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장. 구하면 얻을 것이요, 죄 또한 없애주니>
道者萬物之奧 善人之寶 不善人之所保 美言可以市 尊行可以加人 人之不善 何棄之有 故立天子 置三公 雖有拱璧以先駟馬 不如坐進此道 古之所以貴此道者何 不曰以求得 有罪以免耶 故爲天下貴
道는 만물이 깊이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선한 사람의 보배요, 선하지 않은 사람도 지니고 있다. 아름다운 말은 널리 퍼지고, 좋은 행위는 사람들이 본을 받는다. 그러나 사람이 선하지 않다 하더라도 버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늘이) 천자를 세우고 삼공을 임명할 때, 마차를 앞세우고 귀한 옥구슬을 바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릎을 꿇고 道를 바치는 것이 훨씬 낫다. 옛사람들이 이 道를 귀히 여긴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구하면 얻을 것이고, 죄를 지어도 면해 준다 하지 않았던가. 그런 까닭에 천하에 귀한 것이다.
道者萬物之奧 善人之寶 不善人之所保 美言可以市 尊行可以加人 人之不善 何棄之有(도자만물지오 선인지보 불선인지소보 미언가이시 존행가이가인 인지불선 하기지유)
시비와 분별로 얼룩진 유위의 세계에서는 선한 사람과 선하지 않은 사람의 가치가 뚜렷하게 나누어지지만, 무위의 세계에서는 서로 동등한 가치를 지닌 상대적 존재로서 인정한다. 유위의 삶에서는 선과 불선을 가늠하는 잣대가 절대적으로 유효하지만, 무위의 삶에서는 그러한 잣대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모두가 각자의 잣대를 지니고 있을 따름이다. 달리 말하면 모두가 세계의 중심인 것이다. 이는 선, 불선 둘 모두 道의 자식인 까닭에서이다. 장자는 “말은 풍파(風波)요, 행위는 득실(得失)이다”라며 비웃었지만, ‘아름다운 말과 좋은 행위’는 시장에서 물건 팔리듯 널리 팔려나가고, 또한 사람들이 앞다퉈 본을 받으려 애쓴다. 이는 선과 불선 사이에 뛰어넘지 못할 경계를 그어놓고 일방향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과 불선에 90%, 80% 등의 위계를 설정해서 계급질서를 튼튼하게 하는 데 활용한다. 말하자면 100%의 완벽한 선은 하늘과 동급인 지배자의 몫이며, 그 밑으로 귀족ㆍ성직자ㆍ지식인 등 권력의 정도에 따라 지배계급 모두에게 제각기 자리가 정해지고, 불선 또한 직분과 신분에 따라 피지배계급 모두에게 적절히 배분된다. 이러한 절대적 중심을 설정하고 그 거리에 따라 위계와 질서를 배분하는 ‘정도의 철학’은 통치권력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의 道는 이러한 통속적인 위계와 질서, 관념을 뒤집는다. 선이라 해서 챙기고, 불선이라 해서 버리지 않는다. 선은 불선으로 인해 존재하며, 불선은 선으로 인해 존재한다. 절대적 선도 불선도 없는 까닭에 선이 곧 불선이 되고, 불선 또한 곧 선이 된다. 2장에서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여기는 것은 이미 추함이 있기 때문이며, 착함을 착함으로 여기는 것 또한 착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無와 有는 서로의 관계에서 비롯하며, 어렵고 쉬움도 서로의 관계에서 생기며, 길고 짧음도 서로 비교되는 것이며, 높고 낮음도 서로 기울어지는 것이며, 노랫가락과 목소리도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도 서로 따르는 것이다”라 했고, 27장에서도“선한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며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한 사람의 바탕이다”라 했다.
故立天子 置三公 雖有拱璧以先駟馬 不如坐進此道 古之所以貴此道者何 不曰以求得 有罪以免耶 故爲天下貴(고립천자 치삼공 수유공벽이선필마 불여좌진차도 고지소이귀차도자하 불왈이구득 유죄이면야 고위천하귀)
‘삼공’은 천자에 버금가는 강력한 권한을 지닌 관직으로 공식 명칭은 후한 때라는 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62장은 춘추전국시대보다는 한참 후에 첨가한 것으로 여겨진다. ‘마차를 앞세우고 귀한 옥구슬을 바치는 것’은 지배자에 영합하는 속된 무리들 즉 유위의 처세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진정 백성과 나라를 아끼는 조언을 해야 한다면 세상사람들의 눈에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무위의 道를 권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하면 얻을 것이다’는 道는 구하는 사람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깨달음은 대학입학시험이나 운전면허시험 같은 차별적 관문이 아니다. <열반경>에서 부처가 “一切衆生悉有佛性(모든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라 말씀했는데, 이는 불성의 절대평등론을 선언한 것이다.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모두가 부처인 것이다. 다만 욕망와 무지, 번뇌로 인해 지혜작용이 막혀 자각하지 못할 따름인 것이다. ‘죄를 지어도 면해 준다’는 얘기는, 道를 깨달으면 이분법적인 대립의 분별지를 벗어버리게 되므로, 죄의 실상에 대해서 뚜렷하게 인식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절에서 예불시에 독송하는 <천수경(千手經)>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罪無自性從心起 죄는 본성이 없으나 마음 좇아 일어나네
心若滅是罪亦亡 마음이 쉬면 죄 역시 사라지고
罪亡心滅兩俱空 죄와 마음 함께 공하면
是則名爲眞懺悔 이를 진실한 참회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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