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마음을 찾으면
▲ 그림 박구원 |
천만겁 지나도 얻지 못한다
밖으로 찾아 다니는 수행은
당장 무심함만 못하다
한번 눈을 떴더라도
이치를 수용 못하면
갈팡질팡하는 이들도 있다
망념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망념 일으키게 하는
근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망상에 끄달리지 않고
그냥 흘려 보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법[心法]을 전했다는 말을 듣고, 마음 위에 따로 깨닫고 취할 만한 법이 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마음을 가지고 법을 찾으면서, 마음이 곧 법이고 법이 곧 마음인 줄 알지 못한다.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찾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천만 겁이 지나더라도 끝내 얻을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마음인 줄 알면 한결 쉬울 텐데,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니 자기도 모르게 찾고 구하게 된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 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갈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른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다.’는 말을 아무리 배워도, 실제로 깨닫지 못하면 헤맬 수밖에 없다.
당장 무심함만 못하니, 무심이 곧 본래의 법[本法]이다. 마치 힘센 장사가 자기 이마에 보배구슬이 있는 줄 모르고 밖으로 찾아 온 시방세계를 두루 다니며 찾아도 끝내 얻지 못하다가, 지혜로운 이가 그것을 지적해주면 본래부터 구슬이 있었음을 바로 알아보는 것과 같다. 도를 배우는 사람도 자기 본심에 미혹하여 그것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밖으로 찾아다니면서 수행을 하며 차제를 밟아서 깨달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억겁동안 애써 구한다 해도 영원히 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당장 무심함만 못하다.
소승은 중생 근기를 봐서 차제법문을 설했지만, 대승과 최상승은 차제가 방편인 줄 알아서 본래 무심자리를 그대로 드러낸다. 한 생각에 깨달으면 따로 차제로 찾고 구하는 일 없이 즉시에 성품을 보고 뜻을 이루지만, 그렇지 못한 입장에서는 ‘먼 거리를 가려면 한걸음부터인데, 어찌 한참에 도착한단 말인가?’라고 말한다. ‘가고, 가지 않고’에 관계없이 본래 마음자리를 갖고 쓰고 있지만, 스스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인연으로 그렇게 되었을 뿐임을 알아야 한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깨달음을 통해서 ‘그 자리가 바로 마음자리’라는 사실을 눈뜨게 해주면, 이런 말을 수용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한편 눈을 떴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이치를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공부는 된 것 같은데, 오히려 더 갑갑해졌다며 갈팡질팡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다 보면 공부를 등지고 다른 것을 찾으러 헤매게 된다.
〈대반열반경〉 ‘여래성품’에 이런 우화가 전한다. 어떤 왕실에서 시중들던 힘센 장사[力士]가 미간에 금강석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수시로 다른 장사들과 씨름을 했는데, 어느 날 이마를 부딪쳐 금강석이 피부 속으로 함몰되고 말았다. 자랑스러운 금강석이 보이지 않자, 그는 잃어버린 줄 알고 슬피 울며 사방으로 찾아다녔다. 나중에 현명한 의사를 통해 금강석이 이마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불사의(不思議)한 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이것은 〈능엄경〉에 나오는 유명한 ‘연야달다 고사(故事)’와 같은 뜻이다. 일체 중생이 본래부터 불성을 지니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우화라 하겠다.
일체의 법이 있다 할 것도 없고, 얻었다 할 것도 없음을 결정코 알아야 한다. 의지할 것도, 머무를 것도 없다. 주관이니 객관이니 할 것도 없다. 망념을 일으키지 않으면, 즉시 보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망념이 일어날 때, 거기에 끄달리면 깨달음과는 등지게 된다. 즉시 알아차려서 망념을 일으키게 하는 근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끄달리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알고 보면, 망념을 일으키는 그 자리가 바로 깨닫는 자리다. 이것이 바로 원력바라밀이다. 이런 바라밀을 자기 안에서 활용할 수 있어야 중생계와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지, 스스로도 제도 못하면서 남을 위해서 바라밀을 행한다고 쫓아다니는 것은 쓸데없이 더 많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바라밀행을 하는 것만을 말하자면, 타종교인인들도 잘한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많은 사람들과 이익을 나누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하지만 이러한 바라밀행은 일시적인 편안함만 줄 뿐, 고(苦)의 원인을 알아서 본래부터 망상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편안함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망념을 일으키지 않으면, 바로 보리를 깨닫게 된다.’는 말이 분명 맞는 말이지만, 듣는 입장에 따라서는 혼란스러울 수 있다.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여 믿음을 낸 입장에서는 이 말이 그림자를 쫓아준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망념을 일부러 없애려고 하니 문제다. 망념을 없애고 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망념이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본래 그러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으면, 일어나는 망상에 더 이상 끄달리지 않고 그냥 흘려보낼 수 있다. 확철히 깨친 입장에서는 일으키지 않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쓸어서 자취를 감출 수 있고, 일으키려면 하루 종일 일으켜도 일으키기 이전의 모습을 알고 쓰는 것이기 때문에 일으킨 바가 없는 것이다.
도를 깨닫는 때에 이르러서는, 다만 ‘본래 마음인 부처[本心佛]’를 깨달을 뿐이다. 오랜 세월을 거친 노력은 모두 헛된 수행일 뿐이다. 마치 힘센 장사가 구슬을 얻은 것은 본래부터 이마에 있던 구슬을 얻은 것일 뿐, 밖으로 찾아 다녔던 노력과는 상관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실제로는 얻은 것이 없다.” 다만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되어, 오안(五眼)을 가져다 보이시고, 오어(五語)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 도리는 진실 되어 허망하지 않으니, ‘최고의 진리[第一義諦]’다.
이치를 설파하더라도 아는 사람한테 해야 한다. 모르는 사람한테 말할 경우에는, 상대방이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 게다가 자기식대로 받아들이는 잘못까지 저지르곤 한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공부한 입장에서는, 믿음을 바탕으로 이런 말을 들으면서 마음의 여유를 찾아나간다. 반면 공부한 바가 없는 입장에서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며 궁금증이 하나씩 깨지는 것에서 즐거움을 구할 뿐, 진정한 즐거움은 놓치고 만다.
〈금강경〉의 부처님 말씀에 오안과 오어가 나온다. 오안은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이다. 오어는 진어(眞語), 실어(實語), 여어(如語), 불광어(不?語), 불이어(不異語)다.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2322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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