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철학

인도불교 교단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쇠퇴I_(3)

수선님 2020. 12. 6. 11:30

3. 초기불교 교단의 성립과 발전

 

1) 부처님 생존시의 상가의 성립과 발전

불교의 교단은 부처님이 보드가야(Bodhgaya)의 보리수(Bodhi-tree, Pippapa) 아래서 成道하신 이후 바라나시(Vārāṇasi)에서 성립되었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法을 누구에게 설할 것인지 생각한 끝에, 고행하던 시절 함께 수행하였던 5명의 수행자들에게 설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바라나시 북동쪽 8Km지점에 있는 녹야원(鹿野苑, Migadāya)에 있었다. 녹야원은 현재 사르나트(Sārnāth)로 알려져 있으며, 부처님이 5명의 수행자에게 초전법륜(初轉法輪)한 유적지로 되어있다. 또한 이 녹야원에 아쇼카왕의 石柱가 있는데, 그 法輪(Dharma-cakra)이 새겨진 '獅子柱頭'는 독립 인도의 문장(紋章)이 되었다.

 

부처님은 이 녹야원에서 5명의 수행자들에게 고(苦)와 락(樂)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中道, Majjhimā patipadā)'와 '四聖諦'의 가르침을 설하여 제자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불교 비구의 모임, 즉 '상가'의 최초 성립이다. 그후 다시 부처님은 '오온무아(五蘊無我)'의 가르침을 설해서 5비구는 아라한(阿羅漢)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하신 녹야원 정경.

율장에 의하면, 4인 이상의 귀의자가 있을 때 상가가 된다고 하였다. '교단'이 4인 이상의 무리가 모여서 성립되는 것이라면 최초의 상가는 5비구로 구성된 '遊行비구상가'로 볼 수 있다. 古 佛典에 의하면 부처님은 그 후에 바라나시에서 長者seṭhi의 아들 耶舍(Yasa)와 그의 부모, 그리고 처 등을 제자로 삼았다고 한다. 이 때 야사의 부모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세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우리들은 이제 세존과 법과 비구상가에 귀의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우리들을 우바새, 우바이로 삼아주십시오. 지금부터 목숨이 다하도록 귀의하겠습니다 

라고 청원하자, 세존께서 이를 받아들여 최초의 在家의 제자, 즉 우빠사까(優婆塞)와 우빠시까(優婆夷)가 되었다고 한다. 그후 야사의 친구 4명과 다른 50명의 친구들이 출가하여 제자가 되었으며, 그들도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아래와 같이 傳法할 것을 명하였다.

 

비구들아, 遊行하라. 중생의 愛愍을 위하여중생의 안락을 위하여世間을 사랑하기 위하여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애정그리고 안락을 위해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아라처음도중간도끝도 좋은도리에 맞으며 言設이 잘 정돈된 법을 설하라.

 

고 말했다고 한다교화 초기에 부처님은 바라나시에서 마가다으로 돌아오신 후많은 제자들을 얻었다부처님 당시 마가다국에서 유명한 종교가였던 우루벨라 까사빠(Uruevla-Kassapa)와의 法戰에서 부처님이 승리하여 그의 제자 1,000명을 비구로 만들기도 하였다.

 

 

우루벨라 까사빠(Uruevla-Kassapa)의 귀의 출처: 나까무라 하지메 외. 『불타의 세계』 p.157.

또 육사외도 중 한 사람인 산자야 벨라티뿟따(Sanjaya Belatthiputta)는 왕사성에 거주하면서 내세의 업보에 대하여 인식적 회의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유명한 두 제자 샤리뿟따(Sriputta, 舍利佛)와 마하 목갈라나(Mahā-Moggallāna, 目健蓮) 중 사리뿟따는 부처님의 최초 5비구 중 한 사람인 앗사지(Assaji, 馬勝)로부터, “一切法 으로부터 생긴다. 如來는 그 을 설할 뿐만 아니라,  도 설한다. 훌륭한 사문이란 이와 같이 설하는 사람이다라는 설법을 듣고 마음의 문이 열려 불가지론을 버리고, 목갈라나를 권유하여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산자야의 다른 제자 250명도 그들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하였다고 한다. 마하 까사빠(Mahā-Kassapa, 大迦葉) 多子塔(Bahuputraka Caitya)에서 부처님을 보고 제자가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엄격한 수행자로서 부처님이 입별한 후에 상가를 한데 모아 遺法을 결집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교화의 소식이 마가다국의 국왕이었던 빔비사라(Seniya Bimbisāra)에게 전해지자, 왕은 스스로 자진 귀의하여 부처님의 재가제자가 되었으며, 상가의 외호자가 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왕사성에서 산자야의 제자 250명과 까사빠의 제자 1,000명 등 모두 1,250명을 제자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후대의 많은 佛典들에서 어느 때 세존은 왕사성 영축산에서 1,250인의 비구와 함께 가셨다고 기술된 이유인 것이다.

  

영축산 산정에 있는 향실(香室) 터​

그 후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야숙을 하거나 혹은 나무 밑에서나 동굴 속에서 생활하시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한 나머지 安居(Vāṣrika)하기에 적합한 장소에 竹林精舍를 지어 布施하였다. 이것이 바로 불교 최초의 精舍였다. 이로써 불교 교단의 근거지가 확립된 것이다.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에 있던 죽림정사는 그후 동인도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아 상가는 교화 초기에 이미 점차적으로 유행 비구상가에서 정사 비구상가로 변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빔비사라가 죽림정사를 기증하였을 때, 부처님은 적당한 장소의 조건을 도시에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으며, 왕래에 편리하여 원하는 사람에게 가기 쉽고, 낮에는 시끄럽지 않고 밤에는 소리가 없는, 그리고 사람의 통행이 없으며, 사람을 유혹하는 것도 없어 명상에 적당한 곳을 지시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그후 정사위치 선정의 기준이 되었다.

 

또한 부처님의 재가신자 중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수닷따(Sudatta, 須達多) 寒林sītvana으로 찾아가 귀위한 것은 마가다국의 수도인 왕사성에서였다. 그는 꼬살라(Kosala)국의 수도인 사위성의 대상인이었다. 그는 고아들에게 음식공양을 했으므로 고독한 사람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사람(Anāthapiṇḍika, 給孤獨長者)’이라고 불렸다.

 

그는 사위성의 제타숲(Jata-vana)을 제타태자로부터 사들여 상가의 안거지로서 祇園精舍를 건립하여 보시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 정사의 이름이 한문 경전에는 祇樹給孤獨園으로 나타나 있다. ‘기원정사는 바로 기수급고독원의 준말이다. 기원정사는 그 당시 북인도의 불교 중심지였고, 현존 불교 경전 중 3분의 2가 넘는 분량이 그곳에서 작성되었다고 한다. 부처님은 성도 후 45회의 안거 중 25회를 사위성의 기원정사에서 안거하셨다고 한다.

  

출처: 나까무라 하지메 외. 『불타의 세계』 p.152. 기원정사의 원림(園林)

부처님은 성도 후 5년 째 되던 해, 고향인 까삐라바스뚜(Kapilavastu)로 돌아가 석가을 많이 출가시켰다고 한다. 그 때 라훌라(Rāhula, 羅睺羅)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沙彌(Sāmaṇera)로 출가하여 샤리뿟따를 스승으로 모시고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석가족의 여섯 명의 청년들  밧디야(Bhaddiya),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 아난다(Ānada, 阿難), 바구(Bhagu), 낌비라(Kimbira), 데바닷따(Devadatta, 堤婆達多) - 이 출가하여 석존의 상가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석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세존이시여, 우리 사캬족의 사람들은 교만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발사 우빨리(Upāli, 優婆離)는 오랫동안 우리들의 하인이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를 먼저 출가시켜 주십시오. 우리들은 그를 공경하고, 일어서서 맞으며, 합장하고 예경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우리 사캬족 사람들은 사캬족으로서의 교만심을 버리겠습니다.

 

사캬족 출신의 비구들이 사캬족으로서의 교만심 때문에 평등을 本旨로 삼는 불교 교단의 질서를 해치지 않으려는 결의를 하고 이와 같이 청원하자, 석존은 이를 받아들여 우빨리를 먼저 출가시켰다고 한다. 그는 후에 계율에 정통한 사람으로서 교단 내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불교 교단에서는 세속의 가문이나 성분에 관계없이 하루라도 먼저 출가한 사람은 선배이며, 후배는 선배에 대해 일어나서 인사하고, 합장하며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단에서는 완전한 계(具足戒, Upasampadā)’를 받고 먼저 출가하여 수행자가 된 년수(法臘)을 존중하였던 것이다.

 

사캬족 자제의 출가 출처: 나까무라 하지메 외. 『불타의 세계』 p.156.

상가의 기본적인 성격은 모든 의미에서의 평등, 무차별이라고 하는데, 불교 상가에서 이 평등, 무차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和合衆의 실현에 있었다. ‘화합중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고찰하였는데, 일체 평등의 원칙에 따라 상가의 구성원은 서로를 존중하고, 상가가 일체가 되어 수행에 전념한다는 뜻으로, 바꾸어 말하면 평화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 상가의 여러 가지 계율은 모두 이와 같은 화합중의 실현을 위해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 상가의 기본적 특징 중 하나는 세속의 계급이나 출생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는 데 있다. 불교 교단에 들어와 출가생활을 하고자 생각한 사람은 가족도 재산도 모두 버리고, 오직 를 위해서만 생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석가족의 젊은 청년들이 출가한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사랑하는 제자인 아난의 주선으로 부처님은 자신의 양모 마하빠자빠띠(Mahāpajāpati)의 출가를 간신히 허락하였다고 한다. 부처님의 양모는 교단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다. 이로써 부처님 재세 당시, 그것도 상당히 이른 시기에 비구니상가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금욕생활을 준수하면서 수행해야만 하는 비구상가와 비구니상가의 관계를 고려하여, 부처님은 양자의 교제를 엄격히 제한하고, 비구니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八重法을 지킬 것을 명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전체 불교도를 총칭하는 말로서 四衆이 완성되어 교단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그리하여 초기불교의 교단은 상하 모든 계급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교단의 중심을 구성하는 것은 출가 수행자였다.

 

원림정사와 설법을 듣고자 모여드는 사람들 쉬라바스티의 망고원과 푸라세나짓트왕에 대한 설법. 산치 제 1탑, 북문 문기둥, 1세기경. 출처: 나까무라 하지메 외. 『불타의 세계』 p.140.

교단의 기초가 확립된 후부처님은 더욱 더 교화의 열의를 더해 나갔다부처님은 어느 누구에게나 구별 없이 항상 많은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법을 설하기 위하여 入滅할 때까지 계속해서동쪽으로는 마가다의 수도 라자그리하(Rājagṛha, 王舍城)로부터 서족으로는 꼬살라의 수도 쉬라바스티(Śrāvasti, 舍衛城사이를 왕래하였다이러한 왕래를 통하여 출가와 재가에 걸친 수많은 제자들이 탄생하였던 것이다그 대표적인 인물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부처님이 훌륭한 설럽자였던 만큼 비구니 중에도 뛰어난 수행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예를 들면케마(Khemā)나 담마딘다(Dhammadinnā)는 지혜가 탁월하여 가끔씩은 남성들을 상대로 법을 설하기도 하였으며우빨라반나(Uppalavaṇṇā, 蓮華色)는 신통력이 뛰어났으며끼사고따미(Kisāgotam)는 깨달음의 깊이에 있어서 뛰어났다고 한다.

 

재가 신자로는 찌따(Citta)거사가 법의 이해에 있어서 탁월했으며마하샬리의 욱가(Ugga, 郁伽)거사나 석가족의 마하나마(Mahānāma)는 보시를 잘 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이들 외에도 도적이었던 앙굴리말라(Arigulimala)나 바이샬리의 遊女 암바빨리(Ambapālī)를 교화하여 제자로 만들기도 했다.

 

또 마가다국의 아자따삿뚜(Ajātasattu)꼬살라국의 빠세나디(Pasenadi)왕이 부처님께 귀의한 것은 원시불교 경전 가운데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오래된 碑文에도 기록되어 있다이 외에도 설법에 능했던 뿐나(Puṇṇa, 富樓那), 법을 해석하는 데 탁월하였던 마하깟짜나(Mahā-Kaccāna, 등 이름이 알려진 제자가 많았다마하깟짜나는 중인도에서 멀리 떨어진 아반띠(Avanti)국의 수도인 웃자인(Ujjain)에서 전법한 사람으로 유명하며뿐나는 웃자인 서남쪽의 수나빠란따(Sunāparanta, 현 봄베이 서북방에 있는 항구)에서 불교를 보급했다고 한다.

 

부처님 재세 시 강가강 유역  출처: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부처님의 생에』, p.258

이와 같이 석가보니 부처님은 어느 누구 구별 없이 평등하게 법을 설하셨던 것이다. 부처님은 당시 인도 사회에서 바라문을 정점으로 하는 엄격한 카스트 제도가 당연시되었던 분위기에서 인간은 누구나 계급이나 남녀의 구별, 귀천에 관계 없이 완전히 평등하다는 주장을 펴면서, 누구라도 진리에 눈을 뜨면 佛陀(=覺者)가 될 수 있다는 萬人成佛의 길을 밝혔다.

 

이것은 인도의 종교·철학사에 있어서 획기적 사건이었다. 부처님은 인간평등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평등관을 상가의 제도나 운영에 그대로 구현시키려고 하였다. 불교 교단에는 바라문이든 슈드라(Sūdra)든 부처님을 믿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자는 누구나 차별 없이 입단이 가능했다. 사실 부처님의 교단에서는 바라문 계급의 출신자나 끄샤뜨리야 계급출신이나 한 사람의 수행자로서 완전히 평등하게 취급되어 어느 누구에게나 구별 없이 평등하게 법이 설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리얀 문화의 주류인 바라문 儀禮化 四姓制度의 정착에 따른 인간 평등의 경시 등의 현실에서 볼 때, 매우 획기적 사건이었다. 당시의 일반적인 인도의 종교·철학에 있어서 최후의 가르침은 스승과 제자가 조용한 숲 속에서 두 사람만이 대좌하여 비밀히 전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초전법륜: 대좌에 다섯 비구와 돌아가는 법륜, 그리고 녹야원을 상징하는 사슴도 묘사되어 있다. 사르나트 출토. 5세기. 사르나트 고고학박물관 소장. 출처: 나까무라 하지메 외. 『불타의 세계』 p.140.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인평등의 길을 제시한 것은 불교가 아리야문화 속에서 탄생하였으면서도 아리야문화를 극복·초월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의 단적인 예는 부처님의 10대 제자의 구성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부처님은 계급이나 출생을 전혀 문제삼지 않고, 道心 殊勝한 능력만을 기준으로 삼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러한 보편적 가르침의 영향으로 교단은  부처님과 직계 십대제자들의 교화지역을 고려한다면  서북쪽으로는 딱샤실라(Taxila) 부근까지 전해졌고, 남쪽은 쁘라띠슈타나(Pratishthā,  Paithan)지방의 고다바리(Godavari)강변까지이다. 또 동쪽은 갠지스강 하류지방, 그리고 서쪽은 지금의 봄베이 서북방인 수나빠란따(Sunāparanta) 지방, 즉 아라비아해 연안까지 미쳤다고 한다.

 

 

 

 

 

 

 

 

 

[출처] 인도불교 교단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쇠퇴I_(3)|작성자 만남 창조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