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철학

인도 고대종교의 회통으로서의 석가모니의 인식과 실천

수선님 2020. 10. 1. 12:02

인도 고대종교의 회통으로서의 석가모니의 인식과 실천

 

 

 

Ⅰ. 들어가는 말 

Ⅱ. 인도 고대종교의 회통으로서의 석가모니의 인식

Ⅲ. 인도 고대종교의 회통으로서의 석가모니의 실천 

IV. 맺음말

 

 

Ⅰ. 들어가는 말

 

인도는 서남 아시아의 관문이다. 북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을 경계로 하여 네팔․티벳․중국 등과 국경을 맞대었고, 서쪽으로는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에 연하여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 해안의 서쪽은 아라비아 해, 남쪽은 인도양(印度洋) 동쪽은 벵골(Bengal)만이다. 옛부터 이 곳은 페르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통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동양이라는 지정학적(地政學的) 특성과 함께 서구적 풍모를 골고루 갖추고 있다.

 

인도의 지리적 특성은, 먼저 그 광막한 땅의 넓이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인도 영토의 지면은 3,280,483 평방 킬로미터이다. 이것은 지구표면 땅 넓이의 약 1/15에 해당한다. 인도의 최북단인 까쉬미르(kashmir)에서부터 대륙의 최남단인 까냐․꾸마리(Ka-nya Kumari)까지는 약 3,200km, 릿수로는 약 구천 리에 이른다. 동쪽의 끝인 아샘(Assam)의 디부르가르트(Dibrugarth)에서부터 서쪽의 드와르까(Dwarka) 까지의 거리는 약 3,000km, 팔천 리가 넘는 이 땅의 넓이를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보면 그 엄청남을 실감할 수 있다. 

 

즉, 인도의 땅덩어리는 소련 영토를 제외한 전 유럽의 땅넓이보다도 더 크다. 유럽에서는 비교적 크다고 할 수 있는 프랑스보다는 약 여덟 배, 한반도의 크기 보다는 십오 배가 넘는다. 면적으로는 미국․소련․중국․브라질에 다음가는 나라가 되는 셈이다. 이 인도대륙에는 바다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강줄기가 도처에 흐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직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원시림을 비롯한 정글, 사막 그리고 눈 덮인 히말라야의 정상까지 거의 모든 지구상의 지리적 특성을 갖추고 있다. 기후도 지역에 따라 다양하여 열대(熱帶)와 한대(寒帶)가 공존한다. 심지어는 같은 지역에서조차 일교차(日較差)가 심한 곳이 많다. 그 광막한 대륙을 배경으로 하여 잡다한 인종이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키워 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를 「동질성을 지닌 단일국가」로 파악하기는 매우 힘들다. 지역에 따라서 판이하게 다른 생김새, 풍속, 언어가 상존(尙存)하고 있다. 이에 따른 「문화적 충격」은 일상적으로 이방인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인도의 상호간의 원만한 교류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현실이다.

 

출처: 인도지도  www.tradeindia.co.kr

인도의 지리는 크게 나누어 보아 넷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히말라야 산맥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지역, 둘째는 아라비아 해에 연하는 서부인도, 세 번째는 뱅골 만에 접해 있는 동부인도, 그리고 네 번째로 인도의 남부에 길게 누워 있는 데칸(Deccan)고원의 이남에 있는 인도양에 가까운 남부인도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인도가 갖는 지리적 특성‧풍토적 성격‧인종적 복잡성 등에서 발생한 종교요, 철학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의 인식과 실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인도의 종교사상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고찰함으로써 어떻게 회통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Ⅱ. 인도 고대종교의 회통으로서의 석가모니의 인식

 

‘인도(印度)’라는 말은『大唐西域記』의 저자 당나라 玄奘(602-664)스님이 인도의 유학(629-645 A.D)에서 돌아온 후 東洋의 佛典에서 당시 天竺, 賢豆, 身毒 등으로 사용되었던 음역을 원어의 발음을 좇아 ‘印度’로 고쳐 부른 것이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印度라는 말은 원래 ‘大水’, ‘大河’ 또는 인더스(Indus)江을 뜻하는 산스끄리뜨 신드후(Sindhu)가 페르시아어의 영향을 받아 유럽어인 힌드후(Hindhu)로 된 뒤 다시 영어계통의 인디아(India)로 변했는데, 그것이 또 다시 東洋으로 되돌아와서 漢字로 ‘印度’라고 불리어지게 된 것이다.

 

인도인들이 인도를 부를 때는 印度(India)라고 부르지 않고, 산스끄리뜨나 힌디語로 '영원히 번영하는 사람들’ 또는 ‘영원히 번영하는 땅’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브하라뜨 칸다(Bharat-Khaṇḍa)’ 또는 ‘브하라뜨 와르샤(Bharat-vaṛsa)’라고 호칭한다.

 

인도의 모든 문화와 사상들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 인도정신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 바로 영성적 성향이라는 것이다. 영적인 체험은 인도 종교사에 있어서 그 풍요로움의 토대였다. 인도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영적인 것에 대한 갈망과 지혜에 대한 사랑을 볼 수 있으며, 마음에 대한 건전한 추구의 열정을 발견하게 된다. 인도인들은 깨달음에서 오는 기쁨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라고 자각하였다. 이에 대한 인도인들의 열정은 마음속에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랐다. 인도인들은 우리의 삶의 세계를 재산(artha)이나 쾌락(kāma), 그리고 권력이나 명예(dharma)를 얻기 위해 싸우는 전쟁터(yuddhakṣetra)로 본 것이 아니라, 자아실현(自我實現)과 모든 중생(衆生)의 복리(福利)를 위한 ‘실현의 장(場)’이라고 생각하였다. 인도의 철인들은 보다 차원 높은 삶, 즉 어떻게 하면 보다 완전하고 영원한 영적인 삶을 영위할 것인가를 탐색하였다. 그리하여 인도종교에서는 삶 전체를 영성의 힘으로 채우려는 노력들이 일반적 경향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석가모니의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이전의 인도 고대종교에 대하여 간략하게 사상적 변천과정을 살펴본다.

 

인도에 있어서 철학적 사유의 기원은 힌두교의 최고고전이며 대부분의 정통 철학학파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는 베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베다 문학을 산출한 사람들은 서력기원전 약 1500년경부터 인도의 서북부를 침입하여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새로운 삶의 근거를 마련한 아리얀족들이었다. 그들은 원래 지금의 코카사스 지방의 북쪽 초원지대에서 살던 유목민으로서 소위 인도유럽 Indo-European 언어 계통의 종족들 중의 일부였다. 이들 인도유럽 종족들은 서력기원전 약 2000년경에 초원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서쪽으로 간 종족들은 지금의 유럽의 제민족을 형성하였으며, 동쪽으로 이동한 아리얀족들은 한편으로는 이란지방에 정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을 통하여 인도의 서북부를 침입하여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이륜마차를 타고 청동으로 만든 무기를 들고 싸우는 씩씩한 전사들로서 약 15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오하지방(Panjāb)을 점령하고 베다문화를 이룩한 것이다. 그들의 언어는 산스끄리뜨(Sanskrit 語)로서 인도유럽계통의 언어에 속한다.

 

불교는 인도에 있어서 초기 우빠니샤드의 뒤에 나타난 것으로 제 4기의 소산이니, 제 1기는 리그 - 베다 시대(B.C.1500-1000)로서 아리얀이 자연 현상을 신으로 예배하며 그들의 雄志를 펴 나간 시대다. 사상적으로는 신화적인 우주관을 가지고 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제 2 기는 야쥬르 - 베다에서 브라흐마나 시대(B.C. 1000-800)에 이르는 시대니, 아리얀이 빤잡 지방으로부터 야무나(Yamuṅā)강과 갠지스(Gaṅgā)강 상류 지방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정착하면서 카스트 제도를 확립하고, 종교적인 의례를 확립시킨 시대다. 이 시대에는 바라문교가 확립되니, 신지학적인 제의 중심 시대라고 하겠다.

 

제 3 기는 우빠니샤드 시대로서, 형식적으로는 브라흐마나의 시대를 계승하면서도 점차로 브라흐만과 아뜨만의 一如함을 고찰한 시대(B.C.800-500)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자아에 대한 자각이 크게 일어나 자아 철학이 확립되니, 인도의 사상계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

 

이상의 사상적인 조류의 전개를 보면, 점차로 새로운 사상이 나타나고 있었다고 하겠으나, 베다 중심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그 다음의 제 4기에 이르면 이와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이런 사조의 변천은 그들의 생활 무대의 다름에 따라 나타났으니, 제 3기까지는 인더스강 유역에서 갠지스강 상류 지방을 중심으로 한 데 대하여, 제 4기는 갠지스강의 하류로 그 중심이 이동한 시대로서, 이 시대에는 사상적인 개척자가 오히려 끄샤뜨리야 계급이 중심이 된 시대다.

 

 

 

 

  특성 

 1기 

 리그 - 베다 시대(B.C.1500-1000)

 신화적인 우주관

 2기

 야쥬르 - 베다에서 브라흐마나 시대(B.C. 1000-800)

 신지학적인 제의 중심 

 3기

 우빠니샤드 시대(B.C.800-500)

 자아 철학

 4기

  갠지스강의 하류로 그 중심이 이동한 시대

 끄샤뜨리야 계급이 중심이 된 시대

 

 

불교는 실로 이러한 시대적인 추세에 따라서 일어난 비바라문계의 새로운 종교다.

 

이들 자유사상운동은 종래의 바라문들과는 달리 사문(śrāmaṇa)이라는 새로운 형의 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사문이란 일정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촌락(村落)이나 도시(都市)에 유행(流行)하면서 걸식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면서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는 출가자들이었다.

 

이와 같이 사회적 배경을 토대로 하여 많은 사상가들이 배출되어 자유 사상을 제창하였다. 육십이견이나 삼백육십삼의 논쟁가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들의 대표적인 사상가로서 육사외도의 학설이 알려지고 있다.

『장부경전(長部經典)』의 『사문과경(沙門果經, Sāmaňňaphala Sutta)』에는 당시의 사문으로서 육사외도가 설해지고 있는데, 6명의 종교가가 유명했다. 여섯 사람 모두가 제자들을 잘 통솔하고 교단의 우두머리(gaṇin)로서 존경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 여섯 사람은 다음과 같다.

 

(1) 뿌라나 까사빠(Pūraṇa Kassapa)

(2) 마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

(3) 아지따 께사깜발린(Ajita Kesakambalin)

(4) 빠꾸다 까차야나(Pakudha Kaccayāna)

(5) 산자야 벨라띠뿟따(Saňjaya Belaṭṭhiputta)

(6) 니간따 나따풋따(Nigaṇṭha Nātaputta)

 

이 사람들이 가장 중요시했던 것은 선악의 행위(業)는 결과(報)를 가져 오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최초의 뿌라나는 사람을 죽이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더라도 악을 행한 것은 아니며, 선악의 행위는 도덕적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설함으로써 도덕의 부정을 주장했다고 한다.

 

두 번째의 마칼리 고살라는 인간은 발전을 하건 혹은 타락하건 간에 거기에는 因도 없으며 緣도 없다고 하여 우연론(Ahetu, Apaccaya)‧ 숙명론(Pubbekatahetu)을 제창했다. 그의 교단을‘아지비까(Ājīvika)'라고 한다. 이것은 불교경전에서는 사명외도라고 번역되고 있지만, 본래는 '엄격한 생활법을 지키는 사람' 이라는 뜻으로서 고행주의자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아쇼카왕의 비문이나 『아르타샤스트라(Artha-śātra)』등에도 이 교단에 관한 것이 설해지고 있는데, 불교나 쟈이나교와 함께 후세까지도 유력한 교단의 하나였다. 고살라는 쟈이나교의 大勇(Mahāvīra)과 함께 수행했다고도 하며,고행을 통해 해탈을 얻으려 한 수행자였던 것 같다.

 

세 번째의 아지따는 地‧水‧火‧風의 4원소만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설하고 유물론을 주장했다. 또한 도덕적 행위의 무력함을 주장하면서 오직 인생의 최고 목표는 이 세상에서 육체의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쾌락을 최대한으로 즐기는데 있다고 한다. 이러한 유물론의 전통은 그 후에도 인도에 존재했는데, 이것을 ‘로까야따(Lokāyata)’라 하며 불전에서는 順世外道라 번역하고 있다. 또한 후세에는 ‘짜르와까(Cārvāka)’라고도 한다.

 

빠꾸다는 地‧水‧火‧風의 4원소 외에 苦‧樂‧生命을 추가하여 7요소의 실재를 설했다고 한다. 7요소는 불변하기 때문에 비록 사람을 죽이더라도 칼은 이 7요소의 間隙을 통과했을 뿐이며 살인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러한 요소만의 실재를 인정하는 사고방식은 후세의 勝論學派(Vaiśeṣika)로 계승 발전되어 갔다.

다섯 번째의 산자야는 어떠한 질문이 주어지면 그에 대하여 불확정적이고 애매모호한 답변을 했다고 한다. 그 근저에는 지식에 대한 懷疑와 不可知論이 있었다고 보여지며, 논리학에 대한 반성도 있었다고 인정되고 있다. 후에 석가모니의 高弟가 된 사리뿟따(Sāriputta)와 목갈라나(Mahāmoggallāna)는 그의 제자였다고 한다.

 

여섯 번째의 니간타는 바로 쟈이나교의 개조인 마하비라(Mahāvīra)이다. 니간타(離繫)란 속박을 떠났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의 속박을 떠날 것을 목적으로 고행을 하고 있던 사람들의 교단을 니간타派라고 불렀다. 마하비라는 이 교단에 들어가 고행을 하고 깨달음을 구하여 지나의 자각을 얻었다. 이 때문에 그 이후 이 교단을 쟈이나라고 한다. 쟈이나교 이전의 니간타파의 역사는 꽤 길었던 듯하며, 이 파에서 설하는 24조 중 빠르슈바는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리사뱌 나타] 육사외도의 한 사람인 니칸다 나타풋타가 포교한 자이나교의 조사(祖師).  12세기 경. 럭노우 박불관 소장. 출처: 나까무라 하지메 외. 불타의 세계. p 191

쟈이나교는 불교와 함께 유력한 종교이며, 교리용어 등도 불교와 공통되는 것이 많다. 쟈이나교는 신체적인 속박, 즉 육체적인 욕망이나 본능을 극복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 때문에 고행을 통해 신체의 세력을 약하게 하는 것이다. 게다가 五大誓를 중심으로 하는 엄격한 계율을 실천하고 특히 살생을 엄격히 금하며, 또한 무소유를 강조하기 때문에 의복까지도 버리고 나체로 수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파는 훌륭한 교리와 지식론을 갖추고 있으며, 경전으로 완성되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이 파의 오래된 경전은 ‘아르다 마가디어(Ardha-māgadhī)’로 씌어 있다.

 

당시 이렇게 많은 사문이 배출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가 사상의 변혁기를 맞고 있었던 점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당시 중인도가 많은 출가자를 부양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을 갖고 있었던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중인도는 갠지스강의 중류에 위치하며, 아리야인이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중인도에서는 벼농사의 기술이 진보하여 식량이 풍부했다. 열대기후로 말미암아 부패가 빠른 탓으로 조리한 음식이 남으면 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때문에 걸식생활을 하며 수행하는 사문의 배출이 용이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6師의 주장에도 보이듯이, 당시는 도덕적 행위가 결과를 초래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 중대한 문제였다. 이것은 업의 과보에 관한 문제이며, 마음의 자유(해탈)를 얻기 위해서는 업의 속박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끊어 버리겠는가 하는 것이 쟁점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윤회의 문제와도 관계가 있다. 輪廻轉生이라는 사상은 베다에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우빠니샤드에서 점차 무르익어 간 세계관이다. 그러나 윤회를 인정한다면 당연히 윤회하는 주체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까르마의 사상도 불타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아직 업의 과보가 법칙으로서 승인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불교는 이 막연한 까르마의 관념을 불교의 독자적인 방법을 통해 ‘업의 因果律’로서 조직한 것이다. 쟈이나교도 역시 업의 과보를 인정하고 있지만, 그들은 행위의 결과를 벌(罰, daṇḍa)로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도 후 최초로 녹야원에서 설했다고 하는 사성제(catvāryāryam - satyāmi)의 첫 번째 진리는 인생의 苦에 대한 진리다. 生,老,病,死가 모두 苦이며, 싫어하는 자와 만나고 좋아하는 자와 헤어짐이 모두 苦이며,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함도 苦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나아가서 인간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色,受,想,行,識이라는 五蘊, 즉 다섯 가지의 그룹들이 그 자체가 苦라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하면 인간이란 色(rūpa)이라는 물질적 요소들, 受(vedana)라는 6가지 감각기관들 (眼,耳,鼻,舌,身,意)과 대상들과의 접촉에서 생기는 감정들, 想(saṃjňā)이라는 같은 방법으로 해서 생기는 지각들, 行(saṃskāra)이라는 업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意志的인 要素들, 그리고 識이라는 受와 想들에 의해 주어지는 意識들이 한데 묶어진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五蘊이 모두 苦인것은 그들이 잠시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으며 항시 變하는 無常한 것이기 때문이며, 이 無常한 五蘊을 取하여 어느 것도 變하지 않는 영원한 自我라 부를 것이 없다(anātman,無我)고 한다.

 

우빠니샤뜨 哲學에서 말하는 아뜨만이라고 부르는 自我의 개념은 영원불변하고 무한한 喜悅(ānanda)이 되는 것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러한 개념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나, 그의 人間觀은 우빠니샤뜨의 哲人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즉, 五蘊의 어느 것도 그러한 영원한 기쁨이 되는 것은 없으며 인간에게는 五蘊의 和合이외에 따로, 혹은 이 五蘊을 소유하는 어떤 不變의 自我가 있다고는 볼수 없다는 것이다. 人間이란 단지 恒時 變하고 있는 諸法들의 묶음 자체로서 오로지 現象的인 存在일 뿐이라는 것이다. 비단 인간의 存在뿐만 아니라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事物은 法(dharma)라고 부르는 더 이상 還元될 수 없는 무수한 存在要素들 의 結合으로서, 이 法들은 끊임없이 生滅을 계속하고 있으며, 그 어느 것도 常住不變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實在라는 것은 순간순간 作用하고 사라져버리는 法들뿐이며 人間과 世界란 이런 法들로 구성된 현상들로서 그 배후에 어떤 불변하는 실체나 본질이 없다는 하나의 현상주의적인 세계관을 석가모니는 가르친 것이다. 諸法은 無常‧苦‧無我의 세 가지 法印(dharma-lakṣana)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두 번째 진리는 이러한 苦에는 苦가 일어나게 되는 原因이 있다는 集諦(samudaya)이다. 즉 다시 태어남을 초래하는 愛慾(tṛṣṇa)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苦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發見한 매우 중요한 사상으로서 몇 가지 기본적인 관념들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苦로서의 인간존재에는 原因이 있다는 생각이다. 苦란 아무 원인도 없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無因論者(ahetuvādin)가 아니었다. 둘째, 원인을 가진 것은 生成된 것이므로 有限한 것이며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原因이 除去되면 結果도 除去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苦로서의 人間存在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영원한 宿命(niyati)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석가모니의 인식은 偶然論이나 宿命論을 회통하는 것으로 緣起說을 나타냈다.

 

‘우연론’이나 ‘숙명론’의 견해는 인간의 의지나 인간의 노력의 효과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하여 배척했다. 석가모니가 인식한 연기의 입장은 이 두 가지 입장을 회통한 것이다.

 

다시 이상의 여러 견해들을 정리하면, 자아든지 세계든지 유일한 브라흐만(梵)에서 流出 轉變했다고 보는 정통 바라문의 ‘轉變說(Pariṇāma-vāda)’ 과 그러한 유일의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고 개개의 요소가 상주한다고 믿고서 그것들이 모여 인간이나 세계가 성립한다고 보는 ‘積聚說(Ārambha-vāda)’로 나뉜다. 이러한 두 가지 사고방식의 기초가 이 시대에 형성된 것인데 그것을 회통한 것이 연기설이다.

 

연기설(pratītyasamutpāda)의 일반적인 구조는‘A가 있으면 B가 있고, A가 생기면 B도 생기고 A가 없으면 B가 없고, A가 滅하면 B도 滅한다’라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이 眞理를 苦 로서의 人間存在의 원인을 구명하는 데에 적용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천명한 十二支緣起說인 것이다.四聖諦에서는 석가모니는 苦의 원인을 단순히 愛慾이라고 들고 있지만 經典의 다른 여러 곳에서는 다음과 같은 12개의 요소들을 가지고 生死에 流轉하는 人間存在를 더 자세히 說明하고 있다.

 

無明(avidyā)->行(saṁskāra)->識(vijňāna)->名色(nāmarūpa)->六入(sad-āyatana)->觸(sparśa)->受(vedanā)->愛(tṛṣṇa)->取(upādāna)->有(bhava)->生(jāti)->老死(jarā-maraṇa)

 

전통적으로 이 十二支緣起說은 三世(과거,현재,미래)에 걸친 인간의 流轉을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즉 無明과 行은 現世에 태어나기 이전의 過去世, 識으로부터 有까지는 現世, 그리고 生과 老死는 來世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이러한 緣起說에 의할 것 같으면 人間存在의 여러 측면을 가리키고 있는 이들 諸法은 우연적으로 無秩序하게 生起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어떤 一定한 必然的 規則性 내지 法則性을 가지고 相互關聯 속에서 生滅한다는 것이다. 또한 諸法은 이렇게 相依相資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것도 獨自性을 지니지 못하고 相對的, 條件的, 그리고 一時的인 存在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諸法이 相依相資하여 生起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궁극적인 最初의 原因이 될수는 없다. 석가모니의 緣起說은 우빠니샤드의 哲學처럼 人間과 宇宙의 어떤 궁극적인 第一原因이 되는 實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無常한 諸法의 相互作用에 의한 生滅만을 얘기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無明으로부터 輪廻의 과정이 시작할 필요는 없으며, 어디서 시작되든 꼭 같은 樣相으로 生死의 과정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無明自體도 條件的으로 發生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無明으로 生死의 循環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그것이 보다 根本的인 條件이기 때문이며 그것을 除去해야만 다른 것들도 따라서 除去될 수 있기 때문이다.

 

 

十二支緣起說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석가모니에 의할 것 같으면 이러한 生死의 과정을 통하여 어떤 不變의 自我가 있음으로 해서 그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점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條件的으로 生起하는 諸法의 連續으로서의 人間存在라는 현상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의 生으로 다시 태어남에 있어서 前後 兩存在와의 關係는 같은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라고 한다. 예를 들어 불이 한 연료(五蘊이라는)를 다 태우면 다른 연료로 옮겨가나 그 옮겨진 불은 前의 불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것이다. 같다고 생각하면 無我說에 背反되는 常住論(śāśvatavāda)에 빠지고, 다르다고 하면 人格의 連續性을 無視하기 때문에 도덕적 因果律과 責任을 否定하는 斷滅論(ucchedavāda)에 빠지게 된다고 하여 석가모니는 이 두 견해를 배척하고 自己의 立場을 中道的인 것으로 規定한 것이다.

 

석가모니 當時의 우빠니샤드的인 人間觀이나 唯物論的인 人間觀, 또는 運命(niyati)에 의한 決定論이나 偶然에 의한 無決定論을 모두 排斥하고 석가모니는 緣起論에 입각한 人間觀을 說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緣起觀을 重視하여 말하기를 “緣起를 본 자는 法 을 보고, 法을 본 자는 緣起를 본다”고까지 말한 것이다. 그래서 칼 야스퍼스는 “불교의 교리는 연기설에 근거를 둔 힌두 철학의 완성같이 보인다.”고 주장했다.

 

즉 연기라는 것은 ‘인연생기(因緣生起)’라는 의미로서 모든 것은 서로 인(因)이 되고 서로 연(緣)이 되어 생기(生起)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움으로써 성립, 유지된다. 이 특질(dhātu)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 안하든 법으로 확정되어 있다.”고 한다. 석가모니는 연기설을 인식함으로써 인도 고대종교의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회통할 수 있었다.

 

 

 

Ⅲ. 인도 고대종교의 회통으로서의 석가모니의 실천

 

석가모니는 연기설에 의거 열반에 이르는 실천의 길을 가르쳤다. 올바른 지혜를 실현하는 길은 팔정도(Āryāṣṭaňgika-marga)의 실천에 의해 얻어지는데, 이것은 또한 戒‧定‧慧의 三學으로 정리되어 있다. 즉 正見 ‧ 正思 ‧ 正語 ‧ 正業 ‧ 正命 ‧ 正精進 ‧ 正念 ‧ 正定의 八正道이다. 이 8가지 修行을 셋으로 분류하여 戒(śīla: 正語 ‧ 正業 ‧ 正命) ‧ 定(samādhi: 正念 ‧ 正定 ‧正精進) ‧ 慧(prajňā: 正見 ‧正思)의 三學으로 나눌 수 있다. 석가모니의 실천은 궁극적으로 이 三學을 닦아나가는 修行의 宗敎이며,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대부분 이 八正道의 내용을 여러 가지로 가르친 것이다.

 

팔정도는 ‘중도 majjhimā’라고들 한다. 욕락을 탐내는 생활은 천한 생활이다. 관능에 몸을 맡기는 생활에는 발전이 없다. 또한 그 반대로 오로지 신체를 괴롭히기만 하는 고행도 자신을 괴롭게 할 뿐 아무런 쓸모가 없다. 석가모니는 당시 시대 사조의 두 주류인 ‘짜르와까’의 快樂說과 ‘쟈이나교’의 苦行說 이 두 극단을 회통하고 중도에 의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 중도란 곧 정견‧정사…정정이다. 정견 등의 ‘正’은 팔정도의 교설 자체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을 보이는 것이 중도이다. 쾌락은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지만, 일방적으로 쾌락에 몸을 내맡기는 것은 타락이다. 거기에는 정신의 향상이 없다. 다음으로 고행의 실천에는 강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이 노력은 고귀한 것이지만, 육체를 괴롭힌다고 해서 깨달음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행만으로는 이성이 계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양 극단의 중도를 발견해 가는 지혜가 팔정도의 ‘正’의 의미이다. 중도는‘苦樂中道(VP. Vol. I, p.10)’외에 ‘斷常中道(SN. Vol.Ⅱ, p.38)’,‘有無中道(SN. Vol.Ⅱ, p.17)’등 에 의해서도 설명되고 있다.

 

고락중도는 실천적인 입장이지만, 단상중도나 유무중도는‘견해’의 문제이다. 憶說이나 선입견을 갖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는 것이 고정적인 견해에 빠지지 않는 중도의 입장이다. 현상을 항상한 것으로 보고, 단절이라고 보고, 有라고 보고, 無라고 보는 것은 고정적인 사고방식이며 독단이다. 이러한 고정적인 입장에 의거하지 않는 것이 중도이다.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는 것으로부터‘無記(avyākata, avyākṛta)’의 입장이 대두된다.‘나와 세계는 常住하는가 아니면 無常한 것인가, 有邊인가 혹은 無邊인가’등의 문제에 대해서 석가모니는 침묵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신체와 영혼은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여래의 사후는 有인가 혹은 無인가'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인식 불가능한 문제나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서 석가모니는 지식의 한계를 알고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논쟁을 걸어 왔을 때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실로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시의 사상가들은 “이것만이 진리이다. 다른 것은 허망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타설을 배격하고 자설을 주장하는 등 논쟁을 일삼고 있었다. 거기에는 자기에 대한 집착과 慢心이 있다. 비록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을 논쟁의 입장으로 삼을 때, 그 진리는 집착에 의해 더럽혀진다. 석가모니는 집착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논쟁의 무익함을 알고 논쟁에 가담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점에 석가모니의 이성적인 자제력이 나타나 있다. 석가모니는 당시의 사상가들이 자설의 절대성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해 鏡面王(Ādāsamukha)이 맹인들로 하여금 코끼리를 만져보게 한 다음 그들 각자에게 코끼리를 만져본 소감을 말해 보도록 했다는 고사를 비유적으로 인용해 보였다고 한다(Udāna Ⅳ, 4).

 

석가모니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선입견이나 편견을 초월해 있었던 사실은 석가모니가 四姓의 평등을 제창한 점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사람은 출신성분에 의해 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행위에 의해 천민이 된다. 출신을 묻지 말고 오직 행위를 물으라(Suttanipāta 42, 462)”고 설하고, 행위에 의해 인간의 가치가 결정됨을 주장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삼학의 실천을 강조했다.

 

마투라 불입상. 마투라 출토, 마투라 박물관 소장 출처: 나까무라 하지메 외. 불타의 세계. p 307

우선 계학에 의해 생활을 가지런히 한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여 올바른 신앙심을 발휘하고 그러한 연후에 계를 몸에 갖춘다. 신자들은 5계(殺․盜․邪淫․妄語․飮酒를 하지 않는 것)를 지키고, 출가하여 사미나 비구가 되면 더욱 많은 계를 지키며 엄격한 수행생활을 한다. 계를 실천함으로써 악을 멀리하기 때문에 마음에 후회나 불안이 없으며, 뿐만 아니라 계의 규율적인 생활에 의해 건강을 얻고 심신의 평안을 얻어 선정에 들 준비가 갖추어진다. 이 계학에 기초하여 선정을 실천하는 것이 두 번째의 정학(增上心學)이다. 이것은 四禪의 실습이 주이지만, 그 예비적인 수행으로서 호흡을 관하는 수식관, 신체의 不淨을 관하는 부정관, 몸을 부정하다고 보고 受를 苦라고 보고 마음을 무상하다고 보고 법을 무아라고 관하는 四念處觀, 게다가 慈․悲․喜․捨의 四無量心, 空․無相․無願의 三解脫門 등 여러 가지 관법이 있다. 定學은 마음의 寂靜을 실현하는 '止(samatha)'와 그 적정에 입각하여 진리를 통찰하는 '관(觀, vipassanā)'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정학에 기초하여 연기의 지혜를 실현하는 실습이 세 번째의 慧學이다. 지와 관을 구분하는 경우, '관'은 혜학에 포함시켜도 좋다. '관'에는 사념처관이나 사무량심 등도 중요하지만, 특히 사성제를 관하는 것, 오온 하나하나를 무상․고․무아라고 관하는 것, 십이연기를 順逆으로 관하는 것 등이 올바른 지혜의 실현을 위해 중요시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올바른 지혜가 강화됨에 따라 번뇌가 제거되는 것이다.

 

삼학이 완성되면 이로써 해탈이 실현되고 해탈했다는 자각(解脫知見)이 일어난다. 삼학의 완성은 번뇌가 사라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無漏’라고 한다. 그리하여 무루의 계․정․혜․해탈․해탈지견을 ‘五分法身’이라고 한다. 이것은 성자가 갖추는 실천적인 ‘법’이다.

 

또한 원시불교의 수행도로서는 ‘37道品(37菩提分法)’이 중시되고 있다. 이것은 四念處 ․ 四正勤 ․ 四如意足(四神足) ․ 五根 ․ 五力 ․ 七覺支 ․ 八正道 이다.

 

이러한 수행에 의해 진척되는 깨달음의 과정은 네 단계로 구별되고 있다. 그것은 預流果(예류과에 도달하기까지는 預流向) ․ 一來果(이 이전은 一來向) ․ 不還果(이 이전은 不還向) ․ 阿羅漢果(이 이전은 阿羅漢向)이다. 과와 향을 합해서 ‘四向四果’라고 하며, 또한 四雙八輩라고도 한다.‘예류’란 ‘흐름에 참여한다’는 의미로서, 불교의 흐름에 들어가 다시는 물러서거나 타락하지 않는 단계에 도달한 것을 말한다. 삼보에 귀의하고(올바른 믿음을 얻는 것), 성스런 계를 受持하면 예류라고 한다. 그러나 이 외에 三結(我見․戒禁取見․疑)을 끊으면 예류라고 하는 설, 如實知見을 얻으면 예류라고 하는 설 등도 있다.‘일래’란 한번 이 세상으로 되돌아온다는 의미이다. 수행하는 도중에 죽은 사람은 내세에 天界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거기서 수행을 완성하여 열반에 들기란 불가능하고, 한 번 더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하는 의미에서 일래라고 한다. 일래란 삼결을 끊어 탐․진․치가 희박해진 상태(三毒薄)라고 한다. ‘불환’이란 이 세상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죽어서 천계에 태어나 거기서 열반에 드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五下分結(貪․瞋․身見․戒禁取見․疑)을 끊은 사람이라고 한다. 오하분결이란 사람을 욕계에 붙들어 매는 번뇌(結)를 말한다. 네 번째의 아라한은 수행을 완성한 사람으로서, 일체의 번뇌를 끊고 이 세상에서 열반에 든다.

 

이 修道論은 윤회의 사고방식과 윤회의 장소로서의 삼계(欲界․色界․無色界)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이 세상의 수행만으로는 깨달음을 완성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윤회를 반복하여 수행을 한다고 하는 사상이 생겼다.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석가모니의 실천은 당시 시대 사조의 두 주류인 ‘짜르와까’의 快樂說과 ‘쟈이나교’의 苦行說을 中道로 회통해 八正道를 수행했다.

 

 

IV. 맺음말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석가모니의 인식과 실천은 인도가 갖는 지리적 특성․풍토적 성격․ 인종적 복잡성 등에서 형성된 것이다. 사상사적으로 고찰하면 석가모니의 인식은 정통바라문(B.C.1500-500)의 세계관인 유일한 브라흐만(梵)에서 流出 轉變한다는 ‘轉變說(Pariṇāma-vāda)'과 비바라문계의 육사외도의 세계관인 ‘積聚說(Ārambha-vāda)'을 회통한 것이 연기설이다. 석가모니는 연기설을 인식함으로써 인도 고대종교의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회통 할 수 있었다.

 

석가모니의 실천은 당시 시대 사조의 두 주류인 ‘짜르와까’의 快樂說과 ‘쟈이나교’의 苦行說을 中道로 회통하여 八正道를 수행했다. 이러한 팔정도에 의해서 어느 고정적인 입장에 의거하지 않는 것이 중도의 실천이다.

 

석가모니의 인식과 실천은 연기설에 근거한 중도의 삶이다. 緣起의 眞理는 自性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空이요, 空은 있다 없다 하는 有無의 二邊을 떠난 것이므로 中道다. 中論에서 말하기를, “緣起인 것을 모두 空性이라고 설한다. 그것은 因에 의한 假說이고, 實로 그것은 中道”라고 하고 있다. 우리도 석가모니처럼 일상생활에서 緣起의 인식으로 中道的 삶을 실천하는 것이 當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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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문

 

본 논고는 인도 고대종교의 회통으로서의 석가모니의 인식과 실천을 탐색해 보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본 연구는 인도 고대종교의 인식과 실천을 석가모니가 어떻게 회통했는가를 사상사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석가모니의 인식은 정통바라문(B.C.1500-500)의 세계관인 유일한 브라흐만(梵)에서 流出 轉變한다는 ‘轉變說(Pariṇāma-vāda)'과 비바라문계의 육사외도의 세계관인 ‘積聚說(Ārambha-vāda)'을 회통한 것이 연기설이다. 석가모니는 연기설을 인식함으로써 인도 고대종교의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회통 할 수 있었다.

석가모니의 실천은 당시 시대 사조의 두 주류인 ‘짜르와까’의 快樂說과 ‘쟈이나교’의 苦行說을 中道로 회통하여 八正道를 수행했다. 이러한 팔정도에 의해서 어는 고정적인 입장에 의거하지 않는 것이 중도의 실천이다.

석가모니의 인식과 실천은 연기설에 근거한 중도의 삶이다. 緣起의 眞理는 自性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空이요, 空은 있다 없다 하는 有無의 二邊을 떠난 것이므로 中道다. 中論에서 말하기를, “緣起인 것을 모두 空性이라고 설한다. 그것은 因에 의한 假說이고, 實로 그것은 中道”라고 하고 있다. 우리도 석가모니처럼 일상생활에서 緣起의 인식으로 中道的 삶을 실천하는 것이 當爲이다.

 

요약문 〔주제어: 브라흐만교,짜르와까, 쟈이나교, 석가모니, 회통, 연기설, 중도〕

 

 

 

[Abstract]

 

The Śākyamuni's Recognition and Practice as a Principle of Reconciliation in Ancient Indian Religions.

Kim, Sun-Keun

 

The present study aims to explore the Śākyamuni's Recognition and Practice as a Principle of Reconciliation in Ancient Indian Religions.Indian religion means the various religions born in India. Religion in India is a way of life according to a conception of reality.

Ancient Indian Religions is classified as orthodox or unorthodox according as it accepts or rejects the authority of the Vedas, the oldest and most sacred scriptures of the Hindus. Brahmanism is generally regarded as orthodox system. The unorthodox systems are Cārvākism(materialism), Jainism, and Buddhism. In the sixth century B.C. Jainism and Buddhism, rose in prostest against the Brahmanism.

Upaniṣads which form part of the Vedas are the real foundations of Brahmanism. They are "the finest flower of Vedic thought".

 

All orthodox schools of Brahmanism look upon Upaniṣads as their supreme authority. The Upaniṣads try to answer the questions like "Where and how does God exist? How are man and the Universe related to Him?" The Upaniṣads explain various theories of the creation of the Universe.

 

According to the Upaniṣads God and the soul are fundamentally indentical. One of the mahāvakyas, the great utterances of the Upaniṣads are 'Tattvāmasi', 'You are that' and 'Aham Brahmāsmi', 'I am the absolute'. In other words there is the same divine spirit in every human being. Brahman, the Universal Spirit, is identified with Ātman-self. The Ātman is imprisoned in a particular body, mind and understanding, which create in the individual ignorance of his own infinitude and of his oneness with all beings. Mokṣa is the liberation from this prison house of individuality. Mokṣa can be attained by Jnāna or the transcendent knowledge. Other important doctrines of the Upaniṣads are transmigration of souls and karma. There is no death of the soul. After the death of the body, the soul migrates to another body resulting in a cycle of births. The Karma or action determines the nature of life of man in the next birth.

 

It is an age-old belief in almost all cultures that there exists in man an eternal and permanent entity variously known as the 'Soul'. the 'Self' or the 'Spirit' - in short, there exists in many substance called the 'Soul'.

 

Brahmanism and Jainism teach that the soul of man is an immortal substance. These philosopgers hold that the soul is the essence of man. Thus, although man's body changes and perishes, his soul is changeless and immortal, abiding and immutable. It is the soul which animates the body. The soul is to be equated neither with any part of the body nor with the body as a whole. The soul is known in Jainism as the Jīva and in Brahamanism as the Ātman.

But the Śākyamuni teaches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Dependent Origination, everything exists dependently and conditionally; and we have seen that the fact of universal change and impermanence logically follows from the Doctrine of Dependent Origination. As such, there can be nothing which is permanent and unchanging. It is worth noting that th doctrine of universal change and impermance follows from the fundamental teaching, namely, the Doctrine of Dependent Origination, according to which nothing exists unconditionally and absolutely - this arising, that arises and this ceasing to be, that cease to be.

 

If anything exists absolutely and unconditionally, then it is incapable of entering into interaction with anything else, for to enter into interaction is to undergo change. Thus the view that anything exists permanently contradicts the Doctrine of Dependent Origination. The conclusion, then, is that the thesis of universal change and impermance logically follows from the Doctrine of Dependent Origination(pratītyasamutpāda), the foundation of the Buddha's Recognition.

 

It should be emphasized that the Śākyamuni recommends the Doctrine of Dependent Origination as the Middle Way which avoids the two dogmatic extremes of eternalism(śāsvatavāda) and and annihilationism(ucchedavāda). The Doctrine of Dependent Origination is truly the Middle Way, the way of becoming, in that it teaches not only that the objects of our experience exist not, however, absolutely and unconditionally, but also that owing to its conditional existence every object, instead of simply perishing away, produces some effect or other.

The Śākyamuni is unique among the teachers of the world in that he not only clearly saw the bearing of ontology on ethics but also taught an ontology that is most conducive to the moral development of man. Thus the Śākamuni's Practice flow from his doctrine of anattā, which in turn is ontologically firmly grounded in the Doctrine of Dependent Origination. The remarkable insight of the Śākyamuni is that moral perfection cannot be attained without knowledge(right views, Sammādiṭṭhi) concerning existence. We can see now why right views constitute the first step of the Eightfold Path(aṣṭaṅgika-mārga). We can also understand why the Buddha untiringly exhorted men to give up the pernicious illusion of a permanent self. The destruction of this illusion is the first step toward enlightenment, conquest of suffering, and perfection it self.

 

In his very first Sermon at Sāranātha he said: 'There are two extremes, O monks, from which he who leads a religious life must abstain. One is a life of pleasure, devoted to desire and enjoyment: that is base, ignoble, unspiritual, unreal. The other is a life of mortification: it is gloomy, unworthy, unreal. The Perfect One, O monks, if removed from both these extremes and has discovered the way which lies between them, the Middle Way which enlightens, the eyes enlightens the mind, which leads to rest, to knowleelge to enlightenment, to Nirvāna'. This is the Noble Eight-fold Path contained in the Four Noble Truths.

 

In conclusion , the Śākamuni's Recogintion is the Doctrine of Pratītyasamutpāda, his Practice is the Middle Way. The path he chose was self-discipline and self-analysis through concentration and meditation, avoiding egually the extreme of asceticism and self-mortification on the one hand and that of unrestrained pursuit of pleasure and enjoyment on the other. By following the Śākamuni's Recognition and Practice each man can break the chain and attain liberation by eliminating ignorance, the root cause of suffering.

 

Key words: Brahmanism, Cārvāka, Jainism, Śākyamuni, Reconciliation, the Dotine of Pratītyasamutpāda, the Middle Way.

 

 

 

 

 

 

 

 

[출처] 인도 고대종교의 회통으로서의 석가모니의 인식과 실천|작성자 만남 창조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