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철학사] 7. 상키야 요가철학
[인도철학사] 제7장 상키야 요가철학
길희성: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 졸업. 하바드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 전공.
저서- Chinul, the Founder of the Korean Son Tradition
현재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 제2부 인도철학의 체계화 |
제7장 상키야 요가철학
1. 인도철학의 체계화 ▲ 위로
지금까지 우리는 서력 기원전 1500년경부터 기원전 2세기 가량에 걸친 인도철학의 형성기를 고찰해왔다. 이 기간을 인도철학의 형성기라 부르는 것은 이 기간에 다양하고 창의적인 철학적 사상들이 형성되어 후세에 와서 체계화된 철학적 학파들의 근본성격을 결정지어 주는 밑바탕이 되고 있기때문이다. 이들 다양한 사상들은 소승불교의 몇몇 학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아직도 질서있는 논리와 인식론적 비판을 통하여 수립된 체계적 이론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수행과 체험에 입각한 단편적인 철학적 통찰들이라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고찰한 철학적 문헌들은 그 형식에 있어서도 우파니샤드나 불교경전들과 같이 주로 대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어떤 일정한 철학적 세계관을 일관성있게 체계적으로 진술하거나 옹호하는 논문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약 200년부터는 종래의 바라문의 전통 내에서 여러 가지 흐름을 형성하여 오던 사상들이 각기 독자적인 학파를 이루게 되었으며 이들은 자기들의 철학적 견해들을 간략하게 집약하여 진술하는 경이라는 문헌을 산출하게 되었다. 이 경들은 각 학파의 근본경전이 되었으며, 그 내용이 너무 간결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에 대한 주석서인 소와 이 소의 내용을 체계화하여 다루는 논이 씌여지게 되었다.
이러한 인도철학의 학파적 체계적 발전은 아무래도 불교내의 부파철학적 발전에 힘입은 듯하며, 이로부터는 인도철학의 발전은 각 학파간의 상호의식과 논쟁 가운데서 진행되게 되었다. 따라서 각 학파들은 그들의 형이상학적 견해만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서 그들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인식론적으로 밑받침하려는 노력도 보이게 되었다. 이로써 인도철학은 자기반성적인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상좌부, 설일체유부, 경량부와 같은 소승불교의 체계적 발전을 고찰했거니와 이제부터는 바라문의 정통육파철학과 대승불교철학의 체계를 그 철학적 내용에 중점을 두면서 학파별로 고찰하기로 한다.1)
1) 소승부파불교의 철학은 시기적으로도 아쇼카왕을 전후로 하여 일찍 전개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서술의 편의상 1부(형성기)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설일체유부나 경량부 같은 학파는 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도 2부(체계기)에서 다루어도 무방한 것임을 밝혀둔다.
2. 상키야 요가철학의 전통 ▲ 위로
상키야철학은 인도의 체계화된 철학파 가운데서 가장 먼저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2) 상키야철학 사상은 우리가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카타우파니샤드'나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와 같은 후기 우파니샤드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또한 '마하바라타'의 제12권 '해탈법품'에도 여러가지 초기 상키야철학의 형태가 나타나 있음을 우리는 우리는 이미 보았다.
특히 '바가바드 기타'가 형성된 당시, 즉 서럭기원전 2~ 3세기 경에는 상키야는 요가와 더불어 하나의 잘 확립된 사상으로서 존재한 듯 보이며, '기타'에 사상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대 문헌들에 나타나 있는 상키야 철학은 어디까지나 아직도 충분히 발달되지 않은 초기의 것으로서 나중에 형성된 고전적 무신론적 상키야 철학과는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상키야 철학은 전통적으로 카필라라는 기원전 4세기 경의 성현을 원조로 하며, 그의 제자 아슈리 판차쉬카 등에 의하여 대대로 전승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초기 상키야 사상가들의 저서는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카필라에 의해서 씌어졌다고 전해지는 '수론해탈경'은 학자들에 의하면 빨라야 9세기 정도에 씌여진 위작으로 여겨지고 있다.3) 17세기의 베단타철학자인 비즈냐나빅슈는 이 경의 주석서를 썼으며, 그는 또한 상키야철학에 대한 중요한 기본서로서 '수론정요'라는 책을 썼다.
현존하는 고전 상키야철학서 가운데서 가장 오래 되며 동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슈바라크리쉬나 자재흑의 '수론송'이다. 우리는 이 '수론송'에 와서야 수론철학이 분명히 이원론적, 무신론적 철학으로 정립되는 것을 보게 된다. '수론송'은 기원후 4세기 경에 씌여진 것으로 추측되며4) 모두 70절로 되어 있어 '수론70'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인도의 고전 철학서 가운데서도 백미로 간주되는 명저이다. 8세기의 철학자 가우다파다의 주석서 '수론송소'와 9세기의 베단타 철학자 바차스파티미슈라의 주석서인 '진리월광'이 있다.
상키야 철학은 독자적인 학파로서 근세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지는 못했으나 상키야 철학의 여러 이론들은 베단타 철학 등 타철학파들에 흡수되었으며 5) 인도인의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어 왔다.
상키야철학 연구의 또 하나의 중요한 자료는 요가학파의 문헌들이다. 요가는 상키야철학의 세계관과 형이상학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동시에 실천 수행의 면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학파로서, '요가경'이라는 근본경전을 갖고 있다. '요가경'은 전통적으로 파탄잘리라는 B.C. 2세기의 인물에 6) 의한 저서로 알려져 왔으나, 사실상으로는 서력기원 후 4~ 5세기 경에야 완성된 고전으로 간주된다.7)
그러나 물론 요가적인 수행의 전통은 이보다 훨신 이전으로 소급하여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요가의 기원은 아마도 이미 베다시대부터 바라문들이 제사 때에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힘과 지혜를 얻기 위하여 행하던 고행의 행위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이보다도 더 앞서, 인더스문명의 유적 가운데서 요가의 좌법을 한 신상이 발굴됨에 따라 요가는 아마도 베다나 아리안족의 풍습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라 비아리안적인 행법이 아니었는가라는 추측도 자아내고 있다.
여하튼 '카타 우파니샤드'에서는 '요가'라는 말은 감각기관과 마음을 제어하여 절대자를 인식하는 방법을 뜻하고 있으며, 이러한 행위는 이미 불타나 혹은 그에게 선법을 가르쳐 주던 출가수행자들 가운데서 성행하였던 것이다.
'마하바라타'에 와서는 요가는 상키야와 더불어 두 개의 분명한 사상적 체계로서 인정되고 있다. 상키야는 해탈에 이르는 이론적인 접근으로, 그리고 요가는 같은 목적을 위한 실천적 수행적인 방법으로 구별되어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랜 실천적인 전통이 타사상가들이 철학적인 체계로 성립됨에 따라서 '요가경'에 와서 다듬어지고 정리되게 된 것이다.
'요가경'의 주석서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바샤의 '요가경소'이다. 경과 소가 모두 '수론의 해명'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씌어진 당시에 8) 이미 상키야 철학과 요가는 동일한 사상으로 이해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요가 철학은 유신론적인 사상으로서 본래부터 상키야와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여하튼 9세기의 바차스파티미슈라는 뱌사의 소에 '진리통효'라는 복주를 썼으며 이에 의하여 요가철학의 학설은 고정되게 되었다. 16세기의 비즈냐나빅슈도 뱌사의 소에 '요가평전'이라는 주석서와 '요가정수강요''라는 요가철학의 강요서를 저술했다.
이제 이슈바라크리슈나의 '수론송'과 파탄잘리의 '요가경', 그리고 바차스파티미슈라의 주석을 중심으로 하여 상키야 요가 철학의 대강을 살펴보기로 하며, 때에 따라 두 사상의 중요한 차이점들을 언급하기로 한다.
2) 상키야 철학은 세계를 25원리(tattva)에 의하여 설명하므로 수를 중시한다 하여 수론이라 불려왔다. 'Samkhya'라는 말도 '계산하는 자'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3) 이 경은 Sankara에 의해서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9세기의 Vacaspatimisra는 이 경 대신에 '수론송'에 주석을 쓴 것으로 보아 상당히 나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4) '수론송'은 560년경에 진체에 의하여 주석과 함께 영역되었다.
5) 17세기의 비슈누파의 베단타 철학자인 비쥬냐나빅슈는 상키야 철학을 냐야-바이쉐시카 철학과 더불어 영원한 베단타 진리의 한 면으로 간주했다. 그는 상키야 철학을 신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자를 위하여, 그들이 물질과 영혼의 차이를 알지 못할까봐 주어진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다.
6) J.H. Woods는 그의 The Yoga System of Patanjali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1914)에서 이 파탄잘리와 B.C. 2세기의 문법학자 파탄잘리와는 다른 인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Dasgupta는 양자를 동일인으로 본다. 그의 A History of Indian Philosophy, Vol. I, p. 238참조
7) 이 점에 관해서는 Woods의 견해에 따름
8) J.H. Woods는 경의 연대를 300~ 500년경, 소의 연대를 650~800년경으로 잡고 있다. 이에 관하여는 많은 이설들이 있어 확실하지는 않다.
3. 물질 ▲ 위로
상키야 철학은 불교와 같이 세계를 고로 보며, 이 고를 극복하려는 데에 철학적 사유의 주목적이 있다. 또한 그 세계관에 있어서도 불교와 같이 요가의 체험에 기초한 심리학적인 세계관, 즉 인간의 심리현상의 관찰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를 파악하려는 경향이 짙으며, 일원론적인 세계해석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상키야 철학은 불교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인간의 영원한 자아, 즉 푸루샤(정신:purusa)라는 실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불교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상키야 철학은 세계의 모든 존재를 정신 purusa과 물질 prakrti이라는 두 개의 형이상학적 원리로서 설명한다. 따라서 이 두개념을 바로 이해하면 상키야 철학의 근본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프라크르티, 즉 물질이란 개념은 상키야 철학에서 특수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프라크르티는 푸루샤를 제외한 세계의 일체현상이 그로부터 발전되어 나오는 모태와 같은 것으로서 미현현 avyakta이라 불린다. 즉, 경험의 세계에서 보는 바와 같은 한계를 지닌 현상들이 그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이전의 가능성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 자체는 어떤 원인도 가지고 있지 않으나, 그로부터는 모든 것이 발전되어 나오는 세계의 질료적 원인 upadana-karana,혹은 제1원인 pradhana이 되며, 무한한 창조적 힘 sakti이 되는 것이다. 상키야 철학에 의하면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결과도 원인에 이미 내재하고 있어야 한다. 결과란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잠재적으로 이미 원인에 존재하고 있던 것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인도철학에서는 인중유과론 satkarya-vada이라 부른다. 즉 결과 karya가 원인 karana속에 이미 존재 sat한다고 하는 견해이며, 설일체유부와 같은 소승불교나 나야-바이쉐시카철학이 대표하는 인중무과론 asatkaryavada과 대조를 이룬다.
인중유과론을 대표하는 철학 가운데서도 결과를 원인의 참다운 변형으로 보는 전변설 parinamavada이 있는가 하면, 결과를 원인의 환상적 나타남으로 보는 가현설 vivartavada의 인과론도 있다. 전자를 가장 잘 대표하는 것이 상키야 철학이고 후자는 불이론적 베단타 철학에서 그 전형적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전변설에 의할 것 같으면 진흙 안에 이미 항아리가 보이지 않는 형태이지만 존재하고 있고, 항아리는 진흙의 참다운 변형인 것이다. 반면에 가현설에 의할 것 같으면 진흙만이 유일한 실재이고 항아리는 거짓 나타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키야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는 해체 pralaya와 진화 sarga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고 한다. 해체의 상태에는 만물이 프라크르티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발전되어 나타나지 않는 상태를 말하며, 진화란 프라크르티로부터 모든 현상이 순차적으로 발전되어 나오는 과정을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이 해체와 진화를 되풀이하게끔 하는가? 어찌하여 미현현인 프라크르티는 그 자체로서 해체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진화의 과정으로 넘어가는가? 이 문제에 대한 상키야 철학의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라크르티 자체의 성격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상키야에 의하면 프라크르티는 사트바 sattva, 라자스 rajas, 타마스 tamas라는 세 종류의 요소 guna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요소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그 결과들로부터 추리된 존재들로서, 사트바는 지성, 가벼움, 즐거움, 빛남 prakasaka, 흰 색깔의 성질을 갖고 있으며, 라자스는 힘과 끊임없는 운동, 고통, 빨간색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타마스는 질량, 무거움, 저지, 무지, 무감각과 까만색의 속성을 지녔다고 한다.
세계의 만물의 차이는 프라크르티의 이 세 가지 요소가 어떤 비율로 결합되어 그 중의 어떤 것이 지배적인가 하는 데데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이 세 요소는 서로서로에 영향을 주며, 한계와 형태가 없는 프라크르티의 상태로부터 점점 더 분명한 한계와 형태를 가진 현상세계를 산출시킨다. 만약에 이 세 요소가 꼭 같은 비율로 섞여 있어 완전한 평형 samyavastha을 이루고 있을 때에는 비록 이 요소들 자체는 바삐 운동을 계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요소의 성질도 지배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프라크르티는 아무런 변형도 없이 미현현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프라크르티의 이러한 평형사태가 깨어지게 되는가? 상키야철학의 이 문제에 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프라크르티는 단지 푸루샤의 곁에 있게 됨으로써 purusa-samnidhi-matra그 평형이 깨어진다고 한다. 마치 자석이 철을 당기듯이 양자의 접속 samyoga이 있어야만 비로소 세계는 프라크르티로부터 전개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 두개의 이질적인 존재는 접촉을 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상키야는 말하기를 푸루사와 프라크르티의 접촉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푸루샤는 해방 apavarga이나 향수 bhaga, enjoyment를 위하여 프라크르티를 필요로 하며, 프라크르티는 자신을 보고 알며 즐기는 자로서 푸루샤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혹은 장님과 걷지 못하는 절름발이가 서로 협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유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키야철학의 설명은 설득력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만약에 상키야철학에서 주장하는 대로 해설이란 푸루샤와 프라크르티의 분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푸루샤가 해방을 위하여 프라크르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려운 설명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키야철학은 어떻게 하여 전혀 이질적인 두개의 형이상학적 실재 사이에 처음부터 접촉이란 것이 가능한가라는 것을 설명해야만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상키야철학은 그 접촉은 실제상의 접촉이 아니라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설 samyogabhasa을 내세운다.
여하튼 상키야에 의할 것 같으면 푸루샤와 프라크르티의 접촉에 의하여 프라크르티의 내적 평형상태는 깨어지기 시작한다. 이 접촉에 의하여 제일 먼저 영향을 받는 것은 프라크르티의 삼요소 가운데서 운동의 성질을 갖고 있는 라자스 rajas이다. 이 라자스가 먼저 흔들리기 시작하면 샤트바와 타마스도 따라서 흔들리게 되며 진화의 과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일단 그 균형이 깨어진 프라크리티의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다.
제일 먼저 특정한 성격을 갖고 나타나는 것은 사트바를 그 지배적인 성품으로 하는 붓디 buddhi이다. 붓디는 우주론적으로는 그로부터 다른 모든 물질적 세계가 전개되어 나오기 때문에 위대한 것 mahat 이라고도 불리고, 심리적.개인적으로는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기관으로서 붓디, 즉 지성이라고 불린다.
이 붓디는 그 속에 우주가 해체될 때 프라크르티 속으로 잠재해 버렸던 모든 개인적 붓디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붓디들은 과거의 무수한 전생을 통하여 얻은 기억들과 정신적 성향들 samskara, mental disposition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붓디는 어디까지나 프라크르티, 즉 물질의 산물로서 그 자체는 식 cit의 성품을 갖고 있지 않다. 붓디는 그것을 순수식인 푸루샤의 반사작용을 통하여 받는다고 한다. 붓디는 마치 거울과 같아서 푸루샤의 빛이 있을 때만 다른 물건들을 비추게 되어 우리의 정신활동, 인식, 경험 등이 가능하게 된다고 한다.
물론 붓디가 빛을 반사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아주 섬세한 물질, 즉 샤트바의 요소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붓디는 푸루샤와 가장 비슷한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푸루샤에 가장 가까운 존재로서 푸루샤와 프라크르티의 중개 역할을 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경험과 인식 활동은 식을 지닌 푸루샤와 대상과 관계를 맺은 붓디가 상호 협력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경험과 인식의 주체는 푸루샤만도 아니고 붓디만도 아니고 양자의 교섭상태인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상키야철학의 인식론에 있어서 흥미로운 사실은, 미세한 사유물질인 붓디는 감각기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사물의 형상 akara을 인지할 때나 혹은 사고행위를 할 때, 그 자신이 대상들의 각기 다른 형태들에 따라 수시로 변화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붓디는 단순히 거기에 들어오는 여러 대상들을 수동적으로 수납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상들에 따라 변모하여 인식과 경험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붓디로부터 아함카라 ahamkara(아만)라 불리는 개체화의 원리가 전개되어 나온다. 심리적으로는 아함카라의 기능은 무엇보다도 자아의식과 아집과 교만 abhimana이다. 푸루샤는 자신을 바로 이 아함카라로 착각하여 스스로를 행위의 자체로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아함카라는 붓디와 마찬가지로 우주적 존재론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의 지배적인 성품이 사트바냐 라자스냐 타마스냐에 따라서 세 가지 방향으로 아함카라는 발전하게 된다. 라자스는 주로 운동의 성품을 지녔으므로 그 자체로는 독립적인 발전을 하지 않고, 사트바와 타마스를 도와서 지배하도록 하는 일만 한다고 한다. 사트바의 힘이 지배적이 되면 아함카라는 내적 감각기관인 의근 manas과 오지근 jnana-indriya, 즉,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맡는 능력과, 오작근 karma-indriya, 즉 말하고 손을 움직이고, 발을 옮기고, 배설하고, 생식하는 능력들을 산출한다.
여기서 근 Indriya이란 말은 눈에 보이는 육체적 기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관을 통하여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힘 sakti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추론 anumana을 통하여 아는 것이지 지각 Pra-tyaksa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상의 프라크르티의 전개물 가운데서 붓디와 아함카라와 마나스(의근)를 심리기관 antah-karana이라 부르며, 나머지 십근은 외적기관 bahya-karana이라 부른다. 숨 prana은 심리기관의 기능으로 간주된다. 외적 기관은 외부세계를 심리기관에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며, 심리기관의 기능을 위한 조건이 된다.
마나스는 심리기관과 외적 기관의 매개체와 같은 것으로서, 감각기관을 통하여 들어온 무분별적 nirvikalpa 감각의 소여 sense data를 언어를 매개로 하여 분별하고 종합하고 해석하여 분별적인 savikalpa 판단적('이것은 돌이다', '저것은 빨갛다' 등) 지각으로 바꾸는 작용을 한다. 상키야 철학에 의할 것 같으면, 마나스는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러 감각기관들과 동시에 접촉을 할 수가 있다고 한다(이것은 뒤에 고찰하겠지만, 냐야-바이쉐시카 Nyaya-Vaisesika에서 말하는 마나스에 대한 견해와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마나스의 작용 다음에 아함카라는 지각활동을 '나'라는 개념에 연결시켜 자기 경험으로 만든 다음 붓디 buddhi에 전달한다. 붓디는 감각기관과 마나스를 통해 들어온 형상들에 따라 변모한다. buddhi-vrtti.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도 인식이 성립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붓디는 어디까지나 프리크르티, 즉 물질의 발전된 상태이며 그 자체로는 식 cit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푸루샤의 빛을 반사하여서만 비로소 지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볼 것 같으면 프라크르티의 존재론적 전개 과정은 인간의 인식 과정과는 정반대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인식의 성립에 관한 관찰과 분석을 통하여 인식의 가능 근거를 이루는 존재요소들을 거꾸로 올라가며 찾는 것이 상키야 철학의 존재론적 사유과정인 것이다.
다른 한편, 중량의 성격을 지닌 타마스가 지배하는 아함카라로부터는 오유 tanmatra, 즉, 음.촉.색.미.향의 본질을 이루는 미세한 물질이 방출된다. 이 오유의 배합에 의하여 오대 bhuta가 산출된다. 즉, 음의 본질로부터는 공 akasa, 음과 촉의 결합으로 풍 vayu, 음.촉.색의 결합으로 화 tejas, 음.촉.색.미의 결합으로 수 ap, 그리고 음.촉.색.미.향의 결합으로 지 ksiti의 오대가 산출되는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오유의 존재는 눈에 보이는 오대의 성질들에 입각하여 그로부터 역으로 추리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오유의 존재를 설정하게 된 것 같다. 이렇게 하여 제1차적인 진화 sarga의 과정이 끝나고 오대의 여러가지 결합에 의하여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세계의 다양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프라크르티는 그 내적 균형이 깨어진 후 붓디로 발전한 다음, 한편으로는 아함카라에서부터 11개의 근으로 발전하는 내적 전개와, 오유를 거쳐 오대로 발전하는 외적 전개 과정을 거쳐 현상세계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아함카라와 오유는 더 특정지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기 때문에 무결정자 avisesa라 하며, 십일근과 오대는 이미 특정지어져 있기 때문에 결정자 visesa라 부른다.
또한 붓디와 아함카라와 마나스는 오유와 함께 인간의 세신 linga-sarira, subtle body을 이룬다고 한다. 세신이란 우리의 육체가 파괴되는 때에도 계속해서 존속하여 또 다른 몸으로 태어나게 되는 윤회의 주제가 되는 몸이다. 이 세신은 그 안에 과거와 현세의 업을 통하여 형성된 우리의 정신적 성향 samskara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즉 덕 dharma과 악 adharma, 지혜 jnana와 무지 ajnana, 격정 vairagya, 무욕 avairagya, 초자연적 힘 aisvarya, 약함 anaisvarya의 8가지 성향들이다. 세신은 이러한 성향에 따라 그것에 알맞는 형태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마치 연극배우가 여러가지 역할을 하듯이 이 세신은 여러형태의 몸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상키야철학에 의하면 이상과 같은 프라크르티의 전개과정은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어떤 목적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즉 푸루샤의 형수 bhoga나 해방 apavarga을 위한 목적론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푸루샤에 관한 상키야철학의 이론을 검토해 보자.
4. 정신 ▲ 위로
프라크르티는 세계의 질료적인 원인은 되나 결과는 아닌 존재인 반면에, 푸루샤는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닌 어떤 존재이다. 상키야철학은 이 푸루샤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유물론적인 철학이 되지 않는 것이다.
푸루샤는 영원하고 무한하며 부분과 성질들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아트만이나 브라흐만과는 달리 상키야철학은 푸루샤가 무한히 많은, 그러나 본질적 차이는 없는 개별자적 존재들이라고 한다. 이 푸루샤는 순수한 식, 혹은 방관자로서 결코 대상화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며, 우리의 모든 지식이 성립되는 근저에 깔려 있으나, 대상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지식에 의하여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붓디이지 푸루샤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키야에 의하면 푸루샤의 존재도 프라크르티처럼 추론 anumana에 의하여 알려지는 존재라고 한다. 상키야는 푸루샤의 존재에 관하여 여러 가지 증명을 한다. 물질적 세계는 앎이 없으므로 그것을 경험하는 어떤 원리를 필요로 한다. 즉, 대상은 주체를 필요로 하며, 이 주체는 푸루샤인 것이다.
또한 인간에게는 윤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려는 종교적 갈망이 있다. 그리고 이 벗어남은 벗어나고자 하는 것, 즉 물질의 세계와는 다른 어떤 존재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또한 프라크르티의 세계에 있는 모든 부분들로 구성된 사물들에게서 발견되는 목적과 수단의 일치는 어떤 의식적인 존재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상키야는 푸루샤를 이러한 자연 질서의 계획자 designer로서 이해하는 것은 아니나, 이러한 의도적 질서의 혜택을 받는 의식적인 존재로 이해한다.
우리는 여기서 무신론적인 상키야철학과 유신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요가철학의 차이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상키야와 요가는 둘 다 프라크르티가 전개되는 과정 속에 일정한 질서와 합목적성이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원래 지성을 갖고 있지 않은 맹목적인 프라크르티의 어디서 그런 질서와 조화가 생기게 되는 것인가이다.
이 점에 관하여 상키야는 프라크르티 자체가 푸루샤에게 봉사하려는 목적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그 전개 과정에 있어서 아무런 외부적 힘의 작용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요가철학은 프라크르티에는 지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런 목적성을 가질 수 없으며, 더군다나 그 전개 과정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가 행한 업에 합당한 업보를 받도록 전개할 수 있는 것은 프라크르티 자체만으로는 설명이 안된다고 한다. 따라서 요가철학은 전지전능한 신 이슈바라 Isvara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 신의 영원한 의지에 따라서 프라크르티의 전개 과정은 인도되며 푸루샤의 이익이 보호되고 실현된다는 것이다.
본래 '요가경' 자체내에서는 신은 실제적인 기능과 활동은 하지않고 다만 영원히 속박을 모르는 푸루샤로서 요가행자들의 명상의 대상이 되는 존재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주석가들에 와서는 이러한 비활동적인 신의 개념에 만족하지 않고 점점 더 그를 활동적인 존재로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뱌사 Vyasa는 신을 미세한 물질로 몸을 삼아 종교적 교훈도 주며 은총으로 신자들의 구원을 도우기도 하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으며, 바차스파티미슈라는 세계의 주기적인 진화와 해체, 그리고 우주의 도덕적 법칙을 관장하며 베다를 계시하는 자로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5. 해탈론 ▲ 위로
그러면 푸루샤의 해방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문제를 살피기 위하여 우리는 우선 무엇이 상키야철학에 있어서 속박의 상태인가를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미 프라크르티는 해체와 진화의 과정을 끓임없이 반복하고 있음을 얘기했다.
이 프라크르티의 전개의 시작은 프라크르티와 푸루샤의 접속 samyoga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특히 푸루샤는 프라크르티의 최초의 전개물인 붓디와 가장 가까와서, 그 양자의 교섭상태에서 경험과 인식이 가능해지며, 따라서 모든 욕망과 업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붓디는 푸루샤가 프라크르티에 혼입되게 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접촉 혹은 혼입은 실제상의 섞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푸루샤는 본성상 순수한 의식으로서 언제나 자유로우며 프라크르티의 방관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지로 인하여 푸루샤가 붓디로 착각되어 마치 붓디가 겪는 모든 마음의 상태들을 푸루샤가 체험하는 것으로 오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상키야철학에 있어서의 속박이란 푸루샤와 붓대를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무지를 말하는 것이다.
붓디는 사트바의 성질을 지배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주 섬세한 물질이어서, 푸루샤의 빛을 반사하여 마치 그 자체가 의식이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붓디의 상태가 푸루샤가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상키야철학에서 말하는 무지인 것이다.
요가철학은 좀더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를 우리가 붓디의 상태를 마치 푸루샤인 양 간주하는 것이 무지라 한다. 푸루샤는 본래 순수식으로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으며 변화를 겪지 않는 존재이다. 그러나 대상에 따라 변하는 붓디의 비추어진 상태들과 혼동되기 때문에 푸루샤가 자체가 인식과 경험의 주체로서 변화를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아무런 형태도 없는 철구의 불이 둥근 형태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가 하면, 차가운 쇳덩어리가 뜨겁게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혹은 달이 흔들리는 물결에 비치게 되면 마치 달 자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며 물 자체가 빛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고 한다. 따라서 푸루샤와 붓디를 분명히 구별하는 분별지 viveka-jnana가 해탈에 필수적인 요건이 되는 것이다.
상키야철학에 의하면 이러한 분별지의 가능성은 붓디 자체 내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프라크르티는 푸루샤의 해방이라는 영적인 목적을 위하여 부단히 활동하고 있으며, 프라크르티는 본래 푸루샤를 속박하려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결국 해설과 속전은 모두 프라크르티 자체 내의 사건이며 붓디가 그 관련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붓디 내에 이러한 분별지가 생기게 되면, 붓디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인식과 행위도 그치게 되며 푸루샤도 그 본래의 모습인 순수한 독재 kaivalya의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수론송'의 저자 이슈바라크리쉬나 Isvarakrsna는 말하기를 프라크르티는 매우 수줍은 무희와도 같아서, 일단 푸루샤라는 방관자가 자기 춤을 쳐다보고 있다는 의식이 생기면 춤을 그치게 된다고 한다. 푸루샤는 프라크르티를 일단 보고 나면 모든 흥미를 잃어버리고 프라크르티는 푸루샤에 보여졌다고 생각하면 모든 행위를 그치게 된다는 것이다.
요가철학에서는 이 붓디에다가 아함카라 ahamkara와 의근 manas을 포함시켜서 심 citta이라 부른다. 심은 그 안에 전생에서 경험한 경험들의 자취 samskara나 인상 vasana들, 혹은 업의 공과들을 지니고 있는 윤회의 주체로서, 이들 잠재적인 힘들이 현세나 내세에서 적당한 조건들을 만나면 환생하게 된다고 한다. 요가철학은 이 심의 잠재적인 힘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상키야철학에서처럼 푸루샤의 해방을 단순히 분별지만으로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심 속에 잠재해 있는 모든 과거의 습관적인 힘들이 제거되어 심이 푸루샤처럼 순수한 상태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현재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습관적인 힘과 업의 자취를 생성하고 있는 심의 모든 작용들이 그쳐야만 citta-vrtti-nirodha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요가철학에 의하면 심은 다섯 가지의 습관적인 힘 혹은 번뇌 klesa에 의하여 침투되어 있다고 한다. 즉 무명 avidya, 아견 asmita, 탐 raga, 증 dvesa, 현탐(현탐이란 현세의 향락에 집착하여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말한다)인데, 이 중에서 무명이 힘이 가장 크며, 나머지 4가지 번뇌를 낳게 된다. 이들 번뇌에 의하여 우리는 업을 짓게 되며, 우리가 행한 업은 또 심 속에 그 자취와 영향을 남기게 되어 우리는 후에 그에 상응한 업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요가철학은 우리의 심작용을 5종류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정지 pramana, 부정지 viparyaya, 분별지 vikalpa, 수면 nidra, 기억 smrti이다. 정지는 지각 pratyaksa과 추론 anumana과 증언 sabda의 세가지 타당한 인식의 방법으로부터 오는 지식이고 부정지는 적극적으로 틀린 지식을 말한다. 분별지는 대상이 존재함이 없이 순전히 말에 의해서만 아는 지식, 예를 들면 '토끼의 뿔'과 같은 것이고, 수면이란 인식의 부재를 뜻하는 것으로서 이것도 심작용의 하나로 간주된다. 마지막으로 기억은 남겨진 인상을 통하여 과거의 경험을 회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심작용들과 전에 축적되었던 습관적인 힘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요가철학은 구체적인 수행방법으로서 8가지 단계로 구성된 팔지 요가 astanga-yoga를 제시한다. 즉 금제 yama, 권제 niyama, 좌법 asana, 조식 pranayama, 제감 pratyahara, 집지 dharana, 정려 dhyana, 삼매 samadhi로서, 이 중에서 처음 다섯은 나머지 셋을 위한 준비 단계로 간주되며, 요가의 궁극목표는 모든 심작용이 그친 삼매 samadhi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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