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송 열반송(悟道頌,涅槃頌)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송]
1.경당각원(鏡堂覺圓禪師1244-1306)
2.경산학월(慶山鶴月禪師1917-1979)
3.경성일선(敬聖一禪禪師1488-1568)
4.경한백운(景閑白雲禪師1298-1374)
5.경허성우(鏡虛惺牛禪師1849-1912)
6.고봉원묘(高峯原妙禪師1238-1295)
7.고암상언(古庵祥彦大宗師1899-1988)
8.고한희언(孤閑熙彦禪師1561-1647)
9.관조스님(觀照1943-2006)
10.괄허취여(括虛取如禪師1720-1789)
11.구산수련(九山水蓮禪師1910-1983)
12.금오태전(金烏太田禪師1896-1968)
13.금타벽산(金陀碧山禪師1898-1948)
14.금화광덕(金河光德大宗師1927-1999)
15.나옹혜근(懶翁惠勤禪師1320-1376)
16.나찬선사(懶瓚禪師 생몰연대 미상)
17.남산정일(南山正日禪師1932-2004)
18.남포소명(南浦紹明禪師1235-1308)
19.뇌암정수(雷庵正受禪師1146-1208)
20.다릉인욱(茶陵仁郁禪師1025-1072)
21.대매법상(大梅法常禪師752-839)
21.대위선과(大潙善果禪師1079-1152)
23.대혜종고(大慧宗杲禪師1089-1163)
24.동곡일타(東谷日陀禪師1929-1999)
25.동산양게(洞山良价禪師807-869)
26.동산혜일(東山慧日禪師1890-1965)
27.동진경보(洞眞大師慶甫 868-948)
28.만공월면(滿空月面禪師1871~1946)
29.만송행수(萬松行秀禪師1166~1246)
30.만암종헌(曼庵宗憲禪師1876-1957)
31.만해선사(卍海禪師1879-1944)
32.묘연비구니(了然比丘尼)
33.무문혜개(無門慧開禪師1183-1260)
34.무산설악(雪岳霧山禪師1932-2018)
35.무외영허(無畏映虛禪師1792-1881)
36.무주청화(無住淸華禪師1923-2003)
37.무준사범(無準師範禪師?-1249)
38.무학자초(無學自超大師1327-1405)
39.묵담성우(黙潭聲祐禪師1896-1981)
40.묵암최눌(黙庵最訥禪師1717-1790)
41.문희무착(文喜無着禪師 820-899)
42.방온거사(龐蘊居士 ?-808?)
43.백봉김기추(白峯金基秋1908-1985)
44.백운경한(白雲景閑禪師1299-1375)
45.백파긍선(白坡亙璇禪師1767-1852)
46.범해각안(梵海覺岸禪師1820-1896)
47.법전도림(道林堂法傳1925-2018)
48.법정스님(法頂大宗師1932-2010)
49.법장인곡(仁谷堂法長禪師1941-2005)
50.법장고봉(法藏高峰禪師1351-1428)
51.벽안법인(碧眼堂法印禪師1901-1987)
52.벽허원조(碧虛圓照禪師1657-1734)
53.보조지눌(普照知訥禪師1158-1210)
54.보화선사(普化禪師 ?-861)
55.부대사(傅大士 善慧大師497-569)
56.부설거사(浮雪居士, 新羅時代)
57.부용도해(芙蓉道楷禪師1042-1118)
58.부휴선사(浮休禪師1543-1615)
59.사명유정(四溟大師惟政1544-1610)
60.상월새봉(霜月璽篈大師1687-1767)
61.상월원각(上月圓覺大祖師1911-1974)
62.서경보일붕(一鵬徐京保禪師 1914-1996)
63.서산대사(西山大師) ►131. 청허휴정참조
64.서암선사(西庵1946-2003)
65.서암사언(瑞巖師彦禪師?-887)
66.서옹상순(西翁尙純禪師1912-2003)
67.석옥청공(石屋淸珙禪師1272-1352)
68.석우보화(石友普化禪師1875-1958)
69.석전정호(石顚鼎鎬선사1870-1948) ►속명 박한영
70.석창법공(石窓法恭禪師1102-1181)
71.선하자선사(禪荷子禪師조선 선조 때)
72.설잠선사(雪岑禪師1435-1493매월당)
73.성림월산(聖林月山大宗師1912-1997)
74.성철선사(性澈禪師1912-1993)
75.소동파蘇東坡(東坡:蘇軾1036-1101)
76.소요태능(逍遙太能禪師1562-1649)
77.수산성념(首山省念禪師926-993)
78.숭산행원(崇山行願禪師1927-2004)
79.승조선사(僧肇禪師383-414)
80.신수대사(大通神秀大師606-706)
81.아암혜장(兒庵惠藏禪師1772-1811)
82.열당조은(悅堂祖誾禪師1234-1308)
83.영가현각(永嘉玄覺禪師665-713)
84.영운지근(靈雲志勤禪師 ?-820?)
85.영파성규(影波聖奎禪師1728-1812)
86.영조선사 오도송(悟道頌)
87.영희선사 오도송(悟道頌)
88.오석세우(烏石世愚禪師1301-1370)
89.오조법연(五祖法演禪師1024-1104)
90.용성진종(龍城辰鍾禪師1864-1940)
91.운허용하(耘虛龍夏禪師1898-1980)
92.원각상월(圓覺上月祖師1911-1974)
93.원감충지(圓鑑國師沖止1226-1292)
94.원광경봉(圓光鏡峰禪師1892-1982)
95.원담진성(圓潭眞性大宗師1926-2008)
96.원묘국사요세(圓妙國師了世1163-1245)
97.원수행단(元行端禪師1255-1341)
98.원오극근선사(圓悟克勤禪師1063-1135)
99.원진국사승형(圓眞國師承逈1171-1221)
100.원증국사 ►135. 태고보우국사 참조
101.원효대사(元曉大師617-686)
102.월성월정선사(月城禪師1710-17780)
103.월저도안(月渚道安禪師1638-1715)
104.월하종정노천당(老天堂月下1915-2003)
105.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
106.이목서운사(二木瑞雲禪師1903-1995)
107.인곡법장(仁谷法長大宗師1941-2005)
108.일연스님(一然禪師1206-1283 )
109.일타선사 ►24. 동곡일타선사 참조
110.임제의현(臨濟義玄禪師 ?-867)
111.자운성우율사(慈雲盛祐律師 1911-1992)
112.장사경잠(長沙景岑禪師 ?-868)
113.장졸수재(張拙秀才禪師8-10세기경)
114.제심두순(帝心杜順禪師557-640)
115.제월경헌(霽月敬軒禪師1542-1632)
116.적인혜철(寂忍慧哲禪師785-861)
117.전강선사(田岡永信禪師1898-1975)
118.정관일선(靜觀一禪禪師1533-1608)
119.정수혜단(正受慧端禪師1642-1721)
120.정진긍양(靜眞兢讓大師 878~956)
121.정행보월(淨行寶月禪師1902-2000)
122.조주선사(趙州禪師778~897)
123.종봉유정(鍾峯惟政1544-?) ►55. 사명대사 참조
124.진각혜심(眞覺國師慧諶1178-1234)
125.진공탄성(眞空呑星禪師 1930-2000)
126.진묵대사(震默大師 1562~1633)
127.천동굉지(天童宏智禪師1091-1157)
128.청담순호(靑潭淳浩禪師1902-1971)
129.청매인오(靑梅印悟禪師1548-1623)
130.청화선사(무주淸華禪師1924~2003)
131.청허휴정(淸虛休靜禪師1520~1604)
132.초석범기(楚石梵琦禪師1296-1370)
133.춘성춘성(春性春城禪師1891-1977)
134.탄허택성(呑虛,宅成,鐸聲1913-1983)
135.태고보우(太古普愚禪師1301-1382)
136.태전선사(太顚禪師:732-824)
137.퇴옹성철(退翁性澈禪師1912-1993)
138.퇴지한유(退之韓愈768-824)
139.편양언기(鞭羊彦機禪師1581-1644)
140.포대화상(布袋和尙계차禪師 ?-916)
141.한암중원(漢岩重遠禪師1876-1951)
142.한영석전(漢永石顚禪師1870-1948)
143.한산선사(寒山禪師) (6??- 6??)
144.함월해원(涵月海源禪師1691-1770)
145.함허득통(涵虛得通禪師1376-1433)
146.향곡혜림(香谷堂惠林禪師1912-1978)
147.향엄지한(香嚴智閑禪師 ?-898)
148.해안선사(海眼禪師1901-1974)
149.허백명조虛白明照禪師1593-1661)
150.허응보우(懶庵虛應堂普雨1506?-1565)
151.현기두암(斗庵玄機禪師1940-2025)
152.혜감국사(慧鑑國師1562-1649) ►76. 소요태능 참조
153.혜능선사(慧能禪師638-713)
154.혜암성관(慧菴性觀禪師1920-2001)
155.혜암현문(慧庵玄門禪師 884-1985)
156.혜월혜명선사(慧月慧明禪師1861-1937)
157.혜은법홍율사(慧隱法弘律師1915-2003)
158.혜장선사 ►81.아암혜장선사 참조
159.호암체정(虎巖體淨禪師1687-1748)
160.화담법린(華曇法璘禪師1843-1902)
161.환성지안(喚醒志安禪師1664~1729)
162.황벽선사(黃蘗禪師 ?~850)
163.효봉원명(曉峰元明禪師1888-1966)
164.회광일각(廻光壹覺禪師1924-1996)
▣ 별 첨
A. 한국의 승려 P217.
B. 우리나라의 유명한 어른 스님 P217.
C. 한국 선 특징 P225.
D. 대한불교 조계종 P230.
D-1. 불교전개와 삼국시대 P236.
D-2. 선종의 전래 P238.
D-3. 조계종 성립과 발전기 P241.
D-4. 선교 양종시대 P244.
D-5. 조계종 재건과 대표종단 P246.
D-6. 조계종 25교구본사 P249.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송(釋迦牟尼 BC 563~BC483)
자등명(自燈明)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등명(法燈明) 스스로에 의지하라
자귀의(自歸依) 진리를 등불로 삼고
법귀의(法歸依) 진리에 의지하라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이 무상하다
시생멸법(是生滅法) 바로 생멸법이다
생멸멸이(生滅滅已) 생멸이 소멸하여 그치면
적멸위락(寂滅爲樂) 적멸이 즐거움이다.
1.경당각원선사(鏡堂覺圓禪師 1244-1306)
[열반송涅槃頌]
갑자육십삼(甲子六十三) 63년 동안
무법여인설(無法與人說) 한 마디 설법도 한 적이 없다네
임운자거래(任運自去來) 바람 따라 물 따라 오고 가나니
천상지일월(天上只一月) 하늘에는 다만 달이 떠 있네.
물물봉시각득향(物物逢時各得香) 서로서로 만날 때 향기를 얻고
화풍도처진춘양(和風到處盡春陽) 온화한 바람 속에 봄볕도 따사롭네
인생고락종심기(人生苦樂從心起) 인생 괴로움 즐거움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활안조래만사강(活眼照來萬事康) 활달한 눈으로 세상 보면 만사 모두 편안하리라
[경당각원(鏡堂覺圓)(1244-1306년)은 중국 송나라 임제종의 僧人입니다.
사천인.호는 경당, 경론(經論)에 정통했던 그는 오지(吳地)의 모든 선지식을 두루 찾아본 다음
천동산(天童山) 천동사(天童寺)의 환계성일(環溪性一)에게 심인(心印)을 받았다.
그 후 선흥사(禪興寺), 정지사(淨智寺), 흥덕사(興德寺) 등 여러 절에 머물다가 1306년(德治 元年)
9월 26일 63세에 입적했다.
경당각원(鏡堂覺圓)(1244-1306년)은 중국 송나라 임제종의 僧人입니다. 사천인.호는 경당,
1279년 무학조원(無學祖元)과 함께 일본에 가셨습니다.
일본에서 圓寂후에 “대원선사 大圓禪師”의 호를 칙봉(敕封)하셨습니다]
2.경산학월스님(慶山鶴月 1917-1979)
[내 열 손가락이 나의 시봉 일세]
치열했던 불교정화운동을 거쳐 대한불교 조계종이 새롭게 태어난 이후 1963년, 1973년. 그리고 1979년 세 번에 걸쳐 총무원장에 오른 스님이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경산스님이었다.
경산스님은 1917년 6월 21일 함경남도 풍산군 안산면 황수원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손봉준(孫鳳俊), 모친은 이(李)씨다. 본명은 손희진(孫喜璡), 법호는 학월(鶴月)이다.. 1936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홍수암(洪秀庵) 스님을 은사로 해운(海雲)스님을 계사로 수계했다. 법명을 경산(慶山)이라 했다. (1975년 이후 京山으로 바뀜)
1945년 부산 동래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1949년 경남교무원에서 대덕품계를 받은 스님은 금강산 마하연과 오대산 상원사, 금정산범어사, 덕숭산 정혜사, 영축산 통도사 극락암 등의 전국 제방선원을 두루 돌며 참선정진에 몰입했다.
스님은 1956년 정화불사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1962년에는 ‘재단법인 동국학원’의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그 후 세 번에 걸쳐 조계종 총무원장 자리를 맡아 대한불교조계종단의 기틀을 탄탄히 다져놓고 1979년 12월 25일 서울 돈암동 적조암에서 홀연 열반에 들었다.
[겸양의 미덕 평생 실천]
경산 스님은 불교계에서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 일찍 오른 셈이었다. 불교계가 설립한 동국대학교의 재단이사장을 거쳐 1963년에는 통합 조계종단의 총무원장 자리에 올랐으니, 말 그대로 경산 스님은 한국불교 최고 지도자의 반열에 오른 셈이었다.
그러나 경산 스님은 수행자 시절의 그 모습 그대로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겸양의 미덕’을 변함없이 실천하고 보여주는 그런 스님이었다.
경산 스님은 20년 연하인 후학들에게나, 자식과도 같은 상좌들에게 단 한번도 “이래라, 저래라!”
성난 목소리로 호통을 치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왔느냐, 갔느냐”고 묻지도 않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오셨는가?” “가셨는가?” 존댓말을 쓰셨고 “이렇게 하시 게나”, “저렇게 하시는 게
좋을 듯 하오 마는..”하는 식으로 늘 경어(敬語)만을 사용하였다.
경산 스님에게 하심(下心)과 겸손은 그야말로 기본이었고, 누구를 만나거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지극정성으로 모시기를 즐겼다. 그래서 경산 스님의 그 꾸밈없는 ‘겸양의 미덕’은 경산 스님의 대명사처럼 따라 다녔다.
[해외 여행 중 호텔서도 예불]
총무원장 자리는 그야말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일과로 꽉 짜여져 있다. 그런데도 경산 스님은 당신이 총무원장으로서 종무처리에 바쁘다는 이유로 예불을 단 한 번도 빠진 일이 없었다.
심지어 경산 스님은 종무로 지방에 출장을 가든, 해외 불교행사에 한국대표로 참석을 하든,
호텔방에서라도 부처님의 탄생지인도 땅을 향해 예불을 올리고 참선 정진을 빠뜨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경산 스님은 사찰의 청규를 철저히 지키는데 모범을 보였고, 총무원장으로서
종무를 처리하다 공양시간을 놓치게 되면 어김없이 ‘때 아닐 때 먹어서는 안 된다’는 청규를
엄격히 지키느라고 굶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경산 스님은 공인(公人)으로서 공과 사를 철저히 구별, 심지어 개인적인 용무로 출타할
적에는 총무원장용 승용차를 타지 않고 반드시 버스를 타고 다녔다. 기왕에 배정되어 있는 승용차에 대기하고 있는 운전사가 있으니 승용차를 이용하시라고 제자가 말씀드리면 경산 스님은 조용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총무원장용 자가용과 운전기사, 그리고 휘발유는 총무원 공무를 보는데 사용하라는 것이지,
내 개인 볼일 보러 다니는데 쓰라고 있는 게 아닐세.”
경산 스님은 또한 계율을 지키는데도 스스로 엄격함을 보여주었다. 어쩌다 제자들과 함께 유명한 ‘함흥냉면’집에 간 일이 있었다. 경산 스님이 함경북도 출신인지라 고향의 유명한 냉면을 좋아 하실 거라는 제자들의 생각에 일부러 경산 스님을 함흥냉면 집으로 모셨던 것이다.
그러데 함흥냉면은 육수에 면을 말아 나오거나 회 무침에 면을 비벼먹게 되어 있으니 경산 스님은 그런 냉면을 드시지 않고 면(麵)만을 따로 달라고 주문, 기어이 동치미 국물에 면을 말아 잡수시는 것이다.
“그까짓 냉면 한 번 잡수시는 데까지 꼭 그렇게 까다롭게 하실 것 있습니까?”
누군가가 곁에서 그렇게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지만, 그 때 경산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 말씀 마시게. 사소한 것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감히 어찌 큰 것을 지킨다고 큰소리 칠 수 있을 것인가? 원래 저 큰 저수지 둑도 조그마한 개미구멍으로 무너진다고 하신 말씀을 잊어서는
아니 되시네.”
경산 스님은 늘 온화한 얼굴이셨다. 그리고 늘 얼굴 가득히 잔잔한 미소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신 스스로에 대해서는 너무나 엄격하시고 칼날 같으셨다.
총무원장을 지내시면서도 스님은 손수 속옷을 빨아 입으시고 구멍 난 양말을 손수 기워서 신었다.
곁에서 보다 못한 제자 자운과 자용이 이제 시봉 아이를 두도록 하자고 몇 번이나 간청하였지만
경산 스님은 고개를 조용히 흔드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시봉도 두지 않고 손수빨래]
“이걸 보시게. 나에게는 이렇게 열 개의 손가락이 있으니 바로 이 열 개의 손가락이 내 시봉(十奉) 이라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산 스님이 총무원장을 맡고 있는 동안 제자들은 그럴듯한 큰 사찰이라도 한곳 차지해서 문도들이 기를 펴고 살게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산 스님은 당신이 총무원장으로 있으면서 살기 좋은 큰 절을 차지하기는커녕 아예 그런 일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래서 총무원장 손경산 스님이 겨우 몸 붙이며 거처하시던 곳이 서울
돈암동에 있는 허름한 암자 적조암이었다.
적조암(寂照庵)은 그 이름에서도 적막함이 느껴지는 원래 강원도 설악산 신흥사의 열반당으로,
그야말로 열반을 앞둔 노스님들이 머무는 쓸쓸한 처소였다.
바로 이 허름하고 쓸쓸한 초라한 암자에 저 쟁쟁한 조계종 총무원장 경산 스님이 격무에 시달리던 육신을 의탁하고 있었으니, 손경산 총무원장은 결코 권승(權僧)이 아니었음을 이 한가지로 미루어 보아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종단 발전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스님은 1979년 12월25일 서울 적조암에서 원적에 들었다.
법납 42세, 세수 63세.
3.경성일선선사(敬聖一禪 1488-1568)
[열반송涅槃頌]
연유팔십사공화(年逾八十似空花) 팔십 년 삶이 허공의 꽃이요
왕사유유역안화(往事悠悠亦眼花) 지난 일들은 여전히 눈앞의 꽃이로다
각말과문환본국(脚末跨門還本國) 다리 끝이 문을 넘기 전에 본국에 돌아왔으니
고원도리이개화(故園桃李已開花) 옛동산의 복숭아꽃은 이미 활짝 피었나니
[묘향산 문수암文殊庵에 들어가 무문관無門關을 마련하고, 주먹 크기의 구명하나 외에는 사면 벽을 봉쇄하였다. 그리고 일일일식一日一食이 아닌 이일일식二日一食을 하고 대소변도 받아내는 활구선
活句禪 수행을 시작하면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서원誓願을 하였다.
이러한 수행정진 3년 만에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을 보고 확연대오하였다. 그때의 각송覺頌은 회광廻光이다.] [일념회광(一念廻光)]
조주노로도검(趙州老露刀劍) 조주란 늙은이의 칼날이 드러나니
창몽중설몽루(唱夢中說夢漏) 어허, 꿈속에서 꿈을 말함이라
[선사의 대오송大悟頌]
계유성주괴공(界有成住壞空) 세계에는 이루고 머물고 무너지고 없어지는 현상있고
념유생주이멸(念有生住異滅) 생각에는 생기고 머물고 달라지고 없어지는 현상있고
신유생노병사(身有生老病死) 몸에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현상이 있다
무상지체무상(無常之體無常) 무릇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것이다
[오도송(悟道頌)] [회광廻光(영원불멸의 빛)
조주로도검(趙州露刀鈐) 조주의 칼 뺌이여
한상광염염(寒霜光炎炎) 서리발같은 빛이 나는구나
의의문여하(擬議問如何) 어떠한가 묻는 자가 있거든
분신작양단(分身作兩段) 몸을 두 쪽으로 내리라.
[일선 선사는 출가 당시 입었던 누더기 한 벌로 평생을 보냈다고 한다. 선사의 속성은 장씨張氏,
법명은 일선(一禪), 법자는 경성(敬聖), 법호는 휴옹(休翁), 선화자(禪和子).부친은 윤한胤韓이며,
모친 박씨朴氏가 해맑은 구슬明珠(명주)를 삼키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성종 20년(1488) 12월 13일에 울산에서 선사가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1세에 부모님 두 분을 다 여의게 되었으며, 3년동안 돌보는 사람 없이 걸인 아이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 13세에 경주 단석산斷石山에 주석하고 계시던 해산선사
海山禪師의 눈에 뛰어 출가를 하게 되었다. 이때 선사는 생에 대하여 무상함을 뼈저리게 체험한 것으로 전한다] 선사가 일생을 두고 참구했던 수행의 화두는 활구선活句禪이다.
4.경한백운선사(景閑白雲禪師 1298~1374)
[오도송悟道頌] (무일화無一花)
일념불생전체현(一念不生全體現)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전체가 나타나려니
차체여하득유제(此體如何得喩齊) 이 본체를 어떻게 말 할 수 있으리요.
투수월화허가견(透水月華虛可見) 물 속 달빛은 허공에서도 볼 수 있으나
무심감상조상공(無心鑑象照常空) 무심의 거울은 비추어도 항상 허공이로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평상시의 마음이 곧 도이고
제법관체진(製法觀體眞) 모든 법은 보이는 그대로가 진리
법법불상도(法法不相到) 법과 법은 서로 상관하지 않으니
산산수시수(山山水是水) 산은 산이요 물을 물이로다.
(산거山居)
동중류수여람염(洞中流水如藍染) 골짜기 흐르는 물은 쪽물인 것 같고
문외청산진불성(門外靑山盡不成) 문밖의 청산은 자연 그대로이다.
산색수성전체로(山色水聲全體露) 산색 물소리에 전체가 드러났으니
개중수시오무생(箇中誰是悟無生) 그 속에서 무생無生의 깨달음을 얻었노라.
산청청수록록(山靑靑水綠綠) 산은 푸르고 물은 초록색인데
조남남화족족(鳥喃喃花簇簇) 새는 지저귀고 꽃은 우거져 있네.
진시무현금상곡(盡是無絃琴上曲) 이 모두가 무현금의 곡조이거니
벽안호승간부족(碧眼胡僧看不足) 벽안의 호승(達磨)도 원만히 보지 못했네.
산은 푸릇푸릇 물은 파르무레
새는 재잘재잘 꽃은 함빡함빡
이 모두 줄 없는 거문고 가락이러니
푸른 눈 호승(胡僧)을 실컷 보누나.
(선관禪觀)
황면구담불량구(黃面瞿曇不良久) 금빛 얼굴의 부처님은 유구한 세월도 없나니
실중유마역불묵(室中維摩亦不默) 방장실의 유마도 침묵하지 않도다.
흡사취모신발연(恰似吹毛新發硏) 새로이 연마한 취모리 검과도 같으니
외도천마처부득(外道天魔處不得) 외도와 천마天魔도 넘보지 못하네.
[열반송涅槃頌]
인생칠십세(人生七十歲) 인생 70은 예로부터
고래역희유(古來亦希有) 드문 일이네.
칠십칠년래(七十七年來) 77년 살다가
칠십칠년거(七十七年去) 77년에 가나니
처처개귀로(處處皆歸路) 곳곳이 다 돌아갈 길이요
두두시고향(頭頭是故鄕) 머리두면 바로 고향이거늘
하수리주즙(何須理舟楫) 무엇 하러 배와 노를 이끌어
특지욕귀향(特地欲歸鄕) 특히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리.
아신본불유(我身本不有) 내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심역무소주(心亦無所住) 마음 또한 머무는 곳 없나니
작회산사방(作灰散四方) 재를 만들어 四方에 뿌리고
물점단나지(勿占檀那地) 施主의 땅을 범하지 마라.
[백운 화상은 전북 고부 (지금의 정읍시)에서 고려시대인 1299년(충렬왕25)에 태어났다.
백운경한(白雲景閑) 화상은 태고보우(太古普愚1301~1382)화상 나옹혜근(懶翁慧勤1320-1376)화상과 더불어 고려 말의 대표적 고승이다. 고려 불교가 부패해 무너져 가는데, 그래도 이 세 분 스님들이 있어 고려 불교를 지탱해주었고 그 힘으로 조선 5백년 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숨죽여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1365년 나옹(懶翁)의 천거로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신광사(神光寺)의 주지가 되었다.
1368년에는 공민왕비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원당(願堂)으로 창건한 경기도 장단군 오관산(五冠山)의 흥성사(興聖寺) 주지가 되었다.
1369년 김포 포망산 고산암(孤山庵)에 은거했다가, 다시 나옹의 추천으로 1370년에 있었던 공부선(功夫選)의 시관직(試官職)을 맡았다. 그 뒤 여주 혜목산(우두산) 고달사(高達寺) 부근의 취암사(鷲巖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이르는 곳이 모두 돌아갈 길이요 만나는 곳이 모두 고향’이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1374년(공민왕 23) 입적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77세였다.
저서로는 법문집인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과 프랑스 파리에서 발견된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2권이 있다.
<직지심체요절>은 그 내용보다 1377년 간행된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鑄字本)이라는 것으로 더 알려져 있다.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하권(下卷)만이 소장되어 있던 것이 밝혀짐으로써
세계의 주목을 끌은 바 있었다.
<직지심체요절>은 석옥 청공(石屋淸珙) 선사가 전해준 <불조직지심체요절>을 받아서 이를 기초로 해,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의 가르침 중에서 <경덕전등록>과 <선문염송집>, <오등회원>, <치문경훈> 등의 사전부(史傳部)의 여러 내용을 섭렵해서 보중 편찬했다고 한다.
[출처] <백운 경한(白雲景閑, 1299~1374) 화상>
5.경허성우선사(鏡虛惺牛禪師1849-1912)
[오도송(悟道頌)]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 문득 콧구멍이 없다는 말을 들으매
돈각삼천시아가(頓覺三千是我家) 온 우주가 나 자신임을 깨달았네
유월연암산하로(六月鷰巖山下路) 유월 연암산 아래 길
야인무사태평가(野人無事太平歌) 하릴없는 들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열반송涅槃頌]
심월고원(心月孤圓) 마음달이 외로이 둥그니
광탄만상(光呑萬像) 빛이 만상을 삼켰어라
광경구망(光境俱忘) 빛과 경계를 함께 잊나니
부시하물(復是何物) 다시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춘추다가일(春秋多佳日) 봄가을로 좋은 날 많더니
의리위풍년(義理爲豊年) 의리의 풍년이 들었다
정청어독월(靜聽魚讀月) 고요한 밤 물고기가 달 읽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소대조담천(笑對鳥談天) 웃으며 새와 하늘을 이야기하네
운의부대잠(雲衣不待蠶) 누더기로 족하니 누에 칠 때 기다리지 않는데
선실영수가(禪室寧須稼) 선방에서 어찌 농사를 바라겠는가
석발수운액(石鉢收雲液) 돌 바루에 구름 물이나 거두리라. [해인사 퇴설당(堆雪堂)]
봄 가을 내내 참 좋은 날 많더니 春秋多佳日(춘추가가일)
마땅한 약속 지켜 풍년이 들었구나 義理爲豊年(의리위풍년)
달을 읽는 물고기 소리 고요히 들으며 靜聽魚讀月(정청어독월)
하늘을 얘기하는 새와 웃으며 마주하네 笑對鳥談天(소대조담천)
속세와 청산이 어느 쪽이 옳은가 世與靑山何者是(세여청산하자시)
봄볕 있는 곳 꽃피지 않는 곳이 없다네 春光無處不開花(춘광무처불개화)
누가 성우의 가풍을 묻는다면 傍人若問惺牛事(방인약문성우사)
돌계집 마음속 영원의 노래라 하리라 石女心中劫外歌(석녀심중겁외가)
일없음이 오히려 일을 이룸이라 無事猶成事(무사유성사)
사립문 닫고 한낮에 조나니 掩關白日眠(삽관백일면)
산새들이 나의 고독 아는지 幽禽知我獨(유금지아독)
그림자가 자꾸 창 앞을 지나가네 影影過窓前(영영과창전)
참으로 살기 좋은 조촐한 세계가 있으니 有一淨界好堪居(유일정계호감거)
아득한 겁 이전에 이미 터가 마련되었네. 窮劫已前早成墟(궁겁기전조성허)언덕,허
나무계집과 돌사람 마음 이 본래 실다우니 木女石人心本實(목녀석인심본실)
별무리, 등불의 환영 같은 것도 헛되지 않네 星翳燈幻事非虛(성예증환사비허)가리,예/깃,일산
빛나고 태평스런 화창한 봄이여 熙熙太平春(희희태평분)
볼수록 온갖 풀이 다 새로워 看看百草新(간간백초신)
계룡산 자락에 내린 비 鷄龍山上雨(계룡산상우)
지난 밤 티끌을 다 씻었네 昨夜浥輕塵(작야읍경진)젖을,읍
“슬프다.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며 이별의 아쉬움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대 멀리 떠나보내는 내 마음 爲君賦遠遊(위군부원유)
한없이 눈물이 흐르누나 使我涕先流(사아체선류)
인생은 한 백년 나그네 百歲如逆旅(백세여역여)
어디에 묻힐지 아득하구나 何方竟首邱(하방경수구) 언덕,구/땅이름,구
[경허(鏡虛, 1849년 ~ 1912년)는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한 대선사이다.
1849년 전주 자동리에서 아버지 송두옥(宋斗玉)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속명은 동욱(東旭)이다.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9세 때 경기도 의왕시 청계산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하였다.경허 선사의 수제자로 흔히 '삼월(三月)'로 불리는 혜월(慧月,1861년-1937년), 수월(水月,1855년-1928년)· 만공(滿空,1871년-1946년)
선사가 있다. 경허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경허 스님의 법맥은 한국불교 최대문중인 ‘덕숭문중’과 직접 연관이 있지만 덕숭문중의 일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경허 스님의 법맥은 크게 ‘만공계(덕숭문중 수덕사)’와 ‘한암계(오대산 월정사)’, ‘혜월계(영남계)’ 셋으로 구분된다.
만공의 제자는 보월성인, 용음법천, 고봉경욱, 혜암현문, 전강영신, 원담진성, 설봉학몽, 벽초경선, 효봉원명, 청담순호, 포산, 춘성 스님 등이다.
이 가운데 보월성인의 법을 이은 금오태전이 법주사와 불국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월자(月字)‘ 문중을 형성한다. 월산, 범행, 월남, 탄성, 혜정, 월주, 월서, 월탄 스님이 그들이다.
원담 진성은 전 수덕사 방장으로 덕숭산을 지켰고, 청담 순호는 ‘청담문도’를 형성한다.
한암의 제자로는 보문·난암·탄허 등이 있다. 현재 월정사는 ‘탄허 택성’의 제자들이 주를 이룬다.
혜월의 제자로는 운봉 성수-향곡 혜림으로 이어져 현재 조계종 종정인 진제 법원 대종사로 이어진다. 경허의 세 달 중 한명으로 불리는 수월 스님은 그 행장과 제자가 알려지지 않았다.
혜월계는 1902년 경허의 친필로 여겨지는 ‘등등상속’의 경허-혜월 간의 전법을 적통으로 인정한다. 영월 봉율-만화 보선-경허 성우-혜월 혜명-운봉 성수-향곡 혜림-진제 법원으로 이어지는
법맥으로, 여기서는 ‘청허 13세손 환성 9세손설’을 따른다.]
[경허 성우선사 년보, 행적(行跡)]
1849년 기유(己酉) 헌동(憲宗)15 불기 2393년 8월 24일 전주全州) 자동리子東里)에서 여산(礪山) 손두옥(宋斗玉)씨와 밀양박씨(密陽朴氏) 부인 사이에 차남(次男)으로 출생 초명(初名) 동욱(東旭) 법호(法號) 경허(鏡虛) 법명(法名) 성우(惺牛) 먼저 출가하여 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에서 득도(得道)한 백씨(伯氏)는 태허성원(泰虛性圓)스님이다.
1855년 7세 을묘(乙卯) 철종(哲宗)6년 불기 2399년이 무렵 어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짚신을 잘 삼아 뒷 날 너무 큰 발에 맞는 신발을 구하지 못해 난감할 때 짚신을 삼아 신었다.
1857년 9세 (丁巳) 불기 2401년 부친(父親) 상(喪)을 당하여 어머니 자당(慈堂)을 따라 시흥(始興) 청계산(淸溪山) 청계사(淸溪寺)에 입산 계허(桂虛)대사 법하에서 축발수계(祝髮受戒)후 사미(沙彌)의 행자 수업
1862년 14세 임술(壬戌) 불기 2406년 절에서 박(朴) 처사로부터 글을 배우며 재동(才童)으로 칭송이 자자하던 중 가을에 계허(桂虛)스님 천거로 계룡산 동학사 만화(萬化)화상을 찾아가 일대사교(一大四敎)를 섭렵하여 약관(弱冠)의 나이에 발군의 실력을 공인받음.
1871년 23세 신미(辛未) 고종(高宗) 8년 불기 2415년 동학사 강원(講院)에서 강사(講師)의 교리(敎理)를 전수 받아 제방학인(諸方學人)을 지도하며 30세 전후에 젊은 강백(講伯)으로 크게 명망을 떨침.
1879년 31세 을유(乙卯) 불기 1423년 여름철 상경上京 도중에 천안(天安) 부근에서 폭풍우를 만나 민가에 머무르고자 하였으나 악성 콜레라 호열자가 유행하여 문전박대에 민박에 실패하였다. 시체가 널려 있는 참혹한 현장에서 생사의 절박함을 느껴 깨닫고 비로소 발심,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해산하고 강원을 철폐하여 용맹정진하던 중 11월 보름날 한 사미승이 전하는 말, "소가 되어도 코를 뚫을 콧구멍이 없어야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묻자 바로 언하(言下)에 활연대오(豁然大悟)함
1880년 32세 경진(庚辰) 불기 2424년 호서(湖西) 연암산(燕巖山) 천장사(天藏寺)로 옮겨 한 자리에서 보임(保任).
1881년 33세 (辛巳) 불기 2425년 천장사에서 보임 중 옷 한 벌로 일대(一大事)를 마치고 6월에 주장자를 꺾어 던지고 오도가("悟道歌)"를 읊은 뒤, 전등연원(傳燈淵源)을 밝힘.
1882년 34세 임오(壬午) 불기 2426년) 이로부터 20년간 연암산 천장사와 덕숭산(德崇山) 수덕사, 정혜사를 비롯한 상왕산(象王山) 개심사, 문수사, 도비산(都飛山) 부석사, 태화산(泰華山) 마곡사, 천비산(天庇山) 중암 묘각사, 칠갑산 장곡사, 예산(禮山) 대련사, 아산(牙山) 봉곡사, 금산(錦山) 보석사, 태고사, 백마강변 영은사, 면천(眄天) 영탑사, 계룡산 갑사, 동학사, 신원사, 속리산
법주사 등 호서(湖西) 일대에 선풍(禪風)을 크게 떨침
곧 염불 주력(呪力)만을 크게 일삼던 승려들의 고식적 수행 방편을 개선하여 참선을 고취, 개오(改悟) 견성(見性)을 지도하므로 선(禪)을 중흥(中興). 이 무렵의 호서 선송(禪)頌으로 덕숭산 관련 칠언율시(七言律詩)에 "피우은신(避雨隱身)" "가야산(伽倻山)" "정혜사(定慧寺)" 사육언시(四六言詩)에 "정혜사(定慧寺) 두견음(杜鵑吟)" 계룡산 관련 오언정구(五言絶句) "태평춘(太平春)" 칠언절(七言絶) "웅율(熊津)" 칠언율(七言律) 점수돈오(漸修頓悟)" 연암산 관련 오언율(五言律) "고루상(高樓上)" 칠언절(七言絶) "제천장암(題天藏庵)" 태화산 관련 칠언정(七言絶) "제마곡사(題麻谷寺)" "태화산(泰華)山"과 기타 칠언절(七言絶) "호서객(湖西客)" 등을 시작(作詩)
1884년 36세 갑신(甲申) 불기2428년 10월 동학사에서 진암(眞岩)화상을 통해 14세의 도암(道岩)행자이던 만공(滿空)스님을 만나 "화중생연(火中生蓮)"일 수 있다고 말하며 천장사로 보냄,
1890년 42세 경인(庚寅) 불기 2434년 봄에 혜월혜명(慧月慧明)스님에게 전법송(傳法頌)
1898년 50세 무술(戊戌) 고종(高宗) 광무(光武)2, 불기 2442년 도비산(都飛山) 부석사에서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의 초청을 받아 시봉(侍奉 만공(滿空)스님과 함께 금릉(金陵) 청암사(靑岩寺)를 거쳐 범어사행, 영남 최초의 선원(禪院)을 범어사에 개설하고 사좌(師佐) 하안거(夏安居).
1899년 51세 기해(己亥) 광무(光武)3년 불기 2443년 봄 가야산 해인사 조실(祖室)로 초대받고 가을에 국왕의 칙명(勅)命으로 추진하는 "장경(藏經)" 간행불사 증명및 해인사 수선사(修禪社) 창설의 법주(法主)에 추대. 4월 해인사 수선사
"방함록서(芳啣錄序)"에 이어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 수선사(修禪社) 창건기(創建記)" 겨울에 "상포계서(喪布契序)" 씀 해인사 조실 시절 칠언절(七言絶) "해인사구광루(海印寺九光樓)" 가야산홍류동(伽倻山紅流洞)" "여남천당한규(與南泉堂翰奎)"등 시작(作詩)
'결동수정혜동생아솔동불과계사문(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佛果契社文)" 기문(記文)이 해 한 때 청암사에서 조실(祖室) 만우당(萬愚堂), 납자(納子) 한암(漢巖)과 접촉, 칠언율(七言律) "청암사수도암(靑岩寺修道庵)" "방수도암(訪修道庵)“ "청암사조실여만우당화별(靑岩寺祖室與萬愚堂話別)"을 지음
1900년 52세 경자(庚子) 광무(光武)4, 불기 2444년, 1월 하순 조계산 송광사에 주석하여 "취은화상행장(取隱和尙行狀)"을 쓰고, 불사점안(佛事點眼) 증명(證明).
이로부터 한 두해에 걸쳐 송광사를 비롯하여 지리산 화엄사, 천은사, 백장암(百丈庵), 실상사 영원사(靈源寺), 벽암사(碧松寺), 쌍계사(雙溪寺), 동리산(桐裏山) 태안사(泰安寺), 덕유산(德裕山) 송계암(松溪庵)등 호남 일대의 선원(禪院) 창설(創設). 특히 화엄사 말사 천은사(泉隱寺) 산내(山內) 수도암(修道庵)에서 3개월간 진응(震應)스님을 당대의 강백(講伯)으로 지도하였다. 칠언절(七言絶) "제지리산영원사(題智異山靈源寺)". 중춘(仲春 실상사(實相寺)에서 "백장암회록성조서(百丈庵回錄成造序)"를 쓰고 남행(南行)하여 "덕유산공계암회록후성조권선문(德裕山松溪庵回錄後成造勸善文)"과 이 무렵 태안사에 머물 때 "태안사만일회범종단나방함기(泰安寺萬日會梵鍾檀那芳啣記)" 씀. 송광사 관련 칠언시(七言絶)시에 "제송광사육감정(題松廣寺六鑑亭)" "영호당(映湖堂)" "화송광사금명당(和松廣寺錦溟堂)" "송광사월화강백동행화엄로중구호(松廣寺月和講伯同行華嚴路中口號)"등 씀.
여름에 영남 지방으로 옮겨 영축산(靈鷲山) 통도사, 내원사, 백운암(白雲庵), 표충사(表忠寺), 등을 순력(巡歷)하며 선풍(禪風)을 크게 떨치고, 7월에 통도사에서 추모송(追慕頌) "근차환성선사운(謹次喚惺禪師韻)"에 이어 칠언절구 "통도사백운암(通度寺白雲庵)" 지음
그 얼마 뒤 사불산(四佛山) 대승사(大乘寺), 불명산(佛明山) 윤필암(潤筆庵), 팔공산 동화사(桐華寺), 파계사(把溪寺) 성전암(聖殿庵)에도 선방을 창설하였으며, 해인사 조실로 경상남북도 일원의 제방 납자 지도. 1902년 54세 임인(壬寅) 불기 2446년 법어사(梵魚寺)에서 "선문촬요(禪門撮要)" 편찬
불기(佛事) 7월 15일 "법어사해하일(梵魚寺解夏日)" "상원효암(上元曉庵)" 시작(作詩) 가을 범어사 금강암과 마하사(麻하(訶)寺) 나한전(羅漢殿) 개분불사(改粉佛事) 증명(證明)
1903년 55세 계묘(癸卯) 불기2447년, 이 무렵 "동래군(東萊郡) 범어사계명암창설선사기(梵魚寺鷄鳴庵創設禪社記)" "범어사계명암창건기(梵魚寺鷄鳴庵創建記)" "계명암수선사방한청규문(鷄鳴庵修禪寺芳啣淸規文)'" "범어사금강암칠성각창건기(梵魚寺金剛庵七星閣創建記)" "범어사설선사계의서(梵魚寺設禪社契誼序)" 등 서문(序文), 기문(記文)과 "서룡화상행장(瑞龍和尙行狀)" "제범어사보재루(題梵魚寺普濟樓)"등 행장(行狀), 시문(詩文)에 이어 가을 칠언절구(七言絶句) "자범어사향해인사도중구호(自梵魚寺向海印寺道中口號)" 를 쓰며 해인사에 도착 가을에 한암(漢巖)스님과 헤어지면서 "여법자한암(與法子漢巖)"과 치언적 "불망송(不忘頌)"을 남김.
해인사 조실로 학명도일(學明道一), 변설호(卞雪醐)스님에게 "참선곡(參禪曲)"을 써주고 "가가가음(可歌可吟)" "법문곡(法門曲)" "중 노릇 하는 법" 등 대중 법문을 설호 스님이 정리하게 함,
1904년 56세 갑진(甲辰) 불기 2448년, 해인사에서 인경불사(印經佛事)를 매듭짓고 2월에 접어 들어 호서(湖西) 천장암(天藏庵) 도착 11일 제자 만공 스님에게 전법송(傳法頌)으로 후래불법(後來佛法)을 부촉하고 자취를 감춤. 봄에 오대산 월정사에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법회(法會)에서 법(문法文). 칠언율시 "상원암여오하천서구(上院庵與吳荷川敍舊)" 시작(作詩)후에 금강산을 순례하며, 175편의 연작웅편(連作雄篇) "금강산유산가(金剛山遊山歌)" 시작(作詩)를 비롯 "금강산명구(金剛山名句)" "제헐성루(題歇惺樓)" 각(各) 2편도 읊었다.
석왕사(釋王寺)에서 오백라한(五百羅漢) 개분불사(開粉佛事) 증명(證明). 칠언절구 "제석왕사영월루(題釋王寺映月樓)" 칠언율시 "동해절경(東海絶景)" "두문동화강봉헌(杜門洞和姜鳳軒)" "과영변신시장(過寧邊新市場)" 등을 작시하며 북계(北界) 유랑(流浪) 종적이 묘연해짐.
1905년 57세 을사(乙巳) 불기2449년, 삼수(三水), 갑산(甲山), 장진(長津)에 떠돌다가 강계군(江界郡) 종남면(終南面) 한전동(閑田洞) 담여(淡如) 김탁(金鐸)의 집에서 머물며 선비 박나주(朴蘭洲) 또는 유발거사(有髮居士) 박(朴)진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몽생활(訓蒙生活)
이후로 관서(關西)와 관불(關北) 일대는 물론 국경을 넘어 만주 지방으로 비승비속(非僧非俗)으로 떠돌아 다니기를 8, 9년 을사(乙巳) 오조약(五條約)에서 경술(庚戌) 한일합방(韓日合邦)(62세) 비보(悲報)에 망국한(亡國恨)을 달래며 시정주화(詩情酒話)에 젖어 무하향(無何鄕) 도인행(道人行), 갑산, 강계, 장진, 일대 특히 희주(熙川), 두첩사(頭疊寺), 자북사(子北寺), 오남사(午南寺), 아득포(牙得浦), 용포(龍浦), 흥유촌(興有村), 야학촌(野鶴村), 장진강(長津江), 용정강(龍汀江), 구중산(九重山), 오수산(烏首山), 동명루(東門樓), 남문루(南門樓), 북문루(北門樓), 인풍루(仁風樓), 육삼정(六三亭), 거연정(居然亭), 면가정(眄柯亭), 소산원정(小山園亭), 망미정(望美亭), 봉천대(奉天臺), 일해정사(一海精舍), 금천관(錦川館), 또는 운파(雲坡)별장에서 김담여(金淡如), 김유근(金有根), 김수장(金水長), 이여성(李汝盛), 제익(諸益), 해암(海岩), 박상사(朴上舍), 박인규(林麟奎), 김락위(金駱胃), 김타위(金駝胃), 이교사(李敎師), 박정관(朴亨觀), 최문화(崔文華), 오하천(吳荷川), 박이순(朴利淳), 김일연(金日連), 김소산(金小山), 김응삼(金應三), 유진구(劉震九), 송의미(宋義徵), 이택용(李澤龍), 장사윤(張士允), 김박언(金泊彦), 김영항(金英抗), 송남하(宋南河)들과 1911년 불기2455년 신해(辛亥)년까지 어울려 생활하며 선시(禪詩) 주옥편(珠玉篇)을 지어 남김.
1912년 64세 임자(壬子) 불기2456년 4월 25일 갑산(甲山)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법랍(法臘) 56세 세수(世壽) 64세로 시적(示寂).
그 직전에 마지막으로 일원상(一圓相)을 그리며 O 위에 써 놓은 열반게송(涅槃偈頌) 사행(四行)이 전해 오는데,
심월고원(心月孤圓) 심월고원 마음 달이 홀로 둥글어
광탄만상(光呑萬相) 광탄만상 그 빛이 온 세상을 삼켰어라
광경구망(光境俱忘) 광경구망 빛과 대상 세계 함께 잊었는데
부시하물(復是何物) 부시하물 다시 이것이 어떤 물건인고? 로 되어 있음 .
여름에 천화(遷化) 소식을 듣고 수법제자 만공, 혜월 선사가 열반지 갑산에 가서 법구(法軀)를 모셔다가 난덕산(難德山)에서 다비(茶毘), 봉(奉), 법제자(法弟子)에 송만공(宋滿空)(1871~1946), 신혜월(申慧月)(1861~1937). 전수월(田水月)(1855~1928), 혜봉(慧峰), 방한암(方漢巖)(1876~1950) 침운(枕雲) 스님이 있고 법하(法下)에 백학명(白學明), 김남천(金南泉), 진진응(陳震應), 박태평(朴太平), 재산(齋山) 스님등이 선학수업(禪學修業).
6.고봉원묘선사(高峯原妙禪師 1238-1295)
[열반송涅槃頌]
래불입사관(來不入死關) 와도 죽음의 문에 들어온 일이 없으며
거불출사관(去不出死關) 가도 죽음의 문을 벗어나는 일이 없네.
철사찬입해(鐵蛇鑽入海) 쇠로 된 뱀이 바다를 뚫고 들어가
당도수미산(撞倒須彌山) 수미산을 쳐 무너뜨리도다.
[오도송悟道頌]
청정본연극령롱(淸淨本然極玲瓏) 청정한 근본은 극히 영롱하거니
산하대지절점공(山河大地絶点空) 산하대지가 한 점의 허공이로다.
비로일체종하기(毘盧一體從何起) ''비로일체''가 무엇을 따라 일어났던고
해인능인삼매통(海印能仁三昧通) 해인과 능인이 삼매로 통할 뿐이다.
여사주견대성(如泗州見大聖) 사주(泗州)의 대성인(大聖人) 친견한 듯하고
원객환고향(遠客還故鄕) 먼 길 갔던 객이 고향에 돌아온 것 같네
원래지시구시인(元來只是舊時人) 다만 원래 그때의 사람일 뿐일 뿐
불개구시행이처(不改舊時行履處) 옛날 그때 밟고 다니던 자리를 떠난 적이 없도다
[고봉원묘선사(高峰原妙禪師)는 남악선사의 22세손이고, 설암조흠(雪岩祖欽)선사의 법을 이었으며
서(徐)씨 휘는 원묘(原妙), 소주오강(蘇州吳江)사람이다.
대혜종고(1089∼1163)와 고봉원묘(1238∼1295)는 간화선(看話禪) 수행의 '양대 봉우리'로 추앙될 만큼 간화선에 치중하는 한국불교에선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 대혜종고가 비교적 현실 참여의 성향이 짙었고 고봉원묘는 산중에 은둔한 채 수행자의 길을 고집하는 차이를 보였지만 후대에선 '동전의 앞뒤'와도 같은 경지로 두 사람을 평가한다.
고봉원묘는 대혜 선사보다 150여년 뒤에 세상에 나온 임제종 선사. 15세에 출가해 먼저 천태학에 빠졌지만 나중에 선종으로 방향을 틀었다. 15년 동안 화두를 무려 다섯 차례나 바꾸며 목숨 건 수행에 매진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계종 종조(宗祖)인 고려말 태고보우 선사의 법맥이 닿아 있다. 법문집 '선요(禪要)'는 화두 참구에서 가리고 버릴 것들을 조목조목 담은 조사선의 핵심. 한국의 강원에선 필수 교재로 쓸 만큼 선가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선요>는 현재 한국불교에서 강원의 기본 교재[사집四集]로 학습되는, 말하자면 참선수행자는 물론이고 출가자라면 누구나 그 의미를 깨우쳐야 하는 필독서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 조사선의 전통을 뿌리내리게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 책은 남송시대 임제종의 맥을 이은 고봉원묘선사의 설법 모음집(1294년)이다.
고봉원묘(高峯原妙) 1238-1295):남악하 제21세 의 제자, 성은. 15세에 출가하고 18세에 천태교(天台敎)를 공부하다가 20세에 정자사(淨慈寺)에 들어가 ‘3년 사한(死限)’을 세워 단교(斷橋)화상에 묻고 북간사(北磵寺) 설암을 처음으로 참방하였다. 1261년 삼탑사(三塔寺)에서 깨달아 설암의 법을 잇다. 뒤에 천목산(天目山) 서봉(西峰)에 주(住)하면서 선풍을 드날려 수백제자를 길렀다. ‘래불입사관 거불출사관 철사찬입해 당도수미산(來不入死關 去不出死關 鐵蛇鑽入海 撞倒須彌山)’이란 임종게를 남기고 좌망(坐亡)하다.
7.고암상언대종사(古庵祥彦大宗師 1899-1988)
[오도송悟道頌]
선정삼매호중일월(禪定三昧壺中日月) 선정삼매는 항아리 속 일월 같고
양중취래흉중무사(凉風吹來胸中無事) 시원한 바람 부니 가슴 속엔 일이 없네
[열반송涅槃頌]
가야산색방정농(伽倻山色方正濃) 가야산에 단풍잎이 곱게 물들었으니
시지종비천하추(始知從比天下秋) 이로부터 천하는 가을이로세
상강엽낙귀근동(霜降曄落歸根同) 상강이라 낙엽지면 뿌리로 돌아가니
국추망월조허공(菊秋望月照虛空) 구월의 보름달은 허공에 빛나느니라.
[고암상언대종사 (古庵詳彦大宗師1899-1988) 큰스님께서는 1899년 10월 5일에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산동하 어의동에서 파평윤씨 가문(坡平尹氏家門 )에서 탄생하셨다.
부친은 연담거사(蓮潭居士) 윤성장(尹性藏)이시고 모친은 하동 정씨 만행심(萬行心)이셨다.
어릴 때 이름을 지호(志豪)라 하였고, 동리의 학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워 읽어 마치셨다 .
1917년 17세가 되시던 해에 가야산 해인사에 입산 출가, 당대의 선지식(善知識)이신 김제산화상
(金霽山和尙)을 은사로 방한암 율사(方漢岩律師)를 계사(戒師)로 득도수계(得度受戒)하여 [상언(祥彦)]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스님은 1923년 7월 해인사에서 수선안거 한 이래 직지사 천불선원, 통도사 극락선원, 덕숭산 정혜선원, 도봉산 망월선원, 백양사 운문선원, 천성산 내원선원, 오대산 상원사선원 등에서 정진했다. 이때 제산.혜월.만공.용성 스님 회상에서 공부의 깊이를 더했으며, 유점사.표훈사.마하연.묘향산 등 북녘선원에서도 정진했다.
고암스님은 해인사.백련사.표훈사.직지사.범어사 선원의 조실, 그리고 나주 다보선원장, 해인사 용탑선원 조실로 대중을 제접했다.
스님은 1967년 7월 제3대 종정, 1972년 7월 제4대 종정, 1978년 5월 제6대 종정으로 취임하는 등 한국불교 최고의 어른으로 후학을 인도했다.
1914년 적성공립보통학교 졸.
1922년 해인사서 용성스님에게 수계. 1925년 해인사 대교과 수료.
1967년 7월 제3대 종정 추대. 1972년 제4대 종정 취임.
1978년 7월 제5대 종정 직무 대행.
1988년 10월 25일 입적.
8.고한희언선사(孤閑熙彦禪師 1561-1647)
[열반송涅槃頌]
공래세상특(空來世上特) 헛되이 세상에 와서
작지옥재의(作地獄滓矣) 지옥의 찌꺼기만 만들고 가나니
명포체림록(命布體林麓) 이 몸은 저 숲과 산기슭에 버려
이사육 수(以飼育獸) 짐승의 먹이가 되기를
[희언(煕彥1561~1647)은 법명이며, 호는 고한(孤閑)이다. 희언은 1561년(명종16) 9월 함경북도
명천(明川)에서 태어났으며 승려가 되기 전의 성은 이씨(李氏)이다. 희언이 가장 가깝게 지냈던 승려는 부휴 선수의 제자로서 동문이었던 병자호란 때의 의승장 벽암 각성(碧巖覺性1575~1660)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뜻이 맞았다.
희언은 1646년(인조24) 각성과 함께 속리산으로 자리를 옮겨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다음해인 1647년(인조25) 11월22일 나의 유해를 산속에 두어 짐승의 밥이 되게 하라는 유언과 함께 “공연히 세상에 와서 다만 지옥 찌꺼기만 남겼구나[空來世上特作地獄滓矣].”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공래세상특작지옥재의]-찌기 재, 앙금 재-
[희언은 17세에 명천 칠보산 운주사(雲住寺)에 들어가 출가하였고 18년 동안 경론(經論)을 공부하였다. 승려가 된 뒤로는 경(經)과 율(律)을 연구했으나 자신의 본분사를 밝히지 못해 경전을 버리고 사방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덕유산의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를 찾아가 '법성원융(法性圓融)'의 뜻을 묻고 그의 아래에서 3년 동안 학문을 닦았다.
희언은 언제나 누더기옷을 걸치고, 눈이 오는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머리가 길어도 개의치 않았고, 음식을 먹지 않고 10여 일씩이나 선정(禪定)에 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1622년(광해군14)에 임금이 광주(廣州) 청계사(淸溪寺)에서 재를 베풀고 그를 증사(證師)로 삼아 금란가사(金欄袈裟)를 내렸으나, 희언은 재가 끝난 뒤 가사를 벗어놓고 몰래 도망하였다.]
9.관조스님(觀照1943-2006)
[열반송涅槃頌]
삼라만상천진동(森羅萬象天眞同) 삼라만상이 본디 부처의 모습이네
염념보리여사중(念念菩提影寫中) 한 줄기 빛에 담아 보이려 했나니
막문자아하처거(莫問自我何處去) 내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말라
수북산남기미풍(水北山南旣靡風) 동서남북에 언제 바람이라도 일었더냐
[관조스님(생전에 20여 권의 사진집을 출간: 범어사 박물관 소장)
1943년 청도에서 태어나셔서 14세의 어린 나이로 출가하여 2006년 11월 20일 세수 64세요,
법랍 47세로 입적하셨다.스님은 마지막 가시는 길에 당신의 소회를 묻는 제자들에게
"삼라만상이 천진불이니, 한줄기 빛으로 담아보려고 했다. 동서남북에 언제 바람이라도 일었더냐!"
답하셨단다. 바람을 찍고 싶어 하셨다는 스님 극락세계에서도 바람을 찾아다니실까?]
10.괄허취여선사(括虛取如禪師 1720-1789)
[오도송(悟道頌)]
화륜초출해문동(火輪初出海門東) 불타는 바퀴가 동녘바다 문에서 막 떠오르자
만루홍광사벽공(萬縷紅光射碧空) 만 오라기 붉은 빛이 푸른 허공을 쏜다
천지허명요송목(天地虛明遙送目) 밝고 텅 빈 하늘땅 멀리 눈길을 보내니
운초산수영롱동(雲初散水玲瓏彤) 구름이 막 물로 흩어지며 붉은 빛이 영롱하다.
[조선 어느 날, 괄허취여(括虛取如,720~1789) 선사도 해돋이를 보러 강원도 양양 낙산에 갔던
것 같다.(그날이 새해 새날이었는지는 모른다) 이른 새벽, 예불과 참선을 끝낸 괄허 선사는
바닷가로 갔다. 그리고 먼 수평선[海門]에서 막 떠오르는 해를 보았다. 그 일출을 보는 순간, 선사는 한소식을 얻었다. 푸른 하늘로 부챗살처럼 흩어지는 ‘붉은 빛’과 바닷물을 영롱하게 적시는 ‘붉은 빛’이었다. 그 붉은 빛은 ‘불타는 불법(佛法)의 수레바퀴[火輪]’였다.
[열반송涅槃頌]
환래종환거(幻來從幻去) 환에서 와서 환을 쫓아가나니
래거환중인(來去幻中人) 오고감이 환 가운데 사람이로다
환중비환자(幻中非幻者) 환 가운데 환 아닌 것이
시아본래신(是我本來身) 나의 본래 몸일세
[오도송(悟道頌)] [유심(幽心:그윽한 마음)]
산중인방재공곡(山中人方在空谷) 산 속 사람이 빈 골짜기에 사노라니
좌포단방여라의(坐蒲團方女蘿衣) 부들방석에 앉아도 비단옷일세.
취장환이위병(翠丈環而爲屛) 푸른색 높은 산 둘러 병풍이요.
백운비이위유(白雲飛而爲帷) 흰구름 날아 휘장이 되네. 휘장,유
조건엽방락송(朝攓葉方落松) 아침에 채취한 잎은 낙락송인데, 취할,건
모채수방엽엽지(暮採秀方燁燁芝) 저녁에 뜯은 잎은 향초로다.
석천혜랭냉(石泉兮冷冷) 바위틈에서 솟은 물은 차고도 찬데
아치방자결(我齒方自潔) 내 이를 닦으니 스스로 맑아졌다.
묘연방여세상위(杳然方與世相違) 아득한 자연 속세는 더욱 멀고
풍준방불도장실(風埈方不到丈室) 저세상 회오리바람도 내 방에는 못 드네.
[문경 김룡사 괄허취여(括虛取如 1720~1789) 선사(禪師) 말씀]
훼인인역훼(毁人人亦毁)남을 헐뜯으면 남도 나를 헐뜯고,
망물물구망(忘物物俱忘)만물을 잊으면 만물도 함께 잊는다.
아선인인선(我善人人善)내가 착하면 남도 착하고,
아강물물강(我强物物强)내가 강하면 만물도 강하다.
[夢愁吟(몽수음)] 括虛取如(괄허취여)
몽리막설몽리사(夢裏莫說夢裏事) 꿈속에서 꿈속의 일 말하지 말라
몽거몽래몽불휴(夢去夢來夢不休) 꿈이 가면 꿈이 오고 꿈은 쉬지 못하나니
수중막설수중어(愁中莫說愁中語) 근심 속에서 근심 속 이야기 말하지 말라
수거수래수부수(愁去愁來愁復愁) 근심이 가면 근심이 오고 근심이 다시 근심이 되나니
[관심觀心 마음을 보다]
독좌관심해(獨坐觀心海) 홀로 앉아 마음 바다를 바라보니
망망수접천(茫茫水接天) 아득한 물결이 하늘에 닿아 있네
부운무기멸(浮雲無起滅) 뜬구름은 있다 없다 끝이 없는데
고월조삼천(孤月照三千) 외로운 달이 삼천 세계를 비춘다
[괄허취여선사(括虛取如禪師 1720-1789)]
산승편애수중월(山僧偏愛水中月) 산승은 물 속 달을 편애하기에
화월한천납소병(和月寒泉納小缾) 밝은 달과 차가운 물을 작은 병에 담아
귀도석감방사출(歸到石龕方瀉出) 돌아와 수각에 쏟아 붓고
진정각수월무형(盡情覺水月無形) 정성을 다해 휘저어 봐도 달그림자 없다
[괄허스님은 어릴 때 경서, 사기, 자전(子傳) 등을 잠깐 들어도 외울 정도로 총명했으며, 대승사로 출가한 후에는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교학에 해박함을 보여 어른 스님들은 불법의 동량(棟梁)이 될 재목이라
귀히 여겼다. 스님은 여러 지역을 유력하며 가르침을 받은 후 돌아와 환암(幻庵)장로에게 선지(禪旨),
환응담숙(喚應談肅)스님의 의발(衣鉢)을 전수받았다.
법사인 환응스님은 환성지안(1664~1729)의 법맥을 계승한 포월초민(抱月楚旻, 18세기 전반 활동)의
4세손이다. 18세기 전반 환성문중은 영남과 호남에 빠른 속도로 확산됐으며 이 가운데 포월스님과 그의
제자들은 안동, 영주, 문경, 상주 등 영남의 북동부 지역에 주석하면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중을 형성했다. 괄허스님 역시 이를 기반으로 운달산 김룡사, 사불산 대승사, 노음산 남장사에 머물면서 제자를 길러내고 쇠락한 가람을 일으켜 승풍을 진작했다.
100여년이 지난 1887년에 후손인 두암서운(杜巖瑞雲)과 혜운치민(惠雲致敏) 등은 괄허스님의 유고를
모아 <괄허집(括虛集)>을 김룡사 양진암에서 간행했다.]
* 취여(取如, 괄허括虛)/ 1720(숙종 46)~1989년(정조 13), 조선 후기의 승려./ 선승(禪僧),
성은 여씨(余氏). 호는 괄허(括虛).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여 한번 배우면 모두 위웠다고 한다.
14세 때 문경 사불산(四佛山) 대승사(大承寺)에서 능파(凌波)를 은사로 하여 삭발하였고, 진속선사
(眞俗禪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환암(幻庵)에게 선을 배우고 담숙(曇淑)의 법을 이었다.
그 뒤 영남의 여러 사찰을 순방하면서 법을 가르치고 가람을 중수하는 등 불교의 중흥에 힘을
기울였다. 법을 이은 제자로는 척전(陟詮) 등이 있다. 속랍 69세. 법랍 57세로 경상북도 운봉사
(雲峯寺)에서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괄허집』1권이 있다.
11.구산수련선사(九山水蓮仙史 1910-1983)
[열반송涅槃頌]
만산상엽홍어이월화(滿山霜葉紅於二月花) 서리 내린 낙엽이 봄꽃보다 붉나니,
물물두두대기전창(物物頭頭大機全彰) 만물의 큰 기틀이 모두 뚜렷하도 다.
생야공혜사야공(生也空兮死也空) 삶도 공이요 죽음도 공이러니,
능인해인삼매중미소이서(能仁海印三昧中微笑而逝) 해인삼매 속 미소짓고 가노라
[오도송(悟道頌)] [구산수련선사(九山水蓮仙史 1910-1983) 열반송涅槃頌]
심입보현모공리(深入普賢毛孔裡) 깊이 보현의 터럭 속에 들어가
촉패문수대지한(促敗文殊大地閑) 문수를 붙잡으니 대지가 한가롭구나
동지양생송자록(冬至陽生松自綠) 동짓날에 소나무가 저절로 푸르르니
석인가학과청산(石人駕鶴過靑山) 돌사람이 학을 타고 청산을 지나가네
[1951년 정월 보름, 동안거 결제 후 구산스님은 부산 금정사에 주석하고 있는
효봉스님을 찾아 게송을 지어 올리고 경지를 인정받았다. 이때 구산스님이 효봉스님에게
올린 게송과 효봉스님이 내린 전법게는 다음과 같다.]
대지색상본래공(大地色相本來空) 대지의 색과 상이 본래 공한데
이수지공기유정(以手指空豈有情) 공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어찌 정이 있으리오
고목립암무한서(枯木立岩無寒暑) 마른 나무 서 있는 바위엔 추위와 더위가 없건만
춘래화발추성실(春來花發秋成實)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오면 열매 맺도다.
[증구산법자(贈九山法子) 구산법자에게 줌]
재득일주매(裁得一株梅) 한 그루 매화를 얻어 가꾸라 했더니
고풍화이개(古風花已開) 옛 바람에 꽃을 피웠구나
여견응결실(汝見應結實) 그대 응당 열매를 보았으리니
환아종자래(還我種子來) 내게 그 종자를 가져오너라.
[1909년 12월17일(음력) 전북 남원군 남원읍 내척리 509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晉陽). 속명은 소봉호(蘇鋒鎬). 자호는 석사자(石獅子), 법호는 구산(九山). 법명은 수련(秀蓮). 전라북도
남원 출신. 아버지는 재형(在衡)이며, 어머니는 최성녀(崔姓女)이다.
1937년 출가하여 1938년 효봉(曉峰)을 은사로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오계를 받았고, 1940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해담(海曇)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은 뒤 통도사 백련암(白蓮庵)에서 정진하였다.
구산스님은 불일회(佛日會)를 결성하고 재가불자들의 수행정진을 도왔다.
스님은 재가자들이 일상에서 수행할 수 있는 방편으로 일주일을 ‘칠바라밀’로 다시 정했다.
육바라밀에 만행(萬行)을 추가한 것이다.
월요일은 베푸는 날(보시), 화요일은 올바른 날(지계), 수요일은 참는 날(인욕), 목요일은 힘쓰는 날(정진), 금요일은 안정의 날(선정), 토요일은 슬기의 날(지혜), 일요일은 봉사의 날(만행)로 정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퍼온글
본관은 진양(晉陽). 속명은 소봉호(蘇鋒鎬). 자호는 석사자(石獅子), 법호는 구산(九山). 법명은 수련(秀蓮). 전라북도 남원 출신. 아버지는 재형(在衡)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불교계의 정화운동과 가람 수호에 힘썼고, 해외 포교와 송광사의 국제선원을 발전시켰다.
[생애와 활동사항]
1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8세에 남원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학을 배웠다. 1935년 병중에 발심하여, 지리산 영원사로 들어가서 1백일 동안 천수기도(千手祈禱)를 드린 뒤 병이 나았다. 1937년 출가하여 1938년 효봉(曉峰)을 은사로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오계를 받았고, 1940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해담(海曇)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은 뒤 통도사 백련암(白蓮庵)에서 정진하였다.
1941년에는 해인사 백련암을 중건하였고, 1942년에는 금강산, 1943년에는 금릉군 수도암의 정각토굴(正覺土窟)에서 정진하였다. 1946년 해인사에 최초의 가야총림이 개설되자, 이곳에서 도감(都監)의 소임을 맡았다가, 다음 해 가야산 법왕대(法王臺)에 토굴을 짓고 수도하던 중 대중의 요청에 따라 최초로 설법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가야총림이 흩어지자 진주 응석사에 가서 정진하였고, 다음 해 효봉에게 오도송을 지어 보내자 효봉은 전법게를 지어 답하였다. 1954년 여름안거를 마치고 상경하여 교단 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500자의 혈서를 써서 정화의 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1955년에는 초대 전라남도 종무원장에 취임하였고 지리산 쌍계사 탑전(塔殿)에서 안거하였으며, 1956년에는 조계종 중앙감찰원장에 임명되었다. 1957년에는 광양 상백운암을 중건하고 주석하였으며, 1960년에는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으로 피선되어 1967년까지 활동하였다. 1962년에 대구 동화사 주지로 취임하여 절을 중건하였고, 1965년에는 주지직을 사임하고 금당선원에 머물렀다.
1966년 자운(慈雲)과 세계불교승가대회에 참석한 뒤 동남아시아 불교성지를 순례하였고,
그 해 9월 효봉이 입적하자 사리탑을 제막한 뒤 1967년 3월 송광사 삼일암으로 옮겼다. 1967년 8월에는 다시 조계종 감찰원장으로 취임하였고, 1969년 4월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설립되자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었으며, 9월에 창립된 총림 후원 단체인 불일회(佛日會)의 총재 겸 총회장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3월 수선사(修禪社)를 중건하고 ‘3월 불사’를 시작하였는데, 그 뒤 이 불사는 매년 개최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쇠퇴해 가던 호남지방의 불교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 고려 때부터 계승되어 온 승보사찰(僧寶寺刹)의 면모를 새롭게 확립시켜 나갔다.
1972년 운허(耘虛)와 함께 미국 카멜(Camel)의 삼보사(三寶寺) 개원식에 참석하고, 다음 해 미국인 제자 현조(玄照)와 귀국하여 송광사에 국제선원을 개원하였으며, 1974년 1월에는 송광사 서울분원인 법련사를 개원하였다.
1975년 불교의 생활화를 위하여 『칠바라밀(七波羅密)』을 발간하여 유포하였고, 1976년 외국인을
상대로 한 법문을 모아 영역본인 『나인 마운틴즈(Nine Mountains)』를 출간하여 해외에 널리 소개하였다.
1979년 로스앤젤레스에 고려사(高麗寺)를 개원하여 해외 포교에 힘썼으며, 1980년에는 법어집
『석사자(石獅子)』를 간행하였다. 1982년 미주 순방 끝에 제네바에서 불승사(佛乘寺)를 개원하였고, 10월에는 카멜에 대각사(大覺寺)를 개원하였으며, 송광사의 국제선원을 세계 수준으로 이끌었다.
1983년 12월 16일 입적하였다.
12.금오태전선사(金烏太田禪師 1896-1968)
[오도송(悟道頌)]
투출시방승(透出十方昇) 시방세계를 철저히 꿰뚫으니
무무무역무(無無無亦無) 없음과 없음의 없음이 또한 없구나
개개지차양(個個只此兩) 낱낱이 모두 그러하기에
멱본역무무(覓本亦無無) 아무리 뿌리를 찾아보아도 역시 없고 없을 뿐이로다
[금오문중 법맥:경허-만공-보월-금오-월산보월선사(40卒) 대신 만공 선사에게 받은 전법게]
덕숭산맥하(德崇山脈下) 덕숭산맥 아래
금부무문인(今付無文印) 지금에 무문인無文印을 부치노니
보월하계수(寶月下桂樹) 보배 달 비록 계수에서 졌으나
금오철천비(金烏徹天飛) 금 까마귀 하늘에 사무쳐 나르네.
[금오선사 열반송]
홀연히 깨닫고 보니
부처와 조사가 어디 있는가?
한번 구루고 사자후를 토하노라.
세우지 않고
버리지 않고
쉬지 않노라.
[금오태전스님 (1896~1968) 1896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금오(金烏) 태전(太田) 스님은 1911년 3월 15일 금강산 마하연에서 도암(道庵)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23 예천 보덕사 보월스님 회상으로 들어가 2년간 수행했으며, 30세 때는 정혜사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고, 보월스님의 법제자임을 인정받았다.
1935년 직지사를 시작으로 안변 석왕사, 도봉산 망월사, 쌍계사 칠불선원, 동화사, 선학원 등 전국 사찰에서 조실을 지내며 후학들을 지도했다. 정화불사 때에는 전국 비구승대회 준비위원회 추진위원장으로 승단 재건에 참여했고, 1958년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며 승풍진작에 힘썼다.
1961년 캄보디아에서 열린 제6차 세계불교도대회에 참석해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스님은 1968년 충북 보은 법주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73세, 법랍 57세.]
스님과 관련된 유명한 수행일화가 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눈 밝은 스승’을 만나야 한다고 강조했던 스님은 선지식을 찾아 만주까지 가 수월스님 밑에서 1여 년간 수행했다.
스님은 또 하심을 쌓기 위해 거지생활을 택하기도 했다. 서울, 전주 등에서 움막을 짓고 2년간 거지행세를 하며 두타행을 실천했던 스님은 ‘움막 스님’이란 별호를 갖게 됐다.
[현대의 고승 금오(金烏)의 본관은 동래 정씨(鄭氏)이며, 속명은 태선(太先)이다. 법호는 금오이며, 법명이 태전(太田)이다. 그는 1896년 7월 23일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박동리에서 아버지 용보(用甫)와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에 2남 3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12년 3월 금강산 마하연사(摩訶衍寺)로 출가하여 도암(道庵) 긍현(亘玄) 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그곳 선원에서 ‘이 뭣꼬’라는 화두에 몰입하며 선을 닦기 시작했고, 이후 안변 석왕사(釋王寺) 내원암(內院庵)으로 옮겨 10여년 동안 오로지 참선 정진만을 거듭했다.
금오는 1921년에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안거했으며, 그해 8월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일봉(一峰) 율사로
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후 경허선사가 있던 통도사 보광선원과 혜월선사가 주석하던 천성산 미타암 등지를 방문, 여러 선지식과 교유하면서 수행했다.
금오는 1923년 3월 예산 보덕사로 당시 만공의 수제자로 이름을 떨치던 보월(寶月)을 찾아갔다.
그는 보월에게 그동안 자신이 공부한 경계를 “시방세계를 꿰뚫어 보고 나니(透出十方界), 없고 없으며 없다는 것 또한 없구나(無無無亦無), 낱낱이 모두 그러하기에(個個只此爾), 아무리 뿌리를 찾아봐도 역시 없고 없을 뿐이네(覓本亦無無)” 라고 털어놓았다. 이에 보월은 금오의 공부가 깊음을 간파하고 그의 깨달음을 인가한 후, 자신의 법을 이을 상수(上首) 제자로 삼았다. 그후 금오는 2년 동안 보월의 문하에서 보임공부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법을 전하는 건당식(建幢式)을 갖지 못한채, 1924년 12월 보월이 29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에 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보월의 스승인 만공(滿空) 선사가 1925년 2월 보름날 덕숭산 정혜사에서 금오가 보월의 법을 이었음을 증명하는 건당식을 열어준 후 “덕숭산맥 아래에서(德崇山脈下), 지금 ‘글 없는 인’을 부촉하노라(今付無文印), 휘영청 밝은 달이 계수나무로 내려오니(寶月下桂樹), 금빛 까마귀가 하늘을 뚫고 날아오르네(金烏徹天飛)” 라는 전법게(傳法偈)를 내려 주었다.
불과 서른의 나이에 보월의 법을 이은 금오는 철저한 운수행각에 들어갔다. 그는 여러 선지식을 찾아 법거량을 나누었고, 때로는 승속의 경계마저 넘나들며 확철대오를 확고히 하기 위한 만행(萬行)을 감행했다. 금오는 태안 안면도 백사장에서 몇명의 승려들과 함께 걸식 고행했으며, 1933년 경에는 하심(下心)을 기르기 위해 약 2년동안 전주에서 거지들과 함께 걸인생활을 했는데 나중에 승려라는 신분이 드러나 ‘움막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는 심산유곡의 산사에서만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느 곳에서나 수행을 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금오는 구도만행을 할 때 늘 천막을 들고 다니는 버릇이 있었는데, 날이 저물면 어디든지 천막을 치고 며칠간 묵으면서 정진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천막을 지리산 꼭대기와 서해안의 백사장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펼쳐 수행정진의 공간으로 삼았다. 특히 그가 걸어서 만주 봉천까지 수월(水月) 선사를 찾아가 1년동안 토굴에서 함께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1935년부터 금오는 김천 직지사 선원의 조실로 있으면서 후학을 지도하였고, 이어 안변 석왕사, 도봉산 망월사, 지리산 쌍계사와 칠불선원, 서울 선학원 등지서 조실(祖室) 및 회주(會主)로 있으면서 선풍(禪風)을 선양했다. 그는 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항상 “부처를 배우려는 사람은 착한 데 의지하고 착하게 배워라. 탐심(貪心, 탐욕)을 뒤집어엎고 보시하는 마음을 내며, 진심(瞋心, 성냄)을 가라앉혀 참는 마음을 내며, 치심(痴心, 어리석음)을 가셔서 지혜로운 마음을 내어라”고 가르쳤다.
특히 금오는 제자들을 지도할 때는 ‘불법을 향해 목숨을 던지는’ 자세로 선 공부에 몰두할 것을 강조하였고, 언제나 앞장서 용맹정진하였으며, 수행을 위해 노동하는 일에도 모범을 보였다.
1954년 5월 불교정화운동이 시작되자, 금오는 전국 비구승대회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전국의 비구승들을 서울로 집결하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정화 불사를 주도하던중 금오는 수원 팔달사에서 상좌들에게 “청정한 승단을 재건하여 참다운 부처님의 자비정신을 구현해 보자.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멀리 섬으로 들어가 다시는 세상을 보지 말고 이 생이 끝날 때까지 참선 공부만 하자”고 간곡히 당부했다.
이처럼 금오에게 참선은 생명이었다. 무릇 수행자에게 참선은 일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금오의 정진자세는 그만큼 남달랐다. 그는 항상 “화두를 들면 산 사람이요, 놓치면 죽은 사람이다. 공부하는 사람의 생명은 이와 같은 것이다. 화두를 깨치지 못하면 마음의 눈이 멀어 답답해 어찌할까”라고 가르쳤다.
한편 금오는 1955년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부종정(副宗正), 1956년에는 봉은사 주지, 1957년 구례 화엄사 주지, 1958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 1961년 캄보디아에서 열린 제6차 세계불교도대회에는 한국측 수석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자리나 감투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만년에는 전국의 여러 선원을 다니면서 선풍을 떨치고 중생제도에 힘을 쏟았다. 1967년에는 속리산 법주사 주지로 취임하여 종풍(宗風)을 선양하기도 했다.
1968년 10월 8일 수제자 월산이 “문득 본래사를 깨닫고 보니(忽覺本來事), 부처와 조사가 다 어디 있는가(佛祖在何處), 뱃속에 하늘과 땅을 간직하고(腸裏藏乾坤), 몸을 돌려 사자후를 토하더라도(轉身獅子吼), 티끌하나도 세울 수 없고(不立) 티끌하나도 버리지 않으며(不捨) 모든 일을 멈추지 않는다(不休)” 라는 게송을 올리자, 금오는 “나는 무념으로써 종지를 삼는다(無念爲宗), 월산에게 나머지 일을 부촉하노라”는 말을 남기고, 세수 73세 법랍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제자로는 월산(月山), 범행(梵行), 월성(月性), 탄성(呑星), 월고(月古), 월탄(月誕), 월주(月珠) 등 50여명이 있다. 이들은 덕숭문중 가운데도 특별히 금오문중으로 불리며, 오늘날 한국 불교계의 중심 역할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금오집(金烏集)이 전한다.
금오는 근세불교사에 우뚝 솟은 ‘불멸의 수좌’로서 동산, 청담과 함께 불교정화의 세 거봉으로 일컬어 진다. 그는 움막과 토굴에서 거지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치열한 구도정신으로 일관했고, 이를 통해 ‘마음의 가난’을 실천했으며, 마침내 철저한 무소유의 일상사가 마음의 무소유로 이어져 걸림없이 자유자재한 정각(正覺)을 이룬 인물이다.(홀각본래사/불조재하처/장리장건곤/전신사자후)
금오는 항상 자기를 낮추는 마음인 하심(下心)을 강조했으며, 평생을 참선으로 일관했던 진정한 수행자였다. 그는 전국의 선방을 두루 돌아 다니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정진했다. 따라서 금오는 한국 현대불교의 수많은 동량을 길러낸 법모(法母)이자, 조계종풍을 진작시키는데 앞장선 청정하고 위대한 선지식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글쓴이:김 탁, 철학박사]
13.금타벽산선사(金陀碧山 1898-1948)
[오도송悟道頌]
하단릉첨시진실(荷團稜尖是眞實) 연잎 둥글고 뾰족한 모서리가 바로 진실이며
풍취우타비환경(風吹雨打非幻境) 바람 불고 비가 뿌리는 일이 허망한 경계 아니로다.
서접비처생련화(絮蝶飛處生蓮花) 버들개지 날리는 곳에 연꽃이 피고
추단경면방금광(錐端鏡面放金光) 송곳 끝과 거울 바닥에서 금빛이 빛나도다.
[금타 대화상은 1898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했다. 법호는 벽산(碧山), 법명은 상눌(尙訥)이다.
삼매 중 금색지면에 ‘타(陀)’ 자를 득견(得見)하고 스스로 법명을 금타(金陀)로 지었다.
금타 화상은 장성 백양사에서 송만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 불교전문대학 졸업하고 39세에 내장사
벽련암(碧蓮庵)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 뒤 백양사 운문암으로 옮겨 근본불교를 철저히 닦았다.
현대물리학, 불교역사와 철학을 깊이 연구했다. 50세에 대중들이 탁발 나간 사이 시봉 몇 분 만 남았을 때 열반하셨다. 저서로는 유고를 청화 스님이 편한 “금강심론”이 있다.]
스님은 기미년 3·1운동 당시 고창 문수사에 피신해 있던 중 우연히 <금강경>을 보고 발심 출가하여 백양사에서 송만암 대종사를 은계사로 수계득도했다. 1936년 운문암에서 <원각경> ‘삼정관’의 25청정륜법으로 용맹정진 시 정중(定中)에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을 감득(感得)하고, 그해 11월 17일에 깨달음에 이르렀다. 내소사 월명암에서 보낸 1안거를 제외하고는 내장사 벽련암과 백양사 운문암에서 두문불출 불철주야로 십 수 년간 보림정진했다.
‘보리방편문’으로 정혜균지(定慧均持)의 수행법과 가장 고차원의 불교인생관을 확립했고, 부처님이 성도 및 열반 시에 친히 수증(修證)하신 근본선정(根本禪定)인 구차제정(九次第定)을 재조명했다.
또 불교와 과학을 접목한 <우주의 본질과 형량>, 각 경론을 회통한 <수릉엄삼매도결> 등을 지었고, 동서문자를 통일해 중생의 음성을 관찰해 근기에 따라 제도할 방편으로 ‘관음문자’를 창제했다.
또한 지수화풍공 오대(五大)를 합작한 ‘금륜도’를 창작했고, 종교일원화를 제창하고, 수도위차
(修道位次)에 대한 체계를 확립하는 등 독창적이고 획기적인 정법체계를 이룩했다.
1948년 음력 1월 24일 세수 51세, 법랍 29세로 열반에 들었다.
14.금하광덕대종사(金河光德大宗師 1927-1999)
[열반송涅槃頌]
울려서 법계를 진동하여
철위한이 밝아지고
잠잠해서 겁전 봄소식이
겁후에 찬란해라
일찍이 형상으로
몰형상으로 펼쳤으니
금정산이 당당하여
그의 소리 영원하리!
[금하광덕(金河光德) 스님 행장]
현대 한국불교사에 빛나는 공헌을 하시고 종단과 세간의 등불이셨던 금하 광덕 스님은 1927년
4월 4일(음 3월 3일)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 내리에서 아버지(본관 제주) 고준학(高準學)씨와
어머니 김동낭(金東娘)씨 사이에서 2남 3녀중 넷째로 태어나셨습니다. 본명은 병완(秉完).
1950년 부산 범어사 동산 대선사와의 만남을 통해 인생관, 세계관의 일대 전환을 맞이하여 범어사 선방(청풍당), 관음전, 지장전, 미륵암, 금강암, 송도, 죽도, 삼천포, 함안 장춘사 등에서 발분 정진하셨으며, 1952년 동산 대종사를 은사로 사미계 수지, 1956년 부산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하셨습니다.
소천 대선사의 각운동(覺運動)과 그 사상에 깊이 계합한 바 <금강경독송 구국원력대>에 참여 전국 순회를 하기도 하였으며 위법망구(爲法忘軀)로 금정사에서 용맹정진하시던 1954년 봄 어느날 반야개안(般若開眼) 하셨습니다. 당시 정황을 스님께서는“금정사 마루턱에 앉아서 앞산을 건너다보는데 문득 한 경계가 열려 대경(對境)이 모두 달라졌으며, 그때 무척 기뻤고 한없는 감흥에 빠져들었다”고 말씀하신 바 있으셨습니다. 이후 반야 대지혜로“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라고 하는 인간에 대한 절재 긍정의 반야바라밀 신앙을 확립하시고 평생 동안 온 몸을 바쳐 마하반야바라밀 신앙을 전법운동에 전념하셨습니다.
1960년 범어사 보살계 때(음 3. 15) 동산 대종사를 은사와 계사로 수계 하신 스님은 종단활동을 통한 불교중흥과 정법포교를 위해 헌신, 그 빛과 덕으로 한국불교사의 신 새벽을 여셨습니다.
1974년 9월 불광회를 창립하시어 같은 해 11월 불광을 창간하셨으며,
1975년 불광회를 창건하셨습니다. 도심 한가운데에 불광사 불광법회를 창립하고 불교의식을 한글화하고, 매주 법회를 함으로서 일반인은 물론 어린이, 학생, 청년층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생활화 할 수 있게 하였고, 음성포교를 위해 불교합창단을 창설 찬불가 보급은 물론 찬불가를 불교의식의 일부로 만들어 여법한 법회를 이끄셨습니다.
아울러 한국불교역사상 최초로 창작 국악 교성곡 ‘보현행원송’을 만들어 세종문화 회관과 국립중앙극장 대극장에서 공연을 하여 전 국민이 공연을 참관하게 하였으며, 마하반야의 노래, 님의 숨결, 연꽃 피는 날 등 주옥같은 찬불가를 작시하시어 보급하셨습니다.
매월 월간《불광》을 발행(2006년 2월호 현재 통권 376호)하며 문서포교에도 커다란 족적을 남기신 스님은《금강경》,《보현행원품》,《지장경》,《관음경》 등 많은 경을 한글로 번역하시고 《생의 의문에서 그 해결까지》,《삶의 빛을 찾아》, 《메아리 없는 골짜기》, 《만법과 짝하지 않는 자》 등의 저술과
《육조단경》, 《선관책진》 등 참선 지침서도 다수 번역, 20여 종의 불서를 출간하셨습니다.
반야법문을 통해, 월간 불광 발행과 수많은 저술활동을 통해 각종 교육과 봉사, 전법활동을 통해 모든 사람은 본래 부처님, 내 생명이 바로 부처님 무량공덕생명 이라고 하는 찬란한 대 긍정의 세계를 활짝 열어 보이신 스님은 법랍 49세, 세수 73세로 1999년 비록 사바 세연을 거두시고 원적 무상삼매에 드셨습니다.
15.나옹혜근선사(懶翁惠勤禪師1320-1376)
[오도송悟道頌] (무문無聞)
안이원래자몰종(眼耳元來自沒踪) 눈과 귀는 원래 자취가 없거늘
개중수득오원통(箇中誰得悟圓通) 누가 그 가운데서 원만히 깨칠 것인가
공비상처번신전(空非相處飜身轉) 텅 비어 형상 없는 곳에서 몸을 굴리면
견폐려명진활통(犬吠驢鳴盡豁通) 개 짖음과 나귀 울음이 모두 道를 깨침이네.
►용맹정진 4년 왕사께서 29세 때 겨울, 눈이 쌓인 뜰을 거닐다가 때 이른 매화꽃을 보고 大悟
[오도송(悟道頌)]
선불장중좌(選佛場中坐) 선불장 가운데 앉아서
성성착면착(惺惺着眠着) 성성이 눈여겨 잘 보니
견문비타물(見聞非他物) 보고 듣는 것 다른 것이 아니라
원시구주인(元是舊主人) 다만 본래의 옛 주인일세
(대원大圓)
포색허공절영형(包塞虛空絶影形) 허공을 꽉 싸안은 그 모습 뛰어나
능함만상체상청(能含萬像體常淸) 온갖 형상 머금었어도 몸은 항상 깨끗하다.
목전진경수능량(目前眞景誰能量) 앞의 참 경개景槪를 누가 능히 헤아리니
운권청천추월명(雲卷靑天秋月明) 눈구름 걷힌 푸른 하늘에 가을 달은 밝아라.
[열반송涅槃頌]
칠십팔년귀고향(七十八年歸故鄕) 78년 고향으로 돌아가나니
천지산하진시방(天地山河盡十方) 이 산하대지 온 우주가 다 고향이네.
찰찰진진개아조(刹刹塵塵皆我造) 삼라만상 모든 것은 내가 만들었으며
두두물물본진향(頭頭物物本眞鄕) 이 모든 것은 본시 내 고향이네.
생종하처거(生從何處來) 태어날 땐 어느 곳에서 와서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죽으면 어느 그곳으로 가는가?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태어남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고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흩어지는 것.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뜬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듯이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생사 거래 또한 역시 이와 같도다.
독일물상독로(獨一物常獨露) 오직 한 마음을 항상 오로지 드러내어
담연불수어생사(湛然不隨於生死) 담연히 생사에 개의치 말게나.
[나옹(懶翁, 1320~1376) 스님의 ‘깊은 골짜기(深谷)’라는 시다. 말씀은 깊은 골짜기를
이야기하고 있으나 내용인즉 자신만이 도달한 높고 깊은 선경(仙境)을 의미한다.]
극원수능도나변(極遠誰能倒那邊) 깊고 먼 이 곳에 그 누가 이르리
편운횡괘동문전(片雲橫掛洞門前) 조각구름 한가로이 골의 입구에 걸렸는데
기중승경무인식(其中勝境無人識) 이 가운데 뛰어난 경치를 아는 이 없어
명월청풍롱벽천(明月淸風弄碧天) 명월과 청풍이 푸른 하늘을 희롱하고 있다.
[보제존자 나옹 혜근(懶翁慧勤, 1320~1376) 스님은 살아서는 ‘생불’로 추앙받고 입적해서는 ‘전설’이 된 고승이다. 나옹혜근의 호는 강월헌(江月軒, 법명은 혜근(惠勤, 성은 (牙씨, 영해(寧海사람. 태어나면서부터 骨相이 비범하고 영특하였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겪고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서 출가하였다.
그 뒤 전국의 이름 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에서 대오大悟하고, 석옹石翁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중국의 지공指空·평산처림平山處林에게 인가를 받고, 무학無學에게 법을 전하여 조선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웠다. 왕명으로 밀성密城(밀양) 영원사塋源寺로 옮겨가던 중 1376년(우왕 2) 5월 15일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나옹화상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설화의 주인공으로도 많이 나온다. 보우와 함께 고려말의 위대한 고승으로 일컬어지며, 조선 불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노래를 많이 지어 문집인 〈나옹집〉에 보존하고 있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공덕산 묘적암의 요연에게 출가했다. 그뒤 여러 사찰을 순력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회암사에서 4년간 좌선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1347년(충목왕 3) 원나라로
건너가 연경 법원사에서 인도 승려 지공에게 배우고, 다시 자선사로 가서 처림의 법을 받았다.
귀국 후 평양·동해 등지로 다니며 설법하다가 오대산 상두암에 은거했으나, 공민왕의 간곡한
청으로 1361년 상경하여 내전에서 설법하고 신광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뒤 공부선을 관장했으며,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뒤 송광사에 있다가 다시 회암사 주지가 되어 절을 중수하고 교화활동을 펴자 사람들이 본업을 잊고 몰려들어 길이
메워질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376년(우왕 2)에는 문수회를 열어 크게 법명을 떨쳤다.
[보제존자 나옹 혜근(懶翁慧勤, 1320~1376) 스님은 혜근(慧勤)이라고도 한다.
속성(俗姓)은 아씨(牙氏). 초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강월헌(江月軒). 나옹화상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설화의 주인공으로도 많이 나온다. 아버지는 선관서령(膳官署令) 서구(瑞具)이며,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에게 출가했다. 그 뒤 여러 사찰을 순력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4년간 좌선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1347년(충목왕 3) 원나라로 건너가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에게 배우고, 다시 자선사(慈禪寺)로 가서 처림(處林)의 법을 받았다. 그뒤 명주(溟州)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의 관음보살을 참례하고, 육왕사(育王寺)에서 석가모니상을 예배했다.
1352년에는 복룡산(伏龍山)의 천암장(千巖長)을 찾았다. 1355년 연경으로 돌아가 원나라 순제
(順帝)의 명으로 광제사(廣濟寺) 주지가 되었다. 이듬해 10월 개당법회(開堂法會)를 여니 순제는
금란가사(金襴袈裟)와 상아불자를 하사했다. 순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법원사로 지공을 찾아가 그의 부촉을 받고 1358년(공민왕7) 귀국했다.
귀국 후 평양·동해 등지로 다니며 설법하다가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거했으나, 공민왕의 간곡한 청으로 1361년 상경하여 내전에서 설법하고 신광사(神光寺)의 주지가 되었다.
그뒤 공부선(功夫選)을 관장했으며,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1371년 왕사에 봉해지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 풍복국우세보제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의 호를 받았다.
그 뒤 송광사(松廣寺)에 있다가 다시 회암사 주지가 되어 절을 중수하고 교화활동을 펴자 사람들이 본업을 잊고 몰려들어 길이 메워질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376년(우왕 2)에는 문수회(文殊會)를 열어 크게 법명을 떨쳤다.
왕명에 의해 밀성(密城:밀양) 영원사(瑩源寺)로 옮기던 중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했다.
보우와 함께 고려말의 위대한 고승으로 일컬어지며, 조선 불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노래를 많이 지어 문집인 〈나옹집〉에 보존하고 있다.
그의 노래 가운데 특색 있는 것은 〈나옹삼가 懶翁三歌〉로 통칭된 〈백납가 百納歌〉·〈고루가 枯髏歌·〈영주가 靈珠歌〉의 3편이다. 누더기, 해골 같은 몸, 보배스러운 구슬을 노래하고 삶에 집착하지 말고 불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주제이다.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있고, 비석과 부도가 회암사에 남아 있다. 저서로 〈나옹화상어록〉 1권과 〈가송 歌頌〉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선각(禪覺)이다. [출처:daum백과]
16.나찬선사(懶瓚禪師) 생몰연대 미상
[임종게 열반송涅槃頌]
심월고원(心月孤圓) 마음달 외로이 둥글어
광탄만상(光呑萬像) 그 빛이 삼라만상을 삼켰다
광경구망(光境俱忘) 빛과 대상 다 잊어버리면
부시하물(復是何物) 다시 이 무슨 물건이오
기래끽반(飢來喫飯) 배고프면 밥 먹고
곤래즉면(困來卽眠) 졸리면 잠잔다.
분화단지황독미(糞火但知黃犢味) 감자를 쇠똥불에 구워 먹으니 다만 쇠똥 맛만 알겠는데
은구나식자니신(銀鉤那識紫泥新) 은구들이 어찌 자니의 새로움을 알리오
갱무심서수한체(更無心緖收寒涕) 다시 마음 언저리 차가운 콧물도 닦지 못한 나이거늘
기유공부문속인(豈有功夫問俗人) 어찌 속인보다 못한 내게 공부를 물으러 오는가
생사무려갱부하우(生死無慮更復何憂) 나고 죽는 게 걱정 없으니 다시 또 무얼 근심하랴
수월무형아상지령(水月無形我常只寧) 물속 달 형체 없듯 내 항상 아무 일도 없을 뿐이요
만법개이본자무생(萬法皆爾本自無生) 만법이 그러해 본래 그대로라 생겨남 없는 것
올연무사좌출래초자청(兀然無事坐春來草自靑) 오뚝이처럼 가만히 앉았으니 봄이 왔나 풀이 절로 푸르구나 [나찬선사(일명 명찬화상, 생몰년도 모름)]
채필획공공부염(彩筆劃空空不染) 채색 붓을 허공에 그어도 허공은 물들지 않고
이도할수수역연(利刀割水水亦然) 예리한 칼로 물을 베어도 물은 그대로라네
인심약사공여수(人心若似空與水) 사람의 마음이 허공이나 물과 같다면
번용하능작기전(繁冗何能作羈纏) 번거롭게 세상사에 어찌 얽어 맬 수 있으리
* 冗; 쓸데없을 용. 쓸데없다, 번거롭다,무익하다,남아돌다,섞다, 여가(餘暇),겨를.
* 纏; 얽을 전. 얽다,얽히다, 구르다, 감다, 감기다, 돌다.
[명찬화상이라고도 함. 생몰연대 미상, 당대 사람, 북종(北宗)임.
崇山普寂에게 참학하여 법을 계승하였다. 湖南省의 南岳에 은거하였는데 그 모습이 세속의 일에는 관심이 없고 게을렀기 때문에 懶瓚·懶殘 이라고 불리워졌다.
天寶 초년(742년)에 南岳寺에 들어가 20년을 지냈다. 남악사에 있을 적에 李必이 그 절에서 은거하였는데 10년 후에 재상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 과연 이 필이 뒤에 예언한 대로 재상이 되었다. 大明禪師라고 시호를 받고 《남악나찬화상가》가 전해지고 있다.
길거리를 다니며 쇠똥에 감자를 구워 먹었다고도 한다.]
[명찬(明瓚) 선사는 중국 당나라 때의 스님입니다. 처음에 숭산 보적(嵩山普寂)에게서 인가를 받아 법을 이었지만, 평생을 형산(衡山) 바윗굴에서 지냈습니다. 많은 스님들이 불법을 전하고 절을 경영하는데 애썼지만, 스님은 홀로 한가하게 지냈습니다. 주위에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니, 사람들은 스님을 나찬(懶瓚: 게으른 명찬) 또는 나잔(懶殘: 남은 밥을 먹는 게으른 스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 초청했으나, 끝내 사양했습니다. 다음은 나찬 선사의 법문입니다.
세상 많은 일에 사람들은 이리저리 서로 다투며 쫓아다니지만, 나는 하늘에 태어나거나 복전을 바라지 않는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곤하면 잠을 잘뿐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나를 보고 비웃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 사이 소식을 알 것이다.
이는 어리석고 우둔해서가 아니라, 본래의 바탕(本體)이 그와 같기 때문이다.
우두커니 혼자 일 없이 앉았으니,(올연무사좌兀然無事坐)
봄이 오매 풀이 절로 푸르구나.(춘래초자청春來草自靑)
- 남악나찬화상가(南嶽懶瓚和尚歌) <경덕전등록 30권>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라도 좋은 제자를 만나야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후세에 이름이 전해집니다. 그러나 명예에 한 번 눈이 어두워지면, 학인은 명성 있는 스승을 찾고 스승은 권세 있는 제자를 찾습니다. 공부하는 자리가 가장 세속적일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수행자들 가운데는 명성이 높은 스승의 제자가 되거나 큰 도량에 소속하는 것을 자기의 명예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달라이라마의 법회에서 영화배우 리차드 기어가 법회 맨 앞자리에 앉은 일이 있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배려했는지 알 수 없지만, 대중들 사이에서 구설수가 있었습니다.
평생 말없이 공부하는 수행자보다 대중의 인기를 모으는 사람이 주지 자리를 차지하거나, 법좌에 오르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납니다. 물론 이런 일은 부처님의 법을 더 널리 펴기위한 대승적 방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자가 남는 일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공부하는 자리에 명성과 모임의 규모가 앞서면, 배우는 사람의 마음이 가라앉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마음을 쉬고 자성을 찾는 공부는 문자 위의 일일뿐입니다. 평생을 수행한 제자들이 스승이 입적하고 나서 스승의 명성이나 남은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면, 과연 수행이 무엇을 위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편, 출세간의 허물을 보고 재가자들이 새로운 도량을 세우지만, 이 역시 쉽지 않습니다. 뜻을 세우기는 쉽지만, 명리(名利)에 묶이지 않기 위해서는 칼날 위를 걷는 수행이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이 들수록 절감하게 됩니다.
무심의 뜻이 이토록 분명하건만, 현실은 늘 저만치 떨어져 있습니다. 공부가 어긋나면, 배우는 사람은 평생 지(知)와 행(行)의 괴리에 허덕이게 됩니다. 나찬 선사의 법문은 이 문제의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쁘게 뛰어다니지만, 자신은 하늘에 태어나거나 복전을 바라지 않으며, 스스로 배고프면 밥을 먹고, 곤하면 잠을 잘뿐이라고 합니다. 수행과 불사(佛事) 속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아상(我相)을 꿰뚫고 있는 것입니다. 선사의 다음 게송은 무심 수행이 돌아가는 곳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두커니 혼자 일 없이 앉았으니,
봄이 오매 풀이 절로 푸르구나.
나찬 선사의 게송은 지극하여 덧붙일 것이 없습니다. 자성이 온전하게 드러났으니, 여기에서는 더 이상 안과 밖, 지와 행, 스승과 제자의 분별이 없습니다. 만약 게송의 뜻을 가리켜, 풀이 푸른 것은 진공묘용이라거나, 앉는 것은 무심이니 우주와 내가 하나라고 한다면 모두 알음알이입니다.
나찬 선사의 행적을 보면, 선사야말로 참으로 구하는 마음이 끊어진 도인입니다. 자성을 보는 공부의 근본은 무심입니다. 옛 선사는 그래서 제자를 삼생의 원수 대하듯이 했습니다. 참다운 제자는 스승을 팔지 않고, 자기 본래의 면목으로 살아갑니다.
[출처] (게으른 명찬선사 如雲 2018. 4. 6.)
17.남산정일선사(南山正日禪師 1932-2004)
[열반송]
부능거적야요거(不能去的也要去) 이제 갈 수 없는 곳으로 가야만 한다.
니도저요거하방(您到底要去何方) 스님,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입니까?
타개창호간일간(打開窓戶看一看) 창을 열고 자세히 살펴보거라.
[오도송(悟道頌)][남산정일선사(南山正日禪師 1932-2004) 열반송]
극빈자희환대로적로이총(極貧者喜歡帶露的蘆葦叢)
극빈자는 이슬 맺힌 갈대숲이 좋다
혼연간일루시광투과정개대지(渾然間一縷始光透過整個大地)
홀연 한 가닥 시광이 온 대지를 투과하니
만년전사불이열반(萬年前事佛已涅槃) 만년 전 일 부처님 열반이 드러났네.
무우하착무우하착(霧雨下着霧雨下着) 안개비가 내리는구나, 안개비가 내리는구나
최후여고별시적상통(最後如告別時的傷痛)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슬픔과 같이
대전인미답지괘념호(對前人未踏地掛念呼) 전인 미답지가 궁금하느냐?
도정정지핍착수파정소계거세일파검파(到靜靜地泛着水波的小溪去洗一把臉吧)
잔물결 이는 개울로 가서 세수나 하거라
[남산 정일 큰스님은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나셨다. 부친은 고정록 씨, 모친은 정간난 씨이다. 조계사로 출가하여 1958년 금오 선사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수계하셨다.
법명은 정일(正日)이시고 당호는 남산(南山)이시다.]
[남산정일 선사(南山正日禪師) 남산 정일 큰스님은 1932년 서울 불광동에서 태어나셨다.
1957년 조계사에서 금오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시고, 1963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셨다.
이후 범어사, 통도사, 해인사, 망월사, 용화사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셨다. 서울 보광사 보광선원과 정각사 죽림선원 조실, 법주사 주지 등을 역임하셨고, 한국 불교의 선맥(禪脈)을 이어온
선학원의 이사장도 역임하시면서, 부처님의 정법을 수호해오셨다.
큰스님께서는 2004년 9월 7일 새벽 5시 55분께 충북 속리산 법주사 궁현당에서 세납 72세,
법랍 47세를 일기로 원적했다.]
[경 력]
1970년~1974년 전라남도 강진 백련사 주지
1980년 ~ 2004년 서울 보광선원 조실
1980년 ~ 2004녀 서울 보광사 주지
1983년 ~ 1985년 (재)선학원 중앙선원 선원장
1991년 ~ 2004년 정각사 죽림선원 조실
1992년 ~ 1994년 법주사 주지
1992년 ~ 2003년 (재)선학원 이사장
[남산정일 선사(南山正日禪師)의 만화 지장경]
물질만능주의 사회에 ‘효심=불심’ 일깨우는 만화 지장경
지장경은 우리나라 지장신앙의 기본 경전으로 현세이익적인 불경입니다. 이 경은 부처님이 도리천에서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하여 설법을 한 것을 모은 것으로 지장보살을 불러 갖가지 방법으로 아수라, 지옥, 아귀, 육도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과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평등하게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려는 지장보살의 큰 서원을 말씀하신 경전입니다.
지옥의 여러가지 모습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으며, 조상들이 극락왕생하는 공덕들이 나와있습니다. 그래서 지장경은 예로부터 효경으로 전하여 지고 있습니다.
지장경은 정보화 사회, 물질문명이 발달한 사회일 수록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경전이기도 합니다.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지는 수모를 겪고 있는 지금의 문명시대에 만화로 보는 지장경을 널리 읽도록 하여 큰 경종을 울리고 싶은 것이 저자 정일 큰스님의 원력입니다.
저자는 영상과 시각적인 교육과 문화에 익숙해져 가는 모든 문화 및 대중들의 추세에 발맞추어 만화라는 기법으로 특별히 표현해 보았으며 다소 변형이 가해져 있지만 되도록 경전의 충실한 내용 전달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만화로 보는 지장경은 온 가족이 함께 효를 실천하고 선행을 장려할 수 있는 훌륭한 매체가 될 것입니다.
[저자 : 남산정일 선사(南山正日禪師)]
18.남포소명선사(南浦紹明禪師 1235-1308)
[열반송涅槃頌]
사풍매우(詞風罵雨) 비바람 꾸짖나니
불조부지(佛祖不知) 불조도 알지 못하네
일기별전(一機瞥轉) 눈 깜짝할 사이에 몸 바꾸나니
섬전유지(閃電猶遲) 번갯불도 오히려 늦네
[일본의 대응국사(大應國師) 남포소명(南浦紹明)이 9년 동안 송나라에 유학해서 경산(徑山)의
허당선사(虛堂禪師)의 법을 얻고 문영(文永) 4년에 귀국했을 때에 전달했던 칠부(七部)의 다전(茶典)의 일부에 유원보가 지은 <다당청규(茶堂淸規)> 3권이 있고 그중의 다도궤장(茶道軌章)과 사제의장(四諦義章)을 뒤에 초록(抄錄) 한 것을 <다도경(茶道經)>이라고 이름지어서 간행했는데, 이 책에
의하면 수단선사가 다선(茶禪)의 시조임과 더불어 화경청적에 대한 출처를 확인할 수 있다.]
[이희익(李喜益, 1905~1990) 거사로, 재가선(在家禪)의 세계에서는 선도회(禪道會) 지도법사로 알려진 종달(宗達)노사 종달 선사의 임제종 법맥은 다음과 같다.
잘 아시다시피 인도에서의 전법 傳法 은 석가세존께서 마하가섭에게 법을 전하여 반야다라까지 법이 전해졌고,
중국은 인도로부터 법을 가져온 보리달마로부터 임제의현의 후손인 제47세 오조법연, 제48세
원오극근, 제49세인 호구소륭(과 대혜종고)의 법을 이어받은 제50세 응암담화, 제51세 밀암함걸로부터 제52세 송원숭악을 통해 제54세 허당지우까지 이어진 법은
제55세 남포소명을 통해 일본으로 전해졌으며, 제73세 백은혜학을 통해 일본 임제종의
중흥기를 거치고, 남선사파 관장 (방장에 해당)을 역임한 제79세 독담잡삼 후에 묘심사파 관장도
역임), 제80세 무해고량, 제81세 화산대의를 통해 한국의 제82세 의현종달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편 송원숭악과 법형제인 제 52 세 파암조선을 통해 제 56 세 석옥청공까지 이어진 또 다른
법의 갈래는 제57세 태고보우를 통해 한국으로 전해져 청허휴정[서산대사], 경허성우, 만공월면 등과 같은 걸출한 선사들을 배출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9.뇌암정수선사(雷庵正受禪師 1146-1208)
접인본무언(接引本無言) 잡아 당겨도 아무 말이 없고
출몰임왕환(出沒任往還)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네.
원무첨감처(元無添減處) 원래 보탤 것도 줄일 것도 없는 곳이니
단동추월원(但同秋月圓) 다만 가을의 달처럼 둥글기만 하구나.
[남송(南宋) 때 뇌암정수(雷庵正受,1146~1208) 선사가 지은
《선종의 일화집인가태보등록(伽泰普燈錄)》책(冊, 書籍)]에 담긴 선시.
횡변십방(橫邊十方) 공간적으로는 시방세계에 가득 차고
수궁삼제(竪窮三際) 시간적으로 삼세(과거 현재 미래세)를 다한다.
일립속중장세계(一粒粟中藏世界) 한알 좁쌀 속에도 세계가 감추어져 있고
반승쟁내팽산천(反升鐺內烹山川) 반되 솥안에도 산천을 달인다네
향부비관팽다숙(香浮鼻觀烹茶熟) 그윽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니 차가 이미 익었고
희동미한연구성(喜動眉閒煉句成) 기쁜 마음으로 시한수 지어보네
[뇌암정수(雷菴正受) 수좌(首座)는 평강(平江)사람이다. 용모가 훤출하였으며, 오랫동안 월당
(月堂道昌:1089∼1171)·요당(拗堂)스님 등 여러 큰스님들에게 귀의하였다. `보등록(普燈錄)"30권을
편집하였고, `능가경(楞伽經)"에 주석을 붙이기도 하였다.
삽주(霅州) 조씨암(曹氏菴)에 주석하면서 서산거사(抒山居士) 유계고(劉季高)의 조카 유평(劉平)과 가장 가까이 지냈는데, 경원(慶元:1195∼1200)연간 초에 다시 서호(西湖)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유공이 단구(丹丘)에 부임하자 건자봉(巾子峰) 보은사(報恩寺)의 주지로 그를 부르니, 송을 지어 마다하였다.
결묘방희의장송(結茆方喜倚長松) 띠풀집 짓고서야 기뻐서 소나무에 기대니
일침청풍수정농(一枕淸風睡正濃) 베갯머리 맑은 바람에 단잠을 잔다.()
선도상무심리회(禪道尙無心理會)참선이란 도리를 터득하는 것에도 무심함을 높이 사는데
긍장신입료람중(肯將身入鬧藍中) 어이하여 이내 몸을 시끌대는 절간에 넣으려 하오.
[유공이 이 글을 보고 매우 기뻐하여 다시 사람을 보내 굳이 청하며 아울러 화답의 시를 보냈다].
앙장골상의교송(昻藏骨相倚喬松) 높고 깊으신 모습 우뚝한 소나무에 기대어
만세청음지자농(晩歲淸陰只自濃) 노년에 맑은 그늘 스스로 무르익네
호향홍진고저각(好向紅塵姑著脚) 홍진세계에 잠시 발 붙이시어
하방도재소담중(何妨都在笑談中) 웃음지며 얘기한들 무엇이 나쁘겠소.
그러나 스님은 끝까지 가지 않았고 당시 사람들은 그를 고상하다고 하였다. 주지가 되려고 꼬리를 흔들어대며 아첨을 하는 오늘날, 어떻게 이런 사람이 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송나라 뇌암정수雷庵正受가 편찬한, 선종의 일화집인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에도 “좁쌀 한 알에 세계가 들어 있고, 반 되들이 냄비 안에 산천이 끓는다.[一粒粟中藏世界 半升鐺內煮山川(일립율중장세계반승당내자산천)]”는 말이 있다.]
[남송(南宋) 때 뇌암정수(雷庵正受, 1146~1208)가 지은 <가태보등록(伽泰普燈錄)>에는 선사(禪師)들 외에 왕공(王公), 거사(居士)들에 관한 선화들도 소개되어 있다.
이 가운데 송 인종(仁宗)황제가 지은 게송이 수록되어 있는데 마음의 본래 성품을 두고 지은 격조 높은 시이다. 흔히 “공간적으로는 시방에 꽉 차고, 시간적으로 삼세를 다한다.”(橫十方 竪窮三際)는 마음을 설명하는 말을 더 구체적으로 말해 놓은 것 같다.
인종은 젊었을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학문을 좋아한 왕으로 알려졌다. 그가 책을 하도 많이 읽어 창밖의 닭이 글 읽는 소리를 흉내 냈다 하여 계창(鷄窓)이라는 말이 생겼다.]
20.다릉인욱선사(茶陵仁郁禪師 1025-1072 北宋)
[오도송悟道頌]
아유명주일과(我有明珠一顆) 나에게 신비로운 구슬이 한 알 있는데
구피진로관쇄(久被塵勞關鎖) 오랜 세월歲月 더러운 티끌에 묻혀 있었다.
금조진진광생(今朝塵盡光生) 오늘에야 티끌 사라지고 찬란燦爛한 빛 쏟아져
조파산하만타(照破山河萬朶) 산하대지 온갖 만물萬物들을 훤히 비추는구나.
[도, 실천 못하면 꼬리없는 원숭이일 뿐]
하나를 알면 열을 말하고 그 열에 하나도 실천하지 못하는 자를 범부라 하고, 아는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실천하는 자를 도인道人, 즉 진리의 길을 걷는 자라 한다. 진리의 길을 걸어 평안平安이라는 목적지에 무사히 닿기란 생각만큼 용이하지 않다. 갈림길과 함정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여정에는 훌륭한 길잡이[導人], 즉 스승이 필요하다.
귀감龜鑑이란 말이 있다. 거울 앞에 서면 누구나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사람의 눈이 밖으로 나있다 보니 타인의 장단을 논하긴 쉬워도 자신의 허물은 보기 어렵다. 그럴 때 그 앞에 서면 자신의 부족한 점이 고스란히 드러나 절로 삼가고 숙연해지는 사람, 스승은 바로 그런 존재이다.
방회方會선사가 양기산楊岐山에서 막 운개산雲蓋山으로 옮겼을 무렵, 상湘 지역을 떠돌던 수단守端이란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에게는 빼어난 기상이 있었다. 이를 한 눈에 알아본 양기 스님은 속으로 남다르게 생각하였고,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으레 밤을 새고는 하였다. 그러던 어느 섣달그믐날이었다. 갑자기 방회 스님이 물었다.
“스님의 삭발 은사는 누구신가?”
“다릉茶陵의 인욱仁郁화상이십니다.”
“그분이 개울을 건너다 깨닫고 지은 게송이 매우 훌륭하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 게송을 기억하고 있는가?”
수단이 즉석에서 게송을 읊었다.
“나에게 신비로운 구슬 한 알이 있어/ 오랜 세월 더러운 티끌에 묻혀 있었네./ 오늘에야 티끌 사라지고 찬란한 빛 쏟아져/ 산하대지 온갖 떨기를 훤히 비추는구나.”
게송을 들은 방회 선사는 크게 웃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느닷없는 비웃음에 깜짝 놀란 수단은 어쩔 줄 몰라 좌우를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수단은 설날 벽두부터에 인상을 구기고 방장실로 찾아갔다.
“게송을 듣고 웃으신 까닭이 뭡니까?”
시비를 가리기 전엔 물러나지 않을 태세였다. 방회 스님이 그런 수단을 뜬금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자네 어제 액막이 여우[野狐] 만들어 논 것 봤지?”
“보았습니다.”
“자네는 그것보다 한 수 모자라.”
수단은 놀랐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방회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셨다.
“액막이 여우는 사람들이 비웃어도 좋아하는데, 자네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봐 두려워하지 않는가.”
그 한 마디에 수단은 크게 깨쳤다.
[출처] 방회 스님의 액막이 여우
21.대매법상선사(大梅法常禪師 ?-839)
[최잔고목이 찬 수풀에]
최잔고목기한림(崔殘枯木倚寒林) 최잔고목이 찬 수풀에 의지해 있으니
기도봉춘불변심(幾度逢春不變心) 봄을 여러 번 맞아도 마음 변치 않네
초객우지유불고(樵客遇之猶不顧) 나무꾼도 고목은 돌아보지 않는데
영인나득고추심(郢人那得苦追尋) 목수는 어찌하여 괴로이 찾으려 하는가
[大梅 臨遷化示徒云 대매 선사가 열반에 드실 때 대중들에게 말씀하였다.]
내막가앙(來莫可抑)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왕막가추(往莫可追) 가는 것을 따를 수 없다
종용문오서성(從容聞鼯鼠聲 乃云) 조용히 다람쥐 소리를 듣고 말씀하였다
즉차물비타물(卽此物 非他物) 이 물건이요 다른 물건이 아니니이오
여선호지(汝善護持) 그대들은 잘 보호하여 가지라하라
오당서의(吾當逝矣) 나는 마땅히 가리라니라[대매법상선사(大梅法常禪師 ?-839)]
[당대 남악하, 양양(호북성)사람 성은 정씨, 유년부터 형주 옥천사에서 수학한 후 관년에 수구하고 경론을 연구하다가 선에 뜻을 두고는 마조하에서 깨달음을 얻다. 정원12년(736) 사명남쪽 매자진의 은거처였던 대매산에 주하다.
거주하기 40년 즉심즉불, 비심비불의 종풍을 선양하였으며 개성원년(836) 호성사를 짓고 6~700의 대중을 이끌다가 동사년 9월 88세로 시적. 진사 강적이 비문을 짓다. 제자에 항주천룡, 신라가지, 신라충언 등이 있다.
(조당집15, 송고승전11, 전등록7, 회요4, 회원3) 저서로는 대매산상선사어록1권이 있다.]
[즉심즉불 (即心即佛 ) - 무문관
: 마조선사에게 대매(법상) 스님이 물었다
• 대매 :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 마조 : "마음이 곧 부처이다(即心是佛)."]
⇒ 즉심즉불(即心即佛)에서 말하는 마음 은 '사량분별(思量分別) 하거나 집착(執着) 하는 마음'이 아니라 '주객미분전(主客未分前 : 주체와 객체가 나누어지기 이전)의 청정한 마음(一心)'을 말한다. 이것은 생사(生死), 선악(善惡), 유무(有無), 시비(是非), 호오(好惡), 득실(得失) 등 양변(兩邊)을 초월한 무념(無念)ㆍ무심(無心)의 청정한 본래심(本來心)이다.
▷ 마조선사는 밖에서 부처를 찾고 있는 법상 에게 즉심즉불(即心即佛)이라고 설하여,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자신의 안으로 되돌려서 깨닫도록 한 것 이다. - 정성본 무문관
[<전등록>에 의하면, 대매 법상(大梅法常) 선사는 9세기 당나라 때 스님이다. 호북의 양양(襄陽)
사람으로, 성은 정(鄭)씨였다. 10대에 출가해 형주(荊州) 옥천사(玉泉寺)에서 스님이 되었고,
그 후 온갖 경과 논에 통달해 강의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많이 아는 것은 말 재주에 보탬이 될지는 모르지만 마음을 깨닫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내 자신의 경전을 읽어야 된다싶어 스승을 찾아 나섰다.
법상 스님이 처음으로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를 찾아뵙고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간절한 물음이었다. 이에 대한 마조 선사 답이 돌아왔다.
“마음이 곧 부처이니라[즉심시불(卽心是佛).”
마조 선사의 이 한마디 말에 대매 법상은 바로 그 자리에서 크게 깨달았다. ‘즉심시불’을 온 몸으로 보고 실현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부처의 마음이며, 부처의 행위이고, 부처의 언어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법상 스님은 의문이 콱 풀렸다.
“어떻게 지녀야 합니까?”
“네 스스로 잘 보호해 가져라.”
이 법문을 듣고 법상 스님은 그 길로 절강성의 대매산(大梅山)에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천태산(天台山) 여요(餘姚)의 남쪽으로 칠십 리에 있는 매자진(梅子眞)이 옛적에 은거했던 자리, 명주(明州) 대매산(大梅山)에 들어간 것이다. 매자진(梅子眞)은 한(漢) 나라 매복(梅福)의 자(字)로서, 매생(梅生) 혹은 매선(梅仙)이라고도 한다. 전한(前漢) 말 왕망(王莽)이 정사를 전횡하자 처자를 버리고 떠나 은거했던 곳이다.
법상은 796년 얼마 곡식과 종자를 구해 산중으로 들어가 조그마한 오두막을 짓고 살면서 수행을 했다. 그 이후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이미 이 마음이 부처인 줄 알았으니, 그는 이 마음을 살피고 쓸 줄을 알면 됐지,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하고….
스승의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출처] 대매 법상(大梅法常) 선사
22.대위선과선사(大潙善果禪師 1079~1152)
[임종게(臨終偈)]
요행변행(要行便行) 올 때는 문득 오고
요거변거(要去便去) 갈 때는 미련 없이 가네
당파천관(撞破天關) 하늘을 후려쳐 뚫어 버리고
헌번지축(掀翻地軸) 대지를 뒤집어 엎네[흔번;번쩍 들어 뒤짚어엎다.출전;僧寶正續傳 권5]
[속의 여인(拈頌第七二則公案頌)]
월리항아불화미(月裡姮娥不畵眉) 달 속의 여인(항아)은 화장도 않고
지장운무작라의(只將雲霧作羅衣) 구름과 안개만으로 몸을 감았네
부지몽축청난거(不知夢逐靑鸞去) 꿈속에서 푸른 난새 쫓아가던 일 잊고
유파화지개면귀(猶把花枝蓋面歸) 여전히 꽃가지로 얼굴 가리고 돌아오네.
[임제종 양기파(楊岐派)의 선승. 상서성에서 태어났다. 황룡사심(黃龍死心)에게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저서에는《월암과화상어요(月菴果和尙語要)》(1권)가 있다.]
23.대혜종고선사(大慧宗杲 1089-1163)
[열반송涅槃頌]
생야지임마(生也祗恁麽) 삶이 이러하고
사야지임마(死也祗恁麽) 죽음이 이러하나니
유게여무게(有偈與無偈) 게송이 있고 없고
시심마열열(是甚麽熱熱) 이 무슨 뜨거움인가
[75세로 입적(入寂)할 때 유훈(遺訓)의 말씀만 전한다. 삶도 이러하고, 죽는 것도, 이러한데
게송이 있든 없든 그 무슨 논쟁(뜨거움)인가?<生也只恁麽 死也只恁麽 有偈與無偈 是甚麽熱大>이다. 대혜선사 열반송(涅槃頌)인 셈이다]
[춘심(春心)] [대혜종고선사(大慧宗杲 1089-1163)]
삼월소광몰처수(三月韶光沒處收) 춘삼월 아름다운 봄 경치 거두어 둘 곳 없더어
일시산재유초두(一時散在柳梢頭) 버드나무 가지 위에 눈부시게 흩어져 있네,
가련불견춘풍면(可憐不見春風面) 가련하다, 애석하게도 봄바람의 얼굴 볼 수가 없고
각간잔홍축수류(却看殘紅逐水流)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붉은 꽃잎만 보는구나
[대혜종고(大慧宗杲) 종고는 선주(宣州) 영국현(寧國縣),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선성시(宣城市) 출신으로 성이 해씨(奚氏)이고 자(字)는 담회(曇晦), 호(號)는 묘희(妙喜) 또는 운문(雲門)입니다.
혜운원(慧雲院)의 혜재(慧齋)에게 출가한 후 담당문준(湛堂文準, 1061~1115) 문하에서 배우고, 나중에는 환오극근(圜悟克勤, 1063~1135)을 스승으로 모시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1137년에 항주(杭州)의 경산(徑山) 능인사(能仁寺)로 옮겨 가 선종(禪宗)을 크게 선양하였는데, 이때 전국에서 수천 명의 승려들이 몰려와 설법을 들었고, 제자만도 2천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4년 뒤 글을 쓸 때 역대 황제의 이름 글자를 사용하지 않도록 한 피휘(避諱)에 저촉되어 형주(衡州)로 유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14년 만에 사면을 받아 풀려난 후 여러 곳을 떠돌다가 묘희사로 돌아왔는데, 이 무렵에 당시 황제였던 효종(孝宗)에게 설법을 하고 ‘대혜선사(大慧禪師)’란 존호를 받았습니다.
때문에 종고를 부를 때 일반적으로 ‘대혜종고(大慧宗杲)’라고 합니다. 1163년 8월에 입적(入寂)하자 효종이 다시 ‘보각(寶覺)’이란 시호(諡號)를 내려 주었습니다.]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송나라 시대 스님으로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수행법인 간화선(看話禪)을 주창했다. 고관대작을 지내다 벼슬에서 물러난 선비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간화선의 가르침을 자상하게 베풀었다.
'화엄경(華嚴經)' 십신법문(十信法門)에는 수행의 순서를 신(信)·해(解)·행(行)·증(證)으로 설명하고 있다. 신(信)은 부처님의 법을 철저하게 믿는 것이며, 해(解)는 그 법의 의미를 잘 이해하는 것이다. 행(行)은 바르게 수행 정진하는 것이며, 증(證)은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다. 이들의 관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믿음이 공고할 때 지혜의 공덕이 있으며, 지혜의 공덕은 곧 정진과 깨달음의 원동력이 된다.]
[대혜 종고가 입적한 뒤 30권으로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이 편찬되었는데, 이 가운데 권25~권30만을 따로 뽑아 [대혜서장]으로 편찬하였다.
[대혜서장]의 편찬은 종고의 제자 혜연(慧然)과 거사 황문창(黃文昌)이 주관하였으며, 황제의 명으로 1166년 항주 경산 묘희사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대해서장(大慧書狀)』은 송나라 임제종 승려 대혜종고가 42명의 제자 및 신도들과 주고받은 편지글 62편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 [대혜서(大慧書)] [서장(書狀)]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임제 간화선을 정립한 종고의 사상을 담고 있어, 고려 후기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중시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승려들의 교육과정인 이력(履歷)의 교재로 채택되어 널리 읽혔다.
[중국 송나라시대 선승으로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에 속하며, 속성은 해씨(奚氏), 대혜(大慧)는 호, 종고(宗杲)는 법명으로, 지금의 중국 안휘성(安徽省-안후이성) 선성시(宣城市)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꿈에 신인(神人)이 한 스님을 모시고 오셨는데, 얼굴은 검고 코는 오뚝했다. 침실에 이르렀기에, 그 스님의 거처하는 곳을 물었더니 북악(北岳)이라고 대답했다. 잠을 깨고 보니 태기가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는 날에 찬란한 빛이 방을 비추니, 온 마을 사람들이 놀라면서 기이하게 여겼다.
어린 시절 대혜는 장난을 좋아하는 개구쟁이였던 것 같다. 그가 열두 살 때 하루는 서당에서 친구들과 장난을 치다가 먹물 통을 던졌는데, 그만 선생님의 모자에 맞고 말았다. 먹물을 뒤집어쓴 선생님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은 어린 학동은 300냥의 배상금까지 물어내야 했다.
그가 돌아와 말하기를, “세간의 서적을 읽는 것이, 어찌 출세간의 법을 궁구(窮究)하는 것과 같겠는가.”라고 하더니, 16세에 출가를 단행했다. 출가 후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수행하다가 마지막에 <벽암록(碧巖錄)>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원오 극근(圓悟克勤, 1063~1135) 선사 문하에 들어가 임제선(臨濟禪)을 수행해 깨달음을 얻어 마음의 눈을 떴다. 그의 나이 37세 때의 일이었다.
스승 원오 선사 열반 후, 1137년에 항주(杭州)의 경산(徑山) 능인사(能仁寺)로 옮겨가 선종을 크게 선양했는데, 이때 전국에서 수천 명의 승려들이 몰려와 설법을 들었고, 제자만도 2천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 무렵에 당시 송 황제였던 효종(孝宗)에게 설법을 하고 ‘대혜선사(大慧禪師)’란 존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선사를 부를 때 ‘대혜종고(大慧宗杲)’라고 한다.
일생을 오로지 설법과 수행에만 정진하다가 1163년 어느 날 저녁에 한 별똥이 아주 밝은 빛을 내면서 경산 서쪽으로 떨어지는 것을 대중들이 봤다. 스님께서 그 후 몸이 조금 불편함을 보이다가 대중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일 가겠다.”하더니, 그날 저녁에 유표(遺表)를 손수 쓰고 아울러 뒷일을 부탁했다. 이에 요현(了賢)이라는 제자가 게(偈)를 청하니, 선사는 다음과 같은 임종게(臨終偈)를 섰다.
생야지임마(生也只恁麽) 삶도 이대로 였고,
사야지임마(死也只恁麽) 죽음도 이대로인데,
유게여무게(有偈與無偈) 남길 말이 있느니 없느니 하니,
시심마열대(是甚麽熱大) 이 무슨 번거로움이냐.
대혜 선가가 활동하던 당시 고승들은 입적이 다가오면 임종게(열반송)을 남기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대혜 선사의 임종이 가까워오자 제자들은 한 말씀 남겨야 한다는 입장과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아무튼 그런 의논 끝에 요현이 게를 청한 것이다.
그런데 대혜 선사의 생각은 달랐다. 선(禪)의 생명력을 상실한 채 형식화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대혜 선사는 “게송이 없으면 죽지도 못하느냐?”고 일갈했을 정도로 그런 풍토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다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스승의 한 마디를 기다리니, 그래서 남긴 열반송이 “(남길 말이)있고 없음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며, 이 무슨 번거로운 일이냐”는 내용의 것이었다. 이미 삶과 죽음(生死), 오고 감(去來)을 초월했으니 더 이상 게송에 집착하지 말라는 사자후였다. 모든 집착을 떨쳐버린 선사다운 마지막 모습이라 하겠다.
이런 임종게를 남기고 태연하게 입적하시니, 세수는 칠십 다섯이요, 법랍은 오십 여덟이었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기를 그치지 않으시고, 시호를 보각(普覺)이라 내리고 탑호를 보광(普光)이라고 하사했다. 그래서 대혜 보각(大慧普覺)이라고도 한다. 스님의 어록이 대장경을 장식하고, 그의 법을 이은 사람들이 팔십삼 인이나 됐다.
대혜 선사는 선승이었지만 현실 참여적인 성향이 강해서 당대의 이름난 사대부들과 적극적으로 교리를 문답했고, 비판을 할 때는 매우 엄격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이때 주고받은 편지글을 모은 것이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인데, 이를 줄여서 <대혜서(大慧書)>라고도 하며, 더 줄여서 <서장(書狀)>이라 부르는 어록이다.
대혜 선사는 특히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 1130~1200)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를 준열하게 비판했던 주희이었지만, 과거시험을 볼 때 <서장(書狀)>을 시험장에 가지고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로 대혜 선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혜 선사가 활동하던 당시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북쪽에는 여진족의 금(金)나라가 세력을 확장해서 송나라를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북쪽은 금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고 남쪽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중국 역사에서 남송(南宋)이라 부르는 시기(1127~1187)로 한족은 굴욕으로 여겼다.
이러할 때, 송나라 조정은 금나라와 화친하자는 주화파와 국권을 회복하자는 주전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대혜는 주전파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주화파 진회(秦檜) 일당이 권력을 잡으면서 대혜는 반역을 도모했다는 모함을 받아 승적을 박탈당하고 16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호남의 형주(衡州)와 광동의 해주(海州)로 유배당했다. 그러다가 1156년 진회(秦檜)가 죽자, 고종의 사면으로 유배 생활에서 돌아와 승적을 회복했다.
그는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이 무렵, 그 유명한 간화선(看話禪)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조동종(曹洞宗)의 굉지 정각(宏智正覺, 1091~1157) 선사와 수행체계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굉지 선사가 열반에 들었을 때는 대혜 선사가 그의 장례식을 주관했다. 논쟁은 치열하되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대립과 갈등을 일삼는 오늘의 우리나라에 큰 교훈이 된다.
대혜 선사가 남긴 <서장(書狀)>은 편지글이기는 하지만, 선사상(禪思想)의 핵심을 뽑아내어 토론하거나 가르치는 내용이라서 후대에 승려와 학자, 일반 신도 사이에 널리 읽혔고,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많이 읽히고 있다.
주된 내용은 당시 선종 종파 중의 하나인 조동종(曹洞宗)의 묵조선(黙照禪)을 강렬하게 비판하고 임제종의 간화선(看話禪)을 주장한 것이다. 묵조선은 오직 고요하게 참선을 통해 마음의 본질을 깨우쳐 들어가는 것이다. 완전한 삼매 속에서 마음을 집중해서 고요한 마음의 근본을 바라보는 수행으로 무념(無念)을 주로 삼고 무상(無想)을 종으로 삼는 수행법이다. 묵조선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천태종(天台宗)의 지관수행(止觀修行)에서 찾을 수 있다. 지관수행을 통해 바로 법성을 깨우치도록 하는 것인데, 말이 쉬워서 곧바로 무념무상(無念無想)에 들어간다고 하나, 망상으로 가득한 일반인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수행법이기 때문에 명나라 이후에는 간화선 수행에 밀려 명맥이 끊기고 만다. 오늘날은 일본의 조동종에서 이런 수행을 일부 할 뿐 대부분 선불교에서는 묵조선을 행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대혜 선사는 묵조선을 ‘검은 산의 귀신 굴(黑山鬼窟)’로 빠지게 하는 수행이며 ‘고목의 불 꺼진 재(枯木死灰)’처럼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조용히 좌선만 해서는 무기(無記), 즉 수행할 때 생기는 멍한 상태에 빠져 결코 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 앞장서지 않고 고요히 침묵만 지키고 있던 조동종에 대한 비판의식 또한 담겨있었다.
대혜 선사의 저술로는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서장(書狀)> 등이 있다. 특히 <서장>은 대혜 선사가 그의 문하와 거사 및 유학자들의 질문에 답한 선(禪)의 요지를 설명한 편지글이다. <벽암록>과 더불어 간화선 교과서로 불리며, <대혜서(大慧書)>라고도 하는 대혜 선사의 어록인 셈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정해진 교육과정에 따라 교과서로 공부를 하듯 조선시대 승려들에게도 단계별 교육과정이 있었다. 이것을 ‘이력(履歷)’이라고 부르는데, 사미과(沙彌科)-사집과(四集科)-사교과(四敎科)-대교과(大敎科)의 4단계로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사집과는 중등교육과정에 해당하는 단계로서 당나라 승려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841)의 <도서(都序)>, 송나라 승려 고봉 원묘(高峰原妙, 1238~1295)의 법문을 모은 <선요(禪要)>,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이 종밀의 저서를 요약하고 해설을 붙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그리고 <서장(書狀)>이 핵심 교과서였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서장>은 승려라면 누구나 다 한번쯤 읽어보는 책이었다.
대혜 선사 이전에 중국의 전통적인 선은 조사선(祖師禪)이었다. 조사선에서는 언하대오(言下大悟)가 전통이었다. 즉, 선사의 설법을 듣고 즉시 깨달아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근기가 낮아져서 이런 방법으로 깨닫는 사람이 드물어졌다.
그래서 옛 스님들의 설법이나 행장을 하나의 규칙으로 정해서 공안 또는 화두라는 이름으로 정했다. 대혜 선사는 이 공안(화두)만을 전심전력해 의심하고 참구해 깨닫는 것을 추구하는 간화선을 주장한 것이다. 즉, 여러 조사(祖師)들이 선 수행을 돕기 위해 사용했던 간결한 문구인 공안(公案)을 화두로 삼아 탐구해 가는 간화선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의 길이라고 역설한 것이다. 대혜 선사의 영향으로 이후 중국 불교는 간화선이 주류 선풍으로 자리 잡게 됐고, 고려시대에 우리나라에도 전파돼 한국 선종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간화선(看話禪)에서 ‘간(看)’은 주시하다, 참구하다는 뜻이고, ‘화(話)’는 화두(話頭)를 가리킨다. 따라서 ‘간화’란 화두를 참구한다는 뜻이다. 간화선은 큰 의문을 일으키는 곳에 큰 깨달음이 있다고 해서, 화두를 수단으로 자기를 규명하려 하는 선법이다. 그리고 이 큰 의문을 일으키기 위해 화두를 드는 것이다.
‘화두(話頭)’는 글자 그대로 언어의 머리라는 뜻으로 어떤 말로 표현하기 이전의 도리라는 뜻이다. 화두는 깊은 도리를 담고 있는 말 밖의 소식을 전하는 수단이다. ‘이것이 무엇인가(이 뭣꼬)?’ ‘돌장승이 눈물을 흘리는 도리’, ‘무불성(無佛性)’ 등 수많은 화두 중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가장 알맞은 화두를 주어 의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꼭 앉아서 좌선만 해야 하는 다른 수행법보다 큰 장점이 있다.
간화선은 다른 말로 화두선(話頭禪), 혹은 대혜선(大慧禪)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무념무상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산란하고 망념이 가득 찬 마음을 화두에 집중시켜 일념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무심하게 하는 것은 힘들지만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은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수행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념(無念)에서 일념(一念)으로 수행 방법을 변화시킨 것이 바로 간화선이다.
그런데 그 방법은 분별 분석적인 것이 아니라 무분별 직관적인 방법으로 참구하는 것이다. 즉,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으로 일구의 공안에 몰두하는데, 예를 들면, ‘개에게는 불성이 없나(狗子無佛性구자무불성)’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정전백수자)’, ‘마 3근(麻三斤마삼근)’ 등을 화두로 해서 마음에 의심의 덩어리(疑團)을 일으켜서 참구해 의단을 깨뜨리는 것이다. 의단을 깨뜨리면 즉시 의식의 속박을 초월하고, 마음속의 지견(知見)이 쉬게 되며, 일상의 관습적인 성격ㆍ사유를 일으키는 것들을 쳐부수고, 세속의 명예와 이익 그리고 시비분별로 들끓는 번뇌를 벗어나서, 밝고 맑고 철저한 마음으로 어떠한 경계에 부딪쳐도 자유자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간화선이 나오게 된 것은 부처님께서 입멸한 후 천 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후로 세상은 훨씬 복잡해졌고 사람들도 경전이나 책을 통해 아는 게 많아져 번뇌도 그만큼 복잡하고 많아져 묵조선의 수행으로 번뇌를 없애고 삼매에 이르러 깨우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 세상이 돼서 마음을 하나로 붙들어 맬 장치가 필요해져서 화두선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간화선이 쉬우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마음을 화두에 모아 삼매에 이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며, 화두의 도리를 깨우쳐 지혜가 발현되도록 밝게 깨어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깨달음에 목이 마른 불자들은 어려운 간화선을 멀리하고 부처님이 가르쳤던 초기의 위빠사나 수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간화선은 선불교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수행체계다. 여러 공부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오로지 화두를 참구함으로써 깨침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가장 뛰어난 수행법이라고 말하곤 한다. 오늘날 간화선을 빼놓고 한국불교를 말할 수 없다. 이 수행법이 한국불교 조계종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남방에서 유행하는 수행법들이 소개되면서 비판을 받고 있지만, 간화선은 한국불교에서 800년을 이어온 전통적인 수행체계다. 우리나라에서 여름과 겨울, 두 번의 안거(安居) 기간에 실행되고 있는 것도 다름 아닌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이다. 이 특별한 수행법을 개발한 인물이 바로 대혜 종고(大慧宗杲)다. [출처] 대혜종고선사(大慧宗杲禪師)/書狀
24.동곡일타선사(東谷日陀禪師 1929-1999)
[열반송涅槃頌]
일천백일로진심(一天白日露眞心) 하늘 한가운데 우뚝한 해 참마음 드러내니
만리청풍탄고금(萬里淸風彈古琴) 만리에 맑은 바람이 옛 거문고를 타네
생사열반증시몽(生死涅槃曾是夢) 생사와 열반이 일찍이 꿈이거늘
산고해활불상침(山高海闊不相侵) 산 높고 바다 넓어 서로 거리낌이 없나니
[오도송悟道頌]
돈망일야과(頓忘一夜過) 문득 하룻밤을 잊고 지냈으니
시공하소유(時空何所有) 시간과 공간이 어디에 있는가?
개문화소래(開門花笑來) 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다가오고
광명만천지(光明滿天地) 광명이 천지에 가득 넘치는구나.
가사일편(袈裟一片) 가사 한쪼각으로
상사구족(喪事具足) 상례를 모두 갖추었도다
회비대야(灰飛大野) 재를 큰 들판에 날리어
골절하안(骨節何安) 몸이 어디에서도 편안하고
수륙공계(水陸空界) 물 땅 허공
우역가소(又亦可笑) 어디든지 괜 찮도다[동곡일타선사(東谷日陀禪師 1929-1999)]
불탄산고수활로(不憚山高水闊路) 높은 산과 넓은 물길 피하지 아니하고
득득도래하소이(得得來到何所以) 헐레벌떡 이곳까지 온 뜻이 무엇인가
결욕구명일단사(決欲究明一段事) 결정코 일대사인연을 밝히고자 하여
연지연향입계원(燃指燃香立戒願) 손가락을 태우며 계와 원을 세웠도다.
오종금일한십년(吾從今日限十年) 나는 금일로부터 십년을 기약하여
갱불하산요전정(更不下山要專精) 하산하지 않고 오로지 정진하리니
약미발명본가업(若未發明本家業) 이 본분의 업을 발명하지 못한다면
비잡천상하소용(飛잡天上何所用) 천상을 돌아다닌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1955년27세 때]
[동곡일타선사(東谷日陀禪師 1929-1999) 오도송悟道頌]
[친인척 41명이 출가한 것으로 유명한 동곡일타(東谷日陀)스님은 1929년 충남 공주에서 연안 김씨 김봉수(金鳳秀)공을 아버지로, 광산 김씨 김상남(金上男)씨를 어머니로 하여 4남매 중 삼남(三男)으로 태어났습니다.
1942년, 14세에 양산 통도사로 출가하여 고경(古鏡)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셨고, 1946년, 송광사
삼일암의 수선안거(修禪安居)를 시작으로 참선정진하는 한편, 1949년 통도사 강원의 대교과를 졸업하였고,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으며, 22세 때인 1950년부터 진양 응석사와 범어사, 성주사 선원 등에서 금오ㆍ동산ㆍ성철스님을 모시고 정진하였습니다.
1953년 천화율원(天華律院)에서 자운(慈雲)스님에게 율학을 수업하여 정통율맥을 이었습니다.
1954년 오대산 서대에서 생식과 장좌불와로 그해 하안거를 마친 스님은 하안거 해제 후 7일 동안 매일 3천배 용맹정진을 하고는 "굳은 심지가 없이는 생사를 해결할 수 없다."고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할 것을 발원하며 오른쪽 네 손가락 열두 마디를 부처님 전에 촛불로 태워 올리는 연비공양을 감행하였고, 홀로 태백산 도솔암으로 들어가 6년동안 동구불출(洞口不出) 오후불식(午後不食)
장좌불와(長坐不臥) 등 용맹정 진하였습니다
1962년부터는 조계종 종회의원ㆍ역경위원ㆍ교육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통합종단에 정법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1971년부터 가야산 해인총림 선원장ㆍ율원장ㆍ율주ㆍ금강계단 교수아사리가 되어 후학들을 양성하는 한편, 인도ㆍ태국ㆍ미국 등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한국불교를
전파하였습니다.
1999년 11월 22일 하와이로 건너간 스님은 11월 29일(음,10월22일) 하와이 와불산 금강굴에서 상좌 혜인 등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열반에 들었다. 세수 71세 법랍 58세. 다비식은 1999년 12월 5일 오전 11시 은해사에서 원로회의장으로 치러졌다.
25.동산양개선사(洞山良价禪師 807-869)
[오도송(悟道頌)]
절기종타멱(切忌從他覓) 결코 남에게서 찾으려 하지말라
초초여아속(招超輿我疎) 점점 자신과 멀어질 뿐이다
아금독자왕(我今獨自往) 나는 지금 홀로가지만,
처처득봉거(處處得逢渠) 가는 곳마다 그것을 만나다
거금정시아(渠今正是我) 그것은 바로 ''나''이지만,
아금불시거(我今不是渠) 지금 나는 그것이 아니다
응수임마회(應須稔磨會)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방편계여여(方得契如如) 진리에 계합하리라
[동산 양개(洞山良介, 807-869) 선사는 중국 당나라 시대 조동종(曹洞宗)의 창시자이다.
물에 비치는 자기 그림자를 보고 대오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위 동산 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은
선문 오도송(禪門悟道頌)의 효시로 불린다. 어릴 때 출가해 21살 때 숭산(嵩山)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선가오종(禪家五宗)의 최초로 조동종을 만들었고, 저서에 <보경삼매(寶鏡三昧)>와 <오위현결(五位顯訣)>, <현중명(玄中銘)>, <대승경요(大乘經要)>, <조동록(曹洞錄)> 등이 있다.
<조동록>은 동산 양개(洞山良价) 선사의 어록이다. 동산선사는 세수 63세, 법랍 42세인 869년
조용히 열반했다. 이 글은 동산양개선사가 호남성 담주(潭州)에서 개울을 건너가다가 물에 어려
비치는 자기의 모습을 보고서 운암 스님이 말씀하신 뜻을 깨치고 게송을 지으니 선종 오도송의
효시가 되었다한다.]
[열반송(涅槃頌)]
출가지인(出家之人) 출가한 사람은
필불의물(必不依物) 절대로 대상에 의지하지 말라
시진수행(是眞修行) 이것이 참다운 수행이라
로생식사(勞生息死) 수고로운 삶을 쉬는 것이 죽음이니
어비하유(於悲何有) 어찌 슬픔이 있겠는가?
[그는 회계會稽 사람으로서 성은 유兪씨이다. 어릴 적에 스승을 따라 절에 가서 반야심경을 외우다가 근根과 진塵이 없는 이치를 물으니, 그 스승이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나는 그대의 스승이 아니다.” 그리하여 바로 오설산五洩山에 가서 묵黙 선사에게 귀의하고 머리를 깎았다.]
야대기야대기(也大奇也大奇) 신기하고도 신기하여라.
무정해설부사의(無情解說不思議) 무정설법의 부사의함이여,
약장이청성불현(若將耳聽聲不現) 만약 귀로써 들으려면 끝내 알기 어려우니
안처문성방가지(眼處聞聲方可知) 눈으로 소리를 들어야 바야흐로 알게 된다네.
[운암선사에게 바친게송]
26.동산혜일선사(東山慧日禪師1890-1965)
[열반송涅槃頌]
원래미증전(元來未曾轉) 원래 일찍이 바꾼 적이 없거늘
기유제이신(豈有第二身) 어찌 두 번째 몸이 있으랴
삼만육천조(三萬六千朝) 삼만 육천 일
반복지저한(反覆只這漢) 날마다 되풀이하는 다만 이놈뿐이니
[오도송悟道頌]
화래화거기다년(畵來畵去幾多年) 그림을 그리고 그린 것이 몇 해던가
필두락처활묘아(筆頭落處活猫兒) 붓끝이 닿은 곳에 살아 있는 고양이로다
진일창전만면수(盡日窓前滿面睡) 온종일 창 앞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
야래의구착로서(夜來依舊捉老鼠) 밤이 되면 예전처럼 늙은 쥐를 잡는다.
[1927년 4월에는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에 들어갔다. 그해 7월 5일 동산은 방선(放禪)시간에 대나무 숲을 거닐다 삼매에 들어 바람에 부딪치는 댓잎소리를 듣고 홀연히 대오하였다.
이에 그는 위의 오도송(悟道頌)을 지어 용성선사에게 보이고 법을 인가받았다.]
[노사자찬 (老師自贊)]
원래미증전기유등이신(元來未曾轉豈有等二身)
원래 일찍이 전한 바 없으니, 다시 어찌 第二身(제이신)이 있으랴.
삼만육천조반복지저한(三萬六千朝反覆只這漢)”
100년이라 3만6천날이, 다못 이놈의 반복이라.
[동산혜일선사(東山慧日禪師1890-1965)][입적에 들기전 마지막으로 남긴 휘호]
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 부처님이 일체법을 설하신 것은
위도일체심(爲度一切心) 일체심을 건지려고 한 것이니
약무일체심(若無一切心) 만약에 일체심이 없다면
하용일체법(何用一切法) 일체법을 갖고 무엇에 쓰겠는가
[동산(東山)의 본관은 단양 하씨이고 이름은 동규(東奎)다. 그의 법호는 동산이며, 법명은 혜일
(慧日)이다. 1890년 2월 25일 충북 단양군에서 아버지 성창(聖昌)과 어머니 정경운(鄭敬雲) 사이에서 태어났다. 14세까지 한학을 익혔으며, 1904년 3월 익명(益明)보통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다. 서울 중동중학교를 거쳐 1910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예과에 진학 신의학(新醫學)을 배웠다.
그는 1912년 3월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고모부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의 소개로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선사를 찾아갔다가 그의 법문을 듣고 큰 감화를 받았다. 이후 불교를 공부하다 마침내 1912년 10월 범어사 주지 성월(惺月)스님을 찾아가 출가하였다.
이듬해 3월 동산은 용성선사를 은사로, 성월스님을 전계대화상으로 하여 계를 받은후 4월부터 강원에서 <능가경>을 공부했으며, 10월에는 백양사 운문암에서 용성스님께 <전등록> <선문염송> <범망경> <사분률> 등을 배웠다. 그뒤 동산은 1914년 여름 한암선사를 찾아가 사교(四敎)를 2년동안 배웠고, 영명(永明) 강백(講伯)에게서 다시 2년간 대교과(大敎科)를 이수했다.
1963년 태국 불교계 승정과 총무원장 스님들이 불국사에 참배할 때 동산이 다보탑 앞의 석사자(石獅子)를 가리키며 "석사자의 울음소리를 듣습니까? 귀국 불교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저 사자 울음소리를 선사해 드립니다"라고 말하여 대승선(大乘禪)의 진면목을 알렸다.
1965년 음력 3월 동산은 "부귀영화는 뜬 구름이요, 벼슬도 재물도 풀잎 위의 이슬이라, 항상 깨끗하고, 당당하게, 자비롭게, 착하게 살라"고 가르쳤다. 1965년 음력 3월 23일 동산은 편안히 자리에 누운채 잔잔한 미소를 짓는 모습으로 입적하니, 세수 76세, 법랍 53세였다. 3만여 인파가 모여 영결식을 마치고 다비를 하자, 사리 3과가 나와 부도에 안치했다.
그가 남긴 글들은 제자들이 편찬한 <동산대종사석영첩(東山大宗師錫影帖)>에 담겨 있다.
그리고 제자는 성철, 자운, 지효, 광덕, 월산, 능가, 월운, 무진장 등 무려 130여명의 상좌와 제자가 있어, 이른바 '범어문중'을 이룬다.]
27.동진대사경보(洞眞大師慶甫868-948)
[오도송悟道頌] [(백운자각白雲自覺 흰 구름에 깨달은 마음)]
자유청산로(自有靑山路) 나그네 가슴에 푸른 산의 길이 있거늘
백운나득유(白雲那得留) 흰 구름을 어찌 잡아 머물게 하리오.
[스님의 법명은 경보(慶甫)이고 자는 광종, 속성은 김씨이며 경문왕 9년(868) 전남 영암군 구림에서 태어났나. 아버지의 이름은 익량(益良), 벼슬은 알찬 이고 어머니는 박씨이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뜻을 어버이 섬기는 데 두었으나 마음은 불도를 이루는데 있었다. 이를 잘 아는 그의 부모는 어느 날 그에게 "사람이 꼭 하고 싶어하면 하늘도 따르는 법" 이라며 스님 되기를 허락했다. 그는 부인산사로 가서 머리를 깎고 교학의 숲에 안주했다. 그후 백제산 도승(도선?)화상을 찾아가 보살도를 닦고 18세때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구족계를 품수 했다. 당나라 소종 임금 경복 1년(892)중국으로 건너가 무주의 소산으로 가 광인(匡仁)화상의 가르침을 받았다. 당나라 천우 18년(921) 고국으로 돌아와 백제산 옥룡사에 주석, 부처님의 가르침을 폈다. 스님은 세수 80년, 법랍 62년문명(文明:定宗)3년에 가부좌를 한 채 열반에 들었다.]
[동진대사 그가 태어나서 자라던 시기는 신라의 국운이 다해갈 무렵으로 후삼국이 삼국의 통일을 위해 치열한 쟁패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스님의 속성은 김씨로 아버지 낭익과 어머니 박씨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허락으로 어려서부터 출가하여 곧바로 천인산사에 나아가 머리를 깍았으며 학문을 닦다가 백계산으로 가서 도승화상(도선으로 추정)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나이 25세 때인 진성여왕 6년(892년)에 당나라에 건너가서 무주소산의 광인선사에게 입실하여 심인을 전하여 받았다. 경명왕 5년(921년)30여 년 간의 수학을 마치고 고국땅에 돌아오니 당시 신라는 망해갈 무렵으로 호남지방은 이미 견훤의 세력권에 들어 있었고, 강원도 철원에서는 왕건이 태봉의 왕 궁예를 멸하고 고려를 건국한 시기였다.
후백제가 망한 936년(태조 19년)대사의 나이 69세때 태조 왕건의 부름을 받고, 왕사로서 고려왕실에 더움을 주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태조의 뒤를 이은 2대 혜종과 3대 정종에게도 스승의 예우를 받으며 그의 만년생활을 하였다.
정종 3년(948)4월 20일 세수80세로 옥룡사 상원에서 입적하니 법랍은 62세였다. 나라에서는 동진대사라 사호를 내리고 탑을 세워 그의 행적을 기리게 하니 탑호를 보운이라 했다.
영암 구림에서 태어나 도선의 사법제자로 자처하며 새로운 선법과 종풍을 펼쳤던 동진대사는 도선국사와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에 빼놓을 수 없는 대덕으로 일컫어지고 있다]
[경보(慶甫, 869~948년)는 동리산문 선사로 부인산사(夫仁山寺)에서 출가했다. 어느 날 꿈에
부처가 나타나 이곳을 떠나라고 하자, 그 즉시 행장을 꾸려 수행길을 떠나 도선의 제자가 됐다.
885년 월유산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성주산문 무염과 사굴산문의 범일을 찾아가 법을 구했다. 선사는 26세 때인 진성왕 6년(892년)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조동종 동산양개의 제자 소산광인(疎山匡仁, 837~909년, 석두-약산-운암-동산-광인)을 만났다.
광인은 경보에게 ‘그대는 바다의 용과 같구나’라며 입실을 허락했다. 이후 경보가 심인을 증득하자, 소산광인이 기뻐하면서 ‘해동인으로서 법거량을 할 자가 그대뿐이구나’라고 하며 인가]
[경보 동진대사(慶甫 洞眞大師)]
경보는 후백제 견훤과 고려 초 국왕들이 스승으로 공경한 승려이다. 그는 백계산 승려 도선의 제자였고 중국에 가서 구법을 행한 뒤 귀국하여서는 후백제 견훤의 공경을 받았다. 후에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고 태조를 비롯하여 3대 정종에 이르기까지 고려 국왕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입적하여서는 통진대사로 추증되었다. 전라남도 영암 출생. 성은 김씨. 자는 광종(光宗). 경보는 법명이다. 아버지는 알찬(閼粲) 익량(益良)이며, 어머니는 박씨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어려서 대구 팔공산 부인사(符仁寺)로 출가했다가 전라도 광양의 백계산(白鷄山)으로 옮긴 뒤 도승(道乘)의 제자가 되어 선(禪)과 율(律)을 익혔다. 이때 도승은 도선으로 추정된다.
19세에 월유산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계율을 수행하는 데 몰두하다가, 백계산을 떠나 성주산(聖住山)의 무염(無染)과 굴산사(堀山寺)의 범일(梵日) 문하에서 선을 닦았다. 이후 중국 유학의 뜻을 품어 배편을 얻어 타고 바다를 건너 선지식을 찾아다녔다.
892년(진성여왕 6) 당나라의 이름 있는 여러 사찰을 찾아 수행하다가, 무주(撫州: 강서성)의 소산(疎山)에서 조동종(曹洞宗)의 광인(匡仁)을 만났다. 그곳에서 심인(心印)을 받은 뒤 성지 참배에 더욱 정진하였고 또한 강서지방의 노선(老善)을 찾아가 그의 법문을 들었다.
그 후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고 921년에 전라도 임피군(臨陂도 군산시 임피면)으로 귀국하였다. 그곳은 당시 후백제 견훤이 자리잡고 있던 지역이었다. 이에 견훤은 경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그를 친견한 뒤에는 이내 존경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에 견훤은 경보를 전주에 있는 남복선원(南福禪院)에 머물도록 하여 스승으로 삼았다. 당시 중국 유학을 마친 선승들은 후백제 지역으로 귀국하는 사례들이 종종 확인되는데, 경보의 경우는 견훤이 스승으로 공경한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드문 사례이다. 그는 뒷날 다시 백계산의 옥룡사(玉龍寺)로 옮겼다. 936년에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함에 이르렀고, 경보를 왕경으로 초빙하였고 역시 스승으로 높였다.
태조의 뒤를 이어 2대 국왕인 혜종과 3대 정종 역시 경보에 대한 존경을 표하였다. 정종도 경보를 왕경으로 초빙한 사실이 전해진 후 옥룡사 상원(上院)에 머물렀고, 제자들에게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탑과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입적하였다. 나이 80세, 법랍 62세였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천통(泉通)과 현가(玄可)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정종은 경보를 옥룡선화상(玉龍禪和尙)이라 부르고, 동진대사(洞眞大師)라는 시호와 보운(寶雲)이라는 탑명을 내렸다. 경보를 추모하는 비를 건립하기 위해 958년에는 왕명이 내려져 당시 한림학사 김정언(金廷彦)이 비문을 지었다. 경보의 제자인 현가가 글씨를 쓰고, 계묵(繼默)이 이를 새겨서 옥룡사에 비가 건립되었다. 해당 비는 현재 옥룡사 터에 남아 있다.
출처:[한국민속문화대백과]
28.만공월면선사(滿空月面禪師 1871-1946)
[오도송(悟道頌)]
공산리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 공산 이치가 다 고금 밖에 있고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 흰 구름 맑은 바람 예부터 왔도다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摩越西天) 달마대사는 무슨 일로 서천을 넘었는가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 닭은 축시에 울고 해는 인시에 뜨는구나
빈산이기는 고금 밖이요 흰 구름 맑은 바람 스스로 오가는데
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넘었는고 새벽에 닭 우니 밝은 해 솟는다
[만공월면선사의 시, 팔공산성전(八公山聖殿)]
후야우중사(後夜雨中事) 깊은 밤 빗속의 일.
천성미철재(千聖未徹在) 모든 성인들조차 깨닫지 못했네.
불식야불식(不識也不識) 모르겠노라 모르겠노라.
종성도득거(鐘聲道得去) 종소리가 울려 퍼지네.
[거문고 법문(彈琴法曲 탄금법곡)] (滿空月面禪師 1871-1946)
일탄운시 하곡(一彈云是何曲) 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가
시체중 현곡(是體中玄曲) 이것은 체(體) 가운데 현현(玄玄)한 곡이로다
일탄운시 하곡(一彈云是何曲) 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가
시구중 현곡(是句中玄曲) 이것은 일구(一句)가운데 현현한 곡 로다
일탄운시 하곡(一彈云是何曲) 또 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가
시현중 현곡(是玄中玄曲) 이것은 현현 한 가운데 현현 한 곡이로다.
일탄운시 하곡(一彈云是何曲) 다시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가
시석여심 겁외곡(是石女心中劫外曲) 이것은 돌장승 마음 가운데 겁 밖의 곡이로다
졸咄.! 아하.! (만공월면滿空月面)
►[만공 스님은 입적을 하기 전 열반송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거울 앞에서 자신과 나눈 마지막 독백이 지금껏 열반송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 년 동안 동고동락 해왔지만 오늘이 마지막 일세 그동안 수고했네. 그대와 나의 이승 인연이 다 되었네. 그럼 잘 있게”
►滿空禪師 傳法偈
운산무동별(雲山無同別) 구름과 산은 같지도 다르지도 않고
역무대가풍(亦無大家風) 또한 대가의 가풍도 없구나
여시무문인(如是無文印) 이와 같은 글자 없는 인印을
분부혜암여(分付惠菴汝) 혜암 너에게 주노라.
►경허(75대) - 만공(76대) - 전강(77대)으로 법맥이 이어졌다.
춘성은 한 때 그의 문하에서 수행하기도 했다.
[만공 월면은 1871년(고종8년) 전라도 태인군 군내면 상일리(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신통(宋神通)이며 어머니는 김씨였다. 본관은 여산으로 본명은
송도암(宋道巖)이다. 법명은 월면(月面)이고 만공은 법호이다. 따라서 월면 스님으로도 불렀다.
1884년(고종20년) 경허(鏡虛,성우1849-1912)의 인도로 서산군 천장사(天藏寺)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출가하였고, 경허(鏡虛)를 계사하여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였다.
만공스님의 문하에서는 보월(寶月), 전강(田岡),용음(龍吟), 고봉(古峰), 포산당 혜천(惠天) 금봉, 금오(金烏), 춘성(春城), 서경(西耕), 혜암(惠庵), 원담 등이 있다. 비구니 법희(法喜), 만성(萬性), 일엽 등의 제자가 배출되었다.
처음으로 전법게를 전한 제자는 수제자인 보월이다. 그러나 보월은 40세로 요절했다.
1924년 12월 보월선사가 죽자 보월선사의 스승인 만공선사(滿空禪師)가 1925년 2월 덕숭산 정혜사(定慧寺)에서 건당식(建幢式:스스로 일가를 이루는 법회)을 베풀어주고 금오선사에게 전법게(傳法偈)를 주었다.]
덕숭산맥 아래 德崇山脈下(덕숭산맥하)
무늬 없는 인(印)을 지금 전하노라. 今付無文印(금부무문인)
보월은 계수나무에서 내리고 寶月下桂樹(보월하계수)
금오는 하늘 끝까지 날아가네. 金烏徹天飛(금오철천비)
한국의 불교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만공(滿空, 1871~1946) 스님은 조선과 일제 강점기 승려이자 독립운동가다. 한국 현대불교의 대선사로, 석가모니 이래 제76대 조사다. 속세의 성은 송(宋)씨로, 송만공으로도 불렀다. 조선총독부 불교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조선 불교를 지키려 하였다.
또한 선불교(禪佛敎)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불교계에 큰 법맥을 형성하였다. 본명은 도암(道巖), 법명은 월면(月面), 만공은 법호다. 공은 이론과 사변(思辨)을 배제하고, 무심의 태도로 화두를 구할 것을 강조하고 간화선(看話禪)의 수행과 보급에 노력하였다.
제자들에게 무자화두(無字話頭)에 전념할 것을 가르쳤다. 1940년대에는 덕숭산에 머무르며 선불교 진흥을 위해 힘쓰다가 1946년 예산 전월사에서 입적했다. 경허(75대)-만공(76대)-전강(77대)으로 법맥이 이어졌다.
만공 스님께서 1946년 10월 20일 거울을 보며 “만공! 70년 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느라 수고 많았네!”라고 중얼거린 뒤 잠들 듯이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세수 75세, 법랍 62세, 사후 제자들에 의해 <만공어록>(滿空語錄)이라는 책이 편찬되었다.]
[스님의 속명은 송도암(宋道巖)이다. 만공(滿空)은 법호이며 실제 법명은 월면(月面)이다.
그래서 두 사형 수월(水月), 혜월(慧月)과 함께 "경허의 세 달"이라고 불린다.
전라도 태인군(현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에서 태어났으며 서산의 천장사에서 출가하였다.
선종(불교)의 큰스님인 경허(鏡虛) 스님의 수제자로서 법맥을 이어받았고, 이후 전강으로 법맥이 이어진다.
생전에는 상당히 파격적인 기행과 발언으로 유명하였다. 스승인 경허 스님도 이 기행으로 유명했는데 청출어람(?)이라고 만공 스님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아래 내용 중에는 이런 일화의 특성상 사실을 각색한 내용도 있을 수 있으므로 참고하자.
1937년 마곡사의 주지로 지낼 때, 조선총독부에서 31본산 주지회의가 열려서 여기에 참석하였다. 이 당시 총독인 미나미 지로가 "데라우치 마사타케 전 수상[1]이 조선불교를 진흥한 공이 크다"고 칭찬하며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의 통합을 주장하자, 그 자리에서 “청정(淸淨)이 본연(本然)이거늘 어찌하여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나왔는가?”라고 호통을 쳤다.[2] 본디 깨끗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엉뚱하게 산과 강과 대지를 논하냐, 즉 가만히 둬도 되는 한국불교를 왜 간섭하려 드느냐는 비판이었다.
곧이어서 '데라우치 총독은 우리 불교를 망친 인물로 큰 죄악을 저질렀으니 무간 아비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라고 직접적으로 비난하였다. 당시 총독부 경무총감도 이 자리에 배석해서
이 말을 직접 들었는데 이 경무총감이란 바로 마사타케의 아들 데라우치 히사이치였다. 당연히
히사이치는 대노해서 미나미 총독에게 만공을 잡아들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만공의 명망이 너무 높은 관계로 미나미 총독은 처벌 대신 만공에게 일본 여행을 제안하는 등의 회유책을 폈지만
만공은 이 또한 거부했다.
이 이야기는 드라마 야인시대(30화)에서 살짝 각색되어서 등장한다. 만공이 딴청을 피우는 척하며 금강경을 외우고, '나는 지옥에 떨어졌을 데라우치 총독을 위해 금강경을 외우고 있었다'라고 하며 비판한다.
말년에는 예산군에 있는 덕숭산의 전월사에서 기거하였다. 마지막 공양 이후 거울을 보며 "이 사람, 만공! 70년 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느라 고생했지. 그동안 수고 많았네"라는 유언을 남긴 뒤 입적하였다. 덕숭산에서 다비하여서 유골을 봉안한 부도탑(만공탑)을 덕숭산 금선대 인근에 세웠다. 다만 "부처님 사리로 모든 것은 넉넉하고 거기에 다 뜻이 포함 되어 있으니,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사리를 수습하지 않았으며, 이후 덕숭산의 다비식에서는 어떤 스님이든지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것이 문도들이 지켜야 할 전통이자 불문율로 자리집았다.
제자로는 춘성, 일엽(여류시인인 김일엽의 법명), 고봉, 혜암, 혜천, 원담 등이 있다.
만해 한용운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만해는 내 애인이야."라고 말했는가 하면, "지금 온 조선 땅에 사람이 하나 하고도 반 있는데 그 하나가 바로 만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임에도 서훈은 받지 못했는데 보훈처에서 체포, 복역 기록이 없다고 보류 처분했다.
[출처:나무위키]
29.만송행수선사(萬松行秀禪師 1166-1246)
[임종게(臨終偈)]
팔십일년(八十一年) 팔 십일 년 동안
지차일어(只此一語) 이 한 마디뿐
진중제인(珍重諸人) 여러분들 몸조심하고
절막착거(切莫錯擧) 부디 잘못 알지 말라 [출전; 古文集]
[위(上記)의 임종게를 남긴 사람(作者)은 만송 행수(萬松行秀) 선사이다.
만송행수(萬松行秀,1166-1246) 선사는 속성(俗性)은 채(蔡) 씨(氏)이며 현재의 중국 하남성 회경(懷慶) 사람이다. 남송 때 청원문하(門下)의 22대 제자로서 조동종(曹洞宗)의 승려이다.
중국 남송(南宋) 때 조동종의 승려로 만송노인(萬松老人)이라고도 한다. 형주(邢州, 현재의 하북성) 정토사(淨土寺)의 빈윤(贇允)에게서 낙발(落髮)하고 후에 경수사 승묵광(勝黙光)에게 참문하였다. 자주(磁州, 현재의 하남성) 대명사에서 설암혜만(雪巖慧滿, ?~1206)에게 2년간 수학하고 정토사로 다시 돌아와 암자를 짓고 만송헌(萬松軒)이라 했다.
금의 명창 4년(1193), 27세 때 장종(章宗, 1189~1209 재위)황제의 칙(勅)에 의해 설법하고 금란가사를 받았다. 그 후 각지의 명찰에 두루 주석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대도(大都, 현재의 북경)의 앙산 서은사와 보은 홍제사에도 머물렀다. 그 사이에 몽골의 침입으로 금이 멸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섰다. 만송은 북경 보은사 안에 종용암을 짓고 머무르면서 칭기즈칸의 재상이었던 야율초재의 부탁에 응하여 58세에 《종용록》을 완성하였다.
유교, 도교에 정통하고 대장경을 세 번이나 열람하였으며, 만년에는 종용암에 머물다가 81세(1246)에 입적했다.]
만송행수(萬松行秀·1166-1246)선사의 속성은 채(蔡)씨이며, 현재 하남성 회경(懷慶)사람이다.
남송때의 청원 문하의 22대로서 조동종의 승려이다. 자는 보은(報恩)이며, 호는 만송노인(萬松老人)이다.
15세 때에 형주(邢州)정토사 찬윤선사(贊允禪師)에게 삭발 후에 출가하고 오래지 않아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는 원정 종원 원년(元定宗元年ㆍ일설에는 단평ㆍ1236) 연경(燕京ㆍ지금의 북경)에서 입적하였으며
세수는 81세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입적을 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서 사리탑을 세웠다.
전국에 두 곳의 탑을 세웠는데, 하나는 북경(西城區西四南丁字街西)에 있는데 세칭 만송노인탑(萬松老人塔)이라고 칭하며, 다른 하나는 형대(邢台市西南古塔群中)에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문화혁명 중에 훼손되어서 지금은 없다.
그는 조동종 제14대 종주로서, 당시 강남의 천동여정(天童如淨ㆍ1163~1228)과 함께 조동종의 양대 종장(宗匠)으로 이름을 날렸다.
금나라 장종 명창 4년(章宗明昌ㆍ1193)년에 황제로부터 비단대가사를 하사 받기도 했다. 그는 남하해서
자주 대명사(磁州大明寺) 설암혜만(雪岩慧滿ㆍ?~1206)선사를 참방하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서
철오(徹悟)하였다고 한다.
법을 얻은 후에 그의 명성이 각지에 알려지게 되었고, 각지에서 그에게 설법을 청함과 동시에
그곳에 주석해주기를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청을 모두 거절하고 형주(邢州)로 돌아가서
정토사(淨土寺)에 만송헌(萬松軒)을 건립해서 그곳에서 대중을 제접하면서 자신의 수행을 이어갔다.
이로 인해서 그는 만송(萬松)이라는 호를 얻게 되었다.
그가 수년 동안 정토사에 주석할 때는 그를 참방하러 오는 이가 끊이지 않았고, 한편 조야의 모든 이들이 그를 경모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북방의 승속들로부터 추종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금나라와 몽고 양국의 조야로부터 보편적인 추종과 존경을 받았다.
금나라(明昌四年ㆍ1193) 장종(金章宗ㆍ1168~1208)이 매우 그를 공경하기를 그가 궁전에 설법을 할 때 “장종황제는 몸을 굽혀서 예를 올렸다(于內殿說法,章宗躬身迎).”고 전해진다.
몽고가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에도 만송선사는 지속적으로 몽고의 조정으로부터 예우를 받았으며,
후에 몽고 조정의 국사가 되기도 했는데, 당시 원대에 전체 중국불교계에 국사라고 칭하는 사람은
오직 9사람뿐이다. 이 가운데 만송행수선사가 한 사람이다. 때문에 그는 당시의 북방불교의 영수가 되었다.
만송선사가 종용암(從容庵)에 거할 때 야율초재(耶律楚材)의 초청에 응해서 굉지정각(宏智正覺)의 평창(評唱)의 〈송고백칙(頌古百則)〉을 저본 삼아 〈종용록(從容錄)〉6권을 지어서, 조동종의 선풍을 전했다. 그 외도〈請益錄〉, 〈祖燈錄〉, 〈釋氏新聞〉,〈鳴道集〉, 〈四會語錄〉 등의 저작이 있다.
특히 많은 저술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종용암록(從容庵錄)〉과〈청익론(請益論)〉이다.
〈從容庵錄〉은 만송행수가 천동정각의 〈송고백칙(頌古百則)〉을 평창(評唱)한 선학의 명작이다.
〈從容庵錄〉은 매칙(每則)의 공안이 모두 5항으로 구성되었다.
즉 제1부분은 시중(示衆)으로,공안을 위해서 서론을 지었다(示衆).
제2부분은 정각의 〈頌古百則〉에서 발췌한 공안이다(列擧公案).
제3부분은 공안에 대한 평창(評唱)이다(列擧頌古).
제4부분은 정각의 〈頌古百則〉에서 발췌한 송고(頌古)이다(공안, 頌古中夾注).
제5부분은 송고에 대한 평창이다.
때문에〈從容庵錄〉의 요지는〈頌古百則〉의 깊고 오묘한 것을 찬석하였다.
그러나 이 〈從容庵錄〉은 완전히〈벽암록〉의 형식을 모방한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한편 그는 비록 선학 위주의 수행을 하였지만, 화엄에 정통했고, 정토를 추종했기 때문에
금대(金代) 정토종의 5대 영수(領袖)가운데 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특히〈창평천동정각화상송고종용암록(評唱天童正覺和頌古從容庵錄)〉은 당시 선종의 명작이 되기도 했다.
그의 재가 제자인 야율초재(耶律楚材)는 서(序)에서
“조동의 혈맥을 이었으며, 운문의 善巧를 갖추었으며, 임제의 機鋒을 구비했다(得曹洞血脈, 具雲門善巧, 備臨濟機鋒득조동혈맥,구운문선교,비임재기봉).”고 평가했다.
이 외에도 그는 선종의 제종파의 사상은 물론이거니와 유가의 사상도 계승발전시켰기 때문에
세인들이 그를 “유석을 겸비하였고, 종설(宗說)에 정통하였고, 변재가 무애하다(儒釋兼備, 宗說精通,辯才無유맥겸비,종설정통,변재무).”고 평했다.
송대 원초(元初)에 선종의 오엽(五葉) 가운데서 臨濟, 曹洞宗이 크게 흥성하였다.
때문에 당시에 세인들은 “임천하, 조일각(臨天下, 曹一角)이다”고 하였는데, 그 의미는 이러하다.
즉 “임제종풍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광대하게 뒤덮고 있다.
조동종의 위엄은 동남에 떨쳐서 영향이 매우 깊다”고 하였는데, 이때의 조동종이 성행한 이유는
바로 만송행수선사가 온힘을 다해서 조동종의 선풍을 드날린 덕택이다.
송원이후로 선정쌍수(禪淨雙修)가 매우 성행하기 시작하면서 그도 역시 선정쌍수를 중시하기도 했다.
30.만암종헌선사(曼庵宗憲禪師 1876-1957)
[오도송(悟道頌)]
보도번유인(寶刀飜遊刃) 보배 칼을 마음대로 쓰고
명경무전후(明鏡無前後) 밝은 거울은 앞뒤가 없도다
양반일양풍(兩般一樣風) 두 가지 몰아 한 바람이
취도무근수(吹到無根樹) 뿌리 없는 나무에 불어 닿는다
[만암스님의 ‘국군입산명화사암음(國軍入山命火寺庵吟)이란 제목의 시]
국가동란심어산(國家動亂甚於山) 국가의 동란이 산사에도 극심하니
도의수분시가정(道義誰分時可定) 어느 때 그 누가 바로 잡으리오
천고문명일화간(千古文明一火間) 천년의 문명이 한 가닥 불에 달렸으니
온정내무사방한(溫情乃務事方閒) 온정으로 녹여 편안케 할 지어다
[만암종헌선사(曼庵宗憲禪師 1876-1957)
곡운탄토비수색(谷雲呑吐悲愁色) 계곡을 삼킬 듯 토하는 구름은 슬픔만 더하노니
부왕태래의유재(否往泰來宜有在) 어려움 가면 태평한 날 반드시 오리라
설월우다냉정안(雪月尤多冷靜顔) 눈 속 달이 찰수록 얼굴은 더 온화하여
갱기영일운회환(更期寧日運回還) 안녕된 날 돌아오길 기약하노라.
[만암스님은 백양사에 오래 머물러 목양산인(牧羊山人)이라고도 하였다. 속성은 여산 송씨(宋氏)로 1876년에 전라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백양사의 근대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다.
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1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스님은 백양사 취운도진(翠雲道珍)선사의 문하에서 출가한다. 환응(幻應)강백으로부터 전강을 받은 스님은 운문암과 청류암에서 경을 가르치다가 32세때인 1907년 해인사 강백으로 추대되었다.
특히 만암스님은 어수선한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의 승려가 결혼을 하는 상황에서도 백양사의 가풍에 따라 결혼하지 않은 비구로서 청정한 모습을 보였다. 현재 조계종의 고승으로 추앙받는 스님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속가에 자녀들을 두고 출가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백양사의 청정가풍은 미루어 짐작이 되는 것이다.
1947년에 일제 잔제 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상응하여 식민지불교 청산과 민족정기 함양, 승풍 진작 등 3대 목표 아래 전라도 20여 사암 및 포교당을 동참시켜 호남 고불총림을 결성하였다.
1952년에는 조계종 제3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5년 동안 역임하였다.]
[연보]
1876 1. 17. 전북 고창출생, 속성은 여산 송(宋)씨
1886 백양사에서 출가, 법호 만암, 법명 종헌
1892 구암사 강원에서 한영을 사사
1929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
1948 조선불교 교정
1954 조계종 종정
1957. 1. 10. 세수 81, 법랍 71세로 앉아서 입적
[만암 종헌(曼庵宗憲, 1876~1957) 스님은 격변의 시기였던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친 선각자이자 교육자입니다.
*출가 및 수행: 1876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만암 스님은 1886년 백양사에서 취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습니다. 그는 삼선 수행을 중요하게 여기며 수행자 본연의 자세를 강조했습니다.
*교육 사업: 만암 스님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재 양성에 힘썼습니다.
광성의숙 설립 (1910): 백양사 청류암에 세워진 광성의숙은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역사, 국어, 산술 등 신학문을 가르쳐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기관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일제 강점기 민족 교육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심상학교 설립: 일반인을 위한 교육기관인 심상학교(약수초등학교 전신)를 설립하여 한글, 국사, 수리, 농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불교전수학교 교장 (1928): 불교 전문 교육기관인 불교전수학교의 초대 교장을 맡았습니다. 이 학교는 이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거쳐 현재의 동국대학교로 발전했습니다.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 (1929-1932):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불교 교육의 근대화와 체계 확립에 기여했습니다.
정광학원 설립 (1947-1955): 해방 이후에는 광주에 정광중학교와 정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헌신했습니다.
백양사 중창: 만암 스님은 퇴락했던 백양사를 중창하여 오늘날의 규모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는 24년간 백양사 주지를 맡아 중창 불사를 이끌었습니다.
*불교계 활동:
임제종 창립: 일제강점기 일본 불교에 한국 불교를 예속하려는 시도에 맞서 한용운, 박한영 등과 함께 임제종을 창립하여 한국 불교의 자주성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조선불교중앙교무원 활동: 교학부장 등을 역임하며 중앙 불교 교단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조계종 초대 종정: 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불교계에서 종명을 조계종으로 환원하고 종헌을 개정하는 등 한국 불교 정화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54년에는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만암 종헌 스님의 조계종 초대 종정 추대는 한국 불교 정화 운동의 중요한 결실이자, 격동기 한국 불교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일제강점기 불교 왜색화: 일제는 한국 불교를 통제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변질시키려 했습니다.
승려의 결혼 허용, 일본식 사찰 운영 등이 강요되었고, 이는 한국 불교의 전통과 정체성을 훼손하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해방 이후 불교계의 혼란: 해방 이후 한국 불교계는 일제 잔재 청산과 전통 회복이라는 과제에 직면했습니다. 하지만 종단 내부의 의견 충돌과 갈등으로 인해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비구-대처 갈등: 특히 승려의 결혼 허용 문제(대처승)를 둘러싸고 전통적인 비구승과 결혼한 대처승 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이는 종단 분열의 위기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암 스님의 역할: 만암 스님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불교의 자주성을 지키고 전통을 수호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한국 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덕망과 지도력을 바탕으로 종단 내부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종정 추대 과정:
조계종 종단 출범: 만암 스님을 비롯한 뜻있는 스님들은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종단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1954년 대한불교조계종이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됩니다. 이는 왜색화된 불교를 청산하고 전통적인 비구 중심의 종단을 확립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초대 종정 추대: 새롭게 출범한 조계종은 혼란을 수습하고 종단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갈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만암 스님은 그의 덕망과 연륜, 그리고 한국 불교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초대 종정으로 만장일치 추대되었습니다.
추대 시점: 만암 스님은 1954년 대한불교조계종이 정식으로 출범하면서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종정 추대의 의미:
*한국 불교 정통성 확립: 만암 스님의 종정 추대는 왜색 불교의 잔재를 청산하고 한국 불교의 전통적인 가풍과 수행 정신을 되살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종단 안정과 통합: 그의 지도력은 비구-대처 갈등으로 혼란스러웠던 종단을 안정시키고 통합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조계종의 위상 확립: 만암 스님은 초대 종정으로서 조계종의 위상을 높이고,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향후 한국 불교의 방향 제시: 그의 가르침과 종정으로서의 활동은 이후 한국 불교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지침이 되었습니다.
*배경:
선농일치 사상: 수행과 농사를 함께하며 자립적인 삶을 강조하는 '반선반농(半禪半農)' 사상을 실천하고 제창했습니다.
만암 스님은 일제강점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 활동과 쇠퇴한 사찰을 일으켜 세운 중창 불사,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 등 한국 근현대 불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그의 가르침과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불교계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출처:만안평전]
31.만해한용운선사(卍海 萬海 韓龍雲禪師 1879-1944)
[오도송(悟道頌)]
남아도처시고향(南兒到處是故鄕) 남아 대장부는 머무는 곳이 바로 고향인 것을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客愁中) 수많은 나그네 시름 속에서 애태웠네
일성갈파삼천계(一聲喝破三千界) 한 소리 버럭 지르니 삼천세계가 깨지고
설리도화편편홍(雪裡桃花片片紅) 눈 속에 붉은 복사꽃 흩날리네
[춘몽春夢][만해 용운(卍海龍雲, 1879~1944)
몽사낙화화사몽(夢似落花花似夢) 꿈은 흡사 낙화 같고 꽃은 흡사 꿈같은데)
인하호접접하인(人何胡蝶蝶何人) 사람은 어찌 나비이고 나비는 왜 사람인가)
접화인몽동심사(蝶花人夢同心事) 나비 꽃 사람의 꿈은 모두 한마음 속이니)
왕소동군유일춘(往訴東君留一春) 봄신에게 하소연해 이 봄을 붙잡아볼까)
[복종(服從)]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은,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마을)에서 부농인 아버지 한응준(韓應俊)과 어머니 창성 방씨(昌成 方氏)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
(萬海)이다. 어려서 고향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쳤다.
유년시절에는 부친으로부터 의인(義人) 및 걸사(乞士)의 기개와 언행을 전해 듣고 나라와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리하여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홍성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집에 안주하지 않고 세상으로 나왔다.
이런 결단으로 선생은 나라를 구하려고 집을 나왔다가, 우선 ‘인생은 무엇인가’를 풀기 위해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갔다. 백담사에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배웠지만, 문명세계를 알고 싶은 호기심으로 세계일주를 단행하였다. 세계일주를 시베리아에서 중단한 선생은 설악산 백담사로 돌아왔다. 속세와 인연을 끊고 연곡(蓮谷)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불교사상을 탐구한 선생은 일본에서 들어오는 문명세계를 확인하기 위하여 1908년에는 일본유학을 단행하였다. 6개월의 짧은 유학 생활에서 선생은 불교 근대화라는 새로운 세계를 확인하였다.
1910년 선생은 한국불교가 새로운 문명세계에 적응할 수 있는 개혁방안을 제시한 기념비적 책인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백담사에서 탈고하였다. 이 책은 1913년에 발간되었는데 그때
부터 선생은 불교의 혁신운동을 일으킨 주역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1919년 선생은 천도교・기독교・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불교측 인사들과의 접촉을 위해 동분서주 하였다. 그 결과 서울 임제종포교당에서 같이 활동하였던 백용성(해인사 출신) 선사를 민족대표로 서명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남 거창까지 내려가 유림의 거두인 곽종석을 만나 유림측도 운동에 동참을 유도하였다.
한국문학사에서 선생은 근대적 시인이요, 3・1운동 세대가 낳은 최대의 저항적인 민족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생은 88편의 시를 모아 1926년 『님의 침묵』이라는 첫 시집을 발간하였고, 시조와 한시를 포함하여 모두 300여 편에 달하는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작품] 님의침묵/ 알수없어요/ 이별은 미의 창조/ 사랑하는 까닭/ 복종/ 수의 비밀/ 인과율/
일경초/ 심(心)/ 두견새/ 최초의 님/ 흑풍[6]/ 조선독립의 서 등
그밖에 소설로는 『죽음』, 『흑풍(黑風)』(1935, 『조선일보』 연재), 『후회』(1936, 『조선중앙일보』연재하다가 중단), 『철혈미인(鐵血美人)』(1937, 『불교』1 ・ 2집에 연재), 『박명(薄命)』(1938, 『조선일보』 연재) 등이 있다.
32.묘연비구니(了然比丘尼) [나옹선사의 누이 懶翁禪師 妹]?
[오도송(悟道頌)]
오온산두고불당(五蘊山頭古佛堂) 오온의 망상 무더기가 그대로 고불당인데
비로주야방호광(毘盧晝夜放毫光) 비로자나 부처님 주야로 백호광명 항상 놓고 있네
약지차처비동이(若知此處非同異) 만약 여기에서 異同(이동)없는 이치를 안다면
즉시화엄변시방(卽時華嚴遍十方) 곧 이 화엄장엄이 시방세계에 두루 하리라
[동생 묘연 비구니가 머리를 깎다: 나옹 懶翁]
무명의 거치른 풀을 뿌리째 깎았나니
당당한 자성(自性)의 계율이 스스로 원만하리
지금부터는 어떤 그릇된 길도 밟지 말고
바위 위음왕불 겁 밖의 근원을 뚫으라 [懶翁]
33.무문혜개선사(無門慧開禪師 1183-1260)
[오도송(悟道頌)]
청천백일일성뇌(靑天白日一聲雷) 쨍쨍한 해 마른하늘 둥둥 우레소리,
대지군생안활개(大地群生眼豁開) 대지의 온갖 생령(生靈)들이 화들짝 눈을 뜨네
만가삼라제계수(萬家森羅齊稽首) 삼라만상이 한결같이 모두 머리 숙이니
수미발도무삼대(須彌勃跳舞三臺) 수미산을 뛰어오르며 어깨춤을 추는구나
혜개는 스승 문하에서 무자(無字)를 6년간 참구(參究) 하면서 ‘만약 수면(睡眠)에 빠지면 내 몸을 태워버리리라’라고 맹세(盟誓)하고 참선(參禪)했다. 혜개는 수면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선방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찧어 가며 정진하였다.
이렇게 혜개(慧開) 선사(禪師)는 치열(熾熱)하게 정진중(精進中)에 점심 공양을 알리는 북소리를 듣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게 된다. 그때 읊은 게송이다. 쨍쨍한 해 마른하늘 둥둥 우레소리, 대지의 온갖 생령(生靈)들이 화들짝 눈을 뜨네, 삼라만상이 모두 머리 숙이니, 수미산이 벌떡 일어나서 춤을 추는구나! <靑天白日一聲雷 大地群生眼豁開 萬家森羅齊稽首 須彌勃跳舞三臺>
춘유백화추유월(春有百花秋有月) 봄에 온갖 꽃이 피고 가을에 밝은 달이 뜨고
하유량풍동유설(夏有凉風冬有雪) 여름 시원한 바람 불고 겨울에 하얀 눈 온다면
막무한사괘심두(若無閑事掛心頭) 만약 부질없는 일에 마음 두지 않는다면
편시인간호시절(便是人間好時節) 이것이 바로 사람들 바라는 살기 좋은 시절이네
[무문혜개선사(無門慧開禪師 1183-1260)
[무문관(無門關)]
대도무문(大道無門) 큰길에는 문이 없으나
천차유로(千差有路) 천 갈래 다른 길은 있으니
투득차관(透得此關) 이 관문을 꿰뚫고 나아가면
건곤독보(乾坤獨步) 온 천지 당당히 활보하리라.
[혜개는 1260년 78세에 자기가 들어갈 탑을 세우게 하고
감실을 완성한 뒤에 스스로 찬탄하며 읊은 임종게이다.]
허공은 남도 없고 허공은 멸함도 없다.
이런 허공의 경지를 증득하면 허공과 다름없으리.
지⋅수⋅화⋅풍 4대가 꿈⋅환상⋅물거품⋅그림자와 같아서
78년 세월이 손가락 한번 튕김이로다. [게송 읊기를 마치고 세납 78세로 좌탈입망했다.]
[<무문관(無門關)> 선종 5가(禪宗五家)의 일파인 임제종(臨濟宗)에 속하는 남송시대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가 1228년 46세 때에 푸저우(福州) 영가(永嘉)의 용상사(龍翔寺)에서 수행자를 위해 고칙(古則) 48칙(則)을 염제(拈提: 고칙을 제시해 이를 평창함)하고, 평창(評唱)과 송(頌)을 가해서 <무문관>이란 제목을 붙이고, 자신의 찬술이유를 말한 자서(自序)를 가해 간행했다.]
[무문 혜개(無門慧開)는 남송(南宋)시대의 임제종 양기파 선사로, 호는 무문(無門), 자는 자원(子元), 속성은 양(梁) 씨였다. 절강성 항주(杭州) 전당(錢塘) 출신으로, 천룡사(天龍寺)의 천룡 광(天龍曠) 화상에게 배우고, 나중에 여러 선사에게 차례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다가 강소성 평강부(平江府) 만수사의 월림 사관(月林師觀, 1143-1217) 선사의 제자가 됐다. 사관은 혜개에게 ‘무(無)’자를 참구하라 했다. 혜개는 스승 문하에서 ‘무(無)’자를 6년간 참구하면서 ‘만약 수면에 빠지면 내 몸을 태워버리리라’고 맹세했다. 혜개는 수면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가며 정진했다.
6년이 지난 어느 날 점심 공양을 알리는 북소리를 듣고 불법의 대의를 문득 깨달아 노래했다.
청천백일일성뢰(青天白日一声雷)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천둥이 치니
대지군생안활개(大地群生眼豁開) 대지의 중생들 눈 활짝 열었도다. 활
만가삼라제계수(萬家森羅齊稽首) 삼라만상이 한결같이 머리 조아리니
수미발도무삼대(須彌勃跳舞三臺) 수미산을 뛰어오르며 어깨춤을 추도다.
1218년 안길산 보국사에서 세상으로 나와 강서성 천령사, 황룡사, 귀암사, 진강부(강소성) 초산(焦山)의 보제사, 평강부 개원사, 건강부의 보령사에 머물렀다.
1228년 세납 46세 때 동가(東嘉)에 있는 용상사(龍翔寺)에서 대중들의 수좌(首座)로 있을 때,
법을 물어오는 납자들의 청에 따라 옛사람들의 공안을 ‘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으로 삼아 각자 근기에 따라 공부하는 이들을 인도했다.
※‘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고문와자(敲門瓦子)’---깨진 기와조각으로 문을 두드려 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에는 기와조각이 쓸모가 없어지는 것처럼 문자나 언어가 비록 무명의 중생들을 진리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데는 필요하지만 그 문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언어나 문자 또한 깨진 기와조각처럼 쓸모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달을 보게 하기 위해 가리키는 것은 손가락이지만 그 손가락이 달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피안에 이른 뒤 뗏목을 버리는 비유와도 통한다.
마침내 간추려 기록하다 보니 어느새 책 한 권이 되니, 모두 48칙이 됐다. 이것을 통틀어 <무문관(無門關)>이라고 이름을 붙여 간행했다.
무문 혜개 선사가 역대 조사들 화두 중 핵심이 되는 것, 제자들을 가르칠 공안 48칙에 평창(評唱)과 송(頌)을 붙여 <무문관(無門關)>을 지어, 1228년 남송 이종(理宗) 황제의 생일을 기념해 상진했다. 알기 쉽게 풀이한 선 입문서로 그 간결함과 명료함으로 인해 선서(禪書)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1246년 세납 64세 때 칙명을 받아 항주에 호국인왕사(護國仁王寺)를 열었다. 이종(理宗) 황제에게 법요를 설하고,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한 공으로 금란법의와 불안선사(佛眼禪師)의 호를 받았다.
―<무문관(無門關)>의 대의―
<무문관>의 대의는 우리 중생들이 보고, 듣고 아는 모든 것이 다 ‘무(無)’라고 하는, 없을 무(無)자, 모든 것이 다 허망하다 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하는 그 관문(關門)을 넘어야 함을 말한다.
혜개는 <무문관> 자서(自序) 끝에 이렇게 썼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칼 한 자루 들고 뛰어든다면, 팔이 여덟 개나 되는 신장도 그를 막지 못할 것이며, 설령 서천의 스물여덟 조사와 동토의 여섯 조사라도 그 위풍을 바라보며 그저 목숨을 구걸할 것이다. 게송으로 읊었다.
대도무문(大道無門) 대도에는 문이 없도다.
천차유로(千差有路) 천 갈래 길은 있으니
투득차관(透得此關) 이 관문을 뚫고 나아가면
건곤독보(乾坤獨步) 온 천지 당당히 활보하리라.
<무문관(無門關)>은 선가(禪家)에서 간화선의 기본 텍스트로 널리 사용돼왔다. <벽암록>, <종용록> 등의 선서(禪書)가 이미 편찬돼있었지만 간화선의 종지를 결론적으로 더욱 굳건히 제시한 공안집은 무문 혜개 스님의 이 <무문관>이다.
<무문관>에서 제시한 48칙의 공안마다 화두 참구하는 방법과 정법의 안목을 열어주는 자비방편이 가득하다.
스님은 월림 사관(月林師觀) 선사로부터 법을 계승한 이후 세상에 나와 중생을 구제했다. 보인사를 비롯해 여러 사찰의 주지 직을 역임했으니 이(理)⋅사(事)를 종횡무진하는 대선지식의 행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무문 혜개 스님은 자신의 화두였던 ‘무(無)’에 대한 확신을 특이한 게송으로 읊기도 했다.
“無無無無無 無無無無無 無無無無無 無無無無無.”
현재 ‘무문관’이라는 특수선방도 <무문관>이라는 책으로부터 그 이름이 비롯됐다고 본다면 스님의 법력은 시공을 초월하고 있다.
만년의 혜개는 몸은 여위었지만 정신은 맑았으며, 검은 빛 머리카락을 어지럽게 흩날렸고 항상 허름하고 먼지가 낀 옷을 입고 다녀 사람들이 이런 관습의 문을 연 인물로 받들었다.
혜개는 1260년 78세에 자기가 들어갈 탑을 세우게 하고 감실을 완성한 뒤에 스스로 찬탄하며 읊은 임종게이다.
허공은 남도 없고
허공은 멸함도 없다.
이런 허공의 경지를 증득하면
허공과 다름없으리.
지⋅수⋅화⋅풍 4대가
꿈⋅환상⋅물거품⋅그림자와 같아서
78년 세월이 손가락 한번 튕김이로다.
게송 읊기를 마치고 1260년 4월 세납 78세로 좌탈입망했다.
[출처] 무문 혜개(無門慧開) 선사
34.무산오현스님설악무산(雪岳霧山 1932~2018) (조오현曺五鉉)
[오도송]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날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아득한 성자 )南~無~阿彌陀佛!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 울음소리를
홀로 듣노라면,
천경(千經) 그 만론(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
[천지심(天地心: 하늘과 땅의 마음과 나의 한마음)]
秋山疎雨過(추산소우과) 가을 산중에 비가 지나갔나니
霜葉落庭苔(상엽락정태) 서리 맞은 잎이 앞뜰 이끼 위에 떨어진다
白犬通消息(백견통소식) 하얀 개에게 소식을 전하고
罷禪御鶴來(파선어학래) 선정에서 깨어나 학(鶴)을 타고 오도다.
[임종게]
천방지축 天房地軸.=(天方地軸)
기고만장 氣古萬丈
허장성세 虛張聲勢로 살다보니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
억 !
[스스로를 ‘설악산 산지기 ’라고 한 무산 조오현(1932-2018)은 무애도인(無碍道人), 설악당
(雪嶽堂), 무산(霧山)스님, 오현스님, 조오현(曺五鉉), 신흥사 조실, 설악산 조실, 조계종 원로의원,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 대종사 승려문인 등 직함이나 성함 법명도 다양한 스님이 계셨다. 바로 무산 스님이시다.
무산 스님은 1932 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57년 경남 밀양 성천사 인월 화상으로부터 사미계를 수지했으며, 1968년 범어사 석암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젊은 시절 금오산 토굴에서 6년 동안 고행했으며, 설악산 신흥사에서 정호당 성준화상을 법사로
건당(建幢)했다. 1968년『시조문학』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불교신문 주필,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신흥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종단 최고법계인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1968년 등단한 오현 스님은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시조시인으로, 한글 선시의 개척자로 꼽힌다. 시조집 ‘심우도’, ‘아득한 성자’ 등을 펴냈고, 가람시조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현대시조문학상 등을 받았다.
35.무외영허선사(無畏映虛禪師 1792-1881) 역산당 영허선사(亦山堂映虛)
[오도송(悟道頌)] [무위한(無位閑:몸도 마음도 없는 것)]
송창토벽계변지(松窓土壁溪邊地) 창밖에 푸른 솔이 보이는 시냇가 초암에
백수치의나일옹(白首緇衣懶一翁) 흰머리 검은 승복 게으른 늙은이 하나
의도홀연심자락(意到忽然心自樂) 마침내 한 경지 다다르고 보니 마음 절로 즐거워
랑음한보임서동(朗吟閑步任西東) 낭랑한 목소리로 경 읊조리며 한가로이 거니네.
[월파공(月破空:깨달음의 소리)]
탁입정전백(卓立庭前栢) 우뚝 선 뜰 앞의 잣나무
장청직용공(長靑直聳空) 창공으로 솟은 늘 푸른 모습
영종천고월(影從千古月) 천고의 달빛 따라 그림자 드리우고
성임사시풍(聲任四時風) 사계절 바람 좇아 소리를 낸다.
[역산선영(櫟山善影, 1792~1880), 「취암대사 진찬(翠巖大師眞賛)」][무외영허선사(無畏映虛禪師 1792-1881)]
지사지면(知師之面) 대사의 얼굴을 알게 되니
견사지진(見師之眞) 대사의 참마음이 보이누나
칠분면목(七分面目) 진영에 그려진 면목에
일편정신(一片精神) 한 조각 정신 깃들었으니
금계일곡(錦溪一曲) 금계 한 굽이 물 위에
장야월륜(長夜月輪) 긴 밤 운행하는 보름달일세
[선사의 법명은 선영(善影), 자는 무외(無畏), 법호는 영허(映虛), 당호는 역산당(亦山堂)이다.
속성은 임(林) 씨이며, 아버지는 득원(得元), 어머니는 조(趙) 씨이다. 조씨는 어느 날 꿈에 불상에서 서광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조선 정조 16년(1792) 3월 23일 한양성 운현현(雲現現:지금의 운현동)에서 선사는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익혀 경사(經史)에 밝았다. 12세에 수락산 학림암(鶴林庵)으로 출가하여 승행(勝行)의 제자가 되었고, 덕함(德凾)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지탁(知濯)에게 선(禪)을 배웠으며, 21세에 덕준(德俊)으로부터 심인(心印)을 이어받았다.
특히, 선교에 능통하였으므로 주위에서는 ‘십지경왕본색납자(十地經王本色衲子)’라고 하였으며, 스승이었던 지탁도 그의 학문과 지견(知見)을 가리켜 ‘금모(金毛)의 사자(獅子)이며 백우(白牛)’라고 극찬하였다.
만년에는 석왕사 내원암(內院庵)에서 지냈으며 참선과 염불에 전념하여 낮에는 누운 적이 없었다. 용모는 위엄과 자비를 갖추었고 음성은 마치 범종소리처럼 우렁찼다. 한번 도안(道顔)을 쳐다보면 공숙(恭肅)해지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말하지 않아도 교화를 입었다고 한다. 제자와 신도는 합해서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저술로는 『역산집(櫟山集)』이 있다.
『역산집』은 조선 후기의 고승인 영허 선영暎虛善影(1792~1880) 대사의 시문집이다.
가허 영응駕虛靈應이 쓴 발문에 따르면, 대사 생전에 상좌인 용연龍淵이, 대사가 지은 글을 수습하여 간행하려 하였으나, 불태워 버리고 유포하지 말라는 대사의 지시로 인해 간행과 유포에는 미치지 못하였고, 대사의 입멸 8년 뒤에 문도들이 간직해 두었던 유고를 교정하여 간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본 문집은 서문, 상권과 하권, 발문, 문도 명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사께서는 고종 17(1800)년 설봉산 내원암에서 세수 89세 법랍 77세로 입적했다.]
36.무주청화선사(無住淸華禪師 1923-2003)
[열반송涅槃頌]
차세타세간(此世他世間)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거래불상관(去來不相關) 오고감을 상관치 않으나
몽은대천계(蒙恩大千界) 은혜를 입음은 대천세계이거늘
보은한세간(報恩恨細澗) 은혜를 갚음은 작은 시내라 한스럽나니
[오도송(悟道頌)]
폭설오산두(暴雪鰲山頭) 폭설이 오산(사성암부근산) 머리를 휘덮어 온 천지가 하얀데
회룡섬진류(回龍蟾津流) 섬진강은 한 마리 용이 돼 지리산을 휘감고 흐른다 .
천고유자명(天鼓幽自鳴) 영원한 환희의 하늘북소리가 쉼 없이 스스로 울려 퍼지고
허명조심원(虛明照心月) 마음의 달은 홀로 밝아 허공을 비추는구나.
[대종사大宗師께서는 서기 西紀1923년 음陰11월6일 전남全南 무안군務安郡 운남면雲南面 연리 蓮里에서 부친父親 강대봉씨姜大奉氏 와 모친母親 밀양박씨密陽朴氏 양녀良女의 차남次男으로 탄생 誕生하셨으니 본향本鄕은 진주晋州요 속명俗名은 호성虎成이셨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일본日本에 유학留學하여 동경대성중학東京大成中學을 졸업卒業하시고, 귀국歸國 후後 광주사범학교光州師範學校를 졸업卒業하셨으며, 무안망운중학교務安望雲中學校를 설립設立하시어 후진양성後進養成 을 위해 헌신獻身하셨다.
해방解放 후後 좌우이념左右理念 대립對立의 참상慘狀에 인간적고뇌人間的苦惱를 느끼시고 오직 진리탐구眞理探究를 위해 서기西紀 1947 丁亥 음陰 1월 16일에 백양사白羊寺 운문암雲門庵에서
금타선사金陀禪師를 은법사恩法師로 하여 수계득도受戒得度하시니 법호法號 는 무주無住요 법명
法名은 청화淸華시다. 대종사大宗師께서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보살행菩薩行으로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며 정진精進하시다가 세연世緣이 다함에 불기佛紀 2547癸未년 음.10월 19일 해시亥時에
성륜사聖輪寺 조선당祖禪堂에서 적연寂然히 반열반般涅槃하시니 세수世壽 81세요 법랍法臘 56세이셨다.
[무주당無住堂 청화淸華 대종사大宗師 연표年表]
1923년 11월 6일(음) 전남 무안군 운남면 연리 생(父 姜大奉, 母 朴良女) 2남 3녀 중 차남
1937년 (14세) 일본 유학, 동경 대성중학(大成中學) 입학.
1942년 (19세) 대성중학(大成中學) 졸업 귀국. (당시는 5년제 중학)
1943년 (20세) 무안공립농업실수학교(務安公立農業實修學校) 졸업.
1944년 (21세) 재(再) 유학, 동경 상선대학(商船大學 )입학(지금의 해양대학에 준함)
1945년 (22세) 대학 재학 중 일제(日帝)의 학도병으로 한국 진해만에 훈련 도중 해방을 맞음.
1947년 (24세) 광주사범학교(光州師範學校) 졸업. (현 광주교육대학교)
1947년 (24세) 만 24세, 6촌 종제(從弟)의 소개로 장성 기차역에서 8십리 길을 걸어 백양사 운문암(雲門庵)에 가셨고, 동안거를 마치고 금타(金 陀) 존사(尊師)를 은법사(恩法師)로 법련당(法蓮堂) 정수(定修) 스님을 계사(戒師)로 수계를 받다.
1950년 (27세/3) 장성 백양사에 계시면서 ‘금강경’을 영어로 번역하시고자 (속납/법랍) 광주에 잠시 머무셨는데 6. 25 전쟁으로 길이 막혀 사찰로 회귀(回歸)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오심.
1952년 (29세/5) 수행자의 몸으로 고향에 머물면서 지역사회의 계몽을 위해 사재(私財)로 청운고등공민학교(靑雲高等公民學校) 설립. (전남 무안군 운남면 연리, 현 망운중학교(望雲中學校))
1953년 (30세/6) 혜운사(慧雲寺) 창건. (전남 무안군 운남면 성내리 대백산)
1955년 (32세/8) 해남 대흥사 진불암(眞佛庵)으로 가셔서 폐사(廢寺) 직전의 숯 굽는 사찰로 전락한 곳을 복원하여 정진.
1959년 (36세/12) 남원 실상사 백장암(百丈庵)에 기거, 백장암에서 1킬로 떨어 진 곳에서 정진. 두륜산 양도암(養道庵, 전남 해남군 현산면 조성리) 6개월간 주석하시고, 다시 진불암(眞佛庵)에서 4~5 년 주석하심.
1963년 (40세/16) 추강사(秋江寺) 주석. (추강 조응현거사 별서(別墅)를 보시받아, 추강사라 이름함)
1965년 (42세/18) 화엄사(華嚴寺) 탑전에 한철 계시다가 사성암(四聖庵)으로 옮기셔서 정진.
1966년 (43세/19) 동리산(桐裏山) 태안사(泰安寺) 주지 3년, 6, 25 한국 전쟁으 로 전소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태안사 경내의 파손 된 봉서암(鳳瑞庵) 뼈대를 옮겨 전소된 대웅전 법당을 옮겨 불사.
1967년 (44세/20) 구례 사성암(四聖庵) 동안거 성만(成滿). 봄, 다시 태안사로 오심.
1968년 (45세/21) 벽송사(碧松寺)로 가셔서 정진. 두륜조사(頭輪祖師) 토굴에서 1년 지내시고 태안사로 오심.
1969년 (46세/22) 상원암(上元庵)에서 1년 정도 계셨고, 대흥사 진불암에 계시며 복원 증축.
1970년 (47세/23) 능엄사(楞嚴寺) 창건. (전남 장흥군 부산면 심천리, 현 금선사(金仙寺))
1971년 (48세/24) 동안거 진불암(眞佛庵)
1972년 (49세/25) 6월 전남 강진 무위사(無爲寺) 7월 전남 장흥 능엄사 마니대(摩尼臺)
1973년 (50세/26) 12월 전남 해남 진불암
1974년 (51세/27) 5월 경기도 광명시 도덕산 성도원(聖道園)에서 금타(金陀) 대화상께서 1941년
6월 일본어로 저술한 「신설(新説) 우주(宇宙)の본질(本質)と형량(形量)」을 처음으로 번역 출간.
1975년 (52세/28) 전남 해남 진불암, (남미륵암에서 계시다가 사성암 가심) 7월, 전남 구례 사성암. (하안거 이후 백장암으로 가심)
1976년 (53세/29) 9월, 광주 추강사 11월, 전남 해남 양도암(진흥사, 현산면) 11월, 전남 해남
대흥사 진불암 전남 해남 대흥사 상원암
1978년 (55세/31) ‘금강심론(金剛心論)’ 번역 종료. (해남 두륜산 상원암에서 하안거 중), 3년 결사 안거 시작 및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번역 종료. (월출산 상견성암)
1979년 (56세/32) 전남 영암 월출산 상견성암(上見性庵)에서 3년 묵언 정진하시면서 금타 대화상의 유고집(遺稿集)을 정리 ‘금강심론(金剛心論)’으로 편집 첫 출간.
1980년 (57세/33) 4월 ‘정토삼부경’ 번역본 간행(월출산 상견성암)
1981년 (58세/34) 백장암 뒤 사자암(금강대)에서 한철 계시면서 ‘약사경(藥師經)’ 번역하심.
1983년 (60세/36) 1월 전남 남원 백장암(산내면)
1984년 (61세/37) 1월 전남 해남 남미륵암(삼산면)경기도 안성 칠장사(七長寺)에서 동안거 용맹정진 중 소참법문, 후에 ‘정통선(正統禪)의 향훈(香薰)’으로 출간. 당시 퇴락한 요사채 하나만 남아있던 고찰(古刹)로 모든 전각을 중창.
1985년 (62세/38) 태안사로 오셔서 안거, 금강선원(金剛禪院) 동안거 입재 및 3년 결사(三年結社) 입재. 3월 7일 태안사 금강선원 조실(祖室).
1986년 (63세/39) 하안거부터 재가 불자 선원인 태안사 정중선원(淨衆禪院)에서 20여명의 불자들이 수선(修禪) 안거(安居) 시작.
1988년 (65세/41) 3월 3일(음 1.15) 태안사 3년 회향 및 동안거 해제 봉행. 큰 법당, 천불전 불사 터만 남았던 명적암(明寂庵), 동일암(東 日庵)터에 금강선원(金剛禪院), 성기암(聖祈庵) 등 요사 신축 보수, 경내 논은 연못으로 조성 등 태안사 중창 불사.
1989년 (66세/42) 5월 8일 법어집 ‘정통선(正統禪)의 향훈(香薰)’ 출간.
1990년 (67세/43) 3월 1일 서울 정중선원(淨衆禪院) 개원.(서울강남구도곡동) 9월1일 성륜사 대웅전 준공 법회.
1992년 (69세/45) 태안사 금강선원에서 동안거 해제에 즈음해 7일간 특별법회(후에 ‘원통불법
(圓通佛法)의 요체(要諦)’로 간행) 4월 30일 ‘약사경(藥師經)’ 번역본 간행. 9월 20일 미국 순회 법회 차 출국. 11월 8일 미국 최초 대중 스님과 함께 동안거 결제. (하이랜드 스프링 금강선원 (金剛禪院)에서)
1993년 (70세/46) 2월 5일 하이랜드 스프링 금강선원 동안거 해제. 12월 삼보사(三寶寺) 개원
(대중 스님과 함께 동안거 결제). 3월 21일 완도 범혜사(梵慧寺) 선원 상량식. 11월 15일 법어집 ‘원통불법(圓通佛法)의 요체(要諦)’ 출간.
1995년 (72세/48) 1월 동안거 중 7일간의 ‘순선안심탁마법회(純禪安心琢磨法會)’ 개최. 5월 13일
팜스프링 금강선원 개원 및 3년 결사 입재.
1998년 (75세/51) 2월 20일 3년 결사 회향.
1998년 (75세/51) 4월 12일 미국에서 귀국, 미주 3년 결사 회향 성륜사 법회. 동안거 하동 칠불사 (七佛寺) 아자방에서 일종식, 장좌불와 용맹정진.
2000년 (77세/53) 남원 실상사(實相寺) 조실(祖室) 10월 15일 벽산당(碧山堂) 금타(金陀) 대화상
부도(浮圖) 및 탑비(塔碑) 제막식 봉행(성륜사) 11월 ‘육조단경(六祖壇經)’ 번역 시작
(서귀포 공천포 토굴)
2001년 (78세/54) 봄,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신풍리에 자성원(自性苑) 개원.
2002년 (79세/55) 5월 5일 서울 도봉산 광륜사(光輪寺) 개원. 11월 20일 진안 영불사(永佛寺) 개원. 가을 강원도 횡성 진여원(眞如苑)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 번역.
2003년 (80세/56) 5월 28일 ‘육조단경(六祖壇經)’ 번역본 출간. 11월 12일 오후 10시 30분 전남
옥과 성륜사 조선당(祖禪堂)에서 세연(世緣)을 다하시고 열반(涅槃) 드심.
2007년 10월 13일 전남 옥과 성륜사(聖輪寺)에 청화 대종사 부도 및 탑비 조성.
2009년 12월 6일 전북 장성 백양사(白羊寺)에 청화 대종사 부도 및 탑비 조성.
2021년 11월 23일 전남 곡성 태안사(泰安寺)에 청화 대종사 부도 조성.
2024년 11월 19일 전남 해남 대흥사(大興寺)에 청화 대종사 부도 및 탑비 조성.
[출처] 무주당無住堂 청화淸華 대종사大宗師 연표年表
37.무준사범선사(無準師範?-1249)
[임종게(臨終偈)]
래시공삭삭(來時空索索) 올 때는 빈손으로 왔다가
거야적조조(去也赤條條) 갈 때는 알몸으로 가는 것
경요문단적(更要問端的) 다시 이 밖의 사실을 묻는다면
천태유석두(天台有石頭) 천태산에는 돌이 있다 하리라
[삭삭; 흩어져 없어지는 모양. 적조조; 赤裸裸. 출전; 無準師範禪師語錄]
남송시대 임제종 양기파 무준사범(無準師範)선사는 “선인들은 법륜미전(法輪未轉)하고 식륜선전(食輪先轉)이라 했지만 나는 두 바퀴를 모두 굴린다.”고 했습니다.
결제 때는 총림대중이 구순(九旬)동안 함께 모여 화합하며 식륜과 법륜을 굴렀고 해제 때는 흩어져 석달 동안 각자 자리에서 식륜과 법륜을 굴려야 합니다. 대중이 함께 법륜과 식륜을 굴리기는 쉬운 일이지만 혼자서 법륜과 식륜을 굴리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결제 때 공부한 힘으로 해제 때 어느 곳에 있더라도 법륜 굴리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식륜을 통해서 법륜이 더 단단해지고 법륜을 통해서 식륜이 더욱 순일해질 때 비로소 식륜과 법륜이 둘이 아닌 경지를 체득하게 될 것입니다.무준사범선사(無準師範?-1249)
식륜개전(食輪旣轉) 밥의 수레바퀴는 이미 굴렸고
법륜역전(法輪亦轉) 법의 수레바퀴를 또한 굴리니
문미문법(聞未聞法) 이전에 듣지 못한 법을 들었고
득미증식(得未曾食) 일찍이 없던 음식을 얻었구나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남송 때 임제종(臨濟宗) 승려. 성은 옹(雍)씨고, 촉(蜀) 땅 재동(梓潼) 출생이다. 9살 때 출가하여 영은사(靈隱寺)에서 파암조선(破庵祖先)의 법을 계승하고, 20년 가까이 항주(杭州)의 경산(徑山)에서 중생 교화에 힘썼다.
가정(嘉定) 16년(1233) 불감선사(佛鑑禪師)라는 호를 받고, 경산에 많은 불당을 세웠다. 특히 유 ·
불 ·도(道)의 3교 융합사상을 설파하였는데, 문하에서 조원(祖元) ·보령(普寧) 등이 배출되었다.
38.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 [법명:자초(自超)]
(오도송(悟道頌)
청산녹수진아면(靑山綠水眞我面) 푸른 산 푸른 물이 나의 참모습이니
명월청풍수주인(明月淸風誰主人) 밝은 달, 맑은 바람의 주인은 누구인가
막위본래무일물(莫謂本來無一物) 본래부터 한 물건도 없다 이르지 마라
진진찰찰법왕신(塵塵刹刹法王身) 온세계 티끌마다 부처님 몸 아니런가
[무학 자초(無學自超1327~1405)는 조선 최초이자 최후 왕사, 속가의 성은 박(朴), 흔히 부르는
'무학'은 호 로 법명 은 자초(自超).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한양 천도를 도왔다고 한다.
그는 18세에 출가하여 1353년에 원(元)에 가서 인도의 승려 지공(指空 ?~1363)과 고려의 승려 나옹(懶翁, 1320~1376)의 가르침을 받고, 1356년에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에 머물다가 태조가 즉위하자 왕사에 임명되었다. 자초의 법을 이어받은 승려가 득통 기화(得通己和1376~1433)이다.
그는 21세에 관악산 의상암에 출가하고,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자초의 가르침을 받았다.
1414년에 황해도 평산 연봉사(烟峰寺)에 작은 거실을 마련하여 함허당(涵虛堂)이라 이름하고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강의했다.
그는 [현정론(顯正論)[을 저술하여 불교에 대한 유생(儒生)들의 그릇된 견해를 반박했다. 서론 부분에서는 불교의 5계(戒)를 유교의 5상(常)에 비교해서 불살생은 인(仁), 불투도는 의(義), 불사음은 예(禮), 불음주는 지(智), 불망어는 신(信)이라 했다.]
[무학이 등장하는 전설이나 야사가 상당히 많다. 세간에 알려진 이성계의 세 서까래 꿈 해몽 전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는 이야기(猪眼觀之卽猪 佛眼觀之卽佛저안관지즉저 불안관지즉불), 왕십리의 도읍지 위치 배정 및 이자춘과 이성계의 묏자리를 봐주었다는 전설, 심지어는 종묘의 칸 수를 결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음은 태조 이성계와 조선의 개국 공신인 무학대사 사이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태조는 무학대사를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하였습니다.
“내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대사는 꼭 돼지같이 생기셨군요.”
무학대사는 화를 내는 대신 다음과 같이 대꾸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참으로 부처님처럼 인자하게 생기셨습니다.”
태조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습니다.
“나는 대사에게 농담을 건넸는데 대사는 왜 내게 아첨을 하는 것이오?”
그러자 무학대사는 미소를 머금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첨이 아니옵고 저는 사실대로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본래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이지요.”
태조는 무학대사의 재치와 통찰력에 감탄하였습니다.
[無學大師(1327년 ~ 1405년) 생애]
야사 등지에서는 그가 귀주성 전투의 영웅인 박서의 5세손이라는 얘기가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박서의 본관인 죽산 박씨 족보에도 그가 박서의 후손이라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그의 출생지에 관해서도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합천댐 수문 아래 생가터로 추정된 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경상남도 합천이라는 설과 충청남도 서산이라는 의견이 분분하다. 따라서 어렸을 때 미미한 신분으로 추정된다. 야사에서는 모친이 수태하던 날 태몽으로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책과 부러진 붓이 우수수 떨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이후 그의 운명을 암시했다.
고려 충숙왕 14년(1327) 9월 20일에 태어났으며 충목왕 즉위년(1344) 18살에 출가하여 불교를 공부하다가 충목왕 2년(1346)에 능엄경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암자 등에서 수행정진하였다. 공민왕 2년(1353) 27세 나이에 원나라의 수도 대도로 유학을 떠났다. 대도에서 서역 출신 승려이자 당시 고려 불교계에서 부처나 다름없는 고승으로 추앙한 지공(指空, 1300-63)대사를 만나 도를 인가받았다고 한다. 한편 이미 고려에서 유명한 고승이었던 나옹화상(懶翁和尙)[1] 역시 원나라로 갔다가 무학을 만났고, 무학은 나옹을 스승으로 모셨다. 무학은 스스로가 지공대사와 나옹화상, 두 고승의 공동제자라고 주장하였다. 나옹화상 또한 지공의 제자였으므로 무학의 사승관계는 조금 꼬였다.
이후 공민왕 5년(1356) 30세에 다시 고려로 귀국했다. 나옹화상 역시 공민왕 7년(1358)에 고려로 귀국하여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는데 이때 무학과 다시 만났다. 무학은 그후 함주로 가서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의 묘자리를 잡아주어 이 때부터 무학과 이성계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왕 10년(1384)부터 두 사람은 사제지간을 맺을 만큼 본격적으로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정도전이 이성계와 손을 잡고 역성혁명을 꾀하려던 이유 중에는 정도전이 노비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서얼이기에 신분상승을 원한 점도 있다는 주장이 있듯, 무학대사 역시 신분상승을 목표로 이성계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 태조 원년(1392) 10월 9일에 왕사가 되었다. 같은 달 11일이 이성계의 탄신일인지라 깨달음에 대해 강의했는데, 불법의 취지를 능히 해설하지 못해 중들 가운데 탄식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2] 태조 2년(1393) 2월 11일에는 한양의 중심인 높은 언덕에 올라가 땅의 형세를 관람하면서 이성계가 묻자 무학은 능히 알 수 없다고 답했다.
태종 2년(1402) 7월 13일에는 회암사의 감주가 되었고, 같은해 11월 9일에는 이성계가 함주에 있을 때 이방원의 명으로 이성계에게 가서 이방원이 속히 돌아오기를 청한다는 것을 전했다. 태종 5년(1405) 9월 20일에 향년 79세로 입적했고 그 사리는 회암사 부도에 안치되었다. 3년 후에는 태조 이성계도 승하했으며 태종 10년(1410) 시호를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무학(無學)이라는 법호보다는 자초(自超)라는 법명으로 더 많이 나온다.
일관되이 숭유억불이란 입장을 견지한 태종 입장에서 무학은 껄끄러운 존재였던 듯하다. 본인이 불교나 무학을 어떻게 생각하든, 아버지 태조가 무학에게 왕사(王師) 직위를 내리고 그와 가까이 지내며 존중했던 만큼, 태종으로서도 어느 정도는 격식을 갖추어 대접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태종 10년(1410) 7월에 무학에게 시호를 내리면서 변계량에게 무학을 기리는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실록은 태종이 무학을 기리는 비문을 짓도록 한 이유를 "상왕이 그를 존중하고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간결하게 설명하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태종은 신하들에게 계속 자신은 무학을 고승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을 피력했다.
불씨(佛氏)의 도(道)는 그 내력이 오래 되니, 나는 헐뜯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으려 하나 그 도리를 다하는 사람이면 나는 마땅히 존경하여 섬기겠다. 지난날에 승려 자초(自超)는 사람들이 모두 높이 받들었으나, 그는 끝내 도를 얻은 일이 없었다. 이와 같은 무리를 나는 노상(路上)의 행인과 같이 본다. 만약 지공(指空)과 같은 승려라면 어찌 존경하여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태종실록 태종 14년(1414) 6월 20일자 6번째 기사]
왜 하필 태종은 무학을 인도 승려 지공과 대비하여 말했을까? 지공과 나옹은 고려말 불교계에서 위상이 어마어마한 고승이었고, 무학은 자신이 지공과 나옹의 공동제자라고 내세웠다. 나옹 또한 지공의 제자였으므로 어느 쪽으로 보든 결국 무학은 지공의 법맥에 속한다. 태종은 일부러 무학을 그의 스승 지공과 대조하여 '스승만 못한 범속한 승려'라고 격하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 불교계는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을 부처의 법을 전하는 조사(祖師)로 여겨 조사전에 모시기도 하였고 '삼화상(三和尙)'이라고 불렀다. '삼화상'이라고 하면 단어 자체만으로는 '고승 세 분'이란 뜻일 뿐이지만, 심지어 현대 한국 불교에서도 '삼화상'이란 단어는 지공-나옹-무학을 함께 일컫는 단어로 통할 정도이다.
한국 불교계에는 불상을 만들어 사찰에 봉안하기 전에 행하는 불복장의식(佛腹藏儀式)이라는 복잡한 의례가 있다. 불복장의식에는 증인이 되어줄 역할로 삼화상을 청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불교계에서 삼화상이 어떤 위상이었는지를 드러낸다. 자장, 원효, 의상, 도의, 도선, 지눌 같은 역사나 전설 등으로 이름을 남긴 승려들을 제치고 지공-나옹-무학이 조선 불교계를 대표하는 조사로 대우받은 것이다. 정조 16년(1792)에는 개종입교 보조법안 광제공덕 익명흥운 대법사(開宗立敎普照法眼廣濟功德翊命興運大法師)란 호를 추가로 받았다. [출처:나무위키]
39.묵담성우선사(黙潭聲祐禪師 1896-1981)
[오도송(悟道頌)]
청천벽력명(靑天霹靂鳴) 푸른 하늘에 뇌성벽력이 울릴 적에
천지파도기(天地波濤起) 하늘과 땅에 큰 파도가 일어나지만
아즉상안한(我卽常安閑) 나는 항상 편안하고 한가하여서
료여산화소(聊與山花笑) 산에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네
[열반송涅槃頌]
월피법계독존성(越彼法界獨尊性) 저 법계를 초월한 법성이야
기구생사윤회상(豈拘生死輪回相) 어찌 생사윤회 상에 걸림이 있으리오.
약인문아래거처(若人問我來去處) 만일 누가 나의 오고 간 곳을 물으면
운재청천수재병(雲在靑天水在甁) 구름은 청천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 하겠노라.
묵담 성우(默潭 聲祐) 스님 (1896~1981)
1896년 3월 8일 담양에서 출생, 1907년 백양사로 출가하였다. 법명은 성우, 법호는 묵담, 1933년 망월사에서 대오(大悟),1935년 백양사 주지,
1975년 조계종에서 태고종으로 이적, 태고종 3, 4대 종정 역임
1981년 1월 2일 담양 용화사에서 세수 85세, 법랍 74세로 입적하였다.
[묵담 스님은 1896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906년 장성 백양사에서 순오 선사를 은사로 출가 득도하였다. 1914년 내장사 금강계단에서 금해 율사에게 비구 구족계와 보살대계를 수지하였다. 백양사 불교 전문강원에서 사미과·사교과를 졸업하였으며, 내장사, 곡성 관음사, 부안 내소사에서 대교과를 수료하였다.
1918년 백양사 법계고시에서 대선법계를 수하고, 1931년 종사법계를 수하고, 1932년 대종사법계를 수하였다. 백양사 청류암 관음선원, 양주 망월사, 담양 우송선원 등 70여 안거를 성만하였다.
37세에 망월사 선원에서 정전백수자의 화두를 참구하다가 뜰 앞에 있는 늙은 소나무를 보고 확철대오하였으니, 오도송이 “푸른 하늘에 뇌성벽력이 울릴 적에 하늘과 땅에 큰 파도가 일어나지만 나는 항상 편안하고 한가하여서 산에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네(靑天霹靂鳴 天地波濤起 我卽常安閑 聊與山花笑).”였다.
1957년 조계종 중앙총무원 감찰원장, 1957년 조계종정(제 5·6·7대), 1975년 태고종정을 역임하였다. 선(禪), 교(敎), 율(律)에 능통하신 스님은 백양사, 관음사, 증심사, 대전 심광사, 속리산 법주사 등 수많은 사원의 불사에 증사(證師)로, 법회의 법사, 회주, 금강계단의 전계화상 아사리로 대중을 교화하셨다.
1982년 담양 용화사에서 세수 86세, 법랍 75년으로 입적하셨다. 『묵담대종사문집』과
『집착하지 말라 모든 것은 흘러간다 (현대고승법어집)』등이 있다.]
40.묵암최눌선사(黙庵最訥禪師1717-1790)
[오도화(悟道花 깨달음의 꽃)]
진도명성야야회(盡道明星夜夜廻) 밝은 별이 밤마다 돌아온다고 말하는데
당한수신설중매(當寒須信雪中梅) 추위에 비로소 눈 속 매화를 볼 수 있네
진사구겁운성불(塵沙久却云成佛) 오랜 겁 전에 부처됐다 하거니,
하용여금정각래(何用如今正覺來) 무엇하러 아직까지 깨치려 하는가
[불조욕(佛洮浴 불법에 때를 씻은 마음)]
세욕춘산고간빈(洗沐春山古澗濱) 봄 산골짝 오랜 시냇물에 목욕하나니,
허명무복가전진(虛明無復可전塵) 텅비고 환히 밝아 다시 씻을 티끌 없다
본래청정하수욕(本來淸淨何須浴) 본래 맑고 깨끗한데 무엇 때문에 목욕을 하는가,
단척다생죄업신(但滌多生罪業身) 다만 여러생 죄업의 몸을 씻을 뿐이네
지착개생수(地鑿皆生水) 땅을 파면 어디서나 물이 나오고
운수진벽천(雲收盡碧天) 구름 걷히면 푸른 하늘 드러나는 법
강산운수지(江山雲水地) 강이나 산이나 구름이나 물이나 땅
하물부거선(何物不渠禪) 무엇 하나 '선' 아닌 게 어디 있으랴.
구적당중주(扣寂堂中主) 적묵당을 두드리는 주인은 [자신의 진영을 바라보며 지은 자찬(自讚)]
과허석상빈(課虛席上賓) 빈자리를 마련해야할 최고의 손님
눌언겸이식(訥言兼耳食) 어눌한 말을 그대로 믿고
한좌묵암빈(閑坐黙庵賓) 한가로이 앉아있는 묵암도 손님
가소묵암옹(可笑黙庵翁) 참으로 우스운 묵암 늙은이는
안맹이우롱(眼盲耳又聾) 눈멀고 귀 또한 먹었다.
혼돈상불사(混沌尙不死) 어지러움을 오히려 죽이지 않고도
소식정허융(消息正虛融) 소식은 바르고 고요하다.[자신의 진영을 바라보며 지은 자찬(自讚)]
[묵암(默庵) 선사 최눌(最訥) (1717~1790)은 조선 후기 승려로 호(號) 묵암(默庵), 법명(法名)은
최눌(最訥) 자(字)는 이식(耳食), 속성은 朴 氏, 본관(本貫) 밀양, 지금의 고흥인 홍양현 장사촌에서 태어난 묵암선사는 1730년(영조 6) 14세에 낙안 징광사(澄光寺) 돈정(頓淨)에게 출가함.
그후 조계산 송광사 풍암세찰(楓巖世察)에게 4~5년간 불법을 배우고, 또한 호암체정(虎岩體淨) 등의 여러 스승들로부터도 배웠다. 명진(明眞)에게서는 선지(禪旨)를 얻었으며, 1743년(영조 19) 부휴계(浮休系)의 적전 풍암 세찰(楓巖世察 1688∼1767)의세찰로부터 법을 이어 받았다.
그후 순천 대광사(大光寺) 영천암(靈泉庵)에서 강석을 열어 학인들을 지도하고, 연담유일(蓮潭有一)과 함께 성리(性理)의 큰 뜻을 논하기도 하였다. 특히 화엄학에 조예가 깊어 화엄종장으로 손꼽힌다.
1770년(영조 46) 해남 표충사(表忠祠)의 원장에 부임하고, 그후 1790년(정조 14) 4월 27일 조계산 보조암(普照庵)에서 세수74세, 법랍 60년으로 입적함.
최눌은 중국 화엄종의 제4조 징관(澄觀)의 『화엄소초(華嚴疏鈔)』에 대한 과문(科文)인
『화엄과도(華嚴科圖)』, 여러 불교 경전의 요체를 문답으로 정리한 『제경문답(諸經問答)』,
여러 불교 경전의 요체를 그림으로 나타낸 『반착회요(盤錯會要)』, 시문집인 『묵암집(黙庵集)』 3권 등을 저술했다.
[묵암 최눌 선사] [한국문화대백과사전]
[요약]
[묵암(默庵) 선사 최눌(最訥) (1717~1790)은 조선 후기 송광사(松廣寺)를 본거지로 한 부휴계(浮休系)의 적전으로 화엄학자이자 전라남도 해남 표충사(表忠祠) 원장을 역임한 승려이다. 스승은 풍암 세찰(楓巖世察)이다. 화엄을 비롯한 교학에 정통하여 『화엄품목(華嚴品目)』, 『제경회요(諸經會要)』, 『묵암집(黙庵集)』 등의 저술을 남겼다. 대둔사(大芚寺)의 연담 유일(蓮潭有一)과 부처의 마음과 중생의 마음이 같은지 다른지의 문제를 둘러싼 심성 논쟁을 펼쳤다.
가계 및 인적사항
최눌(最訥, 1717~1790)의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성은 박씨(朴氏)이다. 최눌은 전라도 흥양현(興陽縣: 현 전라남도 고흥군) 장사촌(長沙村) 출신이다. 호는 묵암(默庵), 법명(法名)은 최눌(最訥), 자는 이식(耳食)이다. 부휴계(浮休系)의 적전 풍암 세찰(楓巖世察, 1688∼1767)의 법맥을 이었다.
[주요 활동]
최눌은 4세 때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 응계촌(鷹鷄村)으로 이사를 하였고, 어려서부터 글 공부를
좋아했다고 한다. 14세에 징광사(澄光寺)의 돈정(頓淨)에게 출가하였고, 18세에 만리(萬里)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9세에 조계산 송광사(松廣寺)에 들어가 풍암 세찰에게 경전을 배우기
시작하여 4~5년 동안 교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에 부휴계의 교학 종장인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와 편양파(鞭羊派)의 호암 체정(虎岩體淨, 1687∼1748), 상월 새봉(霜月璽篈, 1687∼1767) 등 이름난 학승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1743년(영조 19) 스승 풍암 세찰이 주석하던 순천 대광사(大光寺) 영천암(靈天庵)에서 의발(衣鉢)을 전수받았다. 그 뒤 강석(講席)을 펼쳐서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였고, 자신이 강학한 내용을 모아
10여 종의 책을 지었다고 한다.
1761년 조사인 영해 약탄(影海若坦, 1668∼1754)의 탑을 송광사 부도전에 세웠고, 1770년에는
해남 표충사(表忠祠)의 원장이 되었다. 1790년 조계산 보조암(普照庵)에서 나이 73세, 법랍(法臘)
55세로 입적하였으며, 보조암에 진영(眞影)이 걸리고 송광사 부도전에 탑이 세워졌다.
법맥 상의 적전(嫡傳)은 환해 법린(幻海法璘)이고, 선은 와월 교평(臥月敎萍)에게, 교학은 봉봉(鳳峯)과 성봉(聖峯) 등에게 전했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묵암 최눌은 선과 교에 두루 능통하였지만 특히 화엄 교학에 뛰어났던 것으로 평가된다. 또 유학을 비롯한 제자백가(諸子百家)에도 밝았다. 그는 승려 교육 과정의 최고 단계인 대교과의 『화엄경(華嚴經)』과 『선문염송(禪門拈頌)』 등으로 제자들을 가르쳤고, 평생 강학에 매진하며 연구와 저술에 전념했다.
최눌은 중국 화엄종의 제4조 징관(澄觀)의 『화엄소초(華嚴疏鈔)』에 대한 과문(科文)인 『화엄과도(華嚴科圖)』, 여러 불교 경전의 요체를 문답으로 정리한 『제경문답(諸經問答)』, 여러 불교 경전의 요체를 그림으로 나타낸 『반착회요(盤錯會要)』, 시문집인 『묵암집(黙庵集)』 3권 등을 저술했다. 『화엄과도』는 『화엄품목(華嚴品目)』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었으며, 『제경문답』과 『반착회요』는 『제경회요(諸經會要)』로 합편되어 유통되었다. 최눌은 『제경회요』의 「불조종파도(佛祖宗派圖)」에서 임제태고법통을 내세우면서 부휴계의 계파적 정통성에 입각하여 조선 후기 불교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또 다른 저서인 『묵암집』에는 조선 영조 대에 3정승을 역임한 김상복(金相福)을 비롯한 고위 관료 및 저명한 유학자와 주고받은 시와 편지글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일본 승려에게 보낸 시도
있다. 또한 당시 승려들에게 큰 부담이었던 종이 공납의 폐단을 시정해 달라고 국왕 영조에게 올린 상소문도 들어있다.
한편 최눌은 호암 체정의 제자이자 전라남도 해남 대둔사(大芚寺)의 12대 종사인 연담 유일(蓮潭 有一, 1720∼1799)과 불교 심성에 관한 논쟁을 펼친 후 1775년에 『심성론(心性論)』 3권을 펴냈다. 그는 ‘부처와 중생의 마음은 각각 따로 원만하며 원래부터 하나가 아니다’라는 의견을 냈고, 유일은 ‘부처와 중생의 마음은 각각 원만하게 있지만 본래는 하나’라는 입장에 서 있었다.
10년 후 최눌의 제자인 화일(華日)과 경현(敬賢)은 지리산 천은사(泉隱寺) 상선암(上禪庵)에서
이 책이 쟁론의 화근이 될까 우려하여 불태웠다고 한다. 그리하여 현재 최눌이 쓴 『심성론』은 전해지지 않고 유일이 쓴 『심성론』 「서문」만 남아있다.
41.문희무착선사(文喜禪師 820~899) [문희무착(文喜無着821~900)]
[오도송(悟道頌)]
약인정좌일수유(若人靜坐一須臾) 누구나 잠깐 동안 고요히 앉으면
승조항사칠보탑(勝造恒沙七寶塔) 모래같이 많은 칠보탑 만드는 것보다 수승하다
보탑필경쇄미진(寶塔畢竟碎微塵) 보탑은 결국 무너져 티끌이 되거니와
일념정심성정각(一念淨心成正覺)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부처를 이루도다
[문희선사가 동자 앞에 무릎을 끓고 엎드려 말했다. 한 마디 가르침을 부탁 합니다.
동자가 게송을 읊었다.](面上無瞋供養具 口裡無吐妙香 ►瞋,嗔 두글자 다 사용한다)
면상무진공양구(面上無瞋供養具)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구리무진토묘향(口裏無瞋吐妙香)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심리무진시진보(心裏無瞋是眞寶) 깨끗해 화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무염무구시진상(無染無垢是眞常)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문수보살 만나기를 하도 간절히 원하기에 문수보살께서 노인으로 변신해 무착을 만나주었다.
하지만 무착은 그저 기이한 노인 정도로만 알았다. 그래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나와 보니
노인도 절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제야 낌새를 알아차린 무착이 게송을 읊었다.]
곽주사계성가람(廓周沙界聖伽藍) 온 누리가 그대로 성스러운 가람일세
만목문수접화담(滿目文殊接話談) 눈에 가득히 문수보살 만나 말을 나누었으나
언하부지개하인(言下不知開何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니 어찌하랴
회두지견취산암(廻頭只見翠山巖) 고개 돌려 바라보니 옛 산과 바위뿐일세
[무착문희(無着文喜821~900)] [오도송(悟道頌)]
고호련근고(苦瓠連根苦) 쓴 박은 뿌리까지 쓰고
첨과철체첨(甛瓜徹蒂甛) 단 오이는 꼭지까지 달다.
수행삼대겁(修行三大劫) 삼아승지 대겁을 수행하고
각피노승혐(却被老僧嫌) 도리어 노승의 미움을 받았네.
►이 게송은 문수보살이 무착문희(無着文喜) 선사의 철저한 수행과 깨달음을 평가한 글이다.
[무착 문희(無着文喜821~900)는 당나라 때의 선승으로 그는 가화嘉禾의 어아蓹兒 사람으로서
성은 주朱씨이다. 일곱 살에 출가하여, 처음에는 사분율四分律을 익혔는데, 때마침 회창會昌의
폐교廢敎 사태를 만나자, 법복을 반납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대중大中 초에 법에 따라
다시 스님이 되어 염관鹽官의 제봉사齊峰寺에서 득도하였다.
무착문희(無着文喜)선사는 종남산 운화사에서 화엄종의 제4조인 징관(澄觀)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우고 대력2년(767년) 5월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오대산 화엄사로 들어갔다.
오대산의 동대와 북대 사이에는 누관곡(樓觀谷)이라는 계곡이 있고 그 계곡에는 금강굴이 있는데
그 동굴에는 문수보살이 자주 출현하였다는 말이 내려오고 있었다.
무착문희(無着文喜821~900)선사는 남악회양(南岳懷讓)-마조도일(馬祖道一)-백장회해(百丈懷海)-
위산영우(潙山靈祐)-앙산혜적(仰山慧寂 807~883)으로 이어지는 위앙종 법맥에서 앙상혜적선사의
제자라고 <전등록(傳燈錄)>에 기록돼 있다.
중국 오대산 중턱의 외딴 암자 금강굴에서 한 스님이 손수 밥을 해먹으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스님은 어려서 출가하여 무착(無着; 821-900)이라는 법명을 받아 계율과 교학을 공부하다가
문수보살의 영지(靈地) 오대산에 참배하고 문수보살을 친견(親見)하고자 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하루는 식량이 떨어져 산 아래 마을에 내려가 양식을 탁발해 올라 오다가 소를 몰고 가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노인의 모습이 범상치 않음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뒤를 따르게 되었다.
한참을 뒤쫓아 가다 보니 전혀 보지 못했던 웅장한 절 한 채가 나타났다. 노인이 문 앞에 서서 “균제야! ” 하고 부르니 한 동자가 뛰어나와 소고삐를 잡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따라 들어가 노인에게 인사를 드렸더니, 동자가 아주 향기로운 차를 한 잔 내왔다. 노인이 묻기를
-자네는 오대산에 무엇하러 왔는가?
-저는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그 가호를 얻고자 찾아왔습니다.
-자네가 가히 문수를 만날 수 있을까? 자네 살던 절에는 대중은 얼마나 되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300여명 되는 대중이 경전도 읽고 계율도 익히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곳은 어떠한지요?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이요, 용과 뱀이 뒤섞여 산다네.(龍蛇混雜 凡聖交參용사혼잡범성교참)
무착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새 밖은 어두워져서 무착은 노인에게 하룻밤 쉬어갈 것을 청하였더니
-애착이 남아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자고 갈 수 없네. 하고는 동자에게 배웅하게 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어둑해진 길가에 나와서 무착은 동자에게 물었다.
-아까 노인에게 이곳 대중의 수효를 물었더니 전삼삼 후삼삼 이라고 하시던데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고 물으니, 동자가 큰 소리로 무착아! 하고 부르니 엉겁결에
-네.
하고 대답하자,
-그 수효가 얼마나 되는고?
하며 동자가 다그쳐 묻는 것이었다. 무착은 또 다시 말문이 막혀 동자를 쳐다 보며
-이 절 이름은 무엇입니까?
-반야사(般若寺)라고 합니다.
하며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웅장하던 절은 금시에 간 곳이 없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동자도
사라지고 없는데, 허공에서 한 귀절 게송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面上無瞋供養具)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요한 향이로다(口裡無瞋吐妙香)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心裡無瞋是眞寶)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無染無垢是眞常)
*이렇게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서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무착은 더욱 수행에 힘써 앙산 선사(仰山; 840~916)의 법(法)을 이어받아 어디에도 거리낄 바 없는 대자유인이 되었다.
어느 해 겨울, 동짓날이 되어 팥죽을 쑤고 있는데 김이 무럭무럭 나는 죽 속에서 거룩하신 문수보살이 장엄하게 나타나서는
-무착은 그 동안 무고한가?
하며 옛날 오대산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시키며 먼저 인사말을 건냈다. 그런데 무착스님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팥죽을 젓던 주걱을 들어 문수보살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문수보살은 놀래어
-어이, 무착 내가 바로 자네가 그렇게도 만나고 싶어하던 문수일세 문수야!
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받은 무착스님은
-문수는 문수요 무착은 무착이다. 만일 문수가 아니라 석가나 미륵이 나타날지라도 내 주걱 맛을
보여주리라. 하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문수보살은
-쓴 꼬두박은 뿌리까지 쓰고 단 참외는 꼭지까지 달도다. 내 삼대겁(三大劫)을 수행해 오는 동안
오늘에사 괄시를 받아 보는구나.
하는 말을 마치고 슬며시 사라져 버렸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 금강굴에서 3년 간이나 기도를 하고, 또 문수보살을 원불(願佛)로 모시고 다녔던 무착이었건만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는 문수보살이 스스로 나타나셨어도 도리어 호령을 하고 주걱으로 얼굴을 갈긴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체득한 선사들의 기백이요 실력인 것이다.
42.방온거사(龐蘊居士 ?~808?)
[열반송涅槃頌]
단원공제소유(但願空諸所有) 다만 온갖 있는 바를 비우기 원할지언정
신물실제소무(愼勿實諸所無) 온갖 없는 바를 채우려 하지 마라
호주세간(好住世間) 즐거이 머문 세간
개여영향(皆如影響) 모두 그림자와 메아리 같나니
[오도송悟道頌]
시방동취회(十方同聚會) 온 세상 천지에서 모인 사람들
개개학무위(個個學無爲) 저마다 지어냄이 없는 것을 배우네
차시선불장(此是選佛場) 이곳은 다름아닌 부처가 되려는 곳
심공급제귀(心空及第歸) 빈 마음 이루면 급제하여 돌아가네
무아부무인(無我復無人) 나도 없고 다시 남도 없는데
작마유소친(作麽有疎親) 어찌 친하고 소원함이 있으리.
권군후력좌(勸君休歷坐) 그대에게 권하나니 앉아있지만 말지니
불사직구진(不似直求眞) 곧바로 참됨을 구하는 것만 못하다.
금강반야설(金剛般若性) 금강반야金剛般若의 성품
외벌일섬진(外絶一纖塵) 밖에는 가는 티끌 하나 없나니
아문병신수(我聞幷信受) 내가 듣고 아울러 믿고 받아들인 것은
총시가명진(總是假名陳) 몽땅 거짓 이름을 늘어놓은 것일세.
무아부무인(無我復無人) 나도 없고 다시 남도 없는데
작마유소친(作麽有疎親) 어찌 친하고 소원함이 있으리.
권군후력좌(勸君休歷坐) 그대에게 권하나니 앉아있지만 말지니
불사직구진(不似直求眞) 곧바로 참됨을 구하는 것만 못하다.
심여경역여(心如境亦如) 마음이 여여如如하니 경계도 여여해서
무실역무허(無實亦無虛) 실다움도 없고 또한 허망함도 없구나.
유역불관(有亦不管) 있음[有]에도 관계하지 않고
무역불거(無亦不居) 없음[無]에도 머물지 않으니
시방세계일승동(十方世界一乘同) 시방세계가 동일한 1승乘이니
무상법신기유이(無相法身豈有二) 모습 없는 법신이 어찌 둘이 있으랴.
약사번뇌입보리(若捨煩惱入菩提) 번뇌를 버려야 보리에 들어간다고 하면
부지하방유불지(不知何方有佛地) 어디에 부처의 경지가 있는 줄 모르는 것일세.
[방거사가 공부하는 사람에게 준 게송이다]
단자무심어만물(但自無心於萬物) 스스로 만물에 무심하면
하방만물상위요(何妨萬物常圍繞) 만물에 둘러싸인다고 어찌 나쁘랴
철우부파사자후(鐵牛不怕獅子吼) 철소는 사자후를 겁내지 않나니(두려울,파)
흡사목인견화조(恰似木人見花鳥) 흡사 목인이 꽃을 보는 것 같네
목인목체자무정(木人木體自無情) 목인의 본래 몸은 정이 없어서
화조봉인역불경(花鳥逢人亦不驚) 꽃 새가 그를 보되 놀라지 않네
심경여여지차시(心境如如只遮是) 마음경계 여여하기 이러할진대
하려보시도불성(何慮菩提道不成) 보리도 못 이룰까 어찌 염려하랴?
[방거사가 공부하는 사람에게 준 게송이다]
[어느 날 석두가 이렇게 물었다. [방온거사(龐蘊居士 ?~808?)에게]
“그대가 나를 만난 뒤에 날마다 하는 일[日用事]이 무엇인가?”
“날마다 하는 일을 물으신다면 입을 열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게송을 지어 석두에게 바쳤다. ]
지안(志安)
일용사무별(日用事無別) 일상(日常)의 일 별거 없고
유오자우해(唯吾自偶諧) 오직 내 스스로 짝하여 함께할 뿐이네
두두비취사(頭頭非取捨) 이것저것 취하고 버리지 않는다면
처처물장괴(處處勿張乖) 어디서나 어긋나지 않으리
주자수위호(朱紫誰爲號) 붉다 푸르다(자주빛이라) 누가 이름 붙였는가
구산절점애(丘山絶點埃) 언덕과 산에 티끌 한 점 없도다
신통병묘용(神通幷妙用) 신통과 묘용이여
운수급반시(運水及般柴) 물 긷고 땔감 나르는 것이라네
[방거사는 충주衝州 형양衡陽 사람으로서 자字는 도현道玄이다.
대대로 유도儒道로 업을 삼았으나, 거사는 어릴 적에 번뇌를 깨닫고 참된 진리를 구할 뜻을 가졌다. 당나라 정원貞元 초에 석두石頭 화상을 뵙고는 말을 잊으면서 종지를 이해했고, 다시 단하丹霞
선사와 도반이 되었다.
불교(佛敎)에서는 출가(出家)하지 않고 속가(俗家)에서 가족을 거느리고 수행(修行)하는 사람들을 남자(男子)는 거사(居士)라고 호칭(呼稱)한다. 각국 나라마다 재가수행자(在家修行者)인 거사(居士)는 많았으나 그중에 인도(印度)에는 유마거사(維摩居士)가 유명(有名)하고 중국에는 방거사(龐居士)이고, 우리나라에서는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유명하다.
중국(中國) 방온거사(龐蘊居士)는 많은 선적(禪跡) 선화(禪話)를 남긴 거사이다. 가족 전체가 재가수행(在家修行)을 한 것으로 더욱 유명하다.
거사 딸 영조(靈照)는 평생을 시집도 가지 않고 아버지 방거사를 시봉(侍奉)을 하면서 집에 찾아오는 선사들과 거침없이 선문답(禪問答)을 하여 당대 선객(禪客)들에게 호평(好評)을 받았다.
방거사는 거꾸로 물구나무로 인적한 도적열반(倒寂涅槃)으로 유명한 등은봉선사(鄧隱峯禪師)와는 동시대(同時代)의 인물이다.
방거사는 원래가 대부호(大富豪)였다고 전한다. 청원행사(靑原行思) 선사문하(禪師門下)의 석두희천(石頭希遷) 선사와 남악희천(南嶽希遷) 선사문하(禪師門下)의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禪師)의 두
선하(禪下)에서 선지(禪旨)를 깨닫고 가산(家産) 재물을 배에 싣고 동정호(洞庭湖) 물속에 다 버리고 돛 자리 장사로 그날그날 안빈낙도(安貧樂道) 생계(生計)를 연명(延命)하면서 단하선사(丹霞禪師)나 약산선사(藥山禪師)등과 그 외 많은, 선승(禪僧)들과 교류하면서 공안(公案)이 될만한 선문답(禪問答)도 많이 남겼고 방거사어록(龐居士語錄)도 있을 정도다.
[방온 거사(?∼808)는 호북성 양양 사람으로 유학을 공부하였던 사람이다. 어느 해 단하천연(739∼824)과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길녘 우연히 한 승려를 만났다. 거사들이 스님과 대화를 주고받는
와중에 스님이 물었다. “지금 두 분은 어디 가십니까?” “우리들은 과거시험 보러 갑니다.”
“그대들은 세속에서 명예를 추구해 관리로 선택되는 것보다 수행해서 부처님에게 선택되는 것이
어떻습니까?” “부처님에게 선택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즘 강서성에 마조라는 유명한 선사가 있는데, 한번 그 선사를 만나 뵙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은 그 말을 듣고 과거시험도 단념하고 마조를 찾아갔다.
선불장이라는 단어는 여기서부터 비롯되어 동아시아 국가의 선방마다 ‘선불장’ 편액이 많이 걸려
있다. 하루는 방거사가 마조를 찾아가 물었다.
“만법(萬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그대가 서강(西江)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실 때를 기다려 말해 주리라.”]
방거사(龐居士)는 석두선사(石頭禪師)와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禪師) 유발(有髮) 제자(弟子)다.
인도(印度)에는 유마거사(維摩居士)가 있고, 한국에는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있고, 중국에는 방거사(龐居士)다. 동양(東洋) 삼국(三國)에 삼대(三大) 거사(居士)라고 한다.
출가(出家) 삭발(削髮)하지 않고 부처님 법을 깨닫고 고승(高僧)들과 교류(交流)를 했다. 방거사는 세속(世俗)에서 살면서 벼슬은 하지 않고 식솔(食率) 모두가 도를 깨달아 가족들과 함께 화로(火爐) 앞에 돌아앉아서 도담(道談)을 논(論)하면 단란하게 살았다고 전한다.
방거사 집에는 단하(丹霞) 선사(禪師)가 자주 찾아왔다. 딸 영조(靈照)는 시집도 가지 않고 아버지 방거사를 시봉(侍奉)했다. 아들과 부인은 황무지(荒蕪地) 산(山)을 개간(開墾)해서 같이 살았다.
방거사(龐居士)가 노후(老後) 어느날 딸 영조(靈照)에게 말했다. 밖에 나가 해를 보다가 정오(正午)가 되면 일러다오. 딸이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아버지 정오(正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식(日蝕)을 합니다. 그래! 방거사(龐居士)가 밖으로 나와 해를 보니, 정오는 되었는데 일식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방으로 들어와 보니, 딸 영조(靈照)가 방거사(龐居士) 자리에 않아서 좌탈입망(坐脫入亡)해 버렸다.
불교수행(佛敎修行)은 이렇다. 가고 싶을 때 바로 간다. 방거사(龐居士) 딸 영조(靈照)가 종사열반(宗師涅槃)이 아닌가? 수행은 말로 떠든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가고 싶을 때 임의자재(任意自在)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경지(境地)를 보여야 한다.
방거사(龐居士) 정오(正午)에 열반(涅)에 들려고 했는데, 재치 빠른 딸 영조(靈照)에게 기회(期會)를 뺏겼다. 방거사(龐居士) 흡족(洽足)한 마음으로 이놈 봐라! 할 수 없군! 나보다 솜씨가 빠르니, 나는 일주일 후에나 가야겠다. 하고 딸 영조(靈照)의 시신(屍身)를 다비(茶毗)를 해주었다.
그러고 일주일 약속한 날 막 가려고 하는데 그 고을 태수(太守) 우적(子顆)이 찾아왔다. 어서 오시오, 우적태수와 방거사 반갑게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방거사(龐居士)가 태수 우적의 무릎은 베고 편안하게 누우면서 하는 말이 허공에 꽃 그림자도 떨어지고, 아지랑이 파도는 물결칩니다, 하니 우적이 파도가 쉬면 물결은 저절로 가라앉으리다,
말을 마치고 무릎에 누어있는 방거사(龐居士)를 보니, 방거사(龐居士)는 벌써 입적(入寂)을 하고
말이 없었다. 허~허~ 이 사람 벌써 갔구만! 너무 빠르지 않는가? 우적 태수도 방거사(龐居士)가
열반(涅槃)에 들줄 알고 왔지만 인생사(人生事)가 허망(虛妄)한 일이라 손수 방거사(龐居士) 치상(治喪) 다비(茶毗)를 마치고, 화장한 한 줌의 재(灰)를 방거사(龐居士) 아들과 같이 사는 부인(婦人)에게 유골(遺骨) 재를 전해주었다.
남편 유골 재를 본 방거사 아내 하는 말이 걸작(傑作)이다. 정신 나가 빠진 늙은이 할아범, 어리석은 몹쓸 계집애! 가면서 한마디 말도 없이 가버려! 그러나 가버렸으니 용서할 수 밖에 없지,
태수양반! 이왕 오셨으니, 밭에서 일하는 우리 아들에게 아버지 부음(訃音)이나 전해 주시오.
태수가 방거사(龐居士) 일하는 밭에 가서 아버지와 누이동생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아~ 그래요. 갈려면 소식이나 전해주고 가시지, 그렇다면 나도 이젠 가야겠다, 하고 괭이를 잡고 선체로 가버렸다. 손 얼굴에 흙 투성가 된채로 밭일하다 말고 방거사 아들도 입적(入寂) 해버렸다.
방거사(龐居士) 가족(家族) 생사여탈자재(生死與奪自在) 조사열반(祖師涅槃)이다.
우적 태수가 방거사(龐居士) 아내에게 아들 소식을 전했다. 아들이 가버렸다는 말을 듣고, 거참!
못난 놈! 자식(子息)! 가려면 분수는 알고 가야지, 하고 자식(子息) 다비(茶毗) 화장(火葬) 마치고
일가친척(一家親戚)들에게 다 알리고 집을 나간 뒤로는 종무소식(終無消息)이라는 방거사(龐居士)
한 가족 선화(禪話)다.
방거사는 많은 게송을 남겼다. 속가 거사지만 출가 스님들보다 수행정진 하여 지혜보검(智慧寶劍)을 갖춘 거사다.
방거사 게송을 보자, 세상 사람들은 보배를 중하게 여기나, 나는 찰나의 고요함을 귀하게 여기네. 황금이 많으면 사람 마음은 어지럽고, 고요하면 진여의 성품을 본다.<世人重珍寶 我貴刹那靜 金多亂人心 靜見眞如性세인중 진보아귀찰라정 금다난인심 정견진여성> 세상사람들은 금은보화 귀금속을 보배로 중하게 여기는데 방거사(龐居士)는 찰나의 선정(禪定)에 드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황금 재산이 많으면 사람 마음을 어지럽히는데, 마음이 고요해 지면 진여 자성을 깨달은 다는 체험의 소리다. 방거사는 엄청 부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불법을 만나 깨달음의 얻는, 뒤로는 많은 재산을 몽땅 실어서 바다에다가 버렸다고 한다.
또 다른 게송을 보면 성품이 공하면 법도 또한 공해서 18경계(境界)도 자취가 끊겼네, 다만 마음에 걸림이 없으면 어찌 신통을 얻지 못할까 걱정하랴!<性空法亦空 十八絶行蹤 但自心無礙 何愁神不通성공법역공 십팔절행종 단자무심애 하수신불통> 마음 성품이 공하면 법도 또한 공하다는 말이다,
법이 공하기 때문에 18경계도 자취가 끊어져서 마음이 자유자재로 걸림이 없어져서 신통을 얻지 못한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배고플 때 밥 먹는 것도 신통이고 피곤 할 때 잠자는 것도 신통이라는 말이다.
다음 게송은 무심(無心)을 체득(體得)한 게송이다. 무쇠소는 사자후(獅子吼)도 두려워하지 않고 다만 스스로 만물에 무심해지면 만물이 애워싼들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쇠로 만든 소는 사자후도 두려워 하지 않고 나무 사람은 꽃과 새를 보아도 무심하네,<鐵牛怕獅子吼 但自無心於萬物 鐵牛不怕獅子吼 恰似木人見花鳥철우파사자후 단자무심어만물 철우불파사자수 흡사목인견화조> 마음이 무심해지면 이렇다는 말이다.
다음 게송도 무심를 읊은 게송이다, 목인은 본래 자체에 마음이 없으니, 꽃과 새가 목인을 보고
놀라지도 앖는다, 마음이 이와 같이 한결 같으면 어찌 깨달음을 얻지 못할까 근심하랴!.
다음은 방거사(龐居士) 인생결산(人生決算) 노래인 열반송(涅槃頌)이다. 다만 온갖 있는 것 비우기를 원할지언정 진실로 없는 바를 채우려 하지 말라 즐거이 머문 세간에 모두 그림자 메아리와 같다. [출처:여여법당 화옹]
43.백봉김기추(白峯金基秋 1908-1985)
[오도송悟道頌]
홀문종성하처래(忽聞鐘聲何處來) 홀연忽然히도 들오는 종소리는 어디서 오나
료료장천시오가(廖廖長天是吾家)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 집안이 分明하네.
일구탄진삼천계(一口呑盡三千界) 한 입으로 三千界를 고스란히 삼켰더니
수수산산각자명(水水山山各自明) 물은 물, 산은 산 스스로가 밝더구나.
忽聞鐘聲何處來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얼로오노
寥寥長天是吾家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집안이 분명허이
一口呑盡三千界 한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
水水山山却自明 물은물은 뫼는뫼는 스스로가 밝더구나
[열반송涅槃頌][백봉김기추(白峯金基秋 1908-1985)]
무변허공일구래(無邊虛空一句來) 가없는 虛空에서 한 句節이 이에 오니
안산답지대원경(案山踏地大圓鏡) 허수아비 땅 밟을 새 크게 둥근 거울이라.
어차막문지견해(於此莫問知見解) 여기에서 묻지 마라 知見 풀이 가지고는
이삼륙이삼삼구(二三六而三三九) 二三이라 여섯이요 三三이라 아홉인 걸.
[白峯居士가 하얀 천 위에 써서 禪院 入口 대나무 長대 위에 걸어둔
當身의 偈頌 ‘最初句’가 涅槃頌이 된 셈이다]
1908년 2월 2일(음) 부산 영도에서 한의원집의 아들로 태어난 백봉 거사는 1923년 부산 제2상업학교에 입학, 뒤늦게 설립한 일본계 학교를 '부산 제1상업학교' 라고 부르는데 반발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이후 본격적인 수난의 세월이 시작된다.
20세 때 부산청년동맹 3대 위원장직을 맡아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1년 형무소에 수감되고, 만기출소 후에도 일경의 감시가 끊이질 않자 만주로 망명, 동만산업개발사를 설립해 운영하던 중 다시 구금됐다.
광복 후 교육 사업을 하다가 오십이 넘은 늦은 나이에 불법을 공부하기 시작해 ‘무(無)자 화두’로 정진하던 중 1964년 1월에 활연대오(豁然大悟)했다.
백봉거사는 큰 깨달음을 이룬 뒤에도 속가(俗家)에 머물면서 거사풍 불교를 크게 일으켰다. 여러 철학 교수와 예술가들이 그를 찾았으며 청담, 전강, 구산, 경봉, 탄허, 혜두, 강혜 스님 등과 교분을 나누었다. 자비심 넘치고 열정적인 그의 설법은 수많은 제자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열게 하고 망상을 놓게 해 그들이 참다운 자유와 평화에 이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85년 8월 2일 아침, 마지막 설법을 마치고 입적했다. 중생에 대한 지극한 연민으로 열반에 든 뒤에도 거사의 눈에서 눈물이 비쳤다고 한다.
저서로는 <금강경강송>, <유마경대강론>, <선문염송요론>, <절대성과 상대성> 등이 있다.
44.백운경한선사(白雲景閑禪師 1299-1375)
[열반송涅槃頌]
인생칠십세(人生七十歲) 인생 70은
고래역희유(古來亦希有) 예로부터 드문 일이네
칠십칠년래(七十七年來) 77년 살다가
칠십칠년거(七十七年去) 77년에 가나니
처처개귀로(處處皆歸路) 곳곳이 다 돌아갈 길이요
두두시고향(頭頭是故鄕) 머리두면 바로 고향이거늘
하수리단즙(何須理舟楫) 무엇하러 배와 노를 이끌어(노젓는 기구, 노 접)
특지욕귀향(特地欲歸鄕) 특히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리
아신본불유(我身本不有) 내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심역무소주(心亦無所住) 마음 또한 머무 는 곳 없나니
작회산사방(作灰散四方) 재를 만들어 四方에 뿌리고
물점단나지(勿占檀那地) 시주의 땅을 범하지 마라
[무일화(無一花) 오도송(悟道頌)][백운경한선사(白雲景閑禪師 1299-1375)]
일념불생전체현(一念不生全體現)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전체가 나타나려니
차체여하득유제(此體如何得喩齊) 이 본체를 어떻게 말 할 수 있으리요
투수월화허가견(透水月華虛可見) 물 속 달빛은 허공에서도 볼 수 있으나
무심감상조상공(無心鑑象照常空) 무심의 거울은 비추어도 항상 허공이로다
동중류수여람염(洞中流水如藍染) 골짜기 흐르는 물은 쪽물인 것 같고
문외청산진불성(門外靑山盡不成) 문밖의 청산은 자연 그대로이다
산색수성전체로(山色水聲全體露) 산색, 물소리에 전체가 드러났으니
개중수시오무생(箇中誰是悟無生) 그 속에서 무생(無生 : 모든 법의 실상은
생멸(生滅)이 없는 것)의 깨달음을 얻었노라.
[선관(禪觀)][경한백운선사(景閑白雲禪師 1298~1374) 열반송涅槃頌]
황면구담불량구(黃面瞿曇不良久) 금빛 얼굴의 부처님은 유구한 세월도 없나니
실중유마역불묵(室中維摩亦不默) 방장실의 유마힐도 침묵하지 않도다
흡사취모신발연(恰似吹毛新發硏) 선의 본바탕은 새로이 연마한 취모리 검과 같으니
외도천마처불득(外道天魔處不得) 외도와 천마(天魔)도 넘보지 못하네
[백운경한 (白雲景閑 1299-1375)]
(1) 생애와 저술
白雲和尙 景閑 은 태고국사 보우(1301-1382). 나옹화상 혜근 (1320-1376)등과 함께 고려 말의
대표적 고승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경한의 불교사적 위치는 태고나 나옹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결과 그의 존재는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 같은 현상은 물론 경한의 활동이 이들에 비해 두드러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기인한 결과라 하겠지만,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 성과가 별로 없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염두에 두면서 경한의 생애와 저술 선사상 그리고 그의 불교사적 위치 등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경한의 생애를 전하고 있는 자료로는 백운화상어록 <白雲和尙語錄 >이 유일한 상태이며 <高麗史 >에 그에 관한 단 한 편의 기사가 실려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 자료도 그가 49세 때인 1346년 이후의 사실만 전하고 있어, 그 이전까지의 활동에 대한 내용을 전혀 알 길이 없다 .
경한은 법호가 백운이며 1299년 전북 고부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출가하였다는 그의 행적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충목왕 2년(1346) 5월 선묘에 승 백운에게 명하며 비를 벌었으나 얻지 못하였다 ”는 <高麗史>의 내용이다.
이후의 행적은 <白雲和尙語錄>으로 구성할 수 있는데 정확한 연도추정이 가능한 것은 약 20여개가 된다. 경한은 1351년 (충정왕3) 5월 중국의 호주 가무산 천호암으로 가서 임제종의 거장인 석옥화상 청공 (石屋和尙 淸珙 )을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육조스님과 조주의 화두 등을 예로 들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져 깨달음을 구했으며, 같은 해에 지공화상에게 게송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지공은 나옹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본래 인도인이며 원나라에 들어와 있다가 충숙왕 말년에는 고려에서 거주하였다.
1352년 정월 석옥을 다시 찾은 경한은 깨달음의 큰 전기를 맞이한다. 즉, 아침 저녁으로 석옥을
만나 의심을 품던 어느 날, 혼자 무심무념의 참뜻을 깨닫자 석옥이 찬탄을 하면서 인가하였던 것이다. 당시 경한은 “곧 내 마음에 맺혔던 의심은 얼음처럼 풀리고 무심의 위없는 참뜻을 깊이 믿게 되었다. (卽 我心疑 願然永釋 深信無心無上眞宗 즉 아심의 원연영석 심신무심무상진종)"고 스스로 표현하였다.
스승인 석옥과 이별을 한 후 잠시 휴휴선암이라는 곳에서 머물렀던 경한은 1352년 3월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한 그해에 보법사에서 태고를 만나기도 했던 그는 성각사에서 대중들과 함께 정진을
하던 중 드디어 대오의 경지를 얻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
계사년 (1353) 정월 17일 낮에 단좌를 하고 있었는데 저절로 생각나는 것이 있었으니, 永嘉大師 <證道歌> 중의 “망상을 버리려 하지도 말고 진실을 구하려 하지도 마라.
無明 의 實性 이 곧 불성이요 , 幻化 의 空身 이 곧 법신이다”라는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러 그 말을 깊이 음미하였을 때 갑자기 바로 無心이 되었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전과 후가 아주 끊어져 조금도 의지할 곳이 없어 망연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삼천세계가
온통 하나, 자기 자신임을 보았다.
大悟 를 이룬 다음 해인 1354년(공민왕 3) 6월, 석옥의 제자인 法眼禪人 이 호주 가무산 천호암에서 석옥화상의 辭世頌 을 가지고 와서 경한에게 전하였다. 현재 학계의 일부에서는 이 사세송의 전달 사실을 놓고 석옥의 적사 (嫡嗣)는 태고가 아니라 경한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을 정도로 매우 민감한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세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白雲買了賣淸風 散盡家私徹骨窮
백운매료매청풍 산진가사철골궁
留得一間芽草屋 臨行付與丙丁童
유득일간아초옥 임행부여병정동
백운을 모두 사서 청풍을 팔았더니
온 집안이 텅 비어 뼛속까지 가난하다.
마침 한 칸의 草屋 이 남아 있어
떠나는 길에 다 달아 丙丁童子 에게 주노라.
같은 해에 그는 안국사에서 지공화상에게 여러 편의 게송을 올리기도 하였다. 경한은 1357년 태고의 천거로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이어서 그는 나이 68세가 되던 1365년 6월, 해주 신광사의 주지로 들어갔다. 이때도 주지를 사양하겠다는 글을 왕에게 올렸으나 결국 부임하게 된 것이다. 이 신광사는 당시의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사찰로, 경한은 이때부터 몇 년 간 왕실과 연관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즉 1368년(공민왕 17)에는 왕비 노국공주의 願堂으로 세워진 홍성사의 주지를 맡았으며 1370년에는 9월에 실시했던 功夫選 의 試 을 맡기도 하였다. 신광사 주지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활동은 나옹 화상의 적극적인 천거로 인한 것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1369 년 김포의 포망산에 있는 고산암이라는 곳에서 지공화상의 讚을 쓰기도 했던 경한은 1374년(공민왕 3) 여주 취암사에서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77였다.
人生七十歲 古來亦希有 七十七年來 七十七年去
處處皆歸路 頭頭是故鄕 何須理舟楫 特地欲歸鄕
我身本不有 心亦無所住 作灰散四方 勿占檀那地
인생 70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다. 77년 살다가 77년에 가나니 곳곳이 다 돌아갈 길이요 머리두면
바로 고향이거늘 무엇하러 배와 노를 이끌어 특히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리. 내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마음 또한 머무는 곳 없나니 재를 만들어 四方 에 뿌리고 施主 의 땅을 범하지 마라.
경한은 李穡 이 지은 <白雲和尙語錄> 서문에 의하면 대선사라는 승계를 지녔음이 확인된다.
비록 선종계 내에서는 국·왕사 다음으로 최고의 위치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사후에 추증되었는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다.
결국 그의 생애는 말년의 몇 년간을 제외하고는 태고나 나옹과 같이 왕실과 밀접했던 부분을 찾아볼 수 없으며 그의 어록 서문을 썼던 李玖 의 표현처럼 “천진하고 거짓이 없어 형상을 빌려 이름을 팔지 않았으니 眞境 에 노는 사람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현존하는 경한의 저술로는 <백운화상어록 >과 <佛祖直指心體要節>이 있다. 어록은 그의 시자였던 釋璨 · 達港 등이 기록한 것으로, 상 · 하 양권으로 되어 있으며 李穡과 李玖의 서문이 앞에 붙어있다. 1378년 판각한 것이 전해져 오다가 경성제대에서 1934년 이것을 영인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동화씨는 이 어록에 대해 “한국뿐 아니라 중국 선사들의 법어집으로서도 美文· 통쾌한
점으로는 이 이상 가는 것이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고 극찬하였다.
또한 要節은 그 내용보다 1377년 간행된 세계 最古의 鑄字本이라는 것으로 더 알려져 있다.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下卷만이 소장되어 있던 것이 밝혀짐으로써 세계의 주목을 끌었던
이 저술은 역대조사들의 偈 · 頌 · 讚 · 銘 · 書 · 詩 · 法語 등에서 선의 要諦 를 깨닫는데 필요한 정수들이 抄錄한 내용을 담고 있다.
45.백파긍선선사(白坡亙璇禪師 1767-1852)
[오도송(悟道頌)] [오각(吾覺:나의 본모습)]
두봉송혜안탁삭(頭髼鬆兮眼卓朔) 머리카락은 더부룩하고 눈은 툭 불거진[더벅머리봉,송]
차기노승진면목(此其老僧眞面目) 그 모습이 늙은이의 진면목일세.
상주천지하주지(上柱天之下柱地) 위로 하늘 아래로는 땅을 버티고 선 그것을
불조원래멱불득(佛祖元來覓不得) 부처님도 조사(祖師)님도 원래 찾을 길 없구나.
가가가가시심마(呵呵呵呵是甚磨) 우습도다.그것이 무엇일까?
남북동서유시아(南北東西唯是我) 남북동서에 오직 나 혼자이로다.
백파 긍선(白坡亘璇) 화상은 조선 후기 1767년(영조 43) 4월 전북 고창(高敞) 무장현(茂長縣)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파(白坡), 본관은 전주(全州), 속성은 이씨(李氏)이며, 조선 제11대 임금인 중종의 일곱째아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후손이다. 부친은 송계 이종환으 모친은 김해 김씨(金氏)였다.
긍선은 1778년(12세)에 고창 도솔산 선운사(禪雲寺)의 시헌(詩憲) 장로를 은사로 출가해, 연곡(蓮谷) 화상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1790년(24세)에는 지리산 영원암(智異山 靈源庵)으로 가서, 화엄의 대가인 설파 상언(雪坡尙彦, 1707~1791)의 수계산림(受戒山林)에 참여해 서래종지(西來宗旨)를 배웠고, 스승이 입적하기 한 해 전에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긍선(亘璇)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후에 순창 영구산(靈龜山) 구암사(龜巖寺)에서 상언의 제자인 설봉 회정(雪峰懷淨)으로부터 편양파(鞭羊派)의 주류 법맥을 이었고, 백파당(白坡堂)이라는 당호(堂號)를 받았다. 이 때 암자 명칭을 따 실호(室號)를 구산(龜山)이라 했다.
1792년(26세)에 백양산 운문암(雲門庵)에 개당해서 설법을 시작해 대중 100여 명에게 설법을 했고,
이후 20여 년 동안 학문을 닦고 연구에 전념했다.
1811년(45세)에 “불법의 진실한 뜻이 문자에 있지 않고 도를 깨닫는데 있건만 스스로 법에 어긋난 말만 늘어놓았다”고 참회하면서, 평안북도 초산(楚山)의 용문암(龍門庵)에 들어가 5년 동안 수선결사운동(修禪結社運動)을 전개하고, 수행하다가 심지(心地)가 열려 오도(悟道)했다.
그는 율(律)과 화엄과 선의 정수를 모두 갖춘 거장이었으며, 평소에 교유가 깊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초상화를 그린 뒤 그를 ‘해동의 달마’라고 격찬한 바 있다.
그 후 다시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선법(禪法)을 현양해, 당시에 호남 선백(禪伯)이라고 불렸다. 이때 선의 지침서인 <선문수경(禪門手鏡)>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당시 선사들 사이에서 일대 논쟁의 대상이 됐다.
<선문수경>은 조선후기 백파 긍선(白坡亘璇) 화상의 저서로, 송대 이후 선문 종사(禪門宗師)들의 염(拈)ㆍ
송(頌)ㆍ거(擧)ㆍ평(評)과 찬(讚)ㆍ화(話)ㆍ창(唱)ㆍ화(和) 등을 판석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제시한 논법이 바르지 못한 해석으로 전체를 그르쳤다고 보는 후학들이 출현했다.
대흥사(大興寺)의 의순(意恂-艸衣, 1786~1866)은 <사변만어(四辨漫語)>를 지어 비판했고, 추사(秋史) 역시 의순의 편을 들어 심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이들이 <선문수경>을 비판하자, 백파의 제자 설두(雪竇)는 <선원소류(禪源遡流)>를 저술해 스승을 옹호해 초의와 추사를 통박하고 나섬으로써 조선후기에 선(禪) 논쟁이 활발했다.
현재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禪雲寺) 입구에 있는 부도 밭에 서있는 <백파대사비>는 추사 김정희가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비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근세에 율사(律師)의 종파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白坡)만이 이에 해당할 만하며,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백파가 팔십 년 동안 착수하고 힘을 쏟은 분야이기 때문에 비문의 제목을 ‘화엄 종주 백파 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 한다고 했다.
백파가 입적한 지 3년 후인 1855년, 추사 나이 70세 때 백파 문도들의 요청으로 비문을 직접 짓고 썼다. 추사는 친구인 초의 선사가 당대 최고의 선지식 백파 화상과 선문요지(禪門要旨)에 관해 왕복 토론을 벌이자, 추사 또한 제주에 귀양 가 있던 시절인 1853년 선(禪)에 관해 격렬한 왕복 토론을 벌인바 있다.
백파 화상은 1830년(64세)에 다시 구암사로 돌아와서 이후 20여 년 동안 선강법회를 열어 팔도에서 모여든 후학을 지도했고, 1840년부터는 화엄사의 선사 영당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수행정진하며 좌선하다가 1852년(철종 3년) 4월에 입적했다. 세속 나이는 86세, 법랍은 75년이었다.
[법맥은 청허휴정(淸虛休靜) ― 편양언기(鞭羊彦機) ― 풍담의심(楓潭義諶) ― 월담설제(月潭雪霽) ―
환성지안(喚醒志安) ― 호암체정(虎岩體淨) ― 설파상언(雪坡尙彦) ― 백파긍선으로 이어진다.]
저서로는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 선문수경(禪門手鏡), 육조대사법보단경요해(六祖大師法寶壇經要解), 태고암가과석(太古庵歌科釋), 식지설(識智說), 오종강요사기(五宗綱要私記), 선문염송사기(禪門拈頌私記), 금강경팔해경(金剛經八解經), 선요기(禪要記), 작법귀감(作法龜鑑) 등이 있고, 문집으로는 백파집(白坡集)이 있다.
46.범해각안선사(梵海覺岸禪師 1820-1896)
[오도송(悟道頌)] [관선(寬禪)]
참진명가최후심(參盡名家最後尋) 몸과 마음을 다하여 도(道)를 생각함으로
인연후박가지금(因緣厚薄可知今) 길고 깊은 인연 오늘에까지 이어졌네
장춘랑송장춘동(長春浪送長春洞) 장춘을 물처럼 흘려보냈는데 다시 장춘동일세
범해근구범해심(梵海勤求梵海心) 범해가 일구월심 구하는 것이 범해 마음인데
시화죽간제죽엽(詩和竹間題竹葉) 대나무 속에서 시(詩)와 함께 찻잔만 기울인다.
연개송하청송금(宴開松下廳松琴) 소나무 아래서 벗하여 거문고 소리 즐기다 보니
거유유수용하만(去留有數庸何挽) 덧없이 세월만 가고 낡은 수레바퀴처럼 되었고
계월단단조양금(桂月團團照兩襟) 8월의 교교한 달빛만 양 가슴속에 남았네.
[초의차(草衣茶)]
곡우초청일(穀雨初晴日) 곡우에 이제 막 날이 개어도
황아엽미개(黃芽葉未開) 노란 싹 잎은 아직 펴지 않았네
공당정초출(空鐺精炒出) 빈 솥에 세심히 잘 볶아내
밀실호건내(密室好乾來) 밀실에서 아주 잘 말리었구나
백두방원인(栢斗方圓印) 잣나무 그릇에 방원(方圓)으로 찍어 내어
죽피포리재(竹皮苞裏裁) 대껍질로 꾸려 싼 다음 포장한다네
엄장방외기(嚴藏防外氣) 잘 간수해 바깥 기운을 단단히 막아
일완만향회(一椀滿香回) 한 사발에 향기 가득 떠도는구나
[茶具名(다구명):다구에 대한 명심]
생애청한(生涯淸閑) 한평생 맑고 한가하니
수두다아(數斗茶芽) 몇 말(斗)의 차싹을 거두어
설오유로(設茗猷爐) 나쁘고 거칠고 비뚤어진 화로로
재문무화(載文武火) 약한 불과 세찬 불을 조화하네
와관열우(瓦罐列右) 질항아리는 바른쪽에 놓고
자완재좌(瓷婉在左) 오지 사발은 왼쪽에 놓았네
유다시무(惟茶是務) 애오라지 차에 힘쓰는 것 있을 뿐
하물수아(何物秀我) 나를 유혹하는 것 무엇이 있으랴
[범해각안선사(梵海覺岸禪師 1820-1896)][임종게(臨終偈 열반송)]
망인제연희칠년(妄認諸緣希七年) 헛되이 모든 인연 잘못 알고 살아온 77년이여
창봉사업총망연(窓蜂事業摠茫然) 창 부딪치는 벌처럼 열심히 해온 일도 부질없어라
홀등피안등등운(忽登彼岸騰騰運) 홀연히 모두 다 털고(脫) 저 언덕에 올라 가면서
시각부구해상원(始覺浮球海上圓) 바다 위 물거품인 줄 깨닫기 시작하여 알겠네
[범해 각안은 전남 완도군 군외면 범진에서 태어났다.아버지는 최철(崔徹), 어머니는 성산 배(裵)씨이다. 법호는 범해(梵海)이며, 자는 환여(幻如)이고, 자호는 두륜산인구계(頭輪山人九階)이며, 다승(茶僧)이며, 선승(禪僧)이며 학승(學僧)입니다.
1833년(순조 33년) 두륜산 대둔사(大芚寺)로 가서 출가하였고, 1835년 호의(縞衣)를 은사로 삼고
하의(荷衣)에게서 사미계를 받았으며, 초의(草衣)로부터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그 뒤 호의·하의·초의·문암(聞庵)·운거(雲居)·응화(應化) 등 6법사에게서 불법을 배웠고, 이병원(李炳元)에게서 유서(儒書)를 배웠으며, 태호(太湖)와 자행(慈行)으로부터 재공의식(齋供儀式)을 배웠습니다.
1846년에 호의의 법을 이어 진불암(眞佛庵)에서 개당하여 『화엄경』과『범망경(梵網經)』을 강설하고 선리(禪理)를 가르쳤습니다. 22년 동안을 강당에서 학인들을 가르치다가 다시 조계산·지리산·가야산·영축산 등지에 있는 사찰을 순방하였고, 1873년에는 제주도를, 1875년에는 한양과 송악을 거쳐
묘향산과 금강산을 순례하였습니다.
그 뒤 다시 대둔사로 돌아와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1896(고종33)년 12월 26일에 나이 77세, 법랍 64세로 입적하였습니다.
제자로는 교법을 전한 3인과 선법을 전한 81인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성윤(性允)·예순(禮淳) 등이 가장 뛰어났습니다.]
[저서로는 <동사열전(洞師列傳)> 6편 1책을 비롯하여, <범해선사유고(梵海禪師遺稿)> 2편 1책,
<경훈기(警訓記)> 1권, <유교경기> 1권, <사십이장경기> 1권, <시략기> 1권, <통감기> 1권,
<진보기> 1권, <박의기(博儀記)> 1권, <사비기(四碑記)> 1권, <명수집(名數集)> 1권,
<동시선(東詩選)> 1권, <은적사 사적기> 등 20여편이 있으나 모두 간행되지 않은 것 같다.
또한『차약설』,『다가』를 비롯하여『초의차』등 여러 수의 차시를 남겼습니다.]
47.법장인곡선사(仁谷法長禪師 1941-2005)
[열반송涅槃頌]
아유일발랑(我有一鉢囊) 나에게 바랑이 하나 있는데
무구역무저(無口亦無底) 입도 없고 밑도 없다
수수이불람(受受而不濫) 담아도 담아도 넘치지 않고
출출이불공(出出而不空) 주어도 주어도 비지 않는다
[법장인곡선사(仁谷法長禪師 1941-2005)]
[법장(法長, 본명 : 김계호, 1941년 6월 15일 ~ 2005년 9월 11일)은 대한민국의 승려로, 충청남도 서산시에서 태어났다. 이후 1994년 생명나눔실천회 이사장이 되었고, 2003년에는 제31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원장이 되었다.
2004년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제7대 공동대표 의장을 지냈다. 2005년 9월 11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심장마비로 65세로 입적했으며, 영결식은 조계사에서 거행되었다.
[법장스님 본명은 김계호, 본관은 원주(原州), 법명(法名)은 법장(法長), 호는 인곡당(仁谷堂)이다. 1941년 충남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고등학교 시절에 출가한 사촌 형의 모습을 보고 크게 느낀바 있어 출가를 결심했다 한다. 그리고 1960년 예산 수덕사(修德寺) 원담(圓潭)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31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우리고장의 대표적 승려이다.
대한불교조계종에 따르면 법장스님은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정혜사 능인선원, 통도사 극락선원 등에서 다섯 차례 안거(安居)에 참여하고, 세 차례에 걸쳐 용맹정진하는 등 수행에 전념했고 1980년에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 의원이 된 뒤,
1981년 중앙종회 사무처장,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부장·재무부장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이외에 선거관리위원·재심호계위원·개혁회의의원·법규위원 등을 역임했다.
마침내 1987년에 수덕사 주지에 오르며 충남지방경찰청 경승실장과 1998년 전국 본사주지연합회 회장, 1999년 한국불교선학연구원 이사장을 지냈다. 그리고 2003년에는 대한불교조계종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총무원장으로 선임되어 2005년 9월 11일 열반할 때까지 중앙승가대 이사장,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회장,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장, 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법장은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 활동을 시작한 이래 한국 불교가 나가야 할 바를 정리하여 총무원장 선거공약으로 내세우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종단운영에 있어 참여, 변화, 도약을 실천함으로써 모든 교구를 화합으로 이끌고 그리고 조계종의 새로운 지표로 수행과 전법(傳法)의 불교, 국민에게 신뢰받는 불교, 세계로 나아가는 불교 등을 공약한다.
이어 1년내에 조계종 개혁 청산진을 발표하겠다고 약속하고 우선 말사(末寺)의 주지 임명권을 지방 본사(本寺)로 이양하고 중앙에 내는 분담금을 대폭 줄여 총무원의 권한을 줄이는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밝혀 불교계의 많은 환영을 받는다.
그리고 법장은 실천불교를 특히 강조하는데 수덕사 선풍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경허스님과 만공스님, 그리고 그의 스승인 원담스님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986년부터는 교도소 재소자에 대한 교화사업에 앞장서서 실천했으며.
1994년에는 사단법인 생명나눔실천회를 만들어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활발한 사회 활동을 펼쳤고 지금도 우리고장 서산에는 서광사를 중심으로 많은 회원들일 있어 생명나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스리랑카에 조계종마을을 세우는 등 해외 포교에도 힘써 우리나라 불교의 해외 진출의 초석을 다진다.
저서에는 《선에서 화엄으로》(1992),《고통을 모으러 다니는 나그네》(2002)가 있다. 입적시 열반송 대신 "나에게 바랑이 하나 있는데(我有一鉢囊)/입도 없고 밑도 없다(無口亦無底)/담아도 담아도
넘치지 않고(受受而不濫)/주어도 주어도 비지 않는다(出出而不空)"는 글을 남겼다.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표창(1982), 교정대상 자비상(2001), 국민훈장 목련장(2001)을 받았고,
2005년 9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서산의 인물
48.법장고봉선사(法藏高峰禪師 1351-1428)
[열반송涅槃頌]
청정본연극령롱(淸淨本然極玲瓏) 청청 본연하여 지극히 영롱하나니
산하대지절점공(山河大地絶點空) 산하대지가 점이 끊겨 공하도다
비로일체종하기(毘盧一體從何起) 비로 부처님은 어디에서 이는가?
해인능인삼미통(海印能仁三味通) 해인은 능인께서 삼매로 통달했네
칠십팔년귀고향(七十八年歸故鄕) 78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노니
대지산하진십방(大地山河盡十方) 대지 산하가 온 시방이로다
찰찰진진개아작(刹刹塵塵皆我作) 티끌 같은 온 누리 모두 내가 지었나니
두두물물본진향(頭頭物物本眞鄕) 낱낱 물건들이 본래의 참고향일세.
[법장(法藏, 1350~1428) 선사는 려말선초의 고승으로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의 제16세 사주(社主)였다. 법장선사의 성은 김씨로 본관은 신주(愼州)이고 호는 고봉(高峰) 또는 지숭(志崇)이며 어머니는 임씨(林氏)였다.
선사는 20세에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젊어서 승과(僧科)에 급제하였으나, 명리(名利)를 위하는 길이라 하여 버리고 입산수도하던 중 나옹(懶翁)을 스승으로 삼고 법맥을 이었다. 항상 머리털을 두 치 가량 기르고 바리 하나로 여러 곳을 돌아다녔으며 풀피리를 잘 불어 사람들은 그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30년 동안 명산대찰을 찾아 소요하다가 봉화의 청량산에 청량암(淸凉庵)을 짓고 선정을 닦았다. 1395년(태조4)에 남쪽의 여러 산을 유력(遊歷)하던 중 금전산(金錢山) 금둔사(金芚寺)에서 유숙하다가 꿈속에서 한 사찰을 보았다.
다음 날 우연히 송광사(松廣寺)에 이르렀는데 꿈에 본 사찰과 같았다. 제자들과 함께 송광사를
새로 일으켜 옛 모습대로 완전히 복원할 것을 서원하여 1399년(정종1) 국가의 힘을 빌어서 불(佛) 법(法) 승(僧) 전당 30채를 지었다.
그 뒤 다시 김해 신어산(神魚山) 각암(覺庵)과 경주 원원사(遠願寺),울산 태원암(太元庵) 등에 머물다가 1414년(태종 14)에 송광사로 돌아왔다.
1420년(세종2)에는 송광사 주지가 된 제자 중인(中印)이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다시 사찰의 증축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방문(榜文)을 지어서 낙성회(落成會)를 베풀고 중인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1428년 7월 11일에 병을 얻었으나 평소의 의식을 그대로 행하다가 21일 인시(寅時)에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유언에 따라 유골을 거두어 침실에 안치하였는데, 이듬해에 유골에서 사리(舍利)가 나왔다. 그 뒤로 여러 차례를 두고 사리가 분신(分身)한 것을 합해서 78개를 얻어 백동함(白銅函)에 넣어 송광사
북쪽 언덕, 현재의 청진암(淸眞庵)터에 부도(浮屠)를 세웠다.
송광사를 중창한 공로와 그 도덕으로 송광사 16국사의 열(列)에 참여하게 되었다.
송광사 국사전에 모셔진 고봉 법장 선사의 진영은 16국사탱 가운데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고려 시대의 15국사와는 달리 조선 시대의 국사로 머리가 긴 것이 특징이다.
제자로는 신찬(信贊)ㆍ혜성(惠性)ㆍ상제(尙濟)ㆍ홍인(洪仁)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고봉법장가집(高峰法藏歌集)》1권이 있다.
[고봉법장가집高峰法藏歌集]
나옹삼가(懶翁三歌)인 「완주가(玩珠歌)」·「고골가(枯骨歌)」·「백납가(百衲歌)」에 글귀마다 찬송을 붙인 계송(繼頌)과 잡영(雜詠) 100여수가 수록되었다.
법장은 1423년 여름 경주원원사(遠願寺)에 있을 때 나옹삼가에 계송을 지었으며, 1426년 여름
3종가의 계송과 잡영 100여수를 편집하여 제자에게 발간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나옹삼가의
계송과 임종게(臨終偈)만이 전하며, 이들은 1435년 순천 송광사에서 간행한 동국대학교 소장본과 1940년 이종욱(李鍾郁)이 편집하여 월정사에서 간행한 『나옹집』에 첨부되어 있다.
그리고 삼가의 각 제목에 대해서 게송(偈頌)으로 풀이하였는데, 「영주가(靈珠歌)」 76구(句)에 각
구절마다 3구 또는 4구의 게송을 붙였으며, 「백납가」와 「고골가」에는 각 3구씩 게송을 붙였다.
49.법전도림대종사(道林堂法傳 1925-2018)
[임종게]1946년 1월27일 원적에 들며 남긴 임종게
평생소양저(平生所養底) 평생에 나의 한 짓이
도재일단자(都在一單子) 표주박 하나뿐이네
절애무친소(絶愛無親소) 사랑도 끊고 친소도 없고
단단지자시(單單只者是) 오로지 다만 이것 밖에 없는 것을
내여명월래(來與明月來) 올 때에 명월과 더불어 오고
거수명월거(去髓明月去) 갈 적에 명월을 따라 가는가
거래본무실(去來本無實) 가고 옴이 본래 실속 없는데
실상금하재(實相今何在) 실상은 지금 어디 있는가
[대종사大宗師의 법명은 법전法傳, 법호는 도림道林이며 함자는 김향봉金香奉입니다.
1925년 음력 10월 8일 전남 함평군 대동면 연암리에서 김해김씨 시중공파侍中公派 원중 청신사와 경주최씨 호정 청신녀의 삼남일녀 중 셋째 아들로 출생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고, 1938년 14세 때 장성 백양사白羊寺 청류암淸流庵으로 출가하였습니다.
1941년 17세 때 영광 불갑사佛甲寺에서 은사 설제雪醍 스님· 계사 설호雪浩 스님으로 수계득도
受戒得度 하였으며, 백양사 강원講院에서 수학한 후, 해방 전 만암曼庵 스님의 고불총림古佛叢林
결사에 동참하셨습니다.
1948년 24세 때 문경 봉암사鳳巖寺 결사를 통해 성철스님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참선공부의 길로 들어섰고, 성철스님께서 1951년 통영 안정사安靜寺 천제굴闡提窟에서 스님께 도림道林이라는 법호를 내렸습니다. 1956년 문경 대승사大乘寺 묘적암妙寂庵에서 득력得力한 뒤, 1957년 33세의 나이에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서 성철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후 제방 수행처의 정진대중들은 스님께‘절구통 수좌’라는 별호를 붙여주었습니다.
1969년 45세 때 퇴락한 김천 수도암으로 거처를 옮겨 가람 중수와 선원 복원을 통해 많은 납자들을 제접했으며, 2006년 팔공산에 도림사를 창건하여 대가람으로 일구었습니다.
1967년 해인총림이 설치되면서 해인사와 인연을 맺고 1969년 유나維那소임을 맡아 초기 총림의 법도를 세웠으며, 1984년 해인총림 수좌首座소임을 맏았고 그뒤 주지, 부방장을 맡으셨습니다. 1996년부터 현재까지 방장方丈으로서 영일寧日이 없었습니다. 가람수호와 총림대중의 화합을 통해 수행가풍 진작에 진력하셨습니다. 선승禪僧으로써 매일 108배와 화두참선을 삶의 지남指南으로
삼았습니다. 도림당 법전 대종사께서는 2002년 대한불교조계종 제11대 종정, 2007년 제12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10년간 대임大任을 원만하게 회향하셨습니다.
2003년 『백천간두에서 한걸음 더』라는 법문집을 통해 간화선을 두루 선양하셨고, 2009년 자서전『누구 없는가』를 저술하여 스님의 진솔한 삶과 수행 흔적을 세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2014년 12월 23일(음력 11월 2일), 대구 환성산 도림사道林寺 무심당無心堂에서 원적에 드시니
법랍은 73년 세수는 90세였습니다. 이후 2018년 12월 열반 4주기를 맞아 상좌 스님들이 도림사
비림에 부도탑을 모셨다.
종정 법전스님의 수행과 깨달음의 자서전인 '누구 없는가' 이다
절구통수좌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참선수행으로 일관한 스님은 '수행자는 바보소리 등신소리 들어야 비로소 공부할수 있다' '바보처럼 꾸준히 가라 그래야 자신도 살리고 세상도 살릴 수 있다'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책 첫 장에 있는 글을 옮겨봅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이 있는데 사람이 걷지 않을 뿐이다
행복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에 있으며 그것은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수행이라는 길을 꾸준히 걸어보라
오래 하다 보면 틀림없이 들어가는 곳이 있다
반드시 깨칠 수 있으며 깨치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50.법정스님(法頂 1932-2010)
[오도송(悟道頌)]
산이건 물이건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이랴
흰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열반송涅槃頌] .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스님의 열반송은 2010년 임종한 지 8년 만에
미발표 원고 등을 책으로 낼 때 함께 공개됐다 . 그는
“분별하지 말라. 내가 살아온 것이 그것이다. 간다. 봐라”라고 했다.
[무주청화선사(無住淸華禪師 1923-2003) 열반송涅槃頌]
차세타세간(此世他世間) 이세상 저세상
거래불상관(去來不相關) 오고 감은 상관치 않으나 큰데
몽은대천계(夢恩大千界) 은혜 입은 것은 대천 세계 만큼
보은한세간(報恩恨細澗) 은혜 갚은것은 작은 시내 계천 같음 한스러워 하도다.
법정 스님(法頂, 1932~2010)은 한국을 대표하는 승려이자, 무소유의 철학을 실천한 사상가였다.
그는 193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954년 출가하여 불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속명은 박재철. 수십 권의 수필집을 통해 힘겨운 삶에 허덕이는 현대인에게 진정한 사유의 기쁨과 마음의 안식을 제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작가이자 '무소유'를 실천한 승려이다.
목포상업고등학교를 거쳐 전남대학교 상과대학에 진학했으나 3학년 때인 1954년 출가하여 통영 미래사(彌來寺) 효봉스님의 행자로 있다가 다음해에 사미계를 받고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으며,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지리산 쌍계사,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여러 선원에서 수련하였다.
1960년대 말 봉은사에서 동국역경원의 불교경전 번역작업에 참여했다. 이후 〈불교신문〉 편집국장, 역경국장을 지내다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서울 봉은사에서 운허스님과 불교경전 번역을 하던 중 함석헌·장준하·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1975년에 본래의 수행승으로 돌아가기 위해 송광사 뒷산에 손수 불일암(佛日庵)을 지어 혼자 지냈으나, 또다시 사람들이 찾아오자 1992년 제자들에게조차 거처를 알리지 않고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혼자 지냈다. 1993년 시민운동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소리없는 나눔을 실천했으며, 1996년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을 기부받아 1997년 12월 길상사를 개원한 이후에는 정기적으로 대중법문을 해왔다.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라는 청빈의 도를 실천하며 1976년 4월 산문집 〈무소유〉를 출간한 이후, 불교적 가르침을 담은 산문집을 잇달아 내면서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저서는 〈무소유〉 외에 〈서 있는 사람들〉·〈물소리 바람소리〉·〈산방한담〉·〈오두막 편지〉·〈텅 빈 충만〉·〈홀로 사는 즐거움〉 등의 산문집과, 명상집 〈산에는 꽃이 피네〉·〈아름다운 마무리〉, 잠언집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법문집 〈일기일회〉·〈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번역서 〈깨달음의 거울(禪家龜鑑선가귀감)〉·〈진리의 말씀(法句經법구경)〉·〈불타 석가모니〉·〈숫타니파타〉·〈인연이야기〉·〈신역 화엄경〉·〈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스승을 찾아서〉 등 30여 권에 달한다.
폐암으로 투병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마지막까지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다. 사후에 '더 이상 책을 출간하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들이 모든 책을 절판하기로 했다.
1994년에는 시민운동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었으며, 1996년엔 기생 출신으로 백석의 연인으로도 알려진 김영한으로부터 서울 도심의 요릿집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길상사로 고치고 회주가 되었다.
김영한은 10년 전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법정에게 자신의 전재산인 대원각 부지 7천여 평을 시주해 절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법정 본인은 10년 동안 받지 않고 버텼다. 그러다 1996년에야 시주를 받아들인 것. 이후 법정은 김영한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지어주었고, 김영한은 3년 뒤인 1999년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자신의 뼈를 길상사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후 유언대로 그녀의 유해는 길상사 경내에 뿌려졌으며 길상사에는 그녀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법정(法頂·78) 스님이 2010년 3월 11일 오후 1시 51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入寂)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법정 스님은 1954년 당대의 선승(禪僧) 효봉(曉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송광사·쌍계사·해인사 등에서 참선수행했다.
1960년대에 불경의 한글번역 사업에 참여했으며, 1970년대 들어서는 에세이와 저서를 통해 불교적 가치관을 독자들에 전하며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96년 김영한 보살로부터 서울의 대표적 요정이었던 대원각을 기증받아 2007년 길상사(吉祥寺)를 창건하고 시민운동단체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
[법정 스님은 수필집]
버리고 떠나기, 무소유, 산방한담(山房閑談), 아름다운 마무리, 산에는 꽃이 피네 등 20권이 넘는 대중저서를 출간해 불교계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자리매김했다.
1997년 창건한 길상사에서는 2003년까지 회주를 맡기도 했다.
생전에도 ‘무소유’를 강조하던 법정 스님은 ‘사리를 찾지도, 탑을 세우지도 말라,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법정 스님은 지난 2007년 폐암으로 항암 치료를 받았지만 2009년 재발해 그동안 삼성서울병원에서 투병해 오다가 이날 서울 성북동 길상사로 거처를 옮겨 열반에 들었다.
[조선일보 발췌]
51.벽안당법인선사(碧眼堂法印禪師 1901-1987)
[오도송(悟道頌)]
대도원래무계박(大道元來無繫縛) 대도는 원래 얽매임이 없으니
현기하처관형성(玄機何處關形成) 현묘한 기틀 어찌 모양에서 찾으랴
구순마검한상백(九旬磨劍寒霜白) 구순 안거에 서릿발 같은 지혜의 칼을 가니
격파조관각방행(擊罷祖關各方行) 조사관을 격파하고 마음대로 노닐리라
[열반송涅槃頌] [벽안당법인선사(碧眼堂法印禪師 1901-1987) 오도송(悟道頌)]
영취편운(靈鷲片雲) 영축산의 구름
왕환무제(往還無際) 오고 감에 때(時)가 없네
홀래홀거(忽來忽去) 홀연히 왔다가니
여시여시(如是餘時) 때가 이와 같네
[1901년 경북 월성군 내남면에서 부친 박순진(朴淳鎭) 선생과 모친 월성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스님은 35세 되던 해 금강산 마하연 석우스님 회상에서 정진하며 불가(佛家)와 인연을 맺었다.
제방선원에서 참구하던 스님은 3년 뒤 양산 통도사에서 경봉(鏡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 사문이 됐다. 43세에 부산 범어사 영명(永明)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통도사 주지를 두 차례 지냈으며, 원효학원 이사와 동국학원 이사로 인재불사를 실천했다.
동국학원(지금의 동국대) 이사장을 역임했고, 중앙종회 의장을 세 차례 지내며 종단의 기틀을 닦았다. 1966년에는 세계불교승가대회 한국불교대표로 참석했으며, 1980년에는 조계종 원로원장으로 추대됐다.
벽안스님 제자로는 지일.성묵(省).지한.지정.정각.성호.도훈.종범.정안.범하.지안.지춘.지관.성묵(性).
도승.인산.지준.도원.지견.지학.지태.법전.법선.법형.지근.지선.지철.지활 스님이 있다.]
통도사 주지를 두 차례 지낸 스님은 소임 보는데 엄격함을 우선 하면서도 자상한 마음으로 대중을 인도했다. 예불할 때 대중에 앞서 독송을 인도하는 ‘창불(唱佛)’은 주로 젊은 학인들이 소임을 본다. 창불을 잘한 이가 있으면, 예불이 끝난 후 방으로 불러 포장을 뜯지 않은 양말 한 켤레를 건넸다. 절집 살림이 넉넉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비록 양말 한 켤레였지만 격려의 마음을 담아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이무렵 통도사는 매일 아침 대중공양을 하면서 전날 학인들의 시험결과를 발표했다. 100점 맞은 학인이 있으면 “오늘 아침에 100점 맞은 사람 누군고. 오라해라”해서 메리야스를 선물로 주곤 했다. 하지만 공부를 못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쁜 사람들. 그리 공부 안하려면 시주 밥값 내 놔라.”
스님들이 마당 한켠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이때 벽안스님이 시자를 통해 한 장의 메모를 전해왔다. “풍문즉 정구를 친다고, 그래선 안 될 일이지.” 공부에 힘 써야할 스님들이 배드민턴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경책이었다. 한번은 학인이 종무소 직원 자전거를 타고 신평리까지 갔다가 벽안스님을 만났다. 절로 돌아온 스님은 강사를 불러 “아침에 자전거 타고 간 아이 누군가 조사해라. 그리고 그 아이 보내라”며 꾸중을 했다. 출가사문이 정진에 몰두하지 않고, 배드민턴이나 자전거를 타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스님의 뜻이었다.
벽안스님은 상하를 대할 때 언제나 예(禮)로서 맞이했다. 아무리 어린 사미라고 해도 함부로 ‘야, 자, 저’라고 하지 않고 여법하게 대했다. 세수 30세 정도 된 상좌가 통도사 강사(지금의 강주)를 맡아 법문을 할때 벽안스님은 다른 대중과 똑같이 삼배를 하고, 법문이 끝날 때까지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었다고 한다.
벽안스님 은사 경봉스님과 월하스님 은사 구하스님은 사형사제간 이었다. 구하스님이 사형이고, 경봉스님이 사제였다. 때문에 월하스님과 벽안스님은 세속으로 치면 사촌에 해당한다. 세수는 벽안스님이 위였지만, 촌수로 따지면 월하스님이 위였다. 어느 날 대중이 모든 모인 자리에서 월하스님이 말문을 열었다. “오늘부터 법당의 좌차(座次, 좌석의 차례)를 제일 상석에 벽안스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벽안스님은 “아닙니더. 그런 법이 어디 있는교. 별당(당시 월하스님이 머물던 요사채)스님이 앉으셔야 됩니다.” 이 같은 일화가 있을 정도로 월하스님과 벽안스님은 서로를 존중하고 아꼈다.
벽안스님은 은사 경봉스님과 불과 아홉 살 차이였다. 하지만 언제나 차수를 하고, 무릎 꿇은 채 은사의 말을 경청했다. 경봉스님이 만년에 몸이 불편하여 외출을 삼가고 있을 때. 벽안스님은 매일 아침 큰절에서 극락암까지 걸어와 문안을 드렸다. 지팡이를 쥐고 극락암에 도착한 벽안스님은 은사 스님이 주석하는 경내에는 지팡이를 짚고 들어가지 않았다. 암자 입구에 있는 감나무에 지팡이를 세워놓고, 들어갔다. 은사 계신 곳에 지팡이를 짚고 가는 것이 예의가 아니란 생각 때문이었다.
벽안스님은 금강산 마하연선원 석우(石友)스님 회상에서 정진했다. 당시 청담스님이 입승을 맡았고, 성철스님과 지월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이 생사를 걸고 공부하고 있었다. 식량과 땔감 등 동안거 결제 준비를 모두 마쳤다. 그런데 청담스님이 “아차, 하나를 빠트렸네”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벽안스님이 “무엇을 빠트리셨나요”라고 질문했다. “화목(火木)을 준비 못했네요” “밥 지을 나무와 땔감은 모두 해 놓았습니다.” “그게 아니고, 다비할 나무가 없어요.” 청담스님 말이 이어졌다. “이번 철에 모두 목숨을 떼 걸어놓고 정진할 텐데, 용맹정진하다 죽는 사람 안 나오라는 법이 없습니다.” 당시 초발심을 내고 마하연을 찾은 벽안스님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결국 그해 동안거는 밥 지을 나무와 땔감을 조금씩 아끼며 정진을 해야 했다.
“보살님, 법당에 가면 불전함이 있으니, 그곳에 넣으세요.” 당신을 찾아온 신도가 보시금을 드리자, 봉투를 다시 건네며 불전함에 넣으라고 했다. 청렴결백하게 살았던 스님의 삶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통도사 주지, 종회의장, 동국대 이사장 소임을 보았지만 스님은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했고, 당신 앞으로 일체 재산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남몰래 보시했을 만큼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지녔던 어른이다.
[출처]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8.벽안법인
52.벽허원조선사(碧虛圓照禪師 1657-1734)
[오도송悟道訟] 적일(赤日:붉은 햇빛)
사일천주각(斜日遷朱閣) 지는 햇빛은 붉은 누각에 비치고,
단운기옥봉(斷雲基玉峯) 끊어진 구름은 옥봉(玉峯)을 의지했네.
영요천고탑(鈴搖千古塔) 천고(千古)의 탑에서 방울소리 흔들리고,
회발백년송(匯(回)發百年松) 백년 뒤 소나무에 바람소리 웅웅거리네.
[선사의 법명은 원조(圓照), 법자는 한영(寒影), 법호는 벽허(碧虛),속성은 한씨(韓氏)다.
평양에서 아버지 응백(應白)과 어머니 최씨(崔氏) 사이에서 탄생하였다.
선사의 어머니께서 금까마귀 한쌍이 날다가 한 마리가 떨어져 품속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효종 9년(1675) 10월 10일 선사를 낳았다.
선사는 10세에 평양 태청산 석수암에 주석하고 계신 각형 장로에게 축발하였다.
선사는 삼장(三藏)의 법을 구하며 이교(二敎)도 익혔다.-중략-
이에 선사께서 호남 징광사(澄光寺)로 자리를 옮겨 선불장(選佛場)을 여시게 되었다.
선사께서 참활(參喝)하신다는 현응지영(縣鷹之鈴) 이 전국 곳곳으로 울렸다.
(현응지영(縣鷹之鈴): 사냥을 하는 매의 꼬리부분에 달린 방울,매가 움직일 때마다 방울이 울려 그 매의 소재를 알 수 있다. 여기서 선사께서 은거하여 살아도 소재를 알아 찾아온다는 뜻)
이에 사방에서 찾아오는 중생들과 수좌 대중들이 바닷물이 밀려오듯 구름이 몰려오듯 찾아와서 “원하옵니다. 선열(禪悅)을 베푸시어 우리의 주린 배를 채워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깨달음을 일깨워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이에 선사께서 크게 가르침을 허락하시여 천엽잡화(千葉雜花)의 도량을 여니 보광명전(普光明殿)처럼 방불하였다.
선사의 덕은 사생(四生 :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을 도와 이것저것 따질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자비는 삼라만상을 덮었다.
또한 선사의 가르침에는 사생(四生)과 만유(萬有)가 하나 되어 삼여(三餘)가 없었다.
{삼여(三餘): 겨울은 년(年)의 나머지, 밤은 날(日)의 나머지, 흐리고 비가 오는 것은 시(時)의 나머지이다.
학문은 남는 시간에 하여도 충분하다는 옛 위략독서(魏略讀書)편의 마땅히 세 가지 남음으로써 해야 한다. 는 당이삼여(當以三餘)라는 뜻}
영조11년(1753) 묘향산 동산사(東山寺)에서 세수 78세, 법랍 67세로 입적하였다.
53.보조지눌국사(普照知訥國師 1158-1210)목우자牧牛子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보조국사 지눌스님께서 송광사에 처음 오실 때 짚고 오신 지팡이를 꽂으시며 남기신 시.]
이아동생사(爾我同生死) 너와 나는 같이 살고 죽으니
아사이역연(我謝爾亦然) 내가 떠날때 너도 떠나고
회간이청엽(會看爾靑葉) 너의 푸른 잎을 다시 보게 되면
방지아역연(方知我亦然) 나도 그런 줄 알리라
[고려 중엽 제18대 의종 12년(1158) 황해도 서흥군 동주에서 당시 국학國學(지금의 대학이나 대학원과 같은 기관. 신라나 고려에서 쓰던 이름. 조선시대 성균관에 해당)의 학정學正(국학 및 성균관의 정 8품 벼슬)인 정광우鄭光遇를 아버지로 조씨를 어머니로 하여 황해도 서흥(瑞興)에서 태어났다.
8세 또는 15-20세 사이에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闍崛山(강릉시 명주군 구정면 학산리)에 있는 굴산사崛山寺(신라 문성왕 13년인 851년에 범일국사梵日國師가 개산)의 종휘宗暉 선사에게서 출가하였다. 25세(1182)에 개경의 보제사普濟寺에서 담선법회談禪法會로 승과僧科에 합격하였다.
스님의 나이 31세(1188) 되던 해 봄 대구 팔공산八空山 거조사居組寺에서 옛 동지 3,4인으로 정혜사定慧社를 결성하고, 2년 후인 33세 때에 거조사에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공포하였다.
결사문에서 어떠한 종파적 편향의 기미도 느낄 수 없다. 선禪과 교敎 또는 유가儒家와 도가道家를 불문하였다. 팔공산 거조사는 도량이 협소한데, 대중은 많아지므로 새 도량을 찾아, 명종 27년(1197년) 스님의 나이 40세에 제자를 보내어 당시 신라의 고찰 송광산 길상사를 확장 중건하기 시작하였다.
보조국사(1158∼1210)는 고려시대 송광사 16국사 가운데 제1세로 정혜결사를 일으킨 주인공이다. 당시 고려후기 불교계에 새로운 정신개혁 운동을 전개한 선봉자로서 한 시대의 부패한 현실을 정의롭게 이끌고자 했던 종교지도자였다.
제자로는 혜심(惠諶)·몽여(夢如)등 수백 명이 있다. 죽은 뒤 문도들이 시신을 화장하고 수선사 북쪽에 탑을 세워 사리를 안치했다. 사후에 국사로 추증되었으며, 김군수(金君綏)가 비문을 지었다.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이다.]
저서로는 〈권수정혜결사문〉 1권, 〈진심직설 眞心直說〉 1권, 〈수심결 修心訣〉 1권, 〈계초심학인문 誡初心學人文〉 1권, 〈원돈성불론 元頓成佛論〉 1권, 〈화엄론절요 華嚴論節要〉 3권, 〈간화결의론 看話決疑論〉 1권,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1권, 〈염불요문 念佛要門〉 1권, 〈육조단경발문 六祖壇經跋文〉 1편(이상은 현존함), 〈상당록 上堂錄〉 1권, 〈상당가송 上堂歌頌〉 1권, 〈목우자시집 牧牛子詩集〉 1권(이상은 전하지 않음) 등이 있다.
[선사께서는 타계하던 날 새벽 목욕재계하고 법당에 올라가 향을 사르고 큰 북을 쳐 송광사내 대중을 법당에 운집시켰다. 그리고는 육환장을 들고 법상에 올라 제자들과 일문일답으로 자상하게 진리에 대한 대담을 계속하였다.
마지막으로 한 제자가 “옛날에는 유마거사가 병을 보이었고 오늘은 스님께서 병을 보이시니 같습니까, 다릅니까” 라고 물었다. 같은가 다른가 하는 질문은 선가에서 진리를 시험해 보는 질문이다. 임종이 가까운 스승께 이렇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의 세계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 대하여 지눌은 육환장을 높이 들어 법상을 두어 번 내리친 다음
“일체의 모든 진리가 이 가운데 있느니라” 하고는 법상에 앉은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지눌스님 성은 정씨(鄭氏). 호는 목우자(牧牛子). 아버지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을 지낸 광우(光遇)이고,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다. 8세 때 선종 사굴산파의 종휘(宗暉)에게 출가했다. 이후 일정한 스승을 따르지 않고 배움에 정진했다. 1182년(명종 12)에 승과에 합격했다.
이무렵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했다가, 동료들과 함께 후일 결사(結社)를 하기로 약속했다. 곧이어 남쪽 지방으로 내려와 창평 청원사(淸源寺)에 머물 때 〈육조단경 六祖壇經〉을 읽고 처음 깨달음을 얻었다. 1185년에는 예천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로 가서 3년간 대장경을 열람했는데, 이때 〈화엄경 華嚴經〉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과 이통현(李通玄)의 〈화엄신론 華嚴新論〉을 읽고 선(禪)과 교(敎)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니, 이것이 2번째 깨달음이었다.
1190년 몽선화상(夢船和尙)과 함께 팔공산(八公山) 거조사(居祖寺)로 옮겨가 동지들을 불러모은
다음 예전에 약속했던 결사를 실행했다. 결사의 이름은 '정혜'(定慧)라 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반포했다. 정혜결사를 시작한 지 8년 만에 왕족과 관료를 비롯하여 수백 명의 승려들이 결사에 동참했다. 그러나 결사원 사이에 분쟁이 생기고 결사정신이 지켜지지 않자, 1197년에 거조사를 떠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은둔했다.
여기서 오로지 수행에 정진했는데, 하루는 〈대혜어록 大慧語錄〉을 보다가 3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그후 수행인이 차츰 모여들자 결사를 새로 시작하고자 제자 수우(守愚)를 보내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를 중창하게 했다. 1200년(신종 3) 정혜결사를 거조사에서 길상사로 옮기고 이후 11년간 그곳에 머무르며 결사운동에 정진했다.
1205년(희종 1)에 길상사가 준공되자 왕은 이름을 '조계산수선사'(曹溪山修禪社)로 고치게 하고
가사를 하사했으며 120일 동안 낙성법회를 열게 했다. 지눌이 이곳에서 교화를 시작하자 그의 인격에 감화되어 왕공(王公)과 사서(士庶)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결사에 동참했다.
지눌은 이들에게 〈금강경 金剛經〉을 읽도록 권하고 〈육조단경〉의 이치를 가르쳤으며, 〈화엄신론〉과 〈대혜어록〉으로 보조교재를 삼았다. 억보산(億寶山) 백운정사(白雲精舍), 적취암(積翠庵), 서석산(瑞石山) 규봉난야(圭峰蘭若), 조월암(祖月庵)도 모두 지눌이 개창하여 선을 수행하는 도량으로 삼은
곳이다. 1210년 3월 법당에서 문도들과 대화를 나눈 직후 입적했다.
[출처:daum백과]
54.보화선사(普化禪師 ?~861)
[오도송(悟道頌)]
명두래명두타(明頭來明頭打) 밝음에서 오면 밝음으로 치고
암두래암두타(暗頭來暗頭打) 어둠에서 오면 어둠으로 치고
사방팔면래선풍타(四方八面來旋風打) 사방팔면에서 오면 회오리바람 일으켜 치고
허공래연가타(虛空來連架打) 허공에서 오면 도리깨로 친다.
[보화선사(普化禪師)는 마조도일선사(馬祖道一禪師)의 법사(法嗣)인 반산보적(盤山寶積) 선사의
제자(弟子)다. 확철대오(廓徹大悟)한 선승(禪僧)이다. 기행(奇行) 이적(異蹟)으로 한평생을 살다간
허무승(虛無僧)의 비조(鼻祖)다. 머리는 있어도 꼬리는 없고, 처음은 있어도 끝이 없다는 세평(世評)을 받고도 갖가지 도화(道化)를 남긴 채 당시대(唐時代) 걸승(傑僧)이다.
임제의현선사(臨濟義玄禪師)가 화북진주 땅에 주석할 때 극부(克符)라는 도반(道伴)과 함께 그곳에서 오래 머물면서 임제선법(臨濟禪法)을 크게 도왔다. 보화선사 오도송(悟道頌)은 선림(禪林)에서 백미(白眉)로 꼽는다.
보화선사(普化禪師)는 반산 보적(盤山寶積)선사의 제자로 항상 미친 사람같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교화했다. 보화선사(普化禪師) 기행(奇行)을 그 당시 누구도 이해(理解)해준 사람은 없었으나 임제선사(臨濟禪師)만 알아주고 흉 허물없이 지냈다고 한다.]
55.부대사(傅大士 497-569) [선혜대사(善慧大師)동양대사(東陽大士)]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 아침마다 함께 일어나네
기좌진상수(起坐鎭相隨) 앉으나 서나 늘 따라다니고
어묵동거지(語默同居止) 말할 때나 안 할 때나 함께 있으며
섬호불상리(纖毫不相離) 털끝만큼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여신영상사(如身影相似) 몸에 그림자 따르듯 하는구나
욕식불거처(欲識佛去處) 부처님 간데 알고자 하는가?
지저어성시(只這語聲是) 다만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네
공수파서두(空手把鋤頭) 빈손에 호미를 들고
보행기수우(步行騎水牛) 걸으면서 물소를 탄다.
인종교상과(人從橋上過)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나는데
교류수불류(橋流水不流) 다리는 흘러도 물은 흐르지 않네.
섬호불상리(纖毫不相離) 털끝만치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여신영상사(如身影相似) 몸에 그림자 따르듯 하는구나.
욕식불거처(欲識佛去處) 부처가 간 곳 알고자 하는가?
지저어성시(只這語聲是) 단지 이 말소리 나는 곳이 부처이로세.
[傅大士부대사.양나라 무제(武帝) 서기 497-569년]
[부대사(傅大士)는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 양(梁)~진(陳) 시대에 살았던 재가불자로서 절강성
(浙江省)의 동양(東陽) 출신으로 성(姓)은 부(傅), 이름은 흡(翕), 자(字)는 현풍(玄風), 호는 선혜(善慧)라고 했다.
부대사라는 별칭 이외에 선혜대사(善慧大士), 쌍림대사(雙林大師), 동양거사(東陽居士)라고도
한다. 이때의 대사(大士)는 보살의 별칭이다. 달마(達磨?~536?)대사ㆍ지공(誌公418~514) 화상과 함께 양대 삼대사(梁代三大士)로 일컬어지고 거침없는 수행으로 출가자와 재가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양무제(梁武帝)를 귀의시켜 중국불교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비승비속(非僧非俗)으로 특이하게 살면서 불법에 뜻을 두어 크게 도인 풍을 드날린 사람이었다.
부대사어록傅大士語錄) 4권과 심왕명(心王銘) 1권이 전해지고 있다.]
부대사(傅大士)는 중국 양나라 말의 재가법사(在家法師)로 거침없는 수행으로 출가자(出家者)와 재가자(在家者)들로부터 존경(尊敬)을 받았다. 특히 양무제를 귀의(歸依)시켜 중국 불교(佛敎) 발전에 기여하였다.
부대사(傅大士)는 24세 때 숭두타에게 출가(出家)하여 송산의 쌍림(雙林)에 암자(庵子)를 짓고
살았으므로 쌍림대사(雙林大士)라 부르기도 하고 동양(東陽) 출신이라 동양대사(東陽大士)라
부르기도 했다.
동 시대(時代)의 보지공(寶誌公) 화상(和尙)이 양 무제에게 미륵(彌勒)의 화신(化身)이라 소개한 적이 있었다. 만년에 재가법사(在家法師)로 생활하면서 대도인(大道人)의 풍모(風貌)를 널리
드날리다 종산 정림사에서 입적(入寂)했다
부대사어록傅大士語錄) 4권과 심왕명(心王銘) 1권이 전해지고 있다
[傅大士부대사.양나라 무제(武帝) 서기 497-569년][선혜대사(善慧大師)동양대사(東陽大士)]
★ 임제 의현 스님의 스승인 황벽 희운선사(黃蘗禪師)가 심왕명(心王銘)을 본 후에
후학(後學)들에게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이 법음(法音)을 누가 이해(理解)하겠나? 상근기(上根機)가 비춰볼 거울이다!"
[심왕명(心王銘)]
관심공왕(觀心空王) 마음인 공왕(空王)을 관찰하니
현묘난측(玄妙難測) 그윽하고 묘하여 측량하기 어려워
무형무상(無形無相) 형체도 없고 모양 없으나
유대신력(有大神力) 크나 큰 신통력을 가졌음이네
능멸천재(能滅千災) 능히 온갖 재앙 소멸시키고
성취만덕(成就萬德) 온갖 공덕을 성취시키누나
체성수공(體性雖空) 체성은 비록 공하지만
능시법측(能施法則) 능히 온갖 법칙 이루어내네
관지무형(觀之無形) 관해 보면 모양은 없지만
호지유성(呼之有聲) "아무개야" 부르면 대답은 있어
위대법장(爲大法將) 위대한 법의, 장군이 되어
심계전경(心戒傳經) 마음의 계(戒)로써 경을 전하네
수중염미(水中鹽味) 물속에 소금의 맛이요
색리교청(色裏膠淸) 단청 속에 맑은 아교로다
결정시유(決定是有) 분명히 존재해도
불견기형(不見其形) 그 형체를 볼 수가 없듯이
심왕역이(心王亦爾) 심왕도 이와 같아서
신내거정(身內居停) 몸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면문출입(面門出入) 늘 얼굴로 드나들면서
응물수정(應物隨情) 사물에 응하고 생각(情識)을 냄에
자유자재(自由自在) 자유자재로 걸림이 없어서
소작개성(所作皆成) 행하는 바가 모두 이루어진다
요본식심(了本識心) 근본을 밝히면 마음을 알고
식심견불(識心見佛) 마음을 알면 부처를 보게 된다
시심시불(是心是佛) 마음이 바로 부처이며
시불시심(是佛是心) 부처가 바로 마음이다
념념불심(念念佛心) 생각 생각이 부처의 마음이니
불심념불(佛心念佛) 부처의 마음으로 부처를 생각한다
욕득조성(欲得早成) 공부를 빨리 성취하고자 한다면
계심자율(戒心自律) 계율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정율정심(淨律淨心) 청정한 계율은 바로 청정한 마음이니
심즉시불(心卽是佛)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제차심왕(除此心王) 이 심왕(眞如)을 제외하고서는
경무별불(更無別佛) 다시 다른 부처는 없도다
욕구성불(欲求成佛) 부처가 되기를 원한다면
막염일물(莫染一物) 한 물건에도 물들지 말라
심성수공(心性雖空) 마음의 본성은 비록 텅 비었어도
탐진체실(貪瞋體實) 탐, 진, 치의 체는 실제(實際)하도다
입차법문(入此法門) 이 법문에 들어와서
단좌성불(端坐成佛) 단정히 앉으면 부처가 되어
도피안이(到彼岸已) 저 해탈의 언덕에 이르면
득바라밀(得波羅蜜) 바라밀을 얻을 것이다
모도진사(慕道眞士) 도를 사모하는 참된 보살은
자관자심(自觀自心)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본다
지불재내(知佛在內) 부처는 내면에 있다는 것을 알면
불향외심(不向外尋) 밖을 향하여 찾지 않을 것이다
즉심즉불(卽心卽佛) 마음이 바로 부처이며
즉불즉심(卽佛卽心) 부처가 바로 마음이다
심명식불(心明識佛) 마음이 밝아지면 부처를 알게 되나니
효료식심(曉了識心) 마음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이심시불(離心非佛)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도 없으며
이불비심(離佛非心) 부처를 떠나서는 마음도 없다
비불막측(非佛莫測) 마음이 부처가 아니라면, 헤아릴 수도 없고
무소감임(無所堪任) 견줄만한 것도 없다
집공체적(執空滯寂) 텅 빔에 집착하고 고요함에 정체되면
어차표침(於此漂沈) 이에 이리저리 떠돌게 될 것이다
제불보살(諸佛菩薩) 모든 부처와 보살은
비차안심(非此安心) 이 편안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명심대사(明心大士) 마음을 훤출히 밝힌 대보살은
오차현음(悟此玄音) 이 현묘한 법문을 깨닫는다
신심성묘(身心性妙) 몸과 마음의 본성은 묘(妙)하여
용무경개(用無更改) 사용함에 다시 고칠 것이 없다
시고지자(是故智者) 이런 까닭에 지혜로운 자는
방심자재(放心自在) 마음을 풀어 놓아도 자유자재하다
막언심왕(莫言心王) 심왕(眞如)에 대해
공무체성(空無體性) 텅 비어서 실체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능사색신(能使色身) 능히 색신을 부려서
작사작정(作邪作正) 삿된 일도 짓고 바른 일도 짓는다
비유비무(非有非無)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
은현부정(隱顯不定) 숨고 드러남이 일정하지 않다
심성이공(心性離空) 마음 본성은 텅 비어 없는 것이 아니니
능법능성(能凡能聖) 능히 중생도 되고 성자도 된다
시고상권(是故相勸) 이런한 까닭에 서로 권하니
호자방신(好自防愼) 스스로 방비하고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찰라조작(刹那造作) 잠깐이라도 조작한다면
환부표침(還復漂沈) 도리어 다시 생사의 바다에서 떠돌게 될 것이다
청정심지(淸淨心智) 청정심(淸淨心)의 지혜는
여세황금(如世黃金) 세상의 황금과 같다
반야법장(般若法藏) 지혜로운 진리의 창고는
병재신심(並在身心) 몸과 마음에 아울러 존재한다
무위법보(無爲法寶) 함이 없는 법(眞理)의 보물은
비천비침(非淺非沈) 얕지도 않고 깊지도 않다
제불보살(諸佛菩薩) 모든 불보살은
료차본심(了此本心) 본래의 이 마음을 깨달았을 뿐이니
유연우자(有緣遇者) 인연이 있어서 이 법을 만나는 이는
비거래금(非去來今)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없을 것이다.
56.부설거사(浮雪居士, 6??~6??신라시대)
[열반송涅槃頌]
목무소견무분별(目無所見無分別) 보는 것이 없으니 분별이 없고
이청무성절시비(耳廳無聲絶是非) 듣는 바가 없으니 시비가 일지 않는다
분별시비도방하(分別是非都放下) 분별 시비 다 내려놓고
단간심불자귀의(但看心佛自歸依) 내 마음 부처님께 귀의할 뿐
[오도송(悟道頌)] [부설거사(浮雪居士 6??~6??신라시대 열반송涅槃頌)]
공파적공쌍거법(共把寂空雙去法) 공적의 오묘한 법 함께 놓아버리고
동서운학일간암(同棲雲鶴一間菴) 한 칸 암자에 구름과 학과 함께 사노라
이화불이귀무이(已和不二歸無二) 둘이 아님을 알고나니 둘이 없구나
수문전삼여후삼(誰問前三輿後三) 뉘라서 전후삼삼 물어오는가
한간정중화염염(閑看靜中花艶艶) 한가로이 정원에 곱게 핀 꽃 바라보고
님영창외조남남(任聆窓外鳥喃喃) 창밖에 재잘대는 새소리를 듣는다
능금직입여래지(能今直入如來地) 곧바로 여래지에 들수 있는데
하용구구구력참(何用區區久歷參) 구구히 오래도록 무엇을 참구하랴
*남남(喃喃): 혀를 빨리 돌려 알아들을 수 없게 재잘거림 이나 재잘거리는 소리
[사부시(四浮詩)][부설거사(浮雪居士 6??~6??신라시대 열반송涅槃頌)]
처자권속삼여죽(妻子眷屬森如竹) 사랑하는 처자와 권속, 대숲처럼 빽빽이 둘러있고
금은옥백적여구(金銀玉帛積如坵) 금은보석 보배들이 산더미 같이 쌓였어도
임종독자고혼서(臨終獨自孤魂逝) 죽을 땐 오직 홀로 외로운 넋만 떠나가니
사량야시허부부(思量也是虛浮浮) 생각하여 헤아리면 이 모두 헛되고 덧없네
조조역역홍진로(朝朝役役紅塵路) 날마다 번거롭고 속된 세상사에 매달리어
작위재고이백두(爵位纔高已白頭) 벼슬 겨우 높아지니 어느새 머리는 허얗구나
염왕불파패금어(閻王不怕佩金魚) 염라대왕은 벼슬아치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사량야시허부부(思量也是虛浮浮) 생각하고 헤아리면 이 모두도 헛되고 덧없네
금심수구풍뇌설(錦心繡口風雷舌) 아름다운 마음과 뛰어난 글재주, 혼을 빼는 말솜씨
천수시경만호후(千首詩經萬戶侯) 천편 시와 문장 수많은 사람 호령하는 제후의 권력
증장다생인아본(增長多生人我本) 여러 생에 걸쳐 나 잘났다는 생각만 더욱 늘어나니
사량야시허부부(思量也是虛浮浮) 생각하고 헤아리면 이 모두 헛되고 덧없네
가사설법여운우(假使說法如雲雨) 설법이 아무리 뛰어나 구름과 비를 부르고
감득천화석점두(感得天花石點頭)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돌조차 알고 머리를 끄덕여도
건혜미능면생사(乾慧未能免生死) 껍데기 지혜로는 생과 사의 고통을 면치 못하리니
사량야시허부부(思量也是虛浮浮) 생각하고 헤아리면 이 모두 헛되고 덧없네
[부설거사 팔죽시(浮雪居士八竹詩)][부설거사(浮雪居士 6??~6??신라시대)]
차죽피죽화거죽(此竹彼竹化去竹) 이러면 이런대로 저러면 저런대로 되어 가는대로
풍타지죽랑타죽(風打之竹浪打竹) 바람불면 부는대로 물결치면 치는대로
죽죽반반생차죽(粥粥飯飯生此竹)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사는 형편대로
시시비비간피죽(是是非非看彼竹) 옳으면 옳은대로 그르면 그른대로 보이는 그대로
빈객접대가세죽(貧客接待家勢竹) 손님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시정매매세월죽(市政買賣歲月竹) 세상물건 사는대로 파는대로 그때 시세대로
만사불여오심죽(萬事不如吾心竹) 세상만사 내맘대로 안되면 안되는대로
연연연세과연죽(然然然世過然竹) 그러면 그런대로 그렇다면 그런대로 세상따라 살자.
[부설거사의 팔죽시를 네자로 줄이면?허허실실(虛虛實實)이다.
허허실실(虛虛實實)이란 "되면 좋고 안되어도 그만인 식으로"의 뜻이다]
[부설거사는 신라 선덕여왕 시대의 거사이다. 성은 진(陳)씨, 이름은 광세(光世)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불국사 원정(圓淨)에게 득도했는데 도반인 영희(靈熙)ㆍ영조(靈照)와 함께
오대산으로 수행하러 가던 길에 전북 김제의 구무원(仇無怨)댁에 머물렀다가 그 여식 묘화(妙花)와 혼인하여 망해사(望海寺)에서 수행했다.
후일 영희, 영조가 찾아왔을 때 부인과 함께 도를 이루고 있었고 아들 등운(登雲)은 공주 계룡산 등운암
딸 월명(月明)은 부안 변산 월명암에 각각 출가하여 도를 이루었다.
흔히 인도의 유마(維摩)거사와 중국의 방(龐)거사와 함께 대표적인 거사로 불린다
17세기에 필사된 한문소설 《부설전(浮雪傳)》이 전라북도유형문화재 140호로 부안면사무소에 전하는데 이에는 세 도반이 주고받은 게송(偈頌)과 부록으로 팔죽시(八竹詩) 등이 수록되어 있다.]
[부설거사로 널리 알려진 우리 나라 대표적인 거사(居士)이다. 성은 진씨(陳氏), 이름은 광세(光世), 자는 의상(宜祥). 경상북도 경주 출신. 신라 선덕여왕 때 태어났으며, 어려서 출가하여 경주불국사에서 원정(圓淨)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영희(靈熙) · 영조(靈照) 등과 함께 지리산 · 천관산(天冠山) · 능가산(楞伽山) 등지에서
수 년 동안 수도하다가 문수도량(文殊道場)을 순례하기 위하여 오대산으로 가던 중,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만경들판이 있는 두릉(杜陵)의 구무원(仇無寃)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 집에 있는 18세의 딸 묘화(妙花)는 나면서부터 벙어리였으나 부설의 법문을 듣고 말문이 열렸으며, 그 때부터 부설을 사모하여 함께 살고자 하였다. 부설이 승려의 본분을 들어 이를 거절하자 묘화는 자살을 기도하였다.
이에 부설은 ‘모든 보살의 자비는 중생을 인연따라 제도하는 것’이라 하여 묘화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15년을 살면서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은 뒤 아이들을 부인에게 맡기고 별당을 지어 수도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영희와 영조가 부설을 찾아왔을 때 세 사람은 서로의 도력을 시험하였다. 질그릇 병 세 개에 물을 가득 채워서 대들보에 달아두고 병을 돌로 쳐서 물이 흘러내리는지 아닌지로 도력을 가늠하기로 하였다.
영희도 영조도 병을 돌로 치자 물이 흘러내렸지만 부설이 그 병을 치자 병은 깨어졌으나 물은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부설은 참된 법신에 생사(生死)가 없다는 것을 밝히는 설법을 한 뒤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단정히 앉아서 입적(入寂)하였다.
영희와 영조가 다비(茶毘)하여 사리를 변산 묘적봉(妙寂峰) 남쪽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아들 등운과 딸 월명은 그 때 출가, 수도하여 도를 깨우쳤으며, 부인 묘화는 110세까지 살다가 죽기 전에 집을 보시하여 절을 만들었다. 이 전기는 조선 후기에 편찬한 『영허대사집(暎虛大師集)』 속에 수록되어 있다. [출처:한국민속문화대백과]
57.부용도해선사(芙蓉道楷禪師 1042-1118)
[심행처멸(心行處滅)]
空費悠悠憶少林(공비유유억소림 )부질없이 소림(중국에 있는 절)만을 생각하다
因循衰鬢到如今(인순쇠빈도여금) 어느덧 구레나룻은 희끗희끗
毘耶昔一無成臭(비야석일무성취) 비야리(毘耶離)의 옛날은 소리도 냄새도 없고
摩竭當年絶響音(마갈당년절향음) 마가다(摩竭陀)의 음향은 끊어졌어라
似杌能防分別意(사올능방분별의) 말뚝인 양 앉아 있으니 일 체분별 사라지고
如癡必禦是非心(여치필어시비심) 바보처럼 지내라노니 시비심 일지 않네
故將忘計飛山外(고장망계비산외) 헛된 생각 일랑 산문 밖으로 날려 보내고
終日忘機對碧岑(종일망기대벽잠) 온종일 세사(世事)를 잊고 푸른 산만 마주한다
*비야리(毘耶離)부처님 열반후 불교가 크게 펼쳐진 곳
*마가다(摩竭陀)불멸 후 처음으로 불교가 펼쳐진 곳
[열반송涅槃頌]
오년칠십륙(吾年七十六) 내 나이 일흔여섯
세연금이족(世緣今已足) 세상인연 다했네
생불애천당(生不愛天堂) 살아서는 천당을 좋아하지 않았고
사불파지옥(死不怕地獄) 죽어서는 지옥을 겁내지 않네
[부용도해(芙蓉道楷)스님은 투자스님의 법제자로 법명은 도해(道楷)이며, 기주 자씨(沂州雌氏) 자손이다. 중국 중세기 북송(北宋)때 조동종(曹洞宗)의 위대한 선사입니다.
이 스님은 청백하고 도행(道行)이 높아, 총림(叢林)에는 물론이요 도속(道俗)이 존경하므로, 당시 휘종(徽宗)황제가 자가사(紫袈裟) 즉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당호를 하사했는데, 받지를 않고 되돌려 보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자기가 유명한 선사라 하더라도 감격을 하면서 받아야 할 것인데, 몇 번 간청을 해도 사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그 벌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귀양도 참 별난 귀양이지 않습니까? 한 오 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그곳에 수 백 명의 학도들이 모여 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되니, 황제는 뉘우치고 화엄선사(華嚴禪寺)라는 절 이름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유명한 스님입니다.
58.부휴선수선사(浮休善修禪師 1543-1615)
[열반송涅槃頌]
칠십여년유환해(七十餘年遊幻海) 칠십여년 꿈과 같은 바다에서 놀다가
금조탈각반초원(今朝脫却返初源) 오늘 아침 이 몸 벗고 근원으로 돌아가네
확연공적본무물(廓然空寂本無物) 텅 비어 적적하여 한 물건도 없나니
하유보리생사근(何有菩提生死根) 어찌 깨달음과 나고 죽음이 따로 있겠는가
[오도송悟道頌)]
백세광음여과극(百歲光陰如過隙) 백년이란 세월이 문틈을 지나는것과 같은데
하능구주재인간(何能久住在人間) 어찌 인간 세상에 오래 머물수 있으리요
의수강건수근주(宜隨强健須勤做) 마땅히 젊고 건강할때 부지런히 해야 하나니
생사임시불자한(生死臨時不自閑) 생사가 갈릴 때는 스스로 한가하지 못하리라
허부광음진가석(虛負光陰眞可惜) 헛되이 세월을 보내는 것이 참으로 애석 하니
세간인로시비중(世間人老是非中) 세상 사람들은 시비 속에 늙어 가네
불여단좌포단상(不如端坐蒲團上) 차라리 단정히 부들방석 위에 앉아
근주공부계조풍(勤做功夫繼祖風) 부지런히 공부하여 조사의 가풍 잇는것이 나으리라
[오도송悟道頌] (천지심天地心 하늘과 땅과 나의 한 마음)
추산소우과(秋山疎雨過) 가을 산중에 비가 지나갔나니
상엽락정태(霜葉落庭苔) 서리 맞은 잎이 앞뜰 이끼 위에 떨어지네.
백견통소식(白犬通消息) 하얀 개에게 소식을 전하고
파선어학래(罷禪御鶴來) 선정에서 깨어나 학鶴을 타고 오도다.
►토굴에 함께 있던 개가 낙엽을 물고 오는 것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설월삼경야(雪月三更夜) 눈 희고 달 밝으니
관산만리심(關山萬里心) 고향 생각 끝이 없네
청풍한철골(淸風寒徹骨) 방이 싸늘해 잠 못 이루고
유객독침음(遊客獨沈吟) 나그네 외로이 밤을 지세네
[별천지別天池]
일소즉상친(一笑卽相親) 한번 웃고 바로 친해져버리고
절차우일신(切磋又日親) 갈고 닦으니 또 날로 새롭구나.
홀종운귀거(忽從雲外去) 홀연 구름을 따라 멀리하듯 가버리니
장단초산춘(腸斷楚山春) 초산의 봄은 몹시 슬퍼 창자가 끊어진듯하오.
[浮休禪師는 속성이 김씨이고 법명은 善修이며 호는 浮休로 전북 獒樹(지금의 남원) 사람이다.
부친의 이름은 積山으로 조상은 일찍이 신라 조정에 높은 벼슬을 지낸 대성이었지만 신라가 멸망하면서 가족도 몰락하여 서민이 되었다고 한다.
松廣寺嗣院事蹟碑를 보면, 臨濟禪師로부터 18대를 전하여 石屋淸珙에게 법이 전해졌고, 이 법을 고려의 太古普愚선사가 전해 받았으며, 다시 여섯 번 전승되어 부휴선사에게 이어졌다고 한다.
또한 송광사 開倉碑에서 말하기를, “고려승 보우가 중국 가무산에 들어가 석옥청공선사의 회상에 참여하였는데, 淸珙은 임제의 18대 嫡孫인 바, 보우가 이 법을 남김없이 증득하여 幻庵混修에게 전했다. 혼수는 龜谷覺雲에게, 각운은 登階淨心에게 전했으며, 정심은 碧松智嚴에게, 지엄은 芙蓉靈觀에게,
그리고 영관은 상족제자에게 전했는데 그 이름이 善修이고 자호는 부휴인 바 內典을 모두 꿰뚫어 一代의 宗師가 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부휴선사가 서산대사와 동문의 형제임을 알 수 있음과 동시에, 임제선사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선종의 골수 법맥을 계승한 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사상적 핵심은 문자의 소전을 뛰어난 格外禪道理를 종지로 삼고 있다.]
광해군 6년 庚寅에 선사는 72세가 되어 송광사로부터 쌍계사 · 칠불암으로 갔는데, 이는 입적할 땅을 정하기 위함이었다. 다음 해 7월에 가벼운 병증세를 보이더니 上足제자 碧巖覺性을 불러 간절히 법을 부촉하였다. 11월 1일 午時에 목욕을 마치고 시자를 불러 지필을 가져오도록 하여 하나의 게송을 썼다.
‘七十三年을 幻海에 노닐다가 오늘 껍질을 벗고 初源으로 되돌아간다.
廓然空寂하여 원래 一物도 없거니 어찌 菩提와 생사의 뿌리가 있으랴.’
쓰기를 마치고 조용히 遷化하니 나이 72세 法臘이 57세였다. 저서로는 <부휴당대사집>이 있다
59.사명대사(四溟大師 1544-1610) (종봉유정선사鍾峯惟政禪師)
[오도송(悟道頌)]
일태공간무진장(一太空間無盡藏) 일태는 공간이요, 다함이 없고
적지무취우무성(寂知無臭又無聲) 적지(寂知)는 냄새도 없으며 또한 소리도 없도다
지금청설하번문(只今聽說何煩問) 지금 말을 듣고 어찌 번거롭게 묻는가
운재청천수재병(雲在靑天水在甁) 구름은 청천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느니라
[서광(西光 부처님의 광채)][사명대사(四溟大師 1544-1610)] (종봉유정선사鍾峯惟政禪師)
서풍취동우초헐(西風吹動雨初歇) 서쪽 바람이 불어오자 비로소 비 개이니
만리장공무편운(萬里長空無片雲) 높고 넓은 하늘에 한 조각 구름도 없다
허실호거관중묘(虛室戶居觀衆妙) 빈 선실에 고요히 앉아 모든 묘리를 생각하니
천향계자락분분(天香桂子落粉紛) 천향의 계수 열매가 어지럽게 떨어지네
[운향(雲香 구름처럼 펴져나가는 부처님의 법향)]
무사무여우무견(無思無廬又無牽) 생각도 없고 근심도 없고 아무것도 걸릴 것 없으니
한왕한래임자연(閑往閑來任自然) 한가히 가고 한가히 와서 자연에 맡기노라
지득계산하소사(只得溪山何所事) 산골짝 시냇물에 머물러 있으니
호수년월도년년(好隨年月度年年) 연기와 달을 따라 세월을 보내노라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선시(禪詩)]
만국도성 여의질(萬國都城 如蟻垤) 만국의 도성은 개미집 같고
천가호걸 등산계(千家豪傑 等酸鷄) 장안 호걸은 술독에 빠진 날파리 같구나
일창명월 청허침(一窓明月 淸虛枕) 달밝은 창가 깨끗한 선방에 누우니
무한송풍 운부제(無限松風 韻不齊) 끝없는 솔바람 소리 한결같지 없구나
[사명대사 달마도 찬게四溟大師 達磨圖 讚偈]
십만리래청안소十萬里來靑眼少 십만리 먼 길을 왔건만 알아보는 사람 없네
구년허도소림춘九年虛度少林春 구년동안 소림굴에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니
불봉말후신광배不逢末後神光拜 만일 말후에 신광이 절하는 것, 만나지 못했다면
야시유사랑도인也是流沙浪徒人 사막에 떠도는 유랑객이 될 뻔하였네.
[이 달마도 찬게는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임진왜란(壬辰倭亂) 직후(卽後)에 조선(朝鮮) 사신(使臣)으로 일본(日本)에 가셨을 때 일본 스님이 달마도를 그려 가지고 와서 찬게(讚偈)를 써 달라고 부탁을 받고 써준 게송(偈頌)이다.]
[사명대사는 밀양(密陽) 무안면 고라리에서 1544년 아버지 임수성(任守成)과 어머니 달성서씨(達城徐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本貫)은 풍천(豊川), 속성(俗姓)은 임(任)씨, 속명(俗名)은 응규(應圭)이다. 13세 때 양친 부모(兩親父母)님을 잃고, 김천(金泉)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했다.
신묵화상(信默和尙)의 제자가 되었다. 선조 8년(1575) 32세 나이로 선종(禪宗)의 주지에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서산대사 휴정에게서 가르침 받아 각성(覺性)했다.
사명대사는 오대산(五臺山) 영감사(靈鑑寺)에 잠시 머물다가 정여립(鄭汝立) 역모사건(逆謀事件)에 연루(連累)가 되어서 옥고(獄苦)를 당했다. 다행인 것은 유생(儒生)들이 무죄항소(無罪抗疏)로 풀려나서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에 들어가서 수행정진(修行精進) 하다가 선조25년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고을 백성들을 구출하고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서산대사(西山大師) 격문(檄文)을 받고 승병(僧兵)을 모집하여 스승 서산대사와 합류하여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서 승병(僧兵) 2,000명으로 평양성(平壤城)을 탈환(奪還)하게 된다.
선조대왕은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자 사명대사(四溟大師)를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로 임명한다. 1594년 4월에는 서생포 적진(敵陣)에 들어가서 가등청정과 회담을 하고 적장(敵將)의 전의(戰意)를 꺾는다. 그 후로 7월과 12월과 3월에 다시 적장과 만나 잘못된 조약(條約) 낱낱이 열거하고 침략국의 죄상을 열거 척파 했다. 대사의 공로가 크자, 선조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종이품(從二品) 벼슬을 내렸다. 오대산(五臺山)에서 수행하던 중에 스승이신 서산대사(西山大師) 입적(入寂) 부음(訃音)을 받고, 묘향산(妙香山)으로 가던 중에 선조 대왕이 사명대사를 일본사신(日本使臣)으로 국명(國命)을 받고 일본으로 가서 8개월간 협상과 설득을 통해서 임진왜란(壬辰倭亂) 전란(戰亂) 중에 잡혀온 조선인 포로(捕虜) 3,000명을 데리고 귀국(歸國)하였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四溟大師)와 승병(僧兵)의 구국일념(救國一念)의 활약상(活躍像)은 공(功)이 너무 많고 크다.
스님의 법명은 유정(惟政) 자(字)는 이환(離幻) 당호는 사명(四溟)이고 송운(松雲)이라 불리기도
하며 탑호(塔號)는 종봉(鐘峰) 시호(諡號)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60.상월새봉대사(霜月璽篈大師 1687-1767) (숙종13~영조43)
[금세구(金世龜)]
신유일편선암사(身遊一片仙巖寺) 이 내몸 일편단심 선암사에 머물고
몽상천추월학정(夢想千秋月鶴亭) 꿈 속같이 끝없는 세월 달 아래 학처럼 깃들어 있네
상후기간신죽록(霜後幾看新竹綠) 서리가 내린 후 바라보니 댓잎은 더욱 푸르고
설중유대고송청(雪中惟對古松靑) 눈이 온 후에 생각하니 소나무 더욱 청청하다
차오노거난성권(嗟吾老去難成卷) 슬프다 늙어짐이,
애이년래역열경(愛爾年來易閱經)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부처님만을 바라보고 살았네
록원니산수이로(綠苑尼山雖異路) 녹야원(鹿野苑)에 임하니
천연대도공문정(天然大道共門庭) 만유(萬有 : 우주)의 대도를 깨달았네
[축계(竺桂)]
천서축계해동형(天西竺桂海東馨) 부처님의 밝은 법향 해동에 널리 펴졌고
항우추상월하정(況又秋霜月下庭) 가을의 서리 월하(月下)의 뜰에 내렸다
수신고금근자고(誰信古今根自固) 누구(중생)를 향한 마음 고래로 굳건한데
아지동하엽상청(我知冬夏葉常靑) 나의 마음 춘하추동 푸르다.
개화난만린승탑(開花爛慢隣僧榻) 만개한 촛불 법상에 빛나고
유영파사송객정(庾影婆娑送客亭) 그림자처럼 객이 떠난 깨끗한 정자이런가
우후미양제열뇌(雨後微凉除熱惱) 비온 뒤 시원한 바람에 번뇌가 없어지네
야의단좌삭선경(也宜端坐索禪經) 미동도 없이 단좌(端坐)하니 선경(禪經)이 확연하네
[파근사의 용추에서 봄에 읊다(波根龍湫春詠)
간합무현슬(澗合無絃瑟) 흘러드는 시냇물은 줄 없는 거문고요
산명부화병(山明不畫屏) 밝은 산은 그리지 않은 병풍이라
유회천고사(有懷千古事) 아득히 먼 천고의 일을 회고하면서
독립소사정(獨立小沙汀) 홀로 작은 모래 물가에 섰노라
[철언 사미에게 지어 주다(贈徹彥沙彌)]
일별파근사(一別波根寺) 파근사에서 한번 이별했는데
중심동락산(重尋動樂山) 동락산으로 다시 찾아왔네
도심유미숙(道心猶未熟) 도의 마음 아직 익지 못하여
수희재기간(愁喜在其間) 슬픔 기쁨이 그 사이에 있구나
[상월 새봉(霜月璽篈, 1687~1767) 새봉의 속성(俗姓)은 손(孫) 씨이며, 전라남도 순천(順天) 출신이다. 상월 새봉은 15세에 전라남도 순천 선암사의 극준(極峻)에게 출가하였으며, 이듬해 세진 문신(洗塵文信)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후 18세에 설암 추붕(雪巖秋鵬, 1651~1706)의 아래에서 공부하여 그의 법을 이어 받았다. 1748년(영조 24) 새봉은 선교도총섭규정팔로치류사(禪敎都摠攝糾正八路緇流事), 2년 후에는 주표충원장겸국일도대선사(主表忠院長兼國一都大禪師)로 임명되었다. 《霜月大師詩集》은 새봉(璽封 1687∼1767)의 문집이다. 새봉의 자는 혼원(混遠), 호는 상월(霜月)이며, 설암추봉(雪岩秋鵬)의 法을 이었다.
《상월대사시집》은 1권1책으로, 1780년경 간행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문집 명칭처럼 모두가 詩이다. 5언절구·6언절구·7언절구·5언율시·7언율시 등 74수의 詩가 있다.
序는 신순민(申舜民 1768)과 원중봉(元重峰 1773)이, 跋은 門人 桰登寤가 썼다(1780). 卷首에는
증오가 쓴 행적과 이발(李渤) 및 채제공(蔡濟恭)이 쓴 비명(碑銘), 증오가 쓴 음기(陰記)등이 있다.
61.상월원각대조사(上月圓覺大祖師 1911-1974)
[오도송(悟道頌)]
산색고금외(山色古今外) 산빛은 고금밖이요
수성유무중(水聲有無中) 물소리는 있고 없는 중간이로다.
일견파만겁(一見破萬劫) 한번 보는 것이 만겁을 깨뜨리니
성공시불모(性空是佛母) 성품 공한 것이 바로 부처님 어머니로다.
[열반송涅槃頌]
제불불출세(諸佛不出世) 모든 부처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고
역무유열반(亦無有涅槃) 또한 열반에 들지 않았네
사생본공적(死生本空寂) 죽는 것이 본래 없으니
영허일월륜(盈虛一月輪) 찼다가 빈 것이 한 바퀴 달이로세
[상월원각대조사 법어]
「實相은 無相이고 妙法은 無生이며 蓮華는 無染이다.
無相으로 體를 삼고 無生에 安住하여 無染으로 生活하면
그것이 곧 無上菩提요, 無碍解脫이며 無限生命의 自體具現이다.
一心이常淸淨하면 處處蓮華開니라.」
(실상은 무상이고 묘법은 무생이며 연화는 무염이다.
무상으로 체를 삼고 무생에 안주하여 무염으로 생활하면
그것이 곧 무상보리요, 무애해탈이며 무한생명의 자체구현이다.
일심이 상청정하면 처처연화개니라)
[상월원각 대조사님께서는 1911년 음력 11월 28일 강원도 삼척군 노곡면 상마읍리 봉촌마을에서
밀양 박씨가문 밀성대군의 후예로 태어나셨습니다.
부친이신‘박영진’거사님과 모친이신‘삼척 김씨’사이의 2대 독자로 태어나신 대조사님께서는
속명은 준동(準東)이시고 법명(法名)은 상월(上月), 법호(法號)는 원각(圓覺)이십니다.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출중하셨던 대조사님께서는 인연의 도래와 함께 큰 뜻을 품으시고 결국 15세가 되던 해 음력 3월 봄날에 출가를 결심하시게 됩니다.
상월원각 대조사님께서는 불퇴전의 정진을 하신 후 마침내 임인년(1962년) 음력 12월 28일
‘한 마음 움직이지 않으면 만법(萬法)이 일여(一如)하다.’는 오묘한 경지와 ‘모든 법이 본래 무상
(無常)이요 무생(無生)하다.’는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신 후 천 사백 여 년 전 중국의 천태지자대사께서 천태일승(天台一乘)의 진리를 천명하셨듯이, 고려의 의천 대각국사께서 중국의 천태교관을 전지하여 고려천태의 종지(宗旨)로 삼아 교계의 새 기풍을 일으켜 선교제종(禪敎諸宗)을 다 통합하셨듯이, 상월원각 대조사님께서는 어려운 시기에 참된 자아의 개현, 참된 생활의 구현, 그리고 참된 사회의 실현을 위하여 대중불교의 구현, 생활불교의 실천, 애국불교의 건립이라는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하셨던 것입니다.
1966년(43세) 8월 30일, 구인사를 창건한 지 15년 만에 상월은 대한불교천태종이라는 종단을
중창하기로 결심하고, 회삼귀일(會三歸一)ㆍ삼제삼관(三諦三觀) 등 종지를 계승하여 종헌과 종법을 마련하여 문교부에 신청하였다.
이듬해 67년(44세) 1월 24일에는 허가를 받긴 했는데, 당시에는 정부가 조계종 이외의 불교종단을 따로 인정하지 않아서 '천태종대각불교포교원(天台宗大覺佛敎布敎院)'이란 이름으로 등록되었다.
여기서 대각(大覺)이란 단어는 11세기 고려 승려로 해동 천태종을 창종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에서 땄다.
500년간 맥이 끊겨진 한국 천태종 을 중창한다는 표어를 내걸고 3대 지표인 애국불교, 생활불교, 대중불교를 전개해 중생의 구제를 실천하였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참선 수행을 하는 주경야선(晝耕夜禪)의 종풍을 세웠다. 교리는 천태종의 법맥을 이었으나 주경야선 수행을 통하여 나 자신을 닦아가는 수행으로써의 역할을 더욱 중요시했다.
62.서경보 일붕선사(一鵬徐京保 1914-1996)
[오도송(悟道頌)]
맑은 허공에 새털이 떨어지고
고기가 뛰니 수면에 물결이 인다.
새의 털하나 떨어지지 않고 물살 일지 않는 곳에서
나는 한 가지의 꽃을 들고 법을 설하다.
[열반송]
사화등용일각생(蛇化登龍一角生) 뱀이 화하여 용이 되어 뿔이 하나가 났는데
송담풍우만인경(松潭風雨萬人驚) 송담에는 풍우가 크게 일어나 만인 이 놀랐다
남서춘지마운진(南城春至魔雲盡) 남쪽 성에 새봄이 오니 마운이 다 없어지고
북령야래선월명(北嶺夜來禪月明) 북쪽 영에 밤이 되니 선월이 밝아온다.
[스님은 제주(서귀포) 출신으로 19세에 제주도 산방굴사에서 혜월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후에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나와 동대학 교수가 되었고 불국사 주지도 지냈으며, 조계종 원로의원까지 지냈다.
일붕 서경보가 1975년 사단법인 일붕선종회를 창립하였고 1986년 일붕사 건립 불교 포교를
하였으며 1988년에 서울시 신영동 일붕선원 대법당에서 현재의 재단법인 대한불교 일붕선교종을 창종하여 초대 종정에 올랐다.
재단법인 대한불교 일붕선교종은 현대 한국불교 종단이다. 한국불교의 주요 종단으로 구성된 한국불교종단협의회의 회원 종단이다.
1992년에는 미국 일본 미얀마 스리랑카 등 1백57개국 5천여 불교단체를 규합 세계불교법왕청을 설립,
스리랑카 콜롬보의 국제불교회관에서 초대 법왕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서경보스님은 불교학은 물론 철학, 정치학, 고고학, 환경우생학, 신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조예가 깊어 26개 분야 126개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기네스북에도 올랐으며, 1천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 통일기원비 건립 7백51개, 선필 50만 장 등을 남겼다.]
1980년 출판된 스님의 저서 ‘선이란 무엇인가?’에 소개되어 있는 스님의 약력에 의하면 1964년부터 1966년까지 뉴욕콜롬비아대학교, Washington 대학, California 대학, 하와이대학교 교환 교수를 거쳐 1966년부터 1969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주한국불교의 시작은 1964년 8월에 서경보스님이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여 뉴욕에 도착한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1969년 동국대학교의 불교대학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서경보 스님은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에서 ‘조계선원’을 세워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에게 선을 지도하고, 불교포교 활동을 하였다. 서경보 스님의 첫 번째 미국인 출가제자는
존 길버트씨인데 법명은 ‘대혜’스님이다. 그는 주로 캘리포니아와 남부의 알라바마 주에서 활동을 하였는데 2006년 12월 캘리포니아에서 입적했다.
서경보스님에게 보살계를 받은 미국인중에는 삼발라 출판사를 세운 샘 버콜즈씨가 있다. 1968년에 혜월(惠月)으로 받은 계첩을 본지가 소장하고 있다. 이 계첩은 2004년 미주전법 40주년 기념행사에서 샘 버콜즈 사장이 미주현대불교에 공식적으로 기증한 것이다.
[일붕(一鵬) 서경보(徐京保) 스님(1914~1996) 약력]
1946년 일본 임제전문대학 전문부 졸업. 1950년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1962년 대만 삼장학원에서 삼장법사 학위 수여. 1969년 동국대 불교대학장. 1970년 동국대 대학선원 원장. 동국대, 부산대, 원광대, 전북대, 해인대, 동아대 등에서 불교 및 철학 교수 역임. 서독 함부르크대, 미얀마 상가대학, 미국 캘리포니아대, 템플대, 워싱톤대, 하와이대 교환교수 역임.
생존했을 때 왕성한 활동으로 126개의 명예박사학위, 1042권의 저서, 757개의 통일기원비 건립, 50여만 점의 선필(禪筆), 최대 석굴법당 건립 등 5개 분야에서 기네스북에 오름.사리 83과 남김.
63.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 ►청허(淸虛)휴정(休靜)
[열반송涅槃頌]
천계만사량(千計萬思量) 천 가지 계획 만 가지 생각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 붉은 화로 속 한 점 눈송이
니우수상행(泥牛水上行) 진흙 소가 물 위를 가나니
대지허공열(大地虛空烈) 대지와 허공이 갈라지도다
[오도송(悟道頌)][臨終偈 임종게 西山大師 서산대사 1520~1604]
주인몽설객(主人夢說客) 주인은 손에게 제 꿈 이야기 하고
객몽설주인(客夢說主人) 손은 주인에게 제꿈 이야기 하누나
금설이몽객(今說二夢客) 이제 두 꿈 이야기하는 나그네
역시몽중인(亦是夢中人) 이 또한 꿈속의 사람일세
발백비심백(髮白非心白) 머리가 희어진다고 마음마저 희어지지 않는다
고인증누설(古人曾漏洩) 이는 옛사람들이 이미 말한 것이다
금청일성계(今廳一聲鷄) 지금 대낮에 닭 우는 소리 듣나니
장부능사필(丈夫能事畢) 대장부로서 내가 할 일을 다 마쳤네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태어남은 한조각 뜬 구름이 일어남과 같고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죽음은 한조각 뜬 구름이 없어짐과 같다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뜬 구름 자체가 본시 실상이 없는 것이니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태어나고 죽고 가고 오는것 또한 그와 같도다
[소소영영昭昭靈靈 선가귀감禪家龜鑑]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종본이래(從本以來) 본래부터
소소영영(昭昭靈靈)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부증생부증멸(不曾生不曾滅) 일찍이 나지도 죽지도 않았고
명부득상부득(名不得狀不得) 이름 지을 수도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
[오도송悟道頌](각문覺門)
홀문두우제창외(忽聞杜宇啼窓外) 홀연 들려온 소쩍새 소리에 창밖을 보니
만안춘산진고향(滿眼春山盡故鄕) 봄빛에 물든 온 산이 모두 고향이구나.
급수귀래홀회수(汲水歸來忽回首) 물 길어 오는 길에 문득 머리 돌리니
청산무수백운중(靑山無數白雲中) 수많은 청산이 흰 구름 속에 솟았네.
(성관聲觀:소리에 불타를 보고 깨우쳤네)
발백비심백(髮白非心白) 머리는 세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고인증루설(古人曾漏洩) 옛사람이 이미 말했네.
금청일성계(今聽一聲鷄) 오늘 닭 우는 소리 들으니
장부능사필(丈夫能事畢) 대장부 할 일 다 마쳤네.
(과봉성문오계過鳳城聞午鷄)
홀득자가저(忽得自家底) 홀연히 내 집을 발견하니(底↔處)
두두지차이(頭頭只此爾) 모든 것이 모두 이것이어라.
만천금보장(萬千金寶藏) 천언만어의 경전들이
원시일공지(元是一空紙) 본시 하나의 빈 종이였어라.
십년단좌옹심성(十年端坐擁心性) 십년을 단정히 앉아 마음자리 다스리니
관득심림조불경(寬得深林鳥不驚) 깊은 숲에 새들도 놀라지 않네
작야송담풍우악(昨夜松潭風雨惡) 어젯밤 송담에 비바람 몰아치더니
어생일각학삼성(魚生一角鶴三聲) 고기에 뿔이 하나 돋고 학이 세 번 울더라.
[열반송涅槃頌]
여보게, 친구
들여 마신 숨 내뱉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죽는 것이지.
살아 있는 게 무언가?
숨 한번 들여 마시고 마신 숨 다시 뱉어내고 ···
가졌다 버렸다
버렸다 가졌다.
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표 아니던가?
그러다 어느 한 순간 들여 마신 숨 내뱉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죽는 것이지.
어느 누가 그 값을 내라고도 하지 않는
공기 한 모금도 가졌던 것 버릴 줄 모르면
그게 곧 저승 가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
어찌 그렇게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모두 다 내 것인 양 움켜쥐려고만 하시는가?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저승길 가는 데는
티끌 하나도 못 가지고 가는 법이리니
쓸 만큼 쓰고 남은 것은 버릴 줄도 아시게나.
자네가 움켜쥔 게 웬만큼 되거들랑
자네보다 더 아쉬운 사람에게 자네 것 좀 나눠주고
그들의 마음 밭에 자네 추억 씨앗 뿌려
사람 마음속에 향기로운 꽃 피우면
천국이 따로 없네.
극락이 따로 없다네.
[서산 휴정(西山休靜, 1520˜1604), 휴정은 법명이고, 속성은 최씨(崔氏), 이름은 여신(汝信),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서산(西山),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휴정은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별호는 백화도인·두류산인(頭流山人)·묘향산인(妙香山人)·조계퇴은(曹溪退隱)등이다.
어머니 김 씨는 노파가 찾아와 “아들을 잉태하였다”며 축하하는 태몽을 꾸고, 이듬해 3월
그를 낳았다. 3세 되던 해 4월 초파일에 아버지가 등불 아래에서 졸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꼬마 스님을 뵈러 왔다”고 하며 두 손으로 어린 여신을 번쩍 안아 들고 몇 마디 진언을 하며
머리를 쓰다듬은 뒤, 아이의 이름을 ‘운학’이라 할 것을 지시했다. 그 뒤 아명은 운학이 되었다.
어려서 동네 아이들과 놀 때도 돌을 세워 부처라 하고, 모래를 쌓아 올려놓고 탑이라 하며 놀았다.
1534년 15세로 지리산에서 입산, 숭인장로를 양육사로 경성일선을 수계사로 부일영관을 전법사로 법명은 휴정(休靜), 자(字)는 현응(玄應), 법호는 청허서산(淸虛 西山)이요, 시호(諡號)는 보제등계존자(普齊登階尊者)이다.
휴정은 33세에 승과에 급제하고, 중덕(中德)을 거쳐 36세에 교종판사(敎宗判事)가 됐다. 곧 이어
선종판사(禪宗判事)가 되어 선교양종판사를 모두 맡았다. 판사를 맡은 지 2년만인 38세에 승직을
버리고 운수납자의 길을 걸었다.
1592년 임진왜란시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으로 전국사찰에 격문을 돌려 육천여명의 의병승을 모집. 평양탈환전에 선봉이 되었고, 휴정은 선조로부터 ‘국일도(國一都) 대선사(大禪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부종수교(扶宗樹敎) 보제등계존자(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을 하사받았다. 선사는 말년에 금강산에 상주하다가 1604년 원적암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에 임종게를 쓰고 좌선한 채 입적했다. 법랍(法臘) 67세, 세수(世壽)85세였다.
문집으로는 <청허당집>, 편저에 <선교석> <선교결> <삼가귀감> 등이 있다. 제자로는 사명 유정, 편양 언기, 소요 태능, 정관 일선, 현빈 인영, 완당 원준, 중관 해안, 청매 인오, 기허 영규, 뇌묵
처영 등이 있다. 깨달음을 이룬 제자만 해도 70여명으로 유정, 언기, 태능, 일선, 네 선사는 가장
휴정 문하의 4대 문파를 이루었다.
64.서암홍근선사(西庵鴻根1917.10-2003)
[오도송悟道頌]
계룡산 나한굴에서 나고 죽는 것이 없는 것을 깨달으셨다고 하는데 오도송을 읊으셨습니까? "오도송인지 육도송인지 그런 거 없어."
[열반송涅槃頌]
나는 그런 거 없다.
정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
[근세(近歲) 한국 불교 고승(高僧) 중에 오도송(悟道頌) 열반송(涅槃頌)이 없는 선지식(善知識)은
봉암사(鳳巖寺) 서암선사(西庵禪師)님과 해인사(海印寺) 지월선사(指月禪師)님이 유일(唯一)하다.
수행력(修行力)과 덕행(德行)으로 보면 누구 못지않게 큰 고승대덕(高僧大德)인데도 오도송 열반송을 남기지 않으셨다.]
서암(西庵)스님은 해방 이후 제 10 대 조계종 총무원장,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제8대 조계종 종정 등을 역임한 선승이었다. 스님의 성은 송씨이시며, 이름은 홍근(鴻根)이시다. 西紀1917년 10월8일 경북 안동군 녹전면 구송리에서. 부친 송동식(宋東植)과 모친 신동경(申東卿) 사이에서 5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의 독립항쟁으로 참담한 유랑생활 도중에서도 마을 서당과 단양의 대강보통학교, 예천의 대창학원 등에서 한학과 신학문을 수학, 그 영민함으로 '천재소년'으로 불리워짐.
1932년(16세) 경북 예천 서악사에 출가, 3년간 머슴과 같은 고된 행자생활.
1935년(19세) 경북 문경 김룡사에서 화산스님을 은사로, 낙순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계
법명은 홍근(鴻根). 수계후 김룡사 강원에서 수학
1937년(21세) 김룡사에서 금오선사를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 대덕법계를 품수.
법호를 서암(西庵)으로 받음.
진리탐구(眞理探究)의 열정(熱情)은 일본유학(日本留學) 길에 올라 종비 장학생(宗費獎學生)이 되었으나 타국(他國)에서 힘든 생활로 폐결핵(肺結核) 진단(診斷)을 받고 24세에 귀국(歸國)을 한다.
1975년(59세)에는 제10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맡아 어려운 종단사태를 수습하고 2개월 만에
사퇴했다. 어려운 종단 사태를 수습하려고 총무원장을 맡은 것이지 승직에 연연하지 않음을 보인
좋은 사례이다. 오늘날 총무원장 서로 하려고 말썽 많은 사태의 좋은 본보기 타산지석이다. 1991년(75세)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을 맡아 성철 스님을 종정으로 재추대해 종단의 중심을 잡은 후에
미련 없이 산으로 돌아왔다.
1993년(77세)에는 제8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됐으나 총무원장 자리다툼을 하는 모습에 실망한
나머지 이듬해에 종정 재임 140일 만에 종정직과 함께 봉암사 조실까지 사임하고, 종단마저 떠났다. 2001년(85세)에 봉암사 대중들의 간청에 의해 봉암사 염화실로 돌아와 한거(閑居)하다가,
87세 때인 2003년 3월 29일 봉암사 염화실에서 우리 시대에 올곧은 스승의 모습으로 홀연히
몸을 바꾸었다. 세수 87세, 법랍 72세였다.
65.서암사언선사(瑞巖師彦禪師?-887)
[중국 송나라 초기, 단구(丹丘)의 서암에 살았던 서암 사언(瑞師)스님은 날마다 판도방(辦道房 큰방)
앞마루에 걸터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서 자문자답하였다.]
서암사언화상(瑞岩師彦和尙)은
매일자환주인공(每日自喚主人公) 매일 자기 스스로를 “주인공!” 하고 부르고는
부자응낙(復自應諾) “네” 하고 스스로 대답했다.
내운(乃云 성성착惺惺著) 그리고는 이내 “깨어 있거라?”한 뒤 다시
낙(諾) “네” 하고 대답했다.
타일이시(他日異時) 또 “언제 어느 때든지
막수인만(莫受人瞞) 남에게 속지 말라”라고 한 뒤
낙낙(諾諾) “네, 네” 하고 혼자 대답했다.
[송왈頌曰]서암사언선사(瑞巖師彦禪師?-887)
학도지인불식진(學道之人不識眞) 도를 닦는다는 사람들이 진실을 모르는 것은
지위종전인식신(只爲從前認識神) 다만 본래의 신령함을 식신으로 삼기 때문이다.
무량겁래생사본(無量劫來生死本) 아득한 옛적부터의 나고 죽음의 근본을
치인환작본래인(癡人喚作本來人) 어리석은 이들이 본래 나(自己)라 부르고 있네.
[속성은 허許씨. 남쪽 베트남 근처인 월越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생사의 고통을 절감하고 사바 너머를 꿈꾸며 계율을 익혔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로 유명한 청원靑原(?~740)선사의 법손인 암두巖頭(827-887)선사에게서 법을 익혔다.
천성(天性)이 둔근기(鈍根機)라 멍텅구리 소리를 듣고 살 정도였다고 한다. 스승인 암두선사도 너무 둔한 사람이라 중 될 인연(因緣)이 없는 사람이라고 그다지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스승 암두선사로부터 ‘들숨날숨과 대소변 누는 곳에 본래 자연히 영원불멸의 진리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회광반조廻光返照 조고각하照顧脚下하여라’라는 가르침을 잘 계승하고 있다.]
[서암사언(瑞巖師彦) 선사(禪師)는 암두전활(巖頭全豁) 선사(禪師)의 법을 이었다.
서암선사(瑞巖禪師)는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선방 도판(道判) 마루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보고 혼자서 큰소리로 외쳤다. 주인공(主人公)아! 네(喏)! 정신 차려(惺惺著)라! 네(喏)! 후일에 남에게 속지 말어(莫受人瞞)라! 네(喏)!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이(自問自答)다.
절집에서 비싼 밥 먹고 왜? 이렇게 허구, 헌날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을 했느냐? 가 화두(話頭)다.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보면 노망이 난 늙은 중이 아닌가? 의심(疑心)해볼 만하다.
주인공(主人公)은 우리 인간 본질(本質)에 대한 물음이다. 자기본래면목(自己本來面目)이다.
선가(禪家)에서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물건이라고도 하고, 역대제불조사(歷代諸佛祖師)의 본지풍광(本地風光) 자리라고도 하고, 산하대지(山河大地) 일원성신(日月星辰) 삼라만상(森羅萬像) 진진찰찰(塵塵刹刹)도 여기에서 출현(出現)했다고 본다.
이렇게 본다면 주인공(主人公)은 우주만상(宇宙萬象)의 근본본질(根本本質)을 묻는 화두(話頭)다. 중국 선사들은 이렇게 인간본질(人間本質) 문제(問題)를 화두(話頭)로 문제제기(問題)를 했다. 그래서 화두(話頭)는 공안(公案)이라고 했다.
공안(公案)은 공부안독(公府案牘)의 줄인 말이다. 비밀문서(秘密文書) 법령(法令)이다. 왕(王)의 명령(命令)이 관청법령(官廳法令)이 되어서 지방(地方) 관리(官吏)들에게 파발마를 띄워서 전하게 된다. 왕명(王命)이라 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
그와 같이 우리 인간의 본질 문제도 깨쳐서 아는 사람만 알고 알아듣기 때문에 불가(佛家) 선가(禪家)에서는 부처님이나 역대 조사(祖師)들이 제시한 말이나 대화문답(對話問答)을 깨달음의 계기로 삼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화두(話頭) 공안(公案)을 통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목표(目標)로 하는 것이 화두 참선(話頭參禪)
이고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이런 공안(公案)을 모아놓은 것이 벽암록(碧巖錄)이고, 선문염송(禪門拈頌)이고, 무문관(無門關) 어록집(語錄集)들 이다.
66.서옹상순선사(西翁尙純禪師 1912-2003)
[서옹스님의 자필 임종게. 안(眼), 단(斷), 만(滿)의 운을 걸어
임종의 변을 시문 한 수로 읊고 돌아가셨다]
[임종게(臨終揭)] 서옹상순선사(西翁尙純禪師 1912-2003)
임제일할실정안(臨濟一喝失正眼)
임제록의 한번 큰 소리 꾸짖음으로 正法 眼藏마저 잊어버리니,
덕산일봉별전단(德山一捧別傳斷)
덕산에 한번 받들어 의지했던 한사람 의 일화가 단절되네.
임마래임마거(恁磨來恁磨去)
그토록 괴롭게 왔다가 이토록 괴롭게 가려 하는데,
백학고봉월륜만(白鶴高峰月輪滿)
높고 높은 백학 봉에 둥근 달이 가득 하 네.
[오도송(悟道頌)]
상왕빈신사자후(象王嚬呻獅子吼) 상왕은 위엄 떨치고 사자는 울부짖는다
섬전광중변사정(閃電光中辨邪正) 번개 불 가운데서 사와 정을 분별하도다
청풍늠름불건곤(淸風凜凜拂乾坤) 맑은 바람이 늠름하여 하늘과 땅을 떨치는데
도기백악출중관(倒騎白岳出重關) 백악산을 거꾸로 타고 겹겹 관문 벗어나도다
[열반송涅槃頌]
운문일영무인지(雲門日永無人至) 구름 낀 문에 해는 긴데 이르는 사람 없고
유유잔춘반락화(猶有殘春半落花) 남은 봄에 꽃은 반쯤 떨어졌네
일비백학천년적(一飛白鶴千年寂) 한 번 백학이 나니 천 년이 고요하고
세세송풍송자하(細細松風送紫霞) 부드러운 솔바람 붉은 노을을 보내나니
[서옹상순선사(西翁尙純禪師 1912-2003)]
[전법게(傳法偈)][스승 만암(曼庵) 화상으로부터 받은 전법게]
백암산상일맹호(白岩山上一猛虎) 백암산 위의 한 사나운 호랑이
심야횡행교살인(深夜橫行咬殺人) 한 밤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다 물어 죽인다.
삽삽청풍비효후(颯颯淸風飛哮吼) 솨솨 맑은 바람 일으키며 날아 울부짖으니
추천교월냉상륜(秋天皎月冷霜輪) 가을 하늘에 밝은 달빛은 서릿발처럼 차갑도다.
[서옹(西翁) 스님은 1912년 10월 10일 충남 논산군 연산면 송정리 495번지에서 부친 이범제와 모친 김지정의 외동아들로 출생, 속명은 이상순(李商純), 법명은 석호(石虎), 서옹(西翁)은 호이다.
서옹 큰스님께서는 2003년 12월13일 세수 92세, 법랍 72세를 일기로 좌선하는 자세로(坐脫立亡) 열반에 드셨다. 입적한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서옹당 상순대종사는 자타가 인정하는 우리 시대 최고의 선승(禪僧)이자, 현대 한국불교를 지탱해온 큰 기둥이었다.
이사(理事)에 두루 원융하고 선교(禪敎)를 겸비한 서옹 스님 저서로는 <임제록연의(臨濟錄演義)>,
<절대참사랑>, <선과 현대문명>, <절대 현재의 참 사람> 등이 있다.
[연보]
1912년 충남 논산군 연산면 출생 1932년 양종고보.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 졸.
1941년 일본 교토 임제대 졸. 1932년 백양사서 득도. 은사는 만암(蔓岩) 스님.
1962년 동국대 대학선원장. 1964년 도봉산 무문관 초대조실.
1974년 제5대 종정. 1996년 백양사 고불총림조실.
2003년 12월 12일, 임제선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서옹스님은 백양사 스님과 스님들을 모아
“이제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좌탈임망의 자세로 열반에 들었다.
67.석옥청공선사(石屋淸珙禪師 1272~1352)
[열반송(涅槃頌)] 사세송(辭世頌) 무산 천호암
백운매료매청풍(白雲買了賣淸風) 흰 구름을 사려고 청풍을 팔았더니
산진가사철골궁(散盡家私徹骨窮) 살림살이 바닥이나 뼈속까지 가난하네
유득수간모초옥(留得一間茅草屋) 남은 건 한 칸 띠집 뿐이니
임별부여병정동(臨別付與丙丁童) 세상 떠나면 그것마저 불 속에 던져버리게!
[山月(산월)]
귀래세족상상수(歸來洗足上狀睡) 돌아와서 발을 씻고 잠이 든 채로
인중부지산월이(因重不知山月移) 달이 옮겨 뜨는 줄도 미처 알지 못했네
격림유조홀환성(隔林幽鳥忽喚醒) 숲속의 새 우짖는 소리에 문득 눈 떠 보니
일단홍일괘송지(一團紅日掛松枝) 한 덩이 붉은 해가 솔가지에 걸렸구나!
[호주 하무산에 계신 석옥청공(1272~1352)이 1347년 태고암가에 붙인 글]
선유차암(先有此庵) 먼저 이 암자 있은 뒤에
방유세계(方有世界) 비로소 세계가 있었으니
세계괴시(世界壞時) 세계가 무너질 때에도
차암불괴(此庵不壞) 이 암자는 무너지지 않으리
암중주인(庵中主人) 암자 안의 주인이야
무재부재(無在不在) 있고 없고 관계없이
월조장공(月照長空) 달은 먼 허공을 비추고
풍생만뢰(風生萬籟) 바람은 온갖 소리를 내노라
[원(元)의 석옥청공(石屋淸珙)은 원나라 때의 승려. 상숙(常熟) 사람이다. 임제(臨濟)의 18세(世)
법손(法孫)이다. 자가 석옥이고, 청공(清珙)은 법호, 속성(俗姓)은 온(溫)씨다. 시를 잘 지었다.
소주(蘇州) 상숙(常熟) 사람으로 당호(當湖)의 복원(福源)에서 살았다.
숭복사(崇福寺) 유영법사(惟永法師)에게로 출가해서 스무 살에 머리를 깎은 후 천목산(天目山)의
고봉원묘(高峰原妙) 선사에게 배웠다. 나중에 고봉화상과 그의 도반 암신선사(庵信禪師)의 법을 이었다. 오(吳)와 월(越) 땅을 자주 드나들면서, 선법을 전하고 인연을 넓혀갔다
일찍이 게송을 지어 “끊긴 마를 거두어서 헤진옷을 꿰매니, 이 몸이 적요 속에 있는 줄도 모르겠네.(拾得斷麻穿破納 不知身在寂寥中)”라 말했다. 나중에 삽계(霅溪) 서쪽 천호(天湖)로 옮겨 살면서 유유자적 시를 지으면서 지냈다. 지정(至正, 1341~1370) 연간에 조정에서 금란가사를 하사했다.
저서에 『석옥시집(石屋詩集)』이 있다. 고려 말기의 스님 보우(普愚)가 충목왕 2년(1346)에 중국에 들어가 호주(湖洲) 하무산(霞霧山) 천호암(天湖庵)에 살던 그를 찾아 배웠는데, 법기(法器)를 인정하여 가사(袈裟)를 전해 받아 고려 임제종(臨濟宗)의 적통(嫡統)을 이었다.
[중국 원대 임제종의 고승 석옥청공이 머물렀던 중국 호주시 도량산 만수사에서 편찬하는
사적기 도량사지의 도량사 법맥도에 태고 보우 국사가 석옥청공의 법맥을 이어받았음을 확인하는
내용이 공식적으로 기록된다. 특히 석옥청공의 법맥이 태고보우를 마지막으로 끊어진 것으로 적고
있어, 석옥의 법맥이 중국에서는 끊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8.석우보화선사(石友普化禪師 1875-1958)
[열반송(涅槃頌)]
낭괄건곤방외척(囊括乾坤方外擲) 하늘과 땅을 바랑에 넣어 한켠에 밀쳐놓고
장도일월수중장(杖挑日月袖中藏) 해와 달 지팡이로 따 소맷자락에 감추노라
일성종락부운산(一聲鍾落浮雲散) 한 줄기 종소리에 뜬구름 흩어지고
만라청산정석양(萬蘿靑山正夕陽) 만 갈래 청산에 비로소 석양이 비치나니
[석우보화선사(石友普化禪師 1875-1958) 오도송]
산섭위리수용비(山攝爲籬水用扉) 산으로 울타리 삼고 물로 싸리문 만드니
행인도차세정희(行人到此世情稀) 나그네가 여기 오면 세상일을 모르더라
고암나객환다사(孤庵懶客還多事) 외로운 절에 게으른 손님이 도리어 일이 많나니
정소한운보폐의(淨掃閒雲補弊衣) 구름도 쓸고 해진 옷도 꿰매 입도다.
[1875년 5월11일 경남 의령에서 부친 설상필(薛庠必)선생과 모친 정경씨(鄭景氏)여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속명은 태영(泰榮). 설총(薛聰)의 45세손이다. 글 읽기를 즐겨 한학 을 깊이 연찬했다.
곤궁한 살림에 약초 (藥草) 캐는 일을 생업으로 하면서 의서 (醫書)에도 관심을 가졌다.
명의로 소문나 환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905년 부모의 간청으로 정보애(鄭甫愛)여사와 혼례를 올렸다. 딸 갑순(甲順)을 두었다.
망국의 소식을 들은 후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길 인가 고민을 거듭하다 동래 범어사에 머물던
스님은 고려 말 보조국사가 지은 ‘수심결(修心訣)’ 첫 대목을 읽고 출가를 결심했다. “삼계를 윤회하는 고통은 마치 불난 집과 같은데, 어찌 그대로 참고 머물며 오랜 고통을 받으려 하는가.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님을 찾는 길밖에 없다. 만약 부처님을 찾으려면 이 마음이 곧 부처님이니…”
이 구절을 읽고 스님은 “불각낙루(不覺落淚)하고 ‘대도(大道)는 실로 이 문중(門中)에 있구나’라며 출가의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깨달음을 만나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커다란 도(진정한 도)는 실로 부처님 문중에 있구나’라는 마음으로 출가를 다짐했다.
38세 되던 1912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연담응신(蓮潭凝信)스님을 은사로 삭발하고 보화(普化)를
법명으로 받았다. 석우(石友)라는 법호는 동선의정(東宣義淨) 율사에게 구족계를 수지할 때 받은 것이다.
1954년 가을 해인사 조실로 추대했으며, 1955년 1월 고성 옥천사 백련암으로 자리를 옮겼다.
같은 해 8월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가 열려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했다. 만장일치로 종정(宗正)에 추대됐으며, 종단 권유로 팔공산 동화사로 주석처를 옮겼다. 동화사에 금당선원을 연후 수좌들을
지도했다. 1958년 음력 12월27일 열반에 들었다. 세수 84세. 법납 45세였다.
69.석전정호선사(石顚鼎鎬禪師 1870-1948) 속명 박한영(朴漢永)
법명(法名)은 정호(鼎鎬), 법호(法號)는 영호(映湖), 시호(詩號)는 석전(石顚) 속명인 박한영(朴漢永)으로 더욱 알려진 스님이다.
1870년 음력 8월 18일 전라북도 완주군 초포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명석해 보고 들은 것은 모조리 기억했으며, 성정이 침착하고 조용하여 혼자 있기를 즐겼다.
17세 되던 해 어머니가 생사법문을 들려준 것을 계기로 발심하여 19세에 전주(全州) 위봉사(威鳳寺)에서 금산(錦山)화상에게 계를 받고 정호(鼎鎬)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 후 우연히 만난 자칭 “일장춘몽도인
(一長春夢道人)”의 독려로 백양사 운문암에서 본격적인 수도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운문암에서의 함명(涵溟) · 경붕(景鵬) · 경운(擎雲) 세 스승과의 만남은 스님의 시
“비 속에 눈발 속에”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석전정호선사(石顚鼎鎬禪師 1870-1948) 속명 박한영(朴漢永)
庚寅春已暮 雲門訪幻師 (경인춘이모 운문방환사)
一夏讀棱楞 不下雙溪陲 (일하독릉릉 불하쌍계수)
八月渡曹溪 三老坐參差 (팔월도조계 삼노좌삼차)
擎雲當座主 俊七列墨池 (경운당좌주 준칠열묵지)
霽峰對錦峰 在敏及贊儀 (제봉대금봉 재민급찬의)
以爲法筵首 文質彬一時 (이위법연수 문질빈일시)
경인(庚寅)년 봄도 저물어, 운문(雲門)을 찾아가 환응(幻應)스님 만났네. 한 여름 능엄경을 읽노라고, 쌍계언덕을 내려갈 줄을 몰랐네. 8월에 조계를 건넜는데, 세 노인이 한가하게 앉아 있더군.
경운스님이 웃어른으로, 먹 글씨를 한참들 쓰고 있는데. 제봉(霽峰)과 금봉(錦峰)스님이 마주보고 있고, 재민(在敏)과 찬의(贊儀)스님이 훤출 하더군. 쓴 글발이 번지르르 뛰어나더군. (이하 생략)
정호스님은 당시에 세 스승을 만나 ≪능엄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배웠고, 붓글씨에도 관심을 두었던 모양이다. 스님의 어록에 실린 글씨 또한 글발이 번지르르 막힘 없이 뛰어나다. 선교일치(禪敎一致)와 3백여 편이 넘는 시를 통해 보여 준 선시일여(禪詩一如)의 기초를 이때 마련한 듯하다.
그렇게 정호스님은 백양사 운문암에서 승려로서의 기초 교육을 마치고, 1892년 순천(順天) 선암사(仙巖寺)의 경운(擎雲)화상에게 대교과를 이수한 뒤 석왕사, 건봉사, 산계사 등지를 돌며 참선 정진했다.
1895년 스님은 백양사 인근의 구암사에 주석하던 설유 처명(雪乳處明)스님의 문하에서 수행하여 전법제자가 된다.
스승 설유선사는 조선 후기 선교양종(禪敎兩宗)의 고승으로 추앙받는 백파 긍선(白坡 亘琁,1767~1852)선사의 법맥을 계승한 제자인데, 설유(雪乳)선사로 부터 영호(映湖)라는 법호를 받고 개당하니
법맥으로는 서산대사의 17세, 백파선사의 8세 법손이다.
백파스님이 동시대의 석학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서신으로 오고 간 삼종선(三種禪)에 대한 논쟁은 이후 1백여 년 동안 불교계 공통의 화두가 되기도 하였다. 백파스님 문하의 선교일치(禪敎一致) 가풍은 스님에게도 전해졌다.
스님은 “선가(禪家)에서 종(宗)으로 삼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은 친히 조사(祖師)께서 말한 바가 아니라 선가의 한 유파(流派)의 공안이었다가 세월이 흘러 무식한 무리들의 호신부(護身符)가 되고 졸렬함을 감추는 큰 일산(日傘)이 되고 말았다.”고 하였다.
역대 조사나 선사들도 한동안 경전을 탐독하였다 하여 선 일변도의 수행풍토를 엄중하게 경계하신 것이다.
그후 스님은 교학을 기반으로 전주 대원사를 비롯해 화엄사, 대흥사, 백양사, 해인사, 범어사, 법주사 등에서 대법회를 열어 불법을 강론하셨다.
그러다가 한일합방을 2년 앞둔 1908년에는 불교 유신과 민족 자주의 뜻을 품고 만해 한용운 등과 함께 불교유신운동을 벌였다.
1910년 이회광(李晦光) 등 일부 친일 승려들이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결탁해 조선불교를 예속시키려는 목적에서 “원종(圓宗)”을 추진하자, 1911년 불교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송만암(宋曼庵 : 1876~1956), 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 진진응(陳震應), 오성월(吳惺月 : 1866~1943) 등과 함께 “임제종(臨濟宗)”을 설립했다.
당시 석전스님은 “이 땅에서 태를 받고 비와 이슬을 받아 자란 몸이니 아무리 출가사문이라고 한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일을 저버릴 수 있느냐”며 친일승들의 매종역조(賣宗易祖)를 민족적 차원에서 단죄하고자 주장했다. 그러나 일제가 사찰령을 반포하고 본산제를 실시해 그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그 후 이회광 등 친일승려들이 재차 일본 임제종과 결탁해 한국 불교의 왜색화를 꾀하자 석전스님은 보다 대중적인 불교 유신운동을 펼치기 위해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라는 잡지를 인수해
“해동불보(海東佛報)”로 제호를 바꾸고 창간호를 내는 등 적극적인 집필 활동에 나섰다.
석전스님은 “해동불보” 창간호에서 그 취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해동불보”를 왜 발간하는가. 우리나라 불교가 날로 쇠퇴함을 염려해 세계를 향해 그 빛을 떨치고자 함이라. 석전스님의 필치가 워낙 신랄하여 “당신의 직언을 받아들일 자가 현재의 암흑 불교계에는 없는 것 같으니 차라리 유신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개진해 오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은 그럴수록 더 노력해야 한다면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민족 불교를 살리는 일은 오직 종교인 불교인에 대한 계몽과 교육으로만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신에서 그는 동국대학의 전신인 불교고등강숙의 숙사(塾師), 중앙학림의 교장으로 일하는 등 교육 일선에 나서기도 했다. 매사에 독단적이고 고집불통이었던 만해(卍海)화상도 석전스님에게는
자문 받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3ㆍ1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명단에 실수로 석전스님의 이름을 누락시킨 것을 늘 송구스러워 했다.
석전스님은 1919년 4월 23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전국 13도 대표가 모여 노령, 상해에 이어 한성에 임시정부를 출범시킬 때 지암화상(이종욱) 등과 동참하여 민족 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기도 했다.
이런 그의 기개를 두고 만해화상은 그의 저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서문을 굳이 석전스님에게 부탁하는 등, 그를 각별히 대접했다.
만해의 석전에 대한 흠모는 그의 시에도 잘 나타나 있다.
一天明君君何在 (일천명군군하재) 맑은 달 같으신 당신 어디 계시뇨
滿地丹楓我獨來 (만지단풍아독래) 단풍 가득한 숲 속에 나 홀로 있네
明月丹楓雖相亡 (명월단풍수상망) 맑은 달과 단풍 설령 잊는다 해도
唯有我心共排徊 (유유아심공배회) 내 마음은 항상 그대 그릴 뿐이네
석전스님의, 속명은 박한영(朴漢永)이다. 석전이라는 아호는 추사 김정희가 지어서 백파선사에게
건네주며 앞으로 크게 될 후손에게 전하라고 한 3개의 아호 중 하나이다.
스님은 주로 아호인 석전으로 불렸는데, 당대 석학들의 태두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전스님은 불교에 대한 강설은 물론, 시문과 경사자집(經史子集), 노장학, 서법에서도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러니 자연 세간의 학자나 석학들도 석전을 따르고 존경했다.
위당 정인보는 일찍이 그를 가리켜 「시문에는 깊은 사상이 깃들여 있고, 참선 하실 땐 바로 부처님의 모습이시다. 또한 한번 설렵하신 바는 하나도 열거치 못하는 바가 없으니 놀라울 뿐이다」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육당 최남선도 「스님의 행하심은 내외전(內外典 : 불교와 그 이외의 학문)을 뀌뚫어 내가 감히 미칠 바가 못된다」고 흠모했다.
스님과 가까이 교제한 석학 중에는 오세창, 김돈희, 이도영, 고희동, 안재홍 등이 있고,
가르침을 받은 인물은 청담, 운허, 청우, 운기, 경보 등 부지기수에 이르며 서정주, 이광수, 조지훈, 조종현 등도 모두 그의 후학에 해당한다.
석전스님은 몸담고 있던 중앙학림이 1922년 승격 문제로 휴교하는 사태에 이르자 1926년 개운사 대원암에 법석을 차리고 유싱 교육의 고삐를 다시 조였다. 중앙학림리 불교전수학교를 거쳐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되자 석전스님은 다시 교장에 취임했다. 이듬해에는 새로 발족된 조선 불교의 교정으로 추대됨으로써 명실상부한 한국 불교계 최고의 지도자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스님은 늘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당시 그의 사회적 위상에 구애받지 않고 늘 구차한 행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해를 받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하루는 석전스님이 위당 정인보와 함께 금강산 장안사에 들러 묵기를 청했다. 석전스님의 의상이 하도 남루하여 걸인과 구분이 안 될 정도였기에 지객(知客 : 손님을 맞이하고 보살피는 자리) 소임을 보던 승려는다른 곳으로 가보라며 문전박대를 했다.
석전스님은 그렇다면 노숙이라도 해야겠다고 하자, 이를 보다 못한 위당이 「이분이 누구신 줄 아시오. 바로 조선 불교의 교정(敎正)이자 중앙불전의 박한영 교장이시오.」라고 밝히자 승려들은 당황하여 백배사죄하고 부랴부랴 영접을 했다. 그러나 정작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석전스님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스님의 암루한 행색이 의도적 행동이나 무애행 따위와는 거리가 먼 소박한 그의 성정에서 비롯된 일상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진속을 오가며 많은 활동을 했지만 한시도 계율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하루도 좌정하여 화두를 참구하지 않는 날이 없었던 대선사였던 것이다.
석전스님은 불교인의 시대적 자각을 특히 강조했다. 나라가 기울고 불교가 노후하게 된 원인은 모두 교단 내의 교육이 참되지 못하여 그 역할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론을 펼쳤다.
궁실을 드나들며 집권자와 가까이해 그 혜택을 입으려고 정신을 팔아온
역사가 불교를 망치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비판했다.
스님은 이렇게 잘못되어 있는 불교를 유신시키는 방법은,
첫째 참다운 계정혜(戒定慧, 불교에서는 이 세 가지를 3학이라고 함)를 갖추고,
둘째 이타행을 실천하며,
셋째 학교 설립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넷째 포교 방법의 현대화를 꾀하며,
다섯째 얻어먹는 불교에서 생상 불교로 전환하고,
여섯째 임민에 대한 자선사업을 활발히 펼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올바른 포교의 방향에 대해서도 미신 포교를 지신(智信) 포교로,
이론 포교를 실천 포교로, 과장 포교를 실질 포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30년대, 석전스님은 조선불교계의 가장 높은 어른이신 교정(敎正)을 맡고 있었다. 지금 같으면 종정(宗正)스님이신 셈이었다. 또한 스님은 대원불교강원 강주스님이셨고 지금의 동국대학교 전신(前身)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을 맡고 있었다.
석전스님은 당신이 대원불교강원에서 가르친 젊은이들 가운데 학업을 계속 시킬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난한 제자들의 학비를 어떻게 마련하느냐. 이 당시만 해도 학생이 부업을 할 만한 업소도 없었거니와 막노동할 자리도 별로 없었다.
석전스님은 생각 끝에 제자 몇 사람을 데리고 효자골 최남선의 도서관 일남각을 찾아갔다.
육당 최남선이 깍듯이 모셔들였다.
“어인 일로 여기까지 행차 하셨습니까요, 스님?”
“육당에게 복 짓는 기회를 좀 만들어 주려고 그래서 일부러 왔지.”
“어이구 스님, 저를 위해서 일부러 오셨다구요?”
“그래. 자네, 이 아이들 일을 좀 시키고 학비를 좀 대주시게나.”
“일을 시키고 학비를 대 주어라, 그런 말씀이십니까요 스님?”
“그래. 이 아이들 책을 베껴 쓰는 일을 시키면 아주 똑 부러지게 잘 할 걸세.”
“아 예 잘 알겠습니다요 스님.”
이 무렵, 육당 최남선의 사설 도서관 일남각에는 귀중한 옛 책을
빌리러 오는 선비들이 무척 많았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책을 복사할 수 있는 기계가 없었기 때문에 필요한 책은 일일이 사람 손으로 베껴 쓰는 도리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도서관 일남각에서는 책을 베껴주는 서생이 몇 명 일하고 있었다. 요즘 같으면 아르바이트생인 셈이었다.
책 한 페이지를 철필로 베껴 주면 1전이요, 책 한 페이지를 붓으로 베껴주면 3전을 주었다.
석전스님은 바로 이 아르바이트 일을 제자들에게 구해 주고 그 돈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스님은 이렇게 제자들의 일자리를 구해 주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러나 일자리 구해주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스님은 또 생각다 못해 쓸만한 젊은이 한명씩을 데리고 직접 후원자를 찾아 나섰다. 석전스님은 이재복 학인을 데리고 종로구 사간동에 있는 법륜사로 대륜스님을 찾아 갔다.
“아이구, 교정스님께서 어인 일로 여기까지 큰걸음을 하셨습니까?”
“아 이 서울 장안에서 큰 일 한 가지를 부탁하려면 대륜스님 밖에 더 있겠소이까?”
“원 무슨 분에 넘치는 말씀을요. 그래 큰일이시라면?”
“좋은 일에 돈을 좀 쓰십시오.”
“좋은 일이라 하시면…?”
“저 아이, 장차 쓸만한 물건인데 스님께서 학비를 좀 대주셨으면 해서 데려 왔습니다.”
“예? 하, 학비 말씀이십니까?”
“우리 불교계에 큰 인물이 될만한 젊은이입니다.”
“알겠습니다. 교정 스님께서 데려 오셨을 적에야 쓸만한 사람이겠지요.”
“도와주시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교정 스님의 높으신 뜻이신데요…”
이렇게 해서 석전은 제자 한 명, 또 한 명을 후원자에게 묶어 주어 학업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에 스님 문하에서 스님의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사람 중에는 대전의 보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이재복을 비롯해서 시인 서정주, 신석정, 조지훈, 이광수, 오장환, 김달진, 청담, 운허, 서경보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수두룩했다.
석전스님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많은 젊은이들 가운데서 스님이 관심을 많이 가졌던 인물이 바로 서정주.
가출 청년이었던 서정주는 당시 톨스토이에 흠뻑 빠져 있던 ‘톨스토이 주의자’였다.
그래서 석전스님은 서정주의 별명을 “똘스또이 청년”이라 불렀다.
일제는 중앙불전을 혜화전문으로 개칭하는 것을 기화로, 민족 자주를 내세운 석전스님을 파면 조치하고
대신 일본인 교장을 취임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석전스님은 할 수 없이 1940년 오랫동안 몸담아 왔던 중앙불전을 떠났다. 그리고 해방이 되던 해, 76세의 노구를 이끌고 개운사 대원암을 떠나 정읍의 내장사로 향했다.
당시 주지를 맡고 있던 매곡스님이 스님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았다.
“아이구 이거 큰스님께서 어찌 기별도 없이 이렇게 오셨습니까?”
“아 이 사람아, 늙은 중 오고 가는거 소리 소문 없어야 자네들이 편하지.”
“원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자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스님.”
“잠깐만. 내 절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지스님 대답부터 들어봐야겠네.”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스님?”
“나 여기서 세상 뜨려고 왔는데, 그래도 주지스님 귀찮지 않으시겠는가?”
“예에? 여기서…세상 뜨시겠다구요?”
“그래. 나 여기서 세상 떠도 괜찮으시겠는가?”
“그…그야 스님 뜻대로 하셔야지요.
아무튼 저희는 잘 모실테니 어서 안으로 드시기나 하십시오.”
“고맙네. 그럼 내 마음 편히 이 절에서 지내다 세상 뜨려네.”
그리고 스님의 뜻대로 그 해 음력 2월 스무 아흐렛날 바로 그 내장사에서
학처럼 훨훨 열반의 세계로 날아가셨다.
근대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동안 불교인에 대한 계몽과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으로 불교와 민족의 유신을 꾀했던 커다란 물줄기 석전스님은 마침내 그 삶의 육신을 벗었다.
이때 스님의 나이 76세였고, 법랍은 61세였다.
본명(本名)인 “박한영(朴漢永)”으로도 널리 알려진 석전스님은 후학들이 바른 불교인, 사대를 이끌어 가는 불교인으로 성장하도록 평생 힘을 쏟아 부었던 선지식이며, 뛰어난 지성으로 당대 석학들의 추앙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선사(禪師), 율사(律師), 강사(講師)의 면모를 두루 출중하게 갖춘 불교계의 거목이었다.
“늙음을 허무하다고 하는 말은 죽음과 삶을 깊게 모르는 입에서나 나오는 법,
한지에 먹물 번지듯 햇살이 창에 들듯 죽음은 삶에 스며드는 법,
밝고 따스하게 스미는 죽음의 이치를 알고 나면 늙음도 더 이상 두려운 게 아니지,
죽음을 알고 나면 지혜로움만 남기에, 오히려 태평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네!”
석전스님은 당대의 고승으로 추앙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대 지식인들이 큰스승으로 섬길 만큼, 동-서양의 학문에도 통달하셨고, 특히 우리 한겨레의 뿌리를 밝히는 한국학(韓國學)의 태두(泰斗)라고 불리웠다.
스님은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선생의 학문과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金石學)을 깊이 탐구했고,
이를 현장체험하기 위해 1924년 7월부터 제주도, 금강산, 호남지방 등의 명찰을 수차례 답사했고, 특히 한철학과 한국학의 본향인 백두산에는 일곱 번이나 올랐다.
스님의 백두산행에 수행한 최남선은 이 때 스님으로부터 그 누구로부터도 듣지 못했던 단군고사(檀君古史)와 동명고강(東明古疆)의 한겨레 강역(疆域)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 후일 최남선이 고육지책으로 일제의 <조선사 편수작업>에 참여하는 한편으로는 일제의 조선사 편수 목적에 대항하는 <불함문화론>을 쓰게 된 바탕이 바로 석전 스님의 백두산 등정 강설이다.
석전스님께서 백두산에 올라 읊으신 한시(漢詩)
曉日天池浴(효일천지욕) 천지에서 몸을 씻고 솟아나는 새벽해
虹霓斷復連(홍예단복연) 무지개는 끊어 질 듯 이어지고 있는데
光風吹瀨急(광풍취뢰급) 햇살 실은 바람이 급한 여울처럼 불어오더니
蕩破西峯煙(탕파서봉연) 서쪽 봉우리의 안개를 몽땅 쓸어버리는구나.
[석전정호선사(石顚鼎鎬禪師 1870-1948) 속명 박한영(朴漢永)]
다산선생의 유적지를 탐사하며 남해안 일대를 답사할 때 다도해의 노을을 바라보며 읊으신 한시(漢詩)
多島亭亭映日斜(다도정정영일사) 다도해 곳곳마다 노을 빛 쏟아지니
姻雲錯落似奇花(인운착락사기화) 저문 구름 붉게 피어 한 송이 꽃처럼 지고
波光岸影隨帆轉(파광안영수범전) 파도 빛과 뭍 그림자 돛배 따라 흐르니
身世蒼凉等落霞(신세창량등락하) 이 내 몸 쓸쓸하여 저녁노을과 한가지네
스님은 많은 한시를 남겼다. 그 가운데 ‘돌대(石臺)’라는 제목의 시를 소개한다. 이 시는 미당 서정주가 은사의 한시를 모아 정리한 유고 가운데 하나다. 출처는 동국역경원에서 발행한 <석전 박한영 한시집>.
白級層岩頂(백급층암정) 백층 바위 꼭대기
孤庵若爲橫(고암약위횡) 가로놓인 외로운 암자
巒山章分穢貊(만장분예맥)산등성이 하나로 예맥이 갈라지고
雲海捿蠻荊(운해서만형) 구름 바다에 만과 형이 이어지네
扁額擎虹貫(편액경홍관) 달린 액자에 놀란 무지개 꿰었으며
斷碑己蘇生(단비기소생) 끊어진 빗돌 이미 깨어났어라
有言古井頂(유언고정정) 전설 얽힌 옛 우물 마루
佛躍跏趺成(불약가부성) 부처님은 벌써 가부좌 틀었네.
[석전정호선사(石顚鼎鎬禪師 1870-1948) 속명 박한영(朴漢永)]
-석전 스님이 정읍 내장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의 일화-
하루는 제자 하나가 스님께 못 보던 과자를 드렸습니다.
“그 과자 맛이 아주 좋구나.”
“그건 오징어를 다시마로 싼 것입니다. 오징어를 드셨으니 계를 범하셨지요.
바로 그 점에 대한 법문을 듣고 싶어 스님께 드린 겁니다.”
제자의 말을 듣고 스님은 미소를 지으며,
“오징어를 먹인 것은 너희들이니 계를 범한 쪽은 바로 너희들이니라.”
“그래도 잡수신 분은 스님 아니십니까?”
“허허, 어른이 갓난아이에게 뜨거운 인두를 덥석 쥐어주면 과연 누구의 잘못인고,
순진무구한 갓난아이의 잘못인고, 아니면 어른의 잘못인고?”
이같이 스님은 쉬운 말로 지계(持戒)의 뜻을 일깨웠다.
70.석창법공선사(石窓法恭禪師 1102-1181)
[임종게(臨終偈)]
당양일구(當陽一句) 뚜렷한 이 한 마디에
경무회호(更無回互)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다네
월락한담(月落寒潭) 달은 차가운 못에 떨어지고
연미고도(烟迷古渡) 옛 나루터는 안개 속에 가리워진다
[불탄절 지은 송][석창법공선사(石窓法恭禪師 1102-1181)]
오천일척봉호전(五天一隻蓬蒿箭) 오천축국에서 쏜 한가닥의 쑥대 화살이
교동지나백만병(攪動支那百萬兵) 중국의 백만병사를 휘저어놓았네
부득운문행정령(不得雲門行正令) 운문의 바른 명령 행하지 못하면
기호착인정반성(幾乎錯認定盤星) 자칫 저울눈금을 잘못보게 되리라
[분강(紛康:1126)에 호상(湖湘)에서 동월(東越)로 돌아갈 때 법충스님은 송을 지어 그를 전송하였다.]
한사석인희사주(閑思昔日戱沙洲) 모래섬에 놀던 그 옛날 부질없이 회상하며
굴지우금사십추(屈指于今四十秋) 손꼽아 헤아려보니 어느덧 40년
군도석창한차문(君到石窓閑借問) 그대 석창사에 가거든 조용히 묻게나
허다풍월부수수(許多風月付誰收) 이 많은 풍월을 누구에게 주어야 할지를
[석창법공선사(石窓法恭禪師 1102-1181)]
[석창 법공(1102~1181, 조동종)선사는 도행이 뛰어나고 재주와 역량이 대단했다.
오랫동안 천동사(天童寺)의 굉지(宏智正覺)선사에게 귀의하여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맡아보며 지냈다
석창법공(石窓法恭:1102∼1181)선사는 총림을 두루 참방하고 오랫동안 황룡 법충
(黃龍法忠:1084∼1149)도인에게 의지하다가 뒷날 굉지(宏智正覺)스님에게 귀의하였다.
선사는 당(唐) 나라의 승려(僧侶 사문)로서 수(隋) 나라 말엽 안문(雁門) 휘하(彙下)의 낭장(朗將)이었다. 그는(석창법공) 가정(家庭)을 버리고 청량산(淸凉山) 깊은 골짜기에 이르러
“오직 마음이 부처를 만든다.”라고 하는 『화엄경(華嚴經)』게송을 항상 염송(念頌)하였다.
그러다 후(後日)에 기이한 스님(奇僧)을 만나 반야지(槃若智)의 현묘한 종지(賢妙宗旨)를 전수(傳受)
받고 활연히 마음이 공(空)해졌고 임종(臨終) 때도 앉아서(坐佛) 서거(입적)하였다.
71.선하자선사(禪荷子禪師) -조선 선조 때 스님
[오도송(悟道頌)]
托鉢精誠感羅漢(탁발정성감나한) 탁발정성이 나한님을 감동시켜
供養什物上般來(공야집물상반래) 공양집 물을 절로 올라오게 하더니
祈禱一念化文殊(기도일념화문수) 한 생각 빈 마음에 문수보살 나타나
一發銃聲通大道(일발총성통대도) 한 발의 총성으로 대도를 성취케 하였도다.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 선조 때 선하자(禪荷子)라 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이 스님은 벽송대사(碧松大師)의 제자요, 조선시대 제일의 고승으로 추앙받고 있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사숙이 되는분입니다.
스님은 경상도 울산 출생으로, 일찍이 부모를 잃고 16세에 道를 이루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습니다. 24세가 되던 해, 스님은 크게 마음을 다져 잡고 많은 성현들이 이적(異蹟)을 나타내 보였다는 묘향산 문수암 (文殊庵)으로 가서 대오(大悟)의 서원을 세우고 정진하였습니다.
-중략-
그날부터 선하자 스님은 직접 마지(부처님께 올리는 밥)를 지어 올리며 백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마침네 1백일이 흘러 회향날이 되었습니다. 스님이 마지막 마지를 지어 법당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
갑자가 커다란 망태기를 짊어진 늙수그레한 포수가 나타나 애원했습니다.
"스님, 여러 날 동안 굶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제발 그 밥을 저에게 주십시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그 밥을 주고 싶었으나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인지라,
스님은 도리어 포수에게 사정을 하였습니다.
"영감님 사정을 보아서는 마땅히 이 공양을 드려야 하겠지만, 오늘이 바로 저의 백일 기도를 회향하는 날입니다. 잠깐만 기다리면 기도를 마치고 상을 차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포수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스님께서 마지를 올리고 나면 저는 이미 배가 고파 죽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 마지를 올리는 것보다 불쌍한 중생 하나를 살리는 것이 더 뜻있는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스스로 부처님께 깊이 맹세한 바가 있어 어쩔 수 없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히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이 총으로 스님을 죽이고 밥을 빼앗아 먹 을 수밖에!" 포수가 총을 겨누었지만 스님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역지껏도 굶었는데 잠깐 사이를 참지 못한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나 또한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할지라도 마지를 부처님께 먼저 올리지 않고는 당신에게 밥을 드릴 수 없소."
선하자 스님이 그를 떨치고 법당으로 올라가자, 포수는 스님의 등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탕-."
총소리는 온 산중에 메아리쳤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죽어야할 선하자스님은 쓰러지기는커녕 그 순간 확철대오(廓徹大悟)하였습니다.
스님은 너무나 기뻐 덩실덩실 춤을 추며 가가대소(呵呵大笑)하였습니다.
그러다 가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니 포수는 간곳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분은 포수가 아니라 선하자 스님의 정성을 시험하고 깨달음의 연(緣)을 심어주기 위해 나타난 문수보살님이었습니다.
죽고 사는 것까지 넘어서서 깨달음을 이루고자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깨달음이 다가서기 마련입니다. 꼭 참선을 하여야만 도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선하자 스님의 경우처럼 기도가 꿈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일념삼매(一念三昧)에 젖어 들게 되면 깨달음의 문이 저절로 열리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72.설잠선사(雪岑1435-1493) 매월당(梅月堂)
[선월(禪月)매월당(梅月堂) 설잠(雪岑, 1435-1493)스님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속명은 김시습(金時習)이고, 본관은 강릉이며,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만정추월백삼삼(滿庭秋月白森森) 뜰에 가득한 가을 달 흰빛이 창창한데
인정고등야이심(人靜孤燈夜已深) 사람 없어 고요하고 외로운 등(燈)밤은 깊었다
풍담상청불성몽(風淡霜淸不成夢) 바람 담담하고 서리 맑아서 꿈 못 이루는데
지창염영동선심(紙窓簾影動禪心) 종이,창,발 그림자에 선심이 무엇인지 깨달았구나
선사의 깨침은 태산같은 설산이 녹아내린 것과같다.
[선등(禪燈)]
일점고등형(一點孤燈烱) 한점의 외로운 등불 빛나는 것은[빛날형]
등상두구시(登床杜口時) 세상에 올라 입을 다문 그 때이네
기봉사임림(機鋒似林臨) 심기(心氣)는 번뇌망상과 비슷한데
제오계희이(濟奧契希夷) 오묘한 이치는 희이(希夷,돈오)와 어루러졌으나
시각부생환(始覺浮生幻) 부생(浮生)이 환상임을 비로소 깨치니
다참숙업치(多참宿嶪癡) 전 생업이 어리석어 부끄럼 많다
선심여선대(禪心與禪大) 선심(禪心)은 선행(禪行)보다 더 큰데
상조기인지(相照幾人知) 그 비침을 누가 알리요.
[古風(고풍) 雪岑禪師(설잠선사)]
좌구불능매(坐久不能寐) 오래도록 앉아 있어도 잠 못 이루어
수전일촌촉(手剪一寸燭) 한 치 남은 촛불 심지 베어 내었네
상풍괄아이(霜風聒我耳) 서리 바람 내 귀에 들려 오더니
미산락상액(微霰落床額) 싸락눈 침대 가에 떨어졌네
심지정여수(心地淨如水) 마음 속 깨끗하기가 물 같아서
소연무애격(翛然無礙隔) 빠르게 장애됨이 없고 막힘이 없네
정시망물아(正是忘物我) 바로 그것이 너와 나를 모두 잊는 것
[煮茶(자다:차를 달이며)雪岑禪師(설잠선사)]
송풍경불자다연(松風輕拂煮茶烟) 솔바람 솔솔 불어 차 달이는 연기몰아
요요사횡낙간변(裊裊斜橫落澗邊) 하늘하늘 가로 풍겨 시냇가에 떨어지네.
월상동창추미수(月上東窓揂未睡) 동창에 달 떠 올라도 잠 아직 못 이루고
설병귀거급한천(挈甁歸去汲寒泉) 병들고 돌아가서 찬 샘에 물 긷네.
[茗梡宜自酌(명완의자작):茶椀(차완)에 가득 차나 따라 마시세]
[養茶양다 雪岑禪師 설잠선사][선월(禪月)매월당(梅月堂) 설잠(雪岑 1435-1493)스님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속명은 김시습(金時習)이고, 본관은 강릉이며,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연년다수장신지(年年茶樹長新枝) 해마다 차나무에 새 가지가 자라네
음양편리근호지(蔭養編籬謹護持) 그늘에 키우느라 울을 엮어 보호하네
육우경중경색미(陸羽經中經色味) 육우의 다경속엔 빛과 맛을 논했는데
관가각처취창기(官家榷處取槍旗) 관가에서 도거리 할 적엔 어린 찻잎만 바치라네
춘풍미전아선추(春風未展芽先抽) 봄바람이 아직 불지 않아도 싹이 먼저 터 나오고
곡우초회엽반피(穀雨初回葉半披) 곡우 때가 돌아오면 잎이 반쯤 피어나네
호향소원한난지(好向小園閑暖地) 맑은 동산 한난(閑暖)한 곳을 좋아해 뻗어나가면
불방인우착경유(不妨因雨着瓊蕤) 비 때문에 옥 같은 꽃 드리워도 무방하리라
[설잠 선사는 세종 17년(1435)에 성균관 뒤편에 있는 사저에서 출생하였다.
관향은 강릉 김씨, 속명은 시습(時習), 자는 열경(悅卿), 호는 청한자(淸寒子), 매월당(梅月堂),
법명은 설잠(雪岑), 법호는 동봉(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 법자는 췌세옹(贅世翁)이다.
선사는 세상에 알려져 있듯이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는 어디서 나는가”는 시를 읊었다.
선사는 세종의 총애를 받을 정도로 신동소리를 들었지만 유년시절부터 삶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13세에 이계전, 김반, 윤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타고난 천재성은 일취월장하지 못하여 시련의 길을 걷고 말았다. 1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소년기를 보냈으며, 이러한 생활 속에서는 학업을 이루지 못할 것을 깨닫고 삼각산 중흥사에 들어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21세 되는 해에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견광인자 세아속생(犬狂人者 世我俗生 : 미친개 같은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서 어찌 살 수가 있겠는가)”하고서 똥통 속으로 들어가 3일간 있다가 나와 삭발하였다. 그 후 선사는 산천을 두루 섭렵하여 다니다가 문경새재에 있는 깊은 곳에 은거하여 용맹정진하였다.
선사께서 용맹정진 하였던 곳은 선사의 부도가 있는 혜국사로 추정된다. 이 사찰은 신라 문성왕
8년(846)에 보조 국사가 창건한 법흥사다. 또한 고려 공민왕이 이곳에 행차하여 산의 이름도 설잠산(雪岑山)에서 주흘산(主屹山)으로 고칠 것을 명하였다. 이곳에 주석하면서 선사의 법명이 설잠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선사는 선실에 켜져 있는 등불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선사의 깨침은 태산같은 설산이 녹아내린 것과 같다.
선사는 승려로서 때로는 걸인으로서 시인으로서 또한 천민들과 각설이패와 어울리면서 선(禪)의
세계를 자연과 더불어 마음껏 발휘하여 소외된 중생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었다.
선사는 오늘날까지 중생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준 시대를 초월한 선사로서 무애자(無碍者)이다. 또한 선사는 금오산 용장사(金鰲山 茸長寺)에 주석하실 때 차나무를 심고 가꾸었으며, 일본 스님인 ‘도시모지우까이(俊茂)’에게 우리나라의 다담선(茶湛禪)과 다도를 가르쳤다.
승려로서의 설잠은 간화선 계열의 선승이면서도 화엄(華嚴)․법화(法華) 사상과 조동선(曹洞禪)까지 깊이 연구, [화엄법계도주(華嚴法界圖註)]와 [법화경별찬(法華經別讚)],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조동오위요해(曹洞五位要解)] 등을 저술하여 조선 초기 불교 암흑시대에 불타의 혜명을 잇는다.
스님의 유저(遺著)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비롯하여, [매월당집(梅月堂集)]·[매월당시사유록(每月堂詩四遊錄)]·[화엄법계도주(華嚴法界圖註)]·[법화경별찬(法華經別讚)]·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조동오위요해(曹洞五位要解)] 등이 있다.
선사는 성종 24년(1493)에 열반하였다.
73.성림당 월산대종사(聖林堂月山大宗師 1912-1997)
[열반송(涅槃頌)]
회회일생(廻廻一生) 일생을 돌고 돌았으나
미이일보(未移一步) 아직 한 걸음도 옮기지 않았도다
본래기위(本來其位) 본래 그 자리는
천지이전(天地以前) 하늘땅보다 먼저이니라
[오도송(悟道頌)] [성림당 월산대종사(聖林堂月山大宗師 1912-1997) 열반송(涅槃頌)]
홀각본래사(忽覺本來事) 참모습 깨닫고 보니
불조재하처(佛祖在何處) 부처와 조사 어디에 있는고
두리장건곤(肚裏藏乾坤) 몸속에 하늘과 땅 본래 감추어 있으니
전신하자후(轉身獅子吼) 몸을 뒤쳐 사자후를 하노라
불립(不立) 세우지 않고
불사(不捨) 버리지 않고
불휴(不休) 쉬지 않도다.`
[성림당 월산 대종사는 한국불교의 전환기에 산문에 들어 한국불교의 중흥을 이끈 대표적인 고승이다. 월산 스님은 선원과 강원을 개원해 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혼탁해진 사찰을 일신하려 애썼다. 또 총무원장·종회의장·원로회의 의장 등 조계종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종단의 기틀을 세우고자 했고 한국불교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이와 더불어 월산 스님의
뚜렷한 업적이 바로 『법보신문』 창간으로 이는 월산 스님의 일생에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초대 발행인이었던 월산 스님은 1988년 5월 16일 『법보신문』을 창간하면서 ‘존경진리
(尊敬眞理), 굴복아만(屈伏我慢), 공명정대(公明正大)’라는 사훈으로 『법보신문』의 방향을 명확히
제시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선양하고, 불교계 안팎으로 팽배해있는 아집과 교만심을
항복받으며, 옳고 밝은 것을 드러내고 널리 펴라는 의미였다.]
[1913년5월1일 함경남도 신흥군 원평면 원평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 최흥규(崔興奎) 선생과
모친은 노씨(魯氏)의 3남2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속명은 종렬(鍾烈)이다. 엄격한 가정교육과
서숙(書塾, 글방, 서당)을 거쳐 신학교에서 학문을 익혔다. 부친 별세후 무상(無常)을 절감하고
구도의 길에 올랐다. 정처 없이 천하를 주유(周遊)하다 안변 석왕사와 치악산 상원사를 거쳐 도봉산 망월사에 이르렀다.
1944년 망월사에서 춘성스님의 안내로 금오 (金烏)스님을 친견한 후 출가 수행자의 길어 들어섰다. 해방을 전후해 덕숭산 만공(滿空)스님 회상에서 정진을 거듭하고 ‘이 뭣고’라는 화두를 받았다.
금봉(錦峰).금오.전강(田崗) 스님 등 당대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 수선 안거한 후 가르침을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 3년간 운수행각에 나섰다. 금오스님의 보임처(保任處)인 보길도 남문사 와 청도
적천사에서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섰다.
1948년 문경 봉암사에서 향곡.청담.성철.보문.자운 스님등과 함께 결사 수행을 시작했다.
‘문경 봉암사 결사’는 한국불교 재흥(再興)의 초석을 놓은 의미 있는 결사였다. 공주청규(共住淸規)를 제정해 가행정진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은사 금오스님을 모시고 정화불사에 나섰다. 팔공산 동화사, 속리산 법주사, 설악산 신흥사,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각화사의 도량을 일신했다. 1968년 금오스님이 입적할 당시 “모든 일은 월산에게 부촉(咐囑)하노라”며 법을 전했다. 경허.만공.보월.금오 스님의 법맥이 월산 스님에게 이어진 것이다.
스님은 법주사.불국사.금산사.대승사.불영사 등 제방 선원의 조실로 추대되어 수좌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했다. 또한 1968년과 1978년 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했다. 1986년 원로회의 의장으로
불자들의 정신적 지주로 법등(法燈)을 밝혔다.
평생 수행자의 길을 걸으며 정화불사와 종단발전을 위해 노력한 월산스님은 1997년 9월6일 오후8시10분 경주 불국사 선원 염화실에서 원적했다. 세수 86세, 법납 55세. 상좌로 성타.활안.법달.정휴.장주.종상.종후.종광.종현.종성 스님 등이 있다.]
74.성철선사(퇴옹당性澈禪師 1912-1993)
[오도송(悟道頌)]
황하서류곤륜정(黃河西流崑崙頂) 항하수 곤륜산 정상으로 거꾸로 흐르니
일월무광대지침(日月無光大地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대지는 꺼지는도다
거연일소외수립(遽然一笑回首立)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서니
청산의구백운중(靑山依舊白雲中) 청산은 예대로 흰구름 속에 섰네
[출가송(出家頌)]
미천대업홍로설(彌天大業紅爐雪)
하늘에 넘치는 큰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점의 눈송이요
과해웅기혁일로(跨海雄基赫日露)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수인감사편시몽(誰人甘死片時夢)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초연독보 만고진(超然獨步萬古眞)
만고의 진리를 향해 모든 것 초연히 나홀로 걸어가노라,
[涅槃誦(열반송)]
생평기광남녀군(生平欺狂男女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미천죄업과수미(彌天罪業過須彌)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활함아비한만단(活陷阿鼻恨萬端)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일륜토홍괘벽산(一輪吐紅掛碧山)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성철스님은 1912년(1세,壬子), 음력 2월 19일(양력 4월 6일)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아버지 율은(栗隱) 이상언(李尙彦, 1881~1959), 어머니 강상봉(姜相鳳, 1893~1957)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속명은 이영주(李英柱). 어머니가 스님을 임신하고서는 문밖출입을 삼가고 모난 음식을 먹지 않고 모난데 앉지 않는 등 온갖 정성으로 태교하였다고 전한다.
1920년(9세, 庚申), 4월 단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다. 입학하기 전에 서당을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6년(15세, 丙寅), 3월 단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다. 진주중학교 입학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나 신체검사에서 탈락하다. 원래 몸이 약했던 스님이 이 무렵부터 요양차 대원사에
드나들다.
1931년(20세, 辛未), 대원사에 드나들며 불교에 빠질 것을 염려한 집안에서 결혼을 서두르다. 11월 이덕명(1909~1982)과 혼인신고.
1932년(21세, 壬申), 12월 2일 간례휘찬(簡禮彙纂)에 이영주서적기를 남기다. 행복론,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역사철학, 장자남화경, 소학, 대학, 하이네 시집, 기독교의 신구약성서, 자본론, 유물론 등 동서고금의 철학에 관한 책 약 70여 권의 제목이 적혀 있다.
20세를 전후한 시기에 본격적으로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불교 관련 서적을 탐독하다.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스님의 증도가를 읽고 밤중에 횃불을 만난 것 같았다고 회고하였다. 잡지 「불교」를 통해 화두 공부를 익히고 대원사 요양 중에 서장(책)을 보다.
1935년(24세, 乙亥), 이무 렵 대원사 탑전에서 화두참구하며 42일 만에 동정일여의 경지에 이르렀다. 대원사에서 해인사에 연락하여 환경스님(1887∼1983)의 제자 최범술(효당스님, 1904∼ 1979)이 대원사를 방문하다. 최범술의 권유로 스님이 해인사에 가다.
1936년(25세, 丙子), 1924년에 선원으로 확장된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정진하다. 반대 여론이
있었으나 주지 이고경(李古鏡, 1882~1943) 스님의 호의로 정진을 계속하다. 해인사에서 강의하던
강사 김법린 (1899∼1964)이 교학 연구를 권하다. 3월 3일 범어사 조실 하동산(河東山, 1890~1965)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출가하다.
1937년(26세, 丁丑), 3월 15일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비구계를 받다.
1965년(54세, 乙巳), 4월 30일 동산스님이 입적. 1967년에 세운 동산스님 사리탑 비문을 짓다.
1967년(56세, 丁未), 7월 25일 제16회 임시중앙종회에서 해인사에 방장 체제의 해인총림 설치가
결의되면서 해인총림 방장에 추대되다.
1981년(70세, 辛酉), 1월 20일 조계종 6대 종정으로 취임하였으나 취임법회에는 나가지 않으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가 화제로 등장하다.
[종정수락법어]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1993년 11월 4일 합천 해인사 퇴설당에서 입적하였다. 11월 10일 영결식 및 다비식을 봉행하여
11월 12일 100여과에 이르는 사리를 수습하다. 1998년 11월 해인사 운양대에 사리탑을 봉안하다. 2001년 3월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생가터에 기념관을 건립하고 겁외사를 창건하다.
75.소동파蘇東坡(동파東坡:본명蘇軾소식 1036-1101)
[오도송(悟道頌)]
계성편시장광설(溪聲便是廣長說) 계곡물 소리는 한량 없는 부처님의 설법이요
산색기비청정심(山色豈非淸淨心) 산천초목 울긋불긋 빛깔은 어찌 청정 법신이 아닌가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밤 사이에 내린 계곡물 소리 팔만사천 게송인데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 이 도리를 남에게 어떻게 일러줄까나
약언금상유금성(若言琴上有琴聲) 거문고에 소리가 있다 하면은
방재갑중하불명(放在匣中何不鳴) 갑 속에 두었을 때는 왜 안 울리나.
약언성재지두상(若言聲在指頭上) 그 소리 손가락 끝에 있다 하면은
하부어군지상청(何不於君指上聽) 그대 손끝에선 왜 안 들리나.
금슬비파(琴瑟琵琶) 거문고와 비파
수유묘음(雖有妙音) 비록 아름다운 소리 가졌으나
약무묘음(若無妙指) 오묘한 손놀림이 없으면
종불능발(終不能發) 소리를 낼 수 없다네
[제서림벽(題西林壁)]
횡간성령측성봉(橫看成嶺側成峰) 가로로 보면 산등성 옆으로 보면 뾰쪽한 봉우리
원근고저각부동(遠近高低各不同)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제각기 다르니
불식여산진면목(不識廬山眞面目) 진정으로 알 수 없노라, 여산의 참모습을
지연신재차산중(只緣身在此山中) 그것은 이 몸이 산중에 있기 때문이리라.
[‘동파선생묘지명東坡先生墓誌銘’에 의하면,
소동파는 병세가 위독해지자, 1102년 7월 18일 세 아들을 불러 말했다.]
오생무악(吾生無惡) 나는 일생동안 추호도 악행惡行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필불타(死必不墮) 죽은 다음 절대로 지옥地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니
신무곡읍(慎無哭泣) 부디 울며불며 통곡痛哭하지 말라!
[소동파는 북송 인종(仁宗) 때(1036.12.19.) 메이산에서 태어났다.(메이산,眉山:지금의 쓰촨 성(四川省)에 있음) 본명은 소식(蘇軾), 자는 자첨(子瞻). 동파는 그의 호로 동파거사(東坡居士)에서 따온 별칭이다.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3소'(三蘇)라고 일컬어지며, 이들은 모두 당송 8 대가
(唐宋八大家)에 속한다(소순, 소철).
호는 동파(東坡). 王安石의 정치개혁에 반대하는 시를 썼다가 귀양 갔다. 당송 팔대가(唐宋 八大家) 가운데 한 사람.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宋송 4대 書家서가 가운데 한 사람. 禪선에도 깊이 통달해 상총조각(常總照覺) 선사의 법을 이어받아 <悟道頌오도송>을 짓기도 했다.
저서에는〈동파집 東坡集〉 40권과 〈동파후집 東坡後集〉 20권은 남송 데의 판본이 여러 종류 남아 있다. 이 두 책에 〈주의 奏議〉·〈내제집 內制集〉·〈외제집 外制集〉·〈응소집 應詔集〉·〈속집 續集〉을 합친
〈동파칠집 東坡七集〉은 100권이 넘으며, 〈동파전집 東坡全集〉이라 불리기도 한다.]
76.소요태능(逍遙太能 1562-1649) 혜감국사慧鑑國師
[열반송(涅槃頌)]
해탈비해탈(解脫非解脫) 해탈이 해탈이 아니니
열반기고향(涅槃豈故鄕) 열반이 어찌 고향이리
취모광삭삭(吹毛光爍爍) 취모검의 칼날이 번뜩이니[빛날삭]
구설범봉망(口舌犯鋒鋩) 입 벌리면 그대로 목이 잘리네.[서슬,칼날망]
[오도송 悟道頌]
거려천지가형래(蘧廬天地假形來) 천지天地라는 여관旅館에 형체形體를 빌어 와서
참괴다생탁루태(慚愧多生托累胎) 여러 생生 동안 여러 몸으로 살았던 것 부끄럽네.
옥진일성개활안(玉塵一聲改活眼) 꽃잎 지는 한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으니
야심명월조령대(夜深明月照靈臺) 깊은 밤 밝은 달이 내 마음을 비추누나.
[오도송(悟道頌)]
가소기우자(可笑騎牛子) 우습다 소 탄 자여!
기우갱멱우(騎牛更覓牛)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작래무영수(斫來無影樹)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가
소진해중구(銷盡海中漚) 저 바다 거품을 다 태워 다하라.
[혜감국사慧鑑國師 소요태능 逍遙太能1562-1649] [검각(劍覺:부처님의 칼)]
비성폭죽기봉준(飛星爆竹機鋒峻) 비성(飛星)과 폭죽(爆竹)의 날카로운 칼날 우뚝하고
열석붕의기상고(烈石崩嶬氣像高) 갈라지는 돌 무너지는 언덕의 기상 높도다
대인살활여왕검(對人殺活如王劍) 사람을 죽이고 살림이 왕의 검과 같은데
늠름위풍만오호(凜凜威風滿五湖) 늠름한 위풍이 온 세상에 가득하도다
거년별아여산정(去年別我廬山頂) 지난해 우리 여산에서 이별했더니
금일송군초수빈(今日送君楚水濱) 오늘은 초숫가에서 그대를 보내네
이사유유양무어(離思悠悠兩無語) 이별하는 슬픈 마음 아득히 그대와 나 말이 없는데
낙화제조우잔춘(洛花啼鳥又殘春) 꽃 지고 새 울며 남은 봄이 가고 있네
[혜감국사慧鑑國師 소요태능 逍遙太能1562-1649]
수상니우경월색(水上泥牛耕月色) 물 위에 진흑 소가 달빛을 갈고
운중목마체풍광(雲中木馬掣風光) 구름 속 목마가 풍광을 끌고 가네
위엄고조허공골(威音古調虛空骨) 태고의 옛 곡조 허공 속 뼈요
고학일성천외장(孤鶴一聲天外長) 외로운 학의 일성은 하늘밖에 퍼지는구나!
[출전은 “소요당집(逍遙堂集)”]
스님의 호는 소요(逍遙). 법명은 태능(太能). 전라남도 담양 출신, 성은 오씨(吳氏).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전법제자(傳法弟子)이자 소요파(逍遙派)의 개조(開祖)이다.
13세에 백양산(白羊山)의 경치에 감화 받아, 진대사(眞大師)로부터 계(戒)를 받고 출가하였다.
그 후 속리산과 해인사 등지에서 부휴(浮休)에게 경률(經律)을 익혔는데 부휴의 수백명의 제자들 중, 태능 · 충휘(沖徽) · 응상(應祥)이 법문(法門)의 삼걸(三傑)이라 불렸다.
그는 묘향산으로 휴정을 찾아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화두를 물었다. 문답한 뒤, 휴정은 의발
(衣鉢)을 전하고 3년 동안 지도한 뒤, 개당설법(開堂說法)을 하게 하였다. 그 뒤 휴정에게 다시 탁마한 후, 크게 깨달았다.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의 서성(西城)을 보완하였으며, 지리산의 신흥사
(神興寺)와 연곡사(燕谷寺)를 중건하였다.
1649년 11월 21일 법문과 임종게를 설하고 나이 87세, 법랍 75세로 입적하였다. 사리를 연곡사 · 금산사(金山寺) · 보개산(寶蓋山) 세 곳에 나누어 모시고 부도(浮屠)를 건립하였다. 그를 흠모한 효종은 1652년(효종3) 혜감선사(慧鑑禪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경석(李景奭)을 시켜 비명(碑銘)을 지어 금산사에 세우게 하였다.
제자로는 현변(懸辯), 계우(繼愚), 경열(敬悅), 학눌(學訥), 처우(處愚), 천해(天海), 극린(克璘), 광해(廣海)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소요파로 불리는 수백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저서로는 『소요당집』 1권이 있다.
77.수산성념선사(首山省念 926-993)
[열반송涅槃頌]
노승금년륙십칠(老僧今年六十七) 내 나이 올해 예순 일곱
로병상의차과일(老病相依且過日) 늙고 병들어 그럭저럭 세월만 보낸다
금년기취명년사(今年記取明年事) 올해에 명년 할 일을 기록하였다가
명년기저금년일(明年記著今年日) 이듬해에 올해의 일을 더듬어보면
지명년시개무상(至明年時皆無爽) 명년이 와도 다 어긋남이 없으리.
백은세계금색신(白銀世界金色身) 은세계 금색부처
정여무정공일진(情與無情共一眞) 유정이고 무정이고 모두가 하나의 참다운 법
명암진시구불조(明暗盡時俱不照) 밝음과 어둠이 다할 때 모두가 비춤이 없다가
일륜오후시전신(日輪午後示全身) 오후의 태양에 온몸을 보이도다.
[정오에 편안히 앉아 입적][수산성념선사(首山省念 ) 열반송涅槃頌]
[수산 성념(首山省念 926-993)스님은 법을 전수하는 요점(傳法綱要)을 게송으로 읊은 적이 있다.]
돌돌졸낭군(咄咄拙郞君) 쯧쯧! 못난 낭군이여
기묘무인식(機妙無人識) 기연(機緣)이 오묘하여 아는 이 없어라
타파봉림관(打破鳳林關) 봉림관을 깨부수고
천화수상립(穿靴水上立) 물 위에 신을 신고 서 있네.
돌돌교여아(咄咄巧女兒) 쯧쯧! 꾀많은 아가씨여
정준불해식(停梭不解織) 베틀을 세워두고 베 짤 줄을 모르는구려
탐간투계인(貪看鬪鷄人) 닭싸움을 뚫어지게 보느라고
수우야불식(水牛也不識) 물소를 알지 못하였네.
제43칙[首山竹비(수산죽비)]
首山和尙, 拈竹 篦 示衆云, 汝等諸人, 若喚作竹 篦 則觸. 不喚作竹篦則背 汝諸人 且道, 喚作甚麽
수산화상 점죽 비 시중운 여등제인 약환작죽 비 즉촉 불환작죽비즉배 여제인 차도 환작심마
[수산 성념 선사가 죽비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면서 말하였다.
“너희들, 만일 이것을 죽비라 부르면 ‘범하는’ 것이고, 죽비라 부르지 않으면 ‘등지는’ 것이다.
어디 말해보라. 무어라고 불러야 하겠느냐.”]
수산스님은 속성은 狄(적)씨. 어려서 출가하여 항상 '법화경'만을 열심히 독송하기 때문에
念法華(염법화)라고도 불렀다. 풍혈의 회상에 가서 아무 문답도 없이 지내는데 하루는 풍혈이
상당 설법에서「세존께서 푸른 눈으로 가섭을 돌아보신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냐 ?
만약 말씀없이 말씀하신 것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부처님을 매장하는 것이다」 하는 데서 크게 깨치고는 설법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무 말 없이 법당에서 나왔다.
풍혈의 법을 이어가지고 汝州(여주)의 首山(수산)에서 開堂(개당)하자 그 명성이 천하에 떨쳤다.
찾아오는 납자들을 낱낱히, 자세히 점검하므로 모여있는 대중들은 어느 때나 20여명 밖에 안되었다. 그러나 그의 법을 받은 제자는 十六명이 되었다.
송나라 太宗(태종) 淳化(순화) 4년 68세로 입적하였다.
78.숭산행원선사(崇山行願 1927-2004)
[오도송(悟道頌)]
원각산하비금로(圓覺山下非今路) 원각산 밑 오솔길은 지금 길이 아니고,
배낭행객비고인(背囊行客非古人) 등짐 지고 오르는 이, 옛사람이 아니로다.
탁탁이성관고금(濯濯履聲貫古今) 뚜벅뚜벅 발소리 옛날과 지금을 꿰뚫는데,
가가조성비상수(可可鳥聲飛上樹) 까악, 까악, 까악 까마귀는 나무 위를 나네.
Only go straight(용맹정진할 뿐이다)
Only don't know(오직 모를 뿐이다)
“스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저희는 어찌해야 합니까?” “걱정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예로부터 밝은 빛이요, 푸른 산에 흐르는 물이니라.”
(萬古光明 靑山流水)
[숭산 선사의 속명은 이덕인(李德仁)으로, 1927년 8월 1일 평안남도 순천군 군내면에서 출생하였다. 1940년에 순천공립학교를 졸업한 그는 부친의 뜻에 따라 평양공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숭산 선사가 이 학교에 다닌 시기는 일본 제국주의의 악랄한 식민통치가 막바지로 치닫던 때였으며, 그의 고향 평안남도 순천군은 일제 강점기에 항일운동이 가장 강렬하게 일어난 대표적인 지역에 속했다. 10대 후반의 청년 이덕인의 가슴도 애국심으로 불타고 있었으니, 일례로 재학 중 지하 독립운동단체 활동에 가담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중략-
그 후 선사는 수덕사의 고봉 선사에게 인가를 받고 1949년 1월 25일에 비구계를 수지함으로써
경허성우, 만공월면, 고봉경욱 선사로 이어지는 덕숭법맥의 계승자가 된다. 1952년 육군에 입대 후 전역한 다음 해 선사는 화계사 주지로 취임했다.
한편 효봉, 동산, 청담, 경산 스님들과 함께 불교정화운동을 추진하였는데, 1962년 비구․ 대처 통합종단 비상종회 의장으로 피선되어 활약했다.
이 외에도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재무부장, 초대 감찰부장 등, 전환기에 중책을 역임하며 종단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신문〉의 전신(前身)인 〈대한불교〉의 창간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생존 당시에 이미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태국의 틱낫한, 캄보디아의 마하 거사난다와 함께
“세계 4대 생불(生佛)”로 영국의 유명 작가이자 민속학자인 로웬스타인(Tom Lowenstein)의 저서,
『부처의 비전(The Vision of the Buddha)』에 소개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법랍 57세, 세수 77세 동안 숭산 선사가 남긴 발자취는 지금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 짙게 남아 있다.
그는 1966년 도쿄 재일 홍법원 설립을 시작으로, 1969년 홍콩, 그리고 1972년 미국 프로비던스(Providence)에 홍법원을 설립하며 한국 불교 세계화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이후 관음선종(The Kwan Um School of Zen) 창립으로 이어지며 세계 30여 개국에 120여 개 지부를 설립함으로써 5대양 6대주를 무대로 하며 한국 불교사의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79.승조선사(僧肇 383-414)
[열반송涅槃頌]
사대원무주(四大元無主)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고
오온본래공(五蘊本來空) 오온은 본래 공한 것일 뿐
장두임백인(將頭臨白刃) 칼날이 내 머리 내리치겠지만
이사참춘풍(恰似斬春風)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으리라.
[사대는 나의 존재가 아니며][승조법사(僧肇 383-414)]
사대비아유(四大非我有) 사대로 된 이 몸은 원래 주인이 없고
오온본래공(五蘊本來空) 오온도 본래 공이라
이수임백도(以首臨白刃) 머리를 가져 번뜩이는 칼날 앞에 대니
유여참춘풍(猶如斬春風) 마치 봄바람 베는 것 같네
[승조법사(338~414)]
장안(長安)에서 태어 났으며 처음에는 노자와 장자에 심취하였다. 뒤에 지겸(支謙)스님이 번역한 유마경을 읽고 불교에 귀의 하였다.
어느날 황제가 불러 벼슬을 주어 나라의 기둥으로 쓸 작정이었으나 가지 않아 어명을 어긴 죄로 참살을 당하였다. 그 때 죽음을 일주일만 보류해 달라고 하여 보장록(寶藏錄)이라는 명저를 남겼다.
그리고 위의 게송을 지었다. 스님의 저서는 보장록 외에 조론(肇論), 반야무지론, 열반무명론, 물불천론이 있으며 스님의 나이 서른 한살에 세상을 떠났다.]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북조 후진(後秦, 384~417)의 승려 승조(僧肇, 384~414) 법사가 쓴 <조론(肇論)>은 중국 사상사와 중국불교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저서이다.
<조론>에는 종본의(宗本義), 물불천론(物不遷論), 부진공론(不眞空論),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 유유민 거사의 질문 편지와 승조 스님의 답변 편지 포함),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 등이 있다. <종본의(宗本義)>를 제외하면 네 편의 논문이다. ‘승조(僧肇)’의 ‘조(肇)’와 ‘논(論)’ 자가 붙어 <조론(肇論)>이라는 책명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네 편의 논문의 성립은 모두 승조 나이 20대 때 쓰인 것이라니 놀라운 천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대략적인 성립연대는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반야무지론>은 404년에서 408년 사이,
<부진공론>과 <물불천론>은 409년에서 413년 사이,
<열반무명론>은 413년에서 414년 사이에 각각 찬술됐다고 본다.
[출처] <승조(僧肇) 법사의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
80.신수대사(神秀大師 606-706) 대통신수대사(大通神秀大師)
[오도송(悟道頌)]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몸을 깨달음의 나무요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마음은 밝은 거울이니,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물사약진애(勿使惹塵埃) 때가 끼지 않도록 하여라.
[신수(神秀) 대사의 전기는 <송고승전 >, <경덕전등록 > 등 후대에 찬술된 많은 승전에 실려
있지만 북종선이 단절돼 간략하게 돼있고 비교적 상세하고 믿을 수 있는 자료는 신수에게 귀의한 장열 (張說,667~730)이 대사의 입적 후 작성한 <대통선사비명(大通禪師碑銘 )>이다.
이에 의하면 신수의 속성은 이(李)씨이고 변주(汴州) 위씨(尉氏:현河南省동북부尉氏縣) 출신이라고 한다. ※說 ---말씀 설 , 달랠 세 , 기쁠 열 , 세 가지로 쓰이는 한자임.
신수는 신장이 8 척이고 눈썹이 길고 귀가 커서 귀인의 면모를 갖춘 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박학해서 견문이 넓었다.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현묘한 취지와 <서경(書經)> <주역(周易)>의 핵심을 파악했고 삼승경론(三乘經論)과 <사분율(四分律)> 등에 정통했다고 한다.
따라서 신수는 출가 전부터 유⋅불⋅도 삼교에 모두 뛰어났으며 특히 불교의 경⋅율⋅논에도 해박했음을 알 수 있다.
천축 승 보리달마로부터 첫발을 내디딘 중국의 선불교가 의젓한 하나의 교단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는 것은 그로부터 140여년 후인 4조 도신(四祖道信)과 5조홍인(五祖弘忍)의 동산법문 때부터다. 이어서 제도(帝都) 장안(長安)과 동도(東都) 낙양(洛陽)의 대법주(大法主)인 대통신수(大通神秀, 606~706) 대사의 눈부신 활약으로 선불교는 정치와 종교의 중앙 무대인 장안과 낙양까지 진출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측천무후와 중종(中宗)⋅예종(睿宗)의 국사(國師)로 삼제(三帝)의 귀의를 받았고, 장안과 뤄양의 법주로 추대돼 6년간 그 직을 맡았다. 때문에 후대에 “양경(兩京: 長安과 洛陽)의 법주(法主), 삼제의 국사(國師)”라고 칭해진다.
5조 홍인의 법이 신수의 북종선과 혜능(慧能, 638~713)의 남종선으로 나뉘어 전해졌다고 하지만 신수가 제도에 입성할 무렵엔 아직 혜능은 그 존재조차도 없었던 때였기에, 감히 혜능을 신수와
비교한다는 것이 신수에게 미안할 일이고, 그런 비교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다.
신수와 혜능의 나이차이가 30년 이상이므로, 신수는 혜능의 이름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므로
<육조단경>을 비롯해 신수와 혜능에 관해 전하는 일화들에서 신수와 혜능을 비교하는 일화들은
훗날 혜능의 제자들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봐야 한다.
신수와 혜능은 서로 상면한 적이 없고, 얼굴도 모르며, 나이 차이도 거의 30년 이상 차이가 나서, 혜능이 5조 홍인의 문하에 갔을 때는 이미 신수는 없었다.
다만 후에 혜능의 제자들의 노력으로 남종선이 압도하면서, 북종 선은 뛰어난 제자들이 나오지
못해, 이어지지 못하고 북종 선은 점점 자리를 잃게 된다. 그래서 훗날 중국 선을 총칭하는 5가 7종(五家七宗)은 모두 남종선 계통이다.
저서에 <대승무생방편문(大乘無生方便門)>과 <관심론(觀心論)> 등이 있다.
[출처] <대통신수(大通神秀: 606~706) 대사>
[신수대사 폄하는 역사왜곡이자 날조에 불과]
(돈황본 육조법보단경)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이 몸은 보리수(깨달음의 나무)이고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내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네.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물사야진애(勿使惹塵埃) 티끌과 번뇌가 끼지 않게 하세.
신수대사가 5조 홍인에게 자신이 깨달은 경계를 읊어 보인 이 示法詩(시법시)는 훌륭한 오도송이다. 오언절구의 근체시로써 시가 될 수 있는 조건인 문학성과 대구(對句), 平仄(평측) 그리고 押韻(압운)의 운율이 아주 잘 되어 있고, 심오한 禪理(선리)와 哲理(철리)를 담은 중국 시가 중 賦(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각각 깨달음의 나무와 밝은 거울에 비유한 것이 적절하고, 1구와
2구에서 몸[身〕과 마음〔心〕, 보리수와 명경대가 대구를 이룬 것이 훌륭하다. 명경(明鏡)이
자성불성을 상징하고, 진애(塵埃)가 삼독번뇌를 상징하는 것도 뛰어난 발상이다. 대(臺)와 애(埃)로 압운한 것도 완벽하다.
뿐만 아니라 1․2구에서 “우리의 본래마음이 청정한 것을 맑은 거울과 같음을 밝히고
(마음의 원리)”, 3‧4구에서 “본래마음은 청정하나 삼독번뇌의 먹구름이 가려서 불광을 발휘할 수 없음으로 시시때때로 오염되지 않도록 털고 닦는 수행을 하여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유지하자(마음의 수행)”고 균형 있게 읊고 있다. 체용동시(體用同時)이다.
신수대사의 오도송은 깨달음의 경지를 읊은 선리(禪理)로 보나 시로써 문학성 즉, 시격(詩格)으로 보나 나무랄 데가 없는 명품 선시이다.
그러나《육조법보단경》에서는 신수대사의 이 게송을 무상게(無相偈)라고 칭하고 있는데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번뇌가 끼지 않게 하세”라는 내용이 점수선(漸修禪)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우리의 본래마음(본래심,자성,불성)이 부처의 덕상과 지혜를 모두 구족하고, 청정한데 무엇을 따로 닦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근기가 낮은 신수 북종선에서 수행의 단계와 계단을 밟아서 점차적으로 닦아가는 점수선이라고 일방적으로 폄하하고 있다. 혜능의 남종선은 단번에 깨달음을 얻는 수승한 돈오선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육조법보단경》은 신회(神會)가 자신이 7대조사가 되기 위해 이미 황제(국가)로부터 6조로
인정을 받은 신수대사(7조는 그의 제자 보적선사)의 사상과 수행법을 일방적으로 깎아내리고 비판하여 혜능대사를 6대조사로 현창하기 위해 저술한 책이라는 주장이 있다. 돈황본 《육조법보단경》에는 신회가 7조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후에 편찬된 《육조단경》에는 신회가 덜 떨어진
지해(知解)종도가 되어 6조의 서자가 되고, 남악 회양이 7조가 되어 있다. 이것은 날조이다.
단두대를 만든 사람이 단두대에 목이 잘린 격이 되었다.
신수대사의 저서인 돈황출토 문헌《관심론》,《대승무생방편문》에는 돈오선 사상이 나타나
있다. 또한 남종선에서도 점오선(漸悟禪), 점수선이 나타나 있다.
1900년 중국 감숙성 돈황석굴에서 방대한 양의 고문서가 출토되었는데 거기에 중국초기 선종사와 선어록이 포함되었다. 이 고문헌에 의해 중국 초기선종사와 선사상이 다시 쓰여지게 되었고, 중국의 석학 호적(胡適)의 연구에 의해 신수와 신회가 중국 초기선종사의 선구자로서 초기 선
사상의 기초를 만든 위대한 인물로 새롭게 평가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가(禪家)에서는 아직도 《육조단경》에 나타난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에 (신수가) 완전히 깨닫지 못한 덜 떨어진 선사로 인식되어 있다. 원균(元均)이 임진왜란 때 수많은 해전에서 왜적을 물리치다가 전사하였고, 전쟁이 끝나서 나라에서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으로 책정되는 공훈을 세우고도 이순신을 시기하고 모함한 역적으로 오인 받고 있다. 이은상이 《이순신전》을 써서 한국의 영웅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순신을 극적으로 더욱 훌륭하게 만들려다가 멀쩡한 사람 원균을 천하에 못된 역적으로 만든 것이다.
신수대사가 30년도 더 아래인 손자뻘 되는 혜능대사와의 법통싸움으로 개가 된 것이 원균과 같다 하겠다. 이것은 역사 왜곡이요 날조이다. 신수대사는 코페르니쿠스적 심판의 피해자이다. 마땅히 복권시켜야 한다. 신수의 시에 대해서도 고정관념을 버리고 감상해야 한다.
신수대사(606-706)는 50세에 5조 홍인대사를 만났고, 90세가 되어 측천무후의 초청을 받아
입궁하여 황제가 먼저 예를 올리는 여불(如佛) 대접을 받았다. 삼제(三帝)국사요 양경(兩京)법주로서 전무후무한 예경을 받아서 제도(帝都)불교를 교화하였다. 초기 선종이 형성되고, 선사상이
정립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중국에서 최초로 선과 시가 만나서 융합된 것은《육조법보단경》에 나오는 신수대사와 혜능대사의 오도송에서 전형적인 선시의 모델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달마대사가 최초로 마음을 깨달아 견성(見性) 성불(成佛)하는 선법을 전하여 불교의 종파로써
선종(禪宗)이 형성된 것이 당나라 초기에 신수와 혜능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두 사람이 자신이
깨달은 마음의 경계를 시격(詩格)을 갖춘 게송으로 읊은 것이 선과 시의 만남으로 선시의 최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중국에 선이 남북조시대 달마대사(?-528) 이전에도 전해져서 수많은 선사들이 참선 수행을 했다는 기록이 양(梁)나라 혜교(慧皎, 495-554)가 찬술한《고승전》과 당(唐)나라 도선(道宣, 596-667)이 찬술한《속고승전》습선편(習禪篇)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달마대사 이전에는 선
수행자들이 집단을 이루어서 일관된 선 이론이나 소의경전을 가지고 수행하지 않았음으로 선종이란 종파가 형성되지 않았다.
신수대사와 혜능대사의 오도송을 선시의 시초로 규정한 것은 선시의 범위가 경전에 나타나 있는 선적인 게송이나 인도의 시까지 확대되는 것이 저어하여 필자가 규정해 본 것이다.
[문학박사 김형중 법사]
81.아암혜장선사(兒庵惠藏禪師 1772-1811)
[오도송(悟道頌)][연각향(蓮覺香)]
정중견해최고원(定中見解最高圓) 선정에서 얻은 견해 원만한 지혜인데
경파건곤비일권(更把乾坤比一拳) 또 다시 하늘땅을 한 주먹에 비하노라.
칠책금문개차제(七冊金文開次第) 팔만경전 일곱 책을 한 권 한 권 펼쳐보니
저반심사정여연(這般心事淨如蓮) 맑아진 마음에 가시 피어난 연꽃 한 송이로다.
*선사는 스승 정암장로 회상(會上)에서 수행하던 중 26세 때 초가을 연못가를 거닐다가 해맑게
피어난 연꽃 한 송이를 보고 크게 깨달았다.
[불조향(佛祖香)]
점작충옹(漸作衷翁) 점점 늙어가는 데도[속마음충]
의구치동(依舊癡童) 예전처럼 여전히 어리석은 어린애일 뿐이네.
불조의(佛祖意) 부처님의 뜻
반야체동(半夜螮蝀) 반야(半夜)에 무지개 오른다.[무지개체,동]
청한가계(淸寒家計) 청빈한 가계(家計)요.
담박종풍(淡泊宗風) 담박(淡泊)한 종풍이다.
간영즉진(看影卽眞) 환영(幻影)이 곧 진제(眞諦)요.
범즉불(凡卽佛) 범인이 곧 부처요.
색즉공(色卽空) 색계가 곧 진공(眞空)이구나.
[山居雜興(산거잡흥)]
일렴산색정중선(一簾山色靜中鮮) 주렴에 어린 산 빛은 정적 속에 아름답고
벽수단하만목연(碧樹丹霞滿目姸) 푸른 나무숲, 붉은 노을은 눈에 가득 곱구나
정촉사미수자명(叮囑沙彌須煮茗) 사미승을 불러 차 끓여라 이르고 보니
침두원유지장천(枕頭原有地漿泉) 베갯머리에 원래 시원한 우물이 있는 것을.
[아암 혜장(兒庵惠藏․1772~1811) 스님의 속명은 김홍조(金弘祚), 법명은 혜장(惠藏), 호는 연파(蓮坡) 또는 아암(兒庵). 字는 팔득(八得), 무진(無盡). 전남 해남군 화산면 출생. 다산 정약용과 초의(草衣)의순 스님의 차 스승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대둔사(大芚寺)에서 삭발을 하고 월송화상(月松和尙)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고
춘계천묵(春溪天黙) 스님에게서 수업하였다. 그는 몸집이 작은 데다 소박하고 어리석은 듯이 보여, 여느 스님과는 기품이 달랐다.
스님은 茶山에게 차의 맛을 처음으로 깊이 알게 했던 분이다. 신유년(1801) 겨울 다산 정약용(1762~1836)이 백련사 주지인 아암혜장 스님을 만난다(당시 혜장은 34세, 다산은 44세). 두 사람은 금방 다우(茶友)가 되었으며, 그 후 자주 만났다. 혜장은 다산이 강진 동문 밖 시끄러운 노파의 밥집에서 조용한 고성암 요사(寮舍)로 옮겨 독서도 하고 차도 마실 수 있게 도와준다. 그래서 다산은
고성암(高聲庵) 요사를「보은산방(寶恩山房)」이라고 불렀다.
35세 때부터 시주(詩酒)를 즐기다가 1811년 가을, 병을 얻어 두륜산(頭輪山) 북암(北庵)에서 입적하였다. 제자에 색성(賾性)·자굉(慈宏)·응언(應彦)·법훈(法訓) 등이 있었으며, 모두 불교계의 거장이었다. 저서에는 『아암집』 3권이 있다.]
82.열당조은선사(悅堂祖誾 1234-1308)
[열반송涅槃頌]
연회이래(緣會而來) 인연 따라 왔다가
연산이거(緣散而去) 인연이 다하여 가는 게 아닌가
당도수미(撞倒須彌) 수미산에 부딪쳐 넘어지고 보니
허공독로(虛空獨露) 허공에 나만이 홀로 남았다.
[출전(出典) :남송원명선림승보전8권(南宋元明禪林僧寶傳)8卷 ]
[松下枯髏(송하고루)소나무 아래 해골이 보이길래 쓰다]
초리고루몽리신(艸裏枯髏夢裏身) 풀 숲 사이의 해골 살들을 숨겼구나
식정력진현전진(識情歷盡見全真) 망령되었던 살이 생명을 다하고 본색을 드러내었네
북망한식산전로(北邙寒食山前路) 저 앞이 그 싸늘한 북망(北邙)으로 가는 산길이니 나수송화부대춘(那樹松花不帶春) 그 나무 봄이 아닌데도 소나무꽃을 핀게로구나
[열당조은(悅堂祖誾1234~1308)]
강서성에서 태어났다. 임제종의 선승이다. 13 세에 출가하여 개석지붕(介石智朋)의 법을 이었다.
祖誾(조은) 열당조은(悅堂祖誾1234-1308)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소개되고 있는데, 열당은(悅堂誾)이라야 맞다.
조(祖)라는 글씨가 법명과 성 사이에 끼어든 이유는 열당선사(悅堂禪師) 탑명(塔銘)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온다. 오조법연하칠세손(五祖法演下七世孫, 오조(五祖) 홍인(弘忍)스님의 17세 손으로)이고
임제대혜하사세손(臨濟大慧下四世孫, 임제대사의 4대손)인 적통을 이어 받은 큰스님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임제종(臨濟宗)은 9세기 중국 당(唐) 나라의 임제 의현(臨濟義玄) 스님에 의해서 창시(創始)된
중국 불교 선종 5가(禪宗五家)의 한 종파(宗派)이다. 임제(臨濟義玄) 스님이 만든 종파(宗派)라고
하여 《임제종(臨濟宗)》이다.
한국으로 전파되어 신라(新羅)시대 후기(後期)에 선종(禪宗)이 전래되면서 개창되기 시작하여
고려高麗) 초(初)에 이르는 시간 동안에 성립한 9개의 선문(禪門) 즉,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발전(發全)하였고 일본(日本)으로 전파되어 일본 임제종(臨濟宗)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
※ 각설(恪說)하고
열당 조은(悅堂祖誾)이 출가(出家)를 한 후에 개석 지붕(介石智朋) 선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대는 어디에서 왔으며 그 곳의 불교는 어떠한가 ?" 물었다.
열당 조은(悅堂祖誾)이 대답(對答)했다.
"긴 다리가 울퉁불퉁한 호숫가를 나누고 기둥이 호수 한가운데까지 들어 올립니다.
개석 지붕(介石智朋) 선사가 다시 물었다.
"하늘과 구름이 만나면 그 흔적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
열당 조은(悅堂祖誾)이 대답(對答)했다.
"황금시계가 움직이자 눈 앞의 모든 것(諸法)이 훤히 드러나 있습니다."
개석 지붕(介石智朋) 선사가 말했다.
"지혜로운 자(賢者)의 침묵(沈默)에 대한 의견은 되도록 빨리 표현하는 것이좋은 것이니라."
열당 조은(悅堂祖誾)이 다시 대답(對答)하려고 할 때 개석 지붕(介石智朋) 선사가 그(열당 조은)를
때렸다.
이러한 빈번한 만남과 접촉 후 열당 조은(悅堂祖誾)은 개석 지붕(介石智朋) 선사를 매우 존경(尊敬)하게 되었고 감히 올려다 보지 않았다.
참고적으로 개석지붕(介石智朋) 선사는 진계(秦溪) 사람으로 성품(性品)이 매우 고매(高魅)하고 간결하였다.
83.영가현각선사(永嘉玄覺禪師 665-713)
[오도송(悟道頌)]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노인은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 망상도 없애지 않고 배움도 구하지 않나니
무명실성즉불성(無明實性卽佛性) 무명의 참성품이 곧 불성이요
환화공신즉법신(幻化空身卽法身) 허깨비 같은 빈 몸이 법신이니라
[증도가(證道歌)] [영가현각선사(永嘉玄覺禪師 665-713)]
대상불유어토경(大象不遊於兎徑) 큰 코끼리는 토끼 다니는 길에서 노닐지 않고
대오불구어소절(大悟不拘於小節) 큰 깨달음은 작은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다네
[증도가(證道歌)와 영가집(永嘉集)을 저술]
[증도가35(證道歌35)도를 얻은 노래] - 영가현각(永嘉玄覺)
설산니이갱무잡(雪山膩而更無雜) 눈덮힌 산의 꽃은 다시 잡스럽지 않아
순출제호아상납(純出醍醐我常納) 순수함이 우유의 치즈처럼 내게 항상 받아진다
일성원통일체성(一性圓通一切性) 한 성품에서 모든 성품에 원만히 통하고
일법편함일체법(一法徧含一切法) 한 법성에서 모든 법성을 두루 포함한다
일월보현일체수(一月普現一切水) 한 달이 모든 강에 넓리 나타나고
일체수월일월섭(一切水月一月攝) 일체의 물 속의 달은 한 달에 모여진다
제불법신입아성(諸佛法身入我性) 모든 부처의 법신이 다 내 성품에 들어오고
아성환공여래합(我性還共如來合) 나의 성품이 도리어 모두 진리에 합쳐지노라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 스님의 휘는 현각(玄覺)이요 자는 도명(道明)이며 중국 당나라시대에 선승으로 호는 일숙각(一宿覺)이다. 원저우(溫州) 융자(永嘉)현에서 태어났다 본성은 대(戴), 자는 명도, 호는 일숙각, 시호는 무상 대사, 진각 대사이다. 8세에 출가해서도 어머니와 누나를 봉양할 정도로 효심이 깊었다.
영가현각(永嘉玄覺) 선사는 당나라시대 승려로 속성(俗性)은 대씨(戴氏)이며 8 세에 출가한 후
경론을 널리 연구했으며 특히 천태(天台)의 지관(止觀)에 정통해 진각대사(眞覺大師)라고도 불렸다.
처음 온주(溫州)의 용흥사(龍興寺)에 있다가 스스로 도량을 짓고 선 수행을 했으며 훗날 중국 천태종 조사 제5조 좌계현랑(左谿玄朗)의 권고로 무주현책(婺州玄策)과 함께 조계산의 6조 혜능(慧能 638~713) 대사를 찾아뵙고 문답을 통해서 인가를 받았으며 크게 깨달음을 얻게 되자 하룻밤을 묵고 그냥 떠났다 해서 사람들이 일숙각(一宿覺)이라 부르기도 했다 .
삼장(경율론)을 두루 탐구하였고, 천태지관(天台止觀)과 <유마경>으로 수행하여 높은 경지를 얻었다. 처음 온주의 용흥사에 있다가 스스로 도량을 짓고 선수행을 했으며 훗날 육조 혜능대사를 뵙고 크게 깨우쳤다.
영가스님은 선천 3년(서기713)10월 17일 입적하시니 세수가 49세며 시호는 무상대사(無相大師)이고 탑호(塔號)는 정광(淨光)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진각대사(眞覺大師)로 더 알려져 있다
저서<증도가(證道歌)>는 스님이 증득한 깨달음의 세계를 시로 표현한 것으로 오도송(悟道頌)의
백미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 외에 그의 사후에 선(禪)의 요점을 해설한 그의 글을 모은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이 있다 .
*영가진각대사증도가(永嘉眞覺大師證道歌): 진각대사(眞覺大師647~713)가 선종(禪宗)의 제6조혜능
조사(慧能祖師638~713)를 만나 깨달음을 얻은 진리를 칠언시(七言詩)로 지은 노래와 이것에 대한
여러 주석을 함께 수록한 것으로 선승의 보편적인 수행 지침서이다. 줄여서 <증도가(證道歌)>로
알려져 있다.
84.영운지근선사(靈雲志勤禪師 ?-820?)
[오도송(悟道頌)]
삼십년래심검객(三十年來尋劒客) 삼십년이나 칼을 찾는 나그네여
기회낙엽우추지(幾回落葉又抽枝) 몇 번이나 잎이 지고 가지가 돋아났었던가
자종일견도화후(自從一見桃花後) 그러나 복사꽃을 한 번 본 뒤론
직지여금경불의(直至如今更不疑) 지금에 이르도록 다시 의혹 안 하나니
[長慶禪師 初參 靈雲 僧問 如何是佛法大意? 師曰영운선사가 대답하였다.]
려사미거(驢事未去) 나귀의 일도 마치지 않았는데,
마사도래(馬事到來) 말의 일이 당도하는구나! 이다.
[공안화두(公案話頭) 가운데 나귀 일을 마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하니,]
[영운지근선사(靈雲志勤禪師 ?-820?) 오도송(悟道頌)]
구쇄연환몰단두(鉤鎖連環沒斷頭) 갈고리 쇠사슬 연결고리 되어 머리를 끊지 못하도다.
기관금조우명일(祗管今朝又明日) 단지 오늘 아침과 또 명일에 상관하다가
등한차과일생휴(等閒蹉過一生休) 등한히 일생의 아름다움을 지나치리라
[영운지근(靈雲志勤) 선사는 중국 당(唐)나라 말기의 고승으로, 중국 복주(福洲) 장계(長溪) 출신이며, 위앙종의 창시자 위산 영우(潙山靈祐 771~853) 선사의 제자이다.
처음 위산 영우 선사 아래에 있다가 봄에 복사꽃[도화(桃花)] 피는 것을 보고 오도(悟道)했고,
이를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삼십내년(三十來年)에 검을 찾던 나그네여····
영운 선사가 복사꽃을 보다가 오도(悟道)한 기연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서 많은 선자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고봉(高峰) 선사의 선요(禪要)에는 “세존이 설산에서 6년을 고행하시다가 한 밤중에 밝은 별을 보고 도를 깨달은 것은 일대사의 본원을 깨달은 것이며
달마대사가 중국에 들어와서 소림사에서 면벽구년(面壁九年)을 할 때 신광(神光)이 팔을 끊고 마음을 찾을 수 없게 되어 근거[鼻孔]를 잃어버린 것도 일대사의 본원을 깨달은 것이며,
임제(臨濟) 스님이 황벽(黃蘗) 선사의 60방을 만나고 대우(大愚) 선사의 옆구리에 그 방을 돌려준 것도 또한 일대사의 본원을 깨달은 것이며,
영운 스님이 복사꽃을 본 것과
향엄(香嚴) 스님이 일을 하다가 돌이 굴러가서 대나무를 치는 것을 본 것과
장경(長慶) 스님이 발을 걷어 올리던 일과
현사(玄沙) 스님이 돌부리에 발가락을 채인 일과
그 외 과거의 모든 선지식들이 계합하고 증득하여 중생들을 이익하게 하고 사람들을 제접한 것도
모두가 이 일대사의 본원을 깨달은 것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존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보였는데 가섭 존자가 미소를 지은 일도 역시 그것일 것이다.
85.영파성규선사(影波聖奎禪師 1728-1812)
[오도송(悟道頌)] [불종성(佛鐘聲:종소리에서 나오는 부처님의 소리(法音))
칠일관중역유언(七日關中亦有言) 7일 동안 관중에서 부처님의 법음소리 들었네,
위음뢰약진건곤(威音雷若震乾坤) 위엄스런 우레소리 천지를 진동했다.
욕영무설전천고(欲聆無說傳千古) 말없이 말한 천고의 진리를 알고 싶었는데,
추야한종괘사문(秋夜寒鐘掛寺門) 가을밤 찬 종소리 절문에 걸렸도다.
[영파 성규의 자찬自讚][영파성규선사(影波聖奎禪師 1728-1812)]
자제왈(自題曰) 스스로 제하여 이르노니
이시진야아시진나(爾是眞耶我是眞耶) 네가 참모습인가 내가 참모습인가?
약거본래인면목(若據本來人面目) 만일 본래 면목에 의거한다면
측이개비신(則二皆非眞) 둘 다 참 모습이 아니로다
돌(咄) 돌
추수연천(秋水連天) 가을 물 하늘에 닿아
건곤약무(乾坤若無) 하늘과 땅 구분 없네
곽락무영(廓落無影) 툭 트여 그림자 없거니
색상하구(色相何求) 빛깔과 형상 어디서 구하리.
[영파스님의 자는 회은이고 성씨는 전씨로서 고려 옥산군 영령 (永齡 )의 16 대손 이며 만기(萬紀)의 아들이다. 어머니 응천 박씨는 어느날 꿈에 큰 별하나가 품안으로 날아드는 것을 보고 잉태, 조선조 영조 4년(1728년) 기이한 골격을 갖춘 아이를 낳는다 .
영파 성규影波聖奎(1728~1812)는 서산(西山) 스님의 6세손으로 화엄학과 선∙염불에 해박했던
사상가이자 대둔사 대흥사 12대강사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교학, 선, 염불에 해박하였으며 은해사 운부암에 주석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은해사에 머물면서 경상도 지역에서 화엄종지를 펼쳤다. 그는 편양언기(鞭羊彦機), 환성지안(喚醒 志安), 함월 해원涵月海源(1691~1770)의 법제자로 함월 해원과 설파 상언雪坡尙彦(1707~1799)에게 화엄종지와 선교의 요체를 이어받았으며, 황산 퇴은黃山退隱으로부터 『화엄경』 전질을 받아 30년 동안 연구하여 현리玄理와 묘오妙悟를 체득하였다.
선을 공부할 때에도『화엄경』을 탐독하였고, 이에 입각해 보현보살과 관음보살을 원불願佛로 삼기도 하였다. 생전의 명성에 걸맞게 영파선사의 진영은 김룡사 화장암, 통도사, 용문사, 은해사 등에 전하고 있다.
오백성중청문은 조선 초 무학대사가 석왕사에서 100일 동안 오백 나한을 모시고 행한 의례집을 참고하여 1805년 은해사 운부암에 계시던 영파성규(1728~1812)스님이 편찬한 책으로 10대 제자, 16성중 그리고 오백 나한의 명호가 적혀 있으며 이들의 명호를 일일이 부르며 예불하는 의식 절차가 담겨 있다.
『오백성중청문』의 구성은, 현존 작례나 문헌을 분석한 결과, 고려에서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오백나한 불사 때 나한상의 구성, 혹은 오백나한상이 봉안된 나한전 내의 존상 구성과 일치한다.
본문에는 소청대상과 절차가 쓰여 있는데, 석가모니와 좌우보살, 나한, 그리고 호법신중이 순서대로 올라있다. 나한은 십대제자, 십육나한, 오백나한의 순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모든 존명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86.영조선사(靈照禪師)
[오도송(悟道頌)]
점득유거지(占得幽居地) 높은 산 깊은 골에 터를 골라서
만송영상암(萬松嶺上庵) 숲속에 암자 하나 짓고 사노라
입선간불이(入禪看不二) 선나를 닦고 불이를 보고
탐도희성삼(探道喜成三) 도를 탐구하여 삼학(三學)이루네
채옥인수도(采玉人誰到) 옥 캐는 사람 중에 뉘 이르럿노
함화조자남(含花鳥自喃) 꽃을 물고 오는 새만 지저귀는구나.
소연무외사(所然無外事) 세상 일 모두 잊고 소연히 앉아
일미법문참(一味法門參) 한 맛인 법문 참구하노리
[영조선사,오도송(悟道頌)]
[우영조음又靈照吟 또 영조선사가 읊다]
단지성공견(單智成空見) 지혜만 있으면 공견空見을 이루고.
편비섭애연(偏悲涉愛緣) 자비만 있으면 애연愛緣에 빠지고 말지
쌍행상합의(雙行常合矣) 지혜와 자비를 함께 수행하면 늘 즐거워
일도자천연(一道自天然) 하나의 도가 절로 천연스러워지네
월운인운사(月運因雲駛) 달이 옮겨 감은 구름이 달리기 때문이요
풍표식번현(風飄識幡懸) 바람이 부는 것은 나부끼는 깃발에서 알겠네
간장여재수(干將如在手) 간장검이 내 손에 쥐어져 있다면
안위색류련(安爲色留連) 무엇하러 여색을 위해 머물러 있으랴.
87.영희선사(靈熙禪師)
[오도송(悟道頌)]
운수환희령(雲收歡喜嶺) 구름 걷힌 환희령 고개마루에
월입노송암(月入老松庵) 달 돋아 숲 속 암자 비추는구나
혜검정천만(慧劍精千萬) 지혜의 칼 천만번 갈고 닦아서
심원탕재삼(心源蕩再三) 마음 구석 쓸어내길 재삼하였네
동천춘적적(洞天春寂寂) 동천에 찾아든 봄 호젓도 한데
산조효남남(山鳥曉喃喃) 산새는 새벽마다 재잘거리네
함패무생락(咸佩無生樂) 모두들 무생락을 지닌바에야
현관불용참(玄關不用參) 현관을 참 구함도 부질없구나
[영희선사靈熙禪師] [우영희음又靈熙吟] 또 영희선사가 읊다.
일궤성대력(一簣成坮力) 한 삼태기 흙이면 대를 이루련만
구고교족연(九皐翹足緣) 으슥하고 깊은 못에서 발돋움하여 기다리는 인연
수행파죽의(修行破竹矣) 수행은 대나무 쪼개듯이 해야 하고
득도착편연(得道着鞭然) 득도는 채찍질 하는듯이 해야 하건만
미면삼생루(未免三生累) 삼생의 얽힌 인연을 벗어나지 못해
원가일념현(寃家一念懸) 집안이 온통 근심 걱정에 매달리고 말았구려
타년병반수(他年瓶返水) 훗날 쏟은 물을 도로 병에 담아서
추후적상련(追後跡相連) 뒤늦게나마 우리 함께 수행하게 되길
[부설(浮雪)을 부처님 법(佛法)의 상량감(대들보)이라 하여 존경하는 사람이 많았다.
법우(法友)인 영희(靈熙) 영조(靈照)]
88.오석세우선사(烏石世愚禪師1301-1370)
[임종게(臨終偈)]
생본불생(生本不生) 태어남은 본래 태어남이 아니요
멸본불멸(滅本不滅) 죽음 또한 본래는 죽음 아니네
찰수변행(擦手便行) 두 손을 뿌리치고 문득 돌아가노니
일천명월(一天明月) 하늘엔 둥근 달만 외로이 떠 있네.
[경지(境地)]
우세담홍도눈(雨洗淡紅桃嫩) 비에 씻긴 복사꽃잎, 그 연약한 볼이여
풍요천벽유사경(風搖淺碧柳絲輕) 바람에 연둣빛 안개 흔들려 버들가지 가볍네
백운경리괴석로(白雲影裏怪石露) 흰구름의 그림자 속에 괴석(怪石)이 드러나고
수광중고목청(水光中古木淸) 푸른 물빛 속엔 고목이 싱그럽네.
[오석세우(烏石世愚, 1301~1370)
장안에서 태어났다. 호는 걸봉(傑峰). 어려서 출가하여 지암 보성(止巖普成)의 법을 이었다.
홍무(洪武) 3년(1370) 12월에 입적했다. 법랍(法臘) 50세]
89.오조법연선사(五祖法演禪師 1024-1104)
[오도송(悟道頌)]
산전일편한전지(山前一片閑田地) 저 산 밑에 놀고 있는 밭 한 자락
차수정녕문조용(叉手叮嚀問祖翁) 두 손 모으고 어르신께 묻나이다
위련송죽인청풍(爲憐松竹引淸風) 송죽에 이는 맑은 바람 못내 그리워(벗하려고)
기도매래환자매(幾度賣來還自買) 몇 번이나 팔았다 되사곤 했는지요
[법연은 친구에게 들려준 소염시(小艶詩)]
일단풍과화불성(一段風光畵不成) 한 폭의 아리따운 모습 그려내지 못하는데
동방심처진수정(洞房深處陳愁情) 골방 깊은 곳에서 사모의 정에 애가 타네
빈호소옥원무사(頻呼小玉元無事) 소옥을 자주 부르지만, 소옥에게는 일이 없다네,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 단지 낭군에게 제 목소리 알리기 위한 소리일 뿐.
[법연사계(法演四戒)]
세불가사진(勢不可使盡) 세력은 다 부리지 말라.
복불가수진(福不可受盡) 복도 지나치게 다 받아 쓰지 말라.
호어불가설(진好語不可說盡) 좋은 말도, 다 하지 마라.
규거불가행(진規矩不可行盡) 규율도 다 지키려 하지 마라.
오조법연(五祖法演 1024년-1104년)은 제21대 조사 원오극근 스님에게 법을 전해 주었다.
사천성(四川省) 면주(綿州) 파서(巴西) 사람으로 속세의 성은 등(鄧)이다. 북송(宋) 때 임제종(临济宗) 양기파(楊岐派) 승려이다.
35살에 출가(出家)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1세기 송나라 승려이다. 성도(成都)에서 유학
하면서 백법(百法)과 유식학(唯識學)의 여러 논(論)들을 익히고 깊은 뜻을 탐구했다.
어느 날 교문(敎門)에 의심이 생겨 몸으로 증험하고 이해하고자 책 상자를 짊어지고 남쪽으로 회절(淮浙)을 건너 만나는 고승마다 두루 물었지만 끝내 깨칠 수 없었다. 다시 원조종본(圓照宗本)을
뵙고 고금의 공안고칙(公案古則)을 물었다. 또 부산법원(浮山法遠)을 참례하고 나중에 백운수단(白雲守端) 선사(禪師)에 몸을 맡겨 부지런히 참구(參究)해 마침내 확연철오(廓然徹悟)하고 인가를 받았다. 중국 선불교의 제20대, 석가모니 이래 제47대 조사스님이다.
제21대 조사 원오극근 스님에게 법을 전해 주었다. 선불교에서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정식으로
참구하게 하여 참선공부로 전환한 선사가 바로 오조법연(五祖法演)이다.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 6월 25일 상당(上堂)하여 대중들과 작별하고 몸을 깨끗이 씻은 뒤 입적했다. 세수(世壽) 80여 세다. 세칭(世稱) 선종사(禅宗史)에서 오조법연(五祖法演)으로 불린다.
법사(法嗣)가 자못 많아 불안청원(佛眼淸遠)과 태평혜근(太平慧懃), 원오극근(圜悟克勤)이 가장 유명해 이들을 ‘법연삼걸(法演三傑) 혹은 법연하삼불(法演下三佛)’이라고 칭했다.
저서에 [황매동산연화상어록(黃梅東山演和尙語錄)]과 [서주백운산해회연화상어록(舒州白雲山海會演和尙語錄)][오조법연선사어록(五祖法演禪師語錄)] 등이 있다
►조고각하는 ‘삼불야화(三佛夜話)’란 불교 선종(禪宗)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중국 송나라 때 선사(禪師, 선종의 법리에 통달한 승려)였던 오조법연(五祖法演)에게는 뛰어난 제자 셋이 있었다. 불감혜근(佛鑑慧懃), 불안청원(佛眼淸遠), 불과원오(佛果圓悟) 이 세 제자를 사람들은 ‘삼불(三佛)’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오조법연 선사는 세 명의 제자와 밤길을 걷고 있었다. 들고 있던 등불이 갑자기 꺼지자
선사는 제자들에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불감혜근은 ‘채색 바람이 붉게 물든 노을에 춤춘다(彩風舞丹霄채풍무단소).’라고, 불안청원(佛眼淸遠)은 ‘쇠 뱀이 옛길을 건너가네(鐵蛇橫古路철사횡고로).’라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불과원오는 ‘발밑을 보라(照顧脚下조고각하).’라고 대답했다. 이후 불과원오가 답했던 조고각하는 불가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살펴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는 수행 규칙으로 사용되고 있다.
90.용성진종선사(龍城辰鍾 1864-1940)
[용성진종(龍城辰鍾)선사 (1864~1940) 열반송으로는 2개가 회자하고 있는데.
대개 열반송이 그렇듯 이도 제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라서 다른 모양이다.]
[열반송涅槃頌]
제행지무상(諸行之無常) 모든 행이 무상하고
만법지구적(萬法之俱寂) 모든 법이 적적하여라
포화천리출(匏花穿離出)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아가
한와마전상(閑臥麻田上) 삼밭에 한가로이 누웠나니
[열반송]
산산수수이형(山山水水爾形) 산은 산대로 물을 물대로가 그대의 형상이요
화화초초이의(花花草草爾意) 꽃은 꽃 풀은 풀 그대로가 그대의 마음일세
등한래등한거(等閒來等閒去) 한가롭게 왔다가 한가로이 가는 인생
명월조청풍불(明月照淸風拂) 달은 밝고 바람은 맑게 불어오네 * 拂(불);닦다, 씻다
[오도송(悟道頌)]
금오천추월(金烏千秋月)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낙동만리파(洛東萬理波) 낙동강 만 리의 파도로다
어주하처거(漁丹何處去) 고기잡이 배는 어느 곳으로 갔는고
의구숙노화(依舊宿蘆花) 옛처럼 갈대꽃에 머무는구나.
[기묘년 16세(서기 1879년) 의 견도송(見道頌)][용성진종(龍城辰鍾)선사 (1864~1940)
용성대사께서는 오감의 미혹(迷惑)에서 벗어나 버린 경지에 이르러
견도하시고 이 경계에 이르러 시를 읊으시니 이러하다.
오온산중심우객(五蘊山中尋牛客) 오온인 산중에서 불성을 찾는 나그네가
독좌허당일륜고(獨坐虛堂一輪孤) 텅 빈 집에 둥근 달 비치는데 홀로 앉았도다.
방원장단수시도(方圓長短誰是道) 모나고 둥글고 길고 짧은 이것이 누구의 도이랴
일단화염소대천(一團火炎燒大天) 일단 불꽃이 대천 번뇌를 태우도다.
[갑신년 21세(서기 1884년)] 용맹 결사 정진 끝에 정(情)에 사로잡히지 않고 뜻[意]에 얽매이지 아니하는 수도(修道)를 마치고 수도송(修道頌)을 읊으시니 이러하다.
배운확무심문수(排雲粇霧尋文殊) 번뇌의 먹구름 짙은 운무를 물리치고
시도문수확연공(始到文殊廓然空) 문수를 찾아가 이르러니 확연히 공이로다
색색공공환부공(色色空空還復空) 색색공공이 다시 공(空)으로 돌아가고
공공색색중무진(空空色色重無盡) 공공색색이 거듭 다 함이 없도다이로다
용성진종(龍城震鐘, 1864∼1940)선사는 1864년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252번지(현재 지명)에서 1864년 5월 8일태어났다.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용성의 족보상 이름은 형철(亨喆)이고, 속명은 상규(相奎)이며, 법명은 진종(震鐘),법호(法號)는 용성(龍城)이다. 부친은 수원 백씨(白氏) 백남현이고 모친은 밀양 손씨(孫氏)이다.
스님은 7세에 한학을 익혔으며, 9세에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16세에 해인사에서 출가하였으며, 23세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 뒤 전국 각 사암들을 찾아다니면서 수도 정진하였으며 44세 때에는 중국불교계의 선지식들과도 불법의 진리를 논하기도 하였다.
47세에는 ≪귀원정종歸源正宗≫이란 책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불교적인 측면에서 기독교의 교리에 대하여 해석하고 논박한 것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이다.
1919년 3월 1일에는 만해 한용운스님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중 불교대표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4번째 서명하였으며 이로 인해 서대문 감옥에서 3년간 영어의 생활을 하였다.
1927년 64세 때에는 ≪대각교의식집大覺敎儀式集≫을 발간하면서 왕생가往生歌, 근세가勸世歌 등 창작국악조의 창작찬불가創作讚佛歌를 최초로 작시, 작곡하여 이 분야에서는 국내에서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대종사께서는 우리나라에서 찬불가의 창시자일 뿐만 아니라 국악조의 창작국악으로 된 창작찬불가를 남겼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같은해 함양에 화과원華果院을 만들어 사원경제의 자립을 부르짓는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주창하기도 하였다. 이후 30여 가지의 경전을 번역하였으며 30여 가지의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40년 2월 24일 대각사에서 입적하니 세수는 77세이고 법납은 61세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수한 전등傳燈 68代의 조사祖師인 동시에 근세 중흥조中興律의 6조祖이다.
한국 불교의 근대화와 조국의 독립에 주력한 백용성 스님은 조계종 스님의 절반이 그의 문도라고 할 만큼 큰 영향력을 끼쳤다. 동산, 고암, 인곡, 동암, 동헌, 자운, 운암, 혜암, 소천 등 이른바 구제(九第)를 두었고 법손(法孫)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동산의 제자인 성철(性徹, 1912~1993) 스님도 용성스님의 법손(法孫)이라고 한다.
91.운허용하선사(耘虛龍夏禪師 1898-1980)
운허(耘虛) 스님은 1892년 평북 정주군 신안면 안흥동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이학수(李學洙)였다. 일제의 침략에 당당히 맞선 항일투사, 종교인으로서는 불경의 한글 번역가, 교육자로서는 후학의 양성에 전념한 분이셨다.
운허 스님은 한학을 공부하다 한일강제합방이 체결되자 고향을 떠나 평양 대성중학교를 다녔다. 1912년 미국으로 가기 위해 만주 안동현에 들렸다가 동지들을 만나 환인현에 머물면서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를 하고, 항일단체인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에 가입해 활동했다.
1915년 만주 봉천성에 흥동학교(興東學校)를, 1918년에는 배달학교(倍達學校)를 설립해 교포자녀를 교육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는 삼원포에서 <신한족(新漢族)>이라는 독립군 기관지를 발간하고, 이듬해에는 흥사단에 가입했으며,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했다.
무장독립투쟁을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동지가 체포되자 경성을 탈출해 강원도 회양군 봉일사(鳳逸寺)에 은신했다. 이것이 인연이 돼, 1921년 5월 경송(慶松) 스님을 은사로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출가했다. 법호는 운허(耘虛), 법명은 용하(龍夏)이다.
1924년 부산 동래 범어사(梵魚寺)에서 사교과를 이수했고, 1926년 청담(靑潭) 스님과 함께 전국불교학인대회를 개최했다.
1929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봉천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1930년 9월 조선혁명당에 가입했다. 1936년에는 국내로 돌아와 남양주 봉선사에 홍법강원(弘法講院)을 설립해 후학 양성에 노력했다.
일단 승려가 되어서는 경전 공부에 몰입하고, 후학 양성에 노력하면서 스승으로 두 분을 모셨으니 한 분은 화엄사 주지를 지낸 혜찬 진응(慧燦震應, 1873~1941) 강백이고, 또 한 분은 우리나라 불교 근대화를 이끌었던 선각자이자 석학이었으며, 조계종 초대 교정(지금의 종정)을 지낸 영호당(映湖堂)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1870~1948) 대종사였다.
석전은 법물(法物)로 운허에게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쓴 ‘석전(石顚)’이라는 족자를 건넸다. 여기에는 내력이 있다.
고창 선운사 대강백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과 추사 김정희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추사가 ‘석전(石顚)’과 ‘만암(曼庵)’이라는 글을 지어 써주면서 “훗날 백파 화상 그대처럼 시문(詩文)도 잘하고 경학(經學)에도 밝은 제자가 나오면 이것으로 ‘호’를 삼아주면 영광이겠습니다.”라고 했다.
그것이 대를 물려 내려오다가, 마침내 영호 스님이 ‘석전(石顚)’이란 호를 받게 되었다. ‘만암’ 족자와 호는, 1951년 제3세 조선불교 교정(종정)으로 추대된 백양사의 만암 종헌(曼庵宗憲·1876~1956) 스님 차지가 되었다. 운허가 백파의 문손임을 익히 아는 영호 강백이 그 족자를 운허에게 물린 것이다.
그리고 운허 스님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와의 인연이다. 운허 스님과 춘원은 8촌간으로 다소 먼 친척이지만 나이가 같아(생일은 이광수가 빨랐다) 어린 시절 같이 자라며 함께 공부하면서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해방 후 이광수가 친일변절자의 오명과 아들 봉근의 죽음 등으로 괴로워할 때, <법화경>을 소개해주어 불교의 세계로 인도해 주었으며, 감명을 받은 춘원이 ‘법화행자’의 길을 걷도록 조력해주었다.
친일 이력 때문에 해방 무렵 갈 곳이 없었던 이광수를 거둬준 이가 운허였는데, 그는 이광수가 인근 사릉(思陵) 근처에 터를 잡고 살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이광수는 사릉에서 1944~1948년까지 살았는데, 해방 직후인 1946년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운허 스님이 봉선사 주지로 있을 때, 춘원이 한때 봉선사에 은신하기도 했다.
운허 스님은 해방 후 경기도 교무원장이 됐고, 봉선사를 재건한 운허는 1946년 4월에 남양주 진접읍에 광동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했다. 당시 춘원은 봉선사에 머물면서 광동중학교에 잠시 교편을 잡고 영어와 작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운악산 구름속이 우리들 배우는 집…」으로 시작되는 광동중학교 교가 역시 춘원이 작사하고, 현제명이 작곡한 이 교가는 지금도 광동중학교 교가다.
스님은 불경 번역을 평생의 원력으로 삼고 1964년 동국역경원을 설립해 초대 원장을 지내며,
역경 사업에 헌신했다.
1961년 국내 최초로 <불교사전>을 편찬했고, 1978년 동국대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 11월18일 봉선사에서 법납 59세, 세수 89세로 입적했다.
주요저서로는 <불교사전>, <불교의 자비>, <불교의 깨묵>, <한글금강경>, <정토삼부경>, <대교지문> 등이 있다. 역서로는 동국역경원 한글대장경 가운데 다수의 경전 번역물이 있다.
노년에 운허는 〈촉문(囑文)〉을 지어 죽음 뒤의 일을 당부하기도 했는데, 이 유언장에서 그가 자신의 일생을 어떻게 규정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촉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후신(後身)의 일을 아래와 같이 부탁한다.
1) 문도장(門徒葬)으로 봉선사 화장장에 다비하라.
2) 초종범절은 극히 검약하게 하라.
3) 화환, 금만을 사절하라.
4) 습골 시에 사리를 주우려 하지 마라.
5) 대종사라 칭하지 말고 법사라고 써라.
6) 사십구제도 간소하게 하라.
7) 소장한 고려대장경, 한글대장경, 화엄경은 봉선사에 납부하라.
8) 마음 속이는 중노릇하지 마라.
9) 문도 간에 화목하고 파벌 짓지 말라.
10) 문집을 간행하지 말라.
서기 1972년 1월 9일
이렇게 써 두었던 유촉문을 운허는 그해 초겨울 자신의 사부이신 유점사(楡岾寺) 경송(慶松) 화상의 기제사 날(음, 11월 23일) 문도들에게 보이면서 ‘강의’했다.
제자 월운(月雲)은 녹음을 했고, 이것은 다시 <운허선사어문집>에 풀어 옮겨져 세상에 전했다.
위에 인용한 5)번의 조항을 그는 이렇게 ‘강의’했다. “이전에 노스님 열반하시고 대종사라고 썼는데 지나치지 않나 했습니다. 그러니 그 백 분의 일도 못 되는 내게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해야 되겠는가 생각해 봤습니다. 그냥 법사라고만 썼으면 좋겠습니다. 명정에는 ‘경전 읽고 번역하던 운허당 법사의 관’이라 쓰면 될 것 같습니다. 한문으로 쓸 필요도 없고 이 몇 자가 그 생애를 다 표현한 것이니 그것으로 된 거지요.” 이렇게 운허는 살았다.
춘원은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내 삼종제(이학수)와 함께 노래와 구풍 한시 짓기를 내기했으나 언제나 내가 졌다. 그는 무엇이나 나보다 재주가 승하였다. 그러나 내가 백(伯)을 대할 때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구겨짐 없이 쭉 펴인 천진난만한 성품이었다.”
‘이학수’는 운허의 속명이다. 이런 품성은 그의 문장 속에도 잘 드러난다. 6⋅25전쟁 중에 피난처에서 회갑을 맞이하여 〈회갑일 자부(回甲日 自賦)〉 2수를 남겼는데, 그의 인생이 ‘나라’와 ‘부처’, 두 축으로 점철됐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두 번째 수의 앞부분이다.[운허용하선사(耘虛龍夏禪師 1898-1980)]
낙백우량평수객(落魄踽凉萍水客) 빈털터리 처량하게 떠도는 나그네 *홀로갈 우, 부평초 평
감군귀설수해청(感君爲設晬解淸) 조촐한 환갑상을 차려주니 그대 고맙구려.
효중초지변성몽(效忠初志便成夢) 충성을 다하자던 처음의 뜻, 꿈결로 돌아갔는데
학불반생공부명(學佛半生空負名) 부처를 섬기려던 반평생도 헛이름만 빚졌네.
번역은 제자 월운이 했는데, 위의 자부에서 보이듯이 그의 일생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서른 살 이전은 ‘나라 섬기기’였고 그 이후는 ‘부처 섬기기’였다. 1921년(30세)에 금강산 유점사 출가 전후로 그의 삶은 큰 변화가 생겼다.
――――경전 한글화의 선구자――――
운허 스님은 경전의 뜻만 알면 되는데, 경전을 보기 위해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굳이 한문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많이 했다.
이런 운허의 뜻으로 우리나라 사찰 중 최초로 한글 현판이 탄생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큰법당은 주련에도 한글을 사용했음은 물론, 내부에도 <화엄경>과 <법화경>을 한글로 번역해 동판에 새겨 벽면에 붙여놓았다.
운허 스님께선 한문 불전의 한글화를 평생의 원력으로 삼고 1961년 국내 최초로 불교사전을 편찬한 것은 스님의 실질적 역경작업에 헌신한 두드러진 흔적 가운데 하나다.
그리하여 1964년 동국역경원을 설립해 초대원장에 취임해 활발한 역경작업에 매진했다.
스님은 위대한 역경가로서 국어학자들과도 활발한 교류를 통해 단순한 개인번역이 아닌 명실상부한 역장(譯場)을 봉선사 등에 꾸리고, 시대를 앞서가는 한글 번역 사업을 펼침으로써 경전 한글화의 새벽을 열었다.
초기에 번역한 다수의 한글대장경내 경전들은 물론이고, <이산 혜연 선사 발원문> 번역 등은 올바른 한글번역의 기준으로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스님의 그러한 의지는 조계종 제25교구본사 봉선사의 대웅전이 ‘큰법당’이라는 한글 간판으로 걸고 큰법당 기둥의 주련들 또한 한글로 돼있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라에 충성하고――――
운허는 문학성도 뛰어났다.
그의 8촌 형이었던 춘원 이광수도 그렇듯이 글을 읽던 집안이었다.
1913년(22세)에 만주로 가서 ‘대동청년당’에 가입해 이시열(李時說)로 개명해 활동하고, 그해 또 ‘대종교’에 귀의해 단총(檀叢)이라는 호로 활동하면서 그의 구국 독립활동이 시작됐다.
1915년에는 가족들을 모두 봉천성 신빈현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흥동학교’를 세워 아동 교육에 힘썼다.
1918년에는 다시 아동교육기관 ‘동창학교’를 설립했다.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기미독립선언 이후에 시작됐다. <경종(警鐘)>이라는 독립운동 소식지를 발간하는 동시에 ‘군정부(뒷날 서로군정서로 개편)‘에 가담하고 그 기관지 <한족신보(후에 ‘새배달’로 개명)>의 주필과 사장으로 활동했다.
1920년에는 ‘광한단’(일명 의흥단)을 결성해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와 연락을 하면서 이 시기에 ‘흥사단’에 가입했다.
1921년 서울로 입국했다. 입국 이래 사용하던 가명 ‘조우석’을 버리고 ‘김종봉’으로 바꾸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박명하’란 가명으로 활동했다. 압록강을 건너는 길이 막혀 다시 ‘박용하’라는 가명으로 강원도 회양군 봉일사에 숨었다가 그 길로 승려가 됐다.
1929년, 10년 만에 다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다. 그곳 교포들이 세운 ‘보성학교’ 교장으로 취임히고, 그해 겨울 ‘조선혁명당’에 가입했다.
1932년 만주에서 ‘조선혁명당’과 ‘국민부’ 연합으로 왜경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세가 기울자 가족들을 고향 땅 평안도 정주로 이사시키고 자신은 봉선사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봉선사로 통하는 큰 길목마다 왜놈들이 주재소를 세워 운허를 감시했다. 그 후에도 그의 독립운동은 계속됐다.
1945년 8월 조국이 광복되자 만주에서 활동하던 동지들을 규합해 ‘조선혁명당’을 재건해 정당 활동을 시작했다. 1946년 ‘조선혁명당’이 ‘신진당’으로 개편되면서부터 그는 정당 활동에서는 손을 뗐다. 이런 그의 활동으로, 대한민국은 그에게 1962년에는 ‘문화훈장’으로, 1963년에는 ‘표창장’으로, 다시 사후인 1991년에는 ‘건국애국훈장’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불교에 대한 운허의 인식――――신규탁
운허 스님
첫째, 불경의 언어나 문자에 대한 그의 입장이다. 석가모니와 수많은 불교 수행자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는 그 언어와 문자를 해독해야만 한다는 것이 운허의 생각이었다. 그것도 “부처님의 본의(本意)” 대로, 더 나아가 아름다운 문장으로 우리말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운허의 나라말과 글에 대한 남다른 사랑이 깔려 있다.
둘째, 운허는 최근의 한국불교의 법맥은 오직 도의(道義, ? ~ 825) 국사 후손인 선종(禪宗)만이 남았다고 이해했다. 그래서 자신도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의 법손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비록 이렇게 승려가 되는 과정에서 사승관계로 맺어지는 생리적 계보는 선종이지만, 이념적 계보는 경학을 업으로 하는 전통도 있고, 염불이나 정토를 업으로 하는 전통도 있고, 간화선을 업으로 하는 전통도 생겼다. 운허는 그중에서도 화엄의 교학을 전통적인 강사들로부터 전수받았고, 또 그것을 후학들에게 전수했다. 뿐만 아니라 운허는 교판적으로는 성종(性宗=法性宗)이야말로 불교의 최고의 진리를 설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또 그렇게 가르쳤다.
※법성종(法性宗)-모든 중생의 마음이 진실로 본래부터 청정한 것을 말한다. 중생의 한 마음속에 불변하는 진여의 속성과 진여에 의존해 멸하는 속성이 있고, 진여의 속성에는 무루의 공덕이 있고, 언어나 사유로 규정되기 이전의 것이 있다고 한다. <대승기신론>에서 회통의 논리를 찾았던 원효(元曉)가 법성종을 강조한 대표적인 학자이다.
셋째, 운허는 부처님의 법신은 상주하고 항상 중생들을 교화한다는 불타관(佛陀觀)을 가졌다. 이런 법신은 보살 내지는 여러 가지의 사물로 항상 나타나시어 중생을 교화한다는 불⋅보살관을 가진 운허는 사바세계에는 ‘가르침의 주인이신[敎主]’ 부처는 석가모니불 한 분뿐이지만, 보살은 무수하게 많다는 대승의 보살사상을 믿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보살 중에는 ‘재가’도 있고 ‘출가’도 있다는 입장에 의해 승속 일체의 보살도 사상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성불할 때까지 쉼 없이 보살도를 실천할 것을 제안하고, 그 자신도 그렇게 살았다.
넷째, 운허는 유식(唯識)에서 말하는 지혜를 통해 시방에 상주하는 진여법계와 하나가 되는 형이상학적 진리관을 가졌다. 이것을 그는 ‘이지명합(理智冥合)’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의 ‘이(理)’는 진여법계를 말하고, ‘지(智)’는 대원경지(大圓鏡智)를 말한다. 이렇게 대원경지로 ‘4 방면의 법계’를 관찰하는 공부를 해야만 비로소 진리가 된다고 한다. 이런 경지가 바로 부처의 경지이고 이를 두고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한다. 중생들이 충만한 법계 속에 살면서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지(智)’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구경각(究竟覺)-번뇌를 완전히 소멸시켜 마침내 마음의 근원을 깨달음.
다섯째, 수행에 관해서 운허는 여느 화엄종사와 마찬가지로 관법(觀法)을 제시했다. 그는 ‘마음을 관(觀)하는 수행 방법’을 통해서 ‘진심’을 체험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진심’이란 ‘동교(同敎)’나
‘돈교(頓敎)’에서 말하는 의미의 ‘진심’인데, 운허는 이를 ‘나’라는 말로 표현했다.
‘나’란 무언인가? 운허의 말에 따르면 “영원한 마음이 무상한 몸과 부즉불리(不卽不離)한 것을 우리는 ‘나’라고 한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이런 ‘나’의 체험은 “관찰하는 공부가 성숙해 최후의 일념에 투철하게 되면” 그것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연’의 범주에도 ‘자연’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 운허는 이것을 <화엄경> ‘십지품’의 ‘일심(一心)’ 사상으로 설명하고, 특히 <능엄경 정맥소(楞嚴經正脈疏)>에 입각해 ‘본연청정(本然淸淨)’설로 귀결시켰다.
※<능엄경 정맥소(楞嚴經 正脈疏)>-<능엄경>은 선 수행자의 필독서로서 수행에 바탕이 되는 대승교학을 아우르는 경이다. 중국 명대(明代) 교광 진감(交光眞鑑) 선사가 <능엄경>을 철저히 분석해 선(禪)의 관점에서 경의 맥(脈)에 따라 낱낱이 해설한 주석서이다.
수행 체계와 방편을 자세히 설하고 있어 예로부터 모든 수행자가 이 경을 중시했다.
<능엄경정맥소>는 이러한 <능엄경>을 철저하게 분석해 요의(了義)를 다 드러낸 훌륭한 주석서로서, 대승교학을 밝게 천명해 선(禪)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교학적⋅철학적 관점을 제공해준다.
특히 선수행을 중요시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수행의 묘리를 잘 터득하고자 한다면 <능엄경>을 제외하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진감 스님은 <능엄경>을 가리켜 ‘법화의 곳집이요, 화엄의 열쇠’라며, 이전 열 분의 주석을 모은 <십가회해(十家會解)>를 비판적으로 계승해 새롭게 주해를 냈는데, 이것이 바로 <능엄경정맥소>다. <능엄경정맥소>는 일찍이 여러 큰스님들로부터 지대한 관심을 받아 왔으니, 운허 스님은 <능엄경강화>에서 크게 활용했다.
<능엄경>은 8세기 초 한문으로 번역된 이래 가장 많은 주석이 나온 경전일 것이다. 그러나 교광 진감 스님은 그 미진함을 통탄하고 새로운 소(疏)를 쓰고자 발심해 출가했다.
진감 선사는 <정맥소>를 통해 유식과 중관, 여래장 사상 등 대승(大乘)의 요지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종문의 선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철학적 관점을 세웠다. 진감 스님은 출가한 후 20여 년 동안 오로지 <능엄경>의 주석을 내는 일에만 매진해 이 소 하나만을 저술로 남겼다. 다른 주석가들이 여러 교학의 틀로 <능엄경>을 해석했다면, 진감 스님은 오로지 경의 맥락에 의지해 해석했고, 이런 이유로 소의 이름을 ‘정맥(正脈)’이라 했다.
<능엄경정맥소>가 진명 스님에 의해 한글로 완역돼, 2018년 불광출판사에서 간행됐다.
[출처] 운허 용하(耘虛龍夏, 1898-1980) 스님
92.원각상월조사(圓覺上月祖師 1911-1974)
[오도송(悟道頌)]
산색고금외(山色古今外) 산색은 고금을 벗어나 있고
수성유무중(水聲有無中) 물소리는 유무 가운데 있구나
일견파만겁(一見破萬劫) 일견하니 만겁이 무너지고
성공시불모(性空是佛母) 본성이 공하니 이것이 곧 불모구나
*원각상월(圓覺上月)조사는 한국불교 천태종 창건주. 1945년 5월 ‘억조창생 구제중생
구인사(億兆蒼生救濟衆生救仁寺)’라는 이름으로 천태종의 본사인 구인사를 창건하였다.
(열반송涅槃頌)
제불불출세(諸佛不出世) 모든 부처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고
역무유열반(亦無有涅槃) 또한 열반에 들지 않았네.
사생본공적(死生本空寂) 죽는 것이 본래 없으니
영처일월륜(盈虛一月輪) 찼다가 빈 것이 한 바퀴 달이로세.
[上月圓覺大祖師 법어][上月圓覺 悟道頌상월원각,1911-1974]
「實相은 無相이고 妙法은 無生이며 蓮華는 無染이다.
無相으로 體를 삼고 無生에 安住하여 無染으로 生活하면
그것이 곧 無上菩提요, 無碍解脫이며 無限生命의 自體具現이다.
一心이常淸淨하면 處處蓮華開니라.」
실상은 무상이고 묘법은 무생이며 연화는 무염이다.
무상으로 체를 삼고 무생에 안주하여 무염으로 생활하면
그것이 곧 무상보리요, 무애해탈이며 무한생명의 자체구현이다.
일심이 상청정하면 처처연화개니라.
상월스님은 1923년 1월 24일[4], 강원도 삼척군 노곡면 (現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노곡면)
상마읍리 봉촌에서 밀양 박씨 집안의 박영진(朴泳鎭) 거사와 모친 삼척 김씨 부부 사이에서 1남
5녀의 맏이로 출생했다. 종교나 비결서(秘訣書)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고향이 비결서들에서 말하는
길지 후보에 들어가기도 해서, 종종 마을 근처에 이런 '도인' 수련을 하는 이들이 찾아오곤 했다고 한다.
1951년(28세) 단옷날 연화지에 초가집을 몇 채 지어 구인사를 창건했다. 물론 건물들은 그 전부터 지었지만 단오에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고 보고 창건기념일로 삼았다. 구인사에서는 지금도 단오를 특별히 보낸다.
한편 상월스님은 구인사에서 계속 수도하다가 다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데 그 날짜도 연구자에 따라 차이가 있다. 종단이 1987년에 발간한 [상월원각대조사오도기략](이하 '오도기략')에서는 51년 음력 12월 28일[13]이었다고 설명하고, 최동순도 [처처에 백련 피우리라]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1966년(43세) 8월 30일, 구인사를 창건한 지 15년 만에 상월은 대한불교천태종이라는 종단을 중창하기로 결심하고, 회삼귀일(會三歸一)ㆍ삼제삼관(三諦三觀) 등 종지를 계승하여 종헌과 종법을 마련하여 문교부에 신청하였다. 이듬해 67년(44세) 1월 24일에는 허가를 받긴 했는데, 당시에는 정부가 조계종 이외의 불교종단을 따로 인정하지 않아서 '천태종대각불교포교원(天台宗大覺佛敎布敎院)’
이란 이름으로 등록되었다. 여기서 대각(大覺)이란 단어는 11세기 고려 승려로 해동 천태종을 창종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에서 땄다.
1973년(50세) 생일(음 11월 28일)오전10시, 상월은 광명당에 대중 4천 명이 모인 가운데 죽음에 대해 마지막 법문하였다. 상월은 이후 병이 들어 점차 병세가 깊어지자, 죽음을 앞두고 열반송을
남겼다.
74년 4월 무렵부터 상월은 병을 앓았는데, 낫지는 않고 점차 병세가 심해졌다. 한국 천태종을 중창한 지 8년째 되는 1974년 6월 17일(음력 윤 4월 27일) 오전 8시 30분, 세수 만 51세 사망했다.
장례는 7일장으로 치러 같은 달 23일에 불교식 다비장(화장)이 아니라 매장으로 하였고 장지는 상월이 생전에 말했던 대로 구인사를 품은 소백산 수리봉(영주봉) 정상으로 정했다.
천태종단은 상월의 묘를 적멸궁(寂滅宮)이라고 부른다.
93.원감국사충지(圓鑑國師沖止 1226-1292)
[무애無碍]
춘일화개계원중(春日花開桂苑中) 봄날 꽃은 계원(桂苑)중에 피었는데,
암향부동소림풍(暗香不動小林風) 암향은 소림의 바람에 움직이질 않는구나.
금조과숙첨감로(今朝果熟沾甘露) 오늘 아침 익은 과일은 감로에 젖었고,
무한인천일미동(無限人天一味同) 한없는 인천(人天)은 한 가지 맛이구나.
[그 후 국사는 감로사를 떠나서 정혜사(定慧寺)에 주석한다.
45세되는 봄에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서 다음과 같은 깨달음의 노래를 불렀다]
[청천(聽泉)][원감국사충지(圓鑑國師沖止 1226-1292)]
계족봉전고도장(鷄足峯前古道場) 계족산 봉우리 앞 옛 도량
금래산취별생광(今來山翠別生光) 이제와 보니 푸른 산 빛 유별나네
광장자유청계설(廣長自有淸溪舌) 부처님 소리 바로 맑은 시냇물 소리인데,
하필남남경거양(何必喃喃更擧揚) 무엇 때문에 귀찮게 다시 부처님 소리 세우리
[천지일향(天地一香)]
진찰도노재일암(塵刹都盧在一庵) 티끌과 정토(淨土)가 모두 한 암자
불리방장편순남(不離方丈遍詢南) 방장실을 떠나지 않고도 남방을 두루 순방했네
선재하용근구심(善財何用勤구甚) 선재동자는 무엇 때문에 심한 고생을 자처하여
백십성중왕력참(百十城中枉歷參) 백십성을 순력(巡歷:돌아다닌다)했는가
►百十城:수를 셀 수 없는 여러 곳.
[비 온 뒤(雨餘)]
우여장하추신순(雨餘墻下抽新筍) 비 온 뒤 담장 아래 새 죽순 솟아나고
풍과정우친락화(風過庭隅襯落花) 뜰에 바람 지나자 지는 꽃잎 옷에 붙네.
진일일로향주외(盡日一爐香炷外) 온 종일 향로에 향 심지 꽂는 일 외엔
갱무한사도산가(更無閑事到山家) 산 집엔 다시금 한가한 일밖엔 없네.
[큰 눈(大雪)][원감국사충지(圓鑑國師沖止 1226-1292)]
단인경심월조래(但認更深月照來) 다만 밤 깊어 달빛 비치는 줄만 알았지
부지정원설성퇴(不知庭院雪成堆) 뜨락에 눈이 무더기로 쌓인 줄은 몰랐다.
평명기향성중망(平明起向城中望) 동틀 무렵 일어나 성안을 향해 바라보니
만수개화일야개(萬樹梅花一夜開) 일만 그루 매화가 하룻밤 새 피어났다.
원감충지圓鑑沖止스님은 고려시대 선승(禪僧). 수선사(修禪社) 제6세(世). 성은 위(魏)씨. 속명은
원개(元凱). 본래의 법명은 법환(法桓), 뒤의 법명은 충지. 자호는 복암(宓庵). 전라남도 장흥출신.
아버지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郎) 호소(號紹)이며, 어머니는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郎) 송자옥(宋子沃)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선림(禪林)에 나아가 득도하기를 원하였지만 양친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관직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29세에 선원사(禪源社)의 원오국사(圓悟國師) 문하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비구계를 받은지 오래지 않아 남쪽의 여러 지방을 순력하였는데, 이는 항상 도를 얻고자 53선지식(善 知識)을 찾아다닌 <화엄경> 속의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본받고자 함이었다.
원감충지圓鑑沖止스님은 고려시대 승려로 시호는 원감국사(圓鑑)국사. 19세에 문과(文科)에 장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고 일본에 사신(使臣)으로 갔다 왔다. 선원사 원오(圓悟)에게 법을 받고 41세에 김해(金海) 감로사(甘露寺)에 있다가 원오국사가 입적하매 그의 뒤를 이어 조계(曹溪) 제6세가 되었다. 원(元)나라 세조(世祖)가 북경(北京)으로 청하여 빈주(賓主)의 예로 맞고 금란가사와 백불(白拂)을 선사하기도 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18년에 입적, 그 때 세수 67세 였다.
그의 선풍은 무념무사(無念無事)를 으뜸으로 삼았고, 지관(止觀)의 수행문 중 지(止)를 중시하였으며,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여 지눌의 종풍(宗風)을 계승하였다.
1292년 1월 10일 삭발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문인 (門人)들에게 "생사(生死)가 있는 것은 인생의 일이다. 나는 마땅히 가리니 너희는 잘 있거라."는 말을 남겼다.
정오가 지나자 분향하고 축원을 올린 뒤 선상(禪床)에 앉아 '설본무설 (說本無說)'이라 설하고,
문인들이 청하는 바에 따라 ["돌아보니 세상살이 67년인데, 오늘 아침 모든 일을 마쳤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탄연하여 평탄하고, 노두가 분명하니 어찌 길을 잃으랴. 손에는 겨우 하나의 대지팡이뿐이지만, 가는 길에 다리가 피로하지 않을 것이 또한 기뻐라(閱過行年六十七及到今朝萬事畢故鄉歸路坦然平路頭分明未 會失手中裳有一枝且喜途中脚不倦)."열과행년육십칠급도금조만사필고향귀로단연평로두분명미 회실수중상유일지차희도중각불권]라는 게송(偈頌)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법랍 39세였다. 저서로는 문집인 <원감국사집(圓鑑國師集)> 1권이 남아 있으며, <동문선>에도 시와 글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충렬왕은 원감국사(圓鑑 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보명(寶明)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다.
94.원광경봉선사(圓光鏡峰禪師 1892-1982)
[오도송(悟道頌)]
아시방오물물두(我是訪吾物物頭)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목전즉견주인루(目前卽見主人樓)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가가봉착무의혹(呵呵逢着無疑惑)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
우발화광법계류(優鉢花光法界流) 우담바라 꽃빛이 온누리에 흐르네
물물봉시각득향(物物逢時各得香) 서로서로 만날 때 향기를 얻고
화풍도처진춘양(和風到處盡春陽) 온화한 바람 속에 봄볕도 따사롭네
인생고락종심기(人生苦樂從心起) 인생 괴로움 즐거움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활안조래만사강(活眼照來萬事康) 활달한 눈으로 세상 보면 만사 모두 편안하리라
[홍도화紅桃花] [원광경봉선사(圓光鏡峰禪師 1892-1982)]
산수춘광관고금(山水春光貫古今) 山水의 봄 빛은 古今이 한결같고
홍도지상조정심(紅桃枝上鳥情深) 紅桃花 가지 위 새들의 情은 깊어만 간다
봉랑접객탄향취(蜂郞蝶客呑香醉)손님으로 찾아온 蜂蝶봉접은 꽃 香氣향기에 醉취해
간파화용오수침(看罷花容午睡侵) 꽃 방울 속에서 고이 낮잠에 잠긴다.(벌,봉/나비,접)
[옥류정(玉流亭韻)][원광경봉선사(圓光鏡峰禪師 1892-1982)]
고사월천추(古寺月千秋) 옛 절에 천추의 달은 비치는데
산정객장유(山亭客杖留) 산의 정자에 나그네 지팡이 머무네
여환우여경(如幻又如鏡) 환(幻)과 같고 또 거울 같나니
옥류수불유(玉流水不流) 옥을 흘러가고 물은 흐르지 않네. 출전;三笑窟日誌
[1982년 7월 17일(음력 5월 27일) 이었습니다. 문도들을 모아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아라.”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열반에 드시니 세수 91세, 법랍 75세 이셨습니다.]
원광 경봉선사의 본관은 광주(廣州). 속명은 김용국(金鏞國). 법호는 경봉(鏡峰), 시호(詩號)는 원광(圓光). 법명은 정석(靖錫). 1892년 밀양군 부내면 계수동(서부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규(榮奎)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다.
7세 때 밀양의 한학자 강달수(姜達壽)에게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난 뒤 1907년 출가하여 양산통도사 성해(聖海)스님을 은사로 출가, 이듬해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청호(淸湖)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08년 3월통도사에서 설립한 명신학교(明新學校)에 입학하였으며, 그 해 9월통도사(通度寺)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청호(淸湖)를 계사(戒師)로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1912년해담(海曇)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 연구에 몰두하였다. 여러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선(禪)과 교(敎)를 포괄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으로 선승들을 지도하였다.
1927년 11월 20일 새벽에 방 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그 뒤, 당시의 선지식이었던 방한암(方漢巖)·김제산(金霽山)·백용성(白龍城) 등과 교유하며 정진하였다. 한시와 시조·필묵에 조예가 깊었고, 자기개안(自己開眼)에 의한 육성으로 설법했으며, 선과 교를 포괄하는 독특한 사상을 남겼다
동화사, 내원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겸하며 후학들을 지도했던 스님은 1982년 7월17일
극락호국선원에서 입적했다. 세수 91세, 법랍 75세. 스님은 한시와 필묵에도 뛰어나 많은 선화를
남겼으며, 특히 18세부터 85세까지 67년간 쓴 일지는 한국불교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제자로는 명정(明正), 벽안(碧眼), 경산, 벽산, 도명, 효성 등 많으며, 저서로는 법어집인
『법해(法海)』, 『속법해(續法海)』와 시조집인 『원광한화(圓光閒話)』, 유묵집인 『선문묵일점(禪門墨一點)』, 서간집인 『화중연화소식(火中蓮花消息)』 등이 있다
특히 그는 1910년 1월부터 1976년 4월까지 매일의 중요한 일을 초서(草書)로 기록한 일지를 남겼는데, 중요한 부분만 정리해 <삼소굴일지'(三笑屈日誌)>로 1985년 출간됐다.
[해우소(解憂所)]
스님은 화장실에 ‘해우소(解憂所)’라는 멋진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버리는 것이 바로 도(道) 닦는 것.”
화장실에 '해우소(解憂所)'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때의 일이다.
당시 통도사 극락암 호국선원 조실로 있던 경봉 스님은 두 개의 나무토막에 붓으로 글자를 써서
시자(侍者)에게 내밀었다.
하나는 ‘해우소(解憂所)’라고 쓰여 있었고, 다른 나무토막에는 ’휴급소(休急所)‘라고 적혀 있었다.
경봉 스님은 두 나무토막을 각각 큰일을 치르는 곳과 소변을 보는 곳에 걸라고 명했다.
해우소는 근심을 해결하는 곳, 휴급소는 급한 일을 보고 쉬어가는 곳이라는 의미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급한 것이 무엇이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는 일이야. 그런데도 중생들은 화급한 일 잊어버리고 바쁘지 않은 것을 바쁘다고 해. 내가 소변보는 곳을 휴급소라고 한 것은 쓸데없이 바쁜 마음 그곳에서 쉬어가라는 뜻이야. 그럼 해우소는 무슨 뜻이냐. 뱃속에 쓸데없는 것이
들어 있으면 속이 답답하고 근심 걱정이 생기지, 그것을 다 버리는 거야. 휴급소에 가서 급한 마음을 쉬어가고, 해우소에서 근심 걱정 버리고 가면. 그것이 바로 도(道) 닦는 거야.”
95.원담진성대종사(圓潭眞性大宗師 1926-2008)
[오도송(悟道頌)]
일편허명본묘원(一片虛明本妙圓) 한 조각 비고 밝은 것 본래 묘하고 둥글어
유심무심능부지(有心無心能不知) 유심무심으로는 능히 알 수 없네
경중무형시신즉(鏡中無形是心卽) 거울 가운데 형상 없는 이 마음은
확여허공불괘모(廓如虛空不掛毛) 확연히 허공 같아 티끌만치라도 걸리지 않네
[열반송(涅槃頌)]
본래일물래(來無一物來) 올 때 한 물건도 없이 왔고
거무일물거(去無一物去) 갈 때 한 물건도 없이 가는 것이로다.
거래본무사(去來本無事) 가고 오는 것이 본래 일이 없어
청사초자청(靑山草自靑) 청산과 풀은 스스로 푸름이로다.
일법원무만법공(一法元無萬法空) 한 법도 없는데 만법인들 있겠는가
개중오도상한정(箇中悟道尙閑情) 이 가운데에는 깨달음도 부질없는 생각이라
십자가두박수소(十字街頭拍手笑) 네거리에서 손뼉을 치고 웃으니
만허기풍운월경(滿虛起風雲月驚) 허공 가득 이는 바람에 구름과 달이 놀라겠네.
[원담대종사(大宗師)의 본관(本貫)은 부안김씨(扶安金氏)이며, 모친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해서 아명(兒名)은 몽술(夢述)이요 법명(法名)은 진성(眞性)이고 법호(法號)는 원담(圓潭)이다. 1926년 10월 26일 전북 옥구군 옥구면 수산리 217 번지에서 부친 김낙관(金洛觀)과 모친 나채봉 (羅采鳳)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고, 다음해에 충남 서천군 기산면 신산리 39번지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1932년 신동우 선생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던 중, 장남인 형이 일찍 죽자 수명장수 기도 차 이모인 비구니 스님을 따라 절에 오게 되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승려 생활이 무척 고상하고 숭배하는
마음이 나서 집에 돌아와 부모를 졸라 출가하였고, 1933년 벽초(碧超) 스님을 은사로 만공(滿空)
스님을 계사로 수계득도하였다.
1986년에 덕숭총림 제3대 방장으로 취임하며 보임정수(保任精修)하시게 되었고,
1994년에는 원로회의 부의장을 역임하셨다. 2003년 『원담법향집』을 출간하였고,
2004년 대종사(大宗師) 법계(法戒)를 품수(品受)하셨다.
또한 승가사 조실, 용인 하운사 조실, 용인 법륜사 조실, 금산 금락사 조실, 향천사 천불선원 조실, 개심사 보현선원 조실을 역임하셨다.
30여 년 간의 결제·해제 상당법어(上堂法語)를 보면 마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인 듯, 더위를 씻는
맑은 바람인 듯, 납자(衲子)들에게 길잡이가 되고 조도(助道)에 도움이 되는 지남(指南)이 되시었다.
대종사께서는 예술 방면에도 조예가 깊으셨다.
1982년에 쓰신 수덕사 대웅전 현판을 비롯하여, 1984년에는 속리산 법주사의 주련들을 쓰셨으며,
1986년에는 《일본산업경제신문》이 주최한 국제서도전에서 대상(大賞)을 수상하시고,
같은 해 독립기념관 건립 서예전을 열어 전액을 회사한 바 있다.
2007년 12월 『원담대종사선묵집』을 간행하였으니, 그동안 일필(一筆)을 들어 먹으로 선계(禪界)의 풍류 속에서 개오(開悟)로 이루어진 서예의 예술은 많은 감화와 감동을 남겼다.
원담 진성 대종사는 지난 2008년 3월 18일 9시에 원적에 드셨습니다.
96.원묘국사요세(圓妙國師了世 1163-1245)
[임종게]
[임종을 앞두고 제자 천책스님이 여쭈었다.]
“세상을 떠날 때 정(定)에 든 마음이 곧 극락정토인데 다시 어디로 가시렵니까?”
스승 왈,
“이 생각만이 동요하지 않으면
바로 이 자리에서 도가 나타나니
나는 가지 않으면서 가고,
그들은 오지 않으면서 오니
서로 감응되는 것이며
실상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매일 앉고 누울 때마다 거듭 창하면서 염불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자에게 경쇠를 쳐서 여러 사람을 모으게 한 뒤 세수를 하고 법복을 입고 법상에 올라 가부좌로 서쪽을 향해 바라보며 앉아 대중들에게 고했다.]
“50년 산 속에서 썩은 이 물건이 오늘날 떠나가니 각자 노력하고 법을 위해 힘쓰라”
임종을 앞두고 제자 천인(天因) 스님이 여쭈었다 . “세상을 떠날 때 정(定)에 든 마음이 곧 극락정토인데 다시 어디로 가시렵니까?” 스승 왈, “이 생각만이 동요하지 않으면 바로 이 자리에서 도가 나타나니 나는 가지 않으면서 가고, 그들은 오지 않으면서 오니 서로 감응되는 것이며 실상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요세는 고려 의종 때(1163) 합천의 속현(屬縣)인 신번현(新繁縣)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서필중
(徐必中)의 아들로 대정(大定) 계미년 겨울 10월에 탄생하였는데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용맹한 모습이었고 자라면서 이미 어른스러운 태도가 보였다.
그리고 12 세 때인 1174년에 천태종 천락사(天樂寺)에서 균정(均定)을 스승으로 해서 출가하여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강양군수인 학사 임종비(林宗庇)가 한 번 보고 중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불법을 믿을 곳이 있겠도다”하였다.
23세에 승과에 급제하여 오로지 천태 종승(宗乘)에 뜻을 두고 두루 강(講)에 참석하였다.
요세는 1237년(고종 24)에 고종으로부터 선사(禪師)를 제수받았으며, 1245년(고종 32) 입적한 후 국사(國師)로 추증되고 원묘(圓妙)라는 시호와 중진(中眞)이라는 탑명을 받은 바 있다.
23세 때인 1185년에 승선(僧選)에 합격하고 그 뒤 1198 년 봄에 개경의 천태종 사찰인 고봉사
(高峯寺)에서 개최한 법회에 참석했다. 이름 있는 승려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여러 가지 이론이
벌떼같이 일어났으나 대사가 법좌에 올라 한 번 사자후를 하니 대중들이 모두 경복해 감히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요세스님(了世, 1163–1245)와 진정국사(眞靜國師, 1178–1234)는 고려 시대 불교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로, 백련결사(白蓮結社)를 통해 불교 정화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백련결사는 당시 불교계의 부패와 타락을 바로잡기 위해 설립된 불교 결사 단체로, 불교의 근본
정신을 회복하고 신앙과 수행을 통해 교단을 개혁하려는 목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요세 스님은 1216년 영암 이웃 고을인 강진의 호족들의 지원을 받아 만덕산 마루에 있는 퇴락한 사찰인 만덕사를 80여칸으로 중창하고 여기에 머물며 본격적으로 '백련 결사'를 시작했습니다.
백련 결사는 수선 결사보다 세상의 관심은 덜 끌었지만 청정한 염불 수행의 백련 결사는 주변
고을 호족들과 민중들의 열띤 호응이 뒤따랐습니다.
요세 스님은 날마다 천태의 지관수행법으로 참선하고 법화경 1부를 외우면서 53불께 참회 의식을 행하고 준제진언 1천 번,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1만번 염송하였다고 합니다
백련사에서 1232년 공식적으로 보현도량(普賢道場)을 설치했는데, 이는 그해의 강화천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1236년 제자인 천책(天頙)이 〈백련결사문〉을 찬술·공포했다. 1237년 고종으로부터 선사(禪師)의 직함과 함께 세찬(歲饌)을 받았다.
1240년 〈계환해묘법연화경戒環解妙法蓮華經〉을 보현도량에서 조판하도록 했다. 이로 보아 보현도량과 최씨정권 간에 서로 유대를 맺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245년 천인(天因)에게 백련사를 맡기고, 그해 7월 입적했다.
시호는 원묘국사(圓妙國師)이며, 탑호는 중진(中眞)이다. 스님은 일생 동안 참회를 행하고 강조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참회(徐懺悔)’로 불렀다고도 한다.
저서로는「삼대부절요」가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97.원수행단선사(元叟行端禪師 1255~1341)
[임종게(臨終偈)]
본무생멸(本無生滅) 나고 죽음이 없는데
언유거래(焉有去來) 어찌 가고 옴이 있으리
빙하발화(氷河發火) 빙하에서 불길이 솟고
철수화개(鐵樹華開) 무쇠나무에서 꽃이 피네.
[원수행단(元叟行端, 1255~1341)은 1255년 절강성 임해(臨海)에서 태어났다.
6세 때 어머니에게 《논어》와 《맹자》를 배우고 머지않아 절강성 화성원(化城阮)에 있던 숙부 무상인(茂上人)에게 출가하였다. 경산(徑山)의 장수선진(藏叟善珍)을 찾아가 그의 법을 이었다.
역대 황제들의 귀의를 받아 세 번이나 금란가사(金袈裟)를 받기도 했다. 1341년 8월 4일 88세에 입적했다.
[임종게 어설픈 해설]
빙하에서 불길이 솟을 리 만무하고, 무쇠 나무가 꽃을 피울 리 없죠. 그리고 우리의 삶도 이와 같아
그 실체를 밝힐 수 없는 신기루(蜃氣樓)와 같은 것이며 잠깐 나타난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작과 끝, 오고 감, 나고 죽음이 원래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스님의 임종게에 나타나는 이런 정도의 생사관을 보이려면 외물(外物)과 내(我)가 구분없이 정말 하나가 되어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난 경지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퍼온글]
98.원오극근선사(圓悟克勤禪師 1063-1135)
[오도송(悟道頌)]
금압향쇄금수유(金鴨香鎖錦繡帷) 금오리향 타올라 비단 장막 안에 가득하고
생가총리취부귀(笙歌叢裡醉扶歸) 흥청대는 노래 숲 지나 잔뜩 취해 돌아왔네
소년일단풍유사(少年一段風流事) 멋들어지게 노닐었던 이 사람의 이야기야
지허가인독자지(只許佳人獨自知) 아름다운 사람 말곤 아는 이가 없어라
[임종게(臨終偈)]
이철무공(已徹無功) 나의 이 몸 살아 오면서 아무 것도 해 놓은 것 없거니
불필무송(不必留頌) 애써 굳이 게송을 남기거나 임종게를 남길 이유가 없네
료이응연(聊爾應緣) 인간사 잠시 잠깐 찰나간에 오직 인연에 따라 살 뿐이니
진중진중(珍重珍重) 진중하고 진중하게 살아가소 모두들 잘 있게.
정저니우후월(井底泥牛吼月) 우물 밑에서 진흙소가 달을 향해 울고
운간목마시풍(雲間木馬嘶風) 구름 사이 목마 울음 바람에 섞이네
파단건곤세계(把斷乾坤世界) 이 하늘 이 땅을 움켜잡나니
수분남북서동(誰分南北西東) 누가 남북동서를 가름하는가.
원오극근(圜悟克勤, Yuanwu Keqin, 1063년 ~ 1135년)은 송(宋)나라 때 팽주(彭州) 숭녕(崇寧) 사람으로 어린 시절에 묘적원(妙寂院) 자성(自省) 선사에게 출가하였다.
문희(文熙) 스님과 민행(敏行) 스님을 따라 경론을 연구하였고 뒤에 임제종의 오조법연
(五祖法演,1024-1104) 선사의 법을 이었다. 임제종 양기파(楊枝派)에 속한 스님이다.
한국불교에서 인정하는 조사선맥에서, 석가모니 이래 제48대 조사 스님이다.
사천성 사람으로 속성은 락(駱)씨다. 휘가 극근(克勤)이고, 자는 무착(無著)이며, 원오는 남송 고종에게 받은 사호(賜號)다. 북송 휘종은 불과선사(佛果禪師)라는 호를, 남송 고종은 진각선사(眞覺禪師)라는 호를 내려 극진히 존경했다.
원오극근 스님은 제47대 조사 스님인 오조법연(五祖法演) 스님의 수제자다. 불안청원(佛眼淸遠), 태평혜근(太平慧懃), 원오극근(園悟克勤)을 오조법연 문하의 세 부처라고 한다.
제48대 조사 원오극근 스님의 법은 제49대 조사 호구소융 스님에게 이어졌지만, 원오극근 스님의 유명한 제자로 대혜종고 스님이 있다. 대혜종고 스님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 참선 방법인 간화선을 만들었다.
벽암록은 원오극근 스님의 유명한 저작으로,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종문제일서라며, 최고의 참선 교과서라고 알려져 있다. 벽암록, 종용록, 무문관을 3대 선어록이라고 부른다.
선사는 사천성(泗川省)에서 태어났고, 오조법연(五祖法演) 선사의 법을 잇고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에 속하는 고승(高僧)이다. 저서로는 원오불과선사심요(圓悟佛果禪師心要)가 있다.
법을 묻는 제자(弟子)들과 사대부(士大夫)들과 편지인 143편의 글로 되어서 법을 묻는 사람 근기에 맞게 자세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공안참선(公案參禪) 화두(話頭)를 권하는 선어(禪語)다. 공안화두(公案話頭)는 조주무자(趙州無字)다. 제자(弟子) 대혜종고(大慧宗杲)가 화두참선(話頭參禪)을 주창하는데 교량역(橋梁役)을 한 셈이다.
1125년 원오 극근 선사는 예주(澧州)(현재 후난성 창더시 리현) 협산(夾山)에 위치한 영천선원(靈泉禪院)에 있을 때에 설두(雪竇) 선사가 편집한 <송고백칙(頌古百則)>에 대해 각 칙마다 서론 격으로 짧게 언급하는 수시(垂示)와 본칙과 송에 대한 해설을 가하는 평창(評唱), 그리고 본칙의 각 구절에 대해 원오 선사가 평가하는 형식으로 붙인 착어(着語) 등 세 가지를 덧붙여 만든 책 <벽암록(碧巖錄)>을
저술해서 제자들에게 강론(講論) 한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원오극근 선사는 조고각하(照顧脚下) 선화(禪話)로 유명한 선사다.
1052년 6월 10일 입적하자 조정에서는 명각대사(明覺大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99.원진국사승형(圓眞國師 承逈 1171-1221)
[오도송(悟道頌)] [영원한 향기(永香)]
묘명진성(妙明眞性) 묘하고 밝은 참된 성품이여
청정진성(淸淨眞性) 청정하고 진실된 성품이여
아위대법왕(我爲大法王) 내가 큰 법왕이 되어
어법실자재(於法悉自在) 모든 법에 자재하리라.
[심행처멸心行處滅:마음이 행(실천)하여 머물고 멸하는 곳)]
공비유유억소림(空費悠悠憶少林) 부질없이 소림만을 오로지 생각하다
인순쇠빈도여금(因循衰鬢到如今) 인과 돌고 돌아 오늘 어느덧 구레나룻 희끗희끗
비야석일무성취(毘耶昔一無成臭) 열반하신(毘耶離)는 옛날 소리도 냄새(자취)도 없고
마갈당년절향음(摩竭當年絶響音) 마가다의 음향(佛音 正覺)은 끊어졌어라.
사올능방분별의(似兀能防分別意) 장승인 양 앉아 있으니 일체분별 사라지고
여치필어시비심(如癡必禦是非心) 바보(癡)처럼 지내라노니 시비심 일지 않네
고장망계비산외(故將忘計飛山外) 헛되고 헛 된 생각일랑 산문 밖으로 날려 보내고
종일망기대벽잠(終日忘機對碧岑) 온 종일 세사를 잊고 푸른 산만 마주한다.
[승형承逈 스님은 성은 신씨(申氏). 자는 영형(永逈). 아버지는 통한(通漢)이며 상주 산양현 출신으로 세살 때 고아가 되어 숙부인 시어사(侍御史) 광한(光漢) 밑에서 자라났다.
13세 때 가은 봉암사(鳳巖寺)에서 선사 동순(洞純)을 은사로 득도(得度)하였고 이듬해 김제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197년(고려 명종27) 스승 동순이 입적해서 그
장례를 치르느라고 승과 과정을 제대로 치루지 못하였는데 명종이 '범례에 구속하지 말라 '고 명하여 승과를 볼 수 있었고 합격하였다.
1210년(고려 희종6)에 연법사(演法寺) 법회의 법주(法主)가 되어 선풍(禪風)을 떨치고,
1213년(고려 강종2)에 삼중대사(三重大師), 1214년(고려 고종1)에 선사(禪師)가 되었고, 이듬해에
대선사(大禪師)가 되어 영일군 보경사(寶鏡寺)에 머물렀다.
1220년에는 희종의 넷째아들인 경지(鏡智)의 은사가 되었고, 1221년에 『능엄경』을 설한 뒤 팔공산 염불사(念佛寺)로 옮겨 입적하였다. 국사(國師)로 추증되었으며 비는 보경사에 있고 시호는 원진
(圓眞)이다.
100.원증국사 ▶태고보우국사 참조 [감로심(甘露心 : 맑고 깨끗한 마음)]
[출처] 오도송, 열반송(1경당각원~100원증국사)|작성자 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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