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철학

인도불교 교단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쇠퇴I_(9)

수선님 2021. 3. 14. 12:59

III. 맺음말

 

본문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불교는 인도의 풍토에서 발생한 종교요, 철학으로서 초기불교로부터 부파불교, 대승불교로 발전하면서 5~6세기경까지는 교리가 완전히 조직되어 이때까지 발달한 인도사상의 모든 것을 융합·통일하여 그 정수를 갖추어 가장 이상적인 종교가 되었다.

초기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드가야(Bodhgaya)의 보리수 아래서 성도하신 이후부터 불멸 후 100년까지의 사이의 불교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불교가 성립하여 그 초기 교단에 아직 분파가 생겨나지 않은 시대의 불교를 초기불교라고 보는 것이다. 초기불교 교단은 초기 우빠니샤드시대(800-500 B.C)의 뒤에 나타난 것으로 상고시대의 철학 제 4기의 소산이다. 제4기는 갠지스강의 하류지역인 현재 바라나시(Vārāṇasi)와 빠뜨나(Patna) 지방을 중심으로 이동한 시대로서 이 시대는 바라문교의 전통을 무시하고 자유사상가가 배출되어 비바라문적인 思潮가 크게 일어나 쉬라마나(Srāmaṇa, 沙門)종교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의 여러 가지 종교, 철학사상들을 『梵]綱經』에서는 ‘62見’ 또는 363의 논쟁가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력한 학파는 육사외도와 불교이다. 이들을 인도철학에서는 전통적 이대 분파중 ‘無派(Nāstika darśana)’라고 분류한다.

초기불교의 교단은 부처님이 고행하던 시절에 함께 수행하였던 5비구들에게 初轉法輪한 바라나시의 녹야원에서 최초로 성립되었다. 律藏에 의하면, 4인 이상의 귀의자가 있을 때, 僧伽(Saṁgha)가 성립된다고 하였다. 율장의 규준에 따르면 최초의 상가는 5비구로 구성된 ‘遊行 止丘僧伽’로 볼 수 있다. 그 후에 부처님은 바라나시에서 長者(seṭṭhi)의 아들 耶舍(Yasa)와 그의 부모, 그리고 처등을 제자로 삼아, 최초의 在家의 제자, 즉 우빠사까(Upāsika, 優 婆塞)와 우빠시까(Upāsikā, 優婆夷)가 되었다고 한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석가족의 젊은 청년들이 출가한 후, 阿難의 주선으로 부처님은 자신의 양모 마하빠자빠띠(Mahāpajāpati)의 출가를 허락하여 비구니 상가가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比丘, 比丘尼, 優婆塞, 優婆夷의 전체 불교도를 총칭하는 말로서 ‘四衆’이 완성되어 교단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초기불교의 교단은 上下 모든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교단의 중심을 구성하는 것은 출가 수행자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당시 인도 사회에서 엄격한 카스트 제도가 당연시되었던 분위기에서 인간 누구에게나 계급이나 남녀의 구별, 귀천에 관계없이 완전히 평등하게 법을 설함으로써 萬人成佛의 길을 밝혔다. 이것은 인도의 종교·철학사에 있어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부처님은 인간 평등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평등관을 상가의 제도나 운영에 그대로 적용시켰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러한 보편적인 가르침의 영향으로 교단은 점차적으로 확장되어갔다.

불교 교단을 지칭하는 말인 ‘僧伽’는 원래 보통명사로서 불교 교단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 용어가 종교단체의 명칭으로 쓰여지기 전부터 정치적 단체나 상공업자의 조합 등을 의미하는 말로 쓰여지고 있었다. 불교교단 초창기에는 불교교단의 명칭으로서 ‘상가(saṁgha)’나 ‘가나(gaṇa)’가 함께 채택되어 똑같이 사용되다가 불교교단의 법률인 ‘律(vinaya)’이 확정될 무렵부터 ‘상가’가 불교교단의 정식명칭이 된 것이다. 그 후 상가는 화합된 무리(和合衆)가 계율에 의거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조직을 의미하게 되었다. 상가에 입문한 사람은 자신의 해탈을 위해 노력하면서 또한 자기가 소속한 집단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노력하여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세상의 일들을 함께 하고 서로 위로하고 다툼이 없고, 우유와 물이 화합하듯이 자비스런 눈을 갖고 사는 비구의 모임을 ‘화합중’이라고 하며, 이러한 부처님의 교단은 세상 사람들의 최고의 福田이다.

 

상가의 생활은 개인으로서는 깨달음을 얻도록 노력하는 생활이고, 진리와 합일한 생활을 하도록 하는 애쓰는 생활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 존중하며 구성원이 일체가 되어 수행에 전념하면 거기에는 참된 평화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상가생활의 실천은 출가자의 경우 비구는 250계가 주어지고, 비구니에게는 348계가 주어진다. 초기불교에 있어서 출가생활은 세속의 생활을 떠나 종교적 실천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생활로 들어가 실제로 집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인간 생활에 결부되는 여러 가지 속박을 떠나 홀로 조용한 장소에서 좌선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수행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초기불교 교단의 출가자들은 홀로 한적한 곳에서 선정 수행하는 것이 理想이었다.

출가자들은 당시의 사문의 생활양식을 채용하여, 여러 지역으로 遊行하면서 이른 아침에는 근처의 入家에서 탁발을 하고, 공양을 마치면 나무 아래나 계곡 산 속 동굴, 묘지 등에서 禪定을 닦으며 노숙을 하였다. 당시의 수행생활은 ‘四依止(nissaya)’로 표현하기도 한다. 糞掃衣, 乞食, 樹下坐, 腐爛藥이 그것이다. 문자 그대로 출가 – 집을 떠난 사람 –의 생활을 하였다.

인도의 기후는 매년 7월부터 ‘몬순’의 영향을 받아 많은 비가 내린다. 하천은 홍수가 나서 범람하며, 이 기간 동안 출가자의 유행생활은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래서 처음에 비구들은 이 시기가 되면 각자 오두막집을 짓고 그 속에서 수행했지만, 차츰 공동의 피난처를 마련하는 관습이 생겨서 마침내 安居(Vassa) 혹은 雨安居가 정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우기에 사문들은 한 곳에 머무는 습관이 있었다.

이에 따라 출가 수행자들은 초기에 각자가 자신의 친척·친지 등에 의지하여 우기인 3개월 동안에 매일 탁발할 곳을 확보한 다음, 그 가까이에서 거주하면서 수행을 했다. 초기 교단 비구들의 식생활은 乞食托鉢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安居地는 도시나 마을 가까이에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의 차이에 따라 住處(āvāsa)와 園(ārāma)이라고 두 가지 형태의 안거지가 생겨났다.

일반적으로 주처는 비구들이 일시적인 안거지로서 만든 것이고, 안거가 끝난 뒤에는 내버려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원은 도시나 마을 가까이 있는 과수원이나 화원 등을 말하며, 이는 소유자가 상가에 기증하여 ‘僧伽의 園(saṁgha ārāma, 僧伽藍家)’이라고 했으며, 비구들의 영구적인 안거지가 되었다. 이 곳에 그 지역에서 재력있는 재가신도가 精舍(vihāra)를 지어서 기부하였다. 정사는 처음에는 명상과 수도를 위한 장소나 오두막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교단이 발전하고 낳은 비구들이 공동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대규모의 건물이 건조되자 ‘僧院’을 의미하게 되었다.

 마가다의 빔비사라(Bimbisāra, 頻毘娑羅)왕이 부처님의 명성을 듣고 竹林園(veluvana)을 라자그리하(Rājagṛha, 王舍城)의 장자 須達多(Sudatta)가 祇樹給孤獨園(Jetavana-Anāthapiṇḍikāma), 즉 祇園精舍를 기증한 것이 園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이러한 정사의 건립을 비롯하여 초기의 불교교단을 경제적으로 지원한 것은 마가다국의 왕실이나 여러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 즉 長者들이었다. 비구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주로 정사를 중심으로 하여 수행에 전념하였다.

초기불교의 교단성립 시에는 홀로 조용한 곳에서 선정 수행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으나 점차 우안거를 계기로 하여 영구적인 거주처인 정사가 건립되면서 비구들은 정사를 중심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승원생활이 정착되면 비구는 항상 동료들과 함께 정사에 정주하게 되므로 우안거때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일로서 布薩(Uposatha)의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포살은 오래 전부터 바라문들이 월 2회 성스러운 날 재계하는 습관으로 단식이나 절식을 하면서 청정한 생활을 하는 관행이었다. 부처님이 성도한 후 몇 년 지나서 빔비사라왕의 권유로 부처님께서 이것을 채택하여 실행하게 되었다. 포살은 후에 정비된 형식으로 한 달에 2회, 15일과 30일에 같은 지역(界, sīmā)의 출가수행자가 모여 波羅提目叉(prātimokṣa), 즉 출가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의 조항이 낭독되는 것을 듣고, 자기반성을 통해 죄과를 고백참회하는 의례이다. 초기교단에는 포살이 도입되어 비구·비구니·재가 신자 모두가 이를 실행하였다. 재가신자의 포살은 매월 8,14,15,23,29,30 즉 六齊日에 사원을 참배하고, 설법을 듣고 출가 수행자들에게 음식을 보시하는 등, 八齊戒를 지키는 일을 말한다. 출가 수행자의 포살은 참회·고백에 의해 상가의 청정성을 유지하는 의례가 되었다. 이것이 잘 지켜지는 것은 상가의 존속과도 관련된다. 또한 포살은 상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연대의식을 낳는 원천이기도 하였다. 포살과 우리교단과 연관시켜 생각하여 보면, 오늘의 우리교단 구성원 깨달음 체득을 위해 여법하게 포살의식을 실천하는 것이 正法護持의 길이다.

출가 수행자들이 승원에 정주하는 생활로 정착됨에 따라 정주하는 비구의 생활 습관도 변화되어 고정되어 갔다. 이를테면 사의지(nissaya) 가운데 樹下座도 적어졌으며, 糞掃衣는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托鉢, 乞食하는 습관은 남아 있었으나 점차적으로 정사안에 재료를 비축하여 두고 재가의 고용인이 승원안에서 조리하는 것으로 변천되어 갔다. 陳棄樂에 대해서도 율전은 오줌이 아니라 고가의 약초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유행의 편력생활에서 정사에 정주하는 생활로의 전환된 상가는 출가수행자들이 함께 살고 배우며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행위규범이나 수행법, 나아가서는 세계관을 함께 배우고 전승행 나가는 장소가 되어 부처님의 교법과 교단을 존속시키는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출가수행자들이 정사로의 정착생활은 교단이 발전하는 거점이 되어 훗날 교단이 분열되었을 때, 특정한 지역의 이름을 붙인 교단 명칭이 많았던 사실도 이러한 상가의 토착화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앞에서도 고찰한 바와 같이 부처님 생존시의 상가의 발전은 四大聖地 중심의 지역으로 ‘지방교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부처님의 입멸직후부터 100년까지의 상가의 발전은 먼저 ‘불교의 중국’이라고 하는 중인도에서 닥키나빠타(Dkkiṇāpatha, 南路), 즉 서남인도(Ujjain)쪽으로 포교가 되었다. 웃자인을 중심으로 발전한 초기교단은 후에 남방불교(Vibhajjavāda)로 발전하는 거점이 되었다. 좀 뒤에 발전한 다름 초기교단은 서북인도로 통하는 교역로상에 잇으며, 북동쪽의 쉬라와스띠에서 남쪽의 웃자인으로 가는 길과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마투라까지 확대되었다고 한다. 후에 이 지역에서 設一切有部교단이 크게 발전했다고 한다. 상술의 상가의 발전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중인도(마가다)

 

웃자인 스리랑카

: 南傳

 

 

 

 

중인도(마가다)

 

마투라 서북인도(간다라 까쉬미르)

: 北傳

 

 

 

 

 

 

 

 

[출처] 인도불교 교단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쇠퇴I_(9)|작성자 만남 창조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