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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가, 깨달음으로 금욕을 하는가?

수선님 2018. 11. 25. 12:19
 

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가, 깨달음으로 금욕을 하는가?


유키 시라마네(Yukie Ramona Siramane)

최원섭 옮김 kosa21@chol.com



유키 시라마네(Yukie Ramona Siramane) / 스리랑카 켈라니아 대학(University of Kelaniya) 교수.

최원섭 /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1. 서언


팔리 《율장》의 비구계 227계 중에 21계가 음행과 관련되어 있다. 비구에게 정해진 4바라이(波羅夷, parajika)가 비구니에게 적용될 때에는 8바라이까지 늘어난다. 비구니계에 추가된 네 가지 바라이 중에 세 가지 역시 음행과 관련된 것으로서 4바라이의 ‘음계’를 바탕으로 파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비구니에게 정해진 전체 바라이 수의 절반은 어떤 형태로든 음행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바라이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다른 계 조목도 마찬가지인데 승잔(僧殘, sanghadisesa)과 바일제(波逸提, pacittiya)도 상당수가 청정한 범행(梵行, brahmacariya)에 장애가 되는 음행을 다루고 있다.


대체적으로 범행의 핵심은 금욕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모한 위제라트네(Mohan Wijeratne)는 《비구니 승가(Buddhist Nuns)》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불교의 교리나 계율, 그 어디에서도 영원히 순결을 지키는 일을 숭상한다거나, 그런 식의 육체적 성스러움이나 승려의 금욕이라는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더욱이 부처님은 종교적 의례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음행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종교적 정화(淨化)를 얻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모한 위제라트네가 말한 것처럼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상좌부 불교에서는 《율장》을 통해 비구와 비구니에게 금욕을 무척 강조한다는 점에서 깨달음을 얻는 데 금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이 글은 “깨달음을 통해 금욕을 하는 것인가, 금욕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인가?” 하는 주제로 불교의 여성 제자들의 수행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상좌부 불교의 《율장》에서 금욕의 위치를 고찰하고 둘째, 어린 나이에 수행의 성과가 있거나 깨달음을 얻었다가 이후에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고 지극히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한 여성 제자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불교 문헌을 살펴본다. 다시 말하자면 상좌부 문헌에서 상당한 수행의 성과가 있다고 기록한 재가의 여성 제자들의 삶에서 금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 상좌부 불교의 ‘깨달음’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며 현장 조사를 진행했다.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했다고 여겨지는 비구·비구니·재가 남녀 등 현재의 상좌부 명상 수행자들과 한 인터뷰를 한 결과 예류과(깨달음의 제1단계)를 얻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완전무결하게 청정한’ 금욕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애욕에 빠지지 말라는 등의 정해진 계율만을 지키는 재가인도 있었으며,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게 한’ 종교 체험을 하기 전에는,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는 세 번째 계율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규정들을 무시하고 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셋째로, 이 글에서는 상좌부 불교권에서 사는 현대 명상가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현장 조사 결과를 고찰하고자 한다.


2. 비구니 《율장》에서의 금욕의 위치


불교에서 설명하는 우주와 인간의 생성 과정은 《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 Agganna Sutta)》에 잘 나타나 있다. 경전에서 남녀간의 성관계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내용은 무지와 탐욕의 행동이라는 설명이다. 세상이 생기고 그때까지는 인간에게 없었던 ‘성을 구별’할 수 있는 신체적인 모양이 나타나고 이렇게 새로 생긴 남성과 여성은 탐욕에 빠져 서로와의 성관계에 빠져들어,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이 “그대의 타락함을 없애 주리라. 어찌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렇게 다룬단 말인가?” 하며 모래와 재와 소똥을 뿌렸다.


불교의 최종 목표인 열반은 탐욕(raga)과 혐오(doha)와 무지(moha)가 남김없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향한 수행 과정에서는 성관계를 포함한 감각적 쾌락을 포기하도록 강조하는 것이 당연하다. 더욱이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여자의 육체만큼이나 남자의 마음을 빼앗는 어떠한 색(色)도 알지 못한다. 여자의 육체는 남자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는다. 비구들이여, 여자의 목소리만큼이나 남자의 마음을 빼앗는 어떠한 소리[聲]도 알지 못한다. 여자의 목소리는 남자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는다.”라고 하시고 여자의 체취[香], 맛[味], 촉감[觸] 등으로 설명한다. 여자의 마음을 뺏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진리의 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한 비구와 비구니를 위한 《율장》은 금욕을 매우 강조하면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구족계를 받은 비구와 비구니에 대한 팔리어 《율장》의 계율은 1) 바라이(波羅夷, Parajika), 2) 승잔(僧殘, Sanghadhisesa), 3) 부정(不定, Aniyata), 4) 사타(捨墮, Nissaggiya Pacittiyas), 5) 바일제(波逸提, Pacittiya), 6) 회과(悔過, Patidesaniya), 7) 중학(衆學, Sekhiya), 8) 멸쟁(滅諍, Adhikarana Samatha)의 여덟 가지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가장 무거운 죄인 바라이를 어기면 승단에서 쫓겨나게 된다. ‘바라이’라는 말은 ‘패배’를 뜻하고 비구나 비구니가 이 계를 어겼다는 말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번뇌에 패배했다는 말이다. 일단 이 계를 어기면 그 사람은 승가에 소속될 자격이 없어진다. 바라이를 제외한 다른 계조목을 어겼을 경우에는 《율장》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그에 맞는 처벌을 통해 구제받는다. ‘승잔’은 구제받을 수 있는 계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다.


비구니 승잔죄를 어기면 ‘마낫타(manatta)'라고 부르는 15일 동안의 집행유예 기간이 주어진다. 비구니의 마나타는 비구 승잔죄의 ’별주(別住, parivasa)‘ 기간에 해당한다. 이 기간 동안 계를 어긴 수행자가 가지고 있던 모든 권리와 특권이 박탈되며 이러한 사실을 승가의 모두에게 알려 나쁜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사타’에는 처벌 규정이 있지 않으며 적절한 방법을 통하지 않고 얻은 물건을 포기하면 된다. '바일제’는 고백만 하면 되는 비교적 가벼운 죄이다.


비구에게 정해진 4바라이가 비구니에게 적용될 때에는 8바라이까지 늘어난다. 비구니계에 추가된 네 가지 바라이 중에 세 가지 역시 음행과 관련된 것으로서 4바라이의 ‘음계’를 바탕으로 파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비구니에게 정해진 전체 바라이 수의 절반은 어떤 형태로든 음행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 중에서 비구계와도 공통으로 주어진 바라이 제1조와, 비구니에게만 주어지는 바라이 제5조와 제8조가 직접적으로 음행을 언급하고 있다.


바라이 제1조 : 상대가 동물이라 할지라도 이성과 의도적으로 관계를 가진 비구니는 번뇌에 패배당한 자로서 바라이를 범한 것이다. 다른 비구니와 함께 살 수 없다.


비구에 대한 위 조목의 규정은 다음과 같다.

“계를 받은 비구가 계를 버리지 않고 (출가 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고 고백하지 않은 상태에서 음행을 하면 그 대상이 짐승의 암컷일지라도 이 비구는 쫓겨난 죄를 지었으니….”

비구니의 경우에는 “계를 버리지 않고 (출가 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고 고백하지 않은 상태에서”라는 말이 없다. 그러므로 비구는 승가 전체 앞에서나 비구 몇이 모인 앞에서나 구족계를 받은 비구 한 명 앞에서나, 최소한 그의 말을 이해하는 재가 신도 앞에서 계를 포기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하지만 비구니는 그런 선언 없이도 승단을 떠날 수 있었다.


위 조목을 비구에게 적용할 때에는 사람과의 음행을 금지할 뿐 아니라 악마와 천신 같은 인간 아닌 존재, 사체, 양성자(兩性者, ubhatobyanjanako), 거세자(去勢者, pandakas), 잠든 사람 등과의 음행까지 확장된다. 바라이 제1조가 적극적인 음행을 다루고 있다면 이어지는 바라이는 비구니가 수동적으로 음행의 상대가 되는 일을 금지하는 것이다.


바라이 제5조 : 자신의 몸을 원하는 남자와 함께 쇄골 아래와 무릎 위쪽을 가까이 하거나 비비거나 잡거나 만지거나 누르는 일에 동의하는 욕정에 사로잡힌 비구니는 번뇌에 패배당한 자로서 바라이를 범한 것이다. …


바라이 제8조 : 욕정에 사로잡힌 비구니가, 자신을 원하는 남자가 손을 잡거나 가사의 끝 자락을 잡는 데 동의하거나, 혹은 함께 서 있거나 함께 말하거나 함께 약속하고 다니거나 남자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거나 으슥한 곳에 들어가거나 음행하기 위해 몸을 드러내 보이면 번뇌에 패배당한 것으로서 바라이를 범한 것이다. …


두 가지 조목은 신체적으로 수동적인 역할을 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욕정에 사로잡힌’이라든가 ‘동의하는(sadiyeyya)’ 등의 표현이 마음의 역할을 나타내고 있다. 심리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은 단순히 ‘굴복한다’거나 ‘방관한다’거나 ‘양보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찬성한다’는 뜻이고 ‘승낙한다’는 뜻이며, 특히 제5바라이의 경우 지금 느끼고 과거에 느꼈으며 앞으로 느낄 쾌락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그것에 빠져들었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라한 상태인 자가 강간을 당하거나 몽정을 하는 일은 바라이를 범하지 않은 것이다. 숲에서 젊은 청년에게 강간당한 아라한 장로니 웁팔라반나(Uppalavanna)에 대해 부처님께서 바라이 제1조를 범하지 않았다고 선언한 것은 아라한이라면 모든 번뇌를 제거했기 때문에 그런 행위에서 쾌락을 느끼지 않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음의 비구니 승잔죄는 주목할 만하다.

승잔 제3조 : 비구니 혼자서 마을을 떠나거나 강을 건너 어디로 가거나 밤을 보내거나 무리와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 이런 일을 하는 비구니는 승잔죄를 범하는 것이다.

승잔 제5조 : 비구니는 음심을 품고, 마찬가지로 음심을 품은 남자가 주는 음식을 받거나 함께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

승잔 제6조 : 비구니는 다른 사람에게 “이 남자가 음심이 있든지 없든지 당신이 그런 생각을 즐기지 않으면 그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 그가 주는 것을 받아서 함께 드십시오”라고 말하면 안 된다.


위의 조목들은 탐욕스런 생각과 행위를 즐길 기회를 없애려는 목적뿐만 아니라 강간이나 치한 등 신체적 위험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비구니를 보호하려는 목적과, 일반 대중들은 물론 승가에 우호적이고 후원하는 집단에게 악평을 듣거나 부당한 비난을 듣는 일로부터 하나의 단체로서의 비구니 승가를 보호하려는 목적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중에 일부는 꽤 심각한 것이었기 때문에 해당하는 승잔죄를 저지른 비구니에게는 ‘마낫타’가 주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다음의 바일제 역시 같은 목적을 담고 있다.

바일제 제11조 : 비구니는 한밤중에 등불 없는 곳에서 남자와 함께 있거나 말을 하면 안 된다. 그런 일을 하면 바일제를 범한 것이 된다.

바일제 제12조 : 비구니는 으슥한 곳에서 남자와 함께 있거나 말을 하면 안 된다.

바일제 제13조 : 비구니는 트인 장소에서 남자와 함께 있거나 말을 하면 안 된다.

바일제 제14조 : 비구니는 차도, 골목길, 교차로에서 남자와 함께 있거나 말을 하거나 귓속말을 하거나 같이 있던 비구니를 떨어지게 하면 안 된다.


위의 행동들은 비구니의 마음 상태가 어떠했는지, 또 탐욕의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계를 어긴 것이 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음의 조목들 역시 같은 목적을 담고 있다


바일제 제51조 : 어떤 비구니라도 비구가 혼자 있는 절인 줄 알면서 허락 없이 들어가면 바일제를 범한 것이 된다.

바일제 제102조 : 어떤 비구니라도 남자가 혼자 자는 곳에 누우면…

바일제 제103조 : 어떤 비구니라도 남자에게 설법할 때 다섯 마디나 여섯 마디를 넘게 하면 지혜 있는 여인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바일제 제125조 : 어떤 비구니라도 은밀한 장소에 앉거나 기다리거나 으슥한 곳에 남자와 앉아 있으면…

바일제 제126조 : 어떤 비구니라도 남자와 단둘이서 앉거나 기다리면…


비구니 《율장》에는 자위나 동성애 같은 성적 행위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계 조목이 몇 가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율장》에서 침구나 잠자리를 같이 하지 못하게 하고 담요를 같이 쓰지 못하게 하며 다른 사람의 몸을 문지르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 몸에 기름 같은 것을 바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혹시 있을지 모를 성적인 행위로부터 보호하려는 목적을 포함한 다양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 일부 조목은 다음과 같다.


바일제 제3조 : 손바닥으로 (은밀한 곳을) 때리면 바일제가 된다.

바일제 제4조 : (은밀한 곳에) 밀납으로 만들어진 뭔가를 넣으면 바일제가 된다.


팔리어 문헌에서는 음부에 ‘자투맛타카(jatumutthaka)’를 넣은 비구니 이야기가 나온다. 자투맛타카라는 말은 번역하면 ‘랙으로 장식한 것’(Pali English Dictionary, PTS, London)으로 당시 사회에서 여성이 사용한다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나무나 밀가루, 또는 진흙으로 만든다. 이런 우발적인 사건에 이어서 부처님은 자투맛타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계에서 그치지 않고 치모(恥毛) 깎는 칼을 음부에 대지 못하게 하는 계를 정했다. 바일제 제5조는 비구니가 음부를 씻을 때 2인치 이상 손가락을 넣으면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바일제 제31조 : 어떤 비구니라도 둘이서 한 침상을 쓰면 바일제가 된다.

바일제 제32조 : 어떤 비구니라도 둘이서 한 이불과 한 요를 쓰면 바일제가 된다.

바일제 제90조 : 어떤 비구니라도 다른 비구니를 시켜 연고를 문질러 안마를 받으면 바일제가 된다.

바일제 제91조 : 어떤 비구니라도 식차마나를 시켜 연고를 문질러 안마를 받으면 바일제가 된다.

바일제 제92조 : 어떤 비구니라도 사미니를 시켜 연고를 문질러 안마를 받으면 바일제가 된다.

바일제 제93조 : 어떤 비구니라도 재가 여인을 시켜 연고를 문질러 안마를 받으면 바일제가 된다.


또한 《율장》은 장신구를 한다든가 향수를 뿌린다든가 공공장소에서 맨몸으로 목욕하는 등 남자를 그리워하는 욕정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 행동으로부터 비구니를 보호하려고 한다.


바일제 제96조 : 어떤 비구니라도 대가사를 입지 않고 마을에 들어가면 바일제가 된다.

바일제 제86조 : 어떤 비구니라도 상가니(sanghani)를 입으면 바일제가 된다.(상가니는 엉덩이 둘레에 장식으로 입는 천이나 치장용 체인을 말한다)

바일제 제87조 : 어떤 비구니라도 부녀자의 장신구를 몸에 지니면 바일제가 된다.

바일제 제88조 : 어떤 비구니라도 향수와 화장수를 쓰면 바일제가 된다.

바일제 제21조 : 어떤 비구니라도 맨몸으로 목욕하면 바일제가 된다.


음행은 진제(眞諦)가 아니며 세속제(世俗諦)이고 부정한 것이어서 끝끝내 정화되어야 하고 비밀스러운 것이라고 불교 경전에서는 보통 언급해 왔다. 세속의 삶을 포기한 비구와 비구니가 깨달음의 길을 걷는 데 성적인 문제가 어느 정도까지 금기(禁忌)되는지는 바라이 제1조를 처음 정할 때 수딘나(Sudinna)에게 하신 부처님의 말씀으로 판단할 수 있다.


“어리석은 이여, 그대의 남근을 여인에게 집어넣는 것보다 차라리 무서운 독사의 아가리 속에 집어넣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어리석은 이여, 그대의 남근을 여인에게 집어넣는 것보다 차라리 검은 뱀의 아가리 속에 … 활활 타오르는 … 숯가마에 집어넣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바탕으로 보면 범행(梵行)의 핵심은 금욕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증지부 《메투나경(Methuna Sutta)》에서 생루(生漏, Janussoni) 바라문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나 바라문이 완벽한 범행(梵行)을 닦고 있노라고 한다면 여인과 음행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범행을 확신하기에는 부족하다. 만일 여인을 시켜 향유와 향수로 자신의 몸을 문지르게 하고 목욕시키게 하고 머리를 감게 하며 이 일을 즐기거나 그리워한다면, 만일 여인과 함께 유희를 보며 웃거나 즐긴다면, 만일 여인의 눈을 들여다보고 쳐다보며 그 여인도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란다면, 만일 벽이나 담을 통해 여인이 웃고 말하고 노래하고 우는 소리를 듣는다면, 만일 예전에 여인과 웃고 말하고 함께 유희한 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만일 여인이 그의 남편이나 아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며 다섯 가지 욕락에 빠진다면, 만일 천상 세계에 나려고 범행을 닦는다면, 그런 범행은 무너지지 않고 중단되지 않으며 변하지 않고 불순하지 않으며 완전하고 청정한 범행이라고 할 수 없다.”


위의 경문을 보면 비구나 비구니라도 깨달음을 향한 수행에서 음행을 금욕하는 일이 본질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모한 위제라트네(Mohan Wijeratne)는 《비구니 승가(Buddhist Nuns)》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불교의 교리나 계율, 그 어디에서도 영원히 순결을 지키는 일을 숭상한다거나, 그런 식의 육체적 성스러움이나 승려의 금욕이라는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더욱이 부처님은 종교적 의례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음행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종교적 정화(淨化)를 얻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인간의 육체에 일종의 정신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불교에서 낯선 일이었다. … 금욕에 대해서 비구니들은 ‘신격화된 배우자에게 자신의 삶을 모두 바친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고 정신적인 결혼에 얽매이지도 않았다는 사실 또한 분명히 알아야 한다.”


결혼한 여성은 남편과 부모의 하락만 있으면 12세에 비구니 승가에 들어올 수 있다(바일제 제65조와 제80조). 하지만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경우는 20세가 되기 전에는 승가에 들어올 수 없다(바일제 제71조). 이러한 규정들은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게는 앞으로 결혼 생활을 할 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숙고의 시간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결혼한 여성의 경우에는 이 조목이 결혼 제도를 보호하는 데도 기여를 한다. 그러므로 진리의 길을 가는 데 도움이 되는 마음을 다지게 하기 위한 목적과, 비구와 비구니 승가를 지키고 유지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러한 계 조목들이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금욕을 극심하게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불교 철학 안에는 금욕과 결부된 신성불가침한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3. 성과를 얻은 여성 재가 제자의 수행에서의 금욕의 역할


재가 제자인 녹주(鹿住, Migasala) 우바이가 아난다 장로에게 여래께서 설법하신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물은 적이 있다. 여기에서의 설법은 청정한 범행을 닦으며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비슷한 내생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보인다.


“존자시여, 제 아버지 푸라나(Purana, 富蘭那)는 일상적인 세속의 일은 하지 않고 탐욕을 떠난 생활을 하며 청정한 범행을 닦고 살았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셨을 때 세존께서는 일래과(一來果)를 얻어 도솔천에 머문다고 하셨습니다. 존자시여, 제 숙부 이시닷타(Isidatta, 梨師達多)는 청정한 범행을 닦지 않고 아내와의 생활을 즐기며 사셨습니다. 하지만 숙부가 돌아가시자 세존께서는 숙부 역시 일래과를 얻어 도솔천에 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이 설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아난다 장로는 이 일을 부처님께 말씀드리고 설명을 부탁하였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다른 사람이 얻은 과보를 판단하려는 녹주 우바이의 노력에 대해 매우 강력하게 입장을 밝힌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으로 가는 길은 1) 예류과(豫流果, Sotapatti-Phala), 2) 일래과(一來果, Sakadagami-Phala), 3) 불환과(不還果, Anagami-Phala), 4) 아라한과(阿羅漢果, Arahatta-Phala, 즉 열반)의 네 가지로 구분된다. 이것은 마음의 진척에 따른 순차적인 단계이다. 이 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금욕 자체는 이 길을 걷는 데 필요한 정신적 발달 성과를 얻기 위한 요소가 아닐 뿐만 아니라, ‘아내와의 생활을 즐긴’ 사람이나 금욕 생활을 닦은 사람이나 모두 같은 성과를 얻기 때문에 적어도 열반을 얻는 세 번째 단계까지만 보면 깨달음의 전제 조건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세 번째 단계인 불환과에서는 모든 육체적인 즐거움이 사라져 출가한 사람이든 아니든 자연스럽게 금욕 생활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경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깨달음을 얻기 위해 금욕 생활을 결정한 부처님 제자들의 삶을 검토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 수행의 결과를 얻은 제자로 기록되어 있는 대부분의 경우는 금욕 생활을 하도록 되어 있는 비구와 비구니이다. 이들에게 금욕은 전제 조건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수행과 결과에 금욕이 어느 정도로 효과가 있었는지를 외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따라서 깨달음이라는 목적에 금욕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는지는 자유롭게 금욕 생활을 하지 않는 재가 제자들의 삶에서만 검토할 수 있는 것이다. 아래에서 몇 가지 예를 보기로 한다.


1) 7세에 예류과를 얻은 비사카(Visakha, 최고의 여성 재가 제자)

비사카는 15세 혹은 16세에 결혼하였다. … 후에 아들 열 명과 딸 열 명을 두었으며 이들 모두 같은 수의 자식을 두어 4대가 이어졌다. 비사카는 놀랍게도 120세까지 살았다. … 코끼리처럼 강건하여 하루 종일 싫증내지 않고 일하며 대가족을 돌보았다. 틈만 나면 스님들께 매일 공양하고 사원을 찾았으며 음식·옷·거처·침구·약이 모자라는 스님이 없는지 살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반복해서 설법을 들었다. … 설법을 들으러 갈 때에도 값비싼 결혼 예물을 하고 갔다. … 부처님께서 승가를 후원하는 여성 재가자 중에 최고라는 평가를 하였다.


그러므로 7세의 나이에 깨달음의 첫 단계에 도달하고 나서 결혼하고 아들 딸 10명을 낳을 정도로 육체적인 쾌락을 누리고 살았다. 비사카는 분명히 금욕 생활을 하지 않았다. 일래과를 얻으면 일곱 번의 생 이내에 열반을 얻는 것이 보장되며 아래 단계로 떨어지는 법이 없다. 확실하게 열반의 ‘흐름’에 들어간 것이다. 이 곳에서 더 나아가 최종 목적을 향해 계속 전진하면 최종 목적에 도달하는 데에는 얼마나 수행에 전념하는가에 따른 시간만이 관건이 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첫 단계를 얻은 비사카는 최고의 여성 재가 제자인 만큼 부처님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최종 목적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지, 그녀의 수행에서 금욕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2) 나쿨라 부부, 나쿨라피타(Nakulapita)와 나쿨라마타(Nakulamata)는 부처님이 중요한 재가 제자로 평가한 사람들로서 문헌에서는 서로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팔리어 경전에서는 부부 모두가 세존을 향한 신뢰를 바탕으로 절대적인 믿음에서 생겨난 신성한 수준의 부부애를 지니고 있다며 둘 사이의 관계를 모범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노부부가 부처님을 만났을 때, 부부는 어린 나이에 결혼했지만 평생 단 한 번도 신의를 저버린 적이 없으며 마음으로나 실제로나 외로운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한 순간도 서로에게 정절을 지키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서로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 속에서 부부는 다음 생에도 함께 태어나기를 바란다며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부처님에게 묻고 그에 따른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남편 나쿨라피타가 심한 병을 앓을 때 나쿨라마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 혼자 남겨 둔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아요. 그렇게 세상을 떠나는 것은 괴로운 일이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그러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 내가 베 짜는 재주가 있으니 아이들은 키울 수 있을 거예요. 당신과 16년을 정결하게 살았으니 남편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거예요. 부처님과 스님들 뵙는 일도 그만두지 않고, 오히려 전보다 더 자주 찾아뵐께요. 내가 벌써 수행의 덕 속에 굳게 머물러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잖아요. 그리고 결국 진리 속에서 확고한 자리를 찾았으니 마지막 해탈을 꼭 얻게 될 거예요.”


나쿨라마타의 말을 통해서 서로를 행한 부부애가 흠잡을 데 없고 결혼 생활을 통해 아이도 얻었지만 16년 동안 금욕 생활(gahatthakan brahmacariyan samacinnam)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내가 벌써 수행의 덕 속에 굳게 머물러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잖아요. 그리고 결국 진리 속에서 확고한 자리를 찾았으니 마지막 해탈을 꼭 얻게 될 거예요”라는 말은 나쿨라마타가 예류과를 얻었음을 알게 한다. 부부가 너무나도 사랑하고 내생에도 다시 만나기를 바랄 만큼 서로에게 애착이 있지만 정신적인 성과를 얻으면 금욕 생활로 이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 케마(Khema)는 이미 예류과를 얻은 빔비사라 왕의 아름다운 왕비였다. 왕이 부처님의 든든한 후원자였기 때문에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왕에게 많이 들었으면서도 부처님이 아름다움과 육신의 쾌락의 허무함을 설법한다는 말을 듣고는 부처님을 만나 보려고 하지 않았다. 왕이 가까스로 설득해서 부처님 계신 곳으로 데리고 가게 되었다. 비단과 백단으로 된 황실 옷을 입고 간 왕비는 조금씩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법당으로 관심이 끌렸다. 왕비의 마음을 읽은 부처님은 신통력으로 왕비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을 만들어 설법하는 동안 부처님 뒤에서 부채질을 하게 했다.


왕비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부처님은 그 여인의 젊은 모습에서 중년, 다시 치아는 다 빠지고 백발은 성성하고 피부에 주름이 잡힌 노인의 모습이었다가 목숨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차례로 바꾸어 보여주었다. 아름다움의 허망함을 깨닫게 하신 부처님은 왕비가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에 도달했다는 게송을 주었다. 부처님은 설법을 계속하여 왕비가 황실 옷을 입은 그대로 아라한과를 얻었다는 말로 설법을 마무리하였다. 왕비는 왕의 허락을 얻어 비구니 승가에 들어갔다. 나중에는 비구니 승가에서 가장 뛰어난 두 비구니의 한 명으로 부처님께 인정받았다.


이 이야기를 보면 이 일이 있을 당시 왕비나 이미 예류과를 얻었던 왕 모두가 육체적인 쾌락을 누리고 살았다. 왕비가 아라한과를 얻었을 때에도 깨달음을 휘한 수행의 한 부분으로서 금욕 생활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한 깨달음을 얻자 자연스럽게 세속 생활을 포기하였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도 금욕은 깨달음을 위한 수행에 전혀 역할을 하지 않았다.


이상의 이야기들은 물론, 팔리어 문헌에 전해지는 부처님 제자들이 깨달은 이야기를 살펴보면, 금욕이란 것이 깨달음에 어느 정도로 역할을 하는지를 결정적으로 단언하기는 어렵다.


4. 현장 조사 연구 결과


필자는 최근 상좌부 불교의 ‘깨달음’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며 현장 조사를 진행했다.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했다고 여겨지는 비구·비구니·재가 남녀 등 현재의 상좌부 명상 수행자들과 한 인터뷰를 한 결과 예류과(깨달음의 제1단계)를 얻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완전무결하게 청정한’ 금욕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애욕에 빠지지 말라는 등의 정해진 계율만을 지키는 재가인도 있었으며,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게 한’ 종교 체험을 하기 전에는,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는 세 번째 계율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규정들을 무시하고 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스리랑카 숲 속에 아주 잘 지어진 사원의 주지 소임을 보는 올해 54세, 법랍 27세의 어느 스님은 수행의 길을 걸으면서 처음으로 겪었던 의미 깊은 종교 체험의 충격을, 되돌릴 수 없는 도덕성의 변화였다고 말하였다. 계율을 비웃으며 계를 지키고 사는 사람들을 우습게 보던 스님은 계율의 힘을 깨닫고 나서 계율을 잘 지키고 존중하게 되었으며 다른 이들에게도 계율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한다.


“… 처음으로 계율의 힘을 알게 된 겁니다. 계율이란 그저 감옥에 가두어 두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항상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계율이 이제 제 인생의 유일한 목표가 되어 버렸죠. … 계율 같은 게 뭐냐고 이죽거리고 조롱하던 제가 청정한 생활을 존중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계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하게 된 겁니다. 그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제 도덕성에 변화가 온 거였죠. …

한참 후에 제 자신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살생할 수 있을까, 도둑질할 수 있을까, 음행을 저지를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행동을 접하면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낼 수 있을까? … 이런 체험을 하기 전에는 욕망이라는 것을 규명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욕망에 대한 모든 것을 경험할 필요가 있겠다는 잘못된 생각을 한 겁니다.

미움에 대해서도 속이는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생각을 했어요. 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제대로 보려고 살아 있는 것들을 잘라보기도 하고, 철통같이 경계가 삼엄함 곳에서 훔치기도 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중독성 약물을 맛보기도 했지요. 속이는 일도, 기왕 하는 거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속이자 한 거죠. 이런 일들을 시도해보는 것마다 거의 성공한 거예요. 하지만 얻은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쪽 길로 들어섰더니 전혀 반대의 일이 생긴 겁니다. 욕망이니 미움이니 하는 것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어요. 아예 생각하기도 싫은 겁니다.”


스님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Buddha Sasana)에 엄청난 신세를 졌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무조건 진리의 가르침을 섬기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고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출가를 했다.


앞에서 언급한 최신 현장 조사에서, 수행 중에 의미 있는 종교 체험에 대해 필자와 인터뷰한 기혼 여성 세 명 중에서 두 명이 예류과를 얻었을 당시, 남편과 가족과 함께 정상적인 재가인의 삶을 살고 있었고 재가 제자에게 주어지는 최소한의 계율인 5계를 지키며 살았다. 그러나 10년~20년 동안 수행을 계속해 오던 이들은 결국 종교 체험 이후로는 몇 년 동안 줄곧 수행에 매진하여 재가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금욕 등 더 높은 수준의 청정행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부부관계를 하지 않은 것만 제외하면 다른 모든 면에서는 ‘정상적’이고 완벽한 재가인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이하는 해당 현장 조사의 개요이다.


1) 사례 1

두 아이를 둔 66세의 주부는 30년 전 어느 명상 센터에서 안거하는 중에 최초의 뜻깊은 종교 체험(예류과)을 했다. 종교 체험을 할 무렵은 정식 명상 센터에 있었기 때문에 8재계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는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책임을 다하며 완벽히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하였으며 보통의 계인 5계를 지키고 있었다. 모든 면에서 아내와 어머니의 책임을 다하면서도 종교 체험 후 ‘4, 5년’이 지나자 ‘높은 단계의 계’를 지키며 금욕 생활을 시작했다. 8재계 전체(향수나 보석 등을 하지 않는다, 점심 이후로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않는다 등이 8재계에 들어 있다)를 지킨 것은 아니지만 부부 관계를 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이 문제 때문에 처음에는 남편과의 사이에 긴장이 있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해해주었다. 요즘은 더 높은 단계의 성과를 고대하며 조화로운 결혼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2) 사례 2

두 아이를 둔 엄마인 56세의 교사는 19년 전에 최초의 뜻깊은 종교 체험을 하였다. 그는 집에서 최초의 체험(예류과로 묘사하였다)을 하였다. 집안일을 잘 해내서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하고 있었지만 이 무렵에는 ‘5계보다는 높은 수준의 계’를 지키고 있었다. 이 체험을 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다른 모든 면에서는 정상적인 재가 생활을 하면서도, 부부 관계를 금지할 뿐만 아니라 점심 이후에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는 등 많은 육체적 쾌락을 금지하는 8재계를 지키고 있다. 종교 체험을 했을 때 이미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나빠져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도 남편과는 ‘함께 살지’는 않지만 같은 지붕 아래 살면서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3) 사례 3

상업 지구의 고위 관리인 40대 초반의 기혼 여성은 11년 전에 최초의 뜻깊은 종교 체험(예류과)을 했다. 집에서 이 체험을 했는데 5계를 지키면서 완전히 정상적인 재가인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체험 후 4년이 지날 무렵 자연스럽게 남편과의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지금은 8재계 전체를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금욕 생활을 하고 있다. 불교를 이해하고 있는 남편과의 조화로운 사이에 금욕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열반을 얻으려고 꾸준히 노력하면서도 자신의 경력을 추구하는 등 다른 모든 면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재가인의 삶을 계속하고 있다.


위의 사례들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조사 대상 수행자들이 성적으로 왕성한 젊은 나이이면서도 금욕 생활을 택한다는 점이다. 필자가 인터뷰한 예류과를 얻은 남성 재가인들의 경우는 최초의 체험을 하고 몇 년 후에 결국 완전한 금욕 생활을 위해 출가를 하였다.


4. 결론


이상의 재가인들의 삶을 살펴보면 금욕이 깨달음의 전제 조건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또한 깨달음을 얻는 데 금욕 생활이 얼마나 기여하는지도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계율이라는 형태로 비구와 비구니 승가에 극도의 금욕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에서 금욕의 역할은 평가절하될 수는 없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계율을 제정하셨다.


1) 승가의 청정을 위하여

2) 승가의 안주(安住)를 위하여

3)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을 멀리 하기 위하여

4) 선(善) 비구들의 안주를 위하여

5) 현세의 번뇌를 끊기 위하여

6) 내세의 번뇌를 미리 끊기 위하여

7) 새로운 사람들을 귀의시키기 위하여

8) 이미 귀의한 사람들의 신심을 증장시키기 위하여

9) 정법이 오래도록 안정되게 머물게 하기 위하여

10) 계율을 소중히 하기 위하여


그러므로 계율은 단순히 깨달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의 단체로서의 승가를 생생하게 유지시키려는 복합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비구와 비구니에게 주어지는 금욕의 계율 역시 단순히 깨달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길을 걷는 과정에서 육체적 쾌락과 마음과 육신의 본질을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금욕 생활의 과정을 겪게 된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일찍 그런 마음 상태에 도달한다. 최후의 어느 순간에 세 번째 단계인 아나함과를 얻으면 완전한 금욕으로 전환한다. 아잔 브라흐마밤소(Ajahn Brahmavamso)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적 욕망을 완전히 초월하였기 때문에 성에 대한 열망에 불을 붙일 불씨가 남아 있지 않다. 모든 아라한은 ‘성적 능력이 있는 성 무능자이다.’”


출처 http://budreview.com/

출처 : 여여불여 如如不如
글쓴이 : slowdrea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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