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오가해

[스크랩] 62 무득무설분

수선님 2018. 1. 28. 12:51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如來 有所說法耶

“수보리여!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는가? 여래가 설법한 적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보충설명>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는 실상의 입장에서 보았을 경우 과거 · 현재 · 미래를 통틀어 얻을 대상도 아닌 것이며 또 설할 대상도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과 진리는 能所의 관계가 끊어져서 通身인 한 모습이며 따라서 부처님은 진리 그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부처님의 49년 설법은 진리를 다만 신훈의 입장에서 설한 것입니다. 즉, 범부중생의 근기 따라 진리에 접근하도록 차근차근 방편을 빌려 설한 것입니다. 소명태자가 나눈 이 무득무설분의 과목에 이르러 부처님께서는, 얻을 바도 없고 설할 바도 없는 실상의 진리와 사성제 · 팔정도 등의 방편설 사이에서, 대중이 혼돈하거나 의심할 소지가 있음을 미리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보리에게 물음을 던져 무득무설의 진리에 관해 운을 떼었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진리도, 본래면목의 나도, 그 밖의 삼라만상도 서로 구분 없이 탕탕히 비워지고 또 아무런 흔적도 붙지 않은 청정한 한 모습입니다. 이런 입장이어야 인연화합으로 모여진 갖가지 모습으로부터 해탈이 가능해집니다.

須菩提 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如來可說

수보리가 여쭈었다. “제가 이해한 부처님의 설한 바 뜻은, 어떤 일정한 한 법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 붙일 수 없으며 또한 어떤 일정한 법을 고정시켜 여래가 가히 설할 수도 없습니다.”

<보충설명>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최상의 법, 바른 법, 평등한 법, 원만한 법입니다. 절대적인 무득무설의 당처이기 때문에 깨달음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설할 대상도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부처님이 世間에 나투더라도 일정한 법으로 고정시켜 설하거나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체득해야 하는 것이지 언어문자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冶父}寒卽言寒 熱卽言熱

차가운 것을 차갑다고 말하고, 뜨거운 것을 뜨겁다고 말했을 뿐이로다.

<보충설명> 부처님은 아무런 편견 없이 사물의 이치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치 거울 앞에 붉은 노을이 나타나면 거울이 붉은 노을을 그대로 되비쳐주듯이, 사물의 이치에 관해 如實히 비쳐주었습니다. 사물의 이치에 관한 부처님의 관찰이나 가르침은 무지로 얼룩진 범부중생의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범부중생의 편견 속에는 욕심과 울분과 어리석음이 가득하지만 부처님의 지혜는 맑고 밝아서 진리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그러나 설령 진리에 어긋남이 없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도, 四相에 물든 우리가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그 가르침에 집착한다면 이 또한 부처님의 진리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雲起南山雨北山 驢名馬字幾多般 請看浩渺無情水 幾處隨方幾處圓

구름이 남산에서 일어나니 북산에 소나기가 지나가네. 나귀라고 이름을 붙이거나 말이라고 글자를 정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청컨대, 넓고 아득한 무정(無情)의 물을 보라. 얼마나 많이 모난 그릇의 모양을 따르고 둥근 모양을 따랐는가?

<보충설명> 물은 얽매임 없이 웅덩이를 채우며 그 웅덩이의 모양에 따라 모습을 바꾸면서 흘러갈 뿐입니다. 부처님의 설법도 물처럼 걸림 없이 펼쳐지지만 범부중생은 말과 이름에 집착해서 시비를 가립니다. 相을 초월하여 펼쳐지는 부처님의 설법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겠지만 그 원천인 진리는 增減도 없고, 始終도 없고, 淸濁도 없는 절대평등의 한 모습입니다.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어떤 까닭이겠는가? 여래가 설한 바 법은 모두 취할 수도 없고, 설할 수도 없으며, 법이라 할 수도 없고, 비법이라 할 수도 없다.”

{冶父}是甚麽

이 무엇인고?

<보충설명>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강물이 태평양에 흘러 들어가면 태평양 전체가 되는 것처럼, 아집을 끊고 부처님 세계에 들어가 하나가 되어야 원융무애의 상태를 이룹니다. 함허 스님도 부처님의 진리는 마치 빈 호로병이 파도의 높낮이에 따라 높게 흔들리기도 하고 낮게 흔들리기도 하면서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고 했습니다. 야보 스님도 불가취, 불가설인 이 진리를 가리켜 ‘이 뭐꼬?’ 하며 고일착 합니다.

恁麽也不得 不恁麽也不得 廓落太虛空 鳥飛無影跡 咄 撥轉機輪却倒迴 南北東西任往來

이렇게 하여도 얻지 못하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얻지 못하니, 텅 빈 태허공에 새가 날아도 그림자가 없는 것과 같도다. 돌! 중생의 기틀과 바퀴를 비틀고 굴리니 도리어 뒤집어져서 동서남북에 자유자재로 왕래한다.

<보충설명1> 상에 집착하면 어떻게 하더라도 여기저기 걸려서 점점 수렁에 빠지고 진리를 얻지 못하지만, 상을 초월한다면 이렇게 해도 얻고 저렇게 해도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비에 얽매인 중생의 기틀을 뒤집어 흔들고 굴려서 흔적 없는 진리를 얻으면 시간과 공간에 자유자재할 수 있습니다.
<보충설명2> 기륜은 무대 뒤에서 무대 위의 인형극을 조정하는 것으로서 자유자재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탐진치에 얽매여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무대 위의 허수아비 인형이라면 기륜은 탐진치를 초탈한 실상의 우리자신입니다.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일체의 현인과 성인은 모두 무위의 법으로 차별이 생겼을 뿐이니라.”

<보충설명> 사람들이 달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상은 제각기 다릅니다. 슬픔을 지닌 사람은 달도 슬프게 보이고 기쁨을 지닌 사람들은 달도 기쁘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하늘에 떠 있는 달은 기쁘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치우친 느낌들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서 삼라만상에 공평하게 빛을 나누어 줍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도 하늘에 떠 있는 달처럼 치우침 없는 절대평등의 진리이며 무위의 법입니다. 다만 화엄경이나 법화경 등으로 나뉘어 설해진 것은 범부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설해졌기 때문에 나타난 차별일 뿐입니다.

{冶父}毫釐有差 天地懸隔

털끝만큼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의 현격한 차이로 벌어지리라.

正人說邪法 邪法悉歸正 邪人說正法 正法悉歸邪

바른 사람이 삿된 법을 설하면 삿된 법이라도 바른 것으로 돌아가고, 삿된 사람이 바른 법을 설하면 바른 법이라도 삿된 것으로 돌아가니라.

江北成枳江南橘 春來都放一般花

강북에서는 탱자가 되고 강남에서는 귤이 되지만, 봄이 오면 모두 한 가지 꽃이 피네.

<보충설명> 똑같은 꽃이 피는 나무지만 추운 곳에서는 탱자가 되고 더운 곳에서는 귤이 되듯이, 법은 하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각각 다르므로 차별이 생기게 됩니다.

출처 : 忍土에서 淨土로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메모 :

'금강경 오가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64 의법출생분 2  (0) 2018.01.28
[스크랩] 63 의법출생분 1  (0) 2018.01.28
[스크랩] 61 정신희유분 3  (0) 2018.01.28
[스크랩] 60 정신희유분 2  (0) 2018.01.28
[스크랩] 59 정신희유분 1  (0) 2018.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