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종교
1. 인더의 문명인의 종교생활
인도의 지형을 크게 구분하면, 기후적으로 문화적으로 인도를 아시아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대체로 격리시켜 온 히말라야 산계(山係), 인도 반도의 중앙부에 자리잡고 있는 데칸 고원 그리고 데칸 고원과 히말라야 남쪽 기슭 사이의 평탄하고 광대한 힌두스탄 평원으로 나눌 수 있다. 이 힌두스탄 평원을 인더스, 갠지스, 브라흐마푸트라 등 인도의 3대 강이 흐르고 있다. 이 중에서도 인도문명이 가장 먼저 일어날 곳은 인더스 강 유역이다.
이 지역은 농경생활에 필요한 평야지대라는 점도 있지만 주변의 다른 문명권과의 접촉이 유리한 지리적 조건도 갖추고 있었다. 즉 인더스 강 유역은 비옥한 토지가 넓게 전개되어 있었고 강우량과 기후가 농경에 알맞았으므로, 원시 농경민이 정착하기에 적당하였다. 또한 강의 하류지역은 바다를 통하여 페르시아만, 메소포타미아 지방, 홍해 그리고 이집트 지방과 교섭할 수 있었고, 강 상류의 펀잡 지방은 육로를 통하여 중앙아시아와 중동지방을 왕래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인더스 문명의 유물을 통해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인더스 ANSDUAD인들은 보리와 밀이 주요 식량이고, 깨, 콩, 대추, 야자열매 등을 먹고 살았다. 또한 출토된 동물의 뼈로 미루어 보아 소, 물소, 양, 코끼리, 낙타 등의 가축이 있었다. 소는 이륜차를 끄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이나 말을 사용한 흔적은 없다. 그리고 그들은 쇠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외에 생선도 식용하고 있었다.
금속제의 낚시바늘과 추로 보이는 물건이 많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사냥과 고기잡이도 성행했으며, 특히 그물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물레가 남아 있으며, 실의 종류는 양털과 무명실을 사용한 것이 밝혀졌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스스로 실을 직접 뽑아 옷을 마련한 것 같다.
발달된 도시문명과 아울러 유물 가운데 특색이 있는 것은 정교한 채색토기와 유약도기이다. 특히 유약도기는 다른 문명권에 앞서 독자적인 발전을 보인 것이다. 인더스 문명인들은 세계에서 최초로 면화를 생산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신드 지방에서 생산되는 명화를 그 지역의 이름을 따서 신돈(Sindon)이라고 불렀다.
로마 시대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공중 목욕탕의 시설, 인장 등에서 보이는 인더스 미술의 사실적인 표현, 독특한 장식을 한 채색 항아리, 천을 짜는 무명실, 저울 그리고 상형문자의 사용 등에서 인더스 문명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목걸이, 팔찌, 반지 등의 장신구가 여럿 발견되는 것을 보면 그들은 금, 은, 상아 등의 보석류를 즐겨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아주 세속적인 유회용 작품도 있다. 재미있고 익살스러운 색다른 상, 풍자적인 상, 몸을 뒤틀고 있는 요염한 무희의 청동상, 목을 흔드는 동물이라든가 노끈으로 끄는 조그만 손수레 등 매력적인 테라코타 장난감도 발견되었다.
현재 이 지방은 연 강수량 15cm가량의 척박한 곳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벽돌을 굽는 연료로 장작을 쓸 수 있을 만큼 주위에 숲이 울창 했던 것 같다. 또 관개설비의 유적으로 보면 당시 수량이 풍부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도장 등에 새긴 동물을 보아도 습한 땅에서 서식하는 호랑이, 물소, 코끼리 등이 자주 나오는 반면 건조한 땅에 사는 사자는 보이지 않는다. 기원전 4세기에 이곳에 들어왔던 알렉산더 대왕도 신드 지방은 매우 비옥한 땅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여튼 여러 가지 유물이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인더스 강 유역은 현재와 같이 극도로 메마르고 생활조건이 나쁜 황량한 땅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인더스 문명을 이룩한 주민의 대다수는 상인과 농부엿을 것이다. 갖가지 도안이나 상형문자를 새긴 인장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인장은 한 변이 약 2.5cm 정도의 정사각형으로, 그것은 아마 재산이나 재물의 소유권을 표시하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무역이나 상거래를 위해 도량법을 쓰고 있는데, 무게의 단위로는 16의 배수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계속 이어져 그 후에도 16 아나(anna)는 1루피(rupee)로 통용되었다. 모헨조다로에서만도 1000개 이상의 인장이 발굴 되었고, 인더스 문명의 인장이 메소포타미아나 그 동쪽 산악 지대인 엘람에서도 발견되는 것을 미루어 생각하면 상인들의 거래가 먼 나라에까지 미쳤던 것을 알 수 있다.
인더스 문명인들은 발달된 도시생활을 영위하였다. 무기나 도구에 구리와 청동을 사용하고 석기를 병용하고 있었으며, 녹로를 사용하여 훌륭한 도기 항아리를 만들었다. 또한 바퀴달린 수레를 발명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불에 굽거나 햇볕에 말린 벽돌을 사용하였고, 그림문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인더스 문화가 아리아인의 문화보다 오히려 진보했던 것으로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인더스 문화의 주인공들은 농업과 더불어 상업을 영위하면서 도시생활을 한데 반해, 아리아인들은 유목 생활을 하다가 점차 농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촌락생활을 하였다. 또 인더스 문명인들은 멀리 서남아시아까지 무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 곳에서 발견된 유물로 증명되고 있지만, 아리아인들은 특히 그 초기에 있어서 무역을 했다는 뚜렷한 증거를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도에 들어온 아리아인이 인더스 문명인들을 정치적으로는 지배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문화적으로는 아리아인이 선주민에게 동화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2. 브라만교
1) 베다의 신과 신화
인도에서 나타난 여러 종교의 근거는 대체로 베다 시대에 형성되었으며, 인도의 원시 종교도 대개 다른 민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연숭배의 한 형태로 출발하였다.
원주민들은 모계사회를 이루고 있었으며 농경에 종사하고 지모신이나 뱀, 하천 등을 숭배하고 있었다. 수목숭배와 남근숭배가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하여 아리아인들은 부계사회를 이루고 있던 유목민족으로서 자연현상을 의인화한 신들을 숭배하고 있었다.
초기 베다 시대에 신들은 하늘, 땅, 물, 불, 비, 바람, 해, 번개 등 자연이나 자연현상의 위력을 인격화한 자연신이었으나, 신화가 발달해 감에 따라 미래 신화나 세계 신화의 양상이 가미되어 다채롭게 변천해 갔다. 베다 시대 신화의 중요한 특징은 주로 남성적인 신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신이 오히려 남신보다 우위에 있었던 인더스 강 유역의 문명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리그베다’는 그 대부분이 신들에게 바치는 찬가로 되어 있다. 여기서 신봉되는 신들은 그 성격상 하늘(天)의 신ㆍ대기(空)의 신ㆍ지상(地)의 신으로 구별되는데, 그 수는 33을 헤아린다. 그 연원은 자연현상에 따른 것이 적지 않은 반면에 또한 극도로 의인화되어 있어, 이를 통해 옛날 인도인의 생활과 의식을 비추어 볼 수 있다.
사법신(司法神)인 바루나(Varuna)를 제외하면, 신들과 인간의 관계는 매우 명백하여 호혜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신과 인간과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다. 인간은 신의 위력이 감퇴되지 않도록 상찬(賞讚)과 공물(供物)을 바쳐 신이 힘을 유지하게 하도록 하여야 한다. 신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다. 그러므로 곤란과 위험에 직면할 때 인간은 전적으로 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공물의식을 집행하는 전문 사제계급이 이 신들에게 봉사하고 있었다. 이 공물의식은 아리아인의 초기 종교의식의 중심을 이룰 만큼 중요한 것이 되어 있었다. 신전은 없었으므로 의식은 노출된 제단에서 베풀어졌다. 그 곳에 사람들은 평소에 먹고 마시는 것들, 즉 조리한 곡물, 도살한 동물, 정제한 버터 그리고 소마라는 마취작용을 지닌 음료 등을 바쳤다. 이 공물들은 성스러운 불에 의해 신들에게 운반된다.
그 많은 신들 가운데서도 소마(Some), 아그니(Agni)의 두 신보다도 더욱 인간다우며 그 세력이 가장 강했던 것은 우뢰의 신ㆍ무용(武勇)의 신ㆍ전쟁의 신 인드라(Indra)이다. 베다찬가 약 1/4이 인드라에게 바쳐지고 있다. 그는 중간 하늘의 신들을 지배하며, 특히 건기를 끝내는 폭풍우(몬순)의 신이다. 그는 또한 전쟁의 신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거대한 몸집에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바람에 휘날리는 수염 그리고 거대한 목소리로 외치며 포효하는 형상으로 생각했다. 인드라는 신들의 술인 소마 세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대장장이 신인 트바슈트리(Tvastri)의 손으로 만든 금강저(金剛杵, vajra)를 휘둘러 악마인 다사(Dasa)의 성루를 파괴한다. 그의 용맹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은 산에 있는 성채로 물을 끌어들여 가뭄을 일으키는 뱀의 모습을 한 악마 브리트라(Vrtra)를 죽이고 물을 인간 세계로 끌어낸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인더스 문명과의 연관을 짐작하게 하는 동시에 아리아인 전사(戰士)의 이상형을 반영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인드라는 아리아인을 싸우게 한다는 점에서 실제로 초기 아리아인의 어떤 지도자를 신격해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쾌락을 사랑하며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는 인드라는, 미식가이며, 술을 좋아하고, 도박과 춤을 즐기는 인드라를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인도와 관련지어 생각되고 있는 탈속의 정신이나 염세관을 거의 갖지 않은 씩씩하고 외향적인 사람들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이 신은 후에 제석천(帝釋天)으로 불교의 수호신이 되어 동양으로 전해졌다.
한편 사법신인 바루나를 통해서는 당시의 윤리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을 결합시키고 있던 큰 힘은 신들의 규율이 아니라 리타(rta, 天則)라고 불리는 우주 전체의 질서를 유지함과 동시에 인간 행위를 규제하는 법이라고 믿었다. ‘리타’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의 동사 r, 즉 ‘간다’, ‘움직인다’라는 뜻을 지닌 말에서 나온 것으로, 사물들이 자연적으로 취하는 어떤 일정한 과정을 의미한다. 리타는 낮과 밤, 태양과 달 및 네 계절의 운행과 순환을 일정한 리듬으로 지배하며 신들에 대한 인간의 관계 및 타인들에 의한 인간의 관계도 정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세계에 있어서 파사현정을 담당하는 하늘의 법칙인 것이다.
이처럼 아리아인이 보기에는 인간은 자연의 법칙의 일부였다. 인간이 거짓말을 한다든가 노하거나 취해서 자기를 잊는 것은 우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었다. 이 리타 자체도 한 신과 결부되어 있다. 천상의 궁전에 있는 무섭고 고집센 바루나가 그 신이다. 그러나 우주의 질서를 정한 것이 바루나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 수호신에 지나지 않는다. 즉 바루나는 리타의 보지자이다. 그러나 그는 리타를 극히 엄중히 수호했기 때문에 아리아인이 진심으로 두려워한 유일한 신이 되었다.
인드라와 대조되는 신으로 무서운 산신(山神) 루드라(Rudra)가 있다. 이 신은 사람들은 자주 찾지는 않으면서도 대단히 무서워 하는 신으로서, 히말라야의 눈(雪)으로부터 무서운 폭풍을 몰고 내려오는 사나운 신이다. 이 신은 아리아인의 동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재산과 목숨을 빼앗아가는 존재였다. 그가 나타나는 곳에는 늘 공포와 외경이 따랐다. 사람들은 루드라의 공토의 위력 앞에 겸손하게 떨며 애원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면서도 루드라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신이 아니라 불멸의 상서로운 시바 신(吉祥의 神)이며 또 인간의 후손에게 자비를 베푸는 존재로 찬양되기도 한다. 한편 루드라는 때때로 병을 치료해 주는 친절한 신으로서 히말라야 산의 약초를 관리한다고도 한다. 역사적으로 루드라가 중시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위대한 시바 신(파괴의 신이며, 동시에 재생의 신)의 초기 형태이기 때문이다. 난폭하면서도 인간에게 상서로움을 가져다 주는 자혜로운 신 루드라는 약초를 관리하고 병을 고쳐 준다는 점에서도 쉬바의 속성인 재생의 능력과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주인공 중에 흥미를 끄는 것은 야마(Yama, 염라)이다. 그는 죽음이라는 것을 겪어 본 최초의 인간이며, 이제는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고 관리하는 신이 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사라져 버릴지라도 영혼은 살아남는다는 아리아인들의 관념을 대변하는 것이 바로 이 야마인 것이다. 그래서 ‘리그베다’에서는 야마와 죽은 영혼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조상(pitri)에 대한 아리아인들의 존경심을 표하고 있다. 조상 숭배는 그 때부터 인도 종교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빵과 우유, 또는 우유와 소마를 섞은 것, 또는 쌀로 만든 둥근 떡(pinda)을 차려 놓고 조상의 영혼을 부르는 것은 아리아인들이 정기적으로 치루는 관습이 되었다.
소마 그 자체도 아리아인의 신이었다. 의식에 모여 소마를 마신자는 환각상태에 빠진다. 이 성스러운 음료는 실제로는 정신을 고양시키는 작용을 했다. 공희에서는 소마신의 참여가 필수조건이었다. 인간과 신 모두가 소마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소마를 초빙하는 절차가 제례의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였다.
성스러운 불도 또한 신이었다. 불의 신인 아그니는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었다. 리그베다에 의하면 ‘버터를 등과 얼굴에 바르고 불꽃의 머리카락’을 가진 아그니는 하늘, 땅 그 중간의 대기 전역이라는 세 곳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땅에서는 성스러운 불이며, 신들이 불에 익힌 공물을 받아들이는 입이 된다. 하늘에서의 아그니는 태양이다. 그리고 대기 중에서는 번개이며, 천상의 신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신들이 의식에 초대될 때는 그들을 지상으로 데려오는 중재자이다. 그러므로 아그니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아그니가 왕림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길흉화복이 정해진다고 생각했다.
아그니가 내려와 제의의 불이나 집안 화로의 불에 자리잡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부를 때에는 극진하게 기원을 하며 그에 대한 찬양과 존경도 대단히 극진하다. 불이 정화의 기능을 하듯이 아그니도 죄를 씻어 준다. 그는 지혜이고 빛이며, 어두운 구석을 보게 해 주고 불가해한 일을 해결해 주는 존재이므로, 인간을 인도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고 하겠다. 또 아그니는 신부의 정신적인 남편이자 신랑의 형제로서 혼례식에 결혼을 성스럽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일반인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제들은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신으로서 성스러운 기도문의 신성한 힘을 가리키는 브리하스파티(Brhaspati)가 있다. 그는 기도문을 음송할 때 그 행위가 발휘하는 신성한 힘을 뜻하며, 신의 마음을 움직여 기도하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때로는 아그니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위해 신에게 탄원하는 사제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가 제대로 활약해 주기만 한다면 기도가 큰 힘을 발휘해서 신과 인간 모두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신앙 때문에 기도문, 즉 브라만을 올바로 외우는 일이 대단히 중시되었다. 그러므로 사제들의 기도에는 주력이 깃들어 있으며 신성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따라서 많은 종류의 사제 중에서 브라만이 점차 선두에 나서서 주재하는 사제가 되기에 이르렀으며, 결국에는 브라만이란 성스러운 청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즉 브라만(기도, 주문)을 읊는 사제가 되었다.
여기서 태양의 신 수르야(Surya)와 미트라(Mitra), 땅의 신 프리티비(Prthivi), 바람의 신 와유(Vayu), 폭풍의 신 마루트(Maruts) 등의 다채롭고 다양한 신들이 베다의 신계(新界)를 이루고 있다. 이 밖에도 새벽의 신 우샤스(Usas), 언어의 신 바크(Vac) 등 소수의 여신들이 그 사이에 끼어 있어 일종의 흥미를 더한다. 뿐만 아니라 신비한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동ㆍ식물이든 기이한 형상이든 모두 신격화하였고, 때에 따라서는 보통 추상명사로 불리는 것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베다 신들의 성격, 위력, 계급 순위도 세대교체를 겪으면서 차츰 인간 세태를 반영하며 변천해 갔다. 하지만 그 영향력만은 소멸하지 않고 아직도 인도인의 일상생활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후세의 힌두교를 고려할 때, 그 최고신의 하나인 시바와 비슈누가 ‘리그베다’에 있어서는 아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시바는 루드라의 모습으로, 비슈누는 태양이 빛을 발하는 모습을 신격화한 태양신 수르야의 모습으로 이미 리그베다에 나타나 있다.
중요한 신들 사이에는 상하의 구별이 없으며 최고신을 갖지 않는 ‘리그베다’의 종교적 성격은 당시 아리아인의 부족들이 제각기 독립되어 있던 사회적ㆍ정치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 그 자체가 베다의 시인들로 하여금 최고신 또는 최고 원리를 탐구하는 철학적 사색으로 이끌었던 하나의 큰 요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점차적으로 베다 신화가 형성되면서 다신교의 세계에 만족할 수 없었던 시인들은 다수의 신들이란 사실은 유일신이 다양한 모습을 취하여 나타난 것이며, 그 유일신의 다른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상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시인들 중에는 신들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하여 의문을 품은 사람도 있었다. 이들 회의론자들은 신들의 존재 자체도 초월한 보다 근원적인 유일 ㆍ 절대의 근본원리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새로운 사색은 단편적으로 나타날 따름이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후세 인도사상의 주류를 형성하는 일신교적 또는 일원론적 사상의 맹아를 발견할 수 있다.
2) 브라만 사상의 성립
아리아인들은 자연현상과 대자연의 구성요소를 의인화한 하늘의 신들에게 바램의 성취를 기원하였다. 신들이 불려들여지고 그들의 덕이 찬양되었다. 리그베다는 이와 같은 신들을 불러들여 찬양하기 위한 찬가를 집성한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종교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희생하는 의식은 베다 시대의 예식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희생물을 바치는 것은 아리아족에게 가장 신성한 종교의식이었다. 가족단위로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 부족이 대규모로 희생물을 바치기도 하였다. 모든 종교적인 의식이나 기원은 제사를 통해 행해진다. 사람들은 제단을 쌓고 여기에 불을 피우고는 공물을 바쳤다. 그리고 공중으로 오르는 연기를 타고 그 공물이 신이 있는 곳으로 가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성의가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살아 있는 동물이 바쳐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먹는 곡물과 육류 등의 일부를 의인화된 신에게 성의를 다하여 바쳐야만 했다. 그 성의가 전달됨으로써 신들은 인간의 요청을 들을 수 있다. 그리하여 공희(供犧, yajna)라는 제식이 발전하였다.
리그베다에 이어 사마베다, 야주르베다가 대략 기원전 10~8세기경 사이에 그리고 곧 아타르바베다가 성립되었다. 베다는 이들 신을 제례의식을 통해 제단에 불러내기 위해서 소리 높이 노래한 주문이기도 하며, 브라만은 그 제관이자 주술사였다. 따라서 신들의 지위가 어느새 주술사의 권위로 자연스럽게 바뀌어 갔다. 원래 제사는 신의 은총에 감사하거나 신의 후의를 기원하는 행위였다. 그런데 제례의식이 점점 전문화되고 복잡해지면서 제례의식 그 자체에 더욱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제례의식을 통하지 않고는 신의 위력도 무기력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 가운데 신들 앞에 엎드려 숭배하며 기도하는 제식은 일찍부터 그 성격이 점차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하나의 발단은 아마도 아타르바베다 및 이를 관장하는 브라만 제관에 의한 것이었다. 아타르바베다는 나머지의 세 베다와 함께 4베다로 불려왔다. 그러나 그 내용이나 성격은 다른 세 베다와 크게 다르다. 이는 본질적으로 주술에 관한 법칙(呪法)을 설명한 것이다.
브라만은 음성ㆍ언어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주력으로서 이는 구체적으로 베다의 찬가에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발전하여 찬가 가운데 표현되어 있는 지식도 브라만으로 간주 되었다. 그러므로 브라만 제관, 즉 ‘브라흐마나’제관은 본래 베다에 관한 지식과 관련된 주술의 힘(브라만)을 구사하는 사람의 의미로 사용 되었던 것이다.
당신의 주술에 관한 찬가, 문구를 집성한 것으로서 이를 관장하던 브라만 제관은 처음에는 베다 제식의 계층 질서 가운데에서 결코 높은 지위를 갖고 있던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확실히 브라만 제관은 다른 세 베다를 관장하는 제관보다는 한 단계 낮은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는 흔적이 있다. 주법은 제식보다 차원이 낮은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타르바베다를 중심으로 주력 ‘브라만’을 구사하고 제식을 주술화함으로써 제식 전반을 통솔하는 사람으로서의 지위를 구축하게 되었다.
아타르바베다에는 브라만을 아는 사람은 신을 직접 볼 수 있다거나, 브라만은 세계를 지탱하는 지주라는 내용이 표현이 나타난다. 주술의 중심인 브라만은 우주만물을 창출하는 근원적 힘이 되었다. 만물을 창출하고 이를 지배하며, 만물에 두루 존재하는 근본 원리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브라만을 최고 원리로 생각함은 브라마나(Brahmana) 문헌에서도 더욱 계승, 발전하였다. 이 문헌은 기원전 1000~500년경에 고대 인도에서 성립된 제식문헌집으로 여기에는 베다의 제식을 실제로 시행함에 따른 설명 및 그 철학적 의의, 해석을 담고 있다. 이는 넓은 의미로는 베다 문헌의 한 부분을 형성한다. 앞에서 본대로 베다 문헌의 가장 오래된 부분을 ‘베다본집(Samhita)'이라 하는데, 이것은 찬가 ㆍ 제사 ㆍ 주문(이를 총칭하여 ’만트라‘라고 함)으로 이루어져 모두 제식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를 뒤이어 나온 ’브라마나‘는 제례의식을 설명하고 그 의의를 탐구하는 문헌이다.
.....................................................베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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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트라................................................브라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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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그베다... 야주르... 사마베다... 아타르...... 브라마나... 아란야카... 우파니샤드
..................베다 ......................바베다 ......(행위편) .....(명상편) .....(지식편)
‘브라마나’의 내용은 제식의 규칙을 설명하는 부분(儀?, Vidhi)과 그의 의의와 유래를 설명하는 부분(儀?, Arthavada)으로 나뉘어진다. 후자 속에는 간혹 흥미 있는 전설 ㆍ 신화 ㆍ 철학사상이 포함되어 있으나 그것들도 본래는 모두가 제식과의 관련 속에서 설해졌던 것이다.
제식의 종류는 대단히 많아서 그의 조직과 규칙은 매우 복잡하다. 처음에 제사란 신들에게 ‘기도하고 공물을 바침으로서 신들의 은총을 받고자 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브라마나 시대에 있어서는 제식이 신들을 강제하는 독자적인 힘을 갖는 하나의 메카니즘으로 변모하였고, 이것을 관장하는 제관은 극히 오만해져서 스스로 일종의 신이라고까지 자칭하게 되었다.
신은 인간의 이상적인 형에 지나지 않으며, 신들도 일찍이 제사를 행하여 이것으로써 승천하여 현재의 힘을 얻었다고 한다. 브라마나에서의 제식이란 그러한 신들의 소행을 모방하는 것이기도 했다. 제식의 주목적은 제례의 주인인 왕족과 귀족들이 제사를 통해 죽은 후 천계에 올라가 신들에게 영생불사를 성취하는 데 있었다. 물론 현세적인 여러 가지 소원을 성취하는 것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의 연장이라는 욕망의 달성으로써, 곧 내세에서 다시는 죽지 않는 것이었다.
제사는 상징적으로 우주이며, 곧 제주 자신이다. 내세에서는 결코 죽지 않는 당체(當體)로서의 제주인 자아(atman)가 개개의 신성한 제사 의식을 통하여 신성하고 멸하지 않는 존재로 완성된다는 생각은, 우주의 제식과 개체가 상응한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또 ‘브라마나’에서의 최고의 신은 프라자파티(生主)인데, 프라자파티는 일체의 우주이고 동시에 제사이다. 제식을 통해 제주는 프라자파티가 된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이 극도로 발전하여 마침내 범아일여라는 우파니샤드의 사상에 이르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우주의 근본 원리로서의 브라만(Brahman)의 관념이 점차 명확하게 되었다. 브라마나 문헌의 최근의 신화에서는 이제까지 프라자 파티가 점유하고 있던 창조주의 위치가 브라만으로 대체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이 브라만을 우파니샤드에 있어 브라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아트만과 동치시키고 있어, 우파니샤드로의 과도기적 단계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브라마나 문헌이 많이 작성된 시대에 이르면, 브라만 제관은 자신들의 주술의 힘을 이용하여 그리고 노력의 결과로서 다른 세 종류의 제관을 능가하게 되었으며 제식 전반을 통솔하는 지위에 올랐다. 제식을 비롯한 종교의식 일반을 관장하는 계층의 사람들은 점차로 브라만이라는 명칭으로 흡수되어 브라만이라는 계층이 성립되었다.
특히 고대사회에 있어서는 일상적인 사회생활 속에서 제식의례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농경, 전쟁에서의 승리, 출산, 기타의 일상 생활 속에서 화복을 결정하는 것은 종교적 의례의 실행 내지는 그 효과에 달려 있다고 그들은 믿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브라만들은 야즈나(yajna)라고 해서 흙으로 단을 쌓고 불을 피우고, 제물(때로는 산 동물의 희생도 포함함)을 바치는 의식을 발전시켰다. 그 배후에는 주술적인 관념이 자리잡고 있어서 성스러운 말이나 아구의 신비한 힘(브라만)에 의존하면 결국에는 우주나 신들까지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의식의 절차와 규범은 더욱 복잡하고 세밀하게 정비되어 일반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엄한 훈련에 의해 주술의 힘 ‘브라만’을 갖추었다. 그들은 지상에 존재하는 브라만 그 자체이며 지상에 거주하는 신들이라고 자칭하면서, 의식적으로 제식의 의궤를 보다 치밀하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사회에서 제식은 사회생활 전반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브라만들은 제식을 독점하고, 일반인의 보시와 존경을 받았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유도하였다. 그들의 사회적 ㆍ 종교적 지위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브라만들은 이 제식을 독점하고 종교적 권위와 함께 사회적 세력의 확대에도 힘을 썼던 것이다. 여기에 다분히 주술적 세계를 바탕으로 하여 성립된 제식만능 주의와 브라만 지상주의의 문화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것이 브라마니즘이다.
베다에서 비롯된 제식은 미세한 부분에까지 세칙을 두어 제식의 만능을 기하여 그 사회에서 제관의 지위는 매우 높았으며, 제식을 주관하는 브라만들은 세습적인 제관으로서 특수한 사회계층을 형성하였다. 브라만 계급은 브라만교의 경전인 베다 연구와 지식 개발에 힘써 논리학, 심령학, 점성술, 신학, 철학, 수학, 언어학 등의 학문발전과 예술발달에 크게 기여한 바도 있지만 바르나 제도(四姓制度) 발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브라마나(Brahmana) 사상의 특징은 행위의 인과율에 대한 믿음이다. 브라마나에서 행위라 함은 주로 제사의 행위로서, 올바른 방법으로 행한 행위는 자연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신의 뜻에 관계 없이 자동적으로 그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리그베다에서 자연의 법칙을 의미하던 ‘리타’의 개념은 브라마나에 와서는 무엇보다도 올바른 제사의식과 그 제사행위로 하여금 그에 합당한 결과를 필연적으로 초래하도록 하는 행위의 법칙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인도에서의 업에 대한 법칙의 믿음은 이러한 브라마나의 제사주의적인 사고에서 발전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는 국민의 지식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자연숭배의 종교는 차차 그 권위가 손상되고, 형식에 얽매인 브라만교도 민중과 사이가 멀어지면서, 새로운 철학사상과 종교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기원전 8~7세기에는 인격화된 자연현상으로서의 제신들의 특성을 초월하여 그들의 근저에 있는 통일적인 실재를 탐구하려는 노력이 우파니샤드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끝부분을 이룬다고 하여 베단타(Vedanta, 베다의 끝 또는 목적)라고도 하며 인도의 철학사상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심오한 철학적인 사유의 산물인 우파니샤드는 우주의 근원인 전일자를 자각하고 그것과 자기 안에 있는 인간의 본체인 전일자와의 합일을 믿으며, 제사의 허례를 떠나서 그 근본의 실재를 인식하고 체험할 것을 강조했다. 이 범아일여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인간의 궁극적인 원리이며, 절대자이며, 실재인 브라만의 개념과, 법과 윤회전생과 해탈과 카르마의 사상이 무르익어 다신교의 신화에서 출발한 베다가 정통적인 철학사상의 정점에 달했다.
우파니샤드는 인류가 도달한 가장 심오한 철학사상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철학서이다. 뿐만 아니라 브라만교의 형식적 ㆍ 예식적 ㆍ 폐쇄적 교의에 대한 반성은 인도의 사상계에 큰 자극제가 되어 브라만 계급의 지배에 반대하는 새로운 종교운동인 자이나교나 불교가 일어날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3. 힌두교
1) 힌두교의 성립
후기 베다 시대에 이르러 왕권의 강화와 결부되어 군주제 국가가 신장되어감에 따라 국가의 장벽을 넘는 통상 ㆍ 경제행위가 발전하였다. 화폐경제가 일반화되고, 도시에는 상공업자의 길드도 생겼다. 조합장과 대상인의 자본가와 왕족은 도시를 중심으로 사회의 상층계급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브라만들의 어떤 주장에도 속박되지 않았다. 재래의 농촌과는 다른 새로운 기운과 새로운 가치관의 새 문화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브라만의 종교적 권위는 과거의 빛을 잃게 되었다.
당시 브라만이 독점했던 제식(yajna)은 현세의 이익을 기원하는 의례였다. 현세 이익은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서민의 종교적 요망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그 제식에 부수된 동물의 희생이 혐오되었으며, 그 효과도 의심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푸자(puja)라는 새로운 예배형식도 토착문화에서 출발하여 번성하게 된다. 옛날의 신들은 사라지고, 시바 또는 비슈누와 같은 신들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동시에 인간의 지식의 발달은 종교적으로 보다 고차원적인 ‘해탈’의 경지를 추구하게 되었다. 해탈에 관한 수행법과 사상이 정비되고, 그 가치는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윤회와 업의 사상도 이 시대에 일반화되었는데, 당시의 문헌은 왕족이 이러한 새로운 설을 브라만에게 가르쳤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경제, 사회, 종교 등의 여러면에서 브라만 지상주의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초기의 불교 경전이 사성(四姓)을 기록함에 있어 크샤트리아를 브라만보다 앞서 열거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사회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 된다.
이러한 변모를 겪으면서 초기의 힌두 문화는 급격히 동남쪽으로 확대되어 갔다. 어쩌면 이러한 지역적 발전은 필연적으로 변모를 수반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동인도에서 현저하였다. 동인도는 브라만의 입장에서 보면 변방지역이며, 그러한 점에서 전통적인 브라만 문화의 속박을 덜 받는 지방이었다. 힌두세계에 동화되어 가면서도 독자적인 생활양식과 관행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비브라만적 혹은 반브라만적 분위기도 강하였다. 여기에서 새로운 사상운동이 꽃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상 운동을 담당한 사람들은 슈라마나(sramana, 사문)라는 출가유행자 집단이었다. 그들은 반브라만적 색채를 띠면서 다양한 학설을 제시하였다.
불타도 이러한 슈라마나의 한 사람이었다. 불교는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종교, 문화 등 인간생활의 여러 면에서 재래의 전통이 의심되었던 격동의 시대에 태어난 신흥종교의 하나로서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베다 시대에는 개인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사주기(四週期: 梵行期, 家住期, 林住期, 遊行期)로 제시해 주는 아슈라마(asrarna)제도가 잘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으나, 베다 후기 문헌인 법전류(Dhar-ma Sastra)에는 현세의 삶 속에서 지켜야 할 올바른 의무적 행위를 다음과 같이 체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삶의 제 1기는 범행자(梵行者, brahmacarin)의 생활로써, 아동기를 벗어나는 성인 입문식(upanayana)을 마치고 출가하여 스승(guru)의 지도하에 베다 등의 학문을 배우며 금욕적인 생활을 한다. 제2기는 재가자(在家者, grhastha)의 생활로써 결혼하여 후손을 낳고, 신과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등의 본능적인 욕망과 부를 추구하는 생활을 한다. 제 3기는 임서자(林棲者, vanaprastha)의 생활로써 재가자의 삶을 마치고 숲 속으로 들어가 은거하면서 명상과 금욕생활을 한다. 제4기는 유행자(遊行者, samnyasin)의 생활로써 일체의 사회적 유대관계를 끊고 현세의 삶을 포기한 채 오로지 해탈의 세계만을 추구한다. 이러한 4주기 중에서 후기 베다 시대에는 3주기까지의 언급이 보인다. 초세간적인 해탈을 추구하는 출가자의 이상을 말하는 유행의 시기는 베다 후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리그베다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인드라와 아그니 신은 후기 베다 시대에 와서는 이전의 확고한 위치를 상실하고, 대신에 프라자파티(Prajapati : 생명의 주란 뜻)가 후기 베다 신전에 최고신으로 등장하여 세계 창조의 신으로 숭배되게 되었다.
리그베다 시대의 여러 잡다한 신들도 다시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 예를 들면 루드라는 후기 베다 시대에 와서 중요한 신의 역할을 하며, 비슈누는 베다 시대의 목축업에서 농경민으로 정착한 그들의 삶을 보호하고 유지하게 하는 신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후기 베다 시대의 브라마니즘을 순수한 아리안의 종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무렵에는 아리안인과 원주민과의 혼혈이 많아져서 상호간에 문화적 영향을 서로 미치고 있었다. 브라만 중에도 원주민 출신이 있는가 하면 아리아계에도 하위 계층에 편입된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리안 계통의 문화적 요소가 주체가 되면서도 상당히 많은 원주민 문화가 흡수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혈통의 순수함을 지키려는 아리안들의 현실적 욕구가 바르나 제도라는 이론적 구조를 짜임새 있게 만들어 놓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브라만 문화는 불타가 나오기 이전에 북인도의 갠지스 강 중류 유역에 성립되었다. 이것은 아리안의 문화가 이미 인도에 정착을 완료한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아리안 계통의 문화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 밖의 잡다한 토착문화도 충분히 흡수 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질적 문화의 융합ㆍ복합화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 점점 그 깊이와 폭을 더해 간다. 그들은 여러 원주민 부족들과 인종적ㆍ문화적으로 융합되면서 점차 동쪽으로 나아가 갠지스 강 중류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이곳은 갠지스와 야무나라는 두 강의 흐름의 중간 지점이라해서 도아브(지금의 펀잡) 지방이라고 부른다. 초기 힌두교라고 할 수 있는 브라만을 중심으로 하는 특이한 종교문화가 형성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후기 베다 시대를 지나게 되면 신에 대한 관념이나 의식, 예배 형식, 종교, 관습 등의 변화가 심하게 표출된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인도 고유의 토속신앙들을 흡수해가면서 브라마니즘 스스로 그 모습이 변해간 형태를 힌두교라고 할 수 있겠다.
힌두이즘이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최근에는 브라마니즘을 힌두이즘의 고전기 내지는 초기 힌두교 시대로 간주해야 한다는 학설이 강력히 등장하고 있다. ‘문화’란 한 사회가 만들어 내고 전승시켜가는 ‘생활양식’을 가리킨다면, 이 설은 특히 ‘문화사’적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설득력이 있다.
이 같은 문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아리안 이전의 선주민들에게도 당연히 그 생활문화가 존재했었을 것이다. 사실상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힌두교의 전승에 미친 선주민들의 문화적 영향은 지극히 큰 것이다. 시바와 비슈누 신을 비롯한 많은 토착신의 대두가 그 좋은 예이다. 아리아 문화 이전부터 연유하여 뒤에 힌두교의 중요한 요소가 된 것으로 선정, 요가, 하천숭배, 정화의례로써의 목욕, 수목과 뱀신숭배, 동물숭배, 링가숭배, 푸자라는 예배형식, 채식주의, 비폭력 사상 등 무수히 많다. 따라서 아리안 이전에 인도대륙에 존재했던 생활문화를 우선 힌두교의 원초적 형태로 간주한 다음 거기에 아리아인, 그리스인 북아시아나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의 문화가 흘러 들어와서 서로 섞이고 상호 변용작용을 일으키는 동안에 복합화된 총체적 생활 양식을 힌두교라고 말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반면에 베다나 브라만의 권위, 바르나 제도 등 아리아인들의 문화에서 유래하는 갖가지 제도와 관념이 힌두교에 미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문화적인 역학관계로 볼 때, 힌두교의 근간은 역시 아리아인의 베다를 중심으로 한 문화에서 기원한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그 테두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요소들은 거의 모두가 아리아인의 문화에서 유래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종래 브라만교라고 부르던 것을 초기 힌두교의 문화적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쉬바 신의 변용과정에서 본대로 힌두교를 결코 고정적이고 정지적인 상태로 파악해서는 않된다. 즉 브라마니즘은 커다란 물의 흐름과도 같이 갖가지 민족, 종족, 생활 문화를 흡수하면서 발전해 나간 것이다.
특히 힌두교의 성립과 더불어 이를 더욱 공고히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 마누법전을 위시한 법전류이다. 원래 ‘법전’이라고 하는 말은 ‘옴금-sastra'인데, 이것은 이와 관계된 dharma-sutra(法經)라는 강요서를 근거로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마누법전‘도 마누법경(Manava-dharma-sutra)을 기초로 하여 수정ㆍ보충된 법전으로 보이는데, ’마누법경‘은 현존하지 않는다.
Manu-smrti(마누법전)에서 ‘smrti'란 기억을 뜻하는데, 태고의 현자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던 성스러운 전승을 제작한 책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슈류티(sruti), 즉 신의 계시에 의한 ’베다‘의 본집이나 ’브라마나‘에 근거한 법위 권위로서 인정되어 법전(法典)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마누는 옛날 ’리그 베다‘이래 사람ㆍ인류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고, 베다 문학의 발전과 함께 신성시되어 인류 시조 또는 온갖 법규의 최고 권위로 간주되기로 하였다. 그러므로 이 이름을 앞에 붙인 법전은 인도의 모든 법전 중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부여받고 있었다.
현존하는 마누법전은 전편이 12장, 2685게(偈)로 이루어져 있는데 운문으로 씌어져 있다. 총 12장 가운데 제2장~제6장 및 제 11장은 이에 상응하는 ‘마누법전’을 충실하게 재현한 것이고, 제 7장~제10장은 현저히 변경된 부분이며, 제 1장과 제12장은 새로 증보된 부분이라고 한다.
제1장은 우주의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아리아족의 사회제도인 종성(caste)의 조직과 기능에 대하여 언급하며, 나아가 법전의 의의 및 내용을 약술한다. 제2장 ~제6장은 아리아족이 일생을 통해 시행해야 할 여러 가지 의식을 열거한다. 일생을 범행자(梵行者, brahmacarin)ㆍ재가자(在家者, grhastha)ㆍ임서자(林捿者, vanaprastha)ㆍ유행자(遊行者, samnyasin)라는 4개의 생활기(asrama)로 분류하고, 각각의 시기에 관한 의무를 설명한다. 제7장에서는 왕법(王法), 즉 제왕학(帝王學)ㆍ 행정 ㆍ 군사 ㆍ 외교 등을 서술하고, 제8장과 제9장에서는 사법에 관한 규정을 18항목으로 분류하고 있다. 제10장에서는 카스트 제도의 명칭ㆍ기원ㆍ기능 등을 설명하고, 잡종 카스트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제11장은 속죄법을, 제12장은 윤회ㆍ전생 및 해탈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한다.
이상에서 법률적으로 보이는 것은 전체의 1/4정도이다. 따라서 법전이라고는 하여도 단순한 법규의 집성이 아니라, 전편을 통하여 종교적 ㆍ 윤리적 정신이 일관하고 있는 하나의 대교훈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오랫동안 인도 민중의 생활에 있어 표준적인 근거가 되어 왔으므로 인도의 사회생활을 아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마누법전’은 인도에서뿐 아니라 버마ㆍ타이ㆍ자바ㆍ발리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2) 힌두교의 다양성
우리는 인도인들의 신앙을 총괄해서 힌두이즘(힌두교)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 안에 무수히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힌두이즘을 한 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다. 힌두이즘은 실제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른 종교들처럼 하나의 단일한 종교가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성격의 종교가 뒤섞여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힌두이즘에 어떤 고정된 교리체계가 있다거나 개인 신앙의 정통성을 가늠해 주는 척도가 무엇인가 하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힌두이즘 속에는 온갖 모순과 상치되는 신조와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힌두교에는 특정한 교의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떠한 사상, 신조, 이념을 주장해도 상관 없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고려될 수 있는 종교적ㆍ철학적 사고의 모든 유형이 제시되어 있다. 유심론도 있으며, 유물론도 있다. 일원론, 이원론 다원론이 혼재하며, 무신론도 있는 반면 다양한 형태의 신관념도 존재한다. 엄격히 자신을 절제하고 고행하여 해탈을 얻는 방법도 있지만, 동시에 쾌락을 수용하는 수행법도 있다. 결국 힌두교에는 ‘이것이 힌두교이다’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특별한 교리가 없는 것이며, 모든 사상과 교리를 아무런 모순 없이 받아들인다.
힌두이즘은 역사상 어느 곳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는 인간의 행동과 어떤 종교적인 신화 혹은 신비스러운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모든 종교는 종교라는 자체의 명목하에 신앙과 실천의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힌두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신비스러운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변화로 더욱 힌두이즘을 굳게 결합시키는 이유는 그들이 순수한 인도인들이라는 것과 그들이 행하는 의식과 예식이다.
힌두교도들이 생각해야 할 정신적인 신앙은 거의 없지만 전통적으로 그들이 지켜야 할 일들이 많다. 그들은 어떤 독특한 교리나 정설, 오래된 사상보다는 생활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있는 훨씬 더 많은 전통적인 인습을 따르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힌두이즘은 마술과 미신적인 애니미즘을 위시하여, 고매한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체계에 이르기까지 각양 각색의 종교적 경향을 한테 묶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잡다한 종교적인 입장도 베다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 사회계층을 종교적으로 신성화하는 것을 용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힌두이즘이라는 말은 어떤 것이라고 규정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며, 스스로 힌두교도라고 자처하는 인도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항상 변화하는 신앙전체를 총칭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힌두교는 사상이 서로 다른 종파와 학파에서부터, 많은 신도를 거느리거나 소수의 신도를 거느리는 종파, 아득한 옛날부터 비롯되어 온 종파 혹은 최근의 현인이나 성자들에 의하여 새로이 성립된 종파 등 다종 다양한 갖가지 종단을 형성하고 있다. 그 중 어떤 종단은 교의나 교설도 없고, 어떤 특정한 사고를 요구하지도 않는 경우도 있다. 여러신을 동시에 숭배하는 종파도 있으며, 어느 신도 믿지 않는 종파도 있다. 그리고 같은 종파 내에서도 각기 서로 다른 신을 믿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힌두교에서 공통적으로 숭배받는 신은 비슈누와 시바이다. 인도의 전역에서는 이들 두 신 이외에도 수많은 남신과 여신들에 대한 숭배가 행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힌두교도에게는 하나의 신을 신봉하는 것이 반드시 다른 신을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유일신으로 비슈누를 숭배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시바는 배타적인 신이 아니라 비슈누 신 다음으로 중요한 신이란 의미이며, 또 이것은 쉬바를 숭배하는 신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힌두교의 신이 모두 시바나 비슈누처럼 ‘위대한 신’인 것은 아니다. 이들보다 힘도 약하고 기능도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보다 친근한 갖가지 신이 있다. 인도에는 무수한 신들이 있어 신앙하는 신들도 극히 다양하다. 힌두교에는 시바 신, 비슈누 신과 같이 전 인도에 그 사원이 있으며, 특정한 촌락에서만 공양되는 촌락의 신도 있다. 남신도 있으며, 사라스와티(辯才天), 락슈미(吉?天)같은 아름다운 여신도 있다. 동시에 칼리 여신과 같이 흑색으로써 인간의 해골을 목걸이로 하고 붉은 피로 물든 혀를 내밀고 있는 추악한 공포의 여신도 있다. 방위의 신들로부터 다양한 귀령(鬼靈)에 이르기까지 힌두교의 신전은 지극히 복잡하다. 이에 따라 무수한 신화적 전승이 있음도 당연하다.
도시에도 농촌에도 크고 작은 신전이 있으며 갖가지 이름과 기능을 지닌 신이 살고 있다. 마을의 수호신, 토지신, 거리의 신, 나무의 신, 산 신, 숲의 신도 있다. 힌두교의 대부분은 성스러운 나무나 동물, 숲이나 산에도 그들의 신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겪게 되는 불가피한 삶의 문제는 이러한 신들에게 공양을 바치고 기원을 하는 것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힌두교도는 이 많은 신들 가운데 어느 신을 신봉하여도 무방하다. 특히 어느 신을 수호신으로 신봉하는 사람도 있으나, 자신의 집단과 촌락에서 거행되는 다른 신들에 대한 제의ㆍ의식에 참여하여도 상관 없으며, 오히려 이러한 일들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힌두교가 다신교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다양한 신들의 배후에는 유일ㆍ절대자의 존재가 상정되어 있다. 이는 모습ㆍ성격 등을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도 없으며, 어떠한 표현도 초월한다. 모든 신들은 이 절대자의 한 없는 기능(활동)의 다른 국면을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른바 역할 분담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주창조는 브라만이, 그 유지는 비슈누 신, 파괴는 시바 신이 담당한다.
그러므로 모든 신을 신봉해도 결국은 동일한 절대자에 귀의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는 다른 신을 신봉하는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생길 이유가 없다. 이러한 신관념은 ‘진실은 하나’라는 생각과 함께 힌두교의 종교적 포용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힌두교와 같은 엄격한 출생종교에서는 힌두교도인 부모에게서 출생했다는 사실에 의 의해서만 인간은 그 종교에 소속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힌두교는 배타성이 강하다. 힌두교는 결코 인류를 포용하려는 의지는 갖고 있지 않다. 힌두교는 한번 추방된 자를 영원히 공동체와의 모든 관계로부터 배쳑해 버리는 종교모독죄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배타적이다. 우리는 힌두교도에게서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최소한 원칙적으로는 힌두교의 신성한 여러 가치에 접근하는 것이 거부된 사람으로 남게 될 것이다.
힌두교의 세계에는 놀라울 정도의 다양한 현상이 혼재한다. 인종과 언어의 계통을 달리하는 사람들 사이의 문화의 차이는 매우 크다. 예를 들면 동일한 문화권에서도 한편으로는 불살생을 귀중히 여겨 육식을 하지 않는 브라만들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가 거주하는 촌락의 촌신제에서는 닭이나 양의 희생을 바치는 일이 보통으로 이루어진다. 어느 편이 올바른 힌두교도인가의 의문이 제기되면 전에 양쪽 모두 올바른 힌두교도로 인정된다.
그렇다고 모두가 다 힌두교도인 것은 아니다. 하나의 기준이 있어, 이에 따라 결과적으로 힌두교도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즉 다양한 가운데 통일이 있다. 그 메카니즘은 주로 카스트 제도와 업ㆍ윤회사상과 다르마로 불리는 사유방법이다.
3) 다양성을 통합하는 사상
힌두교는 복잡하고 다양하다. 힌두교도들은 신념과 실천에 있어서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대단히 넓다. 범신론자도 있고 다신론자도 있으며, 유일신론자, 불가지론자, 심지어 무신론자일 수도 있는가 하면, 이원론자도 있고 다원론자, 일원론자도 있다. 도덕생활의 면에서도,엄격한 행위규범을 지키려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또는 도덕을 초월하여 신비주의를 택하는 이들도 있다. 활동에 치중한 종교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고, 주로 명상에만 몰두하는 이들도 있다. 가정의 종교제의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경우도 있고, 그것을 전혀 안하는 경우도 있다. 정기적으로 사원에 가서 예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또 전혀 가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온갖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단 하나의 의무는 각자의 카스트에 부과되는 규칙과 제의를 충실하게 준수하려 한다는 점과, 또 그렇게 해야 내생이 더욱 행복해지리라고 믿는 점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힌두교에서의 진리를 추구하는 방법에는 각양 각색의 여러 가지 길이 있으나 해탈을 얻는다는 궁극적인 목표는 거의 동일하다.
해탈을 인생의 목적으로 하는 힌두교도들의 공통적인 관념은 특정의 어느 분파를 제외하면 윤회사상과 관련을 맺게 된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자기의 본질로서의 혼이 실재하며, 이것이 윤회의 주체가 된다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선한 행위를 하여 공덕을 쌓아 사우에 하늘에 태어난다는 생각도 모든 힌두교도에게 공통된 것이다. 촌락과 가정의 제사에 참가하고, 사회인으로서의 여러 가지 다르마(의무)를 부과하는 것도 힌두교도로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dharma'는 보통 ’법(法)‘으로 번역되며 ’달마(澾磨)‘로도 음역된다. 이것은 힌두교도뿐만 아니라 불교를 포함한 인도 종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용어이다. 다르마는 보존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서,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이 원래의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이 만약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인간 존재를 보호ㆍ유지하며, 인간을 참으로 인간이도록 하는 것, 나아가서는 ’종교적 진실‘, ’인간의 진실‘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그러나 그러한 진실을 발견한 종교인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설할 때에 다르마는 ’가르침‘, ’교법‘이 되며, 이것이 체계화되면 ’교리‘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에 따른 생활 방법이 사회적으로 정착되면 ’윤리‘, ’도덕‘의 의미가 된다. 또한 ’종교‘라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한편 이러한 생활방법이 약간의 강제력을 갖는 사회관행으로 고정되면 ’전통적 생활방법‘의 의미가 되며, 이 강제력이 더욱 강화되면 ’법률‘, ’의무‘의 의미도 갖게 된다.
현대의 힌두교도는 이 다르마를 ‘생활방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르마에는 카스트의 전승과 규칙을 지키는 것, 단식, 제례, 통과의례, 순례, 목욕 등 그리고 공덕을 쌓아 사후의 생천(生天)을 원하는 관념이 다르마의 의미에 포함되어 있다. 결국 다르마는 ‘생활방법’이란 의미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여기에는 이를 지키는 것으로 개인의 행복이 보장되고, 동시에 집안, 카스트, 촌락의 평화와 질서가 보존된다는 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사유방법은 고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다르마가 사성(四姓)과 사주기(四週期)의 법과 관련을 맺고 있다. 이 사성과 사주기의 다르마는 인간이 지켜야할 의무ㆍ책임이 삶의 각 단계에 따라 다름을 보여준다. 힌두교의 사회관은 이러한 의미에서는 차별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힌두교의 다르마, 생활방법은 카스트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카스트에 관한 의무인 다르마를 지키면 힌두교도가 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면 어떠한 사상ㆍ신조를 가져도 상관 없다. 힌두교의 사상으로서 다양한 사상이 거론되는 것도 이러한 카스트 제도와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인종ㆍ언어의 계통을 달리하는 다양한 사람도 어떠한 카스트에 속하고 그 카스트의 성원으로서의 다르마를 지킴으로써 힌두교도가 된다. 카스트나 지방에 따라 관행이 다르고 다르마의 내용이 다른 경우는 있어도, 이는 모두 힌두ㆍ다르마 안에서의 차이이다. 실질적으로도 힌두교의 생활관행, 의무는 다르마 안에 편입되어 힌두적인 것이 되며, 힌두로서의 일체관을 조장하는 원인이 된다.
힌두교는 심오한 철학과 신비주의, 극심한 고행과 에로티시즘 등이 특징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대다수의 힌두교도들이 철학자, 신비주의자, 금욕주의자, 관능주의자인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힌두교도에게 스며있는 공통적인 철학적 이데아는 업과 윤회(재생)에 대한 믿음이다.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인간과 모든 생명체의 영혼이 죽으면 육체의 형태를 빌어 다시 태어난다고 믿고 있는데, 이것은 영혼이 윤회한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이 윤회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 업사상이다. 개개인의 행위는 다음에 재생할 때 지닐 육체의 형태를 결정한다. 선을 행한 사람들은 높고 고결한 삶을 지니고 다시 태어나며, 악한 행위를 쌓은 사람은 낮은 신분의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윤회설에 의하면 동물, 곤충, 식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그들의 생활에 당연히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되고, 그 결과는 사람들의 행위에 따라서 보상받거나 벌을 받는다.
비록 실제 드러나는 행동에 있어서 힌두교도들은 이 설을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윤회설은 오래 전 신들의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브라만들은 주장하고 있다. 힌두철학과 신비주의에 있어서 인생의 참 목표는 이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가장 영적인 사람만이 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너무나 신학적으로 독단적인 구원이나 육체적인 삶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관념은 대중에게 있어서는 별로 중요시 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부의 획득, 인생의 향락 그리고 종교의식의 준수를 통한 믿음의 축적 등이 대중에게는 목표가 된다. 단지 소수의 삶에 있어서만이 세상을 멀리하고 자기의 구원에 대해서 숙고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에 있어서 대부분의 힌두교도들의 주요 목적은 물질적 번영과 복된 삶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신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신은 업의 결과에 따라 베푸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일반적으로 힌두교도들의 업에 대한 믿음을 보면, 업을 행한 사람들의 영혼은 사후에 극락에서 당분간 행복한 삶을 누리며 그 곳에서 그들은 보상을 받고 더 높은 지위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나쁜 업을 쌓은 사람들은 지옥으로 떨어지며 그 곳에서 응당의 벌을 받고 더 낮은 신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것을 극복하는 길은 신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죽음과 재생에서 구제될 수 있고 신들의 나라(천국)에서 행복하게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볼 때, 힌두교는 확실히 하나의 종교이기는 하지만 불교, 기독교 등의 종교와는 성격이 다르다. 힌두교는 카스트라는 사회구조를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그 기반이란 사람들의 사유방식으로부터 사회관습, 생활방법의 모두를 포함하는 하나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 신앙을 갖지 않으면서도 어떠한 카스트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곧 힌두교도이다. 개인이 개종하여 힌두교도가 된다는 메카니즘이 여기에는 없다. 여기에는 카스트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의례와 제식, 생활방법만이 있고 이에는 경제적 요소도 관련되어 있다.
힌두교는 소박한 민간신앙적인 각종 의례와 관념의 복합체이며, 동시에 거기에는 해탈이라는 고차원적인 관념과 수행법이 있다. 힌두교는 인간생활의 모든 국면을 포괄하며, 그 넓이와 깊이를 갖는 하나의 세계이다.
힌두교는 현실주의적인 성향을 강하게 지녀왔다. 그래서 인간은 무수한 윤회의 과정을 겪으면서 네 가지 삶의 가치(pursartha)를 당연히 또 반드시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왔다. 그것은 욕망(慾望, ka-ma), 부(富, artha), 의무(義務, dharma) 그리고 해탈(解脫, moksa)이다.
처음 두 가지는 욕마의 길을 따르는 것이고, 나중의 두 가지는 욕망을 절제하는 길을 따르는 것이다.
욕망이란 인간의 본능적인 성적 즐거움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다. 바트스야야나(Vatsyayana)의 카마수트라(Kamasutra)나 바라타무니(Bharatamuni)의 나트야샤스트라(Natyasastra)를 보면 쾌락을 추구하는 즐거움도 인간이 추구할 만한 가치의 하나로 여겨왔음을 알 수 있다. 부란 행복한 삶의 조건이 되는 물질적인 풍요를 의미한다. 아르타샤스트라(Arthasastra)나 판차탄트라(Panchatantra)의 우화를 보더라도 인도인들은, 정당한 욕구이기는 하나 그것은 성취하기 위해서는 비정하고 냉담한 자세가 요구된다는 점도 인정하고 있다.
의무란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윤리적인 질서를 의미한다. 마누법전(Manu-smrti)이나 법전류(Dharma-sastra)를 지침으로 삼아서 종교적ㆍ도덕적 법칙으로서의 다르마를 준수하는 일은 개인의 쾌락이나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는 값진 행복의 길이라는 것이다. 해탈이란 인간이 유한한 삶을 넘어서서 영원한 삶을 향유하려는 종교적 갈망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것은 최고의 것이며, 진실로 인생의 최고 목표인 것이다.
예로부터 인도에 거주하였거나 외부에서 인도로 들어온 군소의 종족ㆍ 부족ㆍ 종교집단은 적지 않았다. 힌두교는 장구한 역사가 흘러가는 가운데 이러한 모든 것을 자신의 테두리 안에 편입시켰다. 즉 힌두교는 이와 같이 상이한 문화를 소유한 다양한 집단을 힌두화하여 결국에는 인도 대륙 전체를 힌두화하였다. 이는 상상을 넘는 다종 다양한 생활문화와 양식이 겹치고 혼융되며, 상호 병용하면서 정착되어간 부단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힌두화됨이 없이 독자성을 지닌 것이라 할지라도, 힌두교와 평등한 입장에서 병존하는 형태로 정착되지는 못하였다. 힌두교의 세계라는 체제 안에서 그 존재 위치를 부여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인도에 있어서의 불교의 성립과 발전도 동일한 자격으로 병립하였던 것은 아니다. 불교는 힌두교 세계 위에서 성립하였고, 그 세계 안에서 다채로운 발전을 이루었던 한 종교였다.
힌두교도들은 그들의 고유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늘 힘쓰고 있으며, 그들이 국내는 물론 외국 어디에 거주할지라도 근본적으로 그들의 전통적인 종교를 유지하려고 한다. 반면에 힌두교도들은 불교 ㆍ 기독교 ㆍ 이슬람교도들에 비해 그들의 교리를 전파하는 일에 훨씬 소극적이다. 힌두교도들의 종교적 관념은 자신의 영적인 희열에 유의할 뿐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희열은 그들 자신들이 돌보도록 맡기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힌두교도를 더욱 굳게 결합시키는 이유는 그들이 순수한 인도인들이라는 것과 그들이 행하는 독특한 의식과 의례이다. 그래서 힌두교도들에게는 정신적으로 사고해야 할 신앙보다도 전통적으로 그들이 지켜야할 규제가 너무 많다. 이런 의미에서 힌두교는 어떤 독특한 교리나 사상을 내세우기보다는 그들의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 등에 훨씬 더 많은 힌두적인 요소들이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4) 힌두의 삼신관
브라만들도 박타운동의 일환으로 보다 우주적인 신관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리하여 형성된 것이 좀 고답적인 trimurti, 즉‘삼신관(三神觀)’이다. 굽타 왕조 시대에 이미 브라만들은 여러 신 가운데에서 ‘브라만-아트만’ 합일체가 현현한 것 중 중요한 존재로서 브라마, 비슈누, 시바 등의 세 신을 거론하고, 이 세 신은 각각 세계의 창조, 보존 그리고 파괴의 기능을 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지성인 차원에서는 만족스럽고 포괄적인 조합 이론일 수 있었으나, 인도의 대중은 적어도 실천의 면에서는 그런 체계적인 관념에 전적으로 몰두하는 일은 없었다. 대중은 경우에 따라서 어느 한 신 또는 그 배우자에 헌신하면서 가호를 염원했던 것이다.
브라마: 세 신 가운데에서도 ‘창조자’브라마는 널리 숭배되지는 못했다. 브라마의 사원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대여섯 개가 채 못된다. 브라마는 창조의 과업을 마친 뒤에는 더 이상 지상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민족의 ‘원시 최고신’과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브라마에 대해서 대단히 깊은 존경심을 품고 있다. 예술작품에서 브라마는 머리가 네 개인 왕자(王者)로서 베다를 열심히 읽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또 흰 야생거위를 타고 있는 것은 이것은 그의 초연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시바: 시바는 아시아의 가장 위대한 신 가운데 하나이다. 시바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시바에게 마하데바(Mahadeva), 즉 ‘위대한 신’이라는 이름을 부여했고, 시바는 사실상 그러한 이름을 부여받을 만한 신이다. 시바의 성격은 대단히 복잡하여 몇 가지 매력적인 면도 갖고 있다.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발견된 쉬바 신앙의 몇 가지 원형을 토대로 우리는 셰이비즘(shaivism)의 비아리안적 요소와, 셰이비즘과 인도 원주민의 원시 신앙과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후기 우파니샤드에 와서 시바는 베다의 신 루드라와 동일시되고 다름아닌 브라만 자체로서 간주되게 된다. 이것은 그 동안에 시바 신에 대한 신앙이 널리 발전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마하바라타에 와서는 그는 우주를 창조한 위대한 신으로 숭배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신화적 전통도 풍부하게 형성되어, 히말라야의 높은 케일라쉬 산 속에서 심한 고행을 행하는 전형적인 요가행자(yogi)로서 나타나 있다.
그의 명상을 통하여 이 세계는 유지되며, 그의 이마를 보면 양 눈 사이로 지혜와 전지자의 직관력을 의미하는 수직의 세 번째 눈과 희백색의 재(vibhuti)로 수평의 세 줄 무늬를 하고 있고, 호랑이 가죽 위에 앉아 요기의 형상으로 좌도하고 있으며, 목과 팔에는 코브라 뱀과 염주를 휘감고 있다. 또한 헝클어진 머리에다 머리 위로는 상투를 틀 듯이 감아올린 머리뭉치가 있는데 그 머리꼭데기에는 초생달이 걸려 있으며, 그 곳에서 성스러운 갠지스 강이 솟구쳐 흐르고 있고, 군지(軍持)와 삼지창(三枝槍)을 들고 성우(聖牛) 난디(nan야)mf 타고 다닌다. 그리고 가공의 번개와 같은 그의 여타 무기는 다른 신들도 그를 두려워하기에 충분하다. 이런 모습은 모두 시바의 다양한 속성과 힘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바는 원래 가축의 보호라든가 은혜를 베푸는 것이 주된 임무로 되어 있는 신이었던 것같다. 따라서 ‘가축의 주인(Pasupati)'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베다 신화에 의하면 베다에 나오는 파괴와 공포의 신이자 폭풍의 신 루드라 신의 존칭으로 쓰인 형용사가 바로 ‘시바’인 것이다. 베다 시대의 무서운 폭풍의 신 루드라가 후대에 발전한 신이기도 한 시바는 자기의 원형인 루드라처럼 여전히 ‘파괴자’로서의 중요한 일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시바는 죽음을 관장하는 ‘때(時)’이며 묘지에 사는 ‘귀령의 주인’이어서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얼마후에는 루드라와 시바가 병칭되었고, 나중에는 시바가 독립된 신격을 갖기에 이른다. 루드라에서 시바로의 전화(轉化)에는 많은 토착신앙이 흡수되어 있다. 시바 신의 다채로운 기능은 이렇게하여 힌두교 전파의 메카니즘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신은 힌두문화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몸소 대표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시바가 악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시바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상서로운’존재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시바는 선을 구하고 악을 멸하며, 또한 병을 치료해 주는 대자대비의 자혜로운 은총의 신이라 하여 길상신(吉祥神)으로 알려져 왔다. 시바는 업을 쌓지 않는 존재이므로 전생(轉生)의 영혼이란 방식으로 육신을 취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끝임 없이 윤회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던 인도에서는, 죽음이란 곧 새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 이런 관념에 기초를 두었을 때 시바의 기능과 역할도 풍부하게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관념으로서 시바숭배에는 진실성과 힘이 간직되어 있다. 우주의 실상을 지배하는 힘을 가장 잘 간파하고 있는 것이 시바숭배이다. 우주를 지배하는 힘이란 생성과 파괴이다. 이 가운데 어느 한 쪽이 진행되면 반드시 또 다른 한 쪽도 진행되게 마련이다. 생성과 파괴는 같은 변화의 두 측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자는 또한 파괴자이기도 하다. 창조는 그 본질상 파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바는 우주의 해체자로서 파괴의 신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갱생(更生)의 신이어서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바로 다시 탄생과 시작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시바는 고행자로서 그리고 그의 활동력으로 재생의 역할을 하는 신으로 숭배받고 있다. 시바는 우주의 파괴를 관장한다고 하지만, 파괴는 창조로 이어진다는 힌두적 관념 때문에 생산, 생식, 재생의 신이기도 하다.
시바를 남성기로 표상하는 관습이라든가 풍요신으로 생각하는 관념은 아마도 아리아족 이전부터 소박한 남근숭배와 결부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시바 숭배자들은 그렇게 성에너지와 연관시키고, 남녀 생식기를 나타내는 링가(남자의 생식기)와 요니(여자의 생식기)로서 시바 신을 표상하였다. 이것은 곧 생식 행위에 직접적인 표현이지만 여기에는 생명의 풍요로움이 밝고 대범하게 표상되어 있는 것이다.
링가는 많은 사원에서 보존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 상은 인도 전역에 걸쳐서 볼 수 있는데, 시바 숭배자들은 신과 인간이 지닌 신비로운 창조력에 대한 숭경심을 가지고 집에서나 사원에서나 이 상징들을 극진히 예배한다. 사원에서는 위에 매단 용기로부터 떨어지는 갠지스의 성수를 한 방울씩 받아가며, 링가의 성스러운 신으로서의 숭상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관념이 좀 더 진전되면서 시바는 순수 에너지 또는 활력으로서 ‘생명’ 그 자체를 뜻하게 되기도 한다. 망상의 악마가 엎어져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밟고 올라서서 춤추고 있는 시바의 형상을 흔히 볼 수 있다. 네 팔을 우아한 모습으로 허공에 흔들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손에는 작은 북을, 다른 한 손에는 불꽃이나 화로를 들고 있으며, 한쪽다리로만 딛고 선 그 전체 모습이 대단한 생동력을 느끼게 해 준다. 그 춤은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가속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시바는 자신의 춤행위를 통해 우주의 창조와 파괴, 탄생과 죽음 그리고 시작과 끝이라는 시간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무용(舞踊)의 왕(王)’이기도 하다. 그의 춤은 우주 창조적 잠재 에너지를 불러내어 자신의 구체적이고 무한한 힘을 드러내는 우주창조의 의미로 세계의 창조, 진화 및 해체는 지칠줄 모르고 끊임 없이 추어 대는 그의 춤의 결과이다. 폭발적 힘을 갖고 난폭하고 사납게 추는 탄다바(tandava)춤과 여성답게 우아하게 추는 라스야(lasya) 춤의 양 극단적인 그의 무용을 보더라도 우리는 그의 춤이 샥티의 구현이자 현현(顯現)으로, 곧 창조와 더불어 해방을 위한 파괴행위임을 알 수 있다.
시바 신은 고행에 의하여 절대적인 힘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이 신은 수행자와 성인들을 도와 주는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신은 스스로가 ‘위대한 고행자’이며 삼지창을 세워 들고 히말라야의 케일라슈 산에 산다고 한다. 벌거벗은 몸에 온통 재를 바르고 수행자처럼 비꼬인 머리카락을 한 채 명상하고 있는 시바의 형상을 흔히 볼 수 있다. 수행자들은 아마도 저차원의 자아를 ‘파괴함’으로써 보다 높은 정신적인 자아를 표출시키기 위하여 시바를 수행과 관련지은 듯싶다. 육신을 억압하여 영혼을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온갖 세속적인 감정과 욕망을 뿌리 뽑아야 하며, 그 결과 커다란 힘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재생이고, 재생이라면 시바가 가장 크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항이므로 시바를 수행자들의 동료라고 하는 것이다.
시바가 모든 면에서 생명력을 나타내는 신이 되었다는 사실은 시바의 여러 배우자나 또는 시바와 관련된 여러 존재의 성격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시바의 배우자인 데비(Devi, 여신)는 여러 가지 성격을 한꺼번에 지니고 있으며, 인도의 각 지역에 따라 그 명칭이 다르다. 인도는 5세기경부터 여신숭배가 성황을 이루어 신들이 아내를 두게 되는데 시바도 여러 명의 아내를 두게 된다. 시바의 본부인 사티(Sati)가 환생했다고 하는 파르바티(Parvati, 山의 딸)나 우마(Uma, 빛)라는 이름에서는 우아하고 상냥한 성격이 표상된다. 그러나 두르가(Durga, 접근 불가능한 존재)라든가 찬디(Chan야, 난폭한 자) 또는 칼리(Kali, 검은 자)등의 이름도 있고 보면, 그녀는 도움을 주면서도 광폭하고 무서운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기를 아끼는 존재에게는 친절 하지만, 흔히 인간과 동물을 잡아먹기도 한다.
코끼리 머리를 한 신 가네샤(Ganesa)와 황소 난디도 시바와 연관된다. 가네샤는 시바와 파르바티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시바의 사원이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의 코끼리 머리는 재치와 괴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시바가 타고 다닌다는 황소 난디도 시바의 사원에 앉아 있다.
시바 신의 배우자들은 대개 시바의 샥티(sakti), 즉 여성에너지로 발휘되는 활력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여신들과 관련하여 시바의 신봉자들은 신애를 중시하는 비슈누파(Vaisnavism)에 대하여 요가와 성력(誠力)을 중시하는 경향도 일면 갖게 되어 시바는 샥티즘(Saktism)의 주신이 되기도 한다.
인도의 북동부 지역에서는 시바의 배우자를 특별하게 따로 예배하는 힌두교 종파가 형성되어 하나의 개별 종교로까지 발전하였다. 이것도 일조의 탄트리즘(Tantrism, 밀교)이다. 그러나 이 종파를 불교의 밀교와 좀 더 분명하게 구별해서 샥티즘이라고 한다. 그 실천의 면에서는 ‘우파’와 ‘좌파’로 나뉜다. 우파는 샥티의 온화한 측면, 즉 자연의 에너지 가운데서도 이로운 면을 강조해서 그것을 일종의 모신상징(母神象徵)을 통해 나타낸다. 좌파는 샥티의 어둡고 난폭한 면을 나타내는 두르가와 칼리 여신을 신성한 에너지의 현현 양상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 의례는 주술과 비의(秘儀)를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그가 샥티를 통해 영구의 생식력 내지는 생산력을 갖고 있으며, 해체 뒤에는 반드시 복구와 재건을 담당하는 신비한 재생적 힘을 발휘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시바는 불멸의 창조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 마하데바(Mahadeva: 大神,大天,大主)또는 이슈바라(Isvara: 創造主, 全和者)로 불리는 것이다.
그는 우주의 균형을 유지케 하는 시간(kala)을 해체하는 칼리(Kali)여신을 돕기도 하는 신으로, 시간에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고 어느 곳에나 보편적으로 영원히 존재한다.
원래 삭제된 신화에서는 근친상간을 행하는 창조자 브라마와 금욕적 파괴자 시바사이를 어떤 대립이나 갈등구조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엄연한 창조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두 신은 임의대로 서로간에 역할을 교환하고 있다. 그리고 초월적 절대신 시바에게서 우리는 브라마, 비슈누 그리고 시바가 하나로 융합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시바의 삼면상(三面像, Trimurti)은 그가 최고신으로서의 권화(權化)임을 잘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삼면 가운데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시바의 모습은 우주의 영원한 본질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의 형상은 모든 창조력과 파괴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동시에 조화와 합일이라는 균형 가운데 무한한 환희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러한 면에서 시바는 창조자이자 보존자이며 또한 창조를 위한 파괴자이고, 공포와 온화, 악과 선, 남성과 여성, 인간과 세계 그리고 영원한 휴식과 쉴 새 없는 활동을 하는 모든 상반과 대립을 화해하고 조정하는 신이다.
비슈누: 비슈누 신은 ‘유지자’, ‘보존자’이다. 항상 자애로우며, 무엇보다도 가치를 수호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현시키는 존재이다. 복잡한 성격의 시바와는 달리, 언제나 완벽하고 쾌활한 자애의 표본이다. 비슈누는 하늘에서 두루 굽어 살피다가 질서가 흔들리거나 선한 사람이 재난에 빠진 것을 발견하면 온갖 역량을 발휘하여 바로 잡는다. 비슈누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는 다양하고 흥미로워 비슈누 신봉자가 많이 늘고 있다.
비슈누의 형상은 대개 네 개의 팔을 가진 모습으로 묘사된다. 두 손에는 당당한 힘을 상징하는 철퇴와 원반을 들고 있고 나머지 두 손에는 주술의 힘과 티 없는 청정성을 상징하는 나팔 및 연꽃을 들고 있다. 머리에는 높직한 왕관을 쓰고 있다. 비슈누의 황홀하고 그윽한 눈은 수많은 인도인의 숭경심을 자아낸다. 휴식을 취할 때면 우주적인 뱀 쉐샤(Sesa) 또는 아난타(Ananta)에게 기댄다. 비슈누는 가루다(Garuda)라는 새를 타고 다니며, 물고기를 자신의 상징으로 한다. 비슈누의 샥티는 행운과 미의 여신 락슈미(Laksmi)이다.
베다에서 비슈누는 태양의 신으로 등장한다. 태양은 하늘과 땅 사이에 나 있는 길을 따라 돌면서 이 땅을 어두움으로부터 건져 냈다는 사실을 근거로, 베다 시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신화를 창조했다.
악마의 제왕 발리(Bali)가 이 땅을 장악하자 비슈누는 난쟁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 거인이 흐믓한 기분에 젖어 있는 틈을 타서 한 가지 청을 하여 허락을 받아낸다. 그 청이란 자기가 세 걸음으로 갈 수 있는 거리만큼의 땅을 달라는 것이었다. 약속을 받아내자 비슈누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두 걸음을 뛰니 천상과 지상을 단번에 넘어섰다. 그리하여 천상은 신들에게, 지상은 인간에게 돌려 주었다. 그러나 지옥을 뛰어 넘을 세 번째 걸음은 내딛지 않았다. 그래서 지옥은 악마의 수중에 남아 있게 되었다.
이처럼 비슈누 신은 원래 아리아인의 태양 신이었는데 시바와는 달리 화신이라는 방식에 의해서 갖가지 토착관념을 흡수하면서 전 인도적인 신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 신은 세상이 악으로 충만했을 때 정의를 회복하기 위하여 지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역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신화나 전승상의 위인과 영웅에게도 비슈누의 모습을 구하여, 그들이 비슈누의 화신이라고 생각했다. 현대 인도의 힌두교들이 불타를 힌두교도라 하고, 또 불교의 가르침이나 불타에게 친근감을 갖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비슈누도 시바와 마찬가지로 아리아인의 신관과 원주민 부족의 토착신이 융합되어 발전된 신이다. 비슈누 신의 보급과 권화(權化, 化身) 사상은 매우 밀착되어 있다. 사람들은 전설이나 실재하는 영웅, 이인을 비슈누의 화신으로 파악함으로써 그 보편성을 호소해 왔다. 비슈누의 화신 중에서 크리슈나는 가장 중요하다. 갖가지 전설이 통합되어 만들어진 크리슈나 신화가 완성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지만 그 중에서 그는 피리를 불어 여성을 매혹시켰다고 한다. 그리하여 크리슈나는 라다나 그 밖의 여인(gopi)들과 노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12세기 이후에는 박티(bhakti: 나를 비우고 오직 신에게 한결같은 사랑과 믿음, 봉사만을 바치는 소위 헌신, 신애의 사상)신앙의 기반 위에서 사람들을 에로스적 신비사상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근원을 달리하는 갖가지 토착신앙이 크리슈나에 포함되어 크리슈나 신화는 더욱더 풍요롭게 되어간다. 어린 아이로서의 크리슈나, 소치는 여인과 즐기는 크리슈나, 인드라 신과 싸워서 소를 지키는 목동, 바가바드기타에 나오는 영웅으로서의 크리슈나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라다와의 사랑의 유희 등은 모두 그 근원을 달리하는 독립된 종교의 전승이며 민간신앙이었던 것이다. 비슈누의 화신은 보통 열을 헤아리는데 그 아홉 번째가 불타이며, 그 일곱 번째가 라마(Rama)이다.
비슈누는 필요할 때마다 아바타라(avatara), 즉 ‘하강’을 감행하여 ‘화신’의 모습으로 지상으로 온다. 비슈누의 화신으로는 전통적으로 열가지가 꼽힌다. 그 열 가지 화신 가운데 아홉 가지는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한 가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가운데 세 가지는 이미 언급된 바 있고, 그 나머지는 화신을 살펴보면 우선 비슈누는 물고기(Matsya)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하여 우주의 큰 홍수에 휩쓸려 버린 최초의 인간 마누를 구해냈던 것이다. 거북이(Kurma)로 나타난 경우도 있었는데, 그 때에는 만단(Mandan) 산 밑을 헤엄쳐 신들이 우유의 바다로부터 만들어 낸 아므리타(Amrta:불사약, 불노장수약) 등의 여러 귀한 물건을 휘젓는 일에 힘을 보탰다. 또 한번은 멧돼지(Varaha)로 나타났었다. 그 때에는 송곳니를 가지고 바다 깊이 빠진 땅을 건져 냈다. 반은 사람이고 반은 사자(Narasimha)인 모습으로 나타나 비슈누에게 기도했다는 이유로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악마의 아버지를 갈갈이 찢어버린 일도 있었다. 브라만 신분의 전쟁 영웅으로 나타나서는 크샤트리아들을 스물한 번이나 격퇴하고 마침내 브라만의 우위를 확립한 일도 있었다.
불교의 교조 고타마도 비슈누의 화신이다. 앞으로 나타날 열 번째의 화신은 칼키(Kalki)이다. 칼키는 백마를 타고 불칼을 든 구세주로서, 세상이 타락하는 제4기의 칼리유가(kali-yuga, 암흙 시대)가 끝날 때 지상에 내려와 의로운 사람들을 구하고 사악한 사람들을 파멸시킬 것이다.
그 화신들 가운데에서도 다른 어느 것에 견줄 수 없을 만큼 크게 인기를 끄는 것이 라마와 크리슈나이다. 라마는 인도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이상적인 남성이고, 그의 부인 시타는 이상적인 여성이다. 인도의 방방곡곡에 라마야나의 각종 이본들이 난무하기 때문에 인해서 라마에 대한 신봉도 각양 각색이다. 수백만 명의 신도가 라마를 봉헌의 대상으로 삼으며 라마의 형상에 예배한다. 단순한 구원의 영웅이 아니라 최고의 신으로 받드는 경우도 흔히 있다. 사실상의 라마신앙에는 두가지 국면이 있다. 하나는 비슈누의 화신인 한 영웅으로서의 라마에 대한 숭경이며, 또 하나는 라마를 최고의 신으로 받들고 라마에게만 봉헌하는 예배가 그것이다.
라마도 널리 숭배되지만, 크리슈나는 비슈누의 화신으로서나 개별의 신으로서나 라마 이상으로 널리 숭배된다. 크리슈나의 성격은 라마보다 더 복잡하다. 쉽게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크리슈나가 그 한면이고, 목가와 민담에서 등장하는 크리슈나가 또 다른 한면이다. ‘마하바라타’에서 크리슈나는 진지하고 용맹스런 전쟁 영웅으로 등장한다. 그리하여 크리슈나는 비슈누의 화신인 자기에게 진정한 박티를 무조건 바칠 것을 강요하고 있다.
한편 방대한 민담에서 주인공으로 나타나는 크리슈나는 쾌활한 젊은이이다. 인도인들은 ‘어린 시절 창고에 들락거리며 버터를 훔쳐먹곤 하는 통통하고 장난스러운’어린 크리슈나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되새기곤 하였다. 수많은 인도 여성이 토실토실한 아기 크리슈나 상을 바라보며 매일 예배를 올린다. 그러나 이런 모습의 크리슈나가 더욱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은 매력적인 목가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이다. 대부분의 민담에서 크리슈나는 활달하고 호색적인 목동으로 묘사된다. 크리슈나가 소떼 사이를 거닐면서 아름다운 피리소리로 황활한 곡조를 실어 보내면 고피(소를 돌보는 여인, 크리슈나의 연인)들은 온통 사랑에 빠져들게 되고 크리슈나는 이 처녀들과 진한 사랑의 유희를 벌인다. 그 수많은 처녀 가운데에서도 크리슈나는 아름다운 라다(Radha)를 가장 좋아한다. 크리슈나의 이런 면을 묘사하는 에로틱한 문헌들은 대체로 샥티즘 문헌과 일말의 비슷한 점을 지니고 있다. 물론 샥티즘 문헌에서는 철학과 탄트리즘이 중시되는 반면, 여기에서는 사랑 이야기 묘사에 치중한다는 차이가 있다.
사실상 크리슈나 신봉자들은 모두가 신의 진실이란 육체적인 것이기보다는 정신적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미남의 목동으로 강림한 크리슈나가 소의 젖을 짜며 소를 돌보는 여인들을 유혹하는 이야기에도 일종의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목동의 아내인 기혼녀 라다와 크리슈나의 간통은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확증하는 숭고한 은유가 된다. 크리슈나에 대한 성적 열정은 영혼의 강렬한 갈망을 상징화하고 있으며, 그녀가 자진해서 간통을 범한 것은 신에 대한 사랑과 일치하는 절대적 우위성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그 이야기는 혼인제도의 제한이 늘어남에 따라 점점 어려워져 가는 사랑에 대한 인간적 욕망의 실현이었던 것이다. 목장에서 일하는 여인들의 옷을 벗기고 그들을 벌거벗은 채로 자기 앞에 나서도록 요구하는 데에서, 크리슈나는 영혼이 신을 섬기면서 지녀야할 무구한 청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라다를 소홀히 하는 데에서, 그는 신분과 지위에 관계 없이 모든 영혼을 사랑하는 신의 힘을 증명하고 있다. 원무(圓舞)의 유희(lila)는 신이 얼마나 모든 존재에게 보람된 것인가를 입증했으며, 라다로부터 떠나는 것은 ‘영혼의 어두운 밤’을 상징화한 것이다.
4. 자이나교
1) 사문과 육사외도
값비싼 제례와 엄격한 신분제도에 대해 하층민들의 반발이 생겨났고, 상공업의 점진적인 확대에 따른 사회, 경제생활의 변화는 종교 문제에 있어서도 새로운 변혁을 요구하게 되면서 북인도에는 슈라만(sramana,沙門: 游行乞食하면서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는 출가한 수도자)들이 많이 나와 상가(?伽)라는 생활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들은 대개 브라마니즘에 비판적이어서 상가에는 신분의 구별없이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윤회와 업사상을 인정하면서도 베다의 권위를 부인했으며 신의 존재 마저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사문이란 본래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인 자유사상가의 총칭으로 쓰여지고 있다. 그들은 베다 성전의 권위를 부정하는 등 브라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언어적으로도 브라만들이 주로 사용하던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 민중들이 사용하던 속어에 가까운 프라크리트어를 사용하였다. 그들은 브라마니즘에서 규정한 네가지 생활단계에 따르지 않고 자유로운 시기에 출가하여 한곳에 머물지 않는 유행생활에 ‘들어가 여러 가지 수행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교설을 행하였다. 브라만을 전통적 사상가라고 한다면 사문은 혁신적 사상가이며, 브라만을 정통적 사상가라고 한다면 사문은 이단적인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사회ㆍ경제 등 인간생활 전반에 걸친 격동기에 반 브라만적인 색채를 짙게 띠면서 갖가지 행법과 사상을 주장하였다. 마침 당시는 브라만 문화에 여러 가지 비판과 반성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특히 동인도는 갠지스 강 중류지역에서 하류유역에 해당되기 때문에 브라만의 세력이 비교적 약한 편이었다.
대체로 기원전 6세기경부터 이곳에는 각양 각색의 신흥사상과 종교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담당한 집단이 바로 사문이었음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사상가의 이름과 그 견해를 결부시켜 전하고 있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불타를 별도로 한 이른바 육사외도(六師外道)의 설이 있으며, 실제로 당시에는 약 62개에 달하는 종단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육사외도는 불교적 입장에서 볼 때 이단(외도)인 여섯 명의 사문을 가리키지만, 모두 특징 있는 견해를 표명한 자유사상가로 유명하다. 그들은 불타와 마찬가지로 각각 교단을 이끈 교주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불타도 출가하여 사문의 일원으로 수행을 시작했으며, 또 사문으로 정각을 얻었다. 불교도 역시 이러한 격동기에 신흥종교의 하나로써 일어난 것이다. 다라서 불교는 인도에서 일어난 실존적 종교운동의 초기에 성립된 한 집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문의 사상을 받아들인 것은 주로 신흥도시의 사람들이었다. 도시의 새로운 분위기에 젖은 사람들은 브라만에 대해서 종전처럼 반드시 추종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문이 설하는 바에 공감하였다. 특히 국왕이나 자산가와 같은 새로운 실력자들은 모두 사문들을 존경하고 지지하였다. 편력유행하며 걸식수행을 영위하는 사문들이 많이 배출되어도 그들의 생활을 지탱할만큼의 경제적 기반은 이루어져 있었다.
사문들은 베다의 권위를 배척하고 다른 어떠한 권위에도 속박됨이 없이 인간이 인간으로서 바르게 살아야 할 도리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모든 형이상학적 논리를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실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신적 수행을 실천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끝없는 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베다 성전에 등장하는 신들이나 혹은 당시의 민중이 신앙하던 신들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궁극적인 의의는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2) 자이나교와 불교
당시 브라마니즘은 형식주의에 빠지고, 브라만 승려들 역시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권위주의적이어서 대중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특히 신분제도는 사회의 침체와 발전을 막는 요인으로 되어 갔다. 이와 같이 종교적ㆍ사회적 측면에서 부정적 요인이 등장한 가운데 형식화한 브라마니즘에 대신할 새로운 종교를 요구하고, 브라만 계급의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자유사상적 종교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바르다마나가 대성한 자이나교와 불타가 일으킨 불교이다.
자이나교와 불교는 브라마니즘의 제례의식과 이에 따르는 브라만들의 권위와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평등주의적 윤리관을 내세웠다. 특히 브라마니즘의 전통에 커다란 타격을 준 것은 윤리적 합리성에 입각한 불교였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이들의 비브라마니즘적인 사상이 이미 브라마니즘 내부에서도 일어났으며, 이들은 우파니샤드 철학의 사상적 배경을 이루고 잇었다는 것이다. 윤회에서의 해탈과 불멸의 세계에 도달하는 방법을 설명한 이 철학은 당시의 사상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엄밀한 의미에서 위의 두 종교도 이러한 사상적 바탕 위에서 성립된 것이다.
제식만능과 사회적 계급의 고정화를 가져온 브라만의 권위를 부인하고, 베다의 존엄성과 의례의 준수 등을 거부하면서 윤회와 인과의 그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올바른 행위’에 있음을 역설하는 종교 개혁운동이 크샤트리아 출신의 두 선각자에 의해 추진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베다 경전의 제의주의(祭儀主義)는 부인하면서도 브라만에 의해 이미 제정되어 있는 갖가지 규범은 그들의 금욕적인 행위와 생활양식 속에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 두 종교가 등장하게 된 근본적인 동기와 더불어 사상적인 면에서도 서로 일치하는 점이 많다. 불교는 자이나교와 마찬가지로 지정한 자아의 해탈을 목적으로 하며, 또한 인간 자신이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행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점에서도 두 종교가 서로 비슷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이나교든 불교든 간에 모두 크샤트리아 계급에 속한 사람의 손에서 발생했으면서도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마하비라와 마찬가지로 불타도 브라만들의 철학을 비판하고 부정했으며, 또한 베다 문헌이나 제의가 인간구제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는 힌두교의 교리는 말할 것도 없고, 구원의 길을 밝혀 주는 특권이 브라만에게 있다고 하는 관념에도 도전하였다.
마하비라와 불타 사이의 비슷한 점은 두 사람이 모두 브라마니즘에 대해서 회의의 태도를 보이고 있던 갠지스 강 북쪽지방 출신이라는 사실과 아리아족의 지배에 대해 여전히 저항을 누그러뜨지리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양쪽 모두 각자의 교리를 주로 아리아족의 언어인 산스크리어트가 아니고 그 지방의 언어, 즉 자이나교의 경우 아르다마가디어(Ardhamagadhi), 불교의 경우 팔리어(Pali)로 기록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두 사람 모두 브라만의 일원론적인 관념주의를 거부했으며, 수도단체를 세우고 그 안에서의 카스트 차별을 배척했다. 또한 베다 문헌이 특별히 신성한 경전이라는 브라만의 주장을 거부했기 때문에 힌두교의 입장에서 보면 정통파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떻게 보면 불교와 자이나교 사이에는 이렇게 비슷한 점이 많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드러난다. 자이나교는 철저하고 극심한 고행에 의한 구제의 길을 걸었고 상대주의를 주장한 반면, 불교는 온건하고 상식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중도’에서 길을 찾았던 것이다. 불타가 생각하기에는 극단적인 고행도 감각에 얽매이는 태도와 마찬가지로 결코 바른 길일 수 없었다. 불타는 당시 여러 선지자와 종교 지도자들이 제시한 여러 가지 구원의 길을 객관적으로 검토한 후에, 논리상으로 아무리 일관되고 타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괴이한 종교행위에는 휩쓸리지 않으려고 했다.
자이나교는 불교의 무아설에 대해 요소실재설(要素實在設)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완전한 평등관에 입각하지 못한 점이 불교와 다른 것이다. 불교는 브라마니즘의 계급차별주의를 배격하였다. 반면에 자이나교는 브라마니즘의 형식적인 제사의식을 배격하고 고행을 권장하였으나, 브라만들이 만들었던 일상생활의 규정과 습관을 끝내 거부하려 하지 않았다.
3) 마하비라와 자이나교
자이나교도 처음에는 브라만이 주장하는 교리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것이었다. 아리아족의 사상이 가장 약하게 미친 갠지스 강 북동부 지역에서는 아리아족의 관습과 언어 그리고 종교에 대한 원주민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그 때까지도 카스트 제도는 아직 확립되지 않은 채 여전히 형성되는 과정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계급이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신들이 가장 우월하다는 주장을 들고 나오자 귀족계층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그 주장에 반발하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어떤 하나의 실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브라마니즘의 일원론적 관념주의에 날카롭게 비판하는 의식이 일기 시작했다. 브라만의 일원론적 관념주의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대개 모든 삼라만상의 근원이 되는 무엇인가가 하나 있다는 관념을 거부하고 결국에는 무신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도 브라만교를 거부하고 상키야 철학과 비슷한 입장을 취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점차 상키야 철학과도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입장을 취하였다. 자이나교의 전설에 의하면 그가 나타나기 이전에 23명의 구세자(Tirthankara)가 있었으므로, 그는 제24대조에 해당한다. 마하비라는 제 23대조인 파르슈바(Parsva)의 가르침과 금욕주의를 신봉하였으므로 마하비라의 사상이 형성되는 데에는 파르슈바의 사상이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자이나교는 지나(Jina), 즉 승자의 종교란 뜻이다. 교조인 바르다마나(Vardhamana)는 마하비라(Mahavira), 즉 위대한 영웅이라 불리고 있으며, 불교 경전에 나오는 육사외도의 한 사람인 니간타 나타풋타(Nigantha Nataputta)는 곧 이 마하비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나타족 출신의 크샤트리아였기 때문에 나타풋타, 즉 나타족의 아들이라 부른 것이다.
그는 불타와 같은 시대, 같은 지방에서 활약하였으며 불타보다 좀 일찍 태어 난 것은 확실하지만 그 연대는 여러 설이 있어 확정지을 수가 없으나, 기원전 540년경 재력이 있는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상업도시 베이샬리(Vaisali)의 북부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세속생활을 영위하다가 30세에 양친이 죽자 모든 가재를 버리고 각지를 박탈하며 다니는 생활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그는 극단적인 고행을 했다. 출가할 때 입고 나간 얇은 옷 한 벌 마저도 13개월 후에는 버리고 그 후로는 벌거벗고 고행생활을 했다. 그는 다른 출가승과의 토론, 수행, 명상 등의 12년에 걸친 고행 끝에 마침내 모든 고행자의 목표인 생과 사의 의미에 관한 순간적인 지각, 즉 완전한 지혜를 깨달아 자이나가 되었고, 마하비라로서의 명성과 많은 신자를 얻고 30여 년 간의 포교활동 끝에 72세에 세상을 떴다.
마하비라는 30년 동안 코살라 ㆍ 비데하(지금의 비하르) ㆍ 앙가(지금의 벵갈) 등 마가다 전역에 걸쳐 포교를 하였다. 그는 우기에는 베이샬리, 슈라바스티, 자라그리하(라즈기르) 등지에서 쉬었는데, 이 지방은 불교의 시조 불타가 종교활동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4) 자이나교의 이론
바르다마나보다 약 2000년 후인 중세 유럽의 대부분의 크리스트 개혁자가 그러했듯이 마하비라도 기성 종교의 기본 개념은 거역하지 않고 받아들였으나 지배적인 계급제도에 대해서는 도전했다. 마하비라는 업(karma) 및 윤회를 인정하고 아트만과 브라흐만의 개념을 받아 들이면서도 그것들을 새로운 방법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업(karma)은 그 때까지 추상적인 원리로 이해되었으나, 마하비라는 구체적으로 미세한 물질(pudgal)에 비유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만물은 모두 영혼(jive)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이나 동물뿐만 아니라 나무에도 강에도 나아가서도 돌멩이에도 영혼이 머물러 있다고 했다. 인간의 영혼은 처음에는 더럽혀지지 않아 순수하지만 신(身) ㆍ구(口)ㆍ의(意)의 행위(karma)에 의해 미세한 물질이 영혼에 유입되어 업신(業身, karma-sarira,)을 형성한다. 유입된 업의 물질이 영혼에 달라 붙어 영혼이 속박(bandha)받음으로써 영혼(命我)은 고통스러운 윤회의 삶을 반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상태에서 해탈을 얻기 위햇는 이미 행해진 업의 작용을 소멸시키거나 새로운 업의 유입을 방지해야 한다. 전자를 위한 방법으로는 고행(tapas)이 있으며, 후자를 위해서는 윤리적 행위를 실천하고 감각적 활동을 제어해야 한다. 그리하여 영혼이 업으로부터 정화되면 다시는 윤회전생(환생)을 되풀이하지 않으며, 영혼은 그 본성을 회복하여 해탈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마하비라는 인간이 쌓은 업을 물질로 보았으며, 그 미세한 물질이 영혼(命我)에 유입되어 영혼을 속박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끊임 없이 고통스러운 삶을 계속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영혼을 깨끗이 함으로써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혼의 영원한 안정을 얻도록 하는데 목적을 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생을 고해(苦海)로 생각하여 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는 철저한 고행과 계율의 실행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자이나교에서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은 불살생(不殺生), 진실어(眞實語), 부도(不盜), 불음(不淫), 무소유(無所有)의 오계(五戒)이다. 특히 불살생이 강조되어 그들은 동식물이나 자연현상에도 영혼의 존재를 인정했으며, 깨끗한 영혼을 지키며 정신적인 자율성에 의한 해탈을 위해 살생을 금하는 등 엄격한 계율을 세웠다. 우주의 만물은 산 영혼을 갖고 있으므로, 어떠한 형태의 생명을 죽이는 일도 무서운 영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마하비라는 말했다.
그러나 이 생명의 존중과는 반대로 아이러니하게 죽음의 찬미라는 모순도 주창되고 있다. 자이나교도의 최고의 소망은 단식에 의해 죽는 것이다. 이것은 마하비라 자신이 선택한 죽음의 방법으로 그는 72세에 단식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다. 마하비라와 그의 제자가 살생의 계율을 얼마나 진지하게 지켰는가는 그들이 곤충을 밟아 죽일까 염려하여 비로 길을 쓸면서 걷고, 공기 속에 떠도는 미세한 생물을 삼킬까 염려하여 코와 입을 일종의 마스크로 가린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정통파 자이나교도는 육식을 삼가고 어두운 곳에서는 벌레류에게 해를 주게 될지 모르므로 낮에만 식사를 한다. 자이나교도는 농민이 되려고 해도 될 수가 없었다. 땅을 갈면 땅 속에 사는 생물을 죽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인이 되어 인도에서 번창하고 있는 상업이나 무역에 종사하는 것은 가능했다.
마하비라는 도둑질이나 거짓말 같은 행위를 경고했다. 그것들은 이미 영혼을 뒤덮고 있는 부정(不淨)을 더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소유를 철저히 지키기 위해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나체로 수행했으므로 이들은 나체파 혹은 공의파(空依派, Digambara)라 한다. 이후에는 하얀 옷을 입는 것을 허락하는 일파가 나타났는데 이를 백의파(白衣派, Svetambara)라고 한다.
마하비라의 계율은 엄격했으나 그의 가르침은 계속 전승되었다.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그가 권한 고행 생활은 그 이전부터 인도의 전통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는 낡은 사상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 넣었다. 카르마(業)를 설득력 있는 형태로 정의함으로써, 그는 브라만이 추상적으로 밖에 제시하지 못했던 과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한 것이다.
처음에 자이나교에서는 구원을 얻기까지에 이르는 것은 출가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와 그의 제자들은 언제나 아슈람을 찾는 속인을 자이나교 사원에 맞아들여, 그들에게 출가승의 생활방식을 되도록 본받도록 설교했다.
그는 사물을 고찰할 때에는 여러 가지 입장에서 다각적으로 고찰함으로써 그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 부정주의(不定主義, syadvada)혹은 상대주의(相對主義, anekantavada) 이론을 내세웠다. 그것은 대립된 사상과 의논이 만났을 때, 어느 것이 절대적이라고 하여 일방적인 판단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사물이 실체의 관점에서 보면 상주(常住)이지만, 상태의 관점에서 보면 무상이다. 그러므로 상주도 무상도 절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연기설이나 중도설과도 상당히 유사한 것이다.
철저한 금욕과 고행을 통한 해탈의 경지는 자연 세속을 떠난다는 점이나, 출신계급을 따지지 않고 여자의 출가도 받아들인 점 그리고 베다를 배척하고 브라만의 사회적 특권에 반대하는 점에서는 불교와 상통하였다. 그리고 불교와 함께 당시의 최대강국인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과 그의 아들 아자타샤트루의 보호를 받아 교세가 급격히 커졌다.
5) 자이나교의 전파
자이나교단은 조직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수도원을 만들어 속세와 절연시키고 불교와 마찬가지로 여자 수련자도 입단을 허용했다. 기원전 4세기경 마우리아 왕조의 시조 찬드라굽타는 흉년으로 굶주린 자가 속출하자 마이소르에 수도원을 짓게 하고는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 그 곳에서 아사(餓死)하여 자이나교의 자살의 고행을 실행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원전 1세기경이 되자 자이나교는 지금의 오릿사에서 마투라에 이르는 북인도 일대에 널리 신도를 포섭하면서 크게 교세를 떨쳤으며, 2세기경에는 타밀 문학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세기에는 오늘의 자이나교의 중심지인 구자라트, 카티야와르에 교세의 뿌리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현재 인도에서는 불교도로 자처하는 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자이나교도는 서인도, 서남인도의 상인과 부호들 사이에 많은 신도를 가지로 있다. 특히 이 자이나교도 중에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이들의 금욕주의와 관련하여 볼 때 흥미 있는 일이다. 간디의 무저항주의에도 자이나교의 정신이 살아 있고, 단식수양, 동물애호, 채식주의 등 자이나교의 교의가 인도인의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있다.
5. 불교
1) 불타의 불교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기원전 6세기에 슛도다나(Suddhodana)와 마야(Maya) 부인 사이에 왕자의 몸으로 태어났다. 성은 고타마(Gotama)이고 그의 이름은 싯타르타(Siddhartha)였다. 석가족(釋駕族, Sakya)은 현재 네팔 중부의 남쪽 변경과 인도 국경 근처에 위치하였던 작은 부족으로, 카필라城(Kapilavastu)을 수도로 하여 일종의 공화 정치를 하던 나라였으나, 당시의 정치적 추세에 따라 샤키아 왕국도 인근의 강대국인 코살라국에 병합될 운명에 놓여 있었다. 석가모니의 아버지는 수장(首長)의 위치에 있었으며, 동시에 왕(rajan)으로도 불렸으므로 석가모니는 왕족 출신이다.
석가모니의 탄생지는 룸비니(lumbini, rummindei)라고 전해지는데, 1696년 퓨러(A.Fuhrer)가 발견한 아쇼카 왕 석주에는 “여기에는 석가모니가 탄생하였다.”고 하는 뜻의 글이 새겨져 있어 석가모니 탄생지에 대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불타’란 지니(Jina)와 마찬가지로 득도 후에 얻은 호칭으로 ‘각자(覺者)'란 뜻이며, 샤키아무니(Sakyamuni)도 샤키아족의 성자란 뜻이다. 이 말은 불교가 브라흐만 전통에서 벗어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샤키아족 그리고 샤키아무니에서 시작되는 불교가 비아리아적 요소가 농후한 인도의 토착 문화적 토양 가운데에서 성립ㆍ발전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29세 때 인간의 생(生) ㆍ 로(老) ㆍ병(病) ㆍ사(死)에 깊은 회의를 느껴 왕자로서 누릴 안락한 삶과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출가(mahabhinis-kramana)한 그는 당신의 슈라만(사문)들처럼 걸식 유행하면서 수행을 했다. 그는 여러 수행자들을 만나 선정과 고행에 전념하지만 어느 것에도 만족을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의 나이 35세에 이르러 가야에 있는 한 보리수(pipal tree) 아래에서 명상을 하다가 깨달음(bodha, jnana)을 얻게 된다. 이것을 성도(成道)라 하는데, 이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 즉 ‘불타(佛陀)’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도 후 그는 전에 고행을 같이 했던 다섯 비구들에게 설법을 하기 위하여 베나레스 근교의 사르나트(sarnath)에 있는 녹야원(鹿野苑)에서 최초로 중도(中道, madhyammarga) 및 사성제(四聖諸, catvari-arya-satya)와 팔정도(八正道, astanga-marga)를 설하였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초전법륜(初轉法輪, 옴금-charka-pravartana)이다. 불타는 그 후 45년에 걸쳐서 마가다와 코살라 국의 도시를 중심으로 교화 생활에 전념하다가 쿠시나가라(Kusinagara, 현재의 kusinara)에서 80세를 일기로 하여 생을 마쳤다.
2) 불교의 이론
석가모니는 이 세상 모든 현상을 영원한 것이라고는 없으며 인생은 괴로운 것으로 보고, 이 무상함과 괴로움을 벗어나는 법을 설파하였다. 무상(無常)ㆍ무아(無我)를 이상으로 사성제(四聖諸)를 바르게 이해하고 팔정도(八正道)를 행하면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여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고뇌에서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의 가르침은 고(苦)의 해결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고가 어디에서 생기는가 찾아 냄으로써(集) 그것을 없앨 수 있는(滅) 실천적 길(道)이 분명해진다. 이를 사성제(4가지 성스러운 진리)라 하며, 그것을 실행하는 길(道)은 바로 팔정도를 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타는 흔히 종교의 특질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대부분 자기의 세계관에서 배제하였으나, 힌두교의 주된 교리 가운데 대체로 두가지 개념은 받아들였다. 업의 법칙과 윤회사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를 모두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이에 다소 수정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자아(自我, atman)라고 하는 것은 없다.”라는 불타의 사상체계에서 가장 난해하고 심오한 부분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우리들은 그 무엇인가를 ‘나의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않되며, 또 ‘나’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서도 않된다. 우리들 인간의 구체적인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정신적ㆍ물질적 요소나 기능 중에서, 그 어느 것도 ‘자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떠한 것도 ‘나’일 수 없다. 따라서 우파니샤드 등에서 상정하고 있는 인식의 주체가 되는 아트만의 존재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관과 객관의 대립은 소멸되고 만다. 이것이 이른바 무아설이다.
원래 이 무아(뭄스무, anattan)의 가르침은 아집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이 무아설은 어떠한 것도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되게 되었다. 즉 우리가 관찰하는 한 우리 주변의 것이든 아니면 우리 내면의 것이든 삶의 세계는 항상 유전(流轉)하며 끊임 없이 변화하는 상태에 있다. 세상의 중심이 되고 그 모든 세상일을 계획하는 존재라든가, 모든 것을 한 손에 거머쥔 천상의 주재자 따위는 없다. 존재 자체의 궁극적이고 비인격적인 통일이 있을 뿐이며, 개개인의 자아가 자신을 이제 ‘나’라고 부르지 않게 된다.
불타는 이 모든 것에 대한 경험을 ‘고해(苦海)’라고 하고, 이 괴로움은 열두 가지 원인과 결과의 사슬(十二因緣)로부터 비롯된다고 하였다. 12연기설은 인간에게 왜 생사의 괴로움이 발생하며, 또 멸할 수 있는가를 밝혀 주는 가장 체계적이고 완비된 이론이다.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실상을 알지못하기 (無明) 때문에 여러 가지 맹목적인 의지의 활동이 생겨 업을 이루고 (行), 여러 가지 의지활동이 있음으로써 의식이 생겨나며(愛), 의식적인 지각이 있기 때문에 정신과 육체의 현상이 생겨난다(名色). 정신과 육체의 현상에 힘입어 여섯 가지 감각(六入)이 형성되고, 여섯 가지 감각에 힘입어 밖의 대상과 접촉(258)함이 있게 된다. 밖의 대상과의 접촉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느낌을 받아들이게 된다(258).여러 가지 느낌을 받아들임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탐욕과 갈망이 생겨난다.(愛) 탐욕과 갈망으로 인해 집착하여 붙잡고 놓지 아니한다(258). 집착하여 놓지 않으므로 이 세상의 존재로 생겨난다(有). 존재가 있으므로 생명이 있게 되고(生), 생명이 있음으로써 늙음, 죽음, 슬픔, 고통 등이 생기게 된다(老死). 이렇게 12연기를 순차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또 거꾸로 무명을 없앰으로써 의지의 활동(行)이 없어지고, 의지의 활동을 없앰으로써 의식(識)이 없어지고, …… 늙음, 죽음, 슬픔, 고통 등이 없어진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존재의 여러 측면을 가리키고 있는 이 모든 법칙이 우연적으로 무질서하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정한 필연적 법칙성 내지 규칙성을 가지고 상호 연관 속에서 생명한다는 것이다. 아함경에서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없어지므로 저것이 없어진다.”라고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 철학의 기본적 핵심은 연기설에 근거를 둔 무아론과 무상론이라 할 수 있다. 무아론이 자아에 실체성이 없음을 말한 것이라면, 무상론은 모든 사물에 독립적 실체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이런 관념이 삶에 대한 인간의 의지를 약하게 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실제로 불타는 속세로부터 멀어져야 할 근본 이유를 여기에서 찾았다. 불타는 모든 사념할 수 있는 존재는 자기의 실존을 어지럽히는 세 가지 커다란 결함에 대면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영구하지 못함(無당259), 자아 또는 아트만은 궁극적인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無我) 그리고 괴로움(苦) 등이 그것이다(이것을 三法259)
현상계의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존재는 연속되는 변화 과정 속에 있으며, 그 근저에 깔려 있는 확정적인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거치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한다. 다른 모든 사물도 생기도, 머무르고, 달라지고, 없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끊임 없이 변화한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란 무상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여러 가지 인연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항상 변하고, 또 잠시라도 머물러 있는 일이 없다고 한다. 오직 무상한 제법의 순환만이 생사의 과정을 되풀이 할 뿐이다.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제행무상(諸行無常)하고 제법무아(諸法無我)하다는 사실에 어김 없이 수반되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상하여 끊임 없이 변화하고, 결코 진정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언제나 생성ㆍ소멸을 되풀이 하기만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불타는 근심과 비탄에 빠졌던 것이다. 생ㆍ로ㆍ병ㆍ사가 모두 고이며, 싫어하는 자와 만나고 좋아하는 자와 헤어지는 것이 고이고,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함도 고이다. 그런 연유로 해서 불타는 욕망이 끊어진 적정(寂靜)을 바랐고 끊임 없이 되풀이 도는 고통스러운 생성, 소멸의 반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영구한 경지를 추구했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인도인들이 추구해 온 해탈과 열반의 길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불타는 거의 불완전한 상태인 의식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불타는 인생이 온통 무상한 데도 감각적인 생활과 감각이 주는 작은 쾌락에 연연해하고 집착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은 역시 어리석고 무지한 소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삶과 소유에의 욕망과 갈구, 세계와 그 물질에의 집착 등이 윤회하는 인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며, 만약 이것을 제거할 수 있다면 윤회의 주된 원인이 소멸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타가 이런 결론에 이르기까지에는 삶과 인간에 대한 깊은 심리적인 분석을 거쳤다. 불타는 그런 분석에서 야기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어떻게 해답을 내릴 것인지에 대해 그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통해서 보여 주고 있다.
불타가 스스로 제기한 기본적인 윤리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괴로움을 소멸시키며 현명치 못한 삶과 소유에의 욕망을 떨쳐버리고 궁극적으로 해탈의 희열을 얻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흔히 내(自我)가 정말 실재하며, 현실 세계는 언제나 고정되어 있다고 착각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집착함으로써 인생의 모든 고뇌가 생겨난다. 불타는 이러한 인간의 안타까운 모습을 직시하고,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諸, Catur-arya-satya)를 제시하였다. 제(諸, satya)라는 말은 사실ㆍ진실ㆍ진리 등을 나타낸다. 그러한 제로서 고(苦)ㆍ집(集)ㆍ멸(滅)도(道)의 네 가지를 설하고 있다.
사제의 첫째는, 삶은 고(苦, dukkha) 라는 진리이다. 그러나 초기 불전의 팔리어에서는 두카라는 말은 수레바퀴에서 떨어진 축이나 관절에서 비어진 뼈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불타에 의하면, 삶은 바른 위치에서 벗어난 상태에 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 고통스럽게 운명지어진 이유이다. 태어남이 괴로움이요, 늙어감이 고로움이요, 질병이 고로움이요, 죽음이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자와의 헤어짐도, 미워하는 자와의 만남도,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함도,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하는 것도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받는 괴로움이다. 원래 불타가 출가한 이유도 바로 이 고를 발견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는 데 있었다. 불타의 근본적인 문제 의식이 바로 인생고의 해결에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집(集, samudaya)이라는 진리로써, 그 괴로움이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분석하는 데서 나왔다. 괴로움이 쌓이는 원인은 내가 애타게 바라는(261愛, trsna)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읻.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 하거나 피할 수 없는 것을 피하려 한다. 이런 경향성은 항상 마음 속에서 심한 갈망을 일으킨다. 우리는 이 갈망에 속박되어 자유롭지 못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이 갈망은 세상을 참모습 그대로 보지 못하는 데서 생겨나는데, 이를 무명(無明)이라 한다. 괴로움의 근원적 원인은 결국 이 무명에 있는 것이다.
셋째는, 멸(滅, nirodha)이라는 진리로 자기를 위한 욕망을 극복하지 않으면 않된다는 것이며, 욕망과 무명이 멸한 경지에서 열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타가 이상으로 한 목표인 열반이다. 이것은 등잔의 불을 끄듯이, 타오르는 욕망의 불길을 훅 불어 꺼버리는 것이다. 갈망과 무명이 사라져 버릴 때에 괴로움도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해탈의 경지요, 깨달음의 경지이다.
넷째는, 욕망 극복을 위한 방법으로서의 팔정도인 도(道. marga)라는 진리이다. 팔정도는 기독교의 십계(十戒)에 해당하며,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한 계율이다. 차이점이라면 십계는 어떤 때나 어떤 사람에게 나 꼭 같이 진실이며 구속적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팔정도는 순서를 따라 행해야 할 각각의 규범이라는 점이다.
첫째는 바른 견해(定見, samyak-drsti)이다. 곧 바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고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올바로 아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 나타난 모든 것은 영원히 불변하는 영혼이라는 것은 일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것이 생기고 없어지게 하는 그 근본 원인을 바로 보아야 한다.
둘째는 바른 생각(正思, samyak-samkalpa)이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는 올바른 견해와 함께 항상 올바로 생각하여 수행하여야 한다.
셋째는 바른 말(正語, samyak-vak)이다. 거짓말을 한다든가 타인을 중상한다든가 험담을 한다든가 쓸데없는 말을 한다든가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두 개인을 관철하려는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사람을 깨달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넷째는 바른 행위 (正業, samyak-karamanta)이다. 불타는 이에 대해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 부정(不貞)을 저지르지 말라, 주류를 마시지 말라”등의 다섯 가지 계율을 들고 있다.
다섯째는 바른 생활 (正命, samyak-ajiva)이다. 이는 그릇된 생활을 버리고 올바른 종교적 생활을 실천하는 것이다. 특히 출가 수행자는 재가신자의 보시를 받아 규율에 따르는 출가수행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섯째는 바른 노력(正精進, samyak-vyayama)이다.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이 올바른 용기로 마음을 닦는 것이다.
일곱째는 바른 사념(正念, samyak-smrti)이다. 네 가지 진리인 사성제를 명심하고 항상 기억하여 잊어비리지 않고 마음을 순일하게 하여, 잡념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팔정도의 마지막은 바른 명상 (正定, samyak-samadhi)이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는 구극적 진리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 바른 명상은 바른 사념보다도 한층 내면적이고 기본적인 계기를 이룩하는 것이다. 바른 노력과 바른 사념의 힘에 의해 바른 생각과 바른 생활로 구체화된 바른 견해는 바른 명상에 이르러 비로소 스스로를 완성하게 된다.
열반에 이르는 8가지 수행을 계(戒, sila), 정(定, samadhi), 혜(慧, prajna)의 삼학(三學)으로 나눌 수 있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이 심학을 실천하는 수행의 종교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무명을 없애기 위해 고와 무상과 무아를 깨닫는 지혜이다
3) 불교의 사상적 혁신
불타의 철학적인 개념을 고찰하려면 역설적이지만 우선 불타가 철학적인 사변은 길로서 부적당하다고 거부했던 사실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불타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은 구원을 위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불타는 극히 현실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런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인간의 처지와 직접 연관될 수 없는 사변적인 철학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불타의 관심은, 인간의 근본적인 어려움은 철학적인 사변이 아니라 감성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욕망의 주된 위험이 우리 앞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불타는 또 종교적인 봉헌도 구원의 길이 아니라고 거부하였다. 불타는 이미 언급한대로 마하비라와 같이 무신론의 입장을 취했다. 우주에는 각종 신과 여신, 마령(魔靈)그리고 그 밖의 인간이 아닌 여러 가지의 힘과 존재가 가득 차 있기는 하나 모두가 예외 없이 유한한 존재이고 윤회를 거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있기 이전에 이미 어떤 초월적이고 영원한 존재가 있어서 그 존재가 세상을 만들어 냈고, 또 인간의 운명을 정하며 인간의 소망을 들어 준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불타에게 기도를 한다든가 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행위라고 한다. 적어도 불타 자신은 그런 것에 의지하려하지 않았다.
불타는 또 비슷한 이유로 해서 베다에 의지하거나 그 많은 신을 공희로써 예배하는 것도 구원의 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고 브라만을 사제로 삼아 의지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했다. 마하비라와 마찬가지로 불타는 모든 제자들에게 구원은 자기 자신의 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정신적인 자기 수련에만 정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불타는 브라만 우월주의에 따라 제례의식의 관습에 빠진 브라마니즘을 개혁하여 다시 새롭게 만들고, 신성하고 생명력 있는 종교로 변혁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요소를 배격하였다.
첫째, 불타는 브라마니즘의 권위주의를 공격하였다. 불타는 브라만의 특권을 반대하면서 종교의 진리는 그들 소수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둘째, 불타는 종교의식을 거부하였다. 그는 브라만들이 신에게 올리는 제례는 무의미하다고 반대하였다. 제례의식은 영혼의 해탈과 자아를 극복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셋째, 불타는 형이상학적인 사변을 반대하였다.
넷째, 불타는 과거의 전통을 무조건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다섯째, 숙명론자들의 운명주의를 반대하고, 인생고의 소멸을 위해 스스로 정진할 것을 권고하였다.
여섯째, 불타는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요술 등 미신적인 요소들을 배격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불교는 기성 종교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은 혁신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첫째, 불교의 진리는 사람의 경험을 통하여 얻어진다고 보아 불교는 실증주의적이다.
둘째, 우주의 모든 존재와 존재하게 하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발견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불교는 과학적이다.
셋째, 현실에서 유리된 이론이라기 보다는 실생활에서 당면한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려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불교는 종교적 행동주의에 가깝다고 하겠다.
넷째,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인가에 관한 인간과 인간의 생활과정을 형이상학적이 아닌 심리학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불교는 심리학적이라 하겠다.
다섯째, 불타는 브라만의 계급차별주의에 강력히 반대하면서 사회의 지위를 막론하고 누구나 환영했다는 점에서 불교는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섯째, 자기 자신의 인생고를 극복하는 깨달음에 이르는 개인의 구원이 목적이라는 점에서 불교는 개인의 종교라고 할 수 있겠다.
4) 불교 교단의 형성과 삼장의 성립
불타가 갠지스 강 유역, 중부 인도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설법한 일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브라만들은 자기의 아들이나 또는 선택된 제자에게만 비밀리에 가르쳤으며, 또 진리는 그렇게 은밀히 전수해야만 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그런데 불타는 이러한 인습과 제한을 없애고 모든 사람에게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구원의 길을 믿는 신자들을 모아 상가(sangha)라고 불리는 교단을 조직했다.
상가라는 명칭은 불교 교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널리 고대 인도의 종교적 또는 사회적 조직을 상가 또는 가나(gana)라는 말로 불렀다. 처음에 상가라는 말은 단순히 집단집회회의를 의미하는데 지나지 아니 하였으나 점차 경제상의 조합,정치상의 공화국제 등의 의미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상가란 일반적으로 무리(衆, 和合衆)모여진 집단을 뜻한다고 보면, 상가란 인도 고유의 집단사회의 기초 조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신분제도로 굳어 버린당시의 사회조직 속으로 파고 들어가 만인평등의 불교 교설을 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교단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또한 국왕이나 도시 상공업자의 후원으로 불교 교단은 괄목하게 발전하였다. 마가다국의 빌비사라 왕도 귀의하여 라즈기르 교외에 죽림원을 세워 교단에 기부했고, 그의 아들 아자타샤트루도 신자가 됐다. 즉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마가다왕은 2대에 걸쳐 자이나교와 불교를 동시에 후원했다. 코살라국의 수도 슈라바스티의 장자 수닷타가 '기타의 숲'을 기부하여 기원정사를 세웠다고 한다.
이 일화로 당신의 도시 상공계급의 경제력의 발달을 엿볼 수 있다. 즉 토지를 소유하지 않고도 막대한 현금을 가진 상업 자본가가 대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넓은 땅의 매매가 이렇게 쉽게 이루어진 것은 화폐경제가 진전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불타의 열반 후 그의 교리는 갠지스 강 유역에서 널리 퍼져 나갔다. 승려의 수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일반 신도도 더욱 급속히 증가하였고 지배계층도 많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불타의 입멸 후부터 기원전 3세기의 아쇼카 왕 시대에 이르는 기간 중에 있었던 불교의 발전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시대야말로 불교 발전사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그 기간 중에 승려의 대회의가 여러 차례 있었으며, 18종파가 발생했다고 한다. 구전 불설(口傳 佛說)과 구전 교의(口傳交義)가 집성되었으며, 수식과 해석이 붙여졌고, 결국 경전화되었다. 그리하여 팔리어 경전(Pali-canon)이 편성되었는데 이것을 삼장(三裝, Tripitaka)이라고 부른다.
불타가 불법을 전할 때에는 오직 말로만하였으므로, 불타가 입멸한수에 제자 가섭(迦葉, kasyapa)과 아난다(阿難陀,Ananda) 등이 왕시성(王城267, Rajagrha)에서 불타의 가르침을 함께암송하였다. 그러므로 불타의 가르침이 일찍부터 구비전승(口碑傳承)으로 확립되어 되풀이되어 암송되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왕사성에서 처음으로 불타가 남긴 가르침을 결집할 때에는 가섭이 상좌가 되었고, 우팔리(優波籬, Upali)는 불타가 제정한 계율을 서술하였으며, 아난다는 불타가 설한 법을 구술하였다. 이것이 제 1차 불교 경전의 결집이었다.
그로부터 약 백 년 뒤, 베이샬리(vaisali)의 700 비구들이 모여 제2차 결집을 시도하였다. 그 목적은 계율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을 해결하려는 것에 있었다.
또다시 약 백 년 뒤, 아쇼카 왕이 파탈리푸트라(267氏城, Pataliputta)에서 1000여 명의 대덕을 모아 불전을 결집하였는데, 이 때 대중부(大衆部, Mahasanghika)와 '상좌부(上坐部, Theravada)의 분열이 생겼고, 경(經), 율(律), 론(論) 심장이 모두 갖추어졌다.
불교 성전을 총괄하여 이른바 삼장(經, 律, 論)이라고 한다. '장(藏)'이라고 번역된 '피타카'라고 하는 말은 원래 '바구니' '용기'를 의미 하지만 현재는 세 부문으로 크게 나눈 불교 성전의 각각의 부문을 장이라고 부른다.
경장(經藏, Sutta Pitaka)은 한 마디로 말해 불타의 교설을 말하며 제2결집 때 아난다가 송출(誦出)하였다고 하는 '법(法)'이 그 원형이다. 율장(律藏,Vinaya Pitaka)에는 출가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과 승단의 규정 등이 담겨져 있다. 이것은 제1차 결집 때 우팔리가 송출하였다고 하는 '율(律)'이 그 원형이다. 논장(論藏, Abhidhamma Pitaka)은 법(dhar-ma)에 대한 해석이며, 경의 취지를 밝힌 것으로 대부분이 불제자들이 논술한 것이다. 따라서 논장은 그 성립시기가 늦다. 논이 구비전승 문헌의 형태를 취하여 팔리어 정전(正典)으로 확립된 것은 아마도 수 세기가 지난 후의 일일 것이다.
5) 불교의 종교적 발전과 다변화
불타의 기본 입장은 천국에서 좋은 지위로 태어날 방법보다는 자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일이었다. 즉 불타의 입장은 자신의 처지를 바꾸기 위해 신에게 기원한다는 의미에서의 종교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불타의 불교에서 예배라든가 기도 따위는 무의미한 행위이다. 오직 지혜만이 주된 관심사가 되고, 그 지혜에 대한 진정한 앎은 출가수행자(僧侶)라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불교 본래의 철학적이고 심오한 특성을 이해하려면 어떤 특별한 자질을 갖춘 자들만이 제한된 범위에서 이해되었으리라 생각되기도 한다. 사실상 본래의 모습 그대로인 초기 불교는 대중으로부터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 것이다.
대중의 관심은 우선 불타라는 인물에 있었다. 따라서 샤키아족 출신의 한 현인이 전개한 그 합리적인 철학도 그의 따뜻하고 친근하며 존경스러운 인품을 매개로 한 것이었다. 그 교조인 불타는 자기 구원이라는 아르하트(阿羅漢)의 이상과 모든 생물에 대한 자비의 이상을 조화시켰고, 그러한 자비를 스스로 실천해 보였다. 그리하여 불타가 죽은 후에는 그의 어려운 가르침보다는, 깨달음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자비로움도 갖춘 그의 인격에 의지하려고 하는 추세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교 신자들도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교리의 이면에서 그것을 설한 인물을 부각시켜 그에게서 신격을 찾아냈고, 그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인간을 구제하고자 하는 의도로 받아들여 불타에게 지극한 공경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그 천상의 존재가 이 지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불타라고 하고, 그 몸 안에는 초월적인 힘을 나타내는 서른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인도뿐만 아니라 인도 밖에서도 훌륭한 사상가들이 철학적으로 심오한 불타의 이론을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대중들은 그들의 재능을 인정하고 존중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불교를 대중 나름의 취향에 더욱 부합하도록 그리고 자기들 나름의 욕구를 보다 잘 만족시켜 주는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즉 후세의 불교도들은 불교를 하나의 종교로 발전시키는 일에도 주력하였다. 이것은 불타 자신이 취했던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변질된 점이 많았다.
대중이 불교가 발전해 가는 과정에 미친 또 다른 영향이 있다. 대중은 이전의 관습과 세속의 관심을 그대로 지닌 채 불교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일반 대중은 고와 열반 등 불타의 가르침이라 불리는 것만을 신봉하지는 않았다. 대중은 그들의 오랜 전통, 즉 마을의 정령을 위무하여 화를 예방하고 주술의례를 행하는 데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대중에게 있어서 열반은 수 많은 내생을 거친 후에야 가능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승려들의 의식과 생활규범은 일상생활 속에서 쾌락도 함께 추구하고 있었던 대중으로서는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불상 앞에 앉아 다른 사람과 함께 경전을 낭독하는 일은 대중들의 마음의 평온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지만, 그 밖에도 가정생활의 즐거움과 같은 '업'으로 운명지워지는 일상생활의 쾌락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불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화를 겪어왔음을 보게 된다. 불교 내에서도 대단히 많은 형태의 종교조직과 의례, 그리고 신념이 발전하게 되었으며, 그 신앙의 기본적인 요소들에까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불교 전체를 총괄하여 볼 때에는, 힌두교와 마찬가지로 어느 하나의 단일교가 아니라 불교도 일군의 종교가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사한 모습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6) 불교의 전파
실제로 불교를 연구함에 있어서 두 가지 분명한 요소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 첫째는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불교도 그 시대와 문화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그가 브라마니즘적인 것에 대해서 반발했다는 것도 인도적인 상황에 비추어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둘째로는 불교의 '범아시아적'인 성격이다. 불교가 인도에서는 역사의 흐름과 함께 그 기반을 잃게 되었지만, 그것이 범아시아적인 종교로 기틀을 잡아가지고 다른 아시아 지역에까지 퍼져 나갔다는 점이다.
초기의 불교도들은 불타를 종교적 금욕수행자이자 진리의 발전자요, 스승으로 추앙했을 뿐 인간과 별다른 존재로 간주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불타를 신격화하게 된 데에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 외적으로는 불교가 인도의 종교적 전통과 환경의 영향 밑에서 노정(露呈)되었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불타가 거의 신적인 것으로 비쳐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적으로 본다면 불교의 사원에서는 불타의 인격 속에서 더 심오 하고도 위대한 의의를 발견하곤 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불타의 생애에 관해서는 몇 가지 구전이 있었으며 여기에다 비불교적인 전설도 들어와 본생담(本生譚, Jataka)같은설화집이 편집되었다. 자타카는불타의 전생(前生), 그의 탄생, 소년기, 구도 생활 그리고 해탈과 설법 등 다채로운 내용으로 되어 있어서, 불타의 전기를 쓰는데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사료(史料)에서 불타의 역사적인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그 대신 불타는 철학적으로는 법(dharma)이 되고 신앙적으로는 신격화되고, 문학적으로는 이상화된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n)이 된다.
불타의 가르침은 여러 면에서 당시로서는 놀랄 만한 힘을 지닌 통찰을 볼 수 있다. 우선 그는 베다나 우파니샤드의 신비스런 가르침을 전하는데에 사용되고 있던 산스크리트어가 아니라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말로써 이야기했다. 그러므로 이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종교사상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우파니샤드는 그 교의가 난해한 데다 산스크리트어로 씌어져 있다는 사실에 한층 더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구원도 우파니샤드를 이해해야 하므로 하층의 카스트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불타는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개방한 것이다.
자이나교가 아르다마가디어를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포교를 함에 있어 브라흐만 계층이 주로 사용하던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어느 한 지역에서만 두루 쓰이는 방언이라고 할 수 있는 팔리어(마가디어)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그 종교가 발생한 지방의 역사적 환경과 관련이 있음을 말해준다. 팔리어 성전에 밝혀진 초기 불교는 어디까지나 비브라마니즘의 입장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와 개인적 해탈을 추구하는 상좌부(소승) 불교에서 대중을 구제하는 대승불교로 전환함에 따라 산스크리트어로 된 소위 범어(Sanskrit) 경전이 나오게 된 것이다.
브라마니즘의 전통에 반기를 든 자이나교와 불교의 두 신흥교단은 서로 비판하고 또 다른 학파의 압박을 받으면서도 순조롭게 발전했다. 자이나교나 불교는 다 같이 윤회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해탈주의이며, 그 교의를 실천하는 주체가 인간의 인격 속에 있음을 내세우고 있다. 이런 점에서 윤회로 말미암아 인간의 계급이 나면서부터 고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브라마니즘과는 가치의 기준부터가 달랐다. 말하자면 외면적인 형식주의에서 내면적인 인간주의로 가치를 전환시킨 혁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브라마니즘에 반대하여 베다를 존중하지 아니하고, 고행과 희생을 경시하였던 불교는 결국 인도에서는 사회성을 잃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반면에 국경을 넘어 각 나라의 민간신앙을 흡수하면서 불교는 아시아 각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한편 자이나교는 인도적 성격을 지키므로 인도의 영역에서 그 독자적인 명맥을 유지했지만 국경을 넘지 못한 대조적인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이다.
불타는 현세의 삶은 전세와 내세 사이의 과도기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자기 만족을 얻기 위하여 타인을 괴롭히는 것은 어리석다고 가르쳤다. 불교 윤리의 근본인 자비는 그의 이와 같은 세계관에서 얻은 도덕관이었다. 불교는 브라만의 권위와 카스트 제도의 신분차별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크샤트리아와 바이샤 계급 사이에 환영을 받아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종과 신분에 차별적인 브라마니즘에 대하여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보편 타당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사상은 인간성의 고찰이며, 그 교단의 성격은 카스트 타파와 인간 평등에 있었으므로, 불교는 이미 성립 당시로부터 세계종교로서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는 아시아 각지로 널리 전파되어 동양인의 정신과 문화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불교는 두 가지 형식으로 전파되었다. 첫째로는 불교가 그 인접 국가에 하나의 인도 문명의 형식으로서 침투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도가 결코 이웃 나라를 정치적으로 지배했다는 것이 아니라, 인도의 종교ㆍ문화적인 위성국으로 인도화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경우에는 인도적 불교가 이 지역의 토착물화의 유일한 기반이 되었다. 둘째로는 종교ㆍ문화운동으로서의 불교가 비인도적인 문화나 문명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침투해 들어 갔다는 사실이다. 이 지역은 아무리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코 인도의 종교ㆍ문화적인 위성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경우에는 불교가 복합 가치체계 중의 한 가지 요소 구실을 했을 뿐이다.
7) 남방불교권과 북방불교권
불교권은 오늘날 크게 남방불교권과 북방불교권으로 나뉘어진다. 남방불교권은 전통적인 보수불교(소승불교라고도 함)가 지배적이며, 북방불교권은 소위 대승불교, 즉 기원후에 나타난 새로운 불교가 그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전통적인 보수불교는 현재 스리랑카, 버마, 타이, 라오스, 캄보디아 등지에서 신봉되고 있다. 이들 나라의 불교도는 스스로를 ‘테라바딘(Theravadin)'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테라바다(’thera'는 長老를 뜻하며, ‘vada'는 도, 학파, 교설, 주장, 이즘을 뜻하므로 ’어른의 가르침‘이란 뜻이 된다. 한역으로는 이것을 상좌부 불교라 한다)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이것은 팔리어로 기록된 성전에 의거한 전통적인 계통이다. 이 계통은 불타가 가르치고 실천한 것은 가능한한 충실히 지키려고 한다. 그래서 그 동안 상당한 변화를 거쳐 왔음에도 초기 불교에 비교적 가까운 사상과 생활을 보존하고 있다. 또 그들은 초기 불교의 순수하고 바른 성전을 엄격하게 전승해 왔다고 자부하고 있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불교는 소승불교(Hinayana, 여기에는 ‘yana'는 인생의 바다를 건너가는 ’수레‘란 뜻이므로, ’hinayana'란 말은 소수의 수도자들만이 타는 ‘적은 수레’라는 뜻이 됨)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것은 ‘열등한 실천법’이란 뜻을 가진 말로서 후대에 발전한 대승불교도들이 종래에 있던 불교의 독선적인 실천법을 혹평하여 부른 말이다. 따라서 대승 이전의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불교 혹은 남방불교의 신도들은 이러한 호칭을 당연히 싫어한다. 그래서 소승불교라는 호칭 대신에 남방 불교 또는 테라바다 불교(Theravada Buddhism)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흔히 소승불교라고 불러왔지만 이 말은 대승불교가 나온 이후에 경멸조의 말로 쓰였기 때문에 이들 나라에서는 소승불교란 말을 사용하기를 꺼려한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테라바다 불교의 전통은 팔리어로 정리된 경전에 의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아쇼카 왕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 M모두-dra)가 세일론(스리랑카)에 들어가 포교하여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 테라바다 불교의 특징은 종파가 없다는 것이다. 팔리어 경전은 그 내용이 거의 동일할 뿐만 아니라 주석서까지도 동일하다. 따라서 이는 대승불교가 수많은 종파로 나뉘어져 있고 불전 해석도 다양한데 반해 대단히 균질성이 높다 하겠다.
테라바다 불교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승려는 엄격하게 출가자의 법을 지킨다는 점이다. 테라바다 불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초기 불교의 많은 특징들을 변형시키지 않고 그대로 전승해 왔다. 그래서 승려의 태도도 항상 보수적이고 전통적이었다. 테라바다 불교는 그것만이 불교의 유일하고도 진실한 형태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선언한다. 또 그것을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타의 참된 가르침을 전해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동남아시아는 기원전 3~2세기경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인도의 문화를 받아들여 인도 문화의 영향권 내에 들어갔다. 불교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부파계 불교, 다음에는 대승불교, 밀교가 들어오고, 그 위에 힌두신들에 대한 신앙과 의식들도 도입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인도 종교들은 다양한 형태로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그 기능을 다하였다. 이처럼 일종의 혼돈상태라고도 할 수 있는 다종 다양한 신앙 가운데서 점차 상좌부 불교만이 사람들의 주요한 신앙 대상으로 정착되어 왔는데, 그 이면에는 각각 그 지방이나 나라에서 상좌부 불교를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국교적인 위치를 공고히 해 준 뛰어난 국왕의 힘이 뒷받침되어 있다.
예를 들면 버마(미얀마)에서는 11세기 중엽에 아노라타(재위 1044~1077년, Anawrahta) 왕이 남부 버마의 몬족(族)을 정복하여 파간(pagan)에 수도를 정하고 몬족을 통해 접하게 된 스리랑카계의 상좌부 불교를 국교로 제정했다. 타이에서도 13세기 중엽에 수코타이 왕조의 제2대 왕인 람캄헨 왕이 스리랑카계의 불교를 국교화하였다. 또 캄보디아에서는 일찍부터 불교와 힌두교가 혼합된 종교가 오랫동안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9세기에 이루어진 앙코르와트의 장엄한 불교 유적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러다가 자야 바르만 7세 때인 1181년에 스리랑카로부터 상좌부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되었는데, 14세기 중엽에 이 앙코르 왕조가 타인들에 의해 붕괴되자, 캄보디아에서는 상좌부 불교가 정착하게 되었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상좌부 불교는 자국의 불교가 쇠퇴하여 상가의식의 집행에 필요한 비구의 수가 부족할 때나 세속화되었을 때, 같은 계통의 다른 나라의 불교를 수입하여 법통을 계승해 왔다.
스리랑카에 있어서 11세기에 비자야 바후 1세(1153~1186)가 상가(sangha) 재견의 한 수단으로써 버마에 사신을 파견한다. 당신의 버마 국왕은 뛰어난 영주 아노라타 왕이었으며, 수도는 파간이었다. 아노라타 왕은 부파계의 불교와 대승불교, 밀교, 힌두교 등 갖가지 종교가 혼합되어 있었던 버마지역에 상좌부 계통의 불교를 확립하여 오늘날의 버마 불교 상가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그는 스리랑카에서 팔리 성전과 상좌부 불교를 전승해 온 몬족 출신의 비구인 신 아라한(Shin Arahan)에게 사사받고 있었다. 버마 상좌부의 장로를 초청하고 싶다는 비자야 바후 1세의 요청에 응하여 아노라타 왕은 장로들을 파견하는 일 외에도 많은 경전을 함께 보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스리랑카에서 버마로 전래되었던 상좌부의 법통은 다시 스리랑카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반대로 13세기가 되어 버마의 파간 왕조가 멸망함으로써 버마의 상좌부도 함께 쇠퇴하고 만다. 그리하여 페구 왕조의 담마체디 왕(Dhammaceti, 재위 1460~1491년)은 1476년에 비구와 사미집단을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정식으로 수계를 받게 했다. 그 후로는 이 때에 스리랑카에서 들여 온 정통 불교인 스리랑카파가 버마 상좌부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대승불교는 그것이 전파된 지역의 풍토적, 사회적 환경에 언제나 적절하게 적응하여 왔다. 대승불교는 항상 일반 민중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해왔기 때문에, 대승불교 계통의 승려들은 상좌부 불교의 승려들이 보여 온 독선적이고 오만한 태도를 공박한다.
북방불교는 스스로를 대승불교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큰 수레’, ‘위대한 실천법’이란 뜻이다. 현제 네팔, 부탄, 시킴, 티베트, 몽고,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등지에서 신봉되고 있다. 북방 불교의 성전은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한문 등의 여러 언어로 전승되고 있다. 이 계통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타적인 활동에 의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주창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남을 돕고 구제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살이라고 부르고 있다. 보살의 출현은 대승불교의 뚜렷한 특징이다. 대승불교는 교리적으로 융통성 있는 입장을 취하여, 만일 불교가 풍토적ㆍ문화적 상황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된다면 그에 따라 교리도 달라질 수 있고, 또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도 교리는 변화되어 가면서 발전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두 계통의 불교 가운데에서 상좌부는 교리적인 면에서나 실천적인 면에서나 동남아 각국을 통하여 끈기있게 단일성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이에 비하여 대승의 각 파들은 실로 다종 다양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대승의 태도가 개연성이 있고 자유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8) 불교 쇠퇴의 원인
불교는 이미 석가모니가 입적한 뒤 제자들이 제1차 불전 결집을 할 때부터 두 파로 나뉘었다는 설이 있다. 마우리아 왕조에서 쿠샨 왕조에 이르는 동안 잡다한 문화를 가진 민족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불교 내의 분파과정은 불가피했다. 불교는 불타가 죽은 뒤 계율을 엄격히 존중하는 교조적인 성격이 강했다. 즉 개인의 해탈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경향이 강하게 내려왔다. 그러나 제2차 불전 결집 때부터 이러한 종래의 경향에 비판적인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파작용은 아쇼카 왕의 통제로 당대에는 크게 표면화하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계율과 일신의 해탈을 주로 하는 보수적 입장이 고수되어 제3차 불전 결집은 이 상좌부 불교를 정통화하는 선에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진보적인 불교도 측에서는 불교의 경전을 자유로이 해석할 수 있어야 하며 형식과 계율에 얽매여서는 안된다고 보아, 일신의 해탈보다는 중생 제도를 주장하였다. 이것이 곧 대승불교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카니쉬카 왕에 의한 제4차 불전결집 때에 그 기초가 확립되었다. 이는 여러 문화와의 수용과 사회발전에 따라 불교의 폭넓은 포용성이 필요하였던 시대적 요구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인도에서의 불교 세력은 쿠샨 왕조의 복고적 브라만 보호 정책은 힌두교 발전에 고무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브라마니즘에 반기를 들고 개혁적인 종교로 발전해 온 불교는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불교가 인도에서 확고한 명맥을 유지하지 못한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이슬람교의 침입에 따른 그들의 불교말살을 하나의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외부적인 요인이라 하겠고, 내재적인 요인은 다음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불교는 무신론에 그 바탕을 두고 브라만에 의해 형성된 계급 제도와 제식만능주의를 배격하므로 만민평등주의를 제창한 일종의 브라마니즘에 대한 혁신적인 개혁종교였다. 그러나 인도라는 토양에서 배태한 불교는 인도의 전통적인 종교관념인 윤회와 업사상을 받아들였다. 이는 신분제도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힌두이즘의 중심사상인 것이다. 그리하여 신분제도를 무시하면서 누구나 불타가 될 수 있다던 불교의 평등사상이 빛을 잃고 만다.
말하자면 브라만의 윤회와 업사상을 인정한 불교는 인도의 전통 사상에서 크게 탈피하지 못했고, 브라만의 신분제도와 이를 정당화해온 사상이 불타의 평등사상을 압도해 버렸다. 현세의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면서 살면 내세에는 더 좋은 상태로 태어난다는 업 사상이 신분제도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어, 인도인들은 불교의 혁명적인 평등사상에도 불구하고 엄격하고 불평등한 계급 제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불교는 카스트의 무의미함을 설하고 실제로도 그러한 구별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신분제도를 타파하는 사회개혁운동으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말하자면 불교는 종교운동에 그치고 말았으며, 사회운동으로는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국왕, 고급관리, 상인, 지주 등의 상류 계층에서 성장하고 발전한 도시형 종교였다고 할 수도 있겠다.
불교는 신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예배의 대상도 없는 독자적인 종교였으나 그러한 상태가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불타의 생존 중에 이미 신도 가운데는 그를 신격화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불타는 이에 반대하였으나 후세에 와서 이러한 추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대다수의 다른 종교가 그러하듯이 불교도 몇 개의 종파로 분열된다. 그 중에서도 신도수가 많은 대승불교는 불타를 특히 신격화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완강하게 거부한 형이상학적인 사상도 가미하였다. 우주에 천국과 지옥을 마련하고 성자(聖者)를 앉히고 또 향과 촛불과 성수(聖水)로 예배도 올렸다. 이처럼 신을 무시했던 초기 불교가 대승 불교에 와서는 불타를 중생구제를 위한 신의 화신으로 인식되면서 불교는 힌두이즘과 크게 다를 바 없게 되었다.
불타를 사실상 신격화시킨 대승불교는 힌두이즘과 여러 면에서 공통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곧 불교가 서민 대중 속으로 파고 들게 했으나, 인도 내에서 힌두이즘에 융해되어 주체성을 잃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불교의 토착화라기보다는 불교의 힌두교에의 접근에 지나지 않는다. 불타 자신이 완전한 신으로서 예배의 대상이 된 것도 불교가 힌두이즘의 신관을 채택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불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브라마니즘에 반기를 든 개혁종교로 출발하였다. 불교가 포교를 함에 있어도 브라만 계층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어느 한 지역에서만 두루 쓰이는 방언이라고 할 수 있는 팔리어(마가디어)를 사용한 것은 브라마니즘의 전통에서 탈피하겠다는 불교의 정신과 불교가 발생한 마가다 지방의 역사적 환경을 고려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팔리어 성전에 밝혀진 초기 불교는 어디까지나 비브라마니즘의 입장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었으나, 후대에 내려와 개인적 해탈을 추구하는 테라바다 불교에서 대중을 구제하는 대승불교로 전환함에 따라 산스크리트어로 된 소위 범어(산스크리트어)경전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것은 불교 문화가 비브라만 주의를 그 본질로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브라만 문화에 이끌려 들어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진언(眞言, mantra)과 다라니(dharani)에 힌두교적인 신앙과 의식이 가미되어 7세기경에 홍성한 밀교(密敎)는 불교의 변질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내부적으로 불교가 힌두교의 샥티즘(Saktism)과 탄트리즘(Tantrism)의 영향을 받아 그 자체의 종교적 본질을 잃은데다, 신앙적인 견지에서 쉬바나 비슈누 신에 대항할 근거를 상실했다. 게다가 대승불교는 철학적 깊이를 더하여 대중으로부터 실질적인 감화력을 잃게 된다.
7~8세기에 이르러 불교에 위협을 주는 시대가 시작된다. 북인도에서도 이와 마찬가지 현상을 볼 수 있는데, 특히 타밀에서는 힌두교 박티(bhakti) 신앙의 흐름이 도도한 대하를 이루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의 종교 생활을 변모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박티 신앙의 흐름을 이어받은 비슈누파와 시바파의 성자들이 출현했다. 불교 본래의 생경하고 참신한 종교성이 점차 희박해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신에 대한 정열적 사랑을 역설하는 박티 운동의 출현은 남인도 불교의 쇠퇴를 더욱 촉진하게 되었다.
굽타 시대의 불교는 힌두신과 힌두의 주술적 의례를 대폭 수용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의 독자적인 것으로 변용되었다기 보다는 힌두적인 관념이나 의례를 그대로 수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힌두적인 요소를 그대로 받아들였음을 감안한다면 불교가 힌두화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는 힌두 세계에서 더 이상 이단적인 종교로서의 근거를 상실하여 불타가 비슈누의 권화(화신)로 간주되고 말았다. 현재 힌두교도들은 불타를 비슈누 신의 아홉 번째 화신이라고 믿고 있어 그들에게 있어 불타는 힌두이즘의 주신 비슈누 그 자체인 것이다.
비슈누의 신자들이 기원후 4세기경부터 불타를 비슈누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수용하게 된 것은 틀림없이 불교가 독자적인 운동으로서 확립되는 데에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했던 것은 불교자체에서 창조적인 지성의 활력이 쇠퇴했다는 점일 것이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는 자이나교도 힌두의 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이나교 응집력은 매우 견고한 것이어서, 재가신자들은 독자적으로 12계율의 의무사항을 지키고 있었다. 12종의 통과의례도 확립되어 있었다. 자이나교도는 힌두세계 속에 서도 의례나 생활양식상의 독자성을 주장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사회적으로도 실체가 확실한 단일 집단으로서의 응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곧 자이나교 집단이 힌두세계에 정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불교도는 힌두사회 안에서 정착도가 현저히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탄트릭(tantric) 밀교 시대에 들어서게 되면 불교 본래의 깨달음과 거기에 근거를 둔 윤리적 삶의 종교성은 힌두교의 그것과 아무런 차이도 없게 된다. 불교의 독자적인 사상이 철학으로써 연구되거나 주장된 것은 사실이지만, 불교도의 실천적 생활에는 그다지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없었던 것이다. 불교도로서의 연대감이나 교단 전체로서의 생활에 대한 강제력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응집력 있는 집단으로 만들만한 요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한다면 이슬람의 침입이 북인도 불교의 쇠퇴를 채찍질하고 문화적 타격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불교쇠퇴의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교에 불어닥친 치명적인 강타는 12세기에 일어났다. 수세기 전부터 인도에 들어와 있던 회교가 1197년에 와서는 드디어 불교의 마지막 거점을 침략했던 것이다. 8세기 이후에 터키계 이슬람 교도가 북서 인도에 진출하게 되는데, 11세기의 가즈니 왕조와 고르왕조 등도 북부 인도에 들어왔다. 그들은 우상을 혐오하여 아프가니스탄, 간다라, 카쉬미르 등지에서 불상의 얼굴을 깎아버리거나, 목을 치거나, 또는 사원을 파괴해 버렸다. 그리하여 12세기 말에서 13세기에 걸쳐 벵갈과 비하르의 불교 사원은 이슬람 군대의 침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경전이 소각되고, 건물이 파괴되었다.
이런 연유로 해서 북인도에서 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에 걸쳐서 불교는 그 이전부터 내적인 이유로 힌두세계에 접근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마침내 힌두 세계에 흡수되어 그 모습을 상실해 갔던 것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여 후일에는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였지만, 원래 불교의 근본적인 세계관은 인도 고유의 사상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이와의 밀접한 상호관계를 통해 전개되어 불교는 인도의 사상과 문화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결국은 인도사상의 커다란 물줄기 속으로 흡수되고 만다. 그래서 불교는 인도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고, 인도의 사상이라는 토양에서 나와 다시 자신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역사적으로 불교는 힌두교에 흡수되어 그 모습을 감추었다. 따라서 힌두교도에게 있어서 불타의 가르침은 모두 힌두교 안에 살아 있는 것이 된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불교는 힌두교라는 큰 세계안에 하나의 움직임이었으며, 불교는 독창적이고 체계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힌두교에게 이질감을 주지 않는 종교였다. 그리고 불타의 가르침이 망각된 것은 아니다. 불교의 가장 귀중한 가르침의 대부분은 인도 사상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대 인도의 불교는 힌두교라는 ‘세계’를 바탕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다. 생활문화에 관심을 두는 한, 불교도와 힌두교도의 사회 및 생활양식이 그렇게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교는 힌두교 ‘세계’라는 맥락에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불교와 힌두교는 다른 종교라기보다는 같은 힌두교 중의 다른 종파로 간주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9) 불교 신전에의 힌두신 도입
아쇼카 왕 이후 브라만들은 불교와 같은 대중적 종교운동에 그들 나름대로의 사회적 저변 확대를 위해 인도의 원주민들 사이에 계승되어 온 토속신앙을 포괄적으로 흡수하여 이를 더욱 대중적 신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법전류의 정비를 통해 사회 윤리 체계를 확립하고 수행의 체계를 발전시켰으며, 인도 고유의 토착신앙을 폭 넓게 받아들여 대중의지지 기반을 확대하였다. 마누법전이 정리되고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와 같은 서사시가 생겨나면서 거기에 대중적 신앙의 대상인 시바 신과 비슈누 신이 등장하는 것은 브라마니즘에서 힌두이즘으로의 완전한 성립을 뜻하는 것이다.
베다 시대 이래 인도의 신들은 지극히 다채롭다. 이 신들은 오랜 세월동안 인도 사람들과 함께 살아왔다. 그러므로 당시의 불교도들조차도 힌두 세계의 신들에게 무관심할 수는 없었다. 불타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일상생활 속에 함께 지내 온 대중의 신들을 부정해 버릴 수는 없었으며, 또 그럴 필요도 굳이 없었던 것이다. 힌두의 신들 가운데에서 불교에 흡수되어 동양에까지 전파된 신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주요한 몇 가지를 들어보면 사라스와티 여신(?財天, Sarasvati), 락슈미 여신(吉祥天, Laksmi), 가네샤(聖天, Ganesa), 카릇티케야(天, Karttikeya), 쿠베라신(285, Kubera) 등이 있다. 베다 시대의 신들도 있다. 인드라 (帝 Indra), 바루나(水天, Varuna), 아그니(火天, Agni), 수르야(日天, Surya), 찬드라(月天, Chandra), 브라마(梵天, Brahma), 야마(야5, yama), 약사(285, Yaksa), 약시니(야5, Yaksini)등도 마찬가지이다.
약시니는 본래 풍요로움과 다산을 위한 지모신(地母神)이었는데, 이는 초기의 불교도들의 생활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기원전 2세기부터 1세기초에 걸쳐 이루어진 불교 유적인 산치나 바르후트 등지의 불탑, 탑문이나 난간 등에는 풍만한 약시나 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약시니의 남성형인 약샤는 점차 쿠베라 신의 부하인 한 무리의 귀령으로서 성격을 분명히 나타내게 되는데, 불교 경전에도 그 활약상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관음신앙은 애초부터 현세적 이익과 관련이 있어 힌두산을 대폭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천수관음(千手觀音, Sahasrabhuja)은 인드라 신이나 비슈누, 시바 같은 힌두의 신들이 불교적으로 변용된 것이다. 그 밖에 많은 관음들이 힌두신의 성격에서 차용되거나 음역되어 그대로 불교경전에 전해지고 있다. 북서 인도로부터 중앙 아시아와 중국 등지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관음은 그 지역의 토착신앙을 흡수하여 불교적 민중신앙으로 발전하게 된다.
불교에서의 사천왕(四天王)은 각각 간다르바(286, Gandharva), 쿰반다(286, Kumbhanda), 나가(286, Naga), 약사(286, Yaksa)라는 귀령 무리의 주재신으로서, 힌두세계의 ‘4방위 신’이라는 관념이 불교에 도입된 것이다.
굽타 시대 이후에는 불교 문화속에 많은 힌두적 요소가 스며든 동시에 힌두교 속에 스며든 불교의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힌두교 속에 투영된 불교의 영향으로는 대략 굽타 시대 말기에 불타가 비슈누 신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흡수된 사실을 들 수 있다. 또 5~6세기경의 푸라나 문헌에는 1년 중 어느 특정일이 ‘불타 예배의 날’로 정해져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가 한편으로 자신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점차 힌두사회 속에서 나름대로의 위치를 구축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래 불교는 자등명과 법등명이라고 하는 불타의 가르침이 단적으로 지적하듯이 스스로의 청정한 생활을 실천하는 가운데 법을 구현해 나가는 ‘삶의 방식’이었다. 따라서 불교는 분명히 무신론으로 출발하였으며, 의례나 수행 과정에 있어서 예배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시대에는 보신불, 응신불 사상이 정착되고 여러 보살들도 증가하여, 유신론적 신앙 형태로 성립되어 갔다. 그러면서 굽타왕조 이후에는 힌두교도가 신봉하던 여러 신들이 대량으로 불교에 유입되어, 불교 문화 속에서 갖가지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힌두적 요소를 대폭적으로 수용하여 불교 판테온이 형성된 것인데, 이것은 7세기 이후의 밀교에서 완성된 판테온으로 계승되었다.
10) 불교 문화의 힌두화
굽타 시대에 이르러 불교에 미친 힌두 문화의 영향은 힌두적 신들의 수용과 주술적 의례나 예배방식뿐 아니라, 불교 미술에도 미치고 있다.
초기 불교에서는 불타나 연장자인 비구에게 그 제자나 재가신자들은 존경의 뜻으로 합장하여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산치 스투파의 조각에는 탑 둘레를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고 오체( 五體: 이마, 양 무릎, 양 팔꿈치)를 땅에 댄 채로 예배하는 장면이 있다. 또한 향, 꽃, 음식물을 바치거나, 때로는 가무음곡도 공양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힌두교의 예배양식이 불교에 도입된 것이다.
법현의 파탈리푸트라 불사참관기록을 보더라도 수레를 장식하며 거기에 불상을 싣고 목적지까지 옮겨가는 예배나 제례가 힌두교도를 포함한 일반인들의 참여 속에 불교승원을 기반으로 성행하고 있던 상황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의례의 한 방법으로 베다 시대부터 전래된 불의 세사인 호마(護摩, homa) 의례도 수용되었음이 3세기초의 마등가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 경전의 다른 번역에서는 흙으로 제단을 쌓고, 쇠똥을 땅에 바르며, 겨자 따위의 매운 것을 불 속에 던져 넣는 호마의식을 ‘불교 의례’로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다가 기술하고 있는 “고행과 야즈나(예배) 등이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과는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굽타 시대에는 이미 불교에서도 질병의 치료뿐만 아니라 현세 이익적인 기복의례에는 주술이나 주구가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힌두사회에서 시행되고 있던 여러 가지 주술적 요소, 주문, 주구가 거침없이 불교로 유입되어 불교화한 것이다. 다라니와 만트라(眞言)도 그 한 예이다. 그러나 불교의 전통적인 입장에서 보면 주술은 불교의 본의와는 배치되는 것이다.
불교 문화 속에 흡수된 힌두요소는 판테온과 의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예술분야에도 나타난다. 그리하여 매우 세속적이고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바나 비슈누 같은 신의 모습을 불교에서는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초기의 불보살상은 마투라에서나 간다라에서나 모두 간단한 옷을 걸쳤을 뿐, 장식품은 전혀 지니지 않았다. 그런데 굽타 시대 이후의 불상들이 호화로운 왕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힌두신상의 모습을 불교가 흡수하였기 때문이다.
7세기 이후에 나온 아잔타나 기타의 석굴에 남아 있는 부처나 보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머리에 보관을 쓰고 금은제 허리띠를 두른 모습이다. 아잔타의 유명한 지연화보살과 그 밖의 다른 불, 보살들은 브라만이 몸에 둘러야 할 성삭(聖索: 브라만의 입문식 때 어깨에 걸치는 신성시되는 끈)을 몸에 두르고 있다. 이것은 카스트 제도에 반대하였던 불교가 굽타 왕조 이후에는 광범위한 힌두적 색채의 사회 안에서 브라만의 사회적 우위를 인정하고, 불교의 보살에 그러한 권위를 차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부다가야의 난순기둥이나 아잔타에서 보이는 불교의 미투나상도 힌두 세계에서 받아둘인 것이다. 미투나(Mithuna)란 남녀 한 쌍을 의미하는 것으로, 남녀를 한 쌍으로 표현한 회화나 조각을 미투나상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비구가 수행하여야 할 사원에 그러한 세속적인 조형이 나타나 있는데, 카주라호 사원과 코나라크에 있는 태양 사원에서 힌두교의 미투나군상을 볼 수 있다.
불교는 카스트라는 차별적 사회제도에 대하여 처음에는 항상 반대되는 입장을 취해왔다. 3세기에 이루어진 아슈바고샤의 저작이라고 하는 ‘금강침론(Vajrasuchi)'에도 카스트ㆍ바르나 제도에 대한 불교측의 통렬한 비판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 후의 경전에서는 카스트에 대한 비판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굽타 시대의 문헌이나 비문에는 불교도라는 카스트가 독자적으로 존재한 자취는 없다. 또 카스트적 힌두세계 이외에 불교도라는 집단이 독립해 있었다는 흔적도 역시 없다. 아마도 굽타 시대 이후에는 힌두적 색채가 광범위하게 사회 전반에 정착하여, 브라만의 사회적 우위가 굳어지자, 카스트 제도의 실정을 그대로 수긍해 버리지 않았나 싶다. 불타나 보살에 성삭을 두른 것도 결코 브라만의 권위를 자신들의 보살에 표현하려던 것임에 틀림없다.
결국 불교도라고 해서 카스트를 벗어나서 힌두사회를 이탈했던 것도 아니며, 또한 그들 나름대로 독자적인 사회집단을 형성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불교도는 힌두사회 속에 있었기 때문에 불교도일 수 있었던 것이다.
6. 이슬람교
1) 인도적 상황과 이슬람의 여파
오스만 터키 제국 성립 당시의 인도는 여전히 남북의 차이가 현저해서 북부에서는 터키ㆍ아프간계의 이슬람 여러 왕조가 델리를 중심으로 흥망을 거듭하는 한편 남부에서는 각지에 할거하는 힌두 여러 왕조가 존속함으로써 남북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남부 데칸 고원의 여러 왕조를 굴복시키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해서 16세기 중엽에 확립한 통일정권 무굴제국은 분명히 이슬람 교도에 의한 통일정권이다. 하지만 그 성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는 북인도를 무대로 하여 활약해 온 이슬람교도의 장기간에 걸친 전사(前史)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는 이슬람교도에게 점령당한 인도의 땅은 언제나 인도 바깥에 중심을 둔 제국들의 외곽지로 간주되어 왔었다. 무하마드의 영토조차도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그의 왕국 고르의 속주일 뿐이었다. 그러나 무하마드가 죽자 그의 왕국은 분열했고, 인도의 영토를 지배하도록 그가 임명했던 부하 장군들은 고국으로부터 고립당하고 말았다. 또한 중앙 아시아의 모험가와 부의 추구자들도 때로는 가족까지 데리고 그 이슬람 군대를 따라 먼 북서 지방으로부터 흘러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장군들 중의 한 사람인 쿠투브딘 에이바크가 무하마드의 인도에 있어서의 영토를 독립한 이슬람 왕국이라고 선언한 후에는 일반 이슬람인의 유입이 늘어나 거의 민족이동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이주자들의 대다수가 델리 부근에 집결했다. 에이바크는 거기에 궁전을 지었고, 그 후계 왕조들이 16세기까지 델리의 술탄으로서 통치했다.
그러나 인도에 쇄도한 거칠은 터키인 병사들과 일반인들은 힌두 문화에 자력으로 대항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고 정교한 완성된 문화를 갖고 오지는 못했다. 중앙아시아의 터키인은 이슬람교로 개종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상당히 조야한 민족이었다. 그들이 지닌 교양은 모두 페르시아인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때문에 12세기에 와서도 그들은 아직도 거의 표면적으로만 우아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욱 조야하고 사나운 침입자가 인도의 제도 속에 흡수되고, 충실한 힌두교도가 된 예는 그 때까지 몇 번이나 있었다. 라즈푸트족도 그러한 개종자의 하나였던 것이다.
보통의 추세였다면 힌두교는 당연히 여기에서 새로운 도래자를 그 이전의 모든 도래자들처럼 힌두화시켜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의 진전은 갑자기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갔다. 13세기초 중앙 아시아의 초원 지대에서 몽고인이 모습을 나타낸다. 날쌔고 잔인한 몽고인은 분별 없는 행위로 대륙을 뒤흔들었다. 칭기즈칸(Genghis Khan)이 거느린 군대는 사마르칸드를 비롯하여 터키의 정력과 페르시아 문화로 번영한 그 밖의 중앙아시아의 대도시들을 강탈했다. 이슬람 세계에도 멀리 바그다드까지 공략해 들어가 많은 학자들을 마구 학살하고 도서관을 불태웠다.
북인도는 아마도 거대한 산이 장벽이 된 탓인지 몽고의 내습을 모면한 극소수의 이슬람 교도의 영지의 하나였다. 그래서 북인도는 순식간에 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당시의 이슬람 문화는 세계에서도 최고도로 발달한 문화였으므로 피난민 중에는 학자나 예술가도 많았다. 이처럼 재능 있는 피난민들이 13세기에 인도로 밀려 들어와 인도를 높은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 혼합 문화의 강한 힘 때문에 힌두교는 이전과 같은 힘을 발휘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 각지에 강한 압력을 넣고 있던 델리의 야심적인 술탄의 세력에 눌려 힌두교가 후퇴하는 일 또한 없었다. 술탄은 그럴 생각만 있었다면 피난민들의 종교적 지식에 의해 자기의 식견을 높이고 페르시아의 훌륭한 예술과 민속에서 지적인 자극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전쟁열에 들떠 정복욕에 굶주린 군인이었다. 1세기 이상에 걸쳐 그들은 동쪽과 남쪽에 계속 침략군을 파견하여, 힌두스탄 평원 전부를 정복하고 광대한 데칸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그러나 델리의 술탄의 권력은 불안정하고 단명했다. 그들은 같은 이슬람 교도인 벵갈과 데칸의 총독들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총독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델리와 손을 끊고 독립을 선언했다. 또 술탄은 차츰 인도아 대륙을 완전히 손에 넣는다는 희망은 정치적으로는 물론 지리적으로도 무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갔다. 라즈푸타나는 전술상 거의 통과가 불가능한 지형이어서 남쪽의 광대한 지방에는 도달할 수도 없는 데다가 그야말로 아주 불가능한 요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술탄의 권력이 약화되자 라즈푸타나와 남인도에서 힌두교도의 왕들이 다시 지배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그 후 붕괴의 속도는 점점 더하겨, 인도는 불과 몇 안되는 대제국 시대를 제외하고는 항상 그러했던 제국(諸國)의 분열과 상쟁의 정치판도를 계속하게 된다. 즉 몇몇의 이슬람 국가들과 힌두국가들이 계속 확장ㆍ안정ㆍ분열이라는 정해진 코스를 더듬어 간다.
이러한 상태는 새 침입자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12세기의 라즈푸트족과 마찬가지로 16세기의 연약하고 무능한 술탄도 외적의 침입에 대적할 힘이 없었다. 결국 침입자가 쳐들어왔다. 이 또한 아프가니스탄 평원을 노도처럼 가로질러 인도 북서부의 산길을 넘어온 이슬람교도였다. 이 이슬람 침입군도 역시 탐욕스러운 모험가들이었다.
이처럼 이슬람 지배 하의 인도 문화는 활기가 없었으나, 인도의 영토적 확장에는 크게 기여하였다. 북쪽으로 카시미르, 벵갈 지방 등 히말라야 산맥 지역이 본격적으로 인도의 역사 무대에 편입된 것은 이 때의 일이다. 또 인도 주변 지역에 대한 회교화는 이후 인도를 종교적으로 분열케하는 씨를 뿌린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2) 이슬람문화의 유입
무굴 왕조의 성립에 앞서, 약 300년에 걸쳐 전 인도의 절반을 넘는 지역을 지배한 인도의 초기 이슬람 여러 왕조는 터키ㆍ아프간계의 이슬람교도였다. 그들은 본래 유목생활을 하던 소박한 후진민족으로 일찍부터 격심한 종교투쟁에 시달려온 서아시아의 셈, 이란계의 선진적인 여러 민족의 이슬람교도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슬람의 교의는 이들 터키계 이슬람교도 사이에 놀라울 정도의 순수성을 가지고 받아들여졌고, 청교도와 같은 엄격성으로 실천에 옮겨졌다. 이슬람 발홍시대의 소박한 정신을 잃고 관교화하고 사치에 빠져 타락하고 나약하게 된 아라비아계 이슬람교도나 지주ㆍ상업 귀족을 지배층으로 하여 우아한 페르시아 문화와 사변철학ㆍ신학을 애호한 이란계 이슬람교도의 지배 밑에서 종교적인 정열을 잃어가고 있던 서아시아의 이슬람 사회는 이들 새로운 터키계 이슬람교도에 의해서 청신한 기풍이 불어넣어졌다. 인도에 침입하기에 앞서 이미 서아시아의 수준 높은 이슬람 문화에 접해서 그 세례를 받고 있던 이들 터키계 이슬람교도는 독자적인 종교ㆍ문화를 지니고 지배층으로서 인도사회에 군림하였다.
바로 이러한 부분이 인도에 침입해 온 이민족이 어느 민족이든 오랜 전통을 지닌 인도사회에 동화ㆍ흡수되는 것과 전혀 다른 점이다. 힌두사회는 비로소 자기 문화와는 다른 가치를 지니고 한층 보편적인 성격을 가진 높은 문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도사회에서의 이 두 가지 이질적인 문화의 융합은 엄청난 유혈의 희생을 수반하며 진행되었다. 그 결과 나타난 심각한 인도사회의 이원성의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뼈아픈 상처를 남기고 있다.
7. 시크교
카비르의 영향을 받아 서북인도의 펀잡 지방에서는 나나크가 시크(Sikhs: 나나크를 스승으로서 숭배하고 따르는 ‘제자들’이란 뜻)라 불리는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였다. 1469년 라호르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나나크는 북부 인도에서 박티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태어났다. 시크교의 창시자이며 제1대 구루(스승: 시크교도의 최고 지도자)인펀잡 출신의 힌두 신비주의자 나나크는 진리를 탐구하기 위하여 하리드와르, 델리, 베나레스, 자간나트 사원 그리고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여러 성지를 비롯해서 힌두교의 주요 순례지를 방문하였다.
카비르와 마찬가지로 그는 유일 절대신을 신봉하였고, 우상숭배와 의식을 금하였으며,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 모두가 같다는 범신론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시크교는 주로 힌두이즘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이슬람의 유일신 사상을 강조하여 우상숭배를 배척한,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은 개혁과 힌두교의 종파라고 할 수 있겠다. 교리상으로 나나크의 입장은 크게 다른 두 신앙의 안목을 혼합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단순한 형태를 보여준다. 이러한 응축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중심개념, 즉‘창조주’인 유일신의 주재(主宰)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카스트의 차별과 모든 의식을 무시하였고, 힌두교와 이슬람교간에 차이가 없다고 했다. 나나크도 신은 유일한 것이며 브라흐만과 슈드라, 그리고 힌두교, 이슬람교들이 모두 같은 신을 믿고 있다고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는 점차로 대중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 갔으며, 특히 농민, 대중들 사이에 많은 추종자들을 갖게 되었다.
나나크의 신조와 실천은 대단히 회유적이고 평화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나나크가 세운 종교는 세월이 흐르면서 박해를 받게 되고, 따라서 그 신자들도 칼의 힘에 의지해서 극히 자기방어적인 신앙으로 변할 수 밖에 없는 독특한 운명을 겪는다. 시크교는 열 명의 구루를 거치는 사이에 점차로 교단조직을 엄격화하고 군대조직도 편성하여 무굴 왕조의 황제권과도 대립하게 되었으므로 여러 차례 종교 탄압을 받을 때가 있었다.
나나크 이후에 시크교의 공식적인 우두머리로 아홉 명의 구루가 차례로 계승하였다. 초기에는 정숙주의(quietism)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시의 시크교도들은 평화주의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규범에 따라 살았다.
그러나 제5대 구루 아르준(Arjun, 15814~1606)은 보다 자기방어적이고 호전적인 태도로 전환하였다. 아르준은 아므리트사르(Amrtsar)에 시크교의 사원인 황금사원을 짓기 시작했으며, 아디그란트(Adigranth)라고 불리는 시크교의 경전을 편찬하였다. 그 안에는 나나크와 그의 후계자들이 설교한 내용들을 총망라하여 수록하였다. 그리하여 아디그란트는 시크교의 성전이 되었다. 그 곳에 담긴 송가 가운데 절반은 아르준이 손수 지은 것이고, 나머지는 주로 나나크의 작품이며, 또 2,3,4대 구루가 지은 것과 자야데바, 남데바, 카비르 등이 지은 것도 여러편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시크교단은 그들의 특유한 언어, 성전의례 그리고 중심지를 갖게 되었고, 교단은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이 아디그란트가 바로 유명해지자 엄격한 회교도였던 자항기르는 정치적으로 모반을 했다는 죄목으로 아르준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죽기 전에 아르준은 자기 아들 하르 고빈드(Har Govind)에게 “충분한 무력을 갖추어라. 가능한 한 강한 군대를 길러라”라고 훈시해 놓았다.
구루 하르 고빈드(1606~1645)는 아버지의 유언을 충실히 지켰다. 주위에는 무장한 경비대를 두었으며 처음으로 시크교도의 요새를 세웠다. 그리하여 군복무를 자원한 시크교도 수천 명이 하르고빈드의 깃발 아래 모여 들었다. 시크교도들이 이제 부유하고 아름다운 사원을 가지고 일종의 국가의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하자 주위의 회교세계에서는 점점 더 그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시크교도는 이미 인도 북서부 지방의 전체 균형을 위협하는 하나의 정치적ㆍ사회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9대 구루 테그 바하두르(Te호 Bah역)가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 황제에게 불리어 가서 이슬람교를 받아들일 것을 거절하자 1675년 처형당하였다. 이처럼 시크교에 대한 탄압과 박해가 시작되자 그를 계승한 구루 고빈드 싱은 시크교도를 일종의 전투세력으로 형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형제의 우애 속에서 시작된 시크교는 독립세력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19세기에는 마하라자 란지트 싱의 인솔 하에 펀잡 지방을 장악하였다.
제10대 구루 고빈드 싱(Govind Sin호, 1675~1708) 시절에는 회교와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파상적인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위대한 영감을 얻었다 하여 칼의 세례(Khande 야 Pahul)를 통한 정화(khalsa)제도를 통해 위대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고빈드 싱은 이것이 신의 뜻이라고 믿었다.
어느 날 다섯 명의 추종자(그 가운데 세 명은 이른바 하층 카스트 출신이었다)에게 신앙을 우해서라면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를 주어 신실성을 시험한 끝에, 고빈드 싱은 쇳그릇에 물을 담고 거기에 인도의 향료를 섞으면서 양날 칼로 휘저어 음료수(amrt)를 만들었다. 다음에 그 다섯 명으로 하여금 그 물을 다섯 모금씩 마시게 하고 남은 물은 각자의 머리와 눈에 다섯 차례씩 뿌렸다. 이렇게 그들은 세례를 받은 후에 시크교도들의 전투 구호가 된 ‘Waheguru jika Khalsa, Waheguru ji ka Fateh(정화는 신의 뜻이고, 승리는 신의 것이다)’라는 외침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도록 명받는다.
그 후로 이 다섯 사람과 또 후에 칼사에 가입한 사람들 모두가 ‘tld(sin호)’, 즉 ‘사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항상 5K의 용모를 해야 했다. kes(머리와 수염을 기른다), kangha(빗), kachh(짧은 속바지), kara(쇠팔찌), kirpan(칼) 등이다. 이 밖에도 그들의 눈에는 안보이는 존재로는 오직 한 분의 신만을 예배할 것과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유일하게 신성한 물건인 ‘그란트’를 숭경할 것, 구루를 존경할 것, 해뜨기 전에 일어나 찬 물에 목욕하고 그 다음에 명상, 기도할 것 등을 서약했다. 그들은 또 모든 흥분제, 특히 술과 판(씹는 담배)을 멀리 했으며, 규정된 방식으로 한 칼에 죽인 동물이라면 그 고기를 먹어도 좋다고 허락되었다.
구루 고빈드 싱 자신도 ‘싱’의 한사람이 되었다. 첫 다섯 사람을 ‘싱’으로 만든 다음에 이번에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세례를 주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카스트에 관계 없이 모든 계층의 사람에게 개방된 새로운 종교집단을 열었다. 심지어 인도의 최하층민까지도 포함해서 수많은 하층민이 그 조직에 들어가기 위해 몰려와서는 엄숙한 칼의 세례를 거친 후 겁많은 불가촉민 또는 온순한 하층민이던 신분을 떨구어 버리고 자유롭고 용감한 전사가 되어 최고 카스트 사람과도 동등한 지위로 탈바꿈 하였다. 이에 대해 상층 카스트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불안해 했을 것은 당연하다.
청결한 생활과 가리지 않는 식생활 덕분에 그들은 강건한 체격을 갖게 되었고, 확고한 신앙의 열정은 그들로 하여금 전장에서도 무서운 용기를 발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고빈드 싱은 막강한 회교 통치자 아우랑제브와의 싸움에서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구루로서 자신을 계승할 것이라는 기대를 걸었던 아들 사형제를 모두 잃었고, 고빈드 싱도 1708년 결국에는 회교도 암살자의 칼에 목숨을 잃고 만다. 그러나 그는 미리 자기가 죽은 후에는 ‘그란트’를 구루로 삼으라는 유언을 해 두었다. 시크교도는 그대로 복족하였다. 그 후로 시크교도는 인간 구루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에 그란트의 신성한 권위를 숭경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아므리트사르의 ‘황금 사원’에서는 매일 ‘그란트’에게 왕과 같은 예우를 바친다.
고빈드 싱 시대 이후 시크교의 정치적인 역사는 전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다. 펀잡 지방에서 시크교를 중심으로 영주층이 세력을 강화하자, 무굴제국은 힌두교 세력을 저지할 목적으로 이를 탄압하였다. 시크교도들은 이에 저항하여 전주집단을 형성하였는데, 18세기 중엽에는 대연합체를 형성하였으며, 1760년대에는 아프간군과 싸워서 펀잡 지방의 전역을 그 지배 하에 넣기도 하였다. 시크교도는 여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얼마 후에는 펀잡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1845년과 1848년에 영국군대가 시크교도를 제압하기 위해 몰려오자 그들은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마침내 1849년에는 최후의 시크 통치자 둘립 싱(Maharaja Dhulip Singh)이 막강한 영국 군대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기에 이르렀으며, 충성의 서약으로 빅토리아 여왕에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Koh-i-noor 다이아몬드를 증정하였다.
그 후 시크교도는 영국인 정복자가 자기들을 존중한테 보답하여 영국인과의 약속을 결코 저버리는 일이 없었다. 이른바‘인도 폭동:Indian Mutiny(1857년에서 1858년 사이에 일어났던 벵갈 원주민의 반란)’이 터졌을 때에도 칼사의 싱들은 회교도에게 억압당했던 과거를 상기하고는 영국 편에 서서 인도를 구하는 일에 협조하였다.
그러나 1947년에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복립하게 되자 파키스탄 영내에 있던 시크교도와 회교도 사이에 격렬한 폭동이 벌어졌다. 이 때 인도를 떠나는 회교도들과 교환되어 최소한 250만 명의 시크교도가 파키스탄을 떠났다. 인도에 와서 시골에 정착한 시크교도는 경제적으로 심한 곤란을 겪어야만 했다.
오늘날 인도에는 대략 1000만 명의 시크교도가 있으며 시크사회는 계속 확장되어 가고 있다. 그들을 구별하는 큰 특징은 turban(머리에 감아 쓰는 두건)과 턱수염 그리고 남자들의 긴 머리카락인데 그들은 신이 그들에게 하사한 신체는 완전하고 본래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다.
터번은 완전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대다수의 시크교도들은 가족의 이름에 singh(사자)이란 이름을 덧붙이고 있으나 붙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인디라 간디가 시크교도의 경호원에 의해 살해되고 일어난 폭동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난 뒤, 시크교도들의 상당수가 자신들이 지켜 온 외향적인 전통을 파기하는 경우가 부쩍 많이 늘었다. 그들은 단 하나의 신을 숭배하는데 그 신은 sat(진리)이며 akal(영속)이라고 불린다. 그들은 ‘신은 지상에 화신하지 않는다’고 믿었으며 신을 우상으로 상징하지도 않았다. 고빈드 싱의 사후 종래의 구루 중심으로 이끌어져 오던 시크교는 granth(성전) 중심으로 내려와 현재 시크의 가정과 사원에는 그란트를 안치한 신성한 장소를 두고서 날마다 이를 암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