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문경(帝釋問經. Sakkapanha Sutta. D21)
1.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마가다에서 라자가하의 동쪽에 있는 암바산다라는 바라문 마을 북쪽에 있는 웨디야 산의 인다살라 동굴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에 신들의 왕 삭까가 세존을 친견하려는 간절한 바램이 생겼다. 그래서 신들의 왕 삭까에게 '지금 세존·이라한·정등각께서는 어디에 머물고 계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께서 마가다에서 라자가하의 동쪽에 있는 암바산다라는 바라문 마을 북쪽에 있는 웨디야 산의 인다살라 동굴에 머물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 본 뒤에 삼십삼천의 신들을 불러서 말하였다.
"존자들이여, 그분 세존께서 마가다에서 라자가하의 동쪽에 있는 암바산다라는 바라문 마을 북쪽에 있는 웨디야 산의 인다살라 동굴에 머물고 계십니다.
존자들이여, 그러니 우리가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을 뵈러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삼십삼천의 신들은 신들의 왕 삭까에게 대답했다.
* 제석문경(Sakkapanha Sutta)
본서의「자나와사바 경」(D18)과「마하고윈다 경」(D19)이 불교를 외호하는 범천 사낭꾸마라가 중심이 된 경이요,「대회경」(D20)이 여러 신들과 정령들에 관한 경이라 한다면, 본경은 불교를 외호하는 최고의 천신이며 신들의 왕인 제석(인드라)은 본경을 통하여 세존께 질문을 드리고, 이 질문을 통해서 그는 예류과를 증득하여 불교의 성자(ariya)의 반열에 들어가게 된다.
이처럼 본경은 삭까가 세존께 질문을 드리는 것이 중심이 된 경이므로 경의 제목도 삭까빤하 숫따(Sakkapanha Sutta)이고 이를 직역하여 제석(Sakka)이 질문(panha)을 드린 경(sutta)이라 하여 「帝釋問經」으로 옮겼다. 중국에서는 「석제환인문경」(釋帝桓因問經)으로 한역되어 「장아함」의 14번째 경으로 전해온다.
비록 본경은 삭까(인드라)라는 인도의 신을 내세워 신화적인 구성으로 전개되는 가르침이지만 상좌부 전통에서는 본경을 수행과 관계된 중요한 경전으로 취급하고 있다. 본경을 통해서 삭까가 예류자가 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불교에서 설하는 성자가 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가를 본경은 심도 깊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석서도 그 내용이 상당히 길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본경을 소홀히 하지 말고 정독할 것을 권한다. (각묵스님, 디가니까야 제2권 p443)
* 인다살라 동굴
주석서에 의하면 웨디야 (Vediyaka) 산은 그 주위의 슾들로 에워싸여 있는 것이 마치 보석의 광맥(manivedika)이 둘러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주석서에 의하면 인다살라 동굴(Indasala-guha)은 이 산에 있는 두 개의 큰 바위 사이에 있는 굴로 그 입구에는 큰 살라 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벽과 창문과 문을 달고 잘 장엄하여 세존께 드렸다고 한다.(Ibid)
볍현스님이 방문했을 때는 스님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날란다에서 북동쪽으로 1요자나 거리에 있었다고 하나, 현장스님이 방문했을 때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DPPN) 비하르주의 Giriyek 마을에서 남서쪽으로 2마일 정도의 거리에 있는 동굴
* 간절한 원(바램)
'간절한 원'으로 옮긴 원어는 ussukka(호기심, 바람)인데 주석서에서는 "법에 대한 염원(dhammiko ussaho)"(DA.iii.697)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석서에 의하면 삭까는 신들 가운데서도 가장 줄기차게 부처님을 뵈어왔고 신들 가운데 가장 불방일(不放逸)한 자이지만, 이번에 마치 전에 세존을 친견하지 못한 것처럼 큰 염원으로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삭까는 그의 수명이 다해가는 전조(pubba-nimitta)를 보았으며 놀랍고 두려워서 세존을 찾아죕고 세존의 도움을 청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DA.iii.697∼98) 삭까는 본경 2.3절의 세존의 심심미묘(甚深微妙)하신 설법을 듣고 예류도를 얻었으며, 그 자리에서 죽어서 다시 젊은 삭까로 태어났다고 한다. (2.3절의 주해 참조)
1.2 그러자 신들의 왕 삭까는 간답바의 아들 빤짜시카를 불러서 말하였다.
"그대 빤짜시카야, 그분 세존께서 마가다에서 라자가하의 동쪽에 있는 암바산다라는 바라문 마을의 북쪽에 있는 웨디야 산의 인다살라 동굴에 머물고 계신다.
빤짜시카야, 그러니 우리가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을 뵈러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빤짜시카는 신들의 왕 삭까에게 대답한 뒤 벨루와빤두 류트(악기. 비파)를 가지고 신들의 왕 삭까를 따라나섰다.
신들의 왕 삭까는 삼심삼천의 신들에 에워싸여 간답바의 아들 빤짜시카를 앞세우고 마치 힘센 자가 오므렸던 팔을 펴고, 편 팔을 오므리듯이 그와 같이 재빨리 삼십삼천에서 사라져서 마가다에서 라자가하의 동쪽에 있는 암바산다라는 바라문 마을의 북쪽에 있는 웨디야 산의 인다살라 동굴에 나타났다.
1.3 그러자 웨디야 산과 암바산다 바라문 마을에 큰 광명이 생겨났다. 그것은 신들의 신성한 힘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마을들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보시오, 오늘 웨디야 산은 불타듯 광명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오늘 웨디야 산은 불이 타오르듯 광명이 빛나고 있습니다. 오늘 웨디야 산과 암바산다 바라문 마을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그들은 두려워서 떨었고 몸에 털이 곤두섰다.
1.4 그때 신들의 왕 삭까는 간답바의 아들 빤짜시카를 불러서 말하였다.
"그대 빤짜시카야, 여래.아라한.정등각들께서 선정에 들어가 선정에 머무시면서 혼자 앉아계실 때 나와 같은 자가 다가가기란 쉽지가 않다.
빤짜시카야, 그러니 그대가 먼저 세존이 귀챦으시지 않도록 편안하게 해드려라. 그대가 먼저 세존을 편안하게 해드린 다음에 나는 나중에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을 뵈러가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간답바의 아들 빤짜시카는 신들의 왕 삭까에게 대답한 뒤 벨루와빤두 류트를 가지고 인다살라 동굴로 갔다.
'이 정도면 세존께서 내가 (연주하는) 소리를 들으시기에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을 것이다."라면서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간답바의 아들 빤짜시카는 벨루와빤두 류트를 연주하면서 세존을 칭송하고 법을 칭송하고 아라한을 칭송하면서 또한 연모의 정이 가득 담긴 이런 게송을 노래하였다.
* 벨루와빤두 류트
원어는 Velvapandu-vina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익은 벨루와(빌바) 열매처럼 노란 색깔이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DA.iii.699) 다른 주석서에 의하면 이 류트는 본래 마라(Mara)의 것이었다고 한다.
마라는 세존께서 고행을 시작하던 때부터 시작해서 정각을 이루신 후 1년이 될 때까지 무려 7년간을 세존의 허점을 찾았지만 실패하고 지쳐서 돌아가다가 너무 피곤해서 이 류트를 떨어뜨렸다고 한다. 삭까가 이를 주워서 빤짜시카에게 주었다고 한다.(SnA.ii.393f.)
1.5 "선여인(善女人)이여, 태양과 같이 밝은 분이여,
그대의 아버지 띰바루에게 경배합니다.
나에게 기쁨을 주는 아름다운 (그대가)
그분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땀 흘리는 자에게 바람이 소중하고
목 마른 자에게는 물이 소중하듯이
광채를 가진 그대는 나에게 사랑으로 다가오니
마치 아라한들에게 법과 같습니다.
병든 자에게 약과 같고
배고픈 자에게 음식과 같나니
선여인이여, 나의 (사랑의 열병을) 꺼주시오.
마치 타는 불꽃을 물로 끄듯이.
마치 무더위에 지친 코끼리가
연꽃잎과 꽃가루가 떠다니는
차가운 물의 연못에 뛰어드는 것처럼
나도 그대의 가슴 사이로 (뛰어듭니다.)
마치 갈고리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코끼리가
창이나 투창 따위에는 관심도 없듯이
그런 나도 무엇을 할지 알지 못하나니
그대의 뛰어난 자태에 취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은 그대에게 묶여 버렸으며
나의 마음은 평상심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나니
마치 미끼달린 낚시바늘을 문 물고기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여, 나를 안아 주소서,
아름다운 눈을 가진 분이여, 나를 안아 주소서.
착한 여인이여, 껴안아 주소서.
이것이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곱슬머리 여인이여,
나의 욕망은 처음에는 작았지만
이제는 여러 가지로 자랐습니다.
마치 아라한에게 올린 보시처럼.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여,
여여(如如)하신 아라한들에 대해
내가 지은 공덕이 있다면
그대와 함께 그 과보를 누리게 되기를.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 둥근 대지 위에서
내가 지은 공덕이 있다면
그대와 함께 그 과보를 누리게 되기를.
마치 사꺄의 후예인 성자가
삼매를 통해서 일념이 되고
현명하고 마음챙겨서 불사(不死.열반)를 찾듯이
나 또한 나의 태양인 그대를 찾아다닙니다.
마치 성자가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증득하고 기뻐하듯이
나 또한 그대와 하나 되어
기뻐할 것입니다, 선여인이여.
만일 삼십삼천의 주인인 삭까가
나의 소원을 들어 주신다면
선여인이여, 나는 그대를 원하리니
이렇듯 나의 욕망은 강합니다.
아주 현명한 여인이여!
머지않아 꽃이 필 살라 나무처럼 아름다운
그대의 아버지께 경배하면서 귀의합니다.
그분의 이러한 딸을 위해서.
1.6 이렇게 노래하자 세존께서는 간답바의 아들 빤짜시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빤짜시카여, 그대의 활줄 소리는 노래 소리와 잘 어울리고 그대의 노래 소리는 활줄 소리와 잘 어울리는구나.
빤짜시카여, 그런데 언제 그대는 여래를 칭송하고 법을 칭송하고 아라한을 칭송하면서도 연모의 정이 가득 담긴 이런 게송을 지었느냐?"
"세존이시여, 한때 세존께서는 우루웰라에서 네란자라 강둑에 있는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 아래서 처음 정등각을 성취하여 머무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때 한 여인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녀는 띰바루 간답바 왕의 딸이며 태양과 같이 밝은 밧다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나 그 여인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으니 시킨다라는 마부 마딸리의 아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어떤 수단으로도 그 여인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벨루와빤두 류트를 가지고 띰바루 간답바 왕의 거처로 갔습니다. 가서는 벨루와빤두 류트를 연주하면서 세존을 칭송하고 법을 칭송하고 아라한을 칭송하면서도 연모의 정이 가득 담긴 이런 게송을 노래하였습니다.
"선여인(善女人)이여, 태양과 같이 밝은 분이여,
그대의 아버지 띰바루에게 경배합니다.
나에게 기쁨을 주는 아름다운 (그대가)
그분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땀 흘리는 자에게 바람이 소중하고
목 마른 자에게는 물이 소중하듯이
광채를 가진 그대는 나에게 사랑으로 다가오니
마치 아라한들에게 법과 같습니다.
병든 자에게 약과 같고
배고픈 자에게 음식과 같나니
선여인이여, 나의 (사랑의 열병을) 꺼주시오.
마치 타는 불꽃을 물로 끄듯이.
마치 무더위에 지친 코끼리가
연꽃잎과 꽃가루가 떠다니는
차가운 물의 연못에 뛰어드는 것처럼
나도 그대의 가슴 사이로 (뛰어듭니다.)
마치 갈고리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코끼리가
창이나 투창 따위에는 관심도 없듯이
그런 나도 무엇을 할지 알지 못하나니
그대의 뛰어난 자태에 취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은 그대에게 묶여 버렸으며
나의 마음은 평상심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나니
마치 미끼달린 낚시바늘을 문 물고기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여, 나를 안아 주소서,
아름다운 눈을 가진 분이여, 나를 안아 주소서.
착한 여인이여, 껴안아 주소서.
이것이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곱슬머리 여인이여,
나의 욕망은 처음에는 작았지만
이제는 여러 가지로 자랐습니다.
마치 아라한에게 올린 보시처럼.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여,
여여(如如)하신 아라한들에 대해
내가 지은 공덕이 있다면
그대와 함께 그 과보를 누리게 되기를.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 둥근 대지 위에서
내가 지은 공덕이 있다면
그대와 함께 그 과보를 누리게 되기를.
마치 사꺄의 후예인 성자가
삼매를 통해서 일념이 되고
현명하고 마음챙겨서 불사(不死)를 찾듯이
나 또한 나의 태양인 그대를 찾아다닙니다.
마치 성자가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증득하고 기뻐하듯이
나 또한 그대와 하나 되어
기뻐할 것입니다, 선여인이여.
만일 삼십삼천의 주인인 삭까가
나의 소원을 들어 주신다면
선여인이여, 나는 그대를 원하리니
이렇듯 나의 욕망은 강합니다.
아주 현명한 여인이여!
머지않아 꽃이 필 살라 나무처럼 아름다운
그대의 아버지께 경배하면서 귀의합니다.
그분의 이러한 딸을 위해서.
세존이시여, 이렇게 노래하자 태양과 같이 밝은 밧다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빤짜시카여, 저는 그분 세존을 면전에서 뵙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삼십삼천의 수담마 의회에 춤을 추러 가서 그분 세존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빤짜시카여, 그대가 그분 세존을 칭송하시니 오늘 우리는 같이 지냅시다.'라고.
세존이시여, 그런 저는 그 여인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8 신들의 왕 삭까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간답바의 아들 빤짜시카는 세존과 함께 환담을 나누고 세존께서도 빤짜시카와 환담을 하시는구나.'
그러자 신들의 왕 삭까는 간답바의 아들 빤짜시카를 불러서 말했다.
"그대 빤짜시카야, 그대는 내 (이름으로) '세존이시여, 신들의 왕 삭까가 삼십삼천의 신들과 함께 세존의 발에 머리로 절을 올립니다.'라고 하면서 세존께 절을 올려라."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간답바의 아들 빤짜시카는 신들의 왕 삭까에게 대답한 뒤 "세존이시여, 신들의 왕 삭까가 삼십삼천의 신들과 함께 세존의 발에 머리로 절을 올립니다."라고 하면서 세존께 절을 올렸다.
"빤짜시카여, 신들의 왕 삭까와 삼십삼천의 신들은 행복하라. 신들과 인간들과 아수라들과 용들과 간답바들과 다른 모든 무리들은 행복을 원하기 때문이니라.
빤짜시카여, 여래들은 이러한 큰 위력을 가진 약카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한다."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의 인사를 받고 인다살라 동굴로 들어가서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섰다. 삼십삼천의 신들도 인다살라 동굴에 들어가서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섰다. 간답바의 아들 빤짜시카도 인다살라 동굴에 들어가서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섰다.
1.9 그 무렵에 인다살라 동굴은 고르지 못했는데 고르게 되었고 좁은 부분은 넓게 되었으며 동굴의 어둠은 사라졌고 광명이 나타났다. 그것은 모두 신들의 신성한 힘 때문이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신들의 왕 삭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꼬시야 존자는 해야할 일이 많고 바쁨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직접 오시다니 참으로 놀랍고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랫동안 세존을 친견하어 오고 싶었습니다만 삼십삼천의 신들의 이런저런 일들로 바쁘다 보니 세존을 친견하러 올 수가 없었습니다.
세존이시여,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살랄라 토굴에 머무셨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때 저는 세존을 친견하러 사왓티로 갔었습니다."
1.10 "세존이시여, 그때 세존께서는 어떤 삼매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리고 분자띠라는 웻사와나 대천왕의 궁녀가 세존의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합장한 채로 공경하면서 서 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래서 저는 분자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그대는 내 (이름으로) '세존이시여, 신들의 왕 삭까가 세존의 발에 머리로 절을 올립니다.'라고 하면서 세존께 절을 올려주시오."라고.
그러자 분자띠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자시여, 지금은 세존을 친견할 적당한 시간이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홀로 선정에 머물러 계십니다.'
'여인이여, 그렇다면 세존께서 삼매에서 깨어나시면 그대는 내 말이라 전하면서 '세존이시여, 신들의 왕 삭까가 세존의 발에 머리로 절을 올립니다.'라고 하면서 세존께 절을 올려주시오.'라고 (저는 말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그 여인이 세존께 저의 (이름으로) 절을 올렸습니까? 세존께서는 그 여인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신들의 왕이여, 그 여인은 나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나는 그 여인의 말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대의 마차 바퀴소리를 듣고 그 삼매로부터 깨어났습니다."
* 꼬시야 존자
꼬시야(Kosiya)는 삼스끄리뜨 까우쉬까(Kausika)에서 온 말로 [리그베다」에서부터 나타나는 인드라의 다른 이름이다.
Kausika는 Kusika의 곡용형으로 '꾸쉬까의 아들, 꾸쉬까 가문에 속하는'이라는 뜻이다. 꾸쉬까(kusika)는 사팔뜨기라는 뜻이다. 꾸쉬까는「리그베다」에서부터 나타나는 위슈와미뜨라(Visvamitra)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였다고도 하며 인드라의 아버지였다고도 한다. 그래서 인드라는 까우쉬까, 즉 꾸쉬까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 어떤 삼매에 들어
"그때 세존께서는 삭까의 지혜(nana)가 아직 익지 않은 것을(aparipaka-gata) 아시고 (친견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과의 증득(phala-samapatti)에 머무시면서 앉아계셨다. 삭까는 이것을 모르고 '어떤 삼매에 들어서'라고 말하고 있다.(DA.iii.705) 과의 증득을 결론적으로 표현하면'소멸로 표현된 열반을 대상으로 본삼매에 안주함'이다.
1.11 "세존이시여, 저희 삼십삼천의 무리에 처음으로 태어난 신들이 '여래·아라한·정등각께서 세상에 출현하실 때마다 참으로 하늘의 무리는 가득 차고 아수라의 무리는 줄어든다.'고 하는 것을 저는 그들의 면전에서 직접 듣고 그들의 면전에서 직접 파악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리고 저는 '여래·아라한·정등각께서 세상에 출현하실 때마다 참으로 하늘의 무리는 가득 차고 아수라의 무리는 줄어든다.'고 하는 것을 제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여기 까삘라왓투에 고삐까라는 사꺄의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세존께 청정한 믿음이 있었고, 법에 청정한 믿음이 있었고, 승가에 청정한 믿음이 있었고, 계를 구족하였습니다. 그녀는 여성이 되기를 멀리하고 남성이 되는 것을 닦아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세계(善處), 하늘 세계(天界)에 태어났으며 삼십삼천의 일원이 되어 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그를 '신의 아들 고빠까, 신의 아들 고빠까'라고 부릅니다.
세존이시여, 그리고 다른 세 비구도 청정범행(淸淨梵行)을 닦아서 낮은 간답바의 무리에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다섯 가닥 감각적 쾌락을 갖추고 완비하여 즐기면서 우리들의 시중을 들고 우리들을 섬기러 옵니다. 그들이 우리들의 시중을 들고 우리들을 섬기러 오면 신들의 왕의 아들 고삐까는 질책을 합니다.
'존자들이여, 그대들은 그분 세존으로부터 법을 들을 때 도대체 얼굴을 어디에다 두고 있었습니까?
나는 여인의 몸이었는데도 세존께 청정한 믿음이 있었고, 법에 청정한 믿음이 있었고, 승가에 청정한 믿음이 있었고, (오)계를 구족하였습니다. 그런 나는 여성이 되기를 멀리하고 남성이 되는 것을 닦아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세계(善處), 하늘 세계(天界)에 태어났으며 삼십삼천의 일원이 되어 신들의 왕인 삭까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여기서는 나를 '신의 아들 고빠까, 신의 아들 고빠까'라고 부릅니다.
존자들이여, 그러나 그대들은 세존의 아래서 청정범행을 닦은 뒤 낮은 간답바의 무리에 태어났습니다. 같이 법을 배우던 동료가 낮은 간답바의 무리에 태어난 것을 보게 되니 참으로 보기에 민망합니다.'라고.
세존이시여, 그들은 신의 아들 고빠까의 질책을 받은 뒤 두 명의 신은 그때 그 자리에서 바로 마음챙김을 닦아서 범보천의 신의 몸을 받았으며 한 명은 계속 감각적 쾌락에 빠져 있었습니다."
1.12 신들의 왕의 아들인 고삐까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눈을 가진 분(世尊)의 청신녀(淸信女)가 있었으니 나의 이름은 고삐까였습니다. 세존과 법에 청정한 믿음이 있었고 청정한 마음으로 승가를 모셨습니다.
그분 세존의 좋은 법 때문에 나는 이제 삭까의 아들이 되어 큰 위력을 가졌으며 큰 광채를 가진 세 가지 천상을 얻었나니 여기서는 그를 '신의 아들 고빠까, 신의 아들 고빠까'라고 부릅니다.
어느 날 전에 본 적이 있는 비구들을 보았는데 간답바의 무리에 태어나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따마의 제자들이었으며 전에 인간이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집에서 발을 (씻겨드리는 등으로) 공경한 뒤에 드실 것과 마실 것으로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세존의 법들을 호지할 때에 참으로 얼굴을 어디다 두고 있었습니까? 눈을 가지신 분이 깨달으시고 잘 설하신 법은 참으로 각자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대들을 섬겼지만 성자들의 좋은 말씀을 들은 뒤 이제 삭까의 아들이 되어 큰 위력을 가졌으며 큰 광채를 가진 세 가지 천상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들은 뛰어난 분을 섬겼고 위 없는 청정범행을 닦고서도 낮은 몸을 받았으며 (청정범행)에 어울리지 않는 상태로 태어났으니 참으로 보기에 민망합니다. 같이 법을 배우던 동료가 낮은 몸을 받았으니까요. 그대들은 간답바의 무리에 태어나서 신들을 섬기기 위해 (이곳으로) 오곤 합니다. 재가에 머무르던 우리가 성취한 (삼십삼천이라는) 이런 수승함을 보십시오. 그런 나는 여인이었지만 이제 남성의 신이 되어 천상의 욕락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들 고따마의 제자들은 고빠까의 질책을 받고 그것을 잘 이해한 뒤 절박함이 생겼습니다. "오, 돌아가서 정진합시다. 우리는 더 이상 남의 하인이 되지 맙시다."라고.
그들 가운데 두 명은 정진을 시작하여 고따마의 가르침(교법)을 계속해서 생각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서 마음을 티끌이 없게 한 뒤 감각적 욕망들에서 위험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감각적 욕망의 족쇄와 속박들과 사악한 (마라의) 구속을 멀리 내팽겨쳤습니다. 마치 코끼리가 얽어매는 줄들을 잘라 버리듯이 자른 뒤에 삼십삼천의 신들에게로 갔습니다. 신들은 인드라와 빠자빠띠와 함께 모두 수담마 의회에 모여 있었습니다. 앉아 있는 그들에게 다가간 (두) 영웅은 애욕을 없앴고 때를 제거하였스니다.
그들을 보자 신들의 지배자인 와사와는 신들의 무리 가운데서 절박함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낮은 무리에 태어났는데 이제 삼십삼천의 신들을 능가하는구나."라고. 절박함인 생긴 (삭까의 이런) 말을 듣고서 고빠까는 와사와에게 말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인간의 세상에서 지배자입니다. 그분은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는 사꺄무니라고 알려졌습니다. 이들은 그분의 아들들인데(제자들) 마음새김을 놓아버렸습니다. 저의 질책을 받은 그들은 마음새김을 다시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아직 여기에 머물면서 간답바의 무리에 섞여서 살지만 두 분은 바른 깨달음의 길을 계속해서 생각하여 신들조차도 낮추어 보니 스스로 삼매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여기 (가르침에서) 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떤 제자가 의심을 하겠습니까? 격류를 건너고 의심을 잘라버린 성자요 모든 생명의 지배자이신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그들은 여기서 그런 법을 알고서 수승함을 증득했습니다. 그들은 범보천의 몸을 얻었으며 두 사람은 특별한 경지로 간 자들입니다."
"그런 법을 얻기 위해서 존자시여, 우리는 여기에 왔습니다. 이제 세존께서 허락을 해 주신다면 존자시여, 우리는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1.13 그러자 세존께서는 이런 생각이 드셨다.
'삭까는 오랜 세월 청정하게 살았다. 그러므로 나에게 질문하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 의미를 구족한 것이지 의미를 구족하지 못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가 질문한 것을 내가 설명하면 그것을 즉시에 정확하게 알 것이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신들의 왕 삭까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무엇이든 그대의 마음에 원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나에게 질문하십시오, 와사와여.
그런 모든 질문에 대해서
나는 결론에 이르도록 할 것입니다."
* 계를 구족하였습니다.
"그녀는 오계(五戒, panca sila)를 구족하였다."(DA.iii.706)
* 오계(五戒, panca sila)
1.저는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는다는 계를 지니겠습니다.(不殺生)
2.저는 주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는 계를 지니겠습니다.(不偸盜)
3.저는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다는 계를 지니겠습니다.(不邪淫)
4.저는 잘못된 말을 않는다는 계를 지니겠습니다.(不妄語)
5.저는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술이나 약물을 먹지 않는다는 계를 지니겠습니다. (不飮酒)
* 와사와
여러 경들에서 와사와(Vasava)는 삭까(인드라)의 이름으로 나타나고 본경의 주석서에도 그러하다.
상응부의 경에 의하면 그는 전생에 인간이었을 때 거주처(avasatha)를 많이 보시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S.i.229) 그러나 「대회경」(D20) 등에서는 와수(Vasu)들 가운데서 최상인 자로 언급되며
주석서에서는 와수데와따(Vasudevata)로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삭까는 Vasava로 불려진다는 설명이 더 타당하다. 산스끄리뜨 문헌에서도 「마하바라따」 등에 인드라는 와사와(Vasava)로 불리며 와수(Vasu)의 우두머리나 와수 왕의 아들로 설명하고 있다.
2.1 세존의 허락을 받은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께 다음과 같이 첫 번째 질문을 하였다.
"존자시여, 신들과 인간들과 아수라들과 용들과 간답바들과 그 이외의 모든 무리들은 비록 '원망하지 않고, 몽둥이를 들지 않고, 적을 만들지 않고, 적대감 없이 평화롭게 머무르리라.'고 하지만 무엇에 속박되어 원망하고, 몽둥이를 들고, 적을 만들고 적대감을 가져 원망하면서 머물게 됩니까?"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께 이러한 첫 번째 질문을 드렸다. 그분 세존께서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셨다.
"신들의 왕이여, 질투와 인색에 속박되어서 신들과 인간들과 아수라들과 용들과 간답바들과 그 이외의 모든 무리들은 비록 '원망하지 않고, 몽둥이를 들지 않고, 적을 만들지 않고, 적대감 없이 평화롭게 머무르리라.'고 하지만 원망하고, 몽둥이를 들고, 적을 만들고 적대감을 가져 원망하면서 머무릅니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신들의 왕 삭까의 질문을 설명하셨다. 신들의 왕 삭까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렇습니다. 선서이시여, 질문에 대한 상세한 설명(記別, 授記)을 듣고 저는 의심을 건넜으며 의문이 가시었습니다."
* 질투와 인색
"타인의 성공에 지쳐 버리는 특징을 가진 것이 질투(issa)고 자신의 성공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가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역할을 가진 것이 인색(macchariya)이다.' (DA.iii.718∼19)
2.2 이와 같이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한 뒤 세존께 다른 질문을 드렸다.
"존자시여, 질투와 인색은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합니까? 무엇이 있을 때 질투와 인색이 있으며, 무엇이 없을 때 질투와 인색도 없습니까?"
"신들의 왕이여, 질투와 인색은 좋아하고 싫어함이 그 근원이며, 좋아하고 싫어함으로부터 일어나고,좋아하고 싫어함으로부터 생기며, 좋아하고 싫어함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있을 때 질투와 인색이 발생하며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을 때 질투와 인색도 없습니다."
"존자시여, 좋아하고 싫어함은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합니까? 무엇이 있을 때 좋아하고 싫어함이 있으며, 무엇이 없을 때 질투와 인색도 없습니까?"
"신들의 왕이여, 좋아하고 싫어함은 열의(欲). 바라는 것. 원하는 것)가 그 근원이며, 열의로부터 일어나고, 열의로부터 생기며, 열의로부터 발생합니다. 열의가 있을 때 좋아하고 싫어함이 발생하며 열의가 없을 때 좋아하고 싫어함도 없습니다."
"존자시여, 열의는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합니까? 무엇이 있을 때 열의가 있으며, 무엇이 없을 때 열의도 없습니까?"
"신들의 왕이여, 열의는 일으킨 생각(尋)이 그 근원이며, 일으킨 생각으로부터 일어나고 일으킨 생각으로부터 생기며, 일으킨 생각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일으킨 생각이 있을 때 열의가 있으며 일으킨 생각이 없을 때 열의도 없습니다."
"존자시여, 일으킨 생각은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합니까? 무엇이 있을 때 일으킨 생각이 있으며 무엇이 없을 때 일으킨 생각도 없습니까?"
"신들의 왕이여. 일으킨 생각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이 그 근원이며,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으로부터 일어나고,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으로부터 생기며,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이 있을 때 일으킨 생각이 있으며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이 없을 때 일으킨 생각도 없습니다."
* 좋아함과 싫어함
"좋아하는(piya) 중생과 상카라(行)들을 근원으로 하여 인색이 있고 싫어하는(apiya) 중생과 상카라들을 근원으로 하여 질투가 있다.혹은 둘은 둘 모두의 근원이 된다."(DA.iii.719)
* 열의(chanda)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열의를 설명하고 있다. "열의(慾, chanda, 의욕)는 하고 싶어함의 동의어이다.그러므로 이것은 하고 싶어하는 특징을 가진다. 이 열의는 대상을 잡는데 마음을 뻗는 것이 마치 손을 뻗는 것과 같다고 알아야 한다."(Vis.XIV.150)
본경의 주석서에서는 찾는 열의 (pariyesana-chanda), 얻고자 하는 열의 (patilabha-chanda),
즐기고자 하는 열의 (paribhoga-chanda), 축적하고자 하는 열의 (sannidhi-chanda), 집착하는 열의 (vissajjana-chanda) 의 다섯 가지 열의를 들고 각각 설명한 뒤에 본경에서는 갈애(tanha)를 두고 설한 것이라고 하며(DA.iii.720) 복주사에서는 바로 집착하는 열의라고 설명하고 있다.(DAT.ii.326) 그리고 문맥에 따라 애정으로 옮긴 곳도 있다.
* 일으킨 생각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리저리 사량분별하고 논리적으로 따지고 생각하는 의미를 내포한다. 위딱까(일으킨 생각)은 사유라고도 하며 이것은 그릇된 사유와 바른 사유로 구분된다. 바른 사유는 팔정도의 두번째 덕목이기도 하다.
위딱까가 처음에 일으킨 생각이라면 위짜라(지속적 고찰)는 이 일으킨 생각이 지속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위딱까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 거듭거듭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나타낸다면 위짜라는 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 일으킨 생각을 지속적으로 마음집중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팔정도의 두번째 덕목의 수행에 적용해 보면 예를들면 숙제를 해야하는데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그러나 곧 '이 마음은 무상하다. 잘못된 것이다.'라고 바르게 생각을 일으키고서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을 떨쳐버리고서 숙제를 해야 겠다는 마음을 지속적으로 고찰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자면, 마음집중을 공부하는데 해로운 마음이 일어나면 곧 이 마음은 무상하다, 이것은 그릇된 마음이다;라고 생각하고 곧 바른 생각을 일으켜서 해로운 마음에서 벗어나 유익한 마음으로 전환하여 지속적으로 고찰하는 것입니다.
* 사량분별(思量分別) 복잡한 마음으로 헤아리는 것.사량이란 생각하여 헤아리다.
"세 가지 사량분별이 있다. 갈애(tanha)에 의한 사량분별과, 자만(mana)에 의한 사량분별과,
사견(ditthji)에 의한 사량분별이다." (DA.iii.721)
*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은 papanca(사량분별) + sanna(인식) + sankha(헤아림) 으로 분석해서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살명한다. "취하고(matta) 방일한(pamatta) 모습에(akara) 다다른다는(papana) 뜻에서 사량분별(papanca)이다. 이것과 함께한 인식이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다. 헤아림이란 부분이란 뜻이다."(Ibid)
희론(戱論)이라고 한역되었으며, 여러 가지 사량분별이 확장되고 전이되어 가는 것을 나타내는 불교술어이다. 그래서 사량분별로 옮겼다. 한편 '사량분별 없음 (nippapanca)'은 열반의 여러 동의어들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아비담마의 가르침에 따르면 빠빤짜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갈애, 자만, 사견으로부터 벗어남을 말한다..(VbhA.508)
2.3 "존자시여, 어떻게 도를 닦을 때 비구가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실천하는 것이 됩니까?"
"신들의 왕이여, 정신적인 즐거움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정신적인 괴로움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평온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정신적인 즐거움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왜 정신적인 즐거움에 대해서 이렇게 설했겠습니까?
'내가 어떤 정신적인 즐거움을 받들어 행할 때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善法)들이 제거된다.'고 알면 그러한 정신적 즐거움은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정신적인 즐거움을 받들어 행할 때 해로운 법들이 제거되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고 알면 그러한 정신적 즐거움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만일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기도 하고 만일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기도 하다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경우가 더 수승합니다.
신들의 왕이여, '정신적인 즐거움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내가 말한 것은 이것을 반연(攀緣.얽혀서 맺어지는 인연)하여 말한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정신적인 괴로움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왜 정신적인 괴로움에 대해서 이렇게 설했겠습니까?
'내가 어떤 정신적인 괴로움을 받들어 행할 때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善法)들이 제거된다.'고 알면 그러한 정신적 괴로움은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정신적인 괴로움을 받들어 행할 때 해로운 법들이 제거되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고 알면 그러한 정신적 괴로움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만일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기도 하고 만일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기도 하다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경우가 더 수승합니다.
신들의 왕이여, '정신적인 괴로움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내가 말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말한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평온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왜 평온에 대해서 이렇게 설했겠습니까?
'내가 어떤 평온을 받들어 행할 때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善法)들이 제거된다.'고 알면 그러한 평온은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평온을 받들어 행할 때
해로운 법들이 제거되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고 알면 그러한 평온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만일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기도 하고 만일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기도 하다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경우가 더 수승합니다.
신들의 왕이여, '평온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내가 말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말한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이렇게 도 닦을 때 비구가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을 실천하는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신들의 왕 삭까의 질문을 설명하셨다. 신들의 왕 삭까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참으로 그러힙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러합니다. 선서이시여, 질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듣고 저는 의심을 건넜으며 의문이 가시었습니다."
* 1)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으로 옮긴 원어는 papancasannasanka-nirodha-saruppagamini-patipanno라는 긴 합성어이다. 주석서에는 "이러한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의 부서짐, 소멸, 가라앉음과 이것에 적합하고 이것으로 인도하는 위빳사나와 함께 한 도를 여쭈었다.'라고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DA.iii.721) 이러한 사량분별의 소멸이 바로 열반이다.
그래서 이제[ 세존께서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 즉 도닦음을 삭까에게 설하시는데 세존께서는 이제 세 가지 느낌들을 통해서 그것을 제시하고 계신다.
한편 주석서에서는 물질의 명상주제(rupa-kammatthana)와 비물질(arupa, 정신, 名)의 명상주제로
명상주제를 둘로 나누어서 자세히 설명한 뒤 "그런데 여기서는 세존께서 비물질의 명상주제를 느낌을 상수(上首)로 하여 설하신다."(DA.iii.723)고 적고 있다.
2) 세 가지 느낌 - 즐거움, 괴로움, 평온
여기서부터는 세 가지 느낌(tisso vedana)을 설하기 시작하신다. 우리가 주목해 볼 점은 여기서는 다른 초기경들에서 설하는 세 가지 느낌인 苦受, 樂受, 不苦不樂受로 한역한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으로 설명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왜일까?
이런 세 가지 느낌은 욕계의 몸을 바탕으로 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들은 이러한 거친 욕계의 몸은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정신적인 즐거움(somanassa, 喜), 정신적인 괴로움(domanssa, 憂),
평온(upekkha, 捨)이라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신다.
주지하다시피 아비담마에서는 다섯 가지 느낌을 설하는데 육체적인 괴로움, 육제척 즐거움, 정신적 즐거움, 정신적 괴로움, 평온이다. 이러한 아비담마의 분류는 본경의 이 문단을 통해서 그 경전적 증거를 얻게 된다.
본경의 주석서에서도 "왜냐하면 신들에게는 물질보다 비물질(arupa, 無色, 정신)이 더 분명하며 비물질(정신)의 느낌이 더 분명하기 때문이다.'라고 간접적으로 이런 문체를 설명하고 있다.
3) 두 가지가 있다
한편, 중부 「육처분별경」(M137)에는 정신적인 즐거움, 정신적인 괴로움, 평온을 다시 재가에 바탕을 둔 것, 출리(出離, 출가)에 바탕을 둔 것 등으로 나누고 이들을 다시 각각 여섯 가지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본경에 해당하는 「장부 주석서」는 이것을 상세하게 인용하고 있는데 아래 주해에서 모두 인용하고 있으니 참조할 것.
주석서에서는 이제 비물질(정신)의 명상주제 가운데서 그에게 분명한 느낌을 통해서 천척해 들어가는 입구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문제 제기를 하시고 그에 대한 답을 설하신다고 설명하고 있다. (DA.iii.724)
4) 받들어 행해야 할 정신적 즐거움
"이러한 재가에 바탕을 둔(geha-sita) 즐거움은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한다." (DA.iii.724)
5)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할 정신적 즐거움
"이러한 출리(出離)에 바탕을 둔(nekkhamma-sita) 정신적 즐거움은 받들어 행해야 한다."(Ibid)
6)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기도 하고
"이 출리에 바탕을 둔 정신적 즐거움이란 출리와 위빳사나와 계속해서 생각함(anussati, 隨念))과
초선을 통해서 생긴 일으킨(vitakka, 尋)이 있고 지속적인 고찰(vicara, 伺)이 있는 정신적인 즐거움이라고 알아야 한다.(DA.iii.725)
7)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이것은 제2선과 제3선을 통해서 일어난 일으킨 생각이 없고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정신적인 즐거움이라고 알아야 한다.(Ibid)
8) 이것을 반연하여 말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설하셨는가? 두 가지 아라한과를 설하셨다. 어떻게?
어떤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는 정신적인 즐거움에서 위빳사나를 확립한 뒤 '이 정신적인 즐거움은 무엇을 의지하였는가?'라고 호지(護持)하여 '이들은 (형상, 소리 등의) 토대(境)을 의지했다.'라고 꿰뚫어 안다고 감각접촉을 다섯 번째로 하는 것들에서 설명한 방법대로 차례대로 아라한과에 확립된다.(「네 가지 마음 챙기는 공부」, 202 참조)
다른 비구는 같은 방법으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정신적 즐거움에서 위빳사나를 확립한 뒤
아라한과에 확립된다. 이 가운데서 후자가 더 수승하다. 그래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경우가 더 수승하다고 하셨다." (DA.iii.725)
9) 받들어 행해야 할 정신적인 괴로움
여기서도 받들어 행해야 할 정신적인 괴로움은 출리에 바탕을 둔 정신적 괴로움이라고 주석서는 설명한다.
그리고 주석서는 다음의 맛지마니까야(중부) 「육처분별경」(M137)을 인용하고 있다.
"무엇이 여섯 가지 출리에 바탕을 둔 정신적인 괴로움인가?
형상들은 참으로 무상하고 변하고 빛바래고 소멸한다고 꿰뚫어 알고 그리고 이전의 형상들이나 지금의 모든 형상들은 무상이고 괴로움이요 변하기 마련인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의 바른 통찰지(반야)로써 보면서
위 없는 해탈들에 대해서 바람(願)을 일으킨다. '언제 나는 참으로 성자들이 지금 증득해서 머무는 그런 경지(ayatana)들을 증득해서 머물게 될 것인가?'라고.
이처럼 위없는 해탈들에 대해서 바람을 일으키기 때문에 바람에 조건 지워진 정신적인 괴로움이 일어난다.
이러한 정신적인 괴로움을 출리에 바탕을 둔 불쾌함이라 부른다.
소리들은 냄새들은 맛들은 감촉들은 법들은.. 이러한 정신적인 괴로움을 출리에 바탕을 둔 정신적인 괴로움이라 부른다.이들이 여섯 가지 출리에 바탕을 둔 정신적인 괴로움이다."
10)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할 정신적 괴로움
여기서도 주석서는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할 정신적인 괴로움은 재가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중부」「육처분별경」(M137)의 아래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무엇이 여섯 가지 재가에 바탕을 둔 정신적인 괴로움인가?
눈으로 알아지는 형상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마음을 끌며 세속적인 부귀영화와 연결되어 있다. 이런 것을 획득하지 못한 것을 획득하지 못한 것이라고 여기거나 혹은 이미 지나갔고 소멸되었고 변해버린 이전에 획득하지 못한 것을 기억하면서 정신적인 괴로움이 일어난다.
이러한 정신적인 괴로움을 재가에 바탕을 둔 정신적인 괴로움을 재기에 바탕을 둔 정신적인 괴로움이라 부른다
귀로 알아지는 소리가...코로 알아지는 냄새가...혀로 알아지는 맛이...몸으로 알아지는 감촉이...마노로 알아지는 법이... 이러한 정신적인 괴로움을 재가에 바탕을 둔 정신적인 괴로움을 재기에 바탕을 둔 정신적인 괴로움이라 부른다. 이들이 여섯 가지 재가에 바탕을 둔 정신적인 괴로움이다."
11) 받들어 행해야 하는 평온
같은 방법으로 출리에 바탕을 둔 평온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육처분별경」(M137)을 인용한다.
"여기서 무엇이 출리에 바탕을 둔 평온인가?
형상들은 참으로 무상하고 변하고 빛바래고 소멸한다고 꿰뚫어 알고 그리고 이전의 형상들이나 지금의 모든 형상들은 무상이고 괴로움이요 변하기 마련인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의 바른 통찰지(반야)로써 보면서
평온이 일어난다. 이러한 평온은 형상들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평온을 출리에 바탕을 둔 것이라 부른다.
소리들은...냄새들은...맛들은...감촉들은...법들은... 그러므로 이러한 평온을 출리에 바탕을 둔 것이라 부른다. 이들이 여섯 가지 출리에 바탕을 둔 평온이다."
12)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할 평온
같은 방법으로 재가에 바탕을 둔 평온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육처분별경」을 인용한다.
"여기서 무엇이 재가에 바탕을 둔 평온인가?
눈으로 형상을 보고 어리석고 미혹한 범부에게, (모든 오염원의) 한계를 정복하지 못했고,
업의 과보를 정복하지 못했고, 위험을 보지 못한 범부에게 평온이 생기나니 이러한 평온은 형상을 초월하지 못한다.
귀로 소리를 듣고...코로 냄새를 맡고...혀로 맛을 알고...몸으로 감촉을 감촉하고...마노로 법들을 알고...
그러므로 이런 평온을 재가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여섯 가지 재가에 바탕을 둔 평온이다."
14) 마노란 무엇인가?
'마노'는 빠알리어 mano(Sk. manas)를 음역한 것인데 중국에서는 의(意)로 정착시켰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意와 mano의 의미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역자는 마노로 음역하고 있다.
마노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감각장소(ayatana, 處), 감각기능(indriya, 根)과 문(dvara, 門)이다. 중생은 매찰라 대상과의 연기(緣起)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 가운데 물질적인 대상과의 관계는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을 통해서 하게 된다. 그러므로 눈, 귀, 코, 혀, 몸은 각가가 형상(혹은 색깔0, 소리, 냄새, 맛, 감촉이라는 대상을 만나는 문이 된다. 그리고 이처럼 서로 대(對)가 되어 만남이 일어나는 장소를 불교에서는 감각장소(處)라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장소는 눈에 보는 기능이 있고, 귀에는 듣는 기능이 있듯이 각각에 고유한 기능 혹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불교에서는 감각기능(根)이라고 부른다.그래서 설법하는 상황에 따라서 예를 들면 눈의 문(眼門)이라고도 하고, 눈의 감각장소(眼處)라고도 하고, 눈의 감각기능(眼根)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매순간 우리의 삶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삶이 많은 부분은 정신적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신적인 영역을 관장하는 문/감각장소/감각기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마노(mano, 意)라고 명명한다. 그래서 설법하는 문백에 따라서 마노의 문(意門)이라고도 하고, 마노의 감각장소(意處)라고도 하고, 마노의 감각기능(意根)이라고도 한다.이러한 마노는 초기불교가 천명한 독특한 가르침이며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현대 과학자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마노의 대상이 되는 정신적인 영역을 불교에서는 법(dhamma)이라고 부른다. 아비담마에서는 마노(mano, 意)의 대상인 법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미세한 물질, 마음부수들, 열반을 들고 있다.
2.4 이와 같이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한 뒤 세존께 다른 질문을 드렸다.
"존자시여, 어떻게 도닦을 때 비구가 계목의 단속을 위해서 도닦는 것이 됩니까?"
"신들의 왕이여, 몸의로 짓는 행위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말로 짓는 행위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추구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몸의로 짓는 행위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왜 몸의로 짓는 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설했겠습니까?
'내가 어떤 몸의로 짓는 행위를 받들어 행할 때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善法)들이 제거된다.'고 알면 그러한 정신적 즐거움은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몸의로 짓는 행위를 받들어 행할 때 해로운 법들이 제거되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고 알면 그러한 정신적 즐거움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몸의로 짓는 행위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내가 말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말한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말로 짓는 행위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왜 말로 짓는 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설했겠습니까?
'내가 어떤 말로 짓는 행위를 받들어 행할 때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善法)들이 제거된다.'고 알면 그러한 정신적 괴로움은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말로 짓는 행위를 받들어 행할 때 해로운 법들이 제거되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고 알면 그러한 정신적 괴로움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말로 짓는 행위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내가 말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말한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추구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왜 추구에 대해서 이렇게 설했겠습니까?
'내가 어떤 추구를 받들어 행할 때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善法)들이 제거된다.'고 알면 그러한 추구는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추구를 받들어 행할 때
해로운 법들이 제거되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고 알면 그러한 추구는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추구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내가 말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말한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이렇게 도 닦을 때 비구가 계목의 단속을 위해 도 닦는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신들의 왕 삭까의 질문을 설명하셨다. 신들의 왕 삭까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참으로 그러힙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러합니다. 선서시여, 질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듣고 저는 의심을 건넜으며 의문이 가시었습니다."
* 계목의 단속
"(본 문맥내에서) 계목의 단속(patimokkha-samvara)은 최고요 최상인 계의 단속"(DA.iii.733)
계목의 단속에 대해서는 본서(디가니까야) 제1권 「사문과경」(D2, 42절)과 「청정도론」(I.43)을 참조할 것
* 몸으로 짓는 행위/ 말로 짓는 행위/ 추구로 짓는 행위
이제 계목의 단속을 설명하기 위해서 몸으로 짓는 행위 등을 설하신다고 주석서는 말한다.(Ibid) 계속해서 주석서는 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계의 설명은 (열 가지) 업의 길(kammapatha, 業道)과, 선포하는 것(pannatti) 을 통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먼저 업의 길을 통해서 설명하면, 몸으로 짓는 행위 중에서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살생, 투도, 사음을 말한다. 선포하신 것을 통해서 설명하면, 선포하신 학습계목(sikkhapada)을 몸의 문(kaya-dvara)에서 범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은 살생등을 금하는 것과 선포하신 학습계목을 몸의 문에서 범하지 않는 것이다.
말로 짓는 행위 중에서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은 거짓말 등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선포하신 것을 통해서 설명하면, 선포하신 학습계목을 말의 문(vaci-dvara)에서 범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은 각각 거짓말 등을 금하는 것과 선포하신 학습계목을 말의 문에서 범하지 않는 것이다.(Ibid)
"추구(pariyesana)는 몸과 말로써 추구하는 것이다."(Ibid)
몸으로 짓는 행위와 말로 짓는 행위가 나왔으니 당연히 마음으로 짓는 행위가 나와야 한다.
마음으로 짓는 행위는 너무나 광범위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계목의 단속의 문맥에서 특별히 추구를 들고 있다.
* 성스럽지 못한 추구
주석서에서는 받들어 행해야 하는 추구로 「중부」「성구경」(聖求經,M26)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스러움(ariya) 추구를 들고 있고,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할 추구로는 같은 경에 언급된 성스럽지 못한(anariya)
추구를 들고 그것을 인용하고 있다.(DA.iii.733) 성구경의 해당 부분을 여기서 인용한다.
"비구들이여, 두 가지 추구가 있나니 성스럽지 못한 추구와 성스러운 추구가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성스럽지 못한 추구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기 마련이면서 태어나기 마련인 것을 오직 추구한다.
자신이 늙기 마련이면서 늙기 마련인 것을 추구한다.
자신이 병들기 마련이면서 병들기 마련인 것을 추구한다.
자신이 죽기 마련이면서 죽기 마련인 것을 추구한다.
자신이 슬퍼하기 마련이면서 슬퍼하기 마련인 것을 추구한다.
자신이 오염되기 마련이면서 오염되기 마련인 것을 추구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라고 말하는가?
비구들이여,
아들과 아내는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하인과 하녀는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염소와 양은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닭과 돼지는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코끼리와 소와 말은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금과 은은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집착의 대상들은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여기에 묶이고 여기에 집착하여 자신이 태어나기 마련이면서
태어나기 마련인 것을 추구한다."
2.5 이와 같이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한 뒤 세존께 다른 질문을 드렸다.
"존자시여, 어떻게 도닦을 때 비구가 감각기능의 단속을 위해서 도닦는 것이 됩니까?"
"신들의 왕이여, 눈으로 알아지는 형상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귀로 알아지는 소리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코로 알아지는 냄새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혀로 알아지는 맛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몸으로 알아지는 감촉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마노로 알아지는 법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간략하게 설해 주신 뜻을 저는 이제 이와 같이 자세하고 잘 알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딴 경우에 '내가 눈으로 알아지는 형상을 받아들일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제거된다.'고 알면 그러한 눈으로 알아지는 형상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 '내가 눈으로 알아지는 형상을 받아들일 때 해로운 법들이 제거되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고 알면 그러한 눈으로 알아지는 형상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내가 귀로 알아지는 소리를 받아들일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제거된다.'고 알면 그러한 귀로 알아지는 소리는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 '내가 귀로 알아지는 소리를 받아들일 때 해로운 법들이 제거되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고 알면 그러한 귀로 알아지는 소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딴 경우에 '내가 코로 알아지는 냄새를 받아들일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제거된다.'고 알면 그러한 코로 알아지는 냄새는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 '내가 코로 알아지는 냄새를 받아들일 때 해로운 법들이 제거되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고 알면 그러한 코로 알아지는 냄새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딴 경우에 '내가 혀로 알아지는 맛을 받아들일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제거된다.'고 알면 그러한 혀로 알아지는 맛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 '내가 혀로 알아지는 맛을 받아들일 때 해로운 법들이 제거되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고 알면 그러한 혀로 알아지는 맛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딴 경우에 '내가 몸으로 알아지는 감촉을 받아들일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제거된다.'고 알면 그러한 몸으로 알아지는 감촉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 '내가 몸으로 알아지는 감촉을 받아들일 때 해로운 법들이 제거되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고 알면 그러한 몸으로 알아지는 감촉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딴 경우에 '내가 마노로 알아지는 법을 받아들일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제거된다.'고 알면 그러한 마노로 알아지는 법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 '내가 마노로 알아지는 법을 받아들일 때 해로운 법들이 제거되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고 알면
그러한 마노로 알아지는 법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간략하게 설해 주신 뜻을 저는 이제 이와 같이 자세하게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질문에 대한 세존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의심을 건넜으며 의문이 가시었습니다."
*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
"간략하게 말하면, 어떤 형상을 보면서 감각적 욕망(raga) 등이 일어나면 그것은 받들어 행해서는 안된다. 보아서는 안된다. 쳐다보아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면서 부정의 인식(asubhasanna, 不淨想)이 자리잡거나, 청정한 믿음이 일어나거나, 무상하다는 인식(anaccasanna, 無常想)을 얻게 되면
그런 것은 받들어 행해야 한다."(DA.iii.736) 주석서에서는 비슷한 방법으로 소리, 냄새, 맛, 감촉, 마노의 대상인 법을 대하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 마노와 법
'마노'는 빠알리어 mano(Sk. manas)를 음역한 것인데 중국에서는 의(意)로 정착시켰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意와 mano의 의미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역자는 마노로 음역하고 있다. 마노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감각장소(ayatana, 處), 감각기능(indriya, 根)과 문(dvara, 門)이다.
중생은 매찰라 대상과의 연기(緣起)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 가운데 물질적인 대상과의 관계는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을 통해서 하게 된다. 그러므로 눈, 귀, 코, 혀, 몸은 각각 형상(혹은 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이라는 대상을 만나는 문이 된다. 그리고 이처럼 서로 대(對)가 되어 만남이 일어나는 장소를
불교에서는 감각장소(處)라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장소는 눈에 보는 기능이 있고, 귀에는 듣는 기능이 있듯이 각각에 고유한 기능 혹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불교에서는 감각기능(根)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설법하는 상황에 따라서 예를 들면 눈의 문(眼門)이라고도 하고, 눈의 감각장소(眼處)라고도 하고,
눈의 감각기능(眼根)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매순간 우리의 삶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삶이 많은 부분은 정신적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신적인 영역을 관장하는 문/감각장소/감각기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마노(mano, 意)라고 명명한다.
그래서 설법하는 문백에 따라서 마노의 문(意門)이라고도 하고, 마노의 감각장소(意處)라고도 하고, 마노의 감각기능(意根)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마노는 초기불교가 천명한 독특한 가르침이며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현대 과학자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마노의 대상이 되는 정신적인 영역을 불교에서는 법(dhamma)이라고 부른다.
아비담마에서는 마노(mano, 意)의 대상인 법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미세한 물질, 마음부수들, 열반을 들고 있다.
2.6 이와 같이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한 뒤 세존께 다른 질문을 드렸다.
"존자시여, 모든 사문·바라문들은 전일(專一. 마음과 힘을 오로지 한 가지 일에만 씀)한 교설(남에게 가르쳐 설명하다)을 가지고 있고, 전일한 계를 가지며, 전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신들의 왕이여, 모든 사문·바라문들은 전일한 교설을 가지고 있지 않고, 전일한 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전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러면 왜 모든 사문·바라문들은 전일한 교설을 가지고 있지 않고, 전일한 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전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신들의 왕이여, 세상은 여러 요소를 가지고 있고 각각 다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요소를 가지고 각각 다른 요소를 가진 세상에서 중생들은 그 요소가 어떤 것이든지 아무거나 천착(穿鑿. 깊이 살펴 연구함. 후벼서 구멍을 뚫음))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천착한 것만을 완강하게 고집하고 천착하여 '이것만이 진리고 다른 것은 쓸모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문·바라문들은 전일한 교설을 가지고 있지 않고, 전일한 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전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러면 모든 사문·바라문들은 구경의 완성을 이루고, 구경의 유가안은(瑜伽安隱)을 얻으며, 구경의 목적을 얻습니까?"
"신들의 왕이여, 모든 사문·바라문들은 구경의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구경의 유가안은(瑜伽安隱)을 얻지 못하며, 구경의 목적을 얻지 못합니다."
"존자시여, 그러면 왜 모든 사문·바라문들은
구경의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구경의 유가안은(瑜伽安隱)을 얻지 못하며,
구경의 목적을 얻지 못합니까?"
"신들의 왕이여,
갈애를 소멸하여 해탈한 비구들만이
구경의 완성을 이루고, 구경의 유가안은(瑜伽安隱)을 얻으며, 구경의 목적을 얻습니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신들의 왕 삭까의 질문을 설명하셨다.
신들의 왕 삭까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러합니다, 선서시여.
질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듣고 저는 의심을 건넜으며 의문이 가시었습니다."
* 전일(專一)
"이들의 말이 오직 하나인(eka) 끝(anta)을 가졌으며 둘로(dvedha) 나누어진 교설이 아니라고 해서 '전일한 교설을 가진 자'라고 한다.(DA.iii.737)
* 여러 요소를 가지고 있고
"이 세상은 여러 의향(ajjhasaya)을 가지고 있고 다양한 의향을 가지고 있다. 한 사람이 가고자 하면 다른 사람은 서고자 한다. 한 사람이 서고자 하면 다른 사람은 눞고자 한다. 두 중생이 하나의 의향을 가지기란 참으로 어렵다. 이러한 여러 요소(dhatu)를 가지고 있고 각각 다른 요소를 가진 세상에서
중생들은 그것이 무슨 요소든 그것이 무슨 의향이든 그것을 천착하고(abhinivisanti) 거머쥔다(ganhanti)."(Ibid)
* 구경의 완성/구경의 유가안은/구경의 목적
'구경의 완성'으로 옮긴 원어는 accanta-nittha인데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anta(끝)란 파멸(vinasa이다. 이들에게는 끝을 넘어선 완성(nittha)이 있다고 해서 구경의 완성이라고 한다.
이러한 완성 즉 최상의 안식(parama-assasa)인 열반은 모두에게 파멸을 넘어선 영원한 것이라고 말한다."(Ibid)
'유가안은(瑜伽安隱)'은 yogakkhema(요가케마)의 한역이다. 여기서 유가(瑜伽)는 yoga의 음역이고 안은(安隱)은 khema의 의역이다. 이 단어는 「리그베다」에서부터 나타나는데 yoga는 '획득'을 khema는 '보존(저축)'을 뜻했다. 그러나 빠알리 주석서들에서 예외없이 yoga를 속박으로 해석해서
속박들로부터 풀려나서 안온한 열반으로 유가안은을 설명한다. 유가안온(Sk. yogaksema)의 개념은 까우띨랴(Kautilya)의 정치학 논서인「아르타샤스트라」(副論)에서 왕도정치의 이념으로 표방되었으며, 초기부터 불교에서 받아들여 anuttara(無上)란 수식어를 붙여 anuttara yogakkhema(무상 유가안은)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열반의 동의어로 중요하게 쓰였다.
본경의 주석서에서는 열반의 이름이라고 간단하게 언급만 하고 있다.(DA.iii.737)
'목적'으로 옮긴 원어는 pariyosana(끝, 결론, 완결)인데 열반의 다른 이름이라고 주석서는 언급하고 있다.(Ibid)
* 갈애의 소멸
갈애의 소멸(tanha-sankhaya)이란 도(magga)와 열반이다. 도는 갈애를 소멸하고(sankhinati) 파멸시킨다(vinaseti)고 해서 갈애의 소멸이다. 열반은 갈애를 소멸하고 파멸시켜서 드러나는(agamma) 것이기 때문에 갈애의 소멸이다. 갈애를 소멸시키는 도에 의해서 해탈했고 갈애의 소멸인 열반 (속)으로 해탈한다, 향한다(확신한다, adhimutta)고 해서 갈애를 소멸하여 해탈한 것(tanha-sankhaya-vimutta)이다,(DA.iii.738)
2.7 이와 같이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한 뒤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동요는 병이요, 동요는 종기요, 동요는 쇠살이요, 동요는 사람들을 이런저런 존재로 태어나도록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고 낮은 이런저런 곳에 태어납니다. 세존이시여, 저밖에 있는 다른 사문·바라문들은 제게 질문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는데 세존께서는 제게 그 모두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잠재해 있었던 저의 의심과 의문의 쇠살이 세존에 의해서 뽑혔습니다."
"신들의 왕이여, 그대는 이런 질문들을 다른 사문·바라문들에게도 했던 것을 기억합니까?"
"세존이시여, 저는 이런 질문을 다른 사문·바라문들에게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신들의 왕이여,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설명을 하였습니까? 만일 그대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말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앉아계시거나 세존과 같으신 분이 앉아계시는 한 제게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신들의 왕이여, 그렇다면 말해 보십시오."
"세존이시여, 저는 숲에 머무는 수행을 하는 외딴 거주처에서 사는 수행자들을 만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가서는 이런 질문들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답 대신에 '존자는 누구십니까?'라고 제게 되물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을 받고 저는 '존자들이여, 저는 신들의 왕 삭까입니다.'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제게 '신들의 왕이시여, 그런데 존자는 무슨 업을 지어서 이런 지위를 얻었습니까?'라고 다른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들은 대로 배운 대로 그들에게 법을 설명습니다. 그들은 그 정도로도 마음이 흡족해서 '우리는 신들의 왕 삭까를 친견했다. 우리가 질문한 것을 모두 우리에게 설명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들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저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제자이며 흐름에 든 자(豫流者)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지고, (해탈이) 확실하며,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신들의 왕이여, 그대는 이 이전에도 이러한 만족을 얻고 이러한 기쁨을 얻은 것을 기억합니까?"
"세존이시여, 저는 이 이전에도 이러한 만족을 얻고 이러한 기쁨을 얻은 것을 기억합니다."
"신들의 왕이여, 그러면 어떻게 그대는 이 이전에도 이러한 만족을 얻고 이러한 기쁨을 얻은 것을 기억합니까?"
"세존이시여, 전에 신들과 아수라들의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전쟁에서 신들이 승리하고 아수라들은 패배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전쟁에서 승리한 뒤 제게는 '이제 천상의 음식과 아수라들의 음식 둘 다를 신들이 즐기게 되었구나.'라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나 그러한 저의 그럼 만족과 그런 기쁨은 폭력을 수반하고 무력을 수반한 것이어서 (속된 것들을) 싫어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욕망의 빛바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지 못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존의 법을 듣고 얻은 이러한 감격과 기쁨은 폭력을 수반하지 않고 무력을 수반하지 않은 것이어서 (속된 것들을) 싫어함으로 인도하고, 욕망의 빛바램으로 인도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열반으로 인도해 줍니다."
* 동요
"동요(eja)란 움직인다는(calana) 뜻에서 갈애(tanha)를 말한다."(Ibid)
그(삭까)는 무슨 의심과 의문을 가졌던가? (정리를 해보자)
1. 무엇때문에 중생들은 원망하지 않고 폭력을 쓰지 않고 적대함 없이 평화롭게 머무르자 하면서 서로 원망하고 폭력을 쓰고 적대하면서 살게되는가? - 질투와 인색
2. 질투와 인색은 무엇이 원인인가? - 질투와 인색>좋아함과 싫어함>열의>일으킨 생각>사량분별이라는 헤아림
3. 어떻게 도닦아야 사량분별이라는 헤아림이 소멸하는가? - 정신적 즐거움, 정신적 괴로움, 평온: 유익한 법이 증장하는
4. 어떻게 도닦아야 계목을 수지하는 것이 되는가? - 몸으로 짓는 행위, 말로 짓는 행위, 추구: 유익한 법이 증장하는
5. 어떻게 도닦아야 감각기능을 단속하는 것이 되는가? - 눈으로 알아지는 형상, 귀로 알아지는 소리, 코로 알아지는 냄새, 혀로 알아지는 맛, 몸으로 알아지는 감촉, 마노로 알아지는 법, 유익한 법인 증장하는(不淨想, 無常想)
6. 모든 사문·바라문들은 열반을 얻는가? - 갈애를 소멸한 자만이
2.8 "신들의 왕이여, 그러면 그대는 어떠한 이익을 보기 때문에 그러한 만족과 기쁨을 설합니까?
"세존이시여, 저는 여섯 가지 이익을 보기 때문에 이러한 만족과 기쁨을 설합니다.
저는 여기 이곳 (인다살라) 동굴에서 신의 상태로 다시 태어남을 얻었습니다. 존자시여, 이와 같이 아십시오.
세존이시여, 이것이 제가 이러한 감격과 이러한 기쁨을 설하는 첫 번째 이익입니다. 저는 하늘의 몸에서 떨어져 천상의 수명을 버린 뒤에 저의 마음이 좋아하는 대로 미혹하지 않고 모태를 찾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제가 이러한 감격과 이러한 기쁨을 설하는 두 번째 이익입니다. 그런 저는 미혹하지 않는 통찰지를 지닌 분의 교법을 좋아하며 머물 것이니 바른 방법으로 잘 알아차리고 마음 집중하며 머물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제가 이러한 감격과 이러한 기쁨을 설하는 세 번째 이익입니다. 제가 바른 방법으로 행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완전한 지혜를 원하면서 머무를 것이니 그것은 (인간으로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제가 이러한 감격과 이러한 기쁨을 설하는 네 번째 이익입니다. 제가 인간의 몸에서 떨어져 인간의 수명을 버린 뒤에 다시 신이 될 것이니 신들의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가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제가 이러한 감격과 이러한 기쁨을 설하는 다섯 번째 이익입니다. 더욱더 수승한 신들은 명성을 거진 색구경천이니 그 거주처는 저의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제가 이러한 감격과 이러한 기쁨을 설하는 여섯 번째 이익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러한 여섯 가지 이익을 보기 때문에 이러한 감격과 이러한 기쁨을 설합니다.
* 다시 신으로 태어남
"삭까는 예류자가 된 후에 세존의 앞에서 죽은 뒤(cavitva) 어린 삭까(taruna-sakka)가 되어 태어 났다.
신들이 죽을 때는 (화현을 하기 때문에, opapatikatta, DAT.ii.339) 자기 자신이 가고 오는 경우를 (남들이) 알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신들은 알지 못했다. 마치 등불의 불꽃과도 같다. 그러나 삭까는 자신이 오고가는 것을 알았고, 세존께서는 지혜를 잃지 않으셨기 때문에(appatihata-nanatta) 아셨으니 이처럼 두 사람만이 알았다.(DA.iii.732)
"다시 태어남을 얻었다(punarayu ca me laddho)는 것은 다른 업의 과보(kamma-vipaka, 業異熟)로 나의 생명을 얻었다는 뜻이다. 이것을 통해서 자신이 죽었음(cutabhava)과 태어났음(upapannadhava)을
드러내고 있다.(DA.iii.739)
* 제가 바른 방법으로 행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이것은 일래도(sakadagami-magga)를 두고 한 말이디. 만일 일래자가 된다면이라고 밝힌 것이다."(Ibid)
* 신들의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가 될 것입니다.
"다시 신의 세상에서 신들의 왕인 최상(uttama)의 삭까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Ibid)
* 그 거주처는 저의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즉 거기서, 삭까의 상태에서 죽어서 그 몸에서 불환도를 얻기 때문에 위로 흐르는 자(uddharh-sota),
즉 (낮은 경지로는 다시 태어나지 않고 위로만 태어나서) 색구경천으로 가는 자가 되어 무번천 등에 태어나서 마지막에는 색구경천에 태어날 것이다. 이것을 두고 이렇게 말 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무번천에서 천 겁을 머물 것이고, 무열천에서 2천 겁을, 선현천에서 4천 겁을, 선견천에서 8천 겁을, 색구경천에서 1만 6천겁을 머물 것이다. (아렇게 하여 모두) 3만 천 겁 동안 범천의 수명을 누릴 것이라고 한다. (DA.iii.739 ∼ 40)
2.9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의문과 의심을 품고 오랜 세월 동안 저는 여래를 찾으면서 방랑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외딴 처소에 머무는 사문들은 깨달은 분이라고 여기면서 그들을 섬기러 저는 갔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성공합니까?' '어떻게 해서 실패합니까?' 이렇게 물었지만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고 도와 도닦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신들의 왕 삭까가 왔다고
저에 대해서 알게 되자 오히려 저에 대해서 묻기를 '무엇을 행하여 이것을 성취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들은 대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오히려 그들에게 법을 설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마음이 흡족해져서 '우리는 와사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제 저는 부처님을 뵈었고 의심을 다 건넜으며 오늘 모든 두려움이 남김없이 사라졌습니다. 갈애의 쇠살을 뽑으신 분이며 대적할 자가 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으셨으며 대영웅이요 태양의 후예이신
세존께 저는 예경합니다.
존자시여, 마치 신들이 범천을 공경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는 당신께 경배합니다. 참으로 당신을 공경합니다. 오직 당신만이 바르게 깨달은 분이요 당신은 위없는 스승이십니다. 신을 포함한 세상에서
당신을 대적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2.10 그러자 신들의 왕 삭까는 간답바의 아들 빤짜시카를 불러서 말하였다.
"그대 빤짜시카여. 그대가 먼저 세존을 편안하게 해드렸기 때문에 그대는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도다. 그대가 먼저 편안하게 해드렸기 때문에 우리는 세존·아라한·정등각을 친견하러 올 수 있었도다. 나는 그대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그대는 간답바의 왕이 될 것이로다. 그대가 그토록 원하던 태양과 같이 밝은 밧다를 그대에게 줄 것이로다."
그러고 신들의 왕 삭까는 손으로 땅을 짚고 세 번 감흥어를 읊었다.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 귀의합니다.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 귀의합니다.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 귀의합니다."
2.11 이 상세한 설명(記別, 授記0이 설해지자 신의 왕 삭까에게는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든 모두 멸하기 마련인 법이다(集法卽滅法)'라는 티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이 생겼으며 8만명의 다른 신들도 그러하였다.
이와 같이 신들의 왕 삭까는 질문하기 원했던 것을 여쭈었으며 세존께서는 설명하셨다. 그러므로 이 상세한 설명은 '삭까의 질문'이라고 불린다.
*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원문은 apariyosita-sarnkappo인데 '완결되지 않은 사유를 가지고'라고 직역할 수 있다.
그러나 주석서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anitthita-manoratho)"(DA.iii740)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복주석서에서는 그 목적을 "수승한 존재의 성취와 열반의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것"(DAT.ii.349)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각묵스님)
그는 무슨 의심과 의문을 가졌던가? 어째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방랑했다고 말하는가?
1. 무엇때문에 중생들은 원망하지 않고 폭력을 쓰지 않고 적대함 없이 평화롭게 머무르자 하면서 서로 원망하고 폭력을 쓰고 적대하면서 살게되는가? - 질투와 인색
2. 질투와 인색은 무엇이 원인인가? - 질투와 인색>좋아함과 싫어함>열의>일으킨 생각>사량분별이라는 헤아림
3. 어떻게 도닦아야 사량분별이라는 헤아림이 소멸하는가? - 정신적 즐거움, 정신적 괴로움, 평온: 유익한 법이 증장하는
4. 어떻게 도닦아야 계목을 수지하는 것이 되는가? - 몸으로 짓는 행위, 말로 짓는 행위, 추구: 유익한 법이 증장하는
5. 어떻게 도닦아야 감각기능을 단속하는 것이 되는가? - 눈으로 알아지는 형상, 귀로 알아지는 소리, 코로 알아지는 냄새, 혀로 알아지는 맛, 몸으로 알아지는 감촉, 마노로 알아지는 법, 유익한 법인 증장하는(不淨想, 無常想)
6. 모든 사문·바라문들은 열반을 얻는가? - 갈애를 소멸한 자만이
삼십삼천은 욕계 천상이다. 욕계 천상의 1일은 인간세의 50년이다. 1 천상년은 인간세 18,000년이다.
삼십삼천의 수명은 1,000 천상년이므로 환산하면 일천팔백만년이다. 천팔백만년 동안 신들의 왕 삭까는 이와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제석문경이 끝났다.)
실론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gikoship/15780808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디가 니까야(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빠야시 경(Payasi Sutta. D23) (0) | 2018.03.25 |
---|---|
대념처경(大念處經.Mahāsatipaṭṭhāna sutta. D22) (0) | 2018.03.25 |
마하사마야 경(大會經. Mahasamaya sutta. D20) (0) | 2018.03.25 |
마하고윈다 경(Mahagovinda sutta. D19) (0) | 2018.03.25 |
자나와사바 경(Janavasabha Sutta. D18) (0) | 2018.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