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선어록] 칼이 목에 들어와도 - 지공화상 불이송

수선님 2026. 1. 4. 14:31

법사설법극호(法師說法極好)

법사(法師)는 설법을 지극히 잘 하지만,

심중불리번뇌(心中不離煩惱)

마음속에서는 번뇌를 벗어나지 못하고,

 

구담문자화타(口談文字化他)

입으로 문자(文字)를 말하여 남을 교화하지만,

전갱증타생노(轉更增他生老)

오히려 그들의 생로병사만 더욱 증가시킨다.

 

진망본래불이(眞妄本來不二)

참 마음과 허망한 생각은 본래 둘이 아닌데,

범부기망멱도(凡夫棄妄覓道)

범부는 허망한 생각을 내버리고 따로 도를 찾는다.

 

사중운집청강(四衆雲集聽講)

사부대중이 구름처럼 모여 강설(講說)을 듣고,

고좌논의호호(高座論義浩浩)

법좌(法座)에 높이 앉아 뜻을 논하는 것이 거침없으며,

 

남좌북좌상쟁(南座北座相爭)

남쪽 강단과 북쪽 강단이 서로 쟁론도 하니,

사중위언위호(四衆爲言爲好)

사부대중은 더불어 말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한다.

 

수연구담감로(雖然口談甘露)

비록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지만,

심리심상고조(心裏尋常枯燥)

마음속은 늘 메말라 있네.

 

자기원무일전(自己元無一錢)

자기에게는 원래 한 푼도 없으면서,

일야수타진보(日夜數他珍寶)

밤낮으로 남의 돈만 헤아리고 있구나.

 

지옥천당일상(地獄天堂一相)

지옥과 천당이 하나의 모습이고,

열반생사공명(涅槃生死空名)

열반과 생사가 헛된 이름일 뿐이다.

 

역무탐진가단(亦無貪瞋可斷)

끊어야 할 탐진치도 없고,

역무불도가성(亦無佛道可成)

이루어야 할 불도(佛道)도 없다.

 

중생여불평등(衆生與佛平等)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니,

자연성지성성(自然聖智惺惺)

저절로 성스런 지혜가 뚜렷하구나.

 

아금도도자재(我今滔滔自在)

나는 지금 두루 두루 자재하여,

불선공왕경재(不羡公王卿宰)

왕후(王侯)와 장상(將相)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불위팔풍소견(不爲八風所牽)

어떤 장애에도 끄달리지 않으니,

역무정진해태(亦無精進懈怠)

정진(精進)도 없고 게으름도 없다.

 

임성부침약전(任性浮沈若顚)

본성에 맡겨 흘러가니 마치 뒤집힌 것 같지만,

산탄종횡자재(散誕縱橫自在)

제멋대로 이리저리 막힘없이 자재하다.

 

차막도검임두(遮莫刀劍臨頭)

설령 칼날을 목에 갖다 대어도,

아자안연불변(我自安然不釆)

나는 스스로 편안하여 분별하지 않는다.

 

✔ 아무리 설법을 잘 하여 남들을 잘 교화하더라도 마음속에서 번뇌를 벗어나지 못하고, 견성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중생들의 생노병사만 더욱 증가시킨다.

수많은 방편설법을 자유자재로 하고, 수많은 방편수행을 잘 갈고 닦으며, 방편의 가르침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교화하고, 감동을 준다고 할지라도, 결국 견성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헤매게 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방편 법문을 통해, 낮은 근기의 중생들에게 어느 정도의 선근 공덕을 심어 주어, 진리라고는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이들에게, 진리에 이르는 길을 열어 줄 수도 있고, 진리를 추구하기에는 당장에 처한 현실적인 괴로움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힐링 시켜 줌으로써 그들이 보다 높은 공부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줄 수는 있다. 그러한 순기능적인 방편을 무조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에서는 모든 방편을 깨부수고, 곧장 본질의 바다로 뛰어드는 법문이 아닌가. 그래서 선에서는 오히려 그런 방편의 순기능 뿐 아니라, 역기능을 설하고 있다.

방편은 어차피 임시가설이라고 하듯, 임시적이고 잠깐 동안만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일 뿐이다. 쉽게 말하면 참이 아닌 거짓이라는 말이다. 참 진리는 아니지만, 참 진리를 말하면 이해를 못 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조금 쉬운 길을 알려주어 조금 더 가까이 올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방편은 꼭 필요할 때 잠깐 실천해야지, 그 방편이 본질이라고 여기고, 방편에 집착한다면 그 방편은 더 이상 방편으로의 기능을 잃은 채, 오히려 역효과를 내게 된다.

지금의 수많은 방편 수행과 방편의 법문들이 2,500년 혹은 1,000년을 넘게 이어오면서 그러한 역효과를 내고 있다. 육조스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1,000년 넘게 이어오다 보니 방편에 치우친 수행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방편수행에만 치우쳐, 그것이 참 진리라고 여기게 되면, 오랜 시간을 방편의 수행에 매진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기 쉽다. 그래서 이제는 차라리 방편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이 이 선을 공부하기가 훨씬 쉽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만큼 요즘은 방편의 폐해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조스님 또한 그런 방편에 치우친 법을 설하게 되면, 오히려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노병사만 증가시킨다고 했다.

 

참 마음과 허망한 생각은 본래 둘이 아니다. 빵이 곧 밀가루이듯 허망한 생각이 곧 참마음이다. 그럼에도 범부는 빵을 떠나 다른 곳에서 밀가루를 찾는다. 빵이 곧 밀가루인데, 빵을 빵으로만 보고, 다른 곳에서 밀가루를 찾는다. 밥 속에 밀가루가 있나? 물속에 밀가루가 있나? 하고 바깥을 향해 찾아 나선다.

지금의 수많은 선지식이나 스님이나 법을 설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깨달음 없이, 혹은 깨달음은 아닐지라도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지견도 없이, 오로지 방편에만 치우친 채, 그 방편이 참진리라고 굳게 믿으며 법을 설하고 있다. 중생들 또한 그런 스승 아래에서 그것이 참된 가르침이라고 굳게 믿으며 구름처럼 몰려들어 법문을 듣는다.

방편에 치우친 법문을 하는 분들은 자신의 가르침이 치우친 방편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스스로도 그것이 옳다고 굳게 믿는다. 법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법좌에 앉아서 설법하는데 거침이 없다. 사부대중과 더불어 법회를 열고, 법에 대해 쟁론도 즐거이 행한다. 그러나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면서도, 마음속은 늘 메말라 있다.

겉으로는 법을 자신 있게 설하면서도 자신의 내면은 여전히 메마른 것이다. 여전히 부족함을 실감한다. 심지어 견성을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보임이 원만히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이런 메마름과 갈증을 겪고, 법에 대해 여전히 자신감이 없다.

자신에게는 한 푼도 없으면서 밤낮으로 남의 돈만 헤아리는 사람처럼 바른 법에 대한 안목도 없으면서 온갖 방편들만 구구절절 늘어놓고 있다. 남들의 이야기를 아무리 잘한들, 그것이 자기 내면에서 올라오는 진짜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면, 남의 돈만 세는 사람과 같다.

지옥과 천당이 하나이고, 생사와 열반이 헛된 이름일 뿐이다. 끊어야 할 탐진치도 없고, 이루어야 할 불도(佛道)도 없다. 이 모든 것이 죄다 방편이고, 전부 다 빵일 뿐이다. 부처도 빵이고, 중생도 빵이다.

중생이 있으니까 부처도 있지,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설 곳이 없다. 중생과 부처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는’ 연기적인 관계다. 연기적인 관계는 서로를 인연으로 하여 성립될 수 있기 때문에 인연가합(因緣假合), 말 그대로 가짜로 합쳐진 것이며, 실체가 아니다. 그러니 중생만 티끌이 아니라, 부처도 티끌이다. 부처가 사라질 때 중생도 사라지고, 중생이 사라질 때 부처도 함께 사라진다. 그러니 생사도 열반도, 탐진치도 불도도 전부 다 허망한 하나의 말일 뿐이다. 상(相)일 뿐이다.

이처럼 중생과 부처가 일여(一如)하고 평등하다. 이렇게 성스러운 지혜가 뚜렷해지면, 막힘없이 자재하고,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부럽지 않다. 왕후장상도 결국은 늙고 병들고 죽지 않는가? 이 법을 깨달으면 죽고 사는 것이 없다. 불생불멸법이다. 죽음과 삶이 일여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인 줄 알기 때문이다.

그 어떤 장애도 없고, 끄달림도 없으며, 그런 자에게는 수행도 없고, 정진도 없다. 그렇다고 게으르지도 않다. 완전히 본성과 하나 되어, 본성에 내맡기고 흘러갈 뿐이니, 남들이 보면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니 뒤집어진 것 같겠지만, 자신은 자유자재하여 제멋대로 살더라도 아무런 막힘이 없다.

설령 칼을 목에 갖다 대어도, 설사 당장 내일 죽는 일이 있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생즉사(生卽死)임이 확고하니, 죽음 앞에서도 늘 편안하여 두려움이 없다. 생사라는 분별도 없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