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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순서[수차중편]
까마라실라 저
양지애 역
인도어로 봐와나끄라마,
티베트어로 곰뻬 림빠[수행의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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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동자께 귀의합니다.
대승 경전의 체계에 따라 입문하는 이들을 위해 수행의 순서를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일체종지를 매우 신속히 성취하기를 바라는 지혜로운 이는
일체종지의 원인과 조건을 갖추기 위해 반드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일체종지가 원인 없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일체종지여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것도 의존하지 않고 발생한다면,
그것이 존재하는 데 장애가 있을 수 없으므로 따라서 모든 것이 일체종지가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든 것이 일체종지가 되지 않는가? 모든 사물은 반드시 원인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간혹 생겨나는 일체종지조차 모든 시간에도 아니며, 모든 장소에서도 아니며, 모든 것으로부터도 아니다. 그러므로 원인과 조건에 의존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원인과 조건들 중에서도 오류가 없고 결핍 없는 것들을 의지해야 한다.
옳지 않은 원인을 되풀이하면 오랜 세월이 지난다 해도 바라는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비유하자면, 뿔에서 우유를 짜는 것과 같다. 원인을 짓지 않으면 결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씨앗이나 다른 조건이 전혀 없다면, 결과물인 새싹은 싹틀 수 없다.
그러므로 결과를 원한다면 오류 없는 원인과 조건 둘 모두에 의존해야 한다.
일체종지라는 궁극의 결과를 얻기 위한 원인과 조건은 무엇인가?
이를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과 같은 격이라 설명 할 수는 없지만 부처님께서
깨달은 이후 제자들에게 설법하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인용해 보리라.
부처님께서 『비로자나현증보리경』에서
“비밀의 주인이시여!
일체종지의 지혜는 자비를 바탕으로 생깁니다.
보리심을 원인으로 생깁니다.
방편으로 완성됩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일체종지를 성취하고자 한다면 자비심, 보리심, 방편 이 세 가지를 닦아야 한다.
<자비심>
자비심으로 넘어가서, 보살들이 모든 중생을 실질적으로 구제하기 위해 반드시 서원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나’라는 견해를 소멸하여 실행하기 매우 어렵고, 지속적으로 긴 시간 동안 갈고 닦아야 하는 복덕과 지혜의 선근 공덕[자량]을 공경으로 일으킨다.
이 수행을 통해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온전히 완성할 것이다. 선근 공덕이 온전히 완성되면, 일체종지를 손에 넣은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종지의 뿌리는 오직 자비심이니, 처음부터 이 수행을 익혀야 한다.
『법집경』에서
“부처님이시여! 보살은 매우 많은 수행법을 익히지 않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보살은 하나의 법을 잘 지니고 완벽하게 익힌다면
그는 부처님의 모든 법을 손에 넣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법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대자비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자리(自利)를 모두 원만하게 구족하시어 대자비를 이미 완성하셨으나
중생을 위해 여전히 중생계에 머물고 계신다.
성문처럼 열반의 마을에 머물며 깊은 적멸에 들지도 않으신다.
중생을 돌보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열반 마을의 적멸을 마치 달아오른 쇠 집으로 여기시어 멀리하신다. 부처님께서 무여열반에 드시는 까닭은 오로지 대자비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자비를 익히도록 한다.
평등심
먼저 평등심을 명상하는 것으로 수행을 시작한다. 모든 중생에 대한 집착이나 분노를 버리는 것을 통해 평등심을 갖추도록 한다. 모든 중생은 행복을 원하고 불행을 원하지 않는다. ‘무시이래의 윤회에서 수백 번 더 내 친지가 아니었던 중생이있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
누군가에게는 집착을 하고, 누군가에게는 화를 낼 근거가 없기 때문에
‘나는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대하리라’는 생각을 내라.
평등수행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시작하여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또 미워하는 적을 대상으로 평등심을 수행하라.
모든 중생을 대상으로 평등심을 수행한 다음에 자애에 대해 수행을 한다.
자애의 물로 내면을 적시어 황금 가득한 대지처럼 가꾸고 자비의 씨앗을 심으면
아주 쉽게 그리고 온전하게도 풍요롭게 자랄 것이다.
그러므로 내면을 자애로써 관조하여자비를 수행하도록 한다.
세 가지 고통 – 고고(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
자비심은 불행한 모든 중생이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삼계의 모든 중생이 세 가지 괴로움을 다양한 모습으로 겪고 있기 때문에
모든 중생의 괴로움에 대해 자비를 수행해야 한다.
고고(苦苦) “지옥 중생들은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다양한 뜨거운 고통의 강물 속에 빠져 있다.”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와 같이 “대부분의 아귀들도 매우 극심한 배고픔과 갈증의 고통의 불길에 휩싸여 참으로 다양한 육체의 고통을 겪는다.”라는 말씀도 하셨다. 축생들은 서로 잡아먹고, 성내고, 죽이고, 해치는 등의 많은 괴로움을 겪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사람들 역시 욕망에 대한 갈망으로 서로를 원망하며 해를 입히고,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추하게 되고, 누추해지는 등 셀 수 없는 고통을 당한다. 탐욕 같은 번뇌로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갖가지 나쁜 생각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다. 무엇이든지 고통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마치 절벽에 서 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뿐이다. 천신도 모두 변질되는 고통[괴고壞苦]을 겪는다. 죽음과 낮은 세계[하계]로의 추락에 대한 두려움이 욕계에 있는 모든 천신들의 마음을 괴롭힌다면 어떻게 편안할 수 있겠는가?
행고(行苦)는 업과 번뇌가 본질적인 원인이다. 이것은 찰나마다 소멸하는 본질을 갖추고 있으며 모든 중생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윤회하는 모든 중생이 이글거리고 있는 고통 속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내가 고통을 원하지 않듯이 다른 모든 중생도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 가엾구나! 내가 사랑하는 중생들이 어떻게 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고 중생의 괴로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라.
삼매에 머물 때에도 일상생활을 영위할 때에도 항상 중생의 괴로움을 가까이 하여
그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수행하도록 하라.
자애관
그 다음 ‘중생은 평등하기에 차별이 없음을 보고 나서 모든 중생은 내 친구다’라고 온전하게 생각하고 상대들을 통해 수행하도록 하라. 친한 사람에 대한 자비의 마음과 무관한 사람에 대한 자비의 마음이 평등할 때 시방의 모든 중생을 대상으로 수행을 한다. 사랑하는 어린 아이가 몹시 힘들어 할 때 함께 고통스러워 하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모든 중생이 괴로움에서 구제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날 때 자비심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를 대자비라 한다.
자애 수행은 친한 사람부터 먼저 시작하는데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자신과 무관한 사람, 나아가 적에게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이 자비 수행을 하고 나면 모든 중생을 실제적으로 돕고자 하는 바람이 저절로 생길 것이다. 뿌리인 자비 수행을 완성했다면 보리심을 수행하도록 한다.
<보리심>
보리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세속과 승의이다.
세속은 자비로써 모든 중생을 실제적으로 구제하기를 서원한 뒤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부처가 되겠다’라는 발원으로 ‘무상정등각을 원하는 첫 번째 마음[원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지계품]에서 설명한 의궤처럼 보살의 계율에 머무는 청정한 [피안을 이룬] 현자로부터 발심하도록 한다.
그와 같이 세속의 보리심을 일으키고 난 후 승의의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하여 노력하도록 한다.
승의의 보리심은 세간에서 벗어나[출세간] 모든 희론을 제거한다. 가장 명확하며, 승의의 경계 대상이며, 흠이 없으며[무구], 흔들림 없고[부동] 바람에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동요가 없는 것이다.
보리심을 성취하는 것은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오랫동안 공경하는 마음으로수행을 한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해심밀경』에서
“미륵이여, 성문 혹은 보살 혹은 여래의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선
법은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결과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선정은 이 그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수행자들은 언제나
항상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의지해야 한다.
『해심밀경』에서
“성문, 보살, 여래의 다양한 삼매 그것은 모두 사마타와 위빠사나
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마타만 수행하는 것은 수행자의 업장을 끊지 못할뿐더러 일시적으로 번뇌를 억누르는 것일 뿐이다.
지혜의 빛이 생기지 않으면 잠재되어 있는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므로 잠재되어 있는 번뇌를 온전히 소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해심밀경』에서
“선정으로 번뇌들을 억누른다. 지혜로써 잠재되어
있는 번뇌를 소멸하게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성현삼매왕경』에서
“삼매를 수습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지각[관념]을 없애지 못
한다. 그것은 번뇌인 까닭에 매우 혼잡하여 마치 [외도의] 우드라까가 삼매를 명
상하는 것과 같다.
만일 법무아를 분별 간택하는 것으로서 각각을 관찰하여 수행
한다면 그것은 열반 과위의 인이 되며 다른 원인은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적정이 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보살장경』에서
“누구라 할지라도 보살장경의 법수(法數)를 듣지 않고 성스런 율장
를 듣지 않고서 오직 삼매에 만족하는 자는 아만 때문에 과도한 교만심[증상만(增
上慢)]에 빠질 것이다.
생노병사와 슬픔과 불행과 괴로움과 근심(팔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육도윤회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며 고통의 더미에서 완전
히 벗어날 수 없으니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
가르침을 듣는 것은 늙고 죽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설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업장을 끊고 완전히 청정한 지혜가 생기기 바란다면
사마타에 머물고 지혜를 익히도록 해야 한다.
『보적경』에서
“율 안에 머물러 삼매를 얻는다. 삼매를 얻고 나서 지혜를 수행한다.
반야로써 청정한 지혜를 성취하고 청정한 지혜로 계율을 완성하는 것이다.”
라고설하셨다.
『수신대승경』에서도
“선남자들이여, 반야에 온전히 머물지 않는다면 보살들이 대승에 믿음을 내고
대승으로 어떻게 나아갈 지 나는 말할 수 없다.
선남자들이여, 이같은 법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보살의 대승을 향한 믿음과 대승으로
나아간 무엇이라 할지라도 전부 산란하지 않은 마음이 법을 바르게 사유한 것으로
부터 생긴 것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설명하셨다.”
(우드라까. 사마타만을 닦았던 외도의 수행자. 오랜 세월 선정에 들어있는 동안 그의 머리카락이 길게 자
랐다고 한다. 그 사이 쥐가 그의 머리카락을 갉아 먹었고 후에 선정에서 깨어난 그는 이것을
발견하고 큰 분노를 일으켰다고 한다. 선정에 들어있던 동안 번뇌가 사라진 듯 보였지만 선정
에서 깨어나 보니 그의 번뇌는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마타가 없는 위빠사나만으로 수행을 한다면
수행자의 마음은 경계에 흔들릴 뿐만 아니라 바람 속에 있는 등불처럼 흔들린다.
그렇게 되면 지혜의 빛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 모두에 균등하게 의지해야 한다.
그런 연유로 『대열반경』에서
“성문들이 여래의 경계를 가히 보지 못하는 것은
삼매에 치우쳐 반야가 약하기 때문이다.
보살들은 여래의 경계를 보지만 명확하게보지 못한다.
지혜에 치우쳐 삼매가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래께서 일체를 보시는 것은 사마타와 위빠사나 둘 다 균등하게 수행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사마타의 힘은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분별의 바람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위빠사나는 삿된 견해의 모든 악취를 끊을 수 있다.
그리하여 다른 견해에 휘둘리지 않는다.
『월등경』에서
“사마타의 힘으로 [마음은] 흔들리지 않고,
위빠사나의 힘으로 [마음은] 산과 같다.”
라고 설하셨다.
그러므로 두 가지 모두 수행해야 할 것이다.
.수행의 적절한 환경
먼저 수행자는 신속하고 안전하게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사마타 행의 조건이란 무엇인가?
수행하기에 적합한 장소에 머물며, 소욕하고, 자족할 줄 알아야 한다. 불필요한 일들을 하지 않고,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고, 탐욕같은 분별을 완전히 끊는다.
첫 번째, 다섯 가지 공덕을 갖춘 곳이란 옷과 음식 등을 구하는데 불편함이 없고, 훼방꾼[귀신]이나 적이 살지 않는 안전한 곳, 질병이 없는 깨끗한 곳, 계율을 지키고 선한 도반이 함께하는 곳, 낮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지 않으며 밤에는 조용한 곳이다.
두 번째, 소욕이란 가사나 값비싼 것에 특별히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 자족이란 작은 것에도 항상 만족하는 것이다.
네 번째, 불필요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장사 등 생업에 매이는 것을 포기하고, 재가자, 출가자 모두와 너무 가까운 관계를 맺지 않으며 치료나 점성술을 봐주는 행위를 완전히 끊은 것을 의미한다.
다섯 번째, 계율을 청정하게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죄악인 성죄(性罪)와 차죄(遮罪)를 짓지 않는 학처에서 멀어지거나 부주의하게 죄를 범했다면 곧바로 참회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겠다고 참회하여 여법하게 하는 것, 성문의 계율에서 중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며 말씀하신 것들을 행했을 때 후회하고 이후에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내어야 한다.
게다가 죄를 지은 그 마음은 무자성임을 관찰하여 일체법이 무자성임을 안다면
이런 사람은 계율을 청정하게 지킨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생원멸원경』을 통해서 이해하도록 한다. 참회를 하고 나서 수행에 더 매진해야 한다.
여섯 번째, 이생과 내생에 해악을 끼치는 다양한 유형의 것들에 대해 사유하고 이를 분별하는 것을 끊도록 한다. 한편, 윤회하는 존재의 특징이 아름답건 아름답지않건 모두 소멸하는 것이며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필연코 만물은 물론 나 조차도 오래지 않아 결별할 것인데 이런 것에 집착하는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아 모든 분별을 끊도록 한다.
(성죄(性罪) - 부처님께서 계율로써 금하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행위 자체가 도덕상에 위반되
어 자연히 죄악이 되는 것. 예) 살생, 도둑질
차죄(遮罪) - 부처님께서 또 다른 죄악을 짓지 않도록 사전에 계율로써 금하신 것. 예) 술을
마시는 것)
위빠사나의 조건은 무엇인가?
선지식에 의지하는 것과 많이 들음, 그리고 여법한 마음이다.
첫 번째, 어떤 선지식에 의지할 것인가?
많이 배우고, 표현이 분명하며 자비심이 있고, 참을성이 있는 이다.
두 번째, 많이 들음이 무엇인가?
부처님의 12분교의 요의와 불요의의 가르침을 공경하고 열심히 경청하는 것이다.
『해심밀경』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성인의 말씀을 갈망하면서 듣지 않는 것은 위빠사나의 장애이다.”
『본경』에서는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으시다.
“위빠사나는 가르침을 듣고 사유를 통해 생긴 청정한 견해에서 생기는 것이다.”
『나라연청문경』에서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들음을 통해 반야가 생기는 것이
다. 반야를 지니는 것으로 번뇌를 적멸하게 된다.”
세 번째, 여법한 마음이란 무엇인가?
요의의 경전과 불요의의 경전 등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르게 확립하는 것이다.
보살은 의심이 없을 때 수행에 집중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의심으로 우왕좌왕한다면 사거리 가운데 서서 어느 곳으로 갈지 결정을 못하는 것과 같다.
(요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서 다른 해석이 필요하지 않는 가르침. 불요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말씀과 달리 다른 해석이 필요한 가르침.)
수행자는 항시 생선과 육류 등을 피하고 편식하지 않고 적당량만 먹도록 한다.
이와 같이 보살은 수행을 할 때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예비단계 수행을 모두 쌓고 난 후에
수행에 들어가도록 한다. 또한 수행자가 수행을 시작할 때, 하던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대소변도 보고,
조용하고 마음에 드는 곳에 앉는다.
‘제가 모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겠습니다’라는 생각을 하고 모든 중생을 직접 구제하는 마음가짐으로 대자비심을 실현하며 시방에 머무시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께 오체투지를 한다.
그 다음 불보살님의 모습을 담은 탱화나 사진을 앞에 모시고 그 외의 것도 무방하다.
그리고 힘닿는 만큼 공양과 찬탄을 하고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나서
모든 중생의 복덕을 수희찬탄한다.
매우 부드럽고 편안한 자리에 비로자나불의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로도 앉는다.
눈은 크게 뜨지 않고 감지도 않으며 코끝을 응시한다.
몸은 앞으로 숙이지도 뒤로 젖히지도 말고 곧게 펴고, 의식을 내면에 두고 앉는다.
그 다음, 어깨에 힘을 빼고 턱은 당기고 머리는 앞을 향한다.
코는 배꼽과 일직선이 되게 한다. 입술은 붙이고 혀는 윗니 뒤에 살짝 갖다 댄다.
안팎으로 들이쉬고 내쉼을 거친 소리를 내거나 뱃속에서부터 큰 소리를 내거나 고르지 못한 숨을 쉬지 않는다. 호흡은 인위적으로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쉰다.
·본수행
처음에는 사마타 상태가 되어야 한다.
바깥의 경계, 외부로 향하는 산람함을 가라앉히고
대상에 집중하는데 희열과 경안 상태에 머무는 것을 “사마타”라고 한다.
이 사마타 단계에서 진여를 올바르게 관찰하는 것이 위빠사나다.
『보운경』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사마타는 일심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위파사나는 바르게 관찰 하는 것이다.”
『해심밀경』에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이시여, 어떻게 사마타를 온전히
구해야 하며 위빠사나에 정통할 수 있습니까?”
하고 여쭙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미륵이여, 나는 이와 같은 가르침을 주었다. 계경, 중송, 수기, 풍송, 자설, 인
연, 비유, 본사, 본생, 방광, 희유법, 논의 – 12분교 – 가 그것이다.
내가 보살들에게 이에 대해 설한 것들을 보살이 잘 가르침을 듣고, 그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잘
암송하고, 마음에서 바르게 잘 관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깊이 이해를 한 다음에는 홀로 한적한 곳에 앉아 가르침을 마음에 바르게 두고서
가르침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사유한 생각에 다시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집중 상태를 유지한다.
내면에서 지속적으로 사유해 온 그 가르침에 집중해야 한다.
보살은 이와 같이 안주하고,
이 집중 상태에 자주 머물면 심신이 편안하고 가볍다.
이것을 바로 “사마타”라고한다.
이와 같이 되면 보살은 사마타를 온전히 구한 것이다.
보살이 심신에 경안을얻고 나서 그 상태에 머물면 마음의 산란함은 끊어진다.
그 다음 그대가 집중 대상으로 삼았던 그 현상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깊이 관찰한다.
사마타의 대상인영상을 지각 대상으로 본질을 분석한다.
이것을 철저히 분석하여 완전히 알고 완
전히 고찰해야 한다. 인내를 실천하고 대상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정확하게 분석하고 관찰하여 이해하라.
이 일체를 “위빠사나”라고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위빠사나에 정통한 보살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마타를 실제 이루고자 하는 수행자는 먼저 계경과 응송 등 일체 말씀은
진여에 이른 것이며, 진여에 이르렀던 것이며, 진여에 이를 것이라는 그것에(12분
교) 마음을 온전히 머무르게 해야 한다.”
이 수행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은 모든 법을 요약한 오온(五蘊)같은 것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보고 들은 부처님의 모습을 마음에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12분교- (1) 계경(契經): 산문체의 경전. (2) 중송(重頌),응송(應頌).산문체 경문의 뒤에,
그 내용을 운문(韻文)으로 노래한 것. (3) 수기(授記): 경 중에 말한 뜻을 문답 해석, 또는 제자의 다음 세상에 날 곳을 예언한 것. (4) 풍송(諷頌),고기송(孤起頌). 4언(言)ㆍ5언, 또는 7언의 운문(韻文).
(5) 무문자설(無問自說) 남이 묻지 않는데 부처님이 스스로 말씀한 경. (6) 연기(緣起), 인연.
부처님을 만나 법을 들은 인연 등을 말한 것. (7) 비유(譬喩) 비유로써 은밀(隱密)한 교리를 명
백하게 한 것. (8) 본사(本事) 부처님이나 제자들의 지난 세상 인연을 말한 것. (9) 본생(本生)
부처님 자신의 지난 세상을 행하던 보살행을 말한 것. (10) 방광(方廣)ㆍ방등(方等) 방정(方正),
광대한 진리를 말한 것. (11) 미증유법ㆍ희유법. 부처님의 신통력부사의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
것. (12) 논의(論議) 교법의 의취를 논의 문답한 경문을 말함.)
『삼마지왕경』에서
“황금색 몸을 가지신
세간 보호자[부처님]께서는 매우 아름다우시네.
그 모습을 마음에 두니
보살은 그것을 선정이라고 하네.”
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무엇이든 원하는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라.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반복하여 항상 마음이 그곳에 머물게 하라.
그리고 그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면서 집중한 대상에 마음이 제대로 머물고 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더불어 혼침 상태가 아닌지도 살펴야 한다.
마음이 외부 환경에 휘둘려 산만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밀히 살펴야 한다.
만약 혼침과 졸음이 몰려와 마음이 무기력해짐의 의심이 든다면
환희심을 불러 일으키는 부처님의 모습 또는 밝은 빛을 떠올려 본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혼침 상태에서 벗어나 수행의 대상인 마음을 아주 명확하게 볼 수 있다.
마치 장님 같은, 암흑 속에 있는 것 같은, 또는 눈을 감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마음의 상념을 아주 명확하게 보지 못하는 것이 혼침임을 알아야 한다.
마음이 바깥에 있는 사물을 쫓아가거나 다른 현상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혹은 과거에 경험한 상대에 대한 갈망으로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거나 마음이 들뜬다는 의심이 들 때는
모든 유위법은 무상하다는 사실[제행무상(諸行無常)]과 모든 것은 고통이다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이것은 마음을 고요하게 해 줄 것이다.
그 다음 산란함을 없애고나서 정념(正念)과 정지(正智)의 밧줄로
날뛰는 마음의 코끼리를 소연대상의 기둥에 잘 붙들어 매도록 한다.
혼침과 도거가 아닌 상태, 집중 대상에 마음이 자연스럽게 집중이 되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평온한 상태가 되면 그때 할 수 있는 만큼 앉도록 한다.
이와 같이 사마타에 익숙해져 몸과 마음이 경안이 되고,
원하는 대로 마음이 대상에 집중할 수 있을 때 사마타를 완성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사마타를 완성한 다음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
이와 같이 생각하도록 하
자. 부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훌륭한 설법으로 직접 또는 간접으로 진여를 분
명하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진여, 즉 여여함에 들어가게 한다.
여여함을 알면, 빛
이 어둠을 없애듯 모든 견해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마타만으로는 청정한지혜의 상태에 이를 수 없으며 탁한 악업도 소멸할 수 없다.
지혜로 진여를 잘 수행할 때 올바른 지혜를 지닐 수 있다.
또 지혜만으로 악업을 소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사마타에 머물며 지혜로 진여를 오롯이 추구하되
사마타에만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라.
진여란 무엇인가?
승의적으로 모든 사물,
즉 사람과 존재하는 것의 실체가 공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또한 반야바라밀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다른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해심밀경』에서
“부처님이시여! 보살이 법의 무자성을 어떤 바라밀을 통해 이르러
야 합니까? 관자재여, 반야바라밀을 통해 이르러야 한다. 그러므로 사마타에 머물
면서 지혜[반야]를 수행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인무아
수행자는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
보특가라는 ‘온’과 ‘계’와 ‘처’ 이외 다른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할 수 없다.
보특가라는 ‘온’을 비롯한 자성도 아니다.
게다가 ‘오온같은 것은 무상하며 여러 가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특가라를 항상 존재하며 하나의 본질’이라고 다른 사람들은 말한다.
보특가라가 실재한다고 하는 것은
여여함이나 다른 것으로 설명할 수 없을뿐더러 불가능하다.
실체가 존재하는 다른 모습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와 ‘나의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다 고 살펴본다.
·법무아
법무아에 대한 수행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법은 간추리면 5온, 12처, 18계이다.
‘온’과 ‘처’그리고 ‘계’의 물질적인 모든 것은 승의적 차원에서 마음의 상(想)과 달리 있지 않다.
그것들을 미립자로 분리할 수 있는데, 그 미립자 각각을 분석해 보면
어떠한 성품[자성]도 결코 얻지 못한다.
그런데도 무시이래로 물질[色]을 포함해 진실이 아닌 것을 [실제 한다고] 집착한다.
이로 인해 꿈속에서 집착하는 대상의 환영을 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이들은 마음조차 물질과 같이 바깥에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승의적 차원에서 ‘이 형체들이 마음에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분석하도록 한다. 이렇게 인식을 해서 ‘이 삼계는 오로지 마음뿐이다’라며
법[존재 온, 계, 처의 물질적인 모든 것이 진실로 마음과 따로 있지 않다 하는 것들]을 분별한 모두 오직 마음뿐임을 깨닫고 나서 마음의 본성을 각각 분석해 본다.
‘마음을 낱낱이 분석하면 일체법의 본성을 각각 분석한 것이다’ 마음을 각각 이처럼 살펴보라.
승의적 차원에서 본다면 마음조차도 진실이 아니다.
한 순간 거짓 본성인 형체를 비롯한 것들의 모습들을 인식한 마음이
다양한 형상들을 드러낼 때
마음의 진실성은 어디에 있겠는가?
마치 물질이 거짓 속임인 것처럼 마음 역시 다르지 않기 때문에 거짓인 것이다.
이와 같이 물질은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으므로 하나의 자성도 다수의 본질도 아닌 것처럼
마음 역시 물질의 형상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자성도 다수의 자성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오로지 환영이다. 마음이 그렇듯이 모든 현상(법)도 오로지 환영이다’
마음의 본성이 그러하듯 모든 현상도 지혜[반야]에서 환영 같은 본성일 뿐이라고 분석한다.
승의에서 마음은 안에서도 얻지 못하며 밖에서도 얻지 못하며
안팎이 아닌 곳에서도 얻지 못하며 과거의 마음에서도 얻지 못하며
미래에서도 얻지 못하며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에서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는 모든 순간 어디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며
사라지는 모든 순간에도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잡을 수 없고, 의지할 수 없으며 물질도 아니다.
'물질도 아니고 잡지도 못하고 증명할 수도 없는 모든 것의 본성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보적경』에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가섭이여, 마음을 샅샅이 찾는다 해도 찾을 수 없다.
찾을 수 없는 것 그것은 대상이 될 수 없다.
대상이 될수 없는 그것은 과거도 아니며
미래도 아니며 현재 발생한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분석한다면 따라서 마음의 시작은
진실로 직접 볼 수 없으며 마지막도 진실로
직접 볼 수 없으며, 중간도 진실로 직접 볼 수 없다.
마치 마음에 가장자리와 중심이 없는 것처럼
모든 현상법도 경계와 중심이 없다고 마음에 새긴다.
이렇게 마음에 가장자리와 중심이 없음을 마음에 새기고 나면
마음의 실체[본성]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마음을 전부 분석하여도 역시 공空임을 깨닫는다.
이것을 알면 마음이 만들어낸 본성인 ‘형체[色]’의 본성 역시 진실로 따라서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와 같이 지혜[반야]로 모든 현상법의 본성을 진실되게 따라 볼 수 없으므로
‘형체가 영원하다거나 영원하지 않다거나 공하다거나 공하지 않다거나 유루이거나 무류
이거나 생한다거나 멸한다거나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별할 수 없다.
이처럼 형체[색]에 대해 분별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느낌], 상[지각], 행[반응], 식[마음]들도 분별을 하지 않으니
논제[전제]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그것의결과를 비롯한 각 부분들이 역시 성립되지 않는 것인데
그것에 무슨 분별이 있겠는가?
이처럼 지혜[반야]로 깊이 관찰 분석하여 수행자가
모든 물질의 본성이 진실로 확신[찾을]할 바가 없다는 것을 인식할 때
무분별의 삼매에 들어가는 것이다.
제법의 무자성도 깨닫는다.
반야로 사물의 본질을 각각 분석하는 수행을 하지 않고 오직 사유만을 끊는 수행은
분별을 결코 제거할 수 없어 무자성을 깨닫지 못한다.
이는지혜의 빛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실되게 각각 분석하는 것에서만 진실로 있는 그대로[실상]를 아는 지혜의 불이 발생하니
비비고 비벼 불이 일어나듯 분별의 나무는 타버릴 것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보운경』에서도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결점[과오]을 발견하는데 뛰어난 그는 모든 희론과 멀어지기 위해서 공성 수행을 닦는다.
공성을 끊임없이 수행하면 그 무엇에 마음이 빼앗기거나 마음이 들뜰 때
그것의 자성을 샅샅이 점검하여 공하다는것을 알아차린다.
바로 그 마음을 살펴서 공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마음에 의해 알아차린 모든 것의 자성 하나하나가 역시 공하다는 것을 안다.
그 마음 역시 공하다는 것을 안다.
이를 알면 무상 요가 수행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했다.
이것을 완전하게 분석할 수 있는 사람만이 무상 요가 수행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비록 마음의 활동을 전부 끊는다고 해도
반야로 사물의 본성을 관찰하지 않으면서 무분별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매우 명확하게 설명한 것이다.
지혜로써 형체[색] 등의 사물의 본질을 진실로 있는 그대로 분석해서 선정에 들며
형체 등에 머물러 선정에 들지 않는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사이에 머물러 선정에 들지 않는데 형체 같은 것을 대상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주처 선정자’라고 한다.
반야로 모든 사물의 본성을 살펴 관찰하고 나서 소연대상 없이 선정을 행하는 까닭에 ‘뛰어난 지혜 수행자’라고 한다. 이것은 『허공장경』과 『보정경』에서 설하신 내용이다.
이와 같이 보특가라와 법이 무아인, 오직 그 상태에 머물러
이것을 분석한 것 외의 다른 바라봄이 없으므로 분별과 분석을 여의었고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대상과 인식한 의식이] 하나가 된 의식이 [자력으로써 대상에] 들어가 자연히 선정에 들었고
다른 분별상(想)이 끼어들지 않으므로 진여를 매우 명확하게 수행하며 안주하도록 한다.
거기에 머물러 마음의 흐름[내면]이 흔들리지 않도록 한다.
한 순간 탐욕 같은 것으로 마음이 외부 대상으로 인해 흔들릴 때 산란함을 살펴,
재빨리 부정관을 통해 산란함을 가라앉히고 다시 마음이 여여한 상태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반대로 마음이 불쾌해짐을 느낀다면 삼매의 공덕을 살펴 즐겁게 수행하도록 한다.
산란심의 허물을 잘 살펴 불쾌함을 완전히 멸할 수 있다.
만일 의식이 명료하지 않거나[혼미] 잠이 몰려와 자세가 흐트러지고 의식이 몽롱할 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장 좋아하는 사물 – 부처님과 빛 – 등을 떠올려 속히 혼침을 제거해야 하며,
또한 대상인 진여에 의식을 정확하게 집중해야 한다.
한 순간 과거에 즐거웠던 일이나 행복했던 기억 같은 것으로 마음이 들뜨거나 산만해지는 의심이 들 때면 그때는 앞에서와 같이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함을 떠올려 산만을 가라앉히고
그런 다음 진여에 힘들지 않게 머물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
혼침이나 도거가 사라져 마음이 선정 상태에 머문다면
그때는 마음 상태를 그대로 두고 일부러 노력을 하지 않는다.
만일 마음이 선정 상태에 머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면 그것은 마음이 산만하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이 혼침인 상태에서 얼른 알아차리지 않고 방치한다면
마음은 장님처럼 되어 위빠사나[관조]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혼침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평정을 이루고 있다면 애쓰지 말아야 한다.
어느 순간 위빠사나를 수행하여 지혜[반야]가 과다하게 커지면
사마타가 약해지므로 바람 앞에 등잔불처럼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면 진여를 명료하게 보지 못하니 그때는 사마타 수행을 한다.
사마타가 비중이 커지면 반대로 위빠사나[반야] 수행을 해야 한다.
두 가지[사마타와 위빠사나] 모두 균형을 이룰 때
심신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하며 애쓰지 않고 머무르게 한다.
몸에 불편함이 느끼지는 곳이 있다면
그때마다 모든 세상이 환영이며 오아시스이며 꿈이며 물 위에 비친 달이며 신기루 같은 것이라 여기고 대상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생각한다.
“이 중생들은 이 같은 심오한 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므로 윤회할 때 언제나 번뇌로 시달린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이 그 법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겠다.”
라고 생각하고 대자비와 보리심을 일으키도록 하라.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위와 같은 방식으로
일체 법을 현현하지 않는 삼매에 들어가도록 한다.
마음이 반복적으로 힘들어지면 휴식을 취하도록 한다.
이와 같은 방법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병행하여 들어가는 것인데
분별과 무분별의 영상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수행자는 이 순서대로 한 시간이나, 야밤 수행 시간의 절반, 한 번의 수행시간,
원하는 만큼 진여를 수행하며 앉도록 한다.
이는 의리(義理)를 분석하는 삼매로 『능가경』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런 다음 원한다면 삼매로부터 벗어나 가부좌를 풀기 전에
“이러한 모든 법은 진실한 도리[승의]에서 무자성일지라도 세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행위와 행위의 결과[업과(業果)] 사이에 관계가 존재하겠는가?
부처님께서는
“사물은 세간의 통속적인 진리에 의해[세속적으로] 발생하지만
승의적 차원에서는 자성이없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중생은 자성이 없는 사물들이 존재한다고 전도된인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오랫동안 ‘윤회’를 떠돌고 있으니 나는 중생을 깨닫게
하기 위해 복덕과 지혜의 선근공덕 자량을 쌓아 일체종지를 완성하리라.
그리고나서 중생들이 일체종지의 경지를 성취하도록 하여 그들이 법성을 통달하게 하리
라.”라고 생각한다.
(분별(Tib: rtog pa) -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분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심소 중 하나. 인식하는 대상을 거칠게 살피며 몰입해 들어간다.
분석(Tib: dpyod pa) -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분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심소 중 하나. 인식하는 대상을 세세하게 분석하며 몰입해 들어간다.
현현하지않는 삼매- 보여지는 일체 존재현상이 진실로 있지 않다고 보는 삼매
야밤 수행 시간의 절반- 수행 시간의 절반 약 2시간 정도
한번 수행시간- 약 4시간 정도)
<방편>
그리고 편안하게 가부좌를 풀고 나서 시방에 머무시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께 절을 드리고, 그분들께 공양과 찬탄을 한 다음 『보현보살행원품』같은 광대한 기도를 한다.
그 다음 공성과 대자비의 정수인 보시를 비롯한 복덕과 지혜의 선근 공덕자량을
모두를 성취하도록 정진한다.
그렇게 되면 그 선정으로 모든 것 가운데 최상인 공성을 확실하게 성취할 것이다.
『보정경』에서는 이와 같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자애의 갑옷을 입고 대비심의대지에 머물면서
모든 것 가운데 최상인 공성을 확실하게 성취하도록 하는 삼매를 행한다.
여기에 모든 것 가운데 최상이 되는 공성이란 무엇인가?
보시와 멀어지지않는 것, 지계를 여의지 않는 것, 인욕과 떨어지지 않는 것,
정진과 멀어지지 않는것, 선정을 여의지 않는 것, 반야와 멀어지지 않는 것,
방편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보살은 모든 중생을 성숙하게 하고, 국토와 육신과 많은 주위 권속 등을 원만구족하게 하는 방편인 보시 같은 선업에 반드시 의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께서 정토를 비롯하여 원만구족이라고 말씀하신 그 모든 것의 결과가 어찌 되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것 가운데 최상인 일체종지는 보시를 비롯한 방편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 일체종지는 방편에 의해 완성된다.”
그러므로 보살이 보시를 비롯하여 방편도 수행해야 한다.
공성만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섭연경』에서도 이와 같이 말씀하시고 있다.
“‘미륵이여, 보살이 육바라밀
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것이 일체의 법을 이루기 위함인데 어리석은 이들은 보살은
오직 반야바라밀만을 닦으면 되지, 나머지 바라밀이 왜 필요인가?
하며 다른 바라밀을 부정한다.
미륵이여, 내가 까시국 왕이었을 적에 비둘기를 위해서 내 살과피를 베풀었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반야를 구한 것인가?’ 이에 미륵보살이 대답했다.
“부처님이시여, 그건 그렇지 않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미륵이여, 내가 보살행을 행하는 것이 육바라밀이 온갖 선근을 쌓은 데에 방
해가 되는가?”
미륵보살이 대답하기를
“부처님이시여, 그건 그렇지 않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미륵이여, 그대 또한 60겁 동안 보시바라밀을 청정하게
수행했으며, 60겁 동안 지계바라밀을, 60겁 동안 인욕바라밀을, 60겁 동안 정진바
라밀을, 60겁 동안 선정바라밀을, 60겁 동안 반야바라밀을 청정하게 수행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직 하나의 도리로 깨달았으니
이와 같이공성만으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라고 하지만
그들의 수행은 올바르게 한 것이아니다.”
보살이 방편을 제쳐 두고 반야만을 수행한다면 성문들과 다를 것이 없다.
그는 부처님의 행을 이룰 수 없다.
그렇지만 방편을 닦으면 비로소 가능해 질 것이다.
『보적경』에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가섭이여, 이와 같다. 예를 들면 신하가
있는 국왕은 일체의 국정을 처리할 수 있듯이,
보살의 뛰어난 반야가 방편으로 완벽하게 뒷받침이 된다면
보살 역시 부처의 모든 행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보살도의 견해는 외도나 성문의 견해와 다르다.
외도의 견해는 ‘자아’에 대해 전도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에 반야와 멀어진 도이다.
그래서 그들은 해탈을 얻지 못한다.
성문들은 대자비가 없고 방편이 없기에 오로지 열반에만 집중한다.
보살들은 반야와 방편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는 걸 인정하기에 그들은 무주처열반에 들어서게 된다.
보살도는 반야와 방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무주처열반에 도달한것이다.
반야의 힘은 윤회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방편의 힘은 열반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야산경』에서
“보살들의 도道는 요약하면 두 가지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방편과 반야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화엄경 상승초품』에서도
“반야바라밀은 어머니요, 뛰어난 방편은 아버지이다.”
라고 설하셨다.
『유마힐경』에서도
“보살에게 결박이란 무엇인가? 해탈이란 무엇인가?
방편이 없이 윤회에 묶여 있는 것이 보살에게는 결박이다.
방편으로 윤회 속에 영위하는 것이 해탈이다.
반야 없이 윤회 속에 사는 것은 보살에게는 결박이다.
반야로 윤회 속에 사는 것이 해탈이다.
방편이 갖추어지지 않은 반야는 결박이다.
방편을 갖춘 반야는 해탈이다.
반야가 갖추어지지 않은 방편은 결박이다.
반야를갖춘 방편은 해탈이다.”라고 설하셨다.
보살이 단지 반야만을 의지한다면
성문이 지향하는 열반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결박을 당한 상태처럼 되어 무주처열반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래서
‘방편을 갖추지 않은 반야는 보살들의 결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바람이 불어 추울 때 따듯한 불에 의지하여 바람을 피하듯 보살은
방편이 함께 하는 반야로 공성을 수행해야 한다.
성문들처럼 하지 말아야 한다.
『십법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비유하자면 이와 같으니라.
어떤 사람이 불을 몹시 숭상한다고 하자. 그 불을 공경하고 스승으로 모실지라도 ‘나
는 불을 공경하고 스승으로 섬기고 그림으로 그리더라도 불을 내 두 손으로 붙잡
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자신에게 육체적인 고통과 마음이 불편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보살 또한 열반에 생각이 있을지라도 열반을 실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깨달음에서 돌아서게 될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직 방편만을 의지하면 또한 범부 보살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결박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반야와 함께 방편을 의지해야 한다.
이와 같이 주술로 빚은 독약 같은 번뇌 역시 보살들이 반야를 수행하게 되면 감로로 변하기 때문에 선취의 과보를 지닌 자성에 의해 드러나는 수승한 결과로서 보시의 이익은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보적경』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가섭이여, 이와 같으니, 비유하자면 주술과
약으로 빚은 독약은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보살들의 번뇌는 지혜를 섭수하므로 전도로 떨어지게 하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보살은 방편의 힘으로 윤회를 하지만 열반에 떨어지지 않는다.
반야의 힘으로 모든 대상을 끊어 버리기 때문에 윤회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
러므로 무주처열반 혹은 부처를 성취하는 것이다.
『호공장경』에서도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반야의 지각으로 일체 번뇌를 제거한다.
방편의 지각으로 일체 유정을 저버리지 않는다.”
『해심밀경』에서도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유정을 유익하게 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으며
행[心行]을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외면하는 것을
나는 ‘무상정등각’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부처를 얻고자 한다면 반야와 방편 두 가지 모두에 의지해야 한다.
출세간의 반야를 수행하고 있을 때나 선정에 든 상태에서
보시를 비롯한 방편에 의지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
그러나 수행 예비 단계와 그 이후 반야지가 일어날 때마다 방편에 의존할 기회가 생기니
이런 까닭에 지혜와 방편 두 가지를 동시에 닦이는 것이다.
더불어 보살들의 반야와 방편을 병행하여 실천하는 도(道)가 바로 이것이라 했다.
모든 중생을 돌보는 대자비를 이루어 출세간의 도를 수행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편을 행할 때 마술사처럼 전도되지 않은 보시 등에 의지해야 한다.
『무진혜경』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보살의 방편은 무엇인가? 반야를 직접적으로 성취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정에 들어서 유정을 살필 적에 대자비의 마음을대상에게 뚜렷이 두는 것, 바로 이것이 방편이다.
적정과 대적정에 입정하는 것 바로 이것이 반야이다.”
『항마품』에서는
“보살들의 올바른 가행(加行)이란 반야의 지각으로[만] 특별히 정진하지 않고,
방편의 지각으로 일체 선법을 모은 것을 가행하고, 반야의 지각으로
무아(無我), 무유정(無有情), 무생물(無生物), 무양(無養), 무인(無人)을 가행하고,
방편의 지각으로 일체 유정을 성숙하게 하는 것 또한 수행이다.”
라고 상세히 말씀하셨다.
또한 『법집경』에서도
“예를 들어 어떤 마법사가
환영에서 벗어나고자 노력을 했다.
그러하여 이미 그 환영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 환영에 집착을 하지 않는다.
삼계가 환영과 같음을
정등각자께서는 아시고
중생을 위해 갑옷[대자비]을 입으셨으니
중생이 그와 같음을 이미 알았다.”라고 설하셨다.
“보살들의 지혜와 방편의 도리만을 닦은 가정하에 그들의 가행[실천]이 윤회에 머
무는 것이기도 하지만 생각은 열반에 머무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공성과 대자비의 핵심인 무상정등각에
온전히 회향하는 보시 같은 방편을 닦고 나서
승의의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언제나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정소행경』에서
“언제나 중생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보살의 공덕을 마음에 지니고
정념으로 잘 기억해 방편의 수승함을 수습하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자비와 방편과 보리심을 이생에 틀림없이 잘 닦으면
꿈속에서 항상 부처님과 보살을 친견하게 되고,
그 외에 상서로운 꿈도 꾸게 되며 천신들도 기뻐하면서 수호할 것이다.
찰나마다 복덕과 지혜의 선근과 공덕이 광대하게 쌓이며 번뇌의 장애와 번뇌 습기도 정화된다.
늘 행복하고 평온할 것이며 뭇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며
질병이 몸에 침범하지 않을 것이며 마음 작용 역시 최적한 상태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신통과 같은 수승한 공덕 또한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신통력으로 시방의 무량한 세계에 가서 여러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법문도 듣는다.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반드시 부처님과 보살님을 친견할 것이다.
다음 생에도 어디에서나 불보살님과 함께할 것이며 훌륭한 가문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큰 노력 없이 복덕과 지혜의 선근공덕 자량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많은 재산과 권속들을 거느릴 것이다. 예리한 지혜로 많은 범부들을 제대로 성숙하게 만들 것이다.
세세생생 전생의 삶들을 다 기억하게 될 것이다.
다른 경전에서 이와 같은 무량한 공덕을 밝히고 있으니 그 이익을 잘 이해하도록 하라.
이와 같이 자비와 방편과 보리심을 항상 공경하면서 오랫동안 수행하면
점차 마음의 내면이 지극히 청정한 순간이 생기고, 그리고 완전히 성숙하게 될 것이다.
찬목(鑽木)을 비벼서 불을 일으키듯이 진실된 뜻을 수행하여 구경에 도달하게 되어
출세간의 지혜로 모든 분별의 그물을 여의고 법계를 완전 명백하게 깨달아
허물이 없고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마치 등불을 바람이 없는 곳에 둔 것처럼 흔들림이 없는 [착각하지 않는] 지각을 얻을 것이다.
일체법이 자성이 없다는 것[무아의 본질]을 지각[있는 그대로 보는]하며
견도(見道)에 속한 승의 보리심이라는 본성을 얻는 것이다.
그것을 얻고 나서 존재의 구경을 목표대상으로 삼아 여래의 종성으로 태어나게 된다.
허물이 없는 보살의 단계에 머문다.
세간의 모든 중생들보다 뛰어나며
보살의 법성과 법계를 깨달아 머물면 보살의 초지를 얻은 것이다.”라고 『십지경』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하시고 있다.
이는 진여를 소연대상으로 하는 선정으로 『능가경』에서 설명하고 있다.
보살들이 희론 없는 무분별에 들어선다.
승해행지(勝解行地)에서는 승해의 영향으로 들어섰음을 보인 것으로 직접 지각한 것은 아니다.
그 지혜[초지의 무분별지]가 생기면 비로소 [진여에] 머물게 되니
그와같이 초지(初地)에 들어간 이후 수행하는 도에는
출세간과 후득지인 두 가지의 반야와 방편을 수행한다.
차례로 수도(修道)에서 끊어야 하는 축적된 미세 허물 중에서도 극히 미세한 허물을 정화하기 위함이다. 뛰어난 상위 공덕들을 얻기 위해서 하위의 지(地)들을 전부 정화하므로
여래의 지혜에 이르기 위해 일체종지의 바다에 들어가고
목적을 전부 이루는 목표대상 또한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단계에 의해서만이 마음의 내면이 완전히 청정해진다”
는 것을 『능가경』에서도 설하셨다.
『해심밀경』에서는
“단계에 의해, 높은 경지로 황금처럼 마음을 말끔히 정화하여
무상정등각에 도달하기까지 원만하게 갖추어 성불한다.”라고 설하셨다.
일체종지의 바다에 머무른다면,
마치 여의주와 같이 모든 유정을 구제하는 공덕을 쌓고 과거 서원이 이루어지며,
대자비의 자성을 갖추어 다양한 방편이 저절로 성취되며,
무량한 화신으로 중생들의 서원을 남김없이 이루어 원만한 공덕을 남김없이 통달하며,
습기와 더불어 모든 죄과의 허물을 소멸하여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머물러
깨닫는 것과 함께 모든 공덕의 근원이신 부처님께 믿음을 일으키고
그 공덕을 완성하기 위해 스스로 전력을 다해 노력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일체종지는
자비를 근원으로 해서 생기며,
보리심을 바탕으로 해서 생기며,
방편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견도 - 오도(五道) - 자량도(資糧道), 가행도(加行道), 견도(見道), 견도(見道), 무학도(無學道)
승해행지-자량도와 가행도
승해 - 대상을 향하여 수승한 해(解)로써 시(是)ㆍ비(非), 사(邪)ㆍ정(正)을 살펴 결정하는 정신 작용.
초지 - 보살 십지(十地) 중 첫 단계- 환희지(歡喜地). 이구지(離垢地). 발광지(發光地). 염혜지(焰慧地).
난승지(難勝地) 현전지(現前智). 원행지(遠行智). 부동지(不動地). 선혜지(善慧地) 법운지(法雲地).
정화(Tib: yongs sbyong)- 지(地)의 허물을 끊는다. 예) 초지의 허물을 끊고 초지의 공덕을 원만히 갖추는 것을 ‘초지 정화’라고 한다. 공덕을 전부 원만히 갖추는 순간 2지로 올라선다.
현명한 이는 질투 같은 결점을 멀리 떠나 보내며 충족되지 않은 공덕에 대한 갈증은 바다와 같으니 잘 가려 들어 훌륭한 말씀을 간직하네. 백조가 기쁨의 호수에서 우유를 취하는 것처럼.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들은 편견과 혼란스러운 마음은 멀리 버리고 설령 아이일지라도 좋은 말은 모두 받아들이네. 이같이 중도의 길 설명하여 내 얻은 모든 복덕을 모든 중생을 위해 베푸나니 중관의 도를 얻게 하소서.
『수행의 순서』는 스승[아사리]이신 까말라실라께서 중편을 지으셨다.
인도 학자 쁘라즈냐와르마와 역경사인 비구 예세데가 번역하고 교정하여 확인했다.
수행차제의 다른 번역
http://blog.naver.com/cube393/220627084517
곰림바르빠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주해
http://blog.naver.com/cube393/220627092280
달라이라마 수행차제 법회 함께 보세요
http://www.bbsi.co.kr/BBS_MN/tvPlay.asp?pgno=348&file_id=169067
수습차제론 1강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대한 설명
2강 명상을 하는 자세와 방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
사마타에 들어서 명상하는 방법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직접 해 주십니다.
명상을 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어보아야 하는 부분이네요 ^^
(.....사마타가 완성되기 까지의 구주심 9단계 까지의 현상들 그 완성 이후에 사마타의 완성이 된다.
그 구주심이 이루어진 이후에 신심의 경안이 이루어진다. 신심의 경안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그로 인해 사마타를 닦을 때 어떻한 피로감도 느껴지지 않게 된다.
사마타를 통해서 자신이 경험을 이루었다면, 어떠한 산만함도 방해도 없다면 그 사마타 상태에서 그것을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부처님께써 말씀하신 중론에서 말하는 것들, 여래에 대한 관도 해야힌한다, 여래는 온와 달리 있지 않으며, 오온 안에 있지 않으며 밖에도 있지 않으며,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자신이 공양 올리고 소중히 생각하는 부처님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을 살펴야 한다. 그러면 부처는 무엇인가, 부처는 이름으로, 이름 뿐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 이름 조차도 있지 않은 그 여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는 분석과 고찰을 해나가야한다. 이를 통해서 부처를 봄과 동시에 이런 부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순간 바로 알아차리게 된다.
<인무아>
진여란 무엇인가? 승의적으로 존재하는 그 모든 것 자체의 실체가 공하다고 하는 것이다.
자성이 없다고 말하지만 없다고 말하면서 그 것에 자성에 있다라고 말하는 파와 그 이름 부르는 것 자체에도 자성이 없다고 하는 중관학파가 있다. 청변논사가 부로논사를 비난하는 이유를 잘 생각해보야한다. 월칭논사는 청변논사는 브로논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름과 명칭으로서 있을 뿐이다. 자성이 없는 것이다. 종관학파의 논사들이 말하는 것에 있어서도 그것을 잘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분별과 분석과 고찰을 했을 때 무언가 남아 있다며 그 분석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무자성이어야 한다. 어떤 대상이던간에 그 대상을 유지할 때는 그 대상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과 낱낱이 살펴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낱낱이 분석해 들어가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것도 무자성이다. 본질로서 무자성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공하고 부처와 중생이 하나이고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무아 법무아가 다르지 않고 하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위빠사나를 말할 때 신심의 경안이 또 생겨난다. 그 위빠사나에서 또 생겨나는 경안은 신심을 더 확장시킨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이름 붙인 것이고 그것 자체도 자성이 없다. .....)
http://www.bbsi.co.kr/BBS_MN/tvPlay.asp?pgno=348&file_id=169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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