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온신(五蘊身)과 법성신(法性身)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반야심경에 ‘조견오온개공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오온이라는 것은 다섯 ‘오(五)’와 쌓을 ‘온(蘊)’자 인데, 다섯 가지가 쌓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몸을 일컫는다.
그래서 오온신이라 하기도 한다.
다섯 가지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하는데, 색(色)이란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무게가 있는 것 등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을 말 한다. 뼈는 땅(地)과 같은 것이고, 혈액은 물(水)이며, 체온은 화(火)이며, 숨을 쉬는 것을
풍(風)이라 한다. 수상행식이라는 것은 느낌, 상상, 행동, 인식을 말하는데 늘 나타나고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이름은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 하여 명색신(名色身)이라고도 한다. 명(名)은 수상행식(受想行識)이요 색(色)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이다. 수상행식(受想行識)의 넷에
색(色)을 더한 다섯이 모여서 우리의 몸이 되었다 하여 오온신(五蘊身)이라 하는 것이다.
오온신을 이야기 할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숨을 쉬는 풍이다. 부처님께서도 “생명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고 하셨다. 숨을 쉰다는 것이 바로
생명이다. 그래서 살았다는 것은 숨이 시작되는 것이고, 죽었다는 것은 숨이 끝나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는 숨을 쉬고
쉬지 않는 것의 차이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도 목에 숨이 있으면 ‘목숨이 있다’ 즉 살아있다고 하고, 목에 숨이 없으면 ‘목숨이 끊어졌다’
등으로 표현한다.
숨 한번을 쉬는 사이에서도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있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이 있음을 다 느낄 수 있다 한다. 숨을 쉬다
보면 촉촉한 기운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이 물(水)이고, 숨과 숨 사이에 조용히 가라앉는 약간의 공백이 땅이며(地), 숨 속의 훈훈한 열이
화(火)이며, 공기가 들락거리는 것이 바람(風)이다. 그러므로 숨 속에 지수화풍이 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숨을 쉬는 것을 느끼는 것이
수(受)이고, 숨을 쉬면서 어떤 상상하는 것이 상(想)이고, 그리고 숨쉬는 행위를 하는 것이 행(行)이며, 숨쉬는 것을 아는 것이 식(識)이다.
역시 숨 속에 수상행식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일생의 전부이다. 천년을 살아도 숨이고 백년을 살아도 숨이다. 일생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싶다면 숨을 자세히 들이쉬었다가 자세히 내쉬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몸이 오온신이라 하는데, 이 오온신은 감각에 근본을 두고
있다. 그래서 감각신(感覺身)이라고도 하는데, 감각이 있으면 살았다 하고 감각이 없으면 죽었다고 한다. 느낌, 인식, 생각, 판단 이러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천수경에 보면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이라는 구절이 있다.
법성신(法性身)은 앞서의 오온처럼 눈에 보이고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각으로 느낄 수 있는 몸이다. 그래서 지각신(知覺身)이라고도 한다.
법성신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원적(圓寂)이다. 또한 법성신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 법성게(法性偈)이며,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 법성도(法性圖)이다. 법성게는
‘법성원륭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으로 시작하는데 법성원륭무이상의 원과 제법부동본래적의 적을 따서 원적(圓寂)이라
하는 것이다.
법성원륭무이상의 원륭(圓融)이란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이고,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이라는 것은 모자라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원적이라는 것은 끝이 없이 모자람이 없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법성신은 원적신(圓寂身)이라고도 말한다.
그렇다면
원적신과 오온신은 어떻게 다른가?
감각으로써 느끼면 내 몸이고, 지각으로써 느끼면 법성이라는 것이다. 나의 몸을 떠나서 법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세계로 자세히 느껴보면 오온신이 바로 법성신이다.
법성게에 보면 ‘일즉일체 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라 일미진중에
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는 구절이 있다. 오온신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부가 다른 곳으로부터 온 것이다. 물도 그렇고 음식이며, 햇빛, 공기 등
이 세상에 끊임없이 연결되어서 통하지 않는 곳이 없이 퍼져나간 것이 이 몸인 것이다. 그래서 이 몸은 이 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법계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일미진중에 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다.
이러한 세계로 보아서 일 찰라가 바로
끊임없이 많은 세월이라는 것을 지혜로 느끼는 몸이 법성신이며 원적이다. 우리는 죽음을 원적이라 하는데, 죽음은 끊임없이 부족함이 없는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몸은 감각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지만 법성신은 지혜로써만 느낄 수 있다. 감각이 더 깊어지면 지혜가 생기게
된다. 감각이라는 것은 흙탕물과 같은 것이고 지혜라는 것은 청정수(淸淨水)와 같은 것이다. 흙탕물에서는 있어도 보이지 않지만 청정수에서는 명확히
보인다. 흙탕물은 번뇌인데 감각을 중심으로 많은 근심 걱정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그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번뇌망상이
없는 상태에서 깨달음을 이루셨는데, 깨달음과 동시에 지혜가 생기게 된다. 이것이 지각이다. 지각을 이야기한 중요한 내용이 화엄경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의 첫머리에 나오는데, 법성신의 엄청나게 황홀한 세계를 이야기 하고 있다.
법성신을 깨달은 몸을 불신이라 하는데,
오온신만 알고 불신을 모르는 데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청나게 다가오는 것이다. 법성신과 하나가 될 때에 모든 근심걱정이 소멸되는 것이다.
그래서 천수경에서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이라 기원하는 것이다. 온 우주에 가득한 법성신과 나의 몸이 하나가 되면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다.
철학적으로도 ‘나의 세계를 어디까지 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세계를 나의 몸으로만 본다면 주위를 청소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어릴 때에는 자아가 자신의 몸 정도로 형성되지만 자라나면서 자신의 방으로 또 어른이 되어서는 가족으로 또 더 나아가서는 민족 으로
등 점점 더 넓게 형성되어진다. 자신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폭이 점점 넓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세계를
일체중생으로 확대해서 보시는 것이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가 바로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온 하늘이 자신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하늘이 자신의 세계가 되는 것이고, 공기가 자신의 세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공기도 자신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자신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도 하는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세계를 어느 정도까지 보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마다 다른데 그 사람의 지각에 따라서 그 세계가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한다. 그런데 몸은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몸은 온전히 자신의 세계이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위해서는 아무리 투자를 해도 아깝지 않게 생각을 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통해서 법성신의 세계를 느끼고 보니까 부처님의 몸이 퍼지지 않는 곳이 없음을 보시게 된 것이다. 이것이 불신에 대한
신앙이다.
제사를 지낼 때에도 늘 하는 게송인 천수경도 법성게도 시식도 모두 하나같이 바로 알면 바로 깨닫는 내용들인데 외우기만 하고 그냥
넘어가버리니 깨달음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읊으신 게송이 있다.
불신이
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
보현일체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이라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나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라
부처님의 몸이 온 우주법계에 충만해서 일체중생 앞에 널리 나타났다. 인연 따라서 다 감응을 하고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으나 늘 보리좌에 앉아계신다. 라는 뜻이다.
부처님께서는 온 우주속에 다 나타나시지만 늘 보리좌에 앉아
계신다. 깨달음이 있으면 앉는 곳 마다 보리좌인 것이다. 이것이 법성신이다. 상즉상입(相卽相入) 즉 서로 연결되어있어 서로 들어가고 들어오는
것이 법성신인 것이다. 이러한 세계를 지혜로 느낄 때에 편안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감각신 오온신만 있는 것이다.
무상게(無相偈)에서는 오온을 다음과 같이 말하며 무상하다고 하였다.
‘머리카락. 손톱.이빨 그리고 가죽. 살. 힘줄. 뼈 같은
육신은 다 흙으로 돌아가고, 침과 콧물. 고름. 피 진액. 가래. 눈물. 원기와 오줌 같은 것 들은 다 물로 돌아가고, 몸의 더운 기운은 불로
돌아가고, 활동하던 기운은 바람으로 변하여, 네 가지 요소가 다 각각 지. 수. 화. 풍으로 흩어져 제자리로 돌아가는 법이니 오늘날 영가의
돌아가신 몸이 어디 있다고 하리오.‘
이것이 바로 오온신인데, 오온신은 명색신이고 명색신은 감각신인 동시에 무상신이다. 항상함이 없고 순간
순간 달라지는 몸이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은 우리의 몸 속에서 금방 소멸된다. 몸도 오늘 먹었던 음식으로 오늘의 몸이
이루어지고, 내일 먹을 음식으로 내일의 몸이 이루어지면 오늘의 몸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감각으로는 느끼지 못할 뿐이다. 실제로 어제의 몸과
오늘의 몸은 다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의 몸은 변화한다. 몇 십년 전의 사람과 지금의 사람은 다르다고 하지는 않지만 그 몸은 수없이
바뀐 것이다. 시시각각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아를 이 몸에 한한다면 바뀌어가는 것이 불안하고 허망해서 견딜 수 없다.
그러므로
감각신(感覺身)에서 지각신(知覺身)으로 자신의 세계를 점점 넓혀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법성신을 깨달으면 하나의 티끌 속에서 온갖 것을 다
느낄 수 있고, 또 이 몸이 단지 몸뚱이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햇빛, 공기, 물 등으로부터 왔으며, 다시 그러한 법성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되면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이 몸이 모였다 해서 이익 볼 것이 없고 이 몸이 흩어졌다 해서 손해 볼 것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법성신이다.
감각의 오온신을 얼음에 비유하고 법성신을 물에 비유한다면, 얼음이 얼었다 해서 이익 본 것이 없고 얼음이 녹아 물이
되었다 해서 손해 볼 것이 무엇이 있는가. 얼음 자체가 물이고 얼음이 녹아도 본래 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물이 얼어
얼음이 되어도 생겨난 것이 아니고, 얼음이 녹아 물이 되어도 없어진 것이 아니다.
법성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신심이고 서원이다.
부처님께서는 법성신을 깨달으셨기 때문에 죽음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셨던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으며 오면 맞이하고 안
오면 그것으로 족해서 생각할 것이 없는 것이다.
‘불애생사(不愛生死) 불염생사(不厭生死)’ 즉 생사를 싫어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법성신을 깨달은 분의 생사관이다. 자아관이 넓은 불보살님들의 세계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법성신을 깨달을 수 있을까.
공덕을 많이 지어야 한다. 그것이 공덕신이다. 공덕을 짓는 데는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힘도 공덕이요, 공양을 하는 것도 공덕이요, 일체
선행을 하는 것이 모두 공덕신이다. 이것이 불교식으로 수행을 통해서 하는 공덕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도 공덕이 있다. 현재까지 인류가
깨달은 가치 중에 제일 중요한 가치가 자유이다. ‘자유는 생명이다’고 하여 생명이 있어도 자유가 없다면 생명이 아니라고 하였고, 또 ‘자유는
공기와 같다’ 하여 자유가 없으면 숨을 쉬어도 숨을 쉬는 것이 아리라 하였고, ‘자유는 행복이다’ 하여 자유가 없는 행복은 행복이 아니라
하였다.
이러한 자유를 제대로 키워가려면 여러 가지 기본 여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첫째로 법치주의(法治主義)가 형성되어야 한다.
법치주의라고 하면 법이 만들어질 때 모두의 자유의지에 의해 만들어 져야 하고, 시행 될 때에도 모두에게 공정하게 시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법치주의의 기본이다. 법이 흔들리면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
두 번째로는 민주주의(民主主義)이다. 사람들의 인권과 의지를 지켜주어야
한다.
세 번째로는 시장주의(市場主義)이다. 시장이라고 하는 것은 필요한 것을 서로 교환하는 곳이다. 그러한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시장주의라고 하는 것은 자유의 경제이고, 민주주의는 자유의 인권이며, 법치주의란 자유의 법률이다. 모든 것이 자유가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자유에 의해서 이루어진
민주주의가 가장 소중한 민주주의 이다.
우리나라도 요즘 자유주의라는 말들을 많이 사용하고있다. 나이는 30대이고, 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60년대에 태어났다고 하여 386세대라고 불리우며 민주주의를 외치던 이들이 지금은 40대가 되어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을 자유주의 486이라 부른다.
그러한 자유주의 사상이 바로 불교사상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출가하고 수도하신 것들이 자유의 의지에
의해서 하신 것이지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닌 것이다.
자유가 잘 살아나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데, 공동체에도 3가지가 있다.
사회공동체, 역사공동체, 자연공동체가 그것이다.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함께 사는 것인데, 사회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서로 도와야
한다. 돕는다는 것이 불교의 나눔인데, 세금을 내는 것도 나눔의 일종이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것은 자비보시를 말하는 것이다. 보시라는 것은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공생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너도 성불하고 나도 성불하자는 공성이다.
공양을 올리거나 회향을 할 때나 보시를 할 때에
다음과 같이 서원을 세운다.
‘원이차공덕(願以此功德) 보급어일체(普及於一切) 아등여중생(我等與衆生) 개공성불도(皆共成佛道): 이 공덕이
모든 이들에게 전해져서 나와 중생이 모두 함께 불도를 이루기를 원하옵니다.’
이것이 보시의 서원인데 바로 공성이다. 나누면 주는 사람도
성불하고 받는 사람도 성불하여 다 공덕의 세계로 성장을 하게 된다.
역사공동체란 역사적으로 좋은 유산을 물려받았으니 또한 이것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좋은 것을 받고 나쁜 것을 물려준다면 역사공동체는 깨어지게 되는 것이다.
자연공동체란 우리는 물 없이 살 수 없고, 공기
없이 살 수 없으며, 동물들 등이 없이 인간만이 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가 공동체를 형성해서 잘 가꾸고 키워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이 몸만 내가 아니라 이 자연도 내가 되고, 역사도 내가 되고, 사회도 내가 되어 점점 자아관이 넓어져서
법성신으로 가는것이다. 이런 것이 수행이요 실천이다.
이러한 불교관과 역사관을 잘 이해해서 나를 너무 좁게 보지 말고 죽음을 겁내거나
싫어하지 말고 항상 편안한 마음으로 공덕을 닦아서 보시도 하고 나눔도 이루고 좋은 풍속을 이어주려고 노력하며 자연도 사랑하고 인간도 사랑해서
아름다운 환경을 가꾸려고 노력하다가 죽음이 오면 얼음이 녹듯 가면 되는 것이다. 또 인연을 따라서 모이이게 되면 모이면 되는 것이다.
열심히 닦아서 좋은 세상을 만들기를 바란다.
여래사법회 http://www.ibuddha.tv/vod/vod_content.asp?pk_idx=90&b_budle=ceremony&page=45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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