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철학

유식학파에서 요가의 의미와 목적 / 백진순

수선님 2020. 6. 21. 12:47

유식학파에서 요가의 의미와 목적

- 『해심밀경』 「분별유가품」 을 중심으로 -

「불교학연구」제16호(2007.4)

백 진순(연세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Ⅰ. 들어가는 말

 

요가는 인도 철학의 특징을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사실 인도 철학의 전통에서 학문하는 방법이나 수행은 모두 요가를 바탕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요가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우파니샤드」나 「바가바드기타」와 같은 고대 인도의 성전들이나 자이나교와 불교의 경론에서도 모두 요가의 교의를 받아들인다. 그 문헌들에서는 궁극의 절대자 또는 실재와 하나되기 위해 행해졌던 다양한 지적 탐구와 실천적 행위들이 모두 요가라고 표현된다.

 

‘요가’의 의미는 너무도 다양해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인도 철학에서 요가의 개념을 구체화하여 하나의 경전 형태로 체계화시킨 것은 빠딴잘리(Patañjali)의 「요가경」이다. 이에 따르면, 요가란 마음의 동요를 제거하는 방법․길을 뜻하거나 또는 마음의 동요가 사라진 상태를 가리킨다. 빠딴잘리는 상키야 철학의 형이상학을 도입하여 요가의 개념을 체계화했다. 여기서 ‘마음의 동요가 제거된다’는 것은 물질(쁘라끄리띠)의 가장 시원적 형태인 마음(citta)으로부터 순수 정신(뿌루샤)을 해방시키는 것을 말한다.1) 요컨대, 상캬-요가학파에서 요가의 궁극적 목적은 물질의 제약으로부터 순수 정신을 독립시키는 데 있다.

1) 이지수,「인도에 대하여」, 통나무, 2003, 227쪽 참조

 

이제 눈을 돌려 ‘요가’라는 개념을 가지고 불교를 조명해보면, 불교의 모든 이론과 실천은 그 자체가 요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마음의 동요를 제거하고 해탈에 이르게 한다는 요가의 기본 이념을 따르는 방편들이기 때문이다.2) 특히 불교 내에서 요가 체험과 불교의 교의를 결합하여 체계적 학설을 완성시킨 학파가 바로 유식학파인데, 그 구성원들이 요가수행자[瑜伽師, yogācāra]들이었기 때문에 요가행파라고도 불린다.3)

2) 붓다가 알라라(Ālāṛha Kālāma)와 웃다까(Uddaka Rāmaputta)라는 두 명의 요가 

   스승 에게 요가를 배웠다는 기록도 있다. Shyam Ghosh, The Original Yoga, 

   Munshiram Manoharlal Publishers Pvt. Ltd., 1980, ⅺ 

3) 불교내에서 요가행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유식학파 외에도 밀교의 진언행자(眞

   言行 者)들이 있다. 이 글은 진언행자에 관한 것은 생략하고 유식 요가수행자들에 

   국한시 킨 것이다.

 

유식학파에서도 인도의 정통 요가학파에서와 마찬가지로 요가는 학문적 진리를 구하는 방법이자 동시에 피안에 이르는 길로 받아들여졌다. 오늘날 주로 행해지는 불교적 수행 풍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의외일 수 있겠지만, 우리는 이 학파에서 일종의 철학적 사색 또는 명상이 해탈에 이르는 최상의 길로 격상되는 가장 대표적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불교 내 요가수행자들의 철학적 명상은 매우 난해한 언어철학적 배경을 깔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대승 불교에서 주로 실천하는 화두 참선이나 남방 불교에서 행하는 위빠사나와 비교해보면 다소 이질적인 수행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앞질러 말하면, 좁은 의미에서 요가란 지관(止觀, śamatha-vipaśyanā)의 방법으로 불교의 교의(敎義)에 대해 철학적으로 명상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에게 철학적 명상과 종교적 구원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요가를 무엇보다 ‘지혜[智, jñāna]’를 구하는 최상의 길로 여겼는데, 지관을 본질로 하는 이 요가의 길을 밟아가다 보면 궁극의 지혜를 얻고 그에 의해 번뇌를 끊음으로써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글의 목적은 유식학파의 요가 수행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불교 내에서 행해졌던 철학적 명상의 전통을 다시 부각시키는 데 있다. 이러한 작업은 몇가지 의의를 갖는다. 먼저 우리는 이들이 실천했던 요가 수행의 특징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철학과 종교가 어떻게 하나로 조화될 수 있는가라는 매우 고전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발견할 수 있다. 또 불교 내에서 오랫동안 교법의 이해와 선정의 수행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이 계속되어 왔지만, 우리는 이 요가 수행에서 그 둘 간의 완전한 통합을 추구했던 하나의 전형적 사례를 확인해볼 수 있다.

 

이상의 논의는 모두 ‘요가’를 주제로 하여 이루어진다. 불교 내에서 요가체험에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면서 ‘요가의 완전한 의미[瑜伽了義]’를 설한 경전이『해심밀경(解深密經)』이다. 이하의 논의에서는 이 경전과 그 대표적 주석서인 원측(圓測)의「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에 의거해서 불교 내의 요가수행자들이 실천했던 요가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논하고자 한다.

 

Ⅱ. 광의의 요가: 상응(相應)「

 

1. 상응의 의미

요가[瑜伽, yoga]란 그 어원에서 보면 ‘마음을 하나의 경계에 묶어두는 것[心一境性]’ 즉 정신을 한 군데에 집중하는 것을 뜻한다.4) 그런데 이 단어는 실제로 매우 다양하고 폭넓은 의미로 쓰였다. 한역 유식학 문헌에서도 요가의 다양한 의미를 살리기 위해 대개 ‘유가(瑜伽)’라고 그대로 음역하지만, 의역하는 경우 ‘상응(相應)’이라 한다.5) 아마도 이 ‘상응’이라는 개념이 유식학 문헌에 나타나는 요가의 가장 포괄적 의미에 해당할 것이다. 이는 단순한 심일경성의 차원을 넘어 더 광활한 지평에서 펼쳐지는 요가의 길을 뜻한다.

4) 요가(yoga)라는 말은 본래 ‘묶다’, ‘결합하다’, ‘통제하다’라는 뜻을 가진 범어 유즈

   (√ yuj)에서 나온 말이다. 불교 내에서 이 용어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표현되며 

   선정․삼매의 다른 이름으로 통한다. 요가행파의 ‘요가’에 대한 어원적 정의에 대해서

   는 野澤靜證,「大乘佛敎瑜伽行の硏究」, 法藏館, 昭和32, pp.18-24 참조.

5) 이에 대해 遁倫은 그의「瑜伽論記」권1(『대정장』42, 311c12)에서 다음과 같이 말

   한다. “인도의 본래 음으로는 요가라고 하는데 당나라에는 이에 맞는 정확한 이름이 

   없다. 이는 예를 들어 ‘고(go)’라는 음이 아홉 가지 의미에 통하기 때문에 하나의 이

   름을 배정할 수 없는 경우와 같다. 따라서 본래 음을 그대로 둔 것이다. 지금 [이

  「유가사지론」의 책 이름에서] 그냥 ‘유가’라고 해둔 의도도 이와 같다. 우선 하나의 

   의미에 의거하면 ‘상응’이라 한다[印度本音 稱曰瑜伽 唐無正名 如瞿通九義 無當一名 

   故 置本音 今安瑜伽意亦如是 且就一義 名曰相應]”

 

이 상응의 의미를 살펴보면, 우리는 유식학파의 요가행자들이 받아들인 요가의 포괄적이고도 궁극적인 의미를 알 수 있다. 「유가사지론석」에는 요가라는 단어가 여러 경론들에서 어떤 맥락에서 쓰이는지 자세히 설명하는데,6)그 쓰임새가 너무 광범위해서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의미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찾기 위해, 유식학의 범주들 중에 스물네 가지 불상응행법의 하나인 ‘상응’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여기서 상응이란 어떤 두 가지 것이 인과 관계로서 서로 따르며 분리되지 않는 관계를 말하며, 때로 요가는 바로 그런 결합 관계를 뜻하기도 한다.7) 그런데 요가행자들은 상응 관계가 일어나는 범위를 불교 전체로 확대시킴으로써 모순 없이 서로 따르는 관계들로 엮여진 매우 거대한 요가의 길을 그려낸다. 

6) 이후에 이어지는 ‘요가’의 의미에 대한 원측의 설명은 이「유가사지론석」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이 논서에서 내린 요가의 정의는 그 밖의 다른 유식학 문헌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가장 일반적 정의에 해당한다.

 

이제 원측의 「해심밀경소」의 다음과 같은 압축적 문구에서부터 불교적 요가의 길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겠다.

 

“범음 ‘요가’는 여기 말로 상응이라 한다. 그런데 이 요가에 대해 「유가사지론석」에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같지 않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승의 경(境)․행(行)․과(果) 등의 모든 법들을 공통으로 설하여 다 요가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다 훌륭한 방편으로서 ‘상응한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8)

8)「解深密經疏」 (「한불전」1, 296b), “梵音瑜伽 此云相應 然此瑜伽 依瑜伽釋 兩釋 

   不同 一云 通說三乘境行果等所有諸法 皆名瑜伽 一切並有方便善巧相應義故” 

 

요가를 가장 폭넓게 이해하는 경우, 불교라는 이름으로 포괄되는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요가로 간주될 수 있다. 여기서는 불교를 크게 ‘경․행․과’로 구분하여 그것을 모두 요가라고 부르고 있다. 즉 넓은 의미에서 요가란 소승․대승의 모든 경론에서 수행자들이 알아야 할 경계로서 설해 놓은 교법

들[境], 그것을 진실 그대로 알기 위해 닦는 대․소승의 갖가지 수행법들[行], 그리고 불교의 진리에 대한 지식과 수행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果]로서 얻어진 갖가지 지혜․공덕 등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와 같이 불교적 이론과 수행과 그 결과들이 모두 요가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것들이 모두 ‘상응’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응한다고 할 때 도대체 무엇과 무엇이 상응한다는 것인가? 원측은 경․행․과로 대변되는 삼승의 모든 법들이 다 요가로 간주되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하는 가운데 이에 대해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그것들이 모두 요가라고 불리는 공통적 이유는 무엇보다도 바른 가르침[正敎]과 바른 도리[正理]와 상응하기 때문이다.9)

9) 경행과가 모두 요가로 불리는 몇 가지 이유 중에서 공통적 이유가 바로 ‘정교(正 敎)․

   정리(正理)와 상응한다’는 것이다. 원측 「解深密經疏」(「한불전」1, 296) 참조. 

 

먼저, 삼승의 이론․수행․결과들은 붓다의 가르침과 부합하기 때문에 요가라고 불린다. 삼승의 모든 법들은 본래 붓다의 깨달음이라는 하나의 기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붓다가 설한 가르침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에 상응하는 대소승의 모든 이론과 실천들은 깨달음으로 이르는 하나의 좋은 방편이

자 길[道]이다. 그 길을 따라가면 붓다가 깨달았던 궁극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모두 ‘요가의 길[瑜伽道, yoga-mārga]’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이론이나 수행법이 붓다의 가르침과 상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궁극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첫 번째 이유는 모든 불교 이론이나 수행법들은 경전적 근거를 가져야 한다는 불교적 통념을 진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요가행파에서는 성인의 말씀이 바른 지식의 척도가 되는 것도 결국 그 말이 사실과 부합하고 또 그 말에 반드시 논리적으로 정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삼승의 모든 교법도 모두 ‘바른 도리’와 상응하는 것이고, 이런 이유에서 그것들은 미혹과 전도에서 벗어나 지혜와 해탈을 얻게 해주는 좋은 방편이며, 따라서 요가라고 불린다. 요가행자들에게 ‘도리’란 특히 ‘인과(因果)의 도리’를 뜻한다. 이것은 어떤 진술들 간의 논리적 관계나 사건들 간의 인과적 선후 관계를 뜻할 수도 있고, 또는 두 가지 법이 동시에 상호 인과를 맺으며 모순 없이 함께 작용하는 관계를 뜻할 수도 있으며,10) 궁극적으로는 그런 세속적인 인과의 도리에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수행이 원인[因]이 되어 깨달음[果]에 이르게 되는 관계를 뜻할 수도 있다.11)

10) 이런 이유에서 수행자들이 알아야할 境요가의 범위를 네 가지 바른 논리[道理, nyāya]에 

    국한시키는 학설도 있다. 원측 「解深密經疏」(「한불전」1, 296b) 참조. 

11) 이상으로 성인의 말씀과 논리학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백진순의 「성유식론의 가설에 

    대한 연구: 은유적 표현의 근거에 대한 고찰」(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22-24쪽 

    참조

 

이상과 같이 상응이란 삼승의 이론과 수행과 결과들이 각각 경전의 바른 가르침 및 바른 도리와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상응이란 또한 경․행․과의 세 가지가 서로 모순 없이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넓은 의미에서 요가란 경행과가 정교(正敎)․정리(正理)와 상응할 뿐만 아니라 상호간에도 서로 인과적으로 상응함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상응의 도(道)를 이루고 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다음 절에서 경․행․과 간의 상응 관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2. 경․행․과(境行果)의 요가의 길

이제 상응(요가)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진리의 세계에서 서로 만나고 엮여지는 어떤 관계에 대해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상응으로서의 요가란 여러 갈래 인과의 관계가 서로 모순 없이 엮이면서 궁극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일련의 관계 또는 과정으로 드러난다. 원측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요가[境瑜伽]란 즉 [대․소승에서 설한] 모든 경계를 말하니, 이것들은 전도되지 않은 것이고 서로 모순되지 않는 것이며 수순해가는 것이고 궁극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바른 도리․가르침․수행․결과와 상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요가’라고 한다.……행요가[行瑜伽]란 모든 수행을 말하니, [각각의 수행법들이] 서로 따르고 바른 도리에 부합하며 바른 가르침에 따르고 바른 결과로 나아가기 때문에, ‘요가’라고 한다.……과요가[果瑜伽]란 [수행으로 얻어진] 모든 결과를 말하니, [각각의 결과들이] 서로 따르고 바른 도리에 부합하며 바른 가르침에 따르고 바른 원인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요가’라고 한다.”12)

12) 원측 「解深密經疏」 (「한불전」1, 296b), “境瑜伽者 謂一切境 無顚倒性 不相違性 

    相隨順性 趣究竟性 與正理敎 行果相應 故名瑜伽……行瑜伽者 謂一切行 更相 順故 

    稱正理故 順正敎故 趣正果故 說名瑜伽……果瑜伽者 謂一切果 更相順故 合正理故 

    順正敎故 稱正因故 說名瑜伽”

 

먼저 여러 경론에서 설해진 불교의 진리[境]들은 요가수행자에게 어떠한 전도나 모순도 없는 지식을 제공해주고 궁극에는 깨달음에 이르도록 해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바른 가르침과 도리에 부합하고 그래서 올바른 수행과 결과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의 진리는 요가수행자들이 정신을 집중해서 찾아가야할 요가의 길이다.

 

이 경요가의 길에서 수행자들은 종교적 해탈을 위해 무엇보다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사색에 익숙해질 것을 적극 권장 받는다. 먼저 요가행자가 요가의 길에 들어서려면 무엇보다 세속적인 인과의 도리에 잘 통달해야 하며, 그것은 어떤 주장이 논리적으로 맞는 말인지 또는 사실에 부합하는 말인지를 잘 판단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판단력이 향상됨에 따라 그에 상응해서 올바른 수행들이 일어나고 또 그런 수행과 상응해서 바른 결과들이 산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요가행자들은 성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를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말의 의미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그 말에 담긴 논리적 진실을 발견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다.

 

유식학파의 소의경전인 『해심밀경』뿐만 아니라 많은 유식학 문헌들에서는 ‘바른 인과의 도리’에 대한 지식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모든 불교적 이론들은 궁극적 깨달음에 이르게 해주는 바른 원인 노릇을 하는 지식이며, 그런 지식의 탐구에 있어서 인과의 도리를 잘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해심밀경』「 여래소작사품(如來所作事品)」 에서는 네 가지 도리[道理, nyāya] 중에 특히 ‘이론적으로 증명되는 도리[證成道理]’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서 수행자들에게 어떤 진술이 정당한 경우[淸淨]와 부당한 경우[不淸淨]에 대해 논하고 ‘전자의 조건을 완전하게 구비한 청정한 도리’를 잘 학습하라고 말한다.13)

13)『解深密經』「 如來所作事品 」(大正藏16: 709b-710a) 참조. 이 품에서는 어떤 

    진술이 정당한 경우의 5가지 특징이 언급되는데, 이것을 후대 학자들은 불교의 

    因明논리의 논증식과 연관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가지야마유이치(전치수옮김), 

   「인도불교 의 인식과 논리」, 민족사, 1992, 74-75쪽 참조.

 

다음으로, 요가행자가 불교적 지식을 습득하고 나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청정한 수행을 일으키게 되고, 이 수행들은 마치 보시라는 선한 행위가 부귀․재물라는 좋은 과보를 초감하듯 바른 인과의 법칙에 따라 언젠가 그에 합당한 결과를 이끌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의 모든 수행법들은 요가행자들이 정신을 모아 닦아야할 요가의 길이다. 행요가는 불교적 이론들 즉 경요가와의 관계에서는 전자에 대한 결과로서, 또 수행에 의해 획득될 지혜나 공덕 즉 과요가와의 관계에서는 후자에 대한 원인으로서, 서로 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상응의 도(道)를 이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불교적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수행으로 인해 갖가지 공덕과 지혜가 생겨나는데, 이것들은 바른 원인에 상응해서 필연적으로 이끌려나오는 결과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과요가’로서 요가도의 일부를 이룬다.

 

이와 같이 수행자들이 알아야할 경계들[境]과 닦아야할 수행법들[行]과 얻게 될 결과들[果]은 바른 가르침[正敎]과 바른 도리[正理]에 상응할 뿐만 아니라 서로 간에 인과적으로 상응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요가의 길, 즉 상응의 도를 이루고 있다. 이 길은 어디로 가든 마침내 하나의 궁극적 목적에 이르도록 잘 짜여 있는 일련의 ‘인과적’ 관계 또는 과정이다. 요컨대, 요가의 포괄적 의미에서는 불교 전체가 바로 하나의 거대한 요가의 길이며, 요가행자는 이 길에 나아감으로써 궁극의 지혜와 해탈에 이를 수 있다.

 

Ⅲ. 협의의 요가: 지관(止觀)

 

1. 지관의 근거와 목적

요가란 넓게는 불교의 진리를 지적으로 이해한다거나 또 다양한 대소승의

수행법을 몸소 닦는다거나 또는 그런 행위로 인해 생겨난 결과들을 모두 포

괄하는 말이지만, 좁게는 다만 지관(止觀, śamatha-vipaśyanā)을 가리킨다. 유

식학파에서 요가는 일반적으로 지관을 뜻하며 또한 선정(禪定)․심일경성(心

一境性) 등과 동의어로 쓰인다. 따라서 ?해심밀경?에서도 이 ‘지관’에 국한시

켜 ‘요가의 완전한 의미에 대한 가르침[瑜伽了義之敎]’을 설한다.14) 이 경전

의 분별유가품 에서는 많은 문답을 통해 지관 수행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

해 논하는데, 이 글의 목적에 맞춰 하나의 주제에 논의를 국한시키려 한다.

즉 이 절에서는 요가행자들이 자신들의 언어철학적 통찰을 어떻게 지관 수

행과 접목시키는가에 초점을 맞춰, 불교 내에서 행해진 심원한 철학적 명상

의 전통을 부각시킬 것이다.

14) 원측「解深密經疏」(「한불전」1, 296c) 참조. “이 경전에서 말하는 요가란 두 번째 

    설에 해당한다. 여러 수행법들 중에서 지관을 바탕으로 삼으니, 이는「육처경」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평등하게 운용하는 도를 요가라고 한다고 했던 것과 같다. 이 

    품에서는 지관 요가의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분별유가품」 이라 

    하였다.[此經瑜伽 當第二說 於諸行中 止觀爲體 同六處經 以奢摩他毗鉢舍那平等運道 

    說名瑜伽 於此品中, 廣明正(止)觀瑜伽之義 故名分別瑜伽]”

 

「분별유가품」 의 첫머리에는 세존이 수행자들에게 지관 수행에서 명심해야할 강령을 제시하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에 유식학파의 요가수행이 지극히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명상으로 될 수밖에 없는 중요한 단서가 나타난다.

 

“선남자야, 마땅히 알라. 보살들은 [내가] 임시로 안립해 놓은 교법[法假安立]과 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한 서원을 버리지 않는 것, [이 두 가지를] 의지할 곳과 머물 곳으로 삼아 대승 안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느니라.”15)

15)『解深密經』「 分別瑜伽品」 (『대정장』16, 697c15), “善男子 當知 菩薩法假安立 及 

    不捨阿耨多羅三藐三菩提願 爲依爲住 於大乘中 修奢摩他毘缽舍那”

 

위 인용문에서 우리는 ‘마음을 하나의 경계에 묶어두는 것[心一境性]’이라는 요가의 어원적 정의가 실제로 요가 수행에서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알 수 있다. 요가수행자가 지관을 닦기 위해 ‘마음을 하나의 경계에 묶어둔다’고 했을 때, 이것은 마음을 어디에다 어떤 상태로 두라는 말인가? 그 총괄적 대답이 바로 ‘법가안립(法假安立)’ 즉 ‘임시로 안립해 놓은 교법’으로, 이는 세존께서 설한 십이분교(十二分敎)의 모든 교법들을 말한다. 성인이 깨달은 진리 자체는 언어를 떠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성인의 말을 통해 이미 이 세상에 알려지고 전달되었다. 이 교법들은 세존께서 중생들을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요가(상응)의 기본이념을 따르는 수행자라면 무엇보다 그 목적에 ‘상응(相應)’해서 지관을 닦아야 한다. 따라서 그는 먼저 자신의 산란된 마음을 돌려 ‘법가안립’이라는 가장 청정한 경계에 머물게 한다. 즉 교법에 대해 명상하고 사색하는 것을 지관 수행의 근거[所依]로 삼는다. 물론 이 같은 명상이 철두철미하게 궁극에까지 이어지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최상의 깨달음[無上正等菩提]을 구하겠다는 굳건한 서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서원을 지관 수행의 머물 곳[所住]으로 삼으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교법에 대한 철두철미한 사색을 위해 수행자들이 갖춰야할 내적인 토대가 바로 지관이다. 앞에서 말한 경․행․과의 요가는 단지 일시적 의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자기의 본성을 덮고 있는 어둠과 동요를 몰아내고 참된 진리와 만나겠다는 굳은 의지를 일으킬 때 비로소 시작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자신의 산란된 마음을 거두어 온 마음을 하나의 진실한 경계에 고정시키고[止, śamatha] 그것을 알고자 하는 순수한 의문[觀, vipaśyanā]을 일으켜야 한다. 이러한 지와 관이 갖추어지고 두 가지가 평등하게 운용될 때 실질적인 요가의 도가 일어난다. 이런 이유에서 그 수많은 요가의 길들 중에서 오직 지관이 요가의 본질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전에서처럼 교법에 대한 철학적 사색이 지관의 핵심이 되는 경우, 지(止)와 관(觀)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수행자들은 처음에는 교법을 많이 듣고 그것을 믿고 따르다가 그것에 대해 나름대로 사유한다. 그런 다음에 그 사유된 내용을 가지고 조용한 곳에서 깊이 명상하는데, 이때 지관을 일으킨다. ‘관’이란 그 사유된 법과 연관된 삼매의 영상을 떠올린 다음, 그 법의 전체적 측면에 대해 사유하거나[能正思擇] 그 법의 내적 본질에 대해 사유해보고[最極思擇], 또는 그 법의 특징을 여러 측면에서 분별해보거나[周遍尋思] 또는 그 대상에 대한 관찰을 더 깊이 추구해가는 것[周遍伺察]을 말한다.16) ‘지’란 그 사유하는 마음에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17)

16)「유가사지론」에서는 위의 能正思擇 ․最極思擇 ․周遍尋思 ․周遍伺察을 ‘觀’ 의 

    정의로 간주하였다. 한편『해심밀경』에는 이 네 가지 외에도 ‘관’의 동의어로서  ․

    樂․慧 ․見 등이 언급된다.『解深密經』(『대정장』16, 698a9),「유가사지론」

    (『 대정장』30, 451b14이하) 참조. 

17) 이상은『解深密經』(『대정장』16, 697c28이하), 원측解深密經疏」(「한불전」

    1, 308a15 이하) 참조.

 

이러한 지관의 실천에서 ‘지’ 즉 사마타는 대소승에서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선정에 공통으로 전제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관의 특징은 오히려 ‘관’의 대상을 살펴볼 때 잘 드러난다.18) 즉 지관의 본질은 관찰이다. 수행자가 삼매 속에서 무엇을 골똘히 관찰하고 있을 때 이 관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경전의 표현에 의하면, ‘삼매 속에 나타난 영상[三摩地所行影像]’ 또는 ‘삼매의 영상인 알아야할 의미[三摩地影像所知義]’ 또는 ‘알아야할 사물과 동분인 영상[所知事同分影像]’이다. 상당히 난해한 이 문구들에 대한 해명을 통해 우리는 요가행자들이 실천했던 지관의 본질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18)『해심밀경』에서 지의 대상이 되는 것을 ‘無間心’이라 한다. 이 무간심에 대해서는, 

    바로 직전에 멸한 전 찰나의 마음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여기서는 ‘간단없이 상속하

    는 마음’을 뜻한다. 대상을 관하는 마음은 끊임없이 계속 이어지는데, ‘지’란 이처럼 

    대상을 관하면서 상속하고 있는 그 마음에 정신을 집중하여 그것이 산란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원측의「解深密經疏」(「한불전」1, 308b) 참조.

 

언어철학적으로 말하면, 여기서 관의 대상이 되는 삼매의 영상(影像, pratibimba)이란 ‘말의 의미[語義]’를 뜻한다.19) 자세한 논의는 다음 절로 미루고, 여기서는 지관 수행의 목적과 관련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모든 교법은 본래 말[語]이다. 모든 말은 일차적으로 입으로 발성된 소리라는 점에서 말의 본성은 청각적 소리지만, 말소리는 우리 마음에 어떤 의미(대상)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그 밖의 다른 소리와는 구분된다. 가령 ‘소’라는 발성소리는 우리에게 어떤 관념을 상기시키지만 ‘스’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산란된 마음에서도 하나의 말을 매개로 어떤 심상을 떠올리듯, 마찬가지로 지관 수행자도 정신 집중 상태에서 교법의 단어나 문구를 매개로 하여 자기 마음속에 어떤 심상을 떠올리게 된다. 이것이 ‘삼매에서 나타난 영상’이고, 수행자가 관하는 교법의 의미 즉 ‘알아야할 의미[所知義]’이며, 알아야할 사물[事, vastu] 그 자체가 아니라 관하는 마음이 그려낸 그것의 영상이므로 ‘알아야할 사물과 동분인 영상’이라 한다.

19) 교법에 대한 명상인 경우에 삼매의 영상은 언어와 결부된 어떤 관념을 가리키지만, 

    가령 부정관에서처럼 그 관념은 시각적인 심상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橫山紘一 

    (묘주역),「유식철학」, 경서원, 1989, 45쪽 참조. 

 

지관 수행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그 말의 의미의 자리에 놓인 것, 즉 영상의 본성을 아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해심밀경』에서는 유식의 교의를 받아들이는 요가행자는 삼매에 나타난 영상 다시 말하면 모든 말의 의미(대상)는 외계의 실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식(識)에 의해 현현한 것임을 통찰하라고 말한다.20) 그럼으로써 일상 언어와 결부되어 일어나는 실재론적 집착뿐만 아니라 성전의 언어와 결합되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런 목적에 상응해서 이 경전에서는 지관 수행과 언어철학적 교의를 결합시킨 독특한 수행법을 제시하는데, 다음 절에서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20)『解深密經』 (「대정장」16, 698b22) 참조,  

* 교법에 대한 명상에서 ‘삼매에 나타난 영상’이란 교법의 언어에 의해 떠오른 심상을 

    가리킨다. 이처럼 언어와 결부된 심상이 외계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관

    념적 산물인지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이것은 언어철학적 맥락에서는 말의 의미 즉 

    하나의 단어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이 외계에 실재하는지 아니면 의식의 산물인지 

    하는 논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경전의 「승의제상품」 의 서두에서부터 강조

    하듯, 모든 언어는 가립된 것이고 그 언어에 대응하는 대상도 가립된 것이다. 진나

    를 잇는 유식논리학자들은, 모든 언어는 사물의 공상(共相, 보편상)을 가리킬 뿐이

    며 이 공상은 외계에 그 대응물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식이 만들어낸 일

    종의 보편 개념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입증하기도 한다. 이에 관해서는 백진순, 

    앞의 논문, 34-41쪽 참조.

 

2. 교법의 의미에 대한 명상

 

1) 법(法)에 대한 관찰

『해심밀경』에서 모든 교법에 대한 명상은 법(法)과 의(義)의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진행된다. 이 법과 의의 구분은 불교적 언어관과 연관된다. 불교도들에게 언어란 문자언어가 아니라 음성언어를 뜻하므로 언어의 본체는 청각의 대상인 소리[聲]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소리를 하나의 ‘말’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특정한 음운굴곡(音韻屈曲)을 가진 말소리로 인해 우리 의식에 하나의 이름이 생각나고 그 의미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도들은 청각적 말소리의 특정한 음성학적 패턴에 의거해 이름[名]․문장[句]․음소[文]를 가립하고, 이것으로 언어 자체를 통칭하기도 한다. 이 경전에서 ‘법(法)’이란 바로 언어 자체로서의 명구문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의(義)’란 그 명구문에 의해 떠오른 관념, 다시 말하면 말의 의미이며, 이 경전의 용어로는 ‘삼매에서 나타난 영상’을 가리킨다. 교법에 대한 명상은 이와 같이 언어와 그에 의해 드러나는 의미의 본성을 아는 것이다. 먼저 세존은 ‘법’을 아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남자야. 저 보살들은 다섯 가지 모습으로 인해 법을 잘 아느니라. 첫째는 이름[名]을 아는 것이고, 둘째는 문장[句]을 아는 것이며, 셋째는 음소[文]를 아는 것이고, 넷째는〔이름․문장․음소를〕개별[別]적으로 아는 것이며, 다섯째는 총체[總]적으로 아는 것이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즉 모든 오염법과 청정법에 대해 자성(自性)과 상(想)을 임시로 시설한 것이다. 문장이란 무엇인가? 저 이름의 조합들에서 그에 따라 모든 오염법과 청정법의 의미를 설하는 의지처로서 건립한 것이다. 음소란 무엇인가? 저 두 가지가 의지하는 ‘자(字)’이다. 저것들을 각기 따로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명구문] 각각에 대해 작의함으로 인해 [아는 것이다.] 저것들을 총체적으로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명구문] 전체에 대해 작의함으로 인해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을 하나로 총괄해서 ‘법을 안다’고 하고, 이와 같은 것을 ‘보살이 법을 안다’고 한다.”21)

21)『解深密經』(「대정장」16, 699b28), “善男子 彼諸菩薩 由五種相 了知於法 一者知 

    名 二者知句 三者知文 四者知別 五者知總 云何爲名 謂於一切染淨法中 所立自性想假

    施設 云何爲句 謂卽於彼名聚集中 能隨宣說諸染淨義依持建立 云何爲 文 謂卽彼二所

    依止字 云何於彼各別了知 謂由各別所緣作意 云何於彼總合了知 謂由總合所緣作意 

    如是一切總略爲一 名爲知法 如是名爲菩薩知法”

 

모든 교법은 음소․이름․문장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교법의 본성을 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세 가지의 언어적 본성을 아는 것이다. 이에 대한 위 경전의 설명은 특히 명구문의 문법학적 기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요가행자들은 그것들을 각각 따로 관할 수도 있고 총괄해서 관할 수도 있다.

 

이 경전에서는 ‘이름[名]’에 대해 자성(自性)과 상(想)이라는 두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단어는 어떤 것 자체를 한정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이때 그것을 한정하는 특정 단어를 ‘자성’이라 하고, 그 단어와 결합되는 심상 또는 관념을 ‘상’이라 한다. 이처럼 하나의 단어와 그것이 상기시키는 관념의 결합 관계에 의거해서, 우리는 모든 오염법과 청정법에 대해 이름을 부여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문장[句]’이란 단어들을 조합하여 의미 있는 말이 되도록 나열한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과는 빨갛다’라는 문장에서 ‘사과’라는 주어에 ‘빨갛다’라는 술어를 한정시킴으로써 주어를 ‘빨갛지 않은 것’과 구별시키는 것처럼, 하나의 문장은 어떤 단어에 의해 한정된 오염법과 청정법의 차별적인 의미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문법학적 단위로 기능한다. 따라서 그것을 “오염법과 청정법의 의미를 설하는 의지처”라고 하였다. ‘음소[文]’란 하나의 이름․단어를 이루는 최소의 음성적 단위다. 위 경전의 번역자는 이것을 “이름과 문장이 의지하는 자(字)”라고 표현했는

데, 이는 본래 문자언어가 아니라 음성언어에 근거한 분류이기 때문에 시각적인 기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음성적 패턴을 가진 최소의 음운단위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아버지’라는 발음에서 ‘아’․‘버’․‘지’와 같이 그 자체로는 의미를 지니지 않지만 하나의 의미 있는 단어를 이루는 최소의 음운 단위다.

 

그런데 지관 수행에서 이와 같은 명구문의 본성에 대한 명상이 선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는 성전의 언어에 대한 요가행자들의 기본 태도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모든 요가행자는 교법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사색하기에 앞서, 먼저 그 교법은 그 자체로는 방편으로 시설된 무상한 언어일뿐 어떤 언어적 본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한다.22) 이 점이 쉽게 망각되기 때문에 수행자들은 어떤 말의 의미를 새롭게 앎으로써 다시 그 말에 대한 집착이나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요가행자들은 먼저 그 무상한 말소리에 덧붙은 특정한 음운 단위들(=명구문)의 문법학적 기능의 차이라든지 또 그것들이 우리 의식에서 하나의 의미로서 현현하는 과정에 대해 잘 관찰하는 것이다. 이런 관찰이 선행되었을 때, 식에 현현한 ‘의미’의 본성을 알고자 하는 본격적 관찰도 본래의 목적에 상응해서 제대로 진행될 수 있다.

22) 유식학자들이 언어의 무상함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도 바라문 철학의 聲常住論과 같이 

   「베다」의 말은 영원불변하다고 주장하는 언어 숭배 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식학

    파는 그런 사상과 첨예하게 논쟁했었다.

 

2) 의미[義]에 대한 관찰

지금까지 언급해온 요가의 핵심은 바로 교법의 의미 즉 ‘말의 의미[語義]’를 잘 아는 것이다. 여기서 ‘의미[義]’의 범어 artha는 다의적이다. 그것은 인식의 객관적 대상이 되는 것이라는 뜻에서 ‘경계[境]’나 ‘사물’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말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이라는 뜻에서 ‘의미’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또한 앞서 말했듯, ‘유식무경’의 교의를 받드는 요가행자에게 이 의미(대상)는 하나의 말을 매개로 우리 마음에 떠오른 관념 또는 영상(影像)과 다르지 않다. 혼란을 막기 위해, 이어지는 논의에서 경계․사물․의미(대상)․영상(관념) 등은 모두 ‘말의 의미의 자리에 놓인 것’을 가리키는 용어들로서 문맥에 따라 표현이 달라지는 것임을 다시 환기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이 의미의 세계는 여러 방식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해심밀경』에서는 때로는 열 가지 범주로써, 혹은 다섯 가지나 네 가지나 세 가지 범주로써 모든 의미의 세계를 포괄하여 설명한다. 이 중에서 열 가지 범주[十義]로 설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선남자야, 저 보살들은 열 가지 모습으로 인해 ‘의미’를 아느니라. 첫째는 진소유성(盡所有性)을 아는 것이고, 둘째는 여소유성(如所有性)을 아는 것이며, 셋째는 파악하는 것[能取]의 의미를 아는 것이고, 넷째는 파악되는 것[所取]의 의미를 아는 것이며, 다섯째는 건립(建立)의 의미를 아는 것이고, 여섯째는 수용(受用)의 의미를 아는 것이며, 일곱째는 전도(顚倒)의 의미를 아는 것이고, 여덟째는 전도 없음[無顚倒]의 의미를 아는 것이며, 아홉째는 잡염(雜染)의 의미를 아는 것이고, 열째는 청정(淸淨)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23)

23)『解深密經』(「대정장」16, 699c10), “善男子 彼諸菩薩由十種相了知於義 一者知盡 

    所有性 二者知如所有性 三者知能取義 四者知所取義 五者知建立義 六者知受 用義 

    七者知顚倒義 八者知無倒義 九者知雜染義 十者知淸淨義” 

 

요가행자라면 모든 교법에 의해 포괄되는 모든 사물들을 그 궁극에까지 사색하고 관찰해야 한다. 따라서 ‘일체유식’을 깨닫기 위한 출발점은 지관의 네 가지 인식 대상 가운데 사물의 궁극성[事邊際性]을 관찰하는 것이다.24) 위 인용문에서는 이 사물의 궁극성을 “진소유성(盡所有性)과 여소유성(如所有性)”이라 한다. 이 둘에 대한 앎이 의미의 세계를 관하는 명상에서 가장 핵심이 된다. 이것은 수행자가 알아야할 의미의 세계를 크게 두 방향에서 포괄한 개념으로, 진소유성은 모든 사물들의 외연 전체를 뜻하고 여소유성은 그것들의 내적 본질을 뜻한다.

24)『解深密經』「分別瑜伽品」 에는 지관의 네 가지 인식 대상[所緣境事]이 나온다.

    첫 째는 분별이 있는 영상[有分別影像]이다. 이는 위빠사나[觀]의 인식 대상으로서 

    분별하고 관찰하는 지혜에 의해 파악되는 차별적 영상을 가리킨다. 둘째는 분별이 

    없는 영상[無分別影像]이다. 이는 사마타의 인식 대상으로서, 무분별의 선정의 마

    음에 의해 인식되는 영상이다. 셋째는 사물의 궁극성[事邊際]이다. 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모두의 인식 대상으로서, 사물의 盡所有性과 如所有性을 뜻한다. 넷째는 

    ‘해야 할 일이 성취된 상태[所作成辦]’에서의 인식 대상이다. 이는 해야 할 일을 성

    취한 자, 즉 轉依를 이룬 자에게 현현하는 ‘전도 없는 청정한 대상’들을 가리킨다. 

   『解深密經』(「대정장16, 697c19),「解深密經疏」(「한불전」1, 298b이하) 참조.

 

모든 교법의 언어는 일상적 분별뿐만 아니라 불지(佛智)에 의해 알려진 모든 사물들(=경계들)을 가리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따라서 그 언어에 의해 지시되는 의미의 세계를 극한까지 관찰한다고 할 때, 그것은 시방 세계의 무량한 존재 전체 즉 ‘일체(一切)’에로 확대되기도 하고 반대로 그 모든 것에 관통하는 궁극적 본질인 ‘진여(眞如)’ 등으로 집약될 수도 있다. 진소유성이란 가령 오온․십이처․십팔계 등처럼 ‘모든 사물들의 전체’를 포괄하는 것을 말한다. 여소유성이란 가령 ‘진여’처럼 모든 존재의 내적 본질을 뜻하거나, 때로는 모든 존재에 관철되는 도리(道理) 같은 것을 뜻하기도 한다.25) 요가행자는 이와 같은 ‘사물들의 전체성’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아 계속 추구해 가거나 또는 ‘진여’와 같은 사물의 내적 본질에 대해 깊이 사색함으로써 사물의 궁극성에 도달할 수 있다.

25)「瑜伽師地論」(『대정장』30, 427c4이하)에 따르면, 진여뿐만 아니라 觀待道理․作用 

    道理․證成道理․法爾道理와 같은 사종도리들도 여소유성에 포함된다.

 

이 경전에서는 특히 여소유성을 일곱 가지 진여[七眞如]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하는데, 이는 대소승의 여러 경론에서 언급된 불교적 진리를 일곱 가지로 압축한 것이다. 첫째 유전(流轉)진여란 생사윤회의 세계에서 모든 행(行)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는 초기불교에서부터 한결같이 받아들여진 불교적 진리를 말한다. 둘째 상(相)진여란 모든 법에 내재한 인․법(人法)의 무아성(無我性)이다. 이는 대승의 반야사상에서 확립된 이공(二空)의 진리를 말한다. 셋째 요별(了別)진여란 모든 것은 오직 식일 뿐이라는 ‘유식’의 진리다. 이는 『해심밀경』과 그것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요가행파에서 새롭게 내세운 진리를 말한다. 다음의 네 가지 안립(安立)․사행(邪行)․청정(淸淨)․정행(正行)의 진여란 각기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진리를 나타낸다. 이 일곱 가지 진여는 “오염법과 청정법 가운데 내재되어 있는 궁극의 진리”이며, 요가행자가 사물의 전체성과 더불어 반드시 관찰해야할 궁극적 의미에 해당한다.26)

26) 이상의 여소유성에 대해서는『解深密經』(「대정장」16, 699c18 이하) 참조.

 

이밖에도 파악하는 주체[能取]와 파악되는 대상[所取]의 관계를 중심으로 의미의 세계를 관찰하거나, 또는 유정들이 기거하는 자연계(=건립)와 유정들이 수용하는 생활도구(=수용)들에 대해 관찰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의미의 세계에서는 가령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따위의 전도된 견해들이 생겨날 수 있고, 그와 반대로 전도되지 않은 견해도 생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삼계에서는 번뇌(煩惱)․업(業)․생(生)의 잡염법이 일어나고, 반대로 이것들의 속박을 벗어나는 보리분법(菩提分法)의 청정한 길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전도와 무전도 또는 잡염과 청정의 구도에서 후자가 전자를 어떻게 대치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요가행자들은 명구문을 통해 드러나는 의미(=영상)들을 대상으로 삼아 그것들의 다양하고 차별적 모습과 내적 본질에 대해 집중적으로 관찰한다. 그렇다면 이 학파에서 의미의 본성에 대한 통찰이 중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의미’의 영역이 모든 실재론적 집착을 일으키는 장소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말과 결합되어 나타나는 영상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그와 상응하는 어떤 것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요가행자들은 요가를 통해 바로 그 의미의 세계, 즉 영상들이 오직 식에 의해 현현한 것임을 앎으로써 모든 종류의 실재론적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3) 영상(影像)의 제거

요가행자의 명상은 언어와 그에 의해 떠오르는 관념(의미)을 실마리로 하여 진행되지만, 그 궁극적 목적은 언어적 제약을 넘어서 있는 진리 자체를 증득하는 데 있다. 따라서 교법에 대한 명상의 마지막 수순은 법(法)․의(義)를 앎으로 인해 생긴 새로운 상(相)들을 다시 제거하는 일이다. 『해심밀경』「분별유가품」에서 세존은 온갖 상들을 제거하는 관행(觀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선남자야, 진여에 대해 작의함으로 인해 법(法)의 모습 및 의(義)의 모습을 제거한다. 만약 그 이름[名] 및 이름의 자성에 대해 전혀 얻는 바가 없을 때 또한 그것의 의지처의 상도 보지 않게 된다. 이와 같이 제거해가되, 그 이름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문장[句]에 대해서도 음소[文]에 대해서도 모든 의미에 대해서도 마땅히 이와 같이 제거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중략〕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열 가지 모습을 제거했을 때, [실제로] 어떤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고 어떤 모습들에서 해탈하는 것입니까?” 

“선남자야, 삼매에서 현행한 영상의 모습을 제거하는 것이고, 잡염법에 속박된 모습으로부터 해탈하는 것이며, 그것도 또한 제거하는 것이다.…”27)

27)『解深密經』(「대정장?」16, 700c20), “善男子 由眞如作意 除遣法相及與義相 若於 

    其名及名自性 無所得時 亦不觀彼所依之相 如是除遣 如於其名 於句於文 於一 切義 當知亦爾

    ……世尊 除遣如是十種相時 除遣何等 從何等相 而得解脫 善男 子 除遣三摩地所行影像相 

    從雜染縛相 而得解脫 彼亦除遣”

 

앞서 언급했듯, 법․의의 구분은 언어철학으로는 이름(언어)과 그 의미(대상) 간의 구분을 뜻한다. 이 둘의 결합 관계에 의거해서, 세존은 우리에게 이 세계의 궁극적 진리에 대해 말씀하셨고 수행자들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다. 그런데 지관 요가를 통해 수행자의 마음속에 그 말의 의미가 분명해졌을 때, 그러한 앎도 결국 하나의 말과 의미의 결합 관계에 대한 사회적 약정에 의존하는 것이다. 다만 차이는 가령 ‘아’나 ‘실체’와 같은 이름들에 의해 가정되는 실재론적 세계가 대치(對治)되고 대신에 ‘오온’이나 ‘공’․‘진여’와 같은 말에 의해 드러나는 또 다른 의미의 세계가 자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미의 세계 역시 수행자의 마음에 나타난 영상 혹은 관념적 산물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이전의 오염된 관념에서 좀 더 깨끗한 관념으로 바뀌었을 뿐, 어쨌든 그 관념도 말에 의지하는 한 ‘말을 떠나 있는 진실[離言法性]’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관념들마저 제거해야 하는데, 이것이 곧 “삼매에서 현행한 영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모든 영상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지막으로 요가행자들은 지금까지 관찰해온 명구문과 그 의미들의 본성도 끝내 얻을 것이 없다고 관찰한다. 유식학의 교의에 따르면, 그것들은 ‘모두 자기 마음이 전변해낸 것[皆自心變]’이고, 의사소통을 위해 ‘임시로 시설된 존재[假施設有]’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든 언어는 단지 무상한 말소리의 특정한 음성학적 패턴에 의거해 임시로 가립된 것이고, 또한 그 언어를 통해 드러나는 모든 의미(영상)들도 마음이 변현해낸 관념적 구성물이라는 자각이 분명해지면, 언어적 집착의 대상인 변계소집의 세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 언어의 실질적 근거인 의타기의 식(識)에 대해서도 어떤 관념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수행자가 온 마음을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세계[眞如]에 향해 놓고 거기로부터 모든 말과 관념을 분리시킬 때 가능하다.28)

28) 이상은「解深密經疏」(「한불전」1, 341c 이하) 참조

 

이상과 같은 교법에 대한 명상은, 낮은 단계에서는 각 경론의 개별적인 문구에 정신집중하면서 ‘분별 작용이 있는’ 삼매에서 행해질 수도 있고, 높은 단계에서는 모든 경론의 교설을 다 총괄하는 하나의 진리(=진여)에 정신집중하면서 ‘분별 작용이 없는’ 삼매에서 행해질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문혜(聞慧)․사혜(思慧)․수혜(修慧) 등의 갖가지 유루․무루의 지혜가 무르익는다. 마지막 ‘수행에 의해 성취된 지혜[修所成慧]’는 언어[文]와 의미[義]에 의지하면서도 그에 의해 제약되지 않는 지혜다. 이 지혜로 ‘삼매의 영상’을 다 제거하고 공(空)의 참된 의미를 알 때 지관은 종결된다.29)

29) 이에 대해서는『解深密經』(「대정장」16, 698b24) 이하 참조.

 

『해심밀경』에서 세존은 몇 가지 제거하기 어려운 상들을 없애는 공관(空觀)을 자세히 설명한 후에 수행자들에게, “만약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에서 모든 종류의 잡염과 청정에 대한 변계소집상을 끝내 멀리 떠나는 것, 그리고 여기에서 전혀 얻음이 없는 것, 이와 같은 것을 대승에서의 총체적 공성의 모습”30)이라 결론짓는다. 요컨대, 지관 요가는 언어적 세계를 단서로 하여 시작되지만 그 궁극의 목적은 언어적 제약을 넘어선 세계에 도달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른바 대승의 ‘무소득(無所得)의 공성(空性)’을 깨닫는 것에 다름 아니다.

30)『解深密經』(「대정장」16, 701b14), “若於依他起相 及圓成實相中 一切品類雜染淸淨 

    遍計所執相 畢竟遠離性 及於此中 都無所得 如是名爲於大乘中總空性相”

 

Ⅳ. 맺는 말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의 한 전통에서는 몸과 마음의 활동을 제어하는 어떤 수행을 통해 인생의 모든 고통과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견해가 존재했었다. 유식학파의 ‘요가’ 개념도 이런 전통에서 비롯되었지만, 이 학파에서 그것은 매우 중요한 철학적 의미와 실천적 기능을 갖게 되었다. 요가는 본래 모든 불교도들이 함께 실천하는 것임에도 유독 유식학파를 요가행파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전 논의에 따르면, 요가가 ‘상응(相應)’을 뜻할 때 이는 불교라는 이름으로 포괄되는 모든 것들의 본질과 목적을 표현하는 말이다. 즉 불교 전체가 모두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도록 서로 상응하며 엮여 있는 하나의 요가의 길이다. 또 요가가 ‘지관(止觀)’을 뜻할 때 이는 불교의 교법에 대한 철학적 명상을 통해 ‘유식(唯識)’의 진리를 내적으로 증득하는 최상의 방편이다.

 

불교의 모든 이론․수행․결과[境行果]들이 서로 ‘상응’하는 요가도라는 관점에서도 나타나듯, 여기서 철학과 종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요가행자들은 철학적 명상으로 얻은 지혜의 눈으로 궁극의 진여를 보게 된다. 『해심밀경』의 지관 요가[行]는 그들의 철학적 통찰[境]을 실제로 종교적 해탈[果]과 직결시키는 실험장, 다시 말하면 그 안에 잉태된 지혜를 점점 성숙시켜 궁극의 보리로 탄생시키는 일종의 정신적 연금술과 같은 것이다.

 

이제까지 요가 수행에 대한 고찰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할 것은 ‘교법에 대한 철학적 사색과 논리적 고찰들이 수행의 핵심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요가행자는 지관을 닦기 위해 우선 명상의 소재가 되는 불교의 교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춰야 하고, 또 그 명상의 독특한 관법(觀法)에 도입된 언어철학적 통찰들도 꿰뚫고 있어야 한다. 이는 어떤 교법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화두만을 붙잡는 선종의 참선과 비교해보면 매우 대조적이다. 성전의 교법에 대해 지나치게 배타적인 선종의 태도를 염두에 둘 때, 유식학파에서 주로 행해진 철학적 명상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

 

우리는 상응의 도를 연마하는 요가행자에게서 불교의 교법, 즉 방편의 언어들을 다루는 노련한 장인의 솜씨를 발견할 수 있다. 이들에게 성인의 교법은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진실한 가르침이므로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방편이기 때문에 언젠가 버려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관 요가는 바로 그 두 가지 진실을 모두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일종의 ‘말에 의지해서 말을 버리는’ 수행법이다. 요가행자들은 이름과 그 의미의 본성에 대한 통찰, 즉 ‘모든 말의 의미는 오직 관념적 산물(=영상)’이라는 언어철학적 통찰을 시종일관 밀고나감으로써, 교법에 대한 명상을 결국 모든 교법의 언어 자체와 그에 의해 알려지는 의미의 세계를 모두 해체하고 제거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만들었다.

 

봉사와 헌신이라는 보살의 기본 정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고원한 철학적 명상을 통해 궁극의 진리에 도달하는 유식학파의 지관 수행은 불교의 역사에서도 단연 빛나는 대목이다. 불교의 명맥은 문자에 의지하지 않는 강렬한 선(禪)적 역동성에 의해 이어지기도 하지만, 이처럼 철학의 난해한 근본 문제들에 대한 지적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철학적 진지함에 의해서도 방호되고 계승된다. 불교가 외도들의 정교한 사유 체계에 맞서 오늘날까지 여전히 철학이자 종교로서 존중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유식학파에서 요가의 의미와 목적/백진순

유식학파에서 요가의 의미와 목적 - 『해심밀경』 「분별유가품」 을 중심으로 - 「불교학연구」제16호(2007.4) 백 진순(연세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Ⅰ. 들어가는 말 요가는 인도 철학의 특징을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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