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본지풍광(本地風光)

수선님 2025. 11. 23. 12:31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풍광(本地風光)’은

조계선종의 종지를 나타낸 말이라 할 수 있다.

 

자기 심성(心性)의 본분을 형용하는 선문의 말이다.

 

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부처의 성품,

어떠한 미혹도 번뇌도 없는 부처의 경지를 말한다.

 

천연 그대로여서

조금도 인위적인 조작이 섞이지 않는

진실한 모습이다.

 

본지풍광(本地風光)은

본래면목(本來面目)과 같은 말로

근본 마음자리를 말하는 것으로,

티 없고, 한 점 흠 없는 맑은 마음,

그런 성품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생사를 벗어난

본래 깨달음의 참모습이며,

사물의 본바탕이며,

본래면목(本來面目),

또는 본분사(本分事),

부모미생전면목(父母未生前面目)이라고도 하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열반(涅槃),

보리(菩提),

본성(本性),

진아(眞我),

불성(佛性)이라는 것 등이

모두 같은 뜻으로,

자기 심성(心性)의 본분을 형용하는

선문의 말이요,

선어(禪語)이다.

 

본지풍광은

본래면목과 더불어

중국 송 대 이후의 선서에 많이 쓰였다.

 

예컨대, <벽암록>에 많이 보인다.

이 용어가 선의 용어로 정착된 것은 송 대이지만,

누구나 간직한 본래 모습을 강조하는 선 정신은

그 연원이 6조 혜능(慧能)에 있다.

 

그래서 <육조단경>에 보이고,

특히 <임제록>에서

'자기(自己)의 본래마음'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선명히 대두된다.

 

‘본지(本地)’라는 말은

선(禪)에서만이 아니라

교(敎)에서도 쓰이고 있다.

 

언어로써 형용할 수 없는 경지,

곧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입정처(入定處)란 뜻의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ㆍ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의 소식을 말한다.

 

참선의 목적인 견성(見性)을

때로는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밝힌다고도 한다.

 

이른바 본래의 자기 마음자리를 밝히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본지풍광을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도 한다.

 

원래 ‘본지(本地)’란

모든 번뇌가 사라진

고요한 부처님 마음자리를 말하는데,

불ㆍ보살의 실상법신 자리를 지칭하는 말로서,

만물이 대지를 의지해 있는 것처럼

제법의 근본 입각지(立脚地)를 말한다.

 

‘풍광(風光)’은

마음자리에서 일어나는 부처님의 지혜를 가리킨다.

또한 심성의 참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을 형용한 말이다.

 

사람마다 자기 의발(衣鉢) 아래 텅 비어

신령하게 통하는 이 한 덩이의 큰 빛이 있으니,

이를 본지풍광(本地風光)이라 한다.

 

중생도 부처도 본래 갖추었고

원융해 끝이 없으며

자기의 마음속에

4대(四大) 5온(五蘊)의 주체이기도 한다.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모르는 어리석은 종사들은

선지식이 행하는

‘할(喝)!’이나 ‘방(棒)’과 같이

드러난 표현에만 집착한다.

그것이 본지풍광에 다가가기 위한 임시 방편인줄 모르고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이라고 착각한다.

그리하여 방편에 얽매여서 알음알이를 낸다.

근본을 모르고 곁가지에 집착해

그것이 부처님의 옳은 법이라고

시비하고 분별하게 된다.

 

선불교에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시심마(是甚磨) ―

‘나’란 무엇인가」 라는 화두가 있다.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의

‘나’의 참모습(본래면목)은

어떤 것인가를 묻는 말이다.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나’가

참으로 ‘나’이다.

시공간 이전,

육체라는 형상을 갖기 이전의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다.

‘나’라는 이 육체에는

이미 부모라는 남녀 간에 이루어지는

온갖 수작이 다 포함돼서 형성된 것이므로

그 이전의 ‘나’를 말한다.

 

애초에 이름이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한데 인간이 온갖 생각을 일으켜

이름이 없던 ‘그것’에

별의별 이름을 붙여

‘그것’을 규정해버린다.

‘본래면목’이란

이런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

이름이 있기 이전,

‘무엇이라’ 규정되기 이전,

천연 그대로의 ‘그것’이다.

 

‘그것’을 선문에서는

본심,

본성,

불심,

불성,

혹은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분소식(本分消息),

주인공(主人公),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도 한다.

 

본지풍광(本地風光)은

현재 우리나라 조계종의 종지를 나타낸 말인데,

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태어나기 이전부터 지니고 있는

때 묻지 않은 성품,

어떠한 미혹도 번뇌도 없는

부처의 경지를 말한다.

 

천연 그대로여서

조금도 인위적인 조작이 섞이지 않는 진실한 모습,

그러니 본래면목이다.

 

선가(禪家)에서는

부처님의 근본을 몰라서 곁가지에만 집착하고

시비와 분별을 일삼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시비와 분별이

바로 생사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시비와 분별이 심하면 심할수록

중생의 번뇌는 늘어난다.

조사 스님들은 중생의 이런 잘못을 바로 보시고

단숨에 이를 고쳐 주고자 했다.

 

그래서 허상에 얽매여서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그 근본바탕을 보라고 가르친다.

그 근본바탕에 마음을 맞추어

그것과 하나가 되라고 한다.

근본과 하나가 돼 주객이 사라지고

모든 시비와 분별이 끊어진 마음에서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드러난다.

그래서 한 마음 본지풍광에 계합하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은 본시 잡념이 없고

무언가 끌림이 없이

또렷하고 고요한 상태가 제자리이다.

이 자리를 선가(禪家)에서는

본지풍광(本地風光)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자리를 등지고 온갖 시비와 이해로

끝없는 잡념과 집착의 노예로

한평생을 살고 있다.

 

 

『고요한 연못[심지(心地)]엔 만상(萬相)이 비치나

바람[심식(識心)]이 불면 물결[망상(妄想)]이 일어나듯

한 생각[분별신(分別心)] 일으킴은 모두가 부질없음을 알라.

 

이 글을 보는 마음은 모두가 그대로 이건만은

생각은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벌어지니

물결에 비치는 상이 굴절됨과 같음이라.

 

분별심을 일으킨 즉시 두개로 갈라지니

한 개의 촛불을 두개로 봄과 같다.

그러니 보는 자[주관(主觀)]와

보이는 자[객관(客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과 객관은 둘이 아니네.

 

아! 마음이여

그대 착각으로 인해

보는 자와 보이는 자로 나뉘었느니...

일으킨 즉 전도몽상(顚倒夢相)이 됐다.

 

그대들이여 한 생각이 일어나면

즉시로 회광반조(廻光返照)해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본지풍광(本地風光)에 계합하라.』

 

위는 “한 마음 본지풍광(本地風光)에 계합하라”는

원오(圓悟克勤, 1063~1135) 선사의 법문이다.

자기의 본지풍광을 봐내는 것이

여래 성품을 깨닫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성철(性徹) 스님의 저서에

<본지풍광>이라 이름 하는 책이 있다.

거기에서 성철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를 제도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본래로 성불해 있었는데

무슨 성불을 또 하는 것입니까?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부터 성불한 면목,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래부터 전체가 불국토라는 것,

이것만 바로 알면 되는 것입니다.

 

중생이 본래부처(本來是佛)입니다.

깨쳤다는 것은

본래부처라는 것을 깨쳤다는 말일 뿐,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된 것이 아닙니다.

중생인 줄로 알았는데 깨치고 보니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로 성불해 있더라는 것입니다.

 

온 시방세계에 설법 안하는 존재가 없고

불사(佛事) 안하는 존재가 하나도 없습니다.

 

 

다음은 <선가귀감> 칠십 다섯 번째 게송이다.

「禪學者 本地風光 若未發明則孤峭玄關 擬從何透

(선학자 본지풍광 약미발명즉고초현관 의종하투)

 

往往 斷滅空 以爲禪 無記空 以爲道 一切俱無 以爲高見

(왕왕 단멸공 이위선 무기공 이위도 일체구무 이위고견)

 

此 冥然頑空 受病幽矣

(차 명연완공 수병유의)

 

今天下之言禪者 多坐在此病.

(금천하지언선자 다좌재차병.)

 

참선하는 이가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밝혀 보지 못한다면

높고 아득한 진리의 문을 어떻게 꿰뚫을 것인가?

 

더러는 아주 끊어져 없어진 빈 것으로써

참선을 삼기도 하고,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이 빈 것으로써

도를 삼기도 하며,

모든 것이 없는 것으로써

높은 소견을 삼기도 하니,

이런 것들은 캄캄하게 비어 있어 병이 깊다.

 

지금 천하에 참선을 말하는 사람치고

이와 같은 병에 걸리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참선의 병통에 대해서

아주 정확하게 밝혀 놓은 글이다.

본지풍광이라는 것은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얘기한다.

우리의 본래면목,

본마음,

참나 이것을 밝히지 못한다면

진리의 문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그런 말이다.

 

왕왕(往往;종종)에 단멸공(斷滅空)으로써

선(禪)을 삼기도 하고,

무기공(無記空)으로써

도를 삼기도 하고,

일체(一切)가 무(無)다,

일체가 다 없다, 하는 것으로써

고견(高見)을 삼기도 하니,

이런 것은 다 잘못된 것이다,

병통이다, 이런 말이다.

 

텅 비어 있음으로써

참선이나 도나 고견을 삼는다는 것은

병통이라고 하는 말이다.

 

불교는 단멸론도 아니고

상주론(常住論)도 아니다.

중도설(中道說)이다.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단멸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없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상은 있다.

 

현상은 고정돼 있지 않고

항상 변화하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는 없지만,

변화하는 현상은 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엄청난 영향을 준다.

 

“내가 하지 않아도 다 알아서 하겠지.”

이것은 정말 무책임한 얘기이고,

불법을 잘 이해하지 못한 소식이다.

 

처음에는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유(有)에 집착하고 있다.

 

“존재가 있다.

내가 있다.

우주가 있다.

현실이 있다.”

이렇게 있음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있음을 깨어주는 도리가

바로 공도리(空道理)이다.

 

“모든 것은 공한 것이다.”

“고정된 실체는 없는 것이다.”

“아지랑이와 같고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有)에 대한 집착을 깨어준다.

 

그래서 공의 소식을 터득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한결같이 “고정된 실체는 없다.”

여기에만 집착하게 되면 공에 떨어진다.

 

“변화하는 현상은 있다.”

그래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묘유(妙有),

존재하되 애착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묘유(妙有)의 단계까지 이르도록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운문 문언(雲門文偃) 선사는

어렸을 때는 율종(律宗)에 있었는데,

나중에 선종(禪宗)에 와서

설봉 의존(雪峰義存) 스님의 법을 이었다.

이 분이 <운문광록(雲門廣錄)>이라는 책을 지었는데

거기에 이런 설법이 있다.

 

“빛을 꿰뚫지 못하는 데 두 가지 병이 있다.

여러 곳에 밝지 못하고

눈앞에 무엇이 있는 것이 한 가지 병이고,

 

온갖 법의 빈 이치를 알았다 할지라도

어렴풋이 무엇이 있는 듯한 것은

또한 완전에 드는 것이 못된다.”

 

아직도 유,

무엇인가 있다는 데

애착을 하고 있는 두 가지 병이 있다는 말이다.

 

“법신을 뚫는 데도 또한 두 가지 병이 있다.

법신 경계에까지 갔더라도

법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나’라는 소견이 아직 가시지 못해

법신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한 가지 병이고,

 

설사 법신을 꿰뚫었다 하더라도

자세히 살펴본다면

어떤 숨기운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그것이 또한 병이다.”고 해서,

 

역시 공을 터득했다 하더라도,

“내가 공을 터득했지.”라고

‘나’라는 소견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그것도 역시 병통이고,

 

아직도 공이라는 것도

본마음이라는 게

어떤 ‘존재’인 줄 아는

그것도 병통이다.

이와 같이 참선을 하면서

생길 수 있는 병통들을 잘 지적해 놓았다.

 

 

한결 같이 없다고만 해서도 안 되고,

한 결 같이 있다고만 해서도 안 된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냐?

 

“고정된 실체는 없다.

그러나 변화하는 현실은 있다.”

그래서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의 행위가 나를 만들어간다.

 

왜냐?

나는 고정돼 있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에 ‘나’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가 있다면,

지금 내가 무슨 짓거리를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왜냐?

나는 이미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나 그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내가 없기 때문에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의 행위가 나를 만들어간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중도설이다.

이것이야말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소식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머무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항상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주인이 돼서,

완전 연소한다,

이것이야말로 참선의 가풍을

현실에 잡아다 쓰는 그런 표현이 아닌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주인이 돼서”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밖에서 주인을 찾지 않는 것이다.

 

본마음, 참나, 선지식은

이미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확신하는 것,

밖의 물질적 존재든 정신적 존재든

밖에서 주인을 찾다보면 나는 종이 된다.

그러면 선지식을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의 주인이 돼서 완전 연소한다.

 

항상 밥 먹을 땐 밥 먹을 뿐,

잠잘 땐 잠잘 뿐,

일할 땐 일할 뿐,

공부할 땐 공부할 뿐,

이게 바로 완전 연소하는 삶이다.

 

찌꺼기가 남지 않는 삶.

이것이야말로 열심히 관리는 하되,

소유에 대한 애착은 갖고 있지 않는 상태이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起心)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 옮겨온 글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풍광(本地風光)’은 조계선종의 종지를 나타낸 말이라 할 수 있다. 자기 심성(心性)의 본분을 형용하는 선문의 말이다. 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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