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철학

인도불교 교단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쇠퇴I_(4)

수선님 2020. 12. 6. 11:36

2) 부처님 입멸 후 100년까지의 상가의 발전

 

인도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고 발전된 불교를 말한다. 불교는 나중에 인도국경을 넘어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남방불교, 티벳불교, 중국불교, 한국불교, 일본불교 등의 특색 있는 불교를 발전시켰다

 

이들 발달된 불교에는 그 지역의 민족적 특색이나 풍토적 특색이 가미되었다. 인도불교는 중국불교나 한국불교와 비교해볼 때 기후와 풍토의 차이로 수행생활에도 커다란 차이를 초래했다. 수행생활의 차이는 당연히 교리에 반영되게 마련이다. 이점에서 남방불교(스리랑카, 버마, 타이랜드 등의 불교)는 기후풍토가 인도본토와 유사하다. 어쨋든 불교를 지역에 따라 구분한다면, 불교 전체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보편성과 각각의 지역불교에 고유한 특수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16)

 

 

인도불교사는 크게 보아서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라는 4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초기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도 시부터 불멸 후 100년까지의 사이의 불교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불교가 성립하여 그 초기 교단에 아직 분파가 생겨나지 않은 시대의 불교를 초기불교라고 보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부처님의 입멸 직후부터 100년까지의 상가의 발전을 탐색해보고자 한다.

 

부처님 입멸직후 불교 교단은 부처님이 교화한 유행지역으로 지방단에 불과했다. 부처님이 교화한 지역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는데, 불전은 이를 중국(中國)’17)으로 표현했다.이곳은 야무나강과 갠지스강의 중간지대를 중심으로 하는 북인도 중앙부로서 바라문 문화가 가장 번창하였던 본거지를 지칭한다

 

출처: 나까무라 하지메, 『불타의 세계』, p.91.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Lumbini)와 입멸지인 꾸시나가라(Kuśināgarā)는 동북부 변경에 위치했고, 깨달음을 얻은 成道地 보드가야(Bodhgaya)와 초전법륜지 녹야원(Sāmāth)은 인도의 동부에 위치했다. 이 네 곳은 四大靈場(Cetiya)’으로서 부처님 입멸 후 그를 사모하는 신도들의 순례 참배지였다. 초기 불교도들이 생각했던 中國의 개념도 아마 이 4대성지 중심의 지역을 지칭했을 것이다. 현재 이 지역은 갠지스강의 중하류 지역으로 비하르(Bihar)와 웃따르 쁘라데슈(Uttar Pradesh)주에 걸친 지역이다.

 

 

부처님 생존시에는 부처님이 교단의 중심으로 교법을 설하고 율을 제정하였다. 교법과 율의 구체적 근거는 부처님이었다. 특수한 사정에 따라 개정, 시정할 필요가 있을 때 부처님이 이를 인정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부처님 입멸 후에는 사정이 변했다. 부처님 입멸 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도불교에는 교법과 계율을 제정하고 시행하는 권위를 가진 중앙의 교단 즉 총무원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스스로에게 귀의하며, 법에 귀의할 것(自歸依 法歸依)’을 교설하여 상가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보편적 교단이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임을 선언했다. 따라서 승가를 지배하는 특정한 지배자도 지배세력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불교의 발전은 어디까지나 개개인 信心의 원력에 의한 것이었다.

 

한 지역에 상가가 성립, 정착하여도 상가의 교주는 없다. 모든 사항은 상가 전원의 출석 및 의결(이를 和合이라고 한다)에 의해 결정되었다. 각지의 상가는 통일적인 사방상가의 이념 아래 일체감을 지나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각 지역의 상가가 부처님의 교법을 가르치고 율을 올바로 실천하였다.

 

 

부처님의 열반을 슬퍼하는 아난다 2-3세기, 인도박물관, 인도. 출처: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부처님의 생애』, p.379.

부처님 입멸 후에 부처님이 설하신 율에 없는 사항이 나타날 때는 각자의 판단으로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래서는 교단 전체의 율이 통일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각지의 상가 전원이 부처님의 45년간 가르침 전부를 들었던 것도 아니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책으로 편찬하지도 않았다. 귀로써 들은 것 모두를 기억해 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모두가 확인한 교설을 통일, 정리해 둘 필요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처님 입멸 직후 대가섭은 이대로 방치해 둔다면 부처님의 교설은 조속히 절멸될 것이라고 우려한 나머지 교법과 율의 결집(Saṃgīti)을 서둘렀다. 그래서 대가섭은 왕사성 안의 七葉窟 500인의 비구를 모이게 하였다. 부처님을 오랫동안 항상 가까이에서 모시던 제자인 아난다(Ānanda)가 교법(Dhamma)을 송출하고, (Vinaya)은 계율에 대한 이해가 깊어 持律 제일이라고 불렸던 우빨리(Upāli)가 낭송했다고 한다.

 

이 때 나중에 經藏律藏의 원형이 된 것이 송출되었다. 이들 법과 율은 기억하기에 편리하도록 중요한 교설들을 간단한 단문인 수뜨라(Sūtra)로 완성하거나 혹은 싯귀(Gāthā)로 만들어 전승하였다. 예를 들면 아난다는 나는 일찍이 부처님께서 oooo에 계실 때에, 이와 같이 설하시는 것을 들었다고 하면서 자신이 기억한 부처님의 교설을 낭송한다

 

이것을 참석한 대중들이 듣고 정정할 곳은 정정하고는 모두가 이를 다시 合誦(Saṃgīti)하였다. 이는 개정되고 결정된 가르침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모두가 이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을 불교사에서 최초로 수행된 경, 율의 편찬,  1결집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후 경전, 율전으로 발전하여 소위 경논의 삼장 가운데 경율이라는 방대한 불전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교법이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는가?

 

이에 대해서는 기원전 1세기 중엽, 스리랑카 밧타가마니 왕 시대에 正法의 오래 머무름을 위해 필사되었다는 기록이 잇다. 인도 본토를 포함하여 대개 이 시기부터 교법이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부처님 입멸 직후 교단 내의 지도자는 제1결집의 사회자였던 장자 대가섭이었는데, 점차 제1결집에서 경을 암송한 아난이 교단 내의 유력한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장수를 누렸던 아난의 뒤를 이어 그의 제자인 샤나까바시(Sānakavasi, 商那和修) - 우빠굽타(Upagupta, 優婆掘多)- 디디카(提多延)의 순으로 嗣法의 계보가 전승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 등지 특히 선종 계통에서 강조된 법의 전승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1결집 이후 불교 교단은 제자들의 끊임없는 전법으로 서방과 서남방 두 방면으로 서서히 발전하여 갔다. 불교교단이 이 두 방면으로 발전했던 이유는 중인도의 남방은 북인도와 남인도를 분할하는 빈댜(Vindhya) 산맥의 고원에 의해 가로막혀 있고, 동부는 살인적인 더위로 개발되지 않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분별제일인 마하깟짜나(Mahākaccānā, 大迦旃廷)가 부처님 당시부터 아반띠(Avanti)국의 수도였던 웃자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도에서 포교했기 때문이다

 

고대 인도의 16대국 출처: 나까무라 하지메, 『불타의 세계』, p.91.

웃자인은 당시 교통의 요충지로서, 북동쪽으로는 베디샤(Vedisa)로 가는 길이 있으며, 거기서 동인도로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파이탄(Paithan)에 이른다. 서데칸으로부터 웃자인을 지나 북동쪽으로 베디샤, 다시 코삼비(Kosambī), 사께따(Saketa, 현 지명은 Ayodhya)를 통하여 사위성으로 가는 길을 불전에서는 남로(Dakkhiṇāpatha)’라고 하는데 예부터 개통되어 있던 통상로이다

 

불교 교단이 서남인도로 진출하였던 것은 이 길을 통해서였다. 웃자인은 아리얀 문화와 힌두문화가 남인도로 확대되어 나갈 때 주된 중심지였다. 말하자면 웃자인은 남인도로 통하는 문호인 동시에 서데칸 연안의 여러 항구 도시가 서방과의 무역을 시작할 때 서방 세계의 문물이 북인도로 들어오는 관문 구실도 했다. 따라서 이 지역은 교역과 정치, 문화의 중심지로서 일찍부터 개화되어 있던 지방이다.

 

앞에서도 잠시 고찰한 바와 같이 서남인도에서 불교를 연 중심 인물은 마하깟짜나(大迦旃廷)이다. 그는 웃자인 출신으로 부처님이 성도한 후로 12  13년경에 제자가 된 사람으로 부처님 재세지부터 부처님 교설을 간략히 상세하게 해설하는 재주가 탁월해서 적극적으로 포교 활동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는 논리적 사고에 탁월했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分別(Vibhajja) 제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분별(Vibhajja, Skt. Vibhāsa)이란 교법의 논리적, 철학적 해석과 설명을 말한다. 현대 남방불교의 부파명은 정확히 말해서 분별부(Vibhajjavāda)’라고 하는데, 이는 서남인도를 거점으로 발전된 것이다.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이들은 서남인도 교단의 사람들이며, 또 경전을 전수하고 있는 언어인 빨리어(Pīli)가 이 서인도 방언을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진 사실을 감안할 때, 대가전연이 불교 전교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또 뿐나(Puņņ, 富樓那)는 수나빠나란따(Sunāpanaranta)의 숫빠라까(Suppāraka) 출신 이었다고 하는데, 숫빠라까는 현재 소빠라(Sopāra)라고도 불리며 인도 서해안에 있는 항구이다. 그는 대상의 일원으로서 사위성에 장사를 하려 갔다가 여기서 부처님을 만나 출가득도하였고, 입단 후에는 대가전연의 지도를 받다가 부처님의 10대 제자중의 한 사람이 되어 설법제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후에 그가 자신의 고향으로 포교, 전도의 여행을 하러 나갈 때, 부처님은 그 지방은 불교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만약 사람들이 너를 학대한다면 어찌할 것인가를 물었다. 이에 부루나는 나는 욕을 먹어도 그들을 때리지 않을 것이니, 그들은 나를 점잖다고 생각할 것이며, 몽둥이로 얻어맞아도 죽이지 않을 것이니, 그들은 나를 훌륭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약 나를 죽인다면 고통으로 가득찬 이 세계로부터 참된 열반의 세계로 인도해 준 그들에게 감사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부처님이 그의 인내심과 포교에 대한 열의를 칭찬하였음을 경전은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일화는 불교가 서인도에서 각지로 포교되어 나가기 시작하던 시대적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서인도와 동인도 출처: 나까무라 하지메, 『불타의 세계』, p.91. 

부처님 입멸 후 100년 경, 서인도의 비구들은 동인도의 비구와 논쟁을 벌이게 됨에 따라, 동인도의 교단을 신랄히 비판하게 되어 교단의 분열을 야기하는 분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남인도의 불교는 불교 성립지의 교단과 대등한 힘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불교 교단은 도시의 열린 사회의 상층 계급 사람들에게 새로운 원리를 가르쳐 줌으로써 도시형 종교로 발전해나갔다고 볼 수 있다

 

상술한 것처럼 부처님 입멸 후, ‘불교의 중국이라고 하는 중인도에서 닥키나빠타(南路), 즉 서남인도쪽으로 포교가 먼저 되었다. 중인도에서 보면 훨씬 서방에 위치하고 있는 마투라(Mathurā)쪽을 점차로 포교가 진행되었다. 서북방불교의 유력한 거점이 된 마투라는 야무나강 오른쪽 언덕에 있으며 현재의 델리시 동남방 145km, 아그라(Agra)시 서북방 38km 지점에 위치하는 고도이다

 

마투라는 갠지스강 중하루 유역에서 서북인도로 통하는 교역로 상에 있으며, 북동쪽의 쉬라바스띠(Srāvasti)에서 남쪽의 웃자인으로 가는 길과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부처님 생존시에는 16대국의 하나인 슈라세나(Surasena)의 수도였으며, 상업, 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마투라는 힌두교의 끄리쉬나(Kṛṣņa) 신앙의 발상지로서 힌두교에서는 중요한 성지이다.

 

  

마하깟짜나가 마투라에서 포교했다고 설하는 경전은 있지만, 부처님이 이곳을 방문했다고 설하는 경전은 없다. 초기 불전은 서인도 전법을 전하는 한편으로, 마투라를 다섯 가지 가 있는 곳’, 즉 인구가 많고 부유하지만, 도가 행해지지 않고, 자만심이 강하며, 광포한 개와 소가 많고, 탁발하기 어려운 곳으로 기술하고 있다. 어쨌든 중인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까지 불교가 전해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아육왕경등에 의하면 아난의 제자인 샤나까바시(Sānakavāsī, 商那和修)는 왕사성의 출신이며, 서방의 마투라에서 開敎한 사람이다. 그의 제자인 우빠굽따(優婆掘多)는 마투라 출신이라고 한다. 즉 샤나까바시의 시대에는 마투라까지 교세가 확장되었던 것이다. 이상을 종합하여 보면 부처님 입멸 100년경에 불교 교단이 중인도의 테두리를 넘어 마투라까지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불법이 전래된 후 마투라는 불교가 매우 번창하여 오랫동안 設一切有部(Sarvāastivāda)의 근거지가 되었다.

 

불교의 발전은 중앙 본부에서 포교사를 파견하는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한 지역에 현전상가가 정착하면 비구들은 이를 근거로 하여 새로운 지방으로 진출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고대 인도불교의 발전은 어떤 지역에 어떠한 현전상가가 성립되고 정착되었는가를 중심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分別部(Vibhajjavāda)는 베디샤와 웃자인을 중심으로 하는 서남인도를 경유하여 데칸 서부, 스리랑카로 발전하여 갔던 큰 흐름이다

 

여기서 분별이란 말이 뜻하는 것은 사물을 관찰함에 있어서 분석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부처님은 인간 존재를 五蘊 諸法이 결합된 것이라 하여 분석적으로 보았다. 이런 家風은 웃자인을 중심으로 대가전연이 전승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특히 마투라에서 서북인도에 걸친 지역에서 크게 발전한 부파는 설일체유부 교단이다. 그들은 후에 산스끄리뜨어로 경전을 편찬하였다

 

이 부파는 철학사적 측면에서 후세의 대승불교 및 힌두교 여러 학파의 논쟁 대상이 되었다. 교단으로서 세력도 강대하여 서북인도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로 교세를 확장하여 불교의 국제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승불교가 중앙아시아, 중국으로 포교되면서 그들의 문헌은 주로 중국에 소개되었는데 이것을 北傳이라 하며, 반대로 남방상좌부의 전승을 南傳이라 한다

 

 

16) 平川彰, 印度佛敎史 , 李浩根 譯 (서울: 민족사, 1989), p.15.

 

17) 여기서 中國이란 인도의 중심 지방이라는 뜻이다.

 

 

 

 

 

 

 

 

 

 

[출처] 인도불교 교단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쇠퇴I_(4)|작성자 만남 창조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