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8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7. 나란다 사원 ②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7. 나란다 사원 ② 학인스님 흔적 전하듯 僧房 침대엔 온기돌아 2002년 3월30일 유적지에 도착해 본 나란다 사원은 과연 ‘거대’했다. 인도 대륙 각처에 산재한 불교유적들을 답사하고 도착한 터라, ‘나란다의 거대함’이 더욱 실감(實感)됐다. 파괴된 높이가 30m인 탑, 여기저기 흩어진 많은 부도들, 두꺼운 벽을 가진 수많은 승방들. 하루 종일 봐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였다. 남아있는 유적만 봐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성(盛)의 극(極)을 달린 7·8세기엔 정말 대단한 사원이었을 거란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파괴됐어도 대단한 규모 나란다 사원은 사실 ‘인도승원(僧院) 발전의 정점’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시작된 ‘사원 발달’의 ‘완성형’을 나란다 사원은 ..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6. 나란다 사원 ① 항상 1만여명 모여 공부한 '종합대학'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6. 나란다 사원 ① 항상 1만여명 모여 공부한 '종합대학' 2002년 3월28일 오후 4시30분. 마우리아 왕조의 수도인 파트나를 떠나 라즈기르에 도착했다. 최초의 사원인 기원정사 유적과 "세계 최대의 대학"이 있었던 나란다 사원을 보기 위해서였다. 라즈기르에 도착한 지 이틀 뒤인 3월30일 "꿈에 그리던" 나란다 사원으로 갔다. 아침 일찍 출발했다. 라즈기르에서 북쪽으로 13km 떨어져 있기에 멀지는 않았다. 신선한 공기를 맡으며, 녹음 우거진 거리를 달렸다. 도착하니 9시30분. 마침 3월말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덥지 않은 햇살을 받으며 유적지로 난 포장로를 걸었다. 출입구인 돌문을 지나 유적지에 들어서니 바둑판처럼 잘 정돈된 건물 초석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5. 산치대탑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5. 산치대탑 불교 살아있는 듯 주변엔 생동감 넘쳐 2002년 3월12일 새벽 5시. 현대 인도불교 부흥의 선구자 암베드카 박사가 ‘불교개종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인 나그푸르를 떠나 보팔에 도착했다. 열차(침대 칸)를 타고, 밤새도록 달렸다.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붉은 옷을 입은 짐꾼들이 객실 안으로 몰려들어왔다. 서로 짐을 들겠다고 난리였다. 짐을 맡긴 후 기차역을 나오니 희뿌옇게 동이 트고 있었다. 산치언덕, 평원가운데 우뚝솟아 숙소인 아쇼카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짧은 휴식을 취한 뒤 산치대탑이 있는 언덕으로 향했다. 드넓은 평원 사이로 난 길을 타고 1시간 30분 정도 달리니, 저 멀리 언덕이 보였다. 자그마한 나무들이 서있고, 산치대탑의 모습도 어렴풋이 보였다..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4. 마투라와 불상의 탄생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4. 마투라와 불상의 탄생 북서 인도 포교거점, 불상 처음 조성된 古都 갠지즈강 중·하류(야무나강 오른편 기슭)에서 간다라 등 북서인도로 통하는 교역로 상에 위치한 마투라는 북동쪽의 쉬라바스티(사위성)에서 남쪽의 웃자이니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라자가하(왕사성) 등 동인도에서 흥기한 불교와 자이나교는 바로 이 마투라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갔다. 불교는 북서쪽으로 진출해 인도 밖으로 가게 됐고, 자이나교는 주로 서남 인도로 퍼졌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한 곳인 마투라는 특히 불교에게 의미 있는 장소다. 동인도 불교가 북서인도로 확산될 때 '포교거점'이었고, 북서인도의 간다라와 더불어 '불상이 탄생된 곳'이기 때문이다. 2세기 전반 불상을 조상(造像)하기 ..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3. 바이샬리.파트나의 제 2.3의 결집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3. 바이샬리.파트나의 제 2.3의 결집 제2결집지엔 힌두교 사원만 덩그라니…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기 위해’ 인도에 온 지도 벌써 20여일 지난 2002년 3월24일. 서서히 인도 대지에 적응해 가던 그 때 〈유마경〉의 무대 바이샬리를 찾았다. 원숭이들이 부처님을 위해 연못을 파고, 부처님께 꿀을 공양한 곳 바이샬리. 그 바이샬리에 24일 당도했다. 열반의 땅 쿠시나가라에서 출발해 바이샬리에 도착하니 시간은 오전 11시경. 높이 솟은 아쇼카석주가 있는, 대림 중각강당으로 추정되는 곳을 먼저 보았다. 이어 부처님 사후 제2결집이 거행된 장소를 찾았다. 바이샬리 남쪽 4km 지점에 위치한 제2결집지는 이미 힌두교 사원으로 변해 있었다. 힌두교 사원이 들어선 모습을 보는 순간 ..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2. 칠엽굴의 첫 결집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2. 칠엽굴의 첫 결집 5백 아라한 경·율 편찬 … 흔적 남아있는 듯 2002년 3월29일 부처님 입적 후 제1차 결집이 이뤄진 라즈기르의 ‘삿타파니 동굴’(칠엽굴)에 올랐다. 아침 9시경 등산을 시작했다. 태양은 뜨거웠다. 칠엽굴 입구엔 자이나교 사원이 떡 버티고 있었다. 불교 사찰이 있어야 될 자리에 자이나교 사원이 위용도 당당하게 서있다니…. 사원 앞을 지나가는데, 흰옷 입은 자이나교 수행자 둘이 우리 뒤를 따라왔다. 계속 말을 붙여왔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듣는 둥 마는 둥 걸어가는 데도 끝까지 따라왔다. 입구에 자이나교 사원 자이나교 사원에서 약간 밑으로 내려가 모퉁이를 돌아가니, 사진에서 많이 보던 칠엽굴이 나타났다. 칠엽굴 위치는 상당히 높았다. 라자..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1. 다비와 사리분배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1. 다비와 사리분배 유골 8등분 … 곳곳에 스투파 건립해 추모 ‘괴로움의 바다’에서 헤매는 중생을 건지기 위해, 평생 길에서 산 부처님은 쿠시나가라 사라 숲에서 열반에 들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여 수행을 완성하라”는 가르침을 남긴 채. 육신(肉身)을 벗고 법신(法身)의 세계로 들어갔다. 아침 일찍 열반당 참배 2002년 3월23일. 어제 밤에 참배하지 못한 열반당을 아침 일찍 찾았다.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좁은 형태였다. 입구는 서쪽 벽 중앙에 있는데,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부처님이 누워 계셨다.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오른 손을 베개삼아, 두 발을 포개고, 오른쪽 부분을 대좌(臺座)에 댄 부처님이 계셨다. 황색가사가 부처님 몸 위에 덮여 있었다. 향을 ..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0. 열반의 길 ④ 쿠시나가라 - “게으름 피우지 마라” 남기고 열반|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0. 열반의 길 ④ 쿠시나가라 “게으름 피우지 마라” 남기고 열반 열반의 땅 쿠시나가라. 어제 밤(3월22일) 도착했지만, 어둠에 쌓인 열반당을 참배하진 못했다. 오늘 아침(2002년 3월23일) 일어나자마자 참배하고 화질나가르·쿠쿠다 강·히라냐바티 강을 거쳐 다시 열반당에 도착했다. 열반당 주변에 심어진 사라 나무들은 초봄을 맞아 잎을 뿜어내고 있었고 넓은 공터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1956년 심은 사라쌍수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걸은 길을 따라오는 사이, 우리들 몸은 땀에 절어버렸다. 나무 그늘을 찾아 앉았다. 열반당 앞 정원 여기 저기에 설치된 스프링쿨러들은 쉴새없이 물을 뿜어대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스프링쿨러에 다가가 얼굴을 씻기도 하고, 물을 먹기도 했다...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9. 열반의 길 ③ 춘다의 공양 - “아난다여! 목이 마르다”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9. 열반의 길 ③ 춘다의 공양 “아난다여! 목이 마르다” 쿠쿠다江에서 마지막 목욕 바이샬리를 떠난 부처님은 ‘보가 나가라’를 거쳐 ‘파바 마을’(파바나가르. 현재의 화질나가르)에 도착, 춘다의 망고동산에 머물렀다. 소식을 접한 대장장이 아들 춘다가 서둘러 부처님 처소로 왔다. 여러 가지 가르침을 들은 춘다는 기쁜 마음에 부처님께 말했다. 파바마을 망고동산에 도착 “부처님이사여! 내일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자하오니, 비구들과 함께 꼭 오시도록 하소서.” 부처님은 침묵으로 수락했다. 이튿날 아침. 춘다는 자신의 집에서 딱딱하고 부드러운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다. 음식 중에는 ‘스카라 맛다바’라는 요리도 섞여 있었다. 준비가 완료되자 춘다는 사람을 보내 “부처님이여! 때가 왔사옵니..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8. 열반의 길 ② 바이샬리 “만들어진 것은 결국 사라지니 정진하라”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8. 열반의 길 ② 바이샬리 “만들어진 것은 결국 사라지니 정진하라” 릿차비족의 수도이자, 자이나 교주 니간타 나타풋타(마하비라)의 고향인 바이샬리는 부처님 당시 유명한 상업도시였다. 광암성(光巖城)·광엄성(光嚴城)으로 한역된 바이샬리는 공화제로 통치된, 더할 나위 없는 번영을 누린 곳이었다. 릿차비족에 이어 마가다국 아자타삿투 왕의 지배를 받았으며, 기원 후 건립된 쿠샨(1∼3세기)·굽타(4∼6세기)왕조에 이르기까지 영광을 이어갔다. 그러나 지난 3월24일 찾아간 바이샬리엔 ‘과거의 영광’은 없었다. 상업도시로 번영을 누린 기억조차 새로울 만큼 ‘한미한 촌’으로 전락해 있었다. 한적한 촌으로 변한 바이샬리 열반의 땅 쿠시나가라를 지나 바이샬리에 들어서니, 한 마리의 사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