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대승찬 풀이글) 48

혜국스님의 신·심·명 강설

1. 신심명은 “성철 스님은 신심명을 중도총론이라 설하셨지요” 신심명(信心銘)은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선종의 제3대 조사(祖師)인 승찬(僧璨, ?~606년) 선사께서 지은 선어록입니다. 1000년도 훌쩍 넘은 그 시절, 이처럼 아름다운 글이 지금까지 전해진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고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지구라는 별에 오셔서 평생을 가르치신 내용이 중도연기(中道緣起)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평생을 길에서 사셨습니다. 생명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중생을 위한 길을 걸으셨습니다. ​ ▲ 불교인재원이 2009년 9월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봉행한 ‘혜국 스님의 신심명 대강좌’. ​ 부처님께서 한평생 말씀하신 중도연기를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로 명쾌하게 설하셨는지 지금..

신심명22/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럽게 얽혀 마음의 중심을 잃으리라

22. 재유시비(纔有是非) 분연실심(紛然失心) :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럽게 얽혀 마음의 중심을 잃으리라. 재유시비의 재유는 잠깐이라도 이고, 시비는 옳고 그른 것을 서로 따지는 관계를 말한다. 분연실심의 분연은 실같이 나누어져서 서로 얽혀 어지럽다는 뜻이고 실심은 마음을 잃는다고 했으나 마음의 중심을 잃는다고 해석했다. 남과 잠시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중심을 잃게 된다고 했다. 남과 아주 하찮은 시비라도 있게 되면 우리들의 마음은 그로 인해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고, 솟아오르는 화를 참기 어려워지기도 하고, 전화를 걸거나 만나서 따지고 언쟁하다 보면 화가 하늘 끝까지 오르고, 두 사람 사이는 다시 만나기 어려운 사이까지 가는 경우들이 있다. 우리는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기 쉽지..

신심명21/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찾으려고 하거나 쫓지를 말라

21. 이견부주(二見不住) 신막추심(愼莫追尋) :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찾으려고 하거나 쫓지를 말라. 신심명은 주로 분별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견부주 역시 두 가지로 보는 분별의 견해에 머무르지 말고, 신막추심 즉, 두 가지의 견해인 분별을 쫓아가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헛갈리는 것은 크고 작은 사실을 어떻게 분별하지 말라는 것일까? 또 좋은 것을 좋다고 하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하는데 왜 하지 말라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두 가지 중에 상대적으로 더 예쁘고 좋으며, 더 예쁘지 않거나 좋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더 큰 것 또는 더 예쁘고 좋은 것을 취하려 집착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마찬가..

신심명20/참됨을 구함에는 쓸모가 없으니 오직 그런 견해를 반드시 쉴지니라

20. 불용구진(不用求眞) 유수식견(唯須息見) : 참됨을 구함에는 쓸모가 없으니 오직 그런 견해를 반드시 쉴지니라. 참(眞)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이 마음이 바로 참이다. 우리가 매일 매 순간 경험하고 있는 희로애락애오욕 그 하나하나가 참 아님이 없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 이미 부처다. 우리는 이미 깨달아 있다. 그렇기에 참됨을 구할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오직 지금 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좋다-나쁘다, 됐다-안 됐다, 이다-아니다 등의 둘로 나누고 분별하면서 하나는 버리고 다른 하나는 택하려고 하는 그 허망한 견해만 쉬면 된다. 공관을 하는 수행은 진리를 구함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공관을 하겠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는 말로 해석된다..

신심명19/공 함이 움직여 변해가는 것은 모두 망령된 견해이다

19. 전공전변(前空轉變) 개유망견(皆由妄見) : 공 함이 움직여 변해가는 것은 모두 망령된 견해이다. 공관이란 눈앞에 한 대상을 택하여 그 대상이 공하다고 보는 수행법이다. 눈앞에 있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공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그 나무가 가벼워져 공중에 둥둥 떠다닐 수도 있고, 점점 작아지면서 나중에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수행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가지고 여러 가지 생각이 일어나 전변할 수 있는데 이를 모두 망견이라 했다. 이러한 공관의 단계에 가려면 자신의 업장을 많이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이 단계에 갈 수 있는 수행자는 불생불멸로 가는 길도 알게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망견은 반조 수행에서도 일어나는 법이다. 전공전변 개유망견 앞의 경계가 공하여 변하는 것..

신심명18/좋은 것은 나쁜 것의 원인이 되고, 옳은 것은 그른 것의 원인이 되니

18. 수유반조(須臾返照) 승각전공(勝脚前空) :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 봐도 눈 앞의 공함보다 수승하리라. 수유반조는 모름지기 잠깐 사이라도 마음의 자성을 돌이켜 비추어 보면 이 되고 승각전공의 승각은 보다 수승하다는 뜻이고, 전공은 앞의 공이니 눈앞의 공이고, 눈앞의 공은 경계를 공으로 관하는 수행법이다. 경계를 관하는 수행법에는 화관, 수관, 백골관, 수식관, 공관 등과 같이 수행하는 대상을 불이라고 바라보거나, 물 혹은 백골이라고 바라보는 것이 익숙하게 되면, 생각하고 바라보는 대로 그 대상이 바뀌어 나타나게 된다. 공관이란 앞에 있는 경계, 즉 수행의 대상을 바라보면서 생각으로 공하다고 보는 것이다. 계속해보다 보면 그 경계가 공하게 보이는데 공해진 경계를 앞에 나타난 공이라 해서 이 게송에서..

신심명17/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17. 귀근득지(歸根得旨) 수조실종(隨照失宗) :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다 보면 종취(宗趣)를 잃으리라. 귀근의 근은 뿌리 근으로 원점을 의미하는 것이니 마음속 근본이 되고, 득지의 지는 맛있을 지이니, 합하면 뿌리의 맛, 혹은 원점의 맛을 알게 된다는 말씀이니, 즉 마음속 근본에 돌아가면 대도의 뜻을 얻게 되지만 이 되고, 수조의 수는 따를 수이고, 조는 비출 조인데 앞의 근의 상대는 마음 밖의 경이 되니, 수조는 밝게 비치는 외경을 따르면 실종, 즉 종취를 잃어버린다고 했다. 종취는 원칙이니 원칙을 잃는다는 의미이다. 먼저 귀근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절언절려 무처불통, 즉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한 곳에 근본이 있다고 볼 수 있고, 지동귀지 지갱미..

신심명16/절언절려는 말과 생각이 끊어진 자리

16. 절언절려(絶言絶慮) 무처불통(無處不通) :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못할 곳이 없느니라. 말이 끊어진 절언(絶言)이란 말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말이 끊어졌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다음 순간에 또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지의 자리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심지의 자리가 있다고 해도 틀리고 없다고 해도 틀리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해도 틀리고 무엇이라 입만 열면 틀리니 무엇이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깨닫고 묵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절언이다. 그리고 생각이 끊어진 곳, 절려된 곳은 곧 무념에 든 곳이다. 무념에 든 곳은 곧 무상삼매에 든 것이고, 무상삼매에서는 나는 사라지고 법계와 하나가 된 것이니 시간과 공간 개념이 사라진다. 시공과 하나가 되..

신심명15/다언다려 전부상응/말이 많고 생각이 많이 움직이면 대도와 상응치 못한다

15. 다언다려(多言多慮) 전부상응(轉不相應) :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상응치 못하느니라. 말이 많고 생각이 많이 움직이면 대도와 상응치 못한다. 대도는 말에 있는 것도 아니요 생각에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도는 불생불멸하는 마음이라 고요히 있는 것인데 말이나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면 그 생각과 말에 가려져 대도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다고 했다. 앞 게송(14 게송) 종공배공에서 설명했듯이 공을 생각으로 만들어가려고 하면 오히려 공을 등지게 된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말을 많이 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대개 가상하여 생각하고 말을 하는데, 그 가상은 어디까지나 가상이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과 잘 맞지 않는 생각을 많이 하고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들..

신심명14/견유몰유/있음을 보내려고 하면 오히려 있음에 빠진다

14. 견유몰유(遺有沒有) 종공배공(從空背空) : 있음을 버리려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려면 공함을 등지느니라. 여기에서도 유와 공을 상대로 말하고 있는데 현상적으로 보이는 일체 문제는 모두 있음과 없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견유몰유 : 있음을 보내려고 하면 오히려 있음에 빠진다. 있음을 버리려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탐진치 삼독을 떼어내 보내다, 혹은 버리다. 로 생각된다. 종공배공 : 공을 쫓는다고 할 때, 내 마음에는 공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 이 마음이 무슨 마음일까? 제법무아의 마음, 나는 없다. 를 추구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없다는 색공을 의미하는 것인데 나라는 존재는 지수화풍과 수상행식이 연을 맺어 이루어진 것이니 그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하여 모든 법은 본래 없는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