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일어나도 생각에 집착하지 말아야 지혜 밝아져"/ 종범 스님
생각 일어나도 생각에 집착하지 말아야 지혜 밝아져
도원당 만오 스님 49재 회향 법문에서 만법이 공한 이치로 마음 강조
생사도 실체없는 마음 작용이니 집착서 벗어나면 생사마저 자유로워
의심이 없고 두려움 없는 삶, 그것이 곧 쾌활이며 부처님의 해탈 경계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만오 스님은 불문에 귀의하셔서 공덕을 많이 지으셨기에, 별도의 행사를 치르지 않아도 극락세계에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법문을 중설하는 것은 구름이 피어나는 것과 같고, 비단 위에 꽃을 뿌리는 것과 같기에, 공덕에 공덕을 더하고 인연에 인연을 더하는 뜻으로 법회와 재를 올리는 것입니다.
법무자성 이타위성 법법무법 생생무생
(法無自性 以他爲性 法法無法 生生無生)
법공유심 구경청정 영명성각 상방광명
(法空唯心 究竟淸淨 靈明性覺 常放光明)
법에는 자성이 없고, 다른 것으로 자성을 삼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으신 인연법입니다. 모든 법은 자성이 없으며, 서로 의존하여 존재합니다. 그래서 법에는 법이 없고, 생에도 생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일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났으되 남이 없고, 갔으되 감이 없습니다. 옴에도 옴이 없고 감에도 감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연법이며, 이를 깨달으면 죽음에도 실체가 없습니다.
법은 공하고 마음만 존재합니다. 공이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으로, 우주의 모든 법은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법은 공했고, 오직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마음은 구경청정, 즉 수명이 없는 청정이며, 외물에 물들지 않는 홀로 선 본성입니다. 이 마음은 신령스럽고 밝아 모든 것을 아는 ‘영명성각’이며, 항상 광명을 비춥니다(상방광명). 사람을 보든 물건을 보든, 그것은 공한 것이며 오직 보는 마음만 있습니다.
경에서는 삼계소유 유시일심(三界所有 唯是一心)이라 하였고, ‘육조단경'에서도 “깃발도, 바람도 아닌 너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 했습니다.
보이는 대상은 자체상이 없으며, 마음이 있어야 그것이 인식됩니다. 산, 바다, 바람 등은 모두 마음이 비추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범부는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여 마음을 잊고 전도집착에 빠지게 됩니다. 죽음도 상방광명, 즉 마음이 비추는 현상입니다. 정수일월(淨水一月), 맑은 물 위에 달이 비추는 것처럼, 대상은 실체가 없고 마음의 작용일 뿐입니다. 고인들이 ‘푸른 연못에 달이 비친다’는 예를 들어 물속의 달이 아닌 허공의 달임을 여러 번 살펴 알라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처럼 물질은 공하고, 마음은 항상 광명을 비추는 존재입니다. 깨달음은 이 차이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촛불, 바람, 산 모두 마음이 비추는 현상입니다. 공부가 깊어지면 삶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 모두가 마음의 비춤임을 알게 됩니다.
무명일념은 번뇌에 사로잡힌 마음이 보이는 대상에 들어가 자취가 없는 상태입니다. 마음은 숨고 숨어 자취가 없습니다. 반면 원명일념은 둥글고 밝은 마음, 곧 묘체로서 개별적인 형상이 없으면서도 모든 지각 작용이 현현하는 본체입니다. 이 원명묘체는 컵도, 산도, 물도 모두 마음이 비춘 곳이며, 보는 모든 것이 현현혁혁(現現赫赫), 즉 밝고 분명한 마음의 작용임을 알게 됩니다.
보리무루성 본래상청정 단용차성심 행행실정용
(菩提無漏性 本來常淸淨 但用此性心 行行悉淨用)
어념부착념 어상부착상 무주묘일념 함탄십방공
(於念不着念 於相不着相 無住妙一念 含呑十方空)
보리는 아는 작용이지만 생멸이 없으며, 그 본성은 본래 항상 청정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래 청정한 보리의 마음을 그대로 쓰기만 하면 따로 닦을 것이 없습니다. 닦는다는 행위조차 인위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허공을 찾기 위해 땅을 파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들면 온통 허공이 드러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본래 청정한 보리심을 쓰면, 행하는 모든 것이 곧 청정한 작용이 됩니다. ‘행행실정용’이란 바로 이 뜻입니다.
청정한 작용이 지속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於念不着念). 망상은 허락 없이 들어왔다가 허락 없이 사라집니다. 억지로 끊으려 하면 되레 번뇌를 하나 더 보태는 격이 됩니다. 어둠 속에 불을 켜면 어둠이 자연히 사라지듯, 지혜가 밝아지면 번뇌도 저절로 물러납니다.
또한, 보고 듣고 접촉하되 그 대상(相)에 들러붙지 않는다면(於相不着相), 곧 해탈입니다. 보는 데 집착하지 않으면 보는 데서 자유로워지고, 듣는 데 집착하지 않으면 듣는 데서 해탈합니다. 이것이 곧 육진삼매요, 해탈의 묘법입니다.
이러한 해탈의 상태에서는 생각은 일어나되 머무르지 않고, 그 속에서 ‘무주묘일념(無住妙一念)’, 머묾이 없는 묘한 한 생각이 드러납니다. 이 마음은 원명묘체로, 특정한 곳에 있지 않으면서도 신통 작용이 있으며, 그 자취는 없지만 지혜의 작용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함탄시방공(無住妙一念 含呑十方空)’, 머무름 없는 묘한 한 생각이 시방세계 전체를 삼킨다고 합니다. ‘법성게’에서도 “일미진중 함시방(一微塵中 含十方)”이라 했듯, 하나의 티끌 속에서 시방세계를 거두는 그 마음입니다. 삼킨다는 표현은 오직 그것만이 남고 나머지는 다 녹아 사라졌음을 뜻합니다.
수연여시 금일각령 향삼마처거
(雖然如是 今日覺靈 向什麽處去)
불리다보 해탈경계 자재우자재
(不離多步 解脫境界 自在又自在)
그 마음이 그러하거니와, 오늘의 만오 스님 각령께서는 과연 어디로 향하셨을까요? 우리는 그 걸음을 따라 물으며, 그 경지를 상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답은 분명합니다. 스님께서는 결코 멀리 가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걸음을 옮길 필요 없이(不離多步), 곧장 해탈의 경계에 드셨고, 그곳에서 자재하게(自在又自在) 머무르실 것입니다.
해탈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최초로 이룬 경계입니다. 해탈은 일체 장애에서 벗어난 상태이며, 그 근본은 ‘법에 머물지 않음’에 있습니다. 모든 법은 자성이 없으며, 그 자성 없음의 진리를 보는 눈, 즉 해탈지견(解脫知見)을 얻으면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곧 자재입니다.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며, 드러내고 싶을 때는 드러내되, 드러내지 않을 때는 보이지 않는 자유, 그야말로 부처님의 해탈 경계입니다.
만오 스님 역시 그 해탈의 경계에 드셨습니다. 그 경지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사라집니다. 혹시라도 이 자재함이 다하지 않으셨다면,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나아가 그 자재함을 구족하시기를 발원합니다.
면전일로여현직 거래왕복무괘애
(面前一路如絃直 去來往復無罣礙)
다소달자등차로 초연물외자재행
(多少達者登此路 超然物外自在行)
자재행 자재행 진쾌활 진쾌활
(自在行 自在行 眞快活 眞快活)
해탈의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 눈앞에 거문고 줄처럼 곧게 펼쳐져 있으며, 그 길은 오고 감이 자유롭고 걸림이 없습니다. 이 길을 따라 수많은 선지식들이 걸어갔으며, 그들은 시방삼세를 벗어나 초연한 자유 가운데에서 자재하게 행했습니다.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 의심 없고 두려움 없는 삶. 그것이 곧 쾌활입니다. 쾌(快)는 마음 밖에 무엇이 있다는 의심이 없기에 안심인 상태이고, 활(活)은 두려움 없이 자유로운 작용입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생사조차 마음임을 아는 사람에게는 의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참된 쾌, 참된 활입니다. 이 경지가 바로 석가모니불의 해탈경계입니다. 도를 닦고 안 닦고를 떠나, 마음이 그 경지를 깨달으면 누구나 그 해탈의 세계에 들 수 있습니다.
만오 스님의 지혜와 공덕은 이미 그 경계에 다다르셨으리라 믿습니다. 다만, 혹 그 자재함에 부족함이 있다면,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나아가 다시 자재함을 구족하시기를 마음 모아 발원합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 5월3일 영축총림 통도사 서축암(감원 성오 스님)에서 봉행된 ‘도원당 만오 선사 49재 막재’에서 종범 스님이 추모 법문으로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782호 / 2025년 6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 - 법보신문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만오 스님은 불문에 귀의하셔서 공덕을 많이 지으셨기에, 별도의 행사를 치르지 않아도 극락세계에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법문을 중설하는 것은 구름이 피어
www.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