 규명해 간다. 이들 철학적인 성격의 규명 속에 엔료는 헤겔 등에서 볼 수 있는 서양 근대철학의 최고봉 전통은 불교의 철학적 성격을 대표하는 화엄종과 천태종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 하여 이 화엄종과 천태종의 사상을 상세히 규명한다. 그리고 이들 화엄종과 천태종의 사상을 철학적인 입장과 대비시키면 중도(中道)와 방편(方便), 진여(眞如)와 현상(現像) 등의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 중도와 방편

엔료는 중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중(中)에 대하여, 석가는 삼천 년 전의 고대에 이미 그 일단에 치우치는 폐해가 있는 것을 간파하여 중도의 묘리(妙理)를 설했다. 소위 그 중도란 ‘유도 아니고 공도 아니며, 유이기도 하고 공이기도 한’ 중도로서, 유물과 유심을 합친 중도이며, 주관과 객관을 겸한 중도이며, 경험과 본연을 통합한 중도이며, 가지경과 불가지경이 양립하는 중도이다. 이 중도의 중에는 고래의 제론 제설이 남김없이 모두 회귀하며, 마치 만화(萬火)가 모여 일화(一火)가 되며, 만수(萬水)가 합쳐 일수(一水)가 되듯이 완전히 그 차별이 없어진다. (중략) 실로 광대무변의 중도이며, 원만완비의 중도이다. 이와 같은 공명정대 원만완비의 중도는 세계만방에서 지금까지 일찍이 그 예를 볼 수 없다. 실로 세계 불이(不二)의 중도이며, 만세무비(萬世無比)의 중도이다. 그 이치의 유현미묘(幽玄微妙)한 것은 말로도 문장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그 미묘한 모습은 진실로 언어 문장 외에 있는 것으로, 단지 묘(妙)라고밖에 할 수 없다. (《서론》 pp.79-80)

곧 서양 근대철학의 정반합 조류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통합의 경계가 불교의 중도 개념 속에 녹아 있음을 힘주어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엔료는 특히 불교가 유물론의 구사종에서 시작하여 중도의 이치로 마무리되는 불교의 전통을 “석가의 의도는 중도의 이치를 진실로 삼는 것으로, 다른 유물과 유심은 방편인 것을 말하고 싶다.”(《서론》 p.120)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진실과 방편의 경계를 불교 전통상 천태사상의 5시와 관련해 드러내고 있다.

5시란 석가 일대의 가르침을 다섯으로 구분한 것으로, 제1시는 《화엄경》을, 제2시는 《아함경》을, 제3시는 《방등경》을, 제4시는 《반야경》을, 제5시는 《법화경》 《열반경》을 설한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엔료는 제1시와 제5시의 가르침이 중도의 진리를 드러낸 것이며 나머지 3시는 방편을 설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한 중도의 진실과 방편의 관계를 엔료는 “진실은 방편에 대하여 진실이며, 방편은 진실에 대하여 방편인 까닭에, 진실을 떠나 방편 없고, 방편을 떠나 진실 없으며, 방편이 곧 진실이며, 진실은 곧 방편이다”(《서론》 p.123)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진실과 방편의 관계에 대해 엔료는 그러한 대비를 ‘절대와 상대’ ‘평등과 차별’의 관점에서 논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전체적으로 본질과 현상의 관계를 논하는 것으로, 그러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본질로서 진여(眞如)와 현상(現像)으로서 물심(物心)의 관계이다. 이러한 진여와 물심의 관계는 엔료에게 철학의 궁극점이자 그의 생애 내내 논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3) 진여와 물심

엔료는 우리 삶의 구체적인 모습으로서 주관적인 마음과 객관적인 사물과의 관계를 살피고 그것의 근원으로서 진여의 이체를 세우고 있다. 엔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주관은 객관과 병존하는 것으로, 객관이 없이 주관만 존재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따라서 물심의 본체를 정할 때 먼저 비물비심(非物非心)의 이체(理體)를 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이체를 진여라 한다. 진여는 물이지만 물이 아니고, 심이지만 심은 아니다. 소위 비물비심이면서 시물시심(是物是心)이다. 이것을 ‘비유비공’ ‘역유역공’의 중도라고 한다. 그 까닭에 나는 여기에서 유리론이라는 말을 쓰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理)의 일변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와 물심이 합쳐져 ‘불일불이’의 관계를 갖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중리론(中理論), 완리론(完理論)으로 이름붙이는 이유이다. (《서론》 p.95)

곧 우리 삶의 근거로서 진여를 세우는 이유를 밝히는 것으로, 엔료는 이 진여를 공가중(空假中)의 삼제설(三諦說)로서 공이면서 유, 유이면서 공의 중으로도 표현하고 있다(《서론》 p.105). 여기에서의 진여란 엔료가 서양철학에서 발견한 헤겔의 절대정신 내지 절대 이성 등의 입장을 불교에서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진여는 그러한 우리 삶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이 진여를 엔료는 현상을 전개하는 힘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리고 이 힘이란 인연을 전개시키는 힘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엔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래 진여는 그 자체가 갖는 힘에 의해 자존, 자립, 자연으로 진화하고, 자연히 도태하여 물심이라는 두 가지 현상세계를 전개하며, 모든 현상, 모든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천태종에서는 진여의 이체에 본래 삼천의 제법이 갖춰져 있다고 하고, 또 《대승기신론》에는 일심으로부터 2문이 열리고, 2문에서 모든 현상세계가 생긴다고 설하고 있다. (《서론》 p.98.)

이렇게 진여의 이치에 의해 일체 현상이 생겨나는 까닭에 이 진여를 인과법칙의 근거라고도 말하고 있다. 곧 인과의 법칙은 “진여 자체의 성질이며, 진여의 이치가 존재하는 곳에 반드시 이 법칙은 존재한다”(《서론》 p.111)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진여는 엔료 철학의 근거로서 일체 현상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 진여에 대해 《서론》의 최종 결론 부분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아가 우리가 스스로 인을 닦고 깨달음을 여는 것도 진여의 힘이다. 따라서 우리의 체는 진여의 일부분이지만, 부분을 떠나 전체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체는 그대로 진여이다. 우리의 힘은 진여의 힘이다. 그것에 의해 우리의 힘이 미혹으로부터 깨달음을 열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하면 불교 가운데 유심론, 진여설, 인과도리는 기독교에서는 지금까지 맛볼 수 없었던 것으로, 실로 석존의 뛰어난 견식은 만세에 걸쳐 사람을 놀라게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서론》 p.142)

이렇듯 엔료의 진여에 대한 견해는 《서론》 전체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4. 《불교활론서론》 출간 이후 엔료의 길

엔료가 《서론》을 출간한 때는 1887년 3월, 그의 나이 30세였다. 그간의 그의 사고가 총집결하여 출간된 《서론》은 불교계는 물론 일본 사회 전역에 불교의 새로운 이해에 큰 돌풍을 일으켰다. 그것은 폐불훼석의 불교 탄압으로부터 큰 시련을 겪었던 불교계는 물론 서구의 문물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당시 일본의 사회적 조류 속에서 불교와 동양 전통을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더욱이 서양철학과의 비교를 통해 불교의 위상을 굳건히 한 점은 기독교는 물론 서양의 정신문화에 대항할 수 있다는 자부심과 함께 폐불훼석으로부터 불교가 부활하는 직접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불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자각 속에 엔료는 《서론》을 보완하는 《불교활론본론》으로서 《파사활론》(1887.11), 《현정활론》(1890), 《호법활론》(《활불교》라고도 함, 1912)을 집필해 갔다. 아울러 불교와 철학을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교육기관으로서 철학관(哲學館, 1887.9)을 설립해 본격적인 교육사업에 전념했다. 이 철학관의 설립으로 엔료는 교육자로서의 방향과 위상을 분명히 정립한 것이다.

그리고 《서론》에 나타나는 다양한 불교적 논의는 이후 《불교활론본론》을 통해 세부적이고 상세하게 논의 전개되지만, 이후 저술에 나타난 엔료 사상의 상당수는 《서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일본불교 종파의 전체를 불교철학의 관점에서 통관(通觀)하는 작업으로, 《서론》에 나타나는 성도문과 정토문은 이론종과 실제종 등의 이름으로 세분된다. 이러한 구분에 의한 불교 제 종파에 대한 기술은 1896년 도쿄대학(당시는 帝國大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도 나타난다. 박사학위 논문은 〈불교철학계통론〉이란 이름으로 제출되었지만, 실제 내용은 일본의 불교 종파 전체의 철학적 논의를 정리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불교의 종파적 이해는 이미 《서론》에서 그 틀이 구축된 것으로 《서론》의 틀이 학위논문의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론》에서 세밀하게 논의되는 진여와 물심의 관계는 후대 저술된 엔료의 저작인 《불교철학》(1893), 《대승철학》(1898), 《불교대의》(1899), 《불교통관》(1904) 등에서도 상세하게 다루어졌다. 서양철학 연구를 통해 얻은 불교 최정점의 사상으로서 진여와 물심, 진여와 만법 등의 논의는 이러한 후대의 책 속에서 더욱 상세히 논의된다.

엔료는 이렇게 《서론》을 통해 후대 자신의 불교 사상적 방향을 정했다고 생각되지만, 실제 그는 당시의 불교 활동에 자신의 삶 전부를 바쳤다. 그런 까닭에 엔료는 당시 상황에서 고향의 집에 가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고향의 집에 들르라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엔료가 당시 불교계의 사정과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고 대처하고 있음을 다음의 편지는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일본 전국에 불교의 등불이 실로 꺼져가는 때입니다. 지금은 불교 전체를 위해 생사를 결정해야 할 위급존망의 시기입니다. 이 헌법 국회의 시기는 만세의 국기(國基)를 세우는 때로, 지금 불교를 비하(卑下)하는 세태에 따른다면 만세에 만회할 기회가 없어질 것입니다. 실로 위급한 시기이고, 구사일생의 날이며, 하나의 절 하나의 주지를 위해 급급할 때가 아니며, 한 지방 한 부락을 위해 분주해야 할 때가 아닙니다. 저로서는 이 불교 전체의 존폐에 대해 다년간 고심하여 지금 구사일생의 위급함에 임해서는 죽기를 각오한 자세로 최소한 내년 국회 개원 전에 무엇인가 불교 호지(護持)의 방향을 세워 혼자라도 그 길에 서서 주야로 마음을 다하고 있습니다. 만약 국회가 끝난 뒤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불교 만회의 방책은 없는 것으로, 지금부터 그 진흥법을 입안하여 내일 이후 시바(芝) 청송사(靑松寺)에서 각 종파의 관장 대리들의 협의를 하고 다음 달 상순에는 총관장의 회의를 열어 다시 협의를 해야 합니다. (1889년 8월 28일[32세] 부친 이오우에 엔고[井上円悟] 앞으로 보낸 편지)11)

1890년 11월 ‘대일본제국헌법(1889년 2월 반포)’의 시행을 앞둔 시점의 편지로 엔료의 불교계에서의 활동을 짐작게 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아마도 이후 엔료는 고향의 집에는 가지 않았던 것 같지만, 당시 엔료는 자신의 삶과 미래를 불교의 발전에 바치고자 결심했다고 생각된다. 불교 재활을 위해 이론적 논리를 제공해 준 사상가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로, 또 동양대학의 설립자로서 엔료의 삶은 자신의 인생을 불교를 위해 받친 위대한 불교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

이태승 hakcheakr@hanmail.net

일본 고마자와대학 박사로 한국불교연구원 원장, 일본인도학불교학회 이사, 인도철학회 학회장을 역임하고 위덕대 불교문화학과 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 《실담자기와 망월사본 진언집 연구》(공저), 《을유불교산책》 《샨타라크쉬타의 중관사상》 《폐불훼석과 근대불교학의 성립》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 논문이 있다. 현재 지성불교연구원 원장.

 

 

 

 

 

 

 

세계의 불교학자 37.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 1858~1919) - 불교평론

1. 엔료의 소년기 고백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 1858~1919)(이하 엔료)는 자신의 《불교활론서론》(이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본래 절에서 태어나 불교의 세계에서 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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