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불교

불교의 역사 - 티베트불교사

수선님 2022. 6. 19. 13:41

티베트 불교사
 
티베트가 남쪽에 히말라야, 북쪽에 곤륜 산맥, 서쪽에 파미르, 동쪽에 중국의 사천성이 둘러싼 해발평균 3천m의 고원지대다. 기후는 전형적인 내륙성으로 자연환경이 험하다. 주민은 수도 라사를 중심으로 창포강 유역에 가장 많고 그 밖에 캄(동티베트), 암도(청해지방), 찬탄고원 등지에서 농경과 유목생활을 하고 있다.


티베트란 말은 중국에서 이 지방을 토번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 지방을 토번 외에도 <서쪽의 보물창고>라는 뜻으로 <서장>이라고도 불렀다. 이곳에서는 오래 전부터 여러 부족이 탕창강. 등지. 백란. 당항. 강. 백랑. 다미. 아란. 여국 등의 부족국가를 형성하고 있다가, 7세기초 송첸캄포왕 시대에 통일국가가 형성됐다. 송첸캄포는 중국의 사천에까지 진격하여 문성공주를 항가(降嫁)시켰으며, 또 네팔에도 세력을 뻗쳐 네팔왕 앙슈바르만의 왕녀와도 결혼하였고, 톤미삼포타를 인도에 파견하여 불교와 인도문화를 배워서 티베트문자와 문법책을 짓게 하였다.


8세기 후반 체데송첸왕 시대에 티베트에서는 인도계 불교인 점오설(漸悟說)과 중국계 선종의 돈오설(頓悟說)의 대립이 점차 심하여져 토론이 수차례 행하여졌다.


760년경 차데송첸의 초청으로 인도에서 온 날란다의 유명한 학승 산타라크시타, 파드마삼바바에 의하여 중국계 불교는 탄압되었다. 이후 티베트불교는 완전히 인도불교의 영향아래 놓이게 되었다. 또 치데송첸은 마가다(인도)의 오단타푸리사(寺)를 모방하여, 수도인 라사 동남쪽 삼예에 불교사원을 건립하였고, 이 시기에 최초로 티베트인의 출가가 이루어 졌다.


티베트에는 원래 신령을 숭배하는 샤먼적 본교(本敎)가 있어서 불교가 들어가기 전까지 압도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드마삼바바가 밀교를 들여와 본교와 투쟁하는 동안 이들은 서로 혼융하여 라마교라고 하는 독특한 불교가 만들어졌다. 원시불교로부터 분파된 밀교의 주문이나 진언은 냉철한 이론보다도 자연숭배의 신앙을 가진 티베트인들에게는 매우 합당한 것이었다. 파드마삼바바로부터 비롯된 티베트 초기 불교를 닝마파라 한다. 9세기 전반, 치데송첸과 그의 아들 르파찬은 티베트불교를 가장 보호하던 왕이다. 이 시대에 티베트어로 번역된 불전의 용어를 통일하고, 사전도 편찬됐으며, 많은 경전을 번역하여 불교교의를 순화시겼다.


티베트어 불전은 산스크리트어 원전의 자구(字句)의 원뜻에 충실하는 축자역이 특징인데, 이것은 이 시대에 확립된 전통이다. 그러나, 르파찬은 841년에 암살되고 본교도인 그의 동생 란다르마가 즉위하여 불교를 크게 탄압하였다. 이 때문에 불교는 큰 타격을 입었고, 란다르마 자신도 격분한 불교도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티베트왕가는 분열되고 군웅할거시대로 들어갔다. 11세기가 되어 불교개혁을 바라는 서티베트왕 예세헤의 초청을 받아 1042년 비크라마시라사의 학두(學頭) 아티샤가 티베트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교학은 밀교의 금강승이었기 때문에 과연 닝마파의 입장이 어느 정도 개혁되는지는 의문이다.


이 아티샤 계통을 카담파라고 부른다. 또한 1073년에 코촉게포가 사카사(寺)를 건립하고 사카파를 성립시켰다. 11세기 중엽에는 마르파가 인도의 비크라마시라사에 들어가 나로파에게 금강승을 배우고 귀국하여 새로 카규파를 열었다. 이로써 티베트불교는 토번시대의 닝마파와 함께 4개의 종파가 분립케 됐다. 
13세기 중엽, 사카파는 중국 원조(元祖)와 깊은 관계를 가지며 티베트의 정치. 종교 양권을 장악하였다. 원조의 광적인 티베트의 불교 숭배는 타락한 티베트불교를 더욱 타락시켰다. 이에 14세기 후반에 쫑카파라는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여 타락한 티베트불교를 개혁시켰다. 그는 라마승의 독신생활과 계율주의를 주장하면서, 불교개혁을 지도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황색모자를 쓰고 흑색모자를 쓰는 본교와 구별했다. 이들을 [황모파]라 하며 쫑카파의 법통을 잇는 승정(僧正)을 달라이라마라고 한다. 제5대 달라이라마는 티베트를 재통일하는 데 성공하여 정교양권(政敎兩權)을 다시 장악했으며, 7대 때인 1750년에는 청조(淸祖)의 보호에 들어갔다가 최근에 이르기까지 달라이 법왕국(法王國)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1957년 중공은 티베트를 강제합병했다. 이에 항거하여 달라이라마 14세는 인도로 망명했다. 이후 티베트불교는 중공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다.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중공을 휩쓴 문화혁명으로 3천 700개나 되던 사찰은 13개만 남고 몽땅 파괴되었다. 어떤 사찰은 지방정부에서 나무가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뜯겨지기도 했다. 또 한때 40만 명에 이르던 라마승들은 무참히 처형되나 투옥되었다.


그러나, 1965년 9월 티베트가 중공의 자치구로 발족하고, 사인방(四人幇)이 물러간 후 티베트의 불교는 다시 소생하고 있다. 최근 이 지역을 방문한 여행자들에 따르면 라마승은 1천 300여 명이 있으며, 중공당국이 관광목적이기는 하지만 문화혁명 기간중 파괴된 사원의 복구에 힘쓰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로 말미암아 티베트불교는 어느 정도 소생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 좋은 예가 1986년 2월 18일부터 열흘간 라사(티베트의 수도)의 대소사에서 열린 [불교대법회]다. 대소사의 불교대법회는 500년의 전통을 가진 티베트불교 최대의 행사다. 1986년 법회는 티베트가 중공에 합병된 지 20년만에 재현됐는데, 여기에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과 티베트 사람들이 참가했으며, 이 법회의 법주(法主) 판첸라마는 연일 수천 명의 참가자들에게 [면재증복(免災增福)]의 축복을 내렸다.

이 법회에는 중공의 티베트위원회 오정화 제1서기도 참가해 판첸라마에게 보시를 전했으며, 또 법회에 필요한 우양육(牛羊肉). 다엽(茶葉). 연료. 종교용구 등 일체를 정부가 지원했다. w공의 관영 [인민일보]는 이 사실과 함께 법회가 열리는 열흘간의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 중공의 종교정책이 변화했음을 대내외적으로 선전했다. 또 법회에 참가하고 있던 영국. 미국. 일본 등의 외국인 여행자에 대해서는 중공불교협회 서장분회(西藏分會)에서 중공의 종교정책과 대법회의 내용, 역사 등을 설명했다. 이에 대해 홍콩의 신문들은 [법회를 이용해 북경당국은 중공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한편, 이 법회는 1959년 중공이 티베트를 침공하자 달라이라마를 따라 국외로 탈출했던 10명의 라마승들이 참가해 주목을 모았다. 이 법회는 원래 달라이라마도 귀국하게 되어 있었으나 그가 귀국하는데 대해 북경측이 도중에 조건을 변경함으로써 실현되지 않았다. 달라이라마의 귀국여행이 실현되지 않자, 곤경에 빠진 북경 당국은 친공적(親共的)인 판첸라마를 티베트에 오게 하여 대 법회를 주관케 했다. 그러나, 판첸라마는 [공산당에의 협력]을 호소할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우리의 고향을 복구하는데 동참하자]는 호소를 하는데 그쳤다. 서방의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판첸라마가 중공의 부탁을 거부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렇지만, 달라이라마를 추종하던 라마승의 귀국과 함께 이 대법회에는 연일 티베트 전역(全域)과 중공의 청해. 감숙. 운남. 사천 등 여러 곳에 거주하는 수천의 티베트인들이 이 법회에 참가한 것은 티베트불교의 앞날을 예상케 하는 [상서로운 징조]라고 할 수 있다.


인민일보는 이러한 선전재료를 놓치지 않고 [이 법회에는 매일 4천명 이상이 참가했으며, 하루동안 모이는 보시금은 12만원(원: 한화로 약 3억원)이 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라사의 대법회가 끝난 뒤, 1986년 5월 판첸라마는 최초로 해외나들이를 해 주목을 모았다. 이 여행 기간중 판첸라마는 [전국인민대표자대회(全人代)대표단]의 부단장 자격으로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그 동안 망명중인 달라이라마에 대해 동정적이었으며, 티베트인(달라이라마 추종자)을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다. 1982년 달라이라마가 방문했을 때,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국가원수로서 대우했다. 이에 대해 북경당국은 강력한 항의를 했지만,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묵살하고 말았다. 판첸라마의 오스크레일리아 방문은 이 같은 배경에서 달라이라마 추종자 또는 지지자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으로 분석됐다.


판첸라마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 사는 테베트인에 대한 축복(祝福)의식을 접전하고, [티베트의 최근변화]와 [중국공산당의 종교정책의 공정함]을 강조하는 연설을 오스트레일리아 종교지도자를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판첸라마의 호주발언은 극히 미묘한 뉘앙스를 지닌 것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중공의 티베트정책을 찬양하는 듯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통렬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는 평이다. 예를 들어 티베트의 최근 정세에 대해 [진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변화]라고 표현했으며 [근래 2년]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 이전의 상황은 아주 나빴음을 암시했다.


이 무렵 중공의 실력자 호요방은 티베트의 장기망명지도자 달라이라마가 [통치자로서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그리고 우선 중공에 일시 체류한 다음 티베트를 방문하려 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여 티베트 방문을 허용하겠다고 말했다. 호요방은 이때 영국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티베트의 인권상황을 묻는 기자들에게 [그가 떠나 있는 27년 동안 새로운 세대가 지도자로 부상하는 등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상황인식을 돕기 위한 배려]에서 라고 설명했다.


달라이라마는 티베트에서 절대적인 정치 및 종교지도자로 중공이 티베트를 점령한 1957년 고국을 탈출, 주로 인도와 유럽지역에서 망명생활을 해 왔다. 어째거나, 티베트는 중공과의 합병 이후 심한 억압을 받았으나, 최근의 완화된 종교정책으로 어느정도 생기를 되찾고 있는 것만은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이를 가지고 마치 티베트에서 불교가 재흥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기대다. 아직은 더 관망이 필요하다.


티베트불교의 최대의 자랑은 흔히 서장대장경으로 불리우는 티베트대장경이다. 티베트대장경은 크게 칸주르와 탄주르러 나누는데, 칸주르는 계율부 등 7종, 탄주르는 주석부등 15종류로 세분된다. 칸주르는 약 100질에 800부, 탄주르는 224질에 3천 400부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는 한역경전에도 남아있는 경론이 약500부 정도 있으며, 특히 밀교부의 방대한 문헌은 티베트대장경에만 보이는 것이다. 이 대장경을 번역하는 일은 7세기 송첸캄포왕 때부터 16세기 무렵까지 약 900년간 계속되었는데, 9세기 중엽 란다르마왕의 파불을 경계로 전전과 후전으로 나누어진다.


전전시대에서 역경이 가장 왕성한 때는 치데송첸과 르파찬왕 시대다. 이때 인도인인 실렌드라보디와 티베트인인 예세헤 등 유명한 번역가가 활약하였고, 유부율과 현교경전의 대부분, 그리고 순밀경전등이 역출됐으며, 또한 대승론서도 그 반수 이상이 이 시대에 번역됐다.


후전시대의 유명한 번역가는 린첸삼포로 10세기말의 인물이다. 후전시대에는 동인도 벵갈 지방의 금강승. 시륜승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이슬람의 침입을 받은 비크라마시라사 조직이나 많은 전적등이 티베트에 전해져 티베트대장경의 근간을 이루는 탄트라부를 형성했다. 티베트대장경은 14세기초 나르탄사에서 개판되고부터 10종 가량의 판본이 전해지고 있다.


티베트의 불교예술은 그리 뛰어난 것은 없으나, 탕카류는 주목할 만하다. 탕카란 베 또는 종이로 만든 족자 비슷한 것으로, 그림을 걸어 놓고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설교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는 일축으로 된 것과 여러 축으로 된 것이 있다. 원래는 만다라와는 별개의 것이었으나, 후에는 혼동되어 만다라양식으로 그려진 것도 있다. 그림의 소재는 부처님의 생애나 전생담. 제불보살. 16나한. 쫑카파를 비롯한 고승 등을 그린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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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의 전래 

불교는 송뵅 감포 왕(581∼649)의 말년에 중국과 네팔에서 티베트로 전해졌다고 한다. 송뵅 감포 왕은 티베트의 문자를 창제하기 위해서 그의 신하 톤미 삼보타를 인도에 파견하였다. 이러한 티베트어의 창제를 통해서 불교의 전적의 번역이 가능해졌다. 정치적으로 송뵅 감포는 처음으로 티베트의 전체를 통일하였고, 라싸를 티베트의 수도로 정했다. 그는 또한 주위의 네팔, 중국과 정략결혼을 하였다. 티베트인은 그를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간주한다.


티베트 불교의 토대 형성 

티베트 불교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계율과 금강승의 신앙적 방법론에 기초하고 있다. 이 티베트 불교는 티베트, 몽고, 그리고 히말라야 산맥 주위의 국가들에서 믿어지고 있다. 또한, 티베트 불교는 인도 불교학자 샨타락시타와 파드마삼브하바에 의해서 8세기 티송 데뵅 왕(742∼797)의 후원 아래 정초되었다. 
티송 데뵅 왕은 티데 쭉텐 왕(703∼754)과 중국의 금성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불교를 티베트의 국교(國敎)로 만들었고, 샨타락시타와 파드마삼브하바를 초청하였고, 삼예 대사원을 건립하였다. 나란다의 산타락시타는 중관불교의 전문가이고, 삼예 대사원의 건축 책임자였다. 이 삼예 대사원은 마가다 왕국의 오단타푸리 사원을 모델로 건축되었다. 산타락시타는 설일체유부의 율장을 소개하였고, 그 설일체유부의 계율 전통에 의해서 티베트 초기 불교의 교단이 성립되었다. 파드마삼브하바, 티송 데뵅 왕, 산타락시타, 이 트리오는 티베트 초기 불교의 성립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오디야나의 파드마삼브하바는 악신들과 불교에 적대적인 신들을 진무하였고, 그의 족적을 특히 닝마파에 많이 남기고 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제 2의 붓다로 존경하였다. 현재에도 히말라야 지역의 국가들에서 그는 구루 린포체로 불리어지며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다.


인도 불교와 중국 선종의 논전(論戰) 

중국 불교와 인도 불교의 관계는 인도의 학승 카마라시라와 중국의 선승 마하연의 돈점논쟁(頓漸論爭)에서 대변된다. 카마라시라는 산타락시타의 제자로, 티송 데뵅 왕의 초대로 인도에서 티베트로 왔다. 티송 데뵅 왕은 인도의 점수사상(漸修思想)과 중국 선종의 돈오사상(頓悟思想)의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792년에서 794년 초에 소위 돈점논쟁을 주재하였다. 카마라시라는 방편과 지혜의 겸수에 의해서 깨달음이 획득된다는 점수불교를 주창하였다. 이 논쟁은 삼예대사원에서 행해졌다. 그래서 이를 삼예대논쟁이라 한다. 카마라시라는 그 돈점논쟁에서 돈오의 주창자인 중국 선종의 마하연 스님을 논파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논쟁 이후에 인도 불교의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카마라시라의 논지는 그의 저서 브하바나크라마(수행단계론)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닝마파(古波)
닝마파는 티베트어로 (가장) '오래된 종파'를 의미하고, 티베트의 4대 종파 가운데 가장 최초에 성립되었다. 닝마파는 파드마삼브하바, 비마라미트라, 바이로짜나의 가르침에 기초했다. 닝마파는 족첸(Dzogchen; Mahāsandhi; Atiyoga; 위대한 완성)을 최고 수승한 가르침으로 간주하였고, 론첸파(1308∼1364)는 그 족첸의 가르침을 체계화하였다. 초기 닝마파는 재가 신도와 승려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랑다르마 왕(836∼842)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11세기부터 불교는 다시 부활되었고, 그 새로운 불교의 전통과 구별하기 위해서 닝마파 추종자들은 자기들의 전통을 닝마파(오래된 종파)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랑다르마왕의 불교 탄압

초기의 티베트 불교는 랑다르마 왕의 억불정책으로 탄압을 받고, 토착종교인 본(Bon)교의 가르침이 판을 친다. 이 랑다르마 왕은 승려들을 정가에서 추방하고, 불교 교단에 대한 국가적인 원조를 전면적으로 중단했다. 이것을 랑다르마의 불교 탄압이라고 한다. 티베트의 불교는 이 랑다르마의 불교 탄압을 기점으로 구역 불교(舊譯佛敎)와 신역 불교(新譯佛敎)로 통상 구분된다. 그 후 11세기에 불교가 다시 부흥한다. 이 불교 탄압 이후의 불교를 신역 불교라고 부른다. 이 때 카규파와 사키아파가 발전하고, 인도 불교의 주요 텍스트들이 티베트어로 번역된다. 이 텍스트들이 티베트 대장경에 편입된다. 이 티베트 대장경은 칸규르 부분과 텐규르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칸규르 부분은 한역 대장경의 경장과 율장에 상응하고, 텐규르 부분은 한역 대장경의 논장 부분에 상응한다.


카규파 

카규파는 티베트어로 '부처님 가르침의 (구전) 전통'을 의미한다. 이 종파의 핵심적 가르침은 마하무드라(大手印)와 나로파(1016∼1100)의 여섯가지 교리이다. 이 여섯 가지 교리는 여섯 가지의 명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 가르침은 나로파의 제자 마르파(1012∼1097)에 의해서 인도에서 티베트로 전승되었다. 밀라레파(1025∼1135)의 제자인 감뽀파(1079∼1153)는 그 가르침을 카규파의 전통 속에서 조직하였다. 이 전통으로부터 카르마 카규파와 다른 분파들이 생겨났다. 이 종파는 사자 상승에 특별히 무게를 두고 있다. 카규파의 전통은 법신의 화신인 바즈라드하라(金剛持)에서 시작되고, 틸로파(989∼1069)를 거쳐서 나로파에게 전승되었다고 한다. 위대한 번역사 마르파는 나로파의 제자로 이 사자상승의 전통을 티베트에 전승하였고, 그의 제자 밀라레파는 이 전통을 계승하고 그의 제자 감뽀파에게 전승하였고, 감뽀파는 카규파의 가르침을 집대성하였고, 그에 의해서 카규파가 독립된 종파로 성립된다.


사키아파

사키아파는 사키아 사원의 이름에서 기인한다. 이 사키아는 티베트어로 "회색의 대지"를 의미한다. 콘 콘촉 걀포는 11세기에 이 사키아 사원을 서 티베트에 창건하였고, 그 사원은 회색의 바위 표면 위에 건축되었다. 아티샤(980/90∼1055)의 예언에 의해서 그 사키아 사원은 1073년에 건립되고, 그 사원의 주지와 콘 가(家)의 멤버들은 '방법과 결과(Lamdre; Mārghaphala)'라는 금강승의 핵심 가르침을 전승하였다. 사키아파는 밀교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불교논리학의 문제점도 지적하였다. 13세기와 14세기에, 사키아파는 티베트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키아파는 1092∼1280년 사이에 독립된 종파로 다섯 명의 구루에 의해서 발전하였다. 이 다섯 명의 구루는 사첸 쿵가 닝포(1092∼1158), 그의 두 아들인 소남 쩨모(1142∼1182)와 드락파 겔뵅(1147∼1216), 그의 손자 사키아 판디타(1182∼1251), 그리고 사키아 판디타의 조카 초겔 팍파 (1235∼1280)이다. 이 가운데 사키아 판디타의 영향이 가장 컸고, 그의 학문적 평판이 인도에도 널리 퍼졌으며, 그는 원나라로 초청되었고 초겔 팍파는 쿠빌라이 칸(r. 1260∼1294)의 왕사가 되었다. 원나라는 중앙아시아의 통치권을 이 사키아파에게 1249년에 수여하였다. 

겔룩파(黃帽波)

14세기 말, 겔룩파가 쫑카파(1357∼1419)와 그의 두 명의 핵심적인 제자인 겔짭(1364∼1432)과 케드룹(1385∼1483)에 의해서 티베트의 4대 종파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성립되었다. 겔룩은 티베트어로 "덕행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1409년 쫑카파에 의해서 창건된 간덴사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문수보살로부터 영감을 얻은 후, 쫑카파는 그의 수많은 주석서에서 찬드라키르티(月稱)의 귀류논증파의 중관학파의 가르침을 자기의 사상체계에서 핵심으로 간주했다. 그는 또한 불교의 수행론을 대단히 강조하였다. 그는 발보리심(發菩提心)을 그의 수행론에서 대단히 강조하였고, 수행론의 체계에서 지관(止觀)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또한 밀교의 가르침이 이러한 평정심의 회복을 위한 특별한 테크닉으로 간주되었다.

이 겔룩파는 아티샤의 카담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추종하였고, 계율의 준수와 논서의 체계적인 연구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 가운데, 람림(Lamrim: 불교의 수행론)과 다양한 불교의 교리적 견해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 종파의 핵심적인 과제였다. 이 겔룩파는 티베트의 극서 지방에서 참도, 다르쩨도와 동쪽의 암도 지방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제 3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강쪼(1543∼1588)가 몽고를 방문한 후, 몽고의 후원으로 겔룩파는 몽고와 러시아 연합의 부리아트 지역에서 국가종교가 되었다. 17세기에 이 겔룩파는 중앙티베트에서 지배적인 정치세력이 되었다. 그 때 제 5대 달라이 라마 카왕 로상 강쪼(1617∼1682)는 몽고군의 도움으로 티베트의 종교계와 정치계를 평정하였다. 이러한 겔룩파의 절대적인 위치는 티베트의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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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사 - 삼예의 종론, 아티샤의 활약, 티베트 대장경

인도에서 티베트로의 불교 도입

삼예의 종론

티베트에 불교가 도입된 것은 8세기말경의 일로, 이는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기원 1세기경과 비교해 보면 대략 7백년 정도 이후의 일이 된다. 그리고 지리적 여건상 티베트는 인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아울러 중국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티베트에서의 불교 도입도 또한 인도와 중국의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보인다. 

이러한 관련이 첨예한 대립으로 나타난 대표적인 사건이 티베트의 삼예(bSam yas) 사원에서 거행된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와 대론으로 소위 "삼예의 宗論"으로 알려진 御前論爭이다. 티베트의 불교 전래초기에 거행된 이 논쟁을 계기로 티베트의 불교는 방향을 새로이 확립시켜 독자적인 불교의 역사를 전개시켜 가게 된다. 

티베트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국교로 정해지는 것은 명군으로 알려진 티송데첸(742-797)왕 때의 일이지만, 이미 송첸감포(581-649)왕 시대에 불교는 티베트에 전해진다. 불교의 전래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송첸감포왕의 중국과 네팔에서 맞아들인 부인들이다. 

송첸감포왕은 그의 아들인 궁송궁첸(621-643)왕의 부인으로 唐에서 文成公主를 맞이하지만 궁송궁첸왕이 일찍 죽은 까닭에 후에 문성공주를 자신의 비로 맞이한다.문성공주는 죽은 자신의 남편인 궁송궁첸왕을 위해 라사에 라모체사(Ra mo che, 小招寺)를 건립하여 중국에서 가져온 불상을 안치하고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송첸감포왕의 또 다른 부인인 네팔계통의 티춘(khri btsun)왕비도 남편인 송첸감포왕이 죽은 뒤 투르낭('Phrul snang, 大招寺)사를 건립하여 망부의 명복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이와같이 중국과 네팔의 두 왕비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지만 실제 송첸감포왕이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티베트에 전래된 불교가 새로운 계기를 맞이한 것은 약 반세기를 지나 중국에서 金城公主가 들어온 뒤 부터다. 열성적인 불교신자였던 그녀는 남편인 티데축첸(704-754)왕을 설득시켜 황폐해진 라모체사와 투르낭사를 복구시키고 또한 새로운 절을 세우게 했다. 아울러 중국에서 승려를 초빙하여 머물게 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런 불교의 움직임에 대해 당시 본교(티베트 전통종교)도를 중심으로한 반불교세력의 저항도 나타나지만, 왕비의 노력은 티베트에 불교가 정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티테축첸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모든 사정은 변하여, 실권을 잡은 반불교세력은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를 추방하는 등 불교 전래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왕위에 오른 사람이 나이 어린 티송데첸왕으로 그에 의해 불교는 비로서 티베트 사회에 정착하게 된다. 티송데첸왕은 성년이 되자 권신들에 의한 파불정책을 배척하고 불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결심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선왕인 티데축첸왕에 의해 중국에 파견되어 불교를 배워온 여러 사람들이 있었으며, 특히 그 중에는 삼예의 종론 때에 불교계의 최고 지위에 오른 페르양(dPal dbyangs)도 포함되어 있었다. 

페르양은 중국에서 귀국 도중 淨衆寺 無相 金和尙을 만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하지만 불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결심한 티송데첸왕은 신하로 하여금 당시 네팔에 체재하고 있던 나란다사원의 대학장인 샨타라크시타(725-783)를 티베트에 초청하는데 성공했다. 

다시말해 티송데첸왕은 인도불교를 티베트 불교의 근간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산타라크시타는 <섭진실론> <중관장엄론> 등을 지어 이미 명성이 높았던 인물로 특히 이 샨타라크시타의 사상은 후에 제자인 카발라실라의 사상과 더불어 티베트 불교 사상의 바탕을 형성하게 된다.그러나 티베트에 들어간 샨타라크시타는 그다지 오랫동안 머물지는 못하고 다시 네팔로 돌아오게 되며, 후에 다시 왕의 초청으로 티베트에 들어가게 된다. 

두번째로 티베트에 들어갈 때 샨타라크시타는 파드마삼바바를 동행하였으 며, 이 파드마삼바바의 주술적 능력에 의해 당시의 반불교세력이 제압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와같이 하여 불교 도입의 틀이 형성된 티베트는775년경부터 왕의 명령으로 삼예 대승원이 건립되고 대본당이 완성된 779년에는 샨타라크시타가 계사가 되어 최초로 티베트인에게 구족계가 주어져 티베트에 최초로 승단이 형성하게 된다. 

또한 티송데첸왕은 삼예 대본당에서 왕비와 고관들을 모아 숭불의 조칙에 서명케 하고 불교를 정식으로 국교화시켰으며, 이로부터 범어불교경전의 번 등이 시작되어 본격적인 불교문화가 전개되어 간다.이와같이 티베트는 인도불교를 바탕으로 한 불교의 전개가 이루어지지만 중국과도 왕비의 혼인 등 밀접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당시 티베트가 대단히 강성하여 "토번제국"으로 불릴 정도로 강력했던 것에 연유하는 것으로 특히 786년경에는 돈황을 함락시켜 기세를 드높였다. 이 돈황 함락을 계기로 티베트에 들어온 사람이 중국의 선승 마하연으로, 그의 <不思不觀>의 선은 당시 티베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마하연은 왕비의 후원을 얻어 크게 세력을 떨쳤지만, 이미 형성된 인도 불교에 바탕을 둔 승단과 왕에 의해 한때 선종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종 측의 강력한 항의와 자살하는 자가 속출하는 사태에 이르러 해금령이 내려지고 이러한 사태를 계기로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왕에 의해 시도된 것이 바로 "삼예의 종론"이었다.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대립은 이미 샨타라크시타에 의해 예견되어진 일로서, 산타라크시타는 유언으로 후에 그러한 논쟁이 일어나면 자신의 제자인 카말라실라(740-797)를 부르도록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샨타라크시타의 유언을 기억한 티송데첸왕은 신하로 하여금 카말라실라를 부르도록 하고, 삼예 사원에서 논쟁을 시켜 진 쪽은 티베트를 떠나도록 명령하였던 것이다. 이 삼예 사원의 논쟁이 곧 "삼예의 종론"으로 이는 티베트 불교의 향방이 걸린 운명적인 대사건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유명한 부든(Bu ston)의 <불교사>에 의하면 이 논쟁은 티송데첸왕 앞에서 마하연이 먼저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그에 대해 카말라실라가 또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으로 진행됐다. 먼저 마하연은 일체 행위를 부정하고<불사불관>에 의한 돈오를 설하는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이것에 대해 카말라실라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불사불관>은 기절의 상태와 같은 것으로, 그것은 반야에 대한 智마저도 버리는 것이라고 논난한다.또한 카말라실라는 無分別智란 단순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체법은 무자성이다"라는 명확한 언어표현을 동반한 공성의 智가 장기간의 수행을 통하여 순차적으로 달성되어 얻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돈오적인 마하연의 선종과 수행 자체적인 카말라실라의 논쟁은 반복되었지만, 결과는 결국 카말라실라의 승리로 돌아가고 마하연은 돈황으로 추방된다. 카말라실라의 승리로 인해 티베트 불교는 인도불교적인 방향을 명확히 견지하게 되었고, 아울러 카말라실라가 남긴 <수습차제> 3권은 후에 아티샤, 총카파에게도 영향을 주어 티베트 불교사상의 바탕을 이루게 된다. 

<삼예의 종론>은 티베트 불교의 향방을 결정한 중요한 사건으로 이는 인도 불교와 중국불교의 대립, 점수와 돈오의 대립 등으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방향을 확립한 티베트불교는 이후 인도불교문헌의 본격적 번역과 연구등이 이루어져 불교국가로서 기틀을 확립시켜 간다. 

아티샤의 활약

"삼예의 종론"으로 불교의 향방을 정한 티베트는 티송데첸 왕의 죽음(797)으로 일시적인 파불상태에 직면하였지만, 9세기에 들어와서는 본격적인 불교국가로서 발전하였다. 

인도불교의 경론이 다수 번역되어진 것은 물론 804년 티데송첸 왕(776-815)은 唐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한역불전의 번역도 아울러 촉진시켰다. 

그 후 카르충에 불전을 건립하고 다시 숭불서약의 조칙을 발포해 신하들에게 서명케 하였다. 역경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번역어의 통일을 위해 "결정역어"를 수록한 어휘집 <飜譯名義大集>을 편찬하고, 이어서814년에는 이들 어휘 가운데 문제가 되는 것을 해설한<二卷本 譯語釋>이 편찬되었다. 

터데송천왕을 이은 티축데첸(806-841)왕 시대에 불교는 더욱 융성하였다. 

824년에는 티베트 최초의 역경목록인 <덴카르마 目錄>이 만들어져 그때까지 번역된 경론이 정비되었다. 

그리고 이 왕시대에 불교에 대한 우대는 더욱 두드러져 출가자 1인에 7戶의 예민이 주어지는 등 극단적인 우대책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우대책으로 불교가 발전된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 재정에 영향을 주어 후에 토번제국이 와해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티축데첸 왕 이후 다르마왕은 파불을 단행하였고, 그리고 그의 사후 일어난 왕조 내의 분열은 토번제국을 와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토번제국의 붕괴와 함께 불교교단도 경제적인 기반을 잃고 사실상 해체된다. 이는 티송데첸왕 때에 형성된 티베트 불교교단이 토번제국의 붕괴와 함께 국가의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것을 의미한다. 

이후로 불교교단은 각 지역의 씨족 세력과 결탁하여 독특한 형태의 종파불교를 형성하게 된다.843년경 토번제국 붕괴뒤 대략 2세기에 걸친 혼란기를 경계로 티베트 불교의 역사는 前傳期(snga dar)와 後傳期(phyi dar)로 나누어진다. 

전전기의 불교가 국가의 통제력 아래 있었던 "국가불교"라고 한다면, 후전기의 불교는 국가의 통제력이 상실된 채 독자적으로 전개되는 "종파불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2세기에 걸쳐 국가 통제력이 상실된 혼란한 상황에서 전개된 티베트 불교는 인도불교 후기의 밀교 영향이 뚜렷하지만, 그것은 체계적으로 전승된 밀교 교학이 아니라 잡박하고 실천적인 탄트라 경전이 개별적으로 전해져 티베트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미 전전기의 <이권본역어석>의 서문에서도 특히 性的 실천을 포함한 <無上 僧伽탄트라>의 부류로 분류되는 탄트라 경전에 대해 번역을 금지하는 내용이 나타나지만, 이러한 탄트라 경전류가 국가의 통제력을 잃은 상태에 있던 티베트인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러나 "삼예의 종론"으로 불교의 방향을 정립한 많은 티베트인들에게 국가의 통제력 상실속에서 유행하는 탄트라 경전들이 우려와 걱정을 일으키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잡박한 교리의 亂舞 속에 후전기의 불교역사는 계율과 불교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불교교단의 재흥을 목표로 전개된다. 

후전기의 티베트 불교는 먼저 계율부흥운동과 뒤이어 아티샤(Atisa, 982-1054)의 활약으로 시작된다. 

불교의 재흥을 원하는 사람들은 먼저 출가 승단의 확립과 계율 전통의 부활이 급선무임을 자각하였고, 이러한 자각은 11세기초 티베트의 동부와 서부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동부에서는 캄(Khams) 지방을 중심으로 계율의 전통이 되살아났으며, 서부에서는 가리(mNga' ris) 지방을 중심으로 계율부 흥운동이 일어났다. 

이 동부의 계율 전통을 일반적으로 <低地律>, 서부의 전통을 <高地律>이라 부른다. 이러한 계율의 확립은 후전기 불교 전개에 초석을 이루었다. 특히 <고지율>의 전통에서는 후에 대역경승으로 이름을 떨친 린첸상포(958-1055)와 곡.렉페셰랍 등이 나타나 후전기 불교 확립에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이와같이 하여 교단의 상태가 정비되자 가리왕인 장춥외(Byang chub 'od)는 인도 비크라마실라 승원의 대학승인 아티샤를 티베트에 초청했다. 아티샤는 벵갈지방의 샤호드국 왕자 출신으로 가리왕의 초청을 받았을 때는 <入二諦論> <中螟敎誡論> 등을 지어 이미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 초청에 응한 아티샤는1042년 서티베트의 토딩에 도착하여 그 곳에서 린첸 상포를 만나 장춥외의 요청으로 <菩提道燈論>을 저술하였다. 

장춥외가 아티샤에게 저술을 요청한 것은 아티샤의 사상을 확인하려는 티베트 왕의 신중성을 엿보게 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장춥외 왕이 티베트 불교를 재흥시키는데 아티샤의 사상이 적합한 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 <보리도등론>은 깨달음에 도달하는 수행도를 밝힌 것으로, 그 내용은 聲聞乘章.波羅蜜乘章.眞言乘章의 순서로 구성되어있다. 아티샤는 먼저 사람들에게는 下士.中士.上士의 세 부류가 있어서 하사인 人天乘과 중사인 성문 연각의 二乘, 상사인 大乘은 각각에 적합한 수행을 함으로서 깨달음에 이른다고 설하고 있다. 

그리고 대승보살의 깨달음은 계율을 바탕으로 삼매에서 이루어지며 아울러 그 수행의 깊이는 바라밀승에서 진언승으로 순차적으로 깊어져 간다고 말하고 있다. 

수행에 대해서는 "바라밀승장"에서 보이듯 순차적인 방법으로서 次第와 修習이 강조되며 특히 "無分別의 正觀외 수습"은 菩薩地에 들게 하는 것으로 이러한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붓다와 같은 깨달음은 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바라밀승의 수행이 궁극에 이르는 사람에게"진언승장"에 의한 수행이 필요하고, 진언승에 의해 불교의 수행이 완성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와같이 불교의 수행을 설하는 <보리도등론>은 장춥외 왕뿐만 아니라 당시의 티베트인들에게도 크게 환영을 받았으며 혼란기의 티베트 불교교학을 체계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티샤는 그 후 돔톤(1005-1064)과 곡.렉페셰랍 등에 의해 중앙티베트에 초청되어 포교와 역경에 종사하였고, 마지막에는 라사 근교에 네탕에서 돔톤 등이 바라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아티샤의 13년간에 걸친 포교와 그의 주위에 모여든 티베트 승려들의 활동은 불교가 재흥하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그러나 출가자 집단이 출현하였어도 교단을 통일적으로 원조하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아 각 집단은 지역의 특정한 씨족과 결합하여 독특한 종파불교를 형성하였다. 

아티샤의 정신을 이어받아 후에 생겨난 종파가 카담파(bKa'gdams pa)이다. 카담파는 아티샤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이것은 아티샤의 <보리도등론>을 종전으로 존중한다는 의미이지 아티샤를 개조로 삼는 것은 아니다. 보통 카담파의 개조로 간주되는 사람은 직제자인 돔톤으로 그는 1058년 라뎅에 밀교도량을 세웠다. 

이 돔톤의 제자 가운데 탄트라 불교의 실천을 중시하는"敎誡派"(gDams ngagpa)와 "보리도등론"과 <카담大宗典>을 중시하는 현교주의적인 "敎說派"(aZhung pa)가 생겨났다. 

후자의 대표로는 포타와(1031-1105)와 샤라파(1070-1141) 등을 들 수 있다. 또 아티샤를 라사에 초청하여 환대한 곡.렉페셰랍은 1073년에 상푸(aSang pu)寺를 세웠다. 

특히 이 사원은 조카인 로덴셰랍(1059-1109)과 챠파.최키셍게(1109-1169)를 座主로 하는 시대에 이르러서는 전티베트를 대표하는 대학문사로서 수많은 학숭이 몰려들었다. 이와같이 아티샤를 기원으로 한 카담파는 후에 총카파를 개조로 하는 신카담파-게룩파로 흡수되어지지만, 티베트 불교형성에 토대를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티베트 불교의 종파

티베트 불교가 계율부흥운동과 아티샤의 활약으로 시작되는 가운데 후전기 티베트 불교를 특징짓는 하나의 특색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곧 불교의 종파적 전개이다.그리고 이 종파적 전개는 인도나 중국과는 달리 티베트 각 지역에 오랫동안 뿌리내린 씨족 집단과 사원이 밀접히 결부되어 전개해 가는 특색을 보이고 있다. 

티베트에 등장하는 최초의 종파는 아티샤의 사상을 잇는 카담파이지만 이 카담파가 성립하는 11~12세기를 중심으로 다수의 불교종파가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불교 종파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카담파를 비롯해 카규(Kagyu)파, 닝마(nyingma)파, 사캬(sakya)파, 겔룩(Gelug)파를 들 수 있다. 

특히 겔룩파는 티베트에서 최후로 등장하는 종파로 카담파의 계통을 잇는다는 점에서 신카담파라고도 불리었지만, 독자적인 종파로 발전하여 후에 티베트 최대의 종파로 발전하게 된다.카담파에 대해서는 이미 아티샤의 활약과 함께 살펴본 적이 있지만, 아티샤의 제자인 돔톤이 라뎅에 밀교도량을 세움으로서 시작된 것이다. 

이 돔톤의 제자들 가운데서 밀교의 실천을 중시하는 敎誡派와 현교중심의 敎說派가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카담파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티샤를 라사에 초빙하여 그의 제자가 된 곡.렉폐셰랍이 1073년 상푸寺를 세운 것이다. 

카담파 중 상푸寺에 속하는 학지를 秘訣派라고도 부르지만, 이 절은 렉페 셰랍의 조카인 로덴셰랍(1059-1109)과 차파 최키셍게(1109-65)가 座主이었던 시대에는 전티베트를 대표하는 학문寺로서 이름을 떨쳤다.로덴셰랍은 캐시미르에서 17년간 공부한 명번역가로 알려져 있으며, 논리학과 여래장사상, 중관사상 등의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차파의 학문적 명성도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사상은 오늘날 티베트 불교학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차파는 중관파 가운데 "자립논증파"를 중시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 니마탁에 의해 찬드라키르티의 저술이 번역되어 "귀류논증파"의 설이 알려지기 시작하였을 때, 찬드라키르티의 설을 비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자립논증파"와 "귀류논증파"의 문제는 차파 死後 상푸사를 "上院"과 "下院"으로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하지만, 이 차파의 학문적 성과를 잇는 상푸사의 교학은 후에 게룩파의 학문사를 비롯해 거의 모든 티베트 사원의 모범이 되었다.사캬파는 1073년에 곤촉겔포(1034-1102)가 사캬 지방에 절을 세워 일족이 그곳을 거점으로 포교한 것에 유래하는 것으로 씨족 교단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 파는 <헤바즈라탄트라>를 근본경전으로 중시하고 교리적으로는 유식적 색체가 짙은 "唯心"을 강조하며 수도의 결과를 중시해 부처와 범부가 일치하는 경지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이 파에서는 직계인 쿤가닝포(1092-1158)를 비롯해 소남체모(1142-82), 닥파겐첸(1147-1216), 사캬판디타(1182-1251), 팍파(1235-80)를 5대학자로 간주해 존경한다. 

그러나 차파로부터 배운 소남체모부터는 현교중시의 경향이 생겨나 대학자 사캬 판디타(사팡)의 교학이 형성되는 바탕이 되었다.사팡은 회교도의 난을 피해1204년 티베트에 들어온 비크라마실라 사원의 대학자 사카슈리바드라(1127-1225)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수학하여 여러가지 논서를 지었다. 

특히 그의 논리학서인 <正理寶藏>은 당시 우세하였던 차파의 논리학설을 압도하여 티베트에 다르마키르티의 논리학서를 보급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사팡은 티베트의 여러 사원이 몽고의 공격을 받아 곤경에 처했을 때 티베트의 대표로 몽고왕과 회담을 하였다. 특히 그의 외손자인 팍파는 1270년 元 쿠빌라이의 스승이 되어 티베트 대리 통치를 위임받기도 하였다. 

또한 이 팍파는 몽고의 八思巴문자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이와같이 사캬파는 元朝를 배경으로 후에 카규파가 정치적 힘을 얻기까지 티베트의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카규파는 聖포(990-1139)를 개조로 하는 파와 마르파(1012-96)를 출발로 삼는 두 파가 있다. 

특히 마르파는 인도에 유학하여 나로파로부터 "나로6법"을 배우고, 마이트리파로 부터는 "大印"의 비법을 배웠다고 한다. "나로6법"이란 심신의 훈련을 비롯해 마음을 타인에게 옮기는 등의 여섯가지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대인"의 비법과 함께 카규파의 중요한 교리를 이룬다. 마르파는 부인을 두고 세속적인 삶을 영위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그에게는 종교시인으로 유명한 미라래파(1040-1123)라는 제자가 있다. 

이 미라레파의 생애는 그의 자서전적인 詩인 <十萬歌謠>와 <미라레파전> 에 묘사되어 널리 티베트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이 미라레파의 주요제자 가운데 감포파(1079-1153)가 있으며, 그는 미라레파로부터 "나로6법"과 "대인"의 비법을 배우고 1121년 감포에 승원을 건설하여 제자를 양성했다. 감포파는 본래 카담파에서 구족계를 받은 인물로 그의 저술은 카담파의 "道次第" 설과 카규파의 "대인"설을 통일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 감포파 이후 카규파는 카담파의 현교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감포파의 제자인 뒤숨켄파(1110-93)와 팍모두파(1110-70)로부터 각각 카르마派와 팍모두派가 생겨나 정치적 사회적으로 유력했다.팍모두파 계통인 야르룽 지역의 랑씨는 1354년 팍모두파 왕조를 탄생시켜 그후 1세기정도 티베트를 지배했다. 

또한 카르마파는 한 씨족에게만 의존하지 않는 活佛相續制라는 독특한 교단유지법을 만들어 내 교단의 세력을 증진시켜 강력한 종파를 만들었다. 이 카르마파는 정치적으로도 강력하게 되어 후에 게룩파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할 때까지 치열한 싸움을 전개해 간다.닝마파는"古派"란 말이지만, 이는 前傳期에 번역된 탄트라에 의지한다는 의미로 린첸상포 이후 후전기의 신역 탄트라에 의존하는 여러학파-사라마파라고도 함-와구별된다. 

이 파는 전전기의 파드마삼바바를 개조로 받들지만, 실제 교단으로 성립된 것은 11세기 이후의 일이다. 교리적인 면에서는 인도밀교와 중국선이 융합된 형태로 本覺論, 修道無用論 등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大究境"이라 일컬어지는 최고의 단계가 성취해야 할 목표로서 이 상태가 곧 성불의 단계라고 주장하였다. 

닝마파는 교리적인 이유로 타파로부터 배척받았지만, 14세기 롱첸파(1308-63)등의 사상가와 나와 "대구경"등의 교의를 체계화하였다.게룩파에 대해서는 종카파大師(1357-1419)와 더불어 前號에서 살펴본 적이 있지만, 게룩파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티베트에 최후로 나타난 종파로서 후에 달라이 라마를 수장으로 하여 티베트 불교를 대표할 정도의 최대 종파로 성장한다. 

특히 게룩파는 간텐寺, 데풍寺, 세라寺, 타시룬포寺의 소위 4대학문사를 중심으로 체계적인 발전을 이루고 티베트 불교학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4대 학문사 중 타시룬포寺만이 총카파 사후 건립된 것으로 다른 셋은 총카파 당시부터 건립되어진 것들이다.따라서 이들 학문사에는 총카파가 생전에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카담파의 상푸寺 영향이 다수 남아있고 특히 현교의 교육과정에 있어 그 영향은 두드러진다.

즉 因明學.般若學.中觀學.律學.俱舍學의 교육과정은 이런 상푸사의 영향을 보이는 것이지만, 이것이 오늘날 티베트 불교학의 튼튼한 초석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티베트 대장경

티베트 불교는 9세기 중반 소위 토번왕국의 붕괴를 기점으로 불교의 전전기와 후전기로 나뉘어 진다. 따라서 티베트대장경은 후전기에 들어서 성립될 것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선구적인 역할은 이미 전전기에 이루어진다. 


즉 7세기 초, 송첸감포(581-649)왕에 의해 도입된 불교는, 티송데첸(742-797)왕 때 본격화 되어 "6인의 시행자"라고 하는 티베트인 출가자가 나오고 또한 "삼예의 종론"을 통해 인도계 불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다수의 불교문헌이 전해지고 번역되어 진다.그리하여 티데송첸(776-815)왕 때에는 산스크리트 번역어의 통일을 위해 <번역명의대집>이 만들어지고, 814년에는<이권본역어석>이 편찬되었다. 


전자는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를 병기한 어휘집이며, 후자는 전자 가운데 정정 내지는 증보된 어휘를 따로 추출하여 번역상의 해설을 덧붙인 것이다. 후자는 특히 <난어석>이라고 한다. 특히 <번역명의대집>에 사용된 역어는 왕의 칙명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서 이 역어를<결정역어>라고 하였다. 이 역어를 따르지 않은 경우에는 다시 번역하는 경우도 있었다. 


불전의 번역과 역어의 통일이 이루어짐에 따라 문헌이 축적되고, 그에 따라 번역된 전적에 대한 목록이 만들어졌다. 최초의 것이 티축데첸(806-841)왕 때인 824년에 만들어진 "덴카르마목록"이다. 이 목록은 퇴탕의 덴카르 궁전에서 페르첵.남케닝포.루이왕포 등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짐푸마목록" "팡탕마목록" 등이 만들어 졌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실제 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팡탕마목록"은 그 목록내용이 경부와 론부로 나뉘어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지적된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티베트대장경이 칸귤(불열의 번역이란 뜻)과 텐귤(론서의 번역이란 뜻)의 양부로 구성되어 있어 그 연원을 알 수 있는 문헌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불교의 전전기에 다수의 번역이 이루어지고, 역어의 통일과 목록의 성립은 이루어졌지만, 대장경으로서 다수의 전적을 함께 종합, 정리, 집대성하는 일은 후전기에 들어와 이루어 지는 것으로, 그 최초의 것이 소위 14세기 초에 만들어진 "구나르탕 대장경"이다.이 대장경은 나르탕사에 거주한 침잠페양과 우파로살등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실제 대장경을 건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침잠페양이었다. 


그가 나르탕사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그는 스승인 촘덴릭례를 놀린 죄로 나르탕사로부터 추방되지만, 후일 원나라의 제4대 임금인 무얀부칸(인종, 재위 1312-20)의 초대를 받고 그의 스승이 된 뒤, 그의 스승-즉 총덴릭례-께 화해의 선물을 보내고, 제자인 우파로살에게는 대장경을 만들도록 명했다고 한다. 


이에 우파로살은 다른 동료들과 협력하여, 본래 나르탕사에 있던 전적을 중심으로, 또한 다수의 문헌을 수집한 뒤 이것들을 함께 모아 나르탕사의 문수당에 안치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구나르탕 대장경"인 것이다. 이것은 판본이 아닌 사본으로, 그 내용은 칸귤과 텐귤의 양부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나르탕 대장경"의 칸귤을 기초로 체파게웨.로되는 체파칸귤이라는 것을 제궁탕사에서 완성시켰으며, 또한 부톤(1290-1364)은 이 나르탕의 텐귤을 기초로 샤루사에서 독자의 텐귤을 완성시켰다.샤루사의 텐굴을 기초로 1362년 장춥게첸이 새로이 텐귤을 성립시켰지만, 그것 또한 사본이었다. 부톤은 그의 <불교사>(1322년작)로 유명하며, 그 책의 부록에 실려있는 대장경 목록은 상기의 "덴카르마 목록" 다음으로 오래된 것으로 중시된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의 대장경은 사본을 모은 것으로, 실제 판본으로서의 개판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다.최초의 판본에 의한 티베트대장경은 명의 영락제에 의해 1410년에 개판되었다. 만력판이 1605년 개판되었지만, 만력판은 영락판의 복각판으로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티베트에서 판본에 의한 최초의 대장경은 소위 장판으로, 장사탐의 왕인 카르마.미팜.체왕.소남 람텐(1587~1646)에 의해 1608년 개시되어 1621년 완성되었다. 


이 판의 판본은 후에 몽고군에 의해 리탕에 있었던 게룩파의 절인 잠파링사로 옮겨진 까닭에 이 장판은 또 리탕판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영락판이나 장판은 칸귤만의 집성으로, 이것들은 모두 앞서 제파칸귤에 의거한 것이다.이러한 제판이 선행되어 후일 4대 티베르 대장경이라 불리는 것이 개판되어 칸귤과 텐귤이 모두 함께 집성되기에 이르른다. 


먼저 북경판 칸귤의 개판은 청의 제4대 강희제때인1684년 시작되어 1692년 완성되었으며, 강희제 재위중 제2, 3차의 복각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건융제 1737년에는 제4차의 복각이 이루어졌다. 불교학도가 자주 이용하는 일본 오오타니(대곡)대학의 북경판 칸귤은 강희제에 의한 제3차 복각판으로, 1717-20년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북경판 텐귤은 옹정제 때인 1727년에 개판되었다. 


다음으로 데르게판 칸귤은 시루.최키중네를 감수자로 하여 1727-33년에, 텐귤은 슈첸.충팀린첸을 감수자로서 1737-44년에, 데르게 지방의 왕인 텐파체링(1678-1738)의 후원으로 개판되었다. 칸귤은 리탕판을 저본으로 하고, 텐귤은 샤루사의 텐귤을 저본으로 하고 있다. 신나르탕판은 제7세 달라이 라마인 케상감초(1708-57)의 명을 받들어 포라네.소남롭게(1689-1747/8)등에 의해, 칸귤은 1730-32년에, 텐귤은1741-42년에 개판되었다. 


이 판의 저본은 다름 아닌 "구나르탕 대장경"이다. 초네판의 칸귤은 리탕판을 저본으로 하여 1721-31년에, 텐귤은 데르게판을 저본으로 하여 1753-73년에 초네사에서 개판되었다.이상의 4판본에 의한 대장경이 4대 티베트 대장경으로 중시되는 것이며, 이외에도 라사판, 우르가판, 쿠붐판, 참도판 등의 대장경이 알려지지만, 쿠붐판과 참도판은 현존하지 않는다. 


라사판은 제13세 달라이 라마의 명령에 의해 1934년에 개판된 것으로, 칸귤만으로 되어있다. 우르가판 역시 칸귤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08-10년에 개판되었다.이와같이 티베트 대장경은 시대에 따라 여러 판본이 만들어졌지만 그 판본의 계통적인 면에서 보면 북경판 대장경과 데르게판 대장경의 양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체파칸귤의 영락판으로 부터 시작되는 북경판과 초네판, 나르탕판, 라사판 등이 하나의 계통이라면, 장판 즉 리탕판에 의거하는 데르게판과 그 판의 복각인 우르가판 등이 또 하나의 계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티베트 불교문헌에 대한 연구는 북경판과 데르게판의 양판본에 의거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티베트 대장경에는 일반적으로 티베트 자국내의 불교가의 저술은 실려 있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자국인의 저술은 소위 "장외문헌"으로 따로 이 분류하여 전승되고 있다. 티베트대장경에는 한역대장경에는 수록되지 않은 논서중 특히 중관, 인명등 대승교학과 관련한 논서가 다수 전해지고 있는 까닭에 오늘날 동서양의 많은 불교학자의 관심을 끌고 있으며, 그러한 사실은 많은 불교학도가 티베트불교를 주목하는 이유중의 하나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글 작성자 : 무구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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