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길 | |||||||||||||||||||||||
[전문] 월암스님/함양 벽송사 벽송선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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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화선 수증의 이론적 토대 불교가 어찌 부처님께서 친설하신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한정할 수 있겠는가. 석가세존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법을 깨달은 모든 불조사의 가르침을 통칭하여 불교라고 말하는 것이 역사연기에 부합한 인식일 것이다. 초기불교, 상좌부불교, 대승불교, 중국선불교, 한국불교의 정통 교설이 상이한 내용일 수 없다. 그러므로 중국 조사선에서 집대성되어 한국에 전래된 간화선 수행법이 부처님 당시의 수행법과 상좌부의 아비담마, 그리고 대승불교의 수증론과 동일한 지평 위에서 이해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러한 인식의 기초 위에 간화선의 이론적 토대를 초기불교의 교설 및 수행법으로 해석해 봄으로써 남방의 수행전통과 북방의 수행전통 위에 수립된 간화선이 수행과 깨달음의 핵심내용에 있어서 결코 다르지 않음을 살펴보고, 아울러 간화선에 있어서 화두 의심의 방법적 특징을 몇 가지 천착해보기로 하겠다. 다만 망상으로 뒤바뀌어진 마음, 사량하여 분별하는 마음,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 알음알이(知見)로 알려는 마음, 고요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마음 등을 한꺼번에 눌러야 합니다. 눌러 내린 그 곳에서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조주스님께서 ‘없다’라고 답했다.”는 화두를 들어야 합니다. 오음(五陰) ‧ 육입(六入) ‧ 십이처(十二處) ‧ 십팔계(十八界) ‧ 이십오유(二十五有) ‧ 무명업식(無明業識) ‧ 사량분별(思量計較)하는 마음들이 밤낮으로 일어나되 길들이지 않은 말처럼 잠시도 쉴 틈이 없는 것이 익어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사에 유랑하게 하고, 좋지 않은 일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낯설어지면 보리열반과 진여불성이 바로 눈앞에 드러납니다. 그러나 눈앞에 들어날 때도 눈앞에 들어났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무명업식과 사량분별 등은 낯익은 것들이고, 보리열반, 진여불성은 낯설은 것이다. 여기서 기본적으로 설해지고 있는 것이 오온, 육입, 십이처, 십팔계 등의 교설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이 바로 “생각이 미치지 않는 곳”이란 말이다. 대혜선사는 “오음(五陰) ‧ 육입(六入) ‧ 십이처(十二處) ‧ 십팔계(十八界) ‧ 이십오유(二十五有) ‧ 무명업식(無明業識) ‧ 사량분별(思量計較)하는 마음”, 즉 팔식(八識)이 계속 이어지지 않는 그 곳, 즉 무명으로 인한 번뇌 망념에 휘말리지 않는 그곳에서 무자화두를 참구하라고 지시함으로써, 화두참구의 요체를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오음(五陰) ‧ 육입(六入) ‧ 십이처(十二處) ‧ 십팔계(十八界) 등으로 대변되는 일체 번뇌망념(팔식 작용)을 놓아버린 그곳에서 화두 참구를 통해 번뇌가 바로 공성(空性)임을 요달하여 번뇌가 그대로 보리(菩提)인 진여불성의 중도(中道)를 깨닫게 하는 견성법(見性法)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종에서 주장하는 돈오자성청정(頓悟自性淸淨)이란 자기 성품이 무명번뇌에 오염되지 않는 본래적 진실성(淸淨)을 단박에 깨닫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간화선 수행의 사상적 연원은 혜능의 선법에서 찾을 수 있다. 혜능은『단경』에서 최후 유교설법(遺敎說法)을 통해 선종의 근본종지(根本宗旨)를 잃지 않도록 당부하면서 “삼과법문(三科法門)”과 “삼십육대법(三十六對法)”을 설하고 있다. 혜능이 설한 삼과법문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가리키며, 삼십육대법의 내용은 다름 아닌 중도를 수행하는 견성과 전법의 논리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삼과법문과 삼십육대법은 일념수행(一念修行)과 일념 해탈로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념을 수행하면 자신이 곧 부처이다. 혜능이 천명한 일념수행이란 중생과 제불의 차이를 단지 일념의 미오(迷悟)에 있다고 보고, 미와 오의 차이는 다만 일념지간(一念之間)에 있으므로 일찰나에 전미개오(轉迷開悟)할 것을 권장한다. 이 말은 중생의 일념은 무명에 오염되어 분별망념으로 생멸윤회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지만, 분별망념에 휘말려들지 않고 망념이 본래 공함을 여실히 깨달으면 본래심이 회복되어 부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념, 즉 오온이 공함을 보아 해탈을 성취하는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초기불교『아함』교설에서는 오온이 무상, 고, 공, 무아임을 다음과 같이 관찰하라고 역설하고 있다. 색은 무상하다는 것을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바른 관찰이다. 바르게 관찰하면 곧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즐겨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즐겨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그것을 마음의 해탈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수상행식 역시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 무상하다고 관찰하는 것과 같이 그것들은 고(苦)요, 공(空)이요, 내가 아니라는 것(無我)을 관찰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대혜가 주장하는 일대사인연이나 혜능이 설하고 있는 근봉종지와 일념수행 역시 부처님께서 설한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의 교설이 초기불교로부터 중국 선종에 이르기까지 기본 내용으로 설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초기불교는 생멸연기의 입장에서 부정적 언어(무상, 고, 무아, 부정)로 기술하고 있으며, 선종에서는 환멸연기적 입장에서 긍정적 언어(보리, 불성, 청정, 본래면목, 주인공)로 표현하고 있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실 선종에서 말하는 자성청정(自性淸淨), 본래면목(本來面目), 주인공(主人公), 평상심(平常心), 즉심시불(卽心是佛), 무위진인(無位眞人) 등의 언구는 실체적 진아(眞我: 아트만)의 의미로 설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설하신 공, 무아, 중도를 나타내는 존재의 참모습을 선종용어로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즉 일체의 분별적 사유(망념)가 공하다고 해서 지각하고 인식하는 작용이 없는 것이 아니고 존재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정신세계를 진제(眞諦: 勝義諦)라고 한다면, 이러한 진제(진리)의 입장에서 자성청정, 본래면목, 무위진인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사선에서는 자성, 보리, 불성, 진여 등을 철저한 공사상에 입각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몸이 공(空)하므로 법이 공하며, 마음이 공하므로 성품이 공한 것이다. 몸과 마음 모두 공하므로 성품도 공하다고 한다. 내지 천 갈래의 이설도 모두 너의 본심을 여의지 않는다. 마치 지금 말하는 보리(菩提), 진여(眞如), 불성(佛性), 이승보살(二乘菩薩) 등 모두가 나뭇잎으로 황금이라 하고, 빈주먹 안에 보물이 있다고 말하는 방편설이다. 만약에 손바닥을 폈을 때 하늘이든 사람이든 일체대중은 모두 손바닥 가운데 한 물건도 없음을 본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本來無一物), 어디에 티끌이 있겠는가(何處有塵埃)”라고 하는 것이다. 이미 본래 한 물건이 없다면 과거, 현재, 미래에 본래 소유할 바가 없다. 따라서 수행자는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깨달아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조사선에서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서 제법의 성품이 공(空)함을 설명하고, 또한 제법의 성품이 본래 청정함을 말하고 있다. 선종에서는 제법의 성품, 즉 중생과 제불, 생사와 열반,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세간과 출세간 내지 육도(六道)와 사생(四生), 산하(山下)와 대지(大地), 유성(有性)과 무성(無性) 등 모두가 동일체(同一體)라고 설하고 있다. 그 원인은 “같다고 말하는 것은 이름의 모양(名相)이 또한 공하기 때문이다. 유(有)도 공이요, 무(無)도 공이며 항하사 세계 모두가 원래 하나의 공”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선종에서 설하고 있는 자성청정, 본래면목, 주인공, 평상심 등은 초기불교로부터 대승불교에 이르는 공, 무아, 중도 교설의 중국 선종적 전개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마조의 평상심(平常心)과 임제의 일심(一心)에 대한 법문 또한 이러한 사상적 토대 위에 설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道不用修). 다만 오염시키지 말라. 무엇을 오염이라 하는가? 생사심으로 조작취향(造作趣向)이 있으면 모두 오염이다. 만약 그 도를 바로 깨달으려면 평상심이 도다(平常心是道). 평상심은 조작(造作), 시비(是非), 취사(取捨), 단상(斷常), 범성(凡聖)이 없음이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마음 법(心法)은 형상이 없어서 시방세계를 꿰뚫어 두루 미치고 있다. 그것이 눈에 있을 때는 본다 하고, 귀에 있을 때는 듣는다 하며, 코에 있을 때는 냄새 맡는다 하고, 입에 있을 때는 이야기 한다 하고, 손에 있을 때는 잡는다 하고, 발에 있을 때는 걷는다고 한다. 본래 밝고 정묘한 한 덩어리(一精明)가 나뉘어서 여섯 가지로 화합(六和合: 六根, 六塵, 六識)하여 작용하는 것이다. 만일 한 마음(一心)에 번뇌 망념이 없으면 이르는 곳마다 해탈의 경지이다. 무명 번뇌에 의해 오염(왜곡)된 인식이 실체적 자아 관념을 만들어 이분법적인 틀을 조작하여 옳음과 그름(是非), 단견과 상견(斷常), 범부와 성인(범성) 등으로 이원화시켜 버린다. 그러므로 존재와 세계를 있는 그대로(존재실상) 인식하지 못하고 왜곡된 허위의식의 틀 속에 갇혀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평상심이란 이러한 허구적인 인식의 오염이 없어 더 이상 조작하지 않고 존재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즉 진리를 진리 그대로 보는 마음인 것이다. 허구적인 표상에 오염되지 않는 본래심의 그 자리에서는 밖으로 닦음을 구하는 것이 오히려 망념을 보태는 격이 된다. 따라서 "도는 닦을 필요가 없고, 다만 오염시키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일심이나 평상심은 철저하게 공과 중도의 입장에서 설해진 선법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임제가 설하고 있는 일정명(一精明)의 법문은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지만 이 또한 일심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며 일심으로부터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전개된다면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공하다는 초기불교의 교설을 벗어나지 않으며, 다만 진리의 입장(眞諦)에서 긍정적인 언어로 일심을 설하고 있을 뿐이다. 일정명一精明이란 일심인 것이며, 육화합六和合이란 육근六根을 가리킨다. 육근은 육경六境과 상대하고 육식六識을 형성하기 때문에 모두 십팔계十八界가 되는데, 십팔계는 일심一心의 전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능엄경』에서는 일심, 즉 일정명이 쉬어져서 근원으로 돌아가면 저절로 육식이 공한 도리를 깨닫게 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육근의 작용 또한 이와 같이 원래 일정명(一精明)에 의거해서 나뉘어 여섯 가지로 화합(六和合)을 이룬 것이니, 원래 한 곳만 쉬어져서 근원으로 돌아간다면 여섯 작용 모두 이루어지지 못한다. 대승불교와 조사선에서 설하고 있는 일심이란 깨달은 승의제(勝義諦)의 입장에서 만법을 긍정적으로 표현(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일심, 법계, 진여 등이 번뇌 망념을 모두 소멸시키고 난 뒤에 나타나는 실체적 자아가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眞諦)와 현실의 세계(俗諦)가 둘이 아닌 중도의 입장에서 설하고 있기 때문에 혼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를 임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마음의 법(心法)이며, 일체의 모든 이름은 마음의 이름(心名)이다. 이 만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고 마음은 만법의 근본이다.”라고 전제하고, 만법을 때에 따라 법계, 진여, 이사(理事) 등의 이름으로 자재하게 사용할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어서 아래와 같이 설하고 있다. 갖가지 법이 성립되는 것은 모두 일심에 의거한 것이다. 건립되는 것이나 소탕되는 것 모두가 묘용이며, 묘용은 모두 자기 자신의 본체이다. 깨달음의 세계(眞諦)를 여의고서 현실적인 삶의 세계(俗諦)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 삶의 세계가 곧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며, 일체 모든 묘용은 자기 자신의 깨달음의 당체가 전개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또 다시 어떤 사람이 존재하겠는가? 일체 법은 모두 불법이다. 모든 법은 해탈이다. 해탈이란 진여이다. 모든 법은 진여를 떠나지 않는다.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行住坐臥) 일상사 모든 것이 부사의한 묘용으로 시절인연을 기다리지 않는다. 간화선은 조사선사상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조사선에서 설하고 있는 일심, 법계, 평상심 등의 일체법은 자신의 깨달음의 당체가 전개된 것이다. 조사선의 평상심은 혜능의 무념법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선종에서 제시하고 있는 무념, 무심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무념위종(無念爲宗)”의 법문을 올바로 파악함으로 해서 선종의 제사상이 철저하게 부처님께서 설하신 중도법문에 기인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기로 하자. 없다(無)고 하는 것은 어떤 일이 없다는 것이며, 생각한다(念)는 것은 어떤 물건을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는 것은 두 가지 상(二相)의 모든 번뇌가 없다는 것이요, 생각한다는 것은 진여본성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혜능이 말하는 무념이란 생멸(生滅), 유무(有無), 진속(眞俗) 등 변견(邊見)의 망념을 없애고, 자심의 진여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념위종의 사상은 하택과 혜해에 계승되어 더욱 발전적으로 정의되어 지고 있다. 무념을 종으로 하고(無念爲宗), 망념이 일어나지 않음을 핵심으로 한다(妄念不起爲旨). 청정으로 체를 삼고, 지혜로써 용을 삼는다. ……무념이란 사념(邪念)이 없다는 것이지 정념(正念)마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있음(有)과 없음(無)을 생각하는 것을 일러 삿된 생각(邪念)이라 하고, 있음과 없음을 생각하지 않음을 일러 바른 생각(正念)이라 한다. 선과 악을 생각함을 삿된 생각이라 하고, 선과 악을 생각하지 않음을 일러 바른 생각이라 한다. 내지 고락(苦樂), 생멸(生滅), 취사(取捨), 원친(怨親), 애증(愛憎) 등을 일러 삿된 생각이라 하고, 고락, 생멸 등을 생각하지 않음을 일러 바른 생각이라 한다. 무념(無念)이란 진념(眞念)이다. 만약 생각으로 생각을 삼는 것은 사념(邪念)이지 정념(正念)이 아니다. 왜 그러하냐? 경에 말하길, 사람에게 여섯 가지 생각(六念: 眼識 내지 意識)은 생각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여섯 가지 생각이 있으면 사념이라 부른다. 여섯 가지 생각이 없는 것이 진념이다. 묻기를, 무엇이 정념인가? 답하기를, 정념이란 오직 보리를 생각하는 것이다. 묻는다. 보리는 얻을 수 있는가, 없는가? 답한다. 보리는 얻을 수 없다. 묻기를, 이미 얻을 수 없다면 어째서 보리를 생각한다고 하는가? 답하기를, 보리라고 하는 것도 단지 가짜로 세운 이름에 불과하니 실로 얻을 수 없다. 또한 전후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얻을 수 없으므로 곧 생각이 없다. 오직 무념만이 진념이다. 보리란 생각하는 바가 없으니, 생각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즉 일체처에 무심함이다. 생각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무념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일에 따른 방편에 의해 억지로 이름을 붙인 것이지만, 전부 하나의 체(體)로서 둘이 아니다. 다만 일체처에 무심함을 알면 즉시 무념이다. 혜해선사는 정념이란 “오직 보리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보리열반은 본래 얻을 수 없고, 얻을 바가 없기 때문에 “무념은 모두 일에 따른 방편에 의해 가짜로 그 이름을 붙인” 중도정관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초기불교의 중요한 교설이자 수행법인 정념(正念: Samma-sati)에 대해 박태원 선생은『정념과 화두』에서 “‘무명이 주도하는 세계 왜곡과 오염의 인식 체계와 계열’에 휘말려 들지 않는 국면에 눈떠 그 자리를 ‘지키고 서는’ 멈춤인 동시에, 그 자리에 서서 가공과 왜곡을 일삼던 세계를 더 이상 조작하지 않고 ‘그저 보는’ 혹은 ‘단지 볼 뿐인’ 관찰이다. 그리고 이 멈춤과 관찰의 연장선상에서 지(止)와 관(觀)의 두 국면이 수립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동의한다면, 초기불교의 정념, 즉 sati 수행과 선종이 설하고 있는 정념의 개념은 완전히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무명에 오염된 허망한 분별적 사유인 번뇌망념을 여읜 그 곳이 견성에 눈뜨는 자리이며, 망념이 사라진 순일한 정념의 본래심에 계합한 마음이 즉심(卽心)이기에 "즉심이 부처(卽心是佛)"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즉심이 바로 "'무명이 주도하는 세계 왜곡과 오염의 인식 체계와 계열'에 휘말려 들지 않는" 마음인 sati인 것이다. 그리고 “멈춤과 관찰의 연장선상에서 지(止)와 관(觀)의 두 국면이 수립된다.”라고 하는 지관겸수(止觀兼修)의 입장 또한 선종의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전통과 간화선에 있어서의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는 화두참구법과 동일 지평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남방의 sati(혹은 위빠사나)수행을 통한 해탈열반과 화두 타파로 얻어지는 견성성불이 똑같이 실천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화두에 대한 의심을 매개로 한 화두참구의 구체적 방법론의 특징에 대해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첫째 본래성(本來性). 대승불교는 기본적으로 중생본래성불(衆生本來成佛)의 기초 위에 수증론(修證論)을 제시하고 있다. 화두참구 또한 이러한 자성청정(自性淸淨), 즉 본각(本覺)의 토대 위에서 중생의 현실(不覺)을 직시하여 신심과 분심과 의심으로 시각(始覺)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혜는 시각이 본각에 합쳐지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참구의 대상이 되는 공안(화두) 또한 깨달은 불조사의 깨달음의 영역(기연)에서 설해진 언구이기에, 수선납자가 일단 화두에 의정을 일으킨다는 것은 이미 부처님과 조사의 깨달음의 세계에 발 디딤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생의 본성이 부처와 동일 지평위에 놓여 있음으로 해서 화두참구로 인해 일단 그 본래성을 회복하려는 연결 고리가 형성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안 화두가 불조사로부터 제시되었다 하더라도 수행자가 그 공안을 참구함으로 해서 그 공안은 전적으로 수행자 자신의 몫이 되어 그 본래성에 한 발짝 들여놓음의 국면을 이루어 구경에는 공안의 세계(깨달음)에 계합하게 되는 것이다. 간화선에서는 화두와 사활을 건 한판 승부에서 건곤일척의 자세로 목숨을 던진다는 의미로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현애살수(懸崖撒手)”라는 말로 전일성을 표현하고 있다. 화두 의심 이 외에는 일체 망념이 끼어들 수 있는 여지가 전무하여 오로지 강화된 의심이 형성됨으로 해서 번뇌는 그쳐 고요한 상태가 되고(寂寂) 의심은 더욱 또렷하게(惺惺) 되어 저절로 정혜쌍수가 이루어져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분별과 개념이라는 망념 속에서 화두를 들게 되면 화두 의심 역시 “분별 망념의 참구”에 지나지 않기에 전면적 참구가 이루어 질 수 없게 된다. 또한 총명이나 박식, 혹은 교학적 지식(알음알이)으로 분별하여 개념적으로 규정하지 말고 “오직 모를 뿐”이라는 의심 하나로 참구할 뿐이다. 의심만이 오롯이 드러나는 상태를 순일무잡(純一無雜)이라 한다. 의심이 순일하여 망념이 없는 심리 상태가 지속되면 시절인연을 맞이하여 견성 체험이 이루어지게 된다. 넷째 향상성(向上性: 持續性). 선은 직관(直觀)이요, 통찰(洞察)이다. 즉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로 봄이요, 전면적으로 온전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직관이나 통찰은 고도의 집중(화두삼매)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깨달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취향성이 없이는 중생을 바꾸어 부처로 전의(轉依)될 수 없다. 중생의 업력에서도 의심은 의심을 더하게 하는 심리 작용이 있듯이, 화두 의심에 있어서도 의심이 의심을 강화하는(疑團) 작용이 있어 의정이 스스로 타파되는 길로 나아가게 된다. 화두 참구에 있어서 가장 요긴한 것은 간절함(切)이다. 일대사를 반드시 해결해야 되겠다는 발심(發心)이 전제되었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의정이 끊어지지 않는 심리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틈이 없는 마음, 즉 무간단(無簡單)이 되어야 한다. 간단없는 의심을 이어가되 간절하고 철저하게 사무치는 의심이 일념만년(一念萬年)되게 하여야 깨달음의 단계로 향상할 수 있다. 2. 간화선 수증의 방편 (1) 발심(發心) 신심납자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깨달아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하기 위하여 발심, 수행하여야 한다. 발심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요, 견성성불의 토대가 된다. 생사의 장야(長夜)에서 무상대도를 깨우치기 위하여 출가위승(出家爲僧)하였으니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하루 속히 직지견성하고 광도중생할 것을 발원하여야 한다. (2) 출가(出家) 『죽창수필』에 의하면 출가에는 사료간이 있다. 첫째는 출가의 출가요, 둘째는 재가의 출가요, 셋째는 출가의 재가요, 넷째는 재가의 재가다. 출가의 출가란 오욕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출가사문이 되어 생사대사를 해탈하고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이요, 재가의 출가는 비록 세속에 머물러 있지만,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보리심에 머물러 생사와 해탈이 둘이 아님을 체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출가의 재가는 비록 몸은 출가하였으나 세속을 그리워하고 탐진치 삼독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유위의 업을 쌓아가는 것이다. 재가의 재가는 불법승 삼보를 알지 못하고 영원히 생사 가운데 머물러 생사해탈의 무위법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모름지기 간화행자는 출가의 출가자요, 재가의 출가자로서 정법안장, 열반묘심을 성취하여야 한다. (3) 정견(正見) 선종에서도 연기중도를 수행하고 깨닫는 것을 종지로 삼고 있다. 조계대사도 『단경』에서 마지막으로 법을 유촉하면서 본종의 종지를 유실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는데, 그 종지로 “삼과법문(三科法門)”과 “삼십육대법(三十六對法)”을 내용으로 하는 중도정관의 수증(修證)을 강조하였다. (4) 참문(參問) 외호선지식과 동행선지식의 외호와 탁마에 의하여 반드시 교수선지식인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참방하여 법을 물어야 한다. 선지식이란 안목과 덕행을 갖추고 정도(正道)로 인도하여 정법을 깨닫게 해주는 스승을 말한다. 선지식은 납자에게 수증방편을 제시하고, 참문납자의 수행이력과 발심상태를 관찰하여 오도개안(悟道開眼)에 이르게 한다. (5) 결택(決擇) 이때 선지식은 납자의 수행기연과 이력을 세밀히 관찰하여 화두를 결택해 주어야 한다. 화두는 우주와 인생에 대한 간절한 문제의식에 입각한 현성공안(現成公案)으로 간택하여야 한다. 납자 자신의 현실인식에 바탕에 둔, 즉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체절명의 생사화두여야만 현성공안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옛 조사의 깨달음에 바탕을 둔 1700공안이라 할지라도 수행납자에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의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사구(死句)가 되어 현성공안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선지식은 수행자 자신이 철두철미하게 의심이 될 수 있는 자연(自然)화두를 결택해 주어야 한다. (6) 참구(參究) 대혜선사는 화구참구를 세 단계로 구분하고 있는데, 첫째 화두에 대한 의정을 일으키고, 둘째 화두를 간단없이 참구해야 하고, 셋째 번뇌망념을 끊고 투철히 깨달음이다. 화두에 대한 의심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다는 갈등, 의심, 곤혹이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참구의 방법은 이른바 “화두를 본다(看話).”는 것인데, 여기서 화두(話)를 본다(看)는 것은 화두를 관(觀)한다는 뜻이 아니라, “화두를 의심한다.”는 말이다. 의심하고 의심하여 만 가지 의심이 하나의 의심이 되어야 비로소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될 수 있다. 옛 조사가 말하기를 “큰 의심에 크게 깨닫고(大疑大悟), 작은 의심에 작게 깨닫고(小疑小悟), 의심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다(無疑無悟).”라고 하였다. 그런데 화두를 참구함에는 반드시 활구를 참구하여야 한다. 알음알이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을 사구라 하고, 일체의 분별망념을 초월하여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생각의 길마저 끊어진 것을 활구라 한다. 원오선사는 “활구 아래에서 깨달으면 영겁토록 잊지 않고, 사구 아래에서 깨달으면 자기마저도 구제하지 못하니, 만약 조사와 부처와 더불어 스승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활구를 밝혀야 한다.”라고 활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렇듯 본분납자는 활구를 참구하여 사량분별을 여의고, 행주좌와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여 깨달음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중생을 바꾸어 부처가 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억천만겁 내려오는 번뇌 망념을 돌이켜 화두일념으로 나아가는 것은 지난한 일임에 틀림없다. 옛 조사는 화두참구에 있어서 세 가지 중요한 요건을 설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삼요(三要)라고 불리는 신심과 분심, 그리고 의심이다. 이 삼요를 갖추어 타성일편을 이루어야 한다. (7) 탁마(琢磨) 오늘날 납자의 일각에서 탁마의 정신을 망각하고 상대와 세상에 대한 허물로 허송세월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본색납자는 자기의 허물을 볼지언정 남의 허물에 대해 시비하지 않으며 도류(道類)와 더불어 항상 탁마하여야 한다. 서산대사는 일찍이 “차라리 영겁 동안 생사에 윤회하더라도 모든 성인의 해탈을 구하지 않는 것이 선가의 안목이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지 않고 항상 자기의 허물을 보는 것이 선가의 수족(手足)이다.”라고 말했다. 선가의 안목에 의거하여 수선탁마(修禪琢磨)하며 일체 생명을 보살피고, 선가의 수족에 의거하여 상대의 허물을 보되 나의 허물로 돌리고, 나의 장점을 보되 상대의 장점으로 돌리되, 그 장단점에 양변을 모두 초월하여 중도의 입장에서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 한다. 순경계에서 화두참구가 순일하더라도 역경계를 당하여 흩어져 버린다면, 화두일념이 될 수 없다. 순역경계 어디서나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끊어지지 않아야 의단이 독로하여 조관(祖關)을 투과할 수 있다. (8) 행각(行脚) 행각 중에는 되도록 번거로운 일을 피하고 오로지 화두일념으로 일체 경계를 수용하되 경계에 매몰되지 않고, 수연자재(隨緣自在)하게 공부를 지어가야 한다. 행각 중에는 항상 계정혜 삼학을 등지하고, 육바라밀을 호지하는 대승보살로서의 본분납자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9) 삼매(三昧) 동정일여란,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간단없이 지속적으로 의정이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몽중일여란 화두가 잠잘 때 꿈 가운데서도 한결 같음을 의미하고, 오매일여란 깨어있을 때나 깊은 잠을 잘 때에도 의심이 지속되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화두할 때 화두 함(能)과 화두 되어짐(所)이 하나 되어 능소(能所)가 끊어져 동과 정이 일여하고 오와 매가 일여일 때를 동정일여, 오매일여의 경지라고 표현한 것이다. 저 화두가 일여한 경지에 이르러 화두하는 자도 없고(能空), 화두 함도 없으니(所空) 움직임과 고요함, 밝음과 어두움이 함께 공하여 실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니 움직이는 가운데 고요함이 있고,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으며, 밝음 가운데 어두움이 있고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 있는 것이다. 이때가 바로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으며, 깨어있음도 없으며 잠듦도 없는 화두삼매일 뿐이다. (10) 거량(擧量) 간화선에서는 화두수행이 제대로 진행되고 순숙되고 있는지 스승을 찾아가 자신의 공부상황과 화두를 타파했는지 검증 받는다. 여러 유형의 물음과 검증이 있을 수 있지만, 깨달음의 정사(正邪)를 판별하기 때문에 통칭 법거량(法擧量)이라 한다. 법거량은 스승과 제자가 비밀스럽게 1대 1로 면대하여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공개적으로 대중 앞에서 단독 혹은 여럿이 문답을 통해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의 문답은 즉문즉답(卽問卽答)으로 진행되며, 문답이 격내(格內)와 격외(格外)의 언어와 행동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거량은 법을 구하는 자세와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진실된 마음이 합해져 향상일로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11) 점검(點檢) 이 때 선지식은 수행과정에서 신심과 원력의 문제, 공부 중에 부딪치는 여러 가지 경계의 문제, 병통에 대처하는 방법, 참구를 깊고 면밀하게 하는 방법 등에 대하여 지도해 주며,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때까지 자상하게 일러주어야 한다. 선지식의 지시(점검)를 받지 않고 홀로 공부할 경우, 사도(邪道)에 빠질 위험이 있기에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에서는 선지식과의 문답을 통한 점검을 매우 귀하게 여긴다. (12) 인가(認可) 간화선에서 깨달음의 정과 사를 판별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없으므로, 수행자가 각고의 수행정진 끝에 깨달음을 성취하였을 때, 선지식의 인가점두를 통하여 객관적 인정을 획득하게 된다. 선지식은 철저한 점검을 통하여 인가함으로 수행자가 작은 지견에 빠지거나 착각도인에 빠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자신이 체득한 깨달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도, 옳고 그름을 확인하는 마지막 절차인 인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인가받지 않는 무사도인(無師道人)은 자칫 외도와 사도에 빠질 수 있다. 예로부터 설사 깨달음을 얻어 인가를 받았다 하더라도 더욱 정진하여 보림(保任)에 힘쓰는 전통이 내려오고 있다. 조그마한 경지를 얻었다고 인가도 받지 않고 보림도 없이 함부로 망동하게 되면, 자신도 망치고 타인도 그릇된 길로 인도하게 된다. (13) 교화(敎化) 수행 가운데서도 이러할진대 깨달음을 성취한 연후 육도중생을 널리 구제함은 대승보살의 비원일 것이다.『심우도』에서도 깨달음을 얻고 난후(返本還源) 마지막으로 중생의 삶의 현장인 저자가리로 나아가(垂手入廛) 화광동진(和光同塵)할 것을 설하고 있다. 중국의 조사선과 달리 한국 선종의 종풍은 늘 선과 화엄의 결합으로 나타나고 있다. 선의 견성성불과 화엄의 보현행원이 결합하여 선수행과 보현행원이 일치하는 선엄일치(禪嚴一致)의 가풍을 유지해 왔다. 선엄일치에서 주장된 심지법문이 바로 견성성불과 요익중생이다.
"선방 30년이 무슨 자랑거리인가"
소통 거부하는 선방 "야단법석 나가지 말라" 지난번 실상사 야단법석에서 향봉 스님이 직설적으로 말한 게 <불교닷컴> 등에 보도돼 수좌회에서 회의를 했다. 설왕설래하다가 결론은 '다시는 야단법석에 수좌가 참석하면 안된다'로 내렸다. 특히 나는 법문 나갈 기회가 많았다. 나를 지목해서 주의하라는 뜻으로 들리더라. 그래서 오늘 강의도 조심스럽다. 대표 스님 몇 분 말씀이 '그래도 나가라'고 해서 나왔다. "입전수수는 뒷전 조실방장 돌아갈 때까지 한다" 조주 선사 20세가 되기도 전에 남전선사를 예배했다, 40년을 남전 스님 시봉을 했다. 마지막 20년 동안 중국을 돌아다녔다. '100살이라도 나보다 못하면 가르칠 것이고 10살이라도 나보다 나으면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입전수수(入纏垂手 저자에 들어가 중생을 돕다). 조실방장 최고의 자리를 던지고 삼수갑산으로 갔다. 육신 보살들이다. 요즘은 돌아가실 때까지 조실방장한다. 후계자 싸움이나 하고. "혜능 스님만 최고이고 신수 스님은 안본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선사는 종파주의 입장에서 편향되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혜능 스님만 최고이고 신수 스님은 왜 거들떠 보지 않나. 자기 은사는 고승 선사보다 더 큰 부도탑을 세우는 현실이다. 교조주의에 빠져있다면 한국불교는 문제다. 한국 선방은 7성급 호텔이다. 중국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겨울에 입김이 나고 서리가 낀다. 여름엔 모기와 싸운다. "오와 매가 유하면 오매일여는 틀린 말이다" 오매일여란 오와 매가 유한 입장에서는 안맞는 말이다. 오도 매도 없으면 일여가 된다. 실천 불교가 아니고 관념 불교하고 있다. 내가 더 모범이 돼야 하는데 나부터 그렇지 못하다. 조실방장이면 더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어떠한가. 비구 5년차면 뒤로 나앉는다. 부처님께 공양올리는 것도 돈 주고 사람 사서 한다. 월급 받는 부전이 우리들 대표로 나가서 하는 것 아니냐. 본사 말사 주지 먼저 신심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왜 중노릇을 하면할수록 관념적으로 흐르는가. 나부터 그렇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삼매의 입장에서 보면, 정견이 확립되어 실참이 가미되면 성인의 깨달음이 아니더라도 의식이 달라진다. "임제선풍은 군사문화의 잔재물이다" 임제를 둘러싸고 있는 교화대상은 군인들이다. 창, 활, 방 등이 군사 용어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우리가 군인이냐. 민간인에 맞는 언어로 바꿔야 한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절박한 사람들을 위한 언어들이라 폭력적이다. 그래서 간화선하는 사람들의 인격이 '단순 무식 폭력 고집 불친절'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고시원 30년이면 패가망신. 그런데 우리는?" 한국불교는, 수행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화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여 있다. 선방은 선불장이라 한다. 부처 뽑는 고시원이다. 그런데 우리는 선방에 몇년 보냈냐를 계급장처럼 자랑한다. '내가 고시원에서 30년 보냈다' 그러면 그 놈은 미친 놈이다. 자기도 집구석도 사회도 망한다. 선방서 오랜철 난 것은 귀감이 될 수도 있다. 수행과 깨달음이 하나라는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몇철 난 것만 뻐기고 있다면 양비론으로 접어들 수 있다. [불교닷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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